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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_무제
https://ko.wikipedia.org/wiki/양_무제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양 무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양 무제</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tbody><tr> <th colspan="2"> <div><div><img></div><span><big><big><b>양 무제 소연<br>梁 武帝 蕭衍</b></big></big></span></div> </th></tr> <tr> <td colspan="2"><a><img></a><br>양 고조 무황제 소연 </td></tr> <tr> <td colspan="2"><b>지위</b> </td></tr> <tr> <td colspan="2"><b>양나라의 <a>초대 황제</a></b> </td></tr> <tr> <th><span>재위 </span> </th> <td><a>502년</a> ~ <a>549년</a> </td></tr> <tr> <th><span>전임자 </span> </th> <td><a>남제</a> <a>화제 소보융</a> </td></tr> <tr> <th><span>후임자 </span> </th> <td><a>간문제 소강</a> </td></tr> <tr> <td colspan="2"><b>이름</b> </td></tr> <tr> <th><span>휘 </span> </th> <td>소연(蕭衍) </td></tr> <tr> <th><span>별호 </span> </th> <td>소자: 연아(練兒)<br>자: 숙달(叔達)<br>칭호: 황제보살(皇帝菩薩) </td></tr> <tr> <th><span>묘호 </span> </th> <td>고조(高祖) </td></tr> <tr> <th><span>시호 </span> </th> <td>무황제(武皇帝) </td></tr> <tr> <td colspan="2"><b>신상정보</b> </td></tr> <tr> <th><span>출생일 </span> </th> <td><a>464년</a> </td></tr> <tr> <th><span>사망일 </span> </th> <td><a>549년</a> </td></tr> <tr> <th><span>매장지 </span> </th> <td>수릉(修陵) </td></tr> <tr> <th><span>왕조 </span> </th> <td><a>양나라</a> </td></tr> <tr> <th><span>부친 </span> </th> <td><a>문제 소순지</a> </td></tr> <tr> <th><span>모친 </span> </th> <td>장상유 </td></tr> <tr> <th><span>배우자 </span> </th> <td>황후 치휘<br>귀빈 정영광, 수용 완영령, 숙원 오경휘, 숙의 동씨, 충화 정씨, 수용 갈씨, 사씨 </td></tr> <tr> <th><span>자녀 </span> </th> <td>소명태자 소통, 예장왕 소종, 간문제 소강, 남강간왕 소적, 여릉위왕 소속, 소릉휴왕 소륜, 원제 소역, 무릉정헌왕 소기<br>영흥공주 소옥요, 영세공주 소옥완, 영강공주 소옥현, 안길공주 소옥지, 부양공주 소씨, 장성공주 소옥령 </td></tr> <tr> <th><span>종교 </span> </th> <td><a>불교</a> </td></tr> </tbody></table> <p><b>양 고조 무황제 소연</b>(梁 高祖 武皇帝 蕭衍, <a>464년</a> ~ <a>549년</a>)은 <a>중국</a> <a>남북조 시대</a> <a>양나라</a>의 초대 황제이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 <ul> <li><a><span>1.1</span> <span>출자와 즉위</span></a></li> <li><a><span>1.2</span> <span>치세 전반기</span></a></li> <li><a><span>1.3</span> <span>황제보살</span></a></li> <li><a><span>1.4</span> <span>후경의 난</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평가</span></a></li> <li><a><span>3</span> <span>가족</span></a> <ul> <li><a><span>3.1</span> <span>부모</span></a> <ul> <li><a><span>3.1.1</span> <span>아버지</span></a></li> <li><a><span>3.1.2</span> <span>어머니</span></a></li> </ul> </li> <li><a><span>3.2</span> <span>형제</span></a> <ul> <li><a><span>3.2.1</span> <span>형</span></a></li> <li><a><span>3.2.2</span> <span>동생</span></a></li> </ul> </li> <li><a><span>3.3</span> <span>아내</span></a> <ul> <li><a><span>3.3.1</span> <span>정궁</span></a></li> <li><a><span>3.3.2</span> <span>후궁</span></a></li> </ul> </li> <li><a><span>3.4</span> <span>자녀</span></a> <ul> <li><a><span>3.4.1</span> <span>아들</span></a></li> <li><a><span>3.4.2</span> <span>딸</span></a></li> </ul> </li> </ul> </li> <li><a><span>4</span> <span>참고 문헌</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출자와 즉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남난릉(南蘭陵), 즉 지금의 <a>중국</a> <a>장쑤 성</a>을 본관으로 하는 난릉 소씨(蘭陵蕭氏)의 일문으로 남제 황실의 방계에 해당된다. 아버지 <a>소순지</a>는 남제의 초대 황제인 <a>소도성</a>의 족제로서 단양윤(丹陽尹)을 지냈다. </p><p>기록에는 그가 어려서부터 문무를 두루 통달하여 주목받았다고 적고 있다. 일찍이 남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경릉왕(竟陵王) <a>소자량</a>의 서저(西邸)에도 드나들었으며, <a>심약</a>(沈約) 등과 함께 경릉팔우(竟陵八友)의 한 사람으로 수학하였다. 소연이 옹주자사(雍州刺史)가 되었을 때, 당시 남제의 황제였던 <a>소보권</a>이 한창 폭정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a>소의</a>를 비롯한 황족 종친뿐 아니라 많은 대신과 사람들을 죽였고 궁전에선 과도한 사치를 일삼았고, 소연은 형이 살해당한 일을 계기로 그를 타도하기 위하여 거병했다. 수도인 <a>건강</a>으로 진군해 소보권을 살해하고 <a>화제</a>를 옹립했으나, 이듬해인 <a>502년</a>에 화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고 양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p> <div><div><a><img></a> <div><div><a></a></div>양나라를 세울 당시의 무제</div></div></div> <h3><span></span><span>치세 전반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치세 전반기에 해당하는 천감 연간(<a>502년</a> - <a>519년</a>) 동안에 무제는 <a>심약</a>이나 범운(范雲)으로 대표되는 명족 출신 인물들을 재상으로 등용하고, 국정 전반에 걸쳐 검약을 모토로 삼아 관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법률인 양률(梁律)을 반포하였으며, 국가 교육기관인 대학(大學)을 설치하여 인재 등용에 애썼고 조세를 경감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실적을 거두었다. 또한 토단법(土斷法)을 실시하여 유랑민 대책에도 성과가 있었다. </p><p>그동안 내정을 정비하여 구품관인법을 개선하고, 불교를 장려하여 국내를 다스리고 문화를 번영시켰다. 대외관계도 비교적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하여 남조 최대 전성기를 보냈다. 또한 무제의 맏아들이자 황태자인 <a>소명태자</a>가 편찬한 《<a>문선</a>》은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훌륭한 문헌이다. </p> <h3><span></span><span>황제보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520년</a>에 무제는 연호를 바꿨는데, 그 이후부터 차츰 정치를 방기하기 시작했다. 거꾸로 무제 자신이 귀의한 불교 교단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면서 불교에 차츰 빠져들었고, 결국 <a>527년</a> 이후부터는 황제 자신이 지은 동태사(同泰寺)에 사신(捨身)이라는 이름으로 막대한 재물을 보시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양의 재정은 궁핍해졌고 과거 남제 말기 소보권 시절에 민중에게 행했던 가혹한 수탈과 착취가 재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한문(寒門) 출신으로 대표되는 주이(朱异) 등을 중용하면서 관료 체계에서의 기강도 해이해지기에 이르렀다. </p><p>이러한 무제의 불교 신앙은 표면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무제 자신이 불교 경전에 대한 수많은 주석서를 집필하였다. 또한 황제 자신도 불교의 계율을 따르며 소식(蔬食)하기를 견지했기에, 당시에는 황제를 가리켜 황제보살(皇帝菩薩)로 부를 정도였다. 이는 당시 국가불교로서의 색채가 농후했던 북조에서 사용하던 황제즉여래(皇帝即如来)에 대비되어 남조의 불교를 상징하는 칭호로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황제에 대해 당시 양과 교섭이 활발했던 동남아시아나 서역, 한반도의 <a>백제</a>나 <a>왜국</a> 등 여러 국가에서는 무제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무제를 보살이라 불렀는데, 당시의 국제사회에서도 양의 황제는 불교 신앙에 있어 고명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p> <div><div><a><img></a> <div><div><a></a></div>말년의 무제</div></div></div> <h3><span></span><span><a>후경의 난</a></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548년</a>에 <a>동위</a>의 무장이었던 <a>후경</a>이 양나라에 투항해 왔다. 이를 북조에 맞설 절호의 기회라 여긴 무제는 신하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후경에게 원군을 보내주고 그를 하남왕(河南王)에 봉했다. 그러나 양나라의 원군은 팽성(彭城)에서 동위에 패했고, 후경도 와양(渦陽)에서 패했다. 무제는 후경이 자신의 군을 거느린 채로 양나라에 투항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후경은 양나라 종실의 여러 왕들이 서로 연대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켜 수도 건강을 포위했다. </p><p>당시 건강의 외성은 동궁학사(東宮學士) 유신(庾信)이 인솔하는 문인과 무인 3천 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철면을 쓴 후경의 군이 다가오자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이에 양나라는 부교를 부수려 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했고, 후경군은 선양문(宣陽門)에서 임하왕 <a>소정덕</a>의 인도를 받으며 건강의 외성으로 무혈입성했다. 무제 등은 내성에서 농성했지만 후경은 이들마저 포위하고, 동궁을 점거하고 사로잡은 궁녀 수백 인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자축연을 벌이기까지 했다. 분노한 황태자 <a>소강</a>이 병사를 보내 동궁을 불태워 버렸고, 이 와중에 수백 년에 걸쳐 유지되어 오던 건강의 역사적인 건축물은 물론 소장된 장서들마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p><p>후경은 다시 내성 공략에 나섰지만, 장수 양간(羊侃)의 지휘 아래 내성은 몇 달에 걸쳐 후경의 공격을 막아냈다. 후경이 나무를 쌓아올려 성을 공격하면 양간은 갈대에 불을 붙여 그것을 태워 무너뜨리는 식이었다. 격노한 후경은 궁성의 동서로 흙산을 쌓아올리게 했다. 이 과정에서 장내에 사는 사람은 일반 서민에서 귀족까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마구 쌓게했고, 쓰러져 죽는 자는 그대로 흙산에 묻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흙산은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갑작스런 호우로 무너졌다. 후경은 다시 내성의 노비들을 향해 항복하면 모두 면천시켜 주겠다고 선언했고, 주승(朱昇) 등의 노비들이 성을 내려오자 그들에게 의동삼사(儀同三司)의 관직을 내렸다. 이에 감격한 노비들이 자신들의 옛 주인을 향해 "우린 네놈을 50년을 섬기고도 겨우 중령군(中領軍)에 그쳤는데, 후왕(侯王, 후경) 어른을 섬기니 바로 의동(儀同)이 되는 구나!" 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p><p>후경의 작전은 주효하여 사흘 동안 후경의 병력이 급증한데 비해 내성의 방어군은 빗의 이가 빠지듯 탈주가 잇따랐고, <a>549년</a> 3월에 군을 지휘하던 양간이 병사함으로써 전세는 후경에게로 기울었다. 내성의 군사나 농성중이던 남녀들도 몸이 붓고 호흡도 곤란해 지는 가운데, 후경은 현무호(玄武湖)의 물을 끌어들여 성에 대한 수공을 펼쳤고, 결국 성은 함락되었다. 마침내 후경이 황제를 알현할 때 무제가 후경에게 말하기를, "경이 군중에 있은지 오래되었으니, 어찌 수고로움이 없겠는가!" 하자, 후경은 얼굴에 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고 한다. 무제가 다시 묻기를, "경은 어느 주(州)의 사람이며, 감히 여기에 이르렀는데, 처자는 아직 북쪽에 있는가?" 라고 했다. 후경이 여전히 대답을 못하자, 후경의 옆에 있던 임약(任約)이 대신 대답하기를, "신 후경의 처자는 고씨(高氏)에게 도륙당하고 오직 이 한몸으로 폐하께 돌아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무제가 마침내 "강을 건널 때는 몇 명이 있었는가?" 라고 묻자 후경은 천 명이라고 대답했고, 다시 "성을 포위했을 때는 몇 명이었는가?" 라고 묻자 후경은 10만 명이었다고 대답했으며, 마지막으로 "그럼 지금은 몇 명이 있는가?" 라고 묻자 후경은 "거느리는 땅에서 제 것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는데, 결국 무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폐된 상태에서 식사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울분 속에 병이 든 황제는 마지막으로 꿀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못한 채, 실의와 쇠약으로 결국 죽고 말았다. </p><p>각지에 분봉되었던 종실의 여러 왕들은 형제나 삼촌 또는 조카들이었기에 각자의 이득을 보고 견제를 한 결과 모두 황제의 구출에 나서지않아 무제가 죽는 걸 보고만 있었다. 후경은 간문제를 옹립했다가 <a>551년</a>에 간문제를 폐하고 예장왕(豫章王) <a>소동</a>을 옹립한 뒤 선양을 받아 건강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각지에 주둔한 여러 왕들 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형주자사 <a>소역</a>은 <a>왕승변</a>과 <a>진패선</a>에게 대군을 주어 건강을 공격해 후경을 죽이고 난을 평정했다. </p> <div><div><a><img></a> <div><div><a></a></div>무제가 묻힌 수릉 앞에 가까스로 남아있는 천록(天祿)</div></div></div> <h2><span></span><span>평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북송의 역사가 <a>사마광</a>은 자신의 《<a>자치통감</a>》에서 무제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p> <blockquote><div>양 고조(무제)가 마지막 자리를 보전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드는 조식(소식)을 성덕으로 하면서 군주로서의 도가 이미 갖춰지니 더 이상 더해질 것이 없어 군신의 간언은 어떤 것도 들을 필요 없다고 하였다.(…) 이름을 더럽히고 몸은 위험에 빠졌으며 나라는 뒤집히고 종묘의 제사가 끊어지니 길이 후세의 놀림거리만 되고 말았도다. 슬픈 일이다.</div> </blockquote> <h2><span></span><span>가족</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부모</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h4><span></span><span>아버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ul><li><a>소순지</a>(蕭順之) - 무제가 양나라를 세운 뒤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로 추존했다.</li></ul> <h4><span></span><span>어머니</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ul><li><a>장상유</a>(張尙柔)</li></ul> <h3><span></span><span>형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div><div><a><img></a> <div><div><a></a></div>소담의 묘에 있는 석각(石刻)</div></div></div> <h4><span></span><span>형</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ol><li><a>소의</a></li> <li><a>소부</a></li></ol> <h4><span></span><span>동생</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ol><li>소창</li> <li>소융</li> <li>소굉</li> <li>소위</li> <li>소수</li> <li>소회</li> <li>소담</li></ol> <h3><span></span><span>아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h4><span></span><span>정궁</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ul><li>황후 <a>치휘</a></li></ul> <h4><span></span><span>후궁</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ul><li>귀빈 <a>정령광</a></li> <li>수용 <a>완령영</a></li> <li>숙원(淑媛) 오씨(吳氏)</li> <li>소의(昭儀) 동씨(董氏)</li> <li>윤화(充華) 정씨</li> <li>수용 갈씨(葛氏)</li> <li>사씨(佘氏)</li></ul> <h3><span></span><span>자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h4><span></span><span>아들</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ol><li><a>소통</a></li> <li><a>소종</a></li> <li><a>소강</a></li> <li><a>소적</a></li> <li><a>소속</a></li> <li><a>소륜</a></li> <li><a>소역</a></li> <li><a>소기</a></li></ol> <h4><span></span><span>딸</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ol><li><a>소옥요</a></li> <li><a>소옥완</a></li> <li><a>소옥현</a></li> <li><a>소옥지</a></li> <li><a>부양도공주</a></li> <li><a>소옥령</a></li></ol> <h2><span></span><span>참고 문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자치통감</a></li> <li><a>양서</a></li></ul> <table> <tbody><tr> <td>전 임<br><b>(초대)</b> </td> <td>제1대 <a>양나라</a> 황제<br><a>502년</a> ~ <a>549년</a> </td> <td>후 임<br><b><a>임하왕 소정덕</a> (비정통)<br><a>간문제 소강</a> (정통)</b> </td></tr></tbody></table>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중국 남조의 황제</a></div></th></tr><tr><th><a>유송</a>(劉宋)</th><td><div></div><table><tbody><tr><th>추숭</th><td><div> <ul><li><a>효제</a></li></ul> </div></td></tr><tr><th>통치</th><td><div> <ul><li><a>무제</a></li> <li><a>소제</a></li> <li><a>문제</a></li> <li><a>효무제</a></li> <li><a>전폐제</a></li> <li><a>명제</a></li> <li><a>후폐제</a></li> <li><a>순제</a></li></ul> </div></td></tr><tr><th>자립</th><td><div> <ul><li><a>진안왕</a></li></ul> </div></td></tr><tr><th>찬탈</th><td><div> <ul><li><a>원흉</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a>남제</a>(南齊)</th><td><div></div><table><tbody><tr><th>추숭</th><td><div> <ul><li><a>선제</a></li> <li><a>문제</a></li> <li><a>경황</a></li></ul> </div></td></tr><tr><th>통치</th><td><div> <ul><li><a>고제</a></li> <li><a>무제</a></li> <li><a>전폐제</a></li> <li><a>후폐제</a></li> <li><a>명제</a></li> <li><a>동혼후</a></li> <li><a>화제</a></li></ul> </div></td></tr><tr><th>자립</th><td><div> <ul><li><a>파양왕</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a>양</a>(梁)</th><td><div></div><table><tbody><tr><th>추숭</th><td><div> <ul><li><a>문제</a></li> <li><a>소명제</a></li> <li><a>안제</a></li></ul> </div></td></tr><tr><th>남량</th><td><div> <ul><li><a>무제</a></li> <li><a>간문제</a></li> <li><a>폐제</a></li> <li><a>원제</a></li> <li><a>민제</a></li> <li><a>경제</a></li></ul> </div></td></tr><tr><th><a>후량</a></th><td><div> <ul><li><a>선제</a></li> <li><a>명제</a></li> <li><a>정제</a></li></ul> </div></td></tr><tr><th>자립</th><td><div> <ul><li><a>임하왕</a></li> <li><a>무릉정헌왕</a></li> <li><a>영가왕</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한(漢)</th><td><div></div><table><tbody><tr><th>추숭</th><td><div> <ul><li><a>원제</a></li></ul> </div></td></tr><tr><th>통치</th><td><div> <ul><li><a>후경</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a>진</a>(陳)</th><td><div></div><table><tbody><tr><th>추숭</th><td><div> <ul><li><a>경제</a></li></ul> </div></td></tr><tr><th>통치</th><td><div> <ul><li><a>무제</a></li> <li><a>문제</a></li> <li><a>폐제</a></li> <li><a>선제</a></li> <li><a>후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d colspan="2"><div> <ul><li><a>삼황오제</a> → <a>하나라</a> → <a>상나라</a> → <a>주나라</a> → <a>진(秦)나라</a> → <a>한나라</a> → <a>삼국시대</a> → <a>진(晉)나라</a> / <a>오호 십육국</a> → <a>남조</a> / <a>원위</a> - <a>북주</a> - <a>북제</a> → <a>수나라</a> → <a>당나라</a> → <a>오대</a> / <a>십국</a> → <a>송나라</a> / <a>요나라</a> / <a>서하</a> / <a>금나라</a> → <a>원나라</a> → <a>명나라</a> → <a>청나라</a> → <a>중화민국</a> / <a>중화인민공화국</a></li></ul> </div></td></tr></tbody></table></div> <div><table><tbody><tr><th><a>전거 통제</a></th><td><div> <ul><li><a>WorldCat</a></li> <li><a>VIAF</a>: <span><a>23413581</a></span></li> <li><a>LCCN</a>: <span><a>n79034658</a></span></li> <li><a>ISNI</a>: <span><a>0000 0000 8206 4606</a></span></li> <li><a>GND</a>: <span><a>142137782</a></span></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양_무제&amp;oldid=23220136</a>"</div> <div><div><a>분류</a>: <ul><li><a>464년 태어남</a></li><li><a>549년 죽음</a></li><li><a>양 (남조)의 황제</a></li><li><a>제 (남조)의 섭정</a></li><li><a>제 (남조)의 불교 신자</a></li><li><a>양 (남조)의 불교 신자</a></li><li><a>굶어 죽은 사람</a></li><li><a>창업군주</a></li><li><a>5세기 중국 사람</a></li><li><a>5세기 시인</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Deutsch</a></li><li><a>English</a></li><li><a>Français</a></li><li><a>Bahasa Indonesia</a></li><li><a>日本語</a></li><li><a>Nederlands</a></li><li><a>Polski</a></li><li><a>Русский</a></li><li><a>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a></li><li><a>ไทย</a></li><li><a>Українська</a></li><li><a>Tiếng Việt</a></li><li><a>吴语</a></li><li><a>中文</a></li><li><a>文言</a></li><li><a>Bân-lâm-gú</a></li><li><a>粵語</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8년 12월 8일 (토) 09:4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무제가 불교 경전에 대한 수많은 주석서를 집필하였을 때, 황제를 무엇으로 불렀나?
황제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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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01
[ "무제가 불교 경전에 대한 수많은 주석서를 집필하였을 때, 황제를 무엇으로 불렀나?", "양과 교섭이 활발해던 나라들에서 무제에게 보내는 국서에 무제를 무엇으로 칭했나?", "양 무제가 불교의 계율을 따르며 소식하기를 견지했기에, 당시 황제를 가리켰던 칭호는?", "양 무제 제위 당시 양 나라의 국가 종교는 무엇이었는가?", "무제는 불교의 계율을 따르며 소식하기를 견지하여서 당시 황제를 무엇이라 불렀는가?", "북조에서 황제를 무엇이라 칭하였는가?", "당시 건강의 외성은 문인과 무인 몇명이 지키고 있었나?", "당시 건강의 외성이 후경의 군이 다가와 무너지자 양나라는 무엇을 부수려 했는가?", "후경군이 외성과 동궁을 점거하고 자축연을 벌이자 황태자 소강이 불태워 버린 것은 무엇인가?", "양 무제 제위 당시 건강의 외성을 호위한 무인 수는?", "양 무제 제위 당시 건강의 외성을 호위하는 무인을 인솔한 사람은?", "양나라는 건강의 외성을 누가 인솔하였나?", "후경은 무엇을 쌓아 내성을 공격했는가?", "후경이 성을 내려온 노비들에게 내린 관직은?", "후경이 난을 일으켜 건강의 내성을 공략할 당시 내성을 지휘한 장수는?", "후경이 난을 일으켜 건강의 내성을 공략할 당시 항복한 노비들에게 내린 관직은?", "내성의 노비들을 향해 항복하면 모두 면천하여 주겠다고 한 사람은 누구인가?", "주승 등의 노비들이 내성에서 내려오자 어떤 관직을 내렸는가?", "후경이 수공을 펼칠 때 물을 끌어들인 곳은?", "무제가 후경에게 처자에 대해 질문할 때 대신 대답한 이는?", "후경이 양 나라 건강의 내성을 함락시킬 당시 끌어들인 호수는?", "후경은 어떤 호수의 물을 끌어들여 성에 대한 수공을 펼쳤는가?" ]
<!DOCTYPE html> 양 무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양 무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tbody><tr> <th colspan="2"> 양 무제 소연梁 武帝 蕭衍 </th></tr> <tr> <td colspan="2">양 고조 무황제 소연 </td></tr> <tr> <td colspan="2">지위 </td></tr> <tr> <td colspan="2">양나라의 초대 황제 </td></tr> <tr> <th>재위 </th> <td>502년 ~ 549년 </td></tr> <tr> <th>전임자 </th> <td>남제 화제 소보융 </td></tr> <tr> <th>후임자 </th> <td>간문제 소강 </td></tr> <tr> <td colspan="2">이름 </td></tr> <tr> <th>휘 </th> <td>소연(蕭衍) </td></tr> <tr> <th>별호 </th> <td>소자: 연아(練兒)자: 숙달(叔達)칭호: 황제보살(皇帝菩薩) </td></tr> <tr> <th>묘호 </th> <td>고조(高祖) </td></tr> <tr> <th>시호 </th> <td>무황제(武皇帝) </td></tr> <tr> <td colspan="2">신상정보 </td></tr> <tr> <th>출생일 </th> <td>464년 </td></tr> <tr> <th>사망일 </th> <td>549년 </td></tr> <tr> <th>매장지 </th> <td>수릉(修陵) </td></tr> <tr> <th>왕조 </th> <td>양나라 </td></tr> <tr> <th>부친 </th> <td>문제 소순지 </td></tr> <tr> <th>모친 </th> <td>장상유 </td></tr> <tr> <th>배우자 </th> <td>황후 치휘귀빈 정영광, 수용 완영령, 숙원 오경휘, 숙의 동씨, 충화 정씨, 수용 갈씨, 사씨 </td></tr> <tr> <th>자녀 </th> <td>소명태자 소통, 예장왕 소종, 간문제 소강, 남강간왕 소적, 여릉위왕 소속, 소릉휴왕 소륜, 원제 소역, 무릉정헌왕 소기영흥공주 소옥요, 영세공주 소옥완, 영강공주 소옥현, 안길공주 소옥지, 부양공주 소씨, 장성공주 소옥령 </td></tr> <tr> <th>종교 </th> <td>불교 </td></tr> </tbody></table> 양 고조 무황제 소연(梁 高祖 武皇帝 蕭衍, 464년 ~ 549년)은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초대 황제이다. 목차 1 생애 1.1 출자와 즉위 1.2 치세 전반기 1.3 황제보살 1.4 후경의 난 2 평가 3 가족 3.1 부모 3.1.1 아버지 3.1.2 어머니 3.2 형제 3.2.1 형 3.2.2 동생 3.3 아내 3.3.1 정궁 3.3.2 후궁 3.4 자녀 3.4.1 아들 3.4.2 딸 4 참고 문헌 생애[편집] 출자와 즉위[편집] 남난릉(南蘭陵), 즉 지금의 중국 장쑤 성을 본관으로 하는 난릉 소씨(蘭陵蕭氏)의 일문으로 남제 황실의 방계에 해당된다. 아버지 소순지는 남제의 초대 황제인 소도성의 족제로서 단양윤(丹陽尹)을 지냈다. 기록에는 그가 어려서부터 문무를 두루 통달하여 주목받았다고 적고 있다. 일찍이 남제 문화의 중심지였던 경릉왕(竟陵王) 소자량의 서저(西邸)에도 드나들었으며, 심약(沈約) 등과 함께 경릉팔우(竟陵八友)의 한 사람으로 수학하였다. 소연이 옹주자사(雍州刺史)가 되었을 때, 당시 남제의 황제였던 소보권이 한창 폭정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소의를 비롯한 황족 종친뿐 아니라 많은 대신과 사람들을 죽였고 궁전에선 과도한 사치를 일삼았고, 소연은 형이 살해당한 일을 계기로 그를 타도하기 위하여 거병했다. 수도인 건강으로 진군해 소보권을 살해하고 화제를 옹립했으나, 이듬해인 502년에 화제로부터 제위를 선양받고 양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양나라를 세울 당시의 무제 치세 전반기[편집] 치세 전반기에 해당하는 천감 연간(502년 - 519년) 동안에 무제는 심약이나 범운(范雲)으로 대표되는 명족 출신 인물들을 재상으로 등용하고, 국정 전반에 걸쳐 검약을 모토로 삼아 관제를 정비하고 새로운 법률인 양률(梁律)을 반포하였으며, 국가 교육기관인 대학(大學)을 설치하여 인재 등용에 애썼고 조세를 경감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실적을 거두었다. 또한 토단법(土斷法)을 실시하여 유랑민 대책에도 성과가 있었다. 그동안 내정을 정비하여 구품관인법을 개선하고, 불교를 장려하여 국내를 다스리고 문화를 번영시켰다. 대외관계도 비교적 평온하여 약 50년간 태평성대를 유지하여 남조 최대 전성기를 보냈다. 또한 무제의 맏아들이자 황태자인 소명태자가 편찬한 《문선》은 후세에까지 전해지는 훌륭한 문헌이다. 황제보살[편집] 520년에 무제는 연호를 바꿨는데, 그 이후부터 차츰 정치를 방기하기 시작했다. 거꾸로 무제 자신이 귀의한 불교 교단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태도를 보이면서 불교에 차츰 빠져들었고, 결국 527년 이후부터는 황제 자신이 지은 동태사(同泰寺)에 사신(捨身)이라는 이름으로 막대한 재물을 보시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양의 재정은 궁핍해졌고 과거 남제 말기 소보권 시절에 민중에게 행했던 가혹한 수탈과 착취가 재현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한문(寒門) 출신으로 대표되는 주이(朱异) 등을 중용하면서 관료 체계에서의 기강도 해이해지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무제의 불교 신앙은 표면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무제 자신이 불교 경전에 대한 수많은 주석서를 집필하였다. 또한 황제 자신도 불교의 계율을 따르며 소식(蔬食)하기를 견지했기에, 당시에는 황제를 가리켜 황제보살(皇帝菩薩)로 부를 정도였다. 이는 당시 국가불교로서의 색채가 농후했던 북조에서 사용하던 황제즉여래(皇帝即如来)에 대비되어 남조의 불교를 상징하는 칭호로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황제에 대해 당시 양과 교섭이 활발했던 동남아시아나 서역, 한반도의 백제나 왜국 등 여러 국가에서는 무제에게 보내는 국서에서 무제를 보살이라 불렀는데, 당시의 국제사회에서도 양의 황제는 불교 신앙에 있어 고명한 인물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년의 무제 후경의 난[편집] 548년에 동위의 무장이었던 후경이 양나라에 투항해 왔다. 이를 북조에 맞설 절호의 기회라 여긴 무제는 신하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후경에게 원군을 보내주고 그를 하남왕(河南王)에 봉했다. 그러나 양나라의 원군은 팽성(彭城)에서 동위에 패했고, 후경도 와양(渦陽)에서 패했다. 무제는 후경이 자신의 군을 거느린 채로 양나라에 투항하는 것을 허락했지만, 후경은 양나라 종실의 여러 왕들이 서로 연대하지 못하고 혼란스러운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켜 수도 건강을 포위했다. 당시 건강의 외성은 동궁학사(東宮學士) 유신(庾信)이 인솔하는 문인과 무인 3천 명이 지키고 있었는데, 철면을 쓴 후경의 군이 다가오자 순식간에 무너져 버렸다. 이에 양나라는 부교를 부수려 했지만 이마저도 실패했고, 후경군은 선양문(宣陽門)에서 임하왕 소정덕의 인도를 받으며 건강의 외성으로 무혈입성했다. 무제 등은 내성에서 농성했지만 후경은 이들마저 포위하고, 동궁을 점거하고 사로잡은 궁녀 수백 인은 장병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자축연을 벌이기까지 했다. 분노한 황태자 소강이 병사를 보내 동궁을 불태워 버렸고, 이 와중에 수백 년에 걸쳐 유지되어 오던 건강의 역사적인 건축물은 물론 소장된 장서들마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후경은 다시 내성 공략에 나섰지만, 장수 양간(羊侃)의 지휘 아래 내성은 몇 달에 걸쳐 후경의 공격을 막아냈다. 후경이 나무를 쌓아올려 성을 공격하면 양간은 갈대에 불을 붙여 그것을 태워 무너뜨리는 식이었다. 격노한 후경은 궁성의 동서로 흙산을 쌓아올리게 했다. 이 과정에서 장내에 사는 사람은 일반 서민에서 귀족까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마구 쌓게했고, 쓰러져 죽는 자는 그대로 흙산에 묻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 흙산은 미처 완성되기도 전에 갑작스런 호우로 무너졌다. 후경은 다시 내성의 노비들을 향해 항복하면 모두 면천시켜 주겠다고 선언했고, 주승(朱昇) 등의 노비들이 성을 내려오자 그들에게 의동삼사(儀同三司)의 관직을 내렸다. 이에 감격한 노비들이 자신들의 옛 주인을 향해 "우린 네놈을 50년을 섬기고도 겨우 중령군(中領軍)에 그쳤는데, 후왕(侯王, 후경) 어른을 섬기니 바로 의동(儀同)이 되는 구나!" 라고 소리쳤다고 한다. 후경의 작전은 주효하여 사흘 동안 후경의 병력이 급증한데 비해 내성의 방어군은 빗의 이가 빠지듯 탈주가 잇따랐고, 549년 3월에 군을 지휘하던 양간이 병사함으로써 전세는 후경에게로 기울었다. 내성의 군사나 농성중이던 남녀들도 몸이 붓고 호흡도 곤란해 지는 가운데, 후경은 현무호(玄武湖)의 물을 끌어들여 성에 대한 수공을 펼쳤고, 결국 성은 함락되었다. 마침내 후경이 황제를 알현할 때 무제가 후경에게 말하기를, "경이 군중에 있은지 오래되었으니, 어찌 수고로움이 없겠는가!" 하자, 후경은 얼굴에 땀을 흘리며 고개를 들지 못하였다고 한다. 무제가 다시 묻기를, "경은 어느 주(州)의 사람이며, 감히 여기에 이르렀는데, 처자는 아직 북쪽에 있는가?" 라고 했다. 후경이 여전히 대답을 못하자, 후경의 옆에 있던 임약(任約)이 대신 대답하기를, "신 후경의 처자는 고씨(高氏)에게 도륙당하고 오직 이 한몸으로 폐하께 돌아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무제가 마침내 "강을 건널 때는 몇 명이 있었는가?" 라고 묻자 후경은 천 명이라고 대답했고, 다시 "성을 포위했을 때는 몇 명이었는가?" 라고 묻자 후경은 10만 명이었다고 대답했으며, 마지막으로 "그럼 지금은 몇 명이 있는가?" 라고 묻자 후경은 "거느리는 땅에서 제 것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라고 대답했는데, 결국 무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폐된 상태에서 식사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고, 울분 속에 병이 든 황제는 마지막으로 꿀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그것마저도 허락되지 못한 채, 실의와 쇠약으로 결국 죽고 말았다. 각지에 분봉되었던 종실의 여러 왕들은 형제나 삼촌 또는 조카들이었기에 각자의 이득을 보고 견제를 한 결과 모두 황제의 구출에 나서지않아 무제가 죽는 걸 보고만 있었다. 후경은 간문제를 옹립했다가 551년에 간문제를 폐하고 예장왕(豫章王) 소동을 옹립한 뒤 선양을 받아 건강에서 황제로 즉위했다. 각지에 주둔한 여러 왕들 중 가장 세력이 강했던 형주자사 소역은 왕승변과 진패선에게 대군을 주어 건강을 공격해 후경을 죽이고 난을 평정했다. 무제가 묻힌 수릉 앞에 가까스로 남아있는 천록(天祿) 평가[편집] 북송의 역사가 사마광은 자신의 《자치통감》에서 무제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양 고조(무제)가 마지막 자리를 보전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자신이 드는 조식(소식)을 성덕으로 하면서 군주로서의 도가 이미 갖춰지니 더 이상 더해질 것이 없어 군신의 간언은 어떤 것도 들을 필요 없다고 하였다.(…) 이름을 더럽히고 몸은 위험에 빠졌으며 나라는 뒤집히고 종묘의 제사가 끊어지니 길이 후세의 놀림거리만 되고 말았도다. 슬픈 일이다. 가족[편집] 부모[편집] 아버지[편집] 소순지(蕭順之) - 무제가 양나라를 세운 뒤 태조(太祖) 문황제(文皇帝)로 추존했다. 어머니[편집] 장상유(張尙柔) 형제[편집] 소담의 묘에 있는 석각(石刻) 형[편집] 소의 소부 동생[편집] 소창 소융 소굉 소위 소수 소회 소담 아내[편집] 정궁[편집] 황후 치휘 후궁[편집] 귀빈 정령광 수용 완령영 숙원(淑媛) 오씨(吳氏) 소의(昭儀) 동씨(董氏) 윤화(充華) 정씨 수용 갈씨(葛氏) 사씨(佘氏) 자녀[편집] 아들[편집] 소통 소종 소강 소적 소속 소륜 소역 소기 딸[편집] 소옥요 소옥완 소옥현 소옥지 부양도공주 소옥령 참고 문헌[편집] 자치통감 양서 <table> <tbody><tr> <td>전 임(초대) </td> <td>제1대 양나라 황제502년 ~ 549년 </td> <td>후 임임하왕 소정덕 (비정통)간문제 소강 (정통) </td></tr></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2">vdeh중국 남조의 황제</th></tr><tr><th>유송(劉宋)</th><td><table><tbody><tr><th>추숭</th><td> 효제 </td></tr><tr><th>통치</th><td> 무제 소제 문제 효무제 전폐제 명제 후폐제 순제 </td></tr><tr><th>자립</th><td> 진안왕 </td></tr><tr><th>찬탈</th><td> 원흉 </td></tr></tbody></table></td></tr><tr><th>남제(南齊)</th><td><table><tbody><tr><th>추숭</th><td> 선제 문제 경황 </td></tr><tr><th>통치</th><td> 고제 무제 전폐제 후폐제 명제 동혼후 화제 </td></tr><tr><th>자립</th><td> 파양왕 </td></tr></tbody></table></td></tr><tr><th>양(梁)</th><td><table><tbody><tr><th>추숭</th><td> 문제 소명제 안제 </td></tr><tr><th>남량</th><td> 무제 간문제 폐제 원제 민제 경제 </td></tr><tr><th>후량</th><td> 선제 명제 정제 </td></tr><tr><th>자립</th><td> 임하왕 무릉정헌왕 영가왕 </td></tr></tbody></table></td></tr><tr><th>한(漢)</th><td><table><tbody><tr><th>추숭</th><td> 원제 </td></tr><tr><th>통치</th><td> 후경 </td></tr></tbody></table></td></tr><tr><th>진(陳)</th><td><table><tbody><tr><th>추숭</th><td> 경제 </td></tr><tr><th>통치</th><td> 무제 문제 폐제 선제 후주 </td></tr></tbody></table></td></tr><tr><td colspan="2"> 삼황오제 → 하나라 → 상나라 → 주나라 → 진(秦)나라 → 한나라 → 삼국시대 → 진(晉)나라 / 오호 십육국 → 남조 / 원위 - 북주 - 북제 → 수나라 → 당나라 → 오대 / 십국 → 송나라 / 요나라 / 서하 / 금나라 → 원나라 → 명나라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인민공화국 </td></tr></tbody></table> <table><tbody><tr><th>전거 통제</th><td> WorldCat VIAF: 23413581 LCCN: n79034658 ISNI: 0000 0000 8206 4606 GND: 142137782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양_무제&amp;oldid=23220136" 분류: 464년 태어남549년 죽음양 (남조)의 황제제 (남조)의 섭정제 (남조)의 불교 신자양 (남조)의 불교 신자굶어 죽은 사람창업군주5세기 중국 사람5세기 시인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FrançaisBahasa Indonesia日本語NederlandsPolski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ไทย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吴语中文文言Bân-lâm-gú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2월 8일 (토) 09:4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주제 요약:** 양 무제(소연)는 중국 남북조 시대 양나라의 초대 황제로, 502년부터 549년까지 재위하며 국가의 내정을 정비하고 불교를 장려하여 문화적 번영을 이끌었다. 그러나 후반기에는 불교에 몰두하며 정치적 기강이 해이해졌고, 결국 후경의 난으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그의 통치는 남조의 최대 전성기를 이끌었으나, 마지막에는 국가의 혼란을 초래하였다. **각 문단의 핵심 문장:** 1. **생애 - 출자와 즉위:** 양 고조 무황제 소연은 남제 황실의 방계 출신으로, 남제의 폭정을 타도하고 502년에 양나라를 세웠다. 2. **치세 전반기:** 무제는 재위 초기 동안 검약과 법률 개정을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고, 불교를 장려하여 문화적 번영을 이루었다. 3. **황제보살:** 무제는 불교에 깊이 빠져들며 재정이 궁핍해졌고, 그의 불교 신앙은 국제사회에서도 고명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4. **후경의 난:** 후경의 반란으로 양나라가 혼란에 빠지면서 무제는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5. **평가:** 사마광은 무제가 군주로서의 도를 갖추지 못하고 나라가 뒤집히는 비극을 겪었다고 평가하였다.
이 텍스트를 읽고, 전체 주제를 세 문장 이내로 요약한 뒤, 각 문단의 핵심 문장도 추출해서 함께 보여줘. 중요하지 않은 예시는 생략하고 핵심 개념 위주로 정리해줘.
검사외전
https://ko.wikipedia.org/wiki/검사외전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검사외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검사외전</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tbody><tr> <td colspan="2"> <div><div><img></div><span><big><big><b>검사외전</b></big></big></span></div> </td></tr> <tr> <td colspan="2"><a><img></a> </td></tr> <tr> <th>감독 </th> <td><a>이일형</a> </td></tr> <tr> <th>제작 </th> <td>영화사 월광, 사나이픽처스 </td></tr> <tr> <th>각본 </th> <td><a>이일형</a> </td></tr> <tr> <th>출연 </th> <td><a>황정민</a>, <a>강동원</a> </td></tr> <tr> <th>촬영 </th> <td><a>최찬민</a> </td></tr> <tr> <th>편집 </th> <td><a>김상범</a>, <a>김재범</a> </td></tr> <tr> <th>음악 </th> <td><a>황상준</a> </td></tr> <tr> <th>배급사 </th> <td>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td></tr> <tr> <th>개봉일 </th> <td><a>2016년</a> <a>2월 3일</a> </td></tr> <tr> <th>시간 </th> <td>126분 </td></tr> <tr> <th>국가 </th> <td><span><a><img></a></span> <a>대한민국</a> </td></tr> <tr> <th>언어 </th> <td><a>한국어</a> </td></tr> </tbody></table> <p>《<b>검사외전</b>》은 <a>2016년</a>에 개봉한 <a>대한민국</a>의 범죄 영화이다. </p> <h2><span></span><span>줄거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검사들 사이에선 다혈질로 소문난 변재욱. 스스로도 법과 정의를 위해서가 아닌 나쁜놈들을 합법적으로 조지기 위해 검사가 됐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다. 어느날, 시위현장에서 전경의 머리를 깨뜨린 젊은 용역청년 이진석을 잡혀오는데 늘 그런대로 재욱은 피의자에게 폭행을 행사하며 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취조실 테이블위에 엎드려있던 진석을 깨우던 재욱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자고있다고 생각한 진석은 어찌된 영문인지 숨이 끊어져 있었던것이다. 용의자는 누가봐도 바로 어제까지 그를 구타한 재욱. 그는 선배검사 우종길의 빽줄로 정당방위라는 주장을 앞세우며 집행유예로 풀려나려고 했지만 돌연 종길이 배신을 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15년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리고 교도소에선 그간 자신이 수사와 권력이란 이름으로 아무렇지 않게 폭행을 행사한 피의자들을 맞딱드렸고 그들은 자신들이 당했던걸 고스란히 되갚으며 복수를 한다. </p><p>하루아침에 잘나가는 검사에서 범죄자로 전락한 재욱,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몇번이나 재심신청을 했지만 당연히 모두 기각됐다. 그러다 간수들에게 부동산과 관련된 법률조언을 해준 일을 계기로 교도소 간부들에게 검사일을 하며 얻은 법조계의 노하우를 전수하기 시작했고 5년뒤에는 '<b>9번방 영감님'</b>이라는 이름으로 교도소를 군림하는 경지에 이른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결백을 주장하려는 일은 남몰래 계속 펼치고 있던 그때. 엄청난 인연과 마주친다. 5년전 죽은 진석과 똑같은 말을 하던 젊은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한치원. 빼어난 미모를 가졌지만 입만 열었다 하면 쉴새없이 거짓말을 늘어놓고 숨쉬는것 빼고는 모두 거짓말일 정도의 프로사기꾼이었다. 재욱은 자신이 부탁하는 일만 도와준다면 무죄로 출소하게 해주겠다는 조건으로 치원을 꼬드겼고 치원은 그런 재욱을 수상히 여기면서도 출소라는 말에 덜컥 요구를 수락했다. </p><p>재욱의 도움으로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고 출소한 치원. 하지만 출소하자마자 그는 돌변했다. 초조하게 연락을 기다리는 재욱에게 더이상 연락하지 말라며 배신을 하고만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뜻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드러나는데 진석과 재욱은 같은 용역으로 일했던 동료지간이었다. 따라서 진석에 대해서라면 재욱보다 훨씬 더 잘알고 있었다. 과연, 검사와 사기꾼의 동맹작전은 어떻게 끝날까? </p> <h2><span></span><span>캐스팅</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황정민</a>&#160;: 변재욱 역</li> <li><a>강동원</a>&#160;: 한치원 역</li> <li><a>이성민</a>&#160;: 우종길 역</li> <li><a>박성웅</a>&#160;: 양민우 역</li> <li><a>박종환</a>&#160;: 이진석 역</li> <li><a>한재영</a>&#160;: 장현석 역</li> <li><a>김응수</a>&#160;: 강영식 의원 역</li> <li><a>신소율</a>&#160;: 김하나 역</li> <li><a>주진모</a>&#160;: 최 판사 역</li> <li><a>김원해</a>&#160;: 영철 역</li> <li><a>전배수</a>&#160;: 강영섭 계장 역</li> <li><a>김홍파</a>&#160;: 교도소장 역</li> <li><a>김병옥</a>&#160;: 박 사장 역</li> <li><a>박지환</a>&#160;: 철구 역</li> <li><a>이원섭</a>&#160;: 박준범 역</li> <li><a>손종학</a>&#160;: 김 판사 역</li> <li><a>김종수</a>&#160;: 박청직 법원장 역</li> <li><a>민무제</a>&#160;: 제비 역</li> <li><a>손성찬</a>&#160;: 진석 부 역</li> <li>이선주&#160;: 진석 모 역</li> <li><a>고인범</a>&#160;: 하나 부 역</li> <li><a>추귀정</a>&#160;: 하나 모 역</li> <li>김춘기&#160;: 김창섭 부장검사 역</li> <li>정형석&#160;: 송 교위 역</li> <li><a>이석준</a>&#160;: 임 교위 역</li> <li><a>황병국</a>&#160;: 국선 변호사 역</li> <li><a>황인준</a>&#160;: 호성형사 역</li> <li><a>허형규</a>&#160;: 하나오빠 역</li> <li><a>김희창</a>&#160;: 지구당 위원장 역</li> <li><a>이정은</a>&#160;: 운동원 아줌마 역</li> <li><a>신혜선</a>&#160;: 지구당 경리 역</li> <li>최성필&#160;: 선거유세 MC 역</li> <li><a>이승훈</a>&#160;: 박 계장 역</li> <li><a>이문정</a>&#160;: 민우 사무실 여직원 역</li> <li><a>서왕석</a>&#160;: 대장덩치 역</li> <li><a>권혁</a>&#160;: 종길 보좌관 역</li> <li><a>김광현</a>&#160;: 취조실 형사 2 역</li> <li><a>이영수</a>&#160;: 재욱 호송형사 2 역</li> <li><a>최영도</a>&#160;: 절도재소자 역</li> <li><a>류성현</a>&#160;: 5년전 재소자 1 역</li> <li><a>지건우</a>&#160;: 5년전 재소자 5 역</li> <li><a>도용구</a>&#160;: 5년후 재소자 1 역</li> <li><a>김기무</a>&#160;: 시위조폭 역</li> <li><a>미석</a>&#160;: 현석 패거리 2 역</li> <li><a>이선구</a>&#160;: 현석 패거리 3 역</li> <li><a>이규호</a>&#160;: 현석 패거리 5 역</li> <li><a>김지훈</a>&#160;: 현석패거리 덩치 1 역</li> <li><a>윤경호</a>&#160;: 현석패거리 덩치 2 역</li> <li><a>박지홍</a>&#160;: 치원 패거리 4 역</li> <li><a>장지건</a>&#160;: 옥상 재소자 2 역</li> <li><a>김시은</a>&#160;: 5년전 뉴스 아나운서 역</li> <li>이승준&#160;: 5년전 기자 1 역</li> <li><a>차승호</a>&#160;: 5년후 기자 3 역</li> <li><a>정기섭</a>&#160;: 교도관 2 역</li> <li><a>한창현</a>&#160;: 교도관 4 역</li> <li><a>김주헌</a>&#160;: 남자 2 역</li> <li><a>박종수</a>&#160;: 검찰청입구 경호원 역</li> <li><a>윤소미</a>&#160;: 은행 여직원 역</li> <li><a>조원희</a>&#160;: 경찰청장 역 (특별출연)</li></ul>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검사외전 - 네이버영화</a></li> <li><a>검사외전 - 다음영화</a></li> <li><a>검사외전 - 무비스트</a></li> <li><a>검사외전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a></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검사외전&amp;oldid=24363466</a>"</div> <div><div><a>분류</a>: <ul><li><a>한국어 영화 작품</a></li><li><a>2016년 영화</a></li><li><a>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영화</a></li><li><a>대한민국의 코미디 영화</a></li><li><a>대한민국의 범죄 영화</a></li><li><a>대한민국의 버디 영화</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العربية</a></li><li><a>Deutsch</a></li><li><a>English</a></li><li><a>Français</a></li><li><a>Bahasa Indonesia</a></li><li><a>中文</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6월 2일 (일) 22:0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검사외전에서 재욱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자 한 일은?
재심신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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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사외전에서 재욱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자 한 일은?", "검사외전에서 교도소를 군림하는 재욱은 무엇이라고 불렸는가?", "검사외전에서 재욱이 감옥에서 만난, 진석과 똑같은 말을 하는 남자의 이름은?", "재욱이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신청한 것은?", "재욱이 5년 뒤에 교도소에서 얻은 별명은?", "재욱은 어떤 조건으로 치원을 꼬드겼을까?", "재욱이 교도소 간부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해주며 얻게된 별명은?", "재욱이 마주친 5년전 죽은 진석과 같은 말을 하던 젊은 남자의 이름은?", "재욱이 교도소에서 만난 하는 행동 모두 거짓말인 프로사기꾼의 이름은?" ]
<!DOCTYPE html> 검사외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검사외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tbody><tr> <td colspan="2"> 검사외전 </td></tr> <tr> <td colspan="2"> </td></tr> <tr> <th>감독 </th> <td>이일형 </td></tr> <tr> <th>제작 </th> <td>영화사 월광, 사나이픽처스 </td></tr> <tr> <th>각본 </th> <td>이일형 </td></tr> <tr> <th>출연 </th> <td>황정민, 강동원 </td></tr> <tr> <th>촬영 </th> <td>최찬민 </td></tr> <tr> <th>편집 </th> <td>김상범, 김재범 </td></tr> <tr> <th>음악 </th> <td>황상준 </td></tr> <tr> <th>배급사 </th> <td>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td></tr> <tr> <th>개봉일 </th> <td>2016년 2월 3일 </td></tr> <tr> <th>시간 </th> <td>126분 </td></tr> <tr> <th>국가 </th> <td> 대한민국 </td></tr> <tr> <th>언어 </th> <td>한국어 </td></tr> </tbody></table> 《검사외전》은 2016년에 개봉한 대한민국의 범죄 영화이다. 줄거리[편집] 검사들 사이에선 다혈질로 소문난 변재욱. 스스로도 법과 정의를 위해서가 아닌 나쁜놈들을 합법적으로 조지기 위해 검사가 됐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다. 어느날, 시위현장에서 전경의 머리를 깨뜨린 젊은 용역청년 이진석을 잡혀오는데 늘 그런대로 재욱은 피의자에게 폭행을 행사하며 심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취조실 테이블위에 엎드려있던 진석을 깨우던 재욱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말았다. 자고있다고 생각한 진석은 어찌된 영문인지 숨이 끊어져 있었던것이다. 용의자는 누가봐도 바로 어제까지 그를 구타한 재욱. 그는 선배검사 우종길의 빽줄로 정당방위라는 주장을 앞세우며 집행유예로 풀려나려고 했지만 돌연 종길이 배신을 하는 바람에 꼼짝없이 15년형을 선고받고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리고 교도소에선 그간 자신이 수사와 권력이란 이름으로 아무렇지 않게 폭행을 행사한 피의자들을 맞딱드렸고 그들은 자신들이 당했던걸 고스란히 되갚으며 복수를 한다. 하루아침에 잘나가는 검사에서 범죄자로 전락한 재욱, 그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몇번이나 재심신청을 했지만 당연히 모두 기각됐다. 그러다 간수들에게 부동산과 관련된 법률조언을 해준 일을 계기로 교도소 간부들에게 검사일을 하며 얻은 법조계의 노하우를 전수하기 시작했고 5년뒤에는 '9번방 영감님'이라는 이름으로 교도소를 군림하는 경지에 이른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도 결백을 주장하려는 일은 남몰래 계속 펼치고 있던 그때. 엄청난 인연과 마주친다. 5년전 죽은 진석과 똑같은 말을 하던 젊은 남자였다. 그의 이름은 한치원. 빼어난 미모를 가졌지만 입만 열었다 하면 쉴새없이 거짓말을 늘어놓고 숨쉬는것 빼고는 모두 거짓말일 정도의 프로사기꾼이었다. 재욱은 자신이 부탁하는 일만 도와준다면 무죄로 출소하게 해주겠다는 조건으로 치원을 꼬드겼고 치원은 그런 재욱을 수상히 여기면서도 출소라는 말에 덜컥 요구를 수락했다. 재욱의 도움으로 재심에서 무죄선고를 받고 출소한 치원. 하지만 출소하자마자 그는 돌변했다. 초조하게 연락을 기다리는 재욱에게 더이상 연락하지 말라며 배신을 하고만것이었다. 그리고 여기서 뜻하지 않은 사실이 하나 드러나는데 진석과 재욱은 같은 용역으로 일했던 동료지간이었다. 따라서 진석에 대해서라면 재욱보다 훨씬 더 잘알고 있었다. 과연, 검사와 사기꾼의 동맹작전은 어떻게 끝날까? 캐스팅[편집] 황정민 : 변재욱 역 강동원 : 한치원 역 이성민 : 우종길 역 박성웅 : 양민우 역 박종환 : 이진석 역 한재영 : 장현석 역 김응수 : 강영식 의원 역 신소율 : 김하나 역 주진모 : 최 판사 역 김원해 : 영철 역 전배수 : 강영섭 계장 역 김홍파 : 교도소장 역 김병옥 : 박 사장 역 박지환 : 철구 역 이원섭 : 박준범 역 손종학 : 김 판사 역 김종수 : 박청직 법원장 역 민무제 : 제비 역 손성찬 : 진석 부 역 이선주 : 진석 모 역 고인범 : 하나 부 역 추귀정 : 하나 모 역 김춘기 : 김창섭 부장검사 역 정형석 : 송 교위 역 이석준 : 임 교위 역 황병국 : 국선 변호사 역 황인준 : 호성형사 역 허형규 : 하나오빠 역 김희창 : 지구당 위원장 역 이정은 : 운동원 아줌마 역 신혜선 : 지구당 경리 역 최성필 : 선거유세 MC 역 이승훈 : 박 계장 역 이문정 : 민우 사무실 여직원 역 서왕석 : 대장덩치 역 권혁 : 종길 보좌관 역 김광현 : 취조실 형사 2 역 이영수 : 재욱 호송형사 2 역 최영도 : 절도재소자 역 류성현 : 5년전 재소자 1 역 지건우 : 5년전 재소자 5 역 도용구 : 5년후 재소자 1 역 김기무 : 시위조폭 역 미석 : 현석 패거리 2 역 이선구 : 현석 패거리 3 역 이규호 : 현석 패거리 5 역 김지훈 : 현석패거리 덩치 1 역 윤경호 : 현석패거리 덩치 2 역 박지홍 : 치원 패거리 4 역 장지건 : 옥상 재소자 2 역 김시은 : 5년전 뉴스 아나운서 역 이승준 : 5년전 기자 1 역 차승호 : 5년후 기자 3 역 정기섭 : 교도관 2 역 한창현 : 교도관 4 역 김주헌 : 남자 2 역 박종수 : 검찰청입구 경호원 역 윤소미 : 은행 여직원 역 조원희 : 경찰청장 역 (특별출연) 외부 링크[편집] 검사외전 - 네이버영화 검사외전 - 다음영화 검사외전 - 무비스트 검사외전 -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검사외전&amp;oldid=24363466" 분류: 한국어 영화 작품2016년 영화교도소를 배경으로 한 영화대한민국의 코미디 영화대한민국의 범죄 영화대한민국의 버디 영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FrançaisBahasa Indonesia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일 (일) 22:0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서론 《검사외전》은 2016년에 개봉한 대한민국의 범죄 영화로, 법과 정의를 위해 검사가 된 주인공 변재욱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영화는 권력과 폭력의 관계, 그리고 정의의 모호함을 탐구하며, 주인공이 겪는 극적인 변화를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드러내고자 한다. ### 본론 주인공 변재욱은 다혈질 검사로, 법을 이용해 나쁜 사람들을 처벌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그의 폭력적인 심문 방식이 결국 그를 범죄자로 전락시키고, 교도소에서 복수의 대상이 된다. 재욱은 교도소에서 법조계의 노하우를 전수하며 권력을 쌓고, 결국 '9번방 영감님'으로 군림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는 과거의 범죄와 마주하게 되고,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재심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기각된다. 그러던 중, 사기꾼 한치원과의 만남이 이루어지며 두 사람은 서로의 이익을 위해 동맹을 맺는다. 하지만 치원이 재욱을 배신하면서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이 영화는 검사와 범죄자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을 통해 정의의 복잡성을 강조하고,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관계를 탐구한다. ### 결론 《검사외전》은 범죄와 정의, 그리고 인간의 복잡한 심리를 다룬 작품으로, 주인공의 변화를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한다. 영화는 권력의 남용과 그로 인한 결과를 보여주며, 관객에게 법과 정의에 대한 깊은 성찰을 유도한다. 결국,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 영화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인간의 본성과 사회적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글 전체의 요지를 논리적 흐름에 맞게 정리해줘. 서론, 본론, 결론 구조로 요약해주고, 각 부분마다 글쓴이의 의도나 주장도 명확히 밝혀줘.
신학방법론
https://ko.wikipedia.org/wiki/신학방법론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신학방법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신학방법론</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신학 방법론</b>이란 기독교 <a>신학</a>을 진술하고 논증하며 변증하는데 사용하는 방법론을 말한다. 신학의 중요한 원리를 사용하여 정당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성경적 신학적 논리적 방식의 도구들을 의미한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어거스틴의 신학 방법론</span></a></li> <li><a><span>2</span> <span>롬바르드의 신학방법론</span></a></li> <li><a><span>3</span> <span>근대 미국의 신학자들</span></a> <ul> <li><a><span>3.1</span> <span>아더 태펀 피어선</span></a></li> </ul> </li> <li><a><span>4</span> <span>정통주의 신학자들</span></a> <ul> <li><a><span>4.1</span> <span>바빙크의 신학방법론</span></a> <ul> <li><a><span>4.1.1</span> <span>* 종합적인 방법(Synthetic Method)</span></a></li> </ul> </li> </ul> </li> <li><a><span>5</span> <span>현대신학자들의 신학방법론</span></a> <ul> <li><a><span>5.1</span> <span>기독교 유신론적 방법(The Christian Theistic Method)</span></a></li> </ul> </li> <li><a><span>6</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7</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어거스틴의 신학 방법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어거스틴</a>의 신학방법론은 <b>Credo ut intelligam</b>(신앙은 찾고 지성은 이해한다)이다. 믿음으로 시작하고 이성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성경적 신학을 이루어었다.어거스틴의 신학방법론은 져스틴의 방법과 <a>터툴리안</a>의 방법을 결합하고 종합했다. 저스틴은 <a>소크라테스</a>와 <a>플라톤</a>도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한다.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기독교인이라는 말은 모든 지식, 지성은 로고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모세의 지식이든,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지식이든 로고스는 만세 전부터 있었다. 태초부터 계신 로고스가 모든 지식을 파생시켰는데, 그 로고스가 육체로 태어났다는 주장이다. 그 주장에 반기를 든 사람이 터툴리안이다. 그는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기독교와 무슨 상관이 있느뇨'라고 외쳤다. 이와같이 어거스틴은 이성적인 관점은 저스틴에게 신앙적인 관점은 터툴리안으로 부터 영향을 받아 변증법적 종합을 통하여 그의 신학방법론을 만들었다.<a>[1]</a><sup><a>&#91;1&#93;</a></sup> </p> <h2><span></span><span>롬바르드의 신학방법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스콜라 신학자였던 롬바르드의 저서 『<a>명제집</a>』(Libri Quatuor Sententiarum)은 <a>필리프 멜란히톤</a>의 『신학총론』이전까지 신학의 주교재로 사용되었다. 롬바르드를 읽지 않고는 12세기 유럽의 신학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는 신앙을 세 단계로 구분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임을 믿는 것, 둘째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것, 셋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피터의 주요 공헌은 1147년에서 1151년 사이에 씌어진 『4권의 명제집』(Four Books of Sentences)이다. 이 책은 성경, 교부, 또한 기타 다른 권위 있는 사람들의 글을 뽑아 엮은 것이다. 롬바르드의 방법은 <a>피에르 아벨라</a><b>르</b>의 방법과 유사했다. 즉, 그도 충돌하는 두 권위 사이를 조정하기 위해 이성, <a>변증법</a>, 논리 등을 사용했다. 그의 목표는 자기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확립되는 권위에 근거하여 진리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현재 로마가톨릭의 표준이 된 7성례를 최초로 작성한 사람으로 1439년의 플로렌스 종교회의(the Council of Florence)에서 정통으로 인정되었다.<sup><a>&#91;2&#93;</a></sup> </p><p><br> </p> <h2><span></span><span>근대 미국의 신학자들</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4><span></span><span><a>아더 태펀 피어선</a></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p>A.T.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 1837-1911)은 <a>베이컨</a>의 귀납법적 방법을 통하여 성경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자신의 신학적 방법으로서 신학적 철학을 만들었다. 피어선은 성경을 바르게 연구하는 것을 자기의 신학연구에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신학을 올바르게 탐구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법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논리적 체계를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베이컨의 경험주적 귀납법적 논증 방법이었다. 베이컨이 주장한 관찰과 분석, 그리고 입증을 통하여 이론을 유출하듯 피어선 역시 이런 방식을 통하여 신학적 철학이라는 그의 독특한 신학연구 방법론을 만들었다. 이런 신학방법을 통하여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그의 신학의 목적을 이루게 되었다. 철학적 신학이란 성경 그 자체(ipso facto)가 진리를 증거하고 모든 것들을 성경에 맞추어서 검증하여 성경적 일치와 조화를 이루는 성경신학적 방법이다. 신학의 탐구는 성경을 왜곡하지 않고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오류가 없는 성경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참된 성경의 진리를 증거하는 목적에 도전을 주었다. 성경의 하나님을 왜곡없이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성경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증거하는 그의 신학적 철학과 성경신학적 방법이야말로 피어선의 신학을 가장 가치있는 공헌이다.<sup><a>&#91;3&#93;</a></sup> </p><p><br> </p> <h2><span></span><span>정통주의 신학자들</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바빙크의 신학방법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h5><span></span><span>* 종합적인 방법(Synthetic Method)</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5> <p><a>헤르만 바빙크</a>는 교의학의 방법(Methode der Dogmatiek)에 관하여 3 요소를 말한다. de Heilige Schrift, de belijdenis der kerk en het Christelkk bewustzijn </p> <ul><li>(성경, 신조, 기독교적인 의식).</li></ul> <p>계시인 성경이 신학 방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 이 세 요소가 종합적인 방법으로 상호 밀접하게 관련되어야 한다. 종합적인 방법은 신학적 방법 혹은 권위의 방법으로 말해지는데, 이 방법은 성경에 있는 신적 자기 계시로부터 신학을 인출하는 것이다. </p> <h2><span></span><span>현대신학자들의 신학방법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이들의 공통점은 감정 또는 이성(reason)과 같은 인간적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p> <ul><li><a>슐라이에르마허</a></li></ul> <p>인간의 체험, 인간의 감정을 신학의 방법으로 사용했다. </p> <ul><li><a>칼 바르트</a></li></ul> <p>초기에 변증신학을 사용하고, 후기에 말씀의 신학을 말한다. 변증신학이란 키에르케고르의 역설의 원리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역설은 모순(역설)을 말하면서 사상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키에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을 사용한다. 반어법이란 무지를 드러내는 참된 진리를 깨닫게 한다. 이 방법은 역설적으로 전개한다. </p> <ul><li><a>불트만</a></li></ul> <p>비신화화 방법 - 성경은 고대인의 신화적인 사관에서 기록되었기에 신화적이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비신화화 작업이다. 양식사학파에서 배웠다. - 구전. 전설이 어떻게 전승되어 성경의 형태를 갖게 되었는지를 연구. 역사성을 찾으려고 한다.&#160;<a>실존주의</a>&#160;철학에 의한 해석방법을 도한다. </p> <ul><li><a>폴 틸리히</a></li></ul> <p>상관의 방법 - 현 상황에서 이성이 질문하고 계시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신학을 설명한다. 폴 틸리히의 상호관계의 방법은 기독교 신앙의&#160; 내용을 실존적으로 질문하고 이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대답을 통하여 서로 상호의존(interdependence)시키는 것이다. 신의 대답으로부터 출발하는 바르트와는 달리 틸리히의 출발점은 인간의&#160; 물음이다. 인간의 물음이 무엇인가에&#160; 대한 그의 탐구는 그로 하여 인간&#160; 문화의 광범위한 영역을 탐구하게&#160; 만든다. 그 까닭은 그는 인간은 문화적 형식들 속에서 스스로를 가장 훌륭하게 드러낸다고&#160;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문화적 형식들로&#160; 둘러싸여 있으며, 이 문화적 형식들을 통하여&#160;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이해, 관심 및 불안들을 표현한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문화의 종교의 형식이다. </p> <ul><li>존 맥꽈리(John Macquarrie)</li></ul> <dl><dd>서술 - 현상학적인 접근 방법으로 할 것.</dd> <dd>해석 - 오늘날 우리를 위한 해석이 필요하다.</dd> <dd>적용 - 믿음의 공동체의 삶에 적용.</dd></dl> <ul><li>카프만(Kaufman)</li></ul> <p>상상적인 건설(imaginative construction). </p> <ol><li>현상적인 서술- 현대 체험의 다양성을 세계의 개념 안에서 모아야하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상관이 되고 의미가 있는 인류학적 우주적인 인식을 포함한다.</li> <li>상상과 건설적인 생각을 통한 하나님의 이미지/개념을 소개.</li> <li>현대 체험은 하나님의 관점에 의해서 이해되어야 즉 신학적으로 이해.</li></ol> <p><br> </p> <h3><span></span><span>기독교 유신론적 방법(The Christian Theistic Method)</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ul><li><a>코넬리우스 밴틸</a></li></ul> <p>반틸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모든 유한한 존재와 지식의 근원이시며, 절대적 자의식적 존재이심을 전제해야 한다. 이 말은 명령인데, 비 기독교적인 방법과 구별되는 것이다. 유신론적 방법은 하나님을 지식의 존재 원리로(Principium Essendi of knowledge) 보는 것이다.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a>주승민, 어거스틴의 신학방법론, 신학과 선교 22권 (1997): 25-286</a></span> </li> <li><span><a>↑</a></span> <span>Tony Lane, Christian Thought, 김응국 역, 『복음주의 입장에서 본 기독교 사상사』 (서울: 나침반, 1987), 192-93</span> </li> <li><span><a>↑</a></span> <span> [<a>http://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232439967</a> "안명준, A. T.피어선 박사의 신학방법론&#160;: 그의 신학적 철학의 특징들", 한국개혁신학, 50 (2016) ISSN 1229-1099]<sup>&#91;<a>깨진 링크</a>(<a>과거 내용 찾기</a>)&#93;</sup></span> </li> </ol></div></div>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신학방법론&amp;oldid=24161162</a>"</div> <div><div><a>분류</a>: <ul><li><a>기독교 용어</a></li><li><a>신학</a></li><li><a>방법</a></li><li><a>연구 방법</a></li><li><a>신학용어</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ul> <div><span><a>링크 추가</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5월 7일 (화) 11: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스콜라 신학자인 롬바르드는 신앙을 몇가지 단계로 구분하였는가
세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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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콜라 신학자인 롬바르드는 신앙을 몇가지 단계로 구분하였는가", "<명제집>을 펴낸 스콜라 신학자는?", "명제집을 저술한 스콜라 신학자는?", "피터가 1147년에서 1151년 사이 저술한 책은?", "경험주적 귀납법적 논증방법을 만든 학자는?", "귀납법적 방법을 통하여 성경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신학적 철학을 만든 사람은?", "A.T. 피어선이 만들어낸 신학연구 방법론은?", "성경 그 자체가 진리이며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해 검증하는 철학적 신학 연구법은?" ]
<!DOCTYPE html> 신학방법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신학방법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신학 방법론이란 기독교 신학을 진술하고 논증하며 변증하는데 사용하는 방법론을 말한다. 신학의 중요한 원리를 사용하여 정당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성경적 신학적 논리적 방식의 도구들을 의미한다. 목차 1 어거스틴의 신학 방법론 2 롬바르드의 신학방법론 3 근대 미국의 신학자들 3.1 아더 태펀 피어선 4 정통주의 신학자들 4.1 바빙크의 신학방법론 4.1.1 * 종합적인 방법(Synthetic Method) 5 현대신학자들의 신학방법론 5.1 기독교 유신론적 방법(The Christian Theistic Method) 6 각주 7 각주 어거스틴의 신학 방법론[편집] 어거스틴의 신학방법론은 Credo ut intelligam(신앙은 찾고 지성은 이해한다)이다. 믿음으로 시작하고 이성으로 이해하는 방식이다. 플라톤주의, 신플라톤주의을 올바르게 활용하여 성경적 신학을 이루어었다.어거스틴의 신학방법론은 져스틴의 방법과 터툴리안의 방법을 결합하고 종합했다. 저스틴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도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한다.플라톤과 소크라테스가 기독교인이라는 말은 모든 지식, 지성은 로고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모세의 지식이든,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지식이든 로고스는 만세 전부터 있었다. 태초부터 계신 로고스가 모든 지식을 파생시켰는데, 그 로고스가 육체로 태어났다는 주장이다. 그 주장에 반기를 든 사람이 터툴리안이다. 그는 '예루살렘과 아테네가 기독교와 무슨 상관이 있느뇨'라고 외쳤다. 이와같이 어거스틴은 이성적인 관점은 저스틴에게 신앙적인 관점은 터툴리안으로 부터 영향을 받아 변증법적 종합을 통하여 그의 신학방법론을 만들었다.[1][1] 롬바르드의 신학방법론[편집] 스콜라 신학자였던 롬바르드의 저서 『명제집』(Libri Quatuor Sententiarum)은 필리프 멜란히톤의 『신학총론』이전까지 신학의 주교재로 사용되었다. 롬바르드를 읽지 않고는 12세기 유럽의 신학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는 신앙을 세 단계로 구분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이 참임을 믿는 것, 둘째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믿는 것, 셋째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으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피터의 주요 공헌은 1147년에서 1151년 사이에 씌어진 『4권의 명제집』(Four Books of Sentences)이다. 이 책은 성경, 교부, 또한 기타 다른 권위 있는 사람들의 글을 뽑아 엮은 것이다. 롬바르드의 방법은 피에르 아벨라르의 방법과 유사했다. 즉, 그도 충돌하는 두 권위 사이를 조정하기 위해 이성, 변증법, 논리 등을 사용했다. 그의 목표는 자기 자신의 새로운 생각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확립되는 권위에 근거하여 진리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그는 현재 로마가톨릭의 표준이 된 7성례를 최초로 작성한 사람으로 1439년의 플로렌스 종교회의(the Council of Florence)에서 정통으로 인정되었다.[2] 근대 미국의 신학자들[편집] 아더 태펀 피어선[편집] A.T. 피어선(Arthur Tappan Pierson, 1837-1911)은 베이컨의 귀납법적 방법을 통하여 성경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자신의 신학적 방법으로서 신학적 철학을 만들었다. 피어선은 성경을 바르게 연구하는 것을 자기의 신학연구에 평생의 과제로 삼았다. 신학을 올바르게 탐구한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방법의 기초가 될 수 있는 논리적 체계를 찾았는데 그것이 바로 베이컨의 경험주적 귀납법적 논증 방법이었다. 베이컨이 주장한 관찰과 분석, 그리고 입증을 통하여 이론을 유출하듯 피어선 역시 이런 방식을 통하여 신학적 철학이라는 그의 독특한 신학연구 방법론을 만들었다. 이런 신학방법을 통하여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는 그의 신학의 목적을 이루게 되었다. 철학적 신학이란 성경 그 자체(ipso facto)가 진리를 증거하고 모든 것들을 성경에 맞추어서 검증하여 성경적 일치와 조화를 이루는 성경신학적 방법이다. 신학의 탐구는 성경을 왜곡하지 않고 정직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오류가 없는 성경을 철저하게 분석하고 참된 성경의 진리를 증거하는 목적에 도전을 주었다. 성경의 하나님을 왜곡없이 사실 그대로 보여주고 성경은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증거하는 그의 신학적 철학과 성경신학적 방법이야말로 피어선의 신학을 가장 가치있는 공헌이다.[3] 정통주의 신학자들[편집] 바빙크의 신학방법론[편집] * 종합적인 방법(Synthetic Method)[편집] 헤르만 바빙크는 교의학의 방법(Methode der Dogmatiek)에 관하여 3 요소를 말한다. de Heilige Schrift, de belijdenis der kerk en het Christelkk bewustzijn (성경, 신조, 기독교적인 의식). 계시인 성경이 신학 방법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야 한다. 이 세 요소가 종합적인 방법으로 상호 밀접하게 관련되어야 한다. 종합적인 방법은 신학적 방법 혹은 권위의 방법으로 말해지는데, 이 방법은 성경에 있는 신적 자기 계시로부터 신학을 인출하는 것이다. 현대신학자들의 신학방법론[편집] 이들의 공통점은 감정 또는 이성(reason)과 같은 인간적 철학에 기초하고 있다. 슐라이에르마허 인간의 체험, 인간의 감정을 신학의 방법으로 사용했다. 칼 바르트 초기에 변증신학을 사용하고, 후기에 말씀의 신학을 말한다. 변증신학이란 키에르케고르의 역설의 원리에서 영향을 받았다. 이 역설은 모순(역설)을 말하면서 사상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키에르케고르는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을 사용한다. 반어법이란 무지를 드러내는 참된 진리를 깨닫게 한다. 이 방법은 역설적으로 전개한다. 불트만 비신화화 방법 - 성경은 고대인의 신화적인 사관에서 기록되었기에 신화적이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 비신화화 작업이다. 양식사학파에서 배웠다. - 구전. 전설이 어떻게 전승되어 성경의 형태를 갖게 되었는지를 연구. 역사성을 찾으려고 한다. 실존주의 철학에 의한 해석방법을 도한다. 폴 틸리히 상관의 방법 - 현 상황에서 이성이 질문하고 계시가 답변하는 방식으로 신학을 설명한다. 폴 틸리히의 상호관계의 방법은 기독교 신앙의  내용을 실존적으로 질문하고 이에 대하여 신학적으로 대답을 통하여 서로 상호의존(interdependence)시키는 것이다. 신의 대답으로부터 출발하는 바르트와는 달리 틸리히의 출발점은 인간의  물음이다. 인간의 물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탐구는 그로 하여 인간  문화의 광범위한 영역을 탐구하게  만든다. 그 까닭은 그는 인간은 문화적 형식들 속에서 스스로를 가장 훌륭하게 드러낸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간은 문화적 형식들로  둘러싸여 있으며, 이 문화적 형식들을 통하여  인간은 자신과 자신의 이해, 관심 및 불안들을 표현한다고 한다. 그에게 있어서 문화의 종교의 형식이다. 존 맥꽈리(John Macquarrie) 서술 - 현상학적인 접근 방법으로 할 것. 해석 - 오늘날 우리를 위한 해석이 필요하다. 적용 - 믿음의 공동체의 삶에 적용. 카프만(Kaufman) 상상적인 건설(imaginative construction). 현상적인 서술- 현대 체험의 다양성을 세계의 개념 안에서 모아야하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상관이 되고 의미가 있는 인류학적 우주적인 인식을 포함한다. 상상과 건설적인 생각을 통한 하나님의 이미지/개념을 소개. 현대 체험은 하나님의 관점에 의해서 이해되어야 즉 신학적으로 이해. 기독교 유신론적 방법(The Christian Theistic Method)[편집] 코넬리우스 밴틸 반틸의 방법으로 하나님이 모든 유한한 존재와 지식의 근원이시며, 절대적 자의식적 존재이심을 전제해야 한다. 이 말은 명령인데, 비 기독교적인 방법과 구별되는 것이다. 유신론적 방법은 하나님을 지식의 존재 원리로(Principium Essendi of knowledge) 보는 것이다. 각주[편집] ↑ 주승민, 어거스틴의 신학방법론, 신학과 선교 22권 (1997): 25-286 ↑ Tony Lane, Christian Thought, 김응국 역, 『복음주의 입장에서 본 기독교 사상사』 (서울: 나침반, 1987), 192-93 ↑ [http://academic.naver.com/article.naver?doc_id=232439967 "안명준, A. T.피어선 박사의 신학방법론 : 그의 신학적 철학의 특징들", 한국개혁신학, 50 (2016) ISSN 1229-1099][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각주[편집]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신학방법론&amp;oldid=24161162" 분류: 기독교 용어신학방법연구 방법신학용어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7일 (화) 11: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문단 번호 | 핵심 내용 | 키워드 | |------------|--------------------------------------------------------------------------|---------------------------------| | 1 | 신학 방법론의 정의: 기독교 신학을 논증하고 변증하는 방법론 | 신학 방법론, 기독교 신학 | | 2 | 어거스틴의 신학 방법론: 믿음과 이성을 결합한 접근 | 어거스틴, Credo ut intelligam | | 3 | 롬바르드의 신학 방법론: 신앙의 세 단계 구분 및 권위의 조정 | 롬바르드, 명제집 | | 4 | 아더 태펀 피어선의 신학적 방법: 베이컨의 귀납법적 방법 활용 | 피어선, 귀납법 | | 5 | 바빙크의 신학 방법론: 성경, 신조, 기독교적 의식의 종합적 접근 | 바빙크, 종합적인 방법 | | 6 | 현대 신학자들의 방법론: 감정과 이성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접근 | 현대신학, 감정, 이성 | | 7 | 기독교 유신론적 방법: 하나님을 지식의 근원으로 보는 접근 | 유신론, 지식의 원리 | ### 글의 흐름 요약 문서는 신학 방법론의 정의로 시작하여, 역사적 신학자들의 다양한 방법론을 소개합니다. 어거스틴과 롬바르드의 전통적인 접근을 설명한 후, 근대 미국의 신학자 아더 태펀 피어선의 귀납적 방법론을 다룹니다. 이어서 정통주의 신학자인 바빙크의 종합적 방법론을 설명하고, 마지막으로 현대 신학자들의 다양한 방법론을 소개하며 기독교 유신론적 방법으로 마무리합니다. 전체적으로 신학 방법론의 발전과 다양성을 보여주는 구조입니다.
이 글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표 형식으로 요약해줘. 예: {문단 번호, 핵심 내용, 키워드}. 글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요약 마지막에 간단히 설명해줘.
스테고케라스
https://ko.wikipedia.org/wiki/스테고케라스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스테고케라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스테고케라스</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tbody><tr> <td colspan="2"> <div><div><img></div><span><span><a><img></a></span><big><big><b>스테고케라스</b></big></big></span></div> </td></tr> <tr> <th>화석 범위:<br><a>백악기</a> 후기, 7,750만년-7,500만년 전 </th></tr> <tr> <td><a><img></a><br>스테고케라스의 골격도 </td></tr> <tr> <th><b><a>생물 분류</a></b> </th></tr> <tr> <td> <table> <tbody><tr> <td>역: </td> <td><a>진핵생물</a> </td></tr> <tr> <td>계: </td> <td><a>동물계</a> </td></tr> <tr> <td>문: </td> <td><a>척삭동물문</a> </td></tr> <tr> <td>강: </td> <td><a>파충강</a> </td></tr> <tr> <td>아강: </td> <td><a>이궁아강</a> </td></tr> <tr> <td>상목: </td> <td><a>공룡상목</a> </td></tr> <tr> <td>목: </td> <td><a>†</a> <a>조반목</a> </td></tr> <tr> <td>아목: </td> <td><a>†</a> <a>각각아목</a> </td></tr> <tr> <td>하목: </td> <td><a>†</a> <a>후두하목</a> </td></tr> <tr> <td>과: </td> <td><a>†</a> <a>파키케팔로사우루스과</a> </td></tr> <tr> <td>속: </td> <td><a>†</a> <b>스테고케라스속</b><br>(<i>Stegoceras</i>) </td></tr> </tbody></table> </td></tr> <tr> <th><b>종</b> </th></tr> <tr> <td> <ul><li><a>†</a> <i>S. validum</i> <small>Lambe, 1902</small></li> <li><a>†</a> <i>S. novomexicanum</i> <small>Jasinski &amp; Sullivan, 2011</small></li></ul><table> <tbody><tr><td></td></tr></tbody></table> </td></tr> <tr> <th><b><a>이명</a></b> </th></tr> <tr> <td><i>Ornatotholus</i> <small>Galton &amp; Sues, 1983</small> </td></tr></tbody></table> <p><b>스테고케라스</b> (<i>Stegoceras</i> 뿔이 있는 지붕이라는 뜻) 는 초식성 <a>후두류</a> 공룡의 한 속으로 <a>백악기</a> 후기 현재의 <a>북아메리카</a> 에 살았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어원</span></a></li> <li><a><span>2</span> <span>특징</span></a></li> <li><a><span>3</span> <span>발견과 분류</span></a></li> <li><a><span>4</span> <span>고생물학</span></a> <ul> <li><a><span>4.1</span> <span>성적 이형성</span></a></li> <li><a><span>4.2</span> <span>공세적 행동</span></a></li> </ul> </li> <li><a><span>5</span> <span>참고문헌</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어원</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속명인 스테고케라스는 <a>고대그리스어</a>로 '지붕' 을 뜻하는 <b>스테고</b> (<i>stego-/στεγο-</i>) 와 '뿔'을 뜻하는 <b>케라스</b> (<i>ceras/κέρας</i>) 에서 온 것으로 스테고케라스는 뿔이 있는 지붕이라는 의미다. </p> <h2><span></span><span>특징</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스테고케라스의 몸길이는 약 2 미터,<sup><a>&#91;1&#93;</a></sup> 몸무게는 10 에서 40 킬로그램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sup><a>&#91;2&#93;</a></sup> 상대적으로 큰 편인 뇌는 7.6 센티미터 두께의 두 부분으로 나뉜 뼈로 된 돔 안에 들어 있었다.<sup><a>&#91;3&#93;</a></sup> 돔의 표면은 매우 매끈했으나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구멍이 있어서 뼈 내부의 통로로 연결되었다. 스테고케라스는 (최소한 <i>S. validum</i> 은) 두정-인상골(parietosquamosal)에 선반모양으로 뚜렷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고 상측두창 (supratemporal fosse) 이 열려 있으며 전두-두정골 (frontoparietal) 이 미약하게 돔을 형성하고 작은 돌기들이 후안와골과 인상골에 몰려있다.<sup><a>&#91;4&#93;</a></sup> 스테고케라스의 눈구멍은 둥글고 앞을 향해 있어 시력이 좋았으며 아마 <a>양안시</a>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빨은 작고 휜 모양으로 가장자리는 톱니형태다. 머리는 "S" 자 혹은 "U" 자 모양의 목이 지탱해준다.<sup><a>&#91;5&#93;</a></sup> 스테고케라스의 골격 일부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다른 조반류 공룡들은 보통 가지고 있지 않은 복부갈비뼈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복부갈비뼈라고 생각되었던 것은 나중에 <a>골질화</a>된 <a>힘줄</a>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sup><a>&#91;6&#93;</a></sup> 다리는 팔보다 세 배 이상 길었다. </p> <h2><span></span><span>발견과 분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길모어의 논문에 실린 알버타 대학의 스테고케라스 사진.</div></div></div> <p>스테고케라스는 로렌스 램비가 1902 년에 스테고케라스 발리둠 (<i>Stegoceras validum</i>)을 모식종으로 하여 처음 명명했다. <i>S. validum</i> 의 표본 전체 (약 40 여 점) 는 <a>캐나다</a> 알버타 주의 <a>벨리 리버 층군</a>에서 발견되었다. 대부분은 후기 <a>캄파니아절</a>, 7650만년에서 7500만년 전의 연대를 가진 <a>공룡공원층</a>(Dinosaur Park Formation)에서, 나머지는 올드맨 층 (캄파니아절 중기, 7750만년에서 7650만년) 발견되었다.<sup><a>&#91;7&#93;</a></sup> 스테고케라스는 거의 완전한 골격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다른 후두류 공룡들의 모델 역할을 했다. 1920 년대부터 1945 년까지 스테고케라스는 이빨 형태의 유사성 때문에 <a>트로오돈</a>과 가까운 관계거나 동물이명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보존상태가 좋은 화석이 발견되면서 이 생각은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sup><a>&#91;8&#93;</a></sup> 후두류에 속하는 여러 종들이 처음에는 스테고케라스의 종으로 보고되었다. 예를 들자면 <i>S. lambei</i>, <i>S. sternbergi</i>, 그리고 <i>S. breve</i> 등이 원래는 스테고케라스에 속해있다가 새로운 속인 <a>콜레피오케팔레</a>, <a>한수에시아</a> 그리고 <a>의문명</a>인 포라미나케팔레 (혹은 그 이전의 연구에서 <a>프레노케팔레</a>/<a>스파에로톨루스</a>)로 다시 분류되었다.<sup><a>&#91;4&#93;</a></sup><sup><a>&#91;7&#93;</a></sup><sup><a>&#91;9&#93;</a></sup> </p> <div><div><a><img></a> <div><div><a></a></div>상처의 흔적이 있는 두 개의 <i>S. validum</i> 두개골</div></div></div> <p>최근 <a>뉴멕시코</a>주의 <a>산후안 분지</a>에서 스테고케라스의 새 종이 보고되었다. 해당 종의 표본은 2006 년 설리반과 루카스에 의해 <i>S. validum</i> 과 유사하다고 보고된 바 있다. 스티븐 자신스키와 로버트 설리반이 2011 년 프루트랜드 층 상부와 커틀랜드층 하부에서 두 개의 완전하지 않은 후두류 두개골을 발견해 스테고케라스 노보멕시카눔(<i>Stegoceras novomexicanum</i>)이라고 명명했다. <a>완모식표본</a>인 NMMNH P-33898 은 거의 완전한 전두-두정골로 프루트랜드층 (<a>캄파니아절</a> 후기, 약 7500만 년 전) 상부의 포실 포레스트 층원에서 발견되었으며 <a>부모식표본</a>인 SMP VP-2555 는 왼쪽 전두골 일부분과 양쪽 전두골의 가장 앞쪽 부분 (역시 포실 포레스트 층원에서 발견) 에 해당하고 SMP VP-2790 는 커틀랜드층 ([[캄파니아절 후기, 약 7400만 년 전) 하부의 헌터와시 층원에서 발견된 불완전한 두정골이다.<sup><a>&#91;10&#93;</a></sup> 마히토 와타베(Mahito Watabe), 키시고 촉트바타르키(Khishigjaw Tsogtbaatar), 그리고 로버트 M. 설리반(Robert M. Sullivan)은 2011 년에 새로운 계통발생학적 분석을 시도했으나 해당 연구에서 스테고케라스가 단계통군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sup><a>&#91;11&#93;</a></sup> </p><p>아래는 에반스 외 2013 년 논문의 분지도를 수정한 것이다.<sup><a>&#91;12&#93;</a></sup> </p> <table> <tbody><tr> <td><br></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br></td> <td rowspan="2"> <p><a>완나노사우루스</a>(<i>Wannanosaurus yansiensis</i>) </p> </td></tr> <tr> <td><br> </td></tr> <tr> <td><br></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br></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br></td> <td rowspan="2"> <p><a>콜레피오케팔레</a>(<i>Colepiocephale lambei</i>) </p> </td></tr> <tr> <td><br> </td></tr> <tr> <td><br></td> <td rowspan="2"> <p><a>한수에시아</a>(<i>Hanssuesia sternbergi</i>) </p> </td></tr> <tr> <td><br> </td></tr> <tr> <td><br></td> <td rowspan="2"> <p><i><b>Stegoceras novomexicanum</b></i> </p> </td></tr> <tr> <td><br> </td></tr> <tr> <td><br></td> <td rowspan="2"> <p><b>스테고케라스 발리둠</b>(<i>Stegoceras validum</i>) </p> </td></tr> <tr> <td><br> </td></tr></tbody></table> </td></tr> <tr> <td><br> </td></tr> <tr> <td><br></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br></td> <td rowspan="2"> <p><a>고요케팔레</a>(<i>Goyocephale lattimorei</i>) </p> </td></tr> <tr> <td><br> </td></tr> <tr> <td><br></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br></td> <td rowspan="2"> <p><a>호말로케팔레</a>(<i>Homalocephale calathocercos</i>) </p> </td></tr> <tr> <td><br> </td></tr> <tr> <td><br></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br></td> <td rowspan="2"> <p><a>틸로케팔레</a>(<i>Tylocephale gilmorei</i>) </p> </td></tr> <tr> <td><br> </td></tr> <tr> <td><br></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br></td> <td rowspan="2"> <p><a>프레노케팔레</a>(<i>"Prenocephale" brevis</i>) </p> </td></tr> <tr> <td><br> </td></tr> <tr> <td><br></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br></td> <td rowspan="2"> <p><a>암토케팔레</a>(<i>Amtocephale gobiensis</i>) </p> </td></tr> <tr> <td><br> </td></tr> <tr> <td><br></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br></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br></td> <td rowspan="2"> <p><a>아크로톨루스</a>(<i>Acrotholus audeti</i>) </p> </td></tr> <tr> <td><br> </td></tr> <tr> <td><br></td> <td rowspan="2"> <p><a>프레노케팔레</a>(<i>Prenocephale prenes</i>) </p> </td></tr> <tr> <td><br> </td></tr></tbody></table> </td></tr> <tr> <td><br> </td></tr> <tr> <td><br></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br></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br></td> <td rowspan="2"> <p><a>알래스카케팔레</a>(<i>Alaskacephale gangloffi</i>) </p> </td></tr> <tr> <td><br> </td></tr> <tr> <td><br></td> <td rowspan="2"> <p><a>파키케팔로사우루스</a>(<i>Pachycephalosaurus wyomingensis</i>) </p> </td></tr> <tr> <td><br> </td></tr></tbody></table> </td></tr> <tr> <td><br> </td></tr> <tr> <td><br></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br></td> <td rowspan="2"> <p><a>스파에로톨루스</a>(<i>Sphaerotholus buchholtzae</i>) </p> </td></tr> <tr> <td><br> </td></tr> <tr> <td><br></td> <td rowspan="2"> <p><a>스파에로톨루스</a>(<i>Sphaerotholus goodwini</i>) </p> </td></tr> <tr> <td><br> </td></tr></tbody></table> </td></tr> <tr> <td><br> </td></tr></tbody></table> </td></tr> <tr> <td><br> </td></tr></tbody></table> </td></tr> <tr> <td><br> </td></tr></tbody></table> </td></tr> <tr> <td><br> </td></tr></tbody></table> </td></tr> <tr> <td><br> </td></tr></tbody></table> </td></tr> <tr> <td><br> </td></tr></tbody></table> </td></tr> <tr> <td><br> </td></tr></tbody></table> </td></tr> <tr> <td><br> </td></tr></tbody></table> </td></tr> <tr> <td><br> </td></tr></tbody></table> </td></tr> <tr> <td><br> </td></tr></tbody></table> <h2><span></span><span>고생물학</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로얄 티렐 박물관에 전시된 스테고케라스 발리둠의 골격 캐스트</div></div></div> <p>스테고케라스 발리둠은 알버타와 뉴멕시코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지리적으로 상당히 넓게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sup><a>&#91;13&#93;</a></sup> </p> <h3><span></span><span>성적 이형성</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MNH 5450 표본은 전두-두정골의 돔이 조그마한 개체로 <a>북아메리카</a>의 후두류 중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납작한 두개골을 가진 표본이었다. <a>사우스다코타</a>에서 <a>드라코렉스</a>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두개골이 납작한 후두류로는 유일하게 북아메리카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브라운과 쉴라이커의 1943 년 논문과 골턴의 1971 년 논문에서 돔의 크기가 성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주장을 하면서 AMNH 5450 이 S. validum 의 암컷일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월과 골턴의 1979 년 논문에서는 AMNH 5450 을 새로운 종인 <i>S. browni</i> 로 독립시켰고 골턴과 수에스의 1983 년 논문에서는 이것을 아예 새로운 속인 오르나토톨루스(<i>Ornatotholus</i>)로 명명했다.<sup><a>&#91;14&#93;</a></sup> AMNH&#160;5450 는 알버타 주 남부의 공룡공원 층에서 발견되었다.<sup><a>&#91;15&#93;</a></sup> 굿윈과 동료들의 1998 년 논문에서 <i>O. browni</i>가 스테고케라스의 어린 성장단계를 보여주는 표본일 수 있다고 주장했고 윌리암슨과 카는 2002 년 논문에서 오르나토톨루스가 스테고케라스의 특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스테고케라스의 어린 형태일 가능성이 있으니 오르나토톨루스를 <a>의문명</a>으로 보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2011 년 6 월, <a>PLoS ONE</a> 에 발표된 논문에서 라이언 쇼트와 여러 학자들은 스테고케라스로 분류된 여러 표본들에서 돔의 성장 단계를 분석했다. 이들의 연구에서는 오르나토톨루스가 어린 스테고케라스라는 결론이 나왔다. 현재까지 납작한 머리를 가진 오르나토톨루스 브라우니(<i>Ornatotholus browni</i>, 완모식표본은 AMNH 5450)는 스테고케라스 발리둠의 어린 형태라는 견해가 널리 (설리반 2003, 설리반과 루카스 2006, 롱리치 외 2010, 자신스키와 설리반 2011 그리고 쇼트 외 2011) 받아들여지고 있다.<sup><a>&#91;7&#93;</a></sup><sup><a>&#91;9&#93;</a></sup><sup><a>&#91;10&#93;</a></sup> </p> <h3><span></span><span>공세적 행동</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div><div><a><img></a> <div><div><a></a></div>스테고케라스 발리둠 (UA 2) 두개골 뼈의 상대적 표면 밀도</div></div></div> <p>스테고케라스 (그리고 다른 후두류 종들) 가 마지 오늘날의 <a>큰뿔양</a> 이나 <a>사향소</a>처럼 서로 박치기를 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에는 반론도 있다. 고생물학자인 카펜터는 1997 년 논문에서 스테고케라스의 둥근 돔 때문에 서로 머리를 부딪히기에는 접촉면적이 너무 작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sup><a>&#91;5&#93;</a></sup> 따라서 박치기를 하더라도 아주 정확하게 중심을 맞추지 않으면 빚맞기가 쉬웠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스테고케라스와 여타 돔을 가진 후두류 공룡들이 머리와 목, 그리고 몸통을 일직선으로 정렬하여 충격을 흡수하기는 힘들었으리라는 점이다. 이들의 목은 "S"자나 "U"자 모양으로 굽어져 있다. (스테고케라스의 척추는 두꺼운 목 근육때문에 덜 굽어있긴 하다) 카펜터는 몸통에 머리를 부딪히는 행동을 대안으로 제시하였고 돔의 두꺼운 모양이 몸통 측면에 부딪힐 때 충격을 크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sup><a>&#91;5&#93;</a></sup> 스테고케라스와 여타 후두류 공룡들이 목을 옆으로 움직이고 머리를 돌려 측면으로 충격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돔의 윗면 및 옆면의 표면적이 넓고 이곳이 부딪히는 지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sup><a>&#91;5&#93;</a></sup> 그에 따라 충격이 너무 크지 않아 상대방이 심각한 부상을 입는 것을 방지했을 것이다. 눈 위에 있는 뼈의 융기부는 머리를 부딪히는 개체의 눈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을 수 있다.<sup><a>&#91;5&#93;</a></sup> 또 스테고케라스의 몸통이 상대적으로 넓은 것은 몸통에 머리를 부딪힐 때 중요한 장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 스니블리와 시오도어는 2011 년에 스테고케라스 발리둠, 프레노케팔레 그레네스 및 몇몇 박치기를 하는 <a>우제류</a>들의 두개골을 CT 스캔하여 연구했다. 이들은 스테고케라스의 두개골이 박치기를 하기에 알맞은 구조였다는 것을 밝혔다.<sup><a>&#91;16&#93;</a></sup> 스테고케라스 두개골의 돔 한가운데 밀도가 높은 별도의 층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이 뇌를 잘 보호했을 것으로 보인다. </p> <h2><span></span><span>참고문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ol> <li><span><a>↑</a></span> <span><cite>Palmer, D., 편집. (1999). <i>The Marshall Illustrated Encyclopedia of Dinosaurs and Prehistoric Animals</i>. London: Marshall Editions. 136쪽. <a>ISBN</a>&#160;<a>1-84028-152-9</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Peczkis, J. 1995. Implications of Body-Mass Estimates for Dinosaurs. JVP. Vol. 14(4):520-533</span> </li> <li><span><a>↑</a></span> <span><a>Dinosaurs from A-Z</a> DinoDictionary.com</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cite>Robert M. Sullivan (2003). &#8220;Revision of the dinosaur <i>Stegoceras</i> Lambe (Ornithischia, Pachycephalosauridae)&#8221;. <i>Journal Of Vertebrate Paleontology</i> <b>23</b> (1): 181–207. <a>doi</a>:<a>10.1671/0272-4634(2003)23&#91;181:rotdsl&#93;2.0.co;2</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 <sup><a>마</a></sup></span> <span><cite><a>Carpenter, Kenneth</a> (1997년 12월 1일). <a>&#8220;Agonistic behavior in pachycephalosaurs (Ornithischia: Dinosauria): a new look at head-butting behavior&#8221;</a> <span>(pdf)</span>. <i>Contributions to Geology</i> <b>32</b> (1): 19–25.</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Claessens, Leon P.A.M. (March 2004). &#8220;Dinosaur gastralia: origin, morphology, and function&#8221;. <i>Journal of Vertebrate Paleontology</i> <b>24</b> (1): 89–106. <a>doi</a>:<a>10.1671/A1116-8</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span> <span><cite>Ryan K. Schott, David C. Evans, Mark B. Goodwin, John R. Horner, Caleb Marshall Brown, Nicholas R. Longrich (2011). &#8220;Cranial Ontogeny in <i>Stegoceras validum</i> (Dinosauria: Pachycephalosauria): A Quantitative Model of Pachycephalosaur Dome Growth and Variation&#8221;. <i>PLoS ONE</i> <b>6</b> (6): e21092. <a>Bibcode</a>:<a>2011PLoSO...6E1092S</a>. <a>doi</a>:<a>10.1371/journal.pone.0021092</a>.</cite><span><span>&#160;</span></span><span> CS1 관리 - 여러 이름 (<a>링크</a>)</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Glut, Donald F.</a> (1997). &#12296;Troodon&#12297;. &#12298;Dinosaurs: The Encyclopedia&#12299;. Jefferson, North Carolina: McFarland &amp; Co. 933–938쪽. <a>ISBN</a>&#160;<a>0-89950-917-7</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cite>Longrich, N.R., Sankey, J., and Tanke, D. (2010). &#8220;<i>Texacephale langstoni</i>, a new genus of pachycephalosaurid (Dinosauria: Ornithischia) from the upper Campanian Aguja Formation, southern Texas, USA&#8221;. <i>Cretaceous Research</i> <b>31</b> (2): 274–284. <a>doi</a>:<a>10.1016/j.cretres.2009.12.002</a>.</cite><span><span>&#160;</span></span><span> CS1 관리 - 여러 이름 (<a>링크</a>)</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cite>Steven E. Jasinski and Robert M. Sullivan (2011). <a>&#8220;Re-evaluation of pachycephalosaurids from the Fruitland-Kirtland transition (Kirtlandian, late Campanian), San Juan Basin, New Mexico, with a description of a new species of <i>Stegoceras</i> and a reassessment of <i>Texascephale langstoni</i>&#8221;</a> <span>(PDF)</span>. <i>Fossil Record 3. New Mexico Museum of Natural History and Science, Bulletin</i> <b>53</b>: 202–215.</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Mahito Watabe, Khishigjaw Tsogtbaatar and Robert M. Sullivan (2011). <a>&#8220;A new pachycephalosaurid from the Baynshire Formation (Cenomanian-late Santonian), Gobi Desert, Mongolia&#8221;</a> <span>(PDF)</span>. <i>Fossil Record 3. New Mexico Museum of Natural History and Science, Bulletin</i> <b>53</b>: 489–497.</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Evans, D. C.; Schott, R. K.; Larson, D. W.; Brown, C. M.; Ryan, M. J. (2013). &#8220;The oldest North American pachycephalosaurid and the hidden diversity of small-bodied ornithischian dinosaurs&#8221;. &#12298;Nature Communications&#12299; <b>4</b>: 1828. <a>Bibcode</a>:<a>2013NatCo...4E1828E</a>. <a>PMID</a>&#160;<a>23652016</a>. <a>doi</a>:<a>10.1038/ncomms2749</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Sullivan, R.M. and S.G. Lucas. (2006) "The pachycephalosaurid dinosaur Stegoceras validum from the Upper Cretaceous Fruitland Formation, San Juan Basin, New Mexico". <i>New Mexico Museum of Natural History and Science Bulletin</i> 35:329-330.</span> </li> <li><span><a>↑</a></span> <span><cite>Galton, P. M. and H.-D. Sues (1983). &#8220;New data on pachycephalosaurid dinosaurs (Reptilia: Ornithischia) from North America&#8221;. <i>Canadian Journal of Earth Science</i> <b>20</b>: 462–472. <a>doi</a>:<a>10.1139/e83-043</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Sues, H.-D. and Galton, P. M. (1987). &#8220;Anatomy and classification of the North American Pachycephalosauria (Dinosauria: Ornithischia)&#8221;. <i>Palaeontographica Abteilung A</i> <b>198</b>: 1–40.</cite><span><span>&#160;</span></span><span> CS1 관리 - 여러 이름 (<a>링크</a>)</span></span> </li> <li><span><a>↑</a></span> <span>Snively E, Theodor JM (2011) "Common Functional Correlates of Head-Strike Behavior in the Pachycephalosaur Stegoceras validum (Ornithischia, Dinosauria) and Combative Artiodactyls". <i>PLoS ONE</i> 6(6): e21422. <a>[1]</a> <a>doi</a> <a>10.1371/journal.pone.0021422</a></span> </li> </ol></div> <div><table><tbody><tr><th><a>생물 분류 식별자</a></th><td><div> <ul><li><span><a>Wd</a>: <span><span><a>Q134191</a></span></span></span></li> <li><span><a>EoL</a>: <span><a>4531853</a></span></span></li> <li><span><a>화석연구데이터베이스</a>: <span><a>38787</a></span></span></li> <li><span><a>GBIF</a>: <span><a>4823080</a></span></span></li> <li><span>IRMNG: <span><a>1300986</a></span></span></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스테고케라스&amp;oldid=22380360</a>"</div> <div><div><a>분류</a>: <ul><li><a>백악기의 공룡</a></li><li><a>북아메리카의 공룡</a></li><li><a>후두하목</a></li><li><a>1902년 기재된 화석 분류군</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CS1 관리 - 여러 이름</a></li><li><a>From 변수가 없는 생물 분류 식별자</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li><a>위키생물종</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العربية</a></li><li><a>Català</a></li><li><a>Čeština</a></li><li><a>Deutsch</a></li><li><a>English</a></li><li><a>Esperanto</a></li><li><a>Español</a></li><li><a>فارسی</a></li><li><a>Français</a></li><li><a>עברית</a></li><li><a>Hrvatski</a></li><li><a>Magyar</a></li><li><a>Italiano</a></li><li><a>日本語</a></li><li><a>Қазақша</a></li><li><a>Bahasa Melayu</a></li><li><a>Nederlands</a></li><li><a>ଓଡ଼ିଆ</a></li><li><a>Polski</a></li><li><a>Português</a></li><li><a>Русский</a></li><li><a>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a></li><li><a>Simple English</a></li><li><a>Slovenčina</a></li><li><a>Svenska</a></li><li><a>Tiếng Việt</a></li><li><a>中文</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8년 9월 13일 (목) 09:5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스테고케라스라고 이름 붙인 사람은 누구인가?
로렌스 램비
null
94133
11,106
[ "스테고케라스라고 이름 붙인 사람은 누구인가?", "캐나다 알버타 주의 밸리 리버 층군에서 발견된 S. validum의 표본 전체는 약 몇 점인가?", "스테고케라스라는 이름으로 명명한 사람은?", "스테고케라스의 표본 전체가 최초로 발견된 국가는?", "이빨 형태의 유사성 때문에 스테고케라스와 비슷하거나 혹은 같다고 오해를 받은 공룡의 이름은?", "스테고케라스라는 이름을 처음으로 명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스테고케라스가 트로오돈과 가까운 관계라고 판단했던 근거는 무엇인가?", "최근 뉴멕시코주의 산후안 분지에서 발견된 새 종의 표본은 무엇과 비슷하다고 보고되었는가?", "2096년 S. validum과 유사한 스테고케라스를 보고한 두 사람의 이름은?", "스테고케라스의 새로운 종이 발견된 곳은 어디인가?", "스테고케라스의 새로운 종이 S. validum과 유사하다고 보고한 사람은 누구인가?", "AMNH 5450은 어디서 발견되었는가?", "사우스다코타를 제외하고 두개골이 납작한 표본이 발견된 지역은?", "AMNH 5450 표본 외에도 두개골이 닙작한 공룡의 이름은?", "AMNH 5450 표본에 대해 골턴과 수에스가 논문에서 명명한 이름은 무엇인가? ", "스니블리와 시오도어는 CT스캔 연구를 통해 스테고케라스의 두개골이 무엇을 하기에 알맞은 구조라는 것을 밝혔는가?", "1997년 논문에서 스테고케라스의 둥근 돔 때문에 서로 박치기를 하기에는 접촉면적이 너무 작았을거라고 주장한 학자는 누구인가?", "스테고케라스의 박치기와 관련된 주장에 반론을 낸 학자의 이름은?", "스테고케라스의 두개골 연구 결과 박치기를 하기 알맞은 구조였음을 밝힌 두 사람은?", "스테고케라스의 둥근 돔 때문에 서로 머리 부딪히기에 접촉면이 작았을꺼라고 주장했던 사람은? ", "스테고카라스의 두개골이 박치기 하기에 알맞은 구조였다는 것을 밝힌 사람들은? " ]
<!DOCTYPE html> 스테고케라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테고케라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tbody><tr> <td colspan="2"> 스테고케라스 </td></tr> <tr> <th>화석 범위:백악기 후기, 7,750만년-7,500만년 전 </th></tr> <tr> <td>스테고케라스의 골격도 </td></tr> <tr> <th>생물 분류 </th></tr> <tr> <td> <table> <tbody><tr> <td>역: </td> <td>진핵생물 </td></tr> <tr> <td>계: </td> <td>동물계 </td></tr> <tr> <td>문: </td> <td>척삭동물문 </td></tr> <tr> <td>강: </td> <td>파충강 </td></tr> <tr> <td>아강: </td> <td>이궁아강 </td></tr> <tr> <td>상목: </td> <td>공룡상목 </td></tr> <tr> <td>목: </td> <td>† 조반목 </td></tr> <tr> <td>아목: </td> <td>† 각각아목 </td></tr> <tr> <td>하목: </td> <td>† 후두하목 </td></tr> <tr> <td>과: </td> <td>† 파키케팔로사우루스과 </td></tr> <tr> <td>속: </td> <td>† 스테고케라스속(Stegoceras) </td></tr> </tbody></table> </td></tr> <tr> <th>종 </th></tr> <tr> <td> † S. validum Lambe, 1902 † S. novomexicanum Jasinski &amp; Sullivan, 2011<table> <tbody><tr><td></td></tr></tbody></table> </td></tr> <tr> <th>이명 </th></tr> <tr> <td>Ornatotholus Galton &amp; Sues, 1983 </td></tr></tbody></table> 스테고케라스 (Stegoceras 뿔이 있는 지붕이라는 뜻) 는 초식성 후두류 공룡의 한 속으로 백악기 후기 현재의 북아메리카 에 살았다. 목차 1 어원 2 특징 3 발견과 분류 4 고생물학 4.1 성적 이형성 4.2 공세적 행동 5 참고문헌 어원[편집] 속명인 스테고케라스는 고대그리스어로 '지붕' 을 뜻하는 스테고 (stego-/στεγο-) 와 '뿔'을 뜻하는 케라스 (ceras/κέρας) 에서 온 것으로 스테고케라스는 뿔이 있는 지붕이라는 의미다. 특징[편집] 스테고케라스의 몸길이는 약 2 미터,[1] 몸무게는 10 에서 40 킬로그램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2] 상대적으로 큰 편인 뇌는 7.6 센티미터 두께의 두 부분으로 나뉜 뼈로 된 돔 안에 들어 있었다.[3] 돔의 표면은 매우 매끈했으나 불규칙적으로 배열된 구멍이 있어서 뼈 내부의 통로로 연결되었다. 스테고케라스는 (최소한 S. validum 은) 두정-인상골(parietosquamosal)에 선반모양으로 뚜렷하게 튀어나온 부분이 있고 상측두창 (supratemporal fosse) 이 열려 있으며 전두-두정골 (frontoparietal) 이 미약하게 돔을 형성하고 작은 돌기들이 후안와골과 인상골에 몰려있다.[4] 스테고케라스의 눈구멍은 둥글고 앞을 향해 있어 시력이 좋았으며 아마 양안시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빨은 작고 휜 모양으로 가장자리는 톱니형태다. 머리는 "S" 자 혹은 "U" 자 모양의 목이 지탱해준다.[5] 스테고케라스의 골격 일부가 처음 발견되었을 때는 다른 조반류 공룡들은 보통 가지고 있지 않은 복부갈비뼈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복부갈비뼈라고 생각되었던 것은 나중에 골질화된 힘줄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6] 다리는 팔보다 세 배 이상 길었다. 발견과 분류[편집] 길모어의 논문에 실린 알버타 대학의 스테고케라스 사진. 스테고케라스는 로렌스 램비가 1902 년에 스테고케라스 발리둠 (Stegoceras validum)을 모식종으로 하여 처음 명명했다. S. validum 의 표본 전체 (약 40 여 점) 는 캐나다 알버타 주의 벨리 리버 층군에서 발견되었다. 대부분은 후기 캄파니아절, 7650만년에서 7500만년 전의 연대를 가진 공룡공원층(Dinosaur Park Formation)에서, 나머지는 올드맨 층 (캄파니아절 중기, 7750만년에서 7650만년) 발견되었다.[7] 스테고케라스는 거의 완전한 골격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다른 후두류 공룡들의 모델 역할을 했다. 1920 년대부터 1945 년까지 스테고케라스는 이빨 형태의 유사성 때문에 트로오돈과 가까운 관계거나 동물이명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하지만 보존상태가 좋은 화석이 발견되면서 이 생각은 틀린 것으로 판명났다.[8] 후두류에 속하는 여러 종들이 처음에는 스테고케라스의 종으로 보고되었다. 예를 들자면 S. lambei, S. sternbergi, 그리고 S. breve 등이 원래는 스테고케라스에 속해있다가 새로운 속인 콜레피오케팔레, 한수에시아 그리고 의문명인 포라미나케팔레 (혹은 그 이전의 연구에서 프레노케팔레/스파에로톨루스)로 다시 분류되었다.[4][7][9] 상처의 흔적이 있는 두 개의 S. validum 두개골 최근 뉴멕시코주의 산후안 분지에서 스테고케라스의 새 종이 보고되었다. 해당 종의 표본은 2006 년 설리반과 루카스에 의해 S. validum 과 유사하다고 보고된 바 있다. 스티븐 자신스키와 로버트 설리반이 2011 년 프루트랜드 층 상부와 커틀랜드층 하부에서 두 개의 완전하지 않은 후두류 두개골을 발견해 스테고케라스 노보멕시카눔(Stegoceras novomexicanum)이라고 명명했다. 완모식표본인 NMMNH P-33898 은 거의 완전한 전두-두정골로 프루트랜드층 (캄파니아절 후기, 약 7500만 년 전) 상부의 포실 포레스트 층원에서 발견되었으며 부모식표본인 SMP VP-2555 는 왼쪽 전두골 일부분과 양쪽 전두골의 가장 앞쪽 부분 (역시 포실 포레스트 층원에서 발견) 에 해당하고 SMP VP-2790 는 커틀랜드층 ([[캄파니아절 후기, 약 7400만 년 전) 하부의 헌터와시 층원에서 발견된 불완전한 두정골이다.[10] 마히토 와타베(Mahito Watabe), 키시고 촉트바타르키(Khishigjaw Tsogtbaatar), 그리고 로버트 M. 설리반(Robert M. Sullivan)은 2011 년에 새로운 계통발생학적 분석을 시도했으나 해당 연구에서 스테고케라스가 단계통군으로 나타나지는 않았다.[11] 아래는 에반스 외 2013 년 논문의 분지도를 수정한 것이다.[12] <table> <tbody><tr> <td></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td> <td rowspan="2"> 완나노사우루스(Wannanosaurus yansiensis) </td></tr> <tr> <td> </td></tr> <tr> <td></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td> <td rowspan="2"> 콜레피오케팔레(Colepiocephale lambei) </td></tr> <tr> <td> </td></tr> <tr> <td></td> <td rowspan="2"> 한수에시아(Hanssuesia sternbergi) </td></tr> <tr> <td> </td></tr> <tr> <td></td> <td rowspan="2"> Stegoceras novomexicanum </td></tr> <tr> <td> </td></tr> <tr> <td></td> <td rowspan="2"> 스테고케라스 발리둠(Stegoceras validum) </td></tr> <tr> <td> </td></tr></tbody></table> </td></tr> <tr> <td> </td></tr> <tr> <td></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td> <td rowspan="2"> 고요케팔레(Goyocephale lattimorei) </td></tr> <tr> <td> </td></tr> <tr> <td></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td> <td rowspan="2"> 호말로케팔레(Homalocephale calathocercos) </td></tr> <tr> <td> </td></tr> <tr> <td></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td> <td rowspan="2"> 틸로케팔레(Tylocephale gilmorei) </td></tr> <tr> <td> </td></tr> <tr> <td></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td> <td rowspan="2"> 프레노케팔레("Prenocephale" brevis) </td></tr> <tr> <td> </td></tr> <tr> <td></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td> <td rowspan="2"> 암토케팔레(Amtocephale gobiensis) </td></tr> <tr> <td> </td></tr> <tr> <td></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td> <td rowspan="2"> 아크로톨루스(Acrotholus audeti) </td></tr> <tr> <td> </td></tr> <tr> <td></td> <td rowspan="2"> 프레노케팔레(Prenocephale prenes) </td></tr> <tr> <td> </td></tr></tbody></table> </td></tr> <tr> <td> </td></tr> <tr> <td></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td> <td rowspan="2"> 알래스카케팔레(Alaskacephale gangloffi) </td></tr> <tr> <td> </td></tr> <tr> <td></td> <td rowspan="2"> 파키케팔로사우루스(Pachycephalosaurus wyomingensis) </td></tr> <tr> <td> </td></tr></tbody></table> </td></tr> <tr> <td> </td></tr> <tr> <td></td> <td rowspan="2"> <table> <tbody><tr> <td></td> <td rowspan="2"> 스파에로톨루스(Sphaerotholus buchholtzae) </td></tr> <tr> <td> </td></tr> <tr> <td></td> <td rowspan="2"> 스파에로톨루스(Sphaerotholus goodwini) </td></tr> <tr> <td> </td></tr></tbody></table> </td></tr> <tr> <td> </td></tr></tbody></table> </td></tr> <tr> <td> </td></tr></tbody></table> </td></tr> <tr> <td> </td></tr></tbody></table> </td></tr> <tr> <td> </td></tr></tbody></table> </td></tr> <tr> <td> </td></tr></tbody></table> </td></tr> <tr> <td> </td></tr></tbody></table> </td></tr> <tr> <td> </td></tr></tbody></table> </td></tr> <tr> <td> </td></tr></tbody></table> </td></tr> <tr> <td> </td></tr></tbody></table> </td></tr> <tr> <td> </td></tr></tbody></table> 고생물학[편집] 로얄 티렐 박물관에 전시된 스테고케라스 발리둠의 골격 캐스트 스테고케라스 발리둠은 알버타와 뉴멕시코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지리적으로 상당히 넓게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3] 성적 이형성[편집] AMNH 5450 표본은 전두-두정골의 돔이 조그마한 개체로 북아메리카의 후두류 중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납작한 두개골을 가진 표본이었다. 사우스다코타에서 드라코렉스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두개골이 납작한 후두류로는 유일하게 북아메리카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브라운과 쉴라이커의 1943 년 논문과 골턴의 1971 년 논문에서 돔의 크기가 성에 따라 차이가 난다는 주장을 하면서 AMNH 5450 이 S. validum 의 암컷일 것이라는 가설을 제기했다. 월과 골턴의 1979 년 논문에서는 AMNH 5450 을 새로운 종인 S. browni 로 독립시켰고 골턴과 수에스의 1983 년 논문에서는 이것을 아예 새로운 속인 오르나토톨루스(Ornatotholus)로 명명했다.[14] AMNH 5450 는 알버타 주 남부의 공룡공원 층에서 발견되었다.[15] 굿윈과 동료들의 1998 년 논문에서 O. browni가 스테고케라스의 어린 성장단계를 보여주는 표본일 수 있다고 주장했고 윌리암슨과 카는 2002 년 논문에서 오르나토톨루스가 스테고케라스의 특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으며 스테고케라스의 어린 형태일 가능성이 있으니 오르나토톨루스를 의문명으로 보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2011 년 6 월, PLoS ONE 에 발표된 논문에서 라이언 쇼트와 여러 학자들은 스테고케라스로 분류된 여러 표본들에서 돔의 성장 단계를 분석했다. 이들의 연구에서는 오르나토톨루스가 어린 스테고케라스라는 결론이 나왔다. 현재까지 납작한 머리를 가진 오르나토톨루스 브라우니(Ornatotholus browni, 완모식표본은 AMNH 5450)는 스테고케라스 발리둠의 어린 형태라는 견해가 널리 (설리반 2003, 설리반과 루카스 2006, 롱리치 외 2010, 자신스키와 설리반 2011 그리고 쇼트 외 2011) 받아들여지고 있다.[7][9][10] 공세적 행동[편집] 스테고케라스 발리둠 (UA 2) 두개골 뼈의 상대적 표면 밀도 스테고케라스 (그리고 다른 후두류 종들) 가 마지 오늘날의 큰뿔양 이나 사향소처럼 서로 박치기를 했을 수도 있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에는 반론도 있다. 고생물학자인 카펜터는 1997 년 논문에서 스테고케라스의 둥근 돔 때문에 서로 머리를 부딪히기에는 접촉면적이 너무 작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5] 따라서 박치기를 하더라도 아주 정확하게 중심을 맞추지 않으면 빚맞기가 쉬웠을 것이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스테고케라스와 여타 돔을 가진 후두류 공룡들이 머리와 목, 그리고 몸통을 일직선으로 정렬하여 충격을 흡수하기는 힘들었으리라는 점이다. 이들의 목은 "S"자나 "U"자 모양으로 굽어져 있다. (스테고케라스의 척추는 두꺼운 목 근육때문에 덜 굽어있긴 하다) 카펜터는 몸통에 머리를 부딪히는 행동을 대안으로 제시하였고 돔의 두꺼운 모양이 몸통 측면에 부딪힐 때 충격을 크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5] 스테고케라스와 여타 후두류 공룡들이 목을 옆으로 움직이고 머리를 돌려 측면으로 충격을 전달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돔의 윗면 및 옆면의 표면적이 넓고 이곳이 부딪히는 지점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5] 그에 따라 충격이 너무 크지 않아 상대방이 심각한 부상을 입는 것을 방지했을 것이다. 눈 위에 있는 뼈의 융기부는 머리를 부딪히는 개체의 눈을 보호하는 역할을 했을 수 있다.[5] 또 스테고케라스의 몸통이 상대적으로 넓은 것은 몸통에 머리를 부딪힐 때 중요한 장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을 수 있다. 스니블리와 시오도어는 2011 년에 스테고케라스 발리둠, 프레노케팔레 그레네스 및 몇몇 박치기를 하는 우제류들의 두개골을 CT 스캔하여 연구했다. 이들은 스테고케라스의 두개골이 박치기를 하기에 알맞은 구조였다는 것을 밝혔다.[16] 스테고케라스 두개골의 돔 한가운데 밀도가 높은 별도의 층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것이 뇌를 잘 보호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편집] ↑ Palmer, D., 편집. (1999). The Marshall Illustrated Encyclopedia of Dinosaurs and Prehistoric Animals. London: Marshall Editions. 136쪽. ISBN 1-84028-152-9.  ↑ Peczkis, J. 1995. Implications of Body-Mass Estimates for Dinosaurs. JVP. Vol. 14(4):520-533 ↑ Dinosaurs from A-Z DinoDictionary.com ↑ 가 나 Robert M. Sullivan (2003). “Revision of the dinosaur Stegoceras Lambe (Ornithischia, Pachycephalosauridae)”. Journal Of Vertebrate Paleontology 23 (1): 181–207. doi:10.1671/0272-4634(2003)23[181:rotdsl]2.0.co;2.  ↑ 가 나 다 라 마 Carpenter, Kenneth (1997년 12월 1일). “Agonistic behavior in pachycephalosaurs (Ornithischia: Dinosauria): a new look at head-butting behavior” (pdf). Contributions to Geology 32 (1): 19–25.  ↑ Claessens, Leon P.A.M. (March 2004). “Dinosaur gastralia: origin, morphology, and function”. Journal of Vertebrate Paleontology 24 (1): 89–106. doi:10.1671/A1116-8.  ↑ 가 나 다 Ryan K. Schott, David C. Evans, Mark B. Goodwin, John R. Horner, Caleb Marshall Brown, Nicholas R. Longrich (2011). “Cranial Ontogeny in Stegoceras validum (Dinosauria: Pachycephalosauria): A Quantitative Model of Pachycephalosaur Dome Growth and Variation”. PLoS ONE 6 (6): e21092. Bibcode:2011PLoSO...6E1092S. doi:10.1371/journal.pone.0021092.  CS1 관리 - 여러 이름 (링크) ↑ Glut, Donald F. (1997). 〈Troodon〉. 《Dinosaurs: The Encyclopedia》. Jefferson, North Carolina: McFarland &amp; Co. 933–938쪽. ISBN 0-89950-917-7.  ↑ 가 나 Longrich, N.R., Sankey, J., and Tanke, D. (2010). “Texacephale langstoni, a new genus of pachycephalosaurid (Dinosauria: Ornithischia) from the upper Campanian Aguja Formation, southern Texas, USA”. Cretaceous Research 31 (2): 274–284. doi:10.1016/j.cretres.2009.12.002.  CS1 관리 - 여러 이름 (링크) ↑ 가 나 Steven E. Jasinski and Robert M. Sullivan (2011). “Re-evaluation of pachycephalosaurids from the Fruitland-Kirtland transition (Kirtlandian, late Campanian), San Juan Basin, New Mexico, with a description of a new species of Stegoceras and a reassessment of Texascephale langstoni” (PDF). Fossil Record 3. New Mexico Museum of Natural History and Science, Bulletin 53: 202–215.  ↑ Mahito Watabe, Khishigjaw Tsogtbaatar and Robert M. Sullivan (2011). “A new pachycephalosaurid from the Baynshire Formation (Cenomanian-late Santonian), Gobi Desert, Mongolia” (PDF). Fossil Record 3. New Mexico Museum of Natural History and Science, Bulletin 53: 489–497.  ↑ Evans, D. C.; Schott, R. K.; Larson, D. W.; Brown, C. M.; Ryan, M. J. (2013). “The oldest North American pachycephalosaurid and the hidden diversity of small-bodied ornithischian dinosaurs”. 《Nature Communications》 4: 1828. Bibcode:2013NatCo...4E1828E. PMID 23652016. doi:10.1038/ncomms2749.  ↑ Sullivan, R.M. and S.G. Lucas. (2006) "The pachycephalosaurid dinosaur Stegoceras validum from the Upper Cretaceous Fruitland Formation, San Juan Basin, New Mexico". New Mexico Museum of Natural History and Science Bulletin 35:329-330. ↑ Galton, P. M. and H.-D. Sues (1983). “New data on pachycephalosaurid dinosaurs (Reptilia: Ornithischia) from North America”. Canadian Journal of Earth Science 20: 462–472. doi:10.1139/e83-043.  ↑ Sues, H.-D. and Galton, P. M. (1987). “Anatomy and classification of the North American Pachycephalosauria (Dinosauria: Ornithischia)”. Palaeontographica Abteilung A 198: 1–40.  CS1 관리 - 여러 이름 (링크) ↑ Snively E, Theodor JM (2011) "Common Functional Correlates of Head-Strike Behavior in the Pachycephalosaur Stegoceras validum (Ornithischia, Dinosauria) and Combative Artiodactyls". PLoS ONE 6(6): e21422. [1] doi 10.1371/journal.pone.0021422 <table><tbody><tr><th>생물 분류 식별자</th><td> Wd: Q134191 EoL: 4531853 화석연구데이터베이스: 38787 GBIF: 4823080 IRMNG: 1300986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스테고케라스&amp;oldid=22380360" 분류: 백악기의 공룡북아메리카의 공룡후두하목1902년 기재된 화석 분류군숨은 분류: CS1 관리 - 여러 이름From 변수가 없는 생물 분류 식별자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생물종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FrançaisעבריתHrvatskiMagyarItaliano日本語ҚазақшаBahasa MelayuNederlandsଓଡ଼ିଆ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venska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3일 (목) 09:5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서론 스테고케라스(Stegoceras)는 백악기 후기(약 7,750만 년에서 7,500만 년 전)에 현재의 북아메리카에 살았던 초식성 후두류 공룡의 한 속으로, 그 이름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여 '뿔이 있는 지붕'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 문서는 스테고케라스의 어원, 특징, 발견 및 분류, 고생물학적 연구 결과를 통해 이 공룡의 생태와 행동 양식을 탐구하고자 한다. ### 본론 1. **어원 및 특징**: 스테고케라스는 약 2미터의 몸길이와 10~40킬로그램의 몸무게를 가졌으며, 두개골의 돔 구조가 특징적이다. 이 돔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뼈 내부에 통로가 연결되어 있다. 스테고케라스는 시력이 좋고, 이빨은 작고 톱니 모양이다. 2. **발견과 분류**: 스테고케라스는 1902년 로렌스 램비에 의해 처음 명명되었으며, 캐나다 알버타 주에서 다수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후 여러 종이 스테고케라스 속으로 분류되었으나, 새로운 화석 발견으로 인해 일부는 다른 속으로 재분류되었다. 최근에는 뉴멕시코에서 새로운 종인 S. novomexicanum이 발견되었다. 3. **고생물학적 연구**: 스테고케라스는 성적 이형성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며, 두개골의 형태가 성별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또한, 스테고케라스가 서로 박치기를 하는 행동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으나,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연구자들은 스테고케라스의 두개골 구조가 박치기에 적합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이들이 서로의 머리를 부딪히는 방식으로 사회적 행동을 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 결론 스테고케라스는 그 독특한 생리적 특징과 행동 양식으로 인해 고생물학적 연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공룡의 발견과 연구는 백악기 후기의 생태계와 공룡의 사회적 행동을 이해하는 데 기여하고 있으며, 앞으로의 연구를 통해 더 많은 정보가 밝혀질 것으로 기대된다. 글쓴이는 스테고케라스의 생태적 중요성과 그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글 전체의 요지를 논리적 흐름에 맞게 정리해줘. 서론, 본론, 결론 구조로 요약해주고, 각 부분마다 글쓴이의 의도나 주장도 명확히 밝혀줘.
The_Parting_of_the_Ways
https://ko.wikipedia.org/wiki/The_Parting_of_the_Ways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The Parting of the Ways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The Parting of the Ways</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The Parting of the Ways</b>" (<a>KBS</a> 방영 제목: 〈<b>이별</b>〉)은 영국의 공상과학 텔레비전 드라마 《<a>닥터 후</a>》 <a>시즌 1</a>의 <a>열세 번째 에피소드</a>이자 마지막 에피소드이다. 2005년 6월 18일 영국에서 방영되었고 한국에서는 2005년 7월 17일에 방영되었다. 총 2부로 나뉜 줄거리의 두번째 파트로, <a>크리스토퍼 에클스턴</a>가 <a>9대 닥터</a>로 마지막으로 출연하는 동시에 <a>데이비드 테넌트</a>가 <a>10대 닥터</a>로 처음 출연하는 에피소드이다. 또 <a>잭 하크니스</a>가 닥터의 정기 동행자로 활약하는 마지막 에피소드로, 나중에 시리즈 3 마지막화인 "<a>Utopia</a>" / "<a>The Sound of Drums</a>" / "<a>Last of the Time Lords</a>"과 시리즈 4 마지막화인 "<a>The Stolen Earth</a>" / "<a>Journey's End</a>"에서 다시 출연한다. </p><p>처음 파트에 해당하는 "<a>Bad Wolf</a>"는 이에 앞서 6월 11일에 방영되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줄거리</span></a> <ul> <li><a><span>1.1</span> <span>다른 에피소드와의 연관성</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3</span> <span>외부 링크</span></a> <ul> <li><a><span>3.1</span> <span>평론</span></a></li> </ul> </li> </ul> </div> <h2><span></span><span>줄거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에피소드의 발단은 <a>달렉</a>들이 로즈에게 닥터가 다음으로 할 행동이 무엇이냐고 추궁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닥터는 달렉 함선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a>마찰 추진기</a>를 써서 <a>타디스</a> 주변에 보호막을 씌운 뒤, 함선 내부로 들어가 타디스를 실체화해 착륙시킨다. 잭은 타디스가 실체화되는 자리에 서있다가 타디스 안으로 들어온 달렉을 파괴시켜 죽이고, 둘은 달렉과 대화하기 위해 타디스 밖으로 나온다. 닥터는 달렉들을 부활시킨 것이 누구냐고 묻자, 이미 옛날에 죽은 줄 알았던 <a>달렉 황제</a>가 나타나 자신이 재건했다고 밝히자 당황한다. 게다가 달렉 황제가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는 데에서 더더욱 놀란다. 달렉 황제는 <a>시간 전쟁</a>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반쯤 망가진 함선을 타고 지구로 도망왔고, 그곳에서 게임 스테이션을 통해 선택되어 전송받은 인간들의 DNA 물질을 채취해 달렉 종족을 재건했던 것이었다. 닥터는 이 과정에서 달렉들이 인간의 특성과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동시에 천하무적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닥터와 로즈, 잭은 타디스를 타고 게임 스테이션으로 돌아가서 곧 임박한 달렉들의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p><p>잭은 추진기를 이용해 우주정거장의 맨 꼭대기 여섯 층을 보호하고 방어선을 구축한다. 닥터는 게임 스테이션의 장비로 델타파 생성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델타파는 자기 범위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죽일 수 있었지만, 완전히 충전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닥터는 로즈에게 타디스 안에 들어가서 잠깐 확인해달라고 하고, 로즈가 들어가자 갑자기 <a>소닉 스크류드라이버</a>로 타디스를 로즈의 고향 시간대로 되돌려 보낸다. 갑작스러운 일에 울먹이던 로즈 앞에 닥터가 홀로그램 메시지로 나타나서 상황 설명을 하는데, 자신은 로즈 엄마에게 로즈를 꼭 지켜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로즈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것이며, 또 달렉들이 타디스를 차지하는 일을 막기 위해 로즈를 돌려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닥터의 홀로그램은 타디스가 착륙하면 알아서 작동을 멈출 것이니까 가만 내버려 두고, 환상적인 삶을 살아달라는 말과 함께 로즈와 작별한다. 한편 달렉들이 위성 침공을 개시하고, 방어선을 손쉽게 뚫고 나가 지나가는 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인다. 그리고 닥터 앞에 달렉 황제의 모습이 화면으로 나타나, 델타파를 준비하는 닥터를 조롱한다. 알고 보니 델타파는 달렉 뿐만 아니라 지구 대부분을 쓸어버리게 되고, 닥터도 그 사실을 알면서 준비하는 것이었다. 닥터는 달렉 황제에게 인류는 어떤 수단으로라도 살아남을 테지만 달렉은 전부 말살시키게 되는 것이라고 애써 대꾸한다. </p><p>타디스가 21세기 런던으로 돌아오고, 미키와 재키도 타디스 엔진 소리를 듣고 달려와 로즈를 만나는데, 닥터가 자기를 내보냈다는 죄책감에 상심해 울고 있었다.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린 로즈는 갑자기 공터에 그려져 있는 'Bad Wolf'라는 커다란 낙서를 발견한다. 그리고 타디스가 착륙했던 곳마다 <a>배드 울프</a>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음을 떠올리고, 단순한 표시라기보다는 뭔가를 전하려는 메시지임을 깨닫는다. 로즈는 타디스 심장부에 있는 텔레파시 서킷을 통해 타디스를 조종하여 닥터에게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미키에게 타디스 심장을 여는 걸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데, 미키가 차로 수없이 당기면서 시도해봐도 열리지 않았다. 그때 재키가 등장해서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말하자, 로즈는 재키에게 자신은 <a>아빠</a>를 만난 적이 있고 아빠가 죽을 때 함께 있어줬던 "아가씨"가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남편 이야기에 마음이 약해진 재키는 결국 친구에게서 커다란 트럭을 빌려와 로즈를 돕게 된다. 트럭이 조종간의 패널을 끌어당기자 끝내 활짝 열리고, 로즈는 타디스의 심장에서 나오는 빛에 휩싸인다. 이 모습을 본 미키와 재키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타디스 문이 닫히고, 투명화하여 어디론가 가버린다. </p><p>한편 게임 스테이션에서는 달렉 군대가 꼭대기 500층까지 올라오고, 그 과정에서 잭과 린다도 사망한다. 닥터가 이제 막 델타파의 스위치를 올리려던 참에 달렉 군대가 관제실로 쳐들어온다. 처음부터 달렉을 파괴하면서 지구의 인류까지 몰살시킬 거라는 생각에 갈등하던 닥터는 결국 단념하고 만다. 달렉 황제는 그 모습을 보고 겁쟁이라면서 말살시킬 것을 명한다. 달렉이 닥터를 죽이려는 그때 갑자기 타디스가 실체화되며 착륙한다. 타디스 문이 열리고 로즈가 나타나는데 <a>시간 소용돌이</a>의 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로즈는 자신이 '배드 울프'임을 밝히고 배드 울프라는 단어를 시공간 속에 뿌려 스스로를 이곳으로 인도하게 만든다. 달렉들이 로즈를 말살하려 하지만 로즈는 달렉 광선을 가볍게 무시하고, 달렉 황제와 전 군함을 모조리 분해시켜 버린다. 닥터는 로즈에게 그대로 있으면 위험하다며 자신이 가진 힘을 포기하라고 간청하는데, 로즈는 무시하고 죽은 잭을 되살린다. 로즈가 시간 에너지로 타버리기 시작할 때쯤 닥터가 다가가 키스를 하며, 로즈가 지니고 있던 소용돌이 에너지를 전부 자신의 몸으로 옮긴다. 그리고는 에너지를 타디스로 다시 풀어 보낸 뒤, 의식을 잃은 로즈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둘은 타디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되살아난 잭은 타디스를 타지 못해 게임 스테이션에 그대로 갇히게 된다. </p><p>타디스 안에서 깨어난 로즈는 닥터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닥터는 자신이 흡수한 시간 소용돌이가 몸의 모든 세포를 파괴하고 있다고 말해 준다. 이어서 닥터가 이제 다시는 로즈를 못볼 거라고 말하면서 로즈는 혼란에 빠진다. 닥터는 이다음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할지 혼잣말하다 로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뒤로 물러서더니 노란 에너지를 내뿜으며 <a>재생성</a> 과정에 들어가 스스로 모습을 바꾸기 시작한다. 에너지가 소멸되고 몇 초 뒤 <a>10대 닥터</a>의 모습이 나타난다. 새로운 모습의 닥터는 잠시 새로 갖게 된 이빨 이야기를 하다가, 로즈에게 바르셀로나 행성에 가자고 말하며 에피소드가 끝이 난다. </p> <h3><span></span><span>다른 에피소드와의 연관성</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로즈는 <a>재키</a>에게 "<a>Father's Day</a>"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면서 재키의 협조를 얻게 된다. 닥터는 달렉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자신이 '다가오는 폭풍'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하는데, <a>버진 뉴 어드벤처</a>에서 낸 소설 &lt;<a>사랑과 전쟁</a>&gt; (Love and War, "<a>Father's Day</a>"의 각본을 맡았던 <a>폴 코넬</a> 작품)에서 처음으로 나온 호칭이기도 하다. 이 '다가오는 폭풍'이라는 호칭은 작중 <a>드라코니안</a>들이 닥터에게 붙여준 것이다.<sup><a>&#91;1&#93;</a></sup> </p><p>타디스를 움직이는 엔진 (이자 타디스의 심장부)은 살아있는 생명체와도 같으며 자의식이 있고, 그 위에 타디스 계기판이 바로 설치되어 있다는 설정은 올닥 에피소드인 〈<a>The Edge of Destruction</a>〉(1964)부터 비롯됐다.<sup><a>&#91;2&#93;</a></sup> 또 로즈가 타디스에는 방어막이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올닥 시절의 일부 에피소드에서 타디스는 상당한 방어력을 지닌 실드 생성기로 보호되어 있다는 설정이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1979년 방영된 〈<a>The Armageddon Factor</a>〉 에피소드 외 다수). 이와 더불어 〈<a>The Krotons</a>〉 (1969)에서는 타디스의 '적대행동 이동 시스템' (HADS)라는 이름의 장치가 등장하는데, 치명적인 공격이 닥쳐올 것으로 탐지될 경우 타디스를 멀리 순간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sup><a>&#91;3&#93;</a></sup> 잭이 단발 무기를 이용해 타디스 안에 들어온 달렉을 파괴하는 장면도 옛 올닥 시절의 설정과 관련이 있다. Jack destroys the Dalek in the TARDIS with his one-shot weapon. In 〈<a>The Hand of Fear</a>〉 (1976)에서 닥터는 타디스 내부가 시간적 유예 상태로 존재하여, 타디스 내부에서 무기가 발사되는 것을 막는다고 주장한다,<sup><a>&#91;4&#93;</a></sup> 다만 〈<a>Earthshock</a>〉 (1982)에서는 이 시간 유예를 유지시켜주는 장치가 작동하지 않기도 했다.<sup><a>&#91;5&#93;</a></sup> "<a>Let's Kill Hitler</a>" (2011)에서는 <a>11대 닥터</a>가 자신이 시간 유예 기능에 관해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고 확인한 바 있다.<sup><a>&#91;6&#93;</a></sup> </p><p>달렉의 제왕 (달렉의 창조자 <a>다브로스</a>)를 다룬 이야기는 〈<a>Remembrance of the Daleks</a>〉 (1988) 에피소드가 마지막이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달렉의 황제는 〈<a>The Evil of the Daleks</a>〉 (1967)에서 선보인 것과 같은 초창기 달렉의 우두머리 개념으로 되돌아간 모습이었다.<sup><a>&#91;7&#93;</a></sup> 그 사이 기간에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달렉의 우두머리는 <a>달렉 수프림</a> 내지는 다브로스였다. </p> <div><div><a><img></a> <div><div><a></a></div>달렉 황제의 모습</div></div></div> <p>달렉 황제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나는 죽을 수 없다!" (I cannot die!)인데, 〈<a>Resurrection of the Daleks</a>〉 (1984) 에피소드에서도 다브로스가 바이러스로 죽어갈 때 똑같은 대사를 한다.<sup><a>&#91;8&#93;</a></sup> 다브로스의 경우 다른 에피소드에서 살아남은 채로 다시 돌아오지만, 달렉 황제도 이 같은 전례를 따를지는 아직 지켜볼 부분으로 남아 있다. 달렉 황제는 이후로도 "<a>Doomsday</a>"에서 로즈와 닥터가 한차례 언급하고<sup><a>&#91;9&#93;</a></sup> "<a>Daleks in Manhattan</a>"에서 <a>스카로 교단</a>이 다시 한번 언급한다. 또 로즈가 "<a>School Reunion</a>"에서 <a>사라 제인</a>을 만났을 때 말해준 경험 중 하나로 언급된다.<sup><a>&#91;10&#93;</a></sup> </p><p>이 에피소드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시즌2 에피소드 〈<a>Age of Steel</a>〉에서 다시 언급된다.<sup><a>&#91;11&#93;</a></sup> 에피소드 끝부분에서 미키 스미스가 <a>제이크 시몬스</a>에게 '커다란 노란색 트럭으로 우주를 구했던 이야기'를 푸는 장면이 나오는데, 본 에피소드에서 미키가 응급차량을 이용해 타디스 계기판을 밀어당겨서 로즈가 텔레파시로 타디스를 조종할 수 있게 만든 것을 가리키는 부분이다.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ol> <li><span><a>↑</a></span> <span><cite><a>&#8220;The Parting of the Ways - Fact File&#8221;</a>. BBC<span>. 2012년 3월 27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Levine, Ian (Producer). &#12298;Over the Edge (the making of <i>The Edge of Destruction</i>)&#12299; (DVD documentary).</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a>틀:Cite serial</a></span> </li> <li><span><a>↑</a></span> <span><a>틀:Cite serial</a></span> </li> <li><span><a>↑</a></span> <span><a>틀:Cite serial</a></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Steven Moffat</a> (writer), Richard Senior (director), Marcus Wilson (producer) (2011년 8월 27일). &#12296;<a>Let's Kill Hitler</a>&#12297;. &#12298;<a>Doctor Who</a>&#12299;. 시리즈 6. 제 8회. <a>BBC</a>. <a>BBC One</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a>틀:Cite serial</a></span> </li> <li><span><a>↑</a></span> <span><a>틀:Cite serial</a></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Russell T Davies</a> (writer), <a>Graeme Harper</a> (director), <a>Phil Collinson</a> (producer) (2006년 7월 8일). &#12296;<a>Doomsday</a>&#12297;. &#12298;<a>Doctor Who</a>&#12299;. <a>BBC</a>. <a>BBC One</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Helen Raynor</a> (writer), <a>James Strong</a> (director), <a>Phil Collinson</a> (producer) (2007년 4월 21일). &#12296;<a>Daleks in Manhattan</a>&#12297;. &#12298;<a>Doctor Who</a>&#12299;. <a>BBC</a>. <a>BBC One</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a>"Transcript for Age of Steel"</a> <a>Archived</a> 2015년 11월 21일 - <a>웨이백 머신</a>, Retrieved on 17 October 2015.</span> </li> </ol></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table> <tbody><tr> <td><img></td> <td> <b><a>위키인용집</a></b>에 이 문서와<br>관련된 문서가 있습니다. <div><b><a>The Parting of the Ways</a></b></div> </td> </tr> </tbody></table> <ul><li></li> <li><a> The Parting of the Ways </a> - <a>타디스 데이터 코어 (TARDIS Data Core)</a> (<a>위키아</a> 위키)</li> <li><a>"The Parting of the Ways"</a> - <a>BBC 《닥터 후》 홈페이지</a> <b><span>(영어)</span></b></li> <li><a><i>Bad Wolf" / "The Parting Of The Ways</i></a> - <a>Doctor Who: A Brief History Of Time (Travel)</a></li> <li><a><i>Bad Wolf" / "The Parting of the Ways</i></a> - <a>Doctor Who Reference Guide</a></li> <li><cite><a>&#8220;The Parting of the Ways&#8221;</a>. <a>Outpost Gallifrey</a>. 2008년 1월 1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cite><span><span>&#160;</span></span></li> <li><b><span>(영어)</span></b> <a>The Parting of the Ways</a> – <a>TV.com</a></li> <li><i><a>Doctor Who Confidential</a></i>&#160;— Episode 13: The Final Battle</li> <li><a>"They survived through me."</a>&#160;— Episode trailer for "The Parting of the Ways"</li> <li><a>Watch the regeneration at the BBC website</a></li> <li><b><span>(영어)</span></b> <a>The Parting of the Ways</a> - <a>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a></li></ul> <h3><span></span><span>평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ul><li><b><span>(영어)</span></b> <a>〈The Parting of the Ways〉 </a> - <a>아웃포스트 갈리프레이</a> 리뷰</li> <li><b><span>(영어)</span></b> <a>〈Bad Wolf" / "The Parting of the Ways〉 </a> - <a>아웃포스트 갈리프레이</a> 리뷰</li> <li><b><span>(영어)</span></b> <a>"The Parting of the Ways" </a> 리뷰 - <a>The Doctor Who Ratings Guide</a></li> <li><b><span>(영어)</span></b> <a>"Bad Wolf" / "The Parting of the Ways" </a> 리뷰 - <a>The Doctor Who Ratings Guide</a></li></ul>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닥터 후</a> <a>에피소드</a></div></th></tr><tr><td colspan="2"><div> <ul><li><b>올드 시즌 (1963–89):</b> <a>1</a></li> <li><a>2</a></li> <li><a>3</a></li> <li><a>4</a></li> <li><a>5</a></li> <li><a>6</a></li> <li><a>7</a></li> <li><a>8</a></li> <li><a>9</a></li> <li><a>10</a></li> <li><a>11</a></li> <li><a>12</a></li> <li><a>13</a></li> <li><a>14</a></li> <li><a>15</a></li> <li><a>16</a></li> <li><a>17</a></li> <li><a>18</a></li> <li><a>19</a></li> <li><a>20</a></li> <li><a>21</a></li> <li><a>22</a></li> <li><a>23</a></li> <li><a>24</a></li> <li><a>25</a></li> <li><a>26</a></li></ul> <ul><li><a>시간의 차원</a> (1993)</li> <li><a>닥터 후</a> (1996)</li> <li><a>닥터 후와 치명적인 죽음의 저주</a> (1999)</li> <li><a>샬카의 비명</a> (2003)</li></ul> <ul><li><b>뉴 시리즈 (2005–현재):</b> <a>1</a></li> <li><a>2</a></li> <li><a>3</a></li> <li><a>4</a></li> <li><a>2008~2010 스페셜</a></li> <li><a>5</a></li> <li><a>6</a></li> <li><a>7</a></li> <li><a>2013 스페셜</a></li> <li><a>8</a></li> <li><a>9</a></li> <li><a>10</a></li> <li><a>11</a></li></ul> </div></td></tr><tr><td colspan="2"><div></div><table><tbody><tr><th><a>시리즈 1</a></th><td><div> <ul><li>"<a>Rose</a>"</li> <li>"<a>The End of the World</a>"</li> <li>"<a>The Unquiet Dead</a>"</li> <li>"<a>Aliens of London</a>" / "<a>World War Three</a>"</li> <li>"<a>Dalek</a>"</li> <li>"<a>The Long Game</a>"</li> <li>"<a>Father's Day</a>"</li> <li>"<a>The Empty Child</a>" / "<a>The Doctor Dances</a>"</li> <li>"<a>Boom Town</a>"</li> <li>"<a>Bad Wolf</a>" / "<a>The Parting of the Ways</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body></table></div>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러셀 T 데이비스</a>의 텔레비전 시리즈</div></th></tr><tr><th>작품</th><td><div> <ul><li>《<a>다크 시즌</a>》 (1991)</li> <li>《<a>센추리 펄즈</a>》 (1993)</li> <li>《<a>리벌레이션즈</a>》 (1994~96)</li> <li>《<a>스프링힐</a>》 (1996~97)</li> <li>《<a>코로네이션 스트리트: 비바 라스 베가스!</a>》 (1997)</li> <li>《<a>더 그랜드</a>》 (1997~98)</li> <li>《<a>퀴어 애즈 포크</a>》 (1999~2000)</li> <li>《<a>밥 앤 로즈</a>》 (2001)</li> <li>《<a>더 세컨드 커밍</a>》 (2003)</li> <li>《<a>마인 올 마인</a>》 (2004)</li> <li>《<a>카사노바</a>》 (2005)</li> <li>《<a>닥터 후</a>》 (2005~10)</li> <li>《<a>토치우드</a>》 (2006~11)</li> <li>《<a>사라 제인 어드벤처</a>》(2007~11)</li> <li>《<a>위저즈 vs 에일리언즈</a>》 (2012~13)</li> <li><span><a>큐컴버</a>, <a>바나나</a>, <a>토푸</a></span> (2015, 연작 시리즈)</li> <li>《<a>베리 잉글리시 스캔들</a>》 (2018)</li></ul> </div></td></tr><tr><th><b>《<a>닥터 후</a>》 에피소드</b></th><td><div> <ul><li>"<a>Roes</a>"</li> <li>"<a>The End of the World</a>"</li> <li>"<a>Aliens of London</a>" / "<a>World War Three</a>"</li> <li>"<a>The Long Game</a>"</li> <li>"<a>Boom Town</a>"</li> <li>"<a>Bad Wolf</a>" / "<a>The Parting of the Ways</a>"</li> <li>"<a>닥터 후: 칠드런 인 니드</a>" (미니 에피소드)</li> <li>"<a>The Christmas Invasion</a>"</li> <li>"<a>New Earth</a>"</li> <li>"<a>Tooth and Claw</a>"</li> <li>"<a>Love &amp; Monsters</a>"</li> <li>"<a>Army of Ghosts</a>" / "<a>Doomsday</a>"</li> <li>"<a>The Runaway Bride</a>"</li> <li>"<a>Smith and Jones</a>"</li> <li>"<a>Gridlock</a>"</li> <li>"<a>Utopia</a>" / "<a>The Sound of Drums</a>" / "<a>Last of the Time Lords</a>"</li> <li>"<a>Voyage of the Damned</a>"</li> <li>"<a>Partners in Crime</a>"</li> <li>"<a>Midnight</a>"</li> <li>"<a>Turn Left</a>"</li> <li>"<a>The Stolen Earth</a>" / "<a>Journey's End</a>"</li> <li>"<a>Music of the Spheres</a>" (mini-episode)</li> <li>"<a>The Next Doctor</a>"</li> <li>"<a>Planet of the Dead</a>" (with Gareth Roberts)</li> <li>"<a>The Waters of Mars</a>" (with Phil Ford)</li> <li><i><a>The End of Time</a></i></li></ul> <div><div> </div></div> </div></td></tr></tbody></table></div>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닥터 후</a>》에서 <a>재생성</a>이 등장하는 TV 스토리</div></th></tr><tr><th>닥터</th><td><div></div><table><tbody><tr><th>재생성</th><td><div> <ul><li>〈<a>The Tenth Planet</a>〉</li> <li>〈<a>The War Games</a>〉</li> <li>〈<a>Planet of the Spiders</a>〉</li> <li>〈<a>Logopolis</a>〉</li> <li>〈<a>The Caves of Androzani</a>〉</li> <li>〈<a>Time and the Rani</a>〉</li> <li>《<a>Doctor Who</a>》</li> <li>"<a>The Parting of the Ways</a>"</li> <li>〈<a>The End of Time</a>〉</li> <li>"<a>The Night of the Doctor</a>"</li> <li>"<a>The Day of the Doctor</a>"</li> <li>"<a>The Time of the Doctor</a>"</li> <li>"<a>Twice Upon a Time</a>"</li></ul> </div></td></tr><tr><th>재생성 직후</th><td><div> <ul><li>〈<a>The Power of the Daleks</a>〉</li> <li>〈<a>Spearhead from Space</a>〉</li> <li>〈<a>Robot</a>〉</li> <li>〈<a>Castrovalva</a>〉</li> <li>〈<a>The Twin Dilemma</a>〉</li> <li>"<a>The Christmas Invasion</a>"</li> <li>"<a>The Eleventh Hour</a>"</li> <li>"<a>Deep Breath</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다른 등장인물</th><td><div> <ul><li>〈<a>Planet of the Spiders</a>〉</li> <li>〈<a>Destiny of the Daleks</a>〉</li> <li>〈<a>Mawdryn Undead</a>〉</li> <li>"<a>Utopia</a>"</li> <li>"<a>Day of the Moon</a>"</li> <li>"<a>Let's Kill Hitler</a>"</li></ul> </div></td></tr><tr><th>더 보기</th><td><div> <ul><li>《<a>닥터 후와 치명적인 죽음의 저주</a>》</li> <li>"<a>닥터 후: 칠드런 인 니드</a>"</li> <li>"<a>The Stolen Earth</a>" / "<a>Journey's End</a>"</li> <li>"<a>The Impossible Astronaut</a>"</li></ul> </div></td></tr></tbody></table></div>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닥터 후</a>》에서 <a>달렉</a>이 등장하는 스토리</div></th></tr><tr><th><a>1대 닥터</a></th><td><div> <ul><li>〈<a>The Daleks</a>〉</li> <li>〈<a>The Dalek Invasion of Earth</a>〉</li> <li>〈<a>The Chase</a>〉</li> <li>"<a>Mission to the Unknown</a>"</li> <li>〈<a>The Daleks' Master Plan</a>〉</li></ul> </div></td></tr><tr><th><a>2대 닥터</a></th><td><div> <ul><li>〈<a>The Power of the Daleks</a>〉</li> <li>〈<a>The Evil of the Daleks</a>〉</li></ul> </div></td></tr><tr><th><a>3대 닥터</a></th><td><div> <ul><li>〈<a>Day of the Daleks</a>〉</li> <li>〈<a>Planet of the Daleks</a>〉</li> <li>〈<a>Death to the Daleks</a>〉</li></ul> </div></td></tr><tr><th><a>4대 닥터</a></th><td><div> <ul><li>〈<a>Genesis of the Daleks</a>〉</li> <li>〈<a>Destiny of the Daleks</a>〉</li></ul> </div></td></tr><tr><th><a>5대 닥터</a></th><td><div> <ul><li>〈<a>Resurrection of the Daleks</a>〉</li></ul> </div></td></tr><tr><th><a>6대 닥터</a></th><td><div> <ul><li>〈<a>Revelation of the Daleks</a>〉</li></ul> </div></td></tr><tr><th><a>7대 닥터</a></th><td><div> <ul><li>〈<a>Remembrance of the Daleks</a>〉</li></ul> </div></td></tr><tr><th><a>9대 닥터</a></th><td><div> <ul><li>"<a>Dalek</a>"</li> <li>"<a>Bad Wolf</a>" / "<a>The Parting of the Ways</a>"</li></ul> </div></td></tr><tr><th><a>10대 닥터</a></th><td><div> <ul><li>"<a>Army of Ghosts</a>" / "<a>Doomsday</a>"</li> <li>"<a>Daleks in Manhattan</a>" / "<a>Evolution of the Daleks</a>"</li> <li>"<a>The Stolen Earth</a>" / "<a>Journey's End</a>"</li></ul> </div></td></tr><tr><th><a>11대 닥터</a></th><td><div> <ul><li>"<a>Victory of the Daleks</a>"</li> <li>"<a>The Pandorica Opens</a>" / "<a>The Big Bang</a>"</li> <li>"<a>Asylum of the Daleks</a>"</li> <li>"<a>The Day of the Doctor</a>"</li> <li>"<a>The Time of the Doctor</a>"</li></ul> </div></td></tr><tr><th><a>12대 닥터</a></th><td><div> <ul><li>"<a>Into the Dalek</a>"</li> <li>"<a>The Magician's Apprentice</a>" / "<a>The Witch's Familiar</a>"</li> <li>The Pilot</li></ul> </div></td></tr><tr><th>부연 등장</th><td><div> <ul><li>〈<a>The Space Museum</a>〉</li> <li>〈<a>The Wheel in Space</a>〉</li> <li>〈<a>The War Games</a>〉</li> <li>〈<a>The Mind of Evil</a>〉</li> <li>〈<a>Frontier in Space</a>〉</li> <li>〈<a>Logopolis</a>〉</li> <li>〈<a>Mawdryn Undead</a>〉</li> <li>〈<a>The Five Doctors</a>〉</li> <li>《<a>Doctor Who</a>》</li> <li>"<a>Human Nature</a>"</li> <li>"<a>The Waters of Mars</a>"</li> <li>"<a>The Beast Below</a>"</li> <li>"<a>The Wedding of River Song</a>"</li></ul> </div></td></tr><tr><th>기타</th><td><div> <ul><li>〈<a>후 박사와 달렉들</a>〉</li> <li>〈<a>달렉 - 지구 침공: 2150 A.D.</a>〉</li> <li>〈<a>닥터 후와 치명적인 죽음의 저주</a>〉</li> <li>"<a>The Last Day</a>"</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The_Parting_of_the_Ways&amp;oldid=24465004</a>"</div> <div><div><a>분류</a>: <ul><li><a>방송에 관한 틀</a></li><li><a>TV.com template with unexpected input</a></li><li><a>9대 닥터 에피소드</a></li><li><a>달렉의 스토리</a></li><li><a>2005년 텔레비전 에피소드</a></li><li><a>러셀 T 데이비스의 작품</a></li><li><a>지구를 배경으로 한 닥터 후 스토리</a></li><li><a>10대 닥터 에피소드</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위키데이터와 다른 ID가 포함된 TV.com 틀</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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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가 달렉함선을 착륙시킬때 사용한 것은 무엇인가?
마찰 추진기
null
94501
11,855
[ "닥터가 달렉함선을 착륙시킬때 사용한 것은 무엇인가?", "달렉황제가 어떤 물질을 사용해서 달렉 종족을 재건했을까?", "달렉 종족들이 재건되면서 새롭게 갖게 된 것들은 무엇인가?", "타디스 안으로 들어온 달렉을 파괴시켜 죽이는 인물은?", "닥터가 타디스 주변에 보호막을 씌우는데 사용하는 것은?", "닥터가 타디스 주변에 보호막을 씌우는 데에 사용한 것은 무엇인가요?",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달렉 황제가 달렉 종족을 재건하기 위해 채취한 인간들의 물질은 무엇인가요?", "닥터가 달렉을 없애기 위해 게임스테이션의 장비로 만들기 시작한것은 무엇인가?", "닥터가 달렉들과 싸우기 전에 타디스를 태워 시간여행을 보낸 사람은 누구인가?", "로즈가 타고있는 타디스를 로즈의 고향 시간대로 되돌려 보내는데 사용한 것은?", "닥터가 로즈를 지켜내겠다는 약속을 건낸 사람은 누구인가?", "닥터가 게임 스테이션 장비로 만들기 시작한 것은 무엇인가요?", "닥터가 타디스를 로즈의 고향 시간대로 되돌려 보내는 데에 사용한 것은 무엇인가요?", "타디스는 로즈를 태우고 언제로 돌아왔는가?", "타디스가 착륙했던 곳마다 적혀있던 것으로 로즈가 다시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던 단어는 무엇인가?", "타디스가 착륙했던 곳마다 적혀있던 낙서는 무엇인가?", "로즈가 타디스의 심장을 여는 것을 돕는 로즈의 아내는?", "타디스가 착륙했던 곳마다 적혀 있던 단어는 무엇인가요?", "로즈가 타디스를 조종해서 닥터에게 돌아가기위해 사용하려고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요?", "로즈가 울고 있던 이유는 어떤 감정 때문인가요?", "게임 스테이션에서 달렉 군대에 의해 사망한 두 사람은 누구인가?", "달렉이 닥터를 죽이려고 한 순간 나타난 사람은 누구인가?", "달렉 군대가 게임 스테이션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과정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로즈가 살려내지만 타디스에 타지 못해 게임 스테이션에 갇히는 인물은 누구인가?", "닥터가 로즈의 소용돌이 에너지를 자신의 몸으로 옮긴 방법은?", "로즈가 배드 울프라는 단어를 뿌린 공간은 어디인가요?", "되살아난 잭이 갇힌 곳은 어디인가요?", "로즈가 지니고 있던 에너지는 어떤 에너지였나요?", "타다스를 움직이는 엔진의 특징은 무엇인가?", "타디스가 실드 생성기로 보호된다는 설정은 몇년도에 방영된 에피소드에 나오는가?", "치명적인 공격을 받을 것으로 탐지될 경우 타디스를 멀리 순간이동 시키는 장치는?", "타디스를 움직이는 엔진의 설정은 어떤 에피소드에서 비롯되었나요?", "타디스의 공격이 닥쳐오면 타디스를 순간이동시키는 역할을 하는 장치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닥터가 타디스 내부에서 무기가 발사되는 것을 막는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타디스 내부가 어떤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인가요?", "죽기전에 달렉황제와 똑같은 말을 내뱉은 사람은 누구인가? ", "달렉 황제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은?", "달렉 황제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과 같은 대사를 하며 죽어간 인물은?", "달렉 황제 이외에 나는 죽을 수 없다는 대사를 똑같이 한 인물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
<!DOCTYPE html> The Parting of the Ways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The Parting of the Ways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he Parting of the Ways" (KBS 방영 제목: 〈이별〉)은 영국의 공상과학 텔레비전 드라마 《닥터 후》 시즌 1의 열세 번째 에피소드이자 마지막 에피소드이다. 2005년 6월 18일 영국에서 방영되었고 한국에서는 2005년 7월 17일에 방영되었다. 총 2부로 나뉜 줄거리의 두번째 파트로, 크리스토퍼 에클스턴가 9대 닥터로 마지막으로 출연하는 동시에 데이비드 테넌트가 10대 닥터로 처음 출연하는 에피소드이다. 또 잭 하크니스가 닥터의 정기 동행자로 활약하는 마지막 에피소드로, 나중에 시리즈 3 마지막화인 "Utopia" / "The Sound of Drums" / "Last of the Time Lords"과 시리즈 4 마지막화인 "The Stolen Earth" / "Journey's End"에서 다시 출연한다. 처음 파트에 해당하는 "Bad Wolf"는 이에 앞서 6월 11일에 방영되었다. 목차 1 줄거리 1.1 다른 에피소드와의 연관성 2 각주 3 외부 링크 3.1 평론 줄거리[편집] 에피소드의 발단은 달렉들이 로즈에게 닥터가 다음으로 할 행동이 무엇이냐고 추궁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닥터는 달렉 함선의 공격을 이리저리 피하며 마찰 추진기를 써서 타디스 주변에 보호막을 씌운 뒤, 함선 내부로 들어가 타디스를 실체화해 착륙시킨다. 잭은 타디스가 실체화되는 자리에 서있다가 타디스 안으로 들어온 달렉을 파괴시켜 죽이고, 둘은 달렉과 대화하기 위해 타디스 밖으로 나온다. 닥터는 달렉들을 부활시킨 것이 누구냐고 묻자, 이미 옛날에 죽은 줄 알았던 달렉 황제가 나타나 자신이 재건했다고 밝히자 당황한다. 게다가 달렉 황제가 스스로를 신이라고 칭하는 데에서 더더욱 놀란다. 달렉 황제는 시간 전쟁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반쯤 망가진 함선을 타고 지구로 도망왔고, 그곳에서 게임 스테이션을 통해 선택되어 전송받은 인간들의 DNA 물질을 채취해 달렉 종족을 재건했던 것이었다. 닥터는 이 과정에서 달렉들이 인간의 특성과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동시에 천하무적이 되었음을 알게 된다. 닥터와 로즈, 잭은 타디스를 타고 게임 스테이션으로 돌아가서 곧 임박한 달렉들의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잭은 추진기를 이용해 우주정거장의 맨 꼭대기 여섯 층을 보호하고 방어선을 구축한다. 닥터는 게임 스테이션의 장비로 델타파 생성기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델타파는 자기 범위에 있는 모든 생명체를 죽일 수 있었지만, 완전히 충전하는데 시간이 필요했다. 닥터는 로즈에게 타디스 안에 들어가서 잠깐 확인해달라고 하고, 로즈가 들어가자 갑자기 소닉 스크류드라이버로 타디스를 로즈의 고향 시간대로 되돌려 보낸다. 갑작스러운 일에 울먹이던 로즈 앞에 닥터가 홀로그램 메시지로 나타나서 상황 설명을 하는데, 자신은 로즈 엄마에게 로즈를 꼭 지켜내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로즈의 안전을 보장하려는 것이며, 또 달렉들이 타디스를 차지하는 일을 막기 위해 로즈를 돌려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닥터의 홀로그램은 타디스가 착륙하면 알아서 작동을 멈출 것이니까 가만 내버려 두고, 환상적인 삶을 살아달라는 말과 함께 로즈와 작별한다. 한편 달렉들이 위성 침공을 개시하고, 방어선을 손쉽게 뚫고 나가 지나가는 길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죽인다. 그리고 닥터 앞에 달렉 황제의 모습이 화면으로 나타나, 델타파를 준비하는 닥터를 조롱한다. 알고 보니 델타파는 달렉 뿐만 아니라 지구 대부분을 쓸어버리게 되고, 닥터도 그 사실을 알면서 준비하는 것이었다. 닥터는 달렉 황제에게 인류는 어떤 수단으로라도 살아남을 테지만 달렉은 전부 말살시키게 되는 것이라고 애써 대꾸한다. 타디스가 21세기 런던으로 돌아오고, 미키와 재키도 타디스 엔진 소리를 듣고 달려와 로즈를 만나는데, 닥터가 자기를 내보냈다는 죄책감에 상심해 울고 있었다. 마음을 어느 정도 추스린 로즈는 갑자기 공터에 그려져 있는 'Bad Wolf'라는 커다란 낙서를 발견한다. 그리고 타디스가 착륙했던 곳마다 배드 울프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음을 떠올리고, 단순한 표시라기보다는 뭔가를 전하려는 메시지임을 깨닫는다. 로즈는 타디스 심장부에 있는 텔레파시 서킷을 통해 타디스를 조종하여 닥터에게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미키에게 타디스 심장을 여는 걸 좀 도와 달라고 부탁하는데, 미키가 차로 수없이 당기면서 시도해봐도 열리지 않았다. 그때 재키가 등장해서 이제 그만 포기하라고 말하자, 로즈는 재키에게 자신은 아빠를 만난 적이 있고 아빠가 죽을 때 함께 있어줬던 "아가씨"가 바로 자신이라고 고백한다. 남편 이야기에 마음이 약해진 재키는 결국 친구에게서 커다란 트럭을 빌려와 로즈를 돕게 된다. 트럭이 조종간의 패널을 끌어당기자 끝내 활짝 열리고, 로즈는 타디스의 심장에서 나오는 빛에 휩싸인다. 이 모습을 본 미키와 재키가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타디스 문이 닫히고, 투명화하여 어디론가 가버린다. 한편 게임 스테이션에서는 달렉 군대가 꼭대기 500층까지 올라오고, 그 과정에서 잭과 린다도 사망한다. 닥터가 이제 막 델타파의 스위치를 올리려던 참에 달렉 군대가 관제실로 쳐들어온다. 처음부터 달렉을 파괴하면서 지구의 인류까지 몰살시킬 거라는 생각에 갈등하던 닥터는 결국 단념하고 만다. 달렉 황제는 그 모습을 보고 겁쟁이라면서 말살시킬 것을 명한다. 달렉이 닥터를 죽이려는 그때 갑자기 타디스가 실체화되며 착륙한다. 타디스 문이 열리고 로즈가 나타나는데 시간 소용돌이의 불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로즈는 자신이 '배드 울프'임을 밝히고 배드 울프라는 단어를 시공간 속에 뿌려 스스로를 이곳으로 인도하게 만든다. 달렉들이 로즈를 말살하려 하지만 로즈는 달렉 광선을 가볍게 무시하고, 달렉 황제와 전 군함을 모조리 분해시켜 버린다. 닥터는 로즈에게 그대로 있으면 위험하다며 자신이 가진 힘을 포기하라고 간청하는데, 로즈는 무시하고 죽은 잭을 되살린다. 로즈가 시간 에너지로 타버리기 시작할 때쯤 닥터가 다가가 키스를 하며, 로즈가 지니고 있던 소용돌이 에너지를 전부 자신의 몸으로 옮긴다. 그리고는 에너지를 타디스로 다시 풀어 보낸 뒤, 의식을 잃은 로즈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둘은 타디스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되살아난 잭은 타디스를 타지 못해 게임 스테이션에 그대로 갇히게 된다. 타디스 안에서 깨어난 로즈는 닥터가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고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닥터는 자신이 흡수한 시간 소용돌이가 몸의 모든 세포를 파괴하고 있다고 말해 준다. 이어서 닥터가 이제 다시는 로즈를 못볼 거라고 말하면서 로즈는 혼란에 빠진다. 닥터는 이다음 자신의 몸이 어떻게 변할지 혼잣말하다 로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는, 뒤로 물러서더니 노란 에너지를 내뿜으며 재생성 과정에 들어가 스스로 모습을 바꾸기 시작한다. 에너지가 소멸되고 몇 초 뒤 10대 닥터의 모습이 나타난다. 새로운 모습의 닥터는 잠시 새로 갖게 된 이빨 이야기를 하다가, 로즈에게 바르셀로나 행성에 가자고 말하며 에피소드가 끝이 난다. 다른 에피소드와의 연관성[편집] 로즈는 재키에게 "Father's Day"에서 있었던 일을 밝히면서 재키의 협조를 얻게 된다. 닥터는 달렉 사이에서 전해 내려오는 전설에 자신이 '다가오는 폭풍'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하는데, 버진 뉴 어드벤처에서 낸 소설 &lt;사랑과 전쟁&gt; (Love and War, "Father's Day"의 각본을 맡았던 폴 코넬 작품)에서 처음으로 나온 호칭이기도 하다. 이 '다가오는 폭풍'이라는 호칭은 작중 드라코니안들이 닥터에게 붙여준 것이다.[1] 타디스를 움직이는 엔진 (이자 타디스의 심장부)은 살아있는 생명체와도 같으며 자의식이 있고, 그 위에 타디스 계기판이 바로 설치되어 있다는 설정은 올닥 에피소드인 〈The Edge of Destruction〉(1964)부터 비롯됐다.[2] 또 로즈가 타디스에는 방어막이 없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올닥 시절의 일부 에피소드에서 타디스는 상당한 방어력을 지닌 실드 생성기로 보호되어 있다는 설정이 이미 확립되어 있었다 (1979년 방영된 〈The Armageddon Factor〉 에피소드 외 다수). 이와 더불어 〈The Krotons〉 (1969)에서는 타디스의 '적대행동 이동 시스템' (HADS)라는 이름의 장치가 등장하는데, 치명적인 공격이 닥쳐올 것으로 탐지될 경우 타디스를 멀리 순간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3] 잭이 단발 무기를 이용해 타디스 안에 들어온 달렉을 파괴하는 장면도 옛 올닥 시절의 설정과 관련이 있다. Jack destroys the Dalek in the TARDIS with his one-shot weapon. In 〈The Hand of Fear〉 (1976)에서 닥터는 타디스 내부가 시간적 유예 상태로 존재하여, 타디스 내부에서 무기가 발사되는 것을 막는다고 주장한다,[4] 다만 〈Earthshock〉 (1982)에서는 이 시간 유예를 유지시켜주는 장치가 작동하지 않기도 했다.[5] "Let's Kill Hitler" (2011)에서는 11대 닥터가 자신이 시간 유예 기능에 관해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고 확인한 바 있다.[6] 달렉의 제왕 (달렉의 창조자 다브로스)를 다룬 이야기는 〈Remembrance of the Daleks〉 (1988) 에피소드가 마지막이었다. 이 에피소드에서 달렉의 황제는 〈The Evil of the Daleks〉 (1967)에서 선보인 것과 같은 초창기 달렉의 우두머리 개념으로 되돌아간 모습이었다.[7] 그 사이 기간에 드라마에서 등장하는 달렉의 우두머리는 달렉 수프림 내지는 다브로스였다. 달렉 황제의 모습 달렉 황제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나는 죽을 수 없다!" (I cannot die!)인데, 〈Resurrection of the Daleks〉 (1984) 에피소드에서도 다브로스가 바이러스로 죽어갈 때 똑같은 대사를 한다.[8] 다브로스의 경우 다른 에피소드에서 살아남은 채로 다시 돌아오지만, 달렉 황제도 이 같은 전례를 따를지는 아직 지켜볼 부분으로 남아 있다. 달렉 황제는 이후로도 "Doomsday"에서 로즈와 닥터가 한차례 언급하고[9] "Daleks in Manhattan"에서 스카로 교단이 다시 한번 언급한다. 또 로즈가 "School Reunion"에서 사라 제인을 만났을 때 말해준 경험 중 하나로 언급된다.[10] 이 에피소드에서 벌어진 이야기는 시즌2 에피소드 〈Age of Steel〉에서 다시 언급된다.[11] 에피소드 끝부분에서 미키 스미스가 제이크 시몬스에게 '커다란 노란색 트럭으로 우주를 구했던 이야기'를 푸는 장면이 나오는데, 본 에피소드에서 미키가 응급차량을 이용해 타디스 계기판을 밀어당겨서 로즈가 텔레파시로 타디스를 조종할 수 있게 만든 것을 가리키는 부분이다. 각주[편집] ↑ “The Parting of the Ways - Fact File”. BBC. 2012년 3월 27일에 확인함.  ↑ Levine, Ian (Producer). 《Over the Edge (the making of The Edge of Destruction)》 (DVD documentary).  ↑ 틀:Cite serial ↑ 틀:Cite serial ↑ 틀:Cite serial ↑ Steven Moffat (writer), Richard Senior (director), Marcus Wilson (producer) (2011년 8월 27일). 〈Let's Kill Hitler〉. 《Doctor Who》. 시리즈 6. 제 8회. BBC. BBC One.  ↑ 틀:Cite serial ↑ 틀:Cite serial ↑ Russell T Davies (writer), Graeme Harper (director), Phil Collinson (producer) (2006년 7월 8일). 〈Doomsday〉. 《Doctor Who》. BBC. BBC One.  ↑ Helen Raynor (writer), James Strong (director), Phil Collinson (producer) (2007년 4월 21일). 〈Daleks in Manhattan〉. 《Doctor Who》. BBC. BBC One.  ↑ "Transcript for Age of Steel" Archived 2015년 11월 21일 - 웨이백 머신, Retrieved on 17 October 2015. 외부 링크[편집] <table> <tbody><tr> <td></td> <td> 위키인용집에 이 문서와관련된 문서가 있습니다. The Parting of the Ways </td> </tr> </tbody></table> The Parting of the Ways - 타디스 데이터 코어 (TARDIS Data Core) (위키아 위키) "The Parting of the Ways" - BBC 《닥터 후》 홈페이지 (영어) Bad Wolf" / "The Parting Of The Ways - Doctor Who: A Brief History Of Time (Travel) Bad Wolf" / "The Parting of the Ways - Doctor Who Reference Guide “The Parting of the Ways”. Outpost Gallifrey. 2008년 1월 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영어) The Parting of the Ways – TV.com Doctor Who Confidential — Episode 13: The Final Battle "They survived through me." — Episode trailer for "The Parting of the Ways" Watch the regeneration at the BBC website (영어) The Parting of the Ways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평론[편집] (영어) 〈The Parting of the Ways〉 - 아웃포스트 갈리프레이 리뷰 (영어) 〈Bad Wolf" / "The Parting of the Ways〉 - 아웃포스트 갈리프레이 리뷰 (영어) "The Parting of the Ways" 리뷰 - The Doctor Who Ratings Guide (영어) "Bad Wolf" / "The Parting of the Ways" 리뷰 - The Doctor Who Ratings Guide <table><tbody><tr><th colspan="2">vdeh닥터 후 에피소드</th></tr><tr><td colspan="2"> 올드 시즌 (1963–89):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시간의 차원 (1993) 닥터 후 (1996) 닥터 후와 치명적인 죽음의 저주 (1999) 샬카의 비명 (2003) 뉴 시리즈 (2005–현재): 1 2 3 4 2008~2010 스페셜 5 6 7 2013 스페셜 8 9 10 11 </td></tr><tr><td colspan="2"><table><tbody><tr><th>시리즈 1</th><td> "Rose" "The End of the World" "The Unquiet Dead" "Aliens of London" / "World War Three" "Dalek" "The Long Game" "Father's Day" "The Empty Child" / "The Doctor Dances" "Boom Town" "Bad Wolf" / "The Parting of the Ways" </td></tr></tbody></table></td></tr></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2">vdeh러셀 T 데이비스의 텔레비전 시리즈</th></tr><tr><th>작품</th><td> 《다크 시즌》 (1991) 《센추리 펄즈》 (1993) 《리벌레이션즈》 (1994~96) 《스프링힐》 (1996~97) 《코로네이션 스트리트: 비바 라스 베가스!》 (1997) 《더 그랜드》 (1997~98) 《퀴어 애즈 포크》 (1999~2000) 《밥 앤 로즈》 (2001) 《더 세컨드 커밍》 (2003) 《마인 올 마인》 (2004) 《카사노바》 (2005) 《닥터 후》 (2005~10) 《토치우드》 (2006~11) 《사라 제인 어드벤처》(2007~11) 《위저즈 vs 에일리언즈》 (2012~13) 큐컴버, 바나나, 토푸 (2015, 연작 시리즈) 《베리 잉글리시 스캔들》 (2018) </td></tr><tr><th>《닥터 후》 에피소드</th><td> "Roes" "The End of the World" "Aliens of London" / "World War Three" "The Long Game" "Boom Town" "Bad Wolf" / "The Parting of the Ways" "닥터 후: 칠드런 인 니드" (미니 에피소드) "The Christmas Invasion" "New Earth" "Tooth and Claw" "Love &amp; Monsters" "Army of Ghosts" / "Doomsday" "The Runaway Bride" "Smith and Jones" "Gridlock" "Utopia" / "The Sound of Drums" / "Last of the Time Lords" "Voyage of the Damned" "Partners in Crime" "Midnight" "Turn Left" "The Stolen Earth" / "Journey's End" "Music of the Spheres" (mini-episode) "The Next Doctor" "Planet of the Dead" (with Gareth Roberts) "The Waters of Mars" (with Phil Ford) The End of Time </td></tr></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2">vdeh《닥터 후》에서 재생성이 등장하는 TV 스토리</th></tr><tr><th>닥터</th><td><table><tbody><tr><th>재생성</th><td> 〈The Tenth Planet〉 〈The War Games〉 〈Planet of the Spiders〉 〈Logopolis〉 〈The Caves of Androzani〉 〈Time and the Rani〉 《Doctor Who》 "The Parting of the Ways" 〈The End of Time〉 "The Night of the Doctor" "The Day of the Doctor" "The Time of the Doctor" "Twice Upon a Time" </td></tr><tr><th>재생성 직후</th><td> 〈The Power of the Daleks〉 〈Spearhead from Space〉 〈Robot〉 〈Castrovalva〉 〈The Twin Dilemma〉 "The Christmas Invasion" "The Eleventh Hour" "Deep Breath" </td></tr></tbody></table></td></tr><tr><th>다른 등장인물</th><td> 〈Planet of the Spiders〉 〈Destiny of the Daleks〉 〈Mawdryn Undead〉 "Utopia" "Day of the Moon" "Let's Kill Hitler" </td></tr><tr><th>더 보기</th><td> 《닥터 후와 치명적인 죽음의 저주》 "닥터 후: 칠드런 인 니드" "The Stolen Earth" / "Journey's End" "The Impossible Astronaut" </td></tr></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2">vdeh《닥터 후》에서 달렉이 등장하는 스토리</th></tr><tr><th>1대 닥터</th><td> 〈The Daleks〉 〈The Dalek Invasion of Earth〉 〈The Chase〉 "Mission to the Unknown" 〈The Daleks' Master Plan〉 </td></tr><tr><th>2대 닥터</th><td> 〈The Power of the Daleks〉 〈The Evil of the Daleks〉 </td></tr><tr><th>3대 닥터</th><td> 〈Day of the Daleks〉 〈Planet of the Daleks〉 〈Death to the Daleks〉 </td></tr><tr><th>4대 닥터</th><td> 〈Genesis of the Daleks〉 〈Destiny of the Daleks〉 </td></tr><tr><th>5대 닥터</th><td> 〈Resurrection of the Daleks〉 </td></tr><tr><th>6대 닥터</th><td> 〈Revelation of the Daleks〉 </td></tr><tr><th>7대 닥터</th><td> 〈Remembrance of the Daleks〉 </td></tr><tr><th>9대 닥터</th><td> "Dalek" "Bad Wolf" / "The Parting of the Ways" </td></tr><tr><th>10대 닥터</th><td> "Army of Ghosts" / "Doomsday" "Daleks in Manhattan" / "Evolution of the Daleks" "The Stolen Earth" / "Journey's End" </td></tr><tr><th>11대 닥터</th><td> "Victory of the Daleks" "The Pandorica Opens" / "The Big Bang" "Asylum of the Daleks" "The Day of the Doctor" "The Time of the Doctor" </td></tr><tr><th>12대 닥터</th><td> "Into the Dalek" "The Magician's Apprentice" / "The Witch's Familiar" The Pilot </td></tr><tr><th>부연 등장</th><td> 〈The Space Museum〉 〈The Wheel in Space〉 〈The War Games〉 〈The Mind of Evil〉 〈Frontier in Space〉 〈Logopolis〉 〈Mawdryn Undead〉 〈The Five Doctors〉 《Doctor Who》 "Human Nature" "The Waters of Mars" "The Beast Below" "The Wedding of River Song" </td></tr><tr><th>기타</th><td> 〈후 박사와 달렉들〉 〈달렉 - 지구 침공: 2150 A.D.〉 〈닥터 후와 치명적인 죽음의 저주〉 "The Last Day"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The_Parting_of_the_Ways&amp;oldid=24465004" 분류: 방송에 관한 틀TV.com template with unexpected input9대 닥터 에피소드달렉의 스토리2005년 텔레비전 에피소드러셀 T 데이비스의 작품지구를 배경으로 한 닥터 후 스토리10대 닥터 에피소드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와 다른 ID가 포함된 TV.com 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EnglishEspañolFrançaisРусскийTürkçe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2일 (토) 16:1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서론 "Parting of the Ways"는 영국의 공상과학 드라마 《닥터 후》의 시즌 1 마지막 에피소드로, 9대 닥터(크리스토퍼 에클스턴)와 10대 닥터(데이비드 테넌트)의 교체를 다룬다. 이 에피소드는 닥터와 그의 동료들이 달렉과의 최후의 대결을 통해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 과정을 그리며, 주인공의 변화와 희생을 통해 인간성과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 본론 이 에피소드는 두 부분으로 나뉘며, 첫 번째 부분인 "Bad Wolf"에서 시작된다. 닥터는 달렉의 공격을 피하며 타디스를 보호하고, 달렉 황제와의 대면을 통해 그들의 재건 과정을 알게 된다. 닥터는 인류를 구하기 위해 델타파를 준비하지만, 이 과정에서 로즈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그녀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로즈는 'Bad Wolf'라는 메시지를 통해 닥터와 다시 연결되려 하며, 결국 타디스의 심장을 조종하여 닥터를 구출한다. 에피소드의 클라이맥스에서 로즈는 자신의 힘을 사용해 달렉을 무찌르고, 잭을 되살리지만, 그 과정에서 자신의 존재가 위험에 처하게 된다. 닥터는 로즈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포기하고 재생성 과정을 거치며 10대 닥터로 변신한다. 이 과정은 희생과 변화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으로, 인간의 선택이 가져오는 결과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 결론 "Parting of the Ways"는 닥터와 로즈의 관계, 희생,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다. 닥터의 재생성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며, 로즈의 선택은 그녀의 성장과 강인함을 보여준다. 이 에피소드는 단순한 과학적 상상력을 넘어, 인간의 감정과 도덕적 선택의 복잡성을 탐구하며, 시청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글쓴이는 이러한 주제를 통해 시리즈의 핵심 가치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글 전체의 요지를 논리적 흐름에 맞게 정리해줘. 서론, 본론, 결론 구조로 요약해주고, 각 부분마다 글쓴이의 의도나 주장도 명확히 밝혀줘.
여지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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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여지전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여지전도</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여지전도</b>〉는 19세기에 <a>김정호</a>가 제작했다고 추정되는 목판본 세계지도이다. 크기는 세로 86cm, 가로 62cm이다. 본 지도는 서구의 지리지식이 조선사회에 어떻게 수용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양반구도를 기본 자료로 하면서도 원이 아닌 사각형에 세계를 그렸고, 동양인에게 생소한 신대륙은 지도에서 제외시켰다. 지도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지구구체설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나, 중국을 중심에 배치하고 주변의 유럽·아프리카 대륙은 축소하여 그림으로써 여전히 전통적인 중화적 세계관을 고수하고 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여지전도의 모습</span></a></li> <li><a><span>2</span> <span>여지전도의 제작과정과 목적</span></a></li> <li><a><span>3</span> <span>여지전도의 특징과 지리사상적 의의</span></a> <ul> <li><a><span>3.1</span> <span>지도의 특징</span></a></li> <li><a><span>3.2</span> <span>지리 사상학적 의의</span></a> <ul> <li><a><span>3.2.1</span> <span>지구구체설의 수용</span></a></li> <li><a><span>3.2.2</span> <span>중화적 세계관의 고수</span></a></li> </ul> </li> </ul> </li> <li><a><span>4</span> <span>참조</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여지전도의 모습</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목판본 지도의 상단에는 여지전도로 표기되어있다. 지도에는 아시아·유럽·아프리카·오세아니아 대륙이 그려져 있고 아메리카 대륙은 빠져있다. 서양의 많은 지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조선의 윤곽도 잘 그려져 있다. 지구구체설을 전제로 하고 있는 서구식 양반구도를 기초로 제작되었지만 구대륙과 오세아니아 대륙이 그려진 &lt;지구전도&gt;만을 취하고 신대륙 부분은 수용하지 않았다. 또한 경위선이나 적도,황도같은 천문과 관련된 부분을 배제하여 흡사 평평한 대지를 전제로 한 것처럼 지도를 그렸다. 둥근 지구를 평면상의 종이에 2차원으로 표현할 때 나타나는 투영법의 문제는 &lt;&lt;여지전도&gt;&gt;에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 듯 보인다. 본 지도는 <a>지구전후도</a>의 윤곽, 지명과 유사하고, <a>영환지략</a>에 수록된 지도와도 내용이 비슷하여 이들 지도들을 주로 참고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p> <h2><span></span><span>여지전도의 제작과정과 목적</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17세기 이후 서양선교사들이 제작한 지도가 중국에 들어오고, 이어 조선에서 전해지게 되었다. 조선의 학자들이 새로 유입된 서양지도지식을 바탕으로 세계지도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이 결과물이 바로 &lt;&lt;여지전도&gt;&gt;이다. 지도의 목적은 주기문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있지 않지만, 지도가 제작된 1850,60년대의 시대상황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중국은 1840년에 <a>아편전쟁</a>을 겪으면서 서양 세력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졌으나,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서양세력과의 접촉이 미미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위기의식이 덜했다. 그러나 조선의 해안에 이양선이 빈번하게 출몰하고 중국의 상황이 조선으로 전해지면서 서양세력에 대한 위기의식이 점차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지전도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세계의 지리를 파악하여 당시 밀려드는 외세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p> <h2><span></span><span>여지전도의 특징과 지리사상적 의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지도의 특징</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여지전도는 양반구도를 기초자료로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대륙이 그려진 반구도를 제외시키고 구대륙을 중심으로 그린 점이 특징적이다. 이처럼 구대륙과 신대륙으로 이루어진 양반구도 가운데 오세아니아 대륙을 포함한 구대륙만을 세계지도에 포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테오리치가 제작했던 서구식 세계지도는 대부분 타원형으로 제작되어 이 안에 신대륙까지 포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a>페르비스트</a>의 <a>곤여전도</a>에서는 양반구도로 제작되었는데, 지구구체설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지도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a>마테오 리치</a>의 <a>곤여만국전도</a>도 지구구체설이 뒷받침이 되어야 제대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지만 양반구도보다는 그 정도가 덜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양반구도 가운데 동양인에게는 생소한 신대륙을 그린 지도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지의 세계인 신대륙이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조선의 지식인에게 이해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신대륙이라는 공간이 당시 조선지식인에게 의미있는 장소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성립되어 있어야 했다. 이것은 실지의 경험 속에서 획득되든지 아니면 <a>산해경</a>에 나오는 지명처럼 상상 속에서 획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신대륙에 표기된 지명들은 이와는 거리가 먼 생소한 것들이다. 따라서 신대륙은 객관적인 실재 여부를 떠나 인식된 세계에서는 사라졌던 것이다. </p> <h3><span></span><span>지리 사상학적 의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h4><span></span><span>지구구체설의 수용</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p>지구구체설을 전제로 하고 있는 서구식 양반구도를 기초로 제작되었지만 구대륙과 오세아니아 대륙이 그려진 &lt;지구전도&gt;만을 취하고 신대륙 부분은 수용하지 않았다. 또한 경위선이나 적도,황도같은 천문과 관련된 부분을 배제하여 흡사 평평한 대지를 전제로 한 것처럼 지도를 그렸다. 둥근 지구를 평면상의 종이에 2차원으로 표현할 때 나타나는 투영법의 문제는 &lt;&lt;여지전도&gt;&gt;에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지도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지도의 작자로 추정되는 김정호는 지구구체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도상에는 남극과 북극이라는 용어가 보이고 동서의 끝이라는 용어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a>지구전후도</a>에서처럼 둥근 지구를 전제로 한 북극과 남극을 명시적으로 인정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지도 좌측 상단에는 ‘미합중국의 북쪽 경계와 접하고 있다’라는 주기문이 적혀있는데 있는데, 이를 통해 지도에는 아메리카 대륙이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주기의 바로 옆에는 북극 부근에서는 춘분에서 추분까지는 낮이 되고 추분에서 춘분까지는 밤이 되는 극지방의 특성이 기재돼 있는데, 이러한 극지방의 특성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의해 생기는 현상으로 지도의 제작자가 지구과학적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와 같은 문장을 수록했다고 볼 수는 없다. 서양의 지구과학적 지식들은 이미 <a>마테오 리치</a>의 <a>곤여만국전도</a>에 자세하게 수록된 이래애로 여러 서학서에서 소개되었던 내용들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고려해 볼때, 지도의 제작자는 지구구체설뿐만 아니라 지문학적인 식견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이 지도에 일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p> <h4><span></span><span>중화적 세계관의 고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p>여지전도는 <a>지구구체설</a>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중화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이 <a>지구구체설</a>을 수용하면서도 세계를 둥글게 그리지 않은 것은 지도의 제작자가 중화적 세계관을 강하게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a>지구구체설</a>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심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중화적 세계관에서는 중국이 언제나 세계의 중심이었지만 <a>지구구체설</a>에서는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지도의 제작자가 구상했던 세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a>직방세계</a>였다. 그러나 이전 시기 중국에서 그려졌던 <a>직방세계</a> 중심의 지도와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직방세계 중심의 지도에서 <a>직방세계</a>의 외연은 역사적으로 중국과 통교했던 주변국에 한정되어 있고, 이러한 나라들도 구체적인 영역은 그려지지 않고 단지 명칭만 수록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여지전도에는 당시 객관적 실재로서 인정된 유럽과 아프리카 등이 비록 규모가 축소되어 있지만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유럽에 있는 나라들은 서양 선교사들의 여러 서적을 통해 실재하는 국가로 인정된 것들이다. 직방세계의 외연이 뚜렷하게 확장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p> <h2><span></span><span>참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오상학, 한국지도학회, 논문 &lt;목판본 여지전도의 특징과 지리사상사적 의미&gt;; 2001년</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여지전도&amp;oldid=11804827</a>"</div> <div><div><a>분류</a>: <ul><li><a>한국의 고지도</a></li><li><a>옛 세계 지도</a></li><li><a>목판본</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ul> <div><span><a>링크 추가</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4년 1월 3일 (금) 02: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둥근 지구를 평면상의 종이에 2차원으로 표현할 때 나타나는 문제는?
투영법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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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둥근 지구를 평면상의 종이에 2차원으로 표현할 때 나타나는 문제는?", "둥근 지구를 평면상의 종이에 2차원으로 표현할 때 나타나는 문제로서 '여지전도'에서 고려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이 것은 무엇인가?" ]
<!DOCTYPE html> 여지전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여지전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여지전도〉는 19세기에 김정호가 제작했다고 추정되는 목판본 세계지도이다. 크기는 세로 86cm, 가로 62cm이다. 본 지도는 서구의 지리지식이 조선사회에 어떻게 수용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양반구도를 기본 자료로 하면서도 원이 아닌 사각형에 세계를 그렸고, 동양인에게 생소한 신대륙은 지도에서 제외시켰다. 지도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지구구체설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나, 중국을 중심에 배치하고 주변의 유럽·아프리카 대륙은 축소하여 그림으로써 여전히 전통적인 중화적 세계관을 고수하고 있다. 목차 1 여지전도의 모습 2 여지전도의 제작과정과 목적 3 여지전도의 특징과 지리사상적 의의 3.1 지도의 특징 3.2 지리 사상학적 의의 3.2.1 지구구체설의 수용 3.2.2 중화적 세계관의 고수 4 참조 여지전도의 모습[편집] 목판본 지도의 상단에는 여지전도로 표기되어있다. 지도에는 아시아·유럽·아프리카·오세아니아 대륙이 그려져 있고 아메리카 대륙은 빠져있다. 서양의 많은 지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조선의 윤곽도 잘 그려져 있다. 지구구체설을 전제로 하고 있는 서구식 양반구도를 기초로 제작되었지만 구대륙과 오세아니아 대륙이 그려진 &lt;지구전도&gt;만을 취하고 신대륙 부분은 수용하지 않았다. 또한 경위선이나 적도,황도같은 천문과 관련된 부분을 배제하여 흡사 평평한 대지를 전제로 한 것처럼 지도를 그렸다. 둥근 지구를 평면상의 종이에 2차원으로 표현할 때 나타나는 투영법의 문제는 &lt;&lt;여지전도&gt;&gt;에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 듯 보인다. 본 지도는 지구전후도의 윤곽, 지명과 유사하고, 영환지략에 수록된 지도와도 내용이 비슷하여 이들 지도들을 주로 참고하여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여지전도의 제작과정과 목적[편집] 17세기 이후 서양선교사들이 제작한 지도가 중국에 들어오고, 이어 조선에서 전해지게 되었다. 조선의 학자들이 새로 유입된 서양지도지식을 바탕으로 세계지도를 제작하게 되었는데, 이 결과물이 바로 &lt;&lt;여지전도&gt;&gt;이다. 지도의 목적은 주기문에 구체적으로 명시되어있지 않지만, 지도가 제작된 1850,60년대의 시대상황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다. 중국은 1840년에 아편전쟁을 겪으면서 서양 세력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해졌으나,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서양세력과의 접촉이 미미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위기의식이 덜했다. 그러나 조선의 해안에 이양선이 빈번하게 출몰하고 중국의 상황이 조선으로 전해지면서 서양세력에 대한 위기의식이 점차 고조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여지전도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세계의 지리를 파악하여 당시 밀려드는 외세에 적절하게 대응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 여지전도의 특징과 지리사상적 의의[편집] 지도의 특징[편집] 여지전도는 양반구도를 기초자료로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신대륙이 그려진 반구도를 제외시키고 구대륙을 중심으로 그린 점이 특징적이다. 이처럼 구대륙과 신대륙으로 이루어진 양반구도 가운데 오세아니아 대륙을 포함한 구대륙만을 세계지도에 포현한 이유는 무엇일까? 마테오리치가 제작했던 서구식 세계지도는 대부분 타원형으로 제작되어 이 안에 신대륙까지 포괄하고 있었다. 그러나 페르비스트의 곤여전도에서는 양반구도로 제작되었는데, 지구구체설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지도를 이해하기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도 지구구체설이 뒷받침이 되어야 제대로 이해되는 측면이 있었지만 양반구도보다는 그 정도가 덜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사실들을 고려할 때 양반구도 가운데 동양인에게는 생소한 신대륙을 그린 지도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미지의 세계인 신대륙이 대륙의 동단에 위치한 조선의 지식인에게 이해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신대륙이라는 공간이 당시 조선지식인에게 의미있는 장소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관계가 역사적으로 성립되어 있어야 했다. 이것은 실지의 경험 속에서 획득되든지 아니면 산해경에 나오는 지명처럼 상상 속에서 획득될 수도 있다. 그러나 신대륙에 표기된 지명들은 이와는 거리가 먼 생소한 것들이다. 따라서 신대륙은 객관적인 실재 여부를 떠나 인식된 세계에서는 사라졌던 것이다. 지리 사상학적 의의[편집] 지구구체설의 수용[편집] 지구구체설을 전제로 하고 있는 서구식 양반구도를 기초로 제작되었지만 구대륙과 오세아니아 대륙이 그려진 &lt;지구전도&gt;만을 취하고 신대륙 부분은 수용하지 않았다. 또한 경위선이나 적도,황도같은 천문과 관련된 부분을 배제하여 흡사 평평한 대지를 전제로 한 것처럼 지도를 그렸다. 둥근 지구를 평면상의 종이에 2차원으로 표현할 때 나타나는 투영법의 문제는 &lt;&lt;여지전도&gt;&gt;에서는 전혀 고려되지 않는 듯 보인다 그러나 지도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지도의 작자로 추정되는 김정호는 지구구체설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지도상에는 남극과 북극이라는 용어가 보이고 동서의 끝이라는 용어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이는 지구전후도에서처럼 둥근 지구를 전제로 한 북극과 남극을 명시적으로 인정한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지도 좌측 상단에는 ‘미합중국의 북쪽 경계와 접하고 있다’라는 주기문이 적혀있는데 있는데, 이를 통해 지도에는 아메리카 대륙이 그려져 있지 않지만 그 존재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주기의 바로 옆에는 북극 부근에서는 춘분에서 추분까지는 낮이 되고 추분에서 춘분까지는 밤이 되는 극지방의 특성이 기재돼 있는데, 이러한 극지방의 특성은 지구의 자전과 공전에 의해 생기는 현상으로 지도의 제작자가 지구과학적 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이와 같은 문장을 수록했다고 볼 수는 없다. 서양의 지구과학적 지식들은 이미 마테오 리치의 곤여만국전도에 자세하게 수록된 이래애로 여러 서학서에서 소개되었던 내용들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사실들을 고려해 볼때, 지도의 제작자는 지구구체설뿐만 아니라 지문학적인 식견도 지니고 있었는데 이것이 지도에 일부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화적 세계관의 고수[편집] 여지전도는 지구구체설을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있지만, 여전히 전통적인 중화적 세계관에 기초하고 있다. 이 지구구체설을 수용하면서도 세계를 둥글게 그리지 않은 것은 지도의 제작자가 중화적 세계관을 강하게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구구체설의 입장에서 본다면 중심이라는 것은 상대적인 것으로 환원된다. 중화적 세계관에서는 중국이 언제나 세계의 중심이었지만 지구구체설에서는 지구상의 어떤 나라도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지도의 제작자가 구상했던 세계는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직방세계였다. 그러나 이전 시기 중국에서 그려졌던 직방세계 중심의 지도와는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 직방세계 중심의 지도에서 직방세계의 외연은 역사적으로 중국과 통교했던 주변국에 한정되어 있고, 이러한 나라들도 구체적인 영역은 그려지지 않고 단지 명칭만 수록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여지전도에는 당시 객관적 실재로서 인정된 유럽과 아프리카 등이 비록 규모가 축소되어 있지만 서쪽편에 자리잡고 있다. 유럽에 있는 나라들은 서양 선교사들의 여러 서적을 통해 실재하는 국가로 인정된 것들이다. 직방세계의 외연이 뚜렷하게 확장되어있음을 알 수 있다. 참조[편집] 오상학, 한국지도학회, 논문 &lt;목판본 여지전도의 특징과 지리사상사적 의미&gt;; 2001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여지전도&amp;oldid=11804827" 분류: 한국의 고지도옛 세계 지도목판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4년 1월 3일 (금) 02: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여지전도는 19세기 김정호가 만든 세계지도입니다. 이 지도는 86cm x 62cm 크기로, 조선 사회가 서양의 지리 지식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여줍니다. 지도는 사각형 형태로 세계를 그렸고, 동양인에게 낯선 아메리카 대륙은 제외했습니다. 중국을 중심에 두고 유럽과 아프리카는 축소하여 그리면서도, 지구가 둥글다는 개념을 일부 수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여지전도는 서양의 지도가 조선에 전해진 후, 조선의 학자들이 만든 결과물입니다. 1850-60년대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외세에 대한 위기의식을 느끼고 세계 지리를 이해하기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이 지도는 구대륙을 중심으로 그려졌고, 신대륙은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 신대륙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여지전도는 지구가 둥글다는 개념을 일부 반영하면서도, 여전히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지도에는 유럽과 아프리카가 그려져 있지만, 그 규모는 작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서양의 국가들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전문용어로 풀어서 요약해줘. 단, 원문의 핵심 메시지는 그대로 유지하고, 문장도 자연스럽게 이어줘.
허리케인_린다
https://ko.wikipedia.org/wiki/허리케인_린다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허리케인 린다 (1997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허리케인 린다 (1997년)</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span>(<a>허리케인 린다</a>에서 넘어옴)</span></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caption><b>허리케인 린다</b> </caption> <tbody><tr> <th colspan="3"><b>5등급 허리케인</b> <b>(<a>SSHS</a>)</b> </th></tr> <tr> <td colspan="3"><a><img></a><br>허리케인 린다 (9월 12일) </td></tr> <tr> <td><b>발생일</b> </td> <td colspan="2"><a>1997년</a> <a>9월 9일</a> </td></tr> <tr> <td><b>소멸일</b> </td> <td colspan="2"><a>1997년</a> <a>9월 17일</a> </td></tr> <tr> <td><b>최저 기압</b> </td> <td colspan="2">902hPa </td></tr> <tr> <td><b>최대 풍속</b><br><small>(1분 평균)</small> </td> <td colspan="2">80m/s (160kt) </td></tr> <tr> <td><b>최대 크기</b><br><small>(직경)</small> </td> <td colspan="2">- </td></tr> <tr> <td><b>인명 피해</b><br><small>(사망·실종)</small> </td> <td colspan="2">0명 </td></tr> <tr> <td><b>재산 피해</b><br><small>(억원)</small> </td> <td colspan="2">- </td></tr></tbody></table> <p><b>허리케인 린다</b>(Hurricane Linda)는 <a>1997</a>년의 13번째 <a>허리케인</a>으로, 중심기압이 902 hPa를 기록해 동태평양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허리케인이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허리케인의 진행</span></a></li> <li><a><span>2</span> <span>대비</span></a></li> <li><a><span>3</span> <span>피해</span></a></li> <li><a><span>4</span> <span>기록</span></a></li> </ul> </div> <h2><span></span><span>허리케인의 진행</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허리케인 린다의 이동 경로</div></div></div> <p>허리케인 린다의 초기 상태로는 이렇게 믿어진다. <a>8월 24일</a> <a>아프리카 대륙</a> 서부 해안선에서 열대성 기압대가 배치되어 서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그러나 이 때 아무런 발달없이 계속해서 같은 세력으로 이동해 허리케인으로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고 난 뒤 <a>9월 6일</a>에 <a>파나마</a> 서쪽 해양에서 상승기류가 발달하였는데, 이 상승기류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동해 온 저기압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상승기류는 서진하여 조금씩 발달하다가 드디어 <a>9월 9일</a> 낮에 <a>콜리나 주</a> <a>만자닐로</a> 남쪽 약 740 km (460 mi) 부근 해상에서 열대저기압 14-E로 이름이 붙여졌다. </p><p>열대저기압이 되면서 이 저기압은 북서쪽으로 9.7~19 km/h (6~12 mph)의 속력으로 전진해나갔다. 이 때 <a>바하칼리포르니아수르주</a> 남단에 위치한 <a>저기압</a>대의 영향을 받아 북서진했다. 이 날 부터 빠르게 강해져 <a>9월 10일</a>에 <a>열대 폭풍</a>으로 발달하였고 열대폭풍이 되면서 <a>미국 국립 허리케인 센터</a>(NHC)가 '린다(Linda)'로 명명했다. 끊임없이 강력해져 <a>9월 11일</a>부터 <a>허리케인의 눈</a>이 불규칙하게 나타났다가 소멸되는 현상을 겪었고 곧 NHC가 <a>허리케인</a>의 지위로 승격시켰다. 허리케인 린다는 급격하게 강력해져 24시간만에 81 hPa가 떨어졌다. 이 수치는 1시간마다 평균적으로 3.38 hPa가 낮아진 것과 같다. <a>9월 12일</a>까지 이런 현상이 나타나다가 <a>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a> 제5등급에 들어섰고 이어서 <a>소코로 섬</a> 남동쪽 약 235 km (145 mi) 부근 해상에서 풍속 295 km/h (185 mph)에 도달하게 되어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린다의 최대풍속은 <a>드보락 분류법</a>에 의해 290~314 km/h (180~195 mph)으로 추정되고 있고 최대순간풍속은 351 km/h (218 mph)까지 치솟았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린다의 최저중심기압은 902 hPa로 기록되어 있으나, 허리케인이 실존해 있었을 때의 중심기압은 902 hPa보다 약간 낮은 900 hPa 정도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한편 중심기압 902 hPa는 동태평양에서 관측된 모든 <a>허리케인</a> 중에서 가장 강한 수치이다. </p><p>최성기를 맞이한 후에 린다는 소코로 섬 근처를 <a>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a> 제5등급의 세력으로 거쳐갔으며, 이 때 기상예보관들은 린다가 북쪽으로 이동해 <a>미국</a> <a>캘리포니아주</a> 남부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주 해안 쯤에 도달했을 때, 그 때는 이미 세력이 많이 약해져 <a>열대 폭풍</a>의 세력으로 주에 상륙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예상을 깨고, 허리케인 린다는 서북서쪽으로 완전히 다르게 이동했다. 린다가 육지에서 많이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 주에는 비구름이 몰려와 많은 비가 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서북서쪽으로 이동해 수온이 낮은 <a>태평양</a>으로 이동하면서 빠르게 약화되었고 결국 <a>9월 15일</a>에 <a>열대 폭풍</a>으로 약해진 뒤, 이틀 후 <a>9월 17일</a>에 <a>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a> 남쪽 끄트머리에서 서쪽으로 약 1,778 km (1,105 mi) 지점에서 <a>열대 저기압</a>으로 약해졌다. </p><p>예보관과 컴퓨터들은 어떻게 린다가 강력해질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NHC에서만 린다가 72시간내에 풍속이 185 km/h (115 mph)에 도달해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허리케인 린다의 최대중심기압은 880 hPa까지 떨어졌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현재의 기록인 902 hPa보다 무려 22 hPa가 낮은 기록이다. <a>1997년</a>에는 <a>엘니뇨</a>가 기승을 부려 평소 수온보다 높게 나타나 많은 강한 허리케인와 태풍이 나왔다. 실제로 <a>1997년</a>에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한 29개의 <a>1997년 태풍</a> 중, 슈퍼태풍의 세력이었던 태풍이 11개나 되어, <a>1965년</a>의 11개와 맞먹는 기록이 되었다. <a>1997년</a>의 동태평양 허리케인에서는 슈퍼태풍이 전체 19개 중 7개가 나왔다. 허리케인 린다는 약 한 달 전에 발생한, 거의 같은 강한 세력이었던 <a>허리케인 길레모</a>와 매우 흡사한 점이 많다. 린다가 지나간 지점에서는 수온이 크게 낮아져 후에 제16호 허리케인인 <a>허리케인 노라 (1997년)</a>가 이 지점을 통과할 때 세력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p> <h2><span></span><span>대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허리케인 린다의 초기 예보</div></div></div> <p>허리케인 린다는 육지에 아무데도 상륙하지 않았지만 중심의 <a>허리케인의 눈</a>이 최성기의 시기에 <a>소코로 섬</a>과 매우 가깝게 통과했다. 린다는 섬의 전기를 끊어 섬이 정전사태를 맞이했다. 섬의 기상관측소에서 중심기압이 986 hPa가 관측되었다. </p><p><a>멕시코</a>에서는 아무 허리케인 주의보와 경보가 발령되지 않았으나 높은 파도와 강풍이 멕시코 해안지역을 덮쳤고 5개의 항구가 폐쇄되었다. 해안가에서는 2.4 m (7.8 ft)의 파도가 일었다. </p><p>허리케인 린다가 서북서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좌측의 그림과 같이 예보는 <a>캘리포니아주</a> 남부에 <a>열대 폭풍</a>의 세력으로 린다가 도달할 것이라고 나와있다. 이전에 캘리포니아 주 해안에 상륙한 허리케인은 <a>1939년</a>의 <a>1939년 캘리포니아 허리케인</a>으로, 59년 만에 <a>미국</a> 해안에 상륙할 것이라고 발표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기상 서비스 센터에서는 캘리포니아 주 남부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발표하고 경고령을 내렸으나 확실하지는 않아 매스컴한테는 허리케인을 과장해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기상 서비스 센터에서는 폭우로 인해 홍수가 일어날 수 있고 높은 파도가 해안가를 덮칠 수 있다는 경고를 했고 이에 대응해 작업자들은 배수구를 정비하고 해안가 침수를 막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p> <h2><span></span><span>피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허리케인 린다는 서북서쪽으로 향해 가 본토에는 직접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으나 <a>캘리포니아주</a> 남부에서 4.6~5.5 m (15~18 ft)의 파도가 해안가를 덮쳤고 <a>뉴포트비치</a>의 방파제에서 5명이 떠내려가 약 270 m (900 ft)까지 떠밀려갔는데, 지나가는 선박에 의해 무사히 구조되었다. 린다에서의 비구름이 캘리포니아 주로 이동해 골프공 크기 만한 <a>우박</a>이 내린 일도 있었다. 샌버너디노 군과 리버사이드 군 경계에 있는 <a>샌고르고니오 야생동물 서식지</a>에서는 1시간에 64 mm의 강수량이 관측되었다. 주(州)에서의 강수량은 홍수와 산사태를 불러일으켜 2채의 집을 파괴시켰고 77채는 파손되었고, 총 320만달러(1997년 기준)의 재산피해액이 나왔다. <a>샌디에이고</a>에서는 1.3 mm의 비가 내려 비가 관측된 기상청에서는 164일만에 비가 관측되었다. 163일동안 비가 내리지 않은 기록은 <a>1915년</a>과 <a>1924년</a>의 기록과 같다. 비구름은 미국 중북부 지역까지 확대되어 <a>미네소타주</a>의 최대도시인 <a>미니애폴리스</a>에 50 mm의 비가 내렸다. </p> <h2><span></span><span>기록</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허리케인 린다가 중심기압 902 hPa를 기록하면서 <a>1966년</a>부터 발생한 모든 동태평양 허리케인을 통틀어 가장 강한 허리케인이 되었다. 이전의 기록은 <a>1973년</a>에 발생한 <a>허리케인 애바</a>가 기록한 915 hPa였으나 25년 만에 그 기록이 깨지게 되었다. 그러나 린다의 중심기압이 직접 관측된 관측소는 아무곳도 없어서 902 hPa의 기록이 확실하지는 않고 단지 예상만 했을 뿐이다. 그래서 허리케인 애바가 현재까지도 가장 강한 허리케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p><p>허리케인 린다(Linda)가 남긴 육지에서의 피해는 심각하지 않아 제명이 되지 않았고 <a>2003년</a>과 <a>2009년</a>에 같은 이름이 다시 쓰이게 되었다. </p>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허리케인_린다_(1997년)&amp;oldid=22429775</a>"</div> <div><div><a>분류</a>: <ul><li><a>1997년 동태평양 허리케인</a></li><li><a>멕시코의 허리케인</a></li><li><a>캘리포니아주의 허리케인</a></li><li><a>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 5등급 열대 저기압</a></li><li><a>1997년 멕시코</a></li><li><a>1997년 미국</a></li><li><a>1997년 9월</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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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상예보관들은 린다가 동서남북중 어디로 이동할 것으로 예상했는가?
북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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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815
5,802
[ "기상예보관들은 린다가 동서남북중 어디로 이동할 것으로 예상했는가?", "린다가 예상과 달리 서북서쪽으로 이동하게 되면서 캘리포니아 주의 날씨는 어떠했는가?", "유일하게 린다가 강해질 것이라고 예측한 곳은?", "1997년에 일어난 기상현상은?", "허리케인 린다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는 허리케인의 이름은?", "허리케인 린다는 약 한달전에 발생한 거의 같은 강한 세력이었던 어떤 허리케인과 흡사한가?", "허리케인 린다가 지나간 후 그 영향으로 세력이 약해진 허리케인은?", "허리케인 린다로 인한 해안가 침수를 예방하기 위해 작업자들이 한 일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기상 서비스 센터에서 매스컴에게 요청한 일은?", "허리케인 린다의 영향으로 인해 뉴포트비치의 방파제에서 몇명이 떠내려갔나?", "허리케인 린다의 영향으로 인해 몇채의 집이 파손되었나?" ]
<!DOCTYPE html> 허리케인 린다 (1997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허리케인 린다 (1997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허리케인 린다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caption>허리케인 린다 </caption> <tbody><tr> <th colspan="3">5등급 허리케인 (SSHS) </th></tr> <tr> <td colspan="3">허리케인 린다 (9월 12일) </td></tr> <tr> <td>발생일 </td> <td colspan="2">1997년 9월 9일 </td></tr> <tr> <td>소멸일 </td> <td colspan="2">1997년 9월 17일 </td></tr> <tr> <td>최저 기압 </td> <td colspan="2">902hPa </td></tr> <tr> <td>최대 풍속(1분 평균) </td> <td colspan="2">80m/s (160kt) </td></tr> <tr> <td>최대 크기(직경) </td> <td colspan="2">- </td></tr> <tr> <td>인명 피해(사망·실종) </td> <td colspan="2">0명 </td></tr> <tr> <td>재산 피해(억원) </td> <td colspan="2">- </td></tr></tbody></table> 허리케인 린다(Hurricane Linda)는 1997년의 13번째 허리케인으로, 중심기압이 902 hPa를 기록해 동태평양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허리케인이다. 목차 1 허리케인의 진행 2 대비 3 피해 4 기록 허리케인의 진행[편집] 허리케인 린다의 이동 경로 허리케인 린다의 초기 상태로는 이렇게 믿어진다. 8월 24일 아프리카 대륙 서부 해안선에서 열대성 기압대가 배치되어 서쪽으로 계속 이동했다. 그러나 이 때 아무런 발달없이 계속해서 같은 세력으로 이동해 허리케인으로의 변화가 없었다. 그러고 난 뒤 9월 6일에 파나마 서쪽 해양에서 상승기류가 발달하였는데, 이 상승기류가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동해 온 저기압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왔다. 상승기류는 서진하여 조금씩 발달하다가 드디어 9월 9일 낮에 콜리나 주 만자닐로 남쪽 약 740 km (460 mi) 부근 해상에서 열대저기압 14-E로 이름이 붙여졌다. 열대저기압이 되면서 이 저기압은 북서쪽으로 9.7~19 km/h (6~12 mph)의 속력으로 전진해나갔다. 이 때 바하칼리포르니아수르주 남단에 위치한 저기압대의 영향을 받아 북서진했다. 이 날 부터 빠르게 강해져 9월 10일에 열대 폭풍으로 발달하였고 열대폭풍이 되면서 미국 국립 허리케인 센터(NHC)가 '린다(Linda)'로 명명했다. 끊임없이 강력해져 9월 11일부터 허리케인의 눈이 불규칙하게 나타났다가 소멸되는 현상을 겪었고 곧 NHC가 허리케인의 지위로 승격시켰다. 허리케인 린다는 급격하게 강력해져 24시간만에 81 hPa가 떨어졌다. 이 수치는 1시간마다 평균적으로 3.38 hPa가 낮아진 것과 같다. 9월 12일까지 이런 현상이 나타나다가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 제5등급에 들어섰고 이어서 소코로 섬 남동쪽 약 235 km (145 mi) 부근 해상에서 풍속 295 km/h (185 mph)에 도달하게 되어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린다의 최대풍속은 드보락 분류법에 의해 290~314 km/h (180~195 mph)으로 추정되고 있고 최대순간풍속은 351 km/h (218 mph)까지 치솟았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린다의 최저중심기압은 902 hPa로 기록되어 있으나, 허리케인이 실존해 있었을 때의 중심기압은 902 hPa보다 약간 낮은 900 hPa 정도를 기록했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한편 중심기압 902 hPa는 동태평양에서 관측된 모든 허리케인 중에서 가장 강한 수치이다. 최성기를 맞이한 후에 린다는 소코로 섬 근처를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 제5등급의 세력으로 거쳐갔으며, 이 때 기상예보관들은 린다가 북쪽으로 이동해 미국 캘리포니아주 남부에 도달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캘리포니아 주 해안 쯤에 도달했을 때, 그 때는 이미 세력이 많이 약해져 열대 폭풍의 세력으로 주에 상륙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모든 예상을 깨고, 허리케인 린다는 서북서쪽으로 완전히 다르게 이동했다. 린다가 육지에서 많이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캘리포니아 주에는 비구름이 몰려와 많은 비가 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서북서쪽으로 이동해 수온이 낮은 태평양으로 이동하면서 빠르게 약화되었고 결국 9월 15일에 열대 폭풍으로 약해진 뒤, 이틀 후 9월 17일에 바하칼리포르니아 반도 남쪽 끄트머리에서 서쪽으로 약 1,778 km (1,105 mi) 지점에서 열대 저기압으로 약해졌다. 예보관과 컴퓨터들은 어떻게 린다가 강력해질지 예상하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NHC에서만 린다가 72시간내에 풍속이 185 km/h (115 mph)에 도달해 강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허리케인 린다의 최대중심기압은 880 hPa까지 떨어졌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현재의 기록인 902 hPa보다 무려 22 hPa가 낮은 기록이다. 1997년에는 엘니뇨가 기승을 부려 평소 수온보다 높게 나타나 많은 강한 허리케인와 태풍이 나왔다. 실제로 1997년에 북서태평양에서 발생한 29개의 1997년 태풍 중, 슈퍼태풍의 세력이었던 태풍이 11개나 되어, 1965년의 11개와 맞먹는 기록이 되었다. 1997년의 동태평양 허리케인에서는 슈퍼태풍이 전체 19개 중 7개가 나왔다. 허리케인 린다는 약 한 달 전에 발생한, 거의 같은 강한 세력이었던 허리케인 길레모와 매우 흡사한 점이 많다. 린다가 지나간 지점에서는 수온이 크게 낮아져 후에 제16호 허리케인인 허리케인 노라 (1997년)가 이 지점을 통과할 때 세력이 약해지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대비[편집] 허리케인 린다의 초기 예보 허리케인 린다는 육지에 아무데도 상륙하지 않았지만 중심의 허리케인의 눈이 최성기의 시기에 소코로 섬과 매우 가깝게 통과했다. 린다는 섬의 전기를 끊어 섬이 정전사태를 맞이했다. 섬의 기상관측소에서 중심기압이 986 hPa가 관측되었다. 멕시코에서는 아무 허리케인 주의보와 경보가 발령되지 않았으나 높은 파도와 강풍이 멕시코 해안지역을 덮쳤고 5개의 항구가 폐쇄되었다. 해안가에서는 2.4 m (7.8 ft)의 파도가 일었다. 허리케인 린다가 서북서쪽으로 이동하기 전에 좌측의 그림과 같이 예보는 캘리포니아주 남부에 열대 폭풍의 세력으로 린다가 도달할 것이라고 나와있다. 이전에 캘리포니아 주 해안에 상륙한 허리케인은 1939년의 1939년 캘리포니아 허리케인으로, 59년 만에 미국 해안에 상륙할 것이라고 발표했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기상 서비스 센터에서는 캘리포니아 주 남부에 많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발표하고 경고령을 내렸으나 확실하지는 않아 매스컴한테는 허리케인을 과장해 보도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기상 서비스 센터에서는 폭우로 인해 홍수가 일어날 수 있고 높은 파도가 해안가를 덮칠 수 있다는 경고를 했고 이에 대응해 작업자들은 배수구를 정비하고 해안가 침수를 막기 위해 모래주머니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피해[편집] 허리케인 린다는 서북서쪽으로 향해 가 본토에는 직접영향을 끼치지는 않았으나 캘리포니아주 남부에서 4.6~5.5 m (15~18 ft)의 파도가 해안가를 덮쳤고 뉴포트비치의 방파제에서 5명이 떠내려가 약 270 m (900 ft)까지 떠밀려갔는데, 지나가는 선박에 의해 무사히 구조되었다. 린다에서의 비구름이 캘리포니아 주로 이동해 골프공 크기 만한 우박이 내린 일도 있었다. 샌버너디노 군과 리버사이드 군 경계에 있는 샌고르고니오 야생동물 서식지에서는 1시간에 64 mm의 강수량이 관측되었다. 주(州)에서의 강수량은 홍수와 산사태를 불러일으켜 2채의 집을 파괴시켰고 77채는 파손되었고, 총 320만달러(1997년 기준)의 재산피해액이 나왔다. 샌디에이고에서는 1.3 mm의 비가 내려 비가 관측된 기상청에서는 164일만에 비가 관측되었다. 163일동안 비가 내리지 않은 기록은 1915년과 1924년의 기록과 같다. 비구름은 미국 중북부 지역까지 확대되어 미네소타주의 최대도시인 미니애폴리스에 50 mm의 비가 내렸다. 기록[편집] 허리케인 린다가 중심기압 902 hPa를 기록하면서 1966년부터 발생한 모든 동태평양 허리케인을 통틀어 가장 강한 허리케인이 되었다. 이전의 기록은 1973년에 발생한 허리케인 애바가 기록한 915 hPa였으나 25년 만에 그 기록이 깨지게 되었다. 그러나 린다의 중심기압이 직접 관측된 관측소는 아무곳도 없어서 902 hPa의 기록이 확실하지는 않고 단지 예상만 했을 뿐이다. 그래서 허리케인 애바가 현재까지도 가장 강한 허리케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허리케인 린다(Linda)가 남긴 육지에서의 피해는 심각하지 않아 제명이 되지 않았고 2003년과 2009년에 같은 이름이 다시 쓰이게 되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허리케인_린다_(1997년)&amp;oldid=22429775" 분류: 1997년 동태평양 허리케인멕시코의 허리케인캘리포니아주의 허리케인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 5등급 열대 저기압1997년 멕시코1997년 미국1997년 9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Tagalog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7일 (월) 00:4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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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 린다(Hurricane Linda)는 1997년 9월 9일부터 17일까지 발생한 강력한 허리케인으로, 동태평양에서 가장 강한 허리케인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허리케인은 중심 기압이 902 hPa로, 이전 기록을 깨뜨렸습니다. 허리케인은 아프리카 대륙 서부 해안에서 시작되어, 9월 6일에 저기압으로 발전한 후 9월 9일에 열대저기압으로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이후 빠르게 강해져 9월 12일에는 295 km/h의 최대 풍속에 도달하며 5등급 허리케인으로 분류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캘리포니아주에 상륙하지 않고 서북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약해졌습니다. 린다는 소코로 섬 근처를 지나면서 전기를 끊고, 멕시코 해안에 높은 파도를 일으켰습니다. 캘리포니아주에서는 비구름이 이동해 강한 비와 우박이 내렸고, 이로 인해 홍수와 산사태가 발생했습니다. 피해는 있었지만 인명 피해는 없었습니다. 결국 허리케인 린다는 1997년의 다른 허리케인들과 함께 강력한 허리케인 시즌을 이끌었고, 그 기록은 이후에도 주목받고 있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전문용어로 풀어서 요약해줘. 단, 원문의 핵심 메시지는 그대로 유지하고, 문장도 자연스럽게 이어줘.
사회적_평등
https://ko.wikipedia.org/wiki/사회적_평등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사회적 평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사회적 평등</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d><div><img></div></td><td><span>이 글의 <b><a>중립성</a>에 대한 이의</b>가 제기되었습니다.<span>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a>토론 문서</a>에서 나누어 주세요.<br>주관적인 내용이나 감정적인 표현은 없는지,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여러 관점이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span> <small>(2018년 6월)</small><span></span></span></td></tr></tbody></table> <p><b>사회적 평등</b>이란 사회에서 인간의 평등이 구현되는 바를 가리킨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개념</span></a></li> <li><a><span>2</span> <span>평등 사회</span></a></li> <li><a><span>3</span> <span>함께보기</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개념</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인간의 평등은 사회적 조건이 구비되었을 때 실현가능하다. 근세초기에 인간이 평등해야 한다는 이념을 내세운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인간은 사회적으로 출생과 함께 매우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분적인 불평등을 타파하지 않고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활발하게 자기의 개성을 개발해서 자아를 실현할 수가 없었다. </p><p>농민의 아들로 태어나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큰 뜻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농부의 신세를 벗어날 길이 없는 상태는 그 개인의 큰 불행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힘껏 행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인간 평등의 원리가 높게 제창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근세인은 과거의 신분적·계급적 구속에서 해방되어 각자가 자기의 재능과 희망을 최대한 발휘하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근세의 자유는 인격의 평등에서 도출된 또 하나의 이념이고 실천이라고 할 수가 있다. </p><p>농노적(農奴的)인 구속이나 노예의 신분적 구속의 배제는 인격의 평등 때문이고 그러한 구속이 배제된 결과는 모든 사람이 상하없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실현케 한 점이다. 자유주의의 결과 근세 시민사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한마디로 산업혁명을 통한 경제의 발전이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진전했다는 사실이다.인류는 주로 농업을 주된 산업으로 생활하는 삶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천 년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농업 위주의 사회에는 생산력에 있어서나 생산수단에 있어 그리 큰 변화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의 생활도 비교적 간단하고 검소하며 또 물질적인 생활이 인생에 대해서 지니는 비중도 그다지 큰 것이 아니었다. </p><p>그러나 근대에 들어와서 산업혁명을 치른 결과 인간의 물질적 생활 정도는 과거의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가 없을 만큼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물질적 문명은 과거와 같은 소수의 왕공(王公)이나 귀족들만이 누리는 특권적인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같이 누리고 즐길 수 있는 범인간적(凡人間的)이란 데에 그 특징이 있다. 따라서 근대사회는 물질적 풍요가 그 가장 큰 특징의 하나이고, 인간의 생활은 이러한 풍요한 물질 속에서 편리하고 고도로 발달된 생활수단의 혜택 속에서 삶을 즐기는 시대로 되었다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에서는 물질 그 자체가 인간생활 속에서 차지하는 몫이 크고 값지게 됨을 피할 길이 없다. </p><p>다시 말해서 과거의 인류는 물질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물질적인 차이가 인간의 전 생활영역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근대시민들의 그것보다는 훨씬 적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생활수단이 고도화함에 따라 이제는 물질의 다과(多寡)나 빈부의 차이는 인간의 행과 불행을 판가름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되고, 가난은 그대로 불행과 직결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p><p>특히 자본주의 사회가 성숙해 감에 따라 사회 속에는 현격한 빈부의 차이가 생겨나고, 이 차이는 이제는 개인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무서운 장벽을 이루게 되었다. 인간의 평등, 즉 인격의 평등에서 시작된 근대가 격심한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결과에 도달하게 되었고, 자본주의 사회가 난숙해짐에 따라 이러한 지나친 생활조건의 불평등은 마침내 인격의 평등 그 자체를 정면에서 부인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는,경제적 생활의 격심한 불평등 속에서 인격의 평등을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한한 용기와 조건의 뒷받침이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이젠 인격의 평등을 명실상부하게 이룩하기 위해서는 격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제거하는 사회적 제조건과 제도의 형성이 절실하다 하겠다. </p> <h2><span></span><span>평등 사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세계사는 근·현대 사회를 <b>평등사회</b>로 규정한다.말 그대로 사회와 인간이 평등해졌다는 것이다.과거의 봉건사회는 신분의 귀천이 있어 귀족과 양반이 권력과 부를 독점,세습하고 대다수 양민과 노비를 혹사시키고 착취하던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불평등사회였으나 근현대에는 평범한 사람과 민중이 직장과 사회,국가의 <b>주인</b>으로서의 [<i>역할과 권력</i>]을 평등하게 행사할 수있는 사회다.그러나 기이하게도 대부분의 대중은 평등사회라는 말을 낯설어하며 평등과 평등사회의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반세기에 걸친 독재정치하의 대중조작과 우민화,반공이데올로기 세뇌때문이다. </p><p>평등이념의 맹아는 멀리 올라가지만 평등의 실질적 구현은 18세기 시민혁명의 성공에서 비록됐으니 200여년의 역사를 지닌 뿌리깊은 사상이다.시민혁명 당시의 유럽은 상위 2%정도의 귀족들이 권력과 부를 독점한 채 나머지 98%의 시민과 노예를 지배하던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였다.프랑스혁명은 이런 야만을 뒤엎고 완전히 새로운 사회,즉 만인이 평등한 참 <b>인간의 시대</b>를 최초로 열었다.그러나 이때의 평등은 법,제도상의 평등었지 실질적 평등은 아니었다.<a>사회주의</a>,공산주의 사상이 나오고 1917년 <a>러시아혁명</a>이 성공함으로써 비로소 노동자,농민 등 약자들도 인간답게 평등하게 살수있게 되었다.러시아혁명은 유럽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오히려 유럽이 더 <b>정치</b>,<b>경제</b>적으로 만인이 평등한 생활을 누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그러나 여자,아이들의 인권과 평등은 아직 요원했다. 1968년의 세계적 <a>68 혁명</a>으로 여성 등의 사회적 약자들의 실질적인 권리가 보장되고 명실공히 <b>인류평등</b>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평등은 소수의 부르주아 시민에서 노동자, 여성 순으로 확장, 보장되었고, 다시 법적 평등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평등으로 영역과 폭이 확대된 것이다. </p><p>한국에서도 양반과 상민·노비로 갈려 소수의 양반층이 민중을 가혹하게 억압,착취하던 야만시대를 동학사상의 대두로 혁명이 발발하여 세상이 뒤바뀌기 시작했다.동학도들끼리는 남녀노소,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서로를 평등하게 대우하고 하늘처럼 섬겼다(사인여천,인내천).그러나 식민기를 거치면서 평등사상이 희박해졌고 오랜 독재정치로 완전히 평등사상은 사라졌다.그리고 5,18광주항쟁과 87년 6월민중항쟁으로 민주주의가 부활함으로써 평등사상도 겨우 빛은 보게 되었다.그러나 이런 도도한 평등의 세계사와 생생한 민족적 체험이 있었음에도,현재 <i>한국사회는 전혀 평등하지가 않다</i>.경제,군사적으로는 선진을 넘어 일류국가를 부르짖으면서도 인간의 상당한 경제적 평등은 고사하고 평등의 초보단계인 법적 정치권력적 평등도 정착시키지 못하고 있다.사회복지 수준,사회구성원의 대다수인 노동자의 지위와 권한,여성의 권리 등에 있어 일류는커녕 거의 중후진국 수준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경제,군사 선진국답게 정치·경제적 평등수준과 사람들 모두의 권익 보장도 선진국다워야 정상이지 이렇게 불균형한 기형적인 나라에서 무슨 희망과 믿음이 있겠는가! </p><p>평등이냐,불평등이냐 하는 문제는 인간이냐,인간이 아니냐 하는 문제로 인류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평등한 사회이면 인간다운 세상이고 그렇지 않고 불평등하면 짐승의 세계에서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역사의 확고한 언명이고 판단이다.지금 한국에서 요구되는 것은 당장 선진국처럼 평등사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역사의 보편적 이치인 인간<a>평등주의</a>에 대한 관념을 일깨우고 마음껏 평등을 주장,설파하고 널리 세상에 확산시키는 것이다.불행히도 한국은 헌법상 사상과 언론,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악법과 굳어진 관습으로 평등주의에 대해 자유롭게 말도 못하는 사회다.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정치권력적으로,경제,사회적으로 대통령과도 맞먹는 엄연한 주권자로서 존엄하게 평등한 존재다.<sup><a>&#91;1&#93;</a></sup> </p> <h2><span></span><span>함께보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table> <tbody><tr> <td><img></td> <td> <b><a>위키문헌</a></b>에 이 글과<br>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div><b><a>평등의 원리</a></b></div> </td> </tr> </tbody></table> <ul><li><a>평등</a></li> <li><a>평등주의</a></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강만길《고쳐쓴 한국근대사》창비/ 캘리니코스《평등》울력ㅡ참조</span> </li> </ol></div></div> <div><small><a><img></a><a><img></a> 이 문서에는 <a>다음커뮤니케이션</a>(현 <a>카카오</a>)에서 <a>GFDL</a> 또는 <a>CC-SA</a> 라이선스로 배포한 <a>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a>의 "평등의 원리"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small></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사회적_평등&amp;oldid=21621498</a>"</div> <div><div><a>분류</a>: <ul><li><a>윤리학</a></li><li><a>사회학</a></li><li><a>인권</a></li><li><a>사회적 불평등</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2018년 6월</a></li><li><a>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모든 문서</a></li><li><a>전체의 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a></li><li><a>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Alemannisch</a></li><li><a>العربية</a></li><li><a>Asturianu</a></li><li><a>Български</a></li><li><a>Català</a></li><li><a>Dansk</a></li><li><a>Deutsch</a></li><li><a>English</a></li><li><a>Esperanto</a></li><li><a>Español</a></li><li><a>فارسی</a></li><li><a>Suomi</a></li><li><a>Français</a></li><li><a>Galego</a></li><li><a>हिन्दी</a></li><li><a>Հայերեն</a></li><li><a>Bahasa Indonesia</a></li><li><a>Italiano</a></li><li><a>Lietuvių</a></li><li><a>Latviešu</a></li><li><a>Nederlands</a></li><li><a>Occitan</a></li><li><a>Polski</a></li><li><a>Português</a></li><li><a>Русский</a></li><li><a>Simple English</a></li><li><a>Soomaaliga</a></li><li><a>Српски / srpski</a></li><li><a>Svenska</a></li><li><a>Тоҷикӣ</a></li><li><a>ไทย</a></li><li><a>Türkçe</a></li><li><a>Українська</a></li><li><a>Tiếng Việt</a></li><li><a>中文</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8년 6월 23일 (토) 05: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과거처럼 특권계층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같이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근대 물질적 문명의 특징은?
범인간적(凡人間的)
null
94906
5,552
[ "과거처럼 특권계층 뿐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다같이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근대 물질적 문명의 특징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에서 인간생활 중 차지하는 몫이 가장 크고 값진 것은?", "근대사회에서 가장 큰 특징은?", "근대에 물질적 문명의 특징은?", "산업혁명이 가져온 근대사회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무엇인가?", "근대사회의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 혁명은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가 성숙해감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 이제는 개인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무서운 장벽을 이루게 된 것은?", "격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제거하는 사회적 제조건과 제도의 형성으로 이룩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평등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떠한 불평등을 제거해야 하는가?", "자본주의 사회가 성숙해지면서 어떠한 차이가 생겨났는가?", "개인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현대사회의 극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낳은 경제 체제는 무엇인가?", "인격의 평등을 이룩하기 위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극복하고 제거해야할 불평등은 무엇인가?", "평등이 실질적으로 구현되기 시작한 시기는?", "1917년 성공했고 비로소 노동자, 농민 등 약자들이 인간답게 평등하게 살 수 있게 된 혁명은?", "약자들도 인간답게 평등하게 살 수 있게 해준 혁명은 몇년도에 성공했는가?", "역사속에서 마지막으로 평등이 확장 보장된 사회적 약자는?", "18세기, 소수가 독점하던 권력을 뒤엎고 평등한 시대를 처음 열게 되었던 시민혁명은 무엇인가?", "법, 제도상의 평등을 넘어 실질적인 평등을 구현토록 하였으며 유럽에 큰 영향을 끼친 혁명은?", "한국의 야만시대가 서로를 평등하게 대우하는 계기가 된 사상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서로를 평등하게 대우하고 하늘처럼 섬기는 태도 및 사상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민주주의가 부활하도록 도운 87년에 일어난 항쟁은?", "한국사회가 선진을 넘어 일류국가를 부르짖는 분야는?", "조선 말기 사회적 혼란 속에서 대두되었던 사상으로 인본주의를 바탕에 두고 있는 사상은?", "경제적인 평등에 앞서 평등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로 일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짐승의 세계와 반대되는 세상은?", "한국이 언론 표현의 자유가 보장 되어 있음에도 평등주의에 대해 자유롭게 말 못하는 사회가 된 원인은?" ]
<!DOCTYPE html> 사회적 평등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사회적 평등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d></td><td>이 글의 중립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다면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주관적인 내용이나 감정적인 표현은 없는지,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여러 관점이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 (2018년 6월)</td></tr></tbody></table> 사회적 평등이란 사회에서 인간의 평등이 구현되는 바를 가리킨다. 목차 1 개념 2 평등 사회 3 함께보기 4 각주 개념[편집] 인간의 평등은 사회적 조건이 구비되었을 때 실현가능하다. 근세초기에 인간이 평등해야 한다는 이념을 내세운 것은 그때까지만 해도 인간은 사회적으로 출생과 함께 매우 불평등한 대우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신분적인 불평등을 타파하지 않고는 모든 인간은 자유롭고 활발하게 자기의 개성을 개발해서 자아를 실현할 수가 없었다.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면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고 큰 뜻을 품고 있다고 하더라도 농부의 신세를 벗어날 길이 없는 상태는 그 개인의 큰 불행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원하는 바를 힘껏 행할 수 있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서 인간 평등의 원리가 높게 제창되었으며 그로 인해서 근세인은 과거의 신분적·계급적 구속에서 해방되어 각자가 자기의 재능과 희망을 최대한 발휘하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근세의 자유는 인격의 평등에서 도출된 또 하나의 이념이고 실천이라고 할 수가 있다. 농노적(農奴的)인 구속이나 노예의 신분적 구속의 배제는 인격의 평등 때문이고 그러한 구속이 배제된 결과는 모든 사람이 상하없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실현케 한 점이다. 자유주의의 결과 근세 시민사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그것은 한마디로 산업혁명을 통한 경제의 발전이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진전했다는 사실이다.인류는 주로 농업을 주된 산업으로 생활하는 삶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천 년간 지속되었다. 이러한 농업 위주의 사회에는 생산력에 있어서나 생산수단에 있어 그리 큰 변화가 있을 수 없고, 따라서 인간의 생활도 비교적 간단하고 검소하며 또 물질적인 생활이 인생에 대해서 지니는 비중도 그다지 큰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와서 산업혁명을 치른 결과 인간의 물질적 생활 정도는 과거의 어느 누구도 상상할 수가 없을 만큼 높아졌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물질적 문명은 과거와 같은 소수의 왕공(王公)이나 귀족들만이 누리는 특권적인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이 다같이 누리고 즐길 수 있는 범인간적(凡人間的)이란 데에 그 특징이 있다. 따라서 근대사회는 물질적 풍요가 그 가장 큰 특징의 하나이고, 인간의 생활은 이러한 풍요한 물질 속에서 편리하고 고도로 발달된 생활수단의 혜택 속에서 삶을 즐기는 시대로 되었다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물질적으로 풍요한 사회에서는 물질 그 자체가 인간생활 속에서 차지하는 몫이 크고 값지게 됨을 피할 길이 없다. 다시 말해서 과거의 인류는 물질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물질적인 차이가 인간의 전 생활영역 속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근대시민들의 그것보다는 훨씬 적었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물질적으로 생활수단이 고도화함에 따라 이제는 물질의 다과(多寡)나 빈부의 차이는 인간의 행과 불행을 판가름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하게 되고, 가난은 그대로 불행과 직결되는 사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가 성숙해 감에 따라 사회 속에는 현격한 빈부의 차이가 생겨나고, 이 차이는 이제는 개인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무서운 장벽을 이루게 되었다. 인간의 평등, 즉 인격의 평등에서 시작된 근대가 격심한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결과에 도달하게 되었고, 자본주의 사회가 난숙해짐에 따라 이러한 지나친 생활조건의 불평등은 마침내 인격의 평등 그 자체를 정면에서 부인하는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는,경제적 생활의 격심한 불평등 속에서 인격의 평등을 부르짖는다는 것은 무한한 용기와 조건의 뒷받침이 있어야 함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이젠 인격의 평등을 명실상부하게 이룩하기 위해서는 격심한 경제적 불평등을 제거하는 사회적 제조건과 제도의 형성이 절실하다 하겠다. 평등 사회[편집] 세계사는 근·현대 사회를 평등사회로 규정한다.말 그대로 사회와 인간이 평등해졌다는 것이다.과거의 봉건사회는 신분의 귀천이 있어 귀족과 양반이 권력과 부를 독점,세습하고 대다수 양민과 노비를 혹사시키고 착취하던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불평등사회였으나 근현대에는 평범한 사람과 민중이 직장과 사회,국가의 주인으로서의 [역할과 권력]을 평등하게 행사할 수있는 사회다.그러나 기이하게도 대부분의 대중은 평등사회라는 말을 낯설어하며 평등과 평등사회의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반세기에 걸친 독재정치하의 대중조작과 우민화,반공이데올로기 세뇌때문이다. 평등이념의 맹아는 멀리 올라가지만 평등의 실질적 구현은 18세기 시민혁명의 성공에서 비록됐으니 200여년의 역사를 지닌 뿌리깊은 사상이다.시민혁명 당시의 유럽은 상위 2%정도의 귀족들이 권력과 부를 독점한 채 나머지 98%의 시민과 노예를 지배하던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였다.프랑스혁명은 이런 야만을 뒤엎고 완전히 새로운 사회,즉 만인이 평등한 참 인간의 시대를 최초로 열었다.그러나 이때의 평등은 법,제도상의 평등었지 실질적 평등은 아니었다.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이 나오고 1917년 러시아혁명이 성공함으로써 비로소 노동자,농민 등 약자들도 인간답게 평등하게 살수있게 되었다.러시아혁명은 유럽에도 큰 영향을 미쳤는데,오히려 유럽이 더 정치,경제적으로 만인이 평등한 생활을 누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그러나 여자,아이들의 인권과 평등은 아직 요원했다. 1968년의 세계적 68 혁명으로 여성 등의 사회적 약자들의 실질적인 권리가 보장되고 명실공히 인류평등 시대에 들어선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적으로 평등은 소수의 부르주아 시민에서 노동자, 여성 순으로 확장, 보장되었고, 다시 법적 평등에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평등으로 영역과 폭이 확대된 것이다. 한국에서도 양반과 상민·노비로 갈려 소수의 양반층이 민중을 가혹하게 억압,착취하던 야만시대를 동학사상의 대두로 혁명이 발발하여 세상이 뒤바뀌기 시작했다.동학도들끼리는 남녀노소,빈부귀천 가리지 않고 서로를 평등하게 대우하고 하늘처럼 섬겼다(사인여천,인내천).그러나 식민기를 거치면서 평등사상이 희박해졌고 오랜 독재정치로 완전히 평등사상은 사라졌다.그리고 5,18광주항쟁과 87년 6월민중항쟁으로 민주주의가 부활함으로써 평등사상도 겨우 빛은 보게 되었다.그러나 이런 도도한 평등의 세계사와 생생한 민족적 체험이 있었음에도,현재 한국사회는 전혀 평등하지가 않다.경제,군사적으로는 선진을 넘어 일류국가를 부르짖으면서도 인간의 상당한 경제적 평등은 고사하고 평등의 초보단계인 법적 정치권력적 평등도 정착시키지 못하고 있다.사회복지 수준,사회구성원의 대다수인 노동자의 지위와 권한,여성의 권리 등에 있어 일류는커녕 거의 중후진국 수준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경제,군사 선진국답게 정치·경제적 평등수준과 사람들 모두의 권익 보장도 선진국다워야 정상이지 이렇게 불균형한 기형적인 나라에서 무슨 희망과 믿음이 있겠는가! 평등이냐,불평등이냐 하는 문제는 인간이냐,인간이 아니냐 하는 문제로 인류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하다.평등한 사회이면 인간다운 세상이고 그렇지 않고 불평등하면 짐승의 세계에서 사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역사의 확고한 언명이고 판단이다.지금 한국에서 요구되는 것은 당장 선진국처럼 평등사회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역사의 보편적 이치인 인간평등주의에 대한 관념을 일깨우고 마음껏 평등을 주장,설파하고 널리 세상에 확산시키는 것이다.불행히도 한국은 헌법상 사상과 언론,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음에도 악법과 굳어진 관습으로 평등주의에 대해 자유롭게 말도 못하는 사회다.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정치권력적으로,경제,사회적으로 대통령과도 맞먹는 엄연한 주권자로서 존엄하게 평등한 존재다.[1] 함께보기[편집] <table> <tbody><tr> <td></td> <td> 위키문헌에 이 글과관련된 원문이 있습니다. 평등의 원리 </td> </tr> </tbody></table> 평등 평등주의 각주[편집] ↑ 강만길《고쳐쓴 한국근대사》창비/ 캘리니코스《평등》울력ㅡ참조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평등의 원리" 항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사회적_평등&amp;oldid=21621498" 분류: 윤리학사회학인권사회적 불평등숨은 분류: 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2018년 6월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모든 문서전체의 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lemannischالعربيةAsturianuБългарскиCatalà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हिन्दी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LietuviųLatviešuNederlandsOccitan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oomaaligaСрпски / srpskiSvenskaТоҷикӣ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6월 23일 (토) 05:4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제목: 사회적 평등: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한 여정 #### 요약 본문: 사회적 평등은 인간이 동등하게 대우받고 권리를 누리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역사적으로, 평등의 개념은 근세에 들어서면서 신분적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한 이념으로 발전하였고, 이는 개인의 자유와 자아 실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물질적 풍요가 증가하면서도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었고, 이는 인격의 평등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현대 사회는 법적 평등을 넘어 정치적, 경제적, 사회·문화적 평등을 추구하고 있으며, 이는 역사적으로 노동자와 여성 등 사회적 약자들의 권리 보장을 통해 확장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여전히 경제적 불평등과 정치적 권력의 불균형 문제를 안고 있으며, 평등의 이념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고 있습니다. #### 결론 요약: 사회적 평등은 인류의 역사에서 중요한 주제이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한국 사회는 과거의 경험을 바탕으로 평등의 가치를 되새기고, 모든 개인이 존엄하게 대우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평등은 단순한 이념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위한 필수 조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글을 기반으로 블로그 요약 포스트를 쓴다고 가정하고,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제목, 요약 본문, 결론 요약까지 작성해줘.
B.o.B
https://ko.wikipedia.org/wiki/B.o.B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B.o.B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B.o.B</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div><a><img></a> <b>비오비</b>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a>BOB</a> 문서를 참조하십시오.</div> <div><div><a><img></a> <div><div><a></a></div>B.o.B</div></div></div> <p><b>B.O.B</b>(<a>1988년</a> <a>11월 15일</a> ~ ) 또는 <b>보비 레이 시먼스</b>(Bobby Ray Simmons)는 미국 <a>조지아주</a> <a>디케이터</a> 출신의 힙합아티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 레코드 프로듀서이다. B.o.B는 현재 그랜드 허슬 레코드(Grand Hustle Records), 레벨 록 엔터테인먼트(Rebel Rock Entertainment), <a>애틀랜틱 레코드</a>에 소속돼 있다. 그는 미국과 영국에서 넘버원을 기록한 데뷔 싱글 "Nothin' on You"로 단번에 명성을 쌓았고 영국에서 1위, 미국에서 2위를 기록한 두 번째 싱글 "Airplanes"으로 유명세를 이어갔다. 연달아 발매한 세 번째 싱글 "Magic"도 빌보드 핫 100의 10위 안에 들었다. </p><p>B.o.B는 MTV에서 선정하는 2010 핫티스트 MC 인 더 게임(Hottest MC in the Game of 2010)에서 9위를 했다. 두 개의 EP앨범과 몇 개의 믹스 테이프를 거쳐 2010년 4월 27일 데뷔 앨범 B.o.B Presents: The Adventures of Bobby Ray가 발매됐다. 이 앨범은 미국 차트에서 1위를 했고 RIAA는 공식적으로 골드(50만 장 판매)를 인증했다. 2012년 5월 1일 B.o.B의 두 번째 정규앨범 Strange Clouds가 발매됐다. 현재 바비 레이는 허슬 레코드 대표인 T.I.와 콜라보레이션 앨범과 록 뮤직 EP를 발매할 계획에 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li> <li><a><span>2</span> <span>디스코그래피</span></a></li> <li><a><span>3</span> <span>수상</span></a></li> <li><a><span>4</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b>1988-2006&#160;: 유년기와 경력의 시작</b> </p><p>시먼스는 <a>노스캐롤라이나주</a> 윈스턴세일럼에서 1988년 11월 15일에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스쿨 밴드에서 트럼펫을 연주했다. 부모님은 학업을 지속하길 바랐지만 6학년(sixth grade) 때 이미 시먼스는 뮤지션의 길을 가고 싶어 했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시먼스에게 음악은 치유이자 창의력의 발휘라는 점을 깨닫게 된 후론 반대를 멈췄다. 훗날 시먼스는 과거를 회상하며 “부모님은 언제나 나를 지지해 줬어. 그들은 비트를 만드는 데 필요한 내 첫 번째 키보드를 마련해줬고 이곳저곳에서 내 장비를 마련해 줬어. 하지만 그분들이 내가 진짜로 어떤 걸 얻고자 하는지를 알지 못했을 거야.” 이후 B.o.B는 조지아 주 디케이터 지역의 컬럼비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p><p>2002년 14살의 나이로 그의 멘토이자 공동 경영자인 비. 리치(B. Rich)를 만난 후에, B.o.B는 전 슬립엔 슬라이드 리코딩(lip-n-Slide recording)의 아티스트 씨티(Citti)의 곡 "I'm the Cookie Man."에 쓰인 비트를 처음으로 팔았다. 그때 B.o.B는 자신이 해냈다는 성취감을 이렇게 표현 했다.&#160;: “나는 나가서 내 모든 돈을 순식간에 다 써버렸지. 금방 다시 나는 빈털터리가 됐지만 두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달았지. 우선은 돈을 아껴야 했고 음악에 흠뻑 빠져야 한다는 것이었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B.o.B는 자신의 기술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공연의 오프닝 무대에 서거나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을 지속했다. 2006년 B. 리치는 미성년자인 B.o.B가 애틀랜타 랩퍼 T.I. 소유인 나이트클럽 클럽 크루셜(Club Crucial)에 일할 수 있게 도와줬다. 그곳에서 B.o.B는 자신이 프로듀스한 스포큰 워드 형태의 마리하나의 송가인 "Cloud 9"으로 공연을 했다. 그의 공연을 본 관객 중에는 프로듀서이자 상업 음악의 베테랑인 TJ's DJ'S의 CEO인 T.J. 채프먼(T.J. Chapman)이 있었다. 채프먼은 B.o.B를 공동관리하는 것에 동의했고 몇 달 뒤 B.o.B는 애틀랜틱 레코드와 플로리다 프로듀서 짐 존신(Jim Jonsin)의 운영되는 발매 계열사인 레벌 록과 계약을 맺었다. 애틀랜틱에서 발매된 그의 2007년의 첫 번째 싱글 "Haterz Everywhere"은 빌보드의 버블링 언더 알앤비/힙합 싱글 차트(U.S. Billboard Bubbling Under Hot 100 Singles)에서 탑 5를 기록했다. 그의 솔로 프로덕션 경력은 B.o.B를 플레이보이 트레(Playboy Tre), TJ 채프먼, B. 리치와 함께 햄 스쿼드(Ham Squad)라 불리는 프로덕션/랩 그룹의 일원이 되게 했다. </p><p><b>2007–2008: 명성의 상승과 믹스 테이프</b> </p><p>B.o.B는 2007년 초부터 처음으로 메이저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웨스 피프(Wes Fif)가 피처링한 언더그라운드 싱글 "Haterz Everywhere"는 랩퍼들의 인지도를 얻게 됐고 빌보드 버블링 언더 핫 100 싱글즈에서 5위를 기록했다. 리치 보이가 피처링한 리믹스 버전은 비디오 게임 파이트 나이트 라운드 4(Fight Night Round 4)에 실리게 됐고 연달아 리믹스 버전의 뮤직 비디오도 공개가 됐다. 다른 싱글 I'll Be in the Sky"는 2008년에 발매됐는데 어바웃닷컴(About.com)은 이 노래를 “스마트하고 펑키한 아트 랩과 앨범의 웅장한 서곡”이라고 표현했고 자신들이 선정한 2008 톱 100 랩 송(Top 100 Rap Songs of 2008)에 13위에 랭크 시켰다. 아울러 바비 레이가 프로듀싱한 ‘Generation Lost’도 동일 차트에서 32위에 이름을 올렸다. 연달아 발매된 다른 싱글 "Don't Let Me Fall"는 일반의 랩보다 알앤비에 가까운 노래였다. 그는 T.I.의 앨범 Paper Trail의 "On Top of the World"에서 피처링을 했다. </p><p>같은 해 그는 XXL 매거진에 <a>애셔 로스</a>, 찰스 해밀턴(Charles Hamilton), 웨일(Wale)과 함께 09 힙합의 클래스(Hip-Hop's Class of '09)로서 지목됐다. 2008년 10월에는 B.o.B는 잡지 바이브(Vibe)의 커버에 유망한 재능으로 평가된 어린 뮤지션들과 함께 등장했다. 그는 자신이 80년대 음악, 테크노, 록 펑크, 심지어 두왑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B.o.B는 영국 랩퍼 <a>긱스</a> 같은 뮤지션들과 함께 2007년부터 2008년 까지 4장의 믹스 테이프를 발매했다.&#160;; The Future (2007), Cloud 9 (2007), Hi! My Name is B.o.B (2008) Who the F#*k is B.o.B? (2008)와 두 개의 EP Eastside (2007), 12th Dimension (2008). </p><p><b>2009–2010: 메인스트림 성공과 The Adventures of Bobby Ray</b> </p><p>2009년 5월 B.o.B는 마누 차오(Manu Chao)의 곡 "Mr. Bobby"를 커버해서 발표하며 바비 레이 하나의 이름만 사용하길 원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방향(new direction)으로 음악을 진행할 거라고 말했다.&#160;: "이제 나는 바비 레이로 활동할 거야. 바비 레이를 확실하게 새겨 둬. 나는 정말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거야 -더 자유롭게 특정한 장르에 부합하려 노력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것을 해왔던 것 같지 않아. 나는 그것을 일치 시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지 않아. 하지만 나는 더 많은 자유로운 정신을 느껴. 나는 더 많은 음악적 의지를 가졌어. 그게 나에 관한 모든 거야. 나는 기타이며 화음이자 키보드야.“ 2009년 6월 22일 B.o.B는 그의 여섯 번째 믹스테이프 B.o.B vs. Bobby Ray를 발매했다. T.I.'s T.I. vs. T.I.P. (2007)를 연상시키는 이 믹스테이프는 퓨리(Fury)와 B.o.B 중심으로 제작됐다. 이 믹스테이프에는 레드 스파이다(Red Spyda)가 프로듀서한 "Fly Like Me"와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의 1990년의 히트곡 "Bonita Applebum"을 리믹스한 "Put Me On"이 실려 있다. 리복은 리복 클래식 리믹스 컬렉션 기념행사에서 "Put Me On"을 사용했다. 이 트랙은 전미 풋 락커(Foot Locker)상점에서 리복 클래식 리믹스 컬렉션 제품을 구입한 고객들만 독점적으로 다운받을 수 있었다. </p><p>2010년 1월 13일 B.o.B는 그의 데뷔 앨범 The Adventures of Bobby Ray가 2010년 5월 25일 발매될 거라고 발표했다. 또 앨범 프로모션용으로 첫 앨범 발매 날짜를 뜻하는 May 25라는 믹스테이프도 발매할 거라고 공개했다. May 25는 2010년 2월 1일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발매됐다. 이 믹스테이프에는 J. 콜(J. Cole), 애셔 로스, 플레이보이 트레, 찰스 해밀턴과 <a>브루노 마스</a>가 참여를 했다. 특히 브루노 마스는 보너스 트랙과 B.o.B의 데뷔 싱글 "Nothin' on You” 피처링을 했다. 믹스테이프 May 25와 싱글 "Nothin' on You"의 상업적 성공으로 인해 데뷔 앨범은 2010년 4월 27일로 발매가 앞당겨졌다. 이 앨범은 T.I.의 레코드 회사인 그랜드 허슬에서 발매됐고 <a>루페 피에스코</a>, T.I., 플레이보이 트레, <a>헤일리 윌리엄스</a>, <a>리버스 쿠오모</a>, 리코 바리노(Ricco Barrino), <a>저넬 모네이</a>, 브루노 마스, <a>영 드로</a>가 참여했다. </p><p>세 개의 다른 싱글은 "Don't Let Me Fall"(2010.4.6 발매), "Airplanes"(2010.4.46 발매; 피처링 헤일리 윌리엄스), "Bet I"(2010.4.20; 피처링 T.I, 플레이보이 트레) 이다. “Bet I”의 뮤직비디오는 애틀랜틱 비디오(Atlantic Videos)에 의해 유튜브에 배포됐다. 2010년 4월 27일에 발매된 데뷔 앨범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리뷰가 주어졌다. 이 앨범은 발매된 첫 주에 8만 4천 장이 팔렸고 빌보드 200에서 1위로 데뷔했다. B.o.B는 데뷔 첫째 주에 넘버원에 오른 13번 째 남자 솔로 가수가 됐다. 7월에 B.o.B는 슛팅 포 스타스 투어(The SHOOTiN for Stars Tour)로 명명된 투어를 할 거라고 발표했다. 그 날짜와 시간은 7월 13일 그의 웹 사이트에서 공표됐다. B.o.B와 앨범, 그의 노래는 베트 어워드(Bet Awards), 틴 초이스 어워드(Teen Choice Awards),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MTV Video Music Awards), 뉴 서커프리 서미트(the new Suckerfree Summit)에 후보에 올랐다. "Airplanes"은 개봉 예정 영화인 Charlie St. Cloud의 테일러에 사용됐고 다른 싱글 "Magic"은 그가 등장한 아디다스 매직 캠페인 광고에 사용됐다. B.o.B는 8월 18일 개최되는 2010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의 <a>에미넴</a>, <a>링킨 파크</a>, <a>카녜이 웨스트</a>, 드레이크(Drake), <a>어셔</a>, 파라모어(Paramore), 플로런스 앤드 더 머신(Florence and the Machine), <a>저스틴 비버</a>와 함께 공연자로 선정됐다. </p><p>2010년 8월 14일 <a>헤일리 윌리엄스</a>는 공식 파라모어 팬클럽을 통해 B.o.B는 파라모어의 11월 영국 투어의 메인 게스트일 거라고 발표했다. 또 B.o.B.는 코메리카 파크에서 열리는 에미넴과 <a>제이지</a>의 홈 앤드 홈 투어(The Home &amp; Home Tour)에 오프닝 게스트로 섰다. B.o.B는 MTV 언플러그드(MTV Unplugged)의 무대에도 섰다. 그는 게스트인 로빈 시크(Robin Thicke)와 멜라닌 피오나(Melanie Fiona), 자넬 모네와 함께 그의 데뷔 앨범의 곡들과 MGMT의 곡 "Kids" 커버해 불렀다. 2010년에는 롤라팔루자(Lollapalooza) 축제에 참여했고 12월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부르노 마스와 "Nothin' on You"를 윌리엄스와 "Airplanes"로 무대에 올랐다. 2010년 12월 7일 B.o.B는 믹스테이프 No Genre를 발표했다. B.o.B는 아이튠즈의 2010 리와인드 차트(iTunes 2010 Rewind Chart)에서 베스트 뉴 아티스트(Best New Artist)로 지명됐다. 12월 16일에는 The Adventures of Bobby Ray 앨범이 RIAA에 의해 골드로 인정받았다. 2011년 1월 30일 제시 J(Jessie J)는 B.o.B와 함께 싱글 "Price Tag"를 영국에서 공개했다. 이 노래는 빠르게 영국 차트에 넘어 원을 기록했고 첫 주에만 8만 4천 장이 팔렸다. </p><p><b>2011-현재: Strange Clouds and The Man the Martian</b> </p><p>2011년 3월 22일 일레트로닉 아츠(Electronic Arts)는 B.o.B가 부른 "New York New York"의 일부가 삽입된 일인칭 슈팅 게임 크라이시스2의 런치 테일러를 공개했다. "New York New York"은 <a>프랭크 시나트라</a>가 부른 "Theme from New York, New York"의 메인 피아노 코러스를 차용했는데 코러스를 누가 불렀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노래 전곡은 얼마 뒤 B.o.B의 여덟 번째 미스테이프 E.P.I.C. (Every Play Is Crucial)에 포함됐는데 마이크 캐런(Mike Caren)이 프로듀스를 했다. </p><p>2011년 초 오드 퓨처(Odd Future)의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Tyler, the Creator)는 "Yonkers"라는 곡을 발표했다. 그 노래에서 타일러는 다음과 같이 랩을 했다. What you think of Hayley Williams?(당신은 헤일리 윌리엄스를 어떻게 생각해?) Fuck her, Wolf Haley robbing 'em(빌어먹을, 강도질이나 하는 울프 헤일리) / I'll crash that fucking airplane that that faggot nigga B.o.B is in(나는 호모 검둥이 B.o.B가 타고 있는 비행기를 부셔 버릴 거야) / And stab Bruno Mars in his goddamn esophagus(그리고 브루노 마스의 빌어먹을 식도를 쑤실 거야) / And won't stop until the cops come in(그리고 결찰이 올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야). 이 노래의 대응으로 3월 25일 B.o.B는 오드 퓨처와 그들의 리더 테일러를 대상으로 노래 "No Future"를 발표했다. 2011년 6월 테크 나인Tech N9ne의 열두 번 째 정규앨범 All 6's and 7's에 B.o.B가 피처링하고 프로듀싱할 거라고 알려졌다. 그 노래는 "Am I a Psycho?"이며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와 이슈가 있는 래퍼 호스핀(Hopsin)도 참여했다. 이 노래에서 B.o.B는 명백하게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를 더 공격했다. B.o.B는 케샤의 히트 싱글 "Blow"의 오피셜 리믹스에 참여했다. 이 리믹스는 2011년 5월 17일에 아이튠에서 공개됐다. </p><p>2011년 여름 B.o.B는 T.I.의 의류상품 A.K.O.O의 새로운 모델로 발탁됐다. AKOO 의류의 2011년 가을 캠페인에서 B.o.B는 뉴욕 양키즈의 <a>커티스 그랜더슨</a>, 보스턴 레드 삭스의 <a>칼 크로퍼드</a>, 베트(the Bet)의 히트 시트콤 더 게임(The Game)의 호세아 찬체즈(Hosea Chanchez)와 함께 등장했다. B.o.B는 A.K.O.O의 그래픽 노블 Hide In Plain Sight – Saving the World From Fashion Conspiracy에서도 등장했다. </p><p>2011년 8월 27일 콜로라도 국립대학에서 B.o.B가 공연하는 것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영상에서 B.o.B는 "Strange Clouds"를 선 공개하며 <a>릴 웨인</a>이 피처링할 거라고 공개했다. <a>시러큐스 대학교</a>의 데일리 오렌지와의 인터뷰에서 B.o.B는 처음으로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에 대해 언급했다. “그것은 더 성숙한 사운드지만 너무 실험적이지는 않을 거야. 이것은 B.o.B Presents: The Adventures of Bobby Ray와 믹스테이프들 사운드의 행복한 중간이 될 거야, 그래서 모두 즐길 수 있을 거야. 현재까지 90퍼센트를 마쳤다고 할 수 있지만 앨범 타이틀은 나중에 공개할 거야.” 2011년 9월 23일 B.o.B는 그의 웹사이트를 통해 발매될 싱글 "Strange Clouds"의 트레일러를 공개했다. 그 트레일러는 "Strange Clouds"가 10월 3일 발매될 거라고 공지했다. 하지만 9월 25일 이 싱글은 발매 날 이전에 유출돼 9월 27일 "Strange Clouds"는 아이튠즈를 통하여 앞당겨 공개됐다. 그날 늦게 B.o.B는 라디오 방송국 V103의 온라인 비디오 스트림에 등장해 싱글과 동명인 앨범 타이틀 Strange Clouds와 2012년 이른 봄에 발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11년 10월 25일 바비 레이는 앨범 Strange Clouds의 첫 번째 리스닝 세션을 트리 사운드 스튜티오에 설치했다. 안드레 3000(André 3000)이 피처링한 프로모셔널 싱글 ‘Play the Guitar’를 포함한 7개의 신곡은 리스닝 세션 기간 동안 공개됐다. 앨범은 완성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릴 웨인, 빅 K.R.I.T, 넬리와 "Arena"에 참여한 T.I 등이 확정된 빅 게스트였다. 게다가 그는 원리퍼블릭의 한 곡을 같이 작업했다. 2011년 11월 15일 B.o.B는 믹스테이프 E.P.I.C.(Every Play Is Crucial)를 정규 앨범 전에 발매할 거라고 발표했다. 믹스테이프는 2011년 11월 28일 에미넴, 모스 데프(Mos Def), 로스코 대쉬(Roscoe Dash), 믹 밀(Meek Mill), 번 B(Bun B) 같은 가수들과 라이언 테더(Ryan Tedder) 부터 릴 C(Lil C)와 짐 (존신Jim Jonsin) 까지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p><p>"Strange Clouds" 뮤직 비디오 촬영 도중 MTV는 B.o.B와 인터뷰를 했고 T.I.와 같이 앨범을 낼 거라는 루머에 대해 질문했다. B.o.B는 “조인트 앨범은 농담으로 시작했어. 팁은 언제나 나를 화성(Martian)이라 불렀고 그의 가사에서 ‘그것은 남자와 화성이야.’라고 말했어. 그리고 우리는 ‘남자(Man)는 앨범 타이틀이 될 거야.’말했어. 우리는 그걸로 약간 연주를 했어. 하지만 이것은 아주 괜찮게 만들어질 것 같기도 해.” 2011년 12월 B.o.B는 뉴욕의 핫 97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고 T.I.와 The Man &amp; The Martian 이라는 앨범을 실제로 작업 중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했다. 2011년 12월 22일 B.o.B는 드레이크, T.I., 스위즈 비츠(Swizz Beatz)가 부른 "Fancy"를 샘플링한 프로모션용 싱글 안드레 3000이 피처링한 "Play the Guitar"를 발매했다. 얼마 뒤 "Play the Guitar"는 2011년 12월 27일 디지털 앨범으로 발매됐다. 2012년 2월 14일 두 번째 싱글 "So Good"의 트레일러를 공개했다. 라이언 테더가 프로듀싱한 이 곡은 2월 21일 발매됐다. 2012년 한 인터뷰에서 B.o.B는 <a>키드 커디</a>, <a>제임스 블레이크</a>, <a>스크릴렉스</a>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언급했다.&#160;: “나는 제임스 블레이크와 함께 작업하고 싶어. 그건 환상적일 거야. 내 생각에 나랑, 제임스 블레이크, 키드 커디는 같이 노래를 해야 해. 그리고 그 곡은 스크릴렉스에 의해 프로듀싱 돼야지. 내 생각엔 하늘이 떨어질 걸, 우리가 그 노래를 하면. 그리고 하늘이 지구로 내려와 우리랑 파티를 하겠지.” 2012년 3월 B.o.B는 Strange Clouds의 두 번째 프로모션 싱글 "Where Are You (B.o.B vs. Bobby Ray)"를 발매했다. 2012년 4월 17일 "So Hard to Breathe"는 세 번째 프로모션 싱글로 발매됐다. B.o.B는 헤일리 라인하트(Haley Reinhart)의 데뷔 앨범 Listen Up!의 인트로 트랙 "Oh My"에 참여했다. 2012년 5월 1일 B.o.B의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Strange Clouds가 비평가의 찬사를 받으며 발매됐다. 첫 주에 76,000장이 팔린 이 앨범은 미국 빌보드 200 차트에 5위로 데뷔했다. 세 번째 싱글 앨범 "Both of Us"는 2012년 5월 22일 탑 40 메인스트림 라디오(Top 40 Mainstream radio)에 올랐다. 이 노래에는 <a>테일러 스위프트</a>가 노래를 했고 오스트레일리아 탑50 싱글 차트에서 46위를 기록했다. "Both of Us" 첫 주에 143,000장이 팔렸고 앨범 발매와 함께 빌보드 핫 100에 18로 데뷔해 그 주의 가장 높은 순위의 데뷔곡이 됐다. </p> <h2><span></span><span>디스코그래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img>이 부분의 본문은 <a>B.o.B discography</a>입니다.</div> <ul><li><i><a>B.o.B Presents: The Adventures of Bobby Ray</a></i> (2010)</li> <li><i><a>Strange Clouds</a></i> (2012)</li></ul> <h2><span></span><span>수상</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2010 소울 트렌이 어워즈(Soul Train Awards) 베스트 송(Best Song) - Nothin' On You (with Bruno Mars)</li> <li>2010 틴 초이스 어워즈(Teen Choice Awards) 후크 업 송(Hook Up Song) - Airplanes (with Hayley Willia)</li></ul>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table> <tbody><tr> <td><img></td> <td> <b><a>위키미디어 공용</a></b>에 관련된<br>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div><b><a>B.o.B</a></b></div> </td> </tr> </tbody></table> <ul><li><span><span><a>B.o.B</a></span></span> - 공식 웹사이트</li> <li><b><span>(영어)</span></b> <a>B.o.B</a> - <a>올뮤직</a></li> <li><b><span>(영어)</span></b> <a>B.o.B</a> - <a>MTV</a></li></ul> <div><table><tbody><tr><th><a>전거 통제</a></th><td><div> <ul><li><a>WorldCat</a></li> <li><a>VIAF</a>: <span><a>66292606</a></span></li> <li><a>LCCN</a>: <span><a>no2008146895</a></span></li> <li><a>ISNI</a>: <span><a>0000 0003 6863 2090</a></span></li> <li><a>GND</a>: <span><a>141560355</a></span></li> <li><a>뮤직브레인즈</a>: <span><a>94c338ff-1985-4429-9dc8-997b61bb5932</a></span></li> <li><a>NKC</a>: <span><a>xx0121235</a></span></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B.o.B&amp;oldid=24250621</a>"</div> <div><div><a>분류</a>: <ul><li><a>B.o.B</a></li><li><a>1988년 태어남</a></li><li><a>살아있는 사람</a></li><li><a>미국의 래퍼</a></li><li><a>미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a></li><li><a>디케이터 (조지아주) 출신</a></li><li><a>미국의 록 가수</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العربية</a></li><li><a>تۆرکجه</a></li><li><a>Català</a></li><li><a>Čeština</a></li><li><a>Dansk</a></li><li><a>Deutsch</a></li><li><a>English</a></li><li><a>Español</a></li><li><a>Eesti</a></li><li><a>فارسی</a></li><li><a>Suomi</a></li><li><a>Français</a></li><li><a>Gaeilge</a></li><li><a>עברית</a></li><li><a>Hrvatski</a></li><li><a>Հայերեն</a></li><li><a>Bahasa Indonesia</a></li><li><a>Italiano</a></li><li><a>日本語</a></li><li><a>Lietuvių</a></li><li><a>Latviešu</a></li><li><a>Nederlands</a></li><li><a>Norsk</a></li><li><a>Polski</a></li><li><a>Português</a></li><li><a>Română</a></li><li><a>Русский</a></li><li><a>Simple English</a></li><li><a>Slovenčina</a></li><li><a>Српски / srpski</a></li><li><a>Svenska</a></li><li><a>ไทย</a></li><li><a>Türkçe</a></li><li><a>Tiếng Việt</a></li><li><a>中文</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5월 20일 (월) 15:5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시먼스의 아버지 직업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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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064
10,026
[ "시먼스의 아버지 직업은?", "시먼스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때까지 스쿨밴드에서 연주한 악기는 무엇인가?", "B.O.B가 학창 시절 스쿨 밴드에서 연주한 악기는?", "B.O.B의 출생일은?", "B.O.B가 진학한 고등학교는?", "보비 레이 시먼스의 출생년도는 몇년도인가요?", "학창시절 B.o.B가 스쿨 밴드에서 연주를 맡은 악기는 무엇인가?", "B.o.B의 학창시절 그의 아버지의 직업은 무엇이었나요?", "시먼스의 공동 경영자는?", "시먼스의 공연을 보고 공동관리에 동의한 사람은?", "비. 리치는 시먼스를 어디에서 일 할 수 있게 하였나?", "애틀랜틱에서 발매한 B.O.B의 첫 싱글로, 2007년 빌보드 버블링 언더 얼앤비/힙합 싱글 차트에서 탑 5위를 기록한 앨범의 제목은?", "B.O.B는 물론 플레이보이 트레, TJ 채프먼, B.리치가 속한 프로덕션/랩 그룹의 이름은? ", "2006년 미성년자였던 B.O.B가 B.리치의 도움으로 일했던 애틀랜타 랩퍼 T.I. 소유의 나이트클럽 이름은? ", "B.o.B가 14살 때 만난, 공동 경영자이자 그의 멘토는 누구인가요?", "2007년 애틀랜틱에서 발매된 B.oB의 첫번째 싱글곡은?", "시먼스는 언제부터 인기를 얻었나?", "리치보이의 리믹스 버전이 실리게 된 게임의 이름은? ", "어바웃 닷컴이 웅장한 서곡이라고 표현한 곡은?", "B.O.B가 랩퍼들의 인지도를 얻기 시작한 언더그라운드 싱글 Haterz Everywhere을 피처링한 가수는?", "리치 보이가 피처링한 B.O.B의 Haterz Everywhere가 실린 비디오 게임은?", "어바웃닷컴의 2008 톱 100 랩 송 13위에 랭크된 B.O.B의 싱글 제목은?", "B.o.B의 언더그라운드 싱글 \"Haterz Everywhere\"은 누가 피처링했나?", "B.o.B의 곡 \"Generation Lost\"는 누가 프로듀싱했나요?", "B.o.B의 곡 중에서 비디오 게임 파이트 나이트 라운드4에 실린 리믹스 버전은 누가 피처링했나요?", "B.O.B를 힙합의 클래스로 지목한 곳은?", "B.O.B가 어떤 것으로 부터 영향을 많이 받고 있나?", "애셔 로스, 찰스 해밀턴, 웨일과 함께 XXL 매거진의 09 힙합의 클래스로 지목된 가수는? ", "B.O.B, 애셔 로스, 찰스 해밀턴, 웨일 등을 09 힙합의 클래스로 지목한 매거진의 이름은?", "B.o.B가 영국 랩퍼 긱스 같은 뮤지션들과 함께 2007년부터 2008년까지 발매한 믹스 테이프의 수는?", "2008년 10월, B.o.B가 유망한 재능으로 평가된 어린 뮤지션들과 함께 커버로 등장한 잡지는?", "2009년 5월 B.O.B가 하나의 이름으로 결정한 명칭은?", "리복 클래식 리믹스 컬렉션 제품을 구입한 사람들은 어떤 노래를 들을 수 있었나?", "2009년 5월 B.O.B가 커버한 곡은?", "2009년 5월, 마누 차오의 곡 Mr.Bobby를 커버해 소개한 B.O.B가 발표한 활동명은? ", "2009년 6월 22일 발매되었으며 퓨리와 B.O.B. 중심으로 제작된 B.O.B의 여섯번째 믹스테이프는?", "B.O.B의 여섯번째 믹스테이프에 실린 곡으로, 리복이 리복 클래식 리믹스 컬렉션 기념행사에서 사용한 곡은?", "2009년 5월 B.o.B는 마우 차오의 곡 중 어떤 곡을 커버했나요?", "2009년 6월 22일 B.o.B가 발매한 여섯 번째 믹스테이프의 제목은?", "2009년 6월 B.o.B가 발매한 믹스테이프 곡들 중에서 리복이 리복 클래식 리믹스 컬렉션 기념행사에서 사용한 곡은?", "2010년 2월 1일 비평가의 찬사를 받으며 발매된 믹스테이프는?", "믹스테이프에 참여한 사람중 B.O.B와 데뷔 싱글 곡을 피처링한 사람은?", "데뷔 앨범은 어느 레코드 회사에서 발매되었나?", "2010년 2월 1일, 비평가들의 찬사 속에 발매된 B.O.B의 믹스테이프는? ", "B.O.B의 데뷔 싱글 Nothin' on You 피처링을 맡은 가수는? ", "루페 피에스코, T.I., 플레이보이 트레, 헤일리 윌리엄스 등이 참여한 B.O.B의 데뷔 앨범을 발매한 T.I의 레코드 회사는?", "B.o.B의 믹스테이프 May 25가 실제로 발매된 날짜는?", "2010년에 발매된 B.o.B의 데뷔 앨범명은?", "믹스테이프 May 25에서 B.o.B의 데뷔 싱글 Nothin' on You를 피처링한 가수는?", "애틀랜틱 비디오에 의해 배포된 뮤직비디오가 빌보드 차트에서 1위한 곡은?", "아디다스 매직 캠페인에 사용된 곡은?", "Airplanes 는 어느 영화에서 사용되었나?", "영화 Charlie St. Cloud의 테일러에 사용된 B.O.B의 곡은? ", "2010년 8월 18일 개최됐으며, 에미넴, 링킨 파크, 카니예 웨스트, 드레이트, 어셔, 파라모어 등이 출연한 뮤직 어워드는? ", "2010년 4월 발매된 B.o.B의 \"Bet I\"는 어떤 회사에 의해 유튜브에 배포되었나?", "데뷔 첫째 주에 넘버원에 오른 남자 솔로 가수 중 B.o.B는 몇번째인가요?", "B.o.B의 싱글 \"Airplanes\"가 테일러로 사용된 영화 제목은?", "2010년에 참여한 축제의 이름은?", "2010년 베스트 뉴 아티스트로 지명된 차트는 어디인가?", "2010년 12월 7일 발표한 B.O.B의 믹스테이프는? ", "RIAA에 의해 골드로 인정받은 B.O.B의 앨범은? ", "2011년 1월 30일 B.O.B와 함께 영국에서 싱글 Price Tag를 공개한 가수는? ", "2010년에 B.o.B가 참여한 축제의 이름은?", "2010년 12월 7일에 B.o.B가 발표한 믹스테이프의 제목은?", "2010년 RIAA에 의해 골드로 인정받았던 B.o.B의 앨범명은?", "2011년 초 타일러가 B.O.B를 견제한 노래를 발매한 곡 이름은?", "B.O.B가 타일러의 Yonkers에 대응한 노래를 발표했는데 제목은 무엇인가?", "B.O.B가 피처링한 열두번 째 정규앨범 중 \"Am I a Psycho?\" 라는 노래에 에 참여한 가수는?", "2011년 초 오드 퓨처의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가 발표한 곡의 제목은? ", "오드 퓨처의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가 발표한 디스곡 Yonkers에 대응해 발표한 B.O.B의 곡 명은? ", "B.O.B가 피처링, 프로듀싱을 맡은 테크 나인의 열두 번째 정규앨범 제목은?", "B.o.B가 오피셜 리믹스에 참여한 히트 싱글 \"Blow\"를 부른 가수는?", "2011년 초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가 발표한 B.o.B를 저격한 곡명은?",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가 발표한 \"Yonkers\" 란 곡의 대응으로 2011년 3월 25일 B.o.B가 발표한 곡명은?", "2011년 8월 27일 공연한 유튜브에 올라온 영상은 어디에서 공연한 것인가?", "2011년 10월 3일에 발매한다고 공지했지만 그 전에 유출되어 9월 27일 발매된 곡은?", "유출된 곡은 발매날을 당겨 어디로 공개하였나?", "2011년 9월 27일 아이튠즈를 통해 공개된 B.O.B의 곡은?", "에미넴, 모스 데프, 로스코 대쉬, 믹 밀 ,번 B등의 가수가 참여한 B.O.B의 믹스테이프 제목은?", "2011년 8월 콜로라도 국립대학에서 B.o.B가 선 공개한 곡명은?", "B.o.B의 싱글 'Play the Guitar'를 피처링한 가수는?", "B.o.B의 싱글 'Strange Clouds'가 원래 발매예정일이있던 \n 날짜는?", "2012년 2월 14일 트레일러를 공개한 이 곡은 2월 21일 발매되었는데 라이언 테더가 프로듀싱한 곡의 제목은?", "2012년 4월 17일 세 번째 프로모션 싱글곡은?", "드레이크, T.I., 스위즈 비츠가 부른 Fancy를 샘플링한 B.O.B의 프로모션용 싱글로, 안드레 3000이 피처링한 곡은? ", "라이언 테더라 프로듀싱했으며, 2012년 2월 21일 발매된 B.O.B의 두 번째 싱글은? ", "B.O.B가 인트로 트랙 Oh My에 참여한 헤일리 라인하트의 데뷔 앨범은? ", "2012년 B.o.B가 발매한 세 번째 프로모션 싱글의 제목은?", "B.o.B가 헤일리 라인하트의 데뷔 앨범 Listen Up!에 참여한 트랙명은?", "B.o.B의 세 번째 싱글 앨범명은?" ]
<!DOCTYPE html> B.o.B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B.o.B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비오비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다른 뜻에 대해서는 BOB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B.o.B B.O.B(1988년 11월 15일 ~ ) 또는 보비 레이 시먼스(Bobby Ray Simmons)는 미국 조지아주 디케이터 출신의 힙합아티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 레코드 프로듀서이다. B.o.B는 현재 그랜드 허슬 레코드(Grand Hustle Records), 레벨 록 엔터테인먼트(Rebel Rock Entertainment), 애틀랜틱 레코드에 소속돼 있다. 그는 미국과 영국에서 넘버원을 기록한 데뷔 싱글 "Nothin' on You"로 단번에 명성을 쌓았고 영국에서 1위, 미국에서 2위를 기록한 두 번째 싱글 "Airplanes"으로 유명세를 이어갔다. 연달아 발매한 세 번째 싱글 "Magic"도 빌보드 핫 100의 10위 안에 들었다. B.o.B는 MTV에서 선정하는 2010 핫티스트 MC 인 더 게임(Hottest MC in the Game of 2010)에서 9위를 했다. 두 개의 EP앨범과 몇 개의 믹스 테이프를 거쳐 2010년 4월 27일 데뷔 앨범 B.o.B Presents: The Adventures of Bobby Ray가 발매됐다. 이 앨범은 미국 차트에서 1위를 했고 RIAA는 공식적으로 골드(50만 장 판매)를 인증했다. 2012년 5월 1일 B.o.B의 두 번째 정규앨범 Strange Clouds가 발매됐다. 현재 바비 레이는 허슬 레코드 대표인 T.I.와 콜라보레이션 앨범과 록 뮤직 EP를 발매할 계획에 있다. 목차 1 생애 2 디스코그래피 3 수상 4 외부 링크 생애[편집] 1988-2006 : 유년기와 경력의 시작 시먼스는 노스캐롤라이나주 윈스턴세일럼에서 1988년 11월 15일에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스쿨 밴드에서 트럼펫을 연주했다. 부모님은 학업을 지속하길 바랐지만 6학년(sixth grade) 때 이미 시먼스는 뮤지션의 길을 가고 싶어 했다. 목사였던 아버지는 시먼스에게 음악은 치유이자 창의력의 발휘라는 점을 깨닫게 된 후론 반대를 멈췄다. 훗날 시먼스는 과거를 회상하며 “부모님은 언제나 나를 지지해 줬어. 그들은 비트를 만드는 데 필요한 내 첫 번째 키보드를 마련해줬고 이곳저곳에서 내 장비를 마련해 줬어. 하지만 그분들이 내가 진짜로 어떤 걸 얻고자 하는지를 알지 못했을 거야.” 이후 B.o.B는 조지아 주 디케이터 지역의 컬럼비아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2002년 14살의 나이로 그의 멘토이자 공동 경영자인 비. 리치(B. Rich)를 만난 후에, B.o.B는 전 슬립엔 슬라이드 리코딩(lip-n-Slide recording)의 아티스트 씨티(Citti)의 곡 "I'm the Cookie Man."에 쓰인 비트를 처음으로 팔았다. 그때 B.o.B는 자신이 해냈다는 성취감을 이렇게 표현 했다. : “나는 나가서 내 모든 돈을 순식간에 다 써버렸지. 금방 다시 나는 빈털터리가 됐지만 두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달았지. 우선은 돈을 아껴야 했고 음악에 흠뻑 빠져야 한다는 것이었지.” 다시 원위치로 돌아가, B.o.B는 자신의 기술을 완벽하게 하기 위해 공연의 오프닝 무대에 서거나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동을 지속했다. 2006년 B. 리치는 미성년자인 B.o.B가 애틀랜타 랩퍼 T.I. 소유인 나이트클럽 클럽 크루셜(Club Crucial)에 일할 수 있게 도와줬다. 그곳에서 B.o.B는 자신이 프로듀스한 스포큰 워드 형태의 마리하나의 송가인 "Cloud 9"으로 공연을 했다. 그의 공연을 본 관객 중에는 프로듀서이자 상업 음악의 베테랑인 TJ's DJ'S의 CEO인 T.J. 채프먼(T.J. Chapman)이 있었다. 채프먼은 B.o.B를 공동관리하는 것에 동의했고 몇 달 뒤 B.o.B는 애틀랜틱 레코드와 플로리다 프로듀서 짐 존신(Jim Jonsin)의 운영되는 발매 계열사인 레벌 록과 계약을 맺었다. 애틀랜틱에서 발매된 그의 2007년의 첫 번째 싱글 "Haterz Everywhere"은 빌보드의 버블링 언더 알앤비/힙합 싱글 차트(U.S. Billboard Bubbling Under Hot 100 Singles)에서 탑 5를 기록했다. 그의 솔로 프로덕션 경력은 B.o.B를 플레이보이 트레(Playboy Tre), TJ 채프먼, B. 리치와 함께 햄 스쿼드(Ham Squad)라 불리는 프로덕션/랩 그룹의 일원이 되게 했다. 2007–2008: 명성의 상승과 믹스 테이프 B.o.B는 2007년 초부터 처음으로 메이저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다. 웨스 피프(Wes Fif)가 피처링한 언더그라운드 싱글 "Haterz Everywhere"는 랩퍼들의 인지도를 얻게 됐고 빌보드 버블링 언더 핫 100 싱글즈에서 5위를 기록했다. 리치 보이가 피처링한 리믹스 버전은 비디오 게임 파이트 나이트 라운드 4(Fight Night Round 4)에 실리게 됐고 연달아 리믹스 버전의 뮤직 비디오도 공개가 됐다. 다른 싱글 I'll Be in the Sky"는 2008년에 발매됐는데 어바웃닷컴(About.com)은 이 노래를 “스마트하고 펑키한 아트 랩과 앨범의 웅장한 서곡”이라고 표현했고 자신들이 선정한 2008 톱 100 랩 송(Top 100 Rap Songs of 2008)에 13위에 랭크 시켰다. 아울러 바비 레이가 프로듀싱한 ‘Generation Lost’도 동일 차트에서 32위에 이름을 올렸다. 연달아 발매된 다른 싱글 "Don't Let Me Fall"는 일반의 랩보다 알앤비에 가까운 노래였다. 그는 T.I.의 앨범 Paper Trail의 "On Top of the World"에서 피처링을 했다. 같은 해 그는 XXL 매거진에 애셔 로스, 찰스 해밀턴(Charles Hamilton), 웨일(Wale)과 함께 09 힙합의 클래스(Hip-Hop's Class of '09)로서 지목됐다. 2008년 10월에는 B.o.B는 잡지 바이브(Vibe)의 커버에 유망한 재능으로 평가된 어린 뮤지션들과 함께 등장했다. 그는 자신이 80년대 음악, 테크노, 록 펑크, 심지어 두왑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했다. B.o.B는 영국 랩퍼 긱스 같은 뮤지션들과 함께 2007년부터 2008년 까지 4장의 믹스 테이프를 발매했다. ; The Future (2007), Cloud 9 (2007), Hi! My Name is B.o.B (2008) Who the F#*k is B.o.B? (2008)와 두 개의 EP Eastside (2007), 12th Dimension (2008). 2009–2010: 메인스트림 성공과 The Adventures of Bobby Ray 2009년 5월 B.o.B는 마누 차오(Manu Chao)의 곡 "Mr. Bobby"를 커버해서 발표하며 바비 레이 하나의 이름만 사용하길 원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방향(new direction)으로 음악을 진행할 거라고 말했다. : "이제 나는 바비 레이로 활동할 거야. 바비 레이를 확실하게 새겨 둬. 나는 정말로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갈 거야 -더 자유롭게 특정한 장르에 부합하려 노력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것을 해왔던 것 같지 않아. 나는 그것을 일치 시키려고 노력했던 것 같지 않아. 하지만 나는 더 많은 자유로운 정신을 느껴. 나는 더 많은 음악적 의지를 가졌어. 그게 나에 관한 모든 거야. 나는 기타이며 화음이자 키보드야.“ 2009년 6월 22일 B.o.B는 그의 여섯 번째 믹스테이프 B.o.B vs. Bobby Ray를 발매했다. T.I.'s T.I. vs. T.I.P. (2007)를 연상시키는 이 믹스테이프는 퓨리(Fury)와 B.o.B 중심으로 제작됐다. 이 믹스테이프에는 레드 스파이다(Red Spyda)가 프로듀서한 "Fly Like Me"와 트라이브 콜드 퀘스트(A Tribe Called Quest)의 1990년의 히트곡 "Bonita Applebum"을 리믹스한 "Put Me On"이 실려 있다. 리복은 리복 클래식 리믹스 컬렉션 기념행사에서 "Put Me On"을 사용했다. 이 트랙은 전미 풋 락커(Foot Locker)상점에서 리복 클래식 리믹스 컬렉션 제품을 구입한 고객들만 독점적으로 다운받을 수 있었다. 2010년 1월 13일 B.o.B는 그의 데뷔 앨범 The Adventures of Bobby Ray가 2010년 5월 25일 발매될 거라고 발표했다. 또 앨범 프로모션용으로 첫 앨범 발매 날짜를 뜻하는 May 25라는 믹스테이프도 발매할 거라고 공개했다. May 25는 2010년 2월 1일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발매됐다. 이 믹스테이프에는 J. 콜(J. Cole), 애셔 로스, 플레이보이 트레, 찰스 해밀턴과 브루노 마스가 참여를 했다. 특히 브루노 마스는 보너스 트랙과 B.o.B의 데뷔 싱글 "Nothin' on You” 피처링을 했다. 믹스테이프 May 25와 싱글 "Nothin' on You"의 상업적 성공으로 인해 데뷔 앨범은 2010년 4월 27일로 발매가 앞당겨졌다. 이 앨범은 T.I.의 레코드 회사인 그랜드 허슬에서 발매됐고 루페 피에스코, T.I., 플레이보이 트레, 헤일리 윌리엄스, 리버스 쿠오모, 리코 바리노(Ricco Barrino), 저넬 모네이, 브루노 마스, 영 드로가 참여했다. 세 개의 다른 싱글은 "Don't Let Me Fall"(2010.4.6 발매), "Airplanes"(2010.4.46 발매; 피처링 헤일리 윌리엄스), "Bet I"(2010.4.20; 피처링 T.I, 플레이보이 트레) 이다. “Bet I”의 뮤직비디오는 애틀랜틱 비디오(Atlantic Videos)에 의해 유튜브에 배포됐다. 2010년 4월 27일에 발매된 데뷔 앨범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리뷰가 주어졌다. 이 앨범은 발매된 첫 주에 8만 4천 장이 팔렸고 빌보드 200에서 1위로 데뷔했다. B.o.B는 데뷔 첫째 주에 넘버원에 오른 13번 째 남자 솔로 가수가 됐다. 7월에 B.o.B는 슛팅 포 스타스 투어(The SHOOTiN for Stars Tour)로 명명된 투어를 할 거라고 발표했다. 그 날짜와 시간은 7월 13일 그의 웹 사이트에서 공표됐다. B.o.B와 앨범, 그의 노래는 베트 어워드(Bet Awards), 틴 초이스 어워드(Teen Choice Awards),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MTV Video Music Awards), 뉴 서커프리 서미트(the new Suckerfree Summit)에 후보에 올랐다. "Airplanes"은 개봉 예정 영화인 Charlie St. Cloud의 테일러에 사용됐고 다른 싱글 "Magic"은 그가 등장한 아디다스 매직 캠페인 광고에 사용됐다. B.o.B는 8월 18일 개최되는 2010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의 에미넴, 링킨 파크, 카녜이 웨스트, 드레이크(Drake), 어셔, 파라모어(Paramore), 플로런스 앤드 더 머신(Florence and the Machine), 저스틴 비버와 함께 공연자로 선정됐다. 2010년 8월 14일 헤일리 윌리엄스는 공식 파라모어 팬클럽을 통해 B.o.B는 파라모어의 11월 영국 투어의 메인 게스트일 거라고 발표했다. 또 B.o.B.는 코메리카 파크에서 열리는 에미넴과 제이지의 홈 앤드 홈 투어(The Home &amp; Home Tour)에 오프닝 게스트로 섰다. B.o.B는 MTV 언플러그드(MTV Unplugged)의 무대에도 섰다. 그는 게스트인 로빈 시크(Robin Thicke)와 멜라닌 피오나(Melanie Fiona), 자넬 모네와 함께 그의 데뷔 앨범의 곡들과 MGMT의 곡 "Kids" 커버해 불렀다. 2010년에는 롤라팔루자(Lollapalooza) 축제에 참여했고 12월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에서 부르노 마스와 "Nothin' on You"를 윌리엄스와 "Airplanes"로 무대에 올랐다. 2010년 12월 7일 B.o.B는 믹스테이프 No Genre를 발표했다. B.o.B는 아이튠즈의 2010 리와인드 차트(iTunes 2010 Rewind Chart)에서 베스트 뉴 아티스트(Best New Artist)로 지명됐다. 12월 16일에는 The Adventures of Bobby Ray 앨범이 RIAA에 의해 골드로 인정받았다. 2011년 1월 30일 제시 J(Jessie J)는 B.o.B와 함께 싱글 "Price Tag"를 영국에서 공개했다. 이 노래는 빠르게 영국 차트에 넘어 원을 기록했고 첫 주에만 8만 4천 장이 팔렸다. 2011-현재: Strange Clouds and The Man the Martian 2011년 3월 22일 일레트로닉 아츠(Electronic Arts)는 B.o.B가 부른 "New York New York"의 일부가 삽입된 일인칭 슈팅 게임 크라이시스2의 런치 테일러를 공개했다. "New York New York"은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른 "Theme from New York, New York"의 메인 피아노 코러스를 차용했는데 코러스를 누가 불렀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노래 전곡은 얼마 뒤 B.o.B의 여덟 번째 미스테이프 E.P.I.C. (Every Play Is Crucial)에 포함됐는데 마이크 캐런(Mike Caren)이 프로듀스를 했다. 2011년 초 오드 퓨처(Odd Future)의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Tyler, the Creator)는 "Yonkers"라는 곡을 발표했다. 그 노래에서 타일러는 다음과 같이 랩을 했다. What you think of Hayley Williams?(당신은 헤일리 윌리엄스를 어떻게 생각해?) Fuck her, Wolf Haley robbing 'em(빌어먹을, 강도질이나 하는 울프 헤일리) / I'll crash that fucking airplane that that faggot nigga B.o.B is in(나는 호모 검둥이 B.o.B가 타고 있는 비행기를 부셔 버릴 거야) / And stab Bruno Mars in his goddamn esophagus(그리고 브루노 마스의 빌어먹을 식도를 쑤실 거야) / And won't stop until the cops come in(그리고 결찰이 올 때까지 멈추지 않을 거야). 이 노래의 대응으로 3월 25일 B.o.B는 오드 퓨처와 그들의 리더 테일러를 대상으로 노래 "No Future"를 발표했다. 2011년 6월 테크 나인Tech N9ne의 열두 번 째 정규앨범 All 6's and 7's에 B.o.B가 피처링하고 프로듀싱할 거라고 알려졌다. 그 노래는 "Am I a Psycho?"이며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와 이슈가 있는 래퍼 호스핀(Hopsin)도 참여했다. 이 노래에서 B.o.B는 명백하게 타일러, 더 크리에이터를 더 공격했다. B.o.B는 케샤의 히트 싱글 "Blow"의 오피셜 리믹스에 참여했다. 이 리믹스는 2011년 5월 17일에 아이튠에서 공개됐다. 2011년 여름 B.o.B는 T.I.의 의류상품 A.K.O.O의 새로운 모델로 발탁됐다. AKOO 의류의 2011년 가을 캠페인에서 B.o.B는 뉴욕 양키즈의 커티스 그랜더슨, 보스턴 레드 삭스의 칼 크로퍼드, 베트(the Bet)의 히트 시트콤 더 게임(The Game)의 호세아 찬체즈(Hosea Chanchez)와 함께 등장했다. B.o.B는 A.K.O.O의 그래픽 노블 Hide In Plain Sight – Saving the World From Fashion Conspiracy에서도 등장했다. 2011년 8월 27일 콜로라도 국립대학에서 B.o.B가 공연하는 것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영상에서 B.o.B는 "Strange Clouds"를 선 공개하며 릴 웨인이 피처링할 거라고 공개했다. 시러큐스 대학교의 데일리 오렌지와의 인터뷰에서 B.o.B는 처음으로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에 대해 언급했다. “그것은 더 성숙한 사운드지만 너무 실험적이지는 않을 거야. 이것은 B.o.B Presents: The Adventures of Bobby Ray와 믹스테이프들 사운드의 행복한 중간이 될 거야, 그래서 모두 즐길 수 있을 거야. 현재까지 90퍼센트를 마쳤다고 할 수 있지만 앨범 타이틀은 나중에 공개할 거야.” 2011년 9월 23일 B.o.B는 그의 웹사이트를 통해 발매될 싱글 "Strange Clouds"의 트레일러를 공개했다. 그 트레일러는 "Strange Clouds"가 10월 3일 발매될 거라고 공지했다. 하지만 9월 25일 이 싱글은 발매 날 이전에 유출돼 9월 27일 "Strange Clouds"는 아이튠즈를 통하여 앞당겨 공개됐다. 그날 늦게 B.o.B는 라디오 방송국 V103의 온라인 비디오 스트림에 등장해 싱글과 동명인 앨범 타이틀 Strange Clouds와 2012년 이른 봄에 발매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11년 10월 25일 바비 레이는 앨범 Strange Clouds의 첫 번째 리스닝 세션을 트리 사운드 스튜티오에 설치했다. 안드레 3000(André 3000)이 피처링한 프로모셔널 싱글 ‘Play the Guitar’를 포함한 7개의 신곡은 리스닝 세션 기간 동안 공개됐다. 앨범은 완성된 상태는 아니었지만 릴 웨인, 빅 K.R.I.T, 넬리와 "Arena"에 참여한 T.I 등이 확정된 빅 게스트였다. 게다가 그는 원리퍼블릭의 한 곡을 같이 작업했다. 2011년 11월 15일 B.o.B는 믹스테이프 E.P.I.C.(Every Play Is Crucial)를 정규 앨범 전에 발매할 거라고 발표했다. 믹스테이프는 2011년 11월 28일 에미넴, 모스 데프(Mos Def), 로스코 대쉬(Roscoe Dash), 믹 밀(Meek Mill), 번 B(Bun B) 같은 가수들과 라이언 테더(Ryan Tedder) 부터 릴 C(Lil C)와 짐 (존신Jim Jonsin) 까지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Strange Clouds" 뮤직 비디오 촬영 도중 MTV는 B.o.B와 인터뷰를 했고 T.I.와 같이 앨범을 낼 거라는 루머에 대해 질문했다. B.o.B는 “조인트 앨범은 농담으로 시작했어. 팁은 언제나 나를 화성(Martian)이라 불렀고 그의 가사에서 ‘그것은 남자와 화성이야.’라고 말했어. 그리고 우리는 ‘남자(Man)는 앨범 타이틀이 될 거야.’말했어. 우리는 그걸로 약간 연주를 했어. 하지만 이것은 아주 괜찮게 만들어질 것 같기도 해.” 2011년 12월 B.o.B는 뉴욕의 핫 97 라디오 방송에 출연했고 T.I.와 The Man &amp; The Martian 이라는 앨범을 실제로 작업 중이라고 확정적으로 말했다. 2011년 12월 22일 B.o.B는 드레이크, T.I., 스위즈 비츠(Swizz Beatz)가 부른 "Fancy"를 샘플링한 프로모션용 싱글 안드레 3000이 피처링한 "Play the Guitar"를 발매했다. 얼마 뒤 "Play the Guitar"는 2011년 12월 27일 디지털 앨범으로 발매됐다. 2012년 2월 14일 두 번째 싱글 "So Good"의 트레일러를 공개했다. 라이언 테더가 프로듀싱한 이 곡은 2월 21일 발매됐다. 2012년 한 인터뷰에서 B.o.B는 키드 커디, 제임스 블레이크, 스크릴렉스와 함께 작업하고 싶다고 언급했다. : “나는 제임스 블레이크와 함께 작업하고 싶어. 그건 환상적일 거야. 내 생각에 나랑, 제임스 블레이크, 키드 커디는 같이 노래를 해야 해. 그리고 그 곡은 스크릴렉스에 의해 프로듀싱 돼야지. 내 생각엔 하늘이 떨어질 걸, 우리가 그 노래를 하면. 그리고 하늘이 지구로 내려와 우리랑 파티를 하겠지.” 2012년 3월 B.o.B는 Strange Clouds의 두 번째 프로모션 싱글 "Where Are You (B.o.B vs. Bobby Ray)"를 발매했다. 2012년 4월 17일 "So Hard to Breathe"는 세 번째 프로모션 싱글로 발매됐다. B.o.B는 헤일리 라인하트(Haley Reinhart)의 데뷔 앨범 Listen Up!의 인트로 트랙 "Oh My"에 참여했다. 2012년 5월 1일 B.o.B의 두 번째 스튜디오 앨범 Strange Clouds가 비평가의 찬사를 받으며 발매됐다. 첫 주에 76,000장이 팔린 이 앨범은 미국 빌보드 200 차트에 5위로 데뷔했다. 세 번째 싱글 앨범 "Both of Us"는 2012년 5월 22일 탑 40 메인스트림 라디오(Top 40 Mainstream radio)에 올랐다. 이 노래에는 테일러 스위프트가 노래를 했고 오스트레일리아 탑50 싱글 차트에서 46위를 기록했다. "Both of Us" 첫 주에 143,000장이 팔렸고 앨범 발매와 함께 빌보드 핫 100에 18로 데뷔해 그 주의 가장 높은 순위의 데뷔곡이 됐다. 디스코그래피[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B.o.B discography입니다. B.o.B Presents: The Adventures of Bobby Ray (2010) Strange Clouds (2012) 수상[편집] 2010 소울 트렌이 어워즈(Soul Train Awards) 베스트 송(Best Song) - Nothin' On You (with Bruno Mars) 2010 틴 초이스 어워즈(Teen Choice Awards) 후크 업 송(Hook Up Song) - Airplanes (with Hayley Willia) 외부 링크[편집] <table> <tbody><tr> <td></td> <td>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B.o.B </td> </tr> </tbody></table> B.o.B - 공식 웹사이트 (영어) B.o.B - 올뮤직 (영어) B.o.B - MTV <table><tbody><tr><th>전거 통제</th><td> WorldCat VIAF: 66292606 LCCN: no2008146895 ISNI: 0000 0003 6863 2090 GND: 141560355 뮤직브레인즈: 94c338ff-1985-4429-9dc8-997b61bb5932 NKC: xx0121235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B.o.B&amp;oldid=24250621" 분류: B.o.B1988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미국의 래퍼미국의 남자 싱어송라이터디케이터 (조지아주) 출신미국의 록 가수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تۆرکجهCatalà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עבריתHrvatski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LietuviųLatvieš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ไทยTürkçe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0일 (월) 15:5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요약 **핵심 주장**: B.o.B는 미국의 힙합 아티스트로, 그의 음악 경력과 성공적인 앨범 발매를 통해 힙합 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 **1. 소개 및 초기 경력** B.o.B(본명: 보비 레이 시먼스)는 1988년 11월 15일 조지아주 디케이터에서 태어난 힙합 아티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 레코드 프로듀서이다. 그는 그랜드 허슬 레코드와 애틀랜틱 레코드에 소속되어 있으며, 데뷔 싱글 "Nothin' on You"로 큰 인기를 얻었다. 이어서 "Airplanes"와 "Magic" 등의 곡으로도 성공을 거두었다. **2. 생애** B.o.B는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아버지는 목사로, 음악이 치유와 창의력의 발현이라는 점을 깨닫고 그를 지지하게 되었다. 14세에 비. 리치와 만나 비트를 판매하며 경력을 시작했고, 2006년 T.I.의 나이트클럽에서 공연을 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3. 명성의 상승** 2007년부터 B.o.B는 메이저 인지도를 얻기 시작했으며, 여러 믹스 테이프와 싱글을 발매했다. 그는 2009년 XXL 매거진의 '힙합의 클래스'로 선정되었고, 다양한 아티스트와 협업하며 음악적 범위를 넓혔다. **4. 메인스트림 성공** 2010년 B.o.B는 데뷔 앨범 "The Adventures of Bobby Ray"를 발매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앨범은 빌보드 200에서 1위로 데뷔하였고, 여러 차트에서 상위권에 올랐다. 그는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와 같은 주요 행사에 참여하며 인지도를 더욱 높였다. **5. 이후 경과** 2011년부터 B.o.B는 두 번째 앨범 "Strange Clouds"를 준비하며 다양한 아티스트와 협업을 이어갔다. 그는 음악적 실험을 통해 더 성숙한 사운드를 추구하고 있으며, T.I.와의 콜라보레이션 앨범도 계획하고 있다. **6. 디스코그래피 및 수상** B.o.B의 주요 앨범으로는 "B.o.B Presents: The Adventures of Bobby Ray"와 "Strange Clouds"가 있으며, 여러 음악 시상식에서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 이 요약은 B.o.B의 경력과 음악적 성취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와 주요 활동을 정리한 것이다.
다음 글의 핵심 주장과 근거를 중심으로 요약해줘. 단락별로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도 함께 정리해줘. 문장 길이는 너무 짧지 않게 하고, 원문의 흐름은 유지해줘.
박동진_(1916년)
https://ko.wikipedia.org/wiki/박동진_(1916년)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박동진 (1916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박동진 (1916년)</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h colspan="2"><div><div><img></div><span>박동진<br>朴東鎭</span></div></th></tr><tr><th colspan="2">기본 정보</th></tr><tr><th>출생</th> <td> 1916년 8월 10일<span>(<span>1916-08-10</span>)</span> (<a>음력 7월 12일</a>)<br><span><span><a><img></a></span> <a>일제 강점기</a> <a>충청남도</a> <a>공주군</a> <a>장기면 무릉리</a></span></td></tr><tr><th>사망</th> <td> 2003년 7월 8일 (86세)<br><span><span><a><img></a></span> <a>대한민국</a> <a>충청남도</a> <a>공주시</a> <a>무릉동</a></span></td></tr><tr><th>직업</th> <td> <a>판소리</a> 국악인 <br> <a>창극배우</a> <br> 판소리 작사가 <br> 판소리 작곡가 <br> 판소리 편곡가 <br> 인간문화재 <br> <a>수필가</a></td></tr><tr><th>장르</th> <td> <a>한국 전통 음악</a></td></tr><tr><th>활동 시기</th> <td> <a>1933년</a> ~ <a>2003년</a></td></tr> <tr><th>배우자</th> <td> 변녹수(재혼)<sup><a>&#91;1&#93;</a></sup></td></tr><tr><th>가족</th> <td> 자녀는 슬하 4남</td></tr><tr><th>학력</th> <td> <a>충청남도 공주 진금보통학교</a> <a>졸업</a> <br> <a>충청남도 대전고등보통학교</a> 중퇴</td></tr><tr><th>종교</th> <td> <a>유교</a>(<a>성리학</a>) → <a>개신교</a>(<a>한국기독교장로회</a>)<sup><a>&#91;2&#93;</a></sup></td></tr><tr><th>웹사이트</th> <td> <a>忍堂 박동진 先生 판소리 전수관</a></td></tr> </tbody></table> <p><b>박동진</b>(忍堂 朴東鎭, <a>1916년</a> <a>8월 10일</a>(<a>음력 7월 12일</a>) ∼ <a>2003년</a> <a>7월 8일</a>)은 일제 강점기의 창극배우이며 <a>대한민국</a>의 <a>판소리</a> 명창이다. </p><p><a>충청남도</a> <a>공주</a>에서 출생하였으며 판소리 완창의 대가로도 손꼽힌 그는 <a>1990년대</a>까지 대한민국 판소리 분야의 대표적 인사로 활약하였다. </p><p>그는 <a>2003년</a> <a>7월 8일</a>에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li> <li><a><span>2</span> <span>국악 예술 세계</span></a></li> <li><a><span>3</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4</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1916년</a> <a>8월 10일</a>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現 <a>충청남도</a> <a>공주시</a> <a>무릉동</a>)에서 출생하였으며 판소리 명창으로 활동하였고 그의 <a>아호(雅號)</a>는 인당(忍堂)이다. 그의 자세한 가계는 알 수 없으나 증언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땅재주를 넘는 어릿광대였으며, 그 재주로 <a>고종</a>(高宗, <a>1852년</a> <a>9월 8일</a> ~ <a>1919년</a> <a>1월 21일</a>)에게 참봉(參奉)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sup><a>&#91;3&#93;</a></sup> 그러나 부친은 국악과 일체 관련을 두지 않은 농사꾼이었다고 한다. </p><p>16세 때 <a>공주</a>에 들어 온 <a>협률사</a>(協律社)의 공연을 본 이후로 판소리에 빠지기 시작하여 18세 때에는 <a>충청남도 청양</a>에 거주하였던 손병두 문하에 들어가 처음 판소리를 익혔다. 헌데 손병두는 본래 명창으로 활동한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박동진은 손병두의 조부라 알려진 손필모의 주선을 받아 김창진(金昌鎭) 문하로 옮겨 《<a>심청가</a>》를 배웠다.<sup><a>&#91;4&#93;</a></sup> 19세에는 <a>정정렬</a>(丁貞烈, <a>1876년</a> <a>5월 21일</a> ~ <a>1938년</a> <a>3월 21일</a>)에게 《<a>춘향가</a>》를 배웠으나 당시 정정렬의 다른 제자들이 많아 다 배우지 못했고, 20세 되던 해에 유성준에게 《<a>수궁가</a>》를, 21세 때 조학진 문하에서 《<a>적벽가</a>》, 22세 때 박지홍 문하에서 《<a>흥보가</a>》를 배웠다. 그리고 다시 상경하여 정정렬에게 《춘향가》를 배웠다. 또한 송만갑에게도 지도를 받았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떤 바탕을 배운 것은 아니고 전반적인 정리 성향을 띈 지도만 받았던 듯 하다.<sup><a>&#91;5&#93;</a></sup> </p><p>25세를 전후하여 무절제한 생활로 목이 상하여 소리꾼으로서는 그렇게 행세하지 못하였고, 행세하는 경우에도 중앙 무대에는 서지 못했다. <a>1944년</a>에서 <a>1952년</a>까지 8년 간은 조선음악단, 김연수 창극단, 조향 창극단 등 창극단 생활을 전전하며 창극 무대에 서기도 하였고, 고수(鼓手)로 행세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다시 목을 되찾기 위해 100일 독공도 마다하지 않는 등 소리 수련을 계속하였는데 생활을 위해 햇님국극단에서 편곡과 무대감독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소리꾼으로 전면적인 활동을 벌이지는 못하였다. </p><p><a>1958년</a>에서 <a>1959년</a>까지 <a>한국독립당</a>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직위를 잠시 지냈고 그 후 <a>1962년</a> <a>국립국악원</a> 국악사보가 되었고, <a>1968년</a>, 당시 국립국악원 원장 <a>성경린</a>(成慶麟, <a>1911년</a> <a>9월 18일</a> ~ <a>2008년</a> <a>3월 5일</a>)의 주선과 당시 각종 창극단에서 악사로 활동하던 <a>한일섭</a>(韓一燮, <a>1929년</a> ~ <a>1973년</a>)의 공조로 판소리 《흥보가》의 5시간 완창 발표를 가졌다. 이 발표회는 UN군 사령부 방송 VUNC를 통해 방송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것을 기점으로 <a>1969년</a>《춘향가》 8시간, <a>1970년</a> 《심청가》 6시간, <a>1971년</a> 《적벽가》 7시간,《수궁가》 4시간의 완창 발표를 연달아 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a>1970년</a>《변강쇠타령》, <a>1972년</a> 《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 《옹고집타령》등을 복원, 완창 발표를 가졌고,《성웅 이순신》, 《성서 판소리》등 새 판소리를 작창하는 등 소리꾼으로서 전면적인 활동에 나섰다. 특히 《적벽가》의 완창 능력을 인정받아 <a>1973년</a>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같은 해 국립창극단의 단장에 취임하는 등 판소리계 중진 인사로 활약하기 시작하여 <a>1990년대</a>까지 연 1회 이상의 연창회를 가졌다. </p><p>본래 특정한 종교가 없었던 그는 <a>1969년</a> <a>장로교</a> 목사 조향록과 극작가 주태익의 요청으로 창작 판소리 《예수전》을 공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a>개신교</a>에 귀의하였고, 이후에도 《성서 판소리》, 《모세전》 등의 창작 판소리를 발표하며 개신교 선교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p><p><a>1980년</a>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a>1981년</a>에 미국 일주 공연에 참가하였으며, <a>1982년</a>에는 《성서 판소리》를 미국에서 발표하였다. <a>1985년</a> 국립국악원 판소리 원로사범에 임명되었고, <a>1987년</a> 국립국악원 지도위원이 되었다. 이 시기에 상당히 많은 상을 수상하였고, 명실상부한 판소리계 최고 원로이며 대명창으로 대접을 받았다. </p><p><a>1990년대</a> 후반부터 후진 양성에 힘쓰기 위해 공주로 내려와 전수관을 개관하는 한편, 여전히 공연 활동을 활발히 펼쳤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완창과 장시간 연창을 감행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p><p><a>2003년</a> <a>7월 8일</a>, 노환으로 별세하였고 별세 다음날 <a>2003년</a> <a>7월 9일</a>에는 생전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p> <h2><span></span><span>국악 예술 세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이미 1910년대에 이르면 중앙무대에서 판소리가 각광 받게 되고 많은 명창들이 활약하게 되면서 동편제니 서편제니 하는 구분이 소용없게 되었고, 특히 김창환을 필두로 하는 근대 5명창들이 서울에서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해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많은 소리꾼들이 이들 5명창을 번갈아 스승으로 모셨다. 따라서 서로 다른 계통의 소리를 배워 자기 것으로 만드는 현상이 만연하였는데, 박동진은 그 중에서도 특히 다양하고 복잡한 사승관계를 가지는데, 그가 직접적으로 다섯 바탕을 전수 받았다고 증언하는 이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p> <ul><li>김창진&#160;: 중고제 김정근 계통</li> <li>정정렬&#160;: 서편 신제</li> <li>박지홍&#160;: 서편 고제 김창환 계통</li> <li>유성준&#160;: 동편제 송판 계통</li> <li>조학진&#160;: 동편제 박기홍 계통<sup><a>&#91;6&#93;</a></sup></li></ul> <p>현재 사멸된 중고제는 물론 서편제의 고제와 신제, 동편제의 송판 계통과 박기홍 계통에 이르기까지 그 계통이 매우 다양하다. 여기에 전반적인 교정을 해주었다는 송만갑의 영향을 생각하면 동편제 신제인 송만갑 계통의 소리 또한 박동진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박동진은 가장 넓은 범위의 유파들을 겸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박동진은 이들의 소리를 받은 그대로 연창하기 보다는 스스로 독공에 의하여 소리를 새로 짠 경우가 많은데 때문에 판소리 사설의 확장이 많고, 확장된 만큼 이야기로서 판소리의 서사성을 많이 살렸다. 또한 과거의 축약적 사설이 가지는 일종의 이면(裏面)적 괴리를 사설의 확장을 통하여 다소간 보완하기도 하였다. </p><p>박동진의 판소리 예술은 대중성을 지향한 것으로 유명한데, 현재 남아있는 공연 실황 자료를 참고해 보면 욕과 재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현장에 따라서 상당히 즉흥적인 사설을 구사하여 가장 대중적인 흥미를 많이 일으키는 소리꾼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아니리를 중시하여 "판소리의 반이 아니리."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고수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일방적인 반주자와 연창자의 관계이기 보다는 고수와 자유롭게 재담과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고수까지도 무대 위의 한 주역으로 끌어 올렸는데, 이것은 음악적 엄격함을 중시하는 김명환 등의 고법 이론, 판소리 이론과는 다소 상충되는 면이 있으나 그 만큼 현장성이 살아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p><p>박동진의 성음은 약간 쉰듯한 수리성인데 칼칼한 느낌이 난다. 또한 독공 기간이 길었던 만큼 그 성량이 매우 커서 유장하고 장엄한 장면의 묘사에 능했고,《적벽가》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전투 장면을 묘사하는 것에서도 뛰어났다. 일각에서는 박동진의 판소리가 재담에 지나치게 치중하여 음악적인 성격이 많이 결여되었다고 하는데, 7~90년대의 공연 실황을 보면 고음과 중음, 저음이 하나 같이 두터운 소리로 나오며, 붙임새의 사용 또한 상황에 맞게 자유자제로 사용하고 있고 무엇보다 <a>김희조</a>가 시작한 '창과 관현악'이라는 장르에서 거문도 뱃노래와 같은 민요까지 직접 부르고 있는 것, 햇님국극단 활동을 하면서 각 곡의 편곡을 담당했던 일을 볼 때 이러한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 또 박동진은 느린 장단을 상당히 중시하였는데 그가 노랑목을 쓰지 않으면서도 시김새를 적절히 구사하는 것은 이러한 소리 미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p><p>박동진은 이러한 모든 제반 예술 행위를 일컬어 광대 놀음이라 하였고, 그 자신을 광대라고 지칭하였는데, 이로 인해 최동현은 "귀명창이 사라진 시대의 명창"이라 말하기도 했다. 박동진은 자신의 이러한 미학을 신재효가 지은 단가 《광대가》에 근거한 것으로 보았으며, 때문에 실전된 단가의 곡조를 자신이 창작하여 다시 부르기도 하였다. </p><p>1960~1970년대에 가장 많이 활약한 고수는 김명환인데 박동진은 김명환보다는 이정업, 한일섭, 김동준, 김득수와 많은 호흡을 맞추었고, 김득수와 김동준의 북을 가장 선호하였다. 김명환은 장판개에게 고법을 배웠고, 소리도 배웠으나 소리꾼으로 행세하기 위해 배웠다기 보다는 오로지 북을 치기 위해 배웠고, 소리는 북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부수적으로 배운 이에 속하였으나 한일섭, 김동준, 김득수 등은 모두 판소리 창자로 시작하여 고수로 전향한 인물들이었고 이정업의 경우에도 본래 줄광대로 시작하였다가 역시 고수로 전향하였던 인물이다. 즉 박동진은 직접 소리꾼으로 활동하여 그 미학을 직접 체감하고 있는 이들의 북 장단을 선호하였다. 1970년대 이후로는 전주의 주봉신을 수행고수로 하여 자주 활동하였다. </p><p>1974년, 김동준의 북 반주로 《적벽가》 전판을 녹음하였고, 같은 해에 박후성의 북 반주로 《성웅 이순신》의 4시간 창본을 녹음하였다. 1988년부터 19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주봉신의 북으로 《흥보가》전판, 《수궁가》전판,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의 일부, 《변강쇠타령》전판 2종, 《배비장타령》전판, 《예수전》 등을 녹음하여 각각 음반으로 출반하였다. 이 외에도 동아방송의 기획으로 김득수와 함께 《숙영낭자전》을 녹음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음원으로 확인되지 않고 다만 DBS의 데이터 목록에서만 확인된다. 여러 판소리를 발표하였지만 출반된 녹음은 사실상 극소수에 속하는데, 그나마 1968년~1972년까지의 완창 공연 릴테이프가 국립국악원에 보관되어 있고, 1970년대 이후 국립극장에서 가졌던 각종 연창회와 완창 발표회, 감상회 당시의 실황이 <a>국립극장 자료실</a>에 보관되어 있어 박동진 판소리 예술의 전모를 알 수 있다.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변녹수(邊祿樹)의 <a>아명(兒名)</a>은 변기(邊基)이다.</span> </li> <li><span><a>↑</a></span> <span><a>박동진 장로(국악인, 초동교회)</a>, 순복음가족신문</span> </li> <li><span><a>↑</a></span> <span>박동진 증언. (김기형,「원로예술인들에게 듣는다. - 박동진의 소리 세계」,『월간 문화예술』2001년 5월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1, P.89~90.)</span> </li> <li><span><a>↑</a></span> <span>김창진은 명창 <a>김창룡</a>의 동생으로 중고제 명창이었다고 한다. 본래 형 김창룡의 고수로 활동하였는데, 그 대접의 차이에 화가나 독공하여 명창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아편에 중독되어 형과는 거의 의절하였으며 서울에서 활동하지 못하였다. 박동진은 김창룡의 소리가 중고제이면서도 동편제 소리와 유사하다고 하였고, 김창진의 소리는 중고제이면서도 서편제 소리와 유사하다고 하였다.</span> </li> <li><span><a>↑</a></span> <span>박동진 증언.</span> </li> <li><span><a>↑</a></span> <span>조학진의 적벽가는 정춘풍에서 박기홍으로 이어지는 소리인데 초기 연구에서는 이 소리를 동편제로 보았으나 근래에는 중고제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그런 만큼 정춘풍의 소리 계통을 어디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다만, 정춘풍을 중고제로 본다고 할지라도 정춘풍의 제자인 박기홍은 본래 동편제 명창 박만순의 제자이며 전도성과 함께 동편 고제를 고수하며 송만갑의 신제소리를 강력하게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박기홍은 정춘풍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기 보다 자신이 고수한 동편제의 원칙에 맞추어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고, 따라서 그 제자인 조학진은 동편제 소리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span> </li> </ol></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박동진 판소리 전수관</a></li> <li><a>maniadb</a></li></ul> <div><small><a><img></a><a><img></a> 이 문서에는 <a>다음커뮤니케이션</a>(현 <a>카카오</a>)에서 <a>GFDL</a> 또는 <a>CC-SA</a> 라이선스로 배포한 <a>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a>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small></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박동진_(1916년)&amp;oldid=24349643</a>"</div> <div><div><a>분류</a>: <ul><li><a>1916년 태어남</a></li><li><a>2003년 죽음</a></li><li><a>공주시 출신</a></li><li><a>일제 강점기의 작사가</a></li><li><a>일제 강점기의 작곡가</a></li><li><a>일제 강점기의 판소리 명창</a></li><li><a>대한민국의 국악인</a></li><li><a>대한민국의 작사가</a></li><li><a>대한민국의 작곡가</a></li><li><a>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a></li><li><a>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a></li><li><a>창극 배우</a></li><li><a>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a></li><li><a>1933년 데뷔</a></li><li><a>한국독립당의 당원</a></li><li><a>대한민국의 수필가</a></li><li><a>대한민국의 장로교도</a></li><li><a>20세기 대한민국 사람</a></li><li><a>21세기 대한민국 사람</a></li><li><a>병사한 사람</a></li><li><a>공주중동초등학교 동문</a></li><li><a>밀양 박씨</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English</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5월 31일 (금) 02:5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1971년 박동진이 7시간 완창 발표한 판소리는 무엇인가?
적벽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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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1년 박동진이 7시간 완창 발표한 판소리는 무엇인가?", "박동진의 직업은 무엇인가요?", "박동진은 1973년 무형문화제 제5호 판소리 어떤것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는가?", "1968년 성경린의 주선으로 박동진이 흥보가를 5시간 완창할 때 공조한 사람은?", "박동진에게 영향을 미친 동편제 신제는 누구 계통인가?", "박동진은 판소리 사설의 확장을 통하여 어떤점을 부각시켰는가?", "판소리의 계통중 사멸된 계통은 무엇인가?", "박동진은 여러계통의 소리를 받은 그대로 연창하지 않고 소리를 어떤것에 의하여 새로 짰는가?", "박동진의 소리에 전반적인 교정을 해 준 사람은?", "박동진은 판소리 사설을 확장해서 판소리의 어떤 특성을 많이 살렸나?", "박동진이 판소리 예술에서 지향한 점은 무엇인가?", "판소리에서 반주자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박동진의 판소리는 어떤것을 지향하였나요?", "박동진은 판소리의 반을 무엇이라고 주장했는가?", "박동진의 판소리 예술이 지향하는 것은?", "박동진이 판소리의 반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박동진이 고수와 자유롭게 재담과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은 전통적인 고법이론의 어떤 특성과 상충되나?", "박동진이 햇님국극단 활동에서 담당했던 일은 무엇인가?", "박동진의 성음은 무엇인가?", "박동진이 각 곡의 편곡을 담당하여 활동하였던 극단은?", "박동진이 판소리에서 중시한 장단은 무엇인가?", "박동진의 목소리는 어떤 성음인가?", "박동진의 성량이 매우 크기 때문에 적벽가에서 특히 뛰어나게 묘사하는 장면은?", "박동진이 각 곡의 편곡을 담당하며 활동했던 극단 이름은?", "1970년대 이후부터 박동진의 수행고수로 활동한 사람은 누구인가?", "1960~1970년대에 주로 활약한 고수는 누구인가?", "김명환은 무엇을 하기 위해 소리를 배웠는가?", "줄광대로 시작하였다가 판소리로 전향한 인물은 누구인가?", "1970년이후 전주의 무엇을 수행고수로 하여 활동하였는가?", "1960~1970년대에 활약이 가장 많았던 고수는?", "박동진이 가장 선호한 고수 두 사람은?", "박동진이 1970년대 이후 수행고수로 삼은 사람은?", "1974년 고수 김동준의 반주로 녹음한 판소리는 무엇인가?", "1974년에 김동준의 북반주로 판소리 무엇의 전판을 녹음하였는가?", "동아방송의 기획으로 김득수와함께 녹음한 작품은 무엇인가?", "1968-1972년 까지 박동진의 완창공연 릴테이프가 보관되어있는 곳은?", "1974년 박동진이 김동준의 북 반주로 녹음한 판소리는?", "1974년 박동진이 박후성의 북 반주로 녹음한 판소리는?", "박동진이 1968년~1972년까지 완창한 공연 릴테이프가 보관되어 있는 곳은?" ]
<!DOCTYPE html> 박동진 (1916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동진 (1916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박동진朴東鎭</th></tr><tr><th colspan="2">기본 정보</th></tr><tr><th>출생</th> <td> 1916년 8월 10일(1916-08-10) (음력 7월 12일)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td></tr><tr><th>사망</th> <td> 2003년 7월 8일 (86세) 대한민국 충청남도 공주시 무릉동</td></tr><tr><th>직업</th> <td> 판소리 국악인 창극배우 판소리 작사가 판소리 작곡가 판소리 편곡가 인간문화재 수필가</td></tr><tr><th>장르</th> <td> 한국 전통 음악</td></tr><tr><th>활동 시기</th> <td> 1933년 ~ 2003년</td></tr> <tr><th>배우자</th> <td> 변녹수(재혼)[1]</td></tr><tr><th>가족</th> <td> 자녀는 슬하 4남</td></tr><tr><th>학력</th> <td> 충청남도 공주 진금보통학교 졸업 충청남도 대전고등보통학교 중퇴</td></tr><tr><th>종교</th> <td> 유교(성리학) → 개신교(한국기독교장로회)[2]</td></tr><tr><th>웹사이트</th> <td> 忍堂 박동진 先生 판소리 전수관</td></tr> </tbody></table> 박동진(忍堂 朴東鎭, 1916년 8월 10일(음력 7월 12일) ∼ 2003년 7월 8일)은 일제 강점기의 창극배우이며 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이다.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하였으며 판소리 완창의 대가로도 손꼽힌 그는 1990년대까지 대한민국 판소리 분야의 대표적 인사로 활약하였다. 그는 2003년 7월 8일에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목차 1 생애 2 국악 예술 세계 3 각주 4 외부 링크 생애[편집] 1916년 8월 10일 충청남도 공주군 장기면 무릉리(現 충청남도 공주시 무릉동)에서 출생하였으며 판소리 명창으로 활동하였고 그의 아호(雅號)는 인당(忍堂)이다. 그의 자세한 가계는 알 수 없으나 증언에 따르면 할아버지가 땅재주를 넘는 어릿광대였으며, 그 재주로 고종(高宗, 1852년 9월 8일 ~ 1919년 1월 21일)에게 참봉(參奉) 벼슬을 받았다고 한다.[3] 그러나 부친은 국악과 일체 관련을 두지 않은 농사꾼이었다고 한다. 16세 때 공주에 들어 온 협률사(協律社)의 공연을 본 이후로 판소리에 빠지기 시작하여 18세 때에는 충청남도 청양에 거주하였던 손병두 문하에 들어가 처음 판소리를 익혔다. 헌데 손병두는 본래 명창으로 활동한 사람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박동진은 손병두의 조부라 알려진 손필모의 주선을 받아 김창진(金昌鎭) 문하로 옮겨 《심청가》를 배웠다.[4] 19세에는 정정렬(丁貞烈, 1876년 5월 21일 ~ 1938년 3월 21일)에게 《춘향가》를 배웠으나 당시 정정렬의 다른 제자들이 많아 다 배우지 못했고, 20세 되던 해에 유성준에게 《수궁가》를, 21세 때 조학진 문하에서 《적벽가》, 22세 때 박지홍 문하에서 《흥보가》를 배웠다. 그리고 다시 상경하여 정정렬에게 《춘향가》를 배웠다. 또한 송만갑에게도 지도를 받았다고 하는데 정확히 어떤 바탕을 배운 것은 아니고 전반적인 정리 성향을 띈 지도만 받았던 듯 하다.[5] 25세를 전후하여 무절제한 생활로 목이 상하여 소리꾼으로서는 그렇게 행세하지 못하였고, 행세하는 경우에도 중앙 무대에는 서지 못했다. 1944년에서 1952년까지 8년 간은 조선음악단, 김연수 창극단, 조향 창극단 등 창극단 생활을 전전하며 창극 무대에 서기도 하였고, 고수(鼓手)로 행세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다시 목을 되찾기 위해 100일 독공도 마다하지 않는 등 소리 수련을 계속하였는데 생활을 위해 햇님국극단에서 편곡과 무대감독을 담당하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소리꾼으로 전면적인 활동을 벌이지는 못하였다. 1958년에서 1959년까지 한국독립당 문화예술행정특보위원 직위를 잠시 지냈고 그 후 1962년 국립국악원 국악사보가 되었고, 1968년, 당시 국립국악원 원장 성경린(成慶麟, 1911년 9월 18일 ~ 2008년 3월 5일)의 주선과 당시 각종 창극단에서 악사로 활동하던 한일섭(韓一燮, 1929년 ~ 1973년)의 공조로 판소리 《흥보가》의 5시간 완창 발표를 가졌다. 이 발표회는 UN군 사령부 방송 VUNC를 통해 방송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것을 기점으로 1969년《춘향가》 8시간, 1970년 《심청가》 6시간, 1971년 《적벽가》 7시간,《수궁가》 4시간의 완창 발표를 연달아 진행하였다. 뿐만 아니라 1970년《변강쇠타령》, 1972년 《배비장타령》, 《숙영낭자전》, 《옹고집타령》등을 복원, 완창 발표를 가졌고,《성웅 이순신》, 《성서 판소리》등 새 판소리를 작창하는 등 소리꾼으로서 전면적인 활동에 나섰다. 특히 《적벽가》의 완창 능력을 인정받아 197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같은 해 국립창극단의 단장에 취임하는 등 판소리계 중진 인사로 활약하기 시작하여 1990년대까지 연 1회 이상의 연창회를 가졌다. 본래 특정한 종교가 없었던 그는 1969년 장로교 목사 조향록과 극작가 주태익의 요청으로 창작 판소리 《예수전》을 공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개신교에 귀의하였고, 이후에도 《성서 판소리》, 《모세전》 등의 창작 판소리를 발표하며 개신교 선교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980년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1981년에 미국 일주 공연에 참가하였으며, 1982년에는 《성서 판소리》를 미국에서 발표하였다. 1985년 국립국악원 판소리 원로사범에 임명되었고, 1987년 국립국악원 지도위원이 되었다. 이 시기에 상당히 많은 상을 수상하였고, 명실상부한 판소리계 최고 원로이며 대명창으로 대접을 받았다. 1990년대 후반부터 후진 양성에 힘쓰기 위해 공주로 내려와 전수관을 개관하는 한편, 여전히 공연 활동을 활발히 펼쳤고,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완창과 장시간 연창을 감행하는 등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2003년 7월 8일, 노환으로 별세하였고 별세 다음날 2003년 7월 9일에는 생전 그간의 공로를 인정받아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국악 예술 세계[편집] 이미 1910년대에 이르면 중앙무대에서 판소리가 각광 받게 되고 많은 명창들이 활약하게 되면서 동편제니 서편제니 하는 구분이 소용없게 되었고, 특히 김창환을 필두로 하는 근대 5명창들이 서울에서 조선성악연구회를 결성해 후진 양성에 힘쓰면서 많은 소리꾼들이 이들 5명창을 번갈아 스승으로 모셨다. 따라서 서로 다른 계통의 소리를 배워 자기 것으로 만드는 현상이 만연하였는데, 박동진은 그 중에서도 특히 다양하고 복잡한 사승관계를 가지는데, 그가 직접적으로 다섯 바탕을 전수 받았다고 증언하는 이들의 면면은 다음과 같다. 김창진 : 중고제 김정근 계통 정정렬 : 서편 신제 박지홍 : 서편 고제 김창환 계통 유성준 : 동편제 송판 계통 조학진 : 동편제 박기홍 계통[6] 현재 사멸된 중고제는 물론 서편제의 고제와 신제, 동편제의 송판 계통과 박기홍 계통에 이르기까지 그 계통이 매우 다양하다. 여기에 전반적인 교정을 해주었다는 송만갑의 영향을 생각하면 동편제 신제인 송만갑 계통의 소리 또한 박동진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박동진은 가장 넓은 범위의 유파들을 겸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박동진은 이들의 소리를 받은 그대로 연창하기 보다는 스스로 독공에 의하여 소리를 새로 짠 경우가 많은데 때문에 판소리 사설의 확장이 많고, 확장된 만큼 이야기로서 판소리의 서사성을 많이 살렸다. 또한 과거의 축약적 사설이 가지는 일종의 이면(裏面)적 괴리를 사설의 확장을 통하여 다소간 보완하기도 하였다. 박동진의 판소리 예술은 대중성을 지향한 것으로 유명한데, 현재 남아있는 공연 실황 자료를 참고해 보면 욕과 재담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현장에 따라서 상당히 즉흥적인 사설을 구사하여 가장 대중적인 흥미를 많이 일으키는 소리꾼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한 아니리를 중시하여 "판소리의 반이 아니리."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고수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일방적인 반주자와 연창자의 관계이기 보다는 고수와 자유롭게 재담과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고수까지도 무대 위의 한 주역으로 끌어 올렸는데, 이것은 음악적 엄격함을 중시하는 김명환 등의 고법 이론, 판소리 이론과는 다소 상충되는 면이 있으나 그 만큼 현장성이 살아있는 것이기도 하였다. 박동진의 성음은 약간 쉰듯한 수리성인데 칼칼한 느낌이 난다. 또한 독공 기간이 길었던 만큼 그 성량이 매우 커서 유장하고 장엄한 장면의 묘사에 능했고,《적벽가》에서 나타나는 커다란 전투 장면을 묘사하는 것에서도 뛰어났다. 일각에서는 박동진의 판소리가 재담에 지나치게 치중하여 음악적인 성격이 많이 결여되었다고 하는데, 7~90년대의 공연 실황을 보면 고음과 중음, 저음이 하나 같이 두터운 소리로 나오며, 붙임새의 사용 또한 상황에 맞게 자유자제로 사용하고 있고 무엇보다 김희조가 시작한 '창과 관현악'이라는 장르에서 거문도 뱃노래와 같은 민요까지 직접 부르고 있는 것, 햇님국극단 활동을 하면서 각 곡의 편곡을 담당했던 일을 볼 때 이러한 비판은 타당하지 않다. 또 박동진은 느린 장단을 상당히 중시하였는데 그가 노랑목을 쓰지 않으면서도 시김새를 적절히 구사하는 것은 이러한 소리 미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박동진은 이러한 모든 제반 예술 행위를 일컬어 광대 놀음이라 하였고, 그 자신을 광대라고 지칭하였는데, 이로 인해 최동현은 "귀명창이 사라진 시대의 명창"이라 말하기도 했다. 박동진은 자신의 이러한 미학을 신재효가 지은 단가 《광대가》에 근거한 것으로 보았으며, 때문에 실전된 단가의 곡조를 자신이 창작하여 다시 부르기도 하였다. 1960~1970년대에 가장 많이 활약한 고수는 김명환인데 박동진은 김명환보다는 이정업, 한일섭, 김동준, 김득수와 많은 호흡을 맞추었고, 김득수와 김동준의 북을 가장 선호하였다. 김명환은 장판개에게 고법을 배웠고, 소리도 배웠으나 소리꾼으로 행세하기 위해 배웠다기 보다는 오로지 북을 치기 위해 배웠고, 소리는 북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해 부수적으로 배운 이에 속하였으나 한일섭, 김동준, 김득수 등은 모두 판소리 창자로 시작하여 고수로 전향한 인물들이었고 이정업의 경우에도 본래 줄광대로 시작하였다가 역시 고수로 전향하였던 인물이다. 즉 박동진은 직접 소리꾼으로 활동하여 그 미학을 직접 체감하고 있는 이들의 북 장단을 선호하였다. 1970년대 이후로는 전주의 주봉신을 수행고수로 하여 자주 활동하였다. 1974년, 김동준의 북 반주로 《적벽가》 전판을 녹음하였고, 같은 해에 박후성의 북 반주로 《성웅 이순신》의 4시간 창본을 녹음하였다. 1988년부터 19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주봉신의 북으로 《흥보가》전판, 《수궁가》전판, 《심청가》, 《적벽가》, 《춘향가》의 일부, 《변강쇠타령》전판 2종, 《배비장타령》전판, 《예수전》 등을 녹음하여 각각 음반으로 출반하였다. 이 외에도 동아방송의 기획으로 김득수와 함께 《숙영낭자전》을 녹음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음원으로 확인되지 않고 다만 DBS의 데이터 목록에서만 확인된다. 여러 판소리를 발표하였지만 출반된 녹음은 사실상 극소수에 속하는데, 그나마 1968년~1972년까지의 완창 공연 릴테이프가 국립국악원에 보관되어 있고, 1970년대 이후 국립극장에서 가졌던 각종 연창회와 완창 발표회, 감상회 당시의 실황이 국립극장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어 박동진 판소리 예술의 전모를 알 수 있다. 각주[편집] ↑ 변녹수(邊祿樹)의 아명(兒名)은 변기(邊基)이다. ↑ 박동진 장로(국악인, 초동교회), 순복음가족신문 ↑ 박동진 증언. (김기형,「원로예술인들에게 듣는다. - 박동진의 소리 세계」,『월간 문화예술』2001년 5월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1, P.89~90.) ↑ 김창진은 명창 김창룡의 동생으로 중고제 명창이었다고 한다. 본래 형 김창룡의 고수로 활동하였는데, 그 대접의 차이에 화가나 독공하여 명창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아편에 중독되어 형과는 거의 의절하였으며 서울에서 활동하지 못하였다. 박동진은 김창룡의 소리가 중고제이면서도 동편제 소리와 유사하다고 하였고, 김창진의 소리는 중고제이면서도 서편제 소리와 유사하다고 하였다. ↑ 박동진 증언. ↑ 조학진의 적벽가는 정춘풍에서 박기홍으로 이어지는 소리인데 초기 연구에서는 이 소리를 동편제로 보았으나 근래에는 중고제로 보는 견해가 강하다. 그런 만큼 정춘풍의 소리 계통을 어디로 보느냐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다만, 정춘풍을 중고제로 본다고 할지라도 정춘풍의 제자인 박기홍은 본래 동편제 명창 박만순의 제자이며 전도성과 함께 동편 고제를 고수하며 송만갑의 신제소리를 강력하게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박기홍은 정춘풍의 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기 보다 자신이 고수한 동편제의 원칙에 맞추어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고, 따라서 그 제자인 조학진은 동편제 소리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외부 링크[편집] 박동진 판소리 전수관 maniadb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박동진_(1916년)&amp;oldid=24349643" 분류: 1916년 태어남2003년 죽음공주시 출신일제 강점기의 작사가일제 강점기의 작곡가일제 강점기의 판소리 명창대한민국의 국악인대한민국의 작사가대한민국의 작곡가대한민국의 판소리 명창대한민국의 남자 연극 배우창극 배우국가무형문화재 보유자1933년 데뷔한국독립당의 당원대한민국의 수필가대한민국의 장로교도20세기 대한민국 사람21세기 대한민국 사람병사한 사람공주중동초등학교 동문밀양 박씨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31일 (금) 02:5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주제 요약:** 박동진(1916-2003)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에서 활동한 판소리 명창이자 창극 배우로, 다양한 판소리 장르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며 한국 전통 음악의 발전에 기여했다. 그는 여러 명창에게서 다양한 판소리 기법을 배워 독창적인 스타일을 확립하였고, 후진 양성에도 힘썼다. 그의 예술적 업적은 판소리의 대중성과 서사성을 강조하며, 1973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각 문단의 핵심 문장:** 1. 박동진은 1916년 충청남도에서 태어나 판소리 명창으로 활동하며 2003년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2. 그는 다양한 스승에게서 판소리를 배우고,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활발히 공연하며 판소리의 대중성을 높였다. 3. 박동진은 판소리의 서사성을 강조하고, 후진 양성을 위해 전수관을 개관하며 지속적으로 활동하였다.
이 텍스트를 읽고, 전체 주제를 세 문장 이내로 요약한 뒤, 각 문단의 핵심 문장도 추출해서 함께 보여줘. 중요하지 않은 예시는 생략하고 핵심 개념 위주로 정리해줘.
인룡상목
https://ko.wikipedia.org/wiki/인룡상목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인룡상목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인룡상목</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tbody><tr> <td colspan="2"> <div><div><img></div><span><span><a><img></a></span><big><big><b>인룡</b></big></big></span></div> </td></tr> <tr> <td><a><img></a><br>코첼라계곡 발가락 도마뱀 </td></tr> <tr> <th><b><a>생물 분류</a></b> </th></tr> <tr> <td> <table> <tbody><tr> <td>계: </td> <td><a>동물계</a> </td></tr> <tr> <td>문: </td> <td><a>척삭동물문</a> </td></tr> <tr> <td>강: </td> <td><a>용궁강</a> 또는 <a>파충강</a> </td></tr> <tr> <td>아강: </td> <td><a>이궁아강</a> </td></tr> <tr> <td>하강: </td> <td><a>인룡하강</a> </td></tr> <tr> <td>상목: </td> <td><b>인룡상목</b><br>(Lepidosauria)<br><small><a>Haeckel</a>, 1866</small> </td></tr> </tbody></table> </td></tr> <tr> <th><b>목</b> </th></tr> <tr> <td> <ul><li><a>훼두목</a></li> <li><a>뱀목</a></li></ul><table> <tbody><tr><td></td></tr></tbody></table> </td></tr> </tbody></table> <div><div><a><img></a> <div><div><a></a></div><a>도마뱀</a>의 발. 인룡류의 특징인 겹치는 <a>비늘</a>을 보여준다</div></div></div> <p><b>인룡</b>(鱗龍; Lepidosaurs, <span><small>→비늘이 있는 도마뱀</small></span>)은 <b>인룡상목</b>(鱗龍上目; Lepidosauria)에 속한 <a>파충류</a>들로, 겹치는 비늘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a>뱀목</a>과 <a>훼두목</a>이 포함된다. 인룡류는 단계통군이며 공통조상의 모든 후손을 포함한다. 뱀목은 <a>뱀</a>, <a>도마뱀</a>, 그리고 <a>지렁이도마뱀</a>을 포함한다. 스페노돈티드과는 2억 년 전에는 훨씬 널리 분포했고 다양했지만 지금은 뉴질랜드에 사는 <a>투아타라</a> 두 종만이 남아있다. 인룡류의 자매분류군은 <a>조강</a>과 <a>악어</a>를 포함하는 <a>지배파충류</a>이다. 현존하는 투아타라는 스페노돈티드과의 스페노돈 속에 속한다. 도마뱀과 뱀은 인룡류 중 가장 종류가 많은 그룹으로 합쳐서 7970 종에 달한다.<sup><a>&#91;1&#93;</a></sup> 뉴질랜드에 서식하는 투아타라는 두 종만이 남아 있다. 도마뱀과 투아타라, 그리고 뱀 사이에는 뚜렷한 형태적 차이가 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특징</span></a></li> <li><a><span>2</span> <span>일반적인 형태</span></a></li> <li><a><span>3</span> <span>화석 기록</span></a></li> <li><a><span>4</span> <span>진화</span></a></li> <li><a><span>5</span> <span>생태</span></a></li> <li><a><span>6</span> <span>생활사와 행동</span></a></li> <li><a><span>7</span> <span>보존</span></a></li> <li><a><span>8</span> <span>참고문헌</span></a></li> </ul> </div> <h2><span></span><span>특징</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파충류의 하위분류인 인룡류는 다른 파충류와 몇 가지 차이점을 가진다. 먼저 수컷은 <a>악어</a>, <a>새</a>, <a>포유류</a>, 그리고 <a>거북</a>에게서 볼 수 있는 발기가 되는 음경이 아닌, <a>반음경</a>을 가진다. 반음경은 꼬리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볼 수 있다. 투아타라에서는 반음경이 완전히 진화하지 않았으나 <a>총배설강</a>의 뒤쪽에 한 쌍의 얕은 주머니를 가지고 있어 이것이 나중에 반음경으로 진화했다고 보고 있다.<sup><a>&#91;2&#93;</a></sup> </p><p>두번째로, 거의 대부분의 인룡류는 스스로 꼬리를 자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능력은 일부 최근 종에서는 없어졌다. 도마뱀은 꼬리뼈 안에 쪼개짐면이 있어서 꼬리를 떼어낼 수 있게 되어 있다. 어떤 도마뱀은 쪼개짐면이 여러 개 있기도 하고 어떤 도마뱀은 하나만 가지고 있다. 꼬리 재생은 항상 완벽한 것은 아니며 개개의 척추가 아닌 연골로 된 막대로 구성된다.<sup><a>&#91;2&#93;</a></sup> 뱀에서는 꼬리가 척추뼈 사이에서 분리되며 다시 자라나지 않는다.<sup><a>&#91;2&#93;</a></sup> </p><p>세번째로 인룡류의 비늘은 케라틴으로 된 상피 조직으로, 허물을 벗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다른 파충류에서 볼 수 있는 인갑(scute)과는 다르다.<sup><a>&#91;2&#93;</a></sup> 탈피는 종에 따라 다른 주기로 이루어진다. 도마뱀은 대개 조각조각 허물을 벗지만 뱀은 통째로 벗는다. 인갑과 달리 인룡류의 비늘은 기와처럼 겹쳐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p> <h2><span></span><span>일반적인 형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현생 파충류는 <a>무궁류</a>와 <a>이궁류</a>, 두 <a>계통군</a>으로 나뉜다. 각 계통군의 이름은 머리뼈에 있는 측두창의 개수에 따라 지어졌다. 무궁류는 측두창이 없고 이궁류는 머리뼈의 양쪽에 각각 두 개 씩 측두창을 가지고 있다.<sup><a>&#91;3&#93;</a></sup> 무궁류에는 거북과 멸종한 근연종들만이 속한다. 이궁류는 인룡류와 자매 분류군인 지배파충류로 구성된다.<sup><a>&#91;2&#93;</a></sup> 인룡류는 뱀목과 스페노돈티드과로 나뉜다. </p><p>뱀목은 뱀, 도마뱀, 그리고 지렁이도마뱀을 포함한다. 뱀목은 다리가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특징이 있다. 뱀, 어떤 도마뱀, 그리고 대부분의 지렁이도마뱀은 다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모든 뱀목의 피부는 <a>비늘</a>로 덮여 있다. 뱀목의 위턱은 머리뼈와 별도로 움직일 수 있는 무정위 운동성(cranial kinesis)를 가지고 있다.<sup><a>&#91;4&#93;</a></sup> 방형골(quadrate)과 그 이웃한 뼈 사이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움직임이 가능하다.<sup><a>&#91;5&#93;</a></sup> 무정위 운동성이 없었다면 뱀들은 자신보다 큰 먹이를 삼킬 수 없었을 것이다. <a>투아타라</a>는 다른 인룡류와 달리 이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지렁이도마뱀은 뱀처럼 대부분 다리가 없고, 보통 훨씬 작다. 지렁이도마뱀 중 세 종은 앞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땅을 파고 들어가 생활한다.<sup><a>&#91;1&#93;</a></sup> </p><p>스페노돈티드과는 투아타라와 멸종한 근연종을 포함하며 <a>뉴질랜드</a> 근처의 작은 섬들에서만 발견된다. 투아타라는 앞뒤가 모두 움푹 들어간 척추뼈를 가지고 있다.<sup><a>&#91;4&#93;</a></sup> 투아타라는 또 꼬리를 스스로 잘라내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투아타라는 정수리의 마루뼈 부근에 잘 발달된 솔방울눈 (pineal eye)을 가지고 있고, 이빨은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sup><a>&#91;2&#93;</a></sup> </p> <h2><span></span><span>화석 기록</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뱀은 <a>화석 기록</a>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지만 가장 오래된 뱀 화석은 <a>백악기</a>의 것이다.<sup><a>&#91;2&#93;</a></sup> 에오세 말기에 멸종한 3 기의 뱀 화석이 몇 종류 발견되었다. 최초의 <a>뱀과</a> 역시 에오세에 나타났다.<sup><a>&#91;2&#93;</a></sup> 도마뱀은 <a>쥐라기</a>에 처음 출현했고 이 때 도마뱀류(scincomorph)과 무족도마뱀류(anguimorph)가 처음 발견된다. 도마뱀붙이류(gekko)는 후기 쥐라기에 나타나고 <a>이구아나</a>류는 후기 백악기에 처음 나타났다. 백악기의 도마뱀들은 대부분 멸종한 속 및 종들에 속한다.<sup><a>&#91;6&#93;</a></sup>다수의 지렁이도마뱀류는 초기 신생대에 처음 나타난다.<sup><a>&#91;1&#93;</a></sup> 스페노돈티드목의 화석 기록은 하부 트라이아스기 지층에서 처음 발견되는데 이것이 인룡류 최초의 화석기록이다. 투아타라는 현재 뉴질랜드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섬들에서만 발견된다. 하지만 화석 기록에 의하면 뉴질랜드 본섬 뿐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sup><a>&#91;4&#93;</a></sup> </p> <h2><span></span><span>진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도마뱀은 원래 <a>이구아니아</a>와 <a>스클레로글로사</a> 두 개의 계통군으로 나뉘었다. 뱀과 지렁이도마뱀은 스클레로글로사 계통군에 속한다. 이빨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이구아니아는 <a>카멜레오니드과</a>와 <a>아가미드과</a> 두 개의 자매분류군으로 나뉜다.<sup><a>&#91;2&#93;</a></sup> 뱀은 도마뱀 그룹 내부의 한 가지이다. 실제로 <a>왕도마뱀</a>류와 같은 일부 도마뱀은 다른 도마뱀들보다 뱀과 더 가까운 관계에 있다. 왕도마뱀류는 반수생이며 큰 몸집을 가진 <a>육식성</a> 도마뱀으로 호주에 산다.<sup><a>&#91;7&#93;</a></sup> </p><p>뱀은 현재 약 3070 개의 현생 종을 가지고 있으며 스코레코피디안과 알레티노피디안으로 나뉜다.<sup><a>&#91;1&#93;</a></sup> 스콜레코피디안에는 370 종 정도가 속하며 입을 그리 크게 벌릴 수 없는 작은 뱀들로 대표된다.<sup><a>&#91;1&#93;</a></sup> 뱀은 작은 입을 가진 스콜레코피디안으로부터 입이 커지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이로 인해 큰 먹이감을 <a>소화</a>할 수 있게 되었다. <a>독사</a>는 약 2500 종 정도가 있으며 모두 <a>뱀상과</a>에 속한다.<sup><a>&#91;1&#93;</a></sup> </p><p>지렁이도마뱀류는 거의 대부분 다리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세 종은 조그마한 앞다리를 가지고 있다. 형태학적 자료에 의하면 앞다리를 가진 종들은 다리가 없는 종류의 자매그룹이다. 이것은 지렁이도마뱀의 진화과정에서 다리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한 번만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sup><a>&#91;1&#93;</a></sup> </p><p>투아타라는 트라이아스기에 기원하여 전세계에 분포하고 있었다. 후기 백악기에 모두 멸종하고 두 종만이 현재 뉴질랜드에 살아남아 있다. 이들의 멸종은 대형포유류의 출현과 시기를 같이 한다. 현생 투아타라의 골격 구조는 트라이아스기에 살았던 종의 구조와 거의 비슷하다. 투아타라의 야생 개체군은 32 개의 섬에서 발견되며 추가로 세 개의 섬에 이주한 것이 알려져 있다.<sup><a>&#91;8&#93;</a></sup> </p> <h2><span></span><span>생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인룡류에는 <a>초식</a>, <a>잡식</a>, <a>충식</a>, 그리고 <a>육식</a>을 하는 종류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초식을 하는 인룡류는 이구아나류, 아가미드류, 그리고 일부 도마뱀들이다.<sup><a>&#91;6&#93;</a></sup> 대부분의 도마뱀과 어떤 뱀들은 곤충을 주로 먹는다. 그 외의 뱀, 투아타라, 그리고 지렁이도마뱀은 육식성이다. 어떤 뱀은 특정한 종류의 먹이만을 먹는다. 예를 들면 살바도라 속의 뱀은 도마뱀만을 먹는다.<sup><a>&#91;6&#93;</a></sup> 나머지 도마뱀들은 잡식성이며 식물이나 곤충을 먹을 수 있다. </p><p>독사아과(viperines)의 뱀들은 머리의 피부에 노출되어 있는 신경말단으로 먹잇감이 방출하는 <a>적외선</a>을 감지할 수 있다.<sup><a>&#91;6&#93;</a></sup> 또, 독사아과와 보아뱀과의 어떤 뱀들은 열을 감지하여 먹잇감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sup><a>&#91;6&#93;</a></sup> 많은 뱀들이 먹이를 졸라서 죽일 수 있다. 먼저 먹잇감을 물고 자신의 몸을 그 주위로 둥글게 감는다. 몸을 세게 조이면 먹잇감은 질식하여 죽는다.<sup><a>&#91;6&#93;</a></sup> 어떤 뱀들은 <a>독</a>을 낼 수 있는 송곳니를 가지고 있다. 독니를 이용하여 뱀은 이미 죽었거나 의식을 잃은 먹이를 잠아먹는다. 또 어떤 독은 단백질분해 성분을 가지고 있어 소화를 돕기도 한다.<sup><a>&#91;6&#93;</a></sup> <a>카멜레온</a>은 길게 발사할 수 있는 혀로 먹이를 잡는다. 독특한 혀 메카니즘을 통해서 가능한데, 혀의 근육을 수축시켜 혀의 끝부분을 바깥쪽으로 밀어내는 방식이다.<sup><a>&#91;6&#93;</a></sup> </p><p>파충류의 주요 포식자는 다른 파충류들이다. 큰 파충류들은 작은 파충류들을 잡아먹는다. 또 파충류의 알도 파충류가 먹는다. 게다가 새들도 파충류를 잡아먹는다. 맹금류, 섭금류, 로드러너 등이 파충류를 잡아먹는 새들이다. 포유류도 파충류를 잡아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sup><a>&#91;6&#93;</a></sup> </p><p>뱀과 도마뱀은 분포가 매우 넓어서 극단적으로 추운 부분을 제외하면 전세계적으로 분포한다. 지렁이도마뱀은 <a>플로리다</a>, <a>멕시코</a> 본토와 <a>바하 캘리포니아</a>, <a>지중해</a>, <a>중동</a>, <a>북아프리카</a>, <a>사하라이남 아프리카</a>, <a>남아메리카</a>, 그리고 <a>카리브해</a> 지역에 산다.<sup><a>&#91;5&#93;</a></sup> 투아타라는 뉴질랜드의 몇몇 돌섬에만 산다. 투아타라는 땅을 파고 살며 주로 곤충을 잡아먹는다.<sup><a>&#91;4&#93;</a></sup> </p> <h2><span></span><span>생활사와 행동</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뱀목은 <a>태생</a>, <a>난태생</a>, 그리고 <a>난생</a>을 보여주는 종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a>태생</a>은 암컷이 새끼를 낳는다는 의미이고, 난태생은 알이 암컷의 몸속에서 새끼로 자란다는 의미이다. 난생인 종들은 암컷이 알을 낳는다. 뱀목의 몇몇 종들은 <a>무성생식</a>을 할 수 있다.<sup><a>&#91;7&#93;</a></sup> 투아타라는 길이 1 인치 정도의 알을 낳는다. 이 알은 14 개월 후에 부화한다.<sup><a>&#91;4&#93;</a></sup> </p><p>뱀목은 알 속에 있을 때 <a>전상악골</a>에 <a>난치</a>(卵齒; egg tooth)가 발달하여 부화 시에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을 돕는다.<sup><a>&#91;6&#93;</a></sup> 파충류는 알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성체가 될 때까지 세 배에서 스무 배까지 성장한다.<sup><a>&#91;6&#93;</a></sup> 인룡류의 생활사에는 크게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다. 부화/탄생, 성적 성숙, 그리고 생식능력의 상실이 그것이다.<sup><a>&#91;6&#93;</a></sup> </p><p>대부분의 인룡류는 <a>보호색</a>을 주요 방어수단으로 사용한다. 어떤 종들은 생태계에 잘 섞여들어갈 수 있는 피부색을 진화시킨 반면 어떤 종들은 현재 환경에 맞게 피부색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꼬리를 스스로 자를 수 있는 능력은 인룡류에서 흔한 방어수단이다. 에키노사우리아 같은 종류는 죽은 척 하는 방어기작을 진화시켰다.<sup><a>&#91;6&#93;</a></sup> </p> <h2><span></span><span>보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뱀가죽으로 만든 부츠로, 가까이 보이는 세 켤레는 다이아몬드 방울뱀 가죽으로 만든 것</div></div></div> <p>뱀은 흔히 공포의 대상이다. <a>북아메리카</a>에서는 <a>방울뱀</a> 라운드업이 열리곤 한다. 1959년부터 1986년 사이에 <a>스위트워터, 텍사스</a>열리는 방울뱀 라운드업 때문에 매년 5,563 마리의 방울뱀이 죽임을 당했다는 자료가 있다. 이때문에 그 지역의 방울뱀 개체군이 쇠퇴하고 특히 조지아의 <a>동부다이아몬드방울뱀</a>이 부분적으로 절멸했다고 한다.<sup><a>&#91;2&#93;</a></sup> </p><p>인간에 의한 서식지파괴가 파충류에게 가장 큰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인룡류의 중요한 서식지였던 땅을 개발한다. 땅을 정비하는 것 역시 서식지의 축소를 가져온다. 어떤 뱀과 도마뱀들은 설치류와 곤충이 풍부한 인간의 거주지로 이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파충류들은 해수로 간주되어 <a>박멸</a>의 대상이 된다.<sup><a>&#91;2&#93;</a></sup> </p><p>사람들은 인룡류의 서식지에 다른 종들을 데리고 들어오면서 파충류가 먹잇감이 되는 일이 많아졌다. <a>자메이카</a>의 사탕수수밭에 창궐하는 쥐를 잡기 위해 <a>인도</a>에서 몽구스를 데리고 들어온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 결과 <a>몽구스</a>는 자메이카의 도마뱀 개체군을 먹이로 삼았고 많은 도마뱀 종들이 절멸되거나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sup><a>&#91;2&#93;</a></sup> </p><p>적절한 행동으로 멸종위기의 파충류를 도울 수도 있다. 어떤 종은 포획된 상태에서는 번식을 하지 못하지만 다른 종류들은 잘 번식해 왔다. 동물피난처를 만드는 방법도 있다. 이 개념은 파충류를 특정 지역 안에서만 살게 해서 사람들의 거주지에 오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환경변화와 포식자의 공격은 피난처 안에서도 일어난다.<sup><a>&#91;6&#93;</a></sup> </p><p>불행히도, 파충류의 가죽은 계속해서 팔리고 있다. 신발, 부츠, 가방, 벨트, 버튼, 지감, 그리고 전등갓 등의 악세사리를 만드는 데 파충류 가죽이 쓰인다.<sup><a>&#91;2&#93;</a></sup> 1986 년에 세계자원기관(World Resource Institute)은 1050만 마리의 파충류 가죽이 합법적으로 거래되었다고 추산했다. 이것은 불법적인 거래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sup><a>&#91;2&#93;</a></sup> 뿔도마뱀을 잡아서 박제로 만든 것이 인기가 많다.<sup><a>&#91;2&#93;</a></sup> 남아 있는 파충류 종들을 보존하기 위해 사람들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p><p><a>기후변화</a>는 투아타라를 보존하기 위한 야생동물 관리의 필요성을 높였다. 투아타라는 더 서늘한 기후로 이주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존론자들은 투아타라를 더 서늘한 기후에 있는 섬으로 강제이주 시키는 것의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sup><a>&#91;9&#93;</a></sup> 투라타라의 서식범위는 이미 고양이, 쥐, 개, 그리고 족제비과 동물들이 들어오면서 크게 줄어들었다.<sup><a>&#91;10&#93;</a></sup> 투아타라가 아직 살아남아 있는 섬들에서 이들 포유류를 박멸한 것이 투아타라 개체군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폴리네시아 쥐의 제거 이후 투아타라 개체군을 관찰한 바에 따르면 쥐가 없어진 후 그 섬에서만 개체군의 크기가 증가했다고 한다.<sup><a>&#91;11&#93;</a></sup> 하지만 이들 소형 포유류가 섬에 다시 서식하게 되는 것을 막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p> <h2><span></span><span>참고문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 <sup><a>마</a></sup> <sup><a>바</a></sup> <sup><a>사</a></sup></span> <span>Vidal, Nicolas and S. Blair Hedges. "The Molecular Evolutionary Tree of Lizards, SNakes, and Amphisbaenians." C.R. Biologies. 332(2209): 129-139.</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 <sup><a>마</a></sup> <sup><a>바</a></sup> <sup><a>사</a></sup> <sup><a>아</a></sup> <sup><a>자</a></sup> <sup><a>차</a></sup> <sup><a>카</a></sup> <sup><a>타</a></sup> <sup><a>파</a></sup> <sup><a>하</a></sup> <sup><a>거</a></sup></span> <span>Pough, Harvey, et al. Herpetology. New Jersey: Prentice-Hall, 1998.</span> </li> <li><span><a>↑</a></span> <span><a>Romer, A. S.</a> &amp; Parsons, T. S. (1985): <i>The Vertebrate Body.</i> (6th ed.) Saunders, Philadelphia.</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 <sup><a>마</a></sup></span> <span>Bellairs, Angus d’A. Reptiles. New York: Harper&amp;Brothers, 1960.</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Benton, M. J.. The Phylogeny and Classification of the Tetrapods: Volume 1.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8.</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 <sup><a>마</a></sup> <sup><a>바</a></sup> <sup><a>사</a></sup> <sup><a>아</a></sup> <sup><a>자</a></sup> <sup><a>차</a></sup> <sup><a>카</a></sup> <sup><a>타</a></sup> <sup><a>파</a></sup> <sup><a>하</a></sup></span> <span>Zug, George R. Herpetology: An introductory Biology of Amphibians and Reptiles. San Diego: Academic Press, Inc, 1993.</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Smith, James G.. “Survival estimation in a long-lived monitor lizard: radio-tracking of Varanus mertensi.” Population Ecology. 52 (2010): 243-247. Web of Science. We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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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8, 2011.</span> </li> </ol></div> <div><table><tbody><tr><th><a>생물 분류 식별자</a></th><td><div> <ul><li><span><a>Wd</a>: <span><span><a>Q728299</a></span></span></span></li> <li><span><a>ADW</a>: <span><a>Lepidosauria</a></span></span></li> <li><span><a>EoL</a>: <span><a>4658568</a></span></span></li> <li><span><a>화석연구데이터베이스</a>: <span><a>37808</a></span></span></li> <li><span><a>ITIS</a>: <span><a>173859</a></span></span></li> <li><span><a>NCBI</a>: <span><a>8504</a></span></span></li> <li><span>uBio: <span><a>655693</a></span></span></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인룡상목&amp;oldid=24208286</a>"</div> <div><div><a>분류</a>: <ul><li><a>인룡</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From 변수가 없는 생물 분류 식별자</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li><a>위키생물종</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العربية</a></li><li><a>Беларуская</a></li><li><a>Български</a></li><li><a>Català</a></li><li><a>Čeština</a></li><li><a>Deutsch</a></li><li><a>English</a></li><li><a>Español</a></li><li><a>Eesti</a></li><li><a>Euskara</a></li><li><a>فارسی</a></li><li><a>Suomi</a></li><li><a>Français</a></li><li><a>Galego</a></li><li><a>עברית</a></li><li><a>हिन्दी</a></li><li><a>Magyar</a></li><li><a>Bahasa Indonesia</a></li><li><a>Italiano</a></li><li><a>Taqbaylit</a></li><li><a>Қазақша</a></li><li><a>Кыргызча</a></li><li><a>Latina</a></li><li><a>Nederlands</a></li><li><a>Occitan</a></li><li><a>Polski</a></li><li><a>Português</a></li><li><a>Русский</a></li><li><a>Simple English</a></li><li><a>Српски / srpski</a></li><li><a>Svenska</a></li><li><a>Тоҷикӣ</a></li><li><a>Українська</a></li><li><a>中文</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9:5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다리가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특징이 있으며, 뱀,도마뱀,지렁이 도마뱀이 포함되는 것은?
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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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리가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특징이 있으며, 뱀,도마뱀,지렁이 도마뱀이 포함되는 것은?", "스페노돈티드목의 화석이 제일 처음 발견된 곳은?", "도마뱀이 처음 출현한 시대는?", "가장 오래된 뱀 화석은 어느 시대의 것인가?", "스페노돈티드목의 화석 기록은 하부 트라이아스기 지층에서 처음 발견되는데 이것이 어떤 종류의 최초의 화석 기록인가?", "뱀은 화석 기록이 많지는 않지만, 그 중 가장 오래된 뱀 화석이 나타난 시기는?", "도마뱀은 언제 처음 출현되었나요?", "인룡류의 최초 화석 기록은?", "독사아과 뱀들은 머리 피부에 노출되어있는 신경말단으로 먹잇감이 방출하는 무엇을 감지할 수 있는가?", "독사아과의 보아뱀과의 어떠한 뱀들은 무엇을 감지하여 먹잇감의 위치를 찾는가?", "머리의 피부에 노출된 신경말단으로 먹잇감이 방출하는 적외선을 감지할 수 있는 뱀들은 무슨 과로 분류되는가?", "독특한 혀 메카니즘으로 길게 혀를 발사해 먹이를 잡는 파충류의 이름은?", "독사이과와 같이 열을 감지하여 먹잇감의 위치를 찾을 수 있는 뱀 종류는?", "길게 발사가능한 혀로 먹이를 잡는 뱀은?", "기후변화는 무엇을 보존하기 위한 야생동물 관리가 필요한가?", "보존자는 투이타라를 어떠한 조건의 섬으로 강제이주를 고려했나요?" ]
<!DOCTYPE html> 인룡상목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인룡상목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tbody><tr> <td colspan="2"> 인룡 </td></tr> <tr> <td>코첼라계곡 발가락 도마뱀 </td></tr> <tr> <th>생물 분류 </th></tr> <tr> <td> <table> <tbody><tr> <td>계: </td> <td>동물계 </td></tr> <tr> <td>문: </td> <td>척삭동물문 </td></tr> <tr> <td>강: </td> <td>용궁강 또는 파충강 </td></tr> <tr> <td>아강: </td> <td>이궁아강 </td></tr> <tr> <td>하강: </td> <td>인룡하강 </td></tr> <tr> <td>상목: </td> <td>인룡상목(Lepidosauria)Haeckel, 1866 </td></tr> </tbody></table> </td></tr> <tr> <th>목 </th></tr> <tr> <td> 훼두목 뱀목<table> <tbody><tr><td></td></tr></tbody></table> </td></tr> </tbody></table> 도마뱀의 발. 인룡류의 특징인 겹치는 비늘을 보여준다 인룡(鱗龍; Lepidosaurs, →비늘이 있는 도마뱀)은 인룡상목(鱗龍上目; Lepidosauria)에 속한 파충류들로, 겹치는 비늘을 갖고 있다. 여기에는 뱀목과 훼두목이 포함된다. 인룡류는 단계통군이며 공통조상의 모든 후손을 포함한다. 뱀목은 뱀, 도마뱀, 그리고 지렁이도마뱀을 포함한다. 스페노돈티드과는 2억 년 전에는 훨씬 널리 분포했고 다양했지만 지금은 뉴질랜드에 사는 투아타라 두 종만이 남아있다. 인룡류의 자매분류군은 조강과 악어를 포함하는 지배파충류이다. 현존하는 투아타라는 스페노돈티드과의 스페노돈 속에 속한다. 도마뱀과 뱀은 인룡류 중 가장 종류가 많은 그룹으로 합쳐서 7970 종에 달한다.[1] 뉴질랜드에 서식하는 투아타라는 두 종만이 남아 있다. 도마뱀과 투아타라, 그리고 뱀 사이에는 뚜렷한 형태적 차이가 있다. 목차 1 특징 2 일반적인 형태 3 화석 기록 4 진화 5 생태 6 생활사와 행동 7 보존 8 참고문헌 특징[편집] 파충류의 하위분류인 인룡류는 다른 파충류와 몇 가지 차이점을 가진다. 먼저 수컷은 악어, 새, 포유류, 그리고 거북에게서 볼 수 있는 발기가 되는 음경이 아닌, 반음경을 가진다. 반음경은 꼬리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볼 수 있다. 투아타라에서는 반음경이 완전히 진화하지 않았으나 총배설강의 뒤쪽에 한 쌍의 얕은 주머니를 가지고 있어 이것이 나중에 반음경으로 진화했다고 보고 있다.[2] 두번째로, 거의 대부분의 인룡류는 스스로 꼬리를 자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 능력은 일부 최근 종에서는 없어졌다. 도마뱀은 꼬리뼈 안에 쪼개짐면이 있어서 꼬리를 떼어낼 수 있게 되어 있다. 어떤 도마뱀은 쪼개짐면이 여러 개 있기도 하고 어떤 도마뱀은 하나만 가지고 있다. 꼬리 재생은 항상 완벽한 것은 아니며 개개의 척추가 아닌 연골로 된 막대로 구성된다.[2] 뱀에서는 꼬리가 척추뼈 사이에서 분리되며 다시 자라나지 않는다.[2] 세번째로 인룡류의 비늘은 케라틴으로 된 상피 조직으로, 허물을 벗을 수 있게 되어 있다. 다른 파충류에서 볼 수 있는 인갑(scute)과는 다르다.[2] 탈피는 종에 따라 다른 주기로 이루어진다. 도마뱀은 대개 조각조각 허물을 벗지만 뱀은 통째로 벗는다. 인갑과 달리 인룡류의 비늘은 기와처럼 겹쳐있는 구조를 하고 있다. 일반적인 형태[편집] 현생 파충류는 무궁류와 이궁류, 두 계통군으로 나뉜다. 각 계통군의 이름은 머리뼈에 있는 측두창의 개수에 따라 지어졌다. 무궁류는 측두창이 없고 이궁류는 머리뼈의 양쪽에 각각 두 개 씩 측두창을 가지고 있다.[3] 무궁류에는 거북과 멸종한 근연종들만이 속한다. 이궁류는 인룡류와 자매 분류군인 지배파충류로 구성된다.[2] 인룡류는 뱀목과 스페노돈티드과로 나뉜다. 뱀목은 뱀, 도마뱀, 그리고 지렁이도마뱀을 포함한다. 뱀목은 다리가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특징이 있다. 뱀, 어떤 도마뱀, 그리고 대부분의 지렁이도마뱀은 다리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모든 뱀목의 피부는 비늘로 덮여 있다. 뱀목의 위턱은 머리뼈와 별도로 움직일 수 있는 무정위 운동성(cranial kinesis)를 가지고 있다.[4] 방형골(quadrate)과 그 이웃한 뼈 사이가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움직임이 가능하다.[5] 무정위 운동성이 없었다면 뱀들은 자신보다 큰 먹이를 삼킬 수 없었을 것이다. 투아타라는 다른 인룡류와 달리 이 특징을 가지고 있지 않다. 지렁이도마뱀은 뱀처럼 대부분 다리가 없고, 보통 훨씬 작다. 지렁이도마뱀 중 세 종은 앞다리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은 땅을 파고 들어가 생활한다.[1] 스페노돈티드과는 투아타라와 멸종한 근연종을 포함하며 뉴질랜드 근처의 작은 섬들에서만 발견된다. 투아타라는 앞뒤가 모두 움푹 들어간 척추뼈를 가지고 있다.[4] 투아타라는 또 꼬리를 스스로 잘라내는 능력도 가지고 있다. 투아타라는 정수리의 마루뼈 부근에 잘 발달된 솔방울눈 (pineal eye)을 가지고 있고, 이빨은 상대적으로 큰 편이다.[2] 화석 기록[편집] 뱀은 화석 기록이 그리 많지 않은 편이지만 가장 오래된 뱀 화석은 백악기의 것이다.[2] 에오세 말기에 멸종한 3 기의 뱀 화석이 몇 종류 발견되었다. 최초의 뱀과 역시 에오세에 나타났다.[2] 도마뱀은 쥐라기에 처음 출현했고 이 때 도마뱀류(scincomorph)과 무족도마뱀류(anguimorph)가 처음 발견된다. 도마뱀붙이류(gekko)는 후기 쥐라기에 나타나고 이구아나류는 후기 백악기에 처음 나타났다. 백악기의 도마뱀들은 대부분 멸종한 속 및 종들에 속한다.[6]다수의 지렁이도마뱀류는 초기 신생대에 처음 나타난다.[1] 스페노돈티드목의 화석 기록은 하부 트라이아스기 지층에서 처음 발견되는데 이것이 인룡류 최초의 화석기록이다. 투아타라는 현재 뉴질랜드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섬들에서만 발견된다. 하지만 화석 기록에 의하면 뉴질랜드 본섬 뿐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4] 진화[편집] 도마뱀은 원래 이구아니아와 스클레로글로사 두 개의 계통군으로 나뉘었다. 뱀과 지렁이도마뱀은 스클레로글로사 계통군에 속한다. 이빨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이구아니아는 카멜레오니드과와 아가미드과 두 개의 자매분류군으로 나뉜다.[2] 뱀은 도마뱀 그룹 내부의 한 가지이다. 실제로 왕도마뱀류와 같은 일부 도마뱀은 다른 도마뱀들보다 뱀과 더 가까운 관계에 있다. 왕도마뱀류는 반수생이며 큰 몸집을 가진 육식성 도마뱀으로 호주에 산다.[7] 뱀은 현재 약 3070 개의 현생 종을 가지고 있으며 스코레코피디안과 알레티노피디안으로 나뉜다.[1] 스콜레코피디안에는 370 종 정도가 속하며 입을 그리 크게 벌릴 수 없는 작은 뱀들로 대표된다.[1] 뱀은 작은 입을 가진 스콜레코피디안으로부터 입이 커지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이로 인해 큰 먹이감을 소화할 수 있게 되었다. 독사는 약 2500 종 정도가 있으며 모두 뱀상과에 속한다.[1] 지렁이도마뱀류는 거의 대부분 다리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세 종은 조그마한 앞다리를 가지고 있다. 형태학적 자료에 의하면 앞다리를 가진 종들은 다리가 없는 종류의 자매그룹이다. 이것은 지렁이도마뱀의 진화과정에서 다리를 잃어버리는 사건이 한 번만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1] 투아타라는 트라이아스기에 기원하여 전세계에 분포하고 있었다. 후기 백악기에 모두 멸종하고 두 종만이 현재 뉴질랜드에 살아남아 있다. 이들의 멸종은 대형포유류의 출현과 시기를 같이 한다. 현생 투아타라의 골격 구조는 트라이아스기에 살았던 종의 구조와 거의 비슷하다. 투아타라의 야생 개체군은 32 개의 섬에서 발견되며 추가로 세 개의 섬에 이주한 것이 알려져 있다.[8] 생태[편집] 인룡류에는 초식, 잡식, 충식, 그리고 육식을 하는 종류가 모두 포함되어 있다. 초식을 하는 인룡류는 이구아나류, 아가미드류, 그리고 일부 도마뱀들이다.[6] 대부분의 도마뱀과 어떤 뱀들은 곤충을 주로 먹는다. 그 외의 뱀, 투아타라, 그리고 지렁이도마뱀은 육식성이다. 어떤 뱀은 특정한 종류의 먹이만을 먹는다. 예를 들면 살바도라 속의 뱀은 도마뱀만을 먹는다.[6] 나머지 도마뱀들은 잡식성이며 식물이나 곤충을 먹을 수 있다. 독사아과(viperines)의 뱀들은 머리의 피부에 노출되어 있는 신경말단으로 먹잇감이 방출하는 적외선을 감지할 수 있다.[6] 또, 독사아과와 보아뱀과의 어떤 뱀들은 열을 감지하여 먹잇감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6] 많은 뱀들이 먹이를 졸라서 죽일 수 있다. 먼저 먹잇감을 물고 자신의 몸을 그 주위로 둥글게 감는다. 몸을 세게 조이면 먹잇감은 질식하여 죽는다.[6] 어떤 뱀들은 독을 낼 수 있는 송곳니를 가지고 있다. 독니를 이용하여 뱀은 이미 죽었거나 의식을 잃은 먹이를 잠아먹는다. 또 어떤 독은 단백질분해 성분을 가지고 있어 소화를 돕기도 한다.[6] 카멜레온은 길게 발사할 수 있는 혀로 먹이를 잡는다. 독특한 혀 메카니즘을 통해서 가능한데, 혀의 근육을 수축시켜 혀의 끝부분을 바깥쪽으로 밀어내는 방식이다.[6] 파충류의 주요 포식자는 다른 파충류들이다. 큰 파충류들은 작은 파충류들을 잡아먹는다. 또 파충류의 알도 파충류가 먹는다. 게다가 새들도 파충류를 잡아먹는다. 맹금류, 섭금류, 로드러너 등이 파충류를 잡아먹는 새들이다. 포유류도 파충류를 잡아먹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6] 뱀과 도마뱀은 분포가 매우 넓어서 극단적으로 추운 부분을 제외하면 전세계적으로 분포한다. 지렁이도마뱀은 플로리다, 멕시코 본토와 바하 캘리포니아, 지중해, 중동, 북아프리카, 사하라이남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그리고 카리브해 지역에 산다.[5] 투아타라는 뉴질랜드의 몇몇 돌섬에만 산다. 투아타라는 땅을 파고 살며 주로 곤충을 잡아먹는다.[4] 생활사와 행동[편집] 뱀목은 태생, 난태생, 그리고 난생을 보여주는 종들을 모두 가지고 있다. 태생은 암컷이 새끼를 낳는다는 의미이고, 난태생은 알이 암컷의 몸속에서 새끼로 자란다는 의미이다. 난생인 종들은 암컷이 알을 낳는다. 뱀목의 몇몇 종들은 무성생식을 할 수 있다.[7] 투아타라는 길이 1 인치 정도의 알을 낳는다. 이 알은 14 개월 후에 부화한다.[4] 뱀목은 알 속에 있을 때 전상악골에 난치(卵齒; egg tooth)가 발달하여 부화 시에 알을 깨고 나오는 것을 돕는다.[6] 파충류는 알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성체가 될 때까지 세 배에서 스무 배까지 성장한다.[6] 인룡류의 생활사에는 크게 세 가지 중요한 사건이 있다. 부화/탄생, 성적 성숙, 그리고 생식능력의 상실이 그것이다.[6] 대부분의 인룡류는 보호색을 주요 방어수단으로 사용한다. 어떤 종들은 생태계에 잘 섞여들어갈 수 있는 피부색을 진화시킨 반면 어떤 종들은 현재 환경에 맞게 피부색을 변화시키기도 한다. 꼬리를 스스로 자를 수 있는 능력은 인룡류에서 흔한 방어수단이다. 에키노사우리아 같은 종류는 죽은 척 하는 방어기작을 진화시켰다.[6] 보존[편집] 뱀가죽으로 만든 부츠로, 가까이 보이는 세 켤레는 다이아몬드 방울뱀 가죽으로 만든 것 뱀은 흔히 공포의 대상이다. 북아메리카에서는 방울뱀 라운드업이 열리곤 한다. 1959년부터 1986년 사이에 스위트워터, 텍사스열리는 방울뱀 라운드업 때문에 매년 5,563 마리의 방울뱀이 죽임을 당했다는 자료가 있다. 이때문에 그 지역의 방울뱀 개체군이 쇠퇴하고 특히 조지아의 동부다이아몬드방울뱀이 부분적으로 절멸했다고 한다.[2] 인간에 의한 서식지파괴가 파충류에게 가장 큰 부정적 영향을 끼친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인룡류의 중요한 서식지였던 땅을 개발한다. 땅을 정비하는 것 역시 서식지의 축소를 가져온다. 어떤 뱀과 도마뱀들은 설치류와 곤충이 풍부한 인간의 거주지로 이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파충류들은 해수로 간주되어 박멸의 대상이 된다.[2] 사람들은 인룡류의 서식지에 다른 종들을 데리고 들어오면서 파충류가 먹잇감이 되는 일이 많아졌다. 자메이카의 사탕수수밭에 창궐하는 쥐를 잡기 위해 인도에서 몽구스를 데리고 들어온 것이 대표적인 예다. 그 결과 몽구스는 자메이카의 도마뱀 개체군을 먹이로 삼았고 많은 도마뱀 종들이 절멸되거나 수가 크게 줄어들었다.[2] 적절한 행동으로 멸종위기의 파충류를 도울 수도 있다. 어떤 종은 포획된 상태에서는 번식을 하지 못하지만 다른 종류들은 잘 번식해 왔다. 동물피난처를 만드는 방법도 있다. 이 개념은 파충류를 특정 지역 안에서만 살게 해서 사람들의 거주지에 오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 하지만 환경변화와 포식자의 공격은 피난처 안에서도 일어난다.[6] 불행히도, 파충류의 가죽은 계속해서 팔리고 있다. 신발, 부츠, 가방, 벨트, 버튼, 지감, 그리고 전등갓 등의 악세사리를 만드는 데 파충류 가죽이 쓰인다.[2] 1986 년에 세계자원기관(World Resource Institute)은 1050만 마리의 파충류 가죽이 합법적으로 거래되었다고 추산했다. 이것은 불법적인 거래는 포함하지 않은 것이다.[2] 뿔도마뱀을 잡아서 박제로 만든 것이 인기가 많다.[2] 남아 있는 파충류 종들을 보존하기 위해 사람들이 의식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기후변화는 투아타라를 보존하기 위한 야생동물 관리의 필요성을 높였다. 투아타라는 더 서늘한 기후로 이주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존론자들은 투아타라를 더 서늘한 기후에 있는 섬으로 강제이주 시키는 것의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9] 투라타라의 서식범위는 이미 고양이, 쥐, 개, 그리고 족제비과 동물들이 들어오면서 크게 줄어들었다.[10] 투아타라가 아직 살아남아 있는 섬들에서 이들 포유류를 박멸한 것이 투아타라 개체군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 폴리네시아 쥐의 제거 이후 투아타라 개체군을 관찰한 바에 따르면 쥐가 없어진 후 그 섬에서만 개체군의 크기가 증가했다고 한다.[11] 하지만 이들 소형 포유류가 섬에 다시 서식하게 되는 것을 막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참고문헌[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Vidal, Nicolas and S. Blair Hedges. "The Molecular Evolutionary Tree of Lizards, SNakes, and Amphisbaenians." C.R. Biologies. 332(2209): 129-139.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거 Pough, Harvey, et al. Herpetology. New Jersey: Prentice-Hall, 1998. ↑ Romer, A. S. &amp; Parsons, T. S. (1985): The Vertebrate Body. (6th ed.) Saunders, Philadelphia. ↑ 가 나 다 라 마 Bellairs, Angus d’A. Reptiles. New York: Harper&amp;Brothers, 1960. ↑ 가 나 Benton, M. J.. The Phylogeny and Classification of the Tetrapods: Volume 1.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타 파 하 Zug, George R. Herpetology: An introductory Biology of Amphibians and Reptiles. San Diego: Academic Press, Inc, 1993. ↑ 가 나 Smith, James G.. “Survival estimation in a long-lived monitor lizard: radio-tracking of Varanus mertensi.” Population Ecology. 52 (2010): 243-247. Web of Science. Web. April 27, 2011. ↑ Hay, Jennifer M., et al. “Genetic diversity and taxonomy: a reassessment of species designation in tuatara (Sphenodon: Reptilia).” Coserv Genet. 11 (2010):1063-1081. Web of Science. Web. April 27, 2011. ↑ Besson, A. A. and A. Cree. “Integrating physiology into conservation: an approach to help guide translocations of a rare reptile in a warming environment.” Animal Conservation. 14 (2011): 28-37. Web of science. Web. April 27, 2011. ↑ Nelson, Nicola J., et al. “Establishing a New Wild Population of Tuatara (Sphendon guntheri).” Conservation Biology. 16 (2002): 887-894. Web of Science. Web. April 27, 2011. ↑ Towns, David R.. “Eradication as reverse invasion: lesions from Pacific Rat (Rattus exulans) removals on New Zealand islands.” Biol Invasions. 11(2009): 1719-1733. Web of Science. Web. April 28, 2011. <table><tbody><tr><th>생물 분류 식별자</th><td> Wd: Q728299 ADW: Lepidosauria EoL: 4658568 화석연구데이터베이스: 37808 ITIS: 173859 NCBI: 8504 uBio: 655693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인룡상목&amp;oldid=24208286" 분류: 인룡숨은 분류: From 변수가 없는 생물 분류 식별자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생물종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हिन्दी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TaqbaylitҚазақшаКыргызчаLatinaNederlandsOccitan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Српски / srpskiSvenskaТоҷикӣ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9:5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문단 번호 | 핵심 내용 | 키워드 | |------------|------------|---------| | 1 | 인룡상목의 정의 및 분류 | 인룡상목, Lepidosauria, 파충류 | | 2 | 인룡류의 특징 및 생물학적 차이점 | 겹치는 비늘, 반음경, 꼬리 자르기 | | 3 | 인룡류의 일반적인 형태 | 무궁류, 이궁류, 뱀목, 스페노돈티드과 | | 4 | 화석 기록 및 역사적 분포 | 화석, 도마뱀, 뱀, 투아타라 | | 5 | 인룡류의 진화 과정 | 도마뱀, 뱀, 지렁이도마뱀, 진화 | | 6 | 생태적 역할 및 먹이 사슬 | 초식, 육식, 포식자 | | 7 | 생활사 및 행동 양식 | 태생, 난생, 방어기작 | | 8 | 보존 상태 및 위협 요소 | 서식지 파괴, 기후변화, 멸종위기 | ### 글의 흐름 요약 이 문서는 인룡상목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제공하며, 인룡류의 정의와 생물학적 특징을 설명한 후, 일반적인 형태와 화석 기록을 다룹니다. 이어서 인룡류의 진화 과정과 생태적 역할, 생활사 및 행동 양식에 대해 설명하며, 마지막으로 보존 상태와 위협 요소를 언급하여 인룡류의 현재 상황을 정리합니다. 전체적으로 인룡상목의 생물학적, 생태적, 보존적 측면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이 글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표 형식으로 요약해줘. 예: {문단 번호, 핵심 내용, 키워드}. 글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요약 마지막에 간단히 설명해줘.
경혜공주
https://ko.wikipedia.org/wiki/경혜공주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경혜공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경혜공주</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tbody><tr> <th colspan="2"> <div><div><img></div><span><big><big><b>경혜공주</b></big></big></span></div> </th></tr> <tr> <td colspan="2"><b>지위</b> </td></tr> <tr> <td colspan="2"><b>군주, 공주</b> </td></tr> <tr> <td colspan="2"><b>이름</b> </td></tr> <tr> <th><span>별호 </span> </th> <td>현주(縣主), 평창군주(平昌郡主) </td></tr> <tr> <td colspan="2"><b>신상정보</b> </td></tr> <tr> <th><span>출생일 </span> </th> <td><a>1436년</a> </td></tr> <tr> <th><span>출생지 </span> </th> <td><a>조선</a> </td></tr> <tr> <th><span>사망일 </span> </th> <td><a>1473년</a> <a>음력 12월 30일</a> </td></tr> <tr> <th><span>능묘 </span> </th> <td>경혜공주 묘<br>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29 </td></tr> <tr> <th><span>왕조 </span> </th> <td><a>조선 왕조</a> </td></tr> <tr> <th><span>부친 </span> </th> <td><a>문종</a> </td></tr> <tr> <th><span>모친 </span> </th> <td><a>현덕왕후</a> 안동 권씨 </td></tr> <tr> <th><span>배우자 </span> </th> <td>영양위 <a>정종</a>(寧陽尉 鄭悰) </td></tr> <tr> <th><span>자녀 </span> </th> <td>1남 1녀<br><a>정미수</a>(鄭眉壽) </td></tr> </tbody></table> <p><b>경혜공주</b>(敬惠公主, <a>1436년</a> ~ <a>1474년</a> <a>1월 17일</a>(음력 <a>1473년</a> <a>12월 30일</a><sup><a>&#91;1&#93;</a></sup>))는 <a>문종</a>과 <a>현덕왕후</a>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a>단종</a>의 친누이이기도 하다. </p><p>세종 때 평창 군주(平昌郡主)에 봉작되었고 문종 즉위 후 공주로 진봉되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li> <li><a><span>2</span> <span>가족 관계</span></a></li> <li><a><span>3</span> <span>경혜공주가 등장하는 작품</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경혜공주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 문종은 즉위 전이었고, 어머니 권씨는 세자의 후궁으로 품계는 종3품 양원(良媛)이었기 때문에 '현주'로 불리게 되었다. 위로 언니가 있었으나 태어난 지 1년도 못 되어 <a>1433년</a>에 죽었다. 어머니 양원 권씨가 세자빈으로 승격되면서 경혜공주는 현주에서 군주로 승격되고, 세자빈의 거처인 자선당에서 살게 되었다.<sup><a>&#91;2&#93;</a></sup> 이때 그는 평창 군주(平昌郡主)라는 작호를 받았는데 <a>정인지</a>가 지은 영릉 묘지문에 작호명이 나타난다. </p><p>경혜공주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당시의 관습대로 재액을 피하기 위해 <a>조유례</a>의 집에서 그 부인 및 외가의 여종인 유모 백씨의 손에 컸다.<sup><a>&#91;2&#93;</a></sup> 그녀는 미모가 굉장히 뛰어났다고 한다. 한양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p><p><a>1450년</a>(세종 32) 1월, 15세의 나이에 참판 정충경의 아들 순의대부(順義大夫)<sup><a>&#91;3&#93;</a></sup> <a>정종</a>(鄭悰)과의 혼인이 결정되었다. 12~13세에 혼인하던 당시 관습과는 달리 비교적 늦은 나이에 혼인한 것은 아내도 없이 고독한 아버지 문종의 곁을 떠나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sup><a>&#91;2&#93;</a></sup> 그러던 와중에 할아버지인 <a>세종</a>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세종이 승하하면 3년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혼인을 할 수 없고, 3년이 지나면 경혜공주의 나이가 너무 과년해지기 때문에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다.<sup><a>&#91;2&#93;</a></sup> 혼인 당시 경혜공주는 여전히 세자의 딸로서 평창군주(平昌郡主)로 불렸다. 군주로 봉해져야 궁 밖에서 생활을 해도 필요한 경비가 지급이 되기 때문에 조유례의 집으로 나갈 때쯤 평창군주로 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sup><a>&#91;2&#93;</a></sup><sup><a>&#91;4&#93;</a></sup> 조선왕조실록에 평창군주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a>1446년</a>(세종 28)의 일이다. </p><p>이후 <a>문종</a>의 즉위로 경혜공주는 공주로 책봉되었고, 문종은 딸의 살림집을 당시의 대표적 부자동네였던 양덕방(陽德坊) 향교동에 차려주었다.<sup><a>&#91;2&#93;</a></sup> 당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윤면(尹沔), 문여량(文汝良) 등이 공주와 부마를 위해 새로이 짓는 집 때문에 30여채의 민가가 철거된다고 아뢰었던 기록이 있다.<sup><a>&#91;5&#93;</a></sup>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종이 승하하고 경혜공주의 동생 단종이 즉위했다. 단종은 자주 향교동 경혜공주의 집을 찾았고 <a>계유정난</a>이 있던 날 밤에도 경혜공주의 집에서 자고 있었다.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은 <a>금성대군</a> 사건에 연루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경기도 양근으로 옮겨졌다. 공주가 병이 나자 단종은 세조에게 사람을 보내어 정종을 한양으로 불러들이라고 일렀고 세조도 문종의 유일한 사위라 하며 정종을 잠시 도읍으로 돌아오게 했다.<sup><a>&#91;6&#93;</a></sup> 그러나 사간원의 상소로 정종은 공주의 병이 낫자 다시 유배되었다.<sup><a>&#91;7&#93;</a></sup> 공주는 이때 정종의 유배지인 <a>수원</a>으로 향했고 나중에 통진(通津)을 거쳐 전라도 광주(光州)까지 따라갔다. 이후 정종은 승려 성탄 등과 결탁해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거열형을 당하였다. 당시 경혜공주는 임신 중이었다.<sup><a>&#91;2&#93;</a></sup> 《<a>연려실기술</a>》에서는 경혜공주 또한 남편의 죄에 연좌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유배되어 순천의 관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p> <blockquote><div>공이 적소에 있다가 사사된 뒤에, 공주가 순천 관비가 되었다. 부사 여자신(呂自新)은 무인인데, 장차 공주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키려 하니, 공주가 곧 대청에 들어가 교의(交椅)를 놓고 앉아서 말하기를,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은 왔지마는,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 하므로 마침내 부리지 못하였다. 여자신은 뒤에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여유길(呂裕吉)의 방조(旁祖)이다.</div> <p><cite> —&#8201;《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cite></p></blockquote> <p><a>안정복</a>의 <a>순암집</a>에도 경혜공주가 <a>장흥</a>의 관노가 되었다는 기술이 있다.<sup><a>&#91;8&#93;</a></sup> 그러나 실록에는 경혜공주가 관노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고 대신 정종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는데 무척 가난했다는 기록이 있다.<sup><a>&#91;9&#93;</a></sup> 세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경혜공주에게 집을 지어주고 몰수한 재산과 노비를 하사했다.<sup><a>&#91;9&#93;</a></sup> 또한 지난 <a>2012년</a> 7월 24일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증된 <a>해주 정씨</a> 대종가 소장 고문서 가운데 경혜공주가 자신의 유일한 아들 <a>정미수</a>에게 재산을 상속한 분재기(分財記)가 공개되었는데, 공주 자신이 죽기 사흘 전인 성종5년(<a>1474년</a>) 음력 12월 27일에 제작된 것으로 '경혜공주지인(敬惠公主之印)'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어 경혜공주가 죽을 때까지 공주의 신분을 유지했다는 증거로 채택되기도 했다.<sup><a>&#91;10&#93;</a></sup> <a>예종</a>에 이르러서는 경혜공주 내외의 아들 정미수를 종친의 예로 서용하였다. <a>1473년</a>(성종4) <a>12월 30일</a> 졸하였으며 성종은 부의(賻儀)로 쌀·콩 아울러 70석(碩), 정포(正布) 50필, 종이 1백 권, 석회(石灰) 60석, 촉랍(燭蠟) 30근을 하사하였다. 공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골에 있다. </p><p>경혜공주는 죽기 사흘 전에 외아들 정미수에게 남긴 분재기에서 "내가 불행히 병이 들어 유일한 아들인 미수가 아직 혼인도 못했는데 지금 홀연히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며, "노비는 갑작스러운 사이에 낱낱이 기록해 줄 겨를이 없어 먼저 정선방(貞善坊)에 하사받은 집과 통진(지금의 경기도 김포)에 있는 전답을 준다"고 적고, 정선방에 있는 가사에 대해서는 자신이 죽은 뒤에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고 자손에게 전하며 오래 지니고 살아줄 것을 당부하였다. </p> <h2><span></span><span>가족 관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b> 본가 <a>전주 이씨</a>(全州 李氏) </b> </p> <ul><li>조부&#160;: 제4대 <a>세종대왕</a>(世宗大王, 1397~1450, 재위: 1418~1450)</li> <li>조모&#160;: <a>소헌왕후</a> <a>청송 심씨</a>(昭憲王后 靑松 沈氏, 1395~1446) <ul><li>고모&#160;: <a>정소공주</a>(貞昭公主, 1412~1424)</li> <li><b>아버지</b>&#160;: 제5대 <a>문종대왕</a>(文宗大王, 1414~1452, 재위: 1450~1452)</li> <li>고모&#160;: <a>정의공주</a>(貞懿公主, 1415~1477)</li> <li>숙부&#160;: 제7대 <a>세조대왕</a>(世祖大王, 1417~1468, 재위: 1455~1468)</li> <li>숙모&#160;: <a>정희왕후</a> <a>파평 윤씨</a>(貞熹王后 坡平 尹氏, 1418~1483) <ul><li>사촌동생&#160;: 추존 <a>덕종대왕</a>(德宗大王, 1438~1457)</li> <li>사촌동생&#160;: <a>의숙공주</a>(懿淑公主, 1442~1477)</li> <li>사촌동생&#160;: 제8대 <a>예종대왕</a> (睿宗大王, 1450~1469, 재위 1468~1469)</li></ul></li> <li>숙부&#160;: <a>안평대군</a>(安平大君, 1418~1453)</li> <li>숙부&#160;: <a>임영대군</a>(臨瀛大君, 1420~1469)</li> <li>숙부&#160;: <a>광평대군</a>(廣平大君, 1425~1444)</li> <li>숙부&#160;: <a>금성대군</a>(錦城大君, 1426~1457)</li> <li>숙부&#160;: <a>평원대군</a>(平原大君, 1427~1445)</li> <li>숙부&#160;: <a>영응대군</a>(永膺大君, 1434~1467)</li></ul></li> <li>외조부&#160;: 화산부원군 경혜공 <a>권전</a>(花山府院君 景惠公 權專, 1372~1441)</li> <li>외조모&#160;: 해령부부인 <a>해주 최씨</a>(海寧府夫人 海州 崔氏,&#160;?~1456) <ul><li><b>어머니</b>&#160;: <a>현덕왕후</a> <a>안동 권씨</a>(顯德王后 安東 權氏, 1418~1441) <ul><li>동생&#160;: 제6대 <a>조선 단종</a>(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li> <li>올케&#160;: <a>정순왕후</a> <a>여산 송씨</a>(定順王后 礪山 宋氏, 1440~1521)</li></ul></li></ul></li></ul> <p><b> 시가 <a>해주 정씨</a>(海州 鄭氏) </b> </p> <ul><li><ul><li>시아버지&#160;: 형조참판 <a>정충경</a>(刑曹參判 鄭忠敬,&#160;?~1443)</li> <li>시어머니&#160;: 민호덕(閔好德)의 딸 정경부인 <a>여흥 민씨</a>(貞敬夫人 驪興 閔氏) <ul><li><b>부마</b>&#160;: 영양위 헌민공 <a>정종</a>(寧陽尉 獻愍公 鄭悰,&#160;? ~1461) <ul><li>장남&#160;: 해평부원군 소평공 <a>정미수</a>(海平府院君 昭平公 鄭眉壽, 1456~1512)</li> <li>며느리&#160;: 호조판서 이덕량(戶曹判書 李德良, 1435~1487)의 딸 정경부인 <a>전의 이씨</a>(貞敬夫人 全義 李氏)</li></ul></li></ul></li></ul></li></ul> <h2><span></span><span>경혜공주가 등장하는 작품</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한명회</a>》 (<a>KBS</a>, <a>1994년</a> 배우: 전소희)</li> <li>《<a>왕과 비</a>》 (<a>KBS</a>, <a>1998년</a>~<a>2000년</a> 배우: <a>김미주</a>)</li> <li>《<a>공주의 남자</a>》 (<a>KBS</a>, <a>2011년</a> 배우: <a>홍수현</a>)</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성종실록》37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12월 30일(병술) 2번째기사</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 <sup><a>마</a></sup> <sup><a>바</a></sup> <sup><a>사</a></sup></span> <span>신명호, 《조선공주실록》, 역사의 아침, 2009, <a>ISBN</a>&#160;<a>9788993119091</a></span> </li> <li><span><a>↑</a></span> <span>정종이 영양위로 책봉된 것은 단종 때의 일이다</span> </li> <li><span><a>↑</a></span> <span>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종실녀의 관제를 정해 빈(嬪)·잉(媵)·궁인(宮人)의 딸은 군주(郡主)라 칭하게 된 것은 <a>1440년</a>이다</span> </li> <li><span><a>↑</a></span> <span>《조선왕조실록》 문종 7권, 문종 1년(1451) 4월 1일 6번째 기사</span> </li> <li><span><a>↑</a></span> <span>《조선왕조실록》, 세조 1권, 세조1(1455) 윤6월 17일 1번째 기사</span> </li> <li><span><a>↑</a></span> <span>《조선왕조실록》, 세조 2권, 세조1(1455) 8월 7일 4번째 기사</span> </li> <li><span><a>↑</a></span> <span>안정복, 《순암집》 한백현(韓伯賢) 에게 편지를 보내다.</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조선왕조실록》, 성종 38권, 성종5(1474) 1월 1일 4번째 기사</span> </li> <li><span><a>↑</a></span> <span>다만 세조 11년(<a>1465년</a>)에 이미 세조는 정종과 경혜공주 사이의 소생에 대해서는 연좌하지 말 것을 예종에게 명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35권, 세조11(1465) 4월 1일 2번째 기사</span> </li> </ol></div>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조선과 대한제국의 왕녀/황녀 목록</div></th></tr><tr><th>추존왕 목조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추존왕 익조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안의공주</a></li></ul> </div></td></tr><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추존왕 도조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문혜공주</a></li> <li><a>문숙공주</a></li> <li><a>문의공주</a></li></ul> </div></td></tr><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추존왕 환조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정화공주</a></li></ul> </div></td></tr><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태조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경신공주</a></li> <li><a>경선공주</a></li> <li><a>경순공주</a></li></ul> </div></td></tr><tr><td colspan="2"><div> <ul><li><a>숙신옹주</a></li> <li><a>의령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정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div></td></tr><tr><td colspan="2"><div> <ul><li><a>함양옹주</a></li> <li><a>숙신옹주</a></li> <li><a>상원옹주</a></li> <li><a>인천옹주</a></li> <li><a>덕천옹주</a></li> <li><a>고성옹주</a></li> <li><a>전산옹주</a></li> <li><a>함안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태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정순공주</a></li> <li><a>경정공주</a></li> <li><a>경안공주</a></li> <li><a>정선공주</a></li></ul> </div></td></tr><tr><td colspan="2"><div> <ul><li><a>정신옹주</a></li> <li><a>정정옹주</a></li> <li><a>숙정옹주</a></li> <li><a>숙녕옹주</a></li> <li><a>숙경옹주</a></li> <li><a>숙근옹주</a></li> <li><a>소신옹주</a></li> <li><a>소숙옹주</a></li> <li><a>경신옹주</a></li> <li><a>정혜옹주</a></li> <li><a>숙혜옹주</a></li> <li><a>숙안옹주</a></li> <li><a>숙순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세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정소공주</a></li> <li><a>정의공주</a></li></ul> </div></td></tr><tr><td colspan="2"><div> <ul><li><a>정안옹주</a></li> <li><a>정현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문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경혜공주</a></li></ul> </div></td></tr><tr><td colspan="2"><div> <ul><li><a>경숙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단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div></td></tr><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세조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의숙공주</a></li></ul> </div></td></tr><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추존왕 덕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명숙공주</a></li></ul> </div></td></tr><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예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현숙공주</a></li> <li><a>혜순공주</a></li></ul> </div></td></tr><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성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순숙공주</a></li> <li><a>신숙공주</a></li></ul> </div></td></tr><tr><td colspan="2"><div> <ul><li><a>휘숙옹주</a></li> <li><a>경숙옹주</a></li> <li><a>휘정옹주</a></li> <li><a>정혜옹주</a></li> <li><a>공신옹주</a></li> <li><a>혜숙옹주</a></li> <li><a>정순옹주</a></li> <li><a>정숙옹주</a></li> <li><a>경순옹주</a></li> <li><a>숙혜옹주</a></li> <li><a>경휘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연산군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휘신공주</a></li> <li><a>이복억</a></li></ul> </div></td></tr><tr><td colspan="2"><div> <ul><li><a>이영수</a></li> <li><a>이함금</a></li> <li><a>이복합</a></li> <li><a>이정수</a></li> <li>옹주 이씨</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중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효혜공주</a></li> <li><a>의혜공주</a></li> <li><a>효순공주</a></li> <li><a>경현공주</a></li> <li><a>인순공주</a></li></ul> </div></td></tr><tr><td colspan="2"><div> <ul><li><a>혜순옹주</a></li> <li><a>혜정옹주</a></li> <li><a>정신옹주</a></li> <li><a>숙정옹주</a></li> <li><a>정순옹주</a></li> <li><a>효정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인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div></td></tr><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명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div></td></tr><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선조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정명공주</a></li> <li>공주</li></ul> </div></td></tr><tr><td colspan="2"><div> <ul><li><a>정신옹주</a></li> <li><a>정혜옹주</a></li> <li><a>정숙옹주</a></li> <li><a>정안옹주</a></li> <li><a>정휘옹주</a></li> <li><a>정인옹주</a></li> <li><a>정선옹주</a></li> <li><a>정근옹주</a></li> <li><a>정정옹주</a></li> <li><a>정화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광해군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div></td></tr><tr><td colspan="2"><div> <ul><li>폐 옹주(단인 이씨)</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추존왕 원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div></td></tr><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인조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공주</li></ul> </div></td></tr><tr><td colspan="2"><div> <ul><li><a>효명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효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숙신공주</a></li> <li><a>숙안공주</a></li> <li><a>숙명공주</a></li> <li><a>숙휘공주</a></li> <li><a>숙정공주</a></li> <li><a>숙경공주</a></li> <li><a>의순공주</a>(양녀)</li></ul> </div></td></tr><tr><td colspan="2"><div> <ul><li><a>숙녕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현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명선공주</a></li> <li><a>명혜공주</a></li> <li><a>명안공주</a></li></ul> </div></td></tr><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숙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공주</li> <li>공주</li></ul> </div></td></tr><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경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div></td></tr><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영조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div></td></tr><tr><td colspan="2"><div> <ul><li><a>화억옹주</a></li> <li><a>화순옹주</a></li> <li><a>화평옹주</a></li> <li><a>화덕옹주</a></li> <li><a>화협옹주</a></li> <li><a>화완옹주</a></li> <li><a>화유옹주</a></li> <li><a>화길옹주</a></li> <li><a>화령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추존왕 진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div></td></tr><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추존왕 장조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청연공주</a></li> <li><a>청선공주</a></li></ul> </div></td></tr><tr><td colspan="2"><div> <ul><li><a>청근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정조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div></td></tr><tr><td colspan="2"><div> <ul><li>옹주</li> <li><a>숙선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순조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명온공주</a></li> <li><a>복온공주</a></li> <li><a>덕온공주</a></li></ul> </div></td></tr><tr><td colspan="2"><div> <ul><li><a>영온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헌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옹주</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철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div></td></tr><tr><td colspan="2"><div> <ul><li><a>영혜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고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공주</li></ul> </div></td></tr><tr><td colspan="2"><div> <ul><li><a>덕혜옹주</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순종 소생</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div></td></tr><tr><td colspan="2"><div>-</div></td></tr></tbody></table><div></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경혜공주&amp;oldid=21798617</a>"</div> <div><div><a>분류</a>: <ul><li><a>조선의 왕족</a></li><li><a>1436년 태어남</a></li><li><a>1474년 죽음</a></li><li><a>조선의 공주</a></li><li><a>조선 세조</a></li><li><a>조선 문종</a></li><li><a>조선 단종</a></li><li><a>전주 이씨</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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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은 경혜공주의 살림집을 어디에 차려주었나?
양덕방(陽德坊) 향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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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643
11,385
[ "문종은 경혜공주의 살림집을 어디에 차려주었나?", "경혜공주의 남편은?", "누구의 즉위로 경혜공주가 공주로 책봉되었는가?", "정종의 유배지인 수원으로 향한 공주는 후에 통진을 거쳐 어디까지 가게 되었는가?", "경혜공주가 남편의 죄에 연좌로 유배되어 순천의 관비가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사서는?", "문종이 경혜공주의 살림집을 차려준곳은 어디인가?", "문종이 승하한 후 즉위한 경혜공주의 동생은 누구인가?", "순암집의 저자는 누구인가?", "경혜공주가 장흥의 관노가 되었다는 기술이 있는 책은?", "실록에는 정종이 죽은 후 경혜공주가 무엇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가?", "경혜공주가 죽을 때까지 공주의 신분을 유지했다는 증거로 채택 된 것은 무엇인가?", "순암집의 저서는 누구인가?", "경혜공주의 유일한 아들은 누구인가?" ]
<!DOCTYPE html> 경혜공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경혜공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tbody><tr> <th colspan="2"> 경혜공주 </th></tr> <tr> <td colspan="2">지위 </td></tr> <tr> <td colspan="2">군주, 공주 </td></tr> <tr> <td colspan="2">이름 </td></tr> <tr> <th>별호 </th> <td>현주(縣主), 평창군주(平昌郡主) </td></tr> <tr> <td colspan="2">신상정보 </td></tr> <tr> <th>출생일 </th> <td>1436년 </td></tr> <tr> <th>출생지 </th> <td>조선 </td></tr> <tr> <th>사망일 </th> <td>1473년 음력 12월 30일 </td></tr> <tr> <th>능묘 </th> <td>경혜공주 묘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산29 </td></tr> <tr> <th>왕조 </th> <td>조선 왕조 </td></tr> <tr> <th>부친 </th> <td>문종 </td></tr> <tr> <th>모친 </th> <td>현덕왕후 안동 권씨 </td></tr> <tr> <th>배우자 </th> <td>영양위 정종(寧陽尉 鄭悰) </td></tr> <tr> <th>자녀 </th> <td>1남 1녀정미수(鄭眉壽) </td></tr> </tbody></table> 경혜공주(敬惠公主, 1436년 ~ 1474년 1월 17일(음력 1473년 12월 30일[1]))는 문종과 현덕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단종의 친누이이기도 하다. 세종 때 평창 군주(平昌郡主)에 봉작되었고 문종 즉위 후 공주로 진봉되었다. 목차 1 생애 2 가족 관계 3 경혜공주가 등장하는 작품 4 각주 생애[편집] 경혜공주가 태어났을 당시 아버지 문종은 즉위 전이었고, 어머니 권씨는 세자의 후궁으로 품계는 종3품 양원(良媛)이었기 때문에 '현주'로 불리게 되었다. 위로 언니가 있었으나 태어난 지 1년도 못 되어 1433년에 죽었다. 어머니 양원 권씨가 세자빈으로 승격되면서 경혜공주는 현주에서 군주로 승격되고, 세자빈의 거처인 자선당에서 살게 되었다.[2] 이때 그는 평창 군주(平昌郡主)라는 작호를 받았는데 정인지가 지은 영릉 묘지문에 작호명이 나타난다. 경혜공주는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당시의 관습대로 재액을 피하기 위해 조유례의 집에서 그 부인 및 외가의 여종인 유모 백씨의 손에 컸다.[2] 그녀는 미모가 굉장히 뛰어났다고 한다. 한양에서도 소문이 날 정도로 아름다웠다고 한다. 1450년(세종 32) 1월, 15세의 나이에 참판 정충경의 아들 순의대부(順義大夫)[3] 정종(鄭悰)과의 혼인이 결정되었다. 12~13세에 혼인하던 당시 관습과는 달리 비교적 늦은 나이에 혼인한 것은 아내도 없이 고독한 아버지 문종의 곁을 떠나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2] 그러던 와중에 할아버지인 세종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세종이 승하하면 3년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혼인을 할 수 없고, 3년이 지나면 경혜공주의 나이가 너무 과년해지기 때문에 결혼을 서두르게 되었다.[2] 혼인 당시 경혜공주는 여전히 세자의 딸로서 평창군주(平昌郡主)로 불렸다. 군주로 봉해져야 궁 밖에서 생활을 해도 필요한 경비가 지급이 되기 때문에 조유례의 집으로 나갈 때쯤 평창군주로 봉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2][4] 조선왕조실록에 평창군주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1446년(세종 28)의 일이다. 이후 문종의 즉위로 경혜공주는 공주로 책봉되었고, 문종은 딸의 살림집을 당시의 대표적 부자동네였던 양덕방(陽德坊) 향교동에 차려주었다.[2] 당시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윤면(尹沔), 문여량(文汝良) 등이 공주와 부마를 위해 새로이 짓는 집 때문에 30여채의 민가가 철거된다고 아뢰었던 기록이 있다.[5]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문종이 승하하고 경혜공주의 동생 단종이 즉위했다. 단종은 자주 향교동 경혜공주의 집을 찾았고 계유정난이 있던 날 밤에도 경혜공주의 집에서 자고 있었다.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은 금성대군 사건에 연루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경기도 양근으로 옮겨졌다. 공주가 병이 나자 단종은 세조에게 사람을 보내어 정종을 한양으로 불러들이라고 일렀고 세조도 문종의 유일한 사위라 하며 정종을 잠시 도읍으로 돌아오게 했다.[6] 그러나 사간원의 상소로 정종은 공주의 병이 낫자 다시 유배되었다.[7] 공주는 이때 정종의 유배지인 수원으로 향했고 나중에 통진(通津)을 거쳐 전라도 광주(光州)까지 따라갔다. 이후 정종은 승려 성탄 등과 결탁해 모반을 꾀했다는 혐의로 거열형을 당하였다. 당시 경혜공주는 임신 중이었다.[2] 《연려실기술》에서는 경혜공주 또한 남편의 죄에 연좌되어 가산이 적몰되고 유배되어 순천의 관비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이 적소에 있다가 사사된 뒤에, 공주가 순천 관비가 되었다. 부사 여자신(呂自新)은 무인인데, 장차 공주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키려 하니, 공주가 곧 대청에 들어가 교의(交椅)를 놓고 앉아서 말하기를, “나는 왕의 딸이다. 죄가 있어 귀양은 왔지마는, 수령이 어찌 감히 나에게 관비의 사역을 시킨단 말이냐.” 하므로 마침내 부리지 못하였다. 여자신은 뒤에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는데, 여유길(呂裕吉)의 방조(旁祖)이다. — 《연려실기술》 제4권 단종조 고사본말(端宗朝故事本末) 안정복의 순암집에도 경혜공주가 장흥의 관노가 되었다는 기술이 있다.[8] 그러나 실록에는 경혜공주가 관노가 되었다는 기록이 없고 대신 정종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었는데 무척 가난했다는 기록이 있다.[9] 세조는 이를 불쌍히 여겨 경혜공주에게 집을 지어주고 몰수한 재산과 노비를 하사했다.[9] 또한 지난 2012년 7월 24일에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증된 해주 정씨 대종가 소장 고문서 가운데 경혜공주가 자신의 유일한 아들 정미수에게 재산을 상속한 분재기(分財記)가 공개되었는데, 공주 자신이 죽기 사흘 전인 성종5년(1474년) 음력 12월 27일에 제작된 것으로 '경혜공주지인(敬惠公主之印)'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어 경혜공주가 죽을 때까지 공주의 신분을 유지했다는 증거로 채택되기도 했다.[10] 예종에 이르러서는 경혜공주 내외의 아들 정미수를 종친의 예로 서용하였다. 1473년(성종4) 12월 30일 졸하였으며 성종은 부의(賻儀)로 쌀·콩 아울러 70석(碩), 정포(正布) 50필, 종이 1백 권, 석회(石灰) 60석, 촉랍(燭蠟) 30근을 하사하였다. 공주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대자골에 있다. 경혜공주는 죽기 사흘 전에 외아들 정미수에게 남긴 분재기에서 "내가 불행히 병이 들어 유일한 아들인 미수가 아직 혼인도 못했는데 지금 홀연히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며, "노비는 갑작스러운 사이에 낱낱이 기록해 줄 겨를이 없어 먼저 정선방(貞善坊)에 하사받은 집과 통진(지금의 경기도 김포)에 있는 전답을 준다"고 적고, 정선방에 있는 가사에 대해서는 자신이 죽은 뒤에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고 자손에게 전하며 오래 지니고 살아줄 것을 당부하였다. 가족 관계[편집] 본가 전주 이씨(全州 李氏) 조부 : 제4대 세종대왕(世宗大王, 1397~1450, 재위: 1418~1450) 조모 : 소헌왕후 청송 심씨(昭憲王后 靑松 沈氏, 1395~1446) 고모 : 정소공주(貞昭公主, 1412~1424) 아버지 : 제5대 문종대왕(文宗大王, 1414~1452, 재위: 1450~1452) 고모 :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1477) 숙부 : 제7대 세조대왕(世祖大王, 1417~1468, 재위: 1455~1468) 숙모 : 정희왕후 파평 윤씨(貞熹王后 坡平 尹氏, 1418~1483) 사촌동생 : 추존 덕종대왕(德宗大王, 1438~1457) 사촌동생 : 의숙공주(懿淑公主, 1442~1477) 사촌동생 : 제8대 예종대왕 (睿宗大王, 1450~1469, 재위 1468~1469) 숙부 : 안평대군(安平大君, 1418~1453) 숙부 : 임영대군(臨瀛大君, 1420~1469) 숙부 : 광평대군(廣平大君, 1425~1444) 숙부 : 금성대군(錦城大君, 1426~1457) 숙부 : 평원대군(平原大君, 1427~1445) 숙부 :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1467) 외조부 : 화산부원군 경혜공 권전(花山府院君 景惠公 權專, 1372~1441) 외조모 : 해령부부인 해주 최씨(海寧府夫人 海州 崔氏, ?~1456) 어머니 : 현덕왕후 안동 권씨(顯德王后 安東 權氏, 1418~1441) 동생 : 제6대 조선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 올케 : 정순왕후 여산 송씨(定順王后 礪山 宋氏, 1440~1521) 시가 해주 정씨(海州 鄭氏) 시아버지 : 형조참판 정충경(刑曹參判 鄭忠敬, ?~1443) 시어머니 : 민호덕(閔好德)의 딸 정경부인 여흥 민씨(貞敬夫人 驪興 閔氏) 부마 : 영양위 헌민공 정종(寧陽尉 獻愍公 鄭悰, ? ~1461) 장남 : 해평부원군 소평공 정미수(海平府院君 昭平公 鄭眉壽, 1456~1512) 며느리 : 호조판서 이덕량(戶曹判書 李德良, 1435~1487)의 딸 정경부인 전의 이씨(貞敬夫人 全義 李氏) 경혜공주가 등장하는 작품[편집] 《한명회》 (KBS, 1994년 배우: 전소희) 《왕과 비》 (KBS, 1998년~2000년 배우: 김미주) 《공주의 남자》 (KBS, 2011년 배우: 홍수현) 각주[편집] ↑ 《성종실록》37권, 4년(1473 계사 / 명 성화(成化) 9년) 12월 30일(병술) 2번째기사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신명호, 《조선공주실록》, 역사의 아침, 2009, ISBN 9788993119091 ↑ 정종이 영양위로 책봉된 것은 단종 때의 일이다 ↑ 다만 조선왕조실록에 종실녀의 관제를 정해 빈(嬪)·잉(媵)·궁인(宮人)의 딸은 군주(郡主)라 칭하게 된 것은 1440년이다 ↑ 《조선왕조실록》 문종 7권, 문종 1년(1451) 4월 1일 6번째 기사 ↑ 《조선왕조실록》, 세조 1권, 세조1(1455) 윤6월 17일 1번째 기사 ↑ 《조선왕조실록》, 세조 2권, 세조1(1455) 8월 7일 4번째 기사 ↑ 안정복, 《순암집》 한백현(韓伯賢) 에게 편지를 보내다. ↑ 가 나 《조선왕조실록》, 성종 38권, 성종5(1474) 1월 1일 4번째 기사 ↑ 다만 세조 11년(1465년)에 이미 세조는 정종과 경혜공주 사이의 소생에 대해서는 연좌하지 말 것을 예종에게 명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세조 35권, 세조11(1465) 4월 1일 2번째 기사 <table><tbody><tr><th colspan="2">vdeh조선과 대한제국의 왕녀/황녀 목록</th></tr><tr><th>추존왕 목조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r><th>추존왕 익조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안의공주 </td></tr><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r><th>추존왕 도조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문혜공주 문숙공주 문의공주 </td></tr><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r><th>추존왕 환조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정화공주 </td></tr><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r><th>태조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경신공주 경선공주 경순공주 </td></tr><tr><td colspan="2"> 숙신옹주 의령옹주 </td></tr></tbody></table></td></tr><tr><th>정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td></tr><tr><td colspan="2"> 함양옹주 숙신옹주 상원옹주 인천옹주 덕천옹주 고성옹주 전산옹주 함안옹주 </td></tr></tbody></table></td></tr><tr><th>태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정순공주 경정공주 경안공주 정선공주 </td></tr><tr><td colspan="2"> 정신옹주 정정옹주 숙정옹주 숙녕옹주 숙경옹주 숙근옹주 소신옹주 소숙옹주 경신옹주 정혜옹주 숙혜옹주 숙안옹주 숙순옹주 </td></tr></tbody></table></td></tr><tr><th>세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정소공주 정의공주 </td></tr><tr><td colspan="2"> 정안옹주 정현옹주 </td></tr></tbody></table></td></tr><tr><th>문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경혜공주 </td></tr><tr><td colspan="2"> 경숙옹주 </td></tr></tbody></table></td></tr><tr><th>단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td></tr><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r><th>세조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의숙공주 </td></tr><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r><th>추존왕 덕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명숙공주 </td></tr><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r><th>예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현숙공주 혜순공주 </td></tr><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r><th>성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순숙공주 신숙공주 </td></tr><tr><td colspan="2"> 휘숙옹주 경숙옹주 휘정옹주 정혜옹주 공신옹주 혜숙옹주 정순옹주 정숙옹주 경순옹주 숙혜옹주 경휘옹주 </td></tr></tbody></table></td></tr><tr><th>연산군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휘신공주 이복억 </td></tr><tr><td colspan="2"> 이영수 이함금 이복합 이정수 옹주 이씨 </td></tr></tbody></table></td></tr><tr><th>중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효혜공주 의혜공주 효순공주 경현공주 인순공주 </td></tr><tr><td colspan="2"> 혜순옹주 혜정옹주 정신옹주 숙정옹주 정순옹주 효정옹주 </td></tr></tbody></table></td></tr><tr><th>인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td></tr><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r><th>명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td></tr><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r><th>선조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정명공주 공주 </td></tr><tr><td colspan="2"> 정신옹주 정혜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휘옹주 정인옹주 정선옹주 정근옹주 정정옹주 정화옹주 </td></tr></tbody></table></td></tr><tr><th>광해군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td></tr><tr><td colspan="2"> 폐 옹주(단인 이씨) </td></tr></tbody></table></td></tr><tr><th>추존왕 원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td></tr><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r><th>인조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공주 </td></tr><tr><td colspan="2"> 효명옹주 </td></tr></tbody></table></td></tr><tr><th>효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숙신공주 숙안공주 숙명공주 숙휘공주 숙정공주 숙경공주 의순공주(양녀) </td></tr><tr><td colspan="2"> 숙녕옹주 </td></tr></tbody></table></td></tr><tr><th>현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명선공주 명혜공주 명안공주 </td></tr><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r><th>숙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공주 공주 </td></tr><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r><th>경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td></tr><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r><th>영조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td></tr><tr><td colspan="2"> 화억옹주 화순옹주 화평옹주 화덕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화유옹주 화길옹주 화령옹주 </td></tr></tbody></table></td></tr><tr><th>추존왕 진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td></tr><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r><th>추존왕 장조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청연공주 청선공주 </td></tr><tr><td colspan="2"> 청근옹주 </td></tr></tbody></table></td></tr><tr><th>정조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td></tr><tr><td colspan="2"> 옹주 숙선옹주 </td></tr></tbody></table></td></tr><tr><th>순조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명온공주 복온공주 덕온공주 </td></tr><tr><td colspan="2"> 영온옹주 </td></tr></tbody></table></td></tr><tr><th>헌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옹주 </td></tr></tbody></table></td></tr><tr><th>철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td></tr><tr><td colspan="2"> 영혜옹주 </td></tr></tbody></table></td></tr><tr><th>고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 공주 </td></tr><tr><td colspan="2"> 덕혜옹주 </td></tr></tbody></table></td></tr><tr><th>순종 소생</th><td><table><tbody><tr><td colspan="2">-</td></tr><tr><td colspan="2">-</td></tr></tbody></table></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경혜공주&amp;oldid=21798617" 분류: 조선의 왕족1436년 태어남1474년 죽음조선의 공주조선 세조조선 문종조선 단종전주 이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ČeštinaEnglishSlovenčina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7월 17일 (화) 22:5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제목: 경혜공주: 조선 왕조의 숨은 이야기 #### 요약 본문: 경혜공주(1436-1474)는 조선 제5대 왕 문종과 현덕왕후의 딸로, 단종의 친누이입니다. 그녀는 세종 대왕의 손녀로 태어나 평창 군주로 봉작되었으며, 문종 즉위 후 공주로 진봉되었습니다. 경혜공주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외가에서 자랐고, 15세에 정종과 혼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녀의 삶은 비극적이었습니다. 남편 정종이 정치적 음모에 연루되어 유배당하자, 경혜공주는 그를 따라 유배지로 향했습니다. 이후 정종이 사사당하자, 경혜공주는 관비로 전락하게 되지만, 그녀의 신분은 여전히 왕족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죽기 전 아들에게 재산을 남기며 자신의 신분을 지켰습니다. #### 결론 요약: 경혜공주는 조선 왕조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고난을 겪은 인물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왕족의 삶을 넘어, 당시 사회의 관습과 정치적 음모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경혜공주의 삶은 조선 역사에서 중요한 여성의 위치를 보여주며, 그녀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흥미로운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을 기반으로 블로그 요약 포스트를 쓴다고 가정하고,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제목, 요약 본문, 결론 요약까지 작성해줘.
어네스트_푹스
https://ko.wikipedia.org/wiki/어네스트_푹스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어네스트 푹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어네스트 푹스</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어네스트 푹스</b>(Ernst Fuchs, <a>1903년</a> <a>6월 11일</a> ~ <a>1983년</a> <a>1월 15일</a>)는 독일의 신학자이며, <a>해석학적 신학</a>자인 <a>에벨링</a>과 더불어 <a>신 해석학</a>파(New Hermeneutic)의 주창자이다. <a>언어 사건</a>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학자이다. 하일브론에서 출생한 푹스는 법학을 전공하던 중 슐라터의 영향으로 <a>튀빙겐 대학교</a>와 <a>마르부르크 대학교</a>에서 신학을 연구한 후에, 1932년에 <a>본 대학교</a>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푹스 자신은 슐라터보다는 <a>불트만</a>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신약학자 <a>소기천</a>에 따르면 신학계에 <a>하이데거</a>의 <a>해석학</a>이 도입되던 시절에 훅스 또한 해석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후기 하이데거의 언어 개념을 <a>신학적 해석학</a>에 적용시키는 데에까지 나아갔다고 평가한다. 뷔르텐베르크의 고백 교회에서 목회를 하기도 했으며, 1978년에는 『설교의 기쁨』이란 설교집을 펴내기도 했다.<sup><a>&#91;1&#93;</a></sup>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신 해석학</span></a></li> <li><a><span>2</span> <span>언어 사건</span></a></li> <li><a><span>3</span> <span>평가</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신 해석학</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그의 관심은 인간 존재에 대한 방해 받지 않는 <a>언어</a>를 듣는 법을 배울려고 한다. <a>신 해석학</a>(Neue&#160;Hermeneutik, New Hermeneutic)이란 언어 스스로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라고 한다(Sinn des "Textes gefragt wird, sondern „nach der mit dem Text selbst gegebenen hermeneutischen Hilfe")<sup><a>&#91;2&#93;</a></sup>. 후기 <a>하이데거</a>의 <a>실존주의</a> 철학을 적용하는데, <a>루돌프 불트만</a>이 예수의 사적(史的) 문제에<sup><a>&#91;3&#93;</a></sup>, 있어서 전혀 도외시하기에<sup><a>&#91;4&#93;</a></sup> 예수의 말씀과 케리그마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게 된다. 예수의 행동과 <a>케리그마</a>(말씀의 선포)의 연속성을 말한다. 초대 기독교의 성찬이나 예수가 세리와 음식을 나눔의 행위는 <a>구속사</a>적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이 구속의 의미를 이해하게 해주었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초기 기독교의 탄생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행동과 케류그마의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sup><a>&#91;5&#93;</a></sup> 언어는 실존적으로 <a>언어 사건</a>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p> <h2><span></span><span>언어 사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언어 사건</a>(Sprachereignis, language event)이란 작성되거나 말하여진 정보의 행위나 사건이다. 1920년대에 철학 학회지(Journal of Philosoph)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 <a>신학</a>에서 이 단어가 사용한 학자는 <a>어네스트 푹스</a>였다.<a>어네스트 푹스</a>의 <a>언어</a> 교리는 역사적인 <a>예수</a>의 "새로운 탐구"에 영감을 불어 넣었다. 왜냐하면 예수의 말씀과 행동이 "언어 사건"(Sprachereignis)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a>믿음</a>은 먼저 언어로 들어와서 "존재의 집" (<a>하이데거</a>) 이라는 언어안에서 <a>실존</a>적으로 가능하게 된다.<sup><a>&#91;6&#93;</a></sup> </p> <h2><span></span><span>평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푹스의 새로운 시도는 성경본문의 초자연적인 특징을 약화시키고 단지 인간의 언어로만 이해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따라서 해석학의 방법에 있어서 영적인 점을 무시하게 된다고 본다. 루터와 칼빈의 주장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철학적인 방법의 우월성을 가지고 언어학적인 분석으로 해석만이 강조되어가는 점에서 문제점을 갖는다고 평가한다. 조직신학자 정승원에 따르면 푹수에 있어서 또 다른 문제는 언어들에 내재해 있는 실존적 의미 혹은 힘이 어떻게 언어 구조와 연결되는 지를 신해석학은 말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이라고 한다. 언어 자체도 중립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 정해지고 전달되는 것이라고 본다. 언어에 생내적으로 실존적 의미나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루우트로 의미가 부여된 언어를 신해석학자들은 '실존적 매개체로 사용하여 실재(reality)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 뿐이라고 평가한다. <sup><a>&#91;7&#93;</a></sup>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a>소기천, 《훅스 &amp; 에벨링 해석학의 역사와 새로운 해석학》(살림: 2006)</a></span> </li> <li><span><a>↑</a></span> <span>Ernst Fuchs, Briefe an&#160;Gerhard Ebeling, in: Festschrift aaO 48</span> </li> <li><span><a>↑</a></span> <span> R. Bultmann, Das Evangelium des Johannes</span> </li> <li><span><a>↑</a></span> <span><a>[1]</a>R. Bultmann</span> </li> <li><span><a>↑</a></span> <span><a>[2]</a></span> </li> <li><span><a>↑</a></span> <span>(1999) Dictionary of Biblical Interpretation, R.N. Soulen, "Ernst Fuchs", by John Hayes, 422-423</span> </li> <li><span><a>↑</a></span> <span><a>정승원 신해석학 기독교개혁신보, 2001. 03. 14</a></span> </li> </ol></div></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어네스트_푹스&amp;oldid=24288515</a>"</div> <div><div><a>분류</a>: <ul><li><a>1903년 태어남</a></li><li><a>1983년 죽음</a></li><li><a>독일의 신학자</a></li><li><a>해석학 (철학)</a></li><li><a>신약 신학자</a></li><li><a>성서 해석학자</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العربية</a></li><li><a>Deutsch</a></li><li><a>English</a></li><li><a>Italiano</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5월 27일 (월) 15:1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예수의 사적 문제에 관하여 도외시한 사람은 누구인가?
루돌프 불트만
null
95740
3,656
[ "예수의 사적 문제에 관하여 도외시한 사람은 누구인가?", "언어 스스로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은 무엇인가?", "루돌프 불트만은 예수의 사적 문제에 누구의 철학을 적용하였나?", "말씀의 선포를 뜻하는 용어는?", "언어는 누구에 의해 정해지고 전달되는가?", "성경의 특징을 약화시켜, 인간의 언어로만 이해한다는 지적을 받는다는 해석학을 창안한 자는 누구인가?", "푹스의 새로운 시도는 성경을 단지 무엇으로만 이해한다는 지적을 받나?", "정승원은 언어자체가 중립적이 될 수 없고 누구에 의해 정해지고 전달된다고 보았나?", "정승원은 신해석학자들이 실재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기위해 언어를 무엇으로 사용한다고 평가하나?" ]
<!DOCTYPE html> 어네스트 푹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어네스트 푹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어네스트 푹스(Ernst Fuchs, 1903년 6월 11일 ~ 1983년 1월 15일)는 독일의 신학자이며, 해석학적 신학자인 에벨링과 더불어 신 해석학파(New Hermeneutic)의 주창자이다. 언어 사건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학자이다. 하일브론에서 출생한 푹스는 법학을 전공하던 중 슐라터의 영향으로 튀빙겐 대학교와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을 연구한 후에, 1932년에 본 대학교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푹스 자신은 슐라터보다는 불트만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신약학자 소기천에 따르면 신학계에 하이데거의 해석학이 도입되던 시절에 훅스 또한 해석학에 관심을 갖게 되고, 후기 하이데거의 언어 개념을 신학적 해석학에 적용시키는 데에까지 나아갔다고 평가한다. 뷔르텐베르크의 고백 교회에서 목회를 하기도 했으며, 1978년에는 『설교의 기쁨』이란 설교집을 펴내기도 했다.[1] 목차 1 신 해석학 2 언어 사건 3 평가 4 각주 신 해석학[편집] 그의 관심은 인간 존재에 대한 방해 받지 않는 언어를 듣는 법을 배울려고 한다. 신 해석학(Neue Hermeneutik, New Hermeneutic)이란 언어 스스로가 말하는 것을 듣는 것이라고 한다(Sinn des "Textes gefragt wird, sondern „nach der mit dem Text selbst gegebenen hermeneutischen Hilfe")[2]. 후기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을 적용하는데, 루돌프 불트만이 예수의 사적(史的) 문제에[3], 있어서 전혀 도외시하기에[4] 예수의 말씀과 케리그마 사이의 연속성을 주장하게 된다. 예수의 행동과 케리그마(말씀의 선포)의 연속성을 말한다. 초대 기독교의 성찬이나 예수가 세리와 음식을 나눔의 행위는 구속사적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십자가 사건은 제자들이 구속의 의미를 이해하게 해주었다고 주장하며, 이것이 초기 기독교의 탄생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행동과 케류그마의 연속성이 있다고 주장한다.[5] 언어는 실존적으로 언어 사건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어 사건[편집] 언어 사건(Sprachereignis, language event)이란 작성되거나 말하여진 정보의 행위나 사건이다. 1920년대에 철학 학회지(Journal of Philosoph)에서 최초로 사용되었다. 신학에서 이 단어가 사용한 학자는 어네스트 푹스였다.어네스트 푹스의 언어 교리는 역사적인 예수의 "새로운 탐구"에 영감을 불어 넣었다. 왜냐하면 예수의 말씀과 행동이 "언어 사건"(Sprachereignis)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먼저 언어로 들어와서 "존재의 집" (하이데거) 이라는 언어안에서 실존적으로 가능하게 된다.[6] 평가[편집] 푹스의 새로운 시도는 성경본문의 초자연적인 특징을 약화시키고 단지 인간의 언어로만 이해한다는 지적을 받는다. 따라서 해석학의 방법에 있어서 영적인 점을 무시하게 된다고 본다. 루터와 칼빈의 주장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기 보다는 철학적인 방법의 우월성을 가지고 언어학적인 분석으로 해석만이 강조되어가는 점에서 문제점을 갖는다고 평가한다. 조직신학자 정승원에 따르면 푹수에 있어서 또 다른 문제는 언어들에 내재해 있는 실존적 의미 혹은 힘이 어떻게 언어 구조와 연결되는 지를 신해석학은 말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이라고 한다. 언어 자체도 중립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 정해지고 전달되는 것이라고 본다. 언어에 생내적으로 실존적 의미나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루우트로 의미가 부여된 언어를 신해석학자들은 '실존적 매개체로 사용하여 실재(reality)와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것' 뿐이라고 평가한다. [7] 각주[편집] ↑ 소기천, 《훅스 &amp; 에벨링 해석학의 역사와 새로운 해석학》(살림: 2006) ↑ Ernst Fuchs, Briefe an Gerhard Ebeling, in: Festschrift aaO 48 ↑ R. Bultmann, Das Evangelium des Johannes ↑ [1]R. Bultmann ↑ [2] ↑ (1999) Dictionary of Biblical Interpretation, R.N. Soulen, "Ernst Fuchs", by John Hayes, 422-423 ↑ 정승원 신해석학 기독교개혁신보, 2001. 03. 1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어네스트_푹스&amp;oldid=24288515" 분류: 1903년 태어남1983년 죽음독일의 신학자해석학 (철학)신약 신학자성서 해석학자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eutschEnglishItaliano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27일 (월) 15:1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서론 어네스트 푹스(1903-1983)는 독일의 신학자이자 신 해석학파의 주창자로, 언어 사건을 학문적으로 정립한 인물이다. 그는 신학 연구를 통해 인간 존재와 언어의 관계를 탐구하며, 후기 하이데거의 철학을 신학적 해석학에 적용하는 데 기여하였다. 푹스의 연구는 신약학과 해석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본론 1. **신 해석학**: 푹스는 신 해석학을 통해 언어가 스스로 말하는 것을 듣는 법을 강조하였다. 그는 예수의 말씀과 행동 간의 연속성을 주장하며, 초대 기독교의 성찬과 예수의 행동이 구속사적 의미를 지닌다고 보았다. 이러한 주장은 예수의 행동이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2. **언어 사건**: 푹스는 '언어 사건'이라는 개념을 통해 언어가 실존적으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설명하였다. 그는 믿음이 언어를 통해 형성되며, 언어가 존재의 집으로 기능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신학적 해석학에서 언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데 기여하였다. 3. **평가**: 푹스의 접근 방식은 성경의 초자연적 특성을 약화시키고 인간 언어로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그의 해석학이 언어의 실존적 의미와 힘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러한 비판은 푹스의 신 해석학이 철학적 방법론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생한다. ### 결론 어네스트 푹스는 신 해석학과 언어 사건 개념을 통해 신학적 해석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의 연구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탐구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지만, 동시에 성경의 초자연적 특성을 간과할 위험이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푹스의 작업은 현대 신학에서 언어와 존재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여전히 중요한 논의의 기초가 되고 있다.
글 전체의 요지를 논리적 흐름에 맞게 정리해줘. 서론, 본론, 결론 구조로 요약해주고, 각 부분마다 글쓴이의 의도나 주장도 명확히 밝혀줘.
장_유사장기
https://ko.wikipedia.org/wiki/장_유사장기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장 유사장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장 유사장기</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장 오가노이드</b>는 1차 조직 및 줄기세포(성체줄기세포, 배아줄기세포, 유도만능줄기세포)로부터 계통발생 과정을 모방하는 분화 기법과 3차원 세포 배양을 기술을 통해 다양한 세포가 패턴화 되어 생체 내 장의 일부 특성을 가지는 <b>장기 유사체</b>이다. 자가 재생 및 자가 조직화가 가능한 장 오가노이드는 장을 구성하는 상피세포 4종(장 상피세포(enterocytes), 배상세포(goblet cells), 장내분비세포(enteroendocrine cells), 파네스 세포(paneth cells))과 장 줄기세포(intestinal stem cells, ISCs)로 구조화 되어 인체와 근접한 생리활성을 지닌다.</p><div><div><a><img></a> <div><div><a></a></div>Lgr5 + 줄기 세포로부터 유래한 장 오가노이드</div></div></div>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오가노이드 제작 배경</span></a></li> <li><a><span>2</span> <span>소장의 구조적 특성</span></a></li> <li><a><span>3</span> <span>장 오가노이드 개발 및 역사</span></a></li> <li><a><span>4</span> <span>장 오가노이드의 종류</span></a> <ul> <li><a><span>4.1</span> <span>1차 조직으로부터 만든 장 오가노이드</span></a></li> <li><a><span>4.2</span> <span>배아줄기세포(ESC)와 유도만능줄기세포(iPSC)로부터 만든 장 오가노이드</span></a></li> </ul> </li> <li><a><span>5</span> <span>장 오가노이드의 활용</span></a> <ul> <li><a><span>5.1</span> <span>조직 발생 및 줄기세포 생물학 연구</span></a></li> <li><a><span>5.2</span> <span>사람 질환 연구</span></a></li> <li><a><span>5.3</span> <span>치료제와 약물 개발</span></a></li> <li><a><span>5.4</span> <span>유전자 치료 및 재생의학</span></a></li> </ul> </li> <li><a><span>6</span> <span>향후 개발 및 적용</span></a></li> <li><a><span>7</span> <span>참고문헌</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오가노이드 제작 배경</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2차원의 평평한 플라스틱 배양접시에 세포를 배양하고, 그 위에서 여러 반응들을 관찰하는 2차원 세포 배양은 생체 내 3차원 구조 및 특성을 반영하기 어려움.</li> <li>다양한 세포로 구성된 체내 환경을 모방하기 위하여 최대 2종의 세포를 공배양 하였으나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모방하기에는 제한이 있음.</li> <li>생체 내 생명 현상을 모사하기 위하여 다양한 실험동물 모델을 사용하였으나 인간과 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종간 차이가 크고, 최근 유럽을 중심으로 동물 실험 규제가 확대될 것이므로 대안 연구가 절실함.</li></ul> <h2><span></span><span>소장의 구조적 특성</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인간 장은 재생(regenerastion)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장기로, 장 상피(intestinal epithelium)에는 분화된 세포 종류인 4종의 장 상피세포와 이를 계속해서 공급하는 장 줄기세포(intestinal stem cells, ISCs)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장 상피(intestinal epithelium)는 내강(lumen) 쪽의 최전선에 위치하는 상피세포로써 4종의 분화한 상피세포로 구성되어있다. 4종의 상피세포는 장 상피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며, 음식물 소화 및 영양분 흡수 역할을 하는 장 상피세포(enterocytes), 점액을 분비하는 배상세포(goblet cells), 호르몬 유사 물질을 분비하는 장내분 비세포(enteroendocrine cells), 데펜신(defensin)유사 항균펩티드(cryptidin)을 만드는 파네스 세포(paneth cells)이다. </p> <div><div><a><img></a> <div><div><a></a></div>소장 상피 세포도</div></div></div> <h2><span></span><span>장 오가노이드 개발 및 역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2009년 한스 클레버스 박사 연구팀에서 최초로 장 오가노이드 시스템을 확립하였다.<sup><a>&#91;1&#93;</a></sup>이전 방법과 달리, 내인성(endogeneous) 장 줄기세포의 주변미세환경 구성요소를 활용하여 마우스 및 인체의 Lgr5+ 장 줄기세포 및 장 움(crypt)으로부터 추출한 상피줄기세포의 성장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배양 시스템을 제공했다. Lgr5+ 장 줄기세포 및 장 움(crypt)으로부터 추출한 상피줄기세포는 Wnt(Frizzled/LRP 리간드), Noggin(BMP 저해 인자), R-spondin(Lgr4/5 수용체 리간드, Wnt 길항제로 작용), EGF(상피 성장인자)를 주요 니치(niche, 미세 환경) 성분으로 하는 배지와 메트리젤(Matrigel, 생체 기질 환경) 지지체 안에서 실제 소장 구조를 모사한 조직으로 3D 배양된다. 이 방법으로 형성된 장 오가노이드는 장 움(crypt-like) 및 융모(villus-like)-유사 도메인을 가진 3차원 조직 구조를 재현하였으며, 줄기세포와 전구세포(progenitor) 및 분화된 세포 유형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p> <h2><span></span><span>장 오가노이드의 종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1차 조직으로부터 만든 장 오가노이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마우스 장으로부터 LGR5+ 장 줄기세포를 분리하여 한스 클레버스 박사 연구팀이 개발한 배지 조건과 메트리젤 안에서 장 오가노이드를 형성하였다. 이 시스템으로 장(intestine) 오가노이드 외에, Lgr5+ 줄기세포를 포함하는 대장(colon), 위장(stomach) 및 간(liver) 오가노이드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p> <h3><span></span><span>배아줄기세포(ESC)와 유도만능줄기세포(iPSC)로부터 만든 장 오가노이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이 방법은 얻기 힘든 시료(1차 조직)를 이용하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배아줄기세포와 달리 유도만능줄기세포는 체세포로부터 역분화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추가 단계가 필요하다. 유도만능줄기세포는 2006년 야마나카 신야 박사 연구팀에서 개발하였으며, 피부세포와 같은 체세포에 역분화를 일으키는 4가지 특정 유전자(Oct4, Sox2, Klf4, c-Myc)의 발현을 통해 다능성을 갖게 된다.<sup><a>&#91;2&#93;</a></sup> </p><p>배아 및 유도만능줄기세포를 진정 내배엽(definitive endoderm), 후장(hindgut), 장세포(intestinal cells)의 단계를 거치는 단계별 조직-특이적 분화 인자에 노출시키고, 메트리젤 안에서 3D 배양법을 적용하여 장 오가노이드를 생성할 수 있다. 배아 및 유도만능줄기세포의 Activin A를 통해 TGF-β 신호 전달을 자극하여 내배엽을 형성한 후, FGF4와 WNT3A(or CHIR99021)를 처리하여 후장(hindgut) 및 장세포(intestinal cells)로의 분화를 촉진하였다. 이 후 Noggin, R-spondin, EGF를 포함하는 하는 배지와 메트리젤 내에서 장 오가노이드가 형성 되었다.<sup><a>&#91;3&#93;</a></sup><sup><a>&#91;4&#93;</a></sup><sup><a>&#91;5&#93;</a></sup> </p> <h2><span></span><span>장 오가노이드의 활용</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조직 발생 및 줄기세포 생물학 연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체계적인 세포의 분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장 오가노이드는 조직 발생 연구에 활용될 수 있으며, 3D 장 오가노이드 배양법과 세포 라벨링(cell labeling), 클론 분석(clonal analysis)를 통해 줄기세포의 동적인 상태에 대한 연구가 용이하다.<sup><a>&#91;6&#93;</a></sup> </p> <ul><li>장 움(crypt)에 있는 Lgr5+ 장 줄기세포의 분열 방식과 군집 유지 관계 연구<sup><a>&#91;7&#93;</a></sup><sup><a>&#91;8&#93;</a></sup></li> <li>파네스 세포(Paneth cells)의 고갈에 따른 Lgr5+ 장 줄기세포의 손실 연구<sup><a>&#91;9&#93;</a></sup></li></ul> <h3><span></span><span>사람 질환 연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환자의 장 줄기세포로부터 생성된 오가노이드는 CRISPR/Cas9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하여 질병 모델링이 가능하며, 장 질환에 관련된 세포의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sup><a>&#91;10&#93;</a></sup> </p> <ul><li>세포증식 및 세포사멸 메커니즘 연구<sup><a>&#91;11&#93;</a></sup> (관련 질환: 크론병(Crohn`s disease), 궤양성대장염(Ulcerative colitis), 소아 지방변증(Coeliac disease) 등)</li> <li>장 오가노이드를 이용한 암 메커니즘 연구<sup><a>&#91;12&#93;</a></sup><sup><a>&#91;13&#93;</a></sup></li> <li>숙주-미생물 간의 상호작용 연구 (장 오가노이드의 내강(lumen)에 병원성 박테리아 주입(enteric infection) 모델 이용)<sup><a>&#91;14&#93;</a></sup></li></ul> <h3><span></span><span>치료제와 약물 개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3D에서 다양한 조건의 약물 스크리닝이 가능하며, 환자 유래 오가노이드를 이용하여 환자-맞춤형 치료법 개발에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sup><a>&#91;15&#93;</a></sup> </p> <h3><span></span><span>유전자 치료 및 재생의학</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CRISPR/Cas9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하여 유전자 교정 및 오가노이드 동종 이식을 통한 치료가 가능하다.<sup><a>&#91;16&#93;</a></sup><sup><a>&#91;17&#93;</a></sup> </p> <h2><span></span><span>향후 개발 및 적용</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장 줄기세포가 <i>ex vivo</i>로 배양될 수 있다는 최초의 보고 이래로, 장 오가노이드 배양 기술이 다른 종류의 조직에도 적용될 수 있음이 보고되었다. </p><p>오가노이드는 개체 발달과정을 모사하는 적합한 모델로써 다양한 세포종이 패턴화 및 구조화 되어 체내의 생리활성과 근접한 장점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장 오가노이드는 유전자 발현패턴 및 기능적으로 성숙되지 않은 태아의 장(미성숙한 장)과 유사한 특성을 보여주는 한계를 갖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배양 방법을 좀 더 성체-특이적으로 수정하고, 정제된 ECM(세포외기질)을 개발한다면, 상당히 정교하고 재현성 있는 배양 모델이 등장할 것이다. 또한 오가노이드 기술은 현재의 기술(CRISPR/Cas9, 3D printing)과 시너지를 일으켜 다양한 기능과 적용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p> <h2><span></span><span>참고문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cite>Sato, Toshiro; Vries, Robert G.; Snippert, Hugo J.; van de Wetering, Marc; Barker, Nick; Stange, Daniel E.; van Es, Johan H.; Abo, Arie; Kujala, Pekka (2009년 3월 29일). <a>&#8220;Single Lgr5 stem cells build crypt-villus structures in vitro without a mesenchymal niche&#8221;</a>. &#12298;Nature&#12299; (영어) <b>459</b> (7244): 262–265. <a>ISSN</a>&#160;<a>0028-0836</a>. <a>doi</a>:<a>10.1038/nature07935</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Takahashi, Kazutoshi; Yamanaka, Shinya (2006년 8월). <a>&#8220;Induction of Pluripotent Stem Cells from Mouse Embryonic and Adult Fibroblast Cultures by Defined Factors&#8221;</a>. &#12298;Cell&#12299; <b>126</b> (4): 663–676. <a>ISSN</a>&#160;<a>0092-8674</a>. <a>doi</a>:<a>10.1016/j.cell.2006.07.024</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Spence, Jason R.; Mayhew, Christopher N.; Rankin, Scott A.; Kuhar, Matthew F.; Vallance, Jefferson E.; Tolle, Kathryn; Hoskins, Elizabeth E.; Kalinichenko, Vladimir V.; Wells, Susanne I. (2010년 12월 12일). <a>&#8220;Directed differentiation of human pluripotent stem cells into intestinal tissue in vitro&#8221;</a>. &#12298;Nature&#12299; (영어) <b>470</b> (7332): 105–109. <a>ISSN</a>&#160;<a>0028-0836</a>. <a>PMC</a>&#160;<a>3033971</a>. <a>PMID</a>&#160;<a>21151107</a>. <a>doi</a>:<a>10.1038/nature09691</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McCracken, Kyle W; Howell, Jonathan C; Wells, James M; Spence, Jason R (2011년 11월 10일). <a>&#8220;Generating human intestinal tissue from pluripotent stem cells in vitro&#8221;</a>. &#12298;Nature Protocols&#12299; (영어) <b>6</b> (12): 1920–1928. <a>ISSN</a>&#160;<a>1754-2189</a>. <a>PMC</a>&#160;<a>3896236</a>. <a>PMID</a>&#160;<a>22082986</a>. <a>doi</a>:<a>10.1038/nprot.2011.410</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Watson, Carey L; Mahe, Maxime M; Múnera, Jorge; Howell, Jonathan C; Sundaram, Nambirajan; Poling, Holly M; Schweitzer, Jamie I; Vallance, Jefferson E; Mayhew, Christopher N (2014년 10월 19일). <a>&#8220;An in vivo model of human small intestine using pluripotent stem cells&#8221;</a>. &#12298;Nature Medicine&#12299; (영어) <b>20</b> (11): 1310–1314. <a>ISSN</a>&#160;<a>1078-8956</a>. <a>PMC</a>&#160;<a>4408376</a>. <a>PMID</a>&#160;<a>25326803</a>. <a>doi</a>:<a>10.1038/nm.3737</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Jung, Kwang Bo; Lee, Hana; Son, Ye Seul; Lee, Ji Hye; Cho, Hyun-Soo; Lee, Mi-Ok; Oh, Jung-Hwa; Lee, Jaemin; Kim, Seokho (2018년 1월). <a>&#8220;In vitro and in vivo imaging and tracking of intestinal organoids from human induced pluripotent stem cells&#8221;</a>. &#12298;FASEB journal: official publication of the Federation of American Societies for Experimental Biology&#12299; <b>32</b> (1): 111–122. <a>ISSN</a>&#160;<a>1530-6860</a>. <a>PMID</a>&#160;<a>28855280</a>. <a>doi</a>:<a>10.1096/fj.201700504R</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Snippert, Hugo J.; van der Flier, Laurens G.; Sato, Toshiro; van Es, Johan H.; van den Born, Maaike; Kroon-Veenboer, Carla; Barker, Nick; Klein, Allon M.; van Rheenen, Jacco (2010년 10월). <a>&#8220;Intestinal Crypt Homeostasis Results from Neutral Competition between Symmetrically Dividing Lgr5 Stem Cells&#8221;</a>. &#12298;Cell&#12299; <b>143</b> (1): 134–144. <a>ISSN</a>&#160;<a>0092-8674</a>. <a>doi</a>:<a>10.1016/j.cell.2010.09.016</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Baker, Ann-Marie; Cereser, Biancastella; Melton, Samuel; Fletcher, Alexander G.; Rodriguez-Justo, Manuel; Tadrous, Paul J.; Humphries, Adam; Elia, George; McDonald, Stuart A.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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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최초로 장 오가이노이드 시스템을 확립한 사람은
한스 클레버스 박사 연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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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최초로 장 오가이노이드 시스템을 확립한 사람은", "인체에서 추출한 상피줄기세포의 성장을 장기간 안정적ㅇ로 배양할수 있는 시스템의 이름?", "2009년 한스 클레버스 박사 연구팀이 최초로 확립한 시스템은?", "상피줄기세포 배양법으로 형성된 장 오가노이드의 조직 구조는 몇 차원인가?", "진정 내배엽, 후자, 장세포의 단계를 거치게 되는 곳은", "메트리젤 안에서 장 오가노이드를 생성하는 방법은", "배지와 메트리젤 내에서 무엇이 형성되는가?", "메트리젤 안에서 어떤 배양법을 적용하여 장 오가노이드를 생성하는가?", "장 유사장기에 적용한 배양법은 무엇인가?", "장 유사장기에 3D 배양법을 적용하여 생성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DOCTYPE html> 장 유사장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 유사장기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장 오가노이드는 1차 조직 및 줄기세포(성체줄기세포, 배아줄기세포, 유도만능줄기세포)로부터 계통발생 과정을 모방하는 분화 기법과 3차원 세포 배양을 기술을 통해 다양한 세포가 패턴화 되어 생체 내 장의 일부 특성을 가지는 장기 유사체이다. 자가 재생 및 자가 조직화가 가능한 장 오가노이드는 장을 구성하는 상피세포 4종(장 상피세포(enterocytes), 배상세포(goblet cells), 장내분비세포(enteroendocrine cells), 파네스 세포(paneth cells))과 장 줄기세포(intestinal stem cells, ISCs)로 구조화 되어 인체와 근접한 생리활성을 지닌다. Lgr5 + 줄기 세포로부터 유래한 장 오가노이드 목차 1 오가노이드 제작 배경 2 소장의 구조적 특성 3 장 오가노이드 개발 및 역사 4 장 오가노이드의 종류 4.1 1차 조직으로부터 만든 장 오가노이드 4.2 배아줄기세포(ESC)와 유도만능줄기세포(iPSC)로부터 만든 장 오가노이드 5 장 오가노이드의 활용 5.1 조직 발생 및 줄기세포 생물학 연구 5.2 사람 질환 연구 5.3 치료제와 약물 개발 5.4 유전자 치료 및 재생의학 6 향후 개발 및 적용 7 참고문헌 오가노이드 제작 배경[편집] 2차원의 평평한 플라스틱 배양접시에 세포를 배양하고, 그 위에서 여러 반응들을 관찰하는 2차원 세포 배양은 생체 내 3차원 구조 및 특성을 반영하기 어려움. 다양한 세포로 구성된 체내 환경을 모방하기 위하여 최대 2종의 세포를 공배양 하였으나 인체의 구조와 기능을 모방하기에는 제한이 있음. 생체 내 생명 현상을 모사하기 위하여 다양한 실험동물 모델을 사용하였으나 인간과 동물 사이에 존재하는 종간 차이가 크고, 최근 유럽을 중심으로 동물 실험 규제가 확대될 것이므로 대안 연구가 절실함. 소장의 구조적 특성[편집] 인간 장은 재생(regenerastion)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장기로, 장 상피(intestinal epithelium)에는 분화된 세포 종류인 4종의 장 상피세포와 이를 계속해서 공급하는 장 줄기세포(intestinal stem cells, ISCs)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장 상피(intestinal epithelium)는 내강(lumen) 쪽의 최전선에 위치하는 상피세포로써 4종의 분화한 상피세포로 구성되어있다. 4종의 상피세포는 장 상피 중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하며, 음식물 소화 및 영양분 흡수 역할을 하는 장 상피세포(enterocytes), 점액을 분비하는 배상세포(goblet cells), 호르몬 유사 물질을 분비하는 장내분 비세포(enteroendocrine cells), 데펜신(defensin)유사 항균펩티드(cryptidin)을 만드는 파네스 세포(paneth cells)이다. 소장 상피 세포도 장 오가노이드 개발 및 역사[편집] 2009년 한스 클레버스 박사 연구팀에서 최초로 장 오가노이드 시스템을 확립하였다.[1]이전 방법과 달리, 내인성(endogeneous) 장 줄기세포의 주변미세환경 구성요소를 활용하여 마우스 및 인체의 Lgr5+ 장 줄기세포 및 장 움(crypt)으로부터 추출한 상피줄기세포의 성장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배양 시스템을 제공했다. Lgr5+ 장 줄기세포 및 장 움(crypt)으로부터 추출한 상피줄기세포는 Wnt(Frizzled/LRP 리간드), Noggin(BMP 저해 인자), R-spondin(Lgr4/5 수용체 리간드, Wnt 길항제로 작용), EGF(상피 성장인자)를 주요 니치(niche, 미세 환경) 성분으로 하는 배지와 메트리젤(Matrigel, 생체 기질 환경) 지지체 안에서 실제 소장 구조를 모사한 조직으로 3D 배양된다. 이 방법으로 형성된 장 오가노이드는 장 움(crypt-like) 및 융모(villus-like)-유사 도메인을 가진 3차원 조직 구조를 재현하였으며, 줄기세포와 전구세포(progenitor) 및 분화된 세포 유형 전체를 포함하고 있다. 장 오가노이드의 종류[편집] 1차 조직으로부터 만든 장 오가노이드[편집] 마우스 장으로부터 LGR5+ 장 줄기세포를 분리하여 한스 클레버스 박사 연구팀이 개발한 배지 조건과 메트리젤 안에서 장 오가노이드를 형성하였다. 이 시스템으로 장(intestine) 오가노이드 외에, Lgr5+ 줄기세포를 포함하는 대장(colon), 위장(stomach) 및 간(liver) 오가노이드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배아줄기세포(ESC)와 유도만능줄기세포(iPSC)로부터 만든 장 오가노이드[편집] 이 방법은 얻기 힘든 시료(1차 조직)를 이용하지 않는 장점이 있지만, 배아줄기세포와 달리 유도만능줄기세포는 체세포로부터 역분화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추가 단계가 필요하다. 유도만능줄기세포는 2006년 야마나카 신야 박사 연구팀에서 개발하였으며, 피부세포와 같은 체세포에 역분화를 일으키는 4가지 특정 유전자(Oct4, Sox2, Klf4, c-Myc)의 발현을 통해 다능성을 갖게 된다.[2] 배아 및 유도만능줄기세포를 진정 내배엽(definitive endoderm), 후장(hindgut), 장세포(intestinal cells)의 단계를 거치는 단계별 조직-특이적 분화 인자에 노출시키고, 메트리젤 안에서 3D 배양법을 적용하여 장 오가노이드를 생성할 수 있다. 배아 및 유도만능줄기세포의 Activin A를 통해 TGF-β 신호 전달을 자극하여 내배엽을 형성한 후, FGF4와 WNT3A(or CHIR99021)를 처리하여 후장(hindgut) 및 장세포(intestinal cells)로의 분화를 촉진하였다. 이 후 Noggin, R-spondin, EGF를 포함하는 하는 배지와 메트리젤 내에서 장 오가노이드가 형성 되었다.[3][4][5] 장 오가노이드의 활용[편집] 조직 발생 및 줄기세포 생물학 연구[편집] 체계적인 세포의 분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장 오가노이드는 조직 발생 연구에 활용될 수 있으며, 3D 장 오가노이드 배양법과 세포 라벨링(cell labeling), 클론 분석(clonal analysis)를 통해 줄기세포의 동적인 상태에 대한 연구가 용이하다.[6] 장 움(crypt)에 있는 Lgr5+ 장 줄기세포의 분열 방식과 군집 유지 관계 연구[7][8] 파네스 세포(Paneth cells)의 고갈에 따른 Lgr5+ 장 줄기세포의 손실 연구[9] 사람 질환 연구[편집] 환자의 장 줄기세포로부터 생성된 오가노이드는 CRISPR/Cas9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하여 질병 모델링이 가능하며, 장 질환에 관련된 세포의 메커니즘을 연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10] 세포증식 및 세포사멸 메커니즘 연구[11] (관련 질환: 크론병(Crohn`s disease), 궤양성대장염(Ulcerative colitis), 소아 지방변증(Coeliac disease) 등) 장 오가노이드를 이용한 암 메커니즘 연구[12][13] 숙주-미생물 간의 상호작용 연구 (장 오가노이드의 내강(lumen)에 병원성 박테리아 주입(enteric infection) 모델 이용)[14] 치료제와 약물 개발[편집] 3D에서 다양한 조건의 약물 스크리닝이 가능하며, 환자 유래 오가노이드를 이용하여 환자-맞춤형 치료법 개발에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15] 유전자 치료 및 재생의학[편집] CRISPR/Cas9 유전자 편집 기술을 이용하여 유전자 교정 및 오가노이드 동종 이식을 통한 치료가 가능하다.[16][17] 향후 개발 및 적용[편집] 장 줄기세포가 ex vivo로 배양될 수 있다는 최초의 보고 이래로, 장 오가노이드 배양 기술이 다른 종류의 조직에도 적용될 수 있음이 보고되었다. 오가노이드는 개체 발달과정을 모사하는 적합한 모델로써 다양한 세포종이 패턴화 및 구조화 되어 체내의 생리활성과 근접한 장점이 있다. 하지만 현재의 장 오가노이드는 유전자 발현패턴 및 기능적으로 성숙되지 않은 태아의 장(미성숙한 장)과 유사한 특성을 보여주는 한계를 갖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배양 방법을 좀 더 성체-특이적으로 수정하고, 정제된 ECM(세포외기질)을 개발한다면, 상당히 정교하고 재현성 있는 배양 모델이 등장할 것이다. 또한 오가노이드 기술은 현재의 기술(CRISPR/Cas9, 3D printing)과 시너지를 일으켜 다양한 기능과 적용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편집] ↑ Sato, Toshiro; Vries, Robert G.; Snippert, Hugo J.; van de Wetering, Marc; Barker, Nick; Stange, Daniel E.; van Es, Johan H.; Abo, Arie; Kujala, Pekka (2009년 3월 29일). “Single Lgr5 stem cells build crypt-villus structures in vitro without a mesenchymal niche”. 《Nature》 (영어) 459 (7244): 262–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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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심 주장 장 유사장기(장 오가노이드)는 인체 장의 구조와 기능을 모사하는 3차원 세포 배양 시스템으로, 다양한 연구 및 치료에 활용될 수 있는 중요한 모델이다. ### 단락별 요약 1. **오가노이드 제작 배경** - 기존의 2차원 세포 배양 방식은 생체 내 구조와 특성을 반영하기 어렵고, 동물 모델의 한계로 인해 장 오가노이드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장 오가노이드는 다양한 세포가 패턴화되어 생리활성을 지닌 장기 유사체로, 자가 재생 및 조직화가 가능하다. 2. **소장의 구조적 특성** - 인간 장은 재생이 활발한 기관으로, 장 상피세포와 장 줄기세포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세포는 음식물 소화와 영양분 흡수, 점액 및 호르몬 분비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3. **장 오가노이드 개발 및 역사** - 2009년 한스 클레버스 박사 연구팀이 최초로 장 오가노이드 시스템을 확립하였다. 이 시스템은 장 줄기세포의 미세환경을 활용하여 장 구조를 모사한 3D 배양을 가능하게 하였다. 4. **장 오가노이드의 종류** - 장 오가노이드는 1차 조직에서 유래한 것과 배아줄기세포 및 유도만능줄기세포에서 유래한 것으로 나뉜다. 후자는 시료를 얻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지만, 추가적인 역분화 과정이 필요하다. 5. **장 오가노이드의 활용** - 장 오가노이드는 조직 발생 연구, 질병 모델링, 약물 개발, 유전자 치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환자 유래 오가노이드를 통해 맞춤형 치료법 개발이 가능하다. 6. **향후 개발 및 적용** - 장 오가노이드 기술은 다른 조직에도 적용될 가능성이 있으며, 현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성체-특이적 배양 방법과 정제된 세포외기질 개발이 필요하다. 이 기술은 CRISPR/Cas9 및 3D 프린팅과 결합하여 다양한 기능을 이끌어낼 수 있다.
다음 글의 핵심 주장과 근거를 중심으로 요약해줘. 단락별로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도 함께 정리해줘. 문장 길이는 너무 짧지 않게 하고, 원문의 흐름은 유지해줘.
캘리포니아_가도
https://ko.wikipedia.org/wiki/캘리포니아_가도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캘리포니아 가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캘리포니아 가도</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div><div><a><img></a> <div>캘리포니아 트레일의 주요 도로(빨간색)</div></div></div> <p><b>캘리포니아 가도</b>(California Trail)는 <a>북미 대륙</a>의 서부 절반에 이르는 길이 약 3,200km의 이주자들이 지나다닌 산길 주요 도로이며, <a>미시시피 강</a> 마을에서 현재의 <a>캘리포니아</a>에 이르는 길이었다. <a>1841년</a>에서 <a>1869년</a>까지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었다. 동쪽에서 <a>오리건 가도</a>와 <a>몰몬 가도</a>와 같은 루트와 다양한 강 유역을 지나 현재 <a>아이다호</a>, <a>와이오밍</a> 또는 <a>유타</a>에서 남서쪽으로 나뉘어 훔볼트 강 유역에 이르는 길이었다. 현재 <a>네바다주</a> 그레이트 분지를 가로 지르는 대부분의 경로에서 모든 여행자들은 필요한 물이나 식량등의 보급품을 얻기 위해 훔볼트 강 유역을 따라 갔다. <a>네바다주</a> 서부와 <a>캘리포니아주</a> 동부에서 나와 개척자들은 바위투성이의 <a>시에라 네바다 산맥</a>을 넘어 일부 도로를 지나 <a>캘리포니아주</a> 서부의 금광 지역, 개척지와 도시로 들어갔다. </p><p>이 길을 <a>1849년</a> 이전에 이용한 사람들은 약 2,700명이었다. 이러한 개척자들은 <a>1846년</a>과 <a>1847년</a>에 <a>존 C. 프리몬트</a>가 캘리포니아 대대의 일원으로서 캘리포니아를 미국의 영토로 도모할 때 추진자가 되었다. 1845년경, 이 지역에는 ‘카르포르니오’라고 불리는 원주민이 있었으며, 약 1,500명의 성인 남성과 6,500명의 여성, 어린이로 구성된 집단이 <a>로스앤젤레스</a> 주변 현재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에 대부분 거주하였다.<sup><a>&#91;1&#93;</a></sup> 이민자 대부분(거의 모두가 성인 남성)은 캘리포니아의 북쪽에 절반이 살았다. <a>1845년</a>에 미국이 <a>멕시코</a>로부터 캘리포니아의 지배권을 빼앗고, <a>1847년</a> <a>1월 14일</a>에 〈<a>카후엔가 조약</a>〉이 체결되었을 때, 캘리포니아의 소규모 무장 저항도 끝이 났다.<sup><a>&#91;2&#93;</a></sup> <a>미국 멕시코 전쟁</a>을 끝낸 <a>1848년</a> 2월 〈<a>과달루페 이달고 조약</a>〉에 의해 캘리포니아는 멕시코에서 (유상으로) 미국 영토로 바뀌었다. <a>1848년</a> 1월에 금이 발견된 후 캘리포니아 <a>골드러시</a>에 관한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a>1848년</a> 후반에는 25만명이 넘는 사업가, 농부, 개척자 및 광부들이 캘리포니아 가도를 넘어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통행자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2년도 못되어 <a>파나마 지협</a>을 거쳐 또는 <a>케이프 혼</a>을 돌아 바닷길 방문자들까지 합쳐 엄청난 인구가 불어나자, <a>1850년</a> 캘리포니아는 미국의 31번째 주로 승격하였다. </p><p>캘리포니아 가도의 경로는 1829년부터 1840년에 걸쳐, 키트 카슨과 조지프 레드 포드 워커, 제데디아 스미스 등 미국인 모피 무역상들, 심지어 피터 스킨 오그덴이 이끄는 <a>허드슨 베이 회사</a>의 덫을 놓는 사람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발견되어 있었다. 1841년에서 1844년 경에는 훔볼트 강 (당시는 오그덴이 메리 강이라고 불렀다)을 따라 <a>시에라 네바다 산맥</a> 너머 사용할 수 있는 거친 마찻길이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개척자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a>1869년</a>에 최초의 <a>대륙 횡단 철도</a>가 개통될 때까지 특히 여름철에 이 길은 매우 이용되었다. 초기의 길은 많은 가짓 길과 끓어진 길이 있었으며, 이러한 것들을 합치면 약 8,800km에 달하는 길이었다. 이 도로들 중 약 1600km는 바퀴자국이 남아 있으며, 캔자스, 네브래스카, 와이오밍, 아이다호, 유타, 네바다와 캘리포니아에 걸쳐 대규모 서부 이민이 있었던 역사적 증거가 있다. 현재 이 도로의 일부는 "캘리포니아 국립 역사 가도'로 토지 관리국과 미국국립공원국에 의해 지정되어 있다.<sup><a>&#91;3&#93;</a></sup><sup><a>&#91;4&#93;</a></sup> </p> <h2><span></span><span>같이 보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오리건 가도</a></li> <li><a>산타페 가도</a></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Californios <a>[1]</a> Accessed 25 July 2009</span> </li> <li><span><a>↑</a></span> <span> Californios revolt 1845<a>[2]</a> Accessed 25 July 2009</span> </li> <li><span><a>↑</a></span> <span>Oregon-California Trail Association <a>[3]</a></span> </li> <li><span><a>↑</a></span> <span> National Trail Map <a>[4]</a></span> </li> </ol></div></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NPS: California National Historical Trail</a></li> <li><a>Detailed history of the Humboldt River Valley (PDF)</a></li> <li><a>A Journey to Great-Salt-Lake City</a> by Jules Remy and Julius Lucius Brenchley (발췌 from an 1861 book about a trip along the trail, courtesy of <a>구글 도서</a> 검색).</li> <li><a>The Gold Rush Diary of George Bonniwell</a></li> <li>Oregon Trail Interactive Map-National Park Service <a>[5]</a> 2009년 1월 20일 확인</li> <li><a>Wyoming Immigrant Trail Maps</a> 2009년 1월 20일 확인</li> <li><a>Wyoming Trail Descriptions &amp; Maps</a> 2009년 1월 20일 확인</li> <li><a>California Trail Maps NPS</a> 2009년 1월 20일 확인</li> <li><a>National Trail Maps</a> 2009년 1월 20일 확인</li> <li><a>National Parks 오리건 트레일 지도</a></li> <li><a>National Parks 캘리포니아 트레일 지도</a></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캘리포니아_가도&amp;oldid=22351773</a>"</div> <div><div><a>분류</a>: <ul><li><a>캘리포니아주의 역사</a></li><li><a>미국의 역사</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Deutsch</a></li><li><a>English</a></li><li><a>Español</a></li><li><a>Français</a></li><li><a>Italiano</a></li><li><a>日本語</a></li><li><a>Nederlands</a></li><li><a>Português</a></li><li><a>Tiếng Việt</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8년 9월 12일 (수) 10: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1845년 경 존재한 원주민의 명칭은 무엇인가?
카르포르니오
null
95890
3,895
[ "1845년 경 존재한 원주민의 명칭은 무엇인가?", "1850년 캘리포니아는 미국의 몇 번째 주로 승격하였는가?", "가도의 초기의 길에 많은 가짓 길과 끊어진 길이 있는데 이것들을 합친 길이는 얼마인가?", "캘리포니아 가도는 주로 어느 계절에 많이 이용되었는가?", "시에라 산맥 너머 사용할 수 있는 마찻길은 무슨 강을 따라있는가?" ]
<!DOCTYPE html> 캘리포니아 가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캘리포니아 가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캘리포니아 트레일의 주요 도로(빨간색) 캘리포니아 가도(California Trail)는 북미 대륙의 서부 절반에 이르는 길이 약 3,200km의 이주자들이 지나다닌 산길 주요 도로이며, 미시시피 강 마을에서 현재의 캘리포니아에 이르는 길이었다. 1841년에서 1869년까지 주요 교통로로 사용되었다. 동쪽에서 오리건 가도와 몰몬 가도와 같은 루트와 다양한 강 유역을 지나 현재 아이다호, 와이오밍 또는 유타에서 남서쪽으로 나뉘어 훔볼트 강 유역에 이르는 길이었다. 현재 네바다주 그레이트 분지를 가로 지르는 대부분의 경로에서 모든 여행자들은 필요한 물이나 식량등의 보급품을 얻기 위해 훔볼트 강 유역을 따라 갔다. 네바다주 서부와 캘리포니아주 동부에서 나와 개척자들은 바위투성이의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어 일부 도로를 지나 캘리포니아주 서부의 금광 지역, 개척지와 도시로 들어갔다. 이 길을 1849년 이전에 이용한 사람들은 약 2,700명이었다. 이러한 개척자들은 1846년과 1847년에 존 C. 프리몬트가 캘리포니아 대대의 일원으로서 캘리포니아를 미국의 영토로 도모할 때 추진자가 되었다. 1845년경, 이 지역에는 ‘카르포르니오’라고 불리는 원주민이 있었으며, 약 1,500명의 성인 남성과 6,500명의 여성, 어린이로 구성된 집단이 로스앤젤레스 주변 현재 남부 캘리포니아 지역에 대부분 거주하였다.[1] 이민자 대부분(거의 모두가 성인 남성)은 캘리포니아의 북쪽에 절반이 살았다. 1845년에 미국이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의 지배권을 빼앗고, 1847년 1월 14일에 〈카후엔가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캘리포니아의 소규모 무장 저항도 끝이 났다.[2] 미국 멕시코 전쟁을 끝낸 1848년 2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에 의해 캘리포니아는 멕시코에서 (유상으로) 미국 영토로 바뀌었다. 1848년 1월에 금이 발견된 후 캘리포니아 골드러시에 관한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갔다. 1848년 후반에는 25만명이 넘는 사업가, 농부, 개척자 및 광부들이 캘리포니아 가도를 넘어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통행자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2년도 못되어 파나마 지협을 거쳐 또는 케이프 혼을 돌아 바닷길 방문자들까지 합쳐 엄청난 인구가 불어나자, 1850년 캘리포니아는 미국의 31번째 주로 승격하였다. 캘리포니아 가도의 경로는 1829년부터 1840년에 걸쳐, 키트 카슨과 조지프 레드 포드 워커, 제데디아 스미스 등 미국인 모피 무역상들, 심지어 피터 스킨 오그덴이 이끄는 허드슨 베이 회사의 덫을 놓는 사람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발견되어 있었다. 1841년에서 1844년 경에는 훔볼트 강 (당시는 오그덴이 메리 강이라고 불렀다)을 따라 시에라 네바다 산맥 너머 사용할 수 있는 거친 마찻길이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개척자들에 의해 개척되었다. 1869년에 최초의 대륙 횡단 철도가 개통될 때까지 특히 여름철에 이 길은 매우 이용되었다. 초기의 길은 많은 가짓 길과 끓어진 길이 있었으며, 이러한 것들을 합치면 약 8,800km에 달하는 길이었다. 이 도로들 중 약 1600km는 바퀴자국이 남아 있으며, 캔자스, 네브래스카, 와이오밍, 아이다호, 유타, 네바다와 캘리포니아에 걸쳐 대규모 서부 이민이 있었던 역사적 증거가 있다. 현재 이 도로의 일부는 "캘리포니아 국립 역사 가도'로 토지 관리국과 미국국립공원국에 의해 지정되어 있다.[3][4] 같이 보기[편집] 오리건 가도 산타페 가도 각주[편집] ↑ Californios [1] Accessed 25 July 2009 ↑ Californios revolt 1845[2] Accessed 25 July 2009 ↑ Oregon-California Trail Association [3] ↑ National Trail Map [4] 외부 링크[편집] NPS: California National Historical Trail Detailed history of the Humboldt River Valley (PDF) A Journey to Great-Salt-Lake City by Jules Remy and Julius Lucius Brenchley (발췌 from an 1861 book about a trip along the trail, courtesy of 구글 도서 검색). The Gold Rush Diary of George Bonniwell Oregon Trail Interactive Map-National Park Service [5] 2009년 1월 20일 확인 Wyoming Immigrant Trail Maps 2009년 1월 20일 확인 Wyoming Trail Descriptions &amp; Maps 2009년 1월 20일 확인 California Trail Maps NPS 2009년 1월 20일 확인 National Trail Maps 2009년 1월 20일 확인 National Parks 오리건 트레일 지도 National Parks 캘리포니아 트레일 지도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캘리포니아_가도&amp;oldid=22351773" 분류: 캘리포니아주의 역사미국의 역사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Italiano日本語NederlandsPortuguêsTiếng Việt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2일 (수) 10: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요약 **핵심 주장:** 캘리포니아 가도는 19세기 중반 미국 서부로의 대규모 이주를 가능하게 한 주요 교통로로, 이민자들이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 **1단락 요약:** 캘리포니아 가도는 약 3,200km에 달하는 이주자들의 주요 도로로, 미시시피 강에서 캘리포니아까지 이어진다. 1841년부터 1869년까지 사용되었으며, 오리건 가도와 몰몬 가도와 연결되어 다양한 강 유역을 지나갔다. 이 도로는 개척자들이 시에라 네바다 산맥을 넘어 금광 지역으로 진입하는 경로로 활용되었다. **2단락 요약:** 1849년 이전에 캘리포니아 가도를 이용한 이민자는 약 2,700명이었으며, 이들은 존 C. 프리몬트의 활동과 함께 캘리포니아를 미국 영토로 만드는 데 기여했다. 당시 지역에는 '카르포르니오'라는 원주민 집단이 있었고, 미국의 멕시코 지배권 획득과 금 발견이 이민을 촉진했다. 1848년에는 25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캘리포니아에 도착하여, 1850년에는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31번째 주로 승격되었다. **3단락 요약:** 캘리포니아 가도의 경로는 1829년부터 1840년 사이에 여러 탐험가들에 의해 부분적으로 발견되었고, 1841년부터 1844년까지 개척자들에 의해 사용되었다. 1869년 대륙 횡단 철도가 개통될 때까지 이 도로는 여름철에 특히 많이 이용되었으며, 초기의 다양한 길들은 약 8,800km에 달했다. 현재 이 도로의 일부는 '캘리포니아 국립 역사 가도'로 지정되어 있다.
다음 글의 핵심 주장과 근거를 중심으로 요약해줘. 단락별로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도 함께 정리해줘. 문장 길이는 너무 짧지 않게 하고, 원문의 흐름은 유지해줘.
제임스_패닌
https://ko.wikipedia.org/wiki/제임스_패닌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제임스 패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제임스 패닌</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div><div><a><img></a> <div><div><a></a></div>제임스 패닌</div></div></div> <p><b>제임스 워커 패닌 주니어</b>(James Walker Fannin, Jr. <a>1804년</a>/<a>1805년</a> - <a>1836년</a> <a>3월 27일</a>)는 <a>19세기</a> 텍사스의 군인으로 <a>1835년</a>부터 <a>1836년</a> <a>텍사스 혁명</a> 중 텍사스의 지도자였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 <ul> <li><a><span>1.1</span> <span>청년기</span></a></li> <li><a><span>1.2</span> <span>텍사스</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콜레토 크리크 전투</span></a></li> <li><a><span>3</span> <span>골리아드 학살</span></a></li> <li><a><span>4</span> <span>유산</span></a></li> <li><a><span>5</span> <span>같이 보기</span></a></li> <li><a><span>6</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청년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패닌은 조지아에서 태어났다. 패닌은 <a>1819년</a> <a>7월 1일</a> <a>웨스트 포인트 미국 육군 사관학교</a>에 입학했다. 성적이 나쁘고, 지각 결석도 많았던 그는 퇴학했다. </p><p><a>1828년</a>, 그는 상인이 되기 위해 <a>조지아주</a> <a>콜럼버스</a>로 이사를 갔다. <a>1829년</a> <a>7월 17일</a>에는 미네르바 포트와 결혼하였고, <a>1830년</a>생의 제이미와 1832년생의 엘리자, 두 명의 딸을 낳았다. 1832년 패닌은 불법적인 미국 노예의 수입을 시작했다. </p> <h3><span></span><span>텍사스</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1834년</a> 패닌은 멕시코의 코아우일라 나테하스 주(현재 텍사스) 벨라스코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그는 농장 주가 되었다. 1835년까지 패닌은 텍사스의 멕시코 정부에 대한 저항 세력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텍사스의 대의를 돕기 위해 재정적 지원과 지원병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1835년 4월, 뉴올리언스에서 거액의 빚 때문에 체포되어 보석금을 지불하고 텍사스로 돌아왔다. 9월 패닌은 텍사스군 현역지원병이 되었다. 10월 2일 곤잘레스 전투에 참가하여, 스티븐 오스틴에게 원군을 파견하도록 요청했다. 이후 패닌은 제 1사단 제 1대대 제임스 보위와 함께 일을 하게 된다. 오스틴의 지휘 아래, 곤잘레스와 샌안토니오 데 벡사 주변의 보급을 확보하여 상황을 안정시켰다. 패닌은 보위와 함께 <a>1835년</a> 10월 <a>콘셉시온 전투</a>에도 참가했다. </p><p><a>1835년</a> 11월, 오스틴은 패닌과 윌리엄 트래비스와 약 150명의 병사로 멕시코군의 병참선을 끊도록 명령을 내렸다. 11월 13일, 샘 휴스턴은 패닌에게 정규군의 총괄 감찰의 지위를 임명했지만, 패닌은 전장에서 준장과 "위험한 지위"로 되돌려달라고 요구했다. 1835년 11월 22일, 패닌은 명예롭게 오스틴이 이끄는 지원병 부대를 제대하고 더 큰 텍사스 정규군의 전쟁에 종사했다. </p><p><a>1835년</a> <a>12월 7일</a>, 패닌은 <a>샘 휴스턴</a>에게 정규군 대령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명령 받았다. <a>1836년</a> 1월 7일, 텍사스 임시정부는 패닌에게 휴스턴이 아니라 임시 정부의 명령을 받는 "군사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그는 다가올 타마우리파스의 마타모로스에서 전쟁을 위해 군단과 물자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패닌의 직위로는 지원병을 이끄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정규군의 규율을 제정했지만, 지원병들은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많은 그의 병사들이 패닌을 고압적이라고 생각했으며, 사학자들은 이것 때문에 그가 비효율적인 지휘관이었다고 믿고 있다. 패닌 아래에서 복무한 대다수 군인들이 텍사스에 오래 있지 않았다. </p><p>2월 초 패닌은 벨라스코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조지아 4대대와 코파노에 상륙, 레푸지오에 있는 텍사스 군 부대에 합류하기 위해 이동했다. 호세 데 우레아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 군 증파 부대가 마타모로스에 도착했을 때 거리를 공격하는 텍사스 군 계획은 곤란하게 되었기 때문에, 패닌은 25마일 북쪽의 골리아드로 철수했다. 그는 부대를 프레시디오 라 바이아(라 바이아 요새)에서 숙박하게 했다. 그때는 제1 포병대 중령이었던 패닌은 골리아드의 방비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각 부대의 대장들에게 병사들을 더 모으라고 지시했다. </p><p><a>알라모 요새</a>에 있는 트래비스의 요청으로 결국 <a>2월 25일</a>, 패닌은 300명 이상의 병사와 4개의 대포를 가지고 지원을 위해 출발했고, 패닌과 그의 부대는 28일 산 안토니오로 90마일 정도 이동했다. 그 구조 작전은 실패했다. 부대는 간신히 샌안토니오 강을 도하하여 아직 골리아드가 보이는 장소에서 야영할 수밖에 없었다. 음식은 거의 없었고, 병사들 중 일부는 아침까지 맨발이었으며, 마차를 끄는 황소는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p><p><a>3월 12일</a>, 패닌은 레푸지오로 마차를 가져가기 위해 에이몽 버틀러 킹 대위와 약 28명의 병사를 파견하여 거기에 남아 있던 가족을 철수하도록 도왔다. 킹과 그의 병사는 레푸지오에서 우레아 장군의 기마대 중 선발부대를 만나 옛전도소가 있는 곳으로 철수했다. 그 지역의 소년이 마을에서 간신히 도망쳐 패닌에게 작은 충돌을 경고했다. 패닌은 윌리엄 워드 중령과 120 명의 병사를 구출하기 위해 킹으로 향했다. 워드는 멕시코군 소부대를 잘 격퇴하고, 군인을 휴식하기 위하여 1박하기로 했다. <a>1836년</a> <a>3월 14일</a>, 워드와 킹은 우레아 장군과 200명 이상의 멕시코 군의 습격을 받았다. 같은 날 휴스턴 장군은 패닌에게 빅토리아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p> <h2><span></span><span>콜레토 크리크 전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3월 19일</a> 오전 9:30 무렵 패닌은 디파이언스 요새에서 천천히 철수를 시작했고, 남아 있는 것들은 모두 파괴했다. 패닌은 9개의 대포와 500개 이상의 예비 머스켓 총을 가지고 무거운 물자와 짐을 메고 있었다. 패닌이 멈추라고 명령할 때까지 더럽은 6마일 정도 행군했다. 오후 3시, 멕시코 군의 기마대가 패닌 부대 근처에 출현했다. 텍사스 군은 곧바로 우레아 장군의 군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대포를 설치했다. 치열한 전투 후, 멕시코 군은 100명에서 200명이 사상 당하고, 텍사스 군의 손실은 7명에서 9명이 죽고 60명이 부상했다. 패닌과 그의 군대는 나머지 군대에 압도되어, 이 콜레토 전투에 항복했다. 그들은 디파이언스 요새로 회군하여 구금되었다. </p> <h2><span></span><span>골리아드 학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img>이 부분의 본문은 <a>골리아드 학살</a>입니다.</div> <p>멕시코 군의 우레아 장군은 빅토리아로 향하는 동안, <a>호세 니콜라스 드 라 포르틸라</a> 대령에게 라바이아 주둔지의 지휘를 명령했다. <a>1836년</a> <a>3월 26일</a>,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장군의 명을 받은 특사가 포르틸라에게 도착하였고, 포르틸라는 다음날 포로를 사형시키겠다고 대답을 했다. 1836년 3월 27일 멕시코군은 패닌과 군인들을 3열 대열로 행군을 시켰고, 모두 지근 거리에서 총살시켰다. 학살을 지켜본 패닌은 눈가리개를 하고 총살대에서 총살당했다. </p> <h2><span></span><span>유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텍사스 패닌 카운티, 조지아의 패닌 카운티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li> <li>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사용된 큰 군사 훈련 시설 및 전쟁포로 수용소인 캠프 패닌도 그의 이름에서 왔다.</li> <li>휴스턴에 있는 주요 거리의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li></ul> <h2><span></span><span>같이 보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텍사스 혁명</a></li></ul>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제임스 W. 패닌 (1804/1805 - 1836)</a></li> <li><a>FANNIN, JAMES WALKER, JR.</a></li></ul> <p><br> </p> <div><table><tbody><tr><th><a>전거 통제</a></th><td><div> <ul><li><a>WorldCat</a></li> <li><a>VIAF</a>: <span><a>4212166</a></span></li> <li><a>LCCN</a>: <span><a>n97034319</a></span></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제임스_패닌&amp;oldid=22393186</a>"</div> <div><div><a>분류</a>: <ul><li><a>텍사스주의 역사</a></li><li><a>텍사스 혁명 관련자</a></li><li><a>1804년 태어남</a></li><li><a>1836년 죽음</a></li><li><a>콜럼버스 (조지아주) 출신</a></li><li><a>휴스턴 출신</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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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 대위와 패닌 우레아 장군의 선발부대가 만난 곳은 어디인가?
레푸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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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45
[ "킹 대위와 패닌 우레아 장군의 선발부대가 만난 곳은 어디인가?", "1836년 3월 14일 휴스턴 장군이 패닌에게 철수하라고 명령한 곳은 어디인가?", "1836년 3월 14일 워드와 킹을 공격한 멕시코 장군은?", "1836년 3월 14일 휴스턴 장군인 패닌에게 어디로 철수하라고 명령하였는가?", "패닌과 위드 중령이 킹으로 향한 이유는 무엇인가?", "휴스턴 장군이 패닌에게 철수하라고 명령한 곳은 어디인가?", "우레아장군은 몇명이상의 군대를 가지고 워드와 킹을 습격하였는가?", "디파이언스 요새에서 철수 뒤 더럽이 행군한 거리는 대략 몇 마일 정도인가?", "패닌의 군대가 콜레토 전투에서 항복한 뒤 회군하여 구금되었던 장소는 어디인가?", "패닌과 그의 군대가 항복한 전투는 무엇인가?", "패닌이 가지고 있던 예비 머스켓 총의 갯수는?" ]
<!DOCTYPE html> 제임스 패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임스 패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제임스 패닌 제임스 워커 패닌 주니어(James Walker Fannin, Jr. 1804년/1805년 - 1836년 3월 27일)는 19세기 텍사스의 군인으로 1835년부터 1836년 텍사스 혁명 중 텍사스의 지도자였다. 목차 1 생애 1.1 청년기 1.2 텍사스 2 콜레토 크리크 전투 3 골리아드 학살 4 유산 5 같이 보기 6 외부 링크 생애[편집] 청년기[편집] 패닌은 조지아에서 태어났다. 패닌은 1819년 7월 1일 웨스트 포인트 미국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성적이 나쁘고, 지각 결석도 많았던 그는 퇴학했다. 1828년, 그는 상인이 되기 위해 조지아주 콜럼버스로 이사를 갔다. 1829년 7월 17일에는 미네르바 포트와 결혼하였고, 1830년생의 제이미와 1832년생의 엘리자, 두 명의 딸을 낳았다. 1832년 패닌은 불법적인 미국 노예의 수입을 시작했다. 텍사스[편집] 1834년 패닌은 멕시코의 코아우일라 나테하스 주(현재 텍사스) 벨라스코에 정착하여 그곳에서 그는 농장 주가 되었다. 1835년까지 패닌은 텍사스의 멕시코 정부에 대한 저항 세력의 일부가 되었다. 그는 텍사스의 대의를 돕기 위해 재정적 지원과 지원병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다. 1835년 4월, 뉴올리언스에서 거액의 빚 때문에 체포되어 보석금을 지불하고 텍사스로 돌아왔다. 9월 패닌은 텍사스군 현역지원병이 되었다. 10월 2일 곤잘레스 전투에 참가하여, 스티븐 오스틴에게 원군을 파견하도록 요청했다. 이후 패닌은 제 1사단 제 1대대 제임스 보위와 함께 일을 하게 된다. 오스틴의 지휘 아래, 곤잘레스와 샌안토니오 데 벡사 주변의 보급을 확보하여 상황을 안정시켰다. 패닌은 보위와 함께 1835년 10월 콘셉시온 전투에도 참가했다. 1835년 11월, 오스틴은 패닌과 윌리엄 트래비스와 약 150명의 병사로 멕시코군의 병참선을 끊도록 명령을 내렸다. 11월 13일, 샘 휴스턴은 패닌에게 정규군의 총괄 감찰의 지위를 임명했지만, 패닌은 전장에서 준장과 "위험한 지위"로 되돌려달라고 요구했다. 1835년 11월 22일, 패닌은 명예롭게 오스틴이 이끄는 지원병 부대를 제대하고 더 큰 텍사스 정규군의 전쟁에 종사했다. 1835년 12월 7일, 패닌은 샘 휴스턴에게 정규군 대령의 지위에 오르는 것을 명령 받았다. 1836년 1월 7일, 텍사스 임시정부는 패닌에게 휴스턴이 아니라 임시 정부의 명령을 받는 "군사 대리인"으로 임명했다. 그는 다가올 타마우리파스의 마타모로스에서 전쟁을 위해 군단과 물자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패닌의 직위로는 지원병을 이끄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는 정규군의 규율을 제정했지만, 지원병들은 그것을 따르지 않았다. 많은 그의 병사들이 패닌을 고압적이라고 생각했으며, 사학자들은 이것 때문에 그가 비효율적인 지휘관이었다고 믿고 있다. 패닌 아래에서 복무한 대다수 군인들이 텍사스에 오래 있지 않았다. 2월 초 패닌은 벨라스코에서 배를 타고 출발하여 조지아 4대대와 코파노에 상륙, 레푸지오에 있는 텍사스 군 부대에 합류하기 위해 이동했다. 호세 데 우레아 장군이 이끄는 멕시코 군 증파 부대가 마타모로스에 도착했을 때 거리를 공격하는 텍사스 군 계획은 곤란하게 되었기 때문에, 패닌은 25마일 북쪽의 골리아드로 철수했다. 그는 부대를 프레시디오 라 바이아(라 바이아 요새)에서 숙박하게 했다. 그때는 제1 포병대 중령이었던 패닌은 골리아드의 방비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각 부대의 대장들에게 병사들을 더 모으라고 지시했다. 알라모 요새에 있는 트래비스의 요청으로 결국 2월 25일, 패닌은 300명 이상의 병사와 4개의 대포를 가지고 지원을 위해 출발했고, 패닌과 그의 부대는 28일 산 안토니오로 90마일 정도 이동했다. 그 구조 작전은 실패했다. 부대는 간신히 샌안토니오 강을 도하하여 아직 골리아드가 보이는 장소에서 야영할 수밖에 없었다. 음식은 거의 없었고, 병사들 중 일부는 아침까지 맨발이었으며, 마차를 끄는 황소는 행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3월 12일, 패닌은 레푸지오로 마차를 가져가기 위해 에이몽 버틀러 킹 대위와 약 28명의 병사를 파견하여 거기에 남아 있던 가족을 철수하도록 도왔다. 킹과 그의 병사는 레푸지오에서 우레아 장군의 기마대 중 선발부대를 만나 옛전도소가 있는 곳으로 철수했다. 그 지역의 소년이 마을에서 간신히 도망쳐 패닌에게 작은 충돌을 경고했다. 패닌은 윌리엄 워드 중령과 120 명의 병사를 구출하기 위해 킹으로 향했다. 워드는 멕시코군 소부대를 잘 격퇴하고, 군인을 휴식하기 위하여 1박하기로 했다. 1836년 3월 14일, 워드와 킹은 우레아 장군과 200명 이상의 멕시코 군의 습격을 받았다. 같은 날 휴스턴 장군은 패닌에게 빅토리아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콜레토 크리크 전투[편집] 3월 19일 오전 9:30 무렵 패닌은 디파이언스 요새에서 천천히 철수를 시작했고, 남아 있는 것들은 모두 파괴했다. 패닌은 9개의 대포와 500개 이상의 예비 머스켓 총을 가지고 무거운 물자와 짐을 메고 있었다. 패닌이 멈추라고 명령할 때까지 더럽은 6마일 정도 행군했다. 오후 3시, 멕시코 군의 기마대가 패닌 부대 근처에 출현했다. 텍사스 군은 곧바로 우레아 장군의 군대의 공격에 대비하여 대포를 설치했다. 치열한 전투 후, 멕시코 군은 100명에서 200명이 사상 당하고, 텍사스 군의 손실은 7명에서 9명이 죽고 60명이 부상했다. 패닌과 그의 군대는 나머지 군대에 압도되어, 이 콜레토 전투에 항복했다. 그들은 디파이언스 요새로 회군하여 구금되었다. 골리아드 학살[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골리아드 학살입니다. 멕시코 군의 우레아 장군은 빅토리아로 향하는 동안, 호세 니콜라스 드 라 포르틸라 대령에게 라바이아 주둔지의 지휘를 명령했다. 1836년 3월 26일, 안토니오 로페스 데 산타 안나 장군의 명을 받은 특사가 포르틸라에게 도착하였고, 포르틸라는 다음날 포로를 사형시키겠다고 대답을 했다. 1836년 3월 27일 멕시코군은 패닌과 군인들을 3열 대열로 행군을 시켰고, 모두 지근 거리에서 총살시켰다. 학살을 지켜본 패닌은 눈가리개를 하고 총살대에서 총살당했다. 유산[편집] 텍사스 패닌 카운티, 조지아의 패닌 카운티는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사용된 큰 군사 훈련 시설 및 전쟁포로 수용소인 캠프 패닌도 그의 이름에서 왔다. 휴스턴에 있는 주요 거리의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같이 보기[편집] 텍사스 혁명 외부 링크[편집] 제임스 W. 패닌 (1804/1805 - 1836) FANNIN, JAMES WALKER, JR. <table><tbody><tr><th>전거 통제</th><td> WorldCat VIAF: 4212166 LCCN: n97034319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제임스_패닌&amp;oldid=22393186" 분류: 텍사스주의 역사텍사스 혁명 관련자1804년 태어남1836년 죽음콜럼버스 (조지아주) 출신휴스턴 출신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FrançaisItaliano日本語PortuguêsРусский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4일 (금) 17: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서론 제임스 패닌은 19세기 텍사스 혁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인으로, 그의 생애와 업적은 텍사스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본 문서는 패닌의 생애, 전투 경험, 그리고 그의 유산을 통해 그가 텍사스 혁명에 미친 영향을 조명하고자 한다. ### 본론 1. **생애**: 패닌은 조지아에서 태어나 웨스트 포인트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으나 퇴학당한 후 상인으로 활동했다. 1834년 텍사스로 이주하여 농장 주가 되었고, 멕시코 정부에 대한 저항 세력에 합류했다. 그는 텍사스군의 지휘관으로서 여러 전투에 참여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2. **콜레토 크리크 전투**: 1836년 3월, 패닌은 콜레토 크리크 전투에서 멕시코 군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항복하게 된다. 이 전투는 그의 군사적 리더십의 한계를 드러내며, 많은 병사들이 그의 지휘 아래에서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점이 강조된다. 3. **골리아드 학살**: 패닌과 그의 병사들은 전투 후 포로로 잡혀 골리아드에서 총살당했다. 이 사건은 텍사스 혁명에서의 비극적인 순간으로 기록되며, 패닌의 죽음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다. 4. **유산**: 패닌의 이름은 텍사스 패닌 카운티와 조지아의 패닌 카운티, 그리고 군사 훈련 시설인 캠프 패닌 등 여러 곳에 남아 있다. 그의 이야기는 텍사스 혁명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결론 제임스 패닌은 텍사스 혁명에서 중요한 인물로, 그의 군사적 경력과 비극적인 최후는 텍사스 역사에서 중요한 교훈을 남긴다. 패닌의 이야기는 단순한 군인의 삶을 넘어, 혁명과 저항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 후세에 영감을 주고 있다. 글쓴이는 패닌의 생애를 통해 역사적 인물의 복잡성과 그들이 남긴 유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글 전체의 요지를 논리적 흐름에 맞게 정리해줘. 서론, 본론, 결론 구조로 요약해주고, 각 부분마다 글쓴이의 의도나 주장도 명확히 밝혀줘.
장_빅토르_마리_모로
https://ko.wikipedia.org/wiki/장_빅토르_마리_모로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장 빅토르 마리 모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장 빅토르 마리 모로</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tbody><tr> <td colspan="2"> <div><div><img></div><span><big><big><b>장 빅토르 마리 모로<br>Jean Victor Marie Moreau</b></big></big></span></div> </td></tr> <tr> <td colspan="2"><a><img></a> </td></tr> <tr> <th><span>생애 </span> </th> <td><a>1763년</a> <a>2월 14일</a> ~ <a>1813년</a> <a>9월 2일</a> </td></tr> <tr> <th><span>출생지 </span> </th> <td><a>프랑스</a> <a>모를레</a> </td></tr> <tr> <th><span>사망지 </span> </th> <td>1813년 9월 2일 (50세)<br><a>보헤미아</a> <a>란</a> </td></tr> <tr> <th><span>복무 </span> </th> <td><a><img></a><a>프랑스 왕국</a><br><a><img></a><a>프랑스 제1공화국</a><br><a><img></a><a>러시아 제국</a> </td></tr> <tr> <th><span>복무 기간 </span> </th> <td>1791~1800년<br>1812~1813년 </td></tr> <tr> <th><span>최종 계급 </span> </th> <td><a>사단장</a><br><a>원수</a><br><a>프랑스 원수</a>(사후) </td></tr> <tr> <th><span>지휘 </span> </th> <td><a>북부 군</a><br><a>라인 군</a> </td></tr> <tr> <th><span>주요 참전 </span> </th> <td><a>프랑스 혁명전쟁</a><br><a>나폴레옹 전쟁</a> <p><a>투르쿠앵 전투</a><br> <a>카사노 전투</a><br> <a>노비 전투</a><br> <a>회흐슈타트 전투</a><br> <a>호엔린덴 전투</a><br> <a>드레스덴 전투</a> </p> </td></tr> <tr> <th><span>기타 이력 </span> </th> <td><a>에투알 개선문</a>에 이름이 새겨져 있음 </td></tr> </tbody></table> <p><b>장 빅토르 마리 모로</b>(Jean Victor Marie Moreau, <a>1763년</a> <a>2월 14일</a> ~ <a>1813년</a> <a>9월 2일</a>)는 프랑스 장군이자 <a>나폴레옹 보나파르트</a>의 힘이 되어주었으나, 훗날 라이벌이 되어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 <ul> <li><a><span>1.1</span> <span>초기 삶</span></a></li> <li><a><span>1.2</span> <span>초기 군사 경험</span></a></li> <li><a><span>1.3</span> <span>특별한 은퇴</span></a></li> <li><a><span>1.4</span> <span>음모</span></a></li> <li><a><span>1.5</span> <span>미국으로 추방</span></a></li> <li><a><span>1.6</span> <span>나폴레옹 적대자들 위한 조언과 죽음</span></a></li> <li><a><span>1.7</span> <span>마지막 말</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유산</span></a></li> <li><a><span>3</span> <span>참조</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초기 삶</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모로는 <a>브르타뉴</a> <a>모를레</a>(Morlaix)에서 태어났다. 모로의 아버지는 성공한 법률가로 모로가 군대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대신 <a>렌 대학</a>(University of Rennes)에서 법률을 공부하도록 강요했다. 젊은 모로는 법률에 좋은 성향을 보였으나 자유로운 학생 생활을 보냈다. 모로는 학위를 얻는 대신 학생시절부터 영웅이나 지도자로의 자질을 보여 지휘하거나 총괄하는 것을 좋아해 군대와 체질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1789년에 일어난 학생운동은 모로가 주도했는데, 이 일상의 사건은 <a>렌</a>의 젊은 귀족들과 시민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p> <h3><span></span><span>초기 군사 경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div><div><a><img></a> <div><div><a></a></div>1792년 <a>일에빌렌</a>의 의용군 중령 시절의 모로.</div></div></div> <p>1791년 모로는 <a>일에빌렌</a>(llle-et-Vilaine)의 의용군 중령으로 선출되어 <a>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a>의 지휘하에 근무하였고, 1793년 모로의 <a>대대</a>(battalion)는 좋은 명령을 받아 그의 고유의 군인다운 캐릭터와 공화정의 원칙에 따라 여단장으로 승진하는 길을 확보했다. 1794년 초기 <a>라자르 카르노</a>에 의해 모로는 사단장으로 승진했고, <a>플랑드르</a>에서 <a>샤를 피슈그뤼</a>가 지휘하는 군대의 좌익을 맡았다. </p> <h3><span></span><span>특별한 은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div><div><a><img></a> <div><div><a></a></div>장 빅토르 모로</div></div></div> <p>1794년 <a>투르쿠앵 전투</a>(Battle of Tourcoing)에서 모로는 군사적 명성을 쌓았고, 1795년 라인과 모젤의 군대를 맡아 지휘하면서 라인을 가로질러 독일로 진격했다. 모로는 첫 임무를 완벽하게 성공함과 동시에 여러 번 승리를 거두고 <a>이사르</a>(Isar)까지 통과했으나 마지막에는 <a>테셴 공작 카를 대공</a>에게 패배했다. 그렇지만 모로는 퇴각을 지휘하면서 솜씨를 발휘해 –이런 작전의 모델을 고려해- 개인적인 명성은 매우 높아졌고, 더욱이 그가 잘 해내고 되돌아올때 약 5,000명의 포로를 데리고 왔다. </p> <h3><span></span><span>음모</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1797년 모로는 이후 자금과 물자의 부족이란 이유에도 불구하고 라인을 가로질러 나아갔으나 모로의 작전은 보나파르트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a>레오본 평화</a>(Peace of Leoben)의 사전 작업의 결과에 따라 저지되었다. 이 시기 모로는 오랜 동료이자 사령관인 <a>샤를 피슈그뤼</a>와 <a>콩데 공</a>(Prince de Condé) 사이에서 왕래된 반역에 관련된 서신을 발견하였다. 모로는 이미 불충한 행위에 대한 비난을 받던 피슈그뤼의 옹호자였었다. 모로는 어리석게도 발견한 서신에 대해 내색하지 않았고, 그 결과 가장 작지만 일부 연루된 의심을 받게 되었다. 뒤늦게 모로는 반역자로써 피슈그뤼를 고발하는 성명서를 군에 발행했고, 결백을 주장하는 서신을 <a>파리</a>에 보냈다. </p><p>모로는 퇴역했지만 1799년 보나파르트의 부재와 승승장구하는 러시아 사령관 <a>알렉산드르 수보로프</a>를 저지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과 경험이 있는 장군이 이탈리아에 필요해 재기용되었다. 모로는 <a>이탈리아 군</a>을 지휘해 작은 성공을 거두고, 짧은 시간 이전에 있었던 라인 군(Army of the Rhine)에 지명되었으나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후임자인 <a>바르텔레미 카트린 주베르</a>와 함께 남아 <a>노비 전투</a>(battle of Novi)때까지 싸우다 패배했다. 전투에서 주베르가 전사하자 모로는 <a>제노바</a>에서 군대의 철수를 지휘했고, <a>장 에티엔 샹피오네</a>(Jean Étienne Championnet)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보나파르트가 <a>이집트</a>에서 돌아오자 모로를 파리로 소환했고, <a>프랑스 독재 정부</a>에 크나큰 불만을 가지고 있던 장군들과 공화당원들이 <a>18 브뤼메르</a>(18 Brumaire)의 <a>쿠데타</a>에서 모로를 지원해 성공했다. 모로는 군대를 지휘해 <a>뤽상부르 궁전</a>(Luxembourg Palace)에서 2명의 독재관을 감금시켰다. </p> <div><div><a><img></a> <div><div><a></a></div><a>호엔린덴 전투</a>.</div></div></div> <p>그 보답으로 나폴레옹은 모로를 라인 군 사령관에 재임명했고, 모로의 군대는 이사르와 라인 강에서 <a>오스트리아</a>를 물러나게 했다. 모로는 파리에 돌아와 <a>조제핀 드 보아르네</a>의 친구인 <a>크리올</a> 여성인 밀르 위로(Mlle Hullot)라는 야심만만한 여성과 결혼했는데, 그는 밀르에게 사로잡혀 버렸다. 이후 몇 주의 시간을 보낸 후 독일에서 군대를 이끌고 경축할만한 <a>호엔린덴 전투</a>의 승리로 전역기간 그가 거둔 즐거움과 행운으로 해결되었다. 모로의 아내는 나폴레옹의 권력강화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모았다. 이 "클럽 모로"(Club Moreau)를 나폴레옹은 성가시게 생각했지만 왕당파에게는 힘이 되었다. 모로는 공화국의 회복을 위해 군사 독재관을 맞이하는 것에 내키지 않았지만 <a>루이 18세</a>를 복권시키려는 음모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모로를 공모자로 의심했다. </p><p>모로에 대한 비난은 커다란 압박을 일으키게 되었고, 보나파르트를 위시한 재판부는 뒤이어 모로에게 제1집정관의 이름으로 투옥이 아닌 추방이란 판결을 내려 관대한 처분을 내리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1804년 모로는 <a>스페인</a>을 거쳐 <a>아메리카</a>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p> <h3><span></span><span>미국으로 추방</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모로는 아내와 함께 12월 <a>뉴욕시</a>에 도착했다. 모로는 이 지역에서 열정을 가지고 일을 얻으려고 했으나 모든 직장에서 근무를 거절당했다. 한동안 여행을 하며 보내던 모로는 <a>트렌턴</a>(Trenton)에서 몇마일 떨어진 <a>델라웨어 강</a>(Delaware River) 근처 장원을 구입해 1806년 <a>뉴저지</a>에 정착하게 되었다. 모로는 1813년까지 그곳에서 살면서 낚시, 사냥, 친목 교제로 시간을 보냈다. 모로의 거주지는 모든 정치적 국외 망명자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외국의 힘을 빌려 나폴레옹을 상대로 모로가 칼을 들도록 권유하였다. <a>1812년 전쟁</a>의 발발로 모로는 <a>매디슨</a>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군대의 사령관직을 제의받았다. 모로는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곧 <a>러시아</a>에서 <a>대육군</a>(Grande Armée)이 파멸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p> <h3><span></span><span>나폴레옹 적대자들 위한 조언과 죽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div><div><a><img></a> <div><div><a></a></div><i>모로 장군의 죽음</i>, 오귀스트 쿠더 (묘사)</div></div></div> <p>모로는 아내의 선동으로 유럽에 돌아옴과 동시에 공화주의자 음모자들의 모임의 옛 친구들과 협상하기 시작했다:이전 장-밥티스트 베르나도트, 현재 스웨덴의 카를 요한 공(훗날 국왕 <a>스웨덴의 카를 14세 요한</a>). 카를 요한과 차르 러시아의 <a>알렉산드르 1세</a>는 나폴레옹을 상대로 함께 군대를 일으켰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이끌었다. 모로는 나폴레옹의 패배와 공화국 정부가 세워지는 것을 보기를 희망했다. 모로는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도자들에게 프랑스를 패배시키는 가장 최선의 방법 등을 조언하는 역할을 맡았다. 모로는 1813년 8월 27일 <a>드레스덴 전투</a>에서 중상을 입고 차르와 대화를 나눈 뒤 <a>라우니</a>(Louny)에서 9월 2일 사망했다. 모로는 <a>상트페테르부르크</a>의 <a>성 카타리나 가톨릭 교회</a>(Catholic Church of St. Catherine)에 매장되었다. 모로의 아내는 차르로부터 연금을 받았고, <a>루이 18세</a>로부터 <i>원수</i>(maréchal)의 지위를 하사받았으나 모로의 동향인들은 모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변절자" 라며 뒤무리에와 피슈그뤼에 비유했다. </p> <h3><span></span><span>마지막 말</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탁월한 재능을 소유한 나폴레옹에 비해 능력이 많이 떨어졌음에도 모로는 장군으로써 매우 높은 위치에 있었다. 모로는 숙련도와 정교함을 겸비하고 있었고, 압박 아래 진지함을 가지고 있었다. 모로는 아버지가 <a>공포정치</a> 시기에 <a>기요틴</a>형에 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진실한 공화주의자였다. 모로의 마지막 말 "침착해라, 신사 여러분 ;이제 나는 죽는다"(Soyez tranquilles, messieurs; c'est mon sort," ("Be calm, gentlemen; this is my fate")의 암시는 자신의 모국을 공격하는 군대의 장군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확실치 않는 입장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p> <h2><span></span><span>유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뉴욕의 모로 타운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p> <h2><span></span><span>참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table> <tbody><tr> <td><img></td> <td> <b><a>위키미디어 공용</a></b>에 관련된<br>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div><b><a>장 빅토르 마리 모로</a></b></div> </td> </tr> </tbody></table> <ul><li><small><a><img></a> 본 문서에는 현재 <a>퍼블릭 도메인</a>에 속한 <a>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a>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small></li></ul> <div><table><tbody><tr><th><a>전거 통제</a></th><td><div> <ul><li><a>WorldCat</a></li> <li><a>VIAF</a>: <span><a>71477667</a></span></li> <li><a>LCCN</a>: <span><a>n84054924</a></span></li> <li><a>ISNI</a>: <span><a>0000 0000 6647 4533</a></span></li> <li><a>GND</a>: <span><a>118784811</a></span></li> <li><a>SELIBR</a>: <span><a>300927</a></span></li> <li><a>SUDOC</a>: <span><a>033136211</a></span></li> <li><a>BNF</a>: <span><a>cb124033209</a> <a>(데이터)</a></span></li> <li><a>BPN</a>: <span><a>73076640</a></span></li> <li><a>BIBSYS</a>: <span><a>2061629</a></span></li> <li><a>ULAN</a>: <span><a>500354291</a></span></li> <li><a>NKC</a>: <span><a>jo2015896704</a></span></li> <li><a>BNE</a>: <span><a>XX5101804</a></span></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장_빅토르_마리_모로&amp;oldid=22413988</a>"</div> <div><div><a>분류</a>: <ul><li><a>1763년 태어남</a></li><li><a>1813년 죽음</a></li><li><a>프랑스 제1제국의 원수</a></li><li><a>프랑스 혁명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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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가 주베르와 같이 싸웠지만 주베르가 전사한 전투는?
노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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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로가 주베르와 같이 싸웠지만 주베르가 전사한 전투는?", "이집트에서 돌아온 보나파르트가 파리로 소환한 사람은?", "1799년 모로가 이탈리아에 다시 기용된 후 저지에 나선 러시아 사령관은?", "모로가 자신의 후임자와 함께 패배할 때까지 싸운 전투는?", "전투에서 후임자인 주베르가 죽은 후 모로가 지휘권을 넘겨준 인물은?", "나폴레옹이 보답으로 모로에게 준 직위는?", "모로가 결혼한 사람은?", "모로의 아내가 나폴레옹의 권력 강화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을 모은 단체의 이름은?", "모로를 라인 군 사령관에 재임명한 인물은 누구인가?", "모로가 결혼한 여성은 누구인가?", "모로의 아내가 나폴레옹의 권력강화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모은 모임의 이름은 무엇인가?", "모로를 라인 군 사령관으로 재임명한 인물은?", "파리로 돌아온 모로가 결혼한 여성은?", "밀르 위로가 나폴레옹의 권력강화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모아 만든 단체는?", "모로가 뉴저지에 정착한 해는?", "모로가 러시아에서 대육군이 파멸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돌아가려고 마음 먹은 곳은?", "모로는 몇년도에 뉴저지에 정착하였는가?", "모로는 뉴저지에 몇년까지 살았는가?", "모로가 델라웨어 강 근처 장원을 구입해 뉴저지에 정착한 해는?", "1812년 전쟁이 발발하자 모로에게 미국 군대 사령관직을 제의한 대통령은?", "모로가 설립하기를 원한 정체는?", "1813년 모로가 중상을 입은 전투는?", "모로에게 원수 지위를 하사한 사람은?", "모로가 1913년 8월 27일 중상을 입은 전투는 무엇인가?", "모로가 사망한 날짜는 언제인가?", "1831년 모로가 중상을 입은 전투는?", "모로의 아내가 루이 18세로부터 하사받은 지위는?", "모로의 동향인들이 모로를 뒤무리에와 피슈그뤼와 비유하며 지칭하는 말은?" ]
<!DOCTYPE html> 장 빅토르 마리 모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 빅토르 마리 모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tbody><tr> <td colspan="2"> 장 빅토르 마리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 </td></tr> <tr> <td colspan="2"> </td></tr> <tr> <th>생애 </th> <td>1763년 2월 14일 ~ 1813년 9월 2일 </td></tr> <tr> <th>출생지 </th> <td>프랑스 모를레 </td></tr> <tr> <th>사망지 </th> <td>1813년 9월 2일 (50세)보헤미아 란 </td></tr> <tr> <th>복무 </th> <td>프랑스 왕국프랑스 제1공화국러시아 제국 </td></tr> <tr> <th>복무 기간 </th> <td>1791~1800년1812~1813년 </td></tr> <tr> <th>최종 계급 </th> <td>사단장원수프랑스 원수(사후) </td></tr> <tr> <th>지휘 </th> <td>북부 군라인 군 </td></tr> <tr> <th>주요 참전 </th> <td>프랑스 혁명전쟁나폴레옹 전쟁 투르쿠앵 전투 카사노 전투 노비 전투 회흐슈타트 전투 호엔린덴 전투 드레스덴 전투 </td></tr> <tr> <th>기타 이력 </th> <td>에투알 개선문에 이름이 새겨져 있음 </td></tr> </tbody></table> 장 빅토르 마리 모로(Jean Victor Marie Moreau, 1763년 2월 14일 ~ 1813년 9월 2일)는 프랑스 장군이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힘이 되어주었으나, 훗날 라이벌이 되어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목차 1 생애 1.1 초기 삶 1.2 초기 군사 경험 1.3 특별한 은퇴 1.4 음모 1.5 미국으로 추방 1.6 나폴레옹 적대자들 위한 조언과 죽음 1.7 마지막 말 2 유산 3 참조 생애[편집] 초기 삶[편집] 모로는 브르타뉴 모를레(Morlaix)에서 태어났다. 모로의 아버지는 성공한 법률가로 모로가 군대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대신 렌 대학(University of Rennes)에서 법률을 공부하도록 강요했다. 젊은 모로는 법률에 좋은 성향을 보였으나 자유로운 학생 생활을 보냈다. 모로는 학위를 얻는 대신 학생시절부터 영웅이나 지도자로의 자질을 보여 지휘하거나 총괄하는 것을 좋아해 군대와 체질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1789년에 일어난 학생운동은 모로가 주도했는데, 이 일상의 사건은 렌의 젊은 귀족들과 시민들 사이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초기 군사 경험[편집] 1792년 일에빌렌의 의용군 중령 시절의 모로. 1791년 모로는 일에빌렌(llle-et-Vilaine)의 의용군 중령으로 선출되어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의 지휘하에 근무하였고, 1793년 모로의 대대(battalion)는 좋은 명령을 받아 그의 고유의 군인다운 캐릭터와 공화정의 원칙에 따라 여단장으로 승진하는 길을 확보했다. 1794년 초기 라자르 카르노에 의해 모로는 사단장으로 승진했고, 플랑드르에서 샤를 피슈그뤼가 지휘하는 군대의 좌익을 맡았다. 특별한 은퇴[편집] 장 빅토르 모로 1794년 투르쿠앵 전투(Battle of Tourcoing)에서 모로는 군사적 명성을 쌓았고, 1795년 라인과 모젤의 군대를 맡아 지휘하면서 라인을 가로질러 독일로 진격했다. 모로는 첫 임무를 완벽하게 성공함과 동시에 여러 번 승리를 거두고 이사르(Isar)까지 통과했으나 마지막에는 테셴 공작 카를 대공에게 패배했다. 그렇지만 모로는 퇴각을 지휘하면서 솜씨를 발휘해 –이런 작전의 모델을 고려해- 개인적인 명성은 매우 높아졌고, 더욱이 그가 잘 해내고 되돌아올때 약 5,000명의 포로를 데리고 왔다. 음모[편집] 1797년 모로는 이후 자금과 물자의 부족이란 이유에도 불구하고 라인을 가로질러 나아갔으나 모로의 작전은 보나파르트와 오스트리아 사이에서 레오본 평화(Peace of Leoben)의 사전 작업의 결과에 따라 저지되었다. 이 시기 모로는 오랜 동료이자 사령관인 샤를 피슈그뤼와 콩데 공(Prince de Condé) 사이에서 왕래된 반역에 관련된 서신을 발견하였다. 모로는 이미 불충한 행위에 대한 비난을 받던 피슈그뤼의 옹호자였었다. 모로는 어리석게도 발견한 서신에 대해 내색하지 않았고, 그 결과 가장 작지만 일부 연루된 의심을 받게 되었다. 뒤늦게 모로는 반역자로써 피슈그뤼를 고발하는 성명서를 군에 발행했고, 결백을 주장하는 서신을 파리에 보냈다. 모로는 퇴역했지만 1799년 보나파르트의 부재와 승승장구하는 러시아 사령관 알렉산드르 수보로프를 저지하기 위해 상당한 노력과 경험이 있는 장군이 이탈리아에 필요해 재기용되었다. 모로는 이탈리아 군을 지휘해 작은 성공을 거두고, 짧은 시간 이전에 있었던 라인 군(Army of the Rhine)에 지명되었으나 이탈리아에서 자신의 후임자인 바르텔레미 카트린 주베르와 함께 남아 노비 전투(battle of Novi)때까지 싸우다 패배했다. 전투에서 주베르가 전사하자 모로는 제노바에서 군대의 철수를 지휘했고, 장 에티엔 샹피오네(Jean Étienne Championnet)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다. 보나파르트가 이집트에서 돌아오자 모로를 파리로 소환했고, 프랑스 독재 정부에 크나큰 불만을 가지고 있던 장군들과 공화당원들이 18 브뤼메르(18 Brumaire)의 쿠데타에서 모로를 지원해 성공했다. 모로는 군대를 지휘해 뤽상부르 궁전(Luxembourg Palace)에서 2명의 독재관을 감금시켰다. 호엔린덴 전투. 그 보답으로 나폴레옹은 모로를 라인 군 사령관에 재임명했고, 모로의 군대는 이사르와 라인 강에서 오스트리아를 물러나게 했다. 모로는 파리에 돌아와 조제핀 드 보아르네의 친구인 크리올 여성인 밀르 위로(Mlle Hullot)라는 야심만만한 여성과 결혼했는데, 그는 밀르에게 사로잡혀 버렸다. 이후 몇 주의 시간을 보낸 후 독일에서 군대를 이끌고 경축할만한 호엔린덴 전투의 승리로 전역기간 그가 거둔 즐거움과 행운으로 해결되었다. 모로의 아내는 나폴레옹의 권력강화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모았다. 이 "클럽 모로"(Club Moreau)를 나폴레옹은 성가시게 생각했지만 왕당파에게는 힘이 되었다. 모로는 공화국의 회복을 위해 군사 독재관을 맞이하는 것에 내키지 않았지만 루이 18세를 복권시키려는 음모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나폴레옹은 모로를 공모자로 의심했다. 모로에 대한 비난은 커다란 압박을 일으키게 되었고, 보나파르트를 위시한 재판부는 뒤이어 모로에게 제1집정관의 이름으로 투옥이 아닌 추방이란 판결을 내려 관대한 처분을 내리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1804년 모로는 스페인을 거쳐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미국으로 추방[편집] 모로는 아내와 함께 12월 뉴욕시에 도착했다. 모로는 이 지역에서 열정을 가지고 일을 얻으려고 했으나 모든 직장에서 근무를 거절당했다. 한동안 여행을 하며 보내던 모로는 트렌턴(Trenton)에서 몇마일 떨어진 델라웨어 강(Delaware River) 근처 장원을 구입해 1806년 뉴저지에 정착하게 되었다. 모로는 1813년까지 그곳에서 살면서 낚시, 사냥, 친목 교제로 시간을 보냈다. 모로의 거주지는 모든 정치적 국외 망명자들의 피난처가 되었고, 외국의 힘을 빌려 나폴레옹을 상대로 모로가 칼을 들도록 권유하였다. 1812년 전쟁의 발발로 모로는 매디슨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군대의 사령관직을 제의받았다. 모로는 기꺼이 받아들였지만 곧 러시아에서 대육군(Grande Armée)이 파멸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유럽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나폴레옹 적대자들 위한 조언과 죽음[편집] 모로 장군의 죽음, 오귀스트 쿠더 (묘사) 모로는 아내의 선동으로 유럽에 돌아옴과 동시에 공화주의자 음모자들의 모임의 옛 친구들과 협상하기 시작했다:이전 장-밥티스트 베르나도트, 현재 스웨덴의 카를 요한 공(훗날 국왕 스웨덴의 카를 14세 요한). 카를 요한과 차르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나폴레옹을 상대로 함께 군대를 일으켰고,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를 이끌었다. 모로는 나폴레옹의 패배와 공화국 정부가 세워지는 것을 보기를 희망했다. 모로는 스웨덴과 러시아의 지도자들에게 프랑스를 패배시키는 가장 최선의 방법 등을 조언하는 역할을 맡았다. 모로는 1813년 8월 27일 드레스덴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차르와 대화를 나눈 뒤 라우니(Louny)에서 9월 2일 사망했다. 모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성 카타리나 가톨릭 교회(Catholic Church of St. Catherine)에 매장되었다. 모로의 아내는 차르로부터 연금을 받았고, 루이 18세로부터 원수(maréchal)의 지위를 하사받았으나 모로의 동향인들은 모로에 대해 이야기할 때 "변절자" 라며 뒤무리에와 피슈그뤼에 비유했다. 마지막 말[편집] 탁월한 재능을 소유한 나폴레옹에 비해 능력이 많이 떨어졌음에도 모로는 장군으로써 매우 높은 위치에 있었다. 모로는 숙련도와 정교함을 겸비하고 있었고, 압박 아래 진지함을 가지고 있었다. 모로는 아버지가 공포정치 시기에 기요틴형에 처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진실한 공화주의자였다. 모로의 마지막 말 "침착해라, 신사 여러분 ;이제 나는 죽는다"(Soyez tranquilles, messieurs; c'est mon sort," ("Be calm, gentlemen; this is my fate")의 암시는 자신의 모국을 공격하는 군대의 장군이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확실치 않는 입장을 표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유산[편집] 뉴욕의 모로 타운은 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참조[편집] <table> <tbody><tr> <td></td> <td>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장 빅토르 마리 모로 </td> </tr> </tbody></table> 본 문서에는 현재 퍼블릭 도메인에 속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제11판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table><tbody><tr><th>전거 통제</th><td> WorldCat VIAF: 71477667 LCCN: n84054924 ISNI: 0000 0000 6647 4533 GND: 118784811 SELIBR: 300927 SUDOC: 033136211 BNF: cb124033209 (데이터) BPN: 73076640 BIBSYS: 2061629 ULAN: 500354291 NKC: jo2015896704 BNE: XX5101804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장_빅토르_마리_모로&amp;oldid=22413988" 분류: 1763년 태어남1813년 죽음프랑스 제1제국의 원수프랑스 혁명 전쟁 관련자나폴레옹 전쟁 관련자숨은 분류: 1911년판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인용한 문서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SELIBR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P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IBSYS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ULA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AsturianuБеларуская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ՀայերենItaliano日本語LatinaLumbaartNederlandsNorskPolskiRomânăРусскийSlovenščinaSvenska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6일 (일) 01: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문단 번호 | 핵심 내용 | 키워드 | |------------|------------|---------| | 1 | 장 빅토르 마리 모로의 생애와 주요 이력 | 생애, 출생, 사망, 군 복무 | | 1.1 | 초기 삶: 법률 공부와 군대에 대한 관심 | 초기 삶, 법률, 군대 | | 1.2 | 초기 군사 경험: 의용군 중령으로 시작 | 군사 경험, 의용군, 승진 | | 1.3 | 특별한 은퇴: 전투에서의 성공과 패배 | 전투, 명성, 퇴각 | | 1.4 | 음모: 반역 서신 발견과 고발 | 음모, 반역, 고발 | | 1.5 | 미국으로 추방: 뉴욕 정착과 정치적 활동 | 추방, 미국, 정치 | | 1.6 | 나폴레옹 적대자들 위한 조언과 죽음 | 조언, 죽음, 전투 | | 1.7 | 마지막 말: 자신의 운명에 대한 태도 | 마지막 말, 운명, 후회 | | 2 | 유산: 모로 타운의 유래 | 유산, 모로 타운 | **글의 흐름 요약:** 이 문서는 장 빅토르 마리 모로의 생애를 다루고 있으며, 그의 초기 삶, 군사 경험, 특별한 은퇴, 음모, 미국으로의 추방, 나폴레옹 적대자들에 대한 조언과 죽음, 마지막 말, 그리고 그의 유산을 순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모로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나폴레옹과의 갈등으로 인해 미국으로 추방되었고, 결국 유럽으로 돌아와 나폴레옹에 대한 조언을 하다 사망하게 된다.
이 글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표 형식으로 요약해줘. 예: {문단 번호, 핵심 내용, 키워드}. 글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요약 마지막에 간단히 설명해줘.
판테온_프로젝트
https://ko.wikipedia.org/wiki/판테온_프로젝트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판테온 프로젝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판테온 프로젝트</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d><div><img></div></td><td><span>이 글의 <b><a>중립성</a>에 대한 이의</b>가 제기되었습니다.<span><br>주관적인 내용이나 감정적인 표현은 없는지,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여러 관점이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span> <small>(2017년 2월)</small><span></span></span></td></tr></tbody></table> <p><b>판테온 프로젝트</b>(Project Pantheon)은 <a>MIT 미디어 랩</a>의 Macro Connection 팀의 프로젝트 중의 하나이다. Pantheon이라는 프로젝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 역사상에서 철학, 예술, 정치, 스포츠 등 다양한 영역에 있어서 인류의 발전에 의미있는 인물들의 데이터를 정리한 프로젝트이다. 2014년 1월부터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위키피디아와 다양한 형태의 인류업적을 데이터 자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오늘날의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다양한 인물들과 업적을 기념하고 이를 편집하고 시각화하여 이해하기 쉽게하였다. B.C.4000년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의 엄청난 시간과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고 역사상의 인물들 간의 관계와 업적을 보여주며 이는 교수에서부터 포르노스타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있다.<sup><a>&#91;1&#93;</a></sup>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내용</span></a> <ul> <li><a><span>1.1</span> <span>Visualisation</span></a> <ul> <li><a><span>1.1.1</span> <span>Treemap</span></a></li> <li><a><span>1.1.2</span> <span>Matrix</span></a></li> <li><a><span>1.1.3</span> <span>Scatterplot</span></a></li> <li><a><span>1.1.4</span> <span>Map</span></a></li> </ul> </li> <li><a><span>1.2</span> <span>Ranking</span></a></li> <li><a><span>1.3</span> <span>People</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목적</span></a></li> <li><a><span>3</span> <span>프로젝트 방식</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내용</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b>Project Pantheon</b>은 크게 4가지 형태의 <b>Data Visualisation</b>을 제공하며 이와 동시에 인물들과 관련한 다양한 <b>Ranking</b>도 제공한다. Data Visualisation의 형태로는 Treemap, Matrix, Scatterplot, Map이 있다. 이들은 각각 이 프로젝트에서 제작한 지표인 HPI 지수를 사용하여 중요도를 판별하며, 데이터의 원천으로는 개인 업적 또는 판테온 프로젝트의 데이터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Rangking 또한 이 지수를 이용하여 다양한 순위를 제공하여 쉽게 비교가 가능하게 되어 있다. </p> <h3><span>Visualisation</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b>Visualisation</b>은 크게 4가지 형태(Treemap, Matrix, Scatterplot, Map)로 데이터를 제공하며, 각각에 대하여 다양한 지표들을 사용하여 다양한 종류의 자료를 볼 수 있으며, 비교 또한 가능하다. </p> <h4><span>Treemap</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p><b>Treemap</b>은 국가 별, 영역 별로 얼마나 다양한 인물들이 있었는지를 한 눈에 보기 쉽게 정리한 자료이다. 이를 통하여 한 국가 내에서 얼마나 다양한 영역의 인물들이 존재하였으며, 각각의 순위와 비중 또한 알 수 있다. 또한 영역 별로 보았을 때에는 각 영역에서 어느 나라 출신의인물들이 존재하며 전체에서 얼마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마찬가지로 각각의 순위와 전체적인 순위 또한 제공하고 있다. 각각의 국가 별, 영역 별 검색을 할 때에 다양한 지표들이 존재한다. B.C. 4000년 에서 2010년까지 원하는 기간 동안의 인물 내에서만 검색이 가능하며, 데이터 원천의 종류와 평가 기준이 되는 지표 또한 개인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sup><a>&#91;2&#93;</a></sup> </p> <h4><span>Matrix</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p><b>Matirix</b>는 전체 국가와 전체 대분류 영역을 표 하나에 나타낸 것으로, 가로축에는 각각의 영역들이 있고 세로축에는 국가들이 더 많은 인물이 있는 순으로 차례대로 나타나게 되어 있고 색상의 농도를 통하여 그 정도 또한 파악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국가 별로 비교가 가능하며, 각 영역별로도 비교가 가능하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의 감소를 알 수 있으며, 과학과 창조예술 등의 분야들이 상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sup><a>&#91;3&#93;</a></sup>이 데이터 또한 다양한 지표를 통하여 볼 수 있는데, 성별을 남, 녀, 남과 여, 여/남 으로 볼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시간 대와 데이터 원천, 지표 등을 선택하여 볼 수 있다.<sup><a>&#91;4&#93;</a></sup> </p> <h4><span>Scatterplot</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p><b>Scatterplot</b>은 국가와 국가 간, 영역과 영역 간 비교를 하기 위한 데이터 자료이다. 크게 2가지로 나뉘는 Scatterplot은 2개의 국가를 지정을하면 각 국가에서 영역별로 2차원 그래프 상에서 나타내 한 축에는 한 국가 다른 축에는 다른 국가를 지표로 설정하여 두 국가 간에 어느 영역에서 더 많은 인물들이 있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2개의 영역을 지정하면 각 영역 내에서 어느 나라에서 더 많은 인묻들이 있었는 지를 알 수 있다. 그래프를 보기 좋게 일반 함수와 로그 함수로 볼 수 있으며, 따로 볼 수도 있으며 대칭해서 볼 수도 있다. 또한 앞의 다른 데이터 형태와 마찬가지로 데이터 원천과 평가 지표를 선택할 수 있다.<sup><a>&#91;5&#93;</a></sup> </p> <h4><span>Map</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p><b>Map</b>은 여러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 비쥬얼라이제이션 중 간단한 형태로 지도 상에 각 분야별로 얼마나 전 지구적으로 인물들이 나타났는지를 표현한다. 지도 상에 짙은 정도를 달리하여 짙을 수록 더욱 많은 인물들이 있는 것으로 이를 통하여 국가 별, 대륙 별로 쉽게 한 눈에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기와 지표, 데이터 자료 원천 등을 선택할 수 있다. </p> <h3><span>Ranking</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시각화된 자료로 제공되는 형태 이외에도 판테온 프로젝트는 <b>Ranking</b>을 통하여 각각의 순위들도 제공한다. 순위는 3가지로 나뉘어서 제공되는데, 국가 별, 인물 별, 영역 별로 순위를 제공한다. 국가 별로는 각 국가에서 탄생한 인물들의 숫자 순서로 정렬이 되어 있으며, 근거가 되는 다양한 지표들도 제공한다. 또한 여성의 비율과 50개 언어 이상의 위키피디아에 있는 인물의 숫자들도 제공한다. 인물 별로도 근거가 되는 다양한 지표들과 함께 직업, 국가, 성별 들도 제공한다. 영역 별로는 각 영역에서의 총 인물들의 숫자와 국가의 수, 여성의 비율, 속한 산업 등 도 나타낸다. 각 분류내에서 각각의 지표에 따라 순위의 재정렬이 가능하며 앞의 시각화된 데이터와 마찬가지로 시대와 데이터 원천, 근거 지표 등도 선택할 수 있다. </p> <h3><span>People</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판테온 프로젝트는 더욱 구체적으로 각각의 인물들에 대해서 다양한 지표들과 더불어 자료들도 제공한다. 얼마나 많은 언어로 위키피디아에 있는 지, 얼마나 많은 페이지가 있는 지, 각 영역 별, 국가 별 그 인물의 순위 들도 제공하고 있다. </p> <h2><span></span><span>목적</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판테온 프로젝트의 목적은 프로젝트의 리더인 César Hidalgo에 따르면 판테온 프로젝트의 가장 큰 목적은 역사적, 문화적 생산물 들을 서로 간에 연결하여 데이터들을 정리하여 시각화하고 각 데이터들간에 연결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데이터들을 모으고, 분석하고 이를 하나의 생산물로써 시각화하여 이로 인해 지금까지의 인류가 있기까지의 선조들의 유산들을 기념하는 것이 판테온 프로젝트의 목적이다.<sup><a>&#91;6&#93;</a></sup> </p> <h2><span></span><span>프로젝트 방식</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판테온 프로젝트는 데이터 원천으로 25개국 언어 이상으로 존재하는 위키피디아 항목을 정리하여 사용한다. 이렇게 정리한 각 인물들을 인물이 태어난 도시의 현재의 국가와 연결하였다.<sup><a>&#91;7&#93;</a></sup>또 다른 데이터 원천으로는 Human Accomplishment이다. Human Accomplishment는 예술,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생산된 책이나 작품 등을 의미하며, 이 자료 역시 현재의 국가와 연결시켰다.<sup><a>&#91;8&#93;</a></sup> 이렇게 구축한 데이터 자료들을 이용하여 각 역사적 인물들의 순위를 정하기 위해 2가지 지표를 사용한다. 그 중의 하나인 <b>L</b>은 위키피디아로 존재하는 언어의 숫자이며 더욱 정교한 지표인 <b>HPI(Historical Popularity Index)</b>는 인물의 시대를 반영하여 시간의 장벽을 해소하고자 하며, 일부 언어로만 번역되어 페이지를 읽은 것이 많은 것을 보완하며, 영어 위키피디아에 편향되지 않게 하여 <b>L</b>지표를 보완한다. </p><p>2가지 데이터 자료와 2가지 지표를 활용하여 총 11340명의 인물들을 선정하였고, 이들을 중복되지 않게 하여 총 88개의 카테고리를 정하여 크게는 Art, Business &amp; Law, Exploration, Humanities, Institutions, Public Figure, Science &amp; Technology, Sports로 나뉘어 그 안에 다시 세세한 직업군으로 나뉘어 분포시켰다.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a>NY Times 관련 기사</a></span> </li> <li><span><a>↑</a></span> <span><a>판테온 프로젝트 홈페이지</a></span> </li> <li><span><a>↑</a></span> <span><a>에디터 편집 기사</a><sup>&#91;<a>깨진 링크</a>(<a>과거 내용 찾기</a>)&#93;</sup></span> </li> <li><span><a>↑</a></span> <span><a>판테온 프로젝트 홈페이지</a></span> </li> <li><span><a>↑</a></span> <span><a>판테온 프로젝트 홈페이지</a></span> </li> <li><span><a>↑</a></span> <span><a>판테온 프로젝트 관련 기사</a></span> </li> <li><span><a>↑</a></span> <span><a>프로젝트 홈페이지</a></span> </li> <li><span><a>↑</a></span> <span><a>판테온 프로젝트 홈페이지</a></span> </li> </ol></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판테온_프로젝트&amp;oldid=24207039</a>"</div> <div><div><a>분류</a>: <ul><li><a>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a></li><li><a>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2017년 2월</a></li><li><a>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모든 문서</a></li><li><a>전체의 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ul> <div><span><a>링크 추가</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6:4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국가 별, 영역 별로 얼마나 다양한 인물들이 있었는지 한 눈에 보기 쉽게 정리한 자료는 무엇인가?
Treemap
null
96051
5,016
[ "국가 별, 영역 별로 얼마나 다양한 인물들이 있었는지 한 눈에 보기 쉽게 정리한 자료는 무엇인가?", "Treemap은 B.C. 4000년 부터 몇 년까지의 검색이 가능할까?", "국가 별, 영역 별로 얼마나 다양한 인물이 있었는지 보기 쉽게 정리한 것은 무엇인가?", "Treemap을 통해 한 국가 내에서 얼마나 다양한 영역의 인물이 존재하였는가에 대한 정보 외에 어떤 것을 알 수 있는가?", "국가와 국가 간, 영역과 영역 간 비교를 하기 위한 데이터 자료는 무엇인가?", "Scatterplot에서 2개의 국가를 지정하면 각 국가에서 영역별로 지표를 설정하여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국가와 국가 간, 영역과 영역 간 비교를 위한 데이터 자료는 무엇인가?", "Scatterplot에서 그래프를 어떤 함수로 볼 수 있는가?", "판테온 프로젝트는 무엇을 통해 각각의 순위를 제공할까?", "판테온 프로젝트가 Ranking을 통해 제공하는 순위는 모두 몇 가지인가?", "판테온 프로젝트는 무엇을 통해 각각의 순위를 제공하는가?", "판테온 프로젝트의 순위는 몇 가지로 나뉘어서 제공되는가?", "판테온 프로젝트의 원천은 무엇인가?", "판테온 프로젝트가 사용하는 위키피디아의 언어는 몇 개 이상일까?", "판테온 프로젝트는 데이터 원천으로 어떤 항목을 정리하여 사용하는가?", "판테온 프로젝트는 구축한 데이터 자료를 이용하여 순위를 정하기 위해 2가지 지표를 사용하는데 그 중 L지표는 무엇인가?" ]
<!DOCTYPE html> 판테온 프로젝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판테온 프로젝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d></td><td>이 글의 중립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주관적인 내용이나 감정적인 표현은 없는지,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여러 관점이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 (2017년 2월)</td></tr></tbody></table> 판테온 프로젝트(Project Pantheon)은 MIT 미디어 랩의 Macro Connection 팀의 프로젝트 중의 하나이다. Pantheon이라는 프로젝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 역사상에서 철학, 예술, 정치, 스포츠 등 다양한 영역에 있어서 인류의 발전에 의미있는 인물들의 데이터를 정리한 프로젝트이다. 2014년 1월부터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위키피디아와 다양한 형태의 인류업적을 데이터 자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오늘날의 인류의 발전에 기여한 다양한 인물들과 업적을 기념하고 이를 편집하고 시각화하여 이해하기 쉽게하였다. B.C.4000년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의 엄청난 시간과 공간적 한계를 극복하고 역사상의 인물들 간의 관계와 업적을 보여주며 이는 교수에서부터 포르노스타에 이르기까지 전 분야에 걸쳐 있다.[1] 목차 1 내용 1.1 Visualisation 1.1.1 Treemap 1.1.2 Matrix 1.1.3 Scatterplot 1.1.4 Map 1.2 Ranking 1.3 People 2 목적 3 프로젝트 방식 4 각주 내용[편집] Project Pantheon은 크게 4가지 형태의 Data Visualisation을 제공하며 이와 동시에 인물들과 관련한 다양한 Ranking도 제공한다. Data Visualisation의 형태로는 Treemap, Matrix, Scatterplot, Map이 있다. 이들은 각각 이 프로젝트에서 제작한 지표인 HPI 지수를 사용하여 중요도를 판별하며, 데이터의 원천으로는 개인 업적 또는 판테온 프로젝트의 데이터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Rangking 또한 이 지수를 이용하여 다양한 순위를 제공하여 쉽게 비교가 가능하게 되어 있다. Visualisation[편집] Visualisation은 크게 4가지 형태(Treemap, Matrix, Scatterplot, Map)로 데이터를 제공하며, 각각에 대하여 다양한 지표들을 사용하여 다양한 종류의 자료를 볼 수 있으며, 비교 또한 가능하다. Treemap[편집] Treemap은 국가 별, 영역 별로 얼마나 다양한 인물들이 있었는지를 한 눈에 보기 쉽게 정리한 자료이다. 이를 통하여 한 국가 내에서 얼마나 다양한 영역의 인물들이 존재하였으며, 각각의 순위와 비중 또한 알 수 있다. 또한 영역 별로 보았을 때에는 각 영역에서 어느 나라 출신의인물들이 존재하며 전체에서 얼마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며, 마찬가지로 각각의 순위와 전체적인 순위 또한 제공하고 있다. 각각의 국가 별, 영역 별 검색을 할 때에 다양한 지표들이 존재한다. B.C. 4000년 에서 2010년까지 원하는 기간 동안의 인물 내에서만 검색이 가능하며, 데이터 원천의 종류와 평가 기준이 되는 지표 또한 개인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2] Matrix[편집] Matirix는 전체 국가와 전체 대분류 영역을 표 하나에 나타낸 것으로, 가로축에는 각각의 영역들이 있고 세로축에는 국가들이 더 많은 인물이 있는 순으로 차례대로 나타나게 되어 있고 색상의 농도를 통하여 그 정도 또한 파악할 수 있다. 이를 통하여 국가 별로 비교가 가능하며, 각 영역별로도 비교가 가능하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종교의 사회적 영향력의 감소를 알 수 있으며, 과학과 창조예술 등의 분야들이 상승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3]이 데이터 또한 다양한 지표를 통하여 볼 수 있는데, 성별을 남, 녀, 남과 여, 여/남 으로 볼 수 있으며, 마찬가지로 시간 대와 데이터 원천, 지표 등을 선택하여 볼 수 있다.[4] Scatterplot[편집] Scatterplot은 국가와 국가 간, 영역과 영역 간 비교를 하기 위한 데이터 자료이다. 크게 2가지로 나뉘는 Scatterplot은 2개의 국가를 지정을하면 각 국가에서 영역별로 2차원 그래프 상에서 나타내 한 축에는 한 국가 다른 축에는 다른 국가를 지표로 설정하여 두 국가 간에 어느 영역에서 더 많은 인물들이 있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2개의 영역을 지정하면 각 영역 내에서 어느 나라에서 더 많은 인묻들이 있었는 지를 알 수 있다. 그래프를 보기 좋게 일반 함수와 로그 함수로 볼 수 있으며, 따로 볼 수도 있으며 대칭해서 볼 수도 있다. 또한 앞의 다른 데이터 형태와 마찬가지로 데이터 원천과 평가 지표를 선택할 수 있다.[5] Map[편집] Map은 여러 다양한 형태의 데이터 비쥬얼라이제이션 중 간단한 형태로 지도 상에 각 분야별로 얼마나 전 지구적으로 인물들이 나타났는지를 표현한다. 지도 상에 짙은 정도를 달리하여 짙을 수록 더욱 많은 인물들이 있는 것으로 이를 통하여 국가 별, 대륙 별로 쉽게 한 눈에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시기와 지표, 데이터 자료 원천 등을 선택할 수 있다. Ranking[편집] 시각화된 자료로 제공되는 형태 이외에도 판테온 프로젝트는 Ranking을 통하여 각각의 순위들도 제공한다. 순위는 3가지로 나뉘어서 제공되는데, 국가 별, 인물 별, 영역 별로 순위를 제공한다. 국가 별로는 각 국가에서 탄생한 인물들의 숫자 순서로 정렬이 되어 있으며, 근거가 되는 다양한 지표들도 제공한다. 또한 여성의 비율과 50개 언어 이상의 위키피디아에 있는 인물의 숫자들도 제공한다. 인물 별로도 근거가 되는 다양한 지표들과 함께 직업, 국가, 성별 들도 제공한다. 영역 별로는 각 영역에서의 총 인물들의 숫자와 국가의 수, 여성의 비율, 속한 산업 등 도 나타낸다. 각 분류내에서 각각의 지표에 따라 순위의 재정렬이 가능하며 앞의 시각화된 데이터와 마찬가지로 시대와 데이터 원천, 근거 지표 등도 선택할 수 있다. People[편집] 판테온 프로젝트는 더욱 구체적으로 각각의 인물들에 대해서 다양한 지표들과 더불어 자료들도 제공한다. 얼마나 많은 언어로 위키피디아에 있는 지, 얼마나 많은 페이지가 있는 지, 각 영역 별, 국가 별 그 인물의 순위 들도 제공하고 있다. 목적[편집] 판테온 프로젝트의 목적은 프로젝트의 리더인 César Hidalgo에 따르면 판테온 프로젝트의 가장 큰 목적은 역사적, 문화적 생산물 들을 서로 간에 연결하여 데이터들을 정리하여 시각화하고 각 데이터들간에 연결을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하여 데이터들을 모으고, 분석하고 이를 하나의 생산물로써 시각화하여 이로 인해 지금까지의 인류가 있기까지의 선조들의 유산들을 기념하는 것이 판테온 프로젝트의 목적이다.[6] 프로젝트 방식[편집] 판테온 프로젝트는 데이터 원천으로 25개국 언어 이상으로 존재하는 위키피디아 항목을 정리하여 사용한다. 이렇게 정리한 각 인물들을 인물이 태어난 도시의 현재의 국가와 연결하였다.[7]또 다른 데이터 원천으로는 Human Accomplishment이다. Human Accomplishment는 예술,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생산된 책이나 작품 등을 의미하며, 이 자료 역시 현재의 국가와 연결시켰다.[8] 이렇게 구축한 데이터 자료들을 이용하여 각 역사적 인물들의 순위를 정하기 위해 2가지 지표를 사용한다. 그 중의 하나인 L은 위키피디아로 존재하는 언어의 숫자이며 더욱 정교한 지표인 HPI(Historical Popularity Index)는 인물의 시대를 반영하여 시간의 장벽을 해소하고자 하며, 일부 언어로만 번역되어 페이지를 읽은 것이 많은 것을 보완하며, 영어 위키피디아에 편향되지 않게 하여 L지표를 보완한다. 2가지 데이터 자료와 2가지 지표를 활용하여 총 11340명의 인물들을 선정하였고, 이들을 중복되지 않게 하여 총 88개의 카테고리를 정하여 크게는 Art, Business &amp; Law, Exploration, Humanities, Institutions, Public Figure, Science &amp; Technology, Sports로 나뉘어 그 안에 다시 세세한 직업군으로 나뉘어 분포시켰다. 각주[편집] ↑ NY Times 관련 기사 ↑ 판테온 프로젝트 홈페이지 ↑ 에디터 편집 기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판테온 프로젝트 홈페이지 ↑ 판테온 프로젝트 홈페이지 ↑ 판테온 프로젝트 관련 기사 ↑ 프로젝트 홈페이지 ↑ 판테온 프로젝트 홈페이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판테온_프로젝트&amp;oldid=24207039" 분류: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2017년 2월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모든 문서전체의 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6:4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판테온 프로젝트 요약** 1. **프로젝트 개요** - 판테온 프로젝트는 MIT 미디어 랩의 Macro Connection 팀이 2014년 1월부터 시작한 데이터 정리 프로젝트로, 인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들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시각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2. **목적** - 프로젝트의 주된 목적은 역사적, 문화적 생산물 간의 연결을 통해 인류의 유산을 기념하고, 이를 데이터로 정리하여 시각화하는 것이다. 3. **데이터 원천 및 선정 기준** - 데이터는 25개국 언어 이상의 위키피디아와 Human Accomplishment에서 수집되며, 총 11,340명의 인물이 선정되어 88개의 카테고리로 분류된다. 4. **데이터 시각화 방식** - 판테온 프로젝트는 4가지 형태의 데이터 시각화 방법을 제공한다: - **Treemap**: 국가 및 영역별 인물의 다양성을 시각적으로 표현. - **Matrix**: 국가와 영역 간의 인물 수를 비교하는 표 형식. - **Scatterplot**: 두 국가 또는 두 영역 간의 인물 수를 2차원 그래프로 비교. - **Map**: 전 세계적으로 인물의 분포를 지도 형태로 나타냄. 5. **Ranking** - 프로젝트는 국가별, 인물별, 영역별로 순위를 제공하며, 각 순위는 다양한 지표를 기반으로 정렬된다. 6. **결론** - 판테온 프로젝트는 인류의 역사적 인물과 그들의 업적을 데이터로 정리하고 시각화하여,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텍스트 내용을 시간순 또는 인과관계 순으로 재배열해서 요약해줘. 사건의 흐름이나 논리 전개 순서를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줘.
폴란드_후사르
https://ko.wikipedia.org/wiki/폴란드_후사르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폴란드 후사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폴란드 후사르</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div><div><a><img></a> <div><div><a></a></div>16세기 초중반의 폴란드 후사르</div></div></div> <p><b>폴란드 후사르</b>(Polish Hussars; 폴란드 어: <i>Husaria</i>)는 16세기에서 18세기 동안 <a>폴란드 군</a>(후에는 <a>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a>군)의 주력부대였다. 흔히 날개달린 후사르(Winged Hussars)라 불린다. <a>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a>왕국은 <a>헝가리</a>로부터 <a>후사르</a> 부대를 도입하였다. 처음 이 부대가 도입되었을 때는 <a>경기병</a>(light cavalry)의 형태를 띠었으나 후에 가서 <a>중기병</a>(heavy cavalry)으로 바뀌었다. 18세기까지 폴란드 후사르 기병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예부대였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역사</span></a></li> <li><a><span>2</span> <span>전술</span></a></li> <li><a><span>3</span> <span>갤러리</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5</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역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후사르((IPA: /həˈzɑːr, həˈsɑːr/, or /hʊ-/)라는 단어는 헝가리어의 <i>후사르</i>(huszár)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후사르라는 단어는 원래 <a>세르비아</a>어로 도둑, 약탈자를 뜻하는 <i>구사르</i>(gusar; <a>킬릴</a>문자로: гуса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처음에 후사르 기병대는 소규모로 운영되었으나, <a>헝가리의 마차시 1세 코르비누스</a>(Matthias I Corvinus of Hungary) 시기에 정예화 되고 강력한 부대로 재편되었다고 한다. 마차시 1세의 지휘 하에 후사르 부대는 1485년 <a>오스만 제국</a>에 대항하는 전역에 참전하였고, 자신들이 보헤미아나 폴란드의 병사들 뿐만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의 <a>시파히</a>(Spahis) 기병들과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1490년 마차시 1세가 사망한 후, 후사르 기병대는 중부와 서부 유럽으로 퍼져나가 자신들이 머문 곳에서 창설된 <a>경기병</a> 부대의 중핵이 되었다. 예를 들어 <a>오스트리아</a>는 헝가리 후사르 기병대를 <a>용병</a>으로 사용하여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였고, <a>프리드리히 대왕</a>(Frederick the Great)은 <a>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a>(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기간 동안 후사르 부대를 광범위하게 운용하였다. 경기병 후사르 부대가 보병대와 포병대를 교란시키는 전술을 위해 전 유럽의 군대에 차용된 반면, 중무장 후사르 부대는 <a>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a>왕국(Polish-Lithuanian Commonwealth)의 후사르들이 가장 유명하다. 후사르의 유래를 살펴보면 14세기 말에서 15세기 동안 <a>세르비아 군인</a>들이 <a>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를 공략</a>한 이래 남부 헝가리로 흘러들어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후사르 부대의 개념은 14세기 말경 <a>세르비아</a>에서 시작되었다. 16세기 경 색칠한 날개나, 날개달린 갈고리가 기병들의 방어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날개는 원래 말 안장에 붙어 있었으나 후에는 갑옷의 등 부분에 붙여진다. 1645년 슈초드로프스키(Szczodrowski)는 타조의 날개를 사용했다고 말하였다. 1500년 폴란드 국고 사용을 기록한 책을 보면 후사르 부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 이들은 외국 용병이었고 <i>라초비에</i>(Racowie) 혹은 '라스치아'(Rascia)라고 불렸는데, 이는 '세르비아의'(of Serbia)라는 뜻이다. 이들은 세르비아의 <a>라스</a>(Ras) 지방에서 건너왔기 때문이다."<sup><a>&#91;1&#93;</a></sup> </p><p><a>폴란드 왕국</a>의 최초의 후사르 기병대는 1503년 헝가리 <a>용병</a> 세 부대를 고용한 폴란드 의회인 <a>세임</a>(Sejm)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시민들도 이 부대의 지원병으로 참여하였다. 이렇게 새로 구성된 후사르 부대는 이전에 고용된 용병들보다는 더 두꺼운 갑옷을 입고 움직이는 데 더 자유로웠다. 이들 부대는 <a>오르샤</a>(Orsza 1514)와 <a>오베르틴</a>(Obertyn 1531)에서 <a>폴란드 왕국</a>과 <a>리투아니아 대공국</a>이 승리를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a>스테판 바토리</a>(Stefan Batory) 국왕 시기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후사르 부대는 중세풍의 <a>랜서</a>(lancer, 장창기병)를 교체하였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a>기병</a>대의 주력으로 편성되었다. </p><p>1500년대 <a>헝가리</a>의 후사르 부대가 중무장 기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헝가리 기병대는 나무 방패를 버리고 플레이트 메일과 같은 중장갑을 채용하였다. 트란실바니아와 헝가리의 대공 <a>스테판 바토리</a>는 1576년 <a>폴란드의 왕</a>으로 <a>선출</a>되었고 장창을 주력 무기로 삼은 헝가리 부대를 따라 중무장 편제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후사르 부대를 재편하였다. 1590년 대다수의 폴란드 헝가리 후사르 부대는 헝가리의 중무장 형태를 따라 변모하였으며, 이러한 폴란드의 '중무장'(heavy) 후사르 부대는 헝가리에서 <i>후사리아</i>(husaria)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p><p>1577년 <a>루비셰프 전투</a>(Battle of Lubiszew)에서 후사르 부대의 '<a>황금 시대</a>'(Golden Age)가 시작되었다. 1683년 <a>빈 전투</a>(Battle of Vienna)에 이르기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후사르 부대는 수많은 적들에 대항하여 무수한 군사적 행동을 벌였고, 거의 패한 적이 없었다. 1577년 <a>루비셰프 전투</a>(Battle of Lubiszew), <a>비치나</a>(Byczyna 1588), <a>코켄하우젠</a>(Kokenhausen 1601), <a>키르홀름</a>(Kircholm 1605), <a>크우신</a>(Kłuszyn 1610), <a>트슈치아나</a>(Trzciana 1629), <a>호침</a>(Chocim 1673), <a>르부프</a>(Lwów 1675)와 같은 일련의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후사르 부대는 무수히 많은 적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a>폴란드-모스크바 전쟁</a>(Polish-Muscovite War) 동안에 벌어진 <a>크우신 전투</a>(Battle of Kluszyn)에서 <a>러시아</a>군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군에 비해 5배나 많았으나 후사르의 활약에 의해 대패하고 말았다. </p><p>후사르들 역시 때때로 패하기도 했으며 특히 <a>흐미엘니츠키 반란</a>(Chmielnicki Uprising)시 1648년 <a>주테 보디 전투</a>(Battle of Żółte Wody)가 후사르가 겪은 가장 큰 패배 중 하나이다. </p><p>후사르 부대의 역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찰대로 변모해 갔으며 점점 정교해져 갔던 후사르 부대의 갑옷과 무구들은 폐기되었다. </p> <h2><span></span><span>전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폴란드-리투아니아 후사르 부대의 주요 전술은 <a>돌격</a>(charge)이다. 이들은 적진에 돌격을 감행하여 적을 돌파하였으며, 이것이 그들의 승리의 중요한 요소였다. 이들은 또 적진을 붕괴시키기 위해 여러번의 돌격을 감행하였다.(이들은 자신들의 장창을 보급받기 위해 보급 마차를 운용하였다.) 돌격 공격과 중무장 갑옷, 전마들은 2세기 동안 이들의 승리를 확고히해 주었다. 후사르 부대는 기다란 홍백의 깃발이 달린 장창과 <a>샤블라</a>(szabla;sabre)라는 기병용 군도, 그리고 1개에서 2개의 권총, 때때로 폴란드 인에게 <i>반돌레트</i>(bandolet)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기병총이나 화승총, 등 뒤에는 호랑이 가죽이나 표범가죽(중동이나 카프카스에서 구했을 것이다.)을 사용하기도 했다. </p><p>폴란드 후사르 기병대는 그들의 등 부분이나 말의 안장에 달린 거대한 '날개'(wings)로 유명하다. 이 날개가 왜 달렸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이 몇 가지 있다. 어떤 이들에 따르면 이 날개는 <a>타타르</a> 인의 올가미를 사용한 공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차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이론에 따르면 돌격 시 이 날개에 달려있는 깃털들이 진동함에 따라 기묘한 소리를 내고 이를 통해 적을 두렵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기도 한다. 1970년대부터 리인엑터들과 영화 제작자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2001에 폴란드 역사가들이 수행한 실험을 해 보았을 때 이러한 이론들은 모두 현실적이지 않다고 밝혀졌다. 아마 이 날개들은 퍼레이드를 할 때 붙여놓고, 전투 중에는 떼어냈을 가능성이 높으나 등 뒤에 달린 호랑이 가죽이나 표범가죽, 랜스에 달린 홍백의 깃발이 적의 눈에 혼란을 주기 위해 달려있는 것으로 추정되므로 날개 역시 마찬가지 효과를 위해 달았을 가능성도 있어 여전히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p> <h2><span></span><span>갤러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 <li><div> <div><div><a><img></a></div></div> <div> <p>폴란드 군사박물관에 소장된 후사르 갑옷. </p> </div> </div></li> <li><div> <div><div><a><img></a></div></div> <div> <p>유제프 브란트(Józef Brandt)작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후사르. </p> </div> </div></li> <li><div> <div><div><a><img></a></div></div> <div> <p>스테파노 델라벨라의 윙드 후사르. </p> </div> </div></li> <li><div> <div><div><a><img></a></div></div> <div> <p>17세기 후사르의 갑옷. </p> </div> </div></li> </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Researched and Written by Margaret Odrowaz-Sypniewska, B.F.A. SOURCES: Brzezinski, Richard. Polish Armies 1569-1600. (volume 1) #184 in the Osprey Men-at-Arms Series. London: Osprey Publishing, 6, 16. Brzezinski, Richard. Polish Winged Hussar 1576-1775. Warrior Series. Oxford: Osprey Publishing Ltd., 2006. Hollins, David. Hungarian Hussars 1756-1815. Osprey Warrior Series. Oxford: Osprey Publishing, Ltd., 2003. Klucina, Petr. (Illustrations by Pavol Pevny) Armor: From Ancient To Modern Times. Reprinted by New York: Barnes &amp; Noble Books, 1992, (by permission of Slovart Publishing Ltd, Batislava). Ostrowski, Jan K., et al. Art in Poland: Land of the Winged Horsemen 1572-1764. Baltimore: Art Services International, 1999. Wasilkowska, Anna. The Winged Horsemen. Warsaw: Wydawnictwo Interpress, 1998. Zamoyski, Adam. The Polish Way. New York: Hippocrene Books, 1996. Also see <a>http://www.warfareeast.co.uk/main/Hungarian_Composition.htm#HussarsGusars</a></span> </li> </ol></div></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Reenactment</a> a Polish reenactment information site</li> <li><a>Husaria.us</a> a Los Angeles based Polish Hussar reenactment group and reference library</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폴란드_후사르&amp;oldid=24054088</a>"</div> <div><div><a>분류</a>: <ul><li><a>폴란드 기병</a></li><li><a>기병</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Беларуская</a></li><li><a>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a></li><li><a>Čeština</a></li><li><a>Deutsch</a></li><li><a>English</a></li><li><a>Español</a></li><li><a>Français</a></li><li><a>עברית</a></li><li><a>Italiano</a></li><li><a>ქართული</a></li><li><a>Polski</a></li><li><a>Русский</a></li><li><a>Српски / srpski</a></li><li><a>Svenska</a></li><li><a>Українська</a></li><li><a>Bân-lâm-gú</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4월 18일 (목) 06:5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폴란드 왕국의 후사르 기병대를 1503년 설립한 폴란드 의회의 이름은 무엇인가?
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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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68
[ "폴란드 왕국의 후사르 기병대를 1503년 설립한 폴란드 의회의 이름은 무엇인가?",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후사르 부대가 장창기병을 교체한 시기는 어느 국왕때인가?", "후사르 기병대는 언제 창설되었는가?", "후사르 기병대는 누구에 의해 창설되었는가?", "후사르 부대가 황금 시대라 불리운건 1577년 어느 전투에서 부터인가?", "폴란드-모스크바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5배나 더 많은 병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패하였는데 이 전투의 명칭은 무엇인가?", "빈 전투는 몇 년에 일어났는가?", "루비셰프 전투는 몇 년에 일어났는가?", "폴란드-리투아니아 후사르 부대의 승리의 주된 요인이 된 전술은 무엇인가?", "후사르 부대가 사용하는 기병총 또는 화승총을 일컫는 말로 폴란드 사람들은 이것을 무엇이라 칭하였나?", "후사르 부대가 주력으로 가지고 있는 전술은 무엇인가?", "후사르 부대의 기병용 군 이름은?", "폴란드 후사르 기병대는 자신들의 등이나 말 안장에 무엇을 달기로 유명했나?", "폴란드 역사가들은 후사르 기병대의 등에 달린 가죽들과 깃발이 적의 무엇에 혼란을 주기위해 단 것이라고 추측했나?", "폴란드 후사르 기병대는 어떤 것으로 유명한가?", "폴란드 후사르 기병대의 날개는 말의 어떤 부분에 달려 있나?" ]
<!DOCTYPE html> 폴란드 후사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폴란드 후사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16세기 초중반의 폴란드 후사르 폴란드 후사르(Polish Hussars; 폴란드 어: Husaria)는 16세기에서 18세기 동안 폴란드 군(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의 주력부대였다. 흔히 날개달린 후사르(Winged Hussars)라 불린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은 헝가리로부터 후사르 부대를 도입하였다. 처음 이 부대가 도입되었을 때는 경기병(light cavalry)의 형태를 띠었으나 후에 가서 중기병(heavy cavalry)으로 바뀌었다. 18세기까지 폴란드 후사르 기병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에서 가장 유명한 정예부대였다. 목차 1 역사 2 전술 3 갤러리 4 각주 5 외부 링크 역사[편집] 후사르((IPA: /həˈzɑːr, həˈsɑːr/, or /hʊ-/)라는 단어는 헝가리어의 후사르(huszár)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후사르라는 단어는 원래 세르비아어로 도둑, 약탈자를 뜻하는 구사르(gusar; 킬릴문자로: гусар)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처음에 후사르 기병대는 소규모로 운영되었으나, 헝가리의 마차시 1세 코르비누스(Matthias I Corvinus of Hungary) 시기에 정예화 되고 강력한 부대로 재편되었다고 한다. 마차시 1세의 지휘 하에 후사르 부대는 1485년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전역에 참전하였고, 자신들이 보헤미아나 폴란드의 병사들 뿐만 아니라 오스만 투르크의 시파히(Spahis) 기병들과도 싸워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1490년 마차시 1세가 사망한 후, 후사르 기병대는 중부와 서부 유럽으로 퍼져나가 자신들이 머문 곳에서 창설된 경기병 부대의 중핵이 되었다.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는 헝가리 후사르 기병대를 용병으로 사용하여 오스만 제국에 저항하였고, 프리드리히 대왕(Frederick the Great)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기간 동안 후사르 부대를 광범위하게 운용하였다. 경기병 후사르 부대가 보병대와 포병대를 교란시키는 전술을 위해 전 유럽의 군대에 차용된 반면, 중무장 후사르 부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Polish-Lithuanian Commonwealth)의 후사르들이 가장 유명하다. 후사르의 유래를 살펴보면 14세기 말에서 15세기 동안 세르비아 군인들이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를 공략한 이래 남부 헝가리로 흘러들어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후사르 부대의 개념은 14세기 말경 세르비아에서 시작되었다. 16세기 경 색칠한 날개나, 날개달린 갈고리가 기병들의 방어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날개는 원래 말 안장에 붙어 있었으나 후에는 갑옷의 등 부분에 붙여진다. 1645년 슈초드로프스키(Szczodrowski)는 타조의 날개를 사용했다고 말하였다. 1500년 폴란드 국고 사용을 기록한 책을 보면 후사르 부대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처음 이들은 외국 용병이었고 라초비에(Racowie) 혹은 '라스치아'(Rascia)라고 불렸는데, 이는 '세르비아의'(of Serbia)라는 뜻이다. 이들은 세르비아의 라스(Ras) 지방에서 건너왔기 때문이다."[1] 폴란드 왕국의 최초의 후사르 기병대는 1503년 헝가리 용병 세 부대를 고용한 폴란드 의회인 세임(Sejm)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시민들도 이 부대의 지원병으로 참여하였다. 이렇게 새로 구성된 후사르 부대는 이전에 고용된 용병들보다는 더 두꺼운 갑옷을 입고 움직이는 데 더 자유로웠다. 이들 부대는 오르샤(Orsza 1514)와 오베르틴(Obertyn 1531)에서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승리를 거두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스테판 바토리(Stefan Batory) 국왕 시기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후사르 부대는 중세풍의 랜서(lancer, 장창기병)를 교체하였고,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기병대의 주력으로 편성되었다. 1500년대 헝가리의 후사르 부대가 중무장 기병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헝가리 기병대는 나무 방패를 버리고 플레이트 메일과 같은 중장갑을 채용하였다. 트란실바니아와 헝가리의 대공 스테판 바토리는 1576년 폴란드의 왕으로 선출되었고 장창을 주력 무기로 삼은 헝가리 부대를 따라 중무장 편제로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후사르 부대를 재편하였다. 1590년 대다수의 폴란드 헝가리 후사르 부대는 헝가리의 중무장 형태를 따라 변모하였으며, 이러한 폴란드의 '중무장'(heavy) 후사르 부대는 헝가리에서 후사리아(husaria)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577년 루비셰프 전투(Battle of Lubiszew)에서 후사르 부대의 '황금 시대'(Golden Age)가 시작되었다. 1683년 빈 전투(Battle of Vienna)에 이르기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후사르 부대는 수많은 적들에 대항하여 무수한 군사적 행동을 벌였고, 거의 패한 적이 없었다. 1577년 루비셰프 전투(Battle of Lubiszew), 비치나(Byczyna 1588), 코켄하우젠(Kokenhausen 1601), 키르홀름(Kircholm 1605), 크우신(Kłuszyn 1610), 트슈치아나(Trzciana 1629), 호침(Chocim 1673), 르부프(Lwów 1675)와 같은 일련의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후사르 부대는 무수히 많은 적군을 격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예를 들어 폴란드-모스크바 전쟁(Polish-Muscovite War) 동안에 벌어진 크우신 전투(Battle of Kluszyn)에서 러시아군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군에 비해 5배나 많았으나 후사르의 활약에 의해 대패하고 말았다. 후사르들 역시 때때로 패하기도 했으며 특히 흐미엘니츠키 반란(Chmielnicki Uprising)시 1648년 주테 보디 전투(Battle of Żółte Wody)가 후사르가 겪은 가장 큰 패배 중 하나이다. 후사르 부대의 역할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정찰대로 변모해 갔으며 점점 정교해져 갔던 후사르 부대의 갑옷과 무구들은 폐기되었다. 전술[편집] 폴란드-리투아니아 후사르 부대의 주요 전술은 돌격(charge)이다. 이들은 적진에 돌격을 감행하여 적을 돌파하였으며, 이것이 그들의 승리의 중요한 요소였다. 이들은 또 적진을 붕괴시키기 위해 여러번의 돌격을 감행하였다.(이들은 자신들의 장창을 보급받기 위해 보급 마차를 운용하였다.) 돌격 공격과 중무장 갑옷, 전마들은 2세기 동안 이들의 승리를 확고히해 주었다. 후사르 부대는 기다란 홍백의 깃발이 달린 장창과 샤블라(szabla;sabre)라는 기병용 군도, 그리고 1개에서 2개의 권총, 때때로 폴란드 인에게 반돌레트(bandolet)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기병총이나 화승총, 등 뒤에는 호랑이 가죽이나 표범가죽(중동이나 카프카스에서 구했을 것이다.)을 사용하기도 했다. 폴란드 후사르 기병대는 그들의 등 부분이나 말의 안장에 달린 거대한 '날개'(wings)로 유명하다. 이 날개가 왜 달렸는가를 설명하는 이론이 몇 가지 있다. 어떤 이들에 따르면 이 날개는 타타르 인의 올가미를 사용한 공격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차용되었다고 한다. 다른 이론에 따르면 돌격 시 이 날개에 달려있는 깃털들이 진동함에 따라 기묘한 소리를 내고 이를 통해 적을 두렵게 하기 위해서라고 하기도 한다. 1970년대부터 리인엑터들과 영화 제작자들, 그리고 가장 최근에는 2001에 폴란드 역사가들이 수행한 실험을 해 보았을 때 이러한 이론들은 모두 현실적이지 않다고 밝혀졌다. 아마 이 날개들은 퍼레이드를 할 때 붙여놓고, 전투 중에는 떼어냈을 가능성이 높으나 등 뒤에 달린 호랑이 가죽이나 표범가죽, 랜스에 달린 홍백의 깃발이 적의 눈에 혼란을 주기 위해 달려있는 것으로 추정되므로 날개 역시 마찬가지 효과를 위해 달았을 가능성도 있어 여전히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갤러리[편집] 폴란드 군사박물관에 소장된 후사르 갑옷. 유제프 브란트(Józef Brandt)작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후사르. 스테파노 델라벨라의 윙드 후사르. 17세기 후사르의 갑옷. 각주[편집] ↑ Researched and Written by Margaret Odrowaz-Sypniewska, B.F.A. SOURCES: Brzezinski, Richard. Polish Armies 1569-1600. (volume 1) #184 in the Osprey Men-at-Arms Series. London: Osprey Publishing, 6, 16. Brzezinski, Richard. Polish Winged Hussar 1576-1775. Warrior Series. Oxford: Osprey Publishing Ltd., 2006. Hollins, David. Hungarian Hussars 1756-1815. Osprey Warrior Series. Oxford: Osprey Publishing, Ltd., 2003. Klucina, Petr. (Illustrations by Pavol Pevny) Armor: From Ancient To Modern Times. Reprinted by New York: Barnes &amp; Noble Books, 1992, (by permission of Slovart Publishing Ltd, Batislava). Ostrowski, Jan K., et al. Art in Poland: Land of the Winged Horsemen 1572-1764. Baltimore: Art Services International, 1999. Wasilkowska, Anna. The Winged Horsemen. Warsaw: Wydawnictwo Interpress, 1998. Zamoyski, Adam. The Polish Way. New York: Hippocrene Books, 1996. Also see http://www.warfareeast.co.uk/main/Hungarian_Composition.htm#HussarsGusars 외부 링크[편집] Reenactment a Polish reenactment information site Husaria.us a Los Angeles based Polish Hussar reenactment group and reference library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폴란드_후사르&amp;oldid=24054088" 분류: 폴란드 기병기병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БеларускаяБеларуская (тарашкевіца)‎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עבריתItalianoქართულიPolskiРусскийСрпски / srpskiSvenskaУкраїнськаBân-lâm-gú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8일 (목) 06:5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제목: "폴란드 후사르: 전투의 전설과 날개 달린 기병의 역사" #### 요약 본문: 폴란드 후사르(Polish Hussars)는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군의 주력부대였으며, '날개 달린 후사르'라는 별명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이 부대는 헝가리에서 도입된 후 경기병에서 중기병으로 발전하였고, 전투에서의 뛰어난 전술과 강력한 전투력으로 유명했습니다. 후사르의 기병들은 돌격 전술을 통해 적진을 무너뜨리며, 그들의 독특한 갑옷과 날개 장식은 전투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특히, 1577년 루비셰프 전투를 기점으로 후사르의 '황금 시대'가 시작되었고, 빈 전투(1683)까지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흐미엘니츠키 반란과 같은 전투에서는 패배하기도 했습니다. #### 결론 요약: 폴란드 후사르는 그들의 독특한 전술과 상징적인 날개 덕분에 역사 속에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군사 부대를 넘어, 폴란드의 군사적 전통과 문화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후사르의 역사는 전투의 영광과 패배를 모두 담고 있으며, 그들의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주제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을 기반으로 블로그 요약 포스트를 쓴다고 가정하고,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제목, 요약 본문, 결론 요약까지 작성해줘.
히타타레
https://ko.wikipedia.org/wiki/히타타레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히타타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히타타레</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히타타레</b>(<b>直垂</b>, ひたたれ)는, 일본의 전통 예복의 하나로, 주로 일본의 <a>무가</a>(武家)사회에서 착용했던 남성용 의복이다. </p><p>히타타레와 비슷한 시기에 「다이몬 히타타레」(大紋直垂)・「스오우 히타타레」(素襖直垂)와, 갑옷 밑에 받쳐 입는 「요로이 히타타레」(鎧直垂)・「가타기누」(肩衣) 등이 생겨났다. </p> <ul><li>「히타타레」라 불리는 것은 「의복」과 「침구」 두 종류가 있다.</li> <li>「침구」로써의 히타타레는</li></ul> <dl><dd><a>헤이안 시대</a>(平安時代) 후기 「히타타레후스마」(直垂衾) ・ 「슈쿠쵸쿠모노」(宿直物) 등으로 불렸던 침구가 있다. 구마노 하야타마 대사(熊野速玉大社)에 소장된 신보(神宝)로써 <a>무로마치 시대</a>(室町時代)에 봉납된 「후스마」(이불)가 존재한다. 현대의 가이마키(掻巻) 이불 같은 것이었다고 여겨진다.</dd></dl>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발상</span></a></li> <li><a><span>2</span> <span>형태</span></a></li> <li><a><span>3</span> <span>역사</span></a> <ul> <li><a><span>3.1</span> <span>헤이안 시대 이전</span></a></li> <li><a><span>3.2</span> <span>헤이안 중기에서 가마쿠라 후기까지</span></a></li> <li><a><span>3.3</span> <span>무로마치 시대</span></a></li> <li><a><span>3.4</span> <span>에도 시대</span></a></li> </ul> </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5</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발상</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고분 시대</a>(古墳時代)부터 입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훗날에는 일반적인 일본식 의상처럼 가슴 앞으로 여미는 형식의 의복의 기원이 되었다. 즉 쇼쿠타이(束帯)나 노시(直衣)보다 오래 전에 일본에 존재하고 있었던 의복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p><p>고대 히타타레는 서민의 의복이었다. <a>하니와</a>(埴輪)나 헤이안 ・ <a>가마쿠라 시대</a>(鎌倉時代)의 에마키(絵巻)에 보이는 남성의 통수의(筒袖衣)가 히타타레의 기원이 되었고, 서민계급을 수용하면서 발전해온 일본의 무사 사회에서 공적인 의복으로써 착용하게 되었다.<sup><a>&#91;1&#93;</a></sup> </p> <h2><span></span><span>형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시대에 따라 히타타레의 형태도 변동이 심했는데, </p> <ul><li>윗옷과 아래옷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윗옷에 하카마(袴, 바지)를 껴입듯이 입었다.</li> <li>윗옷은 아게쿠비(盤領, 목깃에 둥근 부분)가 없고 옷깃이 곧은 다리쿠비(垂領) 형태. 오쿠미(衽, 여밈)을 하지 않고 조금 터놓았고, 옷깃이 교차하는 부분이 끈으로 묶여 있다.</li> <li>윗옷의 겨드랑이를 꿰매지 않고 터놓았다.</li> <li>아래옷은 현대의 양복 바지와 같은 형식이다.</li></ul> <p>라는 점은 고대로부터 변하지 않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p> <h2><span></span><span>역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헤이안 시대 이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고분 시대 일본 열도의 남성을 묘사한 하니와(토기)에는 옷깃이 곧은 윗옷에 따로 양복 바지 같은 아래옷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히타타레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a>아스카 시대</a>(飛鳥時代) 이후 일본에 당풍의 율령제가 도입되고 의복 또한 <a>당</a>(唐)에서 전래된 것을 정통으로써 중시하게 되면서, 조복(朝服)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 뒤 히타타레는 일반 서민의 의복으로써 상류층의 조복이나 <a>가리기누</a>(狩衣) 등 대륙에서 건너온 의복의 영향을 받으며 변화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p> <h3><span></span><span>헤이안 중기에서 가마쿠라 후기까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인세이</a>(院政) 시기를 즈음해 무사가 중앙의 정치에 대두하게 되었고, 이들 무사의 평복이었던 히타타레도 무사의 지위 상승과 함께 정장으로써 인식되기 시작했다. 고분 시대의 남성 의복이나 대륙의 영향을 받은 쇼쿠타이, 노시 등은 윗옷을 하카마 밖으로 내서 입는 것이 통례였지만, 히타타레는 활동하기 쉽게 윗옷을 하카마 안으로 집어넣어서 입게 되었다. 정장의 지위를 얻으면서 히타타레는 그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좁은 소매가 차츰 넓어지고 커지기 시작했고, 하카마도 복숭아뼈까지 올 정도로 길어졌으며, 넓은 소매가 전투에 방해가 될 지경이 되자 소매를 좁게 묶는 끈이 생겨났고, 갑주 아래 받쳐 입는 요로이 히타타레(鎧直垂)로써 사용되기에 이른다. <a>활</a>을 당기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활을 잡는 왼쪽 어깨 부분을 아예 드러내고 활을 쏘거나 한쪽 어깨를 고정시킨 채 갑옷을 입는 차림이 정착했다. 전쟁에서 적의 수급을 죽인 적의 시신의 오른쪽 히타타레 소매를 잘라 거기에 수급을 싸서 들고 가는 일도 있었다. </p><p>한편 쇼군(将軍) 등 고위 무사들은 히타타레가 아니라 스이칸(水干)을 정장으로 착용했다. 중급 이하의 귀족들도 가마쿠라 시대 후기가 되면 히타타레를 평복으로써 착용하는 경우가 생겨났는데, 형식화된 히타타레와 달리 기존의 간소한 것은 소데호소(袖細) ・ 요노하카마(四幅袴)라 불리며 서민이나 무가 봉공인(武家奉公人)이 착용하게 되었지만, 서민도 무사들과 같이 소매가 넓은 히타타레를 입는 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p> <h3><span></span><span>무로마치 시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남북조 시대의 동란으로 귀족 사회의 지위는 저하되었고, 히타타레는 <a>구게</a>(公家) 귀족의 평복으로써, 쇼쿠타이 ・ 노시 ・ 가리기누 등은 의식 등의 필요에 따라 착용되었다. 원래 일본에서 입궐할 때는 쇼쿠타이 ・ 이칸(衣冠) ・ 노시(直衣)만을 입도록 제한되었지만(노시는 특별히 천황의 칙허를 얻은 자에 한해 착용이 가능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히타타레를 「시타스카타」(下姿)라 부르며 이를 입은 채 입궐하기도 했다. 더욱이 <a>오닌의 난</a>으로 무로마치도노(室町殿)에 천황이 일시 파천하면서 이러한 습관이 확산되었고, 셋케(摂家) 등을 제외하고는 시타스카타 차림으로 천황의 어전에 승전(御殿)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에도 시대에 들어 복고적 풍조로 구게 사회에서는 가리기누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고, 시타스카타 차림으로 입궐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p> <h3><span></span><span>에도 시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히타타레나 다이몬, 스오는 고위 무가에서만 착용하는 의복이 되었다. 히타타레를 입는 것이 허락된 것은 4위 이상의 무사들 뿐이었고, 이들 모두가 막객(幕閣)을 배출한 유력 <a>후다이 다이묘</a>(譜代大名)거나 <a>구니모치 다이묘</a>(国持大名), <a>고산케</a>(御三家) 그리고 막부의 쇼군에 해당하는 자들이었다. 또한 옷의 색깔도 포도색(葡萄色)는 쇼군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비색(緋色)은 다이나곤(大納言) 이상만이, 담황색과 연두색(萌黄色)은 아예 사용을 금지시켜 버렸다. 사용할 수 있는 시기도 관례 때나 쇼군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 뿐으로 그 사용이 몹시 제한되었다. 하카마의 길이도 몹시 길어져 땅에 질질 끌릴 정도로 활동성이 떨어지고, 히타타레에 갖춰서 차는 칼도 짧아졌다.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大百科事典(12)」 1985年 平凡社</span> </li> </ol></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風俗博物館(일본어)</a></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히타타레&amp;oldid=19650788</a>"</div> <div><div><a>분류</a>: <ul><li><a>일본의 의상</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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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남북조 시대에 입궐할 때 특별히 천황의 칙허를 얻은 자에 한해서만 착용이 가능한 의복은 무엇인가?
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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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남북조 시대에 입궐할 때 특별히 천황의 칙허를 얻은 자에 한해서만 착용이 가능한 의복은 무엇인가?", "에도 시대에 들어 구게 사회에서는 어떤 차림이 유행하기 시작하였는가?", "4위 이상의 무사들에게만 허락된 의복은 무엇인가?", "쇼군만이 사용할 수 있었던 색상은 무엇인가?" ]
<!DOCTYPE html> 히타타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히타타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히타타레(直垂, ひたたれ)는, 일본의 전통 예복의 하나로, 주로 일본의 무가(武家)사회에서 착용했던 남성용 의복이다. 히타타레와 비슷한 시기에 「다이몬 히타타레」(大紋直垂)・「스오우 히타타레」(素襖直垂)와, 갑옷 밑에 받쳐 입는 「요로이 히타타레」(鎧直垂)・「가타기누」(肩衣) 등이 생겨났다. 「히타타레」라 불리는 것은 「의복」과 「침구」 두 종류가 있다. 「침구」로써의 히타타레는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후기 「히타타레후스마」(直垂衾) ・ 「슈쿠쵸쿠모노」(宿直物) 등으로 불렸던 침구가 있다. 구마노 하야타마 대사(熊野速玉大社)에 소장된 신보(神宝)로써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봉납된 「후스마」(이불)가 존재한다. 현대의 가이마키(掻巻) 이불 같은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목차 1 발상 2 형태 3 역사 3.1 헤이안 시대 이전 3.2 헤이안 중기에서 가마쿠라 후기까지 3.3 무로마치 시대 3.4 에도 시대 4 각주 5 외부 링크 발상[편집] 고분 시대(古墳時代)부터 입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훗날에는 일반적인 일본식 의상처럼 가슴 앞으로 여미는 형식의 의복의 기원이 되었다. 즉 쇼쿠타이(束帯)나 노시(直衣)보다 오래 전에 일본에 존재하고 있었던 의복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고대 히타타레는 서민의 의복이었다. 하니와(埴輪)나 헤이안 ・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의 에마키(絵巻)에 보이는 남성의 통수의(筒袖衣)가 히타타레의 기원이 되었고, 서민계급을 수용하면서 발전해온 일본의 무사 사회에서 공적인 의복으로써 착용하게 되었다.[1] 형태[편집] 시대에 따라 히타타레의 형태도 변동이 심했는데, 윗옷과 아래옷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고, 윗옷에 하카마(袴, 바지)를 껴입듯이 입었다. 윗옷은 아게쿠비(盤領, 목깃에 둥근 부분)가 없고 옷깃이 곧은 다리쿠비(垂領) 형태. 오쿠미(衽, 여밈)을 하지 않고 조금 터놓았고, 옷깃이 교차하는 부분이 끈으로 묶여 있다. 윗옷의 겨드랑이를 꿰매지 않고 터놓았다. 아래옷은 현대의 양복 바지와 같은 형식이다. 라는 점은 고대로부터 변하지 않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편집] 헤이안 시대 이전[편집] 고분 시대 일본 열도의 남성을 묘사한 하니와(토기)에는 옷깃이 곧은 윗옷에 따로 양복 바지 같은 아래옷을 묘사하고 있다. 이것이 히타타레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아스카 시대(飛鳥時代) 이후 일본에 당풍의 율령제가 도입되고 의복 또한 당(唐)에서 전래된 것을 정통으로써 중시하게 되면서, 조복(朝服)의 위치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 뒤 히타타레는 일반 서민의 의복으로써 상류층의 조복이나 가리기누(狩衣) 등 대륙에서 건너온 의복의 영향을 받으며 변화해 나간 것으로 보인다. 헤이안 중기에서 가마쿠라 후기까지[편집] 인세이(院政) 시기를 즈음해 무사가 중앙의 정치에 대두하게 되었고, 이들 무사의 평복이었던 히타타레도 무사의 지위 상승과 함께 정장으로써 인식되기 시작했다. 고분 시대의 남성 의복이나 대륙의 영향을 받은 쇼쿠타이, 노시 등은 윗옷을 하카마 밖으로 내서 입는 것이 통례였지만, 히타타레는 활동하기 쉽게 윗옷을 하카마 안으로 집어넣어서 입게 되었다. 정장의 지위를 얻으면서 히타타레는 그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좁은 소매가 차츰 넓어지고 커지기 시작했고, 하카마도 복숭아뼈까지 올 정도로 길어졌으며, 넓은 소매가 전투에 방해가 될 지경이 되자 소매를 좁게 묶는 끈이 생겨났고, 갑주 아래 받쳐 입는 요로이 히타타레(鎧直垂)로써 사용되기에 이른다. 활을 당기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활을 잡는 왼쪽 어깨 부분을 아예 드러내고 활을 쏘거나 한쪽 어깨를 고정시킨 채 갑옷을 입는 차림이 정착했다. 전쟁에서 적의 수급을 죽인 적의 시신의 오른쪽 히타타레 소매를 잘라 거기에 수급을 싸서 들고 가는 일도 있었다. 한편 쇼군(将軍) 등 고위 무사들은 히타타레가 아니라 스이칸(水干)을 정장으로 착용했다. 중급 이하의 귀족들도 가마쿠라 시대 후기가 되면 히타타레를 평복으로써 착용하는 경우가 생겨났는데, 형식화된 히타타레와 달리 기존의 간소한 것은 소데호소(袖細) ・ 요노하카마(四幅袴)라 불리며 서민이나 무가 봉공인(武家奉公人)이 착용하게 되었지만, 서민도 무사들과 같이 소매가 넓은 히타타레를 입는 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무로마치 시대[편집] 남북조 시대의 동란으로 귀족 사회의 지위는 저하되었고, 히타타레는 구게(公家) 귀족의 평복으로써, 쇼쿠타이 ・ 노시 ・ 가리기누 등은 의식 등의 필요에 따라 착용되었다. 원래 일본에서 입궐할 때는 쇼쿠타이 ・ 이칸(衣冠) ・ 노시(直衣)만을 입도록 제한되었지만(노시는 특별히 천황의 칙허를 얻은 자에 한해 착용이 가능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히타타레를 「시타스카타」(下姿)라 부르며 이를 입은 채 입궐하기도 했다. 더욱이 오닌의 난으로 무로마치도노(室町殿)에 천황이 일시 파천하면서 이러한 습관이 확산되었고, 셋케(摂家) 등을 제외하고는 시타스카타 차림으로 천황의 어전에 승전(御殿)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에도 시대에 들어 복고적 풍조로 구게 사회에서는 가리기누가 다시 유행하기 시작했고, 시타스카타 차림으로 입궐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에도 시대[편집] 히타타레나 다이몬, 스오는 고위 무가에서만 착용하는 의복이 되었다. 히타타레를 입는 것이 허락된 것은 4위 이상의 무사들 뿐이었고, 이들 모두가 막객(幕閣)을 배출한 유력 후다이 다이묘(譜代大名)거나 구니모치 다이묘(国持大名), 고산케(御三家) 그리고 막부의 쇼군에 해당하는 자들이었다. 또한 옷의 색깔도 포도색(葡萄色)는 쇼군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했고, 비색(緋色)은 다이나곤(大納言) 이상만이, 담황색과 연두색(萌黄色)은 아예 사용을 금지시켜 버렸다. 사용할 수 있는 시기도 관례 때나 쇼군에게 새해 인사를 드릴 때 뿐으로 그 사용이 몹시 제한되었다. 하카마의 길이도 몹시 길어져 땅에 질질 끌릴 정도로 활동성이 떨어지고, 히타타레에 갖춰서 차는 칼도 짧아졌다. 각주[편집] ↑ 「大百科事典(12)」 1985年 平凡社 외부 링크[편집] 風俗博物館(일본어)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히타타레&amp;oldid=19650788" 분류: 일본의 의상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Suomi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9월 22일 (금) 13:2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제목: 일본 전통 의복의 상징, 히타타레의 역사와 변천사 #### 요약 본문: 히타타레(直垂)는 일본의 전통적인 남성 예복으로, 주로 무가 사회에서 착용되었습니다. 이 의복은 고대부터 시작되어 헤이안 시대와 가마쿠라 시대를 거치며 발전하였고, 무로마치 시대와 에도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형태와 착용 방식이 변화했습니다. 히타타레는 원래 서민의 의복에서 출발했으나, 무사 계급의 지위 상승과 함께 정장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시대에 따라 윗옷과 아래옷의 형태가 달라졌으며, 전투에 적합하도록 디자인이 조정되었습니다. 에도 시대에는 고위 무사만이 착용할 수 있는 의복으로 제한되었고, 색상과 사용 시기도 엄격히 규제되었습니다. #### 결론 요약: 히타타레는 일본의 전통 의복 중 하나로, 시대에 따라 그 의미와 형태가 변화해왔습니다. 무사 사회의 상징으로 자리 잡은 히타타레는 일본 문화의 중요한 일면을 보여주며, 그 역사적 배경과 변천사는 일본의 의복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합니다.
이 글을 기반으로 블로그 요약 포스트를 쓴다고 가정하고,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제목, 요약 본문, 결론 요약까지 작성해줘.
비디오_게임_문화
https://ko.wikipedia.org/wiki/비디오_게임_문화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비디오 게임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비디오 게임 문화</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caption><a>비디오 게임</a></caption><tbody><tr><td><a><img></a></td> </tr><tr> <td> <div> <div><a>플랫폼</a></div> <div> <ul><li><a>아케이드 게임</a></li> <li><a>비디오 게임</a></li> <li><a>콘솔 게임</a></li> <li><a>휴대용 게임</a> <ul><li><a>모바일 게임</a></li></ul></li> <li><a>온라인 게임</a></li> <li><a>PC 게임</a></li></ul></div> </div></td> </tr><tr> <td> <div> <div><a>장르</a></div> <div> <ul><li><a>롤플레잉 게임</a></li> <li><a>시뮬레이션 게임</a> <ul><li><a>스포츠 게임</a></li></ul></li> <li><a>액션 게임</a> <ul><li><a>슈팅 게임</a></li></ul></li> <li><a>액션 어드벤처 게임</a></li> <li><a>어드벤처 게임</a></li> <li><a>전략 게임</a></li></ul></div> </div></td> </tr><tr> <td> <div> <div><a>게임</a></div> <div> <ul><li><a>최고로 많이 팔린 비디오 게임 시리즈 목록</a></li> <li><a>가장 많이 팔린 게임 프랜차이즈 목록</a></li> <li><a>아케이드 게임 목록</a></li> <li><a>컬트 게임 목록</a></li></ul></div> </div></td> </tr><tr> <td> <div> <div><a>개발</a></div> <div> <ul><li><a>게임 그래픽</a></li> <li><a>게임 디자인</a></li> <li><a>게임 아트</a></li> <li><a>게임 음악</a></li> <li><a>게임 인공지능</a></li> <li><a>게임 프로그래밍</a></li> <li><a>레벨 디자인</a></li> <li><a>상호 작용 디자인</a></li></ul></div> </div></td> </tr><tr> <td> </td> </tr><tr><td><span><a><span>v</span></a>&#160;<span>•</span>&#160;<a><span>d</span></a>&#160;<span>•</span>&#160;<a><span>e</span></a>&#160;<span>•</span>&#160;<a><span>h</span></a></span></td></tr> </tbody></table> <p><b>비디오 게임 문화</b>는 <a>비디오 게임</a>을 기반으로 하는 전 세계적으로 새로이 등장한 미디어 <a>문화</a>이며, 컴퓨터와 비디오 게임의 인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a>대중문화</a>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a>비디오 게임</a> 문화는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최근 인기가 급상승 중인 <a>모바일 게임</a> 뿐만 아니라 <a>사이버 문화</a>를 이용하는 유저들의 손을 거치며 발전해 왔다. 비디오 게임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소위 <a>게이머</a>라고 지칭하며, 이는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나 게임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 등 모두를 포함한다. <a>다인용 비디오 게임</a>과 <a>온라인 게임</a> 등을 통해 비디오 게임은 점점 더 사회적인 기능을 갖게 되었고, 게이머들이 즐기는 게임은 성장하는 소셜 네트워크가 되었다. 새로이 부상하는 트렌드로 알려진 <a>E-스포츠</a>가 널리 받아들여짐에 따라, 게임은 경쟁이면서도 동시에 오락이 될 수 있었다. 오늘날, 비디오 게임을 찾아볼 수 있는 매체는 <a>소셜 미디어</a>, <a>정치</a>, TV, <a>영화</a>, <a>음악</a> 과 <a>유튜브</a> 등이 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사용 인구</span></a></li> <li><a><span>2</span> <span>LAN 게임</span></a></li> <li><a><span>3</span> <span>온라인 게임</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사용 인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2016년 기준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의 평균 연령은 35세이며,<sup><a>&#91;1&#93;</a></sup> 처음으로 등장한 <a>아케이드 게임</a>, <a>비디오 게임 콘솔</a> 및 <a>가정용 컴퓨터</a> 게임을 즐기던 어린이들이 점차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어가며 현재의 유저들이 되면서 연령대가 서서히 증가하였다.<sup><a>&#91;2&#93;</a></sup> </p><p>게이머들 사이의 성별 분포는 거의 평균을 이루었으며, 2016년 연구에 따르면 59%의 유저가 남성이며 나머지 41%는 여성이다. 그러나, 그 연구에서는 또한 여성의 경우 비난을 피하기 위해 게임 상에서 성별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sup><a>&#91;3&#93;</a></sup> 2011년 기준 ESA의 보고서에 따르면 6세부터 49세까지의 미국인 중 71%의 사람들은 비디오 게임을 즐겨본 경험이 있다고 하며, 이들 중 55%는 자신의 휴대 전화 또는 모바일 장치에서 게임을 즐긴다고 한다. 전 세계 게이머들의 평균적인 연령은 20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치며, 그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연령대 역시 증가하고 있다.<sup><a>&#91;4&#93;</a></sup> </p><p>게이머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한 가지 이유로는 점점 더 많은 게임 장르가 다양한 대중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a>Wii</a> 콘솔은 <a>Wii 스포츠</a>와 <a>Wii Fit</a> 등의 게임을 통해서 유저 층을 넓혀왔다. 두 가지 게임 모두 사용자의 활동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내며 가족 간의 겨루기나 운동 등의 즐길만한 이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비디오 게임을 즐겨온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나서도 비디오 게임에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다. 현재, 어린이들을 위한 가장 큰 오락 산업이 바로 게임이기도 하다. 2008년에 실시되어 1,102명의 응답자를 <a>표본</a>으로 가지는 전화조사에서는 미국에 사는 12세에서 17세 사이의 어린이 중 97%가 비디오 게임을 즐긴다고 응답하였다.<sup><a>&#91;5&#93;</a></sup> </p> <h2><span></span><span>LAN 게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방식은 다양하며 가족 간의 모임에서나 혹은 공공 장소에서도 즐길 수 있다. 이는 바로 'LAN(Local Area Network) 파티 맺기' 기능을 통해서 가능한데,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모인 장소에서&#160;해당 기능을 사용하여 친근한 사람들 간의 사교를 목적으로 하는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LAN 파티'는 종종 공공 장소에서 열리는 대규모 이벤트에서 개최되기도 하며, 많은 이들이 참여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는 사교적 목적이 없을 수 있다. </p><p>일례로, 에버퀘스트&#160;팬 페어에서는&#160;게임 팬들에게 주말동안 함께 모여서 큰 규모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이는 수 천회동안 지속적으로 개최되고 있다.&#160; Terry Flew는 그의 저서 <i>Games: Technology, Industry, Culture</i> 에서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를 지칭하여 "유저들이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지는 않지만, 함께 친해질 수 있는 장소"라고 소개하였다.&#160;이는 McLuhan이 제시한 "<a>지구촌</a>"이라는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사람들이 공간적 제약을 초월하여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이들 끼리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160;Shapiro 또한 "기술을 통한 사교성 증진"의 가능성을 강조하였는데,&#160;이는 우정이라는 개념이 더이상 물리적 근접성 (이웃, 동료 등)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Shapiro는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를 포함한)인터넷은 개개인의 사용자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망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며, 뿐만 아니라 처음보는 사람들과 삶의 경험을 소통하고 공유하여 온라인 상의 관계를 형성하도록 도와준다"라고 하였다.&#160;따라서, 이러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하여 비슷한 생각을 지닌 이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욕구를 총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p> <h2><span></span><span>온라인 게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온라인 게임은 게임 문화의 범위와 규모가 급격하게 성장해 왔던 것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온라인 게임의 시초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 유행하였던 <a>전자 게시판</a> 시스템(BBS)과&#160;대학에서 사용된&#160;<a>메인프레임</a>&#160;시스템이었다. <a>머드</a>(MUD) 게임은 동시 접속한 유저들에게 경쟁과 협력이 가능한 컨텐츠를 제공하였지만,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보다 지역적으로 제한되는 정도였다. 인터넷을 통하여 마침내 전 세계의 게이머들은 국가에 상관없이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클라우드 게임이 등장하게 되어 높은 사양을 요구하는 게임을 저사양 시스템 뿐만 아니라 TV를 통해서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p><p>현존하는 온라인 게임 중 가장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a>퀘이크</a>는 열 여섯 명의 플레이어와 팀을 이룰 수 있으며, 총 서른 두명의 플레이어가 동시에 상호작용 할 수 있는 게임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게이머들은 <a>클랜</a>이라는 자신들만의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각각의 클랜들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클랜을 홍보하기도 하며, 클랜 내부의 체계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클랜을 상징하는 표시를 겉으로 드러내기도 한다.&#160;클랜들 끼리는 교류를 맺기도 하며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기도, 그리고 동맹의 관계를 맺는 경우도 있다. 클랜원들 간의 상호작용이 생기는 경우는 주로 공식적인 경쟁이 발생하는 경기, 혹은 클랜원들끼리 공개 <a>서버</a>에서 함께 모여 일반적인 플레이를 즐기는 경우 등이 있다&#160;. 클랜이 구성원을 모집하는 방식으로는 특정 서버에 활동하는 뛰어난 선수들을 초대하여 입단을 위한 면접을 보게 하거나 직접 입단을 권유 하기도 한다.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cite><a>&#8220;ESA report on the sales, demographics and usage data of the industry&#8221;</a> <span>(PDF)</span>. 2018년 2월 19일에 <a>원본 문서</a> <span>(PDF)</span>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18년 4월 30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Jupiter Media gamer age study&#160;– press release&#8221;</a>. 2006년 3월 11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18년 4월 30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Paaßen, Benjamin (2017). &#8220;What is a True Gamer? The Male Gamer Stereotype and the Marginalization of Women in Video Game Culture&#8221;. &#12298;Sex Roles: A Journal of Research&#12299;.</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Flew, Terry and Humphreys, Sal (2005) "Games: Technology, Industry, Culture" Oxford University Press</span> </li> <li><span><a>↑</a></span> <span><cite>Irvine, Martha (2008년 9월 16일). <a>&#8220;Survey:97 Percent of Children Play Video Games&#8221;</a>. &#12298;Huffington Post&#12299;<span>. 2013년 11월 17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ol></div></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비디오_게임_문화&amp;oldid=24507312</a>"</div> <div><div><a>분류</a>: <ul><li><a>비디오 게임 문화</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English</a></li><li><a>Suomi</a></li><li><a>Français</a></li><li><a>Русский</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7월 1일 (월) 05:3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2008년 실시된 비디오게임 관련 전화조사는 어느 나라에서 실시되었는가?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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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5
[ "2008년 실시된 비디오게임 관련 전화조사는 어느 나라에서 실시되었는가?", "2008년 미국에서 실시된 전화조사에서 어린이들의 몇 퍼센트가 비디오게임을 즐긴다고 대답하였는가?", "미국의 청소년 층이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비율은?",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를 가리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유저들끼리 친해질 수 있는 장소라고 언급한 사람은?", "McLuhan이 제시한 것으로 사람들이 공간을 초월하여 전 세계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개념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하는가?", "인터넷이 사용자들에게 사회적 관계망을 확장시키는 기회를 제공해준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인가?", "사람들이 시공간적 제약을 초월하여 서로 소통하는 것을 일컫는 말은?", "게임으로 생긴 우정은 무엇의 제약을 받지 않는가?", "총 32명이 플레이를 할 수 있는 현존 가장 획기적인 작품이라 평가받는 온라인 게임은 무엇인가?",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고 홍보하여 함께 교류할 수 있는 게임 내 집단은 무엇인가?", "퀘이크에서 동시에 플레이가 가능한 수는 몇 명인가?", "온라임 게인 퀘이크는 몇 명의 플에이어가 팀을 이룰수 있도록 하는가?", "온라인 게임 퀘이트에서 유저들이 형성한 집단을 일컫는 용어는?" ]
<!DOCTYPE html> 비디오 게임 문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비디오 게임 문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caption>비디오 게임</caption><tbody><tr><td></td> </tr><tr> <td> 플랫폼 아케이드 게임 비디오 게임 콘솔 게임 휴대용 게임 모바일 게임 온라인 게임 PC 게임 </td> </tr><tr> <td> 장르 롤플레잉 게임 시뮬레이션 게임 스포츠 게임 액션 게임 슈팅 게임 액션 어드벤처 게임 어드벤처 게임 전략 게임 </td> </tr><tr> <td> 게임 최고로 많이 팔린 비디오 게임 시리즈 목록 가장 많이 팔린 게임 프랜차이즈 목록 아케이드 게임 목록 컬트 게임 목록 </td> </tr><tr> <td> 개발 게임 그래픽 게임 디자인 게임 아트 게임 음악 게임 인공지능 게임 프로그래밍 레벨 디자인 상호 작용 디자인 </td> </tr><tr> <td> </td> </tr><tr><td>v • d • e • h</td></tr> </tbody></table> 비디오 게임 문화는 비디오 게임을 기반으로 하는 전 세계적으로 새로이 등장한 미디어 문화이며, 컴퓨터와 비디오 게임의 인기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비디오 게임 문화는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최근 인기가 급상승 중인 모바일 게임 뿐만 아니라 사이버 문화를 이용하는 유저들의 손을 거치며 발전해 왔다. 비디오 게임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소위 게이머라고 지칭하며, 이는 게임을 즐기는 사람이나 게임에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 등 모두를 포함한다. 다인용 비디오 게임과 온라인 게임 등을 통해 비디오 게임은 점점 더 사회적인 기능을 갖게 되었고, 게이머들이 즐기는 게임은 성장하는 소셜 네트워크가 되었다. 새로이 부상하는 트렌드로 알려진 E-스포츠가 널리 받아들여짐에 따라, 게임은 경쟁이면서도 동시에 오락이 될 수 있었다. 오늘날, 비디오 게임을 찾아볼 수 있는 매체는 소셜 미디어, 정치, TV, 영화, 음악 과 유튜브 등이 있다. 목차 1 사용 인구 2 LAN 게임 3 온라인 게임 4 각주 사용 인구[편집] 2016년 기준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의 평균 연령은 35세이며,[1] 처음으로 등장한 아케이드 게임, 비디오 게임 콘솔 및 가정용 컴퓨터 게임을 즐기던 어린이들이 점차 시간이 지나 나이를 먹어가며 현재의 유저들이 되면서 연령대가 서서히 증가하였다.[2] 게이머들 사이의 성별 분포는 거의 평균을 이루었으며, 2016년 연구에 따르면 59%의 유저가 남성이며 나머지 41%는 여성이다. 그러나, 그 연구에서는 또한 여성의 경우 비난을 피하기 위해 게임 상에서 성별을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밝혔다.[3] 2011년 기준 ESA의 보고서에 따르면 6세부터 49세까지의 미국인 중 71%의 사람들은 비디오 게임을 즐겨본 경험이 있다고 하며, 이들 중 55%는 자신의 휴대 전화 또는 모바일 장치에서 게임을 즐긴다고 한다. 전 세계 게이머들의 평균적인 연령은 20대 중반부터 후반에 걸치며, 그들이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연령대 역시 증가하고 있다.[4] 게이머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현상에 대한 한 가지 이유로는 점점 더 많은 게임 장르가 다양한 대중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Wii 콘솔은 Wii 스포츠와 Wii Fit 등의 게임을 통해서 유저 층을 넓혀왔다. 두 가지 게임 모두 사용자의 활동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내며 가족 간의 겨루기나 운동 등의 즐길만한 이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부터 비디오 게임을 즐겨온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나서도 비디오 게임에 흥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다. 현재, 어린이들을 위한 가장 큰 오락 산업이 바로 게임이기도 하다. 2008년에 실시되어 1,102명의 응답자를 표본으로 가지는 전화조사에서는 미국에 사는 12세에서 17세 사이의 어린이 중 97%가 비디오 게임을 즐긴다고 응답하였다.[5] LAN 게임[편집] 비디오 게임을 즐기는 방식은 다양하며 가족 간의 모임에서나 혹은 공공 장소에서도 즐길 수 있다. 이는 바로 'LAN(Local Area Network) 파티 맺기' 기능을 통해서 가능한데, 가족과 친구들이 함께 모인 장소에서 해당 기능을 사용하여 친근한 사람들 간의 사교를 목적으로 하는 오락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LAN 파티'는 종종 공공 장소에서 열리는 대규모 이벤트에서 개최되기도 하며, 많은 이들이 참여하기도 하지만 이 경우에는 사교적 목적이 없을 수 있다. 일례로, 에버퀘스트 팬 페어에서는 게임 팬들에게 주말동안 함께 모여서 큰 규모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이는 수 천회동안 지속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Terry Flew는 그의 저서 Games: Technology, Industry, Culture 에서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를 지칭하여 "유저들이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있지는 않지만, 함께 친해질 수 있는 장소"라고 소개하였다. 이는 McLuhan이 제시한 "지구촌"이라는 개념을 떠오르게 한다. 사람들이 공간적 제약을 초월하여 전 세계적으로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이들 끼리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Shapiro 또한 "기술을 통한 사교성 증진"의 가능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우정이라는 개념이 더이상 물리적 근접성 (이웃, 동료 등)에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Shapiro는 "(온라인 게임 커뮤니티를 포함한)인터넷은 개개인의 사용자들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망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며, 뿐만 아니라 처음보는 사람들과 삶의 경험을 소통하고 공유하여 온라인 상의 관계를 형성하도록 도와준다"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하여 비슷한 생각을 지닌 이들과 함께하고자 하는 욕구를 총족시킬 수 있는 것이다. 온라인 게임[편집] 온라인 게임은 게임 문화의 범위와 규모가 급격하게 성장해 왔던 것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온라인 게임의 시초는 197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 유행하였던 전자 게시판 시스템(BBS)과 대학에서 사용된 메인프레임 시스템이었다. 머드(MUD) 게임은 동시 접속한 유저들에게 경쟁과 협력이 가능한 컨텐츠를 제공하였지만, 인터넷을 이용하는 것보다 지역적으로 제한되는 정도였다. 인터넷을 통하여 마침내 전 세계의 게이머들은 국가에 상관없이 함께 게임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클라우드 게임이 등장하게 되어 높은 사양을 요구하는 게임을 저사양 시스템 뿐만 아니라 TV를 통해서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현존하는 온라인 게임 중 가장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퀘이크는 열 여섯 명의 플레이어와 팀을 이룰 수 있으며, 총 서른 두명의 플레이어가 동시에 상호작용 할 수 있는 게임이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게이머들은 클랜이라는 자신들만의 집단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각각의 클랜들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클랜을 홍보하기도 하며, 클랜 내부의 체계를 구성할 뿐만 아니라 클랜을 상징하는 표시를 겉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클랜들 끼리는 교류를 맺기도 하며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기도, 그리고 동맹의 관계를 맺는 경우도 있다. 클랜원들 간의 상호작용이 생기는 경우는 주로 공식적인 경쟁이 발생하는 경기, 혹은 클랜원들끼리 공개 서버에서 함께 모여 일반적인 플레이를 즐기는 경우 등이 있다 . 클랜이 구성원을 모집하는 방식으로는 특정 서버에 활동하는 뛰어난 선수들을 초대하여 입단을 위한 면접을 보게 하거나 직접 입단을 권유 하기도 한다. 각주[편집] ↑ “ESA report on the sales, demographics and usage data of the industry” (PDF). 2018년 2월 19일에 원본 문서 (PDF)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4월 30일에 확인함.  ↑ “Jupiter Media gamer age study – press release”. 2006년 3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8년 4월 30일에 확인함.  ↑ Paaßen, Benjamin (2017). “What is a True Gamer? The Male Gamer Stereotype and the Marginalization of Women in Video Game Culture”. 《Sex Roles: A Journal of Research》.  ↑ Flew, Terry and Humphreys, Sal (2005) "Games: Technology, Industry, Culture" Oxford University Press ↑ Irvine, Martha (2008년 9월 16일). “Survey:97 Percent of Children Play Video Games”. 《Huffington Post》. 2013년 11월 17일에 확인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비디오_게임_문화&amp;oldid=24507312" 분류: 비디오 게임 문화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SuomiFrançaisРусский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1일 (월) 05:3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비디오 게임 문화 요약 **비디오 게임 문화** - **정의**: 비디오 게임을 기반으로 한 전 세계적인 미디어 문화 - **영향**: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 모바일 게임과 사이버 문화의 발전 **게이머** - **정의**: 게임을 즐기거나 열정을 가진 사람들 - **사회적 기능**: 다인용 및 온라인 게임을 통해 소셜 네트워크 형성 - **E-스포츠**: 경쟁과 오락의 결합 **사용 인구** - **평균 연령**: 2016년 기준 35세 - **성별 분포**: 59% 남성, 41% 여성 (여성은 성별을 숨기는 경향) - **미국 내 비디오 게임 경험**: 6세~49세 중 71%가 경험, 55%는 모바일 장치에서 게임 **게임 장르 및 플랫폼** - **장르**: 롤플레잉, 시뮬레이션, 스포츠, 액션 등 - **플랫폼**: 아케이드, 콘솔, 모바일, 온라인, PC 게임 **LAN 게임** - **정의**: Local Area Network를 통한 게임 - **사교적 기능**: 가족 및 친구와의 모임에서 즐길 수 있는 오락 - **예시**: 에버퀘스트 팬 페어와 같은 대규모 이벤트 **온라인 게임** - **역사**: 1970~1980년대 전자 게시판 시스템에서 시작 - **발전**: 인터넷을 통한 글로벌 게임 경험 가능 - **클랜 형성**: 게이머들이 자신만의 집단을 형성하고 상호작용 **결론** 비디오 게임 문화는 기술 발전과 함께 사회적 상호작용을 증진시키며, 다양한 연령층과 성별의 게이머들이 참여하는 복합적인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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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_후_시리즈의_에피소드_목록
https://ko.wikipedia.org/wiki/닥터_후_시리즈의_에피소드_목록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닥터 후의 에피소드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닥터 후의 에피소드 목록</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span>(<a>닥터 후 시리즈의 에피소드 목록</a>에서 넘어옴)</span></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div><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역대 시즌 및 시리즈 목록</span></a> <ul> <li><a><span>1.1</span> <span>스페셜</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1963년 ~ 1989년</span></a></li> <li><a><span>3</span> <span>2005년 ~ 현재</span></a></li> <li><a><span>4</span> <span>비공식 닥터</span></a> <ul> <li><a><span>4.1</span> <span>The Curse of Fatal Death</span></a></li> <li><a><span>4.2</span> <span>Scream of the Shalka</span></a></li> </ul> </li> <li><a><span>5</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div> <p>영국 <a>BBC</a> 의 드라마인 《<b><a>닥터 후</a></b>》는 <a>1963년</a>부터 <a>1989년</a> 까지 지속된 시즌과 <a>1996년</a> 공개된 TV 영화, 그리고 <a>2005년</a>부터 지속되고 있는 새로운 시즌까지 합쳐 총 51년간 35시즌, 260 시리얼, 826개의 에피소드<small>(2015년 12월 25일 기준)</small> 가 방영되었으며, 이 기록은 계속 갱신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4대 닥터의 일부 에피소드가 1977-78년 사이에 《후 박사의 모험》으로 소개된 바 있고, <a>2005년</a>부터는 <a>KBS2</a>에서 뉴 시즌 1부터 꾸준하게 더빙 방영되고 있으며, 뉴 시즌 8 부터는 <a>KBS1</a>으로 채널을 옮겨 방영하고 있다. </p><p>올드 시즌의 각 에피소드에 붙은 괄호 속 한글 제목은 <b>단순 영어 번역명</b>으로, 공식 표기가 아니다. 뉴 시즌의 각 에피소드에 붙은 중괄호에 달린 한글 제목은 <b><a>KBS</a> 실제 방영시 제목</b>이며, 단순 영어 제목 번역이나 KBS 닥터 후 홈페이지에 게재된 오기된 제목이 아니다. </p> <h2><span></span><span>역대 시즌 및 시리즈 목록</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table> <tbody><tr> <th>시즌 / 시리즈 </th> <th>닥터 </th> <th>시리얼 수 </th> <th>에피소드 수 </th> <th>첫 방영일 (영국) </th> <th>첫 방영 시청자 수 (만 명) </th> <th>마지막 방영일 (영국) </th> <th>마지막 방영 시청자 수 (만 명) </th> <th>평균 시청자 수 (백만 명) </th></tr> <tr> <th><a>시즌 1</a> </th> <th rowspan="4"><a>1대 닥터</a> </th> <th>8 </th> <th>42 </th> <td>1963년 11월 23일 </td> <th>440 </th> <td>1964년 9월 12일 </td> <th>640 </th> <th>796 </th></tr> <tr> <th><a>시즌 2</a> </th> <th>9 </th> <th>39 </th> <td>1964년 10월 31일 </td> <th>840 </th> <td>1965년 7월 24일 </td> <th>830 </th> <th>1038 </th></tr> <tr> <th><a>시즌 3</a> </th> <th>10 </th> <th>45 </th> <td>1965년 9월 11일 </td> <th>900 </th> <td>1966년 7월 16일 </td> <th>550 </th> <th>738 </th></tr> <tr> <th><a>시즌 4</a> </th> <th>2 </th> <th>43 </th> <td>1966년 9월 10일 </td> <th>430 </th> <td>1967년 7월 1일 </td> <th>610 </th> <th>711 </th></tr> <tr> <th><a>시즌 4</a> </th> <th rowspan="3"><a>2대 닥터</a> </th> <th>7 </th> <th>43 </th> <td>1966년 9월 10일 </td> <th>430 </th> <td>1967년 7월 1일 </td> <th>610 </th> <th>711 </th></tr> <tr> <th><a>시즌 5</a> </th> <th>7 </th> <th>40 </th> <td>1967년 9월 2일 </td> <th>600 </th> <td>1968년 6월 1일 </td> <th>650 </th> <th>663 </th></tr> <tr> <th><a>시즌 6</a> </th> <th>7 </th> <th>44 </th> <td>1968년 8월 10일 </td> <th>610 </th> <td>1969년 6월 21일 </td> <th>500 </th> <th>657 </th></tr> <tr> <th><a>시즌 7</a> </th> <th rowspan="5"><a>3대 닥터</a> </th> <th>4 </th> <th>25 </th> <td>1970년 1월 3일 </td> <th>840 </th> <td>1970년 6월 20일 </td> <th>750 </th> <th>718 </th></tr> <tr> <th><a>시즌 8</a> </th> <th>5 </th> <th>25 </th> <td>1971년 1월 2일 </td> <th>730 </th> <td>1971년 6월 19일 </td> <th>830 </th> <th>796 </th></tr> <tr> <th><a>시즌 9</a> </th> <th>5 </th> <th>26 </th> <td>1972년 1월 1일 </td> <th>980 </th> <td>1972년 6월 24일 </td> <th>760 </th> <th>848 </th></tr> <tr> <th><a>시즌 10</a> </th> <th>5 </th> <th>26 </th> <td>1972년 12월 30일 </td> <th>960 </th> <td>1973년 6월 23일 </td> <th>700 </th> <th>898 </th></tr> <tr> <th><a>시즌 11</a> </th> <th>5 </th> <th>26 </th> <td>1973년 12월 15일 </td> <th>870 </th> <td>1974년 6월 8일 </td> <th>890 </th> <th>878 </th></tr> <tr> <th><a>시즌 12</a> </th> <th rowspan="7"><a>4대 닥터</a> </th> <th>5 </th> <th>20 </th> <td>1974년 12월 28일 </td> <th>1010 </th> <td>1975년 5월 10일 </td> <th>900 </th> <th>1014 </th></tr> <tr> <th><a>시즌 13</a> </th> <th>6 </th> <th>26 </th> <td>1975년 8월 30일 </td> <th>750 </th> <td>1976년 3월 6일 </td> <th>1090 </th> <th>1008 </th></tr> <tr> <th><a>시즌 14</a> </th> <th>6 </th> <th>26 </th> <td>1976년 9월 4일 </td> <th>950 </th> <td>1977년 4월 2일 </td> <th>1040 </th> <th>1117 </th></tr> <tr> <th><a>시즌 15</a> </th> <th>6 </th> <th>26 </th> <td>1977년 9월 3일 </td> <th>840 </th> <td>1978년 3월 11일 </td> <th>1050 </th> <th>891 </th></tr> <tr> <th><a>시즌 16</a><sup><a>&#91;참고 1&#93;</a></sup> </th> <th>6 </th> <th>26 </th> <td>1978년 9월 2일 </td> <th>810 </th> <td>1979년 2월 24일 </td> <th>850 </th> <th>856 </th></tr> <tr> <th><a>시즌 17</a> </th> <th>5<sup><a>&#91;참고 2&#93;</a></sup> </th> <th>20 </th> <td>1979년 9월 1일 </td> <th>1350 </th> <td>1980년 1월 12일 </td> <th>880 </th> <th>1122 </th></tr> <tr> <th><a>시즌 18</a> </th> <th>7 </th> <th>28 </th> <td>1980년 8월 30일 </td> <th>510 </th> <td>1981년 3월 21일 </td> <th>670 </th> <th>581 </th></tr> <tr> <th><a>시즌 19</a> </th> <th rowspan="3"><a>5대 닥터</a> </th> <th>7 </th> <th>26 </th> <td>1982년 1월 4일 </td> <th>960 </th> <td>1982년 3월 30일 </td> <th>890 </th> <th>930 </th></tr> <tr> <th><a>시즌 20</a> </th> <th>6 </th> <th>22 </th> <td>1983년 1월 4일 </td> <th>720 </th> <td>1983년 3월 16일 </td> <th>755 </th> <th>700 </th></tr> <tr> <th><a>시즌 21</a> </th> <th>7 </th> <th>24 </th> <td>1984년 1월 5일 </td> <th>725 </th> <td>1984년 3월 30일 </td> <th>710 </th> <th>837 </th></tr> <tr> <th><a>시즌 21</a> </th> <th rowspan="3"><a>6대 닥터</a> </th> <th>7 </th> <th>24 </th> <td>1984년 1월 5일 </td> <th>725 </th> <td>1984년 3월 30일 </td> <th>710 </th> <th>837 </th></tr> <tr> <th><a>시즌 22</a> </th> <th>6 </th> <th>13 </th> <td>1985년 1월 5일 </td> <th>805 </th> <td>1985년 3월 30일 </td> <th>755 </th> <th>717 </th></tr> <tr> <th><a>시즌 23</a><sup><a>&#91;참고 3&#93;</a></sup> </th> <th>4 </th> <th>14 </th> <td>1986년 9월 6일 </td> <th>435 </th> <td>1986년 12월 6일 </td> <th>500 </th> <th>483 </th></tr> <tr> <th><a>시즌 24</a> </th> <th rowspan="3"><a>7대 닥터</a> </th> <th>4 </th> <th>14 </th> <td>1987년 9월 7일 </td> <th>463 </th> <td>1987년 12월 7일 </td> <th>507 </th> <th>498 </th></tr> <tr> <th><a>시즌 25</a> </th> <th>4 </th> <th>14 </th> <td>1988년 10월 5일 </td> <th>535 </th> <td>1989년 1월 4일 </td> <th>545 </th> <th>535 </th></tr> <tr> <th><a>시즌 26</a> </th> <th>4 </th> <th>14 </th> <td>1989년 9월 6일 </td> <th>365 </th> <td>1989년 12월 6일 </td> <th>490 </th> <th>419 </th></tr> <tr> <th><a>시리즈 1</a> </th> <th><a>9대 닥터</a> </th> <th>10 </th> <th>13 </th> <td>2005년 3월 26일 </td> <th>1081 </th> <td>2005년 6월 18일 </td> <th>691 </th> <th>731 </th></tr> <tr> <th><a>시리즈 2</a> </th> <th rowspan="3"><a>10대 닥터</a> </th> <th>10 </th> <th>13 </th> <td>2006년 4월 15일 </td> <th>862 </th> <td>2006년 7월 8일 </td> <th>822 </th> <th>764 </th></tr> <tr> <th><a>시리즈 3</a> </th> <th>9 </th> <th>13 </th> <td>2007년 3월 31일 </td> <th>871 </th> <td>2007년 6월 30일 </td> <th>861 </th> <th>754 </th></tr> <tr> <th><a>시리즈 4</a> </th> <th>10 </th> <th>13 </th> <td>2008년 4월 5일 </td> <th>914 </th> <td>2008년 7월 5일 </td> <th>1057 </th> <th>804 </th></tr> <tr> <th><a>시리즈 5</a> </th> <th rowspan="3"><a>11대 닥터</a> </th> <th>10 </th> <th>13 </th> <td>2010년 4월 3일 </td> <th>1009 </th> <td>2010년 6월 26일 </td> <th>670 </th> <th>773 </th></tr> <tr> <th><a>시리즈 6</a> </th> <th>11 </th> <th>13 </th> <td>2011년 4월 23일 </td> <th>886 </th> <td>2011년 10월 1일 </td> <th>767 </th> <th>751 </th></tr> <tr> <th><a>시리즈 7</a> </th> <th>13 </th> <th>13 </th> <td>2012년 9월 1일 </td> <th>833 </th> <td>2013년 5월 18일 </td> <th>745 </th> <th>744 </th></tr> <tr> <th><a>시리즈 8</a> </th> <th rowspan="3"><a>12대 닥터</a> </th> <th>11 </th> <th>12 </th> <td>2014년 8월 23일 </td> <th>917 </th> <td>2014년 11월 8일 </td> <th>760 </th> <th>726 </th></tr> <tr> <th><a>시리즈 9</a> </th> <th>9 </th> <th>12 </th> <td>2015년 9월 19일 </td> <th>654 </th> <td>2015년 12월 5일 </td> <th>617 </th> <th>604 </th></tr> <tr> <th><a>시리즈 10</a> </th> <th>11 </th> <th>12 </th> <td>2017년 4월 15일 </td> <th>783 </th> <td>2017년 7월 1일 </td> <th>529 </th> <th>545 </th></tr></tbody></table> <h3><span></span><span>스페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table> <tbody><tr> <th>닥터 </th> <th>시즌 / 시리즈 </th> <th>에피소드 수 </th> <th>첫 방영일 (UK) </th> <th>마지막 방영일 (UK) </th> <th>평균 시청자 (만 명) </th></tr> <tr> <th><a>5대 닥터</a> </th> <th><a>20주년 스페셜</a> </th> <th>1 </th> <td colspan="2">1983년 11월 25일 </td> <th>770 </th></tr> <tr> <th><a>1대 닥터</a> </th> <th><a>시즌 1</a> 파일럿 </th> <th>1 </th> <td colspan="2">1991년 8월 26일 </td> <th>170 </th></tr> <tr> <th><a>8대 닥터</a> </th> <th><a>텔레비전 영화</a> </th> <th>1 </th> <td colspan="2">1996년 5월 27일 </td> <th>910 </th></tr> <tr> <th rowspan="4"><a>10대 닥터</a> </th> <th><a>2005년 스페셜</a> </th> <th>2 </th> <td>2005년 11월 18일 </td> <td>2005년 12월 25일 </td> <th> </th></tr> <tr> <th><a>2006년 크리스마스 스페셜</a> </th> <th>1 </th> <td colspan="2">2006년 12월 25일 </td> <th>935<sup><a>&#91;1&#93;</a></sup> </th></tr> <tr> <th><a>2007년 스페셜</a> </th> <th>2 </th> <td>2007년 11월 16일 </td> <td>2007년 12월 25일 </td> <th> </th></tr> <tr> <th><a>2008-2010년 스페셜</a> </th> <th>5 </th> <td>2008년 12월 25일 </td> <td>2010년 1월 1일 </td> <th> </th></tr> <tr> <th rowspan="4"><a>11대 닥터</a> </th> <th><a>2010-2011년 스페셜</a> </th> <th>3 </th> <td>2010년 12월 25일 </td> <td>2011년 3월 18일 </td> <th> </th></tr> <tr> <th><a>2011-2012년 스페셜</a> </th> <th>6 </th> <td>2011년 12월 25일 </td> <td>2012년 8월 31일 </td> <th> </th></tr> <tr> <th><a>2012년 스페셜</a> </th> <th>3 </th> <td>2012년 10월 12일 </td> <td>2012년 12월 25일 </td> <th> </th></tr> <tr> <th><a>2013년 스페셜</a> </th> <th>4 </th> <td>2013년 11월 14일 </td> <td>2013년 12월 25일 </td> <th> </th></tr> <tr> <th rowspan="4"><a>12대 닥터</a> </th> <th><a>2014년 크리스마스 스페셜</a> </th> <th>1 </th> <td colspan="2">2014년 크리스마스 </td> <th> </th></tr> <tr> <th><a>2015년 스페셜</a> </th> <th>1 </th> <td colspan="2">2015년 크리스마스 </td> <th> </th></tr> <tr> <th><a>2016년 스페셜</a> </th> <th>1 </th> <td colspan="2">2016년 크리스마스 </td> <th> </th></tr> <tr> <th><a>2017년 스페셜</a> </th> <th>1 </th> <td colspan="2">2017년 크리스마스 </td> <th> </th></tr></tbody></table> <h2><span></span><span>1963년 ~ 1989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img>이 부분의 본문은 <a>닥터 후의 에피소드 목록 (1963년~1989년)</a>입니다.</div> <h2><span></span><span>2005년 ~ 현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img>이 부분의 본문은 <a>닥터 후의 에피소드 목록 (2005년~현재)</a>입니다.</div> <h2><span></span><span>비공식 닥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The Curse of Fatal Death</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b>치명적인 죽음의 저주</b>》의 각본가인 <a>스티븐 모팻</a>이 집필하고 1999년 3월에 방영한 한 이 에피소드는 1989년에 종료했던 기존의 TV 시리즈 뿐만 아니라 1996년 텔레비전 영화를 계승하여 9대 닥터부터 13대 닥터의 재생성 과정을 코믹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선 9대 닥터 역으로 <a>로언 앳킨슨</a>이 출연하고 이후 닥터 역은 10대 닥터 역으로서 출연한 <a>리처드 E. 그랜트</a>가 승계한다. 하지만 얼마 못가 재생성 직후의 부작용으로 사고를 당해 재생성을 하게 되어 11대 닥터인 <a>짐 브로드벤트</a>와 12대 닥터인 <a>휴 그랜트</a> 순으로 닥터의 역할이 넘어가게 된다. 이후 닥터 역할을 13대 닥터로서 <a>조애나 럼리</a>가 넘겨받고 그 과정을 지켜보며 닥터를 괴롭히던 마스터 역의 <a>조너선 프라이스</a>와 함께 퇴장함으로써 극은 마무리를 맞이하게 된다. 참고로 달렉의 목소리를 맡고 있던 로이 스켈턴의 유작이기도 하며 닥터의 동행자인 엠마 역에 앵글로계 요르단인인 <a>줄리아 스왈르하</a>가 출연한다. </p> <h3><span>Scream of the Shalka</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b>샬카의 비명</b>》이 1989년에 종료했던 TV 시리즈 뿐만 아니라, 1996년 텔레비전 영화와 공식적으로 연속되는 것을 전제로 구성이 되었지만, 2005년까지 프로그램의 부흥이 좌절되자 닥터 역은 비공식인 상태가 되었다 . 시리즈는 <a>리처드 E. 그랜트</a>가 아홉 번째 닥터의 목소리를 제공하며 베테랑 닥터 작가인 폴 코넬이 각본을 담당했다. 이 현상은 그랜트가 영화나 새로운 시리즈의 닥터로서 재생할 것이라는 풍문과 실제로 그가 코믹 릴리프의 스페셜 닥터로서 1999년에 「The Curse of Fatal Death」를 통해 "자부심 높은 닥터" 역으로 등장했던 전통을 따랐다. 그랜트는 이후 닥터 후의 부활된 TV 시리즈로 방영된 2012년 성탄 특집의 "The Snowmen"과 2013년의 "The Bells of St John" 그리고 "The name of The doctor" 등에 게스트 악당으로서 모습을 비췄다. 이 모험에 대한 의사의 동반자인 앨리슨 체니는 1년 후 호텔 르완다를 통해 아카데미 상에 노미네이트될 <a>소피 오코네도</a>가 맡게 되었다. 그녀는 또한 닥터 후의 에피소드인 "The Beast Below"와 "The Pandorica Opens" 에서 미래의 대영 제국 여왕 엘리자베스 10세로 닥터의 2010년도 시리즈에 출연했다. 또한 마스터 역으로 열연한 <a>데릭 재커비</a>는 2007년의 에피소드인 "유토피아 "에서도 마스터로서 자신의 역할을 되풀이했다. 케어테이커 역에 임명된 <a>데이비드 테넌트</a>는 나중에 2005년부터 열번째 닥터로 캐스팅 되어 나타났다.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l><dt>내용주</dt></dl> <div> <div><ol> <li><span><a>↑</a></span> <span>엄밀히 말하면 16번째 시즌이지만, 부제인 <i>The Key to Time</i>으로 알려졌다.</span> </li> <li><span><a>↑</a></span> <span> <i>Shada</i>는 파업으로 인해 제작이 중단됐다. 그 당시 제작 녹화분은 이후 <a>홈비디오</a> 세트로 나왔는데 제작되지 못한 부분은 스토리를 이어나가기 위해 톰 베이커의 보충 나레이션으로 대신했다. 실제로 방영된 화가 아니므로 닥터 후의 에피소드나 스토리의 수를 셀 때에는 포함되지 않는다.</span> </li> <li><span><a>↑</a></span> <span>엄밀히 말하면 23번째 시즌이지만, 부제인 <i>The Trial of a Time Lord</i>로 알려졌다.</span> </li> </ol></div></div> <dl><dt>참조주</dt></dl> <div> <div><ol> <li><span><a>↑</a></span> <span><cite><a>&#8220;Runaway Bride — Official Ratings&#8221;</a>. &#12298;Outpost Gallifrey&#12299;. 2007년 1월 11일. 2007년 9월 30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07년 1월 12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ol></div></div>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닥터 후</a></div></th></tr><tr><th><a>닥터 후 관련 페이지</a></th><td><div></div><table><tbody><tr><th>등장인물</th><td><div> <ul><li><a>닥터</a></li> <li><a>동행자</a></li> <li><a>타임 로드</a></li> <li><a>달렉</a></li> <li><a>사이버맨</a></li> <li><a>우는 천사</a></li> <li><a>마스터</a></li> <li><a>사일런스</a></li></ul> </div></td></tr><tr><th>개념</th><td><div> <ul><li><a>타디스</a></li> <li><a>재생성</a></li> <li><a>시간 전쟁</a></li> <li><a>후니버스</a></li> <li><a>토치우드 기관</a></li> <li><a>UNIT</a></li> <li><a>배드 울프</a></li> <li><a>소닉 스크류드라이버</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a>스핀오프 및 관련 방송</a></th><td><div></div><table><tbody><tr><th>스핀오프</th><td><div> <ul><li><a>토치우드</a>(<a>에피소드 목록</a>)</li> <li><a>사라 제인 어드벤처</a></li> <li><a>클래스</a></li></ul> </div></td></tr><tr><th>다큐멘터리</th><td><div> <ul><li><a>닥터 후 컨피덴셜</a></li> <li><a>토치우드 디클래시파이드</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관련 항목</th><td><div> <ul><li><a>닥터 후의 등장인물 목록</a></li> <li><a>닥터 후의 에피소드 목록</a> <ul><li><a>1963년 ~ 1989년</a></li> <li><a>2005년 ~ 현재</a></li></ul></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닥터_후의_에피소드_목록&amp;oldid=24000607</a>"</div> <div><div><a>분류</a>: <ul><li><a>닥터 후의 에피소드</a></li><li><a>영국의 텔레비전 에피소드 목록</a></li><li><a>닥터 후에 관한 목록</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li><a>위키데이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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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닥터후 시리즈의 11대 닥터역 배우는?
짐 브로드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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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684
10,427
[ "닥터후 시리즈의 11대 닥터역 배우는?", "닥터후 시리즈의 12대 닥터역 배우는?", "10대 탁터 역을 맡은 배우의 이름은?", "13대 닥터역할이 조애나 럼리가 넘겨 받을때 12대 닥터인 휴 그랜트와 함께 퇴장한 마스터 역의 배우는?", "로이 스켈턴이 목소리를 맡은 닥터 후의 등장인물은?", "\"치명적인 죽음의 저주\" 의 각본가는?", "닥터 후 시리즈의 13대 닥터의 배우명은?", "닥터후의 The Beast Below에서 엘리자베스 10세로 출연한 배우는?", "2005년에 열번째 닥터와 2007년에 케어테이커 역을 맡은 이 배우는?", "호텔 르완다를 통해 아카데미 상에 노미네이트 된 배우는?", "소피 오코네트는 닥터 후 에피소드에서 어떤 역으로 출현하였는가?", "2005년부터 닥터 후 시리즈의 열번째 닥터로 캐스팅 된 배우는?", "2007년의 에피소드인 \"유토피아\" 에서 마스터의 역을 맡은 배우는?" ]
<!DOCTYPE html> 닥터 후의 에피소드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닥터 후의 에피소드 목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닥터 후 시리즈의 에피소드 목록에서 넘어옴)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목차 1 역대 시즌 및 시리즈 목록 1.1 스페셜 2 1963년 ~ 1989년 3 2005년 ~ 현재 4 비공식 닥터 4.1 The Curse of Fatal Death 4.2 Scream of the Shalka 5 각주 영국 BBC 의 드라마인 《닥터 후》는 1963년부터 1989년 까지 지속된 시즌과 1996년 공개된 TV 영화, 그리고 2005년부터 지속되고 있는 새로운 시즌까지 합쳐 총 51년간 35시즌, 260 시리얼, 826개의 에피소드(2015년 12월 25일 기준) 가 방영되었으며, 이 기록은 계속 갱신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도 4대 닥터의 일부 에피소드가 1977-78년 사이에 《후 박사의 모험》으로 소개된 바 있고, 2005년부터는 KBS2에서 뉴 시즌 1부터 꾸준하게 더빙 방영되고 있으며, 뉴 시즌 8 부터는 KBS1으로 채널을 옮겨 방영하고 있다. 올드 시즌의 각 에피소드에 붙은 괄호 속 한글 제목은 단순 영어 번역명으로, 공식 표기가 아니다. 뉴 시즌의 각 에피소드에 붙은 중괄호에 달린 한글 제목은 KBS 실제 방영시 제목이며, 단순 영어 제목 번역이나 KBS 닥터 후 홈페이지에 게재된 오기된 제목이 아니다. 역대 시즌 및 시리즈 목록[편집] <table> <tbody><tr> <th>시즌 / 시리즈 </th> <th>닥터 </th> <th>시리얼 수 </th> <th>에피소드 수 </th> <th>첫 방영일 (영국) </th> <th>첫 방영 시청자 수 (만 명) </th> <th>마지막 방영일 (영국) </th> <th>마지막 방영 시청자 수 (만 명) </th> <th>평균 시청자 수 (백만 명) </th></tr> <tr> <th>시즌 1 </th> <th rowspan="4">1대 닥터 </th> <th>8 </th> <th>42 </th> <td>1963년 11월 23일 </td> <th>440 </th> <td>1964년 9월 12일 </td> <th>640 </th> <th>796 </th></tr> <tr> <th>시즌 2 </th> <th>9 </th> <th>39 </th> <td>1964년 10월 31일 </td> <th>840 </th> <td>1965년 7월 24일 </td> <th>830 </th> <th>1038 </th></tr> <tr> <th>시즌 3 </th> <th>10 </th> <th>45 </th> <td>1965년 9월 11일 </td> <th>900 </th> <td>1966년 7월 16일 </td> <th>550 </th> <th>738 </th></tr> <tr> <th>시즌 4 </th> <th>2 </th> <th>43 </th> <td>1966년 9월 10일 </td> <th>430 </th> <td>1967년 7월 1일 </td> <th>610 </th> <th>711 </th></tr> <tr> <th>시즌 4 </th> <th rowspan="3">2대 닥터 </th> <th>7 </th> <th>43 </th> <td>1966년 9월 10일 </td> <th>430 </th> <td>1967년 7월 1일 </td> <th>610 </th> <th>711 </th></tr> <tr> <th>시즌 5 </th> <th>7 </th> <th>40 </th> <td>1967년 9월 2일 </td> <th>600 </th> <td>1968년 6월 1일 </td> <th>650 </th> <th>663 </th></tr> <tr> <th>시즌 6 </th> <th>7 </th> <th>44 </th> <td>1968년 8월 10일 </td> <th>610 </th> <td>1969년 6월 21일 </td> <th>500 </th> <th>657 </th></tr> <tr> <th>시즌 7 </th> <th rowspan="5">3대 닥터 </th> <th>4 </th> <th>25 </th> <td>1970년 1월 3일 </td> <th>840 </th> <td>1970년 6월 20일 </td> <th>750 </th> <th>718 </th></tr> <tr> <th>시즌 8 </th> <th>5 </th> <th>25 </th> <td>1971년 1월 2일 </td> <th>730 </th> <td>1971년 6월 19일 </td> <th>830 </th> <th>796 </th></tr> <tr> <th>시즌 9 </th> <th>5 </th> <th>26 </th> <td>1972년 1월 1일 </td> <th>980 </th> <td>1972년 6월 24일 </td> <th>760 </th> <th>848 </th></tr> <tr> <th>시즌 10 </th> <th>5 </th> <th>26 </th> <td>1972년 12월 30일 </td> <th>960 </th> <td>1973년 6월 23일 </td> <th>700 </th> <th>898 </th></tr> <tr> <th>시즌 11 </th> <th>5 </th> <th>26 </th> <td>1973년 12월 15일 </td> <th>870 </th> <td>1974년 6월 8일 </td> <th>890 </th> <th>878 </th></tr> <tr> <th>시즌 12 </th> <th rowspan="7">4대 닥터 </th> <th>5 </th> <th>20 </th> <td>1974년 12월 28일 </td> <th>1010 </th> <td>1975년 5월 10일 </td> <th>900 </th> <th>1014 </th></tr> <tr> <th>시즌 13 </th> <th>6 </th> <th>26 </th> <td>1975년 8월 30일 </td> <th>750 </th> <td>1976년 3월 6일 </td> <th>1090 </th> <th>1008 </th></tr> <tr> <th>시즌 14 </th> <th>6 </th> <th>26 </th> <td>1976년 9월 4일 </td> <th>950 </th> <td>1977년 4월 2일 </td> <th>1040 </th> <th>1117 </th></tr> <tr> <th>시즌 15 </th> <th>6 </th> <th>26 </th> <td>1977년 9월 3일 </td> <th>840 </th> <td>1978년 3월 11일 </td> <th>1050 </th> <th>891 </th></tr> <tr> <th>시즌 16[참고 1] </th> <th>6 </th> <th>26 </th> <td>1978년 9월 2일 </td> <th>810 </th> <td>1979년 2월 24일 </td> <th>850 </th> <th>856 </th></tr> <tr> <th>시즌 17 </th> <th>5[참고 2] </th> <th>20 </th> <td>1979년 9월 1일 </td> <th>1350 </th> <td>1980년 1월 12일 </td> <th>880 </th> <th>1122 </th></tr> <tr> <th>시즌 18 </th> <th>7 </th> <th>28 </th> <td>1980년 8월 30일 </td> <th>510 </th> <td>1981년 3월 21일 </td> <th>670 </th> <th>581 </th></tr> <tr> <th>시즌 19 </th> <th rowspan="3">5대 닥터 </th> <th>7 </th> <th>26 </th> <td>1982년 1월 4일 </td> <th>960 </th> <td>1982년 3월 30일 </td> <th>890 </th> <th>930 </th></tr> <tr> <th>시즌 20 </th> <th>6 </th> <th>22 </th> <td>1983년 1월 4일 </td> <th>720 </th> <td>1983년 3월 16일 </td> <th>755 </th> <th>700 </th></tr> <tr> <th>시즌 21 </th> <th>7 </th> <th>24 </th> <td>1984년 1월 5일 </td> <th>725 </th> <td>1984년 3월 30일 </td> <th>710 </th> <th>837 </th></tr> <tr> <th>시즌 21 </th> <th rowspan="3">6대 닥터 </th> <th>7 </th> <th>24 </th> <td>1984년 1월 5일 </td> <th>725 </th> <td>1984년 3월 30일 </td> <th>710 </th> <th>837 </th></tr> <tr> <th>시즌 22 </th> <th>6 </th> <th>13 </th> <td>1985년 1월 5일 </td> <th>805 </th> <td>1985년 3월 30일 </td> <th>755 </th> <th>717 </th></tr> <tr> <th>시즌 23[참고 3] </th> <th>4 </th> <th>14 </th> <td>1986년 9월 6일 </td> <th>435 </th> <td>1986년 12월 6일 </td> <th>500 </th> <th>483 </th></tr> <tr> <th>시즌 24 </th> <th rowspan="3">7대 닥터 </th> <th>4 </th> <th>14 </th> <td>1987년 9월 7일 </td> <th>463 </th> <td>1987년 12월 7일 </td> <th>507 </th> <th>498 </th></tr> <tr> <th>시즌 25 </th> <th>4 </th> <th>14 </th> <td>1988년 10월 5일 </td> <th>535 </th> <td>1989년 1월 4일 </td> <th>545 </th> <th>535 </th></tr> <tr> <th>시즌 26 </th> <th>4 </th> <th>14 </th> <td>1989년 9월 6일 </td> <th>365 </th> <td>1989년 12월 6일 </td> <th>490 </th> <th>419 </th></tr> <tr> <th>시리즈 1 </th> <th>9대 닥터 </th> <th>10 </th> <th>13 </th> <td>2005년 3월 26일 </td> <th>1081 </th> <td>2005년 6월 18일 </td> <th>691 </th> <th>731 </th></tr> <tr> <th>시리즈 2 </th> <th rowspan="3">10대 닥터 </th> <th>10 </th> <th>13 </th> <td>2006년 4월 15일 </td> <th>862 </th> <td>2006년 7월 8일 </td> <th>822 </th> <th>764 </th></tr> <tr> <th>시리즈 3 </th> <th>9 </th> <th>13 </th> <td>2007년 3월 31일 </td> <th>871 </th> <td>2007년 6월 30일 </td> <th>861 </th> <th>754 </th></tr> <tr> <th>시리즈 4 </th> <th>10 </th> <th>13 </th> <td>2008년 4월 5일 </td> <th>914 </th> <td>2008년 7월 5일 </td> <th>1057 </th> <th>804 </th></tr> <tr> <th>시리즈 5 </th> <th rowspan="3">11대 닥터 </th> <th>10 </th> <th>13 </th> <td>2010년 4월 3일 </td> <th>1009 </th> <td>2010년 6월 26일 </td> <th>670 </th> <th>773 </th></tr> <tr> <th>시리즈 6 </th> <th>11 </th> <th>13 </th> <td>2011년 4월 23일 </td> <th>886 </th> <td>2011년 10월 1일 </td> <th>767 </th> <th>751 </th></tr> <tr> <th>시리즈 7 </th> <th>13 </th> <th>13 </th> <td>2012년 9월 1일 </td> <th>833 </th> <td>2013년 5월 18일 </td> <th>745 </th> <th>744 </th></tr> <tr> <th>시리즈 8 </th> <th rowspan="3">12대 닥터 </th> <th>11 </th> <th>12 </th> <td>2014년 8월 23일 </td> <th>917 </th> <td>2014년 11월 8일 </td> <th>760 </th> <th>726 </th></tr> <tr> <th>시리즈 9 </th> <th>9 </th> <th>12 </th> <td>2015년 9월 19일 </td> <th>654 </th> <td>2015년 12월 5일 </td> <th>617 </th> <th>604 </th></tr> <tr> <th>시리즈 10 </th> <th>11 </th> <th>12 </th> <td>2017년 4월 15일 </td> <th>783 </th> <td>2017년 7월 1일 </td> <th>529 </th> <th>545 </th></tr></tbody></table> 스페셜[편집] <table> <tbody><tr> <th>닥터 </th> <th>시즌 / 시리즈 </th> <th>에피소드 수 </th> <th>첫 방영일 (UK) </th> <th>마지막 방영일 (UK) </th> <th>평균 시청자 (만 명) </th></tr> <tr> <th>5대 닥터 </th> <th>20주년 스페셜 </th> <th>1 </th> <td colspan="2">1983년 11월 25일 </td> <th>770 </th></tr> <tr> <th>1대 닥터 </th> <th>시즌 1 파일럿 </th> <th>1 </th> <td colspan="2">1991년 8월 26일 </td> <th>170 </th></tr> <tr> <th>8대 닥터 </th> <th>텔레비전 영화 </th> <th>1 </th> <td colspan="2">1996년 5월 27일 </td> <th>910 </th></tr> <tr> <th rowspan="4">10대 닥터 </th> <th>2005년 스페셜 </th> <th>2 </th> <td>2005년 11월 18일 </td> <td>2005년 12월 25일 </td> <th> </th></tr> <tr> <th>2006년 크리스마스 스페셜 </th> <th>1 </th> <td colspan="2">2006년 12월 25일 </td> <th>935[1] </th></tr> <tr> <th>2007년 스페셜 </th> <th>2 </th> <td>2007년 11월 16일 </td> <td>2007년 12월 25일 </td> <th> </th></tr> <tr> <th>2008-2010년 스페셜 </th> <th>5 </th> <td>2008년 12월 25일 </td> <td>2010년 1월 1일 </td> <th> </th></tr> <tr> <th rowspan="4">11대 닥터 </th> <th>2010-2011년 스페셜 </th> <th>3 </th> <td>2010년 12월 25일 </td> <td>2011년 3월 18일 </td> <th> </th></tr> <tr> <th>2011-2012년 스페셜 </th> <th>6 </th> <td>2011년 12월 25일 </td> <td>2012년 8월 31일 </td> <th> </th></tr> <tr> <th>2012년 스페셜 </th> <th>3 </th> <td>2012년 10월 12일 </td> <td>2012년 12월 25일 </td> <th> </th></tr> <tr> <th>2013년 스페셜 </th> <th>4 </th> <td>2013년 11월 14일 </td> <td>2013년 12월 25일 </td> <th> </th></tr> <tr> <th rowspan="4">12대 닥터 </th> <th>2014년 크리스마스 스페셜 </th> <th>1 </th> <td colspan="2">2014년 크리스마스 </td> <th> </th></tr> <tr> <th>2015년 스페셜 </th> <th>1 </th> <td colspan="2">2015년 크리스마스 </td> <th> </th></tr> <tr> <th>2016년 스페셜 </th> <th>1 </th> <td colspan="2">2016년 크리스마스 </td> <th> </th></tr> <tr> <th>2017년 스페셜 </th> <th>1 </th> <td colspan="2">2017년 크리스마스 </td> <th> </th></tr></tbody></table> 1963년 ~ 1989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닥터 후의 에피소드 목록 (1963년~1989년)입니다. 2005년 ~ 현재[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닥터 후의 에피소드 목록 (2005년~현재)입니다. 비공식 닥터[편집] The Curse of Fatal Death[편집] 《치명적인 죽음의 저주》의 각본가인 스티븐 모팻이 집필하고 1999년 3월에 방영한 한 이 에피소드는 1989년에 종료했던 기존의 TV 시리즈 뿐만 아니라 1996년 텔레비전 영화를 계승하여 9대 닥터부터 13대 닥터의 재생성 과정을 코믹하게 묘사하고 있다. 우선 9대 닥터 역으로 로언 앳킨슨이 출연하고 이후 닥터 역은 10대 닥터 역으로서 출연한 리처드 E. 그랜트가 승계한다. 하지만 얼마 못가 재생성 직후의 부작용으로 사고를 당해 재생성을 하게 되어 11대 닥터인 짐 브로드벤트와 12대 닥터인 휴 그랜트 순으로 닥터의 역할이 넘어가게 된다. 이후 닥터 역할을 13대 닥터로서 조애나 럼리가 넘겨받고 그 과정을 지켜보며 닥터를 괴롭히던 마스터 역의 조너선 프라이스와 함께 퇴장함으로써 극은 마무리를 맞이하게 된다. 참고로 달렉의 목소리를 맡고 있던 로이 스켈턴의 유작이기도 하며 닥터의 동행자인 엠마 역에 앵글로계 요르단인인 줄리아 스왈르하가 출연한다. Scream of the Shalka[편집] 《샬카의 비명》이 1989년에 종료했던 TV 시리즈 뿐만 아니라, 1996년 텔레비전 영화와 공식적으로 연속되는 것을 전제로 구성이 되었지만, 2005년까지 프로그램의 부흥이 좌절되자 닥터 역은 비공식인 상태가 되었다 . 시리즈는 리처드 E. 그랜트가 아홉 번째 닥터의 목소리를 제공하며 베테랑 닥터 작가인 폴 코넬이 각본을 담당했다. 이 현상은 그랜트가 영화나 새로운 시리즈의 닥터로서 재생할 것이라는 풍문과 실제로 그가 코믹 릴리프의 스페셜 닥터로서 1999년에 「The Curse of Fatal Death」를 통해 "자부심 높은 닥터" 역으로 등장했던 전통을 따랐다. 그랜트는 이후 닥터 후의 부활된 TV 시리즈로 방영된 2012년 성탄 특집의 "The Snowmen"과 2013년의 "The Bells of St John" 그리고 "The name of The doctor" 등에 게스트 악당으로서 모습을 비췄다. 이 모험에 대한 의사의 동반자인 앨리슨 체니는 1년 후 호텔 르완다를 통해 아카데미 상에 노미네이트될 소피 오코네도가 맡게 되었다. 그녀는 또한 닥터 후의 에피소드인 "The Beast Below"와 "The Pandorica Opens" 에서 미래의 대영 제국 여왕 엘리자베스 10세로 닥터의 2010년도 시리즈에 출연했다. 또한 마스터 역으로 열연한 데릭 재커비는 2007년의 에피소드인 "유토피아 "에서도 마스터로서 자신의 역할을 되풀이했다. 케어테이커 역에 임명된 데이비드 테넌트는 나중에 2005년부터 열번째 닥터로 캐스팅 되어 나타났다. 각주[편집] 내용주 ↑ 엄밀히 말하면 16번째 시즌이지만, 부제인 The Key to Time으로 알려졌다. ↑ Shada는 파업으로 인해 제작이 중단됐다. 그 당시 제작 녹화분은 이후 홈비디오 세트로 나왔는데 제작되지 못한 부분은 스토리를 이어나가기 위해 톰 베이커의 보충 나레이션으로 대신했다. 실제로 방영된 화가 아니므로 닥터 후의 에피소드나 스토리의 수를 셀 때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 엄밀히 말하면 23번째 시즌이지만, 부제인 The Trial of a Time Lord로 알려졌다. 참조주 ↑ “Runaway Bride — Official Ratings”. 《Outpost Gallifrey》. 2007년 1월 11일. 2007년 9월 30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7년 1월 12일에 확인함.  <table><tbody><tr><th colspan="2">vdeh닥터 후</th></tr><tr><th>닥터 후 관련 페이지</th><td><table><tbody><tr><th>등장인물</th><td> 닥터 동행자 타임 로드 달렉 사이버맨 우는 천사 마스터 사일런스 </td></tr><tr><th>개념</th><td> 타디스 재생성 시간 전쟁 후니버스 토치우드 기관 UNIT 배드 울프 소닉 스크류드라이버 </td></tr></tbody></table></td></tr><tr><th>스핀오프 및 관련 방송</th><td><table><tbody><tr><th>스핀오프</th><td> 토치우드(에피소드 목록) 사라 제인 어드벤처 클래스 </td></tr><tr><th>다큐멘터리</th><td> 닥터 후 컨피덴셜 토치우드 디클래시파이드 </td></tr></tbody></table></td></tr><tr><th>관련 항목</th><td> 닥터 후의 등장인물 목록 닥터 후의 에피소드 목록 1963년 ~ 1989년 2005년 ~ 현재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닥터_후의_에피소드_목록&amp;oldid=24000607" 분류: 닥터 후의 에피소드영국의 텔레비전 에피소드 목록닥터 후에 관한 목록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데이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БългарскиCatalàČeštinaDeutschEspañolفارسیSuomiHrvatskiMagyar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9일 (화) 19: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문단 번호 | 핵심 내용 | 키워드 | |------------|------------|---------| | 1 | 닥터 후 시리즈의 에피소드 목록 개요 | 닥터 후, 에피소드, 목록 | | 2 | 닥터 후의 역사: 1963년부터 1989년까지의 시즌 | 역사, 시즌, 1963-1989 | | 3 | 2005년부터 현재까지의 새로운 시즌 | 새로운 시즌, 2005-현재 | | 4 | 비공식 닥터 관련 에피소드 | 비공식, 닥터, 에피소드 | | 4.1 | 《치명적인 죽음의 저주》 에피소드 설명 | 치명적인 죽음의 저주, 스티븐 모팻 | | 4.2 | 《샬카의 비명》 에피소드 설명 | 샬카의 비명, 리처드 E. 그랜트 | | 5 | 각주 및 참고 사항 | 각주, 참고 | ### 글의 흐름 요약 글은 닥터 후 시리즈의 에피소드 목록을 소개하며, 시리즈의 역사적 배경을 1963년부터 1989년까지의 올드 시즌과 2005년부터 현재까지의 뉴 시즌으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또한 비공식 닥터에 대한 두 개의 에피소드를 다루며, 각 에피소드의 주요 내용과 관련된 정보를 제공합니다. 마지막으로 각주를 통해 추가적인 설명을 제공합니다.
이 글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표 형식으로 요약해줘. 예: {문단 번호, 핵심 내용, 키워드}. 글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요약 마지막에 간단히 설명해줘.
격변설
https://ko.wikipedia.org/wiki/격변설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격변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격변설</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div><div><a><img></a> <div><div><a></a></div>세인트 헬렌스 산</div></div></div> <p><b>격변설</b>(激變說, catastrophism)은 격변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현재의 지구의 모습이 되었다는 학설로서, 보통 프랑스 자연철학자 <a>바롱 조르주 퀴비에</a>가 정리한 것을 시초로 본다. <a>창조과학</a>에서 주장하는 '새로운 격변설'과는 다른 개념이다.<sup><a>&#91;1&#93;</a></sup> </p><p>반대 개념인 ‘<a>동일과정설</a>’<sup><a>&#91;2&#93;</a></sup>이라는 용어는 <a>윌리엄 휴얼</a>에 의해 만들어진 말로 그는 또한 지구가 갑작스럽고, 짧은 삶을 산, 급격한 사건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격변설’이라는 용어도 그가 만들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개요</span></a></li> <li><a><span>2</span> <span>지구 내적 원인에 의한 격변과 멸종</span></a></li> <li><a><span>3</span> <span>지구 외적 원인에 의한 격변과 멸종</span></a></li> <li><a><span>4</span> <span>현대 지질학의 추세</span></a></li> <li><a><span>5</span> <span>같이 보기</span></a></li> <li><a><span>6</span> <span>참고 자료</span></a></li> <li><a><span>7</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개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격변설은 현재 <a>지구</a>의 모습은 과거에 일어난 수많은 격변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p><p>지구 역사에서 많은 격변들이 있었다면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예로는 대형 <a>운석</a> 충돌, 전 세계적인 <a>화산</a>폭발이나 <a>지진</a>, <a>해일</a>, <a>대륙이동</a>, <a>빙하기</a>, 대규모 홍수나 산사태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격변들은 생물의 <a>멸종</a>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격변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는 지구 내부 원인에 의한 격변과 멸종, 그리고 지구 외적 원인에 의한 격변과 멸종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p> <h2><span></span><span>지구 내적 원인에 의한 격변과 멸종</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지구에 살고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생명체들은 태양광, 공기, 물 등과 연결된 지구의 <a>기후 변화</a>에 예민하게 의존되어 있다. 이러한 지구 환경의 예민한 균형이 깨어지면 지구에는 대규모 환경 변화가 일어나며, 이는 곧 수많은 종의 멸종으로 이어진다. 지구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지구환경의 격변과 멸종은 주기적으로 여러 차례 일어났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근래에는 인간에 의한 대규모 지구환경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전 지구적 멸종의 가능성이 점증하고 있다. </p><p>한 예로 대규모 화산 폭발을 생각해 보자. 지구 내부에는 엄청난 양의 화산 기체가 녹아 있는 거대한 마그마 챔버들이 있다. 이러한 화산 기체들은 지구 내부에서 엄청난 압력과 높은 온도의 마그마와 함께 있을 때는 마그마에 용해된 상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격렬한 화산 활동을 통해 이 압력이 낮아지고 마그마가 지표면 가까이로 올라오게 되면 마그마로부터 화산 기체들이 재빨리 끓어올라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그러면 치명적인 화산 기체와 더불어 화산재, 암석 분말 등이 뜨거운 상승기류를 타고 성층권에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고공에서 바람을 타고 전 세계로 흩어지면서 지면을 덮게 되면 심각한 기상이변이 일어나게 되고 농업이 불가능하게 되고, 인류의 문명도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p><p>화산 폭발은 <a>자연 재해</a>라고 할 수 있지만 근래에 와서는 사람에 의한 전 지구적 재해의 가능성도 증가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p><p>첫째, <a>온실효과</a>(greenhouse effect)이다. 온실에서 유리가 식물들을 따뜻하게 유지하듯 대기 중에 포함된 수증기, 이산화탄소, 메탄가스 등은 적외선을 흡수하여 지구 대기의 온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로 인해 우리 지구는 생명체들이 살 수 있는 따뜻한 환경이 유지되고 있다. 정상적으로는 이러한 온실 가스들의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기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난 100여 년간 진행된 산업화의 결과로 대기 중의 <a>이산화탄소</a>와 <a>메탄가스</a>의 양이 현저하게 증가하였으며, 이로 인해 급속한 인위적인 온실효과가 일어나고 있다. 화석 연료를 연소시키면서 발생하는 온실 가스로 인해 급속도록 지구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이미 우리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다. 더욱이 과도한 삼림 벌채로 인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숲이 급속히 사라지면서 온실효과가 더 빠른 속도로 나타나고 있다. </p><p>이처럼 오랜 세월동안 자연이 유지해 오던 균형이 깨어지면서 지구의 기후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a>생태계</a> 파괴는 급속히 진전된다. 인구 증가와 더불어 심해지는 대기 <a>오염</a>을 멈추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경각심을 갖고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 </p><p>둘째, <a>오존층</a>의 파괴이다. 자연에서는 오존이 끊임없이 생성, 소멸되고 있다. <a>자외선</a>이 <a>산소</a>분자(O2)에 조사되면 <a>오존</a>분자(O3)가 생성되는 한편 자연에서 생성된 메탄가스(CH4)는 오존분자를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이 두 과정이 자연에서 평형을 이루면서 오존의 농도를 잘 조절하고 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인간이 합성한 <a>CFC</a>(chlorofluorocarbon)라는 물질이 부가적으로 오존분자를 파괴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에서 오존의 생성-소멸 균형이 깨어지게 되었다. 자외선이 CFC 분자를 분해하게 되면 <a>질소</a>와 <a>염소</a>가 생성되는데 이들이 오존분자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오존이 파괴되는 속도는 오존이 생성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p><p>지구 <a>대기권</a>의 <a>성층권</a> 하층에 존재하는 얇은 오존층은 태양으로부터 쏟아지는 치명적인 자외선의 양을 흡수한다. 하지만 오존층이 파괴되어 점점 얇아지게 되면 점점 더 많은 자외선이 지표면에 도달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지상의 생명체들은 심각한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근래 CFC 배출로 인해 남극 상공에 거대한 오존층 구멍이 생기고 <a>오스트레일리아</a>나 <a>뉴질랜드</a>에 <a>피부암</a>이 급증한 것은 우리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많은 자외선이 지표면에 도달하게 되더라도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피부암이 발생할 가능성이 현저히 증가하며, 또한 대규모 흉작과 기근이 일어나서 인류 문명은 지속되기가 어렵게 된다. </p><p>셋째, <a>핵무기</a>의 위협이다. 지난 세기, 인류는 원자핵에 내재된 엄청난 <a>에너지</a>를 활용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를 응용하여 만든 것이 바로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과 같은 핵무기이다. 인간이 만든 핵무기로 인해 전 지구적인 핵전쟁의 위험은 다른 어떤 것보다 인류의 생존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인류가 소유하고 있는 대형 수소폭탄은 작은 <a>소행성</a>이 지구에 충돌할 때에 못지않은 충격을 줄 수 있다. 만일 전 지구적인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전 세계는 치명적인 <a>방사능</a>으로 오염되어 사람들이 살 수 없을 것이다. 도시와 숲, 공장들이 불 탈 것이고, 이때 방출되는 유독 가스들은 불과 수주일 안에 성층권에 이르러 전 지구적으로 흩어질 것이다. 태양광은 차폐되어 지구 표면의 온도는 15-30도 정도 곤두박질 쳐서 소위 <a>핵겨울</a>(nuclear winter)이 닥칠 것이다. 방사능과 유독 가스들은 전 지구적으로 많은 생물들을 멸종시킬 것이며, 나아가 많은 식물들은 일광 부족으로 죽을 것이다. </p><p>이 외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원인에 의한 기후의 갑작스런 변화, <a>면역력</a>이 전혀 없는 병균의 창궐 등도 생물의 멸종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p> <h2><span></span><span>지구 외적 원인에 의한 격변과 멸종</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이러한 지구 내적인 원인에 더하여 지구 외적인 원인도 지구에 격변과 생물의 멸종을 초래할 수 있다. 우주에는 지구의 생명체들을 송두리째 멸종시킬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이 존재한다. </p><p>첫째, <a>우주진</a>으로 인한 멸종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우주 공간을 진공으로 생각하지만 우주는 밀도가 낮기는 하지만 기체나 먼지, 폭발한 별들이나 우주 형성 이래 남은 잔해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우주진이나 기체의 밀도가 높은 곳을 우리는 <a>성운</a>이라 부른다. 이러한 우주진들은 우리 은하의 나선형팔들 사이에도 널리 분포되어 있다. 만일 우리 지구가 이러한 성운들 사이를 통과하게 된다면 지구 생명체들에게는 격변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지구 대기 중의 먼지 밀도가 높아져서 <a>태양</a>으로부터 빛이나 열이 차단될 정도가 되면 빙하기가 시작될 것이다. </p><p>만일 태양이 성운 사이를 통과하게 되면 먼지들이 지구 중력권으로 끌려와 대기와 마찰을 일으키면서 백열 상태로 타버릴 것이다. 그러면 이로 인해 지구 대기의 온도가 과도하게 증가해서 지구 생명체들에게는 재난이 닥칠 것이다. 이러한 격변과 멸종의 가능성은 크게 높지 않다. 우주진들의 분포로 볼 때 적어도 앞으로 몇 백만 년 동안에는 지구가 성운을 통과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p><p>둘째, 태양의 변화로 인한 격변의 가능성이다. 태양은 기체로 되어 있지만 온도나 압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중심에서 원자들이 서로 융합하는 <a>핵융합</a> 반응을 일으킨다. 태양에서는 1초에 4-5억톤 질량이 에너지로 바뀌면서 지구 생명체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열과 빛을 방출하고 있다. 또한 태양은 중심으로부터 강력한 <a>자기장</a>을 방출하여 우주 공간으로 쏘아 보내고 있다. 이러한 태양이 <a>자전</a>하게 되면 태양의 <a>적도지방</a>이 <a>극지방</a>에 비해 속도가 빠르고 이러한 속도의 차이로 인해 자기장이 뒤틀리게 된다. 그리고 이 뒤틀림이 최대가 되는 곳에 우리가 흔히 태양의 흑점이라고 말하는 것이 형성된다. 흑점의 숫자는 최대와 최소 사이를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과학자들은 흑점 주기와 지구의 기후의 변화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은지를 연구한다. 만일 정말 어떤 관계가 존재한다면 흑정 주기의 변화로 인해 소<a>빙하기</a>와 소<a>간빙기</a>가 반복될 것이다. </p><p>셋째, <a>초신성</a>의 근접 폭발도 지구에서의 격변과 멸종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별들은 수 십 억 년 동안 핵융합으로 인한 압력과 <a>중력</a>이 균형을 이룬다. 하지만 어떤 별들은 질량이 너무 커서 일정 기간 동안 안정을 유지하지만 핵연료가 소진되면 내부로 향하는 중력과 외부로 향하는 핵반응 압력이 균형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초신성을 만들면서 별은 없어진다. 이 대폭발이 일어날 때는 엄청난 양의 치명적인 우주선이 사방으로 발산된다. 이때 초신성으로부터 10<a>광년</a> 이내에 살고 있는 어떤 생물이 있다면 초신성에서 방출되는 강한 <a>X-선</a>과 <a>감마선</a>으로 인해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지금도 지구는 많은 초신성으로부터 방출되는 우주선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이 초신성들까지는 거리가 멀고, 그래서 우주선의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만일 지구 가까이에서 초신성이 폭발하게 된다면 지구상의 생물들은 심각한 유전정보의 손상을 입을 것이며, 대규모 멸종이 불가피하다. 이 가설은 충분한 개연성은 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는 단점이 있다. </p><p>초신성 폭발 시 방출되는 강력한 우주선에 의한 멸종에 더하여 초신성의 폭발 잔해가 지구에 충돌하여 생물의 멸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2005년 버컬리연구소(U.S. Department of Energy’s Lawrence Berkeley National Laboratory)의 핵물리학자 파이어스톤(Richard Firestone)과 애리조나 지질학자 웨스트(Allen West)는 초신성 폭발로 인해 매머드가 멸종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지금부터 41,000년 전, 지구로부터 약 250광년 떨어진 초신성이 폭발했다. 이때 발생한 초기 충격파가 초속 10,000km의 속도로 7,000년 동안 우주공간을 가로질러 와서 지구의 매머드들을 죽였으며, 이어 그로부터 21,000년 후인 13,000년 전에는 초신성 폭발의 잔해로 이루어진 직경 10km 정도의 혜성과 같은 저밀도 물체가 지구에 충돌하여 북미주 대륙에 서식하던 매머드들을 모두 멸종시켰다고 한다. </p><p>넷째, 소행성이나 혜성 충돌에 의한 격변과 멸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소행성 등이 충돌하게 되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수 백만 톤의 미세먼지들이 성층권으로 올라가 지상 생명체들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태양광을 가리게 된다. 충돌로 인한 강한 열풍은 먼지와 연기로 휩싸인 지구를 몇 달간 불폭풍(firestorm) 속에 휩싸이게 할 것이다. 그 후에는 먼지와 숯가루가 마치 비처럼 지구상에 떨어져 중생대와 신생대 경계에 있는 K-T 경계면과 같은 얇은 층을 형성할 것이다. 만일 거대한 소행성이 바다에 떨어졌다면 록키산맥 만큼이나 높은 해일이 일어나 시속 수백km의 속도로 진행하면서 모든 것들을 초토화 시킬 것이다. </p><p>소행성과의 충돌은 확률이 낮지만 실제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태양 주위를 공전하면서 지구는 일 년에도 여러 차례 우주진과 작은 운석들이 있는 곳을 통과하기 때문에 유성쇼(meteor show)가 일어난다. 대부분의 운석들은 너무 작아서 지구 대기권에 진입할 때 타버리기 때문에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위협이 되는 것은 직경이 지구의 공전궤도를 가로질러가는 직경 수 km의 소행성들이다. 단 1km 직경을 가진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더라도 인류 문명 전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기후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 10여 년 동안에만 해도 여러 개의 소행성들이 지구로부터 불과 1백만km 이내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사실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1백만km 떨어진 거리라고 하는 것은 정말 가까운 거리이다. </p> <h2><span></span><span>현대 지질학의 추세</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현재 과학적으로 합의된 바에 따르면 지구의 역사는 전체적으로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이며, 그 가운데 때때로 지구 및 지구에 서식하고 있는 생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자연적 격변이 존재하는 것이다.<sup><a>&#91;3&#93;</a></sup> 즉, 지구 역사를 통틀어 <a>대량 절멸</a>이 최소한 다섯 번 이상 존재했으며<sup><a>&#91;4&#93;</a></sup> 이는 지구 역사상 최소한 다섯 번 이상의 전지구적 대격변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p> <h2><span></span><span>같이 보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동일과정설</a></li></ul> <h2><span></span><span>참고 자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양승훈, 창조와 격변, 2006, <a>ISBN</a>&#160;<a>89-8350-698-9</a></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cite>로널드 L. 넘버스 (2016). &#12298;창조론자들&#12299;. 새물결플러스. 525쪽. <a>ISBN</a>&#160;<a>9791186409558</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로널드 L. 넘버스 (2016). &#12298;창조론자들&#12299;. 새물결플러스. 81쪽. <a>ISBN</a>&#160;<a>9791186409558</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The Columbia Encyclopedia Sixth Edition, <i><a>uniformitarianism</a> <a>Archived</a> 2006년 6월 24일 - <a>웨이백 머신</a></i> © 2007 Columbia University Press.</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lroy, J. (2008). <a>&#8220;Dynamics of origination and extinction in the marine fossil record&#8221;</a>. &#12298;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12299;. 105 Suppl 1 (Supplement_1): 11536–11542. <a>Bibcode</a>:<a>2008PNAS..10511536A</a>. <a>PMC</a>&#160;<a>2556405</a>. <a>PMID</a>&#160;<a>18695240</a>. <a>doi</a>:<a>10.1073/pnas.0802597105</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ol></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격변설&amp;oldid=24195061</a>"</div> <div><div><a>분류</a>: <ul><li><a>창조주의</a></li><li><a>지질학</a></li><li><a>세계관</a></li><li><a>의사과학</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العربية</a></li><li><a>Català</a></li><li><a>Čeština</a></li><li><a>Deutsch</a></li><li><a>English</a></li><li><a>Esperanto</a></li><li><a>Español</a></li><li><a>Euskara</a></li><li><a>فارسی</a></li><li><a>Suomi</a></li><li><a>Français</a></li><li><a>Gaeilge</a></li><li><a>Galego</a></li><li><a>עברית</a></li><li><a>Հայերեն</a></li><li><a>Bahasa Indonesia</a></li><li><a>Italiano</a></li><li><a>日本語</a></li><li><a>ქართული</a></li><li><a>Қазақша</a></li><li><a>Lietuvių</a></li><li><a>Nederlands</a></li><li><a>Polski</a></li><li><a>Português</a></li><li><a>Русский</a></li><li><a>Simple English</a></li><li><a>Türkçe</a></li><li><a>Українська</a></li><li><a>中文</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20: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지난 100여 년간 급속한 온실효과와 지구 온난화를 유발한 원인은?
산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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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00여 년간 급속한 온실효과와 지구 온난화를 유발한 원인은?", "인위적인 온실효과를 일으키는 온실가스가 나오는 원인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숲이 급속히 사라지는 원인은?", "자연에서 자외선이 산소분자에 조사되며 발생하는 물질은?", "산소분자의 화학식은?", "오존분자의 화학식은?", "자연에서 오존분자를 파괴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대형 수소폭탄의 위력은 지구에 충돌하는 무엇과 비교할 수 있나?", "핵겨울 시 지구표면 온도는?", "핵전쟁으로 생기는 유독가스들은 수주일 안에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는가?", "태양이 자전하면서 자기장이 뒤틀리면서 그 뒤틀림이 최대가 되는 곳에 발생하는 것은?", "지구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열과 빛이 되는 태양의 에너지는 1초의 얼마만큼 발생하는가?", "태양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나?", "태양은 1초에 얼마의 질량이 에너지도 바뀌는가?", "태양은 1초에 얼마만큼의 질량을 에너지로 바꾸고 있는가?", "태양의 자전 속도 차이로 자기장이 뒤틀리는데, 이 뒤틈림이 최대가 되는 곳에 생기는 것은 무엇인가?", "별의 내부에서 핵융합이 균형을 이루지 못해 대폭발을 일으킬 경우 무엇으로 변하는가?", "현재 지구가 노출되어 있으나 강도가 약해 큰 문제는 없는 초신성으로부터 방출되는 물질은?", "초신성은 감마선과 무엇을 방출하는가?", "별들이 압력과 중력의 균형을 이루는 원동력은?", "지구 가까이서 초신성이 폭발하면 지구상의 생물들은 어떤 손상을 입나?", "지구 근처에서 초신성이 폭발할 경우 지구의 생물들이 멸종하는 이유는?", "초신성 폭발로 인한 멸종 가설이 제기된 생물은?", "2005년 초신성으로 인한 매머드 멸종설을 주장한 버컬리연구소의 핵물리학자의 이름은?", "버컬리 연구소는 초신성의 폭발로 무엇이 멸종했을 것으로 주장했나?", "버컬리연구소가 초신성의 폭발로 매머드의 멸종을 주장한 해는?", "지구는 어느 행성 주위를 공전하는가?", "운석들이 지구로 진입할때 어디에서 타버리는가? " ]
<!DOCTYPE html> 격변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격변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세인트 헬렌스 산 격변설(激變說, catastrophism)은 격변이 여러 차례 반복되어 현재의 지구의 모습이 되었다는 학설로서, 보통 프랑스 자연철학자 바롱 조르주 퀴비에가 정리한 것을 시초로 본다. 창조과학에서 주장하는 '새로운 격변설'과는 다른 개념이다.[1] 반대 개념인 ‘동일과정설’[2]이라는 용어는 윌리엄 휴얼에 의해 만들어진 말로 그는 또한 지구가 갑작스럽고, 짧은 삶을 산, 급격한 사건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격변설’이라는 용어도 그가 만들었다. 목차 1 개요 2 지구 내적 원인에 의한 격변과 멸종 3 지구 외적 원인에 의한 격변과 멸종 4 현대 지질학의 추세 5 같이 보기 6 참고 자료 7 각주 개요[편집] 격변설은 현재 지구의 모습은 과거에 일어난 수많은 격변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보는 견해이다. 지구 역사에서 많은 격변들이 있었다면 가장 먼저 생각해 볼 수 있는 예로는 대형 운석 충돌, 전 세계적인 화산폭발이나 지진, 해일, 대륙이동, 빙하기, 대규모 홍수나 산사태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격변들은 생물의 멸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대격변의 원인이 무엇인가에 따라 우리는 지구 내부 원인에 의한 격변과 멸종, 그리고 지구 외적 원인에 의한 격변과 멸종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구 내적 원인에 의한 격변과 멸종[편집] 지구에 살고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생명체들은 태양광, 공기, 물 등과 연결된 지구의 기후 변화에 예민하게 의존되어 있다. 이러한 지구 환경의 예민한 균형이 깨어지면 지구에는 대규모 환경 변화가 일어나며, 이는 곧 수많은 종의 멸종으로 이어진다. 지구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지구환경의 격변과 멸종은 주기적으로 여러 차례 일어났음을 볼 수 있다. 특히 근래에는 인간에 의한 대규모 지구환경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전 지구적 멸종의 가능성이 점증하고 있다. 한 예로 대규모 화산 폭발을 생각해 보자. 지구 내부에는 엄청난 양의 화산 기체가 녹아 있는 거대한 마그마 챔버들이 있다. 이러한 화산 기체들은 지구 내부에서 엄청난 압력과 높은 온도의 마그마와 함께 있을 때는 마그마에 용해된 상태로 존재한다. 그러나 격렬한 화산 활동을 통해 이 압력이 낮아지고 마그마가 지표면 가까이로 올라오게 되면 마그마로부터 화산 기체들이 재빨리 끓어올라 거대한 폭발을 일으킨다. 그러면 치명적인 화산 기체와 더불어 화산재, 암석 분말 등이 뜨거운 상승기류를 타고 성층권에까지 올라가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고공에서 바람을 타고 전 세계로 흩어지면서 지면을 덮게 되면 심각한 기상이변이 일어나게 되고 농업이 불가능하게 되고, 인류의 문명도 심각한 위협을 받게 된다. 화산 폭발은 자연 재해라고 할 수 있지만 근래에 와서는 사람에 의한 전 지구적 재해의 가능성도 증가하고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첫째, 온실효과(greenhouse effect)이다. 온실에서 유리가 식물들을 따뜻하게 유지하듯 대기 중에 포함된 수증기, 이산화탄소, 메탄가스 등은 적외선을 흡수하여 지구 대기의 온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로 인해 우리 지구는 생명체들이 살 수 있는 따뜻한 환경이 유지되고 있다. 정상적으로는 이러한 온실 가스들의 변화는 서서히 일어나기 지구상의 생명체들이 이에 적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지난 100여 년간 진행된 산업화의 결과로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메탄가스의 양이 현저하게 증가하였으며, 이로 인해 급속한 인위적인 온실효과가 일어나고 있다. 화석 연료를 연소시키면서 발생하는 온실 가스로 인해 급속도록 지구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은 이미 우리들이 피부로 느끼고 있다. 더욱이 과도한 삼림 벌채로 인해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숲이 급속히 사라지면서 온실효과가 더 빠른 속도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오랜 세월동안 자연이 유지해 오던 균형이 깨어지면서 지구의 기후는 급속도로 변화하고 생태계 파괴는 급속히 진전된다. 인구 증가와 더불어 심해지는 대기 오염을 멈추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경각심을 갖고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 둘째, 오존층의 파괴이다. 자연에서는 오존이 끊임없이 생성, 소멸되고 있다. 자외선이 산소분자(O2)에 조사되면 오존분자(O3)가 생성되는 한편 자연에서 생성된 메탄가스(CH4)는 오존분자를 파괴하는 역할을 한다. 이 두 과정이 자연에서 평형을 이루면서 오존의 농도를 잘 조절하고 있다. 하지만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인간이 합성한 CFC(chlorofluorocarbon)라는 물질이 부가적으로 오존분자를 파괴하기 시작하면서 자연에서 오존의 생성-소멸 균형이 깨어지게 되었다. 자외선이 CFC 분자를 분해하게 되면 질소와 염소가 생성되는데 이들이 오존분자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오존이 파괴되는 속도는 오존이 생성되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지구 대기권의 성층권 하층에 존재하는 얇은 오존층은 태양으로부터 쏟아지는 치명적인 자외선의 양을 흡수한다. 하지만 오존층이 파괴되어 점점 얇아지게 되면 점점 더 많은 자외선이 지표면에 도달하게 되고, 이로 인해 지상의 생명체들은 심각한 생존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근래 CFC 배출로 인해 남극 상공에 거대한 오존층 구멍이 생기고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에 피부암이 급증한 것은 우리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현상이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많은 자외선이 지표면에 도달하게 되더라도 인간에게는 치명적인 피부암이 발생할 가능성이 현저히 증가하며, 또한 대규모 흉작과 기근이 일어나서 인류 문명은 지속되기가 어렵게 된다. 셋째, 핵무기의 위협이다. 지난 세기, 인류는 원자핵에 내재된 엄청난 에너지를 활용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이를 응용하여 만든 것이 바로 원자폭탄이나 수소폭탄과 같은 핵무기이다. 인간이 만든 핵무기로 인해 전 지구적인 핵전쟁의 위험은 다른 어떤 것보다 인류의 생존을 송두리째 위협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인류가 소유하고 있는 대형 수소폭탄은 작은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할 때에 못지않은 충격을 줄 수 있다. 만일 전 지구적인 핵전쟁이 일어난다면 전 세계는 치명적인 방사능으로 오염되어 사람들이 살 수 없을 것이다. 도시와 숲, 공장들이 불 탈 것이고, 이때 방출되는 유독 가스들은 불과 수주일 안에 성층권에 이르러 전 지구적으로 흩어질 것이다. 태양광은 차폐되어 지구 표면의 온도는 15-30도 정도 곤두박질 쳐서 소위 핵겨울(nuclear winter)이 닥칠 것이다. 방사능과 유독 가스들은 전 지구적으로 많은 생물들을 멸종시킬 것이며, 나아가 많은 식물들은 일광 부족으로 죽을 것이다. 이 외에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원인에 의한 기후의 갑작스런 변화, 면역력이 전혀 없는 병균의 창궐 등도 생물의 멸종 원인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구 외적 원인에 의한 격변과 멸종[편집] 이러한 지구 내적인 원인에 더하여 지구 외적인 원인도 지구에 격변과 생물의 멸종을 초래할 수 있다. 우주에는 지구의 생명체들을 송두리째 멸종시킬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이 존재한다. 첫째, 우주진으로 인한 멸종의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흔히 우주 공간을 진공으로 생각하지만 우주는 밀도가 낮기는 하지만 기체나 먼지, 폭발한 별들이나 우주 형성 이래 남은 잔해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우주진이나 기체의 밀도가 높은 곳을 우리는 성운이라 부른다. 이러한 우주진들은 우리 은하의 나선형팔들 사이에도 널리 분포되어 있다. 만일 우리 지구가 이러한 성운들 사이를 통과하게 된다면 지구 생명체들에게는 격변적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지구 대기 중의 먼지 밀도가 높아져서 태양으로부터 빛이나 열이 차단될 정도가 되면 빙하기가 시작될 것이다. 만일 태양이 성운 사이를 통과하게 되면 먼지들이 지구 중력권으로 끌려와 대기와 마찰을 일으키면서 백열 상태로 타버릴 것이다. 그러면 이로 인해 지구 대기의 온도가 과도하게 증가해서 지구 생명체들에게는 재난이 닥칠 것이다. 이러한 격변과 멸종의 가능성은 크게 높지 않다. 우주진들의 분포로 볼 때 적어도 앞으로 몇 백만 년 동안에는 지구가 성운을 통과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둘째, 태양의 변화로 인한 격변의 가능성이다. 태양은 기체로 되어 있지만 온도나 압력이 엄청나기 때문에 중심에서 원자들이 서로 융합하는 핵융합 반응을 일으킨다. 태양에서는 1초에 4-5억톤 질량이 에너지로 바뀌면서 지구 생명체들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열과 빛을 방출하고 있다. 또한 태양은 중심으로부터 강력한 자기장을 방출하여 우주 공간으로 쏘아 보내고 있다. 이러한 태양이 자전하게 되면 태양의 적도지방이 극지방에 비해 속도가 빠르고 이러한 속도의 차이로 인해 자기장이 뒤틀리게 된다. 그리고 이 뒤틀림이 최대가 되는 곳에 우리가 흔히 태양의 흑점이라고 말하는 것이 형성된다. 흑점의 숫자는 최대와 최소 사이를 주기적으로 반복한다. 과학자들은 흑점 주기와 지구의 기후의 변화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지 않은지를 연구한다. 만일 정말 어떤 관계가 존재한다면 흑정 주기의 변화로 인해 소빙하기와 소간빙기가 반복될 것이다. 셋째, 초신성의 근접 폭발도 지구에서의 격변과 멸종의 원인이 될 수 있다. 대부분의 별들은 수 십 억 년 동안 핵융합으로 인한 압력과 중력이 균형을 이룬다. 하지만 어떤 별들은 질량이 너무 커서 일정 기간 동안 안정을 유지하지만 핵연료가 소진되면 내부로 향하는 중력과 외부로 향하는 핵반응 압력이 균형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 초신성을 만들면서 별은 없어진다. 이 대폭발이 일어날 때는 엄청난 양의 치명적인 우주선이 사방으로 발산된다. 이때 초신성으로부터 10광년 이내에 살고 있는 어떤 생물이 있다면 초신성에서 방출되는 강한 X-선과 감마선으로 인해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지금도 지구는 많은 초신성으로부터 방출되는 우주선에 노출되어 있다. 하지만 이 초신성들까지는 거리가 멀고, 그래서 우주선의 강도가 약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만일 지구 가까이에서 초신성이 폭발하게 된다면 지구상의 생물들은 심각한 유전정보의 손상을 입을 것이며, 대규모 멸종이 불가피하다. 이 가설은 충분한 개연성은 있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는 단점이 있다. 초신성 폭발 시 방출되는 강력한 우주선에 의한 멸종에 더하여 초신성의 폭발 잔해가 지구에 충돌하여 생물의 멸종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주장도 나왔다. 2005년 버컬리연구소(U.S. Department of Energy’s Lawrence Berkeley National Laboratory)의 핵물리학자 파이어스톤(Richard Firestone)과 애리조나 지질학자 웨스트(Allen West)는 초신성 폭발로 인해 매머드가 멸종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지금부터 41,000년 전, 지구로부터 약 250광년 떨어진 초신성이 폭발했다. 이때 발생한 초기 충격파가 초속 10,000km의 속도로 7,000년 동안 우주공간을 가로질러 와서 지구의 매머드들을 죽였으며, 이어 그로부터 21,000년 후인 13,000년 전에는 초신성 폭발의 잔해로 이루어진 직경 10km 정도의 혜성과 같은 저밀도 물체가 지구에 충돌하여 북미주 대륙에 서식하던 매머드들을 모두 멸종시켰다고 한다. 넷째, 소행성이나 혜성 충돌에 의한 격변과 멸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소행성 등이 충돌하게 되면 거대한 폭발이 일어나고 수 백만 톤의 미세먼지들이 성층권으로 올라가 지상 생명체들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태양광을 가리게 된다. 충돌로 인한 강한 열풍은 먼지와 연기로 휩싸인 지구를 몇 달간 불폭풍(firestorm) 속에 휩싸이게 할 것이다. 그 후에는 먼지와 숯가루가 마치 비처럼 지구상에 떨어져 중생대와 신생대 경계에 있는 K-T 경계면과 같은 얇은 층을 형성할 것이다. 만일 거대한 소행성이 바다에 떨어졌다면 록키산맥 만큼이나 높은 해일이 일어나 시속 수백km의 속도로 진행하면서 모든 것들을 초토화 시킬 것이다. 소행성과의 충돌은 확률이 낮지만 실제적인 위협이 될 수 있다. 태양 주위를 공전하면서 지구는 일 년에도 여러 차례 우주진과 작은 운석들이 있는 곳을 통과하기 때문에 유성쇼(meteor show)가 일어난다. 대부분의 운석들은 너무 작아서 지구 대기권에 진입할 때 타버리기 때문에 별 위협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위협이 되는 것은 직경이 지구의 공전궤도를 가로질러가는 직경 수 km의 소행성들이다. 단 1km 직경을 가진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더라도 인류 문명 전체를 위협하는 심각한 기후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생각된다. 지난 10여 년 동안에만 해도 여러 개의 소행성들이 지구로부터 불과 1백만km 이내를 "살짝" 스쳐 지나갔다. 사실 이 넓고 넓은 우주에서 1백만km 떨어진 거리라고 하는 것은 정말 가까운 거리이다. 현대 지질학의 추세[편집] 현재 과학적으로 합의된 바에 따르면 지구의 역사는 전체적으로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이며, 그 가운데 때때로 지구 및 지구에 서식하고 있는 생물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자연적 격변이 존재하는 것이다.[3] 즉, 지구 역사를 통틀어 대량 절멸이 최소한 다섯 번 이상 존재했으며[4] 이는 지구 역사상 최소한 다섯 번 이상의 전지구적 대격변이 발생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같이 보기[편집] 동일과정설 참고 자료[편집] 양승훈, 창조와 격변, 2006, ISBN 89-8350-698-9 각주[편집] ↑ 로널드 L. 넘버스 (2016). 《창조론자들》. 새물결플러스. 525쪽. ISBN 9791186409558.  ↑ 로널드 L. 넘버스 (2016). 《창조론자들》. 새물결플러스. 81쪽. ISBN 9791186409558.  ↑ The Columbia Encyclopedia Sixth Edition, uniformitarianism Archived 2006년 6월 24일 - 웨이백 머신 © 2007 Columbia University Press. ↑ Alroy, J. (2008). “Dynamics of origination and extinction in the marine fossil record”. 《Proceedings of the National Academy of Science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105 Suppl 1 (Supplement_1): 11536–11542. Bibcode:2008PNAS..10511536A. PMC 2556405. PMID 18695240. doi:10.1073/pnas.0802597105.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격변설&amp;oldid=24195061" 분류: 창조주의지질학세계관의사과학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CatalàČeština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ҚазақшаLietuviųNederlands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Türkçe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20: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격변설은 지구의 현재 모습이 과거의 여러 격변 사건들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학설이다. 이 이론은 프랑스 자연철학자 바롱 조르주 퀴비에에 의해 정리되었으며, 지구 내적 원인(예: 화산 폭발, 기후 변화)과 외적 원인(예: 소행성 충돌, 태양 변화)으로 나뉜다. 지구 내적 원인으로는 대규모 화산 폭발과 인간의 환경 파괴가 있으며, 이는 생물의 멸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외적 원인으로는 우주진, 태양의 변화, 초신성 폭발, 소행성 충돌 등이 있으며, 이들 또한 생명체에 심각한 위협을 가할 수 있다. 현대 지질학에서는 지구의 역사가 전반적으로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임을 인정하면서도, 때때로 격변이 발생해 생물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보고 있다.
다음 글을 보고, 요약문을 만들되 첫 문장은 전체 주제를 압축적으로, 이후 문장은 세부 정보 중심으로 정리해줘.
진경지
https://ko.wikipedia.org/wiki/진경지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진경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진경지</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d><div><img></div></td><td><span>이 문서의 내용은 <b><a>출처</a>가 분명하지 않습니다.</b><span><br>이 <span><a>문서를 편집</a></span>하여, <a>신뢰할 수 있는 출처</a>를 표기해 주세요. <a>검증</a>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a>토론 문서</a>에서 나누어 주세요.</span> <small>(2010년 11월)</small><span></span></span></td></tr></tbody></table> <p><b>진경지</b>(陳慶之, <a>484년</a> ~ <a>539년</a>)는 <a>중국</a> <a>남북조 시대</a>의 무장으로, <a>양 왕조</a>의 정권 아래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p> <h2><span></span><span>개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조상들도 대대로 군인을 배출했던 군인 집안 출신이다. 하지만 몸이 허약하고 검술이나 기마술에도 형편없어서 가족들은 쟁쟁한 형제들에겐 기대를 걸었지만 진경지에겐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 <a>제 왕조</a>의 고위 관료였던 <a>소연</a>은 바둑을 대단히 좋아했는데, 어린 진경지가 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자 그때부터 자주 어울리며 총애했다. 진경지가 권력을 얻을 수 있었던 데는 소연의 후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 </p><p>당시의 국왕은 허약한 권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매우 잔인한 공포 정치를 펼쳤는데, 이에 반발하여 진현달, 배숙업, 최혜경 등의 당시의 유명한 장군들이 연달아 반란을 일으켰고 서기 500년에는 소연도 반란에 합류했는데 이 때 진경지 역시 생애 처음으로 군대를 이끌고 함께 했다. 반란 과정에서 진경지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면서 훨씬 힘이 강하던 다른 반란군들을 제압하고 나아가 왕군을 괴멸시켰다. 제의 수도를 함락시킨 것도 진경지였다. 이 공으로 소연은 진경지에게 대장군의 자리를 주었다. 이 후 진경지는 봉급과 가지고 있던 사재를 모두 자기 사람을 모으고 조직하는 데 썼지만 소양은 결코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진경지의 권력을 갈수록 더해주었다. </p><p>당시 중국의 중앙부를 지배하던 북위와 새로 소연이 세운 양은 525년을 시작으로 수십 년에 걸쳐 이어지게 될 전면전을 시작하였다. 진경지는 2천 명의 기병대만을 이끌고 재빨리 선수를 쳐서 예장왕을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이때 진경지 외에도 두 명의 장군(그 중 한 명은 왕인 소연의 동생이었다)이 각기 다른 경로로 북침했지만 보루를 쌓고 적의 퇴로를 끊은 북위의 군대에게 전멸당했다. 홀로 공을 세운 진경지는 이제 두 사람의 잠재적 경쟁자가 전사하면서 명백하게 군권의 정점에 설 수 있게 되었다. </p><p>526년, 북위에서 승세를 몰아 11만 5천 명의 군대를 파견해 양을 공격한다. 전선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국경의 책임자마저 북위에게 항복했기에 단숨에라도 적군이 수도에까지 밀고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대장군이 된 진경지는 방어 대신 적극적인 공세로 나서 적의 기점 역할을 하던 수춘으로 진입해 2달 만에 53개의 성을 점령하고 9만 명의 적을 죽였다. 앞뒤로 포위될 것을 두려워해 수춘으로 공격해 온 북위의 주력군은 와양 평원에서 진경지와 마주보고 포진하였다. 부사령관이던 위방은 "지금은 수비를 굳건히 하면서 적이 지치길 기다려야 하며, 양의 수도에서 원군이 오면 적을 포위해서 무찌를 수 있다" 고 주장했다. 하지만 진경지는 첫째, 양의 본국에 있는 전력은 믿을 수 없으며, 북위군에게 각개격파당할 위험이 크다. 둘째, 지금 점령한 수춘은 믿을 수 없고 우리 군대는 적으니 언제 적을 도와 배반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아군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될 것‘ 이라며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적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 병사들이 두려워하며 나아가지 않자 진경지는 직접 병사들을 힘있게 독려하며 ’우리는 이제껏 승리를 거듭했다. 이번 전투는 우리의 명예를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다‘라며 스스로 선두에 서서 전쟁을 지휘했다. 전투는 진경지의 승리로 끝났고, 양은 양자강 이북에 영토를 가지면서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대단한 우위에 설 수 있게 된다. </p><p>529년을 시작으로 진경지는 방어가 아니라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원정을 수행하게 된다. 첫 해에 13개의 성을 빼앗았고, 특히 교통의 요지인 양양과 여남을 교묘한 속임수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접수한 것은 의미가 컸다. 이제 진경지의 군대는 북위의 중심부까지 진격할 수 있는 길을 뚫은 셈이었다. 하지만 진경지는 곧바로 진격하는 것을 자제하고 북위의 영토 각지를 공격하면서 적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진경지의 군대 가운데 핵심 주력은 3천 명의 기병이었는데, 이들은 진경지가 처음 전쟁에 나왔을 때부터 함께한 최정예 군단이었다. 이들은 모두 흰 갑옷을 입어서 자신들을 상징했다. </p><p>531년 2번째 북벌에 나섰을 때 진경지 휘하의 병력은 6만 명이었다. 이는 전쟁으로 인구가 감소한 중국에선 상당한 대군이지만 북위를 제압하기엔 역시 부족한 병력이었다. 북위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20만 명을 웃돌았고 당장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상비군도 10만 명에 가까웠다. 게다가 적지에서 전쟁을 하는 만큼 군수품 보급의 문제도 장군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난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후 8년간 벌인 전쟁에서 진경지는 47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고 32개의 도시, 그것도 북위의 핵심부인 황하 유역에 위치한 대도시들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 역사상 양자강 이남에서 일어난 세력이 인구가 많은 황하 유역을 장악한 세력을 상대로 공세를, 그것도 이처럼 성공적인 공세를 펼친 사례로는 진경지가 거의 유일하다. 보급의 문제로 영구적으로 점령을 유지하지는 못했지만 4천 명의 별동대로 3만 명의 북위군이 수비하던 낙양을 함락하기도 했다. </p><p>하지만 국력에서 본래 양을 압도하던 북위는 국내 깊숙이 들어온 진경지를 상대로 조직적인 반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낙양에선 기근이 심해 식량이 없었고 게다가 화산 폭발까지 겹쳤다. 결국 61일간 낙양에 주둔하던 진경지는 군대를 이끌고 회군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주영이 이끄는 북위군에게 덜미가 잡혀 적지 않은 병력을 잃었고, 진경지 스스로도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머리를 밀어야 했다. 하지만 신속한 후퇴와 도중에 매복 작전으로 반격에 성공, 추격군을 격퇴 시키고 무사히 귀국하는데 성공했다. 개중엔 진경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관료들도 있었지만 그의 전공으로 북위의 국력이 크게 쇠퇴한 것은 명백했다. 실제로 강성하던 북위는 진경지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기력을 다해 4년 이후 멸망했다. </p><p>북위의 영토가 여러 번국들로 나뉘자 진경지는 세 번째 북벌을 감행했다. 황하강의 하류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후경을 상대하면서 폭설로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병사들을 강하게 결속시키고 역전에 성공한다. 이 때 진경지는 자기가 죽을 것으로 짐작하고 유서를 남기기까지 했으니 그 위급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진경지와 그의 군대는 식량이 바닥나 8일 동안 잡초와 나무껍질로 연명했다. </p><p>나이 54세에 마지막 원정을 나가 반란을 일으킨 승강을 명령을 받은 지 12일 만에 참수하고 7만 명의 포로를 잡아왔다. 당 왕조 시대의 역사가들이 기록하기를 ‘진경지의 전공은 세상을 뒤덮었다. 그 공은 한신에 버금가고, 곽거병과 백기에 필적하며, 악의와 염파와 이목을 더한 것보다 크다’며 고대 중국의 가장 유명한 장군들 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p><p>진경지는 성격이 신중하고, 누구의 말에건 겸손한 자세로 귀를 기울였다. 생활은 검소하고, 그저 흰 옷을 입었을 뿐이며, 유흥을 좋아하지 않았다. 허약한 체력과 볼품없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부하들로 하여금 그에게 목숨을 바치도록 할 줄 알았다. 더욱이 특이한 점은 진경지는 출신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문벌을 중시했던 남조 양나라에서는 그와 같은 출신으로 고관에 오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양나라 역사상 그와 같은 지위에 오른 사람은 진경지가 유일했다 </p>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진경지&amp;oldid=23157840</a>"</div> <div><div><a>분류</a>: <ul><li><a>484년 태어남</a></li><li><a>539년 죽음</a></li><li><a>양 (남조)의 장군</a></li><li><a>우시시 출신</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출처가 필요한 글/2010년 11월</a></li><li><a>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a></li><li><a>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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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6년 대장군이된 진경지는 적군에게 수도까지 내어줄뻔한 상황에서 어디로 진입하여 2달만에 53개성을 점령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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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26년 대장군이된 진경지는 적군에게 수도까지 내어줄뻔한 \n상황에서 어디로 진입하여 2달만에 53개성을 점령하였는가?", "526년 진경지가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경제적,군사적으로 우위를 가졌는던 영토는?", "북위에서 승세를 몰아 11만 5천 명의 군대를 파견해 양을 공격한 것은 언제인가?", "526년에 진경지가 방어대신 적극적인 공세로 2달 만에 점령한 성은 몇 개인가?", "526년 북위에서 승세를 받아 몇 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는가?", "북위의 공격에도 진경지는 몇 달만에 9만 명의 적을 죽였는가?", "당시 진경지 옆의 부사령관이었던 인물의 이름은?", "531년 2번째 북벌이후 8년간 전투에서 승리한 횟수는?", "531년 2번째 북벌에 나섰을 때 진경지 휘하의 병력은 얼마였나?", "531년 2번째 북벌에 나섰을 때 진경지 휘하의 병력은 몇 명인가?", "진경지가 8년간 벌인 전쟁에서 승리한 횟수는 얼마인가?", "진경지가 2번째 북벌에 나선 년도는?", "당시 북위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몇 명 정도 되었는가?", "당시 8년 간의 전쟁에서 진경지는 몇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는가?", "강성하던 북위는 진경지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기력을 다해 몇년이후 멸망하였는가?", "61일간 낙양에 주둔하던 진경지는 심한 기근과 무엇때문에 회군하였는가?", "화산 폭발등의 이유로 진경지의 군대가 낙양에 주둔한 기간은 얼마인가?", "진경지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북위가 멸망한 기간은 얼마인가?", "진경지는 낙양에서 몇 일 만에 군대를 이끌고 회군했는가?", "당시 낙양 근처에서 진경지가 공격을 당한 북위군을 이끈 장군의 이름은?", "진경지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기력을 다한 북위는 몇 년만에 멸망했는가?" ]
<!DOCTYPE html> 진경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진경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d></td><td>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0년 11월)</td></tr></tbody></table> 진경지(陳慶之, 484년 ~ 539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무장으로, 양 왕조의 정권 아래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개요[편집] 조상들도 대대로 군인을 배출했던 군인 집안 출신이다. 하지만 몸이 허약하고 검술이나 기마술에도 형편없어서 가족들은 쟁쟁한 형제들에겐 기대를 걸었지만 진경지에겐 거의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당시 제 왕조의 고위 관료였던 소연은 바둑을 대단히 좋아했는데, 어린 진경지가 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있자 그때부터 자주 어울리며 총애했다. 진경지가 권력을 얻을 수 있었던 데는 소연의 후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 당시의 국왕은 허약한 권력 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매우 잔인한 공포 정치를 펼쳤는데, 이에 반발하여 진현달, 배숙업, 최혜경 등의 당시의 유명한 장군들이 연달아 반란을 일으켰고 서기 500년에는 소연도 반란에 합류했는데 이 때 진경지 역시 생애 처음으로 군대를 이끌고 함께 했다. 반란 과정에서 진경지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면서 훨씬 힘이 강하던 다른 반란군들을 제압하고 나아가 왕군을 괴멸시켰다. 제의 수도를 함락시킨 것도 진경지였다. 이 공으로 소연은 진경지에게 대장군의 자리를 주었다. 이 후 진경지는 봉급과 가지고 있던 사재를 모두 자기 사람을 모으고 조직하는 데 썼지만 소양은 결코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진경지의 권력을 갈수록 더해주었다. 당시 중국의 중앙부를 지배하던 북위와 새로 소연이 세운 양은 525년을 시작으로 수십 년에 걸쳐 이어지게 될 전면전을 시작하였다. 진경지는 2천 명의 기병대만을 이끌고 재빨리 선수를 쳐서 예장왕을 사로잡는 공을 세웠다. 이때 진경지 외에도 두 명의 장군(그 중 한 명은 왕인 소연의 동생이었다)이 각기 다른 경로로 북침했지만 보루를 쌓고 적의 퇴로를 끊은 북위의 군대에게 전멸당했다. 홀로 공을 세운 진경지는 이제 두 사람의 잠재적 경쟁자가 전사하면서 명백하게 군권의 정점에 설 수 있게 되었다. 526년, 북위에서 승세를 몰아 11만 5천 명의 군대를 파견해 양을 공격한다. 전선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국경의 책임자마저 북위에게 항복했기에 단숨에라도 적군이 수도에까지 밀고 들어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대장군이 된 진경지는 방어 대신 적극적인 공세로 나서 적의 기점 역할을 하던 수춘으로 진입해 2달 만에 53개의 성을 점령하고 9만 명의 적을 죽였다. 앞뒤로 포위될 것을 두려워해 수춘으로 공격해 온 북위의 주력군은 와양 평원에서 진경지와 마주보고 포진하였다. 부사령관이던 위방은 "지금은 수비를 굳건히 하면서 적이 지치길 기다려야 하며, 양의 수도에서 원군이 오면 적을 포위해서 무찌를 수 있다" 고 주장했다. 하지만 진경지는 첫째, 양의 본국에 있는 전력은 믿을 수 없으며, 북위군에게 각개격파당할 위험이 크다. 둘째, 지금 점령한 수춘은 믿을 수 없고 우리 군대는 적으니 언제 적을 도와 배반할지 모른다. 그렇게 되면 아군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될 것‘ 이라며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적의 수가 많은 것을 보고 병사들이 두려워하며 나아가지 않자 진경지는 직접 병사들을 힘있게 독려하며 ’우리는 이제껏 승리를 거듭했다. 이번 전투는 우리의 명예를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다‘라며 스스로 선두에 서서 전쟁을 지휘했다. 전투는 진경지의 승리로 끝났고, 양은 양자강 이북에 영토를 가지면서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대단한 우위에 설 수 있게 된다. 529년을 시작으로 진경지는 방어가 아니라 영토 확장을 목적으로 원정을 수행하게 된다. 첫 해에 13개의 성을 빼앗았고, 특히 교통의 요지인 양양과 여남을 교묘한 속임수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접수한 것은 의미가 컸다. 이제 진경지의 군대는 북위의 중심부까지 진격할 수 있는 길을 뚫은 셈이었다. 하지만 진경지는 곧바로 진격하는 것을 자제하고 북위의 영토 각지를 공격하면서 적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진경지의 군대 가운데 핵심 주력은 3천 명의 기병이었는데, 이들은 진경지가 처음 전쟁에 나왔을 때부터 함께한 최정예 군단이었다. 이들은 모두 흰 갑옷을 입어서 자신들을 상징했다. 531년 2번째 북벌에 나섰을 때 진경지 휘하의 병력은 6만 명이었다. 이는 전쟁으로 인구가 감소한 중국에선 상당한 대군이지만 북위를 제압하기엔 역시 부족한 병력이었다. 북위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은 20만 명을 웃돌았고 당장 전투에 동원할 수 있는 상비군도 10만 명에 가까웠다. 게다가 적지에서 전쟁을 하는 만큼 군수품 보급의 문제도 장군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난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후 8년간 벌인 전쟁에서 진경지는 47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를 거두었고 32개의 도시, 그것도 북위의 핵심부인 황하 유역에 위치한 대도시들을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 역사상 양자강 이남에서 일어난 세력이 인구가 많은 황하 유역을 장악한 세력을 상대로 공세를, 그것도 이처럼 성공적인 공세를 펼친 사례로는 진경지가 거의 유일하다. 보급의 문제로 영구적으로 점령을 유지하지는 못했지만 4천 명의 별동대로 3만 명의 북위군이 수비하던 낙양을 함락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력에서 본래 양을 압도하던 북위는 국내 깊숙이 들어온 진경지를 상대로 조직적인 반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낙양에선 기근이 심해 식량이 없었고 게다가 화산 폭발까지 겹쳤다. 결국 61일간 낙양에 주둔하던 진경지는 군대를 이끌고 회군했는데 이 과정에서 이주영이 이끄는 북위군에게 덜미가 잡혀 적지 않은 병력을 잃었고, 진경지 스스로도 적의 눈에 띄지 않도록 머리를 밀어야 했다. 하지만 신속한 후퇴와 도중에 매복 작전으로 반격에 성공, 추격군을 격퇴 시키고 무사히 귀국하는데 성공했다. 개중엔 진경지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관료들도 있었지만 그의 전공으로 북위의 국력이 크게 쇠퇴한 것은 명백했다. 실제로 강성하던 북위는 진경지의 공격을 막아내면서 기력을 다해 4년 이후 멸망했다. 북위의 영토가 여러 번국들로 나뉘자 진경지는 세 번째 북벌을 감행했다. 황하강의 하류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후경을 상대하면서 폭설로 위기에 빠지기도 했지만 병사들을 강하게 결속시키고 역전에 성공한다. 이 때 진경지는 자기가 죽을 것으로 짐작하고 유서를 남기기까지 했으니 그 위급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때 진경지와 그의 군대는 식량이 바닥나 8일 동안 잡초와 나무껍질로 연명했다. 나이 54세에 마지막 원정을 나가 반란을 일으킨 승강을 명령을 받은 지 12일 만에 참수하고 7만 명의 포로를 잡아왔다. 당 왕조 시대의 역사가들이 기록하기를 ‘진경지의 전공은 세상을 뒤덮었다. 그 공은 한신에 버금가고, 곽거병과 백기에 필적하며, 악의와 염파와 이목을 더한 것보다 크다’며 고대 중국의 가장 유명한 장군들 중에서도 특히 돋보이는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진경지는 성격이 신중하고, 누구의 말에건 겸손한 자세로 귀를 기울였다. 생활은 검소하고, 그저 흰 옷을 입었을 뿐이며, 유흥을 좋아하지 않았다. 허약한 체력과 볼품없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부하들로 하여금 그에게 목숨을 바치도록 할 줄 알았다. 더욱이 특이한 점은 진경지는 출신이 빈약하다는 점이다. 문벌을 중시했던 남조 양나라에서는 그와 같은 출신으로 고관에 오르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양나라 역사상 그와 같은 지위에 오른 사람은 진경지가 유일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진경지&amp;oldid=23157840" 분류: 484년 태어남539년 죽음양 (남조)의 장군우시시 출신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0년 11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Tiếng Việt中文文言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2월 4일 (화) 18:4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진경지(陳慶之, 484년 ~ 539년)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무장으로, 양 왕조에서 군인으로 복무했다. 그의 출생 배경은 군인 집안이었으나, 허약한 체력과 부족한 무술 실력으로 가족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고위 관료 소연의 후원으로 군사적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1. **반란의 시작 (500년)**: 당시 국왕의 잔인한 공포 정치에 반발하여 진경지는 소연과 함께 반란에 참여, 군대를 이끌고 성공적인 전투를 이끌어 제의 수도를 함락시켰다. 이로 인해 대장군으로 임명되었다. 2. **전면전의 시작 (525년)**: 북위와의 전면전이 시작되었고, 진경지는 2천 명의 기병으로 예장왕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그는 군권의 정점에 서게 되었다. 3. **적극적인 공세 (526년)**: 북위의 대군이 양을 공격하자, 진경지는 방어 대신 공격을 선택하여 수춘을 점령하고 대승을 거두었다. 이로 인해 양은 군사적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4. **영토 확장 (529년)**: 진경지는 영토 확장을 위해 원정을 시작, 13개의 성을 점령하고 북위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5. **두 번째 북벌 (531년)**: 진경지는 6만 명의 병력으로 북위에 대한 전투를 벌여 47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 32개의 도시를 점령했다. 그러나 보급 문제로 영구 점령은 어려웠다. 6. **반격과 회군 (북위의 반격)**: 북위의 조직적인 반격과 기근으로 인해 진경지는 낙양에서 회군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일부 병력을 잃었다. 그러나 그의 공격으로 북위의 국력이 크게 쇠퇴했다. 7. **세 번째 북벌 (북위 분열 후)**: 북위가 여러 번국으로 나뉘자 진경지는 세 번째 북벌을 감행, 극한 상황에서도 병사들을 결속시켜 역전의 기회를 잡았다. 8. **최후의 원정 (539년)**: 54세에 마지막 원정을 나가 반란을 진압하고 7만 명의 포로를 잡아왔다. 그의 전공은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받았다. 진경지는 신중하고 겸손한 성격으로, 검소한 생활을 하며 부하들에게 존경받았다. 그의 출신이 빈약했음에도 불구하고 고관에 오른 것은 드문 일이었다.
텍스트 내용을 시간순 또는 인과관계 순으로 재배열해서 요약해줘. 사건의 흐름이나 논리 전개 순서를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줘.
내털리_트랜
https://ko.wikipedia.org/wiki/내털리_트랜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내털리 트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내털리 트랜</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h colspan="2">내털리 트랜</th></tr><tr><td colspan="2"> <a><img></a><br><div>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서 열린 2010 EG 컨벤션에서의 나탈리 트랜</div></td></tr><tr><th>본명</th> <td> Natalie Tyler Tran</td></tr><tr><th>출생</th> <td> 1986년 7월 23일<span>(<span>1986-07-23</span>)</span> (32세)<br><span><a>오스트레일리아</a> <a>시드니</a></span></td></tr><tr><th>국적</th> <td> <a>오스트레일리아</a></td></tr><tr><th>활동 영역</th> <td> 스케치 코미디, 비디오 블로깅</td></tr><tr><th>활동 기간</th> <td> 2006년 ~ 현재</td></tr> </tbody></table> <p><b>내털리 타일러 트랜</b>(Natalie Tyler Tran, 1986년 7월 23일 ~ )은 <a>오스트레일리아</a> <a>시드니</a>출신의 유명한 <a>유튜브</a> <a>비디오 블로거</a>이며, 유튜브 닉네임은 'communitychannel'을 사용하고 있다. <sup><a>&#91;1&#93;</a></sup> 나탈리는 유머있는 독백과 혼자서 진행하는 촌극덕에 유튜브에서 가장많은 구독자를 거느린 호주인 유튜버가 되었다.<sup><a>&#91;2&#93;</a></sup>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li> <li><a><span>2</span> <span>인기</span></a></li> <li><a><span>3</span> <span>비디오</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와 인용</span></a></li> <li><a><span>5</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나탈리의 부모님은 1981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온 베트남인 난민이다. 나탈리의 부모님은 각각 베트남에서 변호사와 문학교수였으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우편공무원과 공립학교교사가 되었다. 나탈리는 시드니에서 자랐으며, 고등학교 졸업후 <a>뉴사우스웨일스 대학교</a>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으나 2년후에 디지털미디어과로 전과하였다. <sup><a>&#91;3&#93;</a></sup><sup><a>&#91;4&#93;</a></sup> </p> <h2><span></span><span>인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2012년 9월 기준으로, 나탈리의 유튜브채널에는 293개의 비디오가 올려져있으며, 현재까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많은 구독자수를 가지고 있는 채널이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는 유튜브 구독자수 26위를 기록하고있으며,<sup><a>&#91;5&#93;</a></sup> 감독으로서는 전세계적으로 7번째 많은 구독자를 가지고있다.<sup><a>&#91;6&#93;</a></sup> 또한, 현재까지 유튜브에서 58번째로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고있다.<sup><a>&#91;7&#93;</a></sup> 나탈리는 마이클 버클리가 주최한 미스 유튜브 콘테스트에서 1위를 차지한 경력이 있다.<sup><a>&#91;8&#93;</a></sup> 나탈리의 첫 비디오는 2006년 9월 25일에 제작되었다.<sup><a>&#91;9&#93;</a></sup> </p><p>나탈리는 100만명 이상의 구독자수를 가지고있으며, 나탈리의 비디오들은 총합 4억 600만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있다.<sup><a>&#91;10&#93;</a></sup> 이러한 인기로 인하여 나탈리는 아래와 같은 다양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The Sydney Morning Herald,<sup><a>&#91;4&#93;</a></sup> Western Australia Today,<sup><a>&#91;11&#93;</a></sup> B&amp;T Magazine,<sup><a>&#91;12&#93;</a></sup> Venus Zine.<sup><a>&#91;13&#93;</a></sup> Der Spiegel,<sup><a>&#91;14&#93;</a></sup> Báo Viêt Luận Online,<sup><a>&#91;15&#93;</a></sup> Việt Tribune,<sup><a>&#91;16&#93;</a></sup> VnExpress,<sup><a>&#91;17&#93;</a></sup> Triple J,<sup><a>&#91;18&#93;</a></sup> Hot30 Countdown,<sup><a>&#91;19&#93;</a></sup> mk 뉴스.<sup><a>&#91;20&#93;</a></sup> 미국인 유튜브 비디오 블로거인 Ben Going의 <a>베지마이트</a>를 비하하는 비디오에 대한 응답으로 나탈리가 올린<sup><a>&#91;21&#93;</a></sup> 베지마이트 변호비디오는<sup><a>&#91;22&#93;</a></sup> 오스트레일리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i>A Current Affair</i> 에 <a>베지마이트</a> 전쟁의 한 부분으로 2007년 2월에 소개되었다. 나탈리의 최고 조회수 기록 비디오는<sup><a>&#91;23&#93;</a></sup> 2012년 4월 기준으로 3천 4백만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였으며<sup><a>&#91;24&#93;</a></sup> 그 후에도 조회수는 상당한 속도로 증가하고있다. </p><p>나탈리는 창의성과 인터넷에서의 인기로인해 여러경로로 인식되었다. 나탈리는 오스트레일리아판 유튜브가 2007년에 공개되었을때 초대받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유튜브 유명인사중 하나였다.<sup><a>&#91;25&#93;</a></sup> 나탈리는 현재 The Sydney Morning Herald지의 기술에 대한 비디오 블로그인 <i><a>Digital Life</a></i>에 토론자와 실생활 기자로서 메인진행자이자 저널리스트인 Séamus Byrne의 보조를 받으며 참여하고있다.<sup><a>&#91;26&#93;</a></sup><i>Digital Life</i>에서의 나탈리의 풍자물은 특별히 이를 위해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탈리의 유튜브 영상물과 거의 동일한 방식과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나탈리는 2009년 5월 시드니현대미술관에서 "Creative Sydney"의 진행자를 맡은 경력이 있다.<sup><a>&#91;27&#93;</a></sup><sup><a>&#91;28&#93;</a></sup> 나탈리는 Mashable지의 2009년 <i>Open Web Awards</i>에서 "최고의 유튜브 채널 또는 성격"과 "가장 재미있는 유튜브 채널"분야에 후보로 지명되었다.<sup><a>&#91;29&#93;</a></sup> 나탈리는 <a>미국</a> <a>캘리포니아주</a> 몬터레이에서 열린 2010 Entertainment Gathering (EG) 컨벤션의 발표자중 하나였다.<sup><a>&#91;30&#93;</a></sup> 같은 해 나탈리는 <a>캐나다</a> <a>토론토</a>에서 열린 ideaCity의 발표자를 맡기도 하였다.<sup><a>&#91;31&#93;</a></sup><sup><a>&#91;32&#93;</a></sup> 2010년, 동영상 분석업체인 TubeMogul에서는 나탈리를 유튜브 광고부문에서 최고 수익자 상위 10명중에서 10위로 선정하였다. 나탈리는 101,000달러의 수익과 138,871,829회의 조회수를 기록하였다.<sup><a>&#91;1&#93;</a></sup> 이러한 특이한 인기와 높은 수익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언론에도 잠시 소개된바가 있다.<sup><a>&#91;33&#93;</a></sup> 유튜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나탈리의 채널은 2011년 3월의 한주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대다수 유명 텔레비전쇼보다 많은 시청률을 기록하였다고한다.<sup><a>&#91;34&#93;</a></sup> 2010년 11월, 나탈리는 <a>론리 플래닛</a>에서 후원하는 전세계 대장정을 떠났다.<sup><a>&#91;35&#93;</a></sup> 나탈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토크쇼인 The Project의 멜버른, 퍼스, 애들레이드, 시드니, 브리즈번의 주말 이벤트를 소개하는 Metro Whip Segment 코너의 시드니 주재원이다. 나탈리는 2011년 9월 4일에 오스트레일리아의 게임쇼인 Talkin' 'Bout Your Generation의 시리즈 3에 게스트로 출연한적이있다.<sup><a>&#91;36&#93;</a></sup> </p> <h2><span></span><span>비디오</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나탈리의 비디오는 전형적으로 나탈리가 카메라앞에서 풍자를 곁들인 독백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일반적인 주제로는 친구의 선물에 얼마만큼의 돈을 써야하는지나<sup><a>&#91;37&#93;</a></sup> 적절한 전화 예절 등에 대한 사회적 딜레마에 대한 의식의 흐름을 사용한 해설뿐 아니라<sup><a>&#91;38&#93;</a></sup> 관찰적 유머와 자기비하 유머가 있다. 이 주제들에대한 예를 들자면 광고주들의 이상하고 판에박힌 관행을 조롱하거나<sup><a>&#91;39&#93;</a></sup> 초음파의사의 장난이 있다.<sup><a>&#91;40&#93;</a></sup> 종종 나탈리는 다른 유튜브 비디오의 패러디영상을 올리기도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비디오는 "식스팩 복근을 만드는법"에대한 패러디가 있다. 이 비디오는 나탈리의 비디오중 최고 조회수를 기록하고있다.<sup><a>&#91;41&#93;</a></sup> 조금 더 진지한 소재의 경우에는 나탈리의 2009년 2월 빅토리아주 산불에 대한 응답이 있다.<sup><a>&#91;42&#93;</a></sup> </p><p>나탈리는 대부분의 경우 포르노 영화에 나올법한 음악을 배경으로 지난 비디오에 달린 덧글을 보여주며 그에 대한 답변을 하는 "포르노 뮤직/코멘트 타임"이라는 코너로 비디오를 끝을낸다. </p><p>2009년 초에 나탈리는 "There's no time!!! Last words"라는 제목의 비디오에서 호주의 전통 디저트인 래밍턴의 조리법을 알려주는 비디오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으나 지금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이로인해 실망한 많은 팬들은 나탈리의 비디오네 유머있는 댓글로 그 실망감을 종종 표출하기도 한다. </p><p>추가적으로 제작하는 일반적인 비디오는 론리 플래닛에 올리는 여행 비디오가 있다. 이 비디오들은 나탈리의 세계 각지의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나탈리 특유의 유머감각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p><p>2011년 7월에 <i><a>포브스지</a></i>와의 인터뷰에서 나탈리는 미래에대한 불확신을 이유로 비디오 제작을 중단하고 작가활동을 하는것을 고려하고 있다고한다.<sup><a>&#91;43&#93;</a></sup> </p> <h2><span></span><span>각주와 인용</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ol>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cite>Firth, Niall (2010년 8월 29일). <a>&#8220;Revealed: the YouTube rich list of the new stars making a fortune from their bedrooms&#8221;</a>. Daily Mail/Mail Online<span>. 2010년 10월 17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communitychannel. <a>&#8220;All Channels, Most Subscribed, All Time&#8221;</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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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탈리는 토론토에서 열린 ideaCity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가?
발표자
null
96871
10,301
[ "나탈리는 토론토에서 열린 ideaCity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가?", "TubeMogul에서 나탈리를 유투브 최고 수익자 몇 위로 선정하였는가?", "2010년 11월 나탈리는 어디에서 후원하는 전세계 대장정을 떠났는가?", "유튜브 광고부문 최고 수익자 상위 10명 중 나탈리의 순위는?", "나탈리의 전세계 대장정을 후원한 곳은?", "나탈리가 가장 재미있는 유튜브 채널 분야의 후보로 지명된 시상식은?", "나탈리가 시드니현대미술관에서 진행자를 맡은 때는?", "나탈리는 유튜브 광고부문에서 최고 수익자 상위 10명중에 몇위로 선정되었나?", "나탈리가 오스트레일리아의 게임쇼에 게스트로 출연한 때는?", "종종 나탈리는 다른 유투브에 대한 어떤 영상을 올리는가?", "나탈리의 가장 유명하여 최고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비디오가 패러디한 영상의 제목은?", "나탈리가 다룬 진지한 소재로 2009년 2월 일어난 사건은?", "나탈리의 가장 유명한 비디오는 무엇에 대한 패러디인가?", "나탈리의 비디오는 나탈리가 카메라앞에서 무엇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나?" ]
<!DOCTYPE html> 내털리 트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내털리 트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내털리 트랜</th></tr><tr><td colspan="2">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서 열린 2010 EG 컨벤션에서의 나탈리 트랜</td></tr><tr><th>본명</th> <td> Natalie Tyler Tran</td></tr><tr><th>출생</th> <td> 1986년 7월 23일(1986-07-23) (32세)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td></tr><tr><th>국적</th> <td> 오스트레일리아</td></tr><tr><th>활동 영역</th> <td> 스케치 코미디, 비디오 블로깅</td></tr><tr><th>활동 기간</th> <td> 2006년 ~ 현재</td></tr> </tbody></table> 내털리 타일러 트랜(Natalie Tyler Tran, 1986년 7월 23일 ~ )은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출신의 유명한 유튜브 비디오 블로거이며, 유튜브 닉네임은 'communitychannel'을 사용하고 있다. [1] 나탈리는 유머있는 독백과 혼자서 진행하는 촌극덕에 유튜브에서 가장많은 구독자를 거느린 호주인 유튜버가 되었다.[2] 목차 1 생애 2 인기 3 비디오 4 각주와 인용 5 외부 링크 생애[편집] 나탈리의 부모님은 1981년에 오스트레일리아로 온 베트남인 난민이다. 나탈리의 부모님은 각각 베트남에서 변호사와 문학교수였으나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우편공무원과 공립학교교사가 되었다. 나탈리는 시드니에서 자랐으며, 고등학교 졸업후 뉴사우스웨일스 대학교에서 교육학을 전공하였으나 2년후에 디지털미디어과로 전과하였다. [3][4] 인기[편집] 2012년 9월 기준으로, 나탈리의 유튜브채널에는 293개의 비디오가 올려져있으며, 현재까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많은 구독자수를 가지고 있는 채널이다. 그리고 전세계적으로는 유튜브 구독자수 26위를 기록하고있으며,[5] 감독으로서는 전세계적으로 7번째 많은 구독자를 가지고있다.[6] 또한, 현재까지 유튜브에서 58번째로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고있다.[7] 나탈리는 마이클 버클리가 주최한 미스 유튜브 콘테스트에서 1위를 차지한 경력이 있다.[8] 나탈리의 첫 비디오는 2006년 9월 25일에 제작되었다.[9] 나탈리는 100만명 이상의 구독자수를 가지고있으며, 나탈리의 비디오들은 총합 4억 600만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있다.[10] 이러한 인기로 인하여 나탈리는 아래와 같은 다양한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The Sydney Morning Herald,[4] Western Australia Today,[11] B&amp;T Magazine,[12] Venus Zine.[13] Der Spiegel,[14] Báo Viêt Luận Online,[15] Việt Tribune,[16] VnExpress,[17] Triple J,[18] Hot30 Countdown,[19] mk 뉴스.[20] 미국인 유튜브 비디오 블로거인 Ben Going의 베지마이트를 비하하는 비디오에 대한 응답으로 나탈리가 올린[21] 베지마이트 변호비디오는[22] 오스트레일리아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A Current Affair 에 베지마이트 전쟁의 한 부분으로 2007년 2월에 소개되었다. 나탈리의 최고 조회수 기록 비디오는[23] 2012년 4월 기준으로 3천 4백만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였으며[24] 그 후에도 조회수는 상당한 속도로 증가하고있다. 나탈리는 창의성과 인터넷에서의 인기로인해 여러경로로 인식되었다. 나탈리는 오스트레일리아판 유튜브가 2007년에 공개되었을때 초대받은 오스트레일리아의 유튜브 유명인사중 하나였다.[25] 나탈리는 현재 The Sydney Morning Herald지의 기술에 대한 비디오 블로그인 Digital Life에 토론자와 실생활 기자로서 메인진행자이자 저널리스트인 Séamus Byrne의 보조를 받으며 참여하고있다.[26]Digital Life에서의 나탈리의 풍자물은 특별히 이를 위해 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나탈리의 유튜브 영상물과 거의 동일한 방식과 스타일로 제작되었다. 나탈리는 2009년 5월 시드니현대미술관에서 "Creative Sydney"의 진행자를 맡은 경력이 있다.[27][28] 나탈리는 Mashable지의 2009년 Open Web Awards에서 "최고의 유튜브 채널 또는 성격"과 "가장 재미있는 유튜브 채널"분야에 후보로 지명되었다.[29] 나탈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몬터레이에서 열린 2010 Entertainment Gathering (EG) 컨벤션의 발표자중 하나였다.[30] 같은 해 나탈리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ideaCity의 발표자를 맡기도 하였다.[31][32] 2010년, 동영상 분석업체인 TubeMogul에서는 나탈리를 유튜브 광고부문에서 최고 수익자 상위 10명중에서 10위로 선정하였다. 나탈리는 101,000달러의 수익과 138,871,829회의 조회수를 기록하였다.[1] 이러한 특이한 인기와 높은 수익으로 인하여 대한민국의 언론에도 잠시 소개된바가 있다.[33] 유튜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나탈리의 채널은 2011년 3월의 한주에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대다수 유명 텔레비전쇼보다 많은 시청률을 기록하였다고한다.[34] 2010년 11월, 나탈리는 론리 플래닛에서 후원하는 전세계 대장정을 떠났다.[35] 나탈리는 오스트레일리아의 토크쇼인 The Project의 멜버른, 퍼스, 애들레이드, 시드니, 브리즈번의 주말 이벤트를 소개하는 Metro Whip Segment 코너의 시드니 주재원이다. 나탈리는 2011년 9월 4일에 오스트레일리아의 게임쇼인 Talkin' 'Bout Your Generation의 시리즈 3에 게스트로 출연한적이있다.[36] 비디오[편집] 나탈리의 비디오는 전형적으로 나탈리가 카메라앞에서 풍자를 곁들인 독백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일반적인 주제로는 친구의 선물에 얼마만큼의 돈을 써야하는지나[37] 적절한 전화 예절 등에 대한 사회적 딜레마에 대한 의식의 흐름을 사용한 해설뿐 아니라[38] 관찰적 유머와 자기비하 유머가 있다. 이 주제들에대한 예를 들자면 광고주들의 이상하고 판에박힌 관행을 조롱하거나[39] 초음파의사의 장난이 있다.[40] 종종 나탈리는 다른 유튜브 비디오의 패러디영상을 올리기도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비디오는 "식스팩 복근을 만드는법"에대한 패러디가 있다. 이 비디오는 나탈리의 비디오중 최고 조회수를 기록하고있다.[41] 조금 더 진지한 소재의 경우에는 나탈리의 2009년 2월 빅토리아주 산불에 대한 응답이 있다.[42] 나탈리는 대부분의 경우 포르노 영화에 나올법한 음악을 배경으로 지난 비디오에 달린 덧글을 보여주며 그에 대한 답변을 하는 "포르노 뮤직/코멘트 타임"이라는 코너로 비디오를 끝을낸다. 2009년 초에 나탈리는 "There's no time!!! Last words"라는 제목의 비디오에서 호주의 전통 디저트인 래밍턴의 조리법을 알려주는 비디오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으나 지금까지 올라오지 않았다. 이로인해 실망한 많은 팬들은 나탈리의 비디오네 유머있는 댓글로 그 실망감을 종종 표출하기도 한다. 추가적으로 제작하는 일반적인 비디오는 론리 플래닛에 올리는 여행 비디오가 있다. 이 비디오들은 나탈리의 세계 각지의 여행지에서의 경험을 나탈리 특유의 유머감각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2011년 7월에 포브스지와의 인터뷰에서 나탈리는 미래에대한 불확신을 이유로 비디오 제작을 중단하고 작가활동을 하는것을 고려하고 있다고한다.[43] 각주와 인용[편집] ↑ 가 나 Firth, Niall (2010년 8월 29일). “Revealed: the YouTube rich list of the new stars making a fortune from their bedrooms”. Daily Mail/Mail Online. 2010년 10월 17일에 확인함.  ↑ communitychannel. “All Channels, Most Subscribed, All Time”. YouTube. 2011년 3월 18일에 확인함.  ↑ “Riding the Tube”. 《The Age》. 2010년 11월 14일. 2010년 11월 14일에 확인함.  ↑ 가 나 Moses, Asher (2009년 2월 4일). “How Natalie became Australia's queen of YouTube”. 《Sydney Morning Herald》. 2009년 3월 7일에 확인함.  ↑ communitychannel. “All Channels, Most Subscribed, All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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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약 **핵심 주장**: 내털리 트랜은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유명 유튜브 비디오 블로거로, 독창적인 유머와 창의적인 콘텐츠로 많은 구독자와 조회수를 기록하며, 다양한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있다. --- **1. 생애** 내털리 트랜은 1986년 7월 23일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모는 베트남 난민으로,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나탈리는 시드니에서 성장하며 교육학을 전공했으나, 디지털 미디어로 전공을 변경하였다. **2. 인기** 2012년 기준으로 나탈리의 유튜브 채널은 293개의 비디오를 보유하고 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많은 구독자를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전 세계적으로 26위의 구독자 수를 자랑하며, 58번째로 많은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나탈리는 2006년부터 비디오를 제작하기 시작했으며, 다양한 매스컴에서 주목받았다. 특히, 그녀의 비디오는 4억 60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3. 비디오** 나탈리의 비디오는 주로 풍자적인 독백 형식으로 진행되며, 사회적 딜레마나 관찰적 유머를 다룬다. 그녀는 다른 유튜브 비디오를 패러디하기도 하며, 2009년 빅토리아주 산불에 대한 응답 비디오와 같은 진지한 주제도 다룬다. 나탈리는 비디오 제작을 중단하고 작가 활동을 고려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4. 각주와 인용** 각주와 인용은 나탈리의 경력과 인기, 비디오 내용에 대한 다양한 출처를 제공하며, 그녀의 활동이 어떻게 매스컴에 반영되었는지를 보여준다. **5. 외부 링크** 나탈리의 유튜브 채널과 소셜 미디어 링크가 제공되어, 그녀의 콘텐츠를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경로를 안내한다.
다음 글의 핵심 주장과 근거를 중심으로 요약해줘. 단락별로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도 함께 정리해줘. 문장 길이는 너무 짧지 않게 하고, 원문의 흐름은 유지해줘.
성학집요
https://ko.wikipedia.org/wiki/성학집요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성학집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성학집요</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d><div><img></div></td><td><span>이 문서의 내용은 <b><a>출처</a>가 분명하지 않습니다.</b><span><br>이 <span><a>문서를 편집</a></span>하여, <a>신뢰할 수 있는 출처</a>를 표기해 주세요. <a>검증</a>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a>토론 문서</a>에서 나누어 주세요.</span> <small>(2015년 10월)</small><span></span></span></td></tr></tbody></table> <table><caption>성학집요<br><br><span></span></caption><tbody><tr><td colspan="2"> <a><img></a><br><div>2014년 1월, <a>국립고궁박물관</a></div></td></tr><tr><th>저자</th> <td> 이이</td></tr><tr><th>국가</th> <td> 조선</td></tr><tr><th>언어</th> <td> 한문</td></tr><tr><th>주제</th> <td> 정치철학</td></tr> <tr><th>발행일</th> <td> 1575년</td></tr> </tbody></table> <p>《<b>성학집요</b>》(聖學輯要)는 조선의 유학자 <a>이이</a>의 정치철학 저서이다. </p> <h2><span></span><span>작품 소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선조</a> 8년, 붕당정치가 시작되던 해에 율곡은 선조가 현명한 임금이기를 바랐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개혁이 이루어질 듯한 분위기는 조성되었으나 구체적으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좌절되곤 했다. 이 책은 이처럼 애매하고 답답한 시기에 진퇴양난의 고뇌를 안고 있던 율곡의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담겨 있는, 임금에게 남은 희망을 걸고 학문적 역량을 다 쏟아 부은 역작이다. </p><p>이 책은 직접 왕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흔치 않은 형식인데, 당시의 왕은 선조였으므로 선조를 위해 지은 책인 셈이다. 그만큼 선조가 좀 더 철두철미하게 개혁을 시행할 수 있는 군주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책을 지어 올리면서 함께 바친 차자(箚子)를 보면 선조의 성격과 장단점을 자세히 지적하고 개선해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위정〉(爲政) 편에서는 창업(創業), 수성(守成), 경장(更張)이 필요한 시기를 구분하고는 가장 어려운 것이 경장이라고 하면서 자세히 논했다. 율곡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경장이 필요한 시기라고 진단했던 것이다. 선조의 등극과 사림의 정계 진출로 개혁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기를 희망했던 율곡은 기대와 달리 기존의 세력이나 관행은 청산되지 못한 채, 개혁을 추진해야 할 주체인 사림파 스스로가 동·서로 분열되는 상황을 겪으면서 중심에 있는 임금이 확고하지 않고서는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절감했다. </p><p>율곡은 선조에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가진 듯하다. 율곡은 선조에 대해 “총명한 자질을 갖고 있지만 도량이 넓지 못해 남이 단점을 지적하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더 잘하라고 충고하면 거꾸로 방향을 선회해 버리는 객기를 부리며, 유능한 사람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잘못된 사람도 과감하게 청산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위정〉 편에서는 인재 등용에 관해 길게 논했는데, 인재 등용이야말로 정치의 향방을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종 인사권자인 임금은 직접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없고, 적합한 사람을 등용해 맡겨두면 된다. 제대로 된 사람을 쓸 수 있는 임금이 훌륭한 임금인 것이다. 제대로 된 사람을 알아보고 등용하고 맡기려면 그만한 인격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 임금은 욕심이 적어야 하며, 또 자기주장을 접고 남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성학집요》뿐만 아니라 유학에서 거론되는 최고의 왕은 훌륭한 신하들에 둘러싸인 채 손을 놓고 있는 모습이다. </p><p>이 책에 대한 종전의 평가가 어떠했는지는 실록의 관련 기사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직접 책을 받은 선조가 높이 평가한 것은 물론이고, 숙종 이후부터는 경연의 텍스트로 쓰일 만큼 비중 있는 저술이었다. 경연은 왕의 학습이 행해지던 장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왕을 독자로 설정한 이 책을 텍스트로 사용했다고 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왕을 대상으로 했다는 특징을 넘어 이 책은 보다 넓은 독자층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었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지은이의 내심에 설정된 독자는 학문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수기·치인으로 대치할 수 있고, 왕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 또 책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기〉는 모든 사람에게 통용될 수 있다. </p> <h2><span></span><span>참고 자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전혜경 역, 2009년, 지식을만드는지식 <a>ISBN</a>&#160;<a>978-89-6228-405-8</a></li> <li><div><small><a><img></a><a><img></a><a><img></a> 본 문서에는 <a>지식을만드는지식</a>에서 <a>CC-BY-SA 3.0</a>으로 배포한 책 소개글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small></div></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성학집요&amp;oldid=21292691</a>"</div> <div><div><a>분류</a>: <ul><li><a>한국 철학</a></li><li><a>조선의 책</a></li><li><a>정치학 책</a></li><li><a>철학 책</a></li><li><a>16세기 책</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출처가 필요한 글/2015년 10월</a></li><li><a>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a></li><li><a>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a></li><li><a>지식을만드는지식 공개자료를 인용한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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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이 선조에게 성학집요를 쓰면서 위정편에서 가장 길게 논한 부분은?
인재 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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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8
[ "율곡이 선조에게 성학집요를 쓰면서 위정편에서 가장 길게 논한 부분은?", "율곡이 성학집요에서 인재 등용에 대해 길게 논한 편으로 훌륭한 임금에 대해 이야기하는 편은?", "율곡이 인재 등용에 관해 길게 논한 편의 이름은?", "성학집요의 위정편에서 임금이 제대로 된 사람을 알아보고 등용하고 맡기기에 필요한 것은?", "율곡은 무슨 편에서 인재 등용에 대해 길게 논의했는가?", "율곡은 위정편에서 최고 인사권자는 누구라고 칭했는가?", "율곡은 위정편에서 정치의 향방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를 뭐라고 보았는가?", "성학집요에 대한 선조의 평가는 어떠했는가?", "율곡이 성학집요 서문에 밝히고 있는 설정된 독자는?", "성학집요는 선조가 높이 평가한 저술로서 어느 왕 이후로 경연의 텍스트로 쓰였을까요?", "성학집요에서 지은이의 내심에 설정된 독자층은?", "성학집요를 직접 받은 임금은?", "성학집요를 경연의 텍스트로 사용하기 시작한 임금은?" ]
<!DOCTYPE html> 성학집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성학집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d></td><td>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5년 10월)</td></tr></tbody></table> <table><caption>성학집요</caption><tbody><tr><td colspan="2"> 2014년 1월, 국립고궁박물관</td></tr><tr><th>저자</th> <td> 이이</td></tr><tr><th>국가</th> <td> 조선</td></tr><tr><th>언어</th> <td> 한문</td></tr><tr><th>주제</th> <td> 정치철학</td></tr> <tr><th>발행일</th> <td> 1575년</td></tr> </tbody></table> 《성학집요》(聖學輯要)는 조선의 유학자 이이의 정치철학 저서이다. 작품 소개[편집] 선조 8년, 붕당정치가 시작되던 해에 율곡은 선조가 현명한 임금이기를 바랐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개혁이 이루어질 듯한 분위기는 조성되었으나 구체적으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좌절되곤 했다. 이 책은 이처럼 애매하고 답답한 시기에 진퇴양난의 고뇌를 안고 있던 율곡의 희망과 절망이 동시에 담겨 있는, 임금에게 남은 희망을 걸고 학문적 역량을 다 쏟아 부은 역작이다. 이 책은 직접 왕을 대상으로 삼고 있는 흔치 않은 형식인데, 당시의 왕은 선조였으므로 선조를 위해 지은 책인 셈이다. 그만큼 선조가 좀 더 철두철미하게 개혁을 시행할 수 있는 군주이기를 바랐던 것이다. 책을 지어 올리면서 함께 바친 차자(箚子)를 보면 선조의 성격과 장단점을 자세히 지적하고 개선해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위정〉(爲政) 편에서는 창업(創業), 수성(守成), 경장(更張)이 필요한 시기를 구분하고는 가장 어려운 것이 경장이라고 하면서 자세히 논했다. 율곡은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경장이 필요한 시기라고 진단했던 것이다. 선조의 등극과 사림의 정계 진출로 개혁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기를 희망했던 율곡은 기대와 달리 기존의 세력이나 관행은 청산되지 못한 채, 개혁을 추진해야 할 주체인 사림파 스스로가 동·서로 분열되는 상황을 겪으면서 중심에 있는 임금이 확고하지 않고서는 개혁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절감했다. 율곡은 선조에게 기대와 실망을 동시에 가진 듯하다. 율곡은 선조에 대해 “총명한 자질을 갖고 있지만 도량이 넓지 못해 남이 단점을 지적하면 자신을 알아주지 못한다며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더 잘하라고 충고하면 거꾸로 방향을 선회해 버리는 객기를 부리며, 유능한 사람을 전적으로 믿지 못하고, 잘못된 사람도 과감하게 청산하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위정〉 편에서는 인재 등용에 관해 길게 논했는데, 인재 등용이야말로 정치의 향방을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종 인사권자인 임금은 직접 어떤 일을 할 필요가 없고, 적합한 사람을 등용해 맡겨두면 된다. 제대로 된 사람을 쓸 수 있는 임금이 훌륭한 임금인 것이다. 제대로 된 사람을 알아보고 등용하고 맡기려면 그만한 인격이 갖추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되기 위해 임금은 욕심이 적어야 하며, 또 자기주장을 접고 남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 《성학집요》뿐만 아니라 유학에서 거론되는 최고의 왕은 훌륭한 신하들에 둘러싸인 채 손을 놓고 있는 모습이다. 이 책에 대한 종전의 평가가 어떠했는지는 실록의 관련 기사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직접 책을 받은 선조가 높이 평가한 것은 물론이고, 숙종 이후부터는 경연의 텍스트로 쓰일 만큼 비중 있는 저술이었다. 경연은 왕의 학습이 행해지던 장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왕을 독자로 설정한 이 책을 텍스트로 사용했다고 해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왕을 대상으로 했다는 특징을 넘어 이 책은 보다 넓은 독자층을 가질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었다. 서문에서 밝혔듯이 지은이의 내심에 설정된 독자는 학문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이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있는 수기·치인으로 대치할 수 있고, 왕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을 제외하면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다. 또 책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는 〈수기〉는 모든 사람에게 통용될 수 있다. 참고 자료[편집] 전혜경 역, 2009년, 지식을만드는지식 ISBN 978-89-6228-405-8 본 문서에는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CC-BY-SA 3.0으로 배포한 책 소개글을 기초로 작성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성학집요&amp;oldid=21292691" 분류: 한국 철학조선의 책정치학 책철학 책16세기 책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5년 10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지식을만드는지식 공개자료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5월 18일 (금) 08:5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성학집요》는 조선의 유학자 이이(율곡)가 1575년에 저술한 정치철학서로, 선조 8년의 붕당정치 시기에 작성되었다. 이이는 선조가 현명한 임금이 되기를 바라면서도, 그 기대가 실망으로 이어지는 복잡한 감정을 담아냈다. 1. **저자 및 배경**: 이이는 조선의 유학자로, 이 책은 선조를 대상으로 하여 개혁을 촉구하는 내용이다. 당시 정치적 상황은 개혁의 필요성이 대두되었으나, 구체적인 성과는 미비했다. 2. **주요 내용**: - 책은 왕에게 직접적으로 조언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선조의 성격과 장단점을 분석하고 개선 방향을 제시한다. - 〈위정〉 편에서는 정치적 상황을 창업, 수성, 경장으로 나누고, 경장이 가장 어려운 시기임을 강조한다. 이이는 자신이 살던 시대가 경장이 필요한 시기라고 진단했다. 3. **인재 등용의 중요성**: 이이는 인재 등용이 정치의 향방을 결정짓는 핵심이라고 보았으며, 임금이 적합한 인재를 등용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 임금은 욕심이 적고, 남의 의견을 수용할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4. **책의 평가**: 《성학집요》는 선조에게 높이 평가되었고, 숙종 이후에는 경연의 텍스트로 사용되며 중요한 저술로 자리 잡았다. 서문에서 이이는 학문에 관심 있는 모든 사람을 독자로 설정했으며, 수신·제가·치국평천하는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인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왕을 위한 저술이 아니라, 넓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한 정치철학적 논의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텍스트 내용을 시간순 또는 인과관계 순으로 재배열해서 요약해줘. 사건의 흐름이나 논리 전개 순서를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줘.
부다페스트_오픈_액세스_이니셔티브
https://ko.wikipedia.org/wiki/부다페스트_오픈_액세스_이니셔티브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부다페스트 오픈 액세스 이니셔티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부다페스트 오픈 액세스 이니셔티브</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d><div><img></div></td><td><span>이 문서는 <b><a>저작권 침해가 의심</a></b>되는 문서입니다.<span><br>이 문서의 저작권에 대한 적절한 소명이 없다면 <a>정책</a>에 따라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span> <small>(2013년 6월 6일)</small><span></span></span></td></tr></tbody></table> <div><div><a><img></a> <div><div><a></a></div>부다페스트 년 12 월 1 일 2001 년 회의에서 참가자.</div></div></div> <div><div><a><img></a> <div><div><a></a></div>부다페스트 오픈 액세스 이니셔티브 제10회 축하 로고.</div></div></div> <p><b>부다페스트 오픈 액세스 이니셔티브</b>(Budapest Open Access Initiative.BOAI)는 모든 학문 분야에서의 학술 논문이 인터넷상에서 자유롭게 이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리, 전략, 위임에 대한 성명이다. OSI(Open Society Institute)의 지원하에 2001년 12월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소규모 모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Budapest Open Access Initiative의 목표는 상호심사가 이루어진 연구논문의 자유로운 이용이며, 이를 위하여 셀프아카이빙과 오픈액세스 저널 두가지의 전략을 제시하고있다. 셀프아카이빙이란 저자가 본인의 논문을 직접 업로드 하는 것이며, 오픈액세스 저널이란 인터넷을 통해 연구논문을 무료로 저작권에 제한없이 이용할 수 있는 저널을 말한다.<sup><a>&#91;1&#93;</a></sup><sup><a>&#91;2&#93;</a></sup> BOAI는 전 학문분야 연구 논문을 일반인이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리로서 오픈 액세스를 ‘동료심사 논문이거나 출판 전 논문이어야 하며, 저작권은 저자가 소유하되 이용과 배포에 아무런 제약이 없어야 하고, 다만 저작에 대한 통제권은 저자가 가지되 인용 시 명확한 출처를 밝혀야 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sup><a>&#91;3&#93;</a></sup> BOAI는 오픈 액세스를 이용자가 저작물의 원문을 읽거나, 다운로드, 복사, 배포, 출판, 검색, 링크를 허용하는 것을 말하며, 문헌을 색인하기 위해서 크롤링(crawling)하고, 이들 데이터를 소프트웨어에 전달하거나 또는 기술적인 장벽 없이 합법적인 목적으로 이들 데이터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sup><a>&#91;4&#93;</a></sup> 이 추진활동은 전 세계의 연구자, 대학, 도서관, 출판사, 학회, 개인, 조직등이 서명하고 있다.<sup><a>&#91;5&#93;</a></sup><sup><a>&#91;6&#93;</a></sup>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자유이용의 정의</span></a></li> <li><a><span>2</span> <span>자유이용의 발전</span></a></li> <li><a><span>3</span> <span>BOAI 선언(2002.2)</span></a></li> <li><a><span>4</span> <span>향후 10 년에 대한 권장 사항</span></a></li> <li><a><span>5</span> <span>OSI의 지원</span></a></li> <li><a><span>6</span> <span>보완 전략</span></a></li> <li><a><span>7</span> <span>접근 범주</span></a></li> <li><a><span>8</span> <span>배경</span></a></li> <li><a><span>9</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10</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자유이용의 정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Budapest Open Access Initiative(2003)는 인터넷에 접속하는 데 따른 제약 이외에는 어떤 금전적, 법적, 기술적 장벽도 없이 이용자로 하여금 합법적인 목적을 위해 저작의 전문을 읽거나, 다운로드, 복제, 배포, 인쇄, 탐색, 연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자유이용이라고 밝히고 있다.<sup><a>&#91;7&#93;</a></sup> </p> <h2><span></span><span>자유이용의 발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BOAI(2003)는 Soros Open Society Institute의 지원 하에 2001년 12월부터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소규모 모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모임의 목적은 모든 학문 분야에서의 학술 논문이 인터넷 상에서 자유롭게 이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을 가중시키기 위한 것이였다. 이들은 자유이용의 실현을 위해서는 첫째. self-archive와 둘째, 자유이용 저널의 생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BOAI가 <a>PloS</a>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우선 <a>PloS</a>는 기존의 과학 저널들로 하여금 자신의 콘텐츠를 출판 후 6개월 이내에 공공 아카이브에 제한하여 자유이용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를 따르지 않는 출판사에 대해서는 저자로서, 논문 심사자로서, 혹은 편집자로서의 역할을 해주지 말 것을 요구하며, 구독료도 지불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다. 반면에 BOAI는 자유이용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자유이용 저널과 self-archiving을 동등하게 취급한다. 셋째, BOAI는 기존의 저널이 이용과 관련한 정책을 바꾸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현재 2,245명의 개인과 149개 기관이 참여하고 있으며 Open Society Institute(OSI)가 3년간 3백만 달러를 지원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sup><a>&#91;8&#93;</a></sup> </p> <h2><span></span><span>BOAI 선언(2002.2)</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BOAI 선언은 전 학문분야 연구논문을 일반인이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리, 전략, 위임에 대한 성명이다. BOAI 선언의 목표는 상호심사가 이루어진 연구논문의 자유로운 이용이며, 이를 위하여 셀프아카이빙과 오픈 액세스 저널 두 가지의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셀프아카이빙이란 ‘셀프 아카이빙’은 심사 완료된 연구논문을 OAI 프로토콜(OAI-PMH: Open Archives Initiative-Protocol for Metadata Harvesting)을 준수하는 논문저장소(repository 또는archive)에 연구자 스스로 저장하는 것을 말한다. 오픈 액세스 저널이란 인터넷을 통해 연구논문을 무료로 저작권에 제한 없이 이용헐 수 있는 저널을 말한다. 이 두 방법은 오픈 엑세스의 목표달성을 위한 직접적이고 효과적일 뿐만아니라 시장이나 법률적 변화를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전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sup><a>&#91;9&#93;</a></sup> 오픈액세스라는 용어는 2001년 12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비교적 소규모로 모인 Open Society Foundation 회의를 통해 2002년 Buda-pest Open Access Initiative(BOAI)선언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물론 BOAI 이전에도 연구자들과 도서관계에서 연구성과물, 특히 학술논문의 이용 및 접근 장벽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지속적으로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특히 BOAI선언을 통해 보다 체계적이고 활발한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sup><a>&#91;10&#93;</a></sup> </p> <h2><span></span><span>향후 10 년에 대한 권장 사항</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1. 정책 1.1. 고등 교육의 각 기관은 교수진의 모든 미래 학자 기사의 피어 - 검토 버전은 기관의 지정 저장소에 보관되는 보장 정책이 있어야합니다. </p><p>1.2. 고급 학위를 제공하는 고등 교육의 각 기관은 향후 논문과 논문은 기관의 OA 저장소의 수용에 입금하는 보장 정책이 있어야합니다. 자신의 작품을 게시하거나 특허 검색에 ​​대한 특허를 추구하려는 학생들의 요청에 따라 정책이 아니라 영구 면제보다 합리적인 지연 시간을 부여해야합니다. </p><p>1.3. 모든 연구 자금 지원 기관, 공공 또는 민간 투자 연구보고 미래의 모든 학술 논문 피어 리뷰 버전이 적절한 저장소에 보관하고 빨리 실행 가능한 OA를 만든 것을 보장하는 정책이 있어야합니다. </p><p>2. 라이센스 및 재사용 </p><p>2.1. 우리는 CC-BY 또는 학술 작품의 출판, 유통, 사용 및 재사용에 대한 최적의 라이선스로 해당 라이센스를 권장합니다 </p><p>3. 인프라 및 지속 가능성 </p><p>3.1. 고등 교육의 각 기관은, OA 저장소를 가지고하는 컨소시엄 OA 저장소와 함께 컨소시엄에 참여, 또는 OA 저장소 서비스를 아웃소싱하기 위해 준비해야한다. </p><p>3.2. 고등 교육 기관과 제휴되지 않은 등의 모든 분야 및 국가의 모든 출판 학자, OA 저장소에 예금 권한이 있어야합니다 </p><p>4. 변호 및 조정 </p><p>4.1. 우리는 라이센스, 편집 과정 모집 제출, 공개 소유권 및 출판 비용의 처리에 대한 예를 들어, OA 출판에 대한 전문적인 행위의 기준을 알고 출판사, 편집자, 심판 및 연구자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일을해야한다. 편집자, 심판 및 연구원 전문 행동의 이러한 기준에 근거하여 출판사 및 저널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를 평가해야합니다. 게시자는 이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 곳을 우리는 그들이 첫 단계로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됩니다. </p> <h2><span></span><span>OSI의 지원</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2001년 12월 OSI(Open Society Institute)의 부다페스트 모임의 결과가 BOAI 선언이며 OSI는 오픈 액세스의 목표달성을 위하여 초기 도움과 자금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자선사업가이며 거부인 George Soros는 이 목표를 위하여 $3Million을 기부하였다(Poynder 2002). OSI는 셀프아카이빙의 확대와 새로운 오픈 액세스 저널의 창립, 그리고 오픈 액세스 저널 시스템이 경제적으로 자생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sup><a>&#91;11&#93;</a></sup> </p> <h2><span></span><span>보완 전략</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I. 셀프 아카이빙: 첫째, 학자들은 자신들의 전문 학회지 논문을 공개된 전자 아카이브에 맡기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셀프 아카이빙이라 부른다. 오픈 아카이브 구상에 따라 수립된 기준에 부합되는 개별적인 아카이브들은 검색엔진 및 툴에 의해 하나의 아카이브로 취급된다.<sup><a>&#91;12&#93;</a></sup> 오픈 전자 아카이브는 OAI(OpenArchivesInitiative)에 의해서 생성된 표준을 따르며,검색 엔진과 기타 도구가 서로 분리되어 보존돼 있어도 추적할 수 있다.<sup><a>&#91;13&#93;</a></sup> 따라서 사용자들은 어떠한 아카이브가 존재하고 자신들이 찾고 이용하고자 하는 컨텐츠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필요가 없어진다. </p><p>II. 오픈 엑세스 저널: 둘째, 학자들은 오픈 엑세스를 전담하는 차세대 학술지를 출간하고, 오픈 엑세스로의 전환을 선택하는 기존의 학술지들을 도울 수단을 필요로한다. 학술지 논문은 가능한 널리 보급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학술지들은 출판 자료에 대한 접근과 사용을 제한하는 저작권 문제를 더 이상 불러일으키지 않을것이다. 비용이 접근권을 제한하는 장벽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새로운 학술지들은 구독료 또는 접속료를 받지 않으며, 이러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다른 수단에 의존할 것이다. 이를 위해 자금 조달을 위한 많은 대안이 존재하는데, 연구의 자금을 대는 재단 및 정부, 연구원을 고용하는 대학 및 실험실, 학과 또는 기관, 오픈엑세스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후원자가 제공하는 기부금, 기본 문서의 부가물 판매로 발생하는 이익, 전통적인 등록비 또는 접속료를 부과하는 학술지의 소멸 또는 취소로 인해 자유롭게 된 기금 또는 심지어 연구자들의 기부금 또한 이에 포함된다. 모든 분야 또는 국가들을 위해, 이러한 방안 중 어느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우선시할 필요는 없으며 또한 다른 독창적인 대안을 찾는 것을 그만 둘 필요도 없다.<sup><a>&#91;14&#93;</a></sup> </p> <h2><span></span><span>접근 범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온라인에서 자유롭게 접근 가능 해야 할 문헌은 학자들이 대가 없이 세상에 제공하는 것이다. 주로, 이러한 범주는 동료 평가를 거친 학술지를 포함할 뿐 아니라, 그들이 평가를 받거나 동료들에게 중요한 연구 결과에 대해 알리기 위해 온라인에 개재하는 출판전의 저작물일 수도 있다. 이러한 문헌의 범위와 종류는 매우 다양하여, 더 광범위하고 더욱 용이한 접근이 가능하다. 이러한 문헌에 대한 “오픈 엑세스”는 공중 인터넷 망에서 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이용자들은 인터넷 자체에 접속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게 수반되는 경우만 제외하고, 재정적, 법적 또는 기술적인 장벽에 구애 받지 않고, 이러한 문헌의 전문을 읽고, 다운로드하고, 복사, 배포, 프린트, 검색 또는 링크할 수 있고, 이를 색인으로 만들기 위해 크로울(crawl)하고 이를 데이터로 소프트웨어에 전달하거나 다른 합법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이 영역에서의 재생 및 배포에 대한 유일한 제약 및 저작권의 유일한 역할은 저자들에게 자신들의 저작물의 원본을 통제하고 적절하게 인정받고 인용될 수 있는 권리를 갖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sup><a>&#91;15&#93;</a></sup> </p> <h2><span></span><span>배경</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학술커뮤니케이션은 연구 및 기타 학술 저작물의 생산, 평가, 배포, 보존, 이용 그리고 다시 생산의 순환 과정을 갖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전통적인 학술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연구자들이 물질적인 보상 없이 연구 결과의 전파를 목적으로 학회 또는 출판사를 통해 그들의 연구논문을 학술지에 실어 왔다. 그러나 학술지는 복잡한 심사과정, 출판지연, 구독료 급증, 독점성, 상업적인 출판사의 저작권 남용 등과 같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학술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모순점을 극복하기 위한 오픈 액세스 운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BOAI는 이 오픈 액세스를 목표로 한다. </p><p>배경.<sup><a>&#91;16&#93;</a></sup>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이두영,황옥경,학술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동향: 자유이용을 중심으로,정보 관리연구 vol.34, no.2, 2003, pp.1-23</span> </li> <li><span><a>↑</a></span> <span>오픈액세스운동의 동향과 학술적 이해관계자의 대응전략<sup>&#91;<a><span>쪽 번호 필요</span></a>&#93;</sup></span> </li> <li><span><a>↑</a></span> <span>신재민. 2008. 오픈 액세스 레포지터리의 사용성 평가에 관한 연구. 충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1p.</span> </li> <li><span><a>↑</a></span> <span>김미향. 2009. 기관 리포지터리의 검색기능 향상을 위한 인명 접근점제어 시스템 구축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8p.</span> </li> <li><span><a>↑</a></span> <span>이두영,황옥경, 학술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동향: 자유이용을 중심으로,정보 관리연구 vol.34, no.2, 2003, pp.1-23</span> </li> <li><span><a>↑</a></span> <span>오픈액세스운동의 동향과 학술적 이해관계자의 대응전략<sup>&#91;<a><span>쪽 번호 필요</span></a>&#93;</sup></span> </li> <li><span><a>↑</a></span> <span>이두영,황옥경,학술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동향: 자유이용을 중심으로,정보 관리연구 vol.34, no.2, 2003, pp.1-23</span> </li> <li><span><a>↑</a></span> <span>이두영,황옥경, 학술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동향: 자유이용을 중심으로, 정보 관리연구 vol.34, no.2, 2003, pp.1-23</span> </li> <li><span><a>↑</a></span> <span>최재황,조현양. 오픈 액세스 운동의 동향과 학술적 이해관계자의 대응전략, 정보관리학회지 제22권 제3호, 2005.9, 311-312P</span> </li> <li><span><a>↑</a></span> <span>심원식, 「빅딜, 오픈액세스, 구글학술검색과 대학도서관의 전자학술정보구독」, 한국정보관리학회지 제29권 제4호, 2012, pp.150~151.</span> </li> <li><span><a>↑</a></span> <span>최재황,조현양. 오픈 액세스 운동의 동향과 학술적 이해관계자의 대응전략, 정보관리학회지 제22권 제3호, 2005.9, 312P</span> </li> <li><span><a>↑</a></span> <span><a>http://www.budapestopenaccessinitiative.org/pdf/BOAI-Korean.pdf</a></span> </li> <li><span><a>↑</a></span> <span>김미향. 2009. 기관 리포지터리의 검색기능 향상을 위한 인명 접근점제어 시스템 구축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7p.</span> </li> <li><span><a>↑</a></span> <span><a>http://www.budapestopenaccessinitiative.org/pdf/BOAI-Korean.pdf</a></span> </li> <li><span><a>↑</a></span> <span><a>http://www.budapestopenaccessinitiative.org/pdf/BOAI-Korean.pdf</a></span> </li> <li><span><a>↑</a></span> <span>[최재황,조현양. 2005. 오픈액세스 운동이 동향과 학술적 이해관계자의 대응전략], 기타 설명.</span> </li> </ol></div></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span><span><a>부다페스트 오픈 액세스 이니셔티브</a></span></span> - 공식 웹사이트</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부다페스트_오픈_액세스_이니셔티브&amp;oldid=22820630</a>"</div> <div><div><a>분류</a>: <ul><li><a>문헌정보학</a></li><li><a>오픈 액세스</a></li><li><a>메타데이터</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문장에 쪽 번호가 필요한 글/2013년 5월</a></li><li><a>문장에 쪽 번호가 필요한 글</a></li><li><a>저작권 침해가 의심되는 문서/2013년 6월</a></li><li><a>저작권 침해가 의심되는 모든 문서</a></li><li><a>전체에 저작권 침해가 의심되는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Català</a></li><li><a>Deutsch</a></li><li><a>Ελληνικά</a></li><li><a>English</a></li><li><a>Español</a></li><li><a>Français</a></li><li><a>Bahasa Indonesia</a></li><li><a>Italiano</a></li><li><a>Nederlands</a></li><li><a>Русский</a></li><li><a>Српски / srpski</a></li><li><a>Українська</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8년 10월 20일 (토) 13: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PIoS는 과학저널에 본인 논문을 출판한 후 몇 개월 이내에 한해 자유이용을 허락하는가?
6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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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IoS는 과학저널에 본인 논문을 출판한 후 몇 개월 이내에 한해 자유이용을 허락하는가?", "BOAI에 참여하는 기관은 몇 개인가?", "BOAI에게 OSI가 약속한 3년간 지원 액수는 몇 백만 달러인가?", "셀프아카이빙의 논문저장소가 준수하는 프로토콜의 이름은 무엇인가?", "오픈 액세스 저널의 논문을 이용하기 위해 내는 비용은 얼마인가?", "셀프 아카이빙 논문저장소가 되기 위해 준수해야 할 프로토콜은?", "BOAI 선언이 진행된 해는?", "오픈 액세스 저널들이 문제시하는 접근권을 제한하는 장벽은?", "오픈 액세스 저널이 불러일으키지 않는 것으로 접근과 사용을 제한하는 결과를 낳는 문제는?", "논문 전문을 크로울 하는 것은 무엇을 만들기 위함인가?", "오픈 액세스를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장소는 어디인가?", "오픈 엑세스가 목표로 하는 문헌들의 자유로운 이용이 일어나는 망은?", "오픈 엑세스에서 저작물의 원본을 통제하고 적절하게 인정받고 인용될 수 있는 권리를 갖도록 하는 한에서 승인되는 권리는?" ]
<!DOCTYPE html> 부다페스트 오픈 액세스 이니셔티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부다페스트 오픈 액세스 이니셔티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d></td><td>이 문서는 저작권 침해가 의심되는 문서입니다.이 문서의 저작권에 대한 적절한 소명이 없다면 정책에 따라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2013년 6월 6일)</td></tr></tbody></table> 부다페스트 년 12 월 1 일 2001 년 회의에서 참가자. 부다페스트 오픈 액세스 이니셔티브 제10회 축하 로고. 부다페스트 오픈 액세스 이니셔티브(Budapest Open Access Initiative.BOAI)는 모든 학문 분야에서의 학술 논문이 인터넷상에서 자유롭게 이용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리, 전략, 위임에 대한 성명이다. OSI(Open Society Institute)의 지원하에 2001년 12월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소규모 모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Budapest Open Access Initiative의 목표는 상호심사가 이루어진 연구논문의 자유로운 이용이며, 이를 위하여 셀프아카이빙과 오픈액세스 저널 두가지의 전략을 제시하고있다. 셀프아카이빙이란 저자가 본인의 논문을 직접 업로드 하는 것이며, 오픈액세스 저널이란 인터넷을 통해 연구논문을 무료로 저작권에 제한없이 이용할 수 있는 저널을 말한다.[1][2] BOAI는 전 학문분야 연구 논문을 일반인이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리로서 오픈 액세스를 ‘동료심사 논문이거나 출판 전 논문이어야 하며, 저작권은 저자가 소유하되 이용과 배포에 아무런 제약이 없어야 하고, 다만 저작에 대한 통제권은 저자가 가지되 인용 시 명확한 출처를 밝혀야 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3] BOAI는 오픈 액세스를 이용자가 저작물의 원문을 읽거나, 다운로드, 복사, 배포, 출판, 검색, 링크를 허용하는 것을 말하며, 문헌을 색인하기 위해서 크롤링(crawling)하고, 이들 데이터를 소프트웨어에 전달하거나 또는 기술적인 장벽 없이 합법적인 목적으로 이들 데이터를 사용하는 것이라고 언급한다.[4] 이 추진활동은 전 세계의 연구자, 대학, 도서관, 출판사, 학회, 개인, 조직등이 서명하고 있다.[5][6] 목차 1 자유이용의 정의 2 자유이용의 발전 3 BOAI 선언(2002.2) 4 향후 10 년에 대한 권장 사항 5 OSI의 지원 6 보완 전략 7 접근 범주 8 배경 9 각주 10 외부 링크 자유이용의 정의[편집] Budapest Open Access Initiative(2003)는 인터넷에 접속하는 데 따른 제약 이외에는 어떤 금전적, 법적, 기술적 장벽도 없이 이용자로 하여금 합법적인 목적을 위해 저작의 전문을 읽거나, 다운로드, 복제, 배포, 인쇄, 탐색, 연결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것이 자유이용이라고 밝히고 있다.[7] 자유이용의 발전[편집] BOAI(2003)는 Soros Open Society Institute의 지원 하에 2001년 12월부터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소규모 모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 모임의 목적은 모든 학문 분야에서의 학술 논문이 인터넷 상에서 자유롭게 이용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국제적인 노력을 가중시키기 위한 것이였다. 이들은 자유이용의 실현을 위해서는 첫째. self-archive와 둘째, 자유이용 저널의 생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BOAI가 PloS와 다른 점은 다음과 같다. 우선 PloS는 기존의 과학 저널들로 하여금 자신의 콘텐츠를 출판 후 6개월 이내에 공공 아카이브에 제한하여 자유이용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를 따르지 않는 출판사에 대해서는 저자로서, 논문 심사자로서, 혹은 편집자로서의 역할을 해주지 말 것을 요구하며, 구독료도 지불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다. 반면에 BOAI는 자유이용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자유이용 저널과 self-archiving을 동등하게 취급한다. 셋째, BOAI는 기존의 저널이 이용과 관련한 정책을 바꾸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현재 2,245명의 개인과 149개 기관이 참여하고 있으며 Open Society Institute(OSI)가 3년간 3백만 달러를 지원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8] BOAI 선언(2002.2)[편집] BOAI 선언은 전 학문분야 연구논문을 일반인이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원리, 전략, 위임에 대한 성명이다. BOAI 선언의 목표는 상호심사가 이루어진 연구논문의 자유로운 이용이며, 이를 위하여 셀프아카이빙과 오픈 액세스 저널 두 가지의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셀프아카이빙이란 ‘셀프 아카이빙’은 심사 완료된 연구논문을 OAI 프로토콜(OAI-PMH: Open Archives Initiative-Protocol for Metadata Harvesting)을 준수하는 논문저장소(repository 또는archive)에 연구자 스스로 저장하는 것을 말한다. 오픈 액세스 저널이란 인터넷을 통해 연구논문을 무료로 저작권에 제한 없이 이용헐 수 있는 저널을 말한다. 이 두 방법은 오픈 엑세스의 목표달성을 위한 직접적이고 효과적일 뿐만아니라 시장이나 법률적 변화를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전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9] 오픈액세스라는 용어는 2001년 12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비교적 소규모로 모인 Open Society Foundation 회의를 통해 2002년 Buda-pest Open Access Initiative(BOAI)선언에서 처음으로 사용되었다. 물론 BOAI 이전에도 연구자들과 도서관계에서 연구성과물, 특히 학술논문의 이용 및 접근 장벽을 제거하려는 노력은 지속적으로 있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특히 BOAI선언을 통해 보다 체계적이고 활발한 운동으로 전개되고 있다.[10] 향후 10 년에 대한 권장 사항[편집] 1. 정책 1.1. 고등 교육의 각 기관은 교수진의 모든 미래 학자 기사의 피어 - 검토 버전은 기관의 지정 저장소에 보관되는 보장 정책이 있어야합니다. 1.2. 고급 학위를 제공하는 고등 교육의 각 기관은 향후 논문과 논문은 기관의 OA 저장소의 수용에 입금하는 보장 정책이 있어야합니다. 자신의 작품을 게시하거나 특허 검색에 ​​대한 특허를 추구하려는 학생들의 요청에 따라 정책이 아니라 영구 면제보다 합리적인 지연 시간을 부여해야합니다. 1.3. 모든 연구 자금 지원 기관, 공공 또는 민간 투자 연구보고 미래의 모든 학술 논문 피어 리뷰 버전이 적절한 저장소에 보관하고 빨리 실행 가능한 OA를 만든 것을 보장하는 정책이 있어야합니다. 2. 라이센스 및 재사용 2.1. 우리는 CC-BY 또는 학술 작품의 출판, 유통, 사용 및 재사용에 대한 최적의 라이선스로 해당 라이센스를 권장합니다 3. 인프라 및 지속 가능성 3.1. 고등 교육의 각 기관은, OA 저장소를 가지고하는 컨소시엄 OA 저장소와 함께 컨소시엄에 참여, 또는 OA 저장소 서비스를 아웃소싱하기 위해 준비해야한다. 3.2. 고등 교육 기관과 제휴되지 않은 등의 모든 분야 및 국가의 모든 출판 학자, OA 저장소에 예금 권한이 있어야합니다 4. 변호 및 조정 4.1. 우리는 라이센스, 편집 과정 모집 제출, 공개 소유권 및 출판 비용의 처리에 대한 예를 들어, OA 출판에 대한 전문적인 행위의 기준을 알고 출판사, 편집자, 심판 및 연구자를 만들기 위해 더 많은 일을해야한다. 편집자, 심판 및 연구원 전문 행동의 이러한 기준에 근거하여 출판사 및 저널에 참여할 수있는 기회를 평가해야합니다. 게시자는 이 기준을 충족하지 않는 곳을 우리는 그들이 첫 단계로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게 됩니다. OSI의 지원[편집] 2001년 12월 OSI(Open Society Institute)의 부다페스트 모임의 결과가 BOAI 선언이며 OSI는 오픈 액세스의 목표달성을 위하여 초기 도움과 자금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자선사업가이며 거부인 George Soros는 이 목표를 위하여 $3Million을 기부하였다(Poynder 2002). OSI는 셀프아카이빙의 확대와 새로운 오픈 액세스 저널의 창립, 그리고 오픈 액세스 저널 시스템이 경제적으로 자생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11] 보완 전략[편집] I. 셀프 아카이빙: 첫째, 학자들은 자신들의 전문 학회지 논문을 공개된 전자 아카이브에 맡기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셀프 아카이빙이라 부른다. 오픈 아카이브 구상에 따라 수립된 기준에 부합되는 개별적인 아카이브들은 검색엔진 및 툴에 의해 하나의 아카이브로 취급된다.[12] 오픈 전자 아카이브는 OAI(OpenArchivesInitiative)에 의해서 생성된 표준을 따르며,검색 엔진과 기타 도구가 서로 분리되어 보존돼 있어도 추적할 수 있다.[13] 따라서 사용자들은 어떠한 아카이브가 존재하고 자신들이 찾고 이용하고자 하는 컨텐츠가 어디에 존재하는지 알 필요가 없어진다. II. 오픈 엑세스 저널: 둘째, 학자들은 오픈 엑세스를 전담하는 차세대 학술지를 출간하고, 오픈 엑세스로의 전환을 선택하는 기존의 학술지들을 도울 수단을 필요로한다. 학술지 논문은 가능한 널리 보급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러한 새로운 학술지들은 출판 자료에 대한 접근과 사용을 제한하는 저작권 문제를 더 이상 불러일으키지 않을것이다. 비용이 접근권을 제한하는 장벽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새로운 학술지들은 구독료 또는 접속료를 받지 않으며, 이러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다른 수단에 의존할 것이다. 이를 위해 자금 조달을 위한 많은 대안이 존재하는데, 연구의 자금을 대는 재단 및 정부, 연구원을 고용하는 대학 및 실험실, 학과 또는 기관, 오픈엑세스라는 대의명분을 위해 후원자가 제공하는 기부금, 기본 문서의 부가물 판매로 발생하는 이익, 전통적인 등록비 또는 접속료를 부과하는 학술지의 소멸 또는 취소로 인해 자유롭게 된 기금 또는 심지어 연구자들의 기부금 또한 이에 포함된다. 모든 분야 또는 국가들을 위해, 이러한 방안 중 어느 하나를 다른 것보다 더 우선시할 필요는 없으며 또한 다른 독창적인 대안을 찾는 것을 그만 둘 필요도 없다.[14] 접근 범주[편집] 온라인에서 자유롭게 접근 가능 해야 할 문헌은 학자들이 대가 없이 세상에 제공하는 것이다. 주로, 이러한 범주는 동료 평가를 거친 학술지를 포함할 뿐 아니라, 그들이 평가를 받거나 동료들에게 중요한 연구 결과에 대해 알리기 위해 온라인에 개재하는 출판전의 저작물일 수도 있다. 이러한 문헌의 범위와 종류는 매우 다양하여, 더 광범위하고 더욱 용이한 접근이 가능하다. 이러한 문헌에 대한 “오픈 엑세스”는 공중 인터넷 망에서 이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이용자들은 인터넷 자체에 접속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게 수반되는 경우만 제외하고, 재정적, 법적 또는 기술적인 장벽에 구애 받지 않고, 이러한 문헌의 전문을 읽고, 다운로드하고, 복사, 배포, 프린트, 검색 또는 링크할 수 있고, 이를 색인으로 만들기 위해 크로울(crawl)하고 이를 데이터로 소프트웨어에 전달하거나 다른 합법적인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 이 영역에서의 재생 및 배포에 대한 유일한 제약 및 저작권의 유일한 역할은 저자들에게 자신들의 저작물의 원본을 통제하고 적절하게 인정받고 인용될 수 있는 권리를 갖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15] 배경[편집] 학술커뮤니케이션은 연구 및 기타 학술 저작물의 생산, 평가, 배포, 보존, 이용 그리고 다시 생산의 순환 과정을 갖는 하나의 시스템이다. 전통적인 학술 커뮤니케이션에서는 연구자들이 물질적인 보상 없이 연구 결과의 전파를 목적으로 학회 또는 출판사를 통해 그들의 연구논문을 학술지에 실어 왔다. 그러나 학술지는 복잡한 심사과정, 출판지연, 구독료 급증, 독점성, 상업적인 출판사의 저작권 남용 등과 같은 적지 않은 문제점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학술커뮤니케이션 시스템의 모순점을 극복하기 위한 오픈 액세스 운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BOAI는 이 오픈 액세스를 목표로 한다. 배경.[16] 각주[편집] ↑ 이두영,황옥경,학술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동향: 자유이용을 중심으로,정보 관리연구 vol.34, no.2, 2003, pp.1-23 ↑ 오픈액세스운동의 동향과 학술적 이해관계자의 대응전략[쪽 번호 필요] ↑ 신재민. 2008. 오픈 액세스 레포지터리의 사용성 평가에 관한 연구. 충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1p. ↑ 김미향. 2009. 기관 리포지터리의 검색기능 향상을 위한 인명 접근점제어 시스템 구축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8p. ↑ 이두영,황옥경, 학술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동향: 자유이용을 중심으로,정보 관리연구 vol.34, no.2, 2003, pp.1-23 ↑ 오픈액세스운동의 동향과 학술적 이해관계자의 대응전략[쪽 번호 필요] ↑ 이두영,황옥경,학술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동향: 자유이용을 중심으로,정보 관리연구 vol.34, no.2, 2003, pp.1-23 ↑ 이두영,황옥경, 학술 커뮤니케이션의 새로운 동향: 자유이용을 중심으로, 정보 관리연구 vol.34, no.2, 2003, pp.1-23 ↑ 최재황,조현양. 오픈 액세스 운동의 동향과 학술적 이해관계자의 대응전략, 정보관리학회지 제22권 제3호, 2005.9, 311-312P ↑ 심원식, 「빅딜, 오픈액세스, 구글학술검색과 대학도서관의 전자학술정보구독」, 한국정보관리학회지 제29권 제4호, 2012, pp.150~151. ↑ 최재황,조현양. 오픈 액세스 운동의 동향과 학술적 이해관계자의 대응전략, 정보관리학회지 제22권 제3호, 2005.9, 312P ↑ http://www.budapestopenaccessinitiative.org/pdf/BOAI-Korean.pdf ↑ 김미향. 2009. 기관 리포지터리의 검색기능 향상을 위한 인명 접근점제어 시스템 구축 연구. 연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7p. ↑ http://www.budapestopenaccessinitiative.org/pdf/BOAI-Korean.pdf ↑ http://www.budapestopenaccessinitiative.org/pdf/BOAI-Korean.pdf ↑ [최재황,조현양. 2005. 오픈액세스 운동이 동향과 학술적 이해관계자의 대응전략], 기타 설명. 외부 링크[편집] 부다페스트 오픈 액세스 이니셔티브 - 공식 웹사이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부다페스트_오픈_액세스_이니셔티브&amp;oldid=22820630" 분류: 문헌정보학오픈 액세스메타데이터숨은 분류: 문장에 쪽 번호가 필요한 글/2013년 5월문장에 쪽 번호가 필요한 글저작권 침해가 의심되는 문서/2013년 6월저작권 침해가 의심되는 모든 문서전체에 저작권 침해가 의심되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FrançaisBahasa IndonesiaItalianoNederlandsРусскийСрпски / srpski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0월 20일 (토) 13: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부다페스트 오픈 액세스 이니셔티브 (BOAI) 요약 **정의 및 목표** - **부다페스트 오픈 액세스 이니셔티브 (BOAI)**: 모든 학술 논문이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이용 가능해야 한다는 원리. - **주요 전략**: - **셀프 아카이빙**: 저자가 자신의 논문을 직접 업로드. - **오픈 액세스 저널**: 저작권 제한 없이 무료로 이용 가능한 저널. **자유이용의 정의** - **자유이용**: 금전적, 법적, 기술적 장벽 없이 저작물의 전문을 읽고, 다운로드, 복제, 배포할 수 있는 권리. **BOAI 선언 (2002)** - 모든 연구 논문은 인터넷을 통해 무료로 이용 가능해야 한다는 성명. - **전략**: 셀프 아카이빙과 오픈 액세스 저널의 생성. **향후 10년 권장 사항** 1. **정책**: - 모든 학술 기사는 기관의 저장소에 보관. - 연구 자금 지원 기관은 OA 보관 정책을 마련해야 함. 2. **라이센스**: CC-BY 라이센스 권장. 3. **인프라**: OA 저장소 구축 및 참여. 4. **변호 및 조정**: OA 출판 기준 설정 및 개선. **OSI의 지원** - **Open Society Institute (OSI)**: BOAI 선언을 지원하며, 초기 자금 제공 (3백만 달러). **보완 전략** - **셀프 아카이빙**: 연구자들이 논문을 공개된 전자 아카이브에 저장. - **오픈 액세스 저널**: 구독료 없이 연구 논문을 출간. **접근 범주** - **자유롭게 접근 가능한 문헌**: 동료 평가를 거친 학술지 및 출판 전 저작물 포함. - **오픈 액세스**: 재정적, 법적, 기술적 장벽 없이 문헌 이용 가능. **배경** - 전통적인 학술 커뮤니케이션의 문제점(구독료, 출판 지연 등)을 극복하기 위한 운동으로 BOAI가 등장. 이 문서는 BOAI의 목표와 전략, 그리고 오픈 액세스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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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리_포지
https://ko.wikipedia.org/wiki/밸리_포지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밸리 포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밸리 포지</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tbody><tr> <td><a><img></a> </td> <th><span><span><big><a><span>조지 워싱턴</span></a></big></span></span> </th></tr> <tr> <td colspan="2"> <ul><li><a>초기 생애</a></li> <li><a>족보</a></li> <li><a>군경력</a></li></ul> <hr> <ul><li><b><a><span>미국 독립 혁명</span></a></b></li></ul> <ul><li><b><a>대륙육군 총사령관</a></b></li></ul> <ul><li><ul><li><a>밸리 포지</a></li> <li><a>트렌턴 전투</a></li></ul></li></ul> <ul><li><b><a>제헌회의 사회감독관</a></b></li></ul> <hr> <p><b>합중국 대통령</b> </p> <hr> <p><b>제1기 임기</b> </p> <ul><li><a>만장일치 선출</a></li></ul> <ul><li><a>1기 취임</a></li> <li><a>조지 워싱턴 행정부</a></li></ul> <ul><li><a>법원조직법</a></li> <li><a>위스키 반란</a></li></ul> <ul><li><a>추수감사절</a></li> <li><a>호칭</a></li> <li><a>화폐법</a></li> <li><a>수도입지법</a> <ul><li><a>컬럼비아 특구</a></li></ul></li></ul> <hr> <p><b>제2기 임기</b> </p> <ul><li><a>만장일치 재선</a></li> <li><a>2기 취임</a></li> <li><a>중립법</a></li> <li><a>제이 조약</a></li></ul> <ul><li><a>고별연설</a></li></ul> <hr> <p><b><a><span>유산</span></a></b> </p><p><a><img></a><br> </p><p><a><img></a><br> </p><p><span><a><span>v</span></a>&#160;<span>•</span>&#160;<a><span>d</span></a>&#160;<span>•</span>&#160;<a><span>e</span></a>&#160;<span>•</span>&#160;<a><span>h</span></a></span> </p> </td></tr></tbody></table> <p><b>밸리 포지</b>(Valley Forge)는 <a>미국 독립 전쟁</a> 중인 <a>1777년</a>에서 <a>1778년</a> 사이에 <a>대륙군</a>이 동계에 주둔한 곳으로 필라델피아에서 북서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진 <a>펜실베이니아</a>에 위치하고 있다.<sup><a>&#91;1&#93;</a></sup> 그때까지 <a>대륙회의</a>의 개최 장소이자, 실질적인 수도의 역할을 했던 <a>필라델피아</a>가 <a>영국군</a>에 점령당하고, 그 겨울 <a>조지 워싱턴</a> 장군은 가장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군대 재교육을 활성화시키는 시기가 되기도 하였다. <a>1778년</a> 프랑스가 미국과 동맹을 맺고 참전한 해지만, 이후 몇 년 동안 <a>미국 독립 전쟁</a>은 지리한 소모전 양상을 보였다.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동상으로 1778년 2월말경에는 거의 2,500명의 미합중국 군인들이 사망했다.<sup><a>&#91;2&#93;</a></sup>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역사</span></a></li> <li><a><span>2</span> <span>슈토이벤 남작</span></a></li> <li><a><span>3</span> <span>밸리 포지 공원</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5</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역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병사들이 살았던 통나무집의 복제품</div></div></div> <div><div><a><img></a> <div><div><a></a></div>밸리 포지의 워싱턴</div></div></div> <div><div><a><img></a> <div><div><a></a></div>워싱턴의 밸리 포지 본부</div></div></div> <p>영국군은 1777년 9월에 필라델피아를 점령했지만 10월에 <a>새러토가 전투</a>에서 <a>존 버고인</a> 장군이 항복했기 때문에 새로운 전략의 전개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대륙군도 적극적으로 나서 전략 실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12월 초 <a>화이트 마쉬 전투</a> 이후에 워싱턴은 병력을 화이트 마쉬에서 물리고 안전한 주둔지를 찾아야 했다. </p><p>여러 곳이 제안되었지만,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40&#160;km 북서쪽에 있는 밸리 포지를 선택했다. 밸리 크릭의 아이언 포지의 이름을 딴 그곳은 탁월한 선택지임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영국군으로부터 적당히 가깝기 때문에, 영국군이 펜실베이니아 내부를 공격하고, 약탈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었고, 또한 영국군의 기습 공격을 저지하기엔 충분한 거리가 되었다. 조이 산과 미저리 산의 고지대에 위치한 고지는 북쪽의 스컬리 강과 연계되어 있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a>1777년</a> <a>12월 19일</a>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오랜 행군으로 지쳐서, 밸리 포지에 접어들었을 때, 매서운 겨울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들 병력 중 세 명 중 한 명 정도만이 신발을 신고 있었고, 대다수가 긴 행군으로 발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여단이 주둔할 곳이 선택되었으며,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1천개 이상의 오두막을 짓는 것이 주거지는 제공해주었지만, 군을 괴롭혔던 보급품 문제는 해결해 주지 못했다. </p><p>병사들은 6주간 꼼짝도 하지 않았고, 3일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오두막집 하나가 지어졌다. 또 다른 막사용 오두막은 80개의 통나무를 먼 곳에서 운반해와서 1주일에 걸쳐서 도끼로만 지었다. 이러한 오두막들은 추위를 충분히 감싸주었지만, 1777년~1778년의 펜실베이니아의 전형적인 겨울 날씨처럼 축축하고 습했다. 얼음과 눈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건조함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성처가 악화되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충분한 고기와 빵을 공급받지 못했으며, 일부는 그나마 밀가루에 물반죽을 해서 구운 맛없는 불케잌을 먹어야 했다. 그러나 제빵사 크리스토퍼 루드윅 장군의 재주로 자주 신선한 빵을 공급받지는 못했지만, 하루에 1파운드는 공급받을 수 있었다. 종종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워싱턴마저도 한탄을 했다.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 군대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생존하기 위해 굶거나, 해산하거나, 흩어져야 한다.”동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워싱턴 군 포병 대장 <a>헨리 녹스</a> 장군은 수백 마리의 말이 아사하거나 피곤에 쩔었다고 남겼다. 워싱턴은 <a>나대니엘 그린</a>을 보급관으로 임명했다. 그린은 식량과 의류가 있는 창고를 발견하고는 그것들을 가져왔다. 의복도 사정이 나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전 전투에서 다친 많은 부상병들이 옷을 입지 못해서 죽어갔다. 오랜 행군은 신발을 헤지게 했다. 담요는 모자랐고, 너덜너덜해진 의복은 교체되지 못했다. 한 때, 이러한 보급품의 부족이 4,000명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p><p>영양 부족과 누추한 의류, 숙소는 혼잡하고, 습기가 많았기 때문에, 병사들은 질병과 전염병에 시달렸다. <a>발진티푸스</a>, <a>장티푸스</a>, <a>이질</a>, 게다가 <a>폐렴</a>이 만연했고, 겨울에만 약 2,000명이 발병했다. 워싱턴은 계속 구제를 요청했지만, <a>대륙회의</a>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병사들은 고통에 신음했다. 징병된 병사의 친족의 여성들이 군이 가장 필요로 하고 있었던 세탁이나 간호 등의 봉사 활동을 하면서 그 고통이 완화되었다. </p><p>군대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보급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은, 전투의 실효성이나 사기, 훈련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이전 부대의 훈련은 뿔뿔이 흩어진 지침서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실제 전투 장면에서는 병사 간 연계가 원활하지 못해서 곤란을 겪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효과적인 훈련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임무가 슈토이벤 남작에 주어졌다. 프로이센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능숙한 훈련 교관인 슈토이벤은 막 유럽에서 도착했지만, 쉬지 않고 병사들을 단련시켰다. 슈토이벤의 강력한 방법으로 매일 격렬한 훈련이 실시되었고, 병사들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심어 완수 능력을 주었다. 이내 영국군이 필라델피아에서 떠났다는 소식에 대륙군의 모든 군인들이 열광했다. 1778년 6월 19일, 밸리 포지에 들어선 지 6개월만에 대륙군은 뉴욕으로 향한 영국군을 쫓아 밸리 포지를 나왔다. 시련의 시기는 끝이 났다. 전쟁이 이후에도 5년간 계속되었지만, 워싱턴과 그의 부대 및 태어나고 있는 나라는 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지의 힘으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p> <h2><span></span><span>슈토이벤 남작</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img> <a>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a> 문서를 참고하십시오.</div> <div><div><a><img></a> <div><div><a></a></div>슈토이벤 장군 기념 우표, 1930년 발행</div></div></div> <p>워싱턴은 <a>슈토이벤 남작</a>의 도움으로 대륙군을 제대로 된 군대로 만들 수 있었다. 동맹국인 프랑스군과 함께 새로운 전쟁 국면이 시작된 것이다. 슈토이벤 남작은 일찍이 프로이센 왕 <a>프리드리히 2세</a>의 참모 본부의 일원이었다. 프로이센 육군을 떠나 일이 없자, 자신의 군대 경험을 패이트리어트를 위해 살리려고 지원해왔다. 프랑스를 거쳐 <a>1778년</a> <a>2월 23일</a>에 밸리 포지에 도착했을 때, <a>벤저민 프랭클린</a>의 소개장을 들고 있었다. 워싱턴은 이 프로이센 군인에게 큰 기대를 갖고 즉시 감찰관으로 임명했으며, 효과적인 훈련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임무를 맡겼다. </p><p>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대륙군은 표준화된 훈련 지침서가 없었던 데다 슈토이벤은 거의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슈토이벤은 좌절하지 않고 초안을 <a>프랑스어</a>로 썼다. 그의 부관이 늦게까지 깨어 영어로 번역했다. 번역된 지침서는 사본을 만들어 각 연대나 중대에 배포되었고, 다음 날에는 훈련에 사용되었다. </p><p>슈토이벤은 병사들을 직접 움직이게 함으로써, 대륙군 장교들의 전통을 깨고 충격을 주었다. 어떤 장교는 슈토이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의 명령에 특유의 품위가 있어서, 일단 병사들을 귀신처럼 복종시켰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슈토이벤의 친근한 목소리가 캠프 안에 들렸고, 행진하는 병사의 소리와 명령하는 함성이 있었다. 곧, 중대, 연대 또한 사단까지 제대로 횡대에서 종대로, 종대에서 횡대로 움직이며 정확하게 <a>머스켓</a>을 조작하였고, 총검으로 훈련된 공격으로 상상의 목표인 ‘<a>레드 코트</a>’(영국 군복)를 전장에서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 </p><p><a>1778년</a> <a>5월 6일</a>, 대륙군이 프랑스와 동맹과 참전을 축하하며, 열병식을 실시했을 때, 슈트이벤은 그 날 열병을 잘 이끌어 표창을 받았다. 그 날 당당한 행진은 통일된 미합중국군에게 최고의 볼거리였다. 대포로부터 축포가 발사되었다. 계속된 행사에서 수천의 머스켓을 가진 2열로 줄을 선 보병이 차례차례로 연속 사격을 실시하면서, 축포를 쐈다. 근처 일대에서 환성이 메아리쳤다. 동맹의 날에 군대가 보여준 잘 훈련된 제식과 절도의 훌륭함은 영국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규율있는 유능한 전투 집단으로의 탈바꿈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워싱턴은은 슈트이벤의 도움으로 대륙군을 진정한 군대로 완성시켰다. 동맹군인 프랑스군과 함께 새로운 전쟁의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게 되었다. </p> <h2><span></span><span>밸리 포지 공원</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이 주둔지 터는 1893년에 펜실베이니아 주립 공원이 되었고, 미국 건국 200년에 해당하는 1976년 7월 4일에는 밸리 포지 국립역사공원으로 되었다. 현재 공원에는 복원된 건물, 기념물 및 방문객에 간단한 소개 영상과 전시물을 보여주는 회관이 있다.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cite>Freedman, Russell (2008). &#12298;Washington at Valley Forge&#12299;. New York: Holiday House. 3쪽.</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Freedman, Russell (2008). &#12298;Washington at Valley Forge&#12299;. New York: Holiday House. 30쪽.</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ol></div></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table> <tbody><tr> <td><img></td> <td> <b><a>위키미디어 공용</a></b>에 관련된<br>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div><b><a>밸리 포지</a></b></div> </td> </tr> </tbody></table> <table> <tbody><tr> <th colspan="2"><a>위키백과 자매 프로젝트</a>에서<br> “밸리 포지”에 관련된 문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hr> </th></tr> <tr> <th><img> </th> <td><a>위키낱말사전</a> &#8212; 사전적 정의 </td></tr> <tr> <th><img> </th> <td><a>위키책</a> &#8212; 교과서 </td></tr> <tr> <th><img> </th> <td><a>위키인용집</a> &#8212; 인용구 </td></tr> <tr> <th><img> </th> <td><a>위키문헌</a> &#8212; 원문 </td></tr> <tr> <th><img> </th> <td><a>위키뉴스</a> &#8212; 뉴스 기사 </td></tr> <tr> <th><img> </th> <td><span><a>위키미디어 공용</a></span> &#8212; 이미지와 미디어 자료 </td></tr> <tr> <th><img> </th> <td><span><a>위키생물종</a></span> &#8212; 생물 분류 도감 </td></tr></tbody></table> <ul><li><a>Valley Forge National Historical Park official website</a></li> <li><a>Valley Forge</a> at UShistory.org</li> <li><a>Pictures of Valley Forge National Historical Park</a></li> <li><a>Valley Forge: A Winter Encampment Part 1 (video)</a></li> <li><a>Valley Forge: A Winter Encampment Part 2 (video)</a></li> <li><a>Valley Forge: A Winter Encampment Part 3 (video)</a></li></ul> <p><span><span><a>좌표</a>: <span><a><span><span><span>북위 40° 05′ 49″</span> <span>서경 75° 26′ 21″</span></span></span><span>&#xfeff; / &#xfeff;</span><span><span>북위 40.096944° 서경 75.439167° </span><span>&#xfeff; / <span>40.096944; -75.439167</span></span></span></a></span></span></span> </p>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밸리_포지&amp;oldid=22415629</a>"</div> <div><div><a>분류</a>: <ul><li><a>미국 독립 전쟁</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Deutsch</a></li><li><a>English</a></li><li><a>Español</a></li><li><a>فارسی</a></li><li><a>Français</a></li><li><a>Italiano</a></li><li><a>日本語</a></li><li><a>मराठी</a></li><li><a>Nederlands</a></li><li><a>Norsk</a></li><li><a>Polski</a></li><li><a>Português</a></li><li><a>Simple English</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8년 9월 16일 (일) 03: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밸리 포지는 어디의 이름을 딴 곳인가?
아이언 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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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29
[ "밸리 포지는 어디의 이름을 딴 곳인가?", "조이 산과 미저리 산의 고지대에 위치한 고지는 북쪽의 무슨 강과 연계되어 있는가?", "밸리 포지의 북쪽에 위치하여 미군의 방어에 도움을 주었던 강은?", "며칠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오두막집 하나가 지어졌는가?", "워싱턴은 누구를 보급관으로 임명하였는가?", "미국 독립 전쟁 당시 미국 군인들이 매일 1파운드의 빵을 먹을 수 있게 한 장군은?", "나대니엘 그린이 조지 워싱턴에게 받은 역할은?", "효과적인 훈련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임무가 누구에게 주어졌는가?", "밸리 포지에 들어선 진 몇개월만에 대륙군은 뉴옥으로 향한 영국군을 쫓아 밸리 포지를 나왔는가?", "슈토이벤 남작이 밸리 포지에 오기 전에 실전 경험을 쌓았던 곳은?", "밸리 포지에 들어갔던 대륙군이 그곳에서 나온 날짜는?", "열병식을 실시했을 때, 열병을 잘 이끌어 표창을 받은 사람은?", "연속 사격을 실시한 수천의 머스켓을 가진 보병들은 몇열로 줄을 섰는가?", "대륙군이 프랑스의 참전에 대한 감사로 실시한 열병식을 이끈 사람은?", "동맹의 날 행사에서 보병들이 축포를 쏜 총은?" ]
<!DOCTYPE html> 밸리 포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밸리 포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tbody><tr> <td> </td> <th>조지 워싱턴 </th></tr> <tr> <td colspan="2"> 초기 생애 족보 군경력 미국 독립 혁명 대륙육군 총사령관 밸리 포지 트렌턴 전투 제헌회의 사회감독관 합중국 대통령 제1기 임기 만장일치 선출 1기 취임 조지 워싱턴 행정부 법원조직법 위스키 반란 추수감사절 호칭 화폐법 수도입지법 컬럼비아 특구 제2기 임기 만장일치 재선 2기 취임 중립법 제이 조약 고별연설 유산 v • d • e • h </td></tr></tbody></table> 밸리 포지(Valley Forge)는 미국 독립 전쟁 중인 1777년에서 1778년 사이에 대륙군이 동계에 주둔한 곳으로 필라델피아에서 북서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진 펜실베이니아에 위치하고 있다.[1] 그때까지 대륙회의의 개최 장소이자, 실질적인 수도의 역할을 했던 필라델피아가 영국군에 점령당하고, 그 겨울 조지 워싱턴 장군은 가장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군대 재교육을 활성화시키는 시기가 되기도 하였다. 1778년 프랑스가 미국과 동맹을 맺고 참전한 해지만, 이후 몇 년 동안 미국 독립 전쟁은 지리한 소모전 양상을 보였다. 굶주림과 질병 그리고 동상으로 1778년 2월말경에는 거의 2,500명의 미합중국 군인들이 사망했다.[2] 목차 1 역사 2 슈토이벤 남작 3 밸리 포지 공원 4 각주 5 외부 링크 역사[편집] 병사들이 살았던 통나무집의 복제품 밸리 포지의 워싱턴 워싱턴의 밸리 포지 본부 영국군은 1777년 9월에 필라델피아를 점령했지만 10월에 새러토가 전투에서 존 버고인 장군이 항복했기 때문에 새로운 전략의 전개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겨울로 접어들면서 대륙군도 적극적으로 나서 전략 실현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12월 초 화이트 마쉬 전투 이후에 워싱턴은 병력을 화이트 마쉬에서 물리고 안전한 주둔지를 찾아야 했다. 여러 곳이 제안되었지만, 그는 필라델피아에서 40 km 북서쪽에 있는 밸리 포지를 선택했다. 밸리 크릭의 아이언 포지의 이름을 딴 그곳은 탁월한 선택지임을 알 수 있었다. 그곳은 영국군으로부터 적당히 가깝기 때문에, 영국군이 펜실베이니아 내부를 공격하고, 약탈하는 것을 견제할 수 있었고, 또한 영국군의 기습 공격을 저지하기엔 충분한 거리가 되었다. 조이 산과 미저리 산의 고지대에 위치한 고지는 북쪽의 스컬리 강과 연계되어 있어,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1777년 12월 19일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고, 오랜 행군으로 지쳐서, 밸리 포지에 접어들었을 때, 매서운 겨울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들 병력 중 세 명 중 한 명 정도만이 신발을 신고 있었고, 대다수가 긴 행군으로 발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여단이 주둔할 곳이 선택되었으며, 방어선이 구축되었다. 1천개 이상의 오두막을 짓는 것이 주거지는 제공해주었지만, 군을 괴롭혔던 보급품 문제는 해결해 주지 못했다. 병사들은 6주간 꼼짝도 하지 않았고, 3일이 지나서야 제대로 된 오두막집 하나가 지어졌다. 또 다른 막사용 오두막은 80개의 통나무를 먼 곳에서 운반해와서 1주일에 걸쳐서 도끼로만 지었다. 이러한 오두막들은 추위를 충분히 감싸주었지만, 1777년~1778년의 펜실베이니아의 전형적인 겨울 날씨처럼 축축하고 습했다. 얼음과 눈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건조함을 유지하기 어려웠고, 성처가 악화되게 만들었다. 병사들은 충분한 고기와 빵을 공급받지 못했으며, 일부는 그나마 밀가루에 물반죽을 해서 구운 맛없는 불케잌을 먹어야 했다. 그러나 제빵사 크리스토퍼 루드윅 장군의 재주로 자주 신선한 빵을 공급받지는 못했지만, 하루에 1파운드는 공급받을 수 있었다. 종종 환경이 너무 열악해서 워싱턴마저도 한탄을 했다. “큰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이 군대는 어쩔 수 없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생존하기 위해 굶거나, 해산하거나, 흩어져야 한다.”동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워싱턴 군 포병 대장 헨리 녹스 장군은 수백 마리의 말이 아사하거나 피곤에 쩔었다고 남겼다. 워싱턴은 나대니엘 그린을 보급관으로 임명했다. 그린은 식량과 의류가 있는 창고를 발견하고는 그것들을 가져왔다. 의복도 사정이 나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전 전투에서 다친 많은 부상병들이 옷을 입지 못해서 죽어갔다. 오랜 행군은 신발을 헤지게 했다. 담요는 모자랐고, 너덜너덜해진 의복은 교체되지 못했다. 한 때, 이러한 보급품의 부족이 4,000명에게 돌아가지 못했다. 영양 부족과 누추한 의류, 숙소는 혼잡하고, 습기가 많았기 때문에, 병사들은 질병과 전염병에 시달렸다.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이질, 게다가 폐렴이 만연했고, 겨울에만 약 2,000명이 발병했다. 워싱턴은 계속 구제를 요청했지만, 대륙회의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병사들은 고통에 신음했다. 징병된 병사의 친족의 여성들이 군이 가장 필요로 하고 있었던 세탁이나 간호 등의 봉사 활동을 하면서 그 고통이 완화되었다. 군대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보급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은, 전투의 실효성이나 사기, 훈련도를 올리는 것이었다. 이전 부대의 훈련은 뿔뿔이 흩어진 지침서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실제 전투 장면에서는 병사 간 연계가 원활하지 못해서 곤란을 겪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효과적인 훈련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임무가 슈토이벤 남작에 주어졌다. 프로이센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능숙한 훈련 교관인 슈토이벤은 막 유럽에서 도착했지만, 쉬지 않고 병사들을 단련시켰다. 슈토이벤의 강력한 방법으로 매일 격렬한 훈련이 실시되었고, 병사들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심어 완수 능력을 주었다. 이내 영국군이 필라델피아에서 떠났다는 소식에 대륙군의 모든 군인들이 열광했다. 1778년 6월 19일, 밸리 포지에 들어선 지 6개월만에 대륙군은 뉴욕으로 향한 영국군을 쫓아 밸리 포지를 나왔다. 시련의 시기는 끝이 났다. 전쟁이 이후에도 5년간 계속되었지만, 워싱턴과 그의 부대 및 태어나고 있는 나라는 무기에 의해서가 아니라, 의지의 힘으로 승리를 얻을 수 있었다. 슈토이벤 남작[편집] 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슈토이벤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슈토이벤 장군 기념 우표, 1930년 발행 워싱턴은 슈토이벤 남작의 도움으로 대륙군을 제대로 된 군대로 만들 수 있었다. 동맹국인 프랑스군과 함께 새로운 전쟁 국면이 시작된 것이다. 슈토이벤 남작은 일찍이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의 참모 본부의 일원이었다. 프로이센 육군을 떠나 일이 없자, 자신의 군대 경험을 패이트리어트를 위해 살리려고 지원해왔다. 프랑스를 거쳐 1778년 2월 23일에 밸리 포지에 도착했을 때, 벤저민 프랭클린의 소개장을 들고 있었다. 워싱턴은 이 프로이센 군인에게 큰 기대를 갖고 즉시 감찰관으로 임명했으며, 효과적인 훈련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임무를 맡겼다. 처음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대륙군은 표준화된 훈련 지침서가 없었던 데다 슈토이벤은 거의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슈토이벤은 좌절하지 않고 초안을 프랑스어로 썼다. 그의 부관이 늦게까지 깨어 영어로 번역했다. 번역된 지침서는 사본을 만들어 각 연대나 중대에 배포되었고, 다음 날에는 훈련에 사용되었다. 슈토이벤은 병사들을 직접 움직이게 함으로써, 대륙군 장교들의 전통을 깨고 충격을 주었다. 어떤 장교는 슈토이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그의 명령에 특유의 품위가 있어서, 일단 병사들을 귀신처럼 복종시켰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슈토이벤의 친근한 목소리가 캠프 안에 들렸고, 행진하는 병사의 소리와 명령하는 함성이 있었다. 곧, 중대, 연대 또한 사단까지 제대로 횡대에서 종대로, 종대에서 횡대로 움직이며 정확하게 머스켓을 조작하였고, 총검으로 훈련된 공격으로 상상의 목표인 ‘레드 코트’(영국 군복)를 전장에서 배제할 수 있게 되었다. 1778년 5월 6일, 대륙군이 프랑스와 동맹과 참전을 축하하며, 열병식을 실시했을 때, 슈트이벤은 그 날 열병을 잘 이끌어 표창을 받았다. 그 날 당당한 행진은 통일된 미합중국군에게 최고의 볼거리였다. 대포로부터 축포가 발사되었다. 계속된 행사에서 수천의 머스켓을 가진 2열로 줄을 선 보병이 차례차례로 연속 사격을 실시하면서, 축포를 쐈다. 근처 일대에서 환성이 메아리쳤다. 동맹의 날에 군대가 보여준 잘 훈련된 제식과 절도의 훌륭함은 영국군을 물리치기 위해서 규율있는 유능한 전투 집단으로의 탈바꿈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워싱턴은은 슈트이벤의 도움으로 대륙군을 진정한 군대로 완성시켰다. 동맹군인 프랑스군과 함께 새로운 전쟁의 국면으로 접어들 수 있게 되었다. 밸리 포지 공원[편집] 이 주둔지 터는 1893년에 펜실베이니아 주립 공원이 되었고, 미국 건국 200년에 해당하는 1976년 7월 4일에는 밸리 포지 국립역사공원으로 되었다. 현재 공원에는 복원된 건물, 기념물 및 방문객에 간단한 소개 영상과 전시물을 보여주는 회관이 있다. 각주[편집] ↑ Freedman, Russell (2008). 《Washington at Valley Forge》. New York: Holiday House. 3쪽.  ↑ Freedman, Russell (2008). 《Washington at Valley Forge》. New York: Holiday House. 30쪽.  외부 링크[편집] <table> <tbody><tr> <td></td> <td>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자료가 있습니다. 밸리 포지 </td> </tr> </tbody></table> <table> <tbody><tr> <th colspan="2">위키백과 자매 프로젝트에서 “밸리 포지”에 관련된 문서를 찾을 수 있습니다. </th></tr> <tr> <th> </th> <td>위키낱말사전 — 사전적 정의 </td></tr> <tr> <th> </th> <td>위키책 — 교과서 </td></tr> <tr> <th> </th> <td>위키인용집 — 인용구 </td></tr> <tr> <th> </th> <td>위키문헌 — 원문 </td></tr> <tr> <th> </th> <td>위키뉴스 — 뉴스 기사 </td></tr> <tr> <th> </th> <td>위키미디어 공용 — 이미지와 미디어 자료 </td></tr> <tr> <th> </th> <td>위키생물종 — 생물 분류 도감 </td></tr></tbody></table> Valley Forge National Historical Park official website Valley Forge at UShistory.org Pictures of Valley Forge National Historical Park Valley Forge: A Winter Encampment Part 1 (video) Valley Forge: A Winter Encampment Part 2 (video) Valley Forge: A Winter Encampment Part 3 (video) 좌표: 북위 40° 05′ 49″ 서경 75° 26′ 21″ / 북위 40.096944° 서경 75.439167°  / 40.096944; -75.43916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밸리_포지&amp;oldid=22415629" 분류: 미국 독립 전쟁숨은 분류: 위키데이터에 있는 좌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Italiano日本語मराठी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Simple English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6일 (일) 03: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서론 밸리 포지(Valley Forge)는 미국 독립 전쟁 중 대륙군이 1777-1778년 겨울을 보낸 장소로, 조지 워싱턴 장군의 군대가 극심한 어려움 속에서도 재교육과 훈련을 통해 전투력을 강화한 중요한 시점이다. 이 문서는 밸리 포지에서의 군대의 고난과 그 극복 과정을 통해 미국 독립 전쟁의 전환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 본론 밸리 포지는 필라델피아에서 북서쪽으로 약 20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대륙군은 영국군의 점령에 대응하기 위해 이곳에 주둔하게 되었다. 겨울철의 혹독한 환경 속에서 병사들은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며, 2,500명이 사망하는 비극을 겪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또한 대륙군의 훈련과 재편성의 기회가 되었다. 워싱턴은 슈토이벤 남작을 훈련 교관으로 임명하여, 병사들에게 체계적이고 효과적인 훈련을 실시했다. 슈토이벤은 프로이센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대륙군을 훈련시키며, 군의 사기와 전투력을 높였다. 이 과정에서 대륙군은 영국군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고, 1778년 6월에는 영국군을 추격하며 밸리 포지를 떠날 수 있었다. ### 결론 밸리 포지에서의 경험은 대륙군이 단순한 군대에서 조직적이고 훈련된 군대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는 미국 독립 전쟁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워싱턴과 그의 부대는 극복의 의지를 통해 승리를 향한 길을 열었다. 밸리 포지는 현재 역사공원으로 보존되어 있으며, 미국의 독립과 군사적 훈련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장소로 남아 있다. 글쓴이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군대의 훈련과 사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글 전체의 요지를 논리적 흐름에 맞게 정리해줘. 서론, 본론, 결론 구조로 요약해주고, 각 부분마다 글쓴이의 의도나 주장도 명확히 밝혀줘.
순다로리스
https://ko.wikipedia.org/wiki/순다로리스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순다로리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순다로리스</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tbody><tr> <td colspan="2"> <div><div><img></div><span><span><a><img></a></span><big><big><b>순다로리스<sup><a>&#91;1&#93;</a></sup></b></big></big></span></div> </td></tr> <tr> <td><a><img></a><br> </td></tr> <tr> <th><b><a>보전 상태</a></b> </th></tr> <tr> <td><img><br><a>취약</a>(VU), <small><a>IUCN 3.1</a><sup><a>&#91;2&#93;</a></sup></small> </td></tr> <tr> <th><b><a>생물 분류</a></b> </th></tr> <tr> <td> <table> <tbody><tr> <td>계: </td> <td><a>동물계</a> </td></tr> <tr> <td>문: </td> <td><a>척삭동물문</a> </td></tr> <tr> <td>강: </td> <td><a>포유강</a> </td></tr> <tr> <td>목: </td> <td><a>영장목</a> </td></tr> <tr> <td>아목: </td> <td><a>곡비원아목</a> </td></tr> <tr> <td>하목: </td> <td><a>로리스하목</a> </td></tr> <tr> <td>과: </td> <td><a>로리스과</a> </td></tr> <tr> <td>아과: </td> <td><a>로리스아과</a> </td></tr> <tr> <td>속: </td> <td><a>늘보로리스속</a> </td></tr> <tr> <td>종: </td> <td><b>순다로리스</b><br>(<i>N. coucang</i>) </td></tr> </tbody></table> </td></tr> <tr> <th><b><a>학명</a></b> </th></tr> <tr> <td><span><i><b>Nycticebus coucang</b></i></span><br><small>(Boddaert, 1785)</small> </td></tr> <tr> <th><b><a>이명</a></b> </th></tr> <tr> <td><i>N. c. coucang</i>: <ul><li><i>brachycephalus</i> <small>Sody, 1949</small></li> <li><i>buku</i> <small>Robinson, 1917</small></li> <li><i>hilleri</i> <small>Stone and Rehn, 1902</small></li> <li><i>insularis</i> <small>Robinson, 1917</small></li> <li><i>malaiana</i> <small>Anderson, 1881</small></li> <li><i>natunae</i> <small>Stone and Rehn, 1902</small></li> <li><i>sumatrensis</i> <small>Ludeking, 1867</small></li> <li><i>tardigradus</i> <small>Raffles, 1821</small></li></ul> <p><i>N. c. menagensis</i>: </p> <ul><li><i>bancanus</i> <small>Lyon, 1906</small></li> <li><i>borneanus</i> <small>Lyon, 1906</small></li> <li><i>philippinus</i> <small>Cabrera, 1908</small></li></ul> <p><i>N. c. javanicus</i>: </p> <ul><li><i>ornatus</i> <small>Thomas, 1921</small></li></ul> </td></tr></tbody></table> <table> <tbody><tr> <td><img></td> <td> <b><a>위키생물종</a></b>에 관련된<br>분류 및 자료가 있습니다. <div> <b><a>순다로리스</a></b></div> </td> </tr> </tbody></table> <p><b>순다로리스</b>(<i>Nycticebus coucang</i>) 또는 <b>늘보원숭이</b>는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a>로리스과</a>의 3중의 <a>늘보로리스</a> 중 하나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이 <a>곡비원류</a> <a>영장류</a>는 앞 쪽을 향하고 있는 큰 눈과 거의 털에 감추어져 있는 작은 귀를 가지고 있다. 꼬리는 매우 뭉턱한 편이다. 이들은 다른 로리스들, 예를 들어 <a>벵갈늘보로리스</a>(<i>Nycticebus bengalensis</i>)보다 작은 편이지만, <a>피그미늘보로리스</a>(<i>N. pygmaeus</i>) 보다는 크다. 순다로리스는 낮에 주로 활동하는 주행성 동물이고, 나무 꼭대기를 좋아하는 수목형 동물이다. 학명은 <a>인도네시아</a>, <a>브루나이</a> 그리고 <a>말레이시아</a>에서 불리는 속명 <b>Kukang</b>에서 유래하였다. 또한 "말루-말루"(<i>Malu-Malu</i>, 이를 번역하면 "부끄럼타는 쿠스쿠스"라는 뜻으로 쿠스쿠스 종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잘못 유래된 것이다.)라는 이름으로도 흔히 알려져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부캉"(<i>Bukang</i>) 또는 "칼라마산"(<i>Kalamasan</i>)으로 불리기도 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콩캉"(<i>Kongkang</i>) 또는 "케라 두쿠"(<i>Kera Duku</i>, 케라는 <a>마카크</a>, 두쿠는 <a>과일</a>을 의미한다.)로 흔히 알려져 있다. 보르네오에서는 "탄다이안동"(<a>두순 족</a>) 또는 <i>sesir</i>로 부른다.<sup><a>&#91;3&#93;</a></sup> 태국에서는 <i>Linglom</i> 또는 <i>Nangeye</i>, <i>Lingjun</i>으로 부른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아종</span></a></li> <li><a><span>2</span> <span>분포 범위와 서식지</span></a></li> <li><a><span>3</span> <span>습성</span></a> <ul> <li><a><span>3.1</span> <span>먹이</span></a></li> </ul> </li> <li><a><span>4</span> <span>번식</span></a></li> <li><a><span>5</span> <span>멸종 위험</span></a></li> <li><a><span>6</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7</span> <span>참고 문헌</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아종</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3종의 아종이 인정되고 있다. </p> <ul><li>말레이늘보로리스 또는 큰늘보로리스" (<i>Nycticebus coucang coucang</i>)<sup><a>&#91;3&#93;</a></sup></li> <li>자바늘보로리스 (<i>Nycticebus coucang javanicus</i>)<sup><a>&#91;3&#93;</a></sup></li> <li>보르네오늘보로리스 또는 필리핀늘보로리스 (<i>Nycticebus coucang menagensis</i>)<sup><a>&#91;3&#93;</a></sup></li></ul> <p>어떤 전문가들은 자바늘보로리스(<i>javanicus</i>)를 별도의 종 <i>N. javanicus</i>로 인정하는 반면에, 일부는 보르네오늘보로리스(<i>menagensis</i>)를 별도의 종 <i>N. menagensis</i>로 제안하고 있다.<sup><a>&#91;4&#93;</a></sup> 만일 말레이늘보로리스(<i>N. c. coucang</i>)가 아종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면, 늘보로리스속(<i>Nycticebus</i>)에서 아종을 포함하고 있는 유일한 종이 된다. 늘보로리스속(<i>Nycticebus</i>)은 크기, 운동 패턴, 무늬, 착추뼈의 차이에 의해 구별된다.<sup><a>&#91;4&#93;</a></sup> 이전에 태국과 말레이시아에서 발견되어 아종으로 인정되었던 <i>N. c. tenasserimensis</i>는 이제 말레이늘보로리스(<i>N. c. coucang</i>)의 이명으로 간주되고 있다.<sup><a>&#91;5&#93;</a></sup> </p> <h2><span></span><span>분포 범위와 서식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순다로리스는 과수원, 농장, 대나무 숲 그리고 말레이시아 반도의 일부 지역, 태국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a>자와 섬</a> 그리고 <a>보르네오 섬</a>의 열대 우림에서 산다.<sup><a>&#91;4&#93;</a></sup><sup><a>&#91;6&#93;</a></sup> 또한, 필리핀의 <a>타위타위</a> 군도에는 보르네오늘보로리스(<i>N. c. menagensis</i>)가 산다. 말라이늘보로리스(<i>N. c. coucang</i>)는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들, 싱가포르에서 발견된다. 보르네오늘보로리스는 보르네오, 말레이시아, 타위타위에서 발견되지만, 자바늘보로리스(<i>N. c. menagensis</i>)는 <a>자와 섬</a>에서만 발견된다.<sup><a>&#91;4&#93;</a></sup> 2007년 현재까지, 이 아종들에 대한 합의된 개체수 집계가 나와 있지 않다.<sup><a>&#91;4&#93;</a></sup> </p> <h2><span></span><span>습성</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다른 늘보로리스들처럼, 순다로리스는 수목형 동물이자 야행성 영장류이며, 낮에 나무가지의 갈래 또는 울창한 식물들 속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밤에는 과일과 곤충 등의 먹이를 구한다. 다른 로리스 종들과 달리, 순다로리스는 일생의 대부분을 나무에서 보내는 반면에 <a>벵갈늘보로리스</a>는 지상에서 잠을 자곤 하며, 순다로리스는 나뭇가지나 군잎 위에서 잠을 잔다.<sup><a>&#91;4&#93;</a></sup> 순다로리스는 연속되는 캐노피로 덮힌 단단한 나무 숲을 좋아하지만 이와 비슷한 조림 환경에서도 발견되며, 확인되지 않은 채 남아있던 자바늘보로리스와 보르네오늘보로리스의 정확한 서식지가 2007년의 보고를 통해 확인되었다.<sup><a>&#91;4&#93;</a></sup> 어른이 되면, 0.004&#160;km²에서 0.25&#160;km²면적에 겹쳐서 산다.<sup><a>&#91;4&#93;</a></sup> 번식을 제외하고는, 순다로리스는 매우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 1967년의 한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늘보로리스는 6마리가 함께 있는 것이 보고 되었으며, 이 군집은 발정기에 있는 한 마리 암컷과 다섯 마리의 수컷 구애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sup><a>&#91;7&#93;</a></sup> </p> <h3><span></span><span>먹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순다로리스는 나무 수액, <a>꽃꿀</a>, 과일, 수지 그리고 <a>절지동물</a> 등을 먹이로 먹는다.<sup><a>&#91;4&#93;</a></sup> </p> <div><div><a><img></a> <div><div><a></a></div>늘보로리스에 관한 1904년 그림. 확실하지 않지만, 상단과 하단은 말레이늘보로리스의 반문(斑紋)을 보여주며, 왼쪽과 오른쪽은 <a>피그미늘보로리스</a>의 채색과 크기를 보여주고 있다.<sup><a>&#91;8&#93;</a></sup></div></div></div> <h2><span></span><span>번식</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순다로리스는 일부다처제 생활을 하며, 한 번에 한 마리의 새끼를 낳고 드물게 쌍둥이를 낳기도 한다. 암컷은 생후 18 내지 24개월이 되면, 조금 일찍 성숙기에 도달하는 수컷과 함께 성적으로 성숙해진다.<sup><a>&#91;9&#93;</a></sup> 임신 기간은 약 180일 또는 6개월 정도 지속된다. 한 마리의 새끼가 태어나고(쌍둥이는 드물게 태어나며) 새끼는 9개월까지 어미 곁에 머무는 반면에, 수컷은 세력권세의 습성을 지니고 있다. 수명은 약 12~14년이다. </p> <h2><span></span><span>멸종 위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애완용으로의 판매를 위해 이빨이 뽑히는 순다로리스. 이빨이 뽑힌 순다로리스는 상처감염이나 과다출혈로 죽게 된다.</div></div></div> <p>순다로리스는 서식지 감소와 애완용 밀무역으로 인해 멸종 위험에 처해 있다.<sup><a>&#91;10&#93;</a></sup> 이 동물에 대한 무역은 불법이지만, 인도네시아와 브루나이의 애완 동물 시장에서 순다로리스를 발견할 수 있다. 브루나이 당국은 <a>타섹 메린번 헤리티지 공원</a>의 시장에서 발견되는 동물들을 몰수해서 다시 풀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sup><a>&#91;11&#93;</a></sup> </p><p><a>대한민국</a> <a>부산</a>의 한 시장에서 밀수된 멸종위기종 순다로리스가 발견되었으며,<sup><a>&#91;12&#93;</a></sup> 지속적으로 순다로리스 등을 밀수하던 업자들이 적발되기도 하였다.<sup><a>&#91;13&#93;</a></sup><sup><a>&#91;14&#93;</a></sup> 순다로리스가 애완동물로 잡혀 유통되는 과정에서 산 채로 이빨이 뽑히는 등 끔찍한 일이 벌어지며, 밀반입 과정에서 대부분이 죽게 된다.<sup><a>&#91;15&#93;</a></sup>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cite>Groves, C.P. (2005). Wilson, D.E.; Reeder, D.M., 편집. <a>&#12298;Mammal Species of the World: A Taxonomic and Geographic Reference&#12299;</a> (영어) 3판. 존스 홉킨스 대학교 출판사. 122쪽. <a>ISBN</a>&#160;<a>0-801-88221-4</a>. <a>OCLC</a>&#160;<a>62265494</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Nycticebus coucang&#8221;</a>. &#12298;<a>멸종 위기 종의 IUCN 적색 목록</a>. 2008판&#12299; (영어). <a>국제 자연 보전 연맹</a>. 2008<span>. 2009년 1월 1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span> <span><a>vernacular names: English, French, German, others (countries of origin)</a>. Lorises and pottos: species, subspecies, local populations. In: <a>http://www.loris-conservation.org/database/</a> Accessed 2009-04-14.</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 <sup><a>마</a></sup> <sup><a>바</a></sup> <sup><a>사</a></sup> <sup><a>아</a></sup> <sup><a>자</a></sup></span> <span>Gron KJ. 2009 March 18. <a>Primate Factsheets: Slow loris (Nycticebus) Taxonomy, Morphology, &amp; Ecology Taxonomy, Morphology, &amp; Ecology</a>. &lt;<a>http://pin.primate.wisc.edu/factsheets/entry/slow_loris</a>&gt;. Accessed 2009 April 14.</span> </li> <li><span><a>↑</a></span> <span><a>Jack Fooden. Report On Primates Collected In Western Thailand January-April, 1967</a>. Fieldiana Volume 59, Number 1 March 18, 1971</span> </li> <li><span><a>↑</a></span> <span><a>Slow Loris distribution map</a><sup>&#91;<a>깨진 링크</a>(<a>과거 내용 찾기</a>)&#93;</sup>, loris-conservation.org</span> </li> <li><span><a>↑</a></span> <span><a>Management of Lorises in Captivity. A Husbandry Manual for Asian Lorisines (Nycticebus &amp; Loris ssp.)</a>. Edited by: Helena Fitch-Snyder and Helga Schulze. Compiler: Lena C. Larsen. loris-conservation.org Last amendment: 2 January 2003</span> </li> <li><span><a>↑</a></span> <span><a>A review of colour and markings in Nycticebus species and subspecies</a>. loris-conservation.org</span> </li> <li><span><a>↑</a></span> <span><cite>Izard, M.K., Weisenseel, K.A., and Ange, R.L (198). &#8220;Reproduction in the slow loris (Nycticebus coucang)&#8221;. &#12298;American Journal of Primatology&#12299; <b>16</b>: 331–339.</cite><span><span>&#160;</span></span><span> CS1 관리 - 여러 이름 (<a>링크</a>)</span></span> </li> <li><span><a>↑</a></span> <span><a>The Trafficking of Kukangs or Slow Lorises (Nycticebus coucang) in Indonesia</a>. Rosek Nursahid and Asep R Purnama, ProFauna Indonesia. 27 January 2007.</span> </li> <li><span><a>↑</a></span> <span><a>Endangered Slow Loris released at Tasek Merimbun Heritage Park</a> <a>Archived</a> 2010년 11월 22일 - <a>웨이백 머신</a>. Borneo Bulletin, Brunei, 29 October 2005.</span> </li> <li><span><a>↑</a></span> <span><a>[카드뉴스</a> 부산서 멸종위기종 원숭이 '슬로로리스' 발견]</span> </li> <li><span><a>↑</a></span> <span><a>'멸종위기종' 원숭이·악어 밀수해 이동동물원 차려</a></span> </li> <li><span><a>↑</a></span> <span><a>밀수된 멸종위기종 슬로로리스 원숭이</a></span> </li> <li><span><a>↑</a></span> <span><a>EBS &lt;하나뿐인 지구&gt; - "야생동물이 배송되었습니다". EBS 공식블로그.</a></span> </li> </ol></div></div> <h2><span></span><span>참고 문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Ehrlich, A. and Musicant, A. 1977. Social and individual behaviors in captive slow lorises. Behaviour. Vol. 60, 197-219.</li> <li>Myers, P., R. Espinosa, C. S. Parr, T. Jones, G. S. Hammond, and T. A. Dewey. 2008. The Animal Diversity Web (online). Accessed January 10, 2009 at <a>http://animaldiversity.org</a>.</li> <li>Wilson, D. E., and Reeder, D. M. (eds). ed.. Mammal Species of the World (3rd edition ed.).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pp.&#160;122.</li> <li>Bourne, G.H. 1974. Primate odyssey. G.P. Putnam's Sons, New York.</li> <li>Eimerl, S. and I. DeVore. 1965. The primates. Time Inc., New York.</li> <li>Freeman, D. 1977. The love of monkeys and apes. Octopus Books, London.</li> <li>Walker, E.P. 1964. Mammals of the world. Johns Hopkins Press, Baltimore, MD.</li> <li>Alterman, L. 1995. Toxins and toothcombs: potential allospecific chemical defenses in Nyciticebus and *Perodicticus. Pp.&#160;413–424 in L. Alterman, G. Doyle, Y. Izzard, eds. Creatures of the Dark. NY: Plenum Press.</li></ul>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span>현존하는</span> <a>로리스과</a><span>의 종</span></div></th></tr><tr><td colspan="2"><div> <ul><li>계: <a>동물계</a></li> <li>문: <a>척삭동물문</a></li> <li>강: <a>포유강</a></li> <li>목: <a>영장목</a></li> <li>아목: <a>곡비원아목</a></li></ul> </div></td></tr><tr><th><a>포토원숭이아과</a></th><td><div></div><table><tbody><tr><th><a>앙완티보속</a></th><td><div> <ul><li><a>칼라바르앙완티보</a></li> <li><a>황금앙완티보</a></li></ul> </div></td></tr><tr><th><a>포토원숭이속</a></th><td><div> <ul><li><a>포토원숭이</a></li></ul> </div></td></tr><tr><th><a>가짜포토원숭이속</a></th><td><div> <ul><li><a>가짜포토원숭이</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a>로리스아과</a></th><td><div></div><table><tbody><tr><th><a>홀쭉이로리스속</a></th><td><div> <ul><li><a>붉은홀쭉이로리스</a></li> <li><a>회색홀쭉이로리스</a></li></ul> </div></td></tr><tr><th><a>늘보로리스속</a></th><td><div> <ul><li><a>순다로리스</a></li> <li><a>벵갈늘보로리스</a></li> <li><a>피그미늘보로리스</a></li> <li><a>자바늘보로리스</a></li> <li><a>필리핀늘보로리스</a></li> <li><a>방카늘보로리스</a></li> <li><a>보르네오늘보로리스</a></li> <li><a>카얀강늘보로리스</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d colspan="2"><div><b><a>분류</a></b></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순다로리스&amp;oldid=22881265</a>"</div> <div><div><a>분류</a>: <ul><li><a>IUCN 적색 목록 취약종</a></li><li><a>로리스과</a></li><li><a>말레이시아의 포유류</a></li><li><a>싱가포르의 포유류</a></li><li><a>인도네시아의 포유류</a></li><li><a>태국의 포유류</a></li><li><a>1785년 기재된 동물</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CS1 - 영어 인용 (en)</a></li><li><a>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a></li><li><a>CS1 관리 - 여러 이름</a></li><li><a>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li><a>위키생물종</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Български</a></li><li><a>Català</a></li><li><a>Cebuano</a></li><li><a>Čeština</a></li><li><a>Dansk</a></li><li><a>Deutsch</a></li><li><a>English</a></li><li><a>Esperanto</a></li><li><a>Español</a></li><li><a>Euskara</a></li><li><a>فارسی</a></li><li><a>Suomi</a></li><li><a>Français</a></li><li><a>Magyar</a></li><li><a>Bahasa Indonesia</a></li><li><a>Italiano</a></li><li><a>Jawa</a></li><li><a>ქართული</a></li><li><a>ລາວ</a></li><li><a>Bahasa Melayu</a></li><li><a>Nederlands</a></li><li><a>Norsk</a></li><li><a>Polski</a></li><li><a>پنجابی</a></li><li><a>Română</a></li><li><a>Русский</a></li><li><a>Basa Sunda</a></li><li><a>Svenska</a></li><li><a>ไทย</a></li><li><a>Tiếng Việt</a></li><li><a>Winaray</a></li><li><a>中文</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8년 10월 30일 (화) 18:0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늘보로리스속의 구분법은 크기, 운동 패턴, 무늬 그리고 또 무엇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는가?
착추뼈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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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97
[ "늘보로리스속의 구분법은 크기, 운동 패턴, 무늬 그리고 또 무엇의 차이에 의해 구별되는가? ", "태국과 말레이시아에서 발견되어 한때는 아종으로 인정받았으나 현재는 말레이늘보로리스의 이명으로 간주되고 있는 것은?", "늘보로리스속은 무엇에 의해 구별되는가?", "태국과 말레이시아에서 발견되어 아종으로 인정받았던 것은?", "순다로리스가 잠을 자는 곳은 어디인가?", "자바늘보로리스와 보르네오늘보로리스의 정확한 서식지가 발견된 해는 언제인가?", "순다로리스는 일생의 대부분을 어디에서 보내는가?", "순다로리스 처럼 나무에서 일생을 보내는 동물을 칭하는 말은?", "순다로리스가 일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곳은?", "벵갈늘보로리스가 잠을 자는 곳은?" ]
<!DOCTYPE html> 순다로리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순다로리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tbody><tr> <td colspan="2"> 순다로리스[1] </td></tr> <tr> <td> </td></tr> <tr> <th>보전 상태 </th></tr> <tr> <td>취약(VU), IUCN 3.1[2] </td></tr> <tr> <th>생물 분류 </th></tr> <tr> <td> <table> <tbody><tr> <td>계: </td> <td>동물계 </td></tr> <tr> <td>문: </td> <td>척삭동물문 </td></tr> <tr> <td>강: </td> <td>포유강 </td></tr> <tr> <td>목: </td> <td>영장목 </td></tr> <tr> <td>아목: </td> <td>곡비원아목 </td></tr> <tr> <td>하목: </td> <td>로리스하목 </td></tr> <tr> <td>과: </td> <td>로리스과 </td></tr> <tr> <td>아과: </td> <td>로리스아과 </td></tr> <tr> <td>속: </td> <td>늘보로리스속 </td></tr> <tr> <td>종: </td> <td>순다로리스(N. coucang) </td></tr> </tbody></table> </td></tr> <tr> <th>학명 </th></tr> <tr> <td>Nycticebus coucang(Boddaert, 1785) </td></tr> <tr> <th>이명 </th></tr> <tr> <td>N. c. coucang: brachycephalus Sody, 1949 buku Robinson, 1917 hilleri Stone and Rehn, 1902 insularis Robinson, 1917 malaiana Anderson, 1881 natunae Stone and Rehn, 1902 sumatrensis Ludeking, 1867 tardigradus Raffles, 1821 N. c. menagensis: bancanus Lyon, 1906 borneanus Lyon, 1906 philippinus Cabrera, 1908 N. c. javanicus: ornatus Thomas, 1921 </td></tr></tbody></table> <table> <tbody><tr> <td></td> <td> 위키생물종에 관련된분류 및 자료가 있습니다. 순다로리스 </td> </tr> </tbody></table> 순다로리스(Nycticebus coucang) 또는 늘보원숭이는 동남아시아가 원산지인 로리스과의 3중의 늘보로리스 중 하나이다. 천천히 움직이는 이 곡비원류 영장류는 앞 쪽을 향하고 있는 큰 눈과 거의 털에 감추어져 있는 작은 귀를 가지고 있다. 꼬리는 매우 뭉턱한 편이다. 이들은 다른 로리스들, 예를 들어 벵갈늘보로리스(Nycticebus bengalensis)보다 작은 편이지만, 피그미늘보로리스(N. pygmaeus) 보다는 크다. 순다로리스는 낮에 주로 활동하는 주행성 동물이고, 나무 꼭대기를 좋아하는 수목형 동물이다. 학명은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그리고 말레이시아에서 불리는 속명 Kukang에서 유래하였다. 또한 "말루-말루"(Malu-Malu, 이를 번역하면 "부끄럼타는 쿠스쿠스"라는 뜻으로 쿠스쿠스 종들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잘못 유래된 것이다.)라는 이름으로도 흔히 알려져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부캉"(Bukang) 또는 "칼라마산"(Kalamasan)으로 불리기도 한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콩캉"(Kongkang) 또는 "케라 두쿠"(Kera Duku, 케라는 마카크, 두쿠는 과일을 의미한다.)로 흔히 알려져 있다. 보르네오에서는 "탄다이안동"(두순 족) 또는 sesir로 부른다.[3] 태국에서는 Linglom 또는 Nangeye, Lingjun으로 부른다. 목차 1 아종 2 분포 범위와 서식지 3 습성 3.1 먹이 4 번식 5 멸종 위험 6 각주 7 참고 문헌 아종[편집] 3종의 아종이 인정되고 있다. 말레이늘보로리스 또는 큰늘보로리스" (Nycticebus coucang coucang)[3] 자바늘보로리스 (Nycticebus coucang javanicus)[3] 보르네오늘보로리스 또는 필리핀늘보로리스 (Nycticebus coucang menagensis)[3] 어떤 전문가들은 자바늘보로리스(javanicus)를 별도의 종 N. javanicus로 인정하는 반면에, 일부는 보르네오늘보로리스(menagensis)를 별도의 종 N. menagensis로 제안하고 있다.[4] 만일 말레이늘보로리스(N. c. coucang)가 아종의 지위를 계속 유지하면, 늘보로리스속(Nycticebus)에서 아종을 포함하고 있는 유일한 종이 된다. 늘보로리스속(Nycticebus)은 크기, 운동 패턴, 무늬, 착추뼈의 차이에 의해 구별된다.[4] 이전에 태국과 말레이시아에서 발견되어 아종으로 인정되었던 N. c. tenasserimensis는 이제 말레이늘보로리스(N. c. coucang)의 이명으로 간주되고 있다.[5] 분포 범위와 서식지[편집] 순다로리스는 과수원, 농장, 대나무 숲 그리고 말레이시아 반도의 일부 지역, 태국 그리고 인도네시아의 자와 섬 그리고 보르네오 섬의 열대 우림에서 산다.[4][6] 또한, 필리핀의 타위타위 군도에는 보르네오늘보로리스(N. c. menagensis)가 산다. 말라이늘보로리스(N. c. coucang)는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들, 싱가포르에서 발견된다. 보르네오늘보로리스는 보르네오, 말레이시아, 타위타위에서 발견되지만, 자바늘보로리스(N. c. menagensis)는 자와 섬에서만 발견된다.[4] 2007년 현재까지, 이 아종들에 대한 합의된 개체수 집계가 나와 있지 않다.[4] 습성[편집] 다른 늘보로리스들처럼, 순다로리스는 수목형 동물이자 야행성 영장류이며, 낮에 나무가지의 갈래 또는 울창한 식물들 속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밤에는 과일과 곤충 등의 먹이를 구한다. 다른 로리스 종들과 달리, 순다로리스는 일생의 대부분을 나무에서 보내는 반면에 벵갈늘보로리스는 지상에서 잠을 자곤 하며, 순다로리스는 나뭇가지나 군잎 위에서 잠을 잔다.[4] 순다로리스는 연속되는 캐노피로 덮힌 단단한 나무 숲을 좋아하지만 이와 비슷한 조림 환경에서도 발견되며, 확인되지 않은 채 남아있던 자바늘보로리스와 보르네오늘보로리스의 정확한 서식지가 2007년의 보고를 통해 확인되었다.[4] 어른이 되면, 0.004 km²에서 0.25 km²면적에 겹쳐서 산다.[4] 번식을 제외하고는, 순다로리스는 매우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 1967년의 한 연구에 의하면, 대부분의 늘보로리스는 6마리가 함께 있는 것이 보고 되었으며, 이 군집은 발정기에 있는 한 마리 암컷과 다섯 마리의 수컷 구애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7] 먹이[편집] 순다로리스는 나무 수액, 꽃꿀, 과일, 수지 그리고 절지동물 등을 먹이로 먹는다.[4] 늘보로리스에 관한 1904년 그림. 확실하지 않지만, 상단과 하단은 말레이늘보로리스의 반문(斑紋)을 보여주며, 왼쪽과 오른쪽은 피그미늘보로리스의 채색과 크기를 보여주고 있다.[8] 번식[편집] 순다로리스는 일부다처제 생활을 하며, 한 번에 한 마리의 새끼를 낳고 드물게 쌍둥이를 낳기도 한다. 암컷은 생후 18 내지 24개월이 되면, 조금 일찍 성숙기에 도달하는 수컷과 함께 성적으로 성숙해진다.[9] 임신 기간은 약 180일 또는 6개월 정도 지속된다. 한 마리의 새끼가 태어나고(쌍둥이는 드물게 태어나며) 새끼는 9개월까지 어미 곁에 머무는 반면에, 수컷은 세력권세의 습성을 지니고 있다. 수명은 약 12~14년이다. 멸종 위험[편집] 애완용으로의 판매를 위해 이빨이 뽑히는 순다로리스. 이빨이 뽑힌 순다로리스는 상처감염이나 과다출혈로 죽게 된다. 순다로리스는 서식지 감소와 애완용 밀무역으로 인해 멸종 위험에 처해 있다.[10] 이 동물에 대한 무역은 불법이지만, 인도네시아와 브루나이의 애완 동물 시장에서 순다로리스를 발견할 수 있다. 브루나이 당국은 타섹 메린번 헤리티지 공원의 시장에서 발견되는 동물들을 몰수해서 다시 풀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11] 대한민국 부산의 한 시장에서 밀수된 멸종위기종 순다로리스가 발견되었으며,[12] 지속적으로 순다로리스 등을 밀수하던 업자들이 적발되기도 하였다.[13][14] 순다로리스가 애완동물로 잡혀 유통되는 과정에서 산 채로 이빨이 뽑히는 등 끔찍한 일이 벌어지며, 밀반입 과정에서 대부분이 죽게 된다.[15] 각주[편집] ↑ Groves, C.P. (2005). Wilson, D.E.; Reeder, D.M., 편집. 《Mammal Species of the World: A Taxonomic and Geographic Reference》 (영어) 3판. 존스 홉킨스 대학교 출판사. 122쪽. ISBN 0-801-88221-4. OCLC 62265494.  ↑ “Nycticebus coucang”. 《멸종 위기 종의 IUCN 적색 목록. 2008판》 (영어). 국제 자연 보전 연맹. 2008. 2009년 1월 1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vernacular names: English, French, German, others (countries of origin). Lorises and pottos: species, subspecies, local populations. In: http://www.loris-conservation.org/database/ Accessed 2009-04-14.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Gron KJ. 2009 March 18. Primate Factsheets: Slow loris (Nycticebus) Taxonomy, Morphology, &amp; Ecology Taxonomy, Morphology, &amp; Ecology. &lt;http://pin.primate.wisc.edu/factsheets/entry/slow_loris&gt;. Accessed 2009 April 14. ↑ Jack Fooden. Report On Primates Collected In Western Thailand January-April, 1967. Fieldiana Volume 59, Number 1 March 18, 1971 ↑ Slow Loris distribution map[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loris-conservation.org ↑ Management of Lorises in Captivity. A Husbandry Manual for Asian Lorisines (Nycticebus &amp; Loris ssp.). Edited by: Helena Fitch-Snyder and Helga Schulze. Compiler: Lena C. Larsen. loris-conservation.org Last amendment: 2 January 2003 ↑ A review of colour and markings in Nycticebus species and subspecies. loris-conservation.org ↑ Izard, M.K., Weisenseel, K.A., and Ange, R.L (198). “Reproduction in the slow loris (Nycticebus coucang)”. 《American Journal of Primatology》 16: 331–339.  CS1 관리 - 여러 이름 (링크) ↑ The Trafficking of Kukangs or Slow Lorises (Nycticebus coucang) in Indonesia. Rosek Nursahid and Asep R Purnama, ProFauna Indonesia. 27 January 2007. ↑ Endangered Slow Loris released at Tasek Merimbun Heritage Park Archived 2010년 11월 22일 - 웨이백 머신. Borneo Bulletin, Brunei, 29 October 2005. ↑ [카드뉴스 부산서 멸종위기종 원숭이 '슬로로리스' 발견] ↑ '멸종위기종' 원숭이·악어 밀수해 이동동물원 차려 ↑ 밀수된 멸종위기종 슬로로리스 원숭이 ↑ EBS &lt;하나뿐인 지구&gt; - "야생동물이 배송되었습니다". EBS 공식블로그. 참고 문헌[편집] Ehrlich, A. and Musicant, A. 1977. Social and individual behaviors in captive slow lorises. Behaviour. Vol. 60, 197-219. Myers, P., R. Espinosa, C. S. Parr, T. Jones, G. S. Hammond, and T. A. Dewey. 2008. The Animal Diversity Web (online). Accessed January 10, 2009 at http://animaldiversity.org. Wilson, D. E., and Reeder, D. M. (eds). ed.. Mammal Species of the World (3rd edition ed.).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pp. 122. Bourne, G.H. 1974. Primate odyssey. G.P. Putnam's Sons, New York. Eimerl, S. and I. DeVore. 1965. The primates. Time Inc., New York. Freeman, D. 1977. The love of monkeys and apes. Octopus Books, London. Walker, E.P. 1964. Mammals of the world. Johns Hopkins Press, Baltimore, MD. Alterman, L. 1995. Toxins and toothcombs: potential allospecific chemical defenses in Nyciticebus and *Perodicticus. Pp. 413–424 in L. Alterman, G. Doyle, Y. Izzard, eds. Creatures of the Dark. NY: Plenum Press. <table><tbody><tr><th colspan="2">vdeh현존하는 로리스과의 종</th></tr><tr><td colspan="2"> 계: 동물계 문: 척삭동물문 강: 포유강 목: 영장목 아목: 곡비원아목 </td></tr><tr><th>포토원숭이아과</th><td><table><tbody><tr><th>앙완티보속</th><td> 칼라바르앙완티보 황금앙완티보 </td></tr><tr><th>포토원숭이속</th><td> 포토원숭이 </td></tr><tr><th>가짜포토원숭이속</th><td> 가짜포토원숭이 </td></tr></tbody></table></td></tr><tr><th>로리스아과</th><td><table><tbody><tr><th>홀쭉이로리스속</th><td> 붉은홀쭉이로리스 회색홀쭉이로리스 </td></tr><tr><th>늘보로리스속</th><td> 순다로리스 벵갈늘보로리스 피그미늘보로리스 자바늘보로리스 필리핀늘보로리스 방카늘보로리스 보르네오늘보로리스 카얀강늘보로리스 </td></tr></tbody></table></td></tr><tr><td colspan="2">분류</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순다로리스&amp;oldid=22881265" 분류: IUCN 적색 목록 취약종로리스과말레이시아의 포유류싱가포르의 포유류인도네시아의 포유류태국의 포유류1785년 기재된 동물숨은 분류: CS1 - 영어 인용 (en)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CS1 관리 - 여러 이름라틴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위키생물종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БългарскиCatalàCebuanoČeštinaDansk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JawaქართულიລາວBahasa MelayuNederlandsNorskPolskiپنجابیRomânăРусскийBasa SundaSvenskaไทยTiếng ViệtWinaray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0월 30일 (화) 18:0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서론 순다로리스(Nycticebus coucang)는 동남아시아 원산의 로리스과에 속하는 영장류로, 이 문서는 순다로리스의 생물학적 특성, 서식지, 습성, 번식 및 멸종 위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글쓴이는 순다로리스의 생태적 중요성과 현재의 멸종 위기를 강조하며, 이 동물에 대한 보호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다. ### 본론 1. **생물 분류 및 특성**: 순다로리스는 로리스과의 3중 늘보로리스 중 하나로, 큰 눈과 작은 귀를 가진 특징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다. 이들은 주행성 동물로, 나무에서 주로 생활하며, 다양한 아종이 존재한다. 2. **분포 범위와 서식지**: 순다로리스는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의 열대 우림과 농장, 대나무 숲에서 발견된다. 각 아종은 특정 지역에 제한적으로 분포하고 있으며, 이들의 서식지는 주로 나무가 우거진 지역이다. 3. **습성 및 먹이**: 이들은 주로 과일, 곤충, 나무 수액 등을 먹으며, 독립적인 생활을 한다. 번식은 일부다처제로 이루어지며, 한 번에 한 마리의 새끼를 낳는다. 4. **멸종 위험**: 순다로리스는 서식지 감소와 애완용 밀무역으로 인해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불법 거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로 인해 많은 개체가 고통받고 있다. 글쓴이는 이러한 상황을 통해 순다로리스 보호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 결론 순다로리스는 생태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동물로, 현재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글쓴이는 이 동물의 보호를 위한 국제적 노력이 필요하며, 불법 거래를 근절하고 서식지를 보호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순다로리스의 생존을 보장하고, 생물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글 전체의 요지를 논리적 흐름에 맞게 정리해줘. 서론, 본론, 결론 구조로 요약해주고, 각 부분마다 글쓴이의 의도나 주장도 명확히 밝혀줘.
무용의_기법
https://ko.wikipedia.org/wiki/무용의_기법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무용의 기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무용의 기법</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본 문서는 <b>무용</b>(舞踊)의 <b>기법</b>(技法)에 대해 설명한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무용의 소재</span></a></li> <li><a><span>2</span> <span>무용의 신체성(身體性)</span></a></li> <li><a><span>3</span> <span>무용의 시간성(時間性)</span></a></li> <li><a><span>4</span> <span>무용의 공간성(空間性)</span></a></li> <li><a><span>5</span> <span>무용의 전체성(全體性)</span></a></li> <li><a><span>6</span> <span>신체 이외의 기법과 효과</span></a></li> <li><a><span>7</span> <span>참고 자료</span></a></li> <li><a><span>8</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무용의 소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무용의 소재(素材)는 살아 있는 인간의 신체 바로 그것이다. 인적 구성(人的構成)은 작품내용을 기본적으로 방향지어주는 것이다. 남성 또는 다수 인원의 구성에는 자체의 역량감(力量感)이 다르며, 여성에게는 유연(柔軟)한 느낌, 혹은 섬세한 느낌이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 또한 어린이들에게는 표현 이전에 본래의 사랑스러움이 넘쳐 흐른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소재가 지니는 성질을 각각의 특성과 동시에 그 한계를 나타내는 것으로도 볼 수 있어, 소재를 살려 개성적인 표현성을 발휘시킨다는 점에 무용의 묘미와 기법이 있다. </p> <h2><span></span><span>무용의 신체성(身體性)</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신체는 그 자체가 대칭적인 디자인인데, 대칭적(<span>symmetric</span>&#32;<small>시머트릭<sup>&#91;<a>*</a>&#93;</sup></small>) 디자인은 안정감을 나타내며 강력한 통일감을 지니고 있다. 이와 반대로 비대칭적(<span>asymmetric</span>&#32;<small>어시머트릭<sup>&#91;<a>*</a>&#93;</sup></small>) 디자인은 왜곡된 불안정감을 나타낸다. 시머트리(symmertry)와 어시머트리(asymmetry)는 다시 대립과 계속으로 나뉜다. 대립적인 디자인은 적극적인 에너지와 활력을 강조하고, 계속적인 디자인은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선적(線的)인 흐름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은 개인이 지니는 신체적 특성 이외에 개인이 이합·집산하는 집단적 기구(機構)에 따라서도 그 표현성이 달라진다. 예컨대 수량적으로는 한정된 공간(무대) 속에 한 사람이 서느냐 두 사람이 서느냐, 혹은 여러 사람이 서느냐에 따라 무대와 인간이 자아내는 역량감과 긴박감은 달라지며, 또한 질적으로는 같은 인원수라 해도 남자만의 경우와 여자만의 경우에서도 또 달라질 뿐만 아니라, 또 전향(前向)과 후향(後向)이 있는 경우나 남녀 혼합의 경우 등, 움직임(동작) 이전에 소재의 동질(同質)부분이 어울린 것으로 느껴지며 다른 성질과 대비적(對比的)인 관계를 만들어 표현적인 것이 된다. </p> <h2><span></span><span>무용의 시간성(時間性)</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무용은 시간성을 하나의 근간으로 하여 성립되는 표현이다. 이 시간적인 경과 속에는 무용의 생명인 리듬, 그것을 정리하는 박자, 그리고 더욱 변화시키는 속도와 매듭을 짓게 하는 길이가 포함되어 있다. 움직임의 리듬은 눈으로 호소되는 한편, 귀에서도 음에 의해 호소된다. 어떤 때는 움직임이 음을 인도하고 예상케 하며, 어떤 때는 음이 움직임을 예상케 한다. 그리고 리듬의 흐름이 규칙적이냐 불규칙적이냐에 따라 표현성이 달라진다. 탄력적인 리듬은 밝음을, 섬세한 리듬은 부드러움이나 미세한 움직임을, 느릿하고 평탄한 리듬은 장중함을 느끼게 하고, 중단되는 리듬은 격렬함이나 긴박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동일한 리듬이라 해도 속도에 따라 그 성격은 달라진다. 느릿한 속도는 안정적이되 장중함 또는 느릿함을, 빠른 속도는 동적이되 경쾌함 또는 활발성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리듬이나 박자가 함부로 단편적(斷片的)인 형태로 구성된다면 무용으로서 성립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노래의 한 절(節), 문장의 한 매듭과 마찬가지로 무용에도 상쾌한 매듭으로서의 일련의 움직임이 있음으로 비로소 표현으로서의 생명이 부여된다. </p> <h2><span></span><span>무용의 공간성(空間性)</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신체의 운동은 다른 한 편에 있어서는 공간적 요인과도 결부되고 있다. 인간의 신체는 이미 다양하게 변화하는 공간적인 입체이다. 입체적인 신체가 운동으로써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한정된 무대공간을 여러 가지로 이동하는 것으로 그 사진틀 같은 틀 안에 온갖 새로운 시공간(視空間)이 출현한다. 신체의 높이·체적·이동하는 거리·방향·경로 등이 상호간에 관계를 유지하면서 표현에 성격을 부여한다. 예컨대 무대의 중앙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전진할 때는, 힘은 적극적으로 작용하며 육박해 오는 듯한 거리(距離)의 연장을 느끼고, 낮은 상태로 무대의 후방으로 후퇴해 갈 때는 보다 소극적이고도 일조의 어두움을 느끼게 한다. 또한 두 사람이 무대를 대각선적으로 이동할 때, 그것이 같은 방향일 때에는 두 사람 이상의 증대된 힘의 강도(强度)를 느끼게 하고, 다른 방향으로 서로 스치며 지날 때에는 두 사람 사이에 대립적인 느낌을 남긴다. 또한 느릿한 동작에서 차차 빠르게 걷기 시작하여 소용돌이 형(型)으로 이동할 때에는 신체의 움직임과 공간이 결부되어 나선적 입체감을 느끼게 하며,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 공간 속에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된다. </p> <h2><span></span><span>무용의 전체성(全體性)</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정리된 무용이란 시공적(時空的)인 성격을 어떻게 살리느냐에 달려 있다. 정리를 위해서 작용하는 하나의 힘은 '간결화(簡潔化)'이다. 같은 움직임 혹은 비슷한 움직임이 반복됨으로써, 그 표현은 인상적인 것이 되며, 안정된 하나의 일관적(一貫的)인 것을 느끼게 한다. 예컨대, 최초에 주요 움직임이 나타나고, 그 움직임이 점차로 고조되고 힘은 강화되며, 다시금 처음의 조용한 상태의 주요 움직임으로 돌아가 끝나는 형식(ABA form)은 처음과 끝의 흡사한 움직임으로 잔상(殘像)을 강조하고, 보다 안정된 느낌으로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지나치게 되풀이될 때에는 단조롭고 평범한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움직임이 부드럽게 옮겨지고 훌륭한 연속을 지닐 때 그 움직임은 잘 기억되며 간결화되고 깨끗한 인상을 준다. 말하자면 여기에도 아름답고 정리된 통일을 꾀하는 힘이 작용하는 것이다.정리감을 위해 작용하는 또 하나의 힘은 '다양화(多樣化)'이다. 간결하고 통일을 꾀하는 힘에 대해 복잡하고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힘의 작용이 있다. 고저(高低)·지속(遲速)·유경(柔硬) 등의 각각 다른 것이 서로 끌어당기면서 조화(調和)하는 대조·대비적인 작용이 그 하나이다. 직선적인 움직임과 곡선적인 움직임, 느릿하고 조용한 움직임에서 급하고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 등 대비적인 효과가 서로 끌어당기면서 더욱 고조된 조화를 나타낸다. 예컨대 전반(前半)에 인간의 어둡고 괴로울 때를 전개하고, 그 종국에 슬픔을 초극(超克)한 뒤의 밝은 희망에 가득찬 전진적인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명암(明暗)이 대조를 이루어, 보는 사람의 마음에 생생한 강렬함을 호소한다. 또한 작품의 흐름 속에서 어떤 부분을 특히 강조하거나 되풀이함으로써 표현을 강하게 인상지어 중심이 되고 고조(高潮)를 보인다. 또, 때로는 표현하려는 것의 복잡한 성격을 무용답게 응축(凝縮)시켜, 어떠한 움직임이나 리듬으로 대치하느냐, 그리고 그 움직임을 어떻게 변용(變容)하고 확대·강화시키느냐, 나아가서는 움직임을 무대 공간에 어떤 식으로 옮기느냐는 등, 이미지를 움직임의 복잡한 변화로 다양하게 옮김으로써 표현에 깊이와 복잡한 팽창을 갖게 할 수 있다. 무용표현은 소재로서의 신체·시간·공간이란 3요소의 다양한 결부 방식으로 무한한 새로운 표현성을 출현시키는 표현형태질(表現形態質)<sup><a>&#91;1&#93;</a></sup>이다. 신체의 움직임이나 공간의 이동 등 여러 종류의 작용은 부분 부분의 집합은 아니다. 부분이 제각기 특성을 지니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부분의 총화 이상의 것<sup><a>&#91;2&#93;</a></sup>의 새로운 성질이 나타난다. 작품 창작은 그와 같은 유기적인 관계를 지니는 작용으로서의 움직임을 선택·정련(精鍊)하고, 또한 융합·대립시켜 움직임의 통합성을 찾아내는 작용인 것이다. 작품의 길이는 동적(動的)인 매체(움직임)로서의 한계로부터도 저절로 그 길이가 한정지어지고 있다. 개인의 작품에서는 나타내려는 내용에 따라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혼자서 출 수 있는 한계 때문에 일반적으로 단시간의 작품이 많다. 군무(郡舞), 또는 극적인 긴 작품에서는 한 시간 가량이나 되는 것이 있다. 한정된 제약 속에서 한계를 초월한 무한한 호소를 하려는 점에 무용작품의 승화를 기대하게 되며 그 압축의 결과 무용은 화려하고 생동하는 생명감의 충일(充溢)을 볼 것으로 생각된다. </p><p><b>무용의 기법</b>이란, 이같은 소재(素材)·매체의 특성을 적확(的確)하게 근거로 함으로써 성립되는 독특한 기예(技藝)와 양식(樣式)일 것이다. 문장에서 볼 수 있는 기승전결(起乘轉結)은 그대로 무용에도 해당된다. 즉, 발레에는 고전형식의 <a>파 드 되</a>(아다주, 바리아시옹, 코다로 이루어진다), 양무(洋舞)에는 음악과 결속되어서 ABA form·론도 form·카논 form 등이 예부터 있었다. </p><p><a>도리스 험프리</a>는 </p> <dl><dd>① ABA 형식,</dd> <dd>② 이야기 줄거리식 형식,</dd> <dd>③ 테마 반복 형식,</dd> <dd>④ 모음곡(組曲)형식,</dd> <dd>⑤ 파조(破調) 형식</dd></dl> <p>의 다섯 형식을 들고 있다. </p> <h2><span></span><span>신체 이외의 기법과 효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신체를 소재(素材)로 하여 표현하는 무용에는 소재가 지니는 한계가 있다. 표현성을 보다 더 강화하고 확대시키고자 하는 데에, 신체 이외의 것과의 결부가 시작된다. 작품은 음·의상·무대장치·조명·소도구 등에 의해서 그 미적 표현성이 확대된다. 음악에 관해서 <a>도리스 험프리</a>는 </p> <blockquote><div>음악의 멜로디, 리듬 및 드라마성(性)은 음악이 인간의 육체를 가장 개성적으로 밀접히 결부시키고 있는 점이다.</div> </blockquote> <p>라고 말하고 있는데, 뛰어난 작품 속에서는 오히려 신체에서부터 음이 나온다고 느껴지는 것처럼 신체(움직임)와 음은 밀접한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다. 또, 의상은 작품의 이미지를 시각적(視覺的)인 형태와 색채로 상징화하고, 표현성을 보다 확실하게 방향지어 주는 작용을 한다. 장치는 조명과 함께 무대 공간에 특수한 통합과 성격을 만들어 내고, 표현 매체인 움직임을 지탱하고 그 표현을 강조·지속하고 발전시키며 작품으로서의 형상화(形象化)를 돕는 것이라고 하겠다. </p> <h2><span></span><span>참고 자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small><a><img></a><a><img></a> 이 문서에는 <a>다음커뮤니케이션</a>(현 <a>카카오</a>)에서 <a>GFDL</a> 또는 <a>CC-SA</a> 라이선스로 배포한 <a>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a>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small></div>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전체적인 성질</span> </li> <li><span><a>↑</a></span> <span>총화 플러스 알파</span> </li> </ol></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무용의_기법&amp;oldid=16010909</a>"</div> <div><div><a>분류</a>: <ul><li><a>춤</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a></li><li><a>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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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에서 흐름이 규칙적이냐 불규칙적이냐에 따라 표현상이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리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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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에서 흐름이 규칙적이냐 불규칙적이냐에 따라 표현상이 달라지는 것은 무엇인가?", "무용에서 밝음을 느끼는 리듬은 무엇인가?", "무용에서 부드러움이나 미세한 움직임을 느끼는 리듬은 무엇인가?", "탄력적인 리듬에서 느껴지는 표현성은?", "중단되는 리듬에서 느껴지는 표현성은?", "시간성을 하나의 근간으로 하여 성립되는 표현은 무엇인가?", "눈으로 호소되고 귀에서도 음에 의해 호소되는 것은 무엇인가?", "높이,체적,이동하는 거리나 방향,경로가 상호간에 관계를 유지하면서 표현에 성격을 부여하는것은 무엇의 역할인가?", "두 사람이 무대를 대각선적으로 이동할 때 두 사람 이상의 증대된 힘의 강도를 느끼게 하는경우는 어떤 방향일 때인가?", "두 사람이 무대를 대각선적으로 이동할 때 두 사람 사이에 대립적인 느낌을 남기는것은 어떤 방햘일때인가?", "무대 위 두 사람이 서로 스쳐지날 때 느껴지는 표현성은?", "무용의 기법 중 소용돌이 형으로 이동할 때 느껴지는 표현성은?", "이미 다양하게 변화하는 공간적인 입체는 무엇인가?", "신체의 움직임과 공간이 결부되어 나선적 입체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최초에 주요 움직임이 나타난뒤 고조되고 강화되다가 처음의 조용한 상태로 돌아가 끝나는 형식을 무엇이라하는가?", "무용에서 고저,디속,유경 등이 서로 끌어당기면서 조화하는 대비적인 작용을 무엇이라하는가?", "무용표현 소재로서의 3요소는?", "단조롭고 정리된 무용 표현법은?" ]
<!DOCTYPE html> 무용의 기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무용의 기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본 문서는 무용(舞踊)의 기법(技法)에 대해 설명한다. 목차 1 무용의 소재 2 무용의 신체성(身體性) 3 무용의 시간성(時間性) 4 무용의 공간성(空間性) 5 무용의 전체성(全體性) 6 신체 이외의 기법과 효과 7 참고 자료 8 각주 무용의 소재[편집] 무용의 소재(素材)는 살아 있는 인간의 신체 바로 그것이다. 인적 구성(人的構成)은 작품내용을 기본적으로 방향지어주는 것이다. 남성 또는 다수 인원의 구성에는 자체의 역량감(力量感)이 다르며, 여성에게는 유연(柔軟)한 느낌, 혹은 섬세한 느낌이 스스로 갖추어져 있다. 또한 어린이들에게는 표현 이전에 본래의 사랑스러움이 넘쳐 흐른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은 소재가 지니는 성질을 각각의 특성과 동시에 그 한계를 나타내는 것으로도 볼 수 있어, 소재를 살려 개성적인 표현성을 발휘시킨다는 점에 무용의 묘미와 기법이 있다. 무용의 신체성(身體性)[편집] 신체는 그 자체가 대칭적인 디자인인데, 대칭적(symmetric 시머트릭[*]) 디자인은 안정감을 나타내며 강력한 통일감을 지니고 있다. 이와 반대로 비대칭적(asymmetric 어시머트릭[*]) 디자인은 왜곡된 불안정감을 나타낸다. 시머트리(symmertry)와 어시머트리(asymmetry)는 다시 대립과 계속으로 나뉜다. 대립적인 디자인은 적극적인 에너지와 활력을 강조하고, 계속적인 디자인은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선적(線的)인 흐름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은 개인이 지니는 신체적 특성 이외에 개인이 이합·집산하는 집단적 기구(機構)에 따라서도 그 표현성이 달라진다. 예컨대 수량적으로는 한정된 공간(무대) 속에 한 사람이 서느냐 두 사람이 서느냐, 혹은 여러 사람이 서느냐에 따라 무대와 인간이 자아내는 역량감과 긴박감은 달라지며, 또한 질적으로는 같은 인원수라 해도 남자만의 경우와 여자만의 경우에서도 또 달라질 뿐만 아니라, 또 전향(前向)과 후향(後向)이 있는 경우나 남녀 혼합의 경우 등, 움직임(동작) 이전에 소재의 동질(同質)부분이 어울린 것으로 느껴지며 다른 성질과 대비적(對比的)인 관계를 만들어 표현적인 것이 된다. 무용의 시간성(時間性)[편집] 무용은 시간성을 하나의 근간으로 하여 성립되는 표현이다. 이 시간적인 경과 속에는 무용의 생명인 리듬, 그것을 정리하는 박자, 그리고 더욱 변화시키는 속도와 매듭을 짓게 하는 길이가 포함되어 있다. 움직임의 리듬은 눈으로 호소되는 한편, 귀에서도 음에 의해 호소된다. 어떤 때는 움직임이 음을 인도하고 예상케 하며, 어떤 때는 음이 움직임을 예상케 한다. 그리고 리듬의 흐름이 규칙적이냐 불규칙적이냐에 따라 표현성이 달라진다. 탄력적인 리듬은 밝음을, 섬세한 리듬은 부드러움이나 미세한 움직임을, 느릿하고 평탄한 리듬은 장중함을 느끼게 하고, 중단되는 리듬은 격렬함이나 긴박감을 느끼게 한다. 또한 동일한 리듬이라 해도 속도에 따라 그 성격은 달라진다. 느릿한 속도는 안정적이되 장중함 또는 느릿함을, 빠른 속도는 동적이되 경쾌함 또는 활발성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리듬이나 박자가 함부로 단편적(斷片的)인 형태로 구성된다면 무용으로서 성립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노래의 한 절(節), 문장의 한 매듭과 마찬가지로 무용에도 상쾌한 매듭으로서의 일련의 움직임이 있음으로 비로소 표현으로서의 생명이 부여된다. 무용의 공간성(空間性)[편집] 신체의 운동은 다른 한 편에 있어서는 공간적 요인과도 결부되고 있다. 인간의 신체는 이미 다양하게 변화하는 공간적인 입체이다. 입체적인 신체가 운동으로써 다양하게 변화하면서 한정된 무대공간을 여러 가지로 이동하는 것으로 그 사진틀 같은 틀 안에 온갖 새로운 시공간(視空間)이 출현한다. 신체의 높이·체적·이동하는 거리·방향·경로 등이 상호간에 관계를 유지하면서 표현에 성격을 부여한다. 예컨대 무대의 중앙에서 정면을 바라보고 전진할 때는, 힘은 적극적으로 작용하며 육박해 오는 듯한 거리(距離)의 연장을 느끼고, 낮은 상태로 무대의 후방으로 후퇴해 갈 때는 보다 소극적이고도 일조의 어두움을 느끼게 한다. 또한 두 사람이 무대를 대각선적으로 이동할 때, 그것이 같은 방향일 때에는 두 사람 이상의 증대된 힘의 강도(强度)를 느끼게 하고, 다른 방향으로 서로 스치며 지날 때에는 두 사람 사이에 대립적인 느낌을 남긴다. 또한 느릿한 동작에서 차차 빠르게 걷기 시작하여 소용돌이 형(型)으로 이동할 때에는 신체의 움직임과 공간이 결부되어 나선적 입체감을 느끼게 하며, 신체적 한계를 넘어서 공간 속에 새로운 현상이 나타난 것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 된다. 무용의 전체성(全體性)[편집] 정리된 무용이란 시공적(時空的)인 성격을 어떻게 살리느냐에 달려 있다. 정리를 위해서 작용하는 하나의 힘은 '간결화(簡潔化)'이다. 같은 움직임 혹은 비슷한 움직임이 반복됨으로써, 그 표현은 인상적인 것이 되며, 안정된 하나의 일관적(一貫的)인 것을 느끼게 한다. 예컨대, 최초에 주요 움직임이 나타나고, 그 움직임이 점차로 고조되고 힘은 강화되며, 다시금 처음의 조용한 상태의 주요 움직임으로 돌아가 끝나는 형식(ABA form)은 처음과 끝의 흡사한 움직임으로 잔상(殘像)을 강조하고, 보다 안정된 느낌으로서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지나치게 되풀이될 때에는 단조롭고 평범한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가 된다. 움직임이 부드럽게 옮겨지고 훌륭한 연속을 지닐 때 그 움직임은 잘 기억되며 간결화되고 깨끗한 인상을 준다. 말하자면 여기에도 아름답고 정리된 통일을 꾀하는 힘이 작용하는 것이다.정리감을 위해 작용하는 또 하나의 힘은 '다양화(多樣化)'이다. 간결하고 통일을 꾀하는 힘에 대해 복잡하고 다양성을 만들어내는 힘의 작용이 있다. 고저(高低)·지속(遲速)·유경(柔硬) 등의 각각 다른 것이 서로 끌어당기면서 조화(調和)하는 대조·대비적인 작용이 그 하나이다. 직선적인 움직임과 곡선적인 움직임, 느릿하고 조용한 움직임에서 급하고 격렬하게 움직이는 것 등 대비적인 효과가 서로 끌어당기면서 더욱 고조된 조화를 나타낸다. 예컨대 전반(前半)에 인간의 어둡고 괴로울 때를 전개하고, 그 종국에 슬픔을 초극(超克)한 뒤의 밝은 희망에 가득찬 전진적인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명암(明暗)이 대조를 이루어, 보는 사람의 마음에 생생한 강렬함을 호소한다. 또한 작품의 흐름 속에서 어떤 부분을 특히 강조하거나 되풀이함으로써 표현을 강하게 인상지어 중심이 되고 고조(高潮)를 보인다. 또, 때로는 표현하려는 것의 복잡한 성격을 무용답게 응축(凝縮)시켜, 어떠한 움직임이나 리듬으로 대치하느냐, 그리고 그 움직임을 어떻게 변용(變容)하고 확대·강화시키느냐, 나아가서는 움직임을 무대 공간에 어떤 식으로 옮기느냐는 등, 이미지를 움직임의 복잡한 변화로 다양하게 옮김으로써 표현에 깊이와 복잡한 팽창을 갖게 할 수 있다. 무용표현은 소재로서의 신체·시간·공간이란 3요소의 다양한 결부 방식으로 무한한 새로운 표현성을 출현시키는 표현형태질(表現形態質)[1]이다. 신체의 움직임이나 공간의 이동 등 여러 종류의 작용은 부분 부분의 집합은 아니다. 부분이 제각기 특성을 지니면서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부분의 총화 이상의 것[2]의 새로운 성질이 나타난다. 작품 창작은 그와 같은 유기적인 관계를 지니는 작용으로서의 움직임을 선택·정련(精鍊)하고, 또한 융합·대립시켜 움직임의 통합성을 찾아내는 작용인 것이다. 작품의 길이는 동적(動的)인 매체(움직임)로서의 한계로부터도 저절로 그 길이가 한정지어지고 있다. 개인의 작품에서는 나타내려는 내용에 따라서도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혼자서 출 수 있는 한계 때문에 일반적으로 단시간의 작품이 많다. 군무(郡舞), 또는 극적인 긴 작품에서는 한 시간 가량이나 되는 것이 있다. 한정된 제약 속에서 한계를 초월한 무한한 호소를 하려는 점에 무용작품의 승화를 기대하게 되며 그 압축의 결과 무용은 화려하고 생동하는 생명감의 충일(充溢)을 볼 것으로 생각된다. 무용의 기법이란, 이같은 소재(素材)·매체의 특성을 적확(的確)하게 근거로 함으로써 성립되는 독특한 기예(技藝)와 양식(樣式)일 것이다. 문장에서 볼 수 있는 기승전결(起乘轉結)은 그대로 무용에도 해당된다. 즉, 발레에는 고전형식의 파 드 되(아다주, 바리아시옹, 코다로 이루어진다), 양무(洋舞)에는 음악과 결속되어서 ABA form·론도 form·카논 form 등이 예부터 있었다. 도리스 험프리는 ① ABA 형식, ② 이야기 줄거리식 형식, ③ 테마 반복 형식, ④ 모음곡(組曲)형식, ⑤ 파조(破調) 형식 의 다섯 형식을 들고 있다. 신체 이외의 기법과 효과[편집] 신체를 소재(素材)로 하여 표현하는 무용에는 소재가 지니는 한계가 있다. 표현성을 보다 더 강화하고 확대시키고자 하는 데에, 신체 이외의 것과의 결부가 시작된다. 작품은 음·의상·무대장치·조명·소도구 등에 의해서 그 미적 표현성이 확대된다. 음악에 관해서 도리스 험프리는 음악의 멜로디, 리듬 및 드라마성(性)은 음악이 인간의 육체를 가장 개성적으로 밀접히 결부시키고 있는 점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데, 뛰어난 작품 속에서는 오히려 신체에서부터 음이 나온다고 느껴지는 것처럼 신체(움직임)와 음은 밀접한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다. 또, 의상은 작품의 이미지를 시각적(視覺的)인 형태와 색채로 상징화하고, 표현성을 보다 확실하게 방향지어 주는 작용을 한다. 장치는 조명과 함께 무대 공간에 특수한 통합과 성격을 만들어 내고, 표현 매체인 움직임을 지탱하고 그 표현을 강조·지속하고 발전시키며 작품으로서의 형상화(形象化)를 돕는 것이라고 하겠다. 참고 자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각주[편집] ↑ 전체적인 성질 ↑ 총화 플러스 알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무용의_기법&amp;oldid=16010909" 분류: 춤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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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의 기법은 신체, 시간, 공간의 요소를 통해 독특한 표현성을 창출하는 예술적 기법이다. 무용의 소재는 인간의 신체로, 성별이나 연령에 따라 다양한 특성과 한계를 지닌다. 신체성은 대칭과 비대칭의 디자인을 통해 안정감과 불안정을 표현하며, 시간성은 리듬과 박자를 통해 감정의 변화를 전달한다. 공간성은 신체의 움직임과 무대의 관계를 통해 새로운 시공간을 창출하고, 전체성은 간결화와 다양화를 통해 작품의 통일성과 복잡성을 조화롭게 나타낸다. 또한, 신체 외의 요소인 음악, 의상, 조명 등이 무용의 표현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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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복
https://ko.wikipedia.org/wiki/주경복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주경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주경복</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h colspan="2">주경복(朱璟福)</th></tr><tr><td colspan="2"> <a><img></a><br><div><div></div></div></td></tr><tr><th>출생</th> <td> <a>1950년</a> <a>9월 29일</a><br><span><a><img></a></span> <a>대한민국</a> <a>강원도</a> <a>원주</a></td></tr><tr><th>거주지</th> <td> <a>서울특별시</a></td></tr><tr><th>국적</th> <td> <span><a><img></a></span> <a>대한민국</a></td></tr> <tr><th>학력</th> <td> <a>파리제5대학교</a> 언어학과<br> <a>파리제5대학교</a> 대학원</td></tr><tr><th>직업</th> <td> 학자, 교수</td></tr><tr><th>종교</th> <td> <a>기독교</a><sup><a>&#91;1&#93;</a></sup></td></tr><tr><th>웹사이트</th> <td> <a>www.joupia.net</a></td></tr> </tbody></table> <p><b>주경복</b>(朱璟福, 1950년 9월 29일 <a>원주</a> ~ )은 <a>대한민국</a>의 교육자로 현 <a>건국대학교</a> 교수이다. </p><p><a>강원도</a> 원주 출신으로 1969년 원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를 졸업한 뒤에, 1978-1979년 대한항공에 근무하다가 1979년 10월 프랑스 파리 5대학교 언어과학 전공 3년차 과정 (Licence)에 편입하였다. 파리 5대학에서 학부과정을 다시 미치고 학사 학위를 받은 뒤에 이어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박사 과정(DEA)을 거친 뒤에 1986년 11월 파리제5대학교대학원에서 언어과학 박사 학위 논문 심사에 통과함으로써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87년 봄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맡아왔다. 건국대, 중앙대, 한국외대, 성신여대, 홍익대, 서울대, 이화여대 등에서 언어철학, 커뮤니케이션, 인문사상, 사회비평, 문화이론, 프랑스어 등을 강의하였다. 1988년 3월부터 현재까지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소속 전공은 커뮤니케이션학이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주요 경력</span></a> <ul> <li><a><span>1.1</span> <span>학회 활동</span></a></li> <li><a><span>1.2</span> <span>사회활동</span></a></li> <li><a><span>1.3</span> <span>교육감 선거</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주요 작품</span></a> <ul> <li><a><span>2.1</span> <span>저서</span></a></li> <li><a><span>2.2</span> <span>번역서</span></a></li> <li><a><span>2.3</span> <span>주요논문</span></a></li> </ul> </li> <li><a><span>3</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4</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주요 경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학회 활동</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프랑스 학회 회장, 한국문화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 한국교육정책이론연구회 회장, 한국불어불문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p> <h3><span></span><span>사회활동</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전국교수회 회장,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 운영위원장 및 대표, 전국사립대학교수협의회 회장,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등을 역임했고, 2007년부터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위원, 2007년부터 학교법인 지산학원 이사, 2007년부터 미래교육정책연구소 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p> <h3><span></span><span>교육감 선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2008년 7월 30일 서울특별시 교육감선거에서 후보로 출마하였다. 시민사회단체의 추대를 받았다. 100여개가 넘는 시민사회 단체와 천인이 넘는 사회저명인사들이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는 이명박 정부에서 국민적 합의 없이 밀어부치려는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설립, 고교등급제 실시, 초등학교 일제고사 및 사설고사 실시, 0교시 수업과 강제자율학습 실시 등에 반대하면서 사교육비 절감(년간 147만원), 방과후 맞춤형 보육제도, 대안형 공립학교 운영, 교육복지특별지원구역 지정, 공립유치원 확대 및 사립유치원 지원 강화, 건강한 학교 급식제도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체벌금지와 촌지 및 불법찬조금 금지, 교육장의 업무추진비 공개, 학부모민원센터, 부적격교사 레드카드제, 학부모-학생-평교사-시민 등이 참여하는 서울교육개혁 시민위원회 운영 등도 공약으로 내걸었다. 선거법의 규정 때문에 자체 후보를 내세우지 못한 <a>민주노동당</a>, <a>진보신당</a>, <a>통합민주당</a> 등의 야권과 <a>전국교직원노동조합</a>도 주경복 후보를 지지하였다. </p><p><a>2008년</a> <a>7월 30일</a> 투표율 15.5%를 기록한 첫 직선제 선거에서 <a>공정택</a> 후보에게 1.7% 뒤진 38.31%의 지지율로 패배하였다.<sup><a>&#91;2&#93;</a></sup> </p><p><a>2009년</a> <a>4월 24일</a> <a>한겨레신문</a>은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가 2007년 주경복 후보를 조사하면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시지부 간부 등 100여명의 전자우편을 일부 7년치까지 확보해 조사한 것을 보도했다. 송 지부장 등이 최종 7년치 이-메일을 압수수색하여 이를 증거자료로 삼은 것에 대해서 신청한 위헌심판청구에 대해서는 이유 없다며 이를 기각했다. </p><p><a>2009년</a> <a>9월 24일</a>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판장 김용상 부장판사)는 오후 3시 대법정 417호에서 진행된 선고를 통하여 주 후보의 혐의를 인정하여 벌금 300만 원을 선고했다. 같이 기소된 송원재 <a>전교조</a> 서울지부장 등 현직 교사들에게도 전원 유죄를 선고했다. 회계 담당자였던 이모 교사(해직교사)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송 지부장과 김모 사무처장에 대해서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또 다른 서울지부 간부들인 이모 부지부장 등 4명에게는 벌금 250만 원을 선고하였다. 또한 당시 지회장이었던 이모 교사와 김모 교사에게도 벌금 150만 원을 선고하고, 나머지 13명의 교사들에게는 벌금 80만 원을 선고하였다. 윤모 해직교사만 유일하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재판부는 현직 교사 8명을 비롯하여 10명이 공무원 당연퇴직에 해당하는 형의 선고했다.<sup><a>&#91;3&#93;</a></sup> </p> <h2><span></span><span>주요 작품</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저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ul><li>《레비스트로스》(건국대학교출판부, 1996)</li> <li>《프랑스와 언어 이론》(어문학사, 1996)</li> <li>《프랑스말글짓기》(만남, 1995)</li></ul> <h3><span></span><span>번역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ul><li>《인간 불평등 기원론》 2003</li> <li>《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2002</li> <li>《소쉬르의 현대적 이해》 1998</li></ul> <h3><span></span><span>주요논문</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ul><li>《프랑스 국립학술연구원(CNRS)에 관한 연구》 2007</li> <li>《기호 분석에서 내용과 표현의 관계》2002</li> <li>《인문학의 패러다임에서 구조와 주체의 관계》 1998</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a>관심사</a><sup>&#91;<a>깨진 링크</a>(<a>과거 내용 찾기</a>)&#93;</sup></span> </li> <li><span><a>↑</a></span> <span><cite>김이삭 기자 (2008년 8월 1일). <a>&#8220;공정택 56%·주경복 26%… 강남 3區가 승부 갈랐다&#8221;</a>. 한국일보. 2008년 12월 2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08년 10월 21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김행수 기자 (2009년 9월 24일). <a>&#8220;주경복 '벌금 300만 원' 등 현직교사 8명 '퇴직형<span>'</span>&#8221;</a>. 오마이뉴스.</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ol></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span><span><a>주경복</a></span></span> - 공식 웹사이트</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주경복&amp;oldid=22907326</a>"</div> <div><div><a>분류</a>: <ul><li><a>1950년 태어남</a></li><li><a>살아있는 사람</a></li><li><a>대한민국의 교육인</a></li><li><a>대한민국의 언어학자</a></li><li><a>원주시 출신</a></li><li><a>한국외국어대학교 동문</a></li><li><a>원주고등학교 동문</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ul> <div><span><a>링크 추가</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8년 11월 2일 (금) 03: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주경복은 어느 지역의 교육감선거 후보로 출마하였는가?
서울특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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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90
[ "주경복은 어느 지역의 교육감선거 후보로 출마하였는가?", "야권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은 왜 자체 후보를 내세우지 못하였나?", "주경복 후보를 지지한 교직원단체는 어디인가?", "2008년 7월 30일 주경복이 교육감선거 후보로 출마한 곳은?", "주경복 후보를 지지한 조합은? ", "유일하게 무죄를 선고받은 교사는 누구인가?", "몇 명의 공무원이 당연퇴직에 해당하는 형을 선고받았나?", "2009년 9월 24일 주경복에게 벌금 300만원을 선고한 판장은 누구인가?", "2009년 9월 24일 주경복의 선고가 이뤄진 곳은 대법정 몇 호인가?" ]
<!DOCTYPE html> 주경복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주경복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주경복(朱璟福)</th></tr><tr><td colspan="2"> </td></tr><tr><th>출생</th> <td> 1950년 9월 29일 대한민국 강원도 원주</td></tr><tr><th>거주지</th> <td> 서울특별시</td></tr><tr><th>국적</th> <td> 대한민국</td></tr> <tr><th>학력</th> <td> 파리제5대학교 언어학과 파리제5대학교 대학원</td></tr><tr><th>직업</th> <td> 학자, 교수</td></tr><tr><th>종교</th> <td> 기독교[1]</td></tr><tr><th>웹사이트</th> <td> www.joupia.net</td></tr> </tbody></table> 주경복(朱璟福, 1950년 9월 29일 원주 ~ )은 대한민국의 교육자로 현 건국대학교 교수이다. 강원도 원주 출신으로 1969년 원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7년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를 졸업한 뒤에, 1978-1979년 대한항공에 근무하다가 1979년 10월 프랑스 파리 5대학교 언어과학 전공 3년차 과정 (Licence)에 편입하였다. 파리 5대학에서 학부과정을 다시 미치고 학사 학위를 받은 뒤에 이어서 석사 과정을 마치고 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박사 과정(DEA)을 거친 뒤에 1986년 11월 파리제5대학교대학원에서 언어과학 박사 학위 논문 심사에 통과함으로써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 뒤 귀국하여 1987년 봄부터 대학에서 강의를 맡아왔다. 건국대, 중앙대, 한국외대, 성신여대, 홍익대, 서울대, 이화여대 등에서 언어철학, 커뮤니케이션, 인문사상, 사회비평, 문화이론, 프랑스어 등을 강의하였다. 1988년 3월부터 현재까지 건국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소속 전공은 커뮤니케이션학이다. 목차 1 주요 경력 1.1 학회 활동 1.2 사회활동 1.3 교육감 선거 2 주요 작품 2.1 저서 2.2 번역서 2.3 주요논문 3 각주 4 외부 링크 주요 경력[편집] 학회 활동[편집] 프랑스 학회 회장, 한국문화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 한국교육정책이론연구회 회장, 한국불어불문학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사회활동[편집] 전국교수회 회장,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 운영위원장 및 대표, 전국사립대학교수협의회 회장,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등을 역임했고, 2007년부터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위원, 2007년부터 학교법인 지산학원 이사, 2007년부터 미래교육정책연구소 소장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교육감 선거[편집] 2008년 7월 30일 서울특별시 교육감선거에서 후보로 출마하였다. 시민사회단체의 추대를 받았다. 100여개가 넘는 시민사회 단체와 천인이 넘는 사회저명인사들이 지지를 표명하였다. 그는 이명박 정부에서 국민적 합의 없이 밀어부치려는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설립, 고교등급제 실시, 초등학교 일제고사 및 사설고사 실시, 0교시 수업과 강제자율학습 실시 등에 반대하면서 사교육비 절감(년간 147만원), 방과후 맞춤형 보육제도, 대안형 공립학교 운영, 교육복지특별지원구역 지정, 공립유치원 확대 및 사립유치원 지원 강화, 건강한 학교 급식제도 등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체벌금지와 촌지 및 불법찬조금 금지, 교육장의 업무추진비 공개, 학부모민원센터, 부적격교사 레드카드제, 학부모-학생-평교사-시민 등이 참여하는 서울교육개혁 시민위원회 운영 등도 공약으로 내걸었다. 선거법의 규정 때문에 자체 후보를 내세우지 못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통합민주당 등의 야권과 전국교직원노동조합도 주경복 후보를 지지하였다. 2008년 7월 30일 투표율 15.5%를 기록한 첫 직선제 선거에서 공정택 후보에게 1.7% 뒤진 38.31%의 지지율로 패배하였다.[2] 2009년 4월 24일 한겨레신문은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가 2007년 주경복 후보를 조사하면서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시지부 간부 등 100여명의 전자우편을 일부 7년치까지 확보해 조사한 것을 보도했다. 송 지부장 등이 최종 7년치 이-메일을 압수수색하여 이를 증거자료로 삼은 것에 대해서 신청한 위헌심판청구에 대해서는 이유 없다며 이를 기각했다. 2009년 9월 24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판장 김용상 부장판사)는 오후 3시 대법정 417호에서 진행된 선고를 통하여 주 후보의 혐의를 인정하여 벌금 300만 원을 선고했다. 같이 기소된 송원재 전교조 서울지부장 등 현직 교사들에게도 전원 유죄를 선고했다. 회계 담당자였던 이모 교사(해직교사)에게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송 지부장과 김모 사무처장에 대해서는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또 다른 서울지부 간부들인 이모 부지부장 등 4명에게는 벌금 250만 원을 선고하였다. 또한 당시 지회장이었던 이모 교사와 김모 교사에게도 벌금 150만 원을 선고하고, 나머지 13명의 교사들에게는 벌금 80만 원을 선고하였다. 윤모 해직교사만 유일하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써 재판부는 현직 교사 8명을 비롯하여 10명이 공무원 당연퇴직에 해당하는 형의 선고했다.[3] 주요 작품[편집] 저서[편집] 《레비스트로스》(건국대학교출판부, 1996) 《프랑스와 언어 이론》(어문학사, 1996) 《프랑스말글짓기》(만남, 1995) 번역서[편집] 《인간 불평등 기원론》 2003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2002 《소쉬르의 현대적 이해》 1998 주요논문[편집] 《프랑스 국립학술연구원(CNRS)에 관한 연구》 2007 《기호 분석에서 내용과 표현의 관계》2002 《인문학의 패러다임에서 구조와 주체의 관계》 1998 각주[편집] ↑ 관심사[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김이삭 기자 (2008년 8월 1일). “공정택 56%·주경복 26%… 강남 3區가 승부 갈랐다”. 한국일보. 2008년 12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10월 21일에 확인함.  ↑ 김행수 기자 (2009년 9월 24일). “주경복 '벌금 300만 원' 등 현직교사 8명 '퇴직형'”. 오마이뉴스.  외부 링크[편집] 주경복 - 공식 웹사이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주경복&amp;oldid=22907326" 분류: 1950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교육인대한민국의 언어학자원주시 출신한국외국어대학교 동문원주고등학교 동문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1월 2일 (금) 03: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주경복 (朱璟福) 요약 - **출생**: 1950년 9월 29일, **강원도 원주** - **거주지**: **서울특별시** - **국적**: **대한민국** - **학력**: - **파리제5대학교** 언어학과 및 대학원 - **한국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 졸업 - **직업**: **학자, 교수** - **종교**: **기독교** - **웹사이트**: [www.joupia.net](http://www.joupia.net) ### 주요 경력 - **대학 교수**: 1988년부터 **건국대학교** 교수 재직 - **학회 활동**: - 프랑스 학회 회장 - 한국문화커뮤니케이션학회 회장 - 한국교육정책이론연구회 회장 - 한국불어불문학회 부회장 - **사회활동**: - 전국교수회 회장 -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 운영위원장 -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상임의장 - 사학분쟁조정위원회 위원 (2007년부터) - **교육감 선거**: - 2008년 서울특별시 교육감 선거 출마 - **지지율**: 38.31%로 공정택 후보에게 패배 - 주요 공약: 사교육비 절감, 대안형 공립학교 운영, 체벌 금지 등 ### 주요 작품 - **저서**: - 《레비스트로스》 (1996) - 《프랑스와 언어 이론》 (1996) - 《프랑스말글짓기》 (1995) - **번역서**: - 《인간 불평등 기원론》 (2003) - 《언어 기원에 관한 시론》 (2002) - 《소쉬르의 현대적 이해》 (1998) - **주요 논문**: - 《프랑스 국립학술연구원(CNRS)에 관한 연구》 (2007) - 《기호 분석에서 내용과 표현의 관계》 (2002) - 《인문학의 패러다임에서 구조와 주체의 관계》 (1998) ### 기타 정보 - **형사 사건**: 2009년, 서울중앙지법에서 벌금 300만 원 선고 및 관련 교사들 유죄 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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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환
https://ko.wikipedia.org/wiki/장일환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장일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장일환</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장일환</b>(張日煥, <a>1886년</a> <a>2월 1일</a> ~ <a>1918년</a> <a>4월 9일</a>)은 <a>일제강점기</a> 독립운동가이다. <a>조선국민회</a>를 조직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li> <li><a><span>2</span> <span>고문으로 순국하는 과정</span></a></li> <li><a><span>3</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4</span> <span>참고자료</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평양</a>에서 태어났고, <a>숭실학교</a>를 졸업했다. <a>1913년</a> <a>안창호</a> 등의 후원으로 평양에서 <a>청산학교</a>를 설립했다. <a>1914년</a> 평양에서 숭실학교와 신학교 재학생,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a>조선독립청년단</a>을 조직하고, 기관지 《청년단지》를 발행했다. <a>1914년</a> 9월 <a>하와이</a>에 건너가 <a>박용만</a>의 지도를 받았다. <a>1915년</a> 4월 귀국하여 <a>1917년</a> <a>3월 23일</a> 평양에서 <a>강석봉</a>, <a>서광조</a>, <a>배민수</a>, <a>백세빈</a>, <a>이보식</a> 등 동지 25명을 모아 <a>조선국민회</a>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됐다.<sup><a>&#91;1&#93;</a></sup> 회보 《국민보(國民報)》를 배포했다. <a>중국군관학교</a>에 보낼 학생을 선발하는 등의 계획을 추진하다가 <a>1918년</a> 2월 조직이 발각되어 체포됐다. <a>1918년</a> <a>4월 9일</a> 고문으로 순국했다. 비밀결사단체로서 무장항일기독교단체였던 조선국민회 조직의 회장이던 장일환은 일본의 앞잡이가 된 조선인 형사 김태석에 의해 미행당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중국식당에서 국내외지하운동을 상의하다가 현장 미행중이던 두 형사인 나까무라와 김태석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p> <h2><span></span><span>고문으로 순국하는 과정</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1주일 이상이나 장일환 등 회원들을 고문하였는데, 만주에서 온 <a>백세빈</a>이 고문에 굴복하여 조직에 대해 실토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회원을 비롯해서 회원들의 지인들까지 모두 체포되었으나 입건은 30명 정도가 되었다. 회장 장일환을 비롯해셔 <a>배민수</a>, <a>김형직</a>, <a>강석봉</a> 등은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독립을 염원하였던 장일환은 배민수에게 유언을 남기고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배민수는 회장 장일환의 순국과정에 대해 기술하였다. <br><br> "일주일 후에, 그들은 우리의 방을 바꾸어 나를 장일환이 있는 방에. 넣었다. 조직의 회장이었던 일환은 누구보다도 고문을 심하게 받았다. 하루는 형사실에 끌려 가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이더니 반죽음이 되어서 돌아왔다. 나는 그를 안고 보살펴주었다. 그는 울며 나에게 말했다.<br>“민수야, 이런 말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더 이상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나는 곧 죽게 될 거야. 주님과 평화로운 천국에 같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게 더 나을 거야, 하지만 어떻게 너를 혼자 고생하도록 두고 가지? 너무나도 안타깝구나. 내가 없어도 잘 할 줄 믿어. 주님의 곁에서 항상 널 위해 기도해 줄게. 우리의 독립을 쟁취하는 그날까지 용기를 잃지 마, 민수야. 언제 죽느냐가 문제지 언젠가 우리는 다 같은 곳에서 만날 거야. 값지게 죽는 것이 뜻 없이 사는 것보다 가치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값진 네 인생을 소중히 해라. 가치 없는 것에 목숨을 걸지 말아라. 네가 목숨을 잃지 않고도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마. 어머니께 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드려라. 민수야 어떻게 널 떠나지, 어떻게 널 떠나지?”그는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고 나는 감정에 치우치지 말라고 했다.<br> “지금은 울 때가 아니라 싸울 때이다. 네가 죽더라도 내가 모든 걸 책임지마. 하지만 나는 네가 죽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너와 나는 같이 일하다가 같이 죽어야 해.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계시쟎아. 일환아, 누워서 좀 쉬도록 해. 넌 너무 지쳐 있어.” <br> </p><p> 나는 그에게 마치 어린 동생에게 말하듯 부드럽게 타일렀다. 내 무릎에 그를 누이자 그는 곧 잠이 들었으나 잠시 후 눈을 뜨더니 정신이 나갔는지 말도 안되는 헛소리들을 지껄였다. <br> “어머니, 어머니! 저기 김경수가 있어요! 날 죽이려 해요! 어며니! 보셔요! 그가 다시와요! 어머니 울지 마셔요! 왜 우시나요? 제발 울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그가 다시 와요! 날 다시 치려고 해요! 어머니, 어머니&#160;! 울지 마세요, 제발 울지 마세요!”<br> 그는 똑같은 말을 밤낮으로 계속 되풀이했다. 아무리 그를 진정시키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나흘 밤낮을 그렇게 고생하더니 점점 더 상태가 악화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얼마 지나면 정신을 차릴 것으로 믿고 있었다. 며칠 후에 그는 집으로 보내졌고, 우리는 평양에 있는 도청 소재의 감옥으로 옮겨졌다. 두 달쯤 후에 우리는 사랑하는 친구 일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sup><a>&#91;2&#93;</a></sup> <br><br>장일환이 순국한 후, 동료 회원들이 검찰에 의해 보안법 위반 등의 이유를 들어 배민수에게 1년, 김형직과 구형필, 서광조, 평석은 10개월, 노덕순, 김평두, 조옥초, 최달형, 강석봉에게는 8개월, 최지화, 이보식, 김인준, 이경균 등은 6개월의 형을 구형받고 재판에서도 그대로 선고되었다. 회원들은 항소하지 않고 그대로 모두 형을 살았는데, 배민수는 1919년 이전이라 비교적 형이 적었다고 회고하였다.<sup><a>&#91;3&#93;</a></sup></p><p> <a>1990년</a>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a>건국훈장</a> 독립장을 추서받았다.<sup><a>&#91;4&#93;</a></sup> </p><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a>[1]</a>, <a>연합뉴스</a>, 2005년 3월 23일, 김형직 독립운동 사료 독립기념관에 소장</span> </li> <li><span><a>↑</a></span> <span>『배민수자서전』, 102쪽 </span> </li> <li><span><a>↑</a></span> <span>조선국민회원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던 사정, 장일환의 죽음, 감옥생활 등에 대해서는 『배민수자서전』, 제5장 지하운동 참조</span> </li> <li><span><a>↑</a></span> <span><a>[2]</a>, <a>국가보훈처</a> 홈페이지 독립유공자 공훈록, 2015년 1월 7일 확인</span> </li> </ol></div> <h2><span></span><span>참고자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동아일보사, 『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 1969</li> <li>姜德相 編, 『現代史資料』25卷, 東京: みすず書房, 1967, 35~37쪽.</li> <li>강영심, 「조선국민회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3, 1989</li> <li>연세대출판부 편, 『배민수자서전』, 1999</li> <li><a>“대한민국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a></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장일환&amp;oldid=24199741</a>"</div> <div><div><a>분류</a>: <ul><li><a>1886년 태어남</a></li><li><a>1918년 죽음</a></li><li><a>한국의 독립운동가</a></li><li><a>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ul> <div><span><a>링크 추가</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02:3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고문에 굴복하여 조직의 정보를 실토한 회원은 누구인가?
백세빈
null
97569
4,256
[ "고문에 굴복하여 조직의 정보를 실토한 회원은 누구인가?", "장일환의 종교는 무엇인가?", "장일환을 포함한 일부 회원들이 옥고를 치른 곳은?", "평양감옥 투옥 당시 장일환의 유언을 듣고 그의 순국과정을 기술한 인물은?", "고문에 굴복하여 조직에 대해 실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장일환의 종교는 무엇인가?", "장일환이 유언을 남긴 사람은 누구인가?", "1919년 이전에 형을 받아 비교적 형이 짧았던 조직원은 누구인가?", "검찰조사를 받은 배민수는 몇년형을 구형받았는가", "정일환이 순국한 후 배민수,김형직,구형필,서관조등이 검찰에게 받았던 죄명은 무엇인가?", "평양에 있는 도청 소재 감옥으로 옮겨진 이후 배민수는 몇년 형을 선고 받았는가?", "장일환 순국 이후 나머지 동료 회원들이 기소된 죄목은?", "보안법 위반으로 8개월 형을 산 사람들은 누구인가?", "배민수는 보안법 위반으로 몇년의 형을 선고받았는가?" ]
<!DOCTYPE html> 장일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일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장일환(張日煥, 1886년 2월 1일 ~ 1918년 4월 9일)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조선국민회를 조직했다. 목차 1 생애 2 고문으로 순국하는 과정 3 각주 4 참고자료 생애[편집] 평양에서 태어났고, 숭실학교를 졸업했다. 1913년 안창호 등의 후원으로 평양에서 청산학교를 설립했다. 1914년 평양에서 숭실학교와 신학교 재학생,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고, 기관지 《청년단지》를 발행했다. 1914년 9월 하와이에 건너가 박용만의 지도를 받았다. 1915년 4월 귀국하여 1917년 3월 23일 평양에서 강석봉, 서광조, 배민수, 백세빈, 이보식 등 동지 25명을 모아 조선국민회를 조직하고 회장에 선출됐다.[1] 회보 《국민보(國民報)》를 배포했다. 중국군관학교에 보낼 학생을 선발하는 등의 계획을 추진하다가 1918년 2월 조직이 발각되어 체포됐다. 1918년 4월 9일 고문으로 순국했다. 비밀결사단체로서 무장항일기독교단체였던 조선국민회 조직의 회장이던 장일환은 일본의 앞잡이가 된 조선인 형사 김태석에 의해 미행당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중국식당에서 국내외지하운동을 상의하다가 현장 미행중이던 두 형사인 나까무라와 김태석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고문으로 순국하는 과정[편집] 1주일 이상이나 장일환 등 회원들을 고문하였는데, 만주에서 온 백세빈이 고문에 굴복하여 조직에 대해 실토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던 회원을 비롯해서 회원들의 지인들까지 모두 체포되었으나 입건은 30명 정도가 되었다. 회장 장일환을 비롯해셔 배민수, 김형직, 강석봉 등은 평양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서 독립을 염원하였던 장일환은 배민수에게 유언을 남기고 고문으로 사망하였다. 배민수는 회장 장일환의 순국과정에 대해 기술하였다. "일주일 후에, 그들은 우리의 방을 바꾸어 나를 장일환이 있는 방에. 넣었다. 조직의 회장이었던 일환은 누구보다도 고문을 심하게 받았다. 하루는 형사실에 끌려 가 돌아올 기미가 안 보이더니 반죽음이 되어서 돌아왔다. 나는 그를 안고 보살펴주었다. 그는 울며 나에게 말했다.“민수야, 이런 말해서 미안하지만, 나는 더 이상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나는 곧 죽게 될 거야. 주님과 평화로운 천국에 같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게 더 나을 거야, 하지만 어떻게 너를 혼자 고생하도록 두고 가지? 너무나도 안타깝구나. 내가 없어도 잘 할 줄 믿어. 주님의 곁에서 항상 널 위해 기도해 줄게. 우리의 독립을 쟁취하는 그날까지 용기를 잃지 마, 민수야. 언제 죽느냐가 문제지 언젠가 우리는 다 같은 곳에서 만날 거야. 값지게 죽는 것이 뜻 없이 사는 것보다 가치가 있을 거야. 그러니까, 값진 네 인생을 소중히 해라. 가치 없는 것에 목숨을 걸지 말아라. 네가 목숨을 잃지 않고도 자유를 찾을 수 있도록 주님께 기도하마. 어머니께 네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모습을 보여드려라. 민수야 어떻게 널 떠나지, 어떻게 널 떠나지?”그는 어린아이처럼 울고 있었고 나는 감정에 치우치지 말라고 했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라 싸울 때이다. 네가 죽더라도 내가 모든 걸 책임지마. 하지만 나는 네가 죽지 않을 거라고 믿는다. 너와 나는 같이 일하다가 같이 죽어야 해. 주님은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계시쟎아. 일환아, 누워서 좀 쉬도록 해. 넌 너무 지쳐 있어.” 나는 그에게 마치 어린 동생에게 말하듯 부드럽게 타일렀다. 내 무릎에 그를 누이자 그는 곧 잠이 들었으나 잠시 후 눈을 뜨더니 정신이 나갔는지 말도 안되는 헛소리들을 지껄였다. “어머니, 어머니! 저기 김경수가 있어요! 날 죽이려 해요! 어며니! 보셔요! 그가 다시와요! 어머니 울지 마셔요! 왜 우시나요? 제발 울지 마세요. 전 괜찮아요. 그가 다시 와요! 날 다시 치려고 해요! 어머니, 어머니 ! 울지 마세요, 제발 울지 마세요!” 그는 똑같은 말을 밤낮으로 계속 되풀이했다. 아무리 그를 진정시키고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려고 애써도 소용이 없었다. 나는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그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는 나흘 밤낮을 그렇게 고생하더니 점점 더 상태가 악화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얼마 지나면 정신을 차릴 것으로 믿고 있었다. 며칠 후에 그는 집으로 보내졌고, 우리는 평양에 있는 도청 소재의 감옥으로 옮겨졌다. 두 달쯤 후에 우리는 사랑하는 친구 일환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2] 장일환이 순국한 후, 동료 회원들이 검찰에 의해 보안법 위반 등의 이유를 들어 배민수에게 1년, 김형직과 구형필, 서광조, 평석은 10개월, 노덕순, 김평두, 조옥초, 최달형, 강석봉에게는 8개월, 최지화, 이보식, 김인준, 이경균 등은 6개월의 형을 구형받고 재판에서도 그대로 선고되었다. 회원들은 항소하지 않고 그대로 모두 형을 살았는데, 배민수는 1919년 이전이라 비교적 형이 적었다고 회고하였다.[3] 199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4] 각주[편집] ↑ [1], 연합뉴스, 2005년 3월 23일, 김형직 독립운동 사료 독립기념관에 소장 ↑ 『배민수자서전』, 102쪽 ↑ 조선국민회원들이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던 사정, 장일환의 죽음, 감옥생활 등에 대해서는 『배민수자서전』, 제5장 지하운동 참조 ↑ [2],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독립유공자 공훈록, 2015년 1월 7일 확인 참고자료[편집] 동아일보사, 『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 1969 姜德相 編, 『現代史資料』25卷, 東京: みすず書房, 1967, 35~37쪽. 강영심, 「조선국민회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3, 1989 연세대출판부 편, 『배민수자서전』, 1999 “대한민국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장일환&amp;oldid=24199741" 분류: 1886년 태어남1918년 죽음한국의 독립운동가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02:3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장일환(1886년 2월 1일 ~ 1918년 4월 9일)은 일제강점기 동안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입니다. 그는 평양에서 태어나 숭실학교를 졸업한 후, 1913년에 청산학교를 설립하고, 1914년에는 조선독립청년단을 조직하여 독립을 위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17년에는 조선국민회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장일환은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군관학교에 학생을 보낼 계획을 세우던 중, 1918년 2월 조직이 발각되어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고문을 받으며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잃지 않았고, 결국 고문으로 인해 사망하게 됩니다. 그의 마지막 순간, 그는 동료에게 자신의 유언을 남기며 독립을 위한 싸움을 계속하라고 격려했습니다. 장일환의 희생은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었고, 1990년에는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전문용어로 풀어서 요약해줘. 단, 원문의 핵심 메시지는 그대로 유지하고, 문장도 자연스럽게 이어줘.
분자영양학
https://ko.wikipedia.org/wiki/분자영양학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분자영양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분자영양학</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d><div><img></div></td><td><span>이 문서의 내용은 <b><a>출처</a>가 분명하지 않습니다.</b><span><br>이 <span><a>문서를 편집</a></span>하여, <a>신뢰할 수 있는 출처</a>를 표기해 주세요. <a>검증</a>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a>토론 문서</a>에서 나누어 주세요.</span> <small>(2016년 1월)</small><span></span></span></td></tr></tbody></table> <p><b>분자영양학</b>(分子營養學)이란 인체에서 발생하는 모든 생리학적 혹은 생물학적인 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a>분자생물학</a>의 근간을 바탕으로 한다. 2005년 인간유전체사업을 통해여 인간 유전자수가 2,500개로 확인되면서 유전자가 생명현상의 특징인 인종, 성별, 체형, 환경에 대한 적응력, 영양요구도, 노화 및 수명연장까지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유전적 배경이 같은 쌍둥이에서도 영양섭취의 양상과 정도에 따라 나타나는 표현형(phenotypes)은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유전자형(genotypes)에 영향을 주는 영양, 운동 및 질병 등의 환경인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자로써 영양소가 부각되면서 발전한 학문영역이 분자영양학이다.<sup><a>&#91;1&#93;</a></sup>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정의</span></a></li> <li><a><span>2</span> <span>분자영양학 연구방법론</span></a> <ul> <li><a><span>2.1</span> <span>영양유전체학(Nutrigenomics)</span></a></li> <li><a><span>2.2</span> <span>Nutrigenetics</span></a></li> <li><a><span>2.3</span> <span>후생유전학</span></a></li> <li><a><span>2.4</span> <span>대사체학(Metabolomics)</span></a></li> </ul> </li> <li><a><span>3</span> <span>분자영양학의 도전 및 제한점</span></a> <ul> <li><a><span>3.1</span> <span>개인 맞춤형 치료 및 맞춤형 예방법에 따른 영양유전체학 연구디자인의 차별화</span></a></li> <li><a><span>3.2</span> <span><i>In vitro-, In vivo-</i> 및 인체 중재시험에 이르는 영양유전체학 적용</span></a></li> <li><a><span>3.3</span> <span>유전자형에 따른 인종 및 성별 간 표현형 발현 양상 차별성 규명</span></a></li> <li><a><span>3.4</span> <span>영양섭취기준 범주: 식품과 영양소</span></a></li> </ul> </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정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분자영양학'이란 인체에서 발생하는 모든 생리학적 혹은 생물학적인 현상을 분자수준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분자생물학의 근간을 바탕으로 하며, 인체가 생존을 위하여 섭취하거나 생체에서 합성 혹은 분해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영양소 분자 및 대사체 분자들이 생물학적 현상의 발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sup><a>&#91;1&#93;</a></sup> </p> <h2><span></span><span>분자영양학 연구방법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영양유전체학(Nutrigenomics)</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유전자와 유전자산물 및 유전 등에 영향을 미치는 분자들의 생물학적 현상을 연구하는 '분자유전학'의 연구형태를 도입한 것이다. 특히 영양소의 결핍 혹은 과잉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질병을 연구하는 영양학의 영역에서 유전체학적 해석을 접목시켜서 발전시킨 연구분야를 '영양유전체학(nutritional genomics, nutrigenomics)'이라고 한다. 영양유전체학은 어떤 질병의 증상이 발현되기 이전의 단계로 해석이 가능하여 질병의 개인 맞춤형 예방법 중 1차적으로 접근하는 영양치료에 기여하므로 현재 가장 주목받는 영역이다.<sup><a>&#91;1&#93;</a></sup> </p> <h3><span>Nutrigenetics</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영양소 및 식품 자체가 유전자 및 단백질 발현에 영향을 주는 현상을 영양유전체학(nutrigenomics)라고 한다면 유전자 변이에 따라 영양소의 흡수와 이용 등 대사 변화에 영향을 주는 현상을 설명함으로써 유전자로 인한 생물학적 변이를 설명하는 것을 nutrigenetics라고 한다.<sup><a>&#91;1&#93;</a></sup> </p> <h3><span></span><span>후생유전학</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유전자는 질병이나 생리현상의 결정적 인자라기보다 필요조건이라는 점이 대두되면서 1980년 히스톤 조작(histone modification), DNA 메틸화(methylation)와 같이 유전자 구조 이외 외부인자에 의하여 유전자 발현이 조절된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이는 epigenetics, epigenomics 혹은 후생유전학, 후생유전체학이라는 새로운 연구분야로 발전하였다. 또한 외부인자가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는 자궁 내 환경, 음식, 흡연, 감염, 스트레스, 환경오염, 사회적 환경, 운동, 음주, 약물 등 수없이 많다. 특히 태아는 영양소에 의한 유전자 발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특정 영양소의 부족 및 과잉은 성인 질병으로 진행하는 데 있어서 조기 발현(early onset disease)에 기여한다. 이를 metabolic imprinting, developmental programming, fetal epigenetics라고 한다. 즉 어릴 때 특정 영양소에 좌우된 유전자 변이는 특정 영양소의 흡수 및 이용 등을 변화시켜서 tolerance/intolerance를 일으키게 된다.<sup><a>&#91;1&#93;</a></sup> </p> <h3><span></span><span>대사체학(Metabolomics)</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대사체학이란 세포 또는 조직 내 대사체의 순환, 분비 변화 등을 체계적으로 확인•정량하고, 그 결과로부터 대사체군(metabolome)을 다양한 생리•병리적 상태와 연관지어 대사체 네트워크를 다시 해석하는 총체적 연구이다. 따라서 특정 질환의 대사체 변화를 이해하고, 대사체 변화를 검출 및 확인하기 위한 초정밀분석기술과 그 결과를 생체의 생리적 상태와 연관지어 해석하기 위한 통계분석이 중요한 기술이다.<sup><a>&#91;1&#93;</a></sup> </p> <h2><span></span><span>분자영양학의 도전 및 제한점</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개인 맞춤형 치료 및 맞춤형 예방법에 따른 영양유전체학 연구디자인의 차별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치료와 예방은 연구방법의 접근 자체가 다르다. 치료를 근간으로 하는 연구는 이미 발생한 질병의 증후군을 억제하는 데 관련된 바이오마커 및 유전자 중심 연구이다. 반면 예방을 근간으로 하는 연구의 경우에는 질병고나련 조직 자체의 분화/증식 혹은 대사 이상에 기여하는 인자를 비롯하여 질병의 시스템 및 합병증에 관여한 모든 조직을 대상으로 관련된 바이오마커 및 유전자를 추적하는 방식이다. 또한 개인의 관련 유전자 다형성에 따른 발현 정도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분자생물학적 도구, 유전체, 전사체, 단백질체, 대사체 기술 모두를 동원하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질병을 치료 및 예방하는 영양문제가 단순히 어떤 식품을 추천하는 단계 혹은 영야소별 대사를 추적하는 데 그치지 말고 관련 질병까지 연계한 영양정보체계를 위한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에 질병과 관련된 분야의 기초연구를 위하여 영양, 운동, 분자생물, 화학, 의학, 약학, 통계 등 분야별 최신기술을 접목시킨 학제 간 융합연구가 필요하다.<sup><a>&#91;1&#93;</a></sup> </p> <h3><span></span><span><i>In vitro-, In vivo-</i> 및 인체 중재시험에 이르는 영양유전체학 적용</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질병의 치료 및 예방을 위한 영양인자의 역할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세포 및 동물시험법이 샘플의 유용성 및 조절의 자율성 때문에 가장 접근이 쉽다. 그러나 영양유전체학의 최종목표는 영양성분이 '인간의 질병 예방'에 미치는 과학적 근거를 밝히고 개인 맞춤형 영야(personalized nutrition)을 실현하는 것이므로 인체 중재시험은 최종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인체 중재연구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세포와 동물시험은 사전시험으로 주로 이용하고 있으나, 단일 물질 처치에 따른 세포와 동물시험조차도 관찰된 각각의 유전자 발현이 동일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고, 일치한다고 하여도 대부분 인체시험에서 유사한 결과를 갖기가 매우 힘들다. 따라서 질병의 종류와 인체의 대사적 양상에 따른 발현유전체지도를 구성하거나 동일 혹은 유사한 발현 양상을 가진 세포 및 동물시험 모델을 찾아서 1차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후 2차적으로 KO-(유전자 삭제(knock out)) 혹은 유전자 변형 모델(transgenic model)에서 같은 결과를 얻으면 인체시험에서도 동일한 결과를 가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이러한 단계적인 결과를 제시할 경우 인체시험의 승인이 유리하다.<sup><a>&#91;1&#93;</a></sup> </p> <h3><span></span><span>유전자형에 따른 인종 및 성별 간 표현형 발현 양상 차별성 규명</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질병은 노화, 식습관, 생활습관, 경제적 상황 등 여러 환경과 연계되어 발생하므로 유전자-환경의 상호관련성(gene-environments interation)을 배제할 수 없으며, 게다가 개체마다의 유전자에 대한 민감성(susceptibility) 또한 이들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질병관련 영양유전체연구를 위하여 반드시 대상국가의 인종적•성적 특성에 따른 식습관 등의 환경인자를 고려한 유전자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sup><a>&#91;1&#93;</a></sup> </p> <h3><span></span><span>영양섭취기준 범주: 식품과 영양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영양유전체학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유전자 변이에 따른 관련 영양소의 권장량을 제시하여야 진정한 맞춤형 영양으로써의 가치를 가지며 그 범주는 평균필요양(EAR)과 상한섭취량(UL) 사이의 수준이어야 한다. 즉 유전자 맞춤형 임상중재연구를 하였을 때 유전자 변이형을 가진 대상이 관련 특정 영양소의 섭취가 과잉으로 요구되는 결과를 도출하여도 영양섭취기준(DRI)의 상한기준을 섭취권장량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생체세포 DNA 분자에 영향을 미치는 영양소는 우리가 섭취하는 식품에서 얻어지므로 각각의 단일 화합물의 경우도 유전자 맞춤형 섭취 기준을 설정하기가 어려우며 식품 형태의 복합 화합물을 섭취할 경우 유전자 발현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더욱 복잡하다. 따라서 최근에는 주요 대사별 장애를 가진 개인의 경우 주요 유전자 다형성에 따른 식품 맞춤형 영양학 중심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sup><a>&#91;1&#93;</a></sup>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 <sup><a>마</a></sup> <sup><a>바</a></sup> <sup><a>사</a></sup> <sup><a>아</a></sup> <sup><a>자</a></sup> <sup><a>차</a></sup></span> <span><cite>이명숙 외 11인 (2015년 5월 11일). &#12298;세포부터 인체까지 분자영양학&#12299;. 교문사.</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ol></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분자영양학&amp;oldid=22820841</a>"</div> <div><div><a>분류</a>: <ul><li><a>응용과학</a></li><li><a>생화학</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출처가 필요한 글/2016년 1월</a></li><li><a>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a></li><li><a>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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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스톤 조작과 더불어 유전자 구조 이외 외부인자에 의한 유전자 발현 조절의 기제는?
DNA 메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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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스톤 조작과 더불어 유전자 구조 이외 외부인자에 의한 유전자 발현 조절의 기제는?", "DNA 메틸화와 더불어 유전자 구조 이외 외부인자에 의한 유전자 발현 조절의 기제는?", "유전자는 인체 내 생리현상의 어떤 조건인가?", "외부요인에 의한 유전자 발현 조절을 일컫는 말은?", "유아기 특정 영양소에 의한 유전자 변이는 무엇을 야기하게 되는가?", "치료는 어떤 부분을 중점으로 한 연구를 진행하는가?", "치료와 예방 연구방법의 이상향은?", "치료와 예방의 연구방법 중 유전자의 발현정도에 대한 추적연구가 필요한 연구방법은?", "영양인자를 연구할 때 샘플의 유용성 및 조절의 자율성 상 가장 접근하기 쉬운 방법은?", "질병의 종류와 인체의 대사적 양상에 따라 구성되는 지도는?", "영양유전체학에서 필수적인 시험단계는?", "세포와 동물시험에서 유전자 발현이 동일할 경우 다음단계로 실행되는 시험단계는?", "영양인자의 역할을 규명하기 위해 필요한 연구단계 중 1차적으로 규명해야 할 것은?", "UL이라고도 불리며 영양소의 권장량이 넘어서는 안되는 것은?", "생체세포 DNA 분자에 영향을 미치는 영양소는 무엇을 섭취함으로써 얻는가?", "영양소의 권장량 범위는?", "유전자 변이형 실험대상에서 과량검출 영양소의 섭취 상한기준은?" ]
<!DOCTYPE html> 분자영양학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분자영양학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d></td><td>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6년 1월)</td></tr></tbody></table> 분자영양학(分子營養學)이란 인체에서 발생하는 모든 생리학적 혹은 생물학적인 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분자생물학의 근간을 바탕으로 한다. 2005년 인간유전체사업을 통해여 인간 유전자수가 2,500개로 확인되면서 유전자가 생명현상의 특징인 인종, 성별, 체형, 환경에 대한 적응력, 영양요구도, 노화 및 수명연장까지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유전적 배경이 같은 쌍둥이에서도 영양섭취의 양상과 정도에 따라 나타나는 표현형(phenotypes)은 매우 다른 양상을 보이면서 유전자형(genotypes)에 영향을 주는 영양, 운동 및 질병 등의 환경인자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자로써 영양소가 부각되면서 발전한 학문영역이 분자영양학이다.[1] 목차 1 정의 2 분자영양학 연구방법론 2.1 영양유전체학(Nutrigenomics) 2.2 Nutrigenetics 2.3 후생유전학 2.4 대사체학(Metabolomics) 3 분자영양학의 도전 및 제한점 3.1 개인 맞춤형 치료 및 맞춤형 예방법에 따른 영양유전체학 연구디자인의 차별화 3.2 In vitro-, In vivo- 및 인체 중재시험에 이르는 영양유전체학 적용 3.3 유전자형에 따른 인종 및 성별 간 표현형 발현 양상 차별성 규명 3.4 영양섭취기준 범주: 식품과 영양소 4 각주 정의[편집] '분자영양학'이란 인체에서 발생하는 모든 생리학적 혹은 생물학적인 현상을 분자수준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분자생물학의 근간을 바탕으로 하며, 인체가 생존을 위하여 섭취하거나 생체에서 합성 혹은 분해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영양소 분자 및 대사체 분자들이 생물학적 현상의 발현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1] 분자영양학 연구방법론[편집] 영양유전체학(Nutrigenomics)[편집] 유전자와 유전자산물 및 유전 등에 영향을 미치는 분자들의 생물학적 현상을 연구하는 '분자유전학'의 연구형태를 도입한 것이다. 특히 영양소의 결핍 혹은 과잉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질병을 연구하는 영양학의 영역에서 유전체학적 해석을 접목시켜서 발전시킨 연구분야를 '영양유전체학(nutritional genomics, nutrigenomics)'이라고 한다. 영양유전체학은 어떤 질병의 증상이 발현되기 이전의 단계로 해석이 가능하여 질병의 개인 맞춤형 예방법 중 1차적으로 접근하는 영양치료에 기여하므로 현재 가장 주목받는 영역이다.[1] Nutrigenetics[편집] 영양소 및 식품 자체가 유전자 및 단백질 발현에 영향을 주는 현상을 영양유전체학(nutrigenomics)라고 한다면 유전자 변이에 따라 영양소의 흡수와 이용 등 대사 변화에 영향을 주는 현상을 설명함으로써 유전자로 인한 생물학적 변이를 설명하는 것을 nutrigenetics라고 한다.[1] 후생유전학[편집] 유전자는 질병이나 생리현상의 결정적 인자라기보다 필요조건이라는 점이 대두되면서 1980년 히스톤 조작(histone modification), DNA 메틸화(methylation)와 같이 유전자 구조 이외 외부인자에 의하여 유전자 발현이 조절된다는 것을 생각하였다. 이는 epigenetics, epigenomics 혹은 후생유전학, 후생유전체학이라는 새로운 연구분야로 발전하였다. 또한 외부인자가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주는 요인으로는 자궁 내 환경, 음식, 흡연, 감염, 스트레스, 환경오염, 사회적 환경, 운동, 음주, 약물 등 수없이 많다. 특히 태아는 영양소에 의한 유전자 발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특정 영양소의 부족 및 과잉은 성인 질병으로 진행하는 데 있어서 조기 발현(early onset disease)에 기여한다. 이를 metabolic imprinting, developmental programming, fetal epigenetics라고 한다. 즉 어릴 때 특정 영양소에 좌우된 유전자 변이는 특정 영양소의 흡수 및 이용 등을 변화시켜서 tolerance/intolerance를 일으키게 된다.[1] 대사체학(Metabolomics)[편집] 대사체학이란 세포 또는 조직 내 대사체의 순환, 분비 변화 등을 체계적으로 확인•정량하고, 그 결과로부터 대사체군(metabolome)을 다양한 생리•병리적 상태와 연관지어 대사체 네트워크를 다시 해석하는 총체적 연구이다. 따라서 특정 질환의 대사체 변화를 이해하고, 대사체 변화를 검출 및 확인하기 위한 초정밀분석기술과 그 결과를 생체의 생리적 상태와 연관지어 해석하기 위한 통계분석이 중요한 기술이다.[1] 분자영양학의 도전 및 제한점[편집] 개인 맞춤형 치료 및 맞춤형 예방법에 따른 영양유전체학 연구디자인의 차별화[편집] 치료와 예방은 연구방법의 접근 자체가 다르다. 치료를 근간으로 하는 연구는 이미 발생한 질병의 증후군을 억제하는 데 관련된 바이오마커 및 유전자 중심 연구이다. 반면 예방을 근간으로 하는 연구의 경우에는 질병고나련 조직 자체의 분화/증식 혹은 대사 이상에 기여하는 인자를 비롯하여 질병의 시스템 및 합병증에 관여한 모든 조직을 대상으로 관련된 바이오마커 및 유전자를 추적하는 방식이다. 또한 개인의 관련 유전자 다형성에 따른 발현 정도에 이르기까지 그 영역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분자생물학적 도구, 유전체, 전사체, 단백질체, 대사체 기술 모두를 동원하여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질병을 치료 및 예방하는 영양문제가 단순히 어떤 식품을 추천하는 단계 혹은 영야소별 대사를 추적하는 데 그치지 말고 관련 질병까지 연계한 영양정보체계를 위한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한다. 이에 질병과 관련된 분야의 기초연구를 위하여 영양, 운동, 분자생물, 화학, 의학, 약학, 통계 등 분야별 최신기술을 접목시킨 학제 간 융합연구가 필요하다.[1] In vitro-, In vivo- 및 인체 중재시험에 이르는 영양유전체학 적용[편집] 질병의 치료 및 예방을 위한 영양인자의 역할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세포 및 동물시험법이 샘플의 유용성 및 조절의 자율성 때문에 가장 접근이 쉽다. 그러나 영양유전체학의 최종목표는 영양성분이 '인간의 질병 예방'에 미치는 과학적 근거를 밝히고 개인 맞춤형 영야(personalized nutrition)을 실현하는 것이므로 인체 중재시험은 최종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인체 중재연구의 어려움 등을 이유로 세포와 동물시험은 사전시험으로 주로 이용하고 있으나, 단일 물질 처치에 따른 세포와 동물시험조차도 관찰된 각각의 유전자 발현이 동일하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고, 일치한다고 하여도 대부분 인체시험에서 유사한 결과를 갖기가 매우 힘들다. 따라서 질병의 종류와 인체의 대사적 양상에 따른 발현유전체지도를 구성하거나 동일 혹은 유사한 발현 양상을 가진 세포 및 동물시험 모델을 찾아서 1차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후 2차적으로 KO-(유전자 삭제(knock out)) 혹은 유전자 변형 모델(transgenic model)에서 같은 결과를 얻으면 인체시험에서도 동일한 결과를 가질 확률이 높기 때문에 이러한 단계적인 결과를 제시할 경우 인체시험의 승인이 유리하다.[1] 유전자형에 따른 인종 및 성별 간 표현형 발현 양상 차별성 규명[편집] 질병은 노화, 식습관, 생활습관, 경제적 상황 등 여러 환경과 연계되어 발생하므로 유전자-환경의 상호관련성(gene-environments interation)을 배제할 수 없으며, 게다가 개체마다의 유전자에 대한 민감성(susceptibility) 또한 이들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질병관련 영양유전체연구를 위하여 반드시 대상국가의 인종적•성적 특성에 따른 식습관 등의 환경인자를 고려한 유전자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1] 영양섭취기준 범주: 식품과 영양소[편집] 영양유전체학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유전자 변이에 따른 관련 영양소의 권장량을 제시하여야 진정한 맞춤형 영양으로써의 가치를 가지며 그 범주는 평균필요양(EAR)과 상한섭취량(UL) 사이의 수준이어야 한다. 즉 유전자 맞춤형 임상중재연구를 하였을 때 유전자 변이형을 가진 대상이 관련 특정 영양소의 섭취가 과잉으로 요구되는 결과를 도출하여도 영양섭취기준(DRI)의 상한기준을 섭취권장량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생체세포 DNA 분자에 영향을 미치는 영양소는 우리가 섭취하는 식품에서 얻어지므로 각각의 단일 화합물의 경우도 유전자 맞춤형 섭취 기준을 설정하기가 어려우며 식품 형태의 복합 화합물을 섭취할 경우 유전자 발현을 총체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더욱 복잡하다. 따라서 최근에는 주요 대사별 장애를 가진 개인의 경우 주요 유전자 다형성에 따른 식품 맞춤형 영양학 중심의 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1] 각주[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이명숙 외 11인 (2015년 5월 11일). 《세포부터 인체까지 분자영양학》. 교문사.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분자영양학&amp;oldid=22820841" 분류: 응용과학생화학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6년 1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0월 20일 (토) 14:0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주제 요약:** 분자영양학은 인체의 생리학적 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고, 영양소가 유전자 발현 및 대사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 분야는 영양유전체학, nutrigenetics, 후생유전학, 대사체학 등 다양한 연구 방법론을 포함하며, 개인 맞춤형 영양 치료 및 예방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그러나 연구의 도전과 제한점으로는 개인의 유전자형에 따른 차별성과 인체 중재시험의 어려움이 있다. **각 문단의 핵심 문장:** 1. **정의:** 분자영양학은 인체의 생리학적 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이해하고 영양소가 생물학적 현상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2. **영양유전체학:** 영양유전체학은 영양소의 결핍이나 과잉으로 발생하는 질병을 연구하며, 질병의 개인 맞춤형 예방법에 기여하는 중요한 영역이다. 3. **Nutrigenetics:** Nutrigenetics는 유전자 변이에 따라 영양소의 흡수와 대사 변화에 영향을 주는 현상을 설명한다. 4. **후생유전학:** 후생유전학은 외부 인자가 유전자 발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강조하며, 특정 영양소의 부족이나 과잉이 성인 질병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5. **대사체학:** 대사체학은 대사체의 변화를 체계적으로 확인하고, 이를 생리적 및 병리적 상태와 연관지어 해석하는 연구이다. 6. **분자영양학의 도전 및 제한점:** 개인 맞춤형 치료와 예방을 위한 연구 디자인의 차별화가 필요하며, 다양한 분야의 융합 연구가 요구된다. 7. **영양유전체학 적용:** 인체 중재시험은 영양성분이 질병 예방에 미치는 과학적 근거를 밝히기 위해 필수적이다. 8. **유전자형에 따른 표현형 발현 차별성:** 질병은 유전자-환경의 상호작용에 의해 발생하므로, 연구 시 인종적 및 성적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 9. **영양섭취기준 범주:** 유전자 변이에 따른 영양소의 권장량 제시는 맞춤형 영양의 가치를 높이는 중요한 요소이다.
이 텍스트를 읽고, 전체 주제를 세 문장 이내로 요약한 뒤, 각 문단의 핵심 문장도 추출해서 함께 보여줘. 중요하지 않은 예시는 생략하고 핵심 개념 위주로 정리해줘.
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
https://ko.wikipedia.org/wiki/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b>, (<b>ICLEI</b>, <b>Local Governments for Sustainability</b>는 1990년 <b>International Council for Local Environmental Initiatives</b>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며 각국 지방정부 및 기관이 참여하여 지속 가능한 성장 가능성을 논의하고자 하는 통합 협의체이다. 협의회는 200개의 지방 정부가 모여서 처음으로 열렸으며 1990년 9월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렸다. 오늘날 84개국의 1,200여 개의 지자체<sup><a>&#91;1&#93;</a></sup>가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국제 협력 및 각국 기준의 프로그램/캠페인 추진을 위해 회원이 아닌 지자체와도 협력이 추진되고 있다. 협의회 차원에서는 행정 지원, 훈련, 교류를 통해 지자체가 공동으로 필요한 분야에 대한 지식, 능력 개발 등을 얻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별히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지역 수준의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안을 창출하자는 것이 주요한 목표이다. <a>대한민국</a>에는 <a>2012년</a> <a>서울</a>에 ICLEI 동아시아 본부가 세워졌고<sup><a>&#91;2&#93;</a></sup> <a>수원</a>에 한국사무소가 개원했으며 현재 64개의 지자체가 가입되어 있다.<sup><a>&#91;3&#93;</a></sup>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프로그램</span></a></li> <li><a><span>2</span> <span>운영방식</span></a></li> <li><a><span>3</span> <span>생태교통</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5</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프로그램</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현재 공식 명칭은 'ICLEI-Local Governments for Sustainability'이며 2003년 지방 정부가 직면한 지상과제에 대해 다루고자 존재 목적과 헌장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좀 더 넓은 의미를 포함하는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게 됐다. </p> <h2><span></span><span>운영방식</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각 지자체가 가입하여 활동하는 민주주의적인 협의체를 이루고 있다. 3년 마다 세계총회가 열리며 6년 단위의 전략 계획을 세워 프로젝트 수립 및 방향성이 논의된다. 가장 최근의 총회는 2009년 <a>캐나다</a> <a>에드먼턴</a>에서, 2012년에는 브라질 벨루오리존치, 2015년에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렸다. 각 회원 지자체와 참여 단체들은 전략 계획과 기구 운영을 감독하는 감독위를 선출했다. </p><p><br> ★ 2015 서울 이클레이 세계총회 </p><p>서울시가 총회를 유치하고 주최도시가 되어 2015년 4월 8일부터 4월 12일까지 제9차 이클레이 세계총회를 주회의장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개최하였다. 역대 총회 중 최대 최고의 회의였다. 76개의 플래너리, 세션, 워크숍이 진행되었으며, 300명 이상의 연사 및 패널이 참여했다. 총 참석자는 3,000여명(직전 2012 벨루오리존치 총회는 1천5백여명)이나 되었으며, 국내인은 2천2백여명, 외국인은 78개국 8백여명에 이르렀다. 참여도시로는 총 334개 도시이며, 이 중 지방정부는 61개국 2백여개 도시였다. 참여기관 수는 1천여개이다. 서울총회에서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이 신임 이클레이회장으로 취임했다. 서울총회의 괄목할 만한 성과는 세계도시의 지속가능 발전을 향한 이정표가 되는 서울선언문, 서울액션플랜이 채택, 선포되었다. 2020이후 신기후체제를 대비 국가단위의 지지부진한 기후변화협상을 지방정부 및 도시 차원에서 견인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번 총회에서 논의되었으며, 기후변화대응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도시의 노력과 역할이 2015년 12월 파리에서 개최되는 제21차 당사국총회(COP21)에서 선보일 것이다. </p> <h2><span></span><span>생태교통</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ICLEI는 법적으로 생태교통 연맹(ecomobility aliance)의 사무국을 관리하고 대변하는 기구이다. 현재 독일 본에 사무국이 위치하고 있으며. 경상남도 창원시가 의장도시를 맡고 있다. 이 연맹의 목적은 비영리기구로서 세계 각국의 시민들이 개인 자가용에 의존하는 비중을 줄여나가고자 하는 움직임을 가리킨다. 즉, 생태교통을 하나의 흐름으로 추진하기 위한 추진체가 생태교통 연맹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며 <a>2011년</a> <a>창원</a>에서 열린 창원생태교통총회 때 지속가능한 교통 및 도시미래 구축을 목적으로 시드니, 프라이브루그, 포틀랜드 등 12개의 선진 녹색교통도시와 ADB(아시아개발은행), GIZ(독일국제협력기구) 등 녹색교통 전문국제기구가 모여 출범했다.<sup><a>&#91;4&#93;</a></sup><sup><a>&#91;5&#93;</a></sup>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a>'제1회 ICLEI 액션토크-미래의 도시교통포럼' 서울서 열린다</a> 뉴시스</span> </li> <li><span><a>↑</a></span> <span><a>ICLEI office to open in Seoul</a> Korea Times</span> </li> <li><span><a>↑</a></span> <span><a>ICLEI 한국사무소 수원서'문 활짝'</a> 인천일보</span> </li> <li><span><a>↑</a></span> <span><a>공식홈페이지</a></span> </li> <li><span><a>↑</a></span> <span><a>박완수 창원시장, UNDESA 주관 '베를린 고위급 회담' 초청받아</a><sup>&#91;<a>깨진 링크</a>(<a>과거 내용 찾기</a>)&#93;</sup> 한국일보</span> </li> </ol></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ICLEI 공식</a></li> <li><a>Activists Fight Green Projects, Seeing U.N. Plot</a></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amp;oldid=24072027</a>"</div> <div><div><a>분류</a>: <ul><li><a>지속 가능한 발전</a></li><li><a>1990년 설립</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Kaszëbsczi</a></li><li><a>Deutsch</a></li><li><a>English</a></li><li><a>Español</a></li><li><a>Français</a></li><li><a>日本語</a></li><li><a>中文</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4월 19일 (금) 23:0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2015년 서울에서 제9차 이클레이 세계총회를 개최한 곳이자 주회의장이였던 장소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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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서울에서 제9차 이클레이 세계총회를 개최한 곳이자 주회의장이였던 장소는?", "2015년 서울에서 개최된 제9차 이클레이 세계총회에 참여한 도시의 개수는?", "2015년 이클레이 서울총회에서 신임 이클레이회장으로 취임한 사람은?", "2015년 서울에서 열린 회의의 총 참석자는 몇명인가?", "서울총회에서 신임 이클레이회장으로 취임한 사람은?", "제9차 이클레이 세계총회가 열린 년도는 언제인가?", "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의의 제9차 이클레이 세계총회는 어느 장소에서 개최되었는가?", "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 제9차 이클레이 세계총회에 참여한 도시는 몇 개인가?", "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 제21차 당사국총회가 개최되는 도시는 어디인가?", "법적으로 생태교통 연맹 사무국을 관리 및 대변하는 기구의 명칭은?", "이클레이의 의장도시를 맡고 있는 대한민국 경상남도에 위치한 도시는?", "이클레이의 사무국이 위치한 도시는?", "ICLEI의 의장도시는?", "ICLEI는 법적으로 무엇의 사무국을 관리하고 대변하는 기구인가?", "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의의 의장도시는 경상남도 어느 시인가?", "2011년 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 의장도시인 창원에서 열리는 총회는 무엇인가?" ]
<!DOCTYPE html> 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 (ICLEI, Local Governments for Sustainability는 1990년 International Council for Local Environmental Initiatives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며 각국 지방정부 및 기관이 참여하여 지속 가능한 성장 가능성을 논의하고자 하는 통합 협의체이다. 협의회는 200개의 지방 정부가 모여서 처음으로 열렸으며 1990년 9월 뉴욕 유엔 본부에서 열렸다. 오늘날 84개국의 1,200여 개의 지자체[1]가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국제 협력 및 각국 기준의 프로그램/캠페인 추진을 위해 회원이 아닌 지자체와도 협력이 추진되고 있다. 협의회 차원에서는 행정 지원, 훈련, 교류를 통해 지자체가 공동으로 필요한 분야에 대한 지식, 능력 개발 등을 얻을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별히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지역 수준의 효과적이고 경제적인 방안을 창출하자는 것이 주요한 목표이다. 대한민국에는 2012년 서울에 ICLEI 동아시아 본부가 세워졌고[2] 수원에 한국사무소가 개원했으며 현재 64개의 지자체가 가입되어 있다.[3] 목차 1 프로그램 2 운영방식 3 생태교통 4 각주 5 외부 링크 프로그램[편집] 현재 공식 명칭은 'ICLEI-Local Governments for Sustainability'이며 2003년 지방 정부가 직면한 지상과제에 대해 다루고자 존재 목적과 헌장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좀 더 넓은 의미를 포함하는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게 됐다. 운영방식[편집] 각 지자체가 가입하여 활동하는 민주주의적인 협의체를 이루고 있다. 3년 마다 세계총회가 열리며 6년 단위의 전략 계획을 세워 프로젝트 수립 및 방향성이 논의된다. 가장 최근의 총회는 2009년 캐나다 에드먼턴에서, 2012년에는 브라질 벨루오리존치, 2015년에는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렸다. 각 회원 지자체와 참여 단체들은 전략 계획과 기구 운영을 감독하는 감독위를 선출했다. ★ 2015 서울 이클레이 세계총회 서울시가 총회를 유치하고 주최도시가 되어 2015년 4월 8일부터 4월 12일까지 제9차 이클레이 세계총회를 주회의장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개최하였다. 역대 총회 중 최대 최고의 회의였다. 76개의 플래너리, 세션, 워크숍이 진행되었으며, 300명 이상의 연사 및 패널이 참여했다. 총 참석자는 3,000여명(직전 2012 벨루오리존치 총회는 1천5백여명)이나 되었으며, 국내인은 2천2백여명, 외국인은 78개국 8백여명에 이르렀다. 참여도시로는 총 334개 도시이며, 이 중 지방정부는 61개국 2백여개 도시였다. 참여기관 수는 1천여개이다. 서울총회에서 박원순 서울특별시장이 신임 이클레이회장으로 취임했다. 서울총회의 괄목할 만한 성과는 세계도시의 지속가능 발전을 향한 이정표가 되는 서울선언문, 서울액션플랜이 채택, 선포되었다. 2020이후 신기후체제를 대비 국가단위의 지지부진한 기후변화협상을 지방정부 및 도시 차원에서 견인하고자 하는 노력이 이번 총회에서 논의되었으며, 기후변화대응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도시의 노력과 역할이 2015년 12월 파리에서 개최되는 제21차 당사국총회(COP21)에서 선보일 것이다. 생태교통[편집] ICLEI는 법적으로 생태교통 연맹(ecomobility aliance)의 사무국을 관리하고 대변하는 기구이다. 현재 독일 본에 사무국이 위치하고 있으며. 경상남도 창원시가 의장도시를 맡고 있다. 이 연맹의 목적은 비영리기구로서 세계 각국의 시민들이 개인 자가용에 의존하는 비중을 줄여나가고자 하는 움직임을 가리킨다. 즉, 생태교통을 하나의 흐름으로 추진하기 위한 추진체가 생태교통 연맹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며 2011년 창원에서 열린 창원생태교통총회 때 지속가능한 교통 및 도시미래 구축을 목적으로 시드니, 프라이브루그, 포틀랜드 등 12개의 선진 녹색교통도시와 ADB(아시아개발은행), GIZ(독일국제협력기구) 등 녹색교통 전문국제기구가 모여 출범했다.[4][5] 각주[편집] ↑ '제1회 ICLEI 액션토크-미래의 도시교통포럼' 서울서 열린다 뉴시스 ↑ ICLEI office to open in Seoul Korea Times ↑ ICLEI 한국사무소 수원서'문 활짝' 인천일보 ↑ 공식홈페이지 ↑ 박완수 창원시장, UNDESA 주관 '베를린 고위급 회담' 초청받아[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국일보 외부 링크[편집] ICLEI 공식 Activists Fight Green Projects, Seeing U.N. Plot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amp;oldid=24072027" 분류: 지속 가능한 발전1990년 설립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Kaszëbsczi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9일 (금) 23:0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자치단체국제환경협의회(ICLEI)는 1990년 설립된 국제 협의체로, 지방정부와 기관들이 지속 가능한 성장 가능성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조직이다. 초기에는 200개 지방정부가 참여하여 뉴욕 유엔 본부에서 첫 회의를 개최했으며, 현재 84개국의 1,200여 개 지자체가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ICLEI는 지자체의 지식과 능력 개발을 지원하며, 지역 사회의 발전을 위한 경제적이고 효과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운영 방식은 민주적인 협의체로, 3년마다 세계총회를 열고 6년 단위의 전략 계획을 수립한다. 최근 총회는 2015년 서울에서 개최되었으며, 3,000여 명이 참석하여 서울선언문과 서울액션플랜이 채택되었다. 이 총회에서는 기후변화 대응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도시의 역할이 논의되었다. 또한, ICLEI는 생태교통 연맹의 사무국을 관리하며, 개인 자가용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 연맹은 2011년 창원에서 출범하였고, 지속 가능한 교통과 도시 미래 구축을 목표로 한다.
다음 텍스트를 읽고 독자가 처음 접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해줘. 주요 인물, 사건, 배경, 갈등 구조 등을 빠짐없이 담되, 문장은 간결하게 유지해줘.
아리한트급_잠수함
https://ko.wikipedia.org/wiki/아리한트급_잠수함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아리한트급 잠수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아리한트급 잠수함</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caption>아리한트급 <a>SSBN</a> </caption> <tbody><tr> <td colspan="2"><a><img></a> </td></tr> <tr> <th colspan="2">개요 </th></tr> <tr> <th>함종 </th> <td><a>SSBN</a> </td></tr> <tr> <th>함급명 </th> <td>아리한트 </td></tr> <tr> <th>제작자 </th> <td><a>힌두스탄 조선소</a> </td></tr> <tr> <th>운용자 </th> <td><span><a><img></a></span> <a>인도</a> </td></tr> <tr> <th>진수일 </th> <td>1번함 2009년 </td></tr> <tr> <th>배치일 </th> <td>1번함 2012년 </td></tr> <tr> <th>계획수 </th> <td>4 </td></tr> <tr> <th colspan="2">특징 </th></tr> <tr> <th>배수량 </th> <td>6000 t </td></tr> <tr> <th>전장 </th> <td>112 m </td></tr> <tr> <th>선폭 </th> <td>15 m </td></tr> <tr> <th>흘수 </th> <td>10 m </td></tr> <tr> <th>추진 </th> <td>83MWt 경수로 1기, 40% 고농축우라늄 </td></tr> <tr> <th>속력 </th> <td>수상 15 노트 (28 km/h)<br> 수중 24 노트 (44 km/h) </td></tr> <tr> <th>잠수 깊이 </th> <td>300 m </td></tr> <tr> <th>항속거리 </th> <td>무제한, 식량보급시 </td></tr> <tr> <th>승조원 </th> <td>95명 </td></tr> <tr> <th>무장 </th> <td>6 X 533mm 어뢰관 X 6<br>4 X 수직발사관<br>*<a>K-4 미사일</a> 4발, 사거리 5000 km<br>*<a>K-15 미사일</a> 12발, 사거리 700 km </td></tr> </tbody></table> <p><b>아리한트급 잠수함</b>은 <a>인도</a>가 처음으로 만든 <a>핵잠수함</a>(<a>SSBN</a>)으로, 이로 인하여 인도는 <a>상임이사국</a>외의 국가 중 유일한 핵잠수함 보유국이 되었다. <a>K-15 SLBM</a>을 보유한 나라 또한 상임이사국 외에는 인도밖에 없다. </p><p>1번함 <a>아리한트함</a>은 2009년 7월 26일 진수되었다. 아리한트는 섬멸자라는 뜻이다.<sup><a>&#91;1&#93;</a></sup> </p><p>1999년 7월 26일 인도는 <a>파키스탄</a>과 <a>카슈미르</a> 지역을 놓고 <a>카길전쟁</a>에서 승리한 승전기념일이다. 파키스탄을 자극할 것으로 보도되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찰리급 잠수함</span></a></li> <li><a><span>2</span> <span>SSBN</span></a></li> <li><a><span>3</span> <span>원자로</span></a></li> <li><a><span>4</span> <span>미사일</span></a></li> <li><a><span>5</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6</span> <span>더 보기</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찰리급 잠수함</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인도는 1988년 부터 1991년까지 <a>소련</a>으로 부터 <a>찰리급 잠수함</a>을 <a>리스</a>했다. 아리한트급은 찰리2급과 매우 닮았다고 알려져 있다. 찰리2급은 찰리1급 동체 후미 8 m를 연장하여, 사거리 110 km인 <a>P-120 말라킷</a> 미사일 8발을 탑재했었다. </p> <h2><span>SSBN</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핵잠수함에는 어뢰만 발사할 수 있는 <a>SSN</a>과 핵탄도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a>SSBN</a>이 있다. 세계 최초의 핵잠수함이자 미국 최초의 핵잠수함 <a>USS 노틸러스 (SSN-571)</a>는 <a>SSN</a>이었다. 소련 최초의 핵잠수함인 <a>노벰버급 잠수함</a>도 <a>SSN</a>이었다. 반면에 프랑스 최초의 핵잠수함인 <a>르두타블함</a>은 <a>SSBN</a>이었다. 인도 최초의 핵잠수함 아리한트함은 <a>SSBN</a>이다. </p><p><a>한국</a>과 <a>브라질</a>이 핵잠수함 건조를 추진하고 있는데(?), <a>SSN</a>을 계획중이다. 두 나라 모두 프랑스 <a>바라쿠다급 잠수함</a>의 기술을 도입하려고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프랑스는 최초의 핵잠수함 <a>르두타블급 잠수함</a>(SSBN)을 최근 <a>트리옹팡급 잠수함</a>(SSBN)으로 교체했다. 프랑스에는 SSN도 있는데, <a>루비급 잠수함</a>이다. 이 루비급을 차기 SSN으로 교체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a>바라쿠다급 잠수함</a>이다. </p><p>인도가 아리한트함 제작에 러시아와 프랑스의 기술을 도입하였다고 하는데, 한국과 브라질도 최초의 핵잠수함 건조를 위해 러시아와 프랑스의 기술을 도입하려 한다는 보도가 여러차례 있었다. 2009년 브라질 룰라 대통령은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과 핵잠수함 수입계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러시아와도 협상을 했었다. 브라질은 1970년대 부터 핵잠수함 개발을 해왔다. 한국은 1993년 러시아로 부터 핵잠수함 설계도를 입수했으며, 러시아 핵잠수함 원자로의 기술을 완전히 이전받아 <a>스마트 원자로</a> 개발을 완료했다. 대체적으로 미국은 핵확산에 매우 소극적이고 적대적인 반면에, 러시아와 프랑스는 핵확산에 매우 적극적이다. 파키스탄, 이란, 북한 등의 핵개발에는 러시아 또는 프랑스의 핵기술이 이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p><p>한국은 박정희 정부 당시 프랑스 핵무기 연구소에서 고폭실험을 완료했으며, 프랑스 설계도로 한국에 플루토늄 핵폭탄 공장을 지으려다가 미국에 의해 저지되었으며, 프랑스 대통령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미국의 핵확산 저지에 대해 유감을 표시한 바 있다. </p><p>한편, <a>일본</a>은 한국이 <a>스마트 원자로</a>를 개발 완료하기 한 해 전에 동일한 출력의 원자로 개발을 완료했다. </p><p><a>SSN</a>은 <a>공격원잠</a>이라고 부르는데, 어뢰관만 탑재하나, 어뢰관에서 발사되는 <a>엑조세</a> 미사일, <a>하푼 미사일</a> 등의 대함미사일과, <a>토마호크 미사일</a>을 발사할 수 있다. 특히 어뢰관에서 발사되는 토마호크 미사일은 사거리 3000 km의 저속 저고도 미사일로서, <a>SSN</a>의 지상 핵공격이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a>SSN</a>은 지상 핵공격 보다는 어뢰를 통한 항공모함 함대 방어가 주임무인 잠수함이다. 디젤 잠수함은 잠수한 상태에서 고속운행이 불가능하다. 4노트 8노트 정도의 저속으로만 운행이 가능하고, 1주일마다 수면으로 부상해야 한다. 반면에, <a>SSN</a>은 수중에서 무제한으로 30노트 이상의 고속운행이 가능하다. 따라서, 항공모함 함대가 20노트 정도의 최고속도로 운행을 할 때, 그보다 앞서서 나아가서 함대를 보호할 수도 있는, 함대를 수중에서 방어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a>SSN</a>을 공격형 원잠이라고 부른다. </p><p><a>SSBN</a>은 <a>전략원잠</a>이라고 부르며, 고속 주행이나 항공모함 함대 방어가 아니라, 별도로 1대가 따로따로 작전한다. 적 영토 근처의 해상에서 오랜기간 잠복해 있으며, 적의 핵공격에 대응해 보복 핵공격을 하는 것이 주임무이다. 핵잠수함은 디젤 잠수함과 달리 수면 부상을 할 필요가 없어서 수개월 이상 수면에 떠오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a>SSBN</a>은 잠복한 핵미사일 기지로서의 역할을 한다. 프랑스는 적의 공격을 야기할 지상 핵미사일 기지와 항공기 장착용 핵무기를 모두 없앴다. 오직 4척의 <a>트리옹팡급 잠수함</a>(SSBN) 보유를 통해서, 2대는 항시 공해상에 숨어있다가, 유사시에 적에게 핵공격을 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한 대의 <a>트리옹팡급 잠수함</a>(SSBN)에는 16발의 핵미사일이 장착되어 있으며, 핵미사일에는 6발의 핵탄두가 들어있어서, 총 96발의 핵탄두를 탑재하고 있다. </p> <h2><span></span><span>원자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배수량 6천톤의 아리한트의 원자로는 열출력 83MWt의 러시아 기술의 경수로인데, 한국의 열출력 65MWt의 러시아 기술의 경수로인 <a>스마트 실증로</a>와 비교된다. 한국은 배수량 4천톤인 <a>KSS-III</a> 잠수함을 계획중이다. </p> <h2><span></span><span>미사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아리한트는 사거리 700km의 정밀유도 탄도 미사일인 <a>K-15 미사일</a> 12발을 탑재한다. 한국은 2012년 사거리 800 km의 탄도 미사일 개발에 착수했다.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a>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amp;mid=sec&amp;sid1=140&amp;oid=001&amp;aid=0002782398</a></span> </li> </ol></div></div> <h2><span></span><span>더 보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네르파함</a> - 인도가 <a>러시아</a>에서 <a>리스</a>한 핵잠수함. 아리한트함은 <a>SSBN</a>인데 비해, 네르파함은 <a>SSN</a>이다.</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리한트급_잠수함&amp;oldid=22744662</a>"</div> <div><div><a>분류</a>: <ul><li><a>인도의 잠수함</a></li><li><a>핵추진 잠수함</a></li><li><a>잠수함 함급</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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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뢰관에서 발사되는 사거리 3000 km의 저속 저고도 미사일로 SSN의 지상 핵공격이 가능한 것은?
토마호크 미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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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뢰관에서 발사되는 사거리 3000 km의 저속 저고도 미사일로 SSN의 지상 핵공격이 가능한 것은?", "잠수한 상태에서 고속운행이 불가능한 잠수함은?", "SSN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토마호크 미사일의 사거리는?", "SSN 잠수함이 수중에서 무제한으로 낼 수 있는 속도는?", "토마호크 미사일은 사거리가 몇 km인가?", "잠수한 상태에서 고속운행이 불가능한 잠수함은?", "디젤 잠수함을 몇 주 간격으로 수면으로 부상해야 하는가?", "지상 핵미사일 기지와 항공기 장착용 핵무기를 모두 없앤 나라는 어디인가?", "한 대의 트리옹팡급 잠수함에 탑재되어 있는 핵 탄두는 총 발인가?", "프랑스가 소유한 SSBN 잠수함은 몇 척인가?", "프랑스가 보유한 SSBN 잠수함 한 척에 장착된 핵미사일은 몇 발인가?", "디젤 잠수함과 다르게 수면 부상을 할 필요가 없는 잠수함은?", "한 대의 트리옹창급 잠수함에는 몇 발의 핵미사일이 장착되어 있는가?", "핵미사일에는 몇 개의 핵탄두가 들어있는가?" ]
<!DOCTYPE html> 아리한트급 잠수함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리한트급 잠수함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caption>아리한트급 SSBN </caption> <tbody><tr> <td colspan="2"> </td></tr> <tr> <th colspan="2">개요 </th></tr> <tr> <th>함종 </th> <td>SSBN </td></tr> <tr> <th>함급명 </th> <td>아리한트 </td></tr> <tr> <th>제작자 </th> <td>힌두스탄 조선소 </td></tr> <tr> <th>운용자 </th> <td> 인도 </td></tr> <tr> <th>진수일 </th> <td>1번함 2009년 </td></tr> <tr> <th>배치일 </th> <td>1번함 2012년 </td></tr> <tr> <th>계획수 </th> <td>4 </td></tr> <tr> <th colspan="2">특징 </th></tr> <tr> <th>배수량 </th> <td>6000 t </td></tr> <tr> <th>전장 </th> <td>112 m </td></tr> <tr> <th>선폭 </th> <td>15 m </td></tr> <tr> <th>흘수 </th> <td>10 m </td></tr> <tr> <th>추진 </th> <td>83MWt 경수로 1기, 40% 고농축우라늄 </td></tr> <tr> <th>속력 </th> <td>수상 15 노트 (28 km/h) 수중 24 노트 (44 km/h) </td></tr> <tr> <th>잠수 깊이 </th> <td>300 m </td></tr> <tr> <th>항속거리 </th> <td>무제한, 식량보급시 </td></tr> <tr> <th>승조원 </th> <td>95명 </td></tr> <tr> <th>무장 </th> <td>6 X 533mm 어뢰관 X 64 X 수직발사관*K-4 미사일 4발, 사거리 5000 km*K-15 미사일 12발, 사거리 700 km </td></tr> </tbody></table> 아리한트급 잠수함은 인도가 처음으로 만든 핵잠수함(SSBN)으로, 이로 인하여 인도는 상임이사국외의 국가 중 유일한 핵잠수함 보유국이 되었다. K-15 SLBM을 보유한 나라 또한 상임이사국 외에는 인도밖에 없다. 1번함 아리한트함은 2009년 7월 26일 진수되었다. 아리한트는 섬멸자라는 뜻이다.[1] 1999년 7월 26일 인도는 파키스탄과 카슈미르 지역을 놓고 카길전쟁에서 승리한 승전기념일이다. 파키스탄을 자극할 것으로 보도되었다. 목차 1 찰리급 잠수함 2 SSBN 3 원자로 4 미사일 5 각주 6 더 보기 찰리급 잠수함[편집] 인도는 1988년 부터 1991년까지 소련으로 부터 찰리급 잠수함을 리스했다. 아리한트급은 찰리2급과 매우 닮았다고 알려져 있다. 찰리2급은 찰리1급 동체 후미 8 m를 연장하여, 사거리 110 km인 P-120 말라킷 미사일 8발을 탑재했었다. SSBN[편집] 핵잠수함에는 어뢰만 발사할 수 있는 SSN과 핵탄도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SSBN이 있다. 세계 최초의 핵잠수함이자 미국 최초의 핵잠수함 USS 노틸러스 (SSN-571)는 SSN이었다. 소련 최초의 핵잠수함인 노벰버급 잠수함도 SSN이었다. 반면에 프랑스 최초의 핵잠수함인 르두타블함은 SSBN이었다. 인도 최초의 핵잠수함 아리한트함은 SSBN이다. 한국과 브라질이 핵잠수함 건조를 추진하고 있는데(?), SSN을 계획중이다. 두 나라 모두 프랑스 바라쿠다급 잠수함의 기술을 도입하려고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프랑스는 최초의 핵잠수함 르두타블급 잠수함(SSBN)을 최근 트리옹팡급 잠수함(SSBN)으로 교체했다. 프랑스에는 SSN도 있는데, 루비급 잠수함이다. 이 루비급을 차기 SSN으로 교체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바라쿠다급 잠수함이다. 인도가 아리한트함 제작에 러시아와 프랑스의 기술을 도입하였다고 하는데, 한국과 브라질도 최초의 핵잠수함 건조를 위해 러시아와 프랑스의 기술을 도입하려 한다는 보도가 여러차례 있었다. 2009년 브라질 룰라 대통령은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과 핵잠수함 수입계약을 정식으로 체결했다. 러시아와도 협상을 했었다. 브라질은 1970년대 부터 핵잠수함 개발을 해왔다. 한국은 1993년 러시아로 부터 핵잠수함 설계도를 입수했으며, 러시아 핵잠수함 원자로의 기술을 완전히 이전받아 스마트 원자로 개발을 완료했다. 대체적으로 미국은 핵확산에 매우 소극적이고 적대적인 반면에, 러시아와 프랑스는 핵확산에 매우 적극적이다. 파키스탄, 이란, 북한 등의 핵개발에는 러시아 또는 프랑스의 핵기술이 이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은 박정희 정부 당시 프랑스 핵무기 연구소에서 고폭실험을 완료했으며, 프랑스 설계도로 한국에 플루토늄 핵폭탄 공장을 지으려다가 미국에 의해 저지되었으며, 프랑스 대통령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러한 미국의 핵확산 저지에 대해 유감을 표시한 바 있다. 한편, 일본은 한국이 스마트 원자로를 개발 완료하기 한 해 전에 동일한 출력의 원자로 개발을 완료했다. SSN은 공격원잠이라고 부르는데, 어뢰관만 탑재하나, 어뢰관에서 발사되는 엑조세 미사일, 하푼 미사일 등의 대함미사일과,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다. 특히 어뢰관에서 발사되는 토마호크 미사일은 사거리 3000 km의 저속 저고도 미사일로서, SSN의 지상 핵공격이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SSN은 지상 핵공격 보다는 어뢰를 통한 항공모함 함대 방어가 주임무인 잠수함이다. 디젤 잠수함은 잠수한 상태에서 고속운행이 불가능하다. 4노트 8노트 정도의 저속으로만 운행이 가능하고, 1주일마다 수면으로 부상해야 한다. 반면에, SSN은 수중에서 무제한으로 30노트 이상의 고속운행이 가능하다. 따라서, 항공모함 함대가 20노트 정도의 최고속도로 운행을 할 때, 그보다 앞서서 나아가서 함대를 보호할 수도 있는, 함대를 수중에서 방어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SSN을 공격형 원잠이라고 부른다. SSBN은 전략원잠이라고 부르며, 고속 주행이나 항공모함 함대 방어가 아니라, 별도로 1대가 따로따로 작전한다. 적 영토 근처의 해상에서 오랜기간 잠복해 있으며, 적의 핵공격에 대응해 보복 핵공격을 하는 것이 주임무이다. 핵잠수함은 디젤 잠수함과 달리 수면 부상을 할 필요가 없어서 수개월 이상 수면에 떠오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SSBN은 잠복한 핵미사일 기지로서의 역할을 한다. 프랑스는 적의 공격을 야기할 지상 핵미사일 기지와 항공기 장착용 핵무기를 모두 없앴다. 오직 4척의 트리옹팡급 잠수함(SSBN) 보유를 통해서, 2대는 항시 공해상에 숨어있다가, 유사시에 적에게 핵공격을 하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한 대의 트리옹팡급 잠수함(SSBN)에는 16발의 핵미사일이 장착되어 있으며, 핵미사일에는 6발의 핵탄두가 들어있어서, 총 96발의 핵탄두를 탑재하고 있다. 원자로[편집] 배수량 6천톤의 아리한트의 원자로는 열출력 83MWt의 러시아 기술의 경수로인데, 한국의 열출력 65MWt의 러시아 기술의 경수로인 스마트 실증로와 비교된다. 한국은 배수량 4천톤인 KSS-III 잠수함을 계획중이다. 미사일[편집] 아리한트는 사거리 700km의 정밀유도 탄도 미사일인 K-15 미사일 12발을 탑재한다. 한국은 2012년 사거리 800 km의 탄도 미사일 개발에 착수했다. 각주[편집]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amp;mid=sec&amp;sid1=140&amp;oid=001&amp;aid=0002782398 더 보기[편집] 네르파함 - 인도가 러시아에서 리스한 핵잠수함. 아리한트함은 SSBN인데 비해, 네르파함은 SSN이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리한트급_잠수함&amp;oldid=22744662" 분류: 인도의 잠수함핵추진 잠수함잠수함 함급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ČeštinaEnglishفارسیFrançaisעבריתहिन्दीPolskiРусскийతెలుగు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0월 10일 (수) 00:5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아리한트급 잠수함 요약** - **개요**: 아리한트급 잠수함은 인도가 최초로 개발한 핵잠수함(SSBN)으로, 인도를 상임이사국 외의 유일한 핵잠수함 보유국으로 만들었다. 1번함인 아리한트는 2009년 진수되었고, 2012년에 배치되었다. - **제작 및 특징**: 이 잠수함은 힌두스탄 조선소에서 제작되었으며, 배수량은 6,000톤, 길이는 112m, 폭은 15m이다. 원자로는 러시아 기술의 경수로를 사용하며, 수중에서 최대 24노트(44 km/h)의 속도로 운항할 수 있다. 승조원은 95명이다. - **무장**: 아리한트는 6개의 어뢰관과 64개의 수직발사관을 갖추고 있으며, K-4 미사일(사거리 5,000 km) 4발과 K-15 미사일(사거리 700 km) 12발을 탑재할 수 있다. - **배경 및 갈등**: 아리한트급 잠수함의 개발은 인도의 군사적 자립을 목표로 하며, 파키스탄과의 긴장 관계 속에서 전략적 억제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아리한트의 진수일인 7월 26일은 인도의 카길 전쟁 승전기념일로, 이로 인해 파키스탄을 자극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다. - **기술적 유사성**: 아리한트급은 과거 인도가 소련으로부터 리스한 찰리급 잠수함과 유사한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인도는 러시아와 프랑스의 기술을 도입하여 아리한트를 개발하였다. 이 잠수함은 인도의 해양 방어 및 핵 억제 전략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다음 텍스트를 읽고 독자가 처음 접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해줘. 주요 인물, 사건, 배경, 갈등 구조 등을 빠짐없이 담되, 문장은 간결하게 유지해줘.
박재영_(1988년)
https://ko.wikipedia.org/wiki/박재영_(1988년)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박재영 (1988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박재영 (1988년)</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tbody><tr> <th colspan="2"><big>박재영</big> </th></tr> <tr> <th colspan="2">기본 정보 </th></tr> <tr> <th>국적 </th> <td>대한민국 </td></tr> <tr> <th>출생 </th> <td><a>1988년</a> <a>7월 7일</a> (31세)<br><a>전라남도</a> <a>고흥군</a> </td></tr> <tr> <th colspan="2">프로게이머 정보 </th></tr> <tr> <th>종족 </th> <td><a>프로토스</a> </td></tr> <tr> <th>아이디 </th> <td>Tempest </td></tr> <tr> <th>별명 </th> <td>먹룡, 템페神<sup><a>&#91;1&#93;</a></sup>, 쾌남<sup><a>&#91;1&#93;</a></sup>, 템폐기물<sup><a>&#91;1&#93;</a></sup> </td></tr> <tr> <th>소속팀 </th> <td><a>KT 롤스터</a> (2007-03-12 ~ 2011-11-22) </td></tr> </tbody></table> <p><b>박재영</b>(<a>1988년</a> <a>7월 7일</a> ~ )은 <a>대한민국</a>의 전직 <a>스타크래프트</a> <a>프로게이머</a>이다. Tempest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며, 종족은 <a>프로토스</a>이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참조</span></a></li> <li><a><span>2</span> <span>33킬 드라군</span></a></li> <li><a><span>3</span> <span>경력</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참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아마추어 시절에는 <a>허영무</a>·<a>도재욱</a>과 함께 WEST서버 3대 토스로 꼽혔다.<sup><a>&#91;1&#93;</a></sup> 2007년 3월 12일 상반기 드래프트에서 KTF 매직엔스(현 KT 롤스터)의 3차 지명으로 입단하였다.<sup><a>&#91;2&#93;</a></sup> 입단 후 2년 동안 <a>강민</a>의 지도를 받으면서 많은 영향을 받고 프로게이머로 성장했다.<sup><a>&#91;3&#93;</a></sup> </p><p>2008 TG삼보-인텔 곰TV클래식에서는 <a>서지훈</a>을 이기고 본선에 진출했으며,<sup><a>&#91;4&#93;</a></sup> 32강에서는 전회 우승자인 <a>이제동</a>을 2:1로 탈락시키는 파란을 일으켰다.<sup><a>&#91;5&#93;</a></sup> 그러나 <a>윤용태</a>에게 1:2로 지며 16강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sup><a>&#91;6&#93;</a></sup> </p><p>2009년에는 클럽데이·로스트사가 MSL 본선 32강에서 연속으로 당시 <a>스타리그</a> 준우승 2회에 빛나는 <a>정명훈</a>을 탈락시켰다. 로스트사가 MSL에서는 처음 정명훈에게 졌으나 <a>변형태</a>를 이겨 최종전의 기회를 얻었고, 여기에서 다시 만난 정명훈을 이겨 16강에 진출했다.<sup><a>&#91;7&#93;</a></sup> 이때의 경험 때문에 정명훈은 다음 MSL 본선에 진출하고 행한 인터뷰에서 박재영을 우승에 가장 강력한 장애물로 언급했다.<sup><a>&#91;8&#93;</a></sup> 16강에서는 당시 하락세이던 <a>이윤열</a>을 만났으나 첫 경기를 내주면서 1:2로 8강 진출에 실패했다. 박재영은 이때 이겼다면 프로게이머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추억했다.<sup><a>&#91;3&#93;</a></sup> </p><p>박재영의 플레이는 마치 강민의 뒤를 이은 듯한 승부수를 던지는 경기가 많았으며, 특히 물량면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고 있다.<sup><a>&#91;5&#93;</a></sup> </p><p><a>이성은</a>, <a>유준희</a>, <a>한동욱</a>에게 전적이 밀리는 반면 <a>신상문</a>, <a>이제동</a> 등 강자들을 잘 꺾는 면을 보이고 있다. </p><p>SK텔레콤의 <a>도재욱</a>이 자주 보여주는 대규모 물량 유닛 운용을 자주 보여주곤 한다. </p><p>그러나 결정적일 때 승리를 하지 못해 아쉬움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간간히 1승씩을 해주었다. </p><p>김민철과 마찬가지로 정명훈을 MSL에서 두번이나 탈락시키는 등 적지 않은 활약을 하였었다. </p><p>10-11 프로리그에서는 승리 없이 7연패라는 극도의 부진에 빠졌다. 2011년 1월 8일에는 상대전적에서 우세한 <a>정명훈</a>을 프로토스가 테란에게 우세한 맵 아즈텍에서 상대했으나 연패를 끊어내지 못했다.<sup><a>&#91;9&#93;</a></sup> 5월 23일 마찬가지로 승리가 없는 오세기와 맞붙어 승기를 잡았으나 오세기의 드롭에 본진 넥서스가 파괴당했으며 자신은 오세기가 공중으로 띄워 피신시킨 건물을 파괴할 수 없어 시즌 첫 무승부를 기록하는 해프닝을 겪었고, 재경기에서는 오세기를 속여내며 드디어 첫 승리를 거두었는데 공격력·방어력·실드 업그레이드가 전부 된 캐리어라는 진기한 세리머니를 보여줬다.<sup><a>&#91;10&#93;</a></sup><sup><a>&#91;11&#93;</a></sup> 이 승리 한 달 전부터 컴퓨터에서 스타크래프트를 삭제하고 게임에만 집중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sup><a>&#91;1&#93;</a></sup> </p><p>2011년 6월 24일 스타리그 2011 듀얼토너먼트 B조 경기에서는 2경기에서 <a>신동원</a>에 패한 뒤, 패자전에서 <a>어윤수</a>와 맞붙어 패했는데, 어윤수와의 경기에서의 패배 뒤 평점 F라는 좋지 않은 결과가 있었다. 당시 잠도 조금 자고 절제된 생활을 하며 게임에만 집중해 경기력을 끌어올렸었고 완벽한 전략도 준비했었지만, 예상 외의 초라한 결과를 받아들자 결국 은퇴를 결심했다. 10-11 프로리그가 소속팀 KT의 우승으로 끝난 후에는 군 입대와 진로 문제 때문에 은퇴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프로게이머를 쉽게 포기할 수 없어서 갈팡질팡하면서 새 시즌이 시작하기 전까지 결단하지 못하고 팀 행사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결국 2011년 11월 22일, 은퇴를 선언했다. 자신의 프로게이머로서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재미있는 경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점을 들었고, 그 성향이 이기는 경기를 해야 하고 틀에 박힌 게임을 하는 것과 충돌하는 것을 아쉬워했다.<sup><a>&#91;12&#93;</a></sup> </p> <h2><span></span><span>33킬 드라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2009년 1월 3일, <a>클럽데이 온라인 MSL 2008</a> 서바이벌 토너먼트 12조 1경기에 출전한 박재영은 MBC게임의 <a>이재호</a>와 대결을 펼쳤다. 당시 이재호는 경기초반 전진 2배럭 전략으로 박재영의 본진에 큰 피해를 줬다. 박재영은 이재호가 전진배럭이나 BBS를 활용할 수 있다고 예측했고, 무난하게 막을 수 있는 1게이트웨이-사이버네틱스 코어 빌드를 택했다. 그러나 프로브 비비기<sup><a>&#91;13&#93;</a></sup>에 실패하면서 쉽게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파일런까지 깨지면서 고전하게 됐다. 이에 박재영은 드라군 1기로 이재호의 마린들을 한 기씩 끊어냈고, 실드 배터리를 지어 드라군의 실드를 회복시켜 악착같이 살려가며 경기를 이어나갔다. 이 드라군은 끝까지 살아남아 33킬을 올렸고,<sup><a>&#91;14&#93;</a></sup> 질럿과 드라군을 각각 1기씩 증원해 기어이 이재호의 병력을 모조리 전멸시키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박재영은 2세트에서도 이재호를 이기고 서바이벌 토너먼트를 통과,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sup><a>&#91;15&#93;</a></sup><sup><a>&#91;16&#93;</a></sup> </p> <h2><span></span><span>경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2006년 10월</a> 엘리트 학생복 스쿨리그 2차시즌 4강</li> <li><a>2006년 11월</a> 제26회 커리지 매치 입상</li> <li><a>2008년 10월</a> 클럽데이 온라인 MSL 16강</li> <li><a>2008년 11월</a> 곰TV TG삼보-인텔 클래식 2008 시즌2 16강</li> <li><a>2009년 1월</a> 로스트사가 MSL 2009 16강</li> <li><a>2009년 6월</a> 곰TV TG삼보-인텔 클래식 2008 시즌3 8강</li> <li><a>2010년 10월</a> 박카스 스타리그 2010 36강</li> <li><a>2011년</a> 진에어 스타리그 2011 24강</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 <sup><a>마</a></sup></span> <span><cite>최민숙 (2011년 5월 27일). <a>&#8220;&#91;초인종&#93;KT 박재영, “재미와 즐거움을 드리는 플레이로 보답할게요”&#8221;</a>. &#12298;포모스&#12299; (포모스). 2017년 5월 8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17년 5월 8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김동현 (2007년 3월 13일). <a>&#8220;상반기 프로게이머 신인 드래프트 50명 중 37명 '안착<span>'</span>&#8221;</a>. &#12298;게임동아&#12299; (게임동아)<span>. 2017년 5월 5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cite>남윤성 (2011년 11월 22일). <a>&#8220;&#91;피플&#93; 은퇴 박재영 "제2막의 성공 사례 쓸게요<span>"</span>&#8221;</a>. &#12298;데일리e스포츠&#12299; (데일리게임). 2017년 5월 30일에 <a>보존된 문서</a><span>.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관리자 (2008년 11월 3일). <a>&#8220;이제동, 곰TV 클래식 32강 간다&#8221;</a>. &#12298;게임어바웃&#12299; (서울시 마포구 만리재로 15,704호: D&amp;K미디어)<span>.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cite><a>&#8220;곰TV 클래식, 프로토스 황금시대 개막&#8221;</a>. 2008년 11월 30일<span>. 2017년 5월 31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여우’ 박성균, 적룡 제압하며 클래식 8강!&#8221;</a>. 2008년 12월 21일<span>. 2017년 5월 31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오상직 (2009년 1월 31일). <a>&#8220;&#91;로스트사가&#93; 박재영 "정명훈과의 악연 신기해<span>"</span>&#8221;</a>. &#12298;데일리e스포츠&#12299; (데일리게임)<span>.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91;서바이버&#93; SK텔레콤 정명훈 "박재영만 안 만나면 우승<span>"</span>&#8221;</a>. &#12298;디지털타임스&#12299; (디지털타임스). www.dailyesports.com. 2011년 11월 22일. 2017년 5월 30일에 <a>보존된 문서</a><span>.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남윤성 (2001년 1월 8일). <a>&#8220;&#91;신한은행&#93; SK텔레콤 정명훈, 박재영 캐리어 잡고 3킬!&#8221;</a>. &#12298;데일리e스포츠&#12299; (데일리게임)<span>.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이소라 (2011년 5월 23일). <a>&#8220;&#91;신한은행&#93; KT 박재영-MBC게임 오세기, 이번 시즌 첫 무승부 판정&#8221;</a>. 데일리이스포츠<span>. 2017년 5월 9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김원용 (2011년 5월 23일). <a>&#8220;&#91;신한은행&#93; KT 박재영, 오세기 꺾고 시즌 첫 승!&#8221;</a>. 데일리이스포츠<span>. 2017년 5월 9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은퇴 발표한 KT 박재영, “어릴 적 꿈을 이뤄 행복했었다”&#8221;</a>. &#12298;포모스&#12299; (포모스). 2011년 11월 22일. 2017년 5월 8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17년 5월 8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스타크래프트의 공인된 버그 플레이로, 일꾼(SCV·드론·프로브) 부대에 멀리 있는 미네랄을 채취하도록 명령하면 한 점으로 뭉쳐 공격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술이다.</span> </li> <li><span><a>↑</a></span> <span>32킬이라고도 하는데, 경기 영상을 보면 이재호가 gg를 치고 나간 후 이 드라군이 마린 1명을 더 죽이면서 33킬을 달성한다. gg 시점에서 경기가 종료됐다고 보면 32킬이 된다.</span> </li> <li><span><a>↑</a></span> <span><cite>이재석 (2009년 1월 3일). <a>&#8220;&#91;서바이버&#93; KTF 박재영, 드라군 33킬 혁명 달성!&#8221;</a>. &#12298;데일리이스포츠&#12299; (데일리게임)<span>. 2017년 5월 5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심현 (2009년 1월 3일). <a>&#8220;&#91;서바이버&#93;박재영, “이름을 들으면 무게가 느껴지는 선수가 되겠다”&#8221;</a>. &#12298;포모스&#12299; (포모스)<span>. 2017년 5월 5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ol></div></div> <div><table><tbody><tr><th colspan="3"><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span><a><img></a></span> <a>대한민국</a>의 <a>스타크래프트</a> 리그</div></th></tr><tr><th>리그</th><td><div></div><table><tbody><tr><th>개인전</th><td><div> <ul><li><a>스타리그</a></li> <li><a>MBC게임 스타리그</a></li> <li><a>곰TV 클래식</a></li> <li><a>소닉 스타리그</a><sup>1</sup></li> <li><a>아프리카TV 스타리그</a><sup>1</sup></li> <li><a>SSL 시리즈</a><sup>1</sup></li></ul> </div></td></tr><tr><th>단체전</th><td><div> <ul><li><a>프로리그</a> (1군)</li> <li><a>드림리그</a> (2군)</li> <li><a>MBC게임 팀리그</a></li> <li><a>위너스리그</a></li> <li><a>경남 - STX컵 마스터즈</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d rowspan="5"><div><a><img></a></div></td></tr><tr><th>조직</th><td><div></div><table><tbody><tr><th><a>협회</a></th><td><div> <ul><li><a>한국e스포츠협회</a></li></ul> </div></td></tr><tr><th><a>게임 개발사</a></th><td><div> <ul><li><a>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a></li></ul> </div></td></tr><tr><th><a>게임 배급사</a></th><td><div> <ul><li><a>한빛소프트</a></li></ul> </div></td></tr><tr><th><a>방송국</a></th><td><div> <ul><li><a>OGN</a></li> <li><a>MBC 게임</a></li> <li><a>곰TV</a></li> <li><a>아프리카TV</a></li> <li><a>SPOTV GAMES</a></li></ul> </div></td></tr><tr><th><a>경기장</a></th><td><div> <ul><li><a>용산 e-Sports 스타디움</a> (온게임넷→OGN, 철거됨)</li> <li><a>히어로센터</a> (MBC 게임, 철거됨)</li> <li><a>곰TV 목동 스튜디오</a> (곰TV, 철거됨)</li> <li><a>ITV 랭킹전</a> <a>iTV 스튜디오</a>/<a>인천 종합문화예술회관 야외 특설무대</a>(iTV 경인방송, 철거됨)</li> <li><a>프릭 업 스튜디오</a> (아프리카TV)</li> <li><a>넥슨 아레나</a> (SPOTV GAMES)</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방송인</th><td><div></div><table><tbody><tr><th><a>OGN</a></th><td><div> <ul><li><a>정소림</a></li> <li><a>엄재경</a></li> <li><a>김정민</a></li></ul> </div></td></tr><tr><th><a>아프리카TV</a></th><td><div> <ul><li><a>박상현</a></li> <li><a>이승원</a></li> <li><a>임성춘</a></li></ul> </div></td></tr><tr><th><a>SPOTV GAMES</a></th><td><div> <ul><li><a>김철민</a></li> <li><a>한승엽</a></li> <li><a>이성은</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과거 게임단</th><td><div> <ul><li><a>KT 롤스터</a></li> <li><a>STX SouL</a></li> <li><a>웅진 스타즈</a></li> <li><a>SK텔레콤 T1</a></li> <li><a>CJ 엔투스</a></li> <li><a>삼성 칸</a></li> <li><a>제8프로게임단</a></li> <li><a>공군 ACE</a></li> <li><a>이스트로</a></li> <li><a>위메이드 폭스</a></li> <li><a>온게임넷 스파키즈</a></li> <li><a>MBC게임 히어로</a></li> <li><a>화승 OZ</a></li></ul> </div></td></tr><tr><th>기타</th><td><div> <ul><li><a>e스포츠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 명예의 전당</a></li> <li><a>골든 마우스</a></li> <li><a>MSL 금배지</a></li> <li><a>KeSPA컵</a></li></ul> </div></td></tr><tr><td colspan="3"><div><sup>1</sup>KeSPA 비공인 리그<br>2012년 9월 22일부로 대한민국의 모든 KeSPA 공인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완전히 종료됨. 단, KeSPA 비공인 리그는 열리고 있음.</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박재영_(1988년)&amp;oldid=23019106</a>"</div> <div><div><a>분류</a>: <ul><li><a>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a></li><li><a>1988년 태어남</a></li><li><a>살아있는 사람</a></li><li><a>고흥군 출신</a></li><li><a>KT 롤스터의 선수</a></li><li><a>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a></li><li><a>프로토스 선수</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ul> <div><span><a>링크 추가</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5일 (목) 03:5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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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영의 소속팀은 어디인가?
K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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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영의 소속팀은 어디인가?", "박재영이 은퇴를 선언한 때는 언제인가?", "박재영 선수가 은퇴를 선언한 날짜는?", "10-11 스타리그의 우승 팀은?", "박재영은 2011년 6월24일 스타리그2011 듀얼토너먼트 B조 경기에서 누구에게 패했나?", "박재영은 언제 은퇴했나?", "2009년 1월 3일 박재영은 누구와 대결하였는가?", "이재호의 소속팀은 어디인가?", "2009년 1월 3일 박재영과 맞붙은 이재호 선수의 소속팀은?", "이재호가 2009년 1월 3일 박재영과의 경기에서 초반에 쓴 전략은?", "박재영은 2009년 1월3일 클럽게이 온라인 MSL2008서바이벌 토너먼트12조 1경기에서 누구와 대결했나?", "당시 이재호의 전략은?" ]
<!DOCTYPE html> 박재영 (1988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재영 (1988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tbody><tr> <th colspan="2">박재영 </th></tr> <tr> <th colspan="2">기본 정보 </th></tr> <tr> <th>국적 </th> <td>대한민국 </td></tr> <tr> <th>출생 </th> <td>1988년 7월 7일 (31세)전라남도 고흥군 </td></tr> <tr> <th colspan="2">프로게이머 정보 </th></tr> <tr> <th>종족 </th> <td>프로토스 </td></tr> <tr> <th>아이디 </th> <td>Tempest </td></tr> <tr> <th>별명 </th> <td>먹룡, 템페神[1], 쾌남[1], 템폐기물[1] </td></tr> <tr> <th>소속팀 </th> <td>KT 롤스터 (2007-03-12 ~ 2011-11-22) </td></tr> </tbody></table> 박재영(1988년 7월 7일 ~ )은 대한민국의 전직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이다. Tempest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며, 종족은 프로토스이다. 목차 1 참조 2 33킬 드라군 3 경력 4 각주 참조[편집] 아마추어 시절에는 허영무·도재욱과 함께 WEST서버 3대 토스로 꼽혔다.[1] 2007년 3월 12일 상반기 드래프트에서 KTF 매직엔스(현 KT 롤스터)의 3차 지명으로 입단하였다.[2] 입단 후 2년 동안 강민의 지도를 받으면서 많은 영향을 받고 프로게이머로 성장했다.[3] 2008 TG삼보-인텔 곰TV클래식에서는 서지훈을 이기고 본선에 진출했으며,[4] 32강에서는 전회 우승자인 이제동을 2:1로 탈락시키는 파란을 일으켰다.[5] 그러나 윤용태에게 1:2로 지며 16강 진출에 만족해야 했다.[6] 2009년에는 클럽데이·로스트사가 MSL 본선 32강에서 연속으로 당시 스타리그 준우승 2회에 빛나는 정명훈을 탈락시켰다. 로스트사가 MSL에서는 처음 정명훈에게 졌으나 변형태를 이겨 최종전의 기회를 얻었고, 여기에서 다시 만난 정명훈을 이겨 16강에 진출했다.[7] 이때의 경험 때문에 정명훈은 다음 MSL 본선에 진출하고 행한 인터뷰에서 박재영을 우승에 가장 강력한 장애물로 언급했다.[8] 16강에서는 당시 하락세이던 이윤열을 만났으나 첫 경기를 내주면서 1:2로 8강 진출에 실패했다. 박재영은 이때 이겼다면 프로게이머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추억했다.[3] 박재영의 플레이는 마치 강민의 뒤를 이은 듯한 승부수를 던지는 경기가 많았으며, 특히 물량면에서 뛰어난 면모를 보이고 있다.[5] 이성은, 유준희, 한동욱에게 전적이 밀리는 반면 신상문, 이제동 등 강자들을 잘 꺾는 면을 보이고 있다. SK텔레콤의 도재욱이 자주 보여주는 대규모 물량 유닛 운용을 자주 보여주곤 한다. 그러나 결정적일 때 승리를 하지 못해 아쉬움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간간히 1승씩을 해주었다. 김민철과 마찬가지로 정명훈을 MSL에서 두번이나 탈락시키는 등 적지 않은 활약을 하였었다. 10-11 프로리그에서는 승리 없이 7연패라는 극도의 부진에 빠졌다. 2011년 1월 8일에는 상대전적에서 우세한 정명훈을 프로토스가 테란에게 우세한 맵 아즈텍에서 상대했으나 연패를 끊어내지 못했다.[9] 5월 23일 마찬가지로 승리가 없는 오세기와 맞붙어 승기를 잡았으나 오세기의 드롭에 본진 넥서스가 파괴당했으며 자신은 오세기가 공중으로 띄워 피신시킨 건물을 파괴할 수 없어 시즌 첫 무승부를 기록하는 해프닝을 겪었고, 재경기에서는 오세기를 속여내며 드디어 첫 승리를 거두었는데 공격력·방어력·실드 업그레이드가 전부 된 캐리어라는 진기한 세리머니를 보여줬다.[10][11] 이 승리 한 달 전부터 컴퓨터에서 스타크래프트를 삭제하고 게임에만 집중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1] 2011년 6월 24일 스타리그 2011 듀얼토너먼트 B조 경기에서는 2경기에서 신동원에 패한 뒤, 패자전에서 어윤수와 맞붙어 패했는데, 어윤수와의 경기에서의 패배 뒤 평점 F라는 좋지 않은 결과가 있었다. 당시 잠도 조금 자고 절제된 생활을 하며 게임에만 집중해 경기력을 끌어올렸었고 완벽한 전략도 준비했었지만, 예상 외의 초라한 결과를 받아들자 결국 은퇴를 결심했다. 10-11 프로리그가 소속팀 KT의 우승으로 끝난 후에는 군 입대와 진로 문제 때문에 은퇴를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렸을 때부터의 꿈인 프로게이머를 쉽게 포기할 수 없어서 갈팡질팡하면서 새 시즌이 시작하기 전까지 결단하지 못하고 팀 행사에도 꾸준히 참여했다. 결국 2011년 11월 22일, 은퇴를 선언했다. 자신의 프로게이머로서의 장점이자 단점으로 재미있는 경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점을 들었고, 그 성향이 이기는 경기를 해야 하고 틀에 박힌 게임을 하는 것과 충돌하는 것을 아쉬워했다.[12] 33킬 드라군[편집] 2009년 1월 3일, 클럽데이 온라인 MSL 2008 서바이벌 토너먼트 12조 1경기에 출전한 박재영은 MBC게임의 이재호와 대결을 펼쳤다. 당시 이재호는 경기초반 전진 2배럭 전략으로 박재영의 본진에 큰 피해를 줬다. 박재영은 이재호가 전진배럭이나 BBS를 활용할 수 있다고 예측했고, 무난하게 막을 수 있는 1게이트웨이-사이버네틱스 코어 빌드를 택했다. 그러나 프로브 비비기[13]에 실패하면서 쉽게 막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파일런까지 깨지면서 고전하게 됐다. 이에 박재영은 드라군 1기로 이재호의 마린들을 한 기씩 끊어냈고, 실드 배터리를 지어 드라군의 실드를 회복시켜 악착같이 살려가며 경기를 이어나갔다. 이 드라군은 끝까지 살아남아 33킬을 올렸고,[14] 질럿과 드라군을 각각 1기씩 증원해 기어이 이재호의 병력을 모조리 전멸시키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박재영은 2세트에서도 이재호를 이기고 서바이벌 토너먼트를 통과, 본선 진출에 성공했다.[15][16] 경력[편집] 2006년 10월 엘리트 학생복 스쿨리그 2차시즌 4강 2006년 11월 제26회 커리지 매치 입상 2008년 10월 클럽데이 온라인 MSL 16강 2008년 11월 곰TV TG삼보-인텔 클래식 2008 시즌2 16강 2009년 1월 로스트사가 MSL 2009 16강 2009년 6월 곰TV TG삼보-인텔 클래식 2008 시즌3 8강 2010년 10월 박카스 스타리그 2010 36강 2011년 진에어 스타리그 2011 24강 각주[편집] ↑ 가 나 다 라 마 최민숙 (2011년 5월 27일). “[초인종]KT 박재영, “재미와 즐거움을 드리는 플레이로 보답할게요””. 《포모스》 (포모스). 2017년 5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5월 8일에 확인함.  ↑ 김동현 (2007년 3월 13일). “상반기 프로게이머 신인 드래프트 50명 중 37명 '안착'”. 《게임동아》 (게임동아). 2017년 5월 5일에 확인함.  ↑ 가 나 남윤성 (2011년 11월 22일). “[피플] 은퇴 박재영 "제2막의 성공 사례 쓸게요"”. 《데일리e스포츠》 (데일리게임). 2017년 5월 30일에 보존된 문서.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  ↑ 관리자 (2008년 11월 3일). “이제동, 곰TV 클래식 32강 간다”. 《게임어바웃》 (서울시 마포구 만리재로 15,704호: D&amp;K미디어).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  ↑ 가 나 “곰TV 클래식, 프로토스 황금시대 개막”. 2008년 11월 30일. 2017년 5월 31일에 확인함.  ↑ “‘여우’ 박성균, 적룡 제압하며 클래식 8강!”. 2008년 12월 21일. 2017년 5월 31일에 확인함.  ↑ 오상직 (2009년 1월 31일). “[로스트사가] 박재영 "정명훈과의 악연 신기해"”. 《데일리e스포츠》 (데일리게임).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  ↑ “[서바이버] SK텔레콤 정명훈 "박재영만 안 만나면 우승"”. 《디지털타임스》 (디지털타임스). www.dailyesports.com. 2011년 11월 22일. 2017년 5월 30일에 보존된 문서.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  ↑ 남윤성 (2001년 1월 8일). “[신한은행] SK텔레콤 정명훈, 박재영 캐리어 잡고 3킬!”. 《데일리e스포츠》 (데일리게임). 2017년 5월 30일에 확인함.  ↑ 이소라 (2011년 5월 23일). “[신한은행] KT 박재영-MBC게임 오세기, 이번 시즌 첫 무승부 판정”. 데일리이스포츠. 2017년 5월 9일에 확인함.  ↑ 김원용 (2011년 5월 23일). “[신한은행] KT 박재영, 오세기 꺾고 시즌 첫 승!”. 데일리이스포츠. 2017년 5월 9일에 확인함.  ↑ “은퇴 발표한 KT 박재영, “어릴 적 꿈을 이뤄 행복했었다””. 《포모스》 (포모스). 2011년 11월 22일. 2017년 5월 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5월 8일에 확인함.  ↑ 스타크래프트의 공인된 버그 플레이로, 일꾼(SCV·드론·프로브) 부대에 멀리 있는 미네랄을 채취하도록 명령하면 한 점으로 뭉쳐 공격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기술이다. ↑ 32킬이라고도 하는데, 경기 영상을 보면 이재호가 gg를 치고 나간 후 이 드라군이 마린 1명을 더 죽이면서 33킬을 달성한다. gg 시점에서 경기가 종료됐다고 보면 32킬이 된다. ↑ 이재석 (2009년 1월 3일). “[서바이버] KTF 박재영, 드라군 33킬 혁명 달성!”. 《데일리이스포츠》 (데일리게임). 2017년 5월 5일에 확인함.  ↑ 심현 (2009년 1월 3일). “[서바이버]박재영, “이름을 들으면 무게가 느껴지는 선수가 되겠다””. 《포모스》 (포모스). 2017년 5월 5일에 확인함.  <table><tbody><tr><th colspan="3">vdeh 대한민국의 스타크래프트 리그</th></tr><tr><th>리그</th><td><table><tbody><tr><th>개인전</th><td> 스타리그 MBC게임 스타리그 곰TV 클래식 소닉 스타리그1 아프리카TV 스타리그1 SSL 시리즈1 </td></tr><tr><th>단체전</th><td> 프로리그 (1군) 드림리그 (2군) MBC게임 팀리그 위너스리그 경남 - STX컵 마스터즈 </td></tr></tbody></table></td><td rowspan="5"></td></tr><tr><th>조직</th><td><table><tbody><tr><th>협회</th><td> 한국e스포츠협회 </td></tr><tr><th>게임 개발사</th><td>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td></tr><tr><th>게임 배급사</th><td> 한빛소프트 </td></tr><tr><th>방송국</th><td> OGN MBC 게임 곰TV 아프리카TV SPOTV GAMES </td></tr><tr><th>경기장</th><td> 용산 e-Sports 스타디움 (온게임넷→OGN, 철거됨) 히어로센터 (MBC 게임, 철거됨) 곰TV 목동 스튜디오 (곰TV, 철거됨) ITV 랭킹전 iTV 스튜디오/인천 종합문화예술회관 야외 특설무대(iTV 경인방송, 철거됨) 프릭 업 스튜디오 (아프리카TV) 넥슨 아레나 (SPOTV GAMES) </td></tr></tbody></table></td></tr><tr><th>방송인</th><td><table><tbody><tr><th>OGN</th><td> 정소림 엄재경 김정민 </td></tr><tr><th>아프리카TV</th><td> 박상현 이승원 임성춘 </td></tr><tr><th>SPOTV GAMES</th><td> 김철민 한승엽 이성은 </td></tr></tbody></table></td></tr><tr><th>과거 게임단</th><td> KT 롤스터 STX SouL 웅진 스타즈 SK텔레콤 T1 CJ 엔투스 삼성 칸 제8프로게임단 공군 ACE 이스트로 위메이드 폭스 온게임넷 스파키즈 MBC게임 히어로 화승 OZ </td></tr><tr><th>기타</th><td> e스포츠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 명예의 전당 골든 마우스 MSL 금배지 KeSPA컵 </td></tr><tr><td colspan="3">1KeSPA 비공인 리그2012년 9월 22일부로 대한민국의 모든 KeSPA 공인 스타크래프트 리그가 완전히 종료됨. 단, KeSPA 비공인 리그는 열리고 있음.</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박재영_(1988년)&amp;oldid=23019106" 분류: 대한민국의 e스포츠 선수1988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고흥군 출신KT 롤스터의 선수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프로토스 선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5일 (목) 03:5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문단 번호 | 핵심 내용 | 키워드 | |------------|------------|---------| | 1 | 박재영의 기본 정보 및 출생 정보 | 박재영, 1988년, 대한민국 | | 2 | 프로게이머로서의 경력 및 소속팀 | 프로게이머, KT 롤스터, Tempest | | 3 | 아마추어 시절과 프로 입단 과정 | 아마추어, KTF 매직엔스, 드래프트 | | 4 | 주요 경기 성과 및 전적 | TG삼보-인텔, 이제동, 정명훈 | | 5 | 플레이 스타일 및 특징 | 물량, 강민, 승부수 | | 6 | 은퇴 결정 과정 및 이유 | 은퇴, 경기력, 꿈 | | 7 | 33킬 드라군 경기 사례 | 드라군, 이재호, 승리 | | 8 | 경력 요약 및 주요 대회 성과 | 스타리그, MSL, 프로리그 | ### 글의 흐름 요약 글은 박재영의 기본 정보로 시작하여, 그의 프로게이머 경력과 소속팀에 대한 설명으로 이어집니다. 이어서 아마추어 시절의 성과와 프로 입단 과정을 다루고, 주요 경기에서의 성과와 플레이 스타일을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은퇴 결정 과정과 그 이유를 언급하며, 33킬 드라군 경기 사례를 통해 그의 기량을 강조합니다. 글은 박재영의 전반적인 경력과 성과를 정리하며 마무리됩니다.
이 글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표 형식으로 요약해줘. 예: {문단 번호, 핵심 내용, 키워드}. 글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요약 마지막에 간단히 설명해줘.
고리치아_백국
https://ko.wikipedia.org/wiki/고리치아_백국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고리치아 백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고리치아 백국</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h colspan="2"><a><img></a><br><small><a>신성 로마 제국</a></small></th></tr><tr><td colspan="2"> 고리치아 백국</td></tr><tr><td colspan="2"> <span>Contea di Gorizia</span> <br> <span>Grafschaft Görz</span></td></tr><tr><td colspan="2"> <table> <tbody><tr> <td><a><span>←</span></a> <a><img></a><br> </td> <td><b>1127년</b> – <b>1747년</b> </td> <td><a><img></a> <a><span>→</span></a><br> </td></tr></tbody></table></td></tr><tr><td colspan="2"> <div> <div> <div><a><img></a></div> <div>국기</div> </div> <div> <div><a><img></a></div> <div>문장</div> </div> </div></td></tr><tr><td colspan="2"> <a><img></a></td></tr><tr><th><a>수도</a></th> <td> <a>고리치아</a> <br> <a>리엔츠</a></td></tr> <tr><th colspan="2"><a>정치</a></th></tr><tr><th><a>정부 형태</a></th> <td> <a>대공제</a></td></tr><tr><th colspan="2"><a>역사</a></th></tr><tr><th>역사</th> <td> &#160;</td></tr><tr><th>&#160;•&#160;<a>마인하르트 폰 괴르츠</a></th> <td> 1127년</td></tr><tr><th>&#160;•&#160;<a>마인하르트 3세</a> <a>티롤</a>을 계승</th> <td> 1253년</td></tr><tr><th>&#160;•&#160;<a>대공국</a>으로 승격</th> <td> 1365년</td></tr><tr><th>&#160;•&#160;<a>합스부르크 가문</a>이 계승</th> <td> 1500년</td></tr><tr><th>&#160;•&#160;<a>오스트리아 관구</a> 참여</th> <td> 1512년</td></tr><tr><th>&#160;•&#160;<a>그라디스카디손초</a>와 재통합</th> <td> 1747년</td></tr><tr><td colspan="2"> <br></td></tr><tr><th colspan="2">기타</th></tr><tr><th><a>국교</a></th> <td> <a>로마 가톨릭교회</a></td></tr> </tbody></table> <p><b>고리치아 백국</b>(<span>Contea di Gorizia</span>)은 <a>신성 로마 제국</a>의 <a>제국 영방 국가</a> 중 하나이며, 1365년부터는 <a>대공국</a>으로 승격했다. 본래는 <a>아퀼레이아 총대주교국</a>의 중재 <a>폭트</a>였던 <a>고리치아 백작</a>들(마인하르트 가문)은 <a>리엔츠</a> 지방과 <a>고리치아</a>(괴르츠)를 근거지로 한 <a>이탈리아</a> 북동부의 <a>프리울리</a> 지방의 일부 <a>영지</a>들을 다스렸다. </p><p>1253년 고리치아 백작들이 <a>티롤 백국</a>을 승계받으면서, 1271년부터 1335년에 남성 후계자가 단절될 때까지 고리치아티롤 가문이 지배했다. 보다 신생 방계 가문이 1500년에 단절될 때까지 고리치아와 리엔츠의 백작령을 다스렸다가, 이후 <a>합스부르크 가문</a>이 계승하게 된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역사</span></a> <ul> <li><a><span>1.1</span> <span>고리치아티롤 가문</span></a></li> <li><a><span>1.2</span> <span>합스부르크 가문</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백작 목록</span></a></li> <li><a><span>3</span> <span>같이 보기</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역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바이에른 공국</a>의 <a>리엔츠</a> 일대의 소유권을 지녔던 <a>마인하르트</a> 귀족 가문의 후손인 <a>마인하르트 1세</a>가 1107년 초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a>아퀼레이아 총대주교국</a>의 관리 <a>폭트</a>였던 그는 <a>고리치아</a>가 포함된 옛 <a>프리울리 변경백국</a>의 넓은 영지를 받게 되었으며, 1127년부터 스스로를 <i>그라프 폰 괴르츠</i>(Graf von Görz, 괴르츠 백작)이라고 칭하였다. </p><p>백국의 국경은 아퀼레이아와 다른 나라들과의 잦은 전쟁으로 지난 4 세기간 자주 변동되었고, 또한 두 주요 중심지를 축으로 영토가 구분되었는데, 하나는 바이에른 선조들의 지역인 <a>리엔츠</a>가 있는 상 <a>드라바 강</a> 위쪽에서 <a>푸스터 계곡</a>의 <a>이니헨</a>까지 이르는 곳이고, 나머지는 <a>프리울리</a>가 있는 고리치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곳이다. </p> <h3><span></span><span>고리치아티롤 가문</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호엔슈타우펜가</a>의 <a>프리드리히 2세</a> 황제의 신하 중 하나였던 마인하르트의 후손인 <a>마인하르트 3세</a>는 <a>바벤부르크 가문</a>이 단절되자, 1248년에 <a>슈타이어마르크</a>의 관리자로 임명된다. 그는 인정한 <a>케른텐 공국</a>에 전쟁을 벌였으나, 1252년 <a>그라이펜부르크</a>에서 <a>베른하르트 폰 슈판하임</a> 공작과 그의 아들 <a>잘츠부르크</a> 대주교 필리프가 이끄는 군대에 패해하고 만다. 그럼에도 마인하르트 3세의 장인인 <a>알베르트 4세</a>가 전투가 벌어진지 1년만에 사망하면서, 그가 <a>티롤 백국</a>을 계승하면서 나라의 힘은 정점에 다다른다. </p> <div><div><a><img></a> <div><div><a></a></div>고리치아 성</div></div></div> <p>1258년에 마인하르트 3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은 물려받은 나라를 1271년까지 처음으로 공동 통치를 하였다. 장남인 <a>마인하르트 4세</a>는 <a>푸스터 계곡</a>의 서쪽 티롤 영지를 가져갔고, 그의 동생인 <a>알베르트 1세</a>는 리엔츠와 고리치아 주변의 마인하르트 선조들의 영지를 차지했다. 고리치아 백작인 알베르트 1세가 사망한 후, 고리치아 백국은 아들들에 의해 다시 분할되어 고리치아 중심지인 "인너 지역" <a>하인리히 3세</a>가, 리엔츠를 중심으로 "아우터 지역" <a>알베르트 2세</a>가 가져갔다. 1323년에 하인리히 3세 백작이 암살당하자, 고리치아 영지는 4개의 국가에 분할되었다. 고리치아 백작은 임시로 <a>트레비소 변경백국</a>의 이탈리아인이 통제했고 <a>파진</a>을 주변으로한 <a>이스트리아 변경백국</a>의 잔류 영지는 <a>알베르트 3세</a>가 1365년에 <a>합스부르크 가문</a>에게 유언을 통해 물려준다. </p> <div><div><a><img></a> <div><div><a></a></div>리엔츠의 <a>뷔르크 성</a></div></div></div> <p>1365년에 <a>마인하르트 6세 폰 괴르츠</a>가 <a>룩셈부르크 가문</a>의 <a>카를 4세</a>에게 <a>대공</a> 작위를 약속받았으며, 그때부터 고리치아 대공국으로 불렸다. 마인하르트 가문은 그럼에도 <a>오스트리아 영지</a>의 합스부르크와 <a>베네치아 공화국</a> 같은 강력한 이웃 국가들로 인해 하향세를 띄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1335년에 케른텐 공국과 <a>크라인 변경백국</a>을, 그리고 1363년에 티롤 백국을 차지하였으며, 리엔츠의 고리치아 잔여 영지도 합스부르크의 "세습 영토"로 분리되었다. 베네치아는 프리울리에 있는 옛 총대주교국의 영토를 정복하여 1434년에 <a>도미니 디 테라페르마</a>에 합병시켰다. 베네치아의 <a>10인 위원회</a>는 인접했던 고리치아를 중심으로 한 "인너 지역"을 <a>이스트리아</a>에 있는 베네치아의 <a>스타토 다 마르</a>에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압박으로 인하여, 고리치아 백작은 리엔츠에 있는 <a>뷔르크 성</a>에 그들의 거점으로 삼았다. </p> <h3><span></span><span>합스부르크 가문</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1429년에 백국은 <a>하인리히 6세 폰 괴르츠</a>의 아래 하나로 재통합되었다. 그의 아들이자 최후의 백작인 <a>레온하르트 폰 괴르츠</a>가 1500년에 사망하였고 베네치아의 권리 주장이 일어났지만, 상속 계약에 따라 백국은 합스부르크 황제 <a>막시밀리안 1세</a>에게 떨어진다. </p><p>리엔츠 지역이 티롤의 <a>왕실 소유지</a>와 같이 관리되는 반면에, 고리치아의 "인너 지역"은 <a>오스트리아 관구</a>의 일부분으로 <a>인너오스트리아</a> 대공이 다스리는 <a>신성 로마 제국</a>의 <a>제국 영방 국가</a>로 남았다. 오스트리아 관구는 <a>소차 강</a> 남쪽으로의 <a>아퀼레이아</a>, <a>코르몬스</a>, <a>두이노</a>와 1511년 제국군에 의해 정복된 베네치아의 옛 요새인 <a>그라디스카디손초</a>가 포함되어 있다. <a>몬팔코네</a>는 1420년에서 1797년까지 베네치아의 고립 영토가 되었다. 1647년에 황제 <a>페르디난트 3세</a>가 고리치아에서 "그라디스카 백국"을 그의 조신인 요한 안톤 폰 <a>에겐베르크</a>를 위해 분리시켜냈다가 1747년에 <a>합스부르크 군주국</a>의 왕실 소유지 중 하나인 <a>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a>으로 재통합된다. </p> <h2><span></span><span>백작 목록</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1459년 <a>잉게람 필사본</a>에 있는 고리치아 가문의 문장</div></div></div> <ul><li><a>푸스터 계곡</a> 백작 마인하르트(Meginhard, 1090년경 사망)</li> <li><a>엥겔베르트 1세</a>(1090년–1122년)</li> <li><a>마인하르트 1세</a>(1122년–1142년)</li> <li><a>하인리히 2세</a>(1142년–1150년)</li> <li><a>엥겔베르트 2세</a>(1150년–1191년)&#160;: 1188년부터 <a>이스트리아 후작</a> 견임</li> <li><a>엥겔베르트 3세</a>(1191년–1220년)</li> <li><a>마인하르트 2세</a>(1220년–1231년)</li> <li><a>마인하르트 3세</a>(1231년–1258년)&#160;: 1253년부터 <a>티롤 백작</a> 견임</li> <li><a>마인하르트 4세</a>(1258년–1271년)&#160;: 1286년부 <a>키린티아 공작</a> 견임 <ul><li><a>알베르트 1세</a>(1258년–1304년)</li></ul></li> <li><a>하인리히 3세</a>(1304년–1323년)</li> <li><a>요한 하인리히 4세</a>(1323년–1338년)&#160;: 1325년까지 친척인 <a>알베르트 2세</a>의 섭정을 받음</li> <li><a>알베르트 3세</a>(1338년–1374년) <ul><li><a>마인하르트 6세</a>(1338년–1385년)</li> <li><a>하인리히 5세</a>(1338년–1362년)</li></ul></li> <li><a>하인리히 6세</a>(1385년–1454년)</li> <li><a>요한 2세</a>(1454년–1462년) <ul><li><a>레온하르트</a>(1454년–1500년)</li></ul></li></ul> <p>가문이 단절되고, 백국은 <a>오스트리아 대공작</a>이지 <a>신성 로마 제국 황제</a>인 <a>합스부르크 가문</a>의 <a>막시밀리안 1세</a>에게 계승됨. </p> <h2><span></span><span>같이 보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고리치아가</a></li> <li><a>고리치아</a></li> <li><a>오스트리아 제국</a></li> <li><a>슬로베니아의 역사</a></li></ul> <div><table><tbody><tr><th colspan="3"><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span><a><img></a></span> <a>신성 로마 제국</a>의 <a>오스트리아 관구</a></div></th></tr><tr><th><a><img></a> <a>합스부르크 가문</a> 영지</th><td><div> <ul><li><a>오스트리아</a></li> <li><a>케른텐</a></li> <li><a>크라인</a></li> <li><a>외오스트리아</a> (<a>알트도르프</a></li> <li><a>브레겐츠</a></li> <li><a>브라이스가우</a></li> <li><a>부르가우</a></li> <li><a>호엔베르크</a></li> <li><a>콘스탄츠</a></li> <li><a>오르테나우</a></li> <li><a>슈토카흐</a></li> <li><a>준트가우</a> <small>(1648년까지)</small></li> <li><a>테트낭</a></li> <li><a>빈바일러</a>)</li> <li><a>고리치아</a></li> <li><a>이스트리아</a></li> <li><a>슈타이어마르크</a></li> <li><a>타라스프</a></li> <li><a>트리에스테</a></li> <li><a>티롤</a></li></ul> </div></td><td rowspan="3"><div><a><img></a></div></td></tr><tr><th><span>&#160;</span><a>주교후국</a></th><td><div> <ul><li><a>브릭센</a></li> <li><a>쿠어</a></li> <li><a>트렌트</a></li></ul> </div></td></tr><tr><th><a><img></a> <a>튜튼</a> 관할구</th><td><div> <ul><li><a>안 데어 에치</a></li> <li><a>오스트리아</a></li></ul> </div></td></tr><tr><td colspan="3"><div>1500년의 관구: <a>바이에른</a>, <a>슈바벤</a>, <a>라인강 상류</a>, <a>라인강 하류–베스트팔렌</a>, <a>프랑켄</a>, <a>작센</a><br>1512년의 관구: <b>오스트리아</b>, <a>부르고뉴</a>, <a>오버작센</a>, <a>선제후 라인강</a> <span>&#160;&#160;&#160;</span> · <span>&#160;&#160;&#160;</span> <a>비관구 소속 영토</a></div></td></tr></tbody></table></div>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이탈리아 반도, 코르시카 섬, 사르데냐 섬, 시칠리아 섬, 몰타 섬의 옛 국가들</a></div></th></tr><tr><th>후기 고대 시대와 <br>대이동 시기<br>(3세기–8세기)</th><td><div> <ul><li><a>로마 제국</a> <ul><li><a>로마 시대의 이탈리아</a></li></ul></li> <li><a>서로마 제국</a> (285년–476년) <ul><li><a>코르시카 에트 사르디니아</a> (기원전 238년–서기 455년)</li> <li><a>시칠리아 (로마의 속주)</a> (기원전 241년–서기 476년)</li></ul></li> <li><a>이탈리아 집정관 구역</a> (337년–584년) <ul><li><a>오도아케르 왕국</a> (476년–493년)</li> <li><a>동고트 왕국</a> (493년–553년)</li> <li><a>반달 왕국</a> (435년–534년)</li></ul></li> <li><a>랑고바르드 왕국</a> (568년-774년) <ul><li><a>베네벤토 공국</a></li> <li><a>프리울리 공국</a></li> <li><a>이브레아 공국</a></li> <li><a>스폴레토 공국</a></li> <li><a>트리덴툼 공국</a></li></ul></li> <li><a>라벤나 엑사르코스 직할구</a> (584년–751년)</li> <li><a>아프리카 엑사르코스 직할구</a> (585년–698년)</li></ul> </div></td></tr><tr><th><a>베네치아 공화국</a> (697년–1797년)</th><td><div> <ul><li><a>도가도</a></li> <li><a>스타토 다 마르</a></li> <li><a>도미니 디 테르라페르마</a></li></ul> </div></td></tr><tr><th>이탈리아 남부<br>(774년–1139년)</th><td><div></div><table><tbody><tr><th>비잔티움 제국</th><td><div> <ul><li><a>아말피 공국</a></li> <li><a>가에타 공국</a></li> <li><a>이탈리아 카테파노 직할구</a></li> <li><a>롱고바르디아</a></li> <li><a>루카니아</a></li> <li><a>나폴리 공국</a></li> <li><a>시칠리아</a></li> <li><a>소렌토 공국</a></li></ul> </div></td></tr><tr><th>아랍계</th><td><div> <ul><li><a>바리 토후국</a></li> <li><a>시칠리아 토후국</a></li></ul> </div></td></tr><tr><th>랑고바르드계</th><td><div> <ul><li><a>베네벤토 공국</a></li> <li><a>살레르노 공국</a></li> <li><a>카푸아 공국</a></li></ul> </div></td></tr><tr><th><a>노르만계</a></th><td><div> <ul><li><a>아풀리아 칼라브리아 백국</a></li> <li><a>아베르사 백국</a></li> <li><a>시칠리아 백국</a></li> <li><a>타란토 후국</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사르데냐와 코르시카<br>(서기 9세기–1420년)</th><td><div> <ul><li><a>주디카티</a> <ul><li><a>아굴리아스트라 주디카토</a></li> <li><a>아르보레아 주디카토</a></li> <li><a>칼리아리 주디카토</a></li> <li><a>갈루라 주디카토</a></li> <li><a>로구도로 주디카토</a></li></ul></li> <li><a>사르데냐 왕국</a></li></ul> </div></td></tr><tr><th>중세 시대의 <a>중세 이탈리아 왕국</a>,<br><a>신성 로마 제국</a>, <a>교황령</a>내 국가들</th><td><div> <ul><li><a>안코나 변경백국</a></li> <li><a>아오스타 공국</a></li> <li><a>파트리아 델 프리울리 (아퀼레이아 대주교후국)</a></li> <li><a>브릭센 주교후국</a></li> <li><a>카스트로 공국</a></li> <li><a>체바 변경백국</a></li> <li><a>페라라 공국</a></li> <li><a>피날레 변경백국</a></li> <li><a>피렌체 공화국</a></li> <li><a>피렌체 공국</a></li> <li><a>프리울리 변경백국</a></li> <li><a>제노바 변경</a></li> <li><a>제노바 공화국</a></li> <li><a>고리치아 백국</a></li> <li><a>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a></li> <li><a>구아스탈라 백국</a></li> <li><a>구아스탈라 공국</a></li> <li><a>이스트리아 변경백국</a></li> <li><a>이브레아 공국</a></li> <li><a>루카 공화국</a></li> <li><a>만토바 공국</a></li> <li><a>마사 카라라 공국</a></li> <li><a>마라니아 공국</a></li> <li><a>밀라노 공국</a></li> <li><a>미란돌라 공국</a></li> <li><a>모데나 레조 공국</a></li> <li><a>몬페라토 변경백국</a></li> <li><a>파르마 공국</a></li> <li><a>피에몬테 공국</a></li> <li><a>피옴비노 후국</a></li> <li><a>피사 공화국</a></li> <li><a>레조 공국</a></li> <li><a>살루초 변경백국</a></li> <li><a>사보이아 백국</a></li> <li><a>사보이아 공국</a></li> <li><a>시에나 공화국</a></li> <li><a>스폴레토 공국</a></li> <li><a>테라 산크티 베네딕티</a></li> <li><a>트렌토 주교후국</a></li> <li><a>토리노 변경</a></li> <li><a>토스카나 변경백국</a></li> <li><a>토스카나 대공국</a></li> <li><a>우르비노 공국</a></li> <li><a>베로나 변경백국</a></li> <li></li></ul> </div></td></tr><tr><th><a>시칠리아 왕국</a> (1130년–1816년) <br><a>나폴리 왕국</a> (1282년–1860년)</th><td><div> <ul><li><a>프레시디국</a></li> <li><a>산도나토 공국</a></li> <li><a>소라 공국</a></li> <li><a>타란토 후국</a></li> <li><a>구호 기사단 시기 몰타</a></li> <li><a>고초국</a></li> <li><a>몰타 보호령</a></li> <li><a>몰타 왕령식민지</a></li></ul> </div></td></tr><tr><th>프랑스 혁명 <br>나폴레옹 시대 (1792년–1815년)</th><td><div></div><table><tbody><tr><th>공화국</th><td><div> <ul><li><a>볼로냐</a></li> <li><a>치살피나</a></li> <li><a>치스파다나</a></li> <li><a>이탈리아 공화국</a></li> <li><a>리구레</a></li> <li><a>루카</a></li> <li><a>파르테노페아</a></li> <li><a>로마</a></li> <li><a>트란스파다나</a></li></ul> </div></td></tr><tr><th>왕조 국가</th><td><div> <ul><li><a>프랑스 제1제국</a></li> <li><a>에트루리아</a></li> <li><a>루카 피옴비노</a></li> <li><a>이탈리아 왕국</a></li> <li><a>나폴리</a></li> <li><a>코르시카 왕국</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나폴레옹 시대 이후 국가</th><td><div> <ul><li><a>루카 공화국</a> (1815–1847)</li> <li><a>마사 카라라 공국</a> (1814–1829)</li> <li><a>모데나 레조 공국</a> (1814–1859)</li> <li><a>파르마 공국</a> (1814–1859)</li> <li><a>토스카나 대공국</a> (1815–1859)</li> <li><a>로마 공화국 (19세기)</a> (1849)</li> <li><a>중앙이탈리아 연방</a> (1859–1860)</li> <li><a>사르데냐 왕국</a> (1814–1860)</li> <li><a>양시칠리아 왕국</a> (1816–1861)</li> <li><a>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a> (1815–1866)</li> <li><a>교황령</a> (1814–1870)</li> <li><a>이탈리아 사회 공화국</a> (1943–1945)</li> <li><a>이탈리아 왕국</a> (1861–1946)</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고리치아_백국&amp;oldid=24172170</a>"</div> <div><div><a>분류</a>: <ul><li><a>고리치아 백국</a></li><li><a>옛 공국</a></li><li><a>유럽의 옛 나라</a></li><li><a>신성 로마 제국의 국가</a></li><li><a>신성 로마 제국의 백국</a></li><li><a>마인하르트가</a></li><li><a>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주의 역사</a></li><li><a>이탈리아의 역사적 지역</a></li><li><a>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주의 지리</a></li><li><a>이탈리아의 지리사</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이탈리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a></li><li><a>독일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a></li><li><a>정비가 필요한 옛 나라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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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스부르크 가문이 1363년에 차지한 백국의 이름은?
티롤
null
97739
10,020
[ "합스부르크 가문이 1363년에 차지한 백국의 이름은?", "1363년 이후 리엔츠의 고리치아 영지는 어느 국가의 세습 영토로 분리 되었는가?", "카를 4세에게 대공 작위를 받았으며 고리치아 대공국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인물은?", "1335년 케르켄 공국과 크라인 변경백국 차지하고\n1363년 티롤 백국을 차지하게 된 가문은?", "마인하르트 6세 폰 괴르츠가 룩셈부르크 가분의 카를 4세에게 대공 작위를 약속받은 해는 언제인가?", "베네치아 10인 위원회는 고리치아를 중심으로 한 어떤 지역을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나?", "몬팔코네는 몇년도까지 베네치아의 고립 영토가 되었는가?", "고리치아에서 그라디스카 백국을 분리시킨 황제의 이름은?", "1420년에서 1797년까지 몬팔코네가 소속된 고립영토는?", "그라디스카 백국이 고리치아 그라디스카로 재통합된 연도는?", "황제 페르디난트 3세가 고리치아에서 분리한 나라는 어디인가?", "어떤 지역이 티롤의 왕실 소유지와 같이 관리되었나?" ]
<!DOCTYPE html> 고리치아 백국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리치아 백국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신성 로마 제국</th></tr><tr><td colspan="2"> 고리치아 백국</td></tr><tr><td colspan="2"> Contea di Gorizia Grafschaft Görz</td></tr><tr><td colspan="2"> <table> <tbody><tr> <td>← </td> <td>1127년 – 1747년 </td> <td> → </td></tr></tbody></table></td></tr><tr><td colspan="2"> 국기 문장 </td></tr><tr><td colspan="2"> </td></tr><tr><th>수도</th> <td> 고리치아 리엔츠</td></tr> <tr><th colspan="2">정치</th></tr><tr><th>정부 형태</th> <td> 대공제</td></tr><tr><th colspan="2">역사</th></tr><tr><th>역사</th> <td>  </td></tr><tr><th> • 마인하르트 폰 괴르츠</th> <td> 1127년</td></tr><tr><th> • 마인하르트 3세 티롤을 계승</th> <td> 1253년</td></tr><tr><th> • 대공국으로 승격</th> <td> 1365년</td></tr><tr><th> •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th> <td> 1500년</td></tr><tr><th> • 오스트리아 관구 참여</th> <td> 1512년</td></tr><tr><th> • 그라디스카디손초와 재통합</th> <td> 1747년</td></tr><tr><td colspan="2"> </td></tr><tr><th colspan="2">기타</th></tr><tr><th>국교</th> <td> 로마 가톨릭교회</td></tr> </tbody></table> 고리치아 백국(Contea di Gorizia)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영방 국가 중 하나이며, 1365년부터는 대공국으로 승격했다. 본래는 아퀼레이아 총대주교국의 중재 폭트였던 고리치아 백작들(마인하르트 가문)은 리엔츠 지방과 고리치아(괴르츠)를 근거지로 한 이탈리아 북동부의 프리울리 지방의 일부 영지들을 다스렸다. 1253년 고리치아 백작들이 티롤 백국을 승계받으면서, 1271년부터 1335년에 남성 후계자가 단절될 때까지 고리치아티롤 가문이 지배했다. 보다 신생 방계 가문이 1500년에 단절될 때까지 고리치아와 리엔츠의 백작령을 다스렸다가,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이 계승하게 된다. 목차 1 역사 1.1 고리치아티롤 가문 1.2 합스부르크 가문 2 백작 목록 3 같이 보기 역사[편집] 바이에른 공국의 리엔츠 일대의 소유권을 지녔던 마인하르트 귀족 가문의 후손인 마인하르트 1세가 1107년 초기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아퀼레이아 총대주교국의 관리 폭트였던 그는 고리치아가 포함된 옛 프리울리 변경백국의 넓은 영지를 받게 되었으며, 1127년부터 스스로를 그라프 폰 괴르츠(Graf von Görz, 괴르츠 백작)이라고 칭하였다. 백국의 국경은 아퀼레이아와 다른 나라들과의 잦은 전쟁으로 지난 4 세기간 자주 변동되었고, 또한 두 주요 중심지를 축으로 영토가 구분되었는데, 하나는 바이에른 선조들의 지역인 리엔츠가 있는 상 드라바 강 위쪽에서 푸스터 계곡의 이니헨까지 이르는 곳이고, 나머지는 프리울리가 있는 고리치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곳이다. 고리치아티롤 가문[편집] 호엔슈타우펜가의 프리드리히 2세 황제의 신하 중 하나였던 마인하르트의 후손인 마인하르트 3세는 바벤부르크 가문이 단절되자, 1248년에 슈타이어마르크의 관리자로 임명된다. 그는 인정한 케른텐 공국에 전쟁을 벌였으나, 1252년 그라이펜부르크에서 베른하르트 폰 슈판하임 공작과 그의 아들 잘츠부르크 대주교 필리프가 이끄는 군대에 패해하고 만다. 그럼에도 마인하르트 3세의 장인인 알베르트 4세가 전투가 벌어진지 1년만에 사망하면서, 그가 티롤 백국을 계승하면서 나라의 힘은 정점에 다다른다. 고리치아 성 1258년에 마인하르트 3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들은 물려받은 나라를 1271년까지 처음으로 공동 통치를 하였다. 장남인 마인하르트 4세는 푸스터 계곡의 서쪽 티롤 영지를 가져갔고, 그의 동생인 알베르트 1세는 리엔츠와 고리치아 주변의 마인하르트 선조들의 영지를 차지했다. 고리치아 백작인 알베르트 1세가 사망한 후, 고리치아 백국은 아들들에 의해 다시 분할되어 고리치아 중심지인 "인너 지역" 하인리히 3세가, 리엔츠를 중심으로 "아우터 지역" 알베르트 2세가 가져갔다. 1323년에 하인리히 3세 백작이 암살당하자, 고리치아 영지는 4개의 국가에 분할되었다. 고리치아 백작은 임시로 트레비소 변경백국의 이탈리아인이 통제했고 파진을 주변으로한 이스트리아 변경백국의 잔류 영지는 알베르트 3세가 1365년에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유언을 통해 물려준다. 리엔츠의 뷔르크 성 1365년에 마인하르트 6세 폰 괴르츠가 룩셈부르크 가문의 카를 4세에게 대공 작위를 약속받았으며, 그때부터 고리치아 대공국으로 불렸다. 마인하르트 가문은 그럼에도 오스트리아 영지의 합스부르크와 베네치아 공화국 같은 강력한 이웃 국가들로 인해 하향세를 띄고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1335년에 케른텐 공국과 크라인 변경백국을, 그리고 1363년에 티롤 백국을 차지하였으며, 리엔츠의 고리치아 잔여 영지도 합스부르크의 "세습 영토"로 분리되었다. 베네치아는 프리울리에 있는 옛 총대주교국의 영토를 정복하여 1434년에 도미니 디 테라페르마에 합병시켰다. 베네치아의 10인 위원회는 인접했던 고리치아를 중심으로 한 "인너 지역"을 이스트리아에 있는 베네치아의 스타토 다 마르에 편입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압박으로 인하여, 고리치아 백작은 리엔츠에 있는 뷔르크 성에 그들의 거점으로 삼았다. 합스부르크 가문[편집] 1429년에 백국은 하인리히 6세 폰 괴르츠의 아래 하나로 재통합되었다. 그의 아들이자 최후의 백작인 레온하르트 폰 괴르츠가 1500년에 사망하였고 베네치아의 권리 주장이 일어났지만, 상속 계약에 따라 백국은 합스부르크 황제 막시밀리안 1세에게 떨어진다. 리엔츠 지역이 티롤의 왕실 소유지와 같이 관리되는 반면에, 고리치아의 "인너 지역"은 오스트리아 관구의 일부분으로 인너오스트리아 대공이 다스리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영방 국가로 남았다. 오스트리아 관구는 소차 강 남쪽으로의 아퀼레이아, 코르몬스, 두이노와 1511년 제국군에 의해 정복된 베네치아의 옛 요새인 그라디스카디손초가 포함되어 있다. 몬팔코네는 1420년에서 1797년까지 베네치아의 고립 영토가 되었다. 1647년에 황제 페르디난트 3세가 고리치아에서 "그라디스카 백국"을 그의 조신인 요한 안톤 폰 에겐베르크를 위해 분리시켜냈다가 1747년에 합스부르크 군주국의 왕실 소유지 중 하나인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으로 재통합된다. 백작 목록[편집] 1459년 잉게람 필사본에 있는 고리치아 가문의 문장 푸스터 계곡 백작 마인하르트(Meginhard, 1090년경 사망) 엥겔베르트 1세(1090년–1122년) 마인하르트 1세(1122년–1142년) 하인리히 2세(1142년–1150년) 엥겔베르트 2세(1150년–1191년) : 1188년부터 이스트리아 후작 견임 엥겔베르트 3세(1191년–1220년) 마인하르트 2세(1220년–1231년) 마인하르트 3세(1231년–1258년) : 1253년부터 티롤 백작 견임 마인하르트 4세(1258년–1271년) : 1286년부 키린티아 공작 견임 알베르트 1세(1258년–1304년) 하인리히 3세(1304년–1323년) 요한 하인리히 4세(1323년–1338년) : 1325년까지 친척인 알베르트 2세의 섭정을 받음 알베르트 3세(1338년–1374년) 마인하르트 6세(1338년–1385년) 하인리히 5세(1338년–1362년) 하인리히 6세(1385년–1454년) 요한 2세(1454년–1462년) 레온하르트(1454년–1500년) 가문이 단절되고, 백국은 오스트리아 대공작이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1세에게 계승됨. 같이 보기[편집] 고리치아가 고리치아 오스트리아 제국 슬로베니아의 역사 <table><tbody><tr><th colspan="3">vdeh 신성 로마 제국의 오스트리아 관구</th></tr><tr><th> 합스부르크 가문 영지</th><td> 오스트리아 케른텐 크라인 외오스트리아 (알트도르프 브레겐츠 브라이스가우 부르가우 호엔베르크 콘스탄츠 오르테나우 슈토카흐 준트가우 (1648년까지) 테트낭 빈바일러) 고리치아 이스트리아 슈타이어마르크 타라스프 트리에스테 티롤 </td><td rowspan="3"></td></tr><tr><th> 주교후국</th><td> 브릭센 쿠어 트렌트 </td></tr><tr><th> 튜튼 관할구</th><td> 안 데어 에치 오스트리아 </td></tr><tr><td colspan="3">1500년의 관구: 바이에른, 슈바벤, 라인강 상류, 라인강 하류–베스트팔렌, 프랑켄, 작센1512년의 관구: 오스트리아, 부르고뉴, 오버작센, 선제후 라인강     ·     비관구 소속 영토</td></tr></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2">vdeh이탈리아 반도, 코르시카 섬, 사르데냐 섬, 시칠리아 섬, 몰타 섬의 옛 국가들</th></tr><tr><th>후기 고대 시대와 대이동 시기(3세기–8세기)</th><td> 로마 제국 로마 시대의 이탈리아 서로마 제국 (285년–476년) 코르시카 에트 사르디니아 (기원전 238년–서기 455년) 시칠리아 (로마의 속주) (기원전 241년–서기 476년) 이탈리아 집정관 구역 (337년–584년) 오도아케르 왕국 (476년–493년) 동고트 왕국 (493년–553년) 반달 왕국 (435년–534년) 랑고바르드 왕국 (568년-774년) 베네벤토 공국 프리울리 공국 이브레아 공국 스폴레토 공국 트리덴툼 공국 라벤나 엑사르코스 직할구 (584년–751년) 아프리카 엑사르코스 직할구 (585년–698년) </td></tr><tr><th>베네치아 공화국 (697년–1797년)</th><td> 도가도 스타토 다 마르 도미니 디 테르라페르마 </td></tr><tr><th>이탈리아 남부(774년–1139년)</th><td><table><tbody><tr><th>비잔티움 제국</th><td> 아말피 공국 가에타 공국 이탈리아 카테파노 직할구 롱고바르디아 루카니아 나폴리 공국 시칠리아 소렌토 공국 </td></tr><tr><th>아랍계</th><td> 바리 토후국 시칠리아 토후국 </td></tr><tr><th>랑고바르드계</th><td> 베네벤토 공국 살레르노 공국 카푸아 공국 </td></tr><tr><th>노르만계</th><td> 아풀리아 칼라브리아 백국 아베르사 백국 시칠리아 백국 타란토 후국 </td></tr></tbody></table></td></tr><tr><th>사르데냐와 코르시카(서기 9세기–1420년)</th><td> 주디카티 아굴리아스트라 주디카토 아르보레아 주디카토 칼리아리 주디카토 갈루라 주디카토 로구도로 주디카토 사르데냐 왕국 </td></tr><tr><th>중세 시대의 중세 이탈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 교황령내 국가들</th><td> 안코나 변경백국 아오스타 공국 파트리아 델 프리울리 (아퀼레이아 대주교후국) 브릭센 주교후국 카스트로 공국 체바 변경백국 페라라 공국 피날레 변경백국 피렌체 공화국 피렌체 공국 프리울리 변경백국 제노바 변경 제노바 공화국 고리치아 백국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후백국 구아스탈라 백국 구아스탈라 공국 이스트리아 변경백국 이브레아 공국 루카 공화국 만토바 공국 마사 카라라 공국 마라니아 공국 밀라노 공국 미란돌라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몬페라토 변경백국 파르마 공국 피에몬테 공국 피옴비노 후국 피사 공화국 레조 공국 살루초 변경백국 사보이아 백국 사보이아 공국 시에나 공화국 스폴레토 공국 테라 산크티 베네딕티 트렌토 주교후국 토리노 변경 토스카나 변경백국 토스카나 대공국 우르비노 공국 베로나 변경백국 </td></tr><tr><th>시칠리아 왕국 (1130년–1816년) 나폴리 왕국 (1282년–1860년)</th><td> 프레시디국 산도나토 공국 소라 공국 타란토 후국 구호 기사단 시기 몰타 고초국 몰타 보호령 몰타 왕령식민지 </td></tr><tr><th>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시대 (1792년–1815년)</th><td><table><tbody><tr><th>공화국</th><td> 볼로냐 치살피나 치스파다나 이탈리아 공화국 리구레 루카 파르테노페아 로마 트란스파다나 </td></tr><tr><th>왕조 국가</th><td> 프랑스 제1제국 에트루리아 루카 피옴비노 이탈리아 왕국 나폴리 코르시카 왕국 </td></tr></tbody></table></td></tr><tr><th>나폴레옹 시대 이후 국가</th><td> 루카 공화국 (1815–1847) 마사 카라라 공국 (1814–1829) 모데나 레조 공국 (1814–1859) 파르마 공국 (1814–1859) 토스카나 대공국 (1815–1859) 로마 공화국 (19세기) (1849) 중앙이탈리아 연방 (1859–1860) 사르데냐 왕국 (1814–1860) 양시칠리아 왕국 (1816–1861)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1815–1866) 교황령 (1814–1870)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 (1943–1945) 이탈리아 왕국 (1861–1946)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고리치아_백국&amp;oldid=24172170" 분류: 고리치아 백국옛 공국유럽의 옛 나라신성 로마 제국의 국가신성 로마 제국의 백국마인하르트가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주의 역사이탈리아의 역사적 지역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주의 지리이탈리아의 지리사숨은 분류: 이탈리아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독일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정비가 필요한 옛 나라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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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리치아 백국은 신성 로마 제국의 제국 영방 국가로, 1127년부터 1747년까지 존재했다. 수도는 고리치아와 리엔츠였으며, 대공제로 승격된 것은 1365년이다. 마인하르트 가문이 백작으로 시작하여, 1253년부터 티롤 백국을 계승하고, 1500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해 통치되었다. 고리치아 백국은 아퀼레이아 총대주교국의 관리 하에 있었고, 여러 전쟁과 정치적 변화로 인해 국경이 자주 변동했다. 1429년에는 다시 통합되었고, 1500년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소속으로 남아 신성 로마 제국의 일부로 존재했다. 1747년에는 그라디스카디손초와 재통합되며 역사적 종지부를 찍었다.
다음 글을 보고, 요약문을 만들되 첫 문장은 전체 주제를 압축적으로, 이후 문장은 세부 정보 중심으로 정리해줘.
Yesterday_and_Today
https://ko.wikipedia.org/wiki/Yesterday_and_Today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Yesterday and Today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Yesterday and Today</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h colspan="2"><div><div><img></div><span>Yesterday and Today</span></div></th></tr><tr><td colspan="2"> <a><img></a></td></tr><tr><th colspan="2"><span><a>비틀즈</a></span>의 <a>정규 음반</a></th></tr><tr><th>발매일</th> <td> 1966년 6월 20일<span>&#160;(<span>1966-06-20</span>)</span><sup><a>&#91;1&#93;</a></sup></td></tr><tr><th>녹음</th> <td> 1965년–1966년<br>런던 <a>EMI 스튜디오</a></td></tr><tr><th><a>장르</a></th> <td> <a>록</a>, <a>사이키델릭 록</a>, <a>포크 록</a></td></tr><tr><th>길이</th> <td> <span><span>27</span>:<span>33</span></span></td></tr><tr><th><a>레이블</a></th> <td> <a>캐피틀</a></td></tr><tr><th><a>프로듀서</a></th> <td> <a>조지 마틴</a></td></tr><tr><th colspan="2"><a>비틀즈</a> 북미 연표</th></tr> <tr><td colspan="2"> <p> </p> <table> <tbody><tr> <td><a>Rubber Soul</a><br>(1965) </td> <td><b>Yesterday and Today</b><br>(1966) </td> <td><a>Revolver</a><br>(1966) </td></tr></tbody></table></td></tr> </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2">전문가 평가</th></tr><tr><th colspan="2">평가 점수</th></tr><tr><th>출처</th><th>점수</th></tr><tr><td><a>올뮤직</a></td><td><span><img><img><img><img><img></span><sup><a>&#91;2&#93;</a></sup></td></tr><tr><td>《<a>대중음악의 백과사전</a>》</td><td><span><img><img><img><img><img></span><sup><a>&#91;3&#93;</a></sup></td></tr><tr><td>《<a>롤링 스톤 앨범 가이드</a>》</td><td><span><img><img><img><img><img></span><sup><a>&#91;4&#93;</a></sup></td></tr></tbody></table> <p>《<b>Yesterday and Today</b>》는 미국 <a>캐피틀 레코드</a>를 통해 발매된 <a>비틀즈</a>의 아홉 번째 앨범으로 미국 발매를 통틀면 열일곱 번째 음반이 된다. 본래 미국과 캐나다만 발매 예정이었지만, 1970년대에 일본에서도 발매, 뒤이어 영국에서 콤팩트 디스크 형식으로 2014년 발매됐다. 이 앨범은 비틀즈 멤버가 흰 셔츠를 입고 주위에 아기 인형과 고기 조각이 널부러진, "<a>정육점</a> 커버(butcher cover)"라 불리는 오리지널 커버를 둘러싼 논란으로 회자되고 있다. 앨범의 제목은 그들의 곡인 〈<a>Yesterday</a>〉를 바탕으로 붙여졌는데, 초기 앨범에는 〈Yesterday〉에 따옴표가 둘러져 있다.<sup><a>&#91;5&#93;</a></sup>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음악</span></a></li> <li><a><span>2</span> <span>발표와 반응</span></a> <ul> <li><a><span>2.1</span> <span>"정육점 커버"</span></a></li> </ul> </li> <li><a><span>3</span> <span>CD 재발매</span></a></li> <li><a><span>4</span> <span>곡 목록</span></a></li> <li><a><span>5</span> <span>차트와 판매량</span></a> <ul> <li><a><span>5.1</span> <span>차트 성적</span></a></li> <li><a><span>5.2</span> <span>판매량</span></a></li> </ul> </li> <li><a><span>6</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7</span> <span>참고 문헌</span></a></li> <li><a><span>8</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음악</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Yesterday and Today》는 당시 비틀즈가 영국에서 발표한 두 개의 LP에서 미국에서 미발표된 수록곡을 가져왔다. 세 개의 곡은 영국에서 LP에 담겨 발표될 예정이었으며, 두 곡은 싱글의 양면에 자리잡고 있다. </p> <ul><li>영국 LP 《<a>Help!</a>》에서는 〈<a>Act Naturally</a>〉와 〈<a>Yesterday</a>〉. (캐피틀에서 싱글로 발표한 바 있다)</li> <li>영국 LP 《<a>Rubber Soul</a>》에서는 〈<a>Nowhere Man</a>〉과 〈<a>What Goes On</a>〉 (마찬가지로 캐피틀에서 싱글로 발표한 바 있다), 〈<a>Drive My Car</a>〉, 〈<a>If I Needed Someone</a>〉.<sup><a>&#91;6&#93;</a></sup></li> <li>더블 A 싱글에 실린 〈<a>Day Tripper</a>〉/〈<a>We Can Work It Out</a>〉.</li> <li>당시 미발표 영국 LP 《<a>Revolver</a>》에서 〈<a>I'm Only Sleeping</a>〉, 〈<a>Doctor Robert</a>〉, 〈<a>And Your Bird Can Sing</a>〉 (이 버전은 듀오포닉 믹스 적용).<sup><a>&#91;7&#93;</a></sup> 이 세 수록곡들은 진짜 스테레오 버전으로 테이프, 차후 비닐로 발매된다. 〈<a>I'm Only Sleeping</a>〉과 〈<a>Doctor Robert</a>〉의 진짜 스테레모 믹스는 영국에서 《<a>Revolver</a>》 발표 이후 《Yesterday and Today》에 실려 나오게 된다.<sup><a>&#91;8&#93;</a></sup></li></ul> <p>비틀즈는 트랙의 순서를 고심해서 정했기 때문에 이러한 캐피틀의 마구잡이식 수록곡 선정에 화를 냈다.<sup><a>&#91;9&#93;</a></sup> </p> <h2><span></span><span>발표와 반응</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1966년 6월 20일 발표된 《Yesterday and Today》는 문제가 되는 커버로 비틀즈가 매체와 배급사의 질타를 받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음반이 디스크 자키와 음반 평론가에게 먼저 보내졌고, 엄청난 악평이 들끓자 캐피틀은 바로 750,000장을 회수하여 커버를 교체했다. 커버를 바꾸고 홍보하는데 250,000달러가 들어 그들은 초기 수익을 전부 날렸다.<sup><a>&#91;10&#93;</a></sup> 이런 사건에도 불구하고 음반은 미국 빌보드 차트에 1966년 7월 30일 정상에 올라 곧바로 골드 인증을 받았다. 음반은 5주나 정상에 머물렀다.<sup><a>&#91;11&#93;</a></sup> </p> <h3><span></span><span>"정육점 커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div><div><a><img></a> <div><div><a></a></div>논란이 된 "정육점" 커버</div></div></div> <p>1966년 3월 25일 사진작가 <a>로버트 휘테이커</a>는 'A Somnambulant Adventure'라는 제목의 개념 예술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비틀즈를 스튜디오에 불렀다. 그는 비틀즈에게 정육점 작업복을 입히고, 고기 조각과 부서진 플라스틱 아기 인형을 걸치게 하고는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일상같은 사진 찍기에 질려 있었고, 이 콘셉트는 그들의 블랙 유머에 부합하는 것이었다.<sup><a>&#91;9&#93;</a></sup> <a>레논</a>은 당시 그들이 "또다른 포토 세션과 또다른 비틀즈 일을 하느라 지루하고 열 받았다"고 말했다.<sup><a>&#91;12&#93;</a></sup> 사실 음반 커버로 쓸 예정은 아니었지만, 비틀즈는 이 사진을 홍보용으로 사용해도 되는지 신청을 했다. 2002년 캐피틀사의 전 사장인 <a>앨런 W. 리빙스톤</a>이 《<a>모조</a>》 인터뷰에서 한 말에 의하면, 사진은 <a>폴 매카트니</a>가 음반 커버로 차용해달라고 강하게 밀어붙였으며, 그가 이를 두고 "<a>베트남 전쟁</a>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sup><a>&#91;13&#93;</a></sup> 그들이 웃으면서 살인을 저지른 듯한 사진은 영국에서 〈<a>Paperback Writer</a>〉 판촉용 싱글의 커버에 쓰였다. 비슷한 사진이 1966년 6월 11일자 영국 잡지 《<a>디스크</a>》의 커버로 사용되었다.<sup><a>&#91;14&#93;</a></sup> </p><p>미국에서는 캐피틀 레코드가 《Yesterday and Today》에서 사용된 사진과 같은 것을 사용한 〈Paperback Writer〉를 약 750,000장 생산했다.<sup><a>&#91;14&#93;</a></sup><sup><a>&#91;15&#93;</a></sup> 이 음반들은 캐피틀사 공장이 자리잡은 미국의 네 개 도시인 <a>로스앤젤레스</a>, <a>스크랜턴</a>, <a>윈체스터</a>, <a>잭슨빌</a>에서 생산되었다. 커버가 어디서 나왔는지 지정하는 번호는 RIAA 심블 근처에 있다. 예를 들어 로스앤젤레스 공장의 스테레오 음반은 "5"로 지정, 로스앤젤레스 모노 버전은 "6"으로 표기되어 있다. 모노와 비교했을 때 스테레오는 10:1의 비율로 그 수가 적어 수집가 사이에서 더 희귀, 가치있게 해준다. 적은 수의 음반이 DJ와 평론가에게 보내졌고 즉각적으로 비난이 쇄도하자 캐피틀의 모회사인 <a>EMI</a>의 회장 <a>조셉 락우드 경</a>은 즉시 회수할 것을 명했다.<sup><a>&#91;16&#93;</a></sup> </p><p>당시 비틀즈의 일부는 정육점 사진의 사용을 옹호했다. 레논은 "그것은 베트남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고, 매카트니는 비평가들이 "순진"하다고 말했다.<sup><a>&#91;14&#93;</a></sup> 그러나 이같은 제언은 모든 밴드 멤버들의 뜻과 같지 않았다. <a>조지 해리슨</a>은 《<a>비틀즈 앤솔로지</a>》에서 "역겹고 한심했어요. 가끔은 다들 바보 같은 짓을 했죠. 순진하고 멍청한 짓인데도 쿨하다거나 멋지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건데, 그 작업도 그런 종류였어요."라고 말했다.<sup><a>&#91;9&#93;</a></sup> <a>링고 스타</a>는 "어쩌다 그 촬영을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떻게 정육점 복장을 하고 온몸에 고기를 두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고요. 우리들 눈을 보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지요. 살다보면 그런 일도 있는 겁니다."라며 담담하게 회고했다.<sup><a>&#91;9&#93;</a></sup> </p> <h2><span></span><span>CD 재발매</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Yesterday and Today》는 2014년 컴팩트 디스크로 발표되었다. 낱개로 출시되거나 박스 세트 《<a>The U.S. Albums</a>》에도 들어갔다. 원래 미국 버전과 믹스가 다른 부분이 있다.<sup><a>&#91;17&#93;</a></sup> </p> <ul><li>모노 〈Drive My Car〉은 영국 모노 믹스로 교체.</li> <li>모노 〈Doctor Robert〉에서 레논이 마지막에 굉장히 빠른 말을 하는 것 생략.</li> <li>〈Day Tripper〉와 〈We Can Work It Out〉를 제외한 스테레오는 2009년 영국 스테레오 CD로 교체.</li></ul> <p>CD 커버는 "정육점" 커버이나 CD는 "트렁크" 커버가 붙여져 있다. </p> <h2><span></span><span>곡 목록</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특별한 표기가 없는 한 모든 곡은 <a>레논-매카트니</a> 작곡이다. </p> <div><table> <tbody><tr> <th colspan="10">1면</th> </tr> <tr> <th>#</th> <th>제목</th> <th><span>재생 시간</span></th> </tr> <tr> <td>1.</td> <td>〈<a>Drive My Car</a>〉 &#160;</td> <td>2:25</td> </tr> <tr> <td>2.</td> <td>〈<a>I'm Only Sleeping</a>〉 &#160;</td> <td>2:58</td> </tr> <tr> <td>3.</td> <td>〈<a>Nowhere Man</a>〉 &#160;</td> <td>2:40</td> </tr> <tr> <td>4.</td> <td>〈<a>Doctor Robert</a>〉 &#160;</td> <td>2:14</td> </tr> <tr> <td>5.</td> <td>〈<a>Yesterday</a>〉 &#160;</td> <td>2:04</td> </tr> <tr> <td>6.</td> <td>〈<a>Act Naturally</a>〉 (모리슨–러셀)</td> <td>2:27</td> </tr> </tbody></table></div> <div><table> <tbody><tr> <th colspan="10">2면</th> </tr> <tr> <th>#</th> <th>제목</th> <th><span>재생 시간</span></th> </tr> <tr> <td>1.</td> <td>〈<a>And Your Bird Can Sing</a>〉 &#160;</td> <td>2:02</td> </tr> <tr> <td>2.</td> <td>〈<a>If I Needed Someone</a>〉 (<a>조지 해리슨</a>)</td> <td>&#160;</td> </tr> <tr> <td>3.</td> <td>〈<a>We Can Work It Out</a>〉 &#160;</td> <td>2:10</td> </tr> <tr> <td>4.</td> <td>〈<a>What Goes On?</a>〉 (레논-매카트니-<a>링고 스타</a>) &#160;</td> <td>2:44</td> </tr> <tr> <td>5.</td> <td>〈<a>Day Tripper</a>〉 &#160;</td> <td>2:47</td> </tr> </tbody></table></div> <h2><span></span><span>차트와 판매량</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미국에서는 1966년 12월 31일까지 967,410장을 팔았고, 10년말에는 1,230,558장을 팔았다.<sup><a>&#91;18&#93;</a></sup> </p> <div> &#32; <table><tbody><tr> <td> <h3><span></span><span>차트 성적</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table> <tbody><tr> <th>연도 </th> <th>차트 </th> <th>순위 </th></tr> <tr> <td>1966 </td> <td><a>미국 빌보드 탑 LP</a><sup><a>&#91;19&#93;</a></sup> </td> <td>1 </td></tr></tbody></table> <p>&#32; </p> </td> <td> <h3><span></span><span>판매량</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table> <caption> </caption> <tbody><tr> <th>국가 </th> <th>인증</th> <th><a>판매량/출하량</a> </th></tr> <tr> <th>캐나다 (<a>뮤직 캐나다</a>)<sup><a>&#91;20&#93;</a></sup> </th> <td>플래티넘 </td> <td>100,000<sup>^</sup> </td></tr> <tr> <th>미국 (<a>RIAA</a>)<sup><a>&#91;21&#93;</a></sup> </th> <td>2× 플래티넘 </td> <td>2,000,000<sup>^</sup> </td></tr> <tr> <td colspan="3"><div> <p><small><sup>^</sup>출하량을 기반으로 한 인증</small> </p> </div> </td></tr></tbody></table> <p>&#32; </p> </td></tr></tbody></table></div>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ol> <li><span><a>↑</a></span> <span><cite><a>Lewisohn, Mark</a> (1988). &#12298;The Beatles Recording Sessions&#12299;. New York: <a>Harmony Books</a>. 201쪽. <a>ISBN</a>&#160;<a>0-517-57066-1</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Eder, Bruce. <a>&#8220;The Beatles <i>Yesterday … and Today</i>&#8221;</a>. <a>AllMusic</a><span>. 2015년 3월 26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Larkin, Colin (2006). &#12298;<a>Encyclopedia of Popular Music</a>&#12299; 4 revis판. New York, NY: Oxford University Press. 487쪽. <a>ISBN</a>&#160;<a>0-19-531373-9</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The Beatles <i><span>&#39;</span>Yesterday' … and Today</i>&#8221;</a>. <a>Acclaimed Music</a>. 2015년 8월 25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15년 3월 26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McGeary. <a>&#8220;The Beatles' Internet Beatles Album&#8221;</a><span>. 2007년 10월 9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a>Schaffner, Nicholas</a>. (1977). <i>The Beatles Forever</i>, Harrisburg, PA: Cameron House. <a>ISBN</a>&#160;<a>0-8117-0225-1</a>, 205-209</span> </li> <li><span><a>↑</a></span> <span>Eder, Bruce. [<b><span>(영어)</span></b> <a>https://www.allmusic.com/album/r1517</a> "Yesterday...and Today Overview"]. Retrieved 19 January 2006.</span> </li> <li><span><a>↑</a></span> <span><a>http://www.columbia.edu/~brennan/beatles/var-1966.html</a></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span> <span>The Beatles. (2000). 《<a>The Beatles Anthology</a>》, San Francisco, CA: Chronicle Books LLC. <a>ISBN</a>&#160;<a>0-8118-2684-8</a>, 204-205</span> </li> <li><span><a>↑</a></span> <span>Lewis, Dan. "Beatles Make $250,000 Goof" <i>Boston Globe</i> 25 June 1966: 8</span> </li> <li><span><a>↑</a></span> <span>Whitburn, Joel. <i>Top Pop Albums 1955–2001</i> (2001) p. 1178</span> </li> <li><span><a>↑</a></span> <span><cite>Sheff, David (2000). &#12298;All We Are Saying: The Last Major Interview with John Lennon and Yoko Ono&#12299;. Macmillan. 219쪽. <a>ISBN</a>&#160;<a>9780312254643</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Gaffney, Dennis (2008년 10월 27일). <a>&#8220;Antiques Roadshow &#124; Follow the Stories &#124; The Beatles' "Butcher" Cover &#124; PBS&#8221;</a>. &#12298;PBS.org&#12299;<span>. 2011년 2월 9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span> <span><a>Schaffner, Nicholas</a>. (1977). <i>The Beatles Forever</i>, Harrisburg, PA: Cameron House. <a>ISBN</a>&#160;<a>0-8117-0225-1</a>, 55</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Beatles' LP Makes Cap. Run for Cover&#8221;</a>. &#12298;Billboard&#12299;. 78권 26호 (Cincinnati, Ohio: Billboard Publishing). 1966년 6월 25일. 3, 6쪽.</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Butcher cover, Canadian - Paul White Letter&#8221;</a>. Rarebeatles.com<span>. 2011년 8월 18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보관 된 사본&#8221;</a>. 2017년 5월 28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17년 2월 9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How Many Records did the Beatles actually sell?&#8221;</a>. Deconstructing Pop Culture by David Kronemyer. 2009년 4월 29일. 2016년 3월 6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15년 7월 11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a>Whitburn 2010</a>, 64쪽.</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12298;Canadian album certifications – The Beatles – Yesterday and Today&#12299;</a>, <a>뮤직 캐나다</a><span>, 2015년 6월 9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12298;American album certifications – The Beatles – Yesterday and Today&#12299;</a>, <a>미국 음반 산업 협회</a><span>, 2015년 6월 9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 <i>If necessary, click </i>Advanced<i>, then click </i>Format<i>, then select </i>Album<i>, then click </i>SEARCH</span> </li> </ol></div> <h2><span></span><span>참고 문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ul><li><cite>Whitburn, Joel (2010), &#12298;Joel Whitburn Presents Top Pop Albums, Seventh Edition&#12299;, Record Research Inc., <a>ISBN</a>&#160;<a>0-89820-183-7</a></cite><span><span>&#160;</span></span></li></ul> </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2011 Auction of "Butcher Cover"</a></li> <li><a>The Real Truth Behind The Beatles Butcher Cover</a>, includes detailed discography on all The Beatles Capitol Records releases</li></ul> <table> <tbody><tr> <td rowspan="1">이전 <br><span><a>프랭크 시나트라</a>의 《<a>Strangers in the Night</a>》</span> </td> <td rowspan="1"><b><a>빌보드 200</a> 1위 음반</b><br>1966년 7월 30일&#160;– 9월 2일 </td> <td rowspan="1">이후<br><span>비틀즈의 《<a>Revolver</a>》</span> </td></tr> </tbody></table>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Revolver</a>》</div></th></tr><tr><th>수록곡</th><td><div></div><table><tbody><tr><th>1면</th><td><div> <ul><li>〈<a>Taxman</a>〉</li> <li>〈<a>Eleanor Rigby</a>〉</li> <li>〈<a>I'm Only Sleeping</a>〉</li> <li>〈<a>Love You To</a>〉</li> <li>〈<a>Here, There and Everywhere</a>〉</li> <li>〈<a>Yellow Submarine</a>〉</li> <li>〈<a>She Said She Said</a>〉</li></ul> </div></td></tr><tr><th>2면</th><td><div> <ul><li>〈<a>Good Day Sunshine</a>〉</li> <li>〈<a>And Your Bird Can Sing</a>〉</li> <li>〈<a>For No One</a>〉</li> <li>〈<a>Doctor Robert</a>〉</li> <li>〈<a>I Want to Tell You</a>〉</li> <li>〈<a>Got to Get You into My Life</a>〉</li> <li>〈<a>Tomorrow Never Knows</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미수록곡</th><td><div> <ul><li>〈<a>Paperback Writer</a>〉</li> <li>〈<a>Rain</a>〉</li></ul> </div></td></tr><tr><th>관련 문서</th><td><div> <ul><li>《<a>Yesterday and Today</a>》</li> <li><a>예수보다 유명하다</a></li> <li><a>비틀즈의 음반 목록</a></li></ul> </div></td></tr><tr><td colspan="2"><div><div> <ul><li>《<a>Please Please Me</a>》</li> <li>《<a>With the Beatles</a>》</li> <li>《<a>A Hard Day's Night</a>》</li> <li>《<a>Beatles for Sale</a>》</li> <li>《<a>Help!</a>》</li> <li>《<a>Rubber Soul</a>》</li> <li>《<a>Revolver</a>》</li> <li>《<a>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a>》</li> <li>《<a>Magical Mystery Tour</a>》</li> <li>《<a>The Beatles (White Album)</a>》</li> <li>《<a>Yellow Submarine</a>》</li> <li>《<a>Abbey Road</a>》</li> <li>《<a>Let It Be</a>》</li></ul> </div></div></td></tr></tbody></table></div>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비틀즈</a>의 <a>음반 목록</a></div></th></tr><tr><td colspan="2"><div>주요 음반은 <b>볼드체</b>로 표시.</div></td></tr><tr><th>정규 음반</th><td><div> <ul><li><b>《<a>Please Please Me</a>》</b></li> <li><b>《<a>With the Beatles</a>》</b></li> <li><b>《<a>A Hard Day's Night</a>》</b></li> <li><b>《<a>Beatles for Sale</a>》</b></li> <li><b>《<a>Help!</a>》</b></li> <li><b>《<a>Rubber Soul</a>》</b></li> <li><b>《<a>Revolver</a>》</b></li> <li><b>《<a>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a>》</b></li> <li><b>《<a>The Beatles (White Album)</a>》</b></li> <li><b>《<a>Yellow Submarine</a>》</b></li> <li><b>《<a>Abbey Road</a>》</b></li> <li><b>《<a>Let It Be</a>》</b></li></ul> </div></td></tr><tr><th>미국 음반</th><td><div> <ul><li>《<a>Introducing... The Beatles</a>》</li> <li>《<a>Meet the Beatles!</a>》</li> <li>《<a>The Beatles' Second Album</a>》</li> <li>《<a>A Hard Day's Night</a>》</li> <li>《<a>Something New</a>》</li> <li>《<a>The Beatles' Story</a>》</li> <li>《<a>Beatles '65</a>》</li> <li>《<a>The Early Beatles</a>》</li> <li>《<a>Beatles VI</a>》</li> <li>《<a>Help!</a>》</li> <li>《<a>Rubber Soul</a>》</li> <li>《<a>Yesterday and Today</a>》</li> <li>《<a>Revolver</a>》</li> <li><b>《<a>Magical Mystery Tour</a>》</b></li> <li>《<a>Yellow Submarine</a>》</li> <li>《<a>Hey Jude</a>》</li></ul> </div></td></tr><tr><th>캐나다 음반</th><td><div> <ul><li>《<a>Beatlemania! With the Beatles</a>》</li> <li>《<a>Twist and Shout</a>》</li> <li>《<a>The Beatles' Long Tall Sally</a>》</li></ul> </div></td></tr><tr><th>EP</th><td><div> <ul><li>《<a>Twist and Shout</a>》</li> <li>《<a>The Beatles' Hits</a>》</li> <li>《<a>The Beatles (No. 1)</a>》</li> <li>《<a>All My Loving</a>》</li> <li>《<a>Souvenir of Their Visit to America</a>》</li> <li>《<a>Four by the Beatles</a>》</li> <li>《<a>Long Tall Sally</a>》</li> <li>《<a>Extracts from the Film A Hard Day's Night</a>》</li> <li>《<a>Extracts from the Album A Hard Day's Night</a>》</li> <li>《<a>4-by the Beatles</a>》</li> <li>《<a>Beatles for Sale</a>》</li> <li>《<a>Beatles for Sale (No. 2)</a>》</li> <li>《<a>The Beatles' Million Sellers</a>》</li> <li>《<a>Yesterday</a>》</li> <li>《<a>Nowhere Man</a>》</li> <li>《<a>Magical Mystery Tour</a>》</li></ul> </div></td></tr><tr><th>라이브 음반</th><td><div> <ul><li>《<a>Live! at the Star-Club in Hamburg, Germany; 1962</a>》</li> <li>《<a>The Beatles at the Hollywood Bowl</a>》</li> <li>《<a>First Live Recordings</a>》</li> <li>《<a>Live at the BBC</a>》</li> <li>《<a>On Air – Live at the BBC Volume 2</a>》</li></ul> </div></td></tr><tr><th>컴필레이션</th><td><div> <ul><li>《<a>From Then To You / The Beatles' Christmas Album</a>》</li> <li>《<a>The Songs Lennon and McCartney Gave Away</a>》</li> <li>《<a>1962–1966</a>》</li> <li>《<a>1967–1970</a>》</li> <li>《<a>Sessions</a>》</li> <li><b>《<a>Past Masters</a>》</b></li> <li>《<a>앤솔로지</a>》 (<a>1</a>, <a>2</a>, <a>3</a>)</li> <li>《<a>I Saw Her Standing There</a>》</li> <li>《<a>The Beatles Bootleg Recordings 1963</a>》</li></ul> </div></td></tr><tr><th>리믹스</th><td><div> <ul><li>《<a>Yellow Submarine Songtrack</a>》</li> <li>《<a>Let It Be... Naked</a>》</li> <li>《<a>Love</a>》</li></ul> </div></td></tr><tr><th>박스 세트</th><td><div> <ul><li>《<a>The Beatles Collection</a>》</li> <li>《<a>The Beatles: The Collection</a>》</li> <li>《<a>The Beatles Box</a>》</li> <li>《<a>The Beatles Box Set</a>》</li> <li>《The Capitol Albums》 <ul><li>vol. <a>1</a></li> <li><a>2</a></li></ul></li> <li>《<a>The Beatles in Mono</a>》</li> <li>《<a>The Beatles (The Original Studio Recordings)</a>》</li> <li>《<a>The U.S. Albums</a>》</li> <li>《<a>The Japan Box</a>》</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Yesterday_and_Today&amp;oldid=24061983</a>"</div> <div><div><a>분류</a>: <ul><li><a>1966년 음반</a></li><li><a>캐피틀 레코드 음반</a></li><li><a>영어 음반</a></li><li><a>비틀즈의 음반</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Deutsch</a></li><li><a>English</a></li><li><a>Español</a></li><li><a>Suomi</a></li><li><a>Français</a></li><li><a>Italiano</a></li><li><a>日本語</a></li><li><a>ქართული</a></li><li><a>Norsk</a></li><li><a>Polski</a></li><li><a>Português</a></li><li><a>Русский</a></li><li><a>Slovenščina</a></li><li><a>Svenska</a></li><li><a>Türkçe</a></li><li><a>中文</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4월 19일 (금) 07: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Paperback Writer의 커버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지정하는 번호는 어디 근처에 있는가?
RIAA 심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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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760
11,978
[ "Paperback Writer의 커버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지정하는 번호는 어디 근처에 있는가?", "미국에서 Paperback Writer 싱글앨범을 생산한 레코드 회사는 어디인가?", "로스앤젤레스 에서 생산된 스테레오 음반의 번호는?", "Paperback Writer를 생산한 회사는?", "미국 캐피틀 레코드가 생산한 Paperback Writer는 몇 장일까?", "캐피틀 모회사인 EMI의 회장은 누구인가?", "정육점 사진을 옹호했던 비틀즈 멤버는 레논과 누가있었나?", "정육점 사진을 비난했던 비틀즈 멤버는 링고 스타와 누가 있었나?", "정육점 사진의 사용을 역겹고 한심했다고 말한 멤버의 이름은?", "레논은 정육점 사진이 무엇과 관련이 있다고 했는가?", "비틀즈의 멤버 중 정육점 사진은 베트남과 관련이 있다고 말한 사람은 누구일까?", "정육점 사진을 역겹고 한심하다고 표현한 비틀즈의 멤버는 누구인가?" ]
<!DOCTYPE html> Yesterday and Today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Yesterday and Today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Yesterday and Today</th></tr><tr><td colspan="2"> </td></tr><tr><th colspan="2">비틀즈의 정규 음반</th></tr><tr><th>발매일</th> <td> 1966년 6월 20일 (1966-06-20)[1]</td></tr><tr><th>녹음</th> <td> 1965년–1966년런던 EMI 스튜디오</td></tr><tr><th>장르</th> <td> 록, 사이키델릭 록, 포크 록</td></tr><tr><th>길이</th> <td> 27:33</td></tr><tr><th>레이블</th> <td> 캐피틀</td></tr><tr><th>프로듀서</th> <td> 조지 마틴</td></tr><tr><th colspan="2">비틀즈 북미 연표</th></tr> <tr><td colspan="2"> <table> <tbody><tr> <td>Rubber Soul(1965) </td> <td>Yesterday and Today(1966) </td> <td>Revolver(1966) </td></tr></tbody></table></td></tr> </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2">전문가 평가</th></tr><tr><th colspan="2">평가 점수</th></tr><tr><th>출처</th><th>점수</th></tr><tr><td>올뮤직</td><td>[2]</td></tr><tr><td>《대중음악의 백과사전》</td><td>[3]</td></tr><tr><td>《롤링 스톤 앨범 가이드》</td><td>[4]</td></tr></tbody></table> 《Yesterday and Today》는 미국 캐피틀 레코드를 통해 발매된 비틀즈의 아홉 번째 앨범으로 미국 발매를 통틀면 열일곱 번째 음반이 된다. 본래 미국과 캐나다만 발매 예정이었지만, 1970년대에 일본에서도 발매, 뒤이어 영국에서 콤팩트 디스크 형식으로 2014년 발매됐다. 이 앨범은 비틀즈 멤버가 흰 셔츠를 입고 주위에 아기 인형과 고기 조각이 널부러진, "정육점 커버(butcher cover)"라 불리는 오리지널 커버를 둘러싼 논란으로 회자되고 있다. 앨범의 제목은 그들의 곡인 〈Yesterday〉를 바탕으로 붙여졌는데, 초기 앨범에는 〈Yesterday〉에 따옴표가 둘러져 있다.[5] 목차 1 음악 2 발표와 반응 2.1 "정육점 커버" 3 CD 재발매 4 곡 목록 5 차트와 판매량 5.1 차트 성적 5.2 판매량 6 각주 7 참고 문헌 8 외부 링크 음악[편집] 《Yesterday and Today》는 당시 비틀즈가 영국에서 발표한 두 개의 LP에서 미국에서 미발표된 수록곡을 가져왔다. 세 개의 곡은 영국에서 LP에 담겨 발표될 예정이었으며, 두 곡은 싱글의 양면에 자리잡고 있다. 영국 LP 《Help!》에서는 〈Act Naturally〉와 〈Yesterday〉. (캐피틀에서 싱글로 발표한 바 있다) 영국 LP 《Rubber Soul》에서는 〈Nowhere Man〉과 〈What Goes On〉 (마찬가지로 캐피틀에서 싱글로 발표한 바 있다), 〈Drive My Car〉, 〈If I Needed Someone〉.[6] 더블 A 싱글에 실린 〈Day Tripper〉/〈We Can Work It Out〉. 당시 미발표 영국 LP 《Revolver》에서 〈I'm Only Sleeping〉, 〈Doctor Robert〉, 〈And Your Bird Can Sing〉 (이 버전은 듀오포닉 믹스 적용).[7] 이 세 수록곡들은 진짜 스테레오 버전으로 테이프, 차후 비닐로 발매된다. 〈I'm Only Sleeping〉과 〈Doctor Robert〉의 진짜 스테레모 믹스는 영국에서 《Revolver》 발표 이후 《Yesterday and Today》에 실려 나오게 된다.[8] 비틀즈는 트랙의 순서를 고심해서 정했기 때문에 이러한 캐피틀의 마구잡이식 수록곡 선정에 화를 냈다.[9] 발표와 반응[편집] 1966년 6월 20일 발표된 《Yesterday and Today》는 문제가 되는 커버로 비틀즈가 매체와 배급사의 질타를 받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음반이 디스크 자키와 음반 평론가에게 먼저 보내졌고, 엄청난 악평이 들끓자 캐피틀은 바로 750,000장을 회수하여 커버를 교체했다. 커버를 바꾸고 홍보하는데 250,000달러가 들어 그들은 초기 수익을 전부 날렸다.[10] 이런 사건에도 불구하고 음반은 미국 빌보드 차트에 1966년 7월 30일 정상에 올라 곧바로 골드 인증을 받았다. 음반은 5주나 정상에 머물렀다.[11] "정육점 커버"[편집] 논란이 된 "정육점" 커버 1966년 3월 25일 사진작가 로버트 휘테이커는 'A Somnambulant Adventure'라는 제목의 개념 예술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비틀즈를 스튜디오에 불렀다. 그는 비틀즈에게 정육점 작업복을 입히고, 고기 조각과 부서진 플라스틱 아기 인형을 걸치게 하고는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일상같은 사진 찍기에 질려 있었고, 이 콘셉트는 그들의 블랙 유머에 부합하는 것이었다.[9] 레논은 당시 그들이 "또다른 포토 세션과 또다른 비틀즈 일을 하느라 지루하고 열 받았다"고 말했다.[12] 사실 음반 커버로 쓸 예정은 아니었지만, 비틀즈는 이 사진을 홍보용으로 사용해도 되는지 신청을 했다. 2002년 캐피틀사의 전 사장인 앨런 W. 리빙스톤이 《모조》 인터뷰에서 한 말에 의하면, 사진은 폴 매카트니가 음반 커버로 차용해달라고 강하게 밀어붙였으며, 그가 이를 두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라고 말했다고 한다.[13] 그들이 웃으면서 살인을 저지른 듯한 사진은 영국에서 〈Paperback Writer〉 판촉용 싱글의 커버에 쓰였다. 비슷한 사진이 1966년 6월 11일자 영국 잡지 《디스크》의 커버로 사용되었다.[14] 미국에서는 캐피틀 레코드가 《Yesterday and Today》에서 사용된 사진과 같은 것을 사용한 〈Paperback Writer〉를 약 750,000장 생산했다.[14][15] 이 음반들은 캐피틀사 공장이 자리잡은 미국의 네 개 도시인 로스앤젤레스, 스크랜턴, 윈체스터, 잭슨빌에서 생산되었다. 커버가 어디서 나왔는지 지정하는 번호는 RIAA 심블 근처에 있다. 예를 들어 로스앤젤레스 공장의 스테레오 음반은 "5"로 지정, 로스앤젤레스 모노 버전은 "6"으로 표기되어 있다. 모노와 비교했을 때 스테레오는 10:1의 비율로 그 수가 적어 수집가 사이에서 더 희귀, 가치있게 해준다. 적은 수의 음반이 DJ와 평론가에게 보내졌고 즉각적으로 비난이 쇄도하자 캐피틀의 모회사인 EMI의 회장 조셉 락우드 경은 즉시 회수할 것을 명했다.[16] 당시 비틀즈의 일부는 정육점 사진의 사용을 옹호했다. 레논은 "그것은 베트남과 관련이 있다"고 말했고, 매카트니는 비평가들이 "순진"하다고 말했다.[14] 그러나 이같은 제언은 모든 밴드 멤버들의 뜻과 같지 않았다. 조지 해리슨은 《비틀즈 앤솔로지》에서 "역겹고 한심했어요. 가끔은 다들 바보 같은 짓을 했죠. 순진하고 멍청한 짓인데도 쿨하다거나 멋지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건데, 그 작업도 그런 종류였어요."라고 말했다.[9] 링고 스타는 "어쩌다 그 촬영을 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떻게 정육점 복장을 하고 온몸에 고기를 두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고요. 우리들 눈을 보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지요. 살다보면 그런 일도 있는 겁니다."라며 담담하게 회고했다.[9] CD 재발매[편집] 《Yesterday and Today》는 2014년 컴팩트 디스크로 발표되었다. 낱개로 출시되거나 박스 세트 《The U.S. Albums》에도 들어갔다. 원래 미국 버전과 믹스가 다른 부분이 있다.[17] 모노 〈Drive My Car〉은 영국 모노 믹스로 교체. 모노 〈Doctor Robert〉에서 레논이 마지막에 굉장히 빠른 말을 하는 것 생략. 〈Day Tripper〉와 〈We Can Work It Out〉를 제외한 스테레오는 2009년 영국 스테레오 CD로 교체. CD 커버는 "정육점" 커버이나 CD는 "트렁크" 커버가 붙여져 있다. 곡 목록[편집] 특별한 표기가 없는 한 모든 곡은 레논-매카트니 작곡이다. <table> <tbody><tr> <th colspan="10">1면</th> </tr> <tr> <th>#</th> <th>제목</th> <th>재생 시간</th> </tr> <tr> <td>1.</td> <td>〈Drive My Car〉  </td> <td>2:25</td> </tr> <tr> <td>2.</td> <td>〈I'm Only Sleeping〉  </td> <td>2:58</td> </tr> <tr> <td>3.</td> <td>〈Nowhere Man〉  </td> <td>2:40</td> </tr> <tr> <td>4.</td> <td>〈Doctor Robert〉  </td> <td>2:14</td> </tr> <tr> <td>5.</td> <td>〈Yesterday〉  </td> <td>2:04</td> </tr> <tr> <td>6.</td> <td>〈Act Naturally〉 (모리슨–러셀)</td> <td>2:27</td> </tr> </tbody></table> <table> <tbody><tr> <th colspan="10">2면</th> </tr> <tr> <th>#</th> <th>제목</th> <th>재생 시간</th> </tr> <tr> <td>1.</td> <td>〈And Your Bird Can Sing〉  </td> <td>2:02</td> </tr> <tr> <td>2.</td> <td>〈If I Needed Someone〉 (조지 해리슨)</td> <td> </td> </tr> <tr> <td>3.</td> <td>〈We Can Work It Out〉  </td> <td>2:10</td> </tr> <tr> <td>4.</td> <td>〈What Goes On?〉 (레논-매카트니-링고 스타)  </td> <td>2:44</td> </tr> <tr> <td>5.</td> <td>〈Day Tripper〉  </td> <td>2:47</td> </tr> </tbody></table> 차트와 판매량[편집] 미국에서는 1966년 12월 31일까지 967,410장을 팔았고, 10년말에는 1,230,558장을 팔았다.[18] <table><tbody><tr> <td> 차트 성적[편집] <table> <tbody><tr> <th>연도 </th> <th>차트 </th> <th>순위 </th></tr> <tr> <td>1966 </td> <td>미국 빌보드 탑 LP[19] </td> <td>1 </td></tr></tbody></table> </td> <td> 판매량[편집] <table> <caption> </caption> <tbody><tr> <th>국가 </th> <th>인증</th> <th>판매량/출하량 </th></tr> <tr> <th>캐나다 (뮤직 캐나다)[20] </th> <td>플래티넘 </td> <td>100,000^ </td></tr> <tr> <th>미국 (RIAA)[21] </th> <td>2× 플래티넘 </td> <td>2,000,000^ </td></tr> <tr> <td colspan="3"> ^출하량을 기반으로 한 인증 </td></tr></tbody></table> </td></tr></tbody></table> 각주[편집] ↑ Lewisohn, Mark (1988). 《The Beatles Recording Sessions》. New York: Harmony Books. 201쪽. ISBN 0-517-57066-1.  ↑ Eder, Bruce. “The Beatles Yesterday … and Today”. AllMusic. 2015년 3월 26일에 확인함.  ↑ Larkin, Colin (2006). 《Encyclopedia of Popular Music》 4 revis판. New York, NY: Oxford University Press. 487쪽. ISBN 0-19-531373-9.  ↑ “The Beatles 'Yesterday' … and Today”. Acclaimed Music. 2015년 8월 2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3월 26일에 확인함.  ↑ McGeary. “The Beatles' Internet Beatles Album”. 2007년 10월 9일에 확인함.  ↑ Schaffner, Nicholas. (1977). The Beatles Forever, Harrisburg, PA: Cameron House. ISBN 0-8117-0225-1, 205-209 ↑ Eder, Bruce. [(영어) https://www.allmusic.com/album/r1517 "Yesterday...and Today Overview"]. Retrieved 19 January 2006. ↑ http://www.columbia.edu/~brennan/beatles/var-1966.html ↑ 가 나 다 라 The Beatles. (2000). 《The Beatles Anthology》, San Francisco, CA: Chronicle Books LLC. ISBN 0-8118-2684-8, 204-205 ↑ Lewis, Dan. "Beatles Make $250,000 Goof" Boston Globe 25 June 1966: 8 ↑ Whitburn, Joel. Top Pop Albums 1955–2001 (2001) p. 1178 ↑ Sheff, David (2000). 《All We Are Saying: The Last Major Interview with John Lennon and Yoko Ono》. Macmillan. 219쪽. ISBN 9780312254643.  ↑ Gaffney, Dennis (2008년 10월 27일). “Antiques Roadshow | Follow the Stories | The Beatles' "Butcher" Cover | PBS”. 《PBS.org》. 2011년 2월 9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Schaffner, Nicholas. (1977). The Beatles Forever, Harrisburg, PA: Cameron House. ISBN 0-8117-0225-1, 55 ↑ “Beatles' LP Makes Cap. Run for Cover”. 《Billboard》. 78권 26호 (Cincinnati, Ohio: Billboard Publishing). 1966년 6월 25일. 3, 6쪽.  ↑ “Butcher cover, Canadian - Paul White Letter”. Rarebeatles.com. 2011년 8월 18일에 확인함.  ↑ “보관 된 사본”. 2017년 5월 28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2월 9일에 확인함.  ↑ “How Many Records did the Beatles actually sell?”. Deconstructing Pop Culture by David Kronemyer. 2009년 4월 29일. 2016년 3월 6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5년 7월 11일에 확인함.  ↑ Whitburn 2010, 64쪽. ↑ 《Canadian album certifications – The Beatles – Yesterday and Today》, 뮤직 캐나다, 2015년 6월 9일에 확인함  ↑ 《American album certifications – The Beatles – Yesterday and Today》, 미국 음반 산업 협회, 2015년 6월 9일에 확인함  If necessary, click Advanced, then click Format, then select Album, then click SEARCH 참고 문헌[편집] Whitburn, Joel (2010), 《Joel Whitburn Presents Top Pop Albums, Seventh Edition》, Record Research Inc., ISBN 0-89820-183-7  외부 링크[편집] 2011 Auction of "Butcher Cover" The Real Truth Behind The Beatles Butcher Cover, includes detailed discography on all The Beatles Capitol Records releases <table> <tbody><tr> <td rowspan="1">이전 프랭크 시나트라의 《Strangers in the Night》 </td> <td rowspan="1">빌보드 200 1위 음반1966년 7월 30일 – 9월 2일 </td> <td rowspan="1">이후비틀즈의 《Revolver》 </td></tr> </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2">vdeh《Revolver》</th></tr><tr><th>수록곡</th><td><table><tbody><tr><th>1면</th><td> 〈Taxman〉 〈Eleanor Rigby〉 〈I'm Only Sleeping〉 〈Love You To〉 〈Here, There and Everywhere〉 〈Yellow Submarine〉 〈She Said She Said〉 </td></tr><tr><th>2면</th><td> 〈Good Day Sunshine〉 〈And Your Bird Can Sing〉 〈For No One〉 〈Doctor Robert〉 〈I Want to Tell You〉 〈Got to Get You into My Life〉 〈Tomorrow Never Knows〉 </td></tr></tbody></table></td></tr><tr><th>미수록곡</th><td> 〈Paperback Writer〉 〈Rain〉 </td></tr><tr><th>관련 문서</th><td> 《Yesterday and Today》 예수보다 유명하다 비틀즈의 음반 목록 </td></tr><tr><td colspan="2"> 《Please Please Me》 《With the Beatles》 《A Hard Day's Night》 《Beatles for Sale》 《Help!》 《Rubber Soul》 《Revolver》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Magical Mystery Tour》 《The Beatles (White Album)》 《Yellow Submarine》 《Abbey Road》 《Let It Be》 </td></tr></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2">vdeh비틀즈의 음반 목록</th></tr><tr><td colspan="2">주요 음반은 볼드체로 표시.</td></tr><tr><th>정규 음반</th><td> 《Please Please Me》 《With the Beatles》 《A Hard Day's Night》 《Beatles for Sale》 《Help!》 《Rubber Soul》 《Revolver》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 《The Beatles (White Album)》 《Yellow Submarine》 《Abbey Road》 《Let It Be》 </td></tr><tr><th>미국 음반</th><td> 《Introducing... The Beatles》 《Meet the Beatles!》 《The Beatles' Second Album》 《A Hard Day's Night》 《Something New》 《The Beatles' Story》 《Beatles '65》 《The Early Beatles》 《Beatles VI》 《Help!》 《Rubber Soul》 《Yesterday and Today》 《Revolver》 《Magical Mystery Tour》 《Yellow Submarine》 《Hey Jude》 </td></tr><tr><th>캐나다 음반</th><td> 《Beatlemania! With the Beatles》 《Twist and Shout》 《The Beatles' Long Tall Sally》 </td></tr><tr><th>EP</th><td> 《Twist and Shout》 《The Beatles' Hits》 《The Beatles (No. 1)》 《All My Loving》 《Souvenir of Their Visit to America》 《Four by the Beatles》 《Long Tall Sally》 《Extracts from the Film A Hard Day's Night》 《Extracts from the Album A Hard Day's Night》 《4-by the Beatles》 《Beatles for Sale》 《Beatles for Sale (No. 2)》 《The Beatles' Million Sellers》 《Yesterday》 《Nowhere Man》 《Magical Mystery Tour》 </td></tr><tr><th>라이브 음반</th><td> 《Live! at the Star-Club in Hamburg, Germany; 1962》 《The Beatles at the Hollywood Bowl》 《First Live Recordings》 《Live at the BBC》 《On Air – Live at the BBC Volume 2》 </td></tr><tr><th>컴필레이션</th><td> 《From Then To You / The Beatles' Christmas Album》 《The Songs Lennon and McCartney Gave Away》 《1962–1966》 《1967–1970》 《Sessions》 《Past Masters》 《앤솔로지》 (1, 2, 3) 《I Saw Her Standing There》 《The Beatles Bootleg Recordings 1963》 </td></tr><tr><th>리믹스</th><td> 《Yellow Submarine Songtrack》 《Let It Be... Naked》 《Love》 </td></tr><tr><th>박스 세트</th><td> 《The Beatles Collection》 《The Beatles: The Collection》 《The Beatles Box》 《The Beatles Box Set》 《The Capitol Albums》 vol. 1 2 《The Beatles in Mono》 《The Beatles (The Original Studio Recordings)》 《The U.S. Albums》 《The Japan Box》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Yesterday_and_Today&amp;oldid=24061983" 분류: 1966년 음반캐피틀 레코드 음반영어 음반비틀즈의 음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lovenščinaSvenskaTürkçe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9일 (금) 07:2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Yesterday and Today** - 비틀즈 앨범 요약 - **발매일**: 1966년 6월 20일 - **녹음**: 1965-1966년, 런던 EMI 스튜디오 - **장르**: 록, 사이키델릭 록, 포크 록 - **길이**: 27:33 - **레이블**: 캐피틀 - **프로듀서**: 조지 마틴 #### **앨범 개요** - **비틀즈의 아홉 번째 앨범** (미국 발매 기준 17번째) - **논란**: "정육점 커버"로 알려진 앨범 커버가 큰 논란을 일으킴 - **제목 유래**: 곡 〈Yesterday〉에서 따옴 #### **음악** - **수록곡**: 영국 LP에서 미발표된 곡 포함 - **영국 LP 《Help!》**: 〈Act Naturally〉, 〈Yesterday〉 - **영국 LP 《Rubber Soul》**: 〈Nowhere Man〉, 〈What Goes On〉, 〈Drive My Car〉, 〈If I Needed Someone〉 - **영국 LP 《Revolver》**: 〈I'm Only Sleeping〉, 〈Doctor Robert〉, 〈And Your Bird Can Sing〉 #### **발표와 반응** - **발표 후 반응**: 초기 악평으로 인해 750,000장 회수 및 커버 교체 - **차트 성적**: 1966년 7월 30일 미국 빌보드 차트 1위, 5주간 유지 - **판매량**: 미국에서 2,000,000장 이상 판매 #### **"정육점 커버" 논란** - **사진작가**: 로버트 휘테이커가 촬영 - **비틀즈의 반응**: 일부 멤버는 커버 사용을 옹호, 다른 멤버는 부정적 반응 - **결과**: 커버 교체로 인한 큰 비용 발생 (250,000달러) #### **CD 재발매** - **2014년**: 컴팩트 디스크로 재발매, 원래 믹스와 차이 있음 #### **차트와 판매량** - **미국 차트**: 1966년 12월 31일까지 967,410장 판매 - **캐나다**: 플래티넘 인증 (100,000장 판매) 이 앨범은 비틀즈의 음악적 진화와 당시 사회적 이슈를 반영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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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_없는_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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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소리 없는 비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소리 없는 비명</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tbody><tr> <td colspan="2"> <div><div><img></div><span><big><big><b>소리 없는 비명</b></big></big><br><big><i>The Silent Scream</i></big></span></div> </td></tr> <tr> <th>감독 </th> <td>Jack Duane Dabner </td></tr> <tr> <th>각본 </th> <td>Donald S. Smith<sup><a>&#91;1&#93;</a></sup> </td></tr> <tr> <th>해설 </th> <td>Bernard Nathanson </td></tr> <tr> <th>촬영 </th> <td>Roger Boller </td></tr> <tr> <th>편집 </th> <td>Dan R. Fouts </td></tr> <tr> <th>음악 </th> <td>James Gabriel Stipech </td></tr> <tr> <th>배급사 </th> <td>American Portrait Films </td></tr> <tr> <th>개봉일 </th> <td>1984년 </td></tr> <tr> <th>시간 </th> <td>28분 </td></tr> <tr> <th>국가 </th> <td>미국 </td></tr> <tr> <th>언어 </th> <td>영어 </td></tr> </tbody></table> <p>《<b>소리 없는 비명</b>》(<i>The Silent Scream</i>)은 1984년에 제작된 <a>낙태</a> 반대 <a>교육 영화</a>이다. 낙태가 진행 중인 <a>자궁</a> 내부를 <a>초음파</a>로 보여주는 것이 내용이다. 이때 태아가 마치 고통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상물은 낙태 반대 단체들의 선전 도구로 인기가 높으나,<sup><a>&#91;2&#93;</a></sup> 의학계에서는 비판받고 있다.<sup><a>&#91;3&#93;</a></sup> 산부인과 의사 Bernard N. Nathanson 이 내레이터이자 의학 전문가 역을 맡았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학계의 비판</span></a></li> <li><a><span>2</span> <span>상원 소위원회 청문회</span></a></li> <li><a><span>3</span> <span>태아통각에 대하여</span></a></li> <li><a><span>4</span> <span>버나드 나단슨 2008년 인터뷰</span></a></li> <li><a><span>5</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6</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학계의 비판</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의학계는 대부분 이 영화에 대해 호도적이며 기만적이라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a>시카고 마운트시나이 의학센터</a> 산부인과 및 부인과 교수 Richard Berkowitz는 이 영화가 "사실을 호도하고 있으며 불공정하다"고 했다.<sup><a>&#91;3&#93;</a></sup> <a>예일 대학교 의과대학</a>의 John Hobbins는 영화가 특수효과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기만적이며, "기술적 사기행위"라고 했다. 그는 영화에 삽입된 초음파 영상이 처음에는 느리게 재생되다가 수술 도구가 삽입되는 순간부터 고속재생시킴으로써 "태아가 위협을 느끼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 했음을 지적했다. Hobbins는 소위 "비명"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태아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입을 벌린 채 지낸다"면서 문제의 "비명"은 사실 하품일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흐릿한 초음파 영상 속에서 "입"으로 보이는 부분도 사실 태아의 뺨과 가슴 사이의 공간인 것으로 확인하였다.<sup><a>&#91;3&#93;</a></sup> </p><p>태아 발달 전문가들은 영화에 등장한 Nathanson의 주장과 달리, 태아는 위험을 인식하거나 의도적인 운동을 할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a>존스 홉킨스 의과대학</a>의 신경생물학자 David Bodian은 12주 된 태아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 그 증거는 없으며, 다만 수술도구가 삽입됨으로 인한 반사운동일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에서 사용된 초음파 영상과 태아 모형 역시 사람을 호도하기 위해 완전히 자란 아기 크기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12주짜리 태아의 크기는 2인치에 불과하다.<sup><a>&#91;3&#93;</a></sup> </p> <h2><span></span><span>상원 소위원회 청문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1985년 태아통각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서 상원 소위원회가 열렸다. 영상에 대한 의학적 견해를 추가로 청취하기 위해서 비판적인 인사와 지지하는 인사가 함께 참석했다. 청문회에서 진술한 사람 중에는 영상을 비판했던 리차드 버코위츠 박사와 스코틀랜드 의사이며 초음파 진단기를 처음으로 개발한 아이언 도널드 박사가 있다. 도널드 박사는 선서를 하고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영상에서 보였던 태아의 움직임은 조작된 것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가공한 결과물도 아니다.” 작품을 만든 버나드 나단슨도 청문회에 나와서 증언했다. “영상 중에는 태아를 자세히 보여 주기 위해서 화면을 정지하거나 느린 화면을 사용한 부분이 있지만 속이기 위한 목적으로 화면을 사용한 적은 없고 항상 화면을 정상속도로 되돌렸다.” 태아통증에 대하여는 “영상에서 태아가 보인 반응을 보면 원시적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태아가 고통 중에 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라고 진술했다. 한편 촬영된 태아의 발달단계에서는 대뇌피질의 통증 인지는 없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영문 위키피디아 중에서 해당 항목 번역 <a>https://en.wikipedia.org/wiki/The_Silent_Scream</a>] </p> <h2><span></span><span>태아통각에 대하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 1980년대로부터 30년이 지난 현재는 신경과학이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좀 더 정확한 태아의 상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30년 전 의학자의 이해 수준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 </p><p>2010년 이후 미국에서는 통각태아 보호법, 또는 태아통각 낙태금지법(PAIN CAPABLE UNBORN CHILD PROTECTION ACT)을 만드는 주가 늘어났다. 19주 이전에는 낙태를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20주 이후의 아기들부터라도 우선적으로 낙태로부터 보호하자는 공화당의 정책이다. 2017년 현재 50개 주 중 16개 주가 이 법을 만들어서 시행하고 있다. 2013년 5월 23일 하원에서 낙태에 관한 청문회가 열렸는데 신경과학 전문가인 모린 콘딕 박사가 참석하여 의원들에게 전문적인 의학 정보를 진술했다. 콘딕 박사(Maureen L. Condic, PhD)는 유타의대 신경생물학, 해부학 조교수이다. 그는 태아의 신경발달 단계를 아래와 같이 요약하여 설명하였다.<br> 3주: 신경계 기본구조 형성<br> 4주: 대뇌피질에서 최초의 신경세포 뉴런 발생<br> 7주: 뉴런과 뉴런의 접합부위인 시냅스 형성 시작, 신경자극의 전달이 가능하다는 뜻<br> 8~10주: 척수회로가 통증 감지, 태아가 통증 신호에 반응할 수 있다는 뜻, 전두엽-피질하 회로 형성<br> 12~18주: 척추시상경로 형성, 태아가 통증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뜻<br> 22~24주: 원거리 피질투영 가능<br> 25세: 피질신경회로 완성단계에 도달, 생물학적으로 24세까지 성장단계를 지속하는데 신경계가 100% 완성단계가 아니라고 해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를 반문하는 뜻 </p><p>[코딕 박사의 진술 내용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a>https://www.youtube.com/watch?v=5fXS5T5c8eY</a>] </p> <h2><span></span><span>버나드 나단슨 2008년 인터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버나드 나단슨(Bernard Nathanson, 1926~2011)은 한때 낙태를 많이 했던 산부인과 의사이었으나 전향하여 낙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하며 평생 동안 많은 생명을 구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2008년 인터뷰를 했던 내용 중 ‘소리 없는 비명’에 관한 대목이 있다. </p><p>‘The Silent Scream(소리 없는 비명, 또는 침묵의 절규)’라는 영상을 제작하여 프로라이프 메시지를 전할 때의 일이다. 미국의 낙태를 주도하고 있는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은 낙태법폐지전국연합(NARAL)이 발간한 책을 이용하여 ‘소리 없는 비명’의 영상은 조작된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나단슨 박사는 이런 소문이야말로 NARAL의 계략이고 거짓말이라고 확언했다. “가족계획연맹은 소문의 책임을 져야 한다. 영상은 조작된 것이 아니다. 영상의 사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스코틀랜드까지 가서 초음파 진단기를 발명한 아이언 도널드 박사를 만나 검증을 받았다. 영상은 모두 보는 그대로 사실이며, 어떤 수정이나 조작이 가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도널드 박사는 맹세하며 진술했다.” ‘소리 없는 비명’의 영상이 조작되었다는 소문이 조작된 것이다. </p><p>원문 기사 전문 <a>https://www.lifesitenews.com/news/former-abortionist-bernard-nathanson-exposes-lies-of-american-pro-abortion-</a>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Donald S. Smith, founder of <i>Crusade for Life</i> <a>http://www.crusadeforlife.org/innocent%20blood.htm</a></span> </li> <li><span><a>↑</a></span> <span><cite>Roiphe, Katie (2008년 1월 1일). <a>&#8220;Choice words&#8221;</a>. &#12298;Guardian Unlimited&#12299; (Guardian News and Media)<span>. 2008년 1월 1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span> <span><cite>Wallis, Claudia; Banta, Kenneth W. (1985년 3월 25일). <a>&#8220;Medicine: Silent Scream&#8221;</a>. &#12298;<a>TIME</a>&#12299;<span>. 2011년 3월 17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ol></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span><span><a>소리 없는 비명</a></span></span> - 공식 웹사이트</li> <li><b><span>(영어)</span></b> <a>소리 없는 비명</a> - <a>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a></li></ul> <table> <tbody><tr> <td><a><img></a> </td> <td>이 글은 영화에 관한 <a>토막글</a>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a>문서를 완성해</a> 갑시다. </td></tr> </tbody></table>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소리_없는_비명&amp;oldid=24092168</a>"</div> <div><div><a>분류</a>: <ul><li><a>1984년 영화</a></li><li><a>낙태를 소재로 한 영화</a></li><li><a>미국의 다큐멘터리 영화</a></li><li><a>미국의 선전 영화</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영화에 관한 토막글</a></li><li><a>큰 토막글 문서</a></li><li><a>모든 토막글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Čeština</a></li><li><a>Deutsch</a></li><li><a>English</a></li><li><a>Español</a></li><li><a>فارسی</a></li><li><a>Français</a></li><li><a>Hrvatski</a></li><li><a>Bahasa Indonesia</a></li><li><a>Italiano</a></li><li><a>日本語</a></li><li><a>Polski</a></li><li><a>Português</a></li><li><a>Русский</a></li><li><a>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a></li><li><a>Српски / srpski</a></li><li><a>اردو</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4월 23일 (화) 20: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상원 소위원회가 열린 년도는?
1985년
null
97837
5,320
[ "상원 소위원회가 열린 년도는?", "아이언 도널드는 태아의 발달단계에서 어느 곳의 통증 인지가 없을 것이라고 인정하였는가?", "태아통각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가 열린 해는?", "소리 없는 비명이라는 영상을 만든 사람은?", "태아통각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한 상원 소위원회가 개최된 연도는?", "초음파 진단기를 만든 아이언 도널드 박사의 국적은?", "태아가 4주가 되면 무엇을 형성 하는가?", "콘딕 박사는 대뇌피질에서 최초의 신경세포 뉴런이 발생한 것은 태아가 생긴지 몇 주 후부터라고 했는가?", "대뇌피질에서 발생하는 최초의 신경세포는?", "2013년 신경과학 전문가로 낙태에 관한 청문회에 참석한 인물은?", "콘딕 박사가 신경생물학, 해부학 조교수로 근무하는 기관은?", "미국의 낙태를 주도하고 있는 연맹의 이름은?", "초음파 진단기를 발명한 사람의 이름은?", "책을 이용하여 소리없는 비명의 영상은 조작된 것이라고 소문을 퍼뜨린 조직은?", "초음파 진단기를 발명한 사람은?", "가족계획연맹은 어느 단체의 발간물을 이용하여 '소리 없는 비명'의 영상이 조작되었다는 소문을 내었는가?", "'소리 없는 비명'의 영상 조작을 부인한 인물은?" ]
<!DOCTYPE html> 소리 없는 비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소리 없는 비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tbody><tr> <td colspan="2"> 소리 없는 비명The Silent Scream </td></tr> <tr> <th>감독 </th> <td>Jack Duane Dabner </td></tr> <tr> <th>각본 </th> <td>Donald S. Smith[1] </td></tr> <tr> <th>해설 </th> <td>Bernard Nathanson </td></tr> <tr> <th>촬영 </th> <td>Roger Boller </td></tr> <tr> <th>편집 </th> <td>Dan R. Fouts </td></tr> <tr> <th>음악 </th> <td>James Gabriel Stipech </td></tr> <tr> <th>배급사 </th> <td>American Portrait Films </td></tr> <tr> <th>개봉일 </th> <td>1984년 </td></tr> <tr> <th>시간 </th> <td>28분 </td></tr> <tr> <th>국가 </th> <td>미국 </td></tr> <tr> <th>언어 </th> <td>영어 </td></tr> </tbody></table> 《소리 없는 비명》(The Silent Scream)은 1984년에 제작된 낙태 반대 교육 영화이다. 낙태가 진행 중인 자궁 내부를 초음파로 보여주는 것이 내용이다. 이때 태아가 마치 고통에 반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상물은 낙태 반대 단체들의 선전 도구로 인기가 높으나,[2] 의학계에서는 비판받고 있다.[3] 산부인과 의사 Bernard N. Nathanson 이 내레이터이자 의학 전문가 역을 맡았다. 목차 1 학계의 비판 2 상원 소위원회 청문회 3 태아통각에 대하여 4 버나드 나단슨 2008년 인터뷰 5 각주 6 외부 링크 학계의 비판[편집] 의학계는 대부분 이 영화에 대해 호도적이며 기만적이라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시카고 마운트시나이 의학센터 산부인과 및 부인과 교수 Richard Berkowitz는 이 영화가 "사실을 호도하고 있으며 불공정하다"고 했다.[3] 예일 대학교 의과대학의 John Hobbins는 영화가 특수효과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 기만적이며, "기술적 사기행위"라고 했다. 그는 영화에 삽입된 초음파 영상이 처음에는 느리게 재생되다가 수술 도구가 삽입되는 순간부터 고속재생시킴으로써 "태아가 위협을 느끼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 했음을 지적했다. Hobbins는 소위 "비명"이라는 것에 대해서도 "태아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입을 벌린 채 지낸다"면서 문제의 "비명"은 사실 하품일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흐릿한 초음파 영상 속에서 "입"으로 보이는 부분도 사실 태아의 뺨과 가슴 사이의 공간인 것으로 확인하였다.[3] 태아 발달 전문가들은 영화에 등장한 Nathanson의 주장과 달리, 태아는 위험을 인식하거나 의도적인 운동을 할 능력이 없다고 말한다. 존스 홉킨스 의과대학의 신경생물학자 David Bodian은 12주 된 태아가 고통을 느낄 수 있는지 그 증거는 없으며, 다만 수술도구가 삽입됨으로 인한 반사운동일 수 있다고 말한다. 영화에서 사용된 초음파 영상과 태아 모형 역시 사람을 호도하기 위해 완전히 자란 아기 크기처럼 보이게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12주짜리 태아의 크기는 2인치에 불과하다.[3] 상원 소위원회 청문회[편집] 1985년 태아통각에 대한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서 상원 소위원회가 열렸다. 영상에 대한 의학적 견해를 추가로 청취하기 위해서 비판적인 인사와 지지하는 인사가 함께 참석했다. 청문회에서 진술한 사람 중에는 영상을 비판했던 리차드 버코위츠 박사와 스코틀랜드 의사이며 초음파 진단기를 처음으로 개발한 아이언 도널드 박사가 있다. 도널드 박사는 선서를 하고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영상에서 보였던 태아의 움직임은 조작된 것도 아니고 의도적으로 가공한 결과물도 아니다.” 작품을 만든 버나드 나단슨도 청문회에 나와서 증언했다. “영상 중에는 태아를 자세히 보여 주기 위해서 화면을 정지하거나 느린 화면을 사용한 부분이 있지만 속이기 위한 목적으로 화면을 사용한 적은 없고 항상 화면을 정상속도로 되돌렸다.” 태아통증에 대하여는 “영상에서 태아가 보인 반응을 보면 원시적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태아가 고통 중에 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라고 진술했다. 한편 촬영된 태아의 발달단계에서는 대뇌피질의 통증 인지는 없을 것이라고 인정했다. [영문 위키피디아 중에서 해당 항목 번역 https://en.wikipedia.org/wiki/The_Silent_Scream] 태아통각에 대하여[편집] - 1980년대로부터 30년이 지난 현재는 신경과학이 획기적으로 발전하여 좀 더 정확한 태아의 상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30년 전 의학자의 이해 수준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 2010년 이후 미국에서는 통각태아 보호법, 또는 태아통각 낙태금지법(PAIN CAPABLE UNBORN CHILD PROTECTION ACT)을 만드는 주가 늘어났다. 19주 이전에는 낙태를 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적어도 20주 이후의 아기들부터라도 우선적으로 낙태로부터 보호하자는 공화당의 정책이다. 2017년 현재 50개 주 중 16개 주가 이 법을 만들어서 시행하고 있다. 2013년 5월 23일 하원에서 낙태에 관한 청문회가 열렸는데 신경과학 전문가인 모린 콘딕 박사가 참석하여 의원들에게 전문적인 의학 정보를 진술했다. 콘딕 박사(Maureen L. Condic, PhD)는 유타의대 신경생물학, 해부학 조교수이다. 그는 태아의 신경발달 단계를 아래와 같이 요약하여 설명하였다. 3주: 신경계 기본구조 형성 4주: 대뇌피질에서 최초의 신경세포 뉴런 발생 7주: 뉴런과 뉴런의 접합부위인 시냅스 형성 시작, 신경자극의 전달이 가능하다는 뜻 8~10주: 척수회로가 통증 감지, 태아가 통증 신호에 반응할 수 있다는 뜻, 전두엽-피질하 회로 형성 12~18주: 척추시상경로 형성, 태아가 통증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는 뜻 22~24주: 원거리 피질투영 가능 25세: 피질신경회로 완성단계에 도달, 생물학적으로 24세까지 성장단계를 지속하는데 신경계가 100% 완성단계가 아니라고 해서 사람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지를 반문하는 뜻 [코딕 박사의 진술 내용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fXS5T5c8eY] 버나드 나단슨 2008년 인터뷰[편집] 버나드 나단슨(Bernard Nathanson, 1926~2011)은 한때 낙태를 많이 했던 산부인과 의사이었으나 전향하여 낙태의 실상을 전 세계에 알리는 활동을 하며 평생 동안 많은 생명을 구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2008년 인터뷰를 했던 내용 중 ‘소리 없는 비명’에 관한 대목이 있다. ‘The Silent Scream(소리 없는 비명, 또는 침묵의 절규)’라는 영상을 제작하여 프로라이프 메시지를 전할 때의 일이다. 미국의 낙태를 주도하고 있는 가족계획연맹(Planned Parenthood)은 낙태법폐지전국연합(NARAL)이 발간한 책을 이용하여 ‘소리 없는 비명’의 영상은 조작된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나단슨 박사는 이런 소문이야말로 NARAL의 계략이고 거짓말이라고 확언했다. “가족계획연맹은 소문의 책임을 져야 한다. 영상은 조작된 것이 아니다. 영상의 사실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스코틀랜드까지 가서 초음파 진단기를 발명한 아이언 도널드 박사를 만나 검증을 받았다. 영상은 모두 보는 그대로 사실이며, 어떤 수정이나 조작이 가해지지 않았다는 것을 도널드 박사는 맹세하며 진술했다.” ‘소리 없는 비명’의 영상이 조작되었다는 소문이 조작된 것이다. 원문 기사 전문 https://www.lifesitenews.com/news/former-abortionist-bernard-nathanson-exposes-lies-of-american-pro-abortion- 각주[편집] ↑ Donald S. Smith, founder of Crusade for Life http://www.crusadeforlife.org/innocent%20blood.htm ↑ Roiphe, Katie (2008년 1월 1일). “Choice words”. 《Guardian Unlimited》 (Guardian News and Media). 2008년 1월 1일에 확인함.  ↑ 가 나 다 라 Wallis, Claudia; Banta, Kenneth W. (1985년 3월 25일). “Medicine: Silent Scream”. 《TIME》. 2011년 3월 17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소리 없는 비명 - 공식 웹사이트 (영어) 소리 없는 비명 -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table> <tbody><tr> <td> </td> <td>이 글은 영화에 관한 토막글입니다. 여러분의 지식으로 알차게 문서를 완성해 갑시다. </td></tr> </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소리_없는_비명&amp;oldid=24092168" 분류: 1984년 영화낙태를 소재로 한 영화미국의 다큐멘터리 영화미국의 선전 영화숨은 분류: 영화에 관한 토막글큰 토막글 문서모든 토막글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Hrvatski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Српски / srpskiاردو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3일 (화) 20:2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문단 번호 | 핵심 내용 | 키워드 | |------------|------------|---------| | 1 | 《소리 없는 비명》은 1984년에 제작된 낙태 반대 교육 영화로, 태아의 고통을 보여주는 초음파 영상을 포함. | 낙태, 교육 영화, 초음파 | | 2 | 의학계는 이 영화에 대해 기만적이라고 비판하며, 태아의 반응이 조작되었다고 주장. | 비판, 기만, 조작 | | 3 | 1985년 상원 소위원회 청문회에서 태아통각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됨. | 청문회, 태아통각, 의견 | | 4 | 2010년 이후 태아통각 보호법이 제정되며, 태아의 신경 발달 단계에 대한 정보 제공. | 태아통각 보호법, 신경 발달 | | 5 | 버나드 나단슨의 인터뷰에서 영상의 사실성을 주장하며, 조작설을 반박. | 나단슨, 인터뷰, 사실성 | | 6 | 각주 및 외부 링크 제공. | 각주, 외부 링크 | ### 글의 흐름 요약 문서는 1984년 제작된 낙태 반대 교육 영화 《소리 없는 비명》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영화의 내용과 의학계의 비판을 소개한 후, 상원 소위원회 청문회에서의 논의와 태아통각 보호법의 제정 과정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영화 제작자인 버나드 나단슨의 인터뷰를 통해 영상의 사실성을 강조하며 글을 마무리한다. 전체적으로 낙태와 관련된 논란과 의학적 견해의 대립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글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표 형식으로 요약해줘. 예: {문단 번호, 핵심 내용, 키워드}. 글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요약 마지막에 간단히 설명해줘.
모치히토_왕
https://ko.wikipedia.org/wiki/모치히토_왕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모치히토 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모치히토 왕</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div><div><a><img></a> <div><div><a></a></div>모치히토 왕</div></div></div> <p><b>모치히토 왕</b>(以仁王, <a>닌페이</a> 원년(<a>1151년</a>) ~ <a>지쇼</a> 4년 <a>음력 5월 26일</a>(<a>1180년</a> <a>6월 20일</a>))은, <a>헤이안 시대</a>(平安時代) 말기의 황족이다.「모치히토 왕의 영지(令旨)」라 불리는 명령서를 전국의 <a>겐지</a>들에게 내려 헤이케 타도를 위한 거병을 촉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저택이 산조 다카쿠라(三条高倉)에 있었기 때문에 산조미야(三条宮), 다카쿠라노미야(高倉宮)로도 불린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li> <li><a><span>2</span> <span>모치히토 왕의 영지</span></a></li> <li><a><span>3</span> <span>자손</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5</span> <span>같이 보기</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고시라카와 천황</a>(後白河天皇)의 제3황자로 태어났으나, <a>헤이케 이야기</a>(平家物語)에서는 형 슈가쿠 법친왕(守覚法親王)이 불문에 드는 바람에 제2황자로 알려졌다. <a>가인</a>(歌人)으로 이름높던 시키코 내친왕(式子内親王)이 그의 친누나였다. 어머니는 후지와라노 스에나리(藤原季成)의 딸 나리코(成子). </p><p>어려서 천태좌주(天台座主) ・ 사이운 법친왕(最雲法親王)의 제자로 들어갔으나, 오호(応保) 2년(<a>1162년</a>) 사이운이 죽자 환속하였다. 에이만(永万) 원년(<a>1165년</a>)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노에 가와라(近衛河原)의 오미야 고쇼(大宮御所)에서 원복을 치렀다고 한다. 그 뒤 하치조인 쇼코 내친왕(八条院暲子内親王)의 양자로 들어갔다.<sup><a>&#91;1&#93;</a></sup> </p><p>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이나 시가, 특히 서예와 피리에 뛰어났고, 어머니의 친가가 한인류(閑院流) 후지와라 씨(藤原氏)로 유력한 한때 황위 계승 후보였지만, 이복 동생 노리히토 친왕(憲仁親王)의 생모로 당시 위세 높던 헤이케 일문의 <a>다이라노 기요모리</a>(平清盛)의 처제 다이라노 시게코(平滋子)가 방해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특히 닌안(仁安) 원년(<a>1166년</a>)에 어머니 쪽의 백부였던 후지와라노 기미미쓰(藤原公光)가 곤노주나곤(権中納言) ・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에서 해관되고 실각되면서 모치히토 왕의 황위 계승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고, 친왕선하(親王宣下)조차도 받지 못했다.<sup><a>&#91;2&#93;</a></sup><sup><a>&#91;3&#93;</a></sup> </p><p>지쇼(治承) 3년(<a>1179년</a>) 11월에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쿠데타를 일으켜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하고 간파쿠(関白) ・ 마쓰도노 모토후사(松殿基房)를 내쫓아버린다(지쇼 3년의 정변). 모치히토 왕도 오랫동안 소유해 오던 죠코지(城興寺) 영지를 몰수당했다.<sup><a>&#91;4&#93;</a></sup> 이듬해 4월, 헤이시 타도를 결의한 모치히토 왕은 <a>미나모토노 요리마사</a>(源頼政)의 권유를 따라 일본 전국에 숨어 있던 겐지들에 대해 헤이케 타도의 영지를 내려 무장봉기를 획책하였다. </p><p>또한 스스로 「최승친왕(最勝親王)」이라 칭하며 거병을 권하였는데,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계획이 헤이케측에 누설되고 말았다. 5월 15일, 헤이케의 압력을 받은 조정은 칙명과 인젠(院宣)을 내려 모치히토 왕의 황적(皇籍)을 박탈하고 「미나모토노 모치미쓰(源以光)」로써 <a>도사 국</a>(土佐国)으로의 유배를 명하였다. 그 날 밤 게비이시(検非違使) 도키 미쓰나가(土岐光長)와 미나모토노 가네쓰나(源兼綱, 요리마사의 아들)가 모치히토 왕의 저택을 기습했지만, 모치히토 왕은 이미 저택을 빠져나간 뒤였다. 16일에 들어 모치히토 왕이 온조지(園城寺)로 달아났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21일에 헤이케는 온조지 공격을 결정하였다. 그 가운데 대장으로 요리마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헤이케는 모치히토 왕이 단독으로 획책한 모반이라고만 생각했지 겐지가 가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p><p>미나모토노 요리마사는 그 날 중으로 자식을 데리고 온조지로 가서 모치히토 왕에게 합류해 버렸고, 온조지와 대립하던 엔랴쿠지(延暦寺)에 협력을 요청했지만 엔랴쿠지는 이를 거부했다. 또한 온조지 안에서도 친헤이케파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모치히토 왕과 요리마사는 난토(南都)로 가서 사원 세력과 합류하기로 했다. </p><p>지쇼 4년(<a>1180년</a>) 5월 26일, 요리마사가 우지(宇治)에서 헤이케 세력을 막고 있는 틈을 타서 모치히토 왕은 <a>고후쿠지</a>(興福寺)로 향했지만, 미나미 산성(南山城)의 가와타(加幡) 강변에서 헤이케의 게닌(家人) 후지와라노 가게타카(藤原景高) ・ 이토 다다쓰나(伊藤忠綱) 등이 거느린 추토군에 쫓기다 죽었다.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히다노카미(飛騨守) 가게이에(景家)의 군세에 의해 고묘 산(光明山)의 도리이 앞에서 전사했다고 되어 있다. </p><p>하지만 아무도 왕자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모치히토 왕이 죽지 않고 도고쿠(東国)로 달아났다는 설도 있었다. 《헤이케 이야기》에는 모치히토 왕의 총애를 받아 그의 아이까지 낳은 궁녀를 데려다 모치히토 왕으로 추정되던 시신의 목을 가져다 보여주었고, 궁녀가 목 앞에 꿇어 앉아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틀림없는 모치히토 왕의 목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p> <h2><span></span><span>모치히토 왕의 영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모치히토 왕의 영지 원문은 《<a>아즈마카가미</a>》(吾妻鏡)나 《헤이케 이야기》 등에도 실려 있는데, 영지(令旨)로써의 형식에 미흡한 부분이 많고 사료에 따라 문체도 다르다. 내용은 스스로를 <a>진신의 난</a>(壬申の乱)에서의 <a>덴무 천황</a>(天武天皇)에 비기면서 황위를 농간하는 헤이케를 타도하고 황위를 이어받겠다는 선언이다. </p><p>《아즈마카가미》는 지쇼 4년(1180년) 4월 <a>이즈</a>(伊豆)에 유배되어 있던 <a>미나모토노 요리토모</a>(源頼朝)에게 모치히토 왕의 영지가 도착하는 데서부터 서술을 시작하며, 《헤이케 이야기》에는 모치히토 왕을 만난 요리마사가 전국의 겐지들로써 믿을 만한 자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미나모토노 미쓰노부(源光信, 미노 겐지美濃源氏), 다다 유키쓰나(多田行綱, 다다 겐지多田源氏), 야마모토 요시쓰네(山本義経, 오미 겐지近江源氏),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 이치조 다다요리(一条忠頼), 야스다 요시사다(安田義定, 가이 겐지), 이즈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a>무쓰</a>(陸奥)의 <a>미나모토노 요시쓰네</a>(源義経) 등이다. 그러나 실제 당시의 중요인물이 빠져 있는가 하면 착오도 많아서 후세의 창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p><p>한편으로 모치히토 왕은 온조지로 달아난 뒤 한 통의 문서를 더 작성했는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헤이케 타도의 영지일 가능성이 지적된다. 이것은 《<a>구칸쇼</a>》(愚管抄)에서 모치히토 왕이 체재하고 있는 동안 「궁선」(宮宣)이 나왔었다는 기술이나,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하치조인의 구란도이자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의 막내아들로 구마노에 숨어 살다가 모치히토 왕의 명을 받들어 왕의 영지를 전국의 겐지들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명받았다는 미나모토노 유키이에(源行家)가 5월 19일에 <a>이세 신궁</a>(伊勢神宮)에 봉납했다고 서술한 원문(願文)에서도 「최승친왕의 칙(勅)」이라는 것이 등장하며, 4월 9일의 영지와 유사한 부분이 있을 뿐 아니라 5월 15일에 온조지로 달아났다는 것까지 인용되어 있다. 즉 온조지로 달아난 직후에 작성된 것으로 유키이에가 (4월 9일의 영지가 아니라) 이 영지에 토대를 두고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영지의 선자(宣者)로 되어 있는 미나모토노 나카쓰나(源仲綱, 요리마사의 아들)는 작성 날짜로부터 조금 뒤 요리마사 등이 합류한 22일 이후에야 모치히토 왕에게 가담했다는 점에서 다소 모순이 있지만, 「최승친왕의 명」 ・ 「이치노인(一院) 제3친왕의 선명」이라는 명령서가 왕의 사후에도 유포되었다는 것이 <a>구조 가네자네</a>의 일기 《교쿠요》(玉葉)나 <a>후지와라노 사다이에</a>의 일기 《메이게쓰기》(明月記)에도 등장하는 점,<sup><a>&#91;5&#93;</a></sup> 4월 9일의 영지는 창작일지 몰라도 모치히토 왕이 온조지로 들어간 뒤에 「모치히토 왕의 영지」라 불릴 만한 문서가 제작되었고 이것이 《아즈마카가미》보다 앞서 성립된 《헤이케 이야기》에 삽입된 영지의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p><p>모치히토 왕 자신의 헤이케 타도 계획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영지를 받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나 기소 요시나카(木曾義仲) 등 각지 겐지들이 잇따라 병사를 일으켜, 헤이케 멸망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조정은 당초에 모치히토 왕이 내렸다는 영지 자체를 가짜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가서야 영지 자체는 진짜라는 것이 밝혀졌고, 나아가 모치히토 왕이 자신의 동생 다카쿠라 천황(高倉天皇)이나 조카 <a>안토쿠 천황</a>(安徳天皇)을 제치고 즉위할 것이라는 문장이 담긴 것을 보고 반발했다고 한다.<sup><a>&#91;6&#93;</a></sup> 반란이 일어나고 16년이 지난 겐큐(建久) 7년(<a>1196년</a>)까지도 모치히토 왕은 「형인(刑人)」이라 불리며 모반자 취급을 받았다(《교쿠요》 겐큐 7년 정월 15일조). </p> <h2><span></span><span>자손</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모치히토 왕의 첫째 아들이었던 <a>호쿠리쿠노미야</a>(北陸宮)는 요시나카(義仲)에게로 달아나 그의 비호를 받았고, 둘째 아들 와카미야(若宮)는 헤이케에 잡혀서 도손(道尊)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했다. 하치조인 산미노 쓰보네(八条院三位局, 다카시나노 모리아키라高階盛章의 딸)가 낳은 왕녀 산조미야 히메미야(三条宮姫宮)는 겐큐 7년에 하치조인에서 아란쿠슈인(安楽寿院) ・ 겐기코인(歓喜光院) 등을 일정 부분 양도 받았다고 한다.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하치조인은 에이만 원년에 붕어한 니조 천황(二条天皇)의 준모(准母, 어머니 대리)였고, 오미야 고쇼에는 니조 천황의 후가 거주하고 있었다. 때문에 모치히토 왕의 환속이나 원복에는 니조 천황 친정파였던 사람들이 지지했다고 여겨진다. 한편으로 고시라카와 법황과 니조 천황은 부자지간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고 니조 천황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모인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고시라카와 법황 ー 다카쿠라 천황의 대항마로써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佐伯智広「二条親政の成立」(初出:『日本史研究』505号(2004년)/수록: 佐伯『中世前期の政治構造と王家』(東京大学出版会、2015년) <a>ISBN</a>&#160;<a>978-4-13-026238-5</a>)).</span> </li> <li><span><a>↑</a></span> <span><a>인세이</a>(院政)시기에 친왕선하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정비(즉 뇨고女御 ・ 중궁 ・ 황후) 소생의 황자 또는 불문에 든 황자(법친왕) 뿐이었다. 모치히토 왕의 어머니는 뇨고도 아니었고 모치히토 왕 자신도 어려서는 불문에 잠시 들기도 했지만 12세에 환속했으므로 친왕선하를 받을 근거가 없었다.</span> </li> <li><span><a>↑</a></span> <span>《헤이케 이야기》에서는 유일하게 「<b>모치히토 친왕</b>」으로 적고 있기는 하다.</span> </li> <li><span><a>↑</a></span> <span>여기에는 다카쿠라 천황 및 그 황통에 대항하는 세력이었던 모치히토 왕의 경제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헤이케 정권의 의도가 있었는데, 죠코지 영지는 본래 사이운 법친왕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모치히토 왕이 이 영지를 이어받은 것도 출가한 그가 사이운 법친왕의 법등을 이어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모치히토 왕은 출가하지 않고 속세의 사람으로써 그대로 이 영지를 소유했고 그것은 당초의 영지 소유 조건에 어긋나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헤이케 정권은 이 점을 노려 죠코지 영지를 몰수한 뒤 본래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던 「이본문적(梨本門跡)」(교토 산젠인三千院의 다른 이름으로 문적이란 일본에서 황족이나 귀족이 주지를 맡는 특정 사찰 또는 그 사찰의 주지를 가리킨다. 당시 산젠인의 문적은 묘운明雲이었다)에게 반환한다는(栗山圭子「城興寺のゆくえ」『中世王家の成立と院政』吉川弘文館、2012년 <a>ISBN</a>&#160;<a>978-4-642-02910-0</a>) 명목으로 모치히토 왕에게서 이 영지를 몰수했던 것이다.</span> </li> <li><span><a>↑</a></span> <span>다만 두 사람 모두 모치히토 왕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설에 기반해 영지 자체를 가짜라고 비판하고 있으며, 실물을 본 것은 아니다. </span> </li> <li><span><a>↑</a></span> <span>두 천황 모두 고시라카와 법황 자신이 치천의 군으로써 지목한 후사였고, 마땅히 그 자손에게 황위가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당시 교토의 귀족 사회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때문에 모치히토 왕의 행동은 차기 황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로써 받아들여 질 수밖에 없었다.</span> </li> </ol></div> <h2><span></span><span>같이 보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겐페이 전쟁</a></li> <li><a>모치히토 왕의 거병</a></li></ul> <div><table><tbody><tr><th><a>전거 통제</a></th><td><div> <ul><li><a>WorldCat</a></li> <li><a>VIAF</a>: <span><a>71271581</a></span></li> <li><a>LCCN</a>: <span><a>nr94010883</a></span></li> <li><a>NDL</a>: <span><a>00621784</a></span></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모치히토_왕&amp;oldid=24198826</a>"</div> <div><div><a>분류</a>: <ul><li><a>1151년 태어남</a></li><li><a>1180년 죽음</a></li><li><a>작전 중 사망자</a></li><li><a>일본의 왕</a></li><li><a>헤이안 시대 사람</a></li><li><a>환속한 사람</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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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모토노 다메요시의 막내아들로 모치히토 왕의 영지를 전국의 겐지들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은?
미나모토노 유키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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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45
[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의 막내아들로 모치히토 왕의 영지를 전국의 겐지들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받은 사람은?", "모치히토 왕이 작성한 문서의 이름은?", "모치히토 왕이 실패한 타도 계획의 대상은?", "모치히토 왕의 동생이자 천황이었던 사람은?", "모치히토 왕이 모반자 취급을 받으며 불리운 이름은?", "모치히토 왕 본인의 계획인 헤이케 타도는 성공 하였나?", "모치히토 왕의 영지를 물려 받은 겐지는?", "모치히토 왕이 모반자라는 취급을 받으면서 불렸던 말은?" ]
<!DOCTYPE html> 모치히토 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모치히토 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모치히토 왕 모치히토 왕(以仁王, 닌페이 원년(1151년) ~ 지쇼 4년 음력 5월 26일(1180년 6월 20일))은,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말기의 황족이다.「모치히토 왕의 영지(令旨)」라 불리는 명령서를 전국의 겐지들에게 내려 헤이케 타도를 위한 거병을 촉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저택이 산조 다카쿠라(三条高倉)에 있었기 때문에 산조미야(三条宮), 다카쿠라노미야(高倉宮)로도 불린다. 목차 1 생애 2 모치히토 왕의 영지 3 자손 4 각주 5 같이 보기 생애[편집] 고시라카와 천황(後白河天皇)의 제3황자로 태어났으나,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에서는 형 슈가쿠 법친왕(守覚法親王)이 불문에 드는 바람에 제2황자로 알려졌다. 가인(歌人)으로 이름높던 시키코 내친왕(式子内親王)이 그의 친누나였다. 어머니는 후지와라노 스에나리(藤原季成)의 딸 나리코(成子). 어려서 천태좌주(天台座主) ・ 사이운 법친왕(最雲法親王)의 제자로 들어갔으나, 오호(応保) 2년(1162년) 사이운이 죽자 환속하였다. 에이만(永万) 원년(1165년)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 고노에 가와라(近衛河原)의 오미야 고쇼(大宮御所)에서 원복을 치렀다고 한다. 그 뒤 하치조인 쇼코 내친왕(八条院暲子内親王)의 양자로 들어갔다.[1]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학문이나 시가, 특히 서예와 피리에 뛰어났고, 어머니의 친가가 한인류(閑院流) 후지와라 씨(藤原氏)로 유력한 한때 황위 계승 후보였지만, 이복 동생 노리히토 친왕(憲仁親王)의 생모로 당시 위세 높던 헤이케 일문의 다이라노 기요모리(平清盛)의 처제 다이라노 시게코(平滋子)가 방해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특히 닌안(仁安) 원년(1166년)에 어머니 쪽의 백부였던 후지와라노 기미미쓰(藤原公光)가 곤노주나곤(権中納言) ・ 사에몬노카미(左衛門督)에서 해관되고 실각되면서 모치히토 왕의 황위 계승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고, 친왕선하(親王宣下)조차도 받지 못했다.[2][3] 지쇼(治承) 3년(1179년) 11월에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쿠데타를 일으켜 고시라카와 법황을 유폐하고 간파쿠(関白) ・ 마쓰도노 모토후사(松殿基房)를 내쫓아버린다(지쇼 3년의 정변). 모치히토 왕도 오랫동안 소유해 오던 죠코지(城興寺) 영지를 몰수당했다.[4] 이듬해 4월, 헤이시 타도를 결의한 모치히토 왕은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의 권유를 따라 일본 전국에 숨어 있던 겐지들에 대해 헤이케 타도의 영지를 내려 무장봉기를 획책하였다. 또한 스스로 「최승친왕(最勝親王)」이라 칭하며 거병을 권하였는데, 준비를 마치기도 전에 계획이 헤이케측에 누설되고 말았다. 5월 15일, 헤이케의 압력을 받은 조정은 칙명과 인젠(院宣)을 내려 모치히토 왕의 황적(皇籍)을 박탈하고 「미나모토노 모치미쓰(源以光)」로써 도사 국(土佐国)으로의 유배를 명하였다. 그 날 밤 게비이시(検非違使) 도키 미쓰나가(土岐光長)와 미나모토노 가네쓰나(源兼綱, 요리마사의 아들)가 모치히토 왕의 저택을 기습했지만, 모치히토 왕은 이미 저택을 빠져나간 뒤였다. 16일에 들어 모치히토 왕이 온조지(園城寺)로 달아났다는 사실이 확인되고, 21일에 헤이케는 온조지 공격을 결정하였다. 그 가운데 대장으로 요리마사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때까지도 헤이케는 모치히토 왕이 단독으로 획책한 모반이라고만 생각했지 겐지가 가담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미나모토노 요리마사는 그 날 중으로 자식을 데리고 온조지로 가서 모치히토 왕에게 합류해 버렸고, 온조지와 대립하던 엔랴쿠지(延暦寺)에 협력을 요청했지만 엔랴쿠지는 이를 거부했다. 또한 온조지 안에서도 친헤이케파가 적지 않았기 때문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모치히토 왕과 요리마사는 난토(南都)로 가서 사원 세력과 합류하기로 했다. 지쇼 4년(1180년) 5월 26일, 요리마사가 우지(宇治)에서 헤이케 세력을 막고 있는 틈을 타서 모치히토 왕은 고후쿠지(興福寺)로 향했지만, 미나미 산성(南山城)의 가와타(加幡) 강변에서 헤이케의 게닌(家人) 후지와라노 가게타카(藤原景高) ・ 이토 다다쓰나(伊藤忠綱) 등이 거느린 추토군에 쫓기다 죽었다.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히다노카미(飛騨守) 가게이에(景家)의 군세에 의해 고묘 산(光明山)의 도리이 앞에서 전사했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아무도 왕자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모치히토 왕이 죽지 않고 도고쿠(東国)로 달아났다는 설도 있었다. 《헤이케 이야기》에는 모치히토 왕의 총애를 받아 그의 아이까지 낳은 궁녀를 데려다 모치히토 왕으로 추정되던 시신의 목을 가져다 보여주었고, 궁녀가 목 앞에 꿇어 앉아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틀림없는 모치히토 왕의 목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모치히토 왕의 영지[편집] 모치히토 왕의 영지 원문은 《아즈마카가미》(吾妻鏡)나 《헤이케 이야기》 등에도 실려 있는데, 영지(令旨)로써의 형식에 미흡한 부분이 많고 사료에 따라 문체도 다르다. 내용은 스스로를 진신의 난(壬申の乱)에서의 덴무 천황(天武天皇)에 비기면서 황위를 농간하는 헤이케를 타도하고 황위를 이어받겠다는 선언이다. 《아즈마카가미》는 지쇼 4년(1180년) 4월 이즈(伊豆)에 유배되어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에게 모치히토 왕의 영지가 도착하는 데서부터 서술을 시작하며, 《헤이케 이야기》에는 모치히토 왕을 만난 요리마사가 전국의 겐지들로써 믿을 만한 자들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미나모토노 미쓰노부(源光信, 미노 겐지美濃源氏), 다다 유키쓰나(多田行綱, 다다 겐지多田源氏), 야마모토 요시쓰네(山本義経, 오미 겐지近江源氏), 다케다 노부요시(武田信義), 이치조 다다요리(一条忠頼), 야스다 요시사다(安田義定, 가이 겐지), 이즈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무쓰(陸奥)의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義経) 등이다. 그러나 실제 당시의 중요인물이 빠져 있는가 하면 착오도 많아서 후세의 창작으로 여겨지고 있다. 한편으로 모치히토 왕은 온조지로 달아난 뒤 한 통의 문서를 더 작성했는데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헤이케 타도의 영지일 가능성이 지적된다. 이것은 《구칸쇼》(愚管抄)에서 모치히토 왕이 체재하고 있는 동안 「궁선」(宮宣)이 나왔었다는 기술이나,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하치조인의 구란도이자 미나모토노 다메요시의 막내아들로 구마노에 숨어 살다가 모치히토 왕의 명을 받들어 왕의 영지를 전국의 겐지들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명받았다는 미나모토노 유키이에(源行家)가 5월 19일에 이세 신궁(伊勢神宮)에 봉납했다고 서술한 원문(願文)에서도 「최승친왕의 칙(勅)」이라는 것이 등장하며, 4월 9일의 영지와 유사한 부분이 있을 뿐 아니라 5월 15일에 온조지로 달아났다는 것까지 인용되어 있다. 즉 온조지로 달아난 직후에 작성된 것으로 유키이에가 (4월 9일의 영지가 아니라) 이 영지에 토대를 두고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영지의 선자(宣者)로 되어 있는 미나모토노 나카쓰나(源仲綱, 요리마사의 아들)는 작성 날짜로부터 조금 뒤 요리마사 등이 합류한 22일 이후에야 모치히토 왕에게 가담했다는 점에서 다소 모순이 있지만, 「최승친왕의 명」 ・ 「이치노인(一院) 제3친왕의 선명」이라는 명령서가 왕의 사후에도 유포되었다는 것이 구조 가네자네의 일기 《교쿠요》(玉葉)나 후지와라노 사다이에의 일기 《메이게쓰기》(明月記)에도 등장하는 점,[5] 4월 9일의 영지는 창작일지 몰라도 모치히토 왕이 온조지로 들어간 뒤에 「모치히토 왕의 영지」라 불릴 만한 문서가 제작되었고 이것이 《아즈마카가미》보다 앞서 성립된 《헤이케 이야기》에 삽입된 영지의 모델이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모치히토 왕 자신의 헤이케 타도 계획은 실패로 끝났지만, 그의 영지를 받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나 기소 요시나카(木曾義仲) 등 각지 겐지들이 잇따라 병사를 일으켜, 헤이케 멸망의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조정은 당초에 모치히토 왕이 내렸다는 영지 자체를 가짜라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가서야 영지 자체는 진짜라는 것이 밝혀졌고, 나아가 모치히토 왕이 자신의 동생 다카쿠라 천황(高倉天皇)이나 조카 안토쿠 천황(安徳天皇)을 제치고 즉위할 것이라는 문장이 담긴 것을 보고 반발했다고 한다.[6] 반란이 일어나고 16년이 지난 겐큐(建久) 7년(1196년)까지도 모치히토 왕은 「형인(刑人)」이라 불리며 모반자 취급을 받았다(《교쿠요》 겐큐 7년 정월 15일조). 자손[편집] 모치히토 왕의 첫째 아들이었던 호쿠리쿠노미야(北陸宮)는 요시나카(義仲)에게로 달아나 그의 비호를 받았고, 둘째 아들 와카미야(若宮)는 헤이케에 잡혀서 도손(道尊)이라는 법명으로 출가했다. 하치조인 산미노 쓰보네(八条院三位局, 다카시나노 모리아키라高階盛章의 딸)가 낳은 왕녀 산조미야 히메미야(三条宮姫宮)는 겐큐 7년에 하치조인에서 아란쿠슈인(安楽寿院) ・ 겐기코인(歓喜光院) 등을 일정 부분 양도 받았다고 한다. 각주[편집] ↑ 하치조인은 에이만 원년에 붕어한 니조 천황(二条天皇)의 준모(准母, 어머니 대리)였고, 오미야 고쇼에는 니조 천황의 후가 거주하고 있었다. 때문에 모치히토 왕의 환속이나 원복에는 니조 천황 친정파였던 사람들이 지지했다고 여겨진다. 한편으로 고시라카와 법황과 니조 천황은 부자지간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고 니조 천황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모인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고시라카와 법황 ー 다카쿠라 천황의 대항마로써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佐伯智広「二条親政の成立」(初出:『日本史研究』505号(2004년)/수록: 佐伯『中世前期の政治構造と王家』(東京大学出版会、2015년) ISBN 978-4-13-026238-5)). ↑ 인세이(院政)시기에 친왕선하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정비(즉 뇨고女御 ・ 중궁 ・ 황후) 소생의 황자 또는 불문에 든 황자(법친왕) 뿐이었다. 모치히토 왕의 어머니는 뇨고도 아니었고 모치히토 왕 자신도 어려서는 불문에 잠시 들기도 했지만 12세에 환속했으므로 친왕선하를 받을 근거가 없었다. ↑ 《헤이케 이야기》에서는 유일하게 「모치히토 친왕」으로 적고 있기는 하다. ↑ 여기에는 다카쿠라 천황 및 그 황통에 대항하는 세력이었던 모치히토 왕의 경제 기반을 무너뜨리려는 헤이케 정권의 의도가 있었는데, 죠코지 영지는 본래 사이운 법친왕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모치히토 왕이 이 영지를 이어받은 것도 출가한 그가 사이운 법친왕의 법등을 이어받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모치히토 왕은 출가하지 않고 속세의 사람으로써 그대로 이 영지를 소유했고 그것은 당초의 영지 소유 조건에 어긋나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헤이케 정권은 이 점을 노려 죠코지 영지를 몰수한 뒤 본래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던 「이본문적(梨本門跡)」(교토 산젠인三千院의 다른 이름으로 문적이란 일본에서 황족이나 귀족이 주지를 맡는 특정 사찰 또는 그 사찰의 주지를 가리킨다. 당시 산젠인의 문적은 묘운明雲이었다)에게 반환한다는(栗山圭子「城興寺のゆくえ」『中世王家の成立と院政』吉川弘文館、2012년 ISBN 978-4-642-02910-0) 명목으로 모치히토 왕에게서 이 영지를 몰수했던 것이다. ↑ 다만 두 사람 모두 모치히토 왕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는 설에 기반해 영지 자체를 가짜라고 비판하고 있으며, 실물을 본 것은 아니다. ↑ 두 천황 모두 고시라카와 법황 자신이 치천의 군으로써 지목한 후사였고, 마땅히 그 자손에게 황위가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 당시 교토의 귀족 사회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때문에 모치히토 왕의 행동은 차기 황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로써 받아들여 질 수밖에 없었다. 같이 보기[편집] 겐페이 전쟁 모치히토 왕의 거병 <table><tbody><tr><th>전거 통제</th><td> WorldCat VIAF: 71271581 LCCN: nr94010883 NDL: 00621784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모치히토_왕&amp;oldid=24198826" 분류: 1151년 태어남1180년 죽음작전 중 사망자일본의 왕헤이안 시대 사람환속한 사람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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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단 번호 | 핵심 내용 | 키워드 | |------------|------------|---------| | 1 | 모치히토 왕의 생애와 배경 소개 | 모치히토 왕, 헤이안 시대, 황족 | | 2 | 모치히토 왕의 영지와 헤이케 타도 계획 | 영지, 헤이케 타도, 쿠데타 | | 3 | 모치히토 왕의 자손과 후계자들 | 자손, 후계자, 왕녀 | | 4 | 각주 및 참고 문헌 | 각주, 참고 문헌 | | 5 | 관련 문서 및 링크 | 관련 문서, 링크 | ### 글의 흐름 요약 문서는 모치히토 왕의 생애와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며, 그의 주요 업적인 헤이케 타도 계획과 그에 따른 영지 발급을 다룹니다. 이어서 그의 자손과 후계자들에 대한 정보로 마무리됩니다. 전체적으로 모치히토 왕의 정치적 야망과 그 결과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이 글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표 형식으로 요약해줘. 예: {문단 번호, 핵심 내용, 키워드}. 글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요약 마지막에 간단히 설명해줘.
허리케인_길버트
https://ko.wikipedia.org/wiki/허리케인_길버트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허리케인 길버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허리케인 길버트</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caption><b>허리케인 길버트</b> </caption> <tbody><tr> <th colspan="3"><b>5등급 허리케인</b> <b>(<a>SSHS</a>)</b> </th></tr> <tr> <td colspan="3"><a><img></a><br>허리케인 길버트 (9월 13일) </td></tr> <tr> <td><b>발생일</b> </td> <td colspan="2"><a>1988년</a> <a>9월 8일</a> </td></tr> <tr> <td><b>소멸일</b> </td> <td colspan="2"><a>1988년</a> <a>9월 19일</a> </td></tr> <tr> <td><b>최저 기압</b> </td> <td colspan="2">888hPa </td></tr> <tr> <td><b>최대 풍속</b><br><small>(1분 평균)</small> </td> <td colspan="2">80m/s (160kt) </td></tr> <tr> <td><b>최대 크기</b><br><small>(직경)</small> </td> <td colspan="2">1500km </td></tr> <tr> <td><b>인명 피해</b><br><small>(사망·실종)</small> </td> <td colspan="2">433(사망) </td></tr> <tr> <td><b>재산 피해</b><br><small>(억원)</small> </td> <td colspan="2">- </td></tr></tbody></table> <p><b>허리케인 길버트</b>(Hurricane Gilbert)는 <a>1988년</a> <a>9월</a>, <a>카리브 해</a> 인접 도서국과 <a>멕시코</a>와 <a>미국</a>을 강타한 엄청난 크기의 초대형 <a>허리케인</a>으로 <a>북대서양</a>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중 2번째로 강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허리케인의 진행</span></a></li> <li><a><span>2</span> <span>피해</span></a> <ul> <li><a><span>2.1</span> <span>베네수엘라</span></a></li> <li><a><span>2.2</span> <span>자메이카</span></a></li> <li><a><span>2.3</span> <span>케이맨 제도</span></a></li> <li><a><span>2.4</span> <span>아이티</span></a></li> <li><a><span>2.5</span> <span>멕시코</span></a></li> <li><a><span>2.6</span> <span>미국</span></a></li> <li><a><span>2.7</span> <span>기타</span></a></li> </ul> </li> <li><a><span>3</span> <span>제명</span></a></li> </ul> </div> <h2><span></span><span>허리케인의 진행</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허리케인 길버트의 이동 경로</div></div></div> <p><a>1988년</a> <a>9월 3일</a>, <a>아프리카 대륙</a> 서쪽 해안에 열대성 기압대가 배치된 이후 이 <a>저기압</a>대는 느린 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하여 <a>9월 8일</a>에는 잘 발달된 하나의 조직이 되었다. <a>9월 9일</a>에는 <a>바베이도스</a> 동쪽 약 640km(400mi) 북근 해상에서 1988년의 <a>열대 저기압</a>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이날 오후에 빠르게 강해지면서 <a>열대 폭풍</a>까지 세력이 도달해 <a>소안틸레스 제도</a>를 통과할 때 이름, '길버트(Gilbert)'가 부여되었고 이는 1988년에 북대서양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중 7번째로 이름이 명명된 허리케인이 되었다. </p><p>허리케인 길버트의 진로 앞에 아무것도 방해할 요인이 없었으므로 <a>9월 10일</a>에 <a>허리케인</a>이 되었고 마침내 <a>9월 11일</a>에 메이저(세력이 강한) 허리케인이 되었다. 길버트는 북쪽에 위치한 강한 <a>고기압</a>대의 가장자리를 따라 서북서쪽으로 계속해서 이동하였다. 길버트는 마침내 <a>자메이카</a>에 첫 번째로 상륙하였고 <a>9월 12일</a>에 풍속 205km/h(125mph), 중심기압 960hPa의 세력으로 자메이카를 동서로 완전히 관통했고 이는 길버트가 <a>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a> 제3등급에 달하는 세력으로 상륙해 섬을 통과한 것으로 분석된다. </p><p>허리케인 길버트는 <a>자메이카</a>를 빠져나온 뒤에 다시 급격하게 강해졌으며 <a>케이맨 제도</a>의 가장 큰 섬인 그랜드 케이맨(Grand Cayman)섬의 기상관측소에서는 <a>9월 13일</a>, 길버트가 섬 남동쪽에 위치해있을 때 252km/h(156mph)에 달하는 돌풍이 관측되기도 하였다. 길버트는 중심기압이 888hPa에 도달하기까지 쉬지않고 계속 강해졌고 마침내 최성기를 맞이하였을 때는 강풍반경 내에서 295km/h(185mph)의 바람이 불었다. 이 수치는 24시간만에 72hPa가 떨어진 것으로 기록되었고 이는 당시 전에 일어났던 모든 북대서양 허리케인을 통틀어서 가장 강한 허리케인이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a>2005년</a>에 <a>허리케인 윌마</a>가 6hPa 낮은 882hPa를 기록하면서 깨지게 되었다. </p><p>허리케인 길버트는 <a>9월 14일</a>에 <a>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a> 제 5등급의 세력으로 <a>코주밀 섬</a>에 두 번째로, 그리고 <a>멕시코</a> <a>유카탄 반도</a>에 세 번째로 상륙했다. 제5등급의 세력으로 상륙한 허리케인은 <a>1979년</a>의 <a>허리케인 데이비드</a>가 <a>히스파니올라 섬</a>에 상륙한 이후 처음 일어났던 일이었다. 또한 상륙할 당시 코주밀 섬의 중심기압은 900hPa으로 예상되었다. 자연히 내륙으로 들어오면서 허리케인은 빠르게 약해졌고 다시 <a>멕시코 만</a>에 제2등급의 세력으로 진출하기 전까지 계속 약화되었다. 그러나 다시 바다로 나온 길버트는 매우 빠르게 강해졌으나 <a>9월 16일</a> <a>멕시코</a> <a>타마울리파스주</a>에 네 번째로 상륙하면서 길버트가 강해질 수 있는 요건을 완전히 제거해 버린 상태가 되어버렸다. </p><p>허리케인 길버트는 <a>9월 17일</a>에 <a>누에보레온주</a>의 주도인 <a>몬테레이</a>을 통과하고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북쪽으로 향해갔다. 길버트는 <a>오클라호마주</a>로 이동하기 전까지 <a>9월 18일</a> <a>텍사스주</a>에 29개의 <a>토네이도</a>를 발생시켰고 이내 <a>9월 19일</a>에 <a>미주리주</a>에서 <a>저기압</a>대에 흡수되면서 소멸되었다. </p> <h2><span></span><span>피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베네수엘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허리케인 길버트의 진로 남쪽에 위치해있던 <a>남아메리카</a> 북부의 <a>베네수엘라</a> 북부에서는 홍수로 5명이 사망했다. </p> <h3><span></span><span>자메이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div><div><a><img></a> <div><div><a></a></div>허리케인 길버트 (9월 12일)</div></div></div> <p>허리케인 길버트는 <a>자메이카</a>의 해안에 5.8m에 달하는 파도를 만들어 덮치게했고 산악지대에 700mm가 넘는 폭우를 내리게 했다. 총 45명이 사망했다. 길버트는 <a>1951년</a>의 <a>허리케인 찰리</a> 이후 가장 강한 허리케인으로 기록되었다. 총 재산피해는 40억달러(1988년 기준)로 집계되었고 길버트는 농작물, 건물, 집과 도로를 파괴했다. 허리케인 길버트는 자메이카에 영향을 준 허리케인 중에서 극심하게 치명적이었던 허리케인으로 악명높다. 자메이카에서는 49명이 숨졌다. </p> <h3><span></span><span>케이맨 제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허리케인 길버트는 <a>케이맨 제도</a> 남쪽 약 48km(30mi) 부근 해상을 지나면서 <a>9월 13일</a>, 섬에 253km/h(157mph)의 바람이 불게 하였다. 그러나 섬의 도민(島民)들은 미리 허리케인이 오기 전에 대피해두어서 섬이 5m의 파도를 받아 침수되어 많은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작물과 나무, 목장과 집들이 심하게 파괴되었다. </p> <h3><span></span><span>아이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허리케인 길버트는 <a>아이티</a>에도 영향을 미쳐 아이티에서는 54명의 인명피해가, 9,120만달러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p> <h3><span></span><span>멕시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허리케인 길버트의 총 사망자 433명 중에 240명은 <a>멕시코</a>에서 나왔을 만큼 멕시코에서는 피해가 극심하였다. 3만5천명의 이재민이 생겼고 길버트가 <a>유카탄 반도</a>를 덮쳤을 때, 83척의 배들이 가라앉았고 6만채의 집이 파괴, 총 재산피해액은 10억에서 20억달러(1989년 기준)으로 추산되었다. <a>캉쿤</a> 지방에서는 8천7백만달러(1989년 기준)의 피해액이 집계되었고 허리케인의 피해로 인해 도시의 관광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유카탄 반도에 위치한 <a>프로그레소</a>라는 도시에서는 350mm가 넘는 비가 쏟아졌기도 하였다. 멕시코 북동부에서는 <a>몬테레이</a> 주변에 폭우가 내려 지역이 물에 잠겼다.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숨졌고 대피자를 나르던 5대의 버스가 뒤집혔다. <a>타마울리파스주</a> 내륙에서는 250mm가 넘는 강수량을 기록하였다. </p> <h3><span></span><span>미국</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텍사스주</a>에서는 허리케인 길버트가 직접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예측되어 엄청난 피해를 낳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소규모의 피해만 입었다. 강한 <a>허리케인</a> 수준의 바람이 몇몇 지역에서 불었으나 주(州)의 주요피해는 해안가가 침식된 일이었다. <a>오클라호마주</a>에서는 <a>미국</a> 전지역에서 길버트에 의한 강수량 중 가장 많은 양의 비가 관측되었는데, 그 양으로는 218mm가 넘었다. 또한 텍사스 주와 오클라호마 주의 고립된 지역에서는 180mm가 넘는 비가 관측되었다. 그러나 허리케인 길버트가 소멸된 이후 비구름이 북부에 위치한 <a>미시간주</a>에서는 76mm만이 기록되었다. 미국에서는 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p> <h3><span></span><span>기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온두라스</a>에서는 12명의 사망자가, <a>과테말라</a>에서는 16명이, <a>코스타리카</a>에서는 2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a>도미니카 공화국</a>에서는 5명이 숨졌다. 또 <a>니카라과</a>에서도 2명이, <a>세인트루시아</a>에서는 4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p> <h2><span></span><span>제명</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허리케인 길버트는 위와 같은 극심한 피해를 주어 길버트라는 이름은 <a>1989년</a> 봄에 영구제명하기로 결정되었다. 후에 대체이름으로 고던(Gordon)이 선택되면서 <a>1994년</a>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1994년의 허리케인 고던도 기이한 이상진로 현상을 보여주어 많은 피해를 남겼다. </p>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허리케인_길버트&amp;oldid=24108289</a>"</div> <div><div><a>분류</a>: <ul><li><a>1988년 북대서양 허리케인</a></li><li><a>카리브 제도의 허리케인</a></li><li><a>도미니카 공화국의 허리케인</a></li><li><a>도미니카 연방의 허리케인</a></li><li><a>아이티의 허리케인</a></li><li><a>자메이카의 허리케인</a></li><li><a>케이맨 제도의 허리케인</a></li><li><a>멕시코의 허리케인</a></li><li><a>푸에르토리코의 허리케인</a></li><li><a>윈드워드 제도의 허리케인</a></li><li><a>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 5등급 열대 저기압</a></li><li><a>1988년 도미니카 공화국</a></li><li><a>1988년 아이티</a></li><li><a>1988년 자메이카</a></li><li><a>1988년 케이맨 제도</a></li><li><a>1988년 멕시코</a></li><li><a>1988년 미국</a></li><li><a>1988년 9월</a></li><li><a>1988년 카리브 제도</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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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케인 길버트가 9월 14일에 2번째로 상륙한 섬의 이름은?
코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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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77
[ "허리케인 길버트가 9월 14일에 2번째로 상륙한 섬의 이름은?", "허리케인 길버트가 9월 14일에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 중 어떤 등급으로 상륙하였나?", "허리케인 길버트는 네 번째로 멕시코 어느 주에 상륙하였나? ", "허리케인 길버트는 9월 14일 제5등급의 세력으로 어떤 섬에 두번째로 상륙했나?", "1979년의 허리케인 이름은?", "허리케인 길버트의 사망자는 총 몇 명인가?", "허리케인 길버트로 인하여 이재민은 몇 명이 생겼는가?", "허리케인 길버트에 의해 캉쿤 지방에서는 얼마의 피해액이 발생되었나?", "허리케인 길버트 영향으로 멕시코에서 발생한 사망자는 몇명인가?", "허리케인 길버트로 인해 총 사망한 사람은 몇명인가?", "허리케인 길버트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본 나라는?", "허리케인 길버트의 총 사망자 수는?", "사망자 중 240명은 어느 나라에서 나왔나?", "이재민의 수는?" ]
<!DOCTYPE html> 허리케인 길버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허리케인 길버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caption>허리케인 길버트 </caption> <tbody><tr> <th colspan="3">5등급 허리케인 (SSHS) </th></tr> <tr> <td colspan="3">허리케인 길버트 (9월 13일) </td></tr> <tr> <td>발생일 </td> <td colspan="2">1988년 9월 8일 </td></tr> <tr> <td>소멸일 </td> <td colspan="2">1988년 9월 19일 </td></tr> <tr> <td>최저 기압 </td> <td colspan="2">888hPa </td></tr> <tr> <td>최대 풍속(1분 평균) </td> <td colspan="2">80m/s (160kt) </td></tr> <tr> <td>최대 크기(직경) </td> <td colspan="2">1500km </td></tr> <tr> <td>인명 피해(사망·실종) </td> <td colspan="2">433(사망) </td></tr> <tr> <td>재산 피해(억원) </td> <td colspan="2">- </td></tr></tbody></table> 허리케인 길버트(Hurricane Gilbert)는 1988년 9월, 카리브 해 인접 도서국과 멕시코와 미국을 강타한 엄청난 크기의 초대형 허리케인으로 북대서양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중 2번째로 강했다. 목차 1 허리케인의 진행 2 피해 2.1 베네수엘라 2.2 자메이카 2.3 케이맨 제도 2.4 아이티 2.5 멕시코 2.6 미국 2.7 기타 3 제명 허리케인의 진행[편집] 허리케인 길버트의 이동 경로 1988년 9월 3일, 아프리카 대륙 서쪽 해안에 열대성 기압대가 배치된 이후 이 저기압대는 느린 속도로 발달하기 시작하여 9월 8일에는 잘 발달된 하나의 조직이 되었다. 9월 9일에는 바베이도스 동쪽 약 640km(400mi) 북근 해상에서 1988년의 열대 저기압 제12호로 지정되었다. 이날 오후에 빠르게 강해지면서 열대 폭풍까지 세력이 도달해 소안틸레스 제도를 통과할 때 이름, '길버트(Gilbert)'가 부여되었고 이는 1988년에 북대서양에서 발생한 허리케인 중 7번째로 이름이 명명된 허리케인이 되었다. 허리케인 길버트의 진로 앞에 아무것도 방해할 요인이 없었으므로 9월 10일에 허리케인이 되었고 마침내 9월 11일에 메이저(세력이 강한) 허리케인이 되었다. 길버트는 북쪽에 위치한 강한 고기압대의 가장자리를 따라 서북서쪽으로 계속해서 이동하였다. 길버트는 마침내 자메이카에 첫 번째로 상륙하였고 9월 12일에 풍속 205km/h(125mph), 중심기압 960hPa의 세력으로 자메이카를 동서로 완전히 관통했고 이는 길버트가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 제3등급에 달하는 세력으로 상륙해 섬을 통과한 것으로 분석된다. 허리케인 길버트는 자메이카를 빠져나온 뒤에 다시 급격하게 강해졌으며 케이맨 제도의 가장 큰 섬인 그랜드 케이맨(Grand Cayman)섬의 기상관측소에서는 9월 13일, 길버트가 섬 남동쪽에 위치해있을 때 252km/h(156mph)에 달하는 돌풍이 관측되기도 하였다. 길버트는 중심기압이 888hPa에 도달하기까지 쉬지않고 계속 강해졌고 마침내 최성기를 맞이하였을 때는 강풍반경 내에서 295km/h(185mph)의 바람이 불었다. 이 수치는 24시간만에 72hPa가 떨어진 것으로 기록되었고 이는 당시 전에 일어났던 모든 북대서양 허리케인을 통틀어서 가장 강한 허리케인이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2005년에 허리케인 윌마가 6hPa 낮은 882hPa를 기록하면서 깨지게 되었다. 허리케인 길버트는 9월 14일에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 제 5등급의 세력으로 코주밀 섬에 두 번째로, 그리고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세 번째로 상륙했다. 제5등급의 세력으로 상륙한 허리케인은 1979년의 허리케인 데이비드가 히스파니올라 섬에 상륙한 이후 처음 일어났던 일이었다. 또한 상륙할 당시 코주밀 섬의 중심기압은 900hPa으로 예상되었다. 자연히 내륙으로 들어오면서 허리케인은 빠르게 약해졌고 다시 멕시코 만에 제2등급의 세력으로 진출하기 전까지 계속 약화되었다. 그러나 다시 바다로 나온 길버트는 매우 빠르게 강해졌으나 9월 16일 멕시코 타마울리파스주에 네 번째로 상륙하면서 길버트가 강해질 수 있는 요건을 완전히 제거해 버린 상태가 되어버렸다. 허리케인 길버트는 9월 17일에 누에보레온주의 주도인 몬테레이을 통과하고 급격하게 방향을 틀어 북쪽으로 향해갔다. 길버트는 오클라호마주로 이동하기 전까지 9월 18일 텍사스주에 29개의 토네이도를 발생시켰고 이내 9월 19일에 미주리주에서 저기압대에 흡수되면서 소멸되었다. 피해[편집] 베네수엘라[편집] 허리케인 길버트의 진로 남쪽에 위치해있던 남아메리카 북부의 베네수엘라 북부에서는 홍수로 5명이 사망했다. 자메이카[편집] 허리케인 길버트 (9월 12일) 허리케인 길버트는 자메이카의 해안에 5.8m에 달하는 파도를 만들어 덮치게했고 산악지대에 700mm가 넘는 폭우를 내리게 했다. 총 45명이 사망했다. 길버트는 1951년의 허리케인 찰리 이후 가장 강한 허리케인으로 기록되었다. 총 재산피해는 40억달러(1988년 기준)로 집계되었고 길버트는 농작물, 건물, 집과 도로를 파괴했다. 허리케인 길버트는 자메이카에 영향을 준 허리케인 중에서 극심하게 치명적이었던 허리케인으로 악명높다. 자메이카에서는 49명이 숨졌다. 케이맨 제도[편집] 허리케인 길버트는 케이맨 제도 남쪽 약 48km(30mi) 부근 해상을 지나면서 9월 13일, 섬에 253km/h(157mph)의 바람이 불게 하였다. 그러나 섬의 도민(島民)들은 미리 허리케인이 오기 전에 대피해두어서 섬이 5m의 파도를 받아 침수되어 많은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작물과 나무, 목장과 집들이 심하게 파괴되었다. 아이티[편집] 허리케인 길버트는 아이티에도 영향을 미쳐 아이티에서는 54명의 인명피해가, 9,120만달러의 재산피해가 발생했다. 멕시코[편집] 허리케인 길버트의 총 사망자 433명 중에 240명은 멕시코에서 나왔을 만큼 멕시코에서는 피해가 극심하였다. 3만5천명의 이재민이 생겼고 길버트가 유카탄 반도를 덮쳤을 때, 83척의 배들이 가라앉았고 6만채의 집이 파괴, 총 재산피해액은 10억에서 20억달러(1989년 기준)으로 추산되었다. 캉쿤 지방에서는 8천7백만달러(1989년 기준)의 피해액이 집계되었고 허리케인의 피해로 인해 도시의 관광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유카탄 반도에 위치한 프로그레소라는 도시에서는 350mm가 넘는 비가 쏟아졌기도 하였다. 멕시코 북동부에서는 몬테레이 주변에 폭우가 내려 지역이 물에 잠겼다. 100명 이상의 사람들이 숨졌고 대피자를 나르던 5대의 버스가 뒤집혔다. 타마울리파스주 내륙에서는 250mm가 넘는 강수량을 기록하였다. 미국[편집] 텍사스주에서는 허리케인 길버트가 직접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예측되어 엄청난 피해를 낳을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소규모의 피해만 입었다. 강한 허리케인 수준의 바람이 몇몇 지역에서 불었으나 주(州)의 주요피해는 해안가가 침식된 일이었다. 오클라호마주에서는 미국 전지역에서 길버트에 의한 강수량 중 가장 많은 양의 비가 관측되었는데, 그 양으로는 218mm가 넘었다. 또한 텍사스 주와 오클라호마 주의 고립된 지역에서는 180mm가 넘는 비가 관측되었다. 그러나 허리케인 길버트가 소멸된 이후 비구름이 북부에 위치한 미시간주에서는 76mm만이 기록되었다. 미국에서는 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기타[편집] 온두라스에서는 12명의 사망자가, 과테말라에서는 16명이, 코스타리카에서는 2명의 사망자가 나왔고,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5명이 숨졌다. 또 니카라과에서도 2명이, 세인트루시아에서는 45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제명[편집] 허리케인 길버트는 위와 같은 극심한 피해를 주어 길버트라는 이름은 1989년 봄에 영구제명하기로 결정되었다. 후에 대체이름으로 고던(Gordon)이 선택되면서 1994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1994년의 허리케인 고던도 기이한 이상진로 현상을 보여주어 많은 피해를 남겼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허리케인_길버트&amp;oldid=24108289" 분류: 1988년 북대서양 허리케인카리브 제도의 허리케인도미니카 공화국의 허리케인도미니카 연방의 허리케인아이티의 허리케인자메이카의 허리케인케이맨 제도의 허리케인멕시코의 허리케인푸에르토리코의 허리케인윈드워드 제도의 허리케인사피어-심프슨 허리케인 5등급 열대 저기압1988년 도미니카 공화국1988년 아이티1988년 자메이카1988년 케이맨 제도1988년 멕시코1988년 미국1988년 9월1988년 카리브 제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DeutschEnglishEsperantoEspañolSuomiFrançais日本語PatoisNederlandsNorskPortuguês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ไทย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27일 (토) 13:1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문단 번호 | 핵심 내용 | 키워드 | |------------|------------|---------| | 1 | 허리케인 길버트는 1988년 9월에 발생한 5등급 허리케인으로, 카리브 해와 멕시코, 미국을 강타했다. | 허리케인, 길버트, 1988년 | | 2 | 허리케인의 발생과 이동 경로에 대한 설명. 9월 8일 발생, 9월 19일 소멸. | 발생일, 이동 경로 | | 3 | 허리케인 길버트의 강도와 기상 기록. 최저 기압 888hPa, 최대 풍속 80m/s. | 기압, 풍속 | | 4 | 허리케인 길버트의 피해 상황. 총 사망자 433명, 재산 피해는 명시되지 않음. | 피해, 사망자 | | 5 | 베네수엘라, 자메이카, 케이맨 제도, 아이티, 멕시코, 미국 등에서의 피해 상황. | 피해 지역 | | 6 | 허리케인 길버트의 제명 결정. 이름이 영구적으로 제거되고 고던(Gordon)으로 대체됨. | 제명, 고던 | **글의 흐름 요약:** 글은 허리케인 길버트의 발생과 이동 경로를 설명한 후, 피해 상황을 지역별로 상세히 나열하고, 마지막으로 이 허리케인의 이름이 영구적으로 제명된 사실로 마무리된다. 전체적으로 허리케인의 강도, 피해 규모, 그리고 그로 인한 인명 피해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글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표 형식으로 요약해줘. 예: {문단 번호, 핵심 내용, 키워드}. 글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요약 마지막에 간단히 설명해줘.
러드퍼드_올콕
https://ko.wikipedia.org/wiki/러드퍼드_올콕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러드퍼드 올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러드퍼드 올콕</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h colspan="2">러더퍼드 올콕 경 <br> Sir Rutherford Alcock</th></tr><tr><td colspan="2"> <a><img></a><br><div><div>1876년 ~ 1884년 사이에 촬영된 올콕</div></div></td></tr><tr><th>출생</th> <td> 1809년 5월 00일<span>(<span>1809-04-30</span>)</span><br></td></tr><tr><th>사망</th> <td> 1897년 11월 2일 (88세)<br><a>영국</a> <a>런던</a></td></tr><tr><th>국적</th> <td> <span><a><img></a></span> <a>영국</a></td></tr> <tr><th>경력</th> <td> 의사, 주 청나라 대사, 주일 대사</td></tr><tr><th>직업</th> <td> 외교관</td></tr> </tbody></table> <p><b>러더퍼드 올콕</b>(Sir Rutherford Alcock, <a>1809년</a> 5월 - <a>1897년</a> <a>11월 2일</a>)은 <a>영국</a>의 의사, 외교관으로 <a>청나라</a> 주재 영사, 초대 주일본 총영사, 주일 공사를 맡았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 <ul> <li><a><span>1.1</span> <span>주일 대사</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이후</span></a></li> <li><a><span>3</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1809년</a>, <a>런던</a> 서부 근교의 <a>일링</a>에서 의사 토마스 올콕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북부의 친척 집에 맡겨졌다가 15살 때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가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웨스트민스터 병원과 웨스트민스터 안과 병원에서 1년간 교육을 받은 뒤 ​​1828년까지 <a>파리</a>에 유학하여, <a>해부학</a>, <a>화학</a>, <a>자연사</a>를 배웠고, 또한 <a>프랑스어</a>뿐만 아니라 <a>이탈리아어</a>를 습득했다.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조각가의 아틀리에에 다니며 조각의 초보 강습을 받고 있었다. <a>런던</a>에 돌아온 뒤 위의 두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2년을 보냈고, <a>1830년</a>에 왕립 외과 학교에서 개업의로서 면허를 얻었다. </p><p>그 후 영국군 군의관이 되어, 전란 중인 <a>이베리아 반도</a>에 부임했다. 런던에 돌아온 뒤 내무부 해부 경위 등을 맡았지만, 외무성의 요청에 따라 이베리아에서 외교 문제 처리를 위해 다시 <a>스페인</a>, <a>포르투갈</a>에 부임했다. 그러나 이베리아에서의 과로로 인해 <a>관절염</a>에 걸려 두 손의 엄지손가락을 전혀 쓸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외과 의사로서의 미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a>외무성</a>에 들어가 외교관이 되었다. </p><p>때마침 <a>아편 전쟁</a> 이후 <a>난징 조약</a>이 <a>청나라</a> 사이에 체결되어 청나라의 다섯 항구가 개항했기 때문에 1844년에 올콕은 <a>푸저우</a> 영사에 임명되었다. 잠시 <a>샤먼</a>에서 보낸 후 조약 항구 푸저우에서 영사 업무를 맡았다. <a>불평등 조약</a>에 규정된 조계 관리와 영사 재판권 등의 복잡한 업무에서 성과를 거두었고, <a>1846년</a>에 <a>상하이</a> 영사, <a>1855년</a>에 <a>광저우</a> 영사로 전임되어 1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중국으로 근무했다. 그동안 <a>푸저우</a>, <a>상하이</a>의 <a>조계지</a>의 발전에 진력했다. 올콕은 시장 개척을 위해 청나라와 다시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상하이 영사였던 시절에는 총리 <a>파머스턴 자작</a>에게 청나라에 대한 무력행사를 하도록 진언하는 서한을 보내 <a>제2차 아편 전쟁</a>을 일으켰다. </p> <h3><span></span><span>주일 대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1858년</a>, 엘긴 백작 <a>제임스 브루스</a>가 <a>일본</a>을 방문하여 〈<a>영일수호통상조약</a>〉이 체결되어 <a>1859년</a>(안세이 6년) <a>7월 1일</a>에 <a>나가사키</a>, <a>가나가와</a>, <a>하코다테</a>의 세 항구를 개항할 것을 약속했다. 올콕은 극동 근무 베테랑으로서 수완을 인정받아, <a>1859년</a> <a>3월 1일</a> 부로 초대 주일 총영사에 임명되었다. </p><p><a>5월 3일</a>, 올콕은 이 명령을 <a>홍콩</a>에서 받아, <a>5월 16일</a>에 홍콩에서 출발하여 <a>상하이</a>를 거쳐 <a>6월 4일</a>에 <a>나가사키</a>에 도착했다. 〈영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 교환을 <a>7월 1일</a> 이전에 수행하도록 지시받았기 때문에, 나가사키를 <a>6월 20일</a>에 출발하여 <a>6월 26일</a>에 <a>시나가와</a> 앞바다에 도착했다. </p><p>올콕들의 도착은 사전에 예고는 하지 않았지만,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a>7월 11일</a>에 일행은 <a>에도 성</a>에 가서 비준서의 교환을 했다. 이에 앞서 <a>7월 6일</a>에 다카나와의 도젠지에 영국 총영사관을 열고, 군마를 팔아달라고 막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이 사이를 이용하여 <a>7월 1일</a>에 올콕은 개항 예정지인 가나가와에 시찰을 떠났으며, 이곳의 건너 편인 <a>요코하마</a>가 실제 개항지임을 알게 된다. 올콕은 실리적인 면에서 요코하마가 유리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조약 준수를 요구하였고, 결국 영사관을 <a>가나가와</a>에 설치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p><p><a>1859년</a> 9월부터 10월까지 또 다른 개항지인 <a>하코다테</a>를 여행했다. <a>12월 23일</a>(안세이 6년), 특명 전권 공사로 승격했다. 또한 <a>1860년</a> <a>9월 11일</a>(만엔 원년)에는 <a>후지산촌 야마구치 등산로</a>를 이용하여 후지산 등반을 했으며(중간 무라야마산보에 숙박), 이 등정 기록이 남아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후지산을 등반하게 된다. 그 귀로에 <a>아타미 온천</a>을 방문했다. 이때의 기념비가 시내의 온천 지역에 현존하고 있다. </p><p>그는 일본의 농촌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p> <blockquote><div>이 잘 경작된 골짜기 땅에서 사람들이 행복가득한 좋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압제에 고통받으며 가혹한 세금​​을 징수당하고, 고통 받는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유럽​​은 이렇게 행복하고, 형편이 좋은 농부는 없고, 또한 그렇게 온화하고 비옥한 토지도 없다고 생각한다.</div> <p><cite> —&#8201;올콕, 대군의 도시</cite></p></blockquote> <p><a>마쓰바라 히사코</a>에 의하면 그는 일본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p> <blockquote><div>그들은 우상숭배자요, <a>이교도</a>이며, 축생처럼 하나님을 믿는 않고 죽는 저주받은 영겁의 벌을 받은 사람들이다. 짐승처럼 신앙은 없고 사후의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도 없이 죽어가는 것이다. 시인, 사상가와 정치가와 재능있는 예술가로 구성된 민족의 일원인 우리에 비해 일본인은 열등 민족이다.</div> </blockquote> <div><div><a><img></a> <div><div><a></a></div>낭인의 습격 (런던 뉴스 삽화)</div></div></div> <p><a>1861년</a> <a>1월 14일</a> (만엔 원년), 미국 주일 공사 <a>타운젠드 해리스</a>의 통역을 맡고 있던 <a>헨리 휴스켄</a>이 양이파에 습격당해 다음날 사망했다. 올콕은 외국인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 막부에 항의로 외교단을 <a>요코하마</a>로 이동시킬 것을 제안했지만, 해리스는 반대했다. 결국 올콕은 프랑스 공사 귀스타브 듀세느 드 벨쿠르와 함께 요코하마로 옮겼다. 에도에 돌아온 것은 1개월 후였지만, 이 무렵부터 해리스와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p><p><a>1861년</a> 4월 하순부터 <a>모스 사건</a>의 사후 처리를 위해 홍콩에 머물렀다. 얼마 전에 <a>러시아 군함의 쓰시마 점령 사건</a>의 보고를 받고 영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a>제임스 호프</a>와 협의해 군함 2척을 <a>대마도</a>에 파견해 정찰을 했다. 올콕은 5월 후반에 <a>나가사키</a>에 도착, <a>6월 1일</a>에 나가사키를 출발 <a>세토 내해</a>와 육로를 통해 34일동안 여행을 하고 <a>7월 4일</a>(분큐 원년)에 에도로 돌아왔다. 이듬해 <a>7월 5일</a>, 양이파 낭인 14명이 영국 공사관을 습격했다. 올콕은 무사했지만, 장관인 <a>로렌스 올리펀트</a>와 나가사키 주재 영사 <a>조지 모리슨</a>이 부상을 당한 <a>제1차 도젠지 사건</a>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영국 수병의 공사관 주둔을 인정받아 영국 함대의 군함이 요코하마에 거주하게 되었다. <a>8월 13일</a>(분큐 원년) 함대를 이끌고 호프가 방일했다. 다음날 <a>8월 14일</a>, 올콕은 호프와 함께 영국 함대가 압력을 넣어 쓰시마 러시아 군함 퇴거시키자고 ㅌ막부에 제안했고 막부는 이를 받아 들였다. <a>9월 19일</a>, 러시아 군함은 쓰시마에서 퇴각했다. </p><p><a>8월 14일</a>과 다음날 15일에 열린 회담에서 올콕, 호프, 올리펀트(<a>제1차 도젠지 사건</a>으로 부상을 입고 귀국 예정)와 막부의 <a>노중</a>, <a>안도 노부마사</a>, <a>와카도시요리</a>, <a>사카이 타다마스</a>에게 통역을 붙여 비밀 회담을 열었다. 올콕은 이곳에서 막부의 권력이 저하된 실태를 알게 되었다. <a>1860년</a>경부터 막부는 <a>니가타</a>, <a>효고</a>와 <a>에도</a>, <a>오사카</a>의 개항 개발 시한의 연기를 요구했지만, 올콕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나 이 회담 후 올콕은 개항 개발 시한을 늦출 필요성을 이해하게 되었고 막부가 파견 예정인 유럽견학사절을 강력하게 지원한다. 올콕은 이 유럽견학사절이 <a>1862년</a> <a>5월 1일</a>부터 개최되는 런던 만국박람회에 초대 손님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 외에도 자신의 휴가 귀국을 이용하여 직접 영국 정부에 개항 개발 시한 연기를 호소했다. 사신 일행은 <a>1862년</a> <a>1월 21일</a>(분큐 원년) 일본을 나섰지만 올콕은 동행하지 않았고, 분큐 2년 <a>3월 23일</a>에 일본을 떠나 뒤를 따라 갔다. 귀국 직전인 <a>3월 16일</a>과 17일 양일간 올콕은 노중 수좌, <a>구제 히로치카</a>와 비밀 회담을 가지고 (<a>안도 노부마사</a>는 <a>사카시타 문 밖의 변</a>으로 부상) 더 자세히 일본 정세를 이해했다. <a>5월 30일</a>에 <a>런던</a>에 도착하여 <a>6월 6일</a> 5년 개항 개발 시한 연기를 인정한 〈런던 각서〉가 체결되었다. 귀국 중인 <a>6월 19일</a>, <a>바스 훈장</a>을 수여받고, ‘경’의 칭호를 얻었다. 또한 이 휴가 중에 러더포드는 자신의 저서 《대군의 도시》 를 발간할 준비를 마치고 <a>1863년</a>에 런던에서 간행했다. </p><p>약 2년간의 휴가를 보낸 후 <a>1864년</a>(겐지 원년) 봄에 일본에 복귀했다. 그러나 일본의 양상은 급변해 있었다. 귀국 중에 <a>나마무기 사건</a>과 그에 대한 보복으로 <a>사쓰에이 전쟁</a>이 벌어졌고, 조슈번이 외국 선박을 포격했기 때문에 <a>간몬 해협</a>은 항행 불능이 되어 있는 등 일본의 양이적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막부도 양이파를 회유하기 위해 유럽에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을 파견했다. 올콕은 이를 타파하고자, 시코쿠 함대를 동원한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이것를 인정하지 않았던 외무부 장관 <a>존 러셀</a>에 의해 소환되었다. 주일 공사는 일찍이 청나라에서 자신의 아랫 사람이었던 <a>해리 파크스</a>(재임, 1865 - 1883년)에게 물려주었다. </p> <h2><span></span><span>이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이후에 올콕의 외교 정책이 부당하지 않았음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일본에 귀임을 요청을 하였지만 거부당했다. 그러나 <a>1865년</a>에는 당시 아시아 주재 외교관 중 가장 지위가 높았던 청나라 주재 공사로 임명되어 <a>1869년</a>까지 <a>베이징</a>에 재임을 하였다. 같은 해에 외교관을 은퇴한 후에 <a>왕립지리학회</a>와 정부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p><p><a>1897년</a> <a>런던</a>에서 사망했다. </p><p><br> </p>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일본 속의 영국, <a>주영대사 연표</a></li></ul> <div><table><tbody><tr><th><a>전거 통제</a></th><td><div> <ul><li><a>WorldCat</a></li> <li><a>VIAF</a>: <span><a>69232892</a></span></li> <li><a>LCCN</a>: <span><a>n81079947</a></span></li> <li><a>ISNI</a>: <span><a>0000 0000 8391 7674</a></span></li> <li><a>GND</a>: <span><a>12472907X</a></span></li> <li><a>BNF</a>: <span><a>cb153512842</a> <a>(데이터)</a></span></li> <li><a>NLA</a>: <span><a>35002753</a></span></li> <li><a>NDL</a>: <span><a>00519487</a></span></li> <li><a>NKC</a>: <span><a>xx0074677</a></span></li> <li><a>BNE</a>: <span><a>XX1508105</a></span></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러드퍼드_올콕&amp;oldid=23254849</a>"</div> <div><div><a>분류</a>: <ul><li><a>1809년 태어남</a></li><li><a>1897년 죽음</a></li><li><a>일본 주재 영국 대사</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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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파 낭인 14명이 영국 공사관을 습격하여 로렌스 올리펀트 장관과 조지 모리슨 영사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은 무엇인가?
제1차 도젠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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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7
[ "양이파 낭인 14명이 영국 공사관을 습격하여 로렌스 올리펀트 장관과 조지 모리슨 영사에게 부상을 입힌 사건은 무엇인가?", "제1차 도젠지 사건을 계기로 영국 수병의 공사관 주둔을 인정받아 영국함대의 군함이 거주하게 된 지역은 어디인가? ", "영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의 이름은 무엇인가?", "1861년 7월 양이파 낭인이 영국 공사관을 습격한 사건의 이름은?", "제1차 도젠지 사건으로 영국 수병의 공사관 주둔을 인정받아 영국 군함이 거주한 곳은 어디인가?", "올콕이 일본의 유럽견학사절이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한 행사는 무엇인가?", "비밀회담으로 일본정세를 이해한 올콕이 참여하여 체결된 개항 개발 시한 연기를 인정한 각서는 무엇인가?", "러더포드의 저서는 어디서 간행되었는가?", "개항 개발 시한 연기를 인정한 내용인 1862년 6월에 체결된 것은 무엇인가?", "러드퍼드 올콕이 1863년에 간행한 자신의 저서의 이름은 무엇인가?", "올콕 다음으로 주일공사로 임명된 사람은 누구인가?", "올콕이 존 러셀에 의해 소환되게 된 결정적인 사건으로 시코쿠 함대를 동원하여 포격한 사건은 무엇인가?", "외무부장관의 이름은 무엇인가?", "올콕의 귀국 중 발생한 나마무기 사건의 보복으로 일어난 전쟁의 이름은?", "조슈번이 외국 선박을 포격하여 항행 불능이 되어버린 해협의 이름은?" ]
<!DOCTYPE html> 러드퍼드 올콕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러드퍼드 올콕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러더퍼드 올콕 경 Sir Rutherford Alcock</th></tr><tr><td colspan="2"> 1876년 ~ 1884년 사이에 촬영된 올콕</td></tr><tr><th>출생</th> <td> 1809년 5월 00일(1809-04-30)</td></tr><tr><th>사망</th> <td> 1897년 11월 2일 (88세)영국 런던</td></tr><tr><th>국적</th> <td> 영국</td></tr> <tr><th>경력</th> <td> 의사, 주 청나라 대사, 주일 대사</td></tr><tr><th>직업</th> <td> 외교관</td></tr> </tbody></table> 러더퍼드 올콕(Sir Rutherford Alcock, 1809년 5월 - 1897년 11월 2일)은 영국의 의사, 외교관으로 청나라 주재 영사, 초대 주일본 총영사, 주일 공사를 맡았다. 목차 1 생애 1.1 주일 대사 2 이후 3 외부 링크 생애[편집] 1809년, 런던 서부 근교의 일링에서 의사 토마스 올콕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기 때문에 잉글랜드 북부의 친척 집에 맡겨졌다가 15살 때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가 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웨스트민스터 병원과 웨스트민스터 안과 병원에서 1년간 교육을 받은 뒤 ​​1828년까지 파리에 유학하여, 해부학, 화학, 자연사를 배웠고, 또한 프랑스어뿐만 아니라 이탈리아어를 습득했다. 학문에 열중하는 한편, 조각가의 아틀리에에 다니며 조각의 초보 강습을 받고 있었다. 런던에 돌아온 뒤 위의 두 병원에서 레지던트로 2년을 보냈고, 1830년에 왕립 외과 학교에서 개업의로서 면허를 얻었다. 그 후 영국군 군의관이 되어, 전란 중인 이베리아 반도에 부임했다. 런던에 돌아온 뒤 내무부 해부 경위 등을 맡았지만, 외무성의 요청에 따라 이베리아에서 외교 문제 처리를 위해 다시 스페인, 포르투갈에 부임했다. 그러나 이베리아에서의 과로로 인해 관절염에 걸려 두 손의 엄지손가락을 전혀 쓸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외과 의사로서의 미래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고, 외무성에 들어가 외교관이 되었다. 때마침 아편 전쟁 이후 난징 조약이 청나라 사이에 체결되어 청나라의 다섯 항구가 개항했기 때문에 1844년에 올콕은 푸저우 영사에 임명되었다. 잠시 샤먼에서 보낸 후 조약 항구 푸저우에서 영사 업무를 맡았다. 불평등 조약에 규정된 조계 관리와 영사 재판권 등의 복잡한 업무에서 성과를 거두었고, 1846년에 상하이 영사, 1855년에 광저우 영사로 전임되어 15년의 긴 세월에 걸쳐 중국으로 근무했다. 그동안 푸저우, 상하이의 조계지의 발전에 진력했다. 올콕은 시장 개척을 위해 청나라와 다시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상하이 영사였던 시절에는 총리 파머스턴 자작에게 청나라에 대한 무력행사를 하도록 진언하는 서한을 보내 제2차 아편 전쟁을 일으켰다. 주일 대사[편집] 1858년, 엘긴 백작 제임스 브루스가 일본을 방문하여 〈영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어 1859년(안세이 6년) 7월 1일에 나가사키, 가나가와, 하코다테의 세 항구를 개항할 것을 약속했다. 올콕은 극동 근무 베테랑으로서 수완을 인정받아, 1859년 3월 1일 부로 초대 주일 총영사에 임명되었다. 5월 3일, 올콕은 이 명령을 홍콩에서 받아, 5월 16일에 홍콩에서 출발하여 상하이를 거쳐 6월 4일에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영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 교환을 7월 1일 이전에 수행하도록 지시받았기 때문에, 나가사키를 6월 20일에 출발하여 6월 26일에 시나가와 앞바다에 도착했다. 올콕들의 도착은 사전에 예고는 하지 않았지만,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7월 11일에 일행은 에도 성에 가서 비준서의 교환을 했다. 이에 앞서 7월 6일에 다카나와의 도젠지에 영국 총영사관을 열고, 군마를 팔아달라고 막부에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이 사이를 이용하여 7월 1일에 올콕은 개항 예정지인 가나가와에 시찰을 떠났으며, 이곳의 건너 편인 요코하마가 실제 개항지임을 알게 된다. 올콕은 실리적인 면에서 요코하마가 유리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조약 준수를 요구하였고, 결국 영사관을 가나가와에 설치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1859년 9월부터 10월까지 또 다른 개항지인 하코다테를 여행했다. 12월 23일(안세이 6년), 특명 전권 공사로 승격했다. 또한 1860년 9월 11일(만엔 원년)에는 후지산촌 야마구치 등산로를 이용하여 후지산 등반을 했으며(중간 무라야마산보에 숙박), 이 등정 기록이 남아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후지산을 등반하게 된다. 그 귀로에 아타미 온천을 방문했다. 이때의 기념비가 시내의 온천 지역에 현존하고 있다. 그는 일본의 농촌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이 잘 경작된 골짜기 땅에서 사람들이 행복가득한 좋은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것이 압제에 고통받으며 가혹한 세금​​을 징수당하고, 고통 받는 곳이라고는 믿을 수 없다. 유럽​​은 이렇게 행복하고, 형편이 좋은 농부는 없고, 또한 그렇게 온화하고 비옥한 토지도 없다고 생각한다. — 올콕, 대군의 도시 마쓰바라 히사코에 의하면 그는 일본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들은 우상숭배자요, 이교도이며, 축생처럼 하나님을 믿는 않고 죽는 저주받은 영겁의 벌을 받은 사람들이다. 짐승처럼 신앙은 없고 사후의 더 나은 삶에 대한 희망도 없이 죽어가는 것이다. 시인, 사상가와 정치가와 재능있는 예술가로 구성된 민족의 일원인 우리에 비해 일본인은 열등 민족이다. 낭인의 습격 (런던 뉴스 삽화) 1861년 1월 14일 (만엔 원년), 미국 주일 공사 타운젠드 해리스의 통역을 맡고 있던 헨리 휴스켄이 양이파에 습격당해 다음날 사망했다. 올콕은 외국인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한 막부에 항의로 외교단을 요코하마로 이동시킬 것을 제안했지만, 해리스는 반대했다. 결국 올콕은 프랑스 공사 귀스타브 듀세느 드 벨쿠르와 함께 요코하마로 옮겼다. 에도에 돌아온 것은 1개월 후였지만, 이 무렵부터 해리스와의 관계가 악화되기 시작했다. 1861년 4월 하순부터 모스 사건의 사후 처리를 위해 홍콩에 머물렀다. 얼마 전에 러시아 군함의 쓰시마 점령 사건의 보고를 받고 영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제임스 호프와 협의해 군함 2척을 대마도에 파견해 정찰을 했다. 올콕은 5월 후반에 나가사키에 도착, 6월 1일에 나가사키를 출발 세토 내해와 육로를 통해 34일동안 여행을 하고 7월 4일(분큐 원년)에 에도로 돌아왔다. 이듬해 7월 5일, 양이파 낭인 14명이 영국 공사관을 습격했다. 올콕은 무사했지만, 장관인 로렌스 올리펀트와 나가사키 주재 영사 조지 모리슨이 부상을 당한 제1차 도젠지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영국 수병의 공사관 주둔을 인정받아 영국 함대의 군함이 요코하마에 거주하게 되었다. 8월 13일(분큐 원년) 함대를 이끌고 호프가 방일했다. 다음날 8월 14일, 올콕은 호프와 함께 영국 함대가 압력을 넣어 쓰시마 러시아 군함 퇴거시키자고 ㅌ막부에 제안했고 막부는 이를 받아 들였다. 9월 19일, 러시아 군함은 쓰시마에서 퇴각했다. 8월 14일과 다음날 15일에 열린 회담에서 올콕, 호프, 올리펀트(제1차 도젠지 사건으로 부상을 입고 귀국 예정)와 막부의 노중, 안도 노부마사, 와카도시요리, 사카이 타다마스에게 통역을 붙여 비밀 회담을 열었다. 올콕은 이곳에서 막부의 권력이 저하된 실태를 알게 되었다. 1860년경부터 막부는 니가타, 효고와 에도, 오사카의 개항 개발 시한의 연기를 요구했지만, 올콕은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나 이 회담 후 올콕은 개항 개발 시한을 늦출 필요성을 이해하게 되었고 막부가 파견 예정인 유럽견학사절을 강력하게 지원한다. 올콕은 이 유럽견학사절이 1862년 5월 1일부터 개최되는 런던 만국박람회에 초대 손님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그 외에도 자신의 휴가 귀국을 이용하여 직접 영국 정부에 개항 개발 시한 연기를 호소했다. 사신 일행은 1862년 1월 21일(분큐 원년) 일본을 나섰지만 올콕은 동행하지 않았고, 분큐 2년 3월 23일에 일본을 떠나 뒤를 따라 갔다. 귀국 직전인 3월 16일과 17일 양일간 올콕은 노중 수좌, 구제 히로치카와 비밀 회담을 가지고 (안도 노부마사는 사카시타 문 밖의 변으로 부상) 더 자세히 일본 정세를 이해했다. 5월 30일에 런던에 도착하여 6월 6일 5년 개항 개발 시한 연기를 인정한 〈런던 각서〉가 체결되었다. 귀국 중인 6월 19일, 바스 훈장을 수여받고, ‘경’의 칭호를 얻었다. 또한 이 휴가 중에 러더포드는 자신의 저서 《대군의 도시》 를 발간할 준비를 마치고 1863년에 런던에서 간행했다. 약 2년간의 휴가를 보낸 후 1864년(겐지 원년) 봄에 일본에 복귀했다. 그러나 일본의 양상은 급변해 있었다. 귀국 중에 나마무기 사건과 그에 대한 보복으로 사쓰에이 전쟁이 벌어졌고, 조슈번이 외국 선박을 포격했기 때문에 간몬 해협은 항행 불능이 되어 있는 등 일본의 양이적 경향이 강해지고 있었다. 막부도 양이파를 회유하기 위해 유럽에 요코하마 쇄항 담판 사절단을 파견했다. 올콕은 이를 타파하고자, 시코쿠 함대를 동원한 시모노세키 포격 사건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고, 이것를 인정하지 않았던 외무부 장관 존 러셀에 의해 소환되었다. 주일 공사는 일찍이 청나라에서 자신의 아랫 사람이었던 해리 파크스(재임, 1865 - 1883년)에게 물려주었다. 이후[편집] 이후에 올콕의 외교 정책이 부당하지 않았음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일본에 귀임을 요청을 하였지만 거부당했다. 그러나 1865년에는 당시 아시아 주재 외교관 중 가장 지위가 높았던 청나라 주재 공사로 임명되어 1869년까지 베이징에 재임을 하였다. 같은 해에 외교관을 은퇴한 후에 왕립지리학회와 정부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1897년 런던에서 사망했다. 외부 링크[편집] 일본 속의 영국, 주영대사 연표 <table><tbody><tr><th>전거 통제</th><td> WorldCat VIAF: 69232892 LCCN: n81079947 ISNI: 0000 0000 8391 7674 GND: 12472907X BNF: cb153512842 (데이터) NLA: 35002753 NDL: 00519487 NKC: xx0074677 BNE: XX1508105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러드퍼드_올콕&amp;oldid=23254849" 분류: 1809년 태어남1897년 죽음일본 주재 영국 대사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NLA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FrançaisItaliano日本語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venska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2월 13일 (목) 11:1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주제 요약:** 러드퍼드 올콕(Sir Rutherford Alcock, 1809-1897)은 영국의 의사이자 외교관으로, 청나라와 일본에서 중요한 외교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주일 총영사로서 일본의 개항과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며, 후에 청나라 주재 공사로 재임하였다. 그의 외교 정책은 일본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영향을 미쳤고, 그는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을 마친 후에도 여러 학술 및 정부 기관에서 활동했다. **각 문단의 핵심 문장:** 1. **생애:** 러더퍼드 올콕은 1809년 런던에서 태어나 의사로 시작하여 외교관으로 경력을 쌓았다. 2. **주일 대사:** 올콕은 1859년 초대 주일 총영사로 임명되어 일본의 개항과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다. 3. **이후:** 올콕은 일본에서의 외교 경력을 마친 후 청나라 주재 공사로 임명되어 1869년까지 재임하였다.
이 텍스트를 읽고, 전체 주제를 세 문장 이내로 요약한 뒤, 각 문단의 핵심 문장도 추출해서 함께 보여줘. 중요하지 않은 예시는 생략하고 핵심 개념 위주로 정리해줘.
제주마
https://ko.wikipedia.org/wiki/제주마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제주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제주마</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caption>제주의제주마<br>(濟州의濟州馬)</caption><tbody><tr><td colspan="2"> <span><a><img></a></span> <a>대한민국</a>의 <a>천연기념물</a></td></tr><tr><td colspan="2"> <a><img></a></td></tr><tr><th>종목</th> <td> <a>천연기념물</a> 제347호 <br>(<a>1986년</a> <a>2월 8일</a> 지정)</td></tr><tr><th>소유</th> <td> 문화재청 외</td></tr> <tr><th>주소</th> <td> <a>제주특별자치도</a> <a>제주시</a> <a>노형동</a>, <a>봉개동</a>, <a>용강동</a></td></tr><tr><th>정보</th> <td> <a>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a></td></tr> </tbody></table> <p><b>제주마</b>(濟州馬, <i>Equus caballus</i>)는 <a>제주특별자치도</a>에 자생하는 <a>조랑말</a>의 총칭으로, <a>1986년</a> <a>2월 8일</a> <a>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a> 제347호로 지정되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개요</span></a></li> <li><a><span>2</span> <span>역사</span></a></li> <li><a><span>3</span> <span>보존 관리</span></a> <ul> <li><a><span>3.1</span> <span>정부 차원의 보존 관리의 문제점</span></a></li> </ul> </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5</span> <span>참고 자료</span></a></li> </ul> </div> <h2><span></span><span>개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흔히 '제주도 조랑말'이라고 하며, 키가 작아서 과실나무 밑을 지날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의 ‘과하마(果下馬)’ 또는 ‘토마(土馬)’라고도 한다. </p><p>제주도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생종 말이 존재한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으로 현재와 가까운 품종의 제주마를 기르게 된 것은 13세기의 일로, 몽골로부터 지금의 제주마 품종이 유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제주의 농경문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한때 그 수가 2만여 마리에 달했던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운송수단의 발달 및 농기계 보급 등으로 인해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마의 혈통 및 품종 보존을 위하여 제주마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p><p>제주마 키는 암컷이 117cm, 수컷이 115cm 정도로 비교적 키가 작으며, 성격은 온순하고 체질이 건강하여 병에 대한 저항력과 생존력이 강하다. 털색은 밤색이 가장 많고 적갈색, 회색, 흑색 등의 순서이다. 전체적으로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으며 몸길이가 긴 독특한 체형이다. </p><p>2011년 제주도청 집계에서 확인된 제주도내 농가 1,157곳에서 기르는 총 22,223마리의 말 가운데 혼혈종 한라마<sup><a>&#91;1&#93;</a></sup> 16,692마리와 수입산 <a>서러브레드</a> 4,179마리를 제외한 나머지 제주마는 모두 1,392마리로 그 가운데 혈통이 등록된 순종은 200마리인 것으로 집계되었다.<sup>&#91;<a>출처 필요</a>&#93;</sup> </p> <h2><span></span><span>역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이미 대정읍 상모리와 안덕면 사계리 해안의 사람과 척추동물 발자국 화석(천연기념물 제464호) 등에서 구석기 말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제주에서 말을 기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곽지리 조개무지, 월령리 한들굴 등에서 출토된 말의 이빨이 발굴되기도 했다. <a>문종</a>(文宗) 27년(1073년)에 탐라국에서 말이 예물로서 진상되었다<sup><a>&#91;2&#93;</a></sup>. </p><p><a>원종</a>(元宗) 14년(1273년) <a>삼별초</a>를 평정하고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세워 제주를 장악한 <a>원</a>(元)이 <a>남송</a>과 <a>일본</a>을 공략하기 위한 군마를 공급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삼았다. 충렬왕 2년(1276년)에 탐라총관부 다루가치 탑자적(塔刺赤)이 다시 몽골 궁정의 말 160마리를 제주 동쪽에 수산평(水山坪, 지금의 <a>서귀포시</a>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 풀어 길렀다. 흔히 이때부터 제주에서 본격적인 말 사육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듬해(1277년)에 제주의 목마장을 관리하기 위해 수산평과 한경면 고산리에 각각 동 · 서 아막(阿幕)이 설치되고, 말과 함께 말을 기르는 전문가들이 제주에 들어왔으며 이들은 훗날 목호(牧胡)라 불리게 되었다.<sup><a>&#91;3&#93;</a></sup> </p><p>이들 목호의 임무는 제주에서 말을 기르고, 고려 본토를 통해 말을 원에 보내는 것이었다. 목호들에 의해서 말 기르는 기술과 함께 몽골어로 된 말 사육 용어도 전래되었으며, '고라', '구렁', '부루', '적다'라는 제주어 용어도 당시의 몽골 어휘에서 유래된 것으로, 제주마의 수가 가장 많았던 때는 고려 말 - 조선 초에 걸쳐 2만 마리가 방목되던 때로 알려져 있다. </p><p><a>공민왕</a>(恭愍王)의 반원자주정책으로 고려 조정은 몽골을 배제하고 제주의 지배권과 말 사육을 장악하고자 했고, 한편으로 원에 맞서기 위해 중국 남쪽에서 일어난 <a>명</a>(明)에 접근하는 정책을 펼친 고려에 명은 원과의 전쟁에 필요한 군마 공급을 위해 제주의 말을 조공품으로 요구하였다. 이에 목호들은 고려 관리를 살해하고 원 본국에 관리를 파견해줄 것을 청하는 등 고려 조정에 계속해 맞섰고, 공민왕 23년(1374년) "세조 황제(쿠빌라이 칸)가 풀어 기르신 말을 적국에 내줄 수는 없다"며 봉기를 일으킨다(<a>목호의 난</a>). 이 봉기는 <a>최영</a>에 의해 대대적으로 진압되었고, 제주는 고려에 귀속되었다. </p><p>조선 왕조의 개창자이자 고려 말의 무장으로서 활약했던 <a>이성계</a>에게는 팔준마라 불리는 여덟 마리의 명마가 있었는데, 이 중 <a>위화도 회군</a> 당시 타고 있었던 응상백(凝霜白)이 제주마였다고 한다. 말의 수를 늘리기 위해 <a>말고기</a> 먹는 것도 금지되어, 태조 7년(1398년)에 4,414필이던 제주마는 <a>세종</a>(世宗) 11년(1429년)부터 16년(1434년)까지 1만여 필로 불어났다. 《세종실록》에는 세종 11년(1429년)에 제주 출신의 관인 <a>고득종</a>(高得宗)의 건의에 따라 <a>한라산</a>(漢拏山) 중산간 지역에 조성되었는데, 이때 해안 지역의 촌락과 농경지와의 경계를 위해 돌로 하잣(돌담)<sup><a>&#91;4&#93;</a></sup>이라는 돌담을 쌓았고, <a>성종</a>(成宗) 24년(1493년) 이전에 완성된 하잣을 기준으로 10개의 구역으로 나눈 10소장이 설치됐다. 각 소장의 둘레는 45∼60리였다. </p><p>조선 시대의 제주목마장은 <a>의정부</a>, <a>병조</a> 및 <a>사복시</a>(司僕寺)의 지휘 감독 아래서 전라도감찰사, 제주목사, 감목관(제주 판관 · 정의현감 · 대정현감 겸임), 마감, 군두, 군부, 목자 등 순서의 계급으로 배치돼 운영되었다. 제주마는 왕이 타는 어승마를 비롯해 군마, 종마, 역마, 파발마, 태마, 만마, 복마 등 다양하게 활용되었으며, 한양의 조정에 해마다 200필과 진상마 60필을 바쳤을 뿐 아니라 제주목사 등 관리에게도 바치도록 규정되어, 3년 주기로 말을 차출했다. 말의 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 목자의 책임으로 전가되어 말값을 본인뿐 아니라 친척들까지 나서서 배상 책임을 지고 물어내야 했는데, 풀이 없는 초봄이나 겨울이 되면 굶주려 죽는 말이 많았고, 이때 목자는 죽은 말의 가죽을 벗겨서 말이 자연사했다는 증거로 관가에 바치도록 되어 있었으며, 관가에서는 장부의 기록과 대조하여 말이 자연사한 것이 확인되면 가죽을 돌려주었지만, 대부분 관리들에 의해 목자들의 과실로 처리되어 목자들이 말값을 물어내려다 파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p><p><a>숙종</a>(肅宗) 28년(1702년) 목사 <a>이형상</a>(李衡祥)에 의해 제작된 《<a>탐라순력도</a>》에는 관 소유의 말이 9,372필, 소 703필에 제주의 인구수가 43,515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기록된 수치는 관 소유만을 기록한 것으로 민간 소유의 말을 포함할 경우 제주마의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p><p>개항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운송수단의 발달 및 농기계 보급으로 제주마의 이용가치는 감소했다. 특히 <a>1948년</a> <a>4.3사건</a> 당시 제주 해안선 5km 바깥(주로 한라산 중산간 지대의 마을)에 내려진 이른바 '소개령'과 함께 주인을 잃고 버려져서 산야를 돌아다니다 아사하는가 하면, "내버려 두었다간 산폭도의 양식이 될 수 있다"는 명목으로 토벌대에 의한 살처분이 행해져서 제주마의 수는 대폭 감소한다. 1984년 당시 순종 제주마는 1천 마리가 조금 못 되었다. </p><p>1986년 2월에 대한민국 정부는 혈통이 확인된 순종 제주마 64마리를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해 국가 차원에서 보호하기로 하였다.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 직전의 제주마 사육두수는 1,347필이었다. </p><p>2000년 7월에는 '제주마 등록관리 규정'을 제정하였고, 2002년 4월부터 제주도(道) 차원에서 제주마에 대한 기초등록 업무를 시작했다. </p> <h2><span></span><span>보존 관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제주마는 혈통등록마와 기초등록마로 등록되어 관리된다. 부마(父馬)와 모마(母馬)가 모두 혈통등록되어 있는 말 사이에 태어난 것이 혈통등록마이고, 농가에서 사육되던 말로서 선대의 혈통을 알 수 없지만 외모와 유전자는 제주마인 개체로 확인된 것이 기초등록마로서, 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은 이 기준에 따라 174마리를 제주마로 선정하여 등록하였다. </p><p>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의 규정에 따르면, 천연기념물로서 제주마로 확인받기 위해서는 </p> <ol><li>엉덩이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li> <li>궁둥이는 돌출되지 않을 것</li> <li>체격에 비해 머리가 크고 눈은 둥글 것</li> <li>목은 굵고 털은 윤택할 것</li> <li>강인한 인상을 줄 것</li></ol> <p>등의 다섯 가지 기준의 외모 심사 기준과 함께, 17가지 유전인자를 확인하는 DNA 검사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이 기준에 따라 기초등록이 이루어지면 말의 '신분증'이라 할 수 있는 등록 전자칩이 말의 목 근육에 심어지고, 전자칩 리더기를 통해 출생정보 등의 이력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p> <h3><span></span><span>정부 차원의 보존 관리의 문제점</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유전자가 일치한다 해도 외모나 발육상태가 통상 규정된 제주마의 표준 외형과 다르다면 제주마로 인정받을 수 없는데, 2005년 제주마 유전자 분석을 통과한 암말 1필의 제주마 기초등록을 위한 신청이 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에 의해 "발육상태와 일반 외모가 제주마의 형태가 달라서 제주마로 등록 관리되기는 부적합하다"고 판정되어 거절된 일이 있었다. 당시 마주(강 모씨, 당시 49세)는 이에 불복하여 제주도축산진흥원장을 상대로 '제주마 기초등록거부처분' 취소에 관한 소송을 제기했고, "DNA 검사 결과 제주마로 인정된 말을 발육상태와 외모만으로 제주마 기초등록을 거부한 것은 부당하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2006년 12월 27일 제주지방법원 행정부(고충정 수석부장판사)는 23,000여 개에 달하는 말 유전자 가운데 17개 유전자만을 선별 분석한데 따른 한계가 있다는 점과 표준발육 성적이 불량하고 외모심사에서 등록관리 부적합 결정을 받은 말은 제주마로 등록 관리될 수 없다며 축산진흥원의 변론을 받아들여, 마주의 소송을 기각하였다.<sup><a>&#91;5&#93;</a></sup> </p><p>제주에 경마장이 들어선 뒤, 2020년부터는 제주 재래마, 즉 제주마로 등록된 말에 한해서만 경주마로 사용한다는 방침을 마사회가 세운 것도 제주마 논쟁에 불을 지폈다. 2007년 말까지 제주도내 말 사육규모는 807농가에 18,634마리로 집계되었는데, 이 중 제주 재래마로 등록되어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한 비중은 878마리로 전체 5% 정도에 불과했고, 같은 해 11월 9일, 사단법인 제주경주마생산자협회(회장 허종택)는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제주마 진상규명 촉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이 제주마 순종을 판정하기 위한 유전자 검사에서 사용하는 17개 유전자는 신뢰성이 없으며, 제주마만 특이 유전자가 없다는 사실이 각종 용역 결과에서 밝혀졌다며 축산진흥원이 내세우는 제주마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축산진흥원에서 제주마로 선정 등록한 174마리 말 가운데 일부는 선대의 혈통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외래종인 서러브레드의 암말이 제주마로 등록되어 있다며 현재 등록된 기초등록마 174마리에 대한 전면 전수조사와 현행 제주마 등록관리시스템에 대한 전면 원점 재검토, 제주자치도 축정(畜政) 당국이 제주마 진위규명을 위해 학계와 생산자, 민간으로 구성된 '제주마진상규명 위원회'(가칭)를 구성, 제주마에 대한 진위를 규명해줄 것을 요구하였다.<sup><a>&#91;6&#93;</a></sup> 2008년 5월 23일에는 같은 협회의 사무국장을 지낸 김동원(46. 제주시 구좌읍) 씨를 비롯한 제주마 사육농가 단체 70여 명이 <a>제주도청</a>을 방문해 "제주가 현재의 제주마 등록제도를 고수할 경우 제주의 말 사육농가들은 모두 도산할 수밖에 없다"며 도의 현행 제주마 혈통등록 및 마필정책에 대해 어려움을 호소하고 항의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sup><a>&#91;7&#93;</a></sup> </p><p>제주마의 '외모' 기준에 대해서는 그 객관성과 공정성에 대해 이미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데, 실제로 2008년에 이루어진 제주도 감사위원회의 ‘제주마 등록제도’ 전반에 대한 특별감사에서 부적정 업무 처리 사례 10건이 적발되고, 시정 및 개선을 요구하는 한편 관련 공무원 3명에 대한 문책이 요구되기도 했다. 감사 결과에서 드러난 것은 우선 제주마 외모의 심사에서 이미 마련된 객관적 기준을 제쳐두고 심사위원의 주관적 체형판단에 의존하거나, 기초 등록마와 혈통 등록마가 모두 동일한 유전자 분석기준을 적용해야 함에도 혈통 등록마에 대해선 소홀한 기준을 적용하는 바람에, 비지정 유전자를 가진 혈통 등록마가 순종 제주마의 씨수말로 기초등록되어 민간에 분양되고 그 새끼들이 계속 제주마로 등록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친자 확인뿐 아니라 발육상황 확인 및 혈통등록증 발급업무도 미흡했음이 드러났다.<sup><a>&#91;8&#93;</a></sup> 이에 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은 2002년 1월에 개정된 제주마 등록 관리 규정 가운데 ‘기초 등록마 외모 심사기준 점수제’를 삭제했던 부분을 개선하고, 외모 심사 때 제주마에 대한 체위별 특징, 몸길이 대 몸통길이 등의 상호비율과 표준편차 인정 범위 등을 구체화해 객관적인 심사 기준을 마련하고, 혈통등록마는 24개월이 지난 뒤 발육 상황을 확인해 기준 체형을 크게 벗어나면 제주마 등록을 취소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을 마련했다.<sup><a>&#91;9&#93;</a></sup>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한라마는 제주마과 <a>서러브레드</a>종 사이의 교배종으로, 제주산마라고도 한다.</span> </li> <li><span><a>↑</a></span> <span>《<a>고려사</a>》</span> </li> <li><span><a>↑</a></span> <span>《<a>신증동국여지승람</a>》</span> </li> <li><span><a>↑</a></span> <span>잣은 제주어로 '성(城)'이라는 뜻이다. 흔히 '잣' 또는 '잣성'이라고 부른다.</span> </li> <li><span><a>↑</a></span> <span><a>〈제주의소리〉 2006.12.27 보도. "제주마(馬) DNA 혈통보다 '외모'가 더 중요"(기자 양김진웅)</a></span> </li> <li><span><a>↑</a></span> <span><a>〈미디어제주〉 2007.11.9 보도. "천연기념물 제주마 진위 규명하라"(기자 문상식)</a></span> </li> <li><span><a>↑</a></span> <span><a>〈미디어제주〉 2008.5.23 보도 "말 사육농가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나"(기자 윤철수)</a></span> </li> <li><span><a>↑</a></span> <span><a>〈서귀포신문〉 2008.6.24 보도 "제주마 등록제도 곳곳에 ‘구멍’"(기자 강승남)</a></span> </li> <li><span><a>↑</a></span> <span><a>〈한겨레〉 2008.6.25 보도 "제주마 외모심사 점수제 부활키로"(기자 허호준)</a></span> </li> </ol></div> <h2><span></span><span>참고 자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제주의제주마</a>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small> ※ 이 문서에는 <a>문화재청</a>에서 <a>공공누리 제1유형</a>으로 배포한 <a>국가문화유산포털</a>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small></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제주마&amp;oldid=19731166</a>"</div> <div><div><a>분류</a>: <ul><li><a>말 품종</a></li><li><a>경마</a></li><li><a>제주특별자치도의 천연기념물</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출처가 필요한 글</a></li><li><a>출처가 필요한 글/2014년 8월</a></li><li><a>공공누리 제1유형 저작물을 인용한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English</a></li><li><a>Euskara</a></li><li><a>Français</a></li><li><a>Svenska</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7년 10월 4일 (수) 22: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이성계가 가지고 있던 명마 중 제주마의 이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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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75
[ "이성계가 가지고 있던 명마 중 제주마의 이름은?", "말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 먹는 것을 금지한 것은?", "해안 지역의 촌락과 농경지의 경계를 구분하기 위해 쌓은 돌담을 이르는 말은?", "고려 말의 무장이자 조선의 개창자이며 8마리의 명마를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성계가 보유하고 있는 8마리의 명마는 무엇이라고 불렸는가?", "세종 16년에 이르러 제주마는 몇 마리로 늘어났는가?", "조선의 제1대 왕은?", "이성계의 여덟 마리의 말을 가리키는 단어는?", "제주도에서 해마다 바친 진상마의 숫자는?", "관가에서 말이 자연사한 것이 확인되면 돌려 준 것은?", "말값을 물어내려다 파산하는 경우가 많았던 이들은?", "어승마와 군마, 종마, 파말마 등 다양하게 활용된 말은 무엇인가?", "한양의 조정에 매년 바쳐지는 진상마 수는 몇 마리인가?", "말이 자연사한 증거로 목자가 관가에 바치도록 되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왕이 타는 제주마의 정식 명칭은?", "말의 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 누구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는가?", "제주마 판정을 거부당한 마주가 소송을 제기한 사람은?", "마주의 소송을 기각된 해는?", "제주마 유전자 분석을 통과한 말이 발육상태와 외모가 달라서 제주마로 인정받지 못한 사건은 언제 발생되었는가?", "2006년 제주마 관련 소송을 담당하던 제주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는 누구인가?", "2006년 제주마 관련 소송 결과 마주의 소송은 어떻게 되었는가?", "제주마로 등록되기 위해서 외모 이외에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는?", "마주의 '제주마 기초등록거부처분'취소에 관한 소송에 대한 결과는?", "제주에 있는 경마장에서 유일하게 경주마로 쓰는 품종은?", "2007년 말 기준으로 제주마를 사육하는 농가의 숫자는?", "축산진흥원이 내세우는 제주마의 진실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단체는?", "2020년부터 제주마로 등록된 말을 경주마로 사용한다는 방침을 세운 조직은 무엇인가?", "2007년 말 제주도 내 말 사육 농가수는 몇 개인가?", "제주도내 말 사육 농가 중 제주 재래마로 등록된 비율은 얼마인가?", "2007년 말에 집계된 제주도내의 말을 사육하는 농가의 수는?", "축산진흥원에서 제주마로 선정한 말 중 외래종의 이름은?", "제주도 감사위원회가 제주마 등록제도 전반에 대해 특별감사를 한 해는?", "혈통등록마를 24개월 후에 확인해 기준 체형을 크게 벗어날 경우 취소할 수 있는 것은?", "제주마 등록제도 관련 특별감사에서 부정 업무 처리사례는 몇 건이 적발되었는가?", "2008년 제주마 관련 특별감사에서 문책을 요구받은 공무원은 몇 명인가?", "혈통등록마는 몇 개월이 지난 뒤 발육 상황을 확인하는가?", "제주마 등록제도에 관해 부적절한 업무 처리 사례가 총 몇 건 적발되었는가? " ]
<!DOCTYPE html> 제주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제주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caption>제주의제주마(濟州의濟州馬)</caption><tbody><tr><td colspan="2">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td></tr><tr><td colspan="2"> </td></tr><tr><th>종목</th> <td> 천연기념물 제347호 (1986년 2월 8일 지정)</td></tr><tr><th>소유</th> <td> 문화재청 외</td></tr> <tr><th>주소</th> <td>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노형동, 봉개동, 용강동</td></tr><tr><th>정보</th> <td>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정보</td></tr> </tbody></table> 제주마(濟州馬, Equus caballus)는 제주특별자치도에 자생하는 조랑말의 총칭으로, 1986년 2월 8일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되었다. 목차 1 개요 2 역사 3 보존 관리 3.1 정부 차원의 보존 관리의 문제점 4 각주 5 참고 자료 개요[편집] 흔히 '제주도 조랑말'이라고 하며, 키가 작아서 과실나무 밑을 지날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의 ‘과하마(果下馬)’ 또는 ‘토마(土馬)’라고도 한다. 제주도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생종 말이 존재한 것으로 보이지만, 본격적으로 현재와 가까운 품종의 제주마를 기르게 된 것은 13세기의 일로, 몽골로부터 지금의 제주마 품종이 유입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제주의 농경문화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한때 그 수가 2만여 마리에 달했던 시대도 있었다. 하지만 운송수단의 발달 및 농기계 보급 등으로 인해 개체수가 급격히 감소하였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마의 혈통 및 품종 보존을 위하여 제주마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제주마 키는 암컷이 117cm, 수컷이 115cm 정도로 비교적 키가 작으며, 성격은 온순하고 체질이 건강하여 병에 대한 저항력과 생존력이 강하다. 털색은 밤색이 가장 많고 적갈색, 회색, 흑색 등의 순서이다. 전체적으로 앞쪽이 낮고 뒤쪽이 높으며 몸길이가 긴 독특한 체형이다. 2011년 제주도청 집계에서 확인된 제주도내 농가 1,157곳에서 기르는 총 22,223마리의 말 가운데 혼혈종 한라마[1] 16,692마리와 수입산 서러브레드 4,179마리를 제외한 나머지 제주마는 모두 1,392마리로 그 가운데 혈통이 등록된 순종은 200마리인 것으로 집계되었다.[출처 필요] 역사[편집] 이미 대정읍 상모리와 안덕면 사계리 해안의 사람과 척추동물 발자국 화석(천연기념물 제464호) 등에서 구석기 말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제주에서 말을 기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곽지리 조개무지, 월령리 한들굴 등에서 출토된 말의 이빨이 발굴되기도 했다. 문종(文宗) 27년(1073년)에 탐라국에서 말이 예물로서 진상되었다[2]. 원종(元宗) 14년(1273년) 삼별초를 평정하고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세워 제주를 장악한 원(元)이 남송과 일본을 공략하기 위한 군마를 공급하기 위한 거점으로서 삼았다. 충렬왕 2년(1276년)에 탐라총관부 다루가치 탑자적(塔刺赤)이 다시 몽골 궁정의 말 160마리를 제주 동쪽에 수산평(水山坪, 지금의 서귀포시 성산읍 수산리 일대)에 풀어 길렀다. 흔히 이때부터 제주에서 본격적인 말 사육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듬해(1277년)에 제주의 목마장을 관리하기 위해 수산평과 한경면 고산리에 각각 동 · 서 아막(阿幕)이 설치되고, 말과 함께 말을 기르는 전문가들이 제주에 들어왔으며 이들은 훗날 목호(牧胡)라 불리게 되었다.[3] 이들 목호의 임무는 제주에서 말을 기르고, 고려 본토를 통해 말을 원에 보내는 것이었다. 목호들에 의해서 말 기르는 기술과 함께 몽골어로 된 말 사육 용어도 전래되었으며, '고라', '구렁', '부루', '적다'라는 제주어 용어도 당시의 몽골 어휘에서 유래된 것으로, 제주마의 수가 가장 많았던 때는 고려 말 - 조선 초에 걸쳐 2만 마리가 방목되던 때로 알려져 있다. 공민왕(恭愍王)의 반원자주정책으로 고려 조정은 몽골을 배제하고 제주의 지배권과 말 사육을 장악하고자 했고, 한편으로 원에 맞서기 위해 중국 남쪽에서 일어난 명(明)에 접근하는 정책을 펼친 고려에 명은 원과의 전쟁에 필요한 군마 공급을 위해 제주의 말을 조공품으로 요구하였다. 이에 목호들은 고려 관리를 살해하고 원 본국에 관리를 파견해줄 것을 청하는 등 고려 조정에 계속해 맞섰고, 공민왕 23년(1374년) "세조 황제(쿠빌라이 칸)가 풀어 기르신 말을 적국에 내줄 수는 없다"며 봉기를 일으킨다(목호의 난). 이 봉기는 최영에 의해 대대적으로 진압되었고, 제주는 고려에 귀속되었다. 조선 왕조의 개창자이자 고려 말의 무장으로서 활약했던 이성계에게는 팔준마라 불리는 여덟 마리의 명마가 있었는데, 이 중 위화도 회군 당시 타고 있었던 응상백(凝霜白)이 제주마였다고 한다. 말의 수를 늘리기 위해 말고기 먹는 것도 금지되어, 태조 7년(1398년)에 4,414필이던 제주마는 세종(世宗) 11년(1429년)부터 16년(1434년)까지 1만여 필로 불어났다. 《세종실록》에는 세종 11년(1429년)에 제주 출신의 관인 고득종(高得宗)의 건의에 따라 한라산(漢拏山) 중산간 지역에 조성되었는데, 이때 해안 지역의 촌락과 농경지와의 경계를 위해 돌로 하잣(돌담)[4]이라는 돌담을 쌓았고, 성종(成宗) 24년(1493년) 이전에 완성된 하잣을 기준으로 10개의 구역으로 나눈 10소장이 설치됐다. 각 소장의 둘레는 45∼60리였다. 조선 시대의 제주목마장은 의정부, 병조 및 사복시(司僕寺)의 지휘 감독 아래서 전라도감찰사, 제주목사, 감목관(제주 판관 · 정의현감 · 대정현감 겸임), 마감, 군두, 군부, 목자 등 순서의 계급으로 배치돼 운영되었다. 제주마는 왕이 타는 어승마를 비롯해 군마, 종마, 역마, 파발마, 태마, 만마, 복마 등 다양하게 활용되었으며, 한양의 조정에 해마다 200필과 진상마 60필을 바쳤을 뿐 아니라 제주목사 등 관리에게도 바치도록 규정되어, 3년 주기로 말을 차출했다. 말의 상태가 좋지 않을 경우 목자의 책임으로 전가되어 말값을 본인뿐 아니라 친척들까지 나서서 배상 책임을 지고 물어내야 했는데, 풀이 없는 초봄이나 겨울이 되면 굶주려 죽는 말이 많았고, 이때 목자는 죽은 말의 가죽을 벗겨서 말이 자연사했다는 증거로 관가에 바치도록 되어 있었으며, 관가에서는 장부의 기록과 대조하여 말이 자연사한 것이 확인되면 가죽을 돌려주었지만, 대부분 관리들에 의해 목자들의 과실로 처리되어 목자들이 말값을 물어내려다 파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숙종(肅宗) 28년(1702년) 목사 이형상(李衡祥)에 의해 제작된 《탐라순력도》에는 관 소유의 말이 9,372필, 소 703필에 제주의 인구수가 43,515명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기록된 수치는 관 소유만을 기록한 것으로 민간 소유의 말을 포함할 경우 제주마의 수는 더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운송수단의 발달 및 농기계 보급으로 제주마의 이용가치는 감소했다. 특히 1948년 4.3사건 당시 제주 해안선 5km 바깥(주로 한라산 중산간 지대의 마을)에 내려진 이른바 '소개령'과 함께 주인을 잃고 버려져서 산야를 돌아다니다 아사하는가 하면, "내버려 두었다간 산폭도의 양식이 될 수 있다"는 명목으로 토벌대에 의한 살처분이 행해져서 제주마의 수는 대폭 감소한다. 1984년 당시 순종 제주마는 1천 마리가 조금 못 되었다. 1986년 2월에 대한민국 정부는 혈통이 확인된 순종 제주마 64마리를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해 국가 차원에서 보호하기로 하였다. 천연기념물로 지정하기 직전의 제주마 사육두수는 1,347필이었다. 2000년 7월에는 '제주마 등록관리 규정'을 제정하였고, 2002년 4월부터 제주도(道) 차원에서 제주마에 대한 기초등록 업무를 시작했다. 보존 관리[편집] 제주마는 혈통등록마와 기초등록마로 등록되어 관리된다. 부마(父馬)와 모마(母馬)가 모두 혈통등록되어 있는 말 사이에 태어난 것이 혈통등록마이고, 농가에서 사육되던 말로서 선대의 혈통을 알 수 없지만 외모와 유전자는 제주마인 개체로 확인된 것이 기초등록마로서, 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은 이 기준에 따라 174마리를 제주마로 선정하여 등록하였다. 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의 규정에 따르면, 천연기념물로서 제주마로 확인받기 위해서는 엉덩이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궁둥이는 돌출되지 않을 것 체격에 비해 머리가 크고 눈은 둥글 것 목은 굵고 털은 윤택할 것 강인한 인상을 줄 것 등의 다섯 가지 기준의 외모 심사 기준과 함께, 17가지 유전인자를 확인하는 DNA 검사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이 기준에 따라 기초등록이 이루어지면 말의 '신분증'이라 할 수 있는 등록 전자칩이 말의 목 근육에 심어지고, 전자칩 리더기를 통해 출생정보 등의 이력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정부 차원의 보존 관리의 문제점[편집] 유전자가 일치한다 해도 외모나 발육상태가 통상 규정된 제주마의 표준 외형과 다르다면 제주마로 인정받을 수 없는데, 2005년 제주마 유전자 분석을 통과한 암말 1필의 제주마 기초등록을 위한 신청이 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에 의해 "발육상태와 일반 외모가 제주마의 형태가 달라서 제주마로 등록 관리되기는 부적합하다"고 판정되어 거절된 일이 있었다. 당시 마주(강 모씨, 당시 49세)는 이에 불복하여 제주도축산진흥원장을 상대로 '제주마 기초등록거부처분' 취소에 관한 소송을 제기했고, "DNA 검사 결과 제주마로 인정된 말을 발육상태와 외모만으로 제주마 기초등록을 거부한 것은 부당하다"는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하지만 2006년 12월 27일 제주지방법원 행정부(고충정 수석부장판사)는 23,000여 개에 달하는 말 유전자 가운데 17개 유전자만을 선별 분석한데 따른 한계가 있다는 점과 표준발육 성적이 불량하고 외모심사에서 등록관리 부적합 결정을 받은 말은 제주마로 등록 관리될 수 없다며 축산진흥원의 변론을 받아들여, 마주의 소송을 기각하였다.[5] 제주에 경마장이 들어선 뒤, 2020년부터는 제주 재래마, 즉 제주마로 등록된 말에 한해서만 경주마로 사용한다는 방침을 마사회가 세운 것도 제주마 논쟁에 불을 지폈다. 2007년 말까지 제주도내 말 사육규모는 807농가에 18,634마리로 집계되었는데, 이 중 제주 재래마로 등록되어 안정적인 판로를 확보한 비중은 878마리로 전체 5% 정도에 불과했고, 같은 해 11월 9일, 사단법인 제주경주마생산자협회(회장 허종택)는 제주도의회 도민의 방에서 '제주마 진상규명 촉구'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이 제주마 순종을 판정하기 위한 유전자 검사에서 사용하는 17개 유전자는 신뢰성이 없으며, 제주마만 특이 유전자가 없다는 사실이 각종 용역 결과에서 밝혀졌다며 축산진흥원이 내세우는 제주마의 진실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다. 축산진흥원에서 제주마로 선정 등록한 174마리 말 가운데 일부는 선대의 혈통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외래종인 서러브레드의 암말이 제주마로 등록되어 있다며 현재 등록된 기초등록마 174마리에 대한 전면 전수조사와 현행 제주마 등록관리시스템에 대한 전면 원점 재검토, 제주자치도 축정(畜政) 당국이 제주마 진위규명을 위해 학계와 생산자, 민간으로 구성된 '제주마진상규명 위원회'(가칭)를 구성, 제주마에 대한 진위를 규명해줄 것을 요구하였다.[6] 2008년 5월 23일에는 같은 협회의 사무국장을 지낸 김동원(46. 제주시 구좌읍) 씨를 비롯한 제주마 사육농가 단체 70여 명이 제주도청을 방문해 "제주가 현재의 제주마 등록제도를 고수할 경우 제주의 말 사육농가들은 모두 도산할 수밖에 없다"며 도의 현행 제주마 혈통등록 및 마필정책에 대해 어려움을 호소하고 항의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7] 제주마의 '외모' 기준에 대해서는 그 객관성과 공정성에 대해 이미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데, 실제로 2008년에 이루어진 제주도 감사위원회의 ‘제주마 등록제도’ 전반에 대한 특별감사에서 부적정 업무 처리 사례 10건이 적발되고, 시정 및 개선을 요구하는 한편 관련 공무원 3명에 대한 문책이 요구되기도 했다. 감사 결과에서 드러난 것은 우선 제주마 외모의 심사에서 이미 마련된 객관적 기준을 제쳐두고 심사위원의 주관적 체형판단에 의존하거나, 기초 등록마와 혈통 등록마가 모두 동일한 유전자 분석기준을 적용해야 함에도 혈통 등록마에 대해선 소홀한 기준을 적용하는 바람에, 비지정 유전자를 가진 혈통 등록마가 순종 제주마의 씨수말로 기초등록되어 민간에 분양되고 그 새끼들이 계속 제주마로 등록되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친자 확인뿐 아니라 발육상황 확인 및 혈통등록증 발급업무도 미흡했음이 드러났다.[8] 이에 제주특별자치도 축산진흥원은 2002년 1월에 개정된 제주마 등록 관리 규정 가운데 ‘기초 등록마 외모 심사기준 점수제’를 삭제했던 부분을 개선하고, 외모 심사 때 제주마에 대한 체위별 특징, 몸길이 대 몸통길이 등의 상호비율과 표준편차 인정 범위 등을 구체화해 객관적인 심사 기준을 마련하고, 혈통등록마는 24개월이 지난 뒤 발육 상황을 확인해 기준 체형을 크게 벗어나면 제주마 등록을 취소할 수 있는 근거 규정을 마련했다.[9] 각주[편집] ↑ 한라마는 제주마과 서러브레드종 사이의 교배종으로, 제주산마라고도 한다. ↑ 《고려사》 ↑ 《신증동국여지승람》 ↑ 잣은 제주어로 '성(城)'이라는 뜻이다. 흔히 '잣' 또는 '잣성'이라고 부른다. ↑ 〈제주의소리〉 2006.12.27 보도. "제주마(馬) DNA 혈통보다 '외모'가 더 중요"(기자 양김진웅) ↑ 〈미디어제주〉 2007.11.9 보도. "천연기념물 제주마 진위 규명하라"(기자 문상식) ↑ 〈미디어제주〉 2008.5.23 보도 "말 사육농가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나"(기자 윤철수) ↑ 〈서귀포신문〉 2008.6.24 보도 "제주마 등록제도 곳곳에 ‘구멍’"(기자 강승남) ↑ 〈한겨레〉 2008.6.25 보도 "제주마 외모심사 점수제 부활키로"(기자 허호준) 참고 자료[편집] 제주의제주마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이 문서에는 문화재청에서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배포한 국가문화유산포털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제주마&amp;oldid=19731166" 분류: 말 품종경마제주특별자치도의 천연기념물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출처가 필요한 글/2014년 8월공공누리 제1유형 저작물을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uskaraFrançaisSvenska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10월 4일 (수) 22: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서론 제주마는 제주특별자치도에 자생하는 조랑말의 총칭으로, 1986년 대한민국의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되었다. 이 글은 제주마의 역사, 보존 관리 현황, 그리고 정부 차원의 보존 관리의 문제점을 다루며, 제주마의 중요성과 보존 필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 본론 1. **개요**: 제주마는 작고 온순한 성격을 가진 말로, 13세기 몽골에서 유입된 품종으로 알려져 있다. 제주마는 농경문화에 기여했으나, 운송수단의 발달로 개체수가 급감하였다. 현재는 정부의 보호 아래 혈통 및 품종 보존이 이루어지고 있다. 2. **역사**: 제주에서의 말 사육은 구석기 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13세기 몽골의 영향으로 본격화되었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는 제주마가 군마 및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었으나, 일제강점기와 1948년 4.3사건 등으로 인해 개체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1986년에는 순종 제주마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3. **보존 관리**: 제주마는 혈통등록마와 기초등록마로 나뉘어 관리되며, 외모와 유전자를 기준으로 등록된다. 그러나 외모 기준의 주관성과 유전자 검사에 대한 신뢰성 문제로 논란이 발생하고 있다. 제주마 등록제도의 공정성과 객관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며, 농가의 생존을 위협하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 결론 제주마는 제주도의 문화유산으로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보존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의 보존 관리 체계에는 여러 문제점이 존재하여, 보다 객관적이고 공정한 기준 마련이 시급하다. 제주마의 진위 규명과 등록 관리 시스템의 개선이 이루어져야 하며, 이를 통해 제주마의 지속 가능한 보존과 농가의 생존을 도모해야 한다. 글쓴이는 제주마의 보존을 위한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글 전체의 요지를 논리적 흐름에 맞게 정리해줘. 서론, 본론, 결론 구조로 요약해주고, 각 부분마다 글쓴이의 의도나 주장도 명확히 밝혀줘.
홍춘경
https://ko.wikipedia.org/wiki/홍춘경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홍춘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홍춘경</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d><div><img></div></td><td><span>이 문서의 내용은 <b><a>출처</a>가 분명하지 않습니다.</b><span><br>이 <span><a>문서를 편집</a></span>하여, <a>신뢰할 수 있는 출처</a>를 표기해 주세요. <a>검증</a>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a>토론 문서</a>에서 나누어 주세요.</span> <small>(2014년 1월)</small><span></span></span></td></tr></tbody></table> <p><b>홍춘경</b>(洪春卿, 1497년(연산군 3년) ~ 1548년(명종 3년) 3월 7일)은 <a>조선</a> 전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판중추 익성부원군 <a>홍성민</a>의 아버지이고 익령군 학곡 <a>홍서봉</a>의 할아버지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자는 명중(明仲), 호는 석벽(石壁)이다. </p>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증조부는 첨지중추부사 겸 수동지성균관사를 지낸 경손(敬孫)이고 할아버지는 봉정대부 봉상시부정으로 사후 증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추증된 윤덕(潤德)이며, 아버지는 예문관대교로 예조참판과 이조판서에 거듭 추증된 계정(係貞)이며, 어머니는 언양김씨(彦陽金氏)로 현감을 지낸 김기수(金期壽)의 딸이다. <a>1522년</a>(중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8년(중종 2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바로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가, 1530년 홍문관 저작, 정자를 지내고, 승문원 주서(承文院注書)가 되었다가 병으로 면직되었다. 이후 다시 홍문관 정자로 복직하여 다시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가 차자(箚子)를 올려 김안로(金安老)의 권력 남용을 탄핵하다가 면직되었다. 1531년 학관(學官)으로 서용된 뒤 다시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다가 이후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전임되고 다시 시강원 사서(司書)로 승진하였다. 이후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 예조좌랑을 거쳐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부수찬으로 재직 중 사관을 두 번 겸직하고,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어 네 번을 전적에 재임명되었다. </p><p><a>홍문관</a> <a>부제학</a>으로 지제교(知製敎)를 맡았다가 1개월만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갔다. 그 뒤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공조정랑이 되자 부모의 나이가 연로(年老)함을 이유로 들어 외직인 영평 현령(永平縣令)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때 대제학이던 <a>김안로</a>는 홍문관에 선발한 인원이 적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이후 형조정랑, 공조정랑을 거쳐 1536년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으나 풍저창수(豊儲倉守)로 전임되었다. 이때 명나라 조정에서 공용경(龔用卿)ㆍ오희맹(吳希孟) 두 공(公)을 우리나라에 조사(詔使)로 보내자 이들을 접대하는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명나라 사신을 수행하였다. 이어 1537년(중종 32년)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을 역임했다. 이후 사성·보덕·집의를 거쳐 예조참의에 올랐다. 1541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p><p><a>김안로</a> 일파가 몰락하자 그는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 보덕(輔德)으로 승진하였고, <a>의정부</a><a>검상</a>(檢詳)이 되어 두 번을 역임했으며 얼마 뒤에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겸직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을 겸임하였다. 이후 봉상시부정,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종부시정, 군기시정을 지내고, 사헌부집의, <a>사간원</a> 사간을 지냈다. 이 때 가뭄이 극심하여 김안로의 패거리인 채무택(蔡無擇)을 석방하자는 여론이 나오자 그는 채무택의 석방을 반대하여 “간인(奸人)을 두호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응하는 것이 아니다.”며 <a>채무택</a>의 석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a>1540년</a>(중종 36년)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가 되고, 우통례(右通禮)를 거쳐 좌통례(左通禮)가 되었다가 곧 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참의에 임명되었다. 바로 공조참의가 되었다가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a>성절사</a>(聖節使)로 연경에 다녀왔다. <a>1541년</a> 귀국 후 승정원 우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좌승지로 승진했다가 다시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p><p>이어 <a>황해도</a><a>관찰사</a>(黃海道觀察使)로 부임했다가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서 병조참의, 한성부우윤, 이조참의를 지냈다. 1543년 중종이 죽자 조정 신하들이 그가 글을 잘 짓는다고 하여 1545년(인종 1) 중종 재궁의 지문(誌文)을 짓도록 하여 중종의 관곽과 함께 묻게 하였다. 이어 예조참의, 공조참의, 병조참의를 역임하고 <a>상호군</a>(上護軍)과 <a>대호군</a>(大護軍)을 지냈다. 1547년(명종 2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묘소 옆에서 시묘살이를 했는데, 이때 병을 얻어 몸이 몹시 수척해져서 쓰러지자 부축한 채로 한성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1548년(명종 3년) 3월 7일 살려내지 못하고 그대로 사망하였다. <a>명종</a>은 부의(賻儀)를 내려주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a>1548년</a> <a>9월</a> 적성현(積城縣) 남면 상수리 송산(松山)에 있는 선영(先塋) 왼쪽, 조부 홍계정과 증조부 홍윤덕 묘소 남서편 위에 안장하였다. 그는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특히 김생체(金生體)를 잘 썼다. 또한 시문에 능하여 여러 편의 시문을 남겼다. </p><p>사후 아들 <a>홍성민</a>이 숭정대부에 올랐으므로 증직으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아들 <a>홍성민</a>이 <a>광국공신</a>과 <a>평난공신</a>에 녹훈되었으므로 특별히 증 순충 적덕 보조 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관상감 성균관 춘추관사에 <a>추증</a>되고, 남영부원군(南寧府院君)에 추봉되었다. </p> <h2><span></span><span>참조 항목</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홍성민</a></li> <li><a>홍서봉</a></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홍춘경&amp;oldid=18434351</a>"</div> <div><div><a>분류</a>: <ul><li><a>1497년 태어남</a></li><li><a>1548년 죽음</a></li><li><a>조선의 문신</a></li><li><a>조선의 정치인</a></li><li><a>조선의 외교관</a></li><li><a>조선의 서예가</a></li><li><a>조선의 시인</a></li><li><a>조선의 작가</a></li><li><a>통역사</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출처가 필요한 글/2014년 1월</a></li><li><a>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a></li><li><a>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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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춘경이 1541년 성절사로 파견되었던 나라는?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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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춘경이 1541년 성절사로 파견되었던 나라는?", "홍춘경 재직 당시의 왕조는?", "홍춘경이 문과 중시에 장원한 년도는?", "홍춘경이 1541년, 성절사로 다녀온 나라는 어디인가?", "여론이 가뭄을 이유로 석방을 요구한 김안로의 패거리 이름은?", "홍춘경이 명나라로 파견 당시 맡은 직책은?", "홍춘경이 공조참의가 되기 전 임명되었던 관직은?", "홍춘경의 글씨 중 가장 출중했던 서체는?", "작문에 능한 홍춘경이 중종의 죽음을 애도하며 지은 글은?", "홍춘경의 사망 년도는?", "중종이 죽게 된 년도는 언제인가?", "홍춘경이 모친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하다 몸이 수척해져 돌아온 지역은?" ]
<!DOCTYPE html> 홍춘경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홍춘경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d></td><td>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4년 1월)</td></tr></tbody></table> 홍춘경(洪春卿, 1497년(연산군 3년) ~ 1548년(명종 3년) 3월 7일)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판중추 익성부원군 홍성민의 아버지이고 익령군 학곡 홍서봉의 할아버지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고 자는 명중(明仲), 호는 석벽(石壁)이다. 생애[편집] 증조부는 첨지중추부사 겸 수동지성균관사를 지낸 경손(敬孫)이고 할아버지는 봉정대부 봉상시부정으로 사후 증 통정대부 이조참의에 추증된 윤덕(潤德)이며, 아버지는 예문관대교로 예조참판과 이조판서에 거듭 추증된 계정(係貞)이며, 어머니는 언양김씨(彦陽金氏)로 현감을 지낸 김기수(金期壽)의 딸이다. 1522년(중종 17)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8년(중종 2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바로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홍문관 정자가 되었다가, 1530년 홍문관 저작, 정자를 지내고, 승문원 주서(承文院注書)가 되었다가 병으로 면직되었다. 이후 다시 홍문관 정자로 복직하여 다시 홍문관 저작이 되었다가 차자(箚子)를 올려 김안로(金安老)의 권력 남용을 탄핵하다가 면직되었다. 1531년 학관(學官)으로 서용된 뒤 다시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다가 이후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로 전임되고 다시 시강원 사서(司書)로 승진하였다. 이후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 예조좌랑을 거쳐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부수찬으로 재직 중 사관을 두 번 겸직하고, 성균관전적에 임명되어 네 번을 전적에 재임명되었다. 홍문관 부제학으로 지제교(知製敎)를 맡았다가 1개월만에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갔다. 그 뒤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공조정랑이 되자 부모의 나이가 연로(年老)함을 이유로 들어 외직인 영평 현령(永平縣令)으로 나가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이때 대제학이던 김안로는 홍문관에 선발한 인원이 적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이후 형조정랑, 공조정랑을 거쳐 1536년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으나 풍저창수(豊儲倉守)로 전임되었다. 이때 명나라 조정에서 공용경(龔用卿)ㆍ오희맹(吳希孟) 두 공(公)을 우리나라에 조사(詔使)로 보내자 이들을 접대하는 원접사(遠接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명나라 사신을 수행하였다. 이어 1537년(중종 32년) 종부시 첨정(宗簿寺僉正),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을 역임했다. 이후 사성·보덕·집의를 거쳐 예조참의에 올랐다. 1541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김안로 일파가 몰락하자 그는 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 보덕(輔德)으로 승진하였고, 의정부검상(檢詳)이 되어 두 번을 역임했으며 얼마 뒤에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겸직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을 겸임하였다. 이후 봉상시부정, 군자감부정(軍資監副正), 종부시정, 군기시정을 지내고, 사헌부집의, 사간원 사간을 지냈다. 이 때 가뭄이 극심하여 김안로의 패거리인 채무택(蔡無擇)을 석방하자는 여론이 나오자 그는 채무택의 석방을 반대하여 “간인(奸人)을 두호하는 것은 하늘의 뜻에 응하는 것이 아니다.”며 채무택의 석방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1540년(중종 36년) 통례원 통례(通禮院通禮)가 되고, 우통례(右通禮)를 거쳐 좌통례(左通禮)가 되었다가 곧 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 예조참의에 임명되었다. 바로 공조참의가 되었다가 명나라에 사신이 파견될 때 성절사(聖節使)로 연경에 다녀왔다. 1541년 귀국 후 승정원 우승지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좌승지로 승진했다가 다시 승정원도승지가 되었다. 이어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부임했다가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서 병조참의, 한성부우윤, 이조참의를 지냈다. 1543년 중종이 죽자 조정 신하들이 그가 글을 잘 짓는다고 하여 1545년(인종 1) 중종 재궁의 지문(誌文)을 짓도록 하여 중종의 관곽과 함께 묻게 하였다. 이어 예조참의, 공조참의, 병조참의를 역임하고 상호군(上護軍)과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 1547년(명종 2년)에 모친상을 당하여 묘소 옆에서 시묘살이를 했는데, 이때 병을 얻어 몸이 몹시 수척해져서 쓰러지자 부축한 채로 한성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1548년(명종 3년) 3월 7일 살려내지 못하고 그대로 사망하였다. 명종은 부의(賻儀)를 내려주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제(弔祭)하게 하였다. 1548년 9월 적성현(積城縣) 남면 상수리 송산(松山)에 있는 선영(先塋) 왼쪽, 조부 홍계정과 증조부 홍윤덕 묘소 남서편 위에 안장하였다. 그는 글씨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특히 김생체(金生體)를 잘 썼다. 또한 시문에 능하여 여러 편의 시문을 남겼다. 사후 아들 홍성민이 숭정대부에 올랐으므로 증직으로 숭정대부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증직되었다가, 다시 아들 홍성민이 광국공신과 평난공신에 녹훈되었으므로 특별히 증 순충 적덕 보조 공신(純忠積德補祚功臣)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관상감 성균관 춘추관사에 추증되고, 남영부원군(南寧府院君)에 추봉되었다. 참조 항목[편집] 홍성민 홍서봉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홍춘경&amp;oldid=18434351" 분류: 1497년 태어남1548년 죽음조선의 문신조선의 정치인조선의 외교관조선의 서예가조선의 시인조선의 작가통역사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4년 1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7년 3월 9일 (목) 17:0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주제 요약:** 홍춘경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며 정치와 외교에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뛰어난 문장력과 서예 실력을 지닌 인물로, 사후에도 그의 업적이 인정받아 여러 차례 추증되었다. 그의 생애는 정치적 갈등과 개인적 고난을 겪으며 조선 왕조의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각 문단의 핵심 문장:** 1. 홍춘경(1497-1548)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시인으로, 본관은 남양이며 자는 명중, 호는 석벽이다. 2. 그는 1522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28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3. 홍춘경은 김안로의 권력 남용을 탄핵하고, 여러 차례 외직과 내직을 오가며 정치적 경력을 쌓았다. 4. 그는 1548년 사망하였으며, 그의 문장과 시문은 후세에 남아있다. 5. 사후 아들 홍성민의 공로로 여러 차례 증직과 추증이 이루어졌다.
이 텍스트를 읽고, 전체 주제를 세 문장 이내로 요약한 뒤, 각 문단의 핵심 문장도 추출해서 함께 보여줘. 중요하지 않은 예시는 생략하고 핵심 개념 위주로 정리해줘.
리처드_몽고메리
https://ko.wikipedia.org/wiki/리처드_몽고메리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리처드 몽고메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리처드 몽고메리</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tbody><tr> <td colspan="2"> <div><div><img></div><span><big><big><b>리처드 몽고메리<br><i>Richard Montgomery</i></b></big></big></span></div> </td></tr> <tr> <td colspan="2"><a><img></a> </td></tr> <tr> <th><span>생애 </span> </th> <td><a>1738년</a> <a>2월 2일</a> ~ <a>1775년</a> <a>12월 31일</a> </td></tr> <tr> <th><span>출생지 </span> </th> <td><a>아일랜드</a> <a>더블린</a> <a>소드</a> </td></tr> <tr> <th><span>사망지 </span> </th> <td><a>캐나다</a> <a>퀘벡주</a> <a>퀘벡 시</a> </td></tr> <tr> <th><span>복무 </span> </th> <td><a>대륙군</a><br> <a>영국 육군</a> </td></tr> <tr> <th><span>복무 기간 </span> </th> <td>영국군(1756–1772)<br> 대륙군(1775) </td></tr> <tr> <th><span>최종 계급 </span> </th> <td>대륙군 소장 </td></tr> <tr> <th><span>근무 </span> </th> <td><a>대륙군</a>, <a>미합중국군</a> </td></tr> <tr> <th><span>지휘 </span> </th> <td><a>대륙군</a> </td></tr> <tr> <th><span>주요 참전 </span> </th> <td><a>폰티액 전쟁</a><br><a>7년 전쟁</a><br> <b><a>미국 독립 전쟁</a></b><br>-<a>퀘벡 침공전</a><br> - <a>세인트진 요새 전투</a><br> - <a>퀘벡 전투</a> </td></tr> </tbody></table> <p><b>리처드 몽고메리</b>(Richard Montgomery, <a>1738년</a> <a>12월 2일</a> - <a>1775년</a> <a>12월 31일</a>)는 <a>아일랜드</a> 태생의 군인으로, 우선 <a>영국 육군</a>에서 복무했다. <a>미국 독립 전쟁</a> 때 <a>대륙군</a> 준장 되어, <a>1775년</a>에 실패로 끝났던 <a>캐나다 침공 작전</a>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li> <li><a><span>2</span> <span>초기 생애</span></a> <ul> <li><a><span>2.1</span> <span>초기</span></a></li> </ul> </li> <li><a><span>3</span> <span>7년 전쟁</span></a> <ul> <li><a><span>3.1</span> <span>카리브 해</span></a></li> </ul> </li> <li><a><span>4</span> <span>폰티액 전쟁</span></a></li> <li><a><span>5</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몽고메리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자랐다. <a>1754년</a> <a>더블린</a>의 <a>트리니티 칼리지</a>에 입학하여 2년 후에는 영국군에 입대해 <a>프렌치 인디언 전쟁</a>에 참전했다. 북아메리카에서 이어 <a>카리브해</a>에서 근무하면서 순조롭게 계급을 올렸다. <a>프렌치 인디언 전쟁</a>이 끝난 후 <a>폰티액 전쟁</a>에서는 디트로이트 요새에 주둔한 후 건강상의 이유로 영국에 귀국했다. 1773년, 몽고메리는 미국에 돌아가서 자넷 리빙스턴과 결혼하여 농장 경영을 시작했다. </p><p>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 독립 지지자가 되었으며, <a>1775년</a> 5월에는 뉴욕 식민지 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a>1775년</a> 6월, 대륙군 준장으로 임관되었다. 필립 스카일러 장군의 병이 깊어져 캐나다 침공을 이끌 수가 없자 몽고메리가 지휘를 인수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세인트존스 요새와 <a>몬트리올 시</a>를 점령한 후 <a>퀘벡 시</a>까지 진군하여 <a>베네딕트 아놀드</a>가 이끄는 별동대와 합류했다. <a>12월 31일</a> 퀘벡 시에 공격을 지휘했지만(퀘벡 전투), 전투 중에 전사했다. 영국군이 그 유해를 찾아 군 장례식을 치뤘다. 유해는 1818년에 뉴욕 시에 이장되었다. </p> <h2><span></span><span>초기 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초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몽고메리는 <a>아일랜드</a> <a>더블린주</a>(현재 <a>핑걸주</a>) 소즈에서 원래 영국군 장교로 아일랜드 의회 대의원이었던 토마스 몽고메리(1700년 –1761년)와 메리 프랭클린 몽고메리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 알렉산더 몽고메리 대령(1720년 –1800년)과, 사촌으로 알렉산더 몽고메리 대령 (1686년 -1729년)이 있으며, 모두 <a>도네갈 주</a> 대표로 대의원을 지냈다. 다른 사촌으로 역시 알렉산더 몽고메리 장군(1721년 -1785년)은 <a>모나한 주</a> 대표로 대의원을 지냈다. </p><p>몽고메리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a>도네갈</a> 근방에서 보냈고, 사냥, 승마, 사격과 펜싱을 배웠다. 아버지 토마스가 몽고메리에 충분한 교육을 받도록 유도했기 때문에, <a>프랑스어</a>, <a>라틴어</a> 및 수사학을 배웠고 벨파스트 교외의 학교를 다녔다. 북아메리카에서 <a>프렌치 인디언 전쟁</a>이 시작된 <a>1754년</a>, 몽고메리는 더블린의 <a>트리니티 칼리지</a>에 입학했다. </p><p>몽고메리는 지식을 매우 사랑했지만 학위는 받지 않았다. 아버지와 형 알렉산더를 설득해 <a>1756년</a> <a>9월 21일</a>에 영국 육군에 입대했다. 아버지가 소위 임관을 사서, 제17 보병연대에 근무하게 되었다. </p> <h2><span></span><span>7년 전쟁</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1757년</a> <a>2월 3일</a>, 제17 보병연대는 골웨이 수비대 임무로 해외 파견을 준비를 하도록 명령받았다. <a>5월 5일</a> 몽고메리와 제17 보병연대는 코크를 출항해 노바스코샤의 <a>핼리팩스</a>로 가서 7월에 도착했다. 영국군은 루이스버그 공략 전략을 세웠지만, 그 실행은 연기되었고, 동계 숙영을 위해 뉴욕 식민지로 향했다. <a>1758년</a>, 제17 보병연대는 핼리팩스로 돌아가 다시 루이스버그 공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p><p>영국군 지휘관 <a>제프리 애머스트</a>와 <a>제임스 에버크롬비</a>는 <a>핼리팩스</a>의 북쪽, 케이프 브레튼 섬의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루이스버그에 주둔하는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다. 프랑스군 수비대는 불과 800명이며, 영국군은 13,142명의 세력에 23척의 전열함과 13척의 <a>프리깃함</a> 지원이 있었다. <a>1758년</a> <a>6월 8일</a>, 요새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몽고메리는 격렬한 포화 속에 해변에 상륙하여, 부대원들에게 총검을 꽂고 전진을 명령했다. 밖에 나와 있던 프랑스군은 요새 방향으로 후퇴했다. 몽고메리 부대와 다른 영국 부대는 요새에 설치된 ​​대포의 사정거리 밖까지 프랑스군을 쫓았다. 이 시점에서 영국군은 요새의 포위전으로 접어들었다. 악천후가 이어졌고, 포위전을 위해 필요한 대포 등 보급 물자의 도착까지 몇 주가 걸렸다. </p><p>몽고메리는 병사들에 참호를 파고, 흉벽을 만들게 해, 프랑스군의 공격 가능성에 대비하면서 경계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7월 9일, 프랑스군이 요새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a>7월 26일</a>, 일련의 전투로 프랑스 해군 함대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요새 내의 프랑스군은 항복했다. 애머스트 장군은 포위전 중의 몽고메리 행동에 감탄하여 중위로 승진시켰다. </p><p><a>1758년</a> <a>7월 8일</a>, 제임스 에버크롬비가 <a>챔플레인 호수</a>를 따라 <a>카리용 요새</a>를 공격했지만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8월, 몽고메리와 제17 보병연대는 보스턴으로 돌아와 올버니에서 에버크롬비의 부대와 합류한 후 <a>조지 호수</a>로 진군했다. <a>11월 9일</a>, 에버크롬비가 해임되고, 애머스트가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p><p>영국군 상층부는 1759년 전략을 위해 캐나다를 세 방면에서의 공격하는 작전을 입안했다. 제17 보병연대를 포함 부대는 카리용 요새를 공격하고, 크라운 포인트에 가까운 <a>세인트 프레드릭 요새</a>도 공략하게 되었다. 애머스트 장군의 지휘 하에 몽고메리와 제17 보병연대는 카리용 요새 공략전에 참전했다. 전에 군대가 집결하고 있는 동안 몽고메리 중대는 경비 임무를 맡았다. 몽고메리는 병사들에게 프랑스군과 인디언 습격에 대비해 경계를 강화라고 명령했다. 5월 9일, 제17 보병연대의 12명의 병사가 공격을 받았으며, 몽고메리의 의심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몽고메리와 제17 보병연대는 처음으로 맹렬한 저항에 마주쳤다. 몽고메리는 병사들에게 오인 전투를 피하기 위해 밤에는 총격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a>7월 21일</a>, 전군이 요새의 공략을 시작했다. <a>7월 26일</a>경 요새 외벽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프랑스군은 대부분 세인트 프레드릭 요새에 퇴각하였다. 낮에 포격전을 주고받은 그날 밤, 프랑스군은 카리용 요새의 화약고를 폭발시켰고, 다음날에는 세인트 프레드릭 요새까지 폭파시킨 후 챔플레인 호수 북단까지 후퇴했다. </p><p>1759년 늦게 <a>로버트 멍크튼</a> 소장의 휘하에 들어간 제17 보병연대는 겨울을 모호크 강 계곡의 수비 임무로 보냈다. <a>1760년</a> <a>5월 15일</a>, 멍턴은 몽고메리를 연대의 부관에 임명했다. 이 지위는 지휘관이 연대의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중위에게 주는 것이었다. </p><p>8월, 제17 보병 연대는 <a>샹플레인 호수</a>에서 사단에 합류하여, <a>크라운 포인트</a>에서 출발하여 몬트리올에 세 방향에서의 공격에 참여했다. 제17 보병 연대는 일오누아와 샹베리 요새를 공략 한 후 몬트리올 교외에 있던 다른 2개 사단과 합류했다. 프랑스 캐나다 총독 보들레르 후작은 몬트리올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몬트리올시가 함락된 것으로, 캐나다는 모두 영국군의 손에 떨어졌다. <a>1761년</a> 여름, 몽고메리와 제17 보병 연대는 몬트리올에서 <a>스태튼 섬</a>까지 개선했다. </p> <h3><span></span><span>카리브 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영국 정부는 캐나다를 정복 한 후, <a>카리브 해</a>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할 작전을 세웠다. <a>1761년</a> 11월 몽고메리와 제17 보병 연대는 <a>바베이도스</a>로 이동, 북미에서 온 다른 부대와 합류했다. <a>1762년</a> <a>1월 5일</a>, 부대는 바베이도스를 출발해 프랑스령 <a>마르티니크 섬</a>으로 가서 1월 중순에 도착했다. 프랑스 군은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접하고 있으며, 그 방어 태새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륙 거점을 신속하게 구축한 주력군의 공세가 <a>1월 24일</a>에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의 외곽 방어를 공략하자 남아 있던 부대는 수도인 로얄 요새에 도망쳤다. 영국군은 요새에 대한 공격 준비를 시작했지만, 프랑스군은 상황이 절망적임을 감지하고 항복했다. <a>2월 12일</a>, 전체가 항복했다. 마르티니크 섬이 함락된 후, 프랑스령 <a>서인도 제도</a>의 <a>그레나다</a>, <a>세인트루시아</a> 및 <a>세인트빈센트 섬</a>이 전투없이 영국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p><p><a>1762년</a> <a>5월 6일</a>, 마르티니크 섬의 공적에 대한 보상으로 <a>존 캠벨</a> 중령이 몽고메리를 대위로 승진시키고, 제17 보병연대 소속 10개 중대의 지휘를 맡겼다. </p><p><a>1761년</a>에 <a>스페인</a>이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영국군 지휘부는 <a>아바나</a>를 점령하면 스페인 본국과 식민지 제국의 통신선을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a>1762년</a> <a>6월 6일</a>, 영국군 습격 부대가 <a>아바나</a> 해안에서 11&#160;km 앞바다에 도착했다. 몽고메리 중대를 포함한 제 17 보병연대는 스페인 하바나의 중요 방어 거점인 <a>모로 요새</a>를 공략하기로 되어 있었다. <a>영국 해군</a>의 전투함이 요새를 포격하여 스페인군의 대포 중 2문을 제외하고 모두 파괴했다. <a>7월 30일</a>, 몽고메리와 제17 보병 연대가 요새를 급습해 점령했다. 8월 하순, 몽고메리와 제17 보병연대는 뉴욕에 보내져 전쟁의 나머지 기간동안 그곳에서 머물렀다. 7년 전쟁은 <a>1763년</a> <a>2월 10일</a>에 조인된 <a>파리 조약</a>으로 끝이났다. </p> <h2><span></span><span>폰티액 전쟁</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img> <a>폰티액 전쟁</a> 문서를 참고하십시오.</div> <p><a>1763년</a> 4월 오타와 인디언 추장 <a>폰티액</a>은 프랑스가 항복한 것에 분노하여, 또한 그들에게 끼친 영국군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인디언 18개 지파를 조직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부족은 영국군의 요새 8곳을 점령하고, 다른 2곳을 빼앗았다. <a>1763년</a> 6월, <a>애머스트 장군</a>은 제17 보병연대에게 올버니로 ​​가서 반란진압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p><p>몽고메리 부대를 수송하는 배가 <a>허드슨 강</a>을 거슬러 올버니로 향하는 도중, 정계의 유력자 리빙스턴 가문의 근처에서 배가 좌초했다. 배를 옮겨타는 동안, 리빙스턴 가는 배에 타고 있던 장교들을 환대했다. 이때 몽고메리는 로버트 리빙스턴의 딸로 20살의 자넷을 소개받았다. 이 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자넷은 연대가 뉴욕에 돌아오면 젊은 몽고메리가 연대와 동행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몽고메리는 그것보다 이전에 잉글랜드로 휴가를 떠났다. </p><p>제17 보병연대는 스턴윅스 요새 수비대 임무를 맡았고, 몽고메리는 그곳에서 1764년까지 머물렀다. 1764년, 몽고메리는 카리브해에서의 종군을 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캠벨 대령과 <a>토마스 게이지</a> 장군에게 잉글랜드에 돌아갈 것을 청했다. 게이지는 귀국을 허용하였고, 캠벨 대령도 가능한 빨리 그렇게하도록 지시했다. 캠벨은 카리브해에 원정에서 부하 장교가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 원정 후에 귀국을 허락했다. </p><p>1764년 영국군은 인디언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두 부대의 원정대를 조직했다. 그 중 하나에 몽고메리와 제17 보병연대가 있었는데, 그는 존 브래드스트리트의 휘하에 배속되어 6월에 <a>나이아가라 요새</a>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한 달을 주둔했고, 그 동안 <a>윌리엄 존슨 경</a>이 인디언들과 <a>오대호</a> 근처에서 회담을 했다. </p>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table> <tbody><tr> <td><img></td> <td> <b><a>위키인용집</a></b>에 이 문서와<br>관련된 문서가 있습니다. <div><b><a>리처드 몽고메리</a></b></div> </td> </tr> </tbody></table> <ul><li><b><span>(영어)</span></b> <a>Grave of General Montgomery at St Paul's Church</a></li> <li><b><span>(영어)</span></b> <a>Collection of Richard Montgomery Letters</a></li> <li><b><span>(영어)</span></b> <a>The General Richard and Janet Livingston Montgomery House belonging to the Chancellor Livingston Chapter, NSDAR, Rhinebeck, NY</a></li></ul> <div><table><tbody><tr><th><a>전거 통제</a></th><td><div> <ul><li><a>WorldCat</a></li> <li><a>VIAF</a>: <span><a>37721031</a></span></li> <li><a>LCCN</a>: <span><a>n79139710</a></span></li> <li><a>ISNI</a>: <span><a>0000 0000 7373 8648</a></span></li> <li><a>GND</a>: <span><a>11918754X</a></span></li> <li><a>BNF</a>: <span><a>cb145315642</a> <a>(데이터)</a></span></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리처드_몽고메리&amp;oldid=22896850</a>"</div> <div><div><a>분류</a>: <ul><li><a>미국 독립 전쟁 관련자</a></li><li><a>1738년 태어남</a></li><li><a>1775년 죽음</a></li><li><a>아일랜드계 미국인</a></li><li><a>18세기 아일랜드 사람</a></li><li><a>더니골주 출신</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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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몽고메리와 제17 보병연대가 애머스트 장군의 지휘 하에 참전한 전쟁은?
카리용 요새 공략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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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14
[ "몽고메리와 제17 보병연대가 애머스트 장군의 지휘 하에 참전한 전쟁은? ", "제17 보병연대를 포함한 부대가 카리용 요새와 함께 공략을 명령 받은 크라운 포인트 근방 요새는? ", "몽고메리가 카리용 요새 공략전에 참전하도록 지휘한 장군은?", "7년 전쟁 중 1759년 7월 프랑스군은 요새를 폭파시키고 어디까지 후퇴했나?", "1762년 1월 5일, 바베이도스를 출발한 몽고메리와 제17 보병 연대가 도착한 프랑스령의 섬 이름은? ", "1762년 1월 24일, 영국군의 공략에 마르티니크 섬에 남아 있던 프랑스 부대가 도망친 요새는? ", "7년 전쟁에서 영국이 캐나다를 정복하고 어디에서 프랑스군을 공격할 작전을 세웠는가?", "1761년,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참전한 국가는? ", "1763년 2월 10일, 7년 전쟁을 종식시킨 조약은? ", "1761년에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참가한 국가는?", "1763년 2월 10일에 영국,프랑스,에스파냐가 파리에서 맺은 조약은?" ]
<!DOCTYPE html> 리처드 몽고메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리처드 몽고메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tbody><tr> <td colspan="2"> 리처드 몽고메리Richard Montgomery </td></tr> <tr> <td colspan="2"> </td></tr> <tr> <th>생애 </th> <td>1738년 2월 2일 ~ 1775년 12월 31일 </td></tr> <tr> <th>출생지 </th> <td>아일랜드 더블린 소드 </td></tr> <tr> <th>사망지 </th> <td>캐나다 퀘벡주 퀘벡 시 </td></tr> <tr> <th>복무 </th> <td>대륙군 영국 육군 </td></tr> <tr> <th>복무 기간 </th> <td>영국군(1756–1772) 대륙군(1775) </td></tr> <tr> <th>최종 계급 </th> <td>대륙군 소장 </td></tr> <tr> <th>근무 </th> <td>대륙군, 미합중국군 </td></tr> <tr> <th>지휘 </th> <td>대륙군 </td></tr> <tr> <th>주요 참전 </th> <td>폰티액 전쟁7년 전쟁 미국 독립 전쟁-퀘벡 침공전 - 세인트진 요새 전투 - 퀘벡 전투 </td></tr> </tbody></table> 리처드 몽고메리(Richard Montgomery, 1738년 12월 2일 - 1775년 12월 31일)는 아일랜드 태생의 군인으로, 우선 영국 육군에서 복무했다. 미국 독립 전쟁 때 대륙군 준장 되어, 1775년에 실패로 끝났던 캐나다 침공 작전을 지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차 1 생애 2 초기 생애 2.1 초기 3 7년 전쟁 3.1 카리브 해 4 폰티액 전쟁 5 외부 링크 생애[편집] 몽고메리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나 자랐다. 1754년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2년 후에는 영국군에 입대해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 참전했다. 북아메리카에서 이어 카리브해에서 근무하면서 순조롭게 계급을 올렸다.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끝난 후 폰티액 전쟁에서는 디트로이트 요새에 주둔한 후 건강상의 이유로 영국에 귀국했다. 1773년, 몽고메리는 미국에 돌아가서 자넷 리빙스턴과 결혼하여 농장 경영을 시작했다.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미국 독립 지지자가 되었으며, 1775년 5월에는 뉴욕 식민지 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됐다. 1775년 6월, 대륙군 준장으로 임관되었다. 필립 스카일러 장군의 병이 깊어져 캐나다 침공을 이끌 수가 없자 몽고메리가 지휘를 인수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세인트존스 요새와 몬트리올 시를 점령한 후 퀘벡 시까지 진군하여 베네딕트 아놀드가 이끄는 별동대와 합류했다. 12월 31일 퀘벡 시에 공격을 지휘했지만(퀘벡 전투), 전투 중에 전사했다. 영국군이 그 유해를 찾아 군 장례식을 치뤘다. 유해는 1818년에 뉴욕 시에 이장되었다. 초기 생애[편집] 초기[편집] 몽고메리는 아일랜드 더블린주(현재 핑걸주) 소즈에서 원래 영국군 장교로 아일랜드 의회 대의원이었던 토마스 몽고메리(1700년 –1761년)와 메리 프랭클린 몽고메리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 알렉산더 몽고메리 대령(1720년 –1800년)과, 사촌으로 알렉산더 몽고메리 대령 (1686년 -1729년)이 있으며, 모두 도네갈 주 대표로 대의원을 지냈다. 다른 사촌으로 역시 알렉산더 몽고메리 장군(1721년 -1785년)은 모나한 주 대표로 대의원을 지냈다. 몽고메리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도네갈 근방에서 보냈고, 사냥, 승마, 사격과 펜싱을 배웠다. 아버지 토마스가 몽고메리에 충분한 교육을 받도록 유도했기 때문에, 프랑스어, 라틴어 및 수사학을 배웠고 벨파스트 교외의 학교를 다녔다. 북아메리카에서 프렌치 인디언 전쟁이 시작된 1754년, 몽고메리는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몽고메리는 지식을 매우 사랑했지만 학위는 받지 않았다. 아버지와 형 알렉산더를 설득해 1756년 9월 21일에 영국 육군에 입대했다. 아버지가 소위 임관을 사서, 제17 보병연대에 근무하게 되었다. 7년 전쟁[편집] 1757년 2월 3일, 제17 보병연대는 골웨이 수비대 임무로 해외 파견을 준비를 하도록 명령받았다. 5월 5일 몽고메리와 제17 보병연대는 코크를 출항해 노바스코샤의 핼리팩스로 가서 7월에 도착했다. 영국군은 루이스버그 공략 전략을 세웠지만, 그 실행은 연기되었고, 동계 숙영을 위해 뉴욕 식민지로 향했다. 1758년, 제17 보병연대는 핼리팩스로 돌아가 다시 루이스버그 공략을 준비하고 있었다. 영국군 지휘관 제프리 애머스트와 제임스 에버크롬비는 핼리팩스의 북쪽, 케이프 브레튼 섬의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루이스버그에 주둔하는 프랑스군을 공격하는 작전을 세웠다. 프랑스군 수비대는 불과 800명이며, 영국군은 13,142명의 세력에 23척의 전열함과 13척의 프리깃함 지원이 있었다. 1758년 6월 8일, 요새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몽고메리는 격렬한 포화 속에 해변에 상륙하여, 부대원들에게 총검을 꽂고 전진을 명령했다. 밖에 나와 있던 프랑스군은 요새 방향으로 후퇴했다. 몽고메리 부대와 다른 영국 부대는 요새에 설치된 ​​대포의 사정거리 밖까지 프랑스군을 쫓았다. 이 시점에서 영국군은 요새의 포위전으로 접어들었다. 악천후가 이어졌고, 포위전을 위해 필요한 대포 등 보급 물자의 도착까지 몇 주가 걸렸다. 몽고메리는 병사들에 참호를 파고, 흉벽을 만들게 해, 프랑스군의 공격 가능성에 대비하면서 경계하도록 지시하기도 했다. 7월 9일, 프랑스군이 요새에서 탈출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7월 26일, 일련의 전투로 프랑스 해군 함대의 대부분이 파괴되었고, 요새 내의 프랑스군은 항복했다. 애머스트 장군은 포위전 중의 몽고메리 행동에 감탄하여 중위로 승진시켰다. 1758년 7월 8일, 제임스 에버크롬비가 챔플레인 호수를 따라 카리용 요새를 공격했지만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다. 8월, 몽고메리와 제17 보병연대는 보스턴으로 돌아와 올버니에서 에버크롬비의 부대와 합류한 후 조지 호수로 진군했다. 11월 9일, 에버크롬비가 해임되고, 애머스트가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영국군 상층부는 1759년 전략을 위해 캐나다를 세 방면에서의 공격하는 작전을 입안했다. 제17 보병연대를 포함 부대는 카리용 요새를 공격하고, 크라운 포인트에 가까운 세인트 프레드릭 요새도 공략하게 되었다. 애머스트 장군의 지휘 하에 몽고메리와 제17 보병연대는 카리용 요새 공략전에 참전했다. 전에 군대가 집결하고 있는 동안 몽고메리 중대는 경비 임무를 맡았다. 몽고메리는 병사들에게 프랑스군과 인디언 습격에 대비해 경계를 강화라고 명령했다. 5월 9일, 제17 보병연대의 12명의 병사가 공격을 받았으며, 몽고메리의 의심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했다. 몽고메리와 제17 보병연대는 처음으로 맹렬한 저항에 마주쳤다. 몽고메리는 병사들에게 오인 전투를 피하기 위해 밤에는 총격하지 않도록 명령했다. 7월 21일, 전군이 요새의 공략을 시작했다. 7월 26일경 요새 외벽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프랑스군은 대부분 세인트 프레드릭 요새에 퇴각하였다. 낮에 포격전을 주고받은 그날 밤, 프랑스군은 카리용 요새의 화약고를 폭발시켰고, 다음날에는 세인트 프레드릭 요새까지 폭파시킨 후 챔플레인 호수 북단까지 후퇴했다. 1759년 늦게 로버트 멍크튼 소장의 휘하에 들어간 제17 보병연대는 겨울을 모호크 강 계곡의 수비 임무로 보냈다. 1760년 5월 15일, 멍턴은 몽고메리를 연대의 부관에 임명했다. 이 지위는 지휘관이 연대의 ​​가장 장래가 촉망되는 중위에게 주는 것이었다. 8월, 제17 보병 연대는 샹플레인 호수에서 사단에 합류하여, 크라운 포인트에서 출발하여 몬트리올에 세 방향에서의 공격에 참여했다. 제17 보병 연대는 일오누아와 샹베리 요새를 공략 한 후 몬트리올 교외에 있던 다른 2개 사단과 합류했다. 프랑스 캐나다 총독 보들레르 후작은 몬트리올을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싸우지 않고 항복했다. 몬트리올시가 함락된 것으로, 캐나다는 모두 영국군의 손에 떨어졌다. 1761년 여름, 몽고메리와 제17 보병 연대는 몬트리올에서 스태튼 섬까지 개선했다. 카리브 해[편집] 영국 정부는 캐나다를 정복 한 후, 카리브 해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할 작전을 세웠다. 1761년 11월 몽고메리와 제17 보병 연대는 바베이도스로 이동, 북미에서 온 다른 부대와 합류했다. 1762년 1월 5일, 부대는 바베이도스를 출발해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으로 가서 1월 중순에 도착했다. 프랑스 군은 공격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접하고 있으며, 그 방어 태새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륙 거점을 신속하게 구축한 주력군의 공세가 1월 24일에 시작되었다. 프랑스군의 외곽 방어를 공략하자 남아 있던 부대는 수도인 로얄 요새에 도망쳤다. 영국군은 요새에 대한 공격 준비를 시작했지만, 프랑스군은 상황이 절망적임을 감지하고 항복했다. 2월 12일, 전체가 항복했다. 마르티니크 섬이 함락된 후,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의 그레나다, 세인트루시아 및 세인트빈센트 섬이 전투없이 영국의 손에 떨어지게 되었다. 1762년 5월 6일, 마르티니크 섬의 공적에 대한 보상으로 존 캠벨 중령이 몽고메리를 대위로 승진시키고, 제17 보병연대 소속 10개 중대의 지휘를 맡겼다. 1761년에 스페인이 프랑스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 영국군 지휘부는 아바나를 점령하면 스페인 본국과 식민지 제국의 통신선을 파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762년 6월 6일, 영국군 습격 부대가 아바나 해안에서 11 km 앞바다에 도착했다. 몽고메리 중대를 포함한 제 17 보병연대는 스페인 하바나의 중요 방어 거점인 모로 요새를 공략하기로 되어 있었다. 영국 해군의 전투함이 요새를 포격하여 스페인군의 대포 중 2문을 제외하고 모두 파괴했다. 7월 30일, 몽고메리와 제17 보병 연대가 요새를 급습해 점령했다. 8월 하순, 몽고메리와 제17 보병연대는 뉴욕에 보내져 전쟁의 나머지 기간동안 그곳에서 머물렀다. 7년 전쟁은 1763년 2월 10일에 조인된 파리 조약으로 끝이났다. 폰티액 전쟁[편집] 폰티액 전쟁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763년 4월 오타와 인디언 추장 폰티액은 프랑스가 항복한 것에 분노하여, 또한 그들에게 끼친 영국군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인디언 18개 지파를 조직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이 부족은 영국군의 요새 8곳을 점령하고, 다른 2곳을 빼앗았다. 1763년 6월, 애머스트 장군은 제17 보병연대에게 올버니로 ​​가서 반란진압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몽고메리 부대를 수송하는 배가 허드슨 강을 거슬러 올버니로 향하는 도중, 정계의 유력자 리빙스턴 가문의 근처에서 배가 좌초했다. 배를 옮겨타는 동안, 리빙스턴 가는 배에 타고 있던 장교들을 환대했다. 이때 몽고메리는 로버트 리빙스턴의 딸로 20살의 자넷을 소개받았다. 이 때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자넷은 연대가 뉴욕에 돌아오면 젊은 몽고메리가 연대와 동행하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몽고메리는 그것보다 이전에 잉글랜드로 휴가를 떠났다. 제17 보병연대는 스턴윅스 요새 수비대 임무를 맡았고, 몽고메리는 그곳에서 1764년까지 머물렀다. 1764년, 몽고메리는 카리브해에서의 종군을 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캠벨 대령과 토마스 게이지 장군에게 잉글랜드에 돌아갈 것을 청했다. 게이지는 귀국을 허용하였고, 캠벨 대령도 가능한 빨리 그렇게하도록 지시했다. 캠벨은 카리브해에 원정에서 부하 장교가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 원정 후에 귀국을 허락했다. 1764년 영국군은 인디언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두 부대의 원정대를 조직했다. 그 중 하나에 몽고메리와 제17 보병연대가 있었는데, 그는 존 브래드스트리트의 휘하에 배속되어 6월에 나이아가라 요새로 파견되었다. 그곳에서 한 달을 주둔했고, 그 동안 윌리엄 존슨 경이 인디언들과 오대호 근처에서 회담을 했다. 외부 링크[편집] <table> <tbody><tr> <td></td> <td> 위키인용집에 이 문서와관련된 문서가 있습니다. 리처드 몽고메리 </td> </tr> </tbody></table> (영어) Grave of General Montgomery at St Paul's Church (영어) Collection of Richard Montgomery Letters (영어) The General Richard and Janet Livingston Montgomery House belonging to the Chancellor Livingston Chapter, NSDAR, Rhinebeck, NY <table><tbody><tr><th>전거 통제</th><td> WorldCat VIAF: 37721031 LCCN: n79139710 ISNI: 0000 0000 7373 8648 GND: 11918754X BNF: cb145315642 (데이터)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리처드_몽고메리&amp;oldid=22896850" 분류: 미국 독립 전쟁 관련자1738년 태어남1775년 죽음아일랜드계 미국인18세기 아일랜드 사람더니골주 출신숨은 분류: VIA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LCCN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ISNI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DanskDeutsch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SvenskaУкраїнська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1일 (목) 09:41에 마지막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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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리처드 몽고메리: 미국 독립 전쟁의 영웅이 된 아일랜드 군인의 삶 ### 요약 본문: 리처드 몽고메리(Richard Montgomery, 1738-1775)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나 영국 육군에서 복무한 후, 미국 독립 전쟁에서 대륙군 소장으로 활약한 군인입니다. 그는 1756년 영국군에 입대하여 프렌치 인디언 전쟁과 7년 전쟁에 참전하며 군 경력을 쌓았습니다. 1775년, 몽고메리는 미국 독립을 지지하며 대륙군 준장으로 임명되어 캐나다 침공 작전을 지휘했으나, 퀘벡 전투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그의 유해는 1818년에 뉴욕으로 이장되었으며, 그는 미국 독립 전쟁의 상징적인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 결론 요약: 리처드 몽고메리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미국 독립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인으로, 그의 용기와 헌신은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전투에서의 희생은 미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의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역사 속에서 그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이 글을 기반으로 블로그 요약 포스트를 쓴다고 가정하고,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제목, 요약 본문, 결론 요약까지 작성해줘.
이규원_(1890년)
https://ko.wikipedia.org/wiki/이규원_(1890년)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이규원 (1890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이규원 (1890년)</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이규원</b>(李圭元, <a>1890년</a> <a>10월 4일</a> ~ <a>1945년</a> <a>4월 24일</a>)은 <a>일제 강점기</a>의 <a>조선귀족</a>으로, 본관은 경주, 호는 우금(又琴)이며 본적은 <a>경성부</a> 중림정이다. 자작 <a>이하영</a>의 아들이자 군인 <a>이종찬</a>의 아버지이다. </p>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2> <p><a>1909년</a> 1월 <a>대한제국</a> <a>궁내부</a> 시종원 시종에 올랐으며 <a>1910년</a> <a>10월 1일</a> 한일합방 후 관직을 사퇴하였다. <a>1911년</a> <a>2월 1일</a>부터 <a>1913년</a> <a>3월 31일</a>까지 <a>조선총독부</a> <a>이왕직</a> 찬시를 지냈다. <a>1912년</a> <a>8월 1일</a>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같은 해 <a>12월 7일</a> 종7위에 서위되었다. <a>1913년</a> <a>3월 31일</a> 고등관 6등에 서위되었고 <a>1914년</a> <a>6월 10일</a> 종5위에 서위되었다. </p><p><a>1916년</a> 2월 서화연구회원으로 선출되었고, <a>1919년</a> 아버지 <a>이하영</a>이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자, <a>이규완</a>, <a>박영효</a>, <a>박중양</a> 등과 함께 대주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해 <a>8월 1일</a> <a>경성부</a> <a>용산면</a> 원효로 1가에서 개최된 <a>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a> 창립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a>1921년</a> 11월 조선불교대회 이사를 지냈다. <a>1922년</a> <a>8월 15일</a>부터 <a>1945년</a> <a>4월 24일</a> 사망할 때까지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에서 취체역과 전무취체역으로 근무했고 조선공업협회 전기문제조사위원회 위원(1926년 2월)과 조선불교단 평의원(1926년 12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1928년 5월 14일), 조선불교단 이사(1928년 5월 20일)를 지냈다. </p><p><a>1929년</a> <a>6월 1일</a> 자신의 아버지였던 이하영이 받은 자작 작위를 승계받았으며 <a>1931년</a> 조선실업구락부 회원을 역임했다. <a>1932년</a> <a>12월 15일</a> 종4위에 서위되었고 <a>1936년</a> 경성상공조합연합회 평의원(1936년 10월 12일)과 경성교화단체연합회 서부교화구위원회 상임위원(1936년 11월), 조선실업구락부 평의원(1936년 12월)을 지냈다. <a>조선신궁</a>에서 열린 행사에 여러 차례 참석했으며 조선귀족회 이사(1937년 7월), 동방직물판매주식회사 대표취체역(1939년 7월 5일),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1939년 11월), 조선고무화판매통제주식회사 감사역(1940년 12월 5일), <a>흥아보국단</a> 경기도 위원(1941년 8월 24일), <a>조선임전보국단</a> 발기인 겸 이사(1941년 10월 22일), 조선귀족회 부회장(1942년 ~ 1945년 4월 24일), 징병령 실시 감사회 10전 헌금 운동 발기인(1943년 8월 1일 ~ 1943년 8월 15일), <a>국민총력조선연맹</a> 총무부 기획위원회(1943년 9월), 창복회 위원(1944년) 등을 지냈다. </p><p><a>1939년</a> <a>12월 28일</a> 정4위에 서위되었으며 <a>1940년</a> <a>11월 10일</a> 일본 정부로부터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태평양 전쟁 선전봉고임시대제(宣戰奉告臨時大祭, 1941년 12월 18일 조선신궁에서 열림)와 <a>메이지 천황</a> 30년 식년제(1942년 7월 30일), <a>만주국</a> 건국 10주년 기념식전(1942년 9월 14일), 경성부 육군병 지워자 후원회 주최로 열린 육군 지원자 훈련소 제11회 퇴소식(1943년 5월 18일) 등에서 조선귀족 대표로 참석했으며 사후 일본 정부로부터 종3위에 추서되었다. <a>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a>의 수작/습작 부문과 <a>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a>가 발표한 <a>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a>에 포함되었다. </p> <h2><span></span><span>가족 관계</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2> <ul><li>증조부&#160;: 이응효(李膺孝, <a>증</a>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ul><li>조부&#160;: <a>이유수</a>(李裕脩, 증 내부대신(贈內部大臣))</li> <li>조모&#160;: <a>서산 서씨</a>(瑞山徐氏) <ul><li>아버지&#160;: <a>이하영</a>(李夏榮)</li> <li>어머니&#160;: <a>강릉 최씨</a> <ul><li>본인&#160;: 이규원</li> <li>부인&#160;: 윤씨 <ul><li>아들&#160;: <a>이종찬</a>(李鐘贊), <a>대한민국</a> 창군 주역, <a>육군참모총장</a> 역임</li> <li>자부&#160;: 표자영 <ul><li>손녀&#160;: 이정은</li></ul></li></ul></li> <li>이복형&#160;: <a>이규삼</a>(李圭三), 삼촌 <a>이준영</a>의 양자로 출계</li></ul></li> <li>숙부&#160;: <a>이준영</a>(李準榮), 관찰사, 국문학자</li></ul></li></ul></li></ul> <h2><span></span><span>참고자료</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2> <ul><li><cite>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12296;이규원&#12297;. &#12298;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1&#12299;. 서울. 890~916쪽.</cite><span><span>&#160;</span></span></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규원_(1890년)&amp;oldid=22232707</a>"</div> <div><div><a>분류</a>: <ul><li><a>1890년 태어남</a></li><li><a>1945년 죽음</a></li><li><a>이하영 가</a></li><li><a>조선자작</a></li><li><a>친일인명사전 수록자</a></li><li><a>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a></li><li><a>경주 이씨</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원본 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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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원은 1931년 어떤 회원을 역임하였는가?
조선실업구락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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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규원은 1931년 어떤 회원을 역임하였는가?", "아버지의 어떤 것을 승계 받았는가?", "이규원이 1936년 상임위원으로 지낸 위원회의 이름?", "이규원이 조선귀족회 이사로 지낸 년도는?", "아버지 이하영에게 승계 받은 직위는?", "1940년 일본 정부로부터 무엇을 받았는가?",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을 발표한 곳은 어디인가?", "이규원은 사후 일본 정부로부터 종 몇위에 추서되었는가?", "1942년에 열린 만주국 기념식전은 만주국 건국 몇 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는가?", "1939년 12월 28일 일본 정부에서 받은 관직은?",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을 발표한 위원회는? " ]
<!DOCTYPE html> 이규원 (1890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규원 (1890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이규원(李圭元, 1890년 10월 4일 ~ 1945년 4월 24일)은 일제 강점기의 조선귀족으로, 본관은 경주, 호는 우금(又琴)이며 본적은 경성부 중림정이다. 자작 이하영의 아들이자 군인 이종찬의 아버지이다. 생애[원본 편집] 1909년 1월 대한제국 궁내부 시종원 시종에 올랐으며 1910년 10월 1일 한일합방 후 관직을 사퇴하였다. 1911년 2월 1일부터 1913년 3월 31일까지 조선총독부 이왕직 찬시를 지냈다. 1912년 8월 1일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같은 해 12월 7일 종7위에 서위되었다. 1913년 3월 31일 고등관 6등에 서위되었고 1914년 6월 10일 종5위에 서위되었다. 1916년 2월 서화연구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919년 아버지 이하영이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자, 이규완, 박영효, 박중양 등과 함께 대주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그해 8월 1일 경성부 용산면 원효로 1가에서 개최된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 창립발기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21년 11월 조선불교대회 이사를 지냈다. 1922년 8월 15일부터 1945년 4월 24일 사망할 때까지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에서 취체역과 전무취체역으로 근무했고 조선공업협회 전기문제조사위원회 위원(1926년 2월)과 조선불교단 평의원(1926년 12월), 조선물산장려회 이사(1928년 5월 14일), 조선불교단 이사(1928년 5월 20일)를 지냈다. 1929년 6월 1일 자신의 아버지였던 이하영이 받은 자작 작위를 승계받았으며 1931년 조선실업구락부 회원을 역임했다. 1932년 12월 15일 종4위에 서위되었고 1936년 경성상공조합연합회 평의원(1936년 10월 12일)과 경성교화단체연합회 서부교화구위원회 상임위원(1936년 11월), 조선실업구락부 평의원(1936년 12월)을 지냈다. 조선신궁에서 열린 행사에 여러 차례 참석했으며 조선귀족회 이사(1937년 7월), 동방직물판매주식회사 대표취체역(1939년 7월 5일),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1939년 11월), 조선고무화판매통제주식회사 감사역(1940년 12월 5일), 흥아보국단 경기도 위원(1941년 8월 24일),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겸 이사(1941년 10월 22일), 조선귀족회 부회장(1942년 ~ 1945년 4월 24일), 징병령 실시 감사회 10전 헌금 운동 발기인(1943년 8월 1일 ~ 1943년 8월 15일), 국민총력조선연맹 총무부 기획위원회(1943년 9월), 창복회 위원(1944년) 등을 지냈다. 1939년 12월 28일 정4위에 서위되었으며 1940년 11월 10일 일본 정부로부터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태평양 전쟁 선전봉고임시대제(宣戰奉告臨時大祭, 1941년 12월 18일 조선신궁에서 열림)와 메이지 천황 30년 식년제(1942년 7월 30일), 만주국 건국 10주년 기념식전(1942년 9월 14일), 경성부 육군병 지워자 후원회 주최로 열린 육군 지원자 훈련소 제11회 퇴소식(1943년 5월 18일) 등에서 조선귀족 대표로 참석했으며 사후 일본 정부로부터 종3위에 추서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수작/습작 부문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가족 관계[원본 편집] 증조부 : 이응효(李膺孝, 증 의정부 참찬(議政府參贊)) 조부 : 이유수(李裕脩, 증 내부대신(贈內部大臣)) 조모 : 서산 서씨(瑞山徐氏) 아버지 : 이하영(李夏榮) 어머니 : 강릉 최씨 본인 : 이규원 부인 : 윤씨 아들 : 이종찬(李鐘贊), 대한민국 창군 주역, 육군참모총장 역임 자부 : 표자영 손녀 : 이정은 이복형 : 이규삼(李圭三), 삼촌 이준영의 양자로 출계 숙부 : 이준영(李準榮), 관찰사, 국문학자 참고자료[원본 편집]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이규원〉.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1》. 서울. 890~916쪽.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이규원_(1890년)&amp;oldid=22232707" 분류: 1890년 태어남1945년 죽음이하영 가조선자작친일인명사전 수록자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경주 이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9월 6일 (목) 17:5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이규원(1890년 10월 4일 ~ 1945년 4월 24일)은 일제 강점기의 조선 귀족으로, 본관은 경주이며, 자작 이하영의 아들이자 군인 이종찬의 아버지이다. 그는 1909년 대한제국 궁내부 시종원에 올랐고, 1910년 한일합방 후 관직을 사퇴했다. 이후 조선총독부에서 여러 직책을 맡으며 일본 정부와의 관계를 유지했다. 이규원은 대륙고무공업주식회사의 대주주로 참여하고, 조선불교대회 이사, 조선공업협회 위원 등 다양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여러 차례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고, 조선귀족회 부회장 등으로 활동하며 친일 행위를 했다. 그의 생애는 일본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조선 귀족으로서의 삶과 친일 행위로 요약될 수 있다. 가족으로는 아내 윤씨와 아들 이종찬이 있으며, 이종찬은 대한민국 창군의 주역으로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이규원은 사후 일본 정부로부터 종3위에 추서되었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되었다.
다음 텍스트를 읽고 독자가 처음 접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해줘. 주요 인물, 사건, 배경, 갈등 구조 등을 빠짐없이 담되, 문장은 간결하게 유지해줘.
베이루트_(밴드)
https://ko.wikipedia.org/wiki/베이루트_(밴드)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베이루트 (밴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베이루트 (밴드)</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tbody><tr> <th colspan="2"><div><div><img></div><span><big><a><img></a></big><br></span></div> </th></tr> <tr> <th colspan="2">기본 정보 </th></tr> <tr> <th>국가 </th> <td><span><a><img></a></span> <a>미국</a> </td></tr> <tr> <th>장르 </th> <td><a>포크</a> <a>인디</a> <a>발칸</a> 월드 </td></tr> <tr> <th>활동 시기 </th> <td><a>2006년</a> ~ <a>현재</a> </td></tr> <tr> <th>레이블 </th> <td>Ba Da Bing! 4AD </td></tr> <tr> <th>웹사이트 </th> <td><a>www.beirutband.com</a> </td></tr> <tr> <td colspan="2"><b>구성원</b> </td></tr> <tr> <td colspan="2">Zach Condon, Nicholas Petree, Perrin Cloutier, Jason Poranski, Paul Collins, Jon Natchez, Kristin ferebee, Kelly Pratt, Tracy Pratt, Heather Trost </td></tr> </tbody></table> <p><b>베이루트</b>(Beirut)는 <a>미국</a> <a>뉴멕시코</a> <a>앨버커키</a> 출신 1986년생 잭 콘돈(Zach Condon)의 원맨 밴드로 시작했으며, 후에 고정적인 밴드 멤버들이 붙어서 콘돈 포함 열 명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a>트럼펫</a>, <a>우쿨렐레</a> 등의 악기 연주는 물론, 작사/작곡과 보컬까지 거의 대부분의 작업이 콘돈의 손을 거쳐 이루어지므로 콘돈과 나머지 세션들로 구성된 밴드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 음악의 기반은 <a>동유럽</a> <a>집시</a> 음악에 <a>포크</a>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으로 계속해서 유랑하는 느낌으로 <a>프랑스</a>, <a>멕시코</a> 등 여러 지역의 음악적 전통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흡수해 가며 독특한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역사</span></a></li> <li><a><span>2</span> <span>디스코그래피</span></a> <ul> <li><a><span>2.1</span> <span>앨범</span></a></li> <li><a><span>2.2</span> <span>EP</span></a></li> <li><a><span>2.3</span> <span>컴필레이션</span></a></li> <li><a><span>2.4</span> <span>객원참여</span></a></li> </ul> </li> <li><a><span>3</span> <span>The Joys of Losing Weight</span></a></li> <li><a><span>4</span> <span>Gulag Orkestar</span></a></li> <li><a><span>5</span> <span>Lon Gisland EP</span></a></li> <li><a><span>6</span> <span>The Flying Club Cup</span></a></li> <li><a><span>7</span> <span>March of the Zapotec/Holland EP</span></a></li> <li><a><span>8</span> <span>Dark Was The Night (A Red Hot Compilation)</span></a></li> <li><a><span>9</span> <span>공연</span></a></li> <li><a><span>10</span> <span>베이루트의 추천곡</span></a></li> <li><a><span>11</span> <span>참고 자료</span></a></li> <li><a><span>12</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역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콘돈은 어릴 때 아버지가 형제들과 즐겨 불렀던 아프리칸 아메리칸 보컬 스타일인 두왑과 <a>모타운</a>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만 혼자 몰래 듣는 본인의 두왑 앨범도 하나 만들어두었지만 공개하진 않았다. 그는 십대 시절부터 집시 영화의 거장이자 노 스모킹 밴드와 함께 뮤지션으로서 내한하기도 했던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들에 빠져 살았으며, 열여섯에 학교를 그만두고 형과 함께 <a>유럽</a> 여행을 떠났다. 중간에 네 번이나 학교로 돌아갔지만 겨우 하루 갔다가 도로 그만둔 적도 몇 번 있었다. 콘돈은 뉴멕시코에 있는 대학에 한 달 정도 다니다가 Ba Da Bing! 레코드에서 앨범을 내자는 연락을 받고 그 날로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서 <a>뉴욕</a> 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sup><a>&#91;1&#93;</a></sup> </p><p>콘돈이 제일 처음 배운 악기는 트럼펫이었으며, 양쪽 손목에 <a>프렌치 호른</a> 모양의 문신을 새길 정도로 <a>브라스 악기</a>들에 열광했다. 열일곱 살 때 팔 수술을 해서 <a>기타</a>를 연주할 수 없게 되자 결국 트럼펫과 <a>만돌린</a>, 우쿨렐레가 그의 주된 악기로 자리 잡았고, 그 악기들이 주축이 되어<sup><a>&#91;2&#93;</a></sup> 소년의 얼굴에 노인의 감성을 지닌 듯한 콘돈은 베이루트라는 이름과 함께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 있는 첫 앨범 Gulag Orkestar를 발표한다. 그는 수많은 <a>블로그</a>들을 통해 퍼져나간 인기와 함께 평단에서도 평가를 얻으며 센세이셔널하게 데뷔했고, 바로 다음 해에 두 번째 앨범 The Flying Club Cup을 발표하며 젊고 왕성한 창작열을 이어갔다. 베이루트는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 장르의 네 가지로 발칸 브라스와 <a>유로 하우스</a>, <a>덥</a>, 그리고 브라질의 트로피칼리아를 꼽았는데,<sup><a>&#91;3&#93;</a></sup> 1집 Gulag Orkestar에서는 발칸 브라스의 영향이 가장 크게 두드러졌고, 프랑스로 음악적 근거지를 옮긴 2집에서는 1집의 기반에서 <a>샹송</a>의 로맨티시즘이 더해졌다. 열여섯 살 때부터 샹송을 즐겨들었던 콘돈은 특히 자끄 브렐의 음악을 즐겨 들었으며, <a>파리</a>를 음악적인 의미에서 제 2의 고향으로 여기는 듯하다. </p><p>콘돈은 자신의 음악을 <a>당나귀</a>에 비유한다. 당나귀는 아주 웃기게 생기고 바보 같고 술에 취한 듯이 걷지만 정말 아름다운 슬픈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베이루트의 음악에 있어서 슬픔이라는 정서는 언제나 중요한 화두이다. March of the Zapotec/Holland 더블 EP 작업을 마치고 투어 중인 베이루트는 함께 작업하고 싶은 아티스트로 조르쥬 벤과 까에따노 벨로주를 꼽으며 트로피칼리아에 대한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이번 2009년 여름 <a>브라질</a>로 향할 것이고 그의 다음 정규 앨범은 그 여행의 결과물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p> <h2><span></span><span>디스코그래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앨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small> </small></p><small></small><ul><small><li>The Joys of Losing Weight (미발매)</li> <li>Gulag Orkestar (2006년 5월)</li> </small><li><small>The Flying Club Cup (2007년 10월) </small></li></ul> <h3><span>EP</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small> </small></p><small></small><ul><small><li>Small Time American Bats (미발매)</li> <li>Onward to Mecca (2006년 11월)</li> <li>Lon Gisland (2007년 1월)</li> <li>Pompeii (2007년 2월)</li> <li>Elephant Gun (2007년 6월)</li> </small><li><small>March of the Zapotec/Holland (2009년 2월)</small></li></ul> <h3><span></span><span>컴필레이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small> </small></p><small></small><ul><small><li>The Believer: 2007 Music Issue</li> <li>Big Change: Songs for FINCA</li> </small><li><small>Dark Was The Night (A Red Hot Compilation)</small></li></ul> <h3><span></span><span>객원참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small> </small></p><small></small><ul><small><li>A Hawk and a Hacksaw의 A Hawk and a Hacksaw and the Hun Hangár Ensemble 앨범에서 만돌린과 트럼펫, 우쿨렐레를 연주했다.</li> <li>Alaska in Winter의 Dance Party in the Balkans 앨범에서 우쿨렐레와 트럼펫, 코러스 등으로 참여했다.</li> <li>Get Him Eat Him의 Arms Down 앨범에 수록된 2x2라는 곡에 참여했다.</li> <li>Bark Cat Bark의 노래 Barranquilla에서 트럼펫을 연주했다.</li> </small><li><small>Final Fantasy의 Spectrum, 14th Century EP에 참여했다.</small></li></ul> <h2><span>The Joys of Losing Weight</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콘돈이 베이루트 이전인 열다섯 살 때, 리얼 피플이라는 이름으로 혼자서 집에 있는 악기들과 <a>신시사이저</a>를 가지고 만들었던 미발매 앨범이다. 베이루트의 음악과는 사뭇 다른 스무 곡 이상의 로우파이 일렉트로닉 음악들이 담겨 있으며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후에 베이루트의 이름으로 발매한 Pompeii EP에 리얼 피플 시절의 곡을 다시 수록하기도 했다. <a>전자 음악</a>에 대한 베이루트의 시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후에도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p> <h2><span>Gulag Orkestar</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 Hawk And A Hacksaw의 <a>제러미 반스</a>와 <a>헤더 트로스트</a>가 <a>드럼</a>과 <a>바이올린</a> 세션으로 참여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 과정을 콘돈 혼자서 담당했다. <a>스튜디오</a>를 사용하지 않고 홈레코딩으로 만들어졌다. 스무살 미국인 청년에게서 기대되지 않을 법한 그의 데뷔 앨범은 인디신에 신선한 충격이 되었으며 비평적 성공과 함께 팬층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The Joys of Losing Weight와 달리 어쿠스틱 악기들이 당당히 중심에 섰고 Scenic World와 After the Curtain에서만 전자음이 사용되었다. 앨범 내에서 가장 말랑말랑하고 예쁜 멜로디를 가진 Postcards from Italy는 가장 널리 알려진 베이루트의 곡 중 하나로 Gulag Orkestar 앨범에서 유일하게 뮤직비디오로 제작되었다. </p> <h2><span>Lon Gisland EP</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1집과 2집 사이에 발매된 Lon Gisland EP에 실린 Elephant Gun은 베이루트의 대표곡 중 하나로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유럽에서 방랑 생활을 했던 본인의 <a>페르소나</a>가 가장 잘 담겨 있는 곡이다. Elephant Gun의 뮤직비디오는 베이루트가 가장 처음으로 찍은 뮤직비디오였으며 알마 하렐이라는 <a>유대계</a>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알마가 일거리를 찾던 중에 베이루트의 음악을 듣고 느낌을 받아 직접 베이루트의 <a>마이스페이스</a>에 나와 있는 <a>메일</a> 주소로 연락을 하게 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콘돈은 알마에게 Elephant Gun의 화자가 <a>사파리</a>의 사냥꾼이라고 말했고, 비디오의 컨셉은 그것으로 결정되었다. 무대 벽에는 <a>한반도</a> 지도를 포함하여 시대를 초월한 세계 각국의 지도로 도배가 되어 있으며, 평소와는 달리 플루크라는 종류의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밴드 멤버 옆에서 노래하는 콘돈을 둘러싼 코끼리 코를 쓴 무용가들은 알퐁스 뮈샤의 그림이 붙어 있는 술병들 사이에서 모두 취한 듯 춤을 춘다. 안무는 엘리자베스타운, 더티 댄싱 2: 하바나 나이트 등 다수의 <a>할리우드</a> 메이저 영화에 참여했던 안무가의 작품이다. 이 곡의 후반부에는 잠시 화면이 바다로 전환되면서 콘돈이 맨발로 등 뒤에 빈 캔을 주렁주렁 매달아 질질 끌면서 걸어가 파도에 발을 담그고 트럼펫을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알마가 콘돈이랑 만났던 첫 모임에서 콘돈이 신혼 여행가는 자동차처럼 자기 발에 캔을 끌고 가는 상상을 한다고 말해서 탄생하게 된 장면이다. 알마는 그 캔이 파티에서 나온 빈 캔이나 쓰레기로 받아들였고, 그에 영감 받아 뮤직비디오에 외롭고 로맨틱한 이미지를 연출해냈다. 이들이 촬영한 바다는 말리부의 해변이고 콘돈과 그의 여자친구인 크리스티아나는 말리부 근처에 위치한 알마의 집에서 5일 동안 머물며 Elephant Gun과 Postcards From Italy의 뮤직비디오까지 이어서 촬영했다. </p><p>Gulag Orkestar에도 실렸던 Scenic World는 EP 버전에서는 어쿠스틱 악기들을 이용해 보다 느린 템포로 연주되었다. Scenic World의 가사는 콘돈이 아니라 그의 형인 라이언 콘돈이 쓴 것이다. 라이언은 잭 콘돈이 학교를 그만두고 열여섯 살 때 떠났던 유럽 여행에도 동행했으며, The Flying Club Cup의 앨범 속지에 글을 적기도 하는 등 문학적 재능으로 베이루트의 작사에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p> <h2><span>The Flying Club Cup</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작업의 근거지를 프랑스로 옮기고 홈 레코딩이 아닌 스튜디오 작업을 하면서 풍성한 <a>실내악</a>과 샹송의 로맨티시즘이 가미된 베이루트의 2집, The Flying Club Cup의 장난스러운 인트로곡 A Call to Arms에 쓰인 악기는 소라 고동이다. </p><p>이 앨범에 실린 Cliquot은 베이루트의 모든 곡 가운데에서 콘돈이 부르지 않은 유일한 곡이다. 각종 브라스 악기들과 키보드, <a>아코디언</a>, 우쿨렐레, 만돌린 등 다양한 악기들을 연주하는 콘돈이지만 <a>현악기</a>만큼은 손으로 뜯는 것 외에 제대로 다룰 줄을 모르기 때문에 외부의 도움을 받았다. Arcade Fire의 멤버이기도 했고 파이널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a>캐나다</a> 뮤지션 오웬 팔렛이 앨범의 전체적인 스트링 작업을 도맡아서 했으며, 특히 이 곡에서는 콘돈과 작곡도 공동으로 작업했다. 노래의 제목은 콘돈이 붙였지만 작사와 보컬은 팔렛이 직접 맡아서 했기 때문에 그는 Cliquot이 베이루트의 곡이기도 하지만 본인의 곡이기도 하다는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팔렛은 이 노래를 위해 베이루트의 콘서트에도 게스트로 참여한 적이 있으며 앨범작업을 할 수 있는 스튜디오를 마련해주는 등 베이루트에게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Cliquot의 앨범 버전에는 오웬 팔렛의 청아한 목소리가 담겨 있으나 뮤직비디오에서는 Grizzly Bear의 에드 드로스테가 보컬을 맡았다. ‘어떤 멜로디가 나의 사랑을 그의 침실로부터 이끌어줄까’라는 가사의 한 구절 때문에 작사를 한 오웬 팔렛이 <a>커밍아웃</a>한 <a>게이</a> 뮤지션이라서 ‘그녀’가 아닌 ‘그의 침실’이 되었다는 추측도 오가기도 했지만 그는 <a>흑사병</a>으로 남편을 잃은 여인의 이야기라고 밝혔다. </p><p>In The Mausoleum은 베이루트의 앨범에서 보기 드문 <a>재즈</a> 스타일의 곡이다. 닉 페트리의 경쾌한 드럼 리듬 위에 콘돈의 보컬과 스트링, 브라스 악기들이 조심스럽게 오가면서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베이루트의 곡들 가운데 가장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드럼 대신 <a>수박</a>을 두드리는 라이브 뮤직비디오 역시 재미있다. </p><p>The Flying Club Cup 때는 헐렁한 티셔츠 차림으로 베이루트의 거주지인 <a>브루클린</a>의 거리 혹은 빈 건물, 아이스크림 창고, 강가 등의 곳곳에서 자연스러운 라이브 공연을 하는 모습을 담은 앨범 전곡의 뮤직비디오를 인터넷에 공개하기도 했다. 앨범의 타이틀 곡인 Nantes와, The Penalty의 뮤직비디오가 먼저 파리에서 Take Away Show로 만들어졌고, 이 인연을 계기로 프로듀서 La Blogothèque와 함께 브루클린에서 작업을 이어가게 된다. 모든 영상들은 핸드헬드 기법으로 원 테이크 원 샷의 모양새를 갖추어 마치 여행지에서 만나는 거리의 악사들을 구경하는 듯한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콘돈은 보컬 녹음할 때 아무리 여러 번 불러도 가장 처음 부를 때가 제일 신선하고 흥분되는 기분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가사를 까먹지 않으면 보통 첫 테이크 그대로 가려고 노력하는 편이라고 밝혔는데, The Flying Club Cup의 라이브 뮤직비디오들 또한 열두 곡을 3일 만에 모두 찍은 것으로 알려졌다. </p> <h2><span></span><span>March of the Zapotec/Holland EP</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베이루트가 The Flying Club Cup 투어로 인해 누적된 피로로 여름에 예정되었던 유럽 투어를 또다시 취소한 뒤에 처음으로 선보인 더블 EP인 March of the Zapotec/Holland는 멕시코에서 했던 작업의 결과였다. 파리에 이어서 그가 멕시코를 방문했던 처음 목적은 Sin Nombre라는 <a>선댄스 영화제</a> 출품작의 사운드트랙 요청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이루트는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스트링이 많이 쓰인 전통적인 사운드트랙 작업을 할 수 없다고 느꼈고 결국 영화음악 작업은 무산되고 만다. 대신에 그는 오하카의 작은 마을에서 만난 Jimenez Band라는 <a>장례</a> 브라스 밴드와 함께 영화가 아닌 자기 자신만의 EP를 위한 곡을 녹음한다. </p><p>더블 EP가 발매되기 이전에 베이루트는 두 EP 가운데 어쿠스틱 EP인 March of the Zapotec에 실릴 세 곡, My Wife, The Shrew, Benito Juárez를 공연에서 먼저 선보였다. 콘돈이 장례행진곡이라고 묘사한 이들 세 곡 가운데 The Shrew는 이미 미발매 앨범 The Joys of Losing Weight에 제목 없이 15번 트랙으로 실려 있던 곡을 브라스를 활용해 베이루트의 느낌으로 재편곡한 결과였으며, Benito Juárez라고 소개되었던 곡은 후에 새롭게 편곡되어 La Llorona라는 제목의 EP 타이틀곡으로 실리게 된다. La Llorona는 '우는 여인'이란 뜻으로 <a>스페인어</a> 문화권에서 굉장히 유명한 전설 중 하나인데,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데 기본 버전은 이렇다. 아름다운 여인이 한 남자를 사랑했는데, 그 남자가 자기를 거절하자 아이들이 없다면 그를 되찾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자기 아이들을 익사시킨다. 그러나 남자가 돌아오지 않자 결국 자기도 자살하고, 아이들을 죽인 죄로 죽어서 떠돌며 자기 아이들의 시신을 찾아다니는 벌을 받아 언제나 울면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때로는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납치하기도 하기 때문에 아이들보고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겁주는 용도로도 쓰였고, 어머니로서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여성상이 반영되어 있는 전설이라는 설도 있다.<sup><a>&#91;4&#93;</a></sup>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a>오언 쿡</a>에 의해서 <a>애니메이션</a>으로 제작되었다.<sup><a>&#91;5&#93;</a></sup> </p><p>Holland는 March of the Zapotec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다섯 곡의 전자음악들로 채워져 있다. 그 중 My Night with the Prostitute from Marseille와 Venice는 각각 Big Change: Songs for FINCA와 The Believer: 2007 Music Issue라는 프로젝트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되었던 곡의 재활용이다. 2007년 10월, 국제공동체지원재단(FINCA)에서 <a>아이튠즈</a>에만 발매한 빈민구제 기금마련 프로젝트 Big Change: Songs for FINCA의 홍보대사였던 배우 <a>내털리 포트먼</a>이 직접 앨범의 참여 뮤지션들을 섭외했는데, 당시 그녀가 매우 즐겨 들어서 가장 먼저 연락을 취한 것이 베이루트였다. 콘돈은 포트만에게 보컬 참여를 제안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My Wife, Lost in the Wild와 The Concubine는 리얼 피플 시절과 베이루트의 중간쯤에 위치한 징검다리적인 느낌을 주고, 마지막 트랙인 No Dice는 완전한 신스팝이다. 완전히 상반되는 음악들을 대범하게 하나의 더블 EP로 묶어놓은 March of the Zapotec/Holland은 세 번째 정규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 색다른 감초 역할을 해주고 있으며, 베이루트는 March of the Zapotec/Holland EP 작업을 마친 후 <a>모로코</a>에서 휴식을 취하고서 다시 투어를 시작했다. </p> <h2><span></span><span>Dark Was The Night (A Red Hot Compilation)</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앤드루 버드</a>, 디셈버리스츠, 벤 기바드, 아이언 앤 와인, <a>호세 곤살레스</a>, 수프얀 스티븐스, 욜 라 텡고 등 인디 포크/록 계열의 스타들이 한 자리에 모인 <a>HIV</a>와 <a>AIDS</a> 퇴치기금 마련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베이루트는 The Flying Club Cup 앨범에 실렸던 Un Dernier Verre (Pour La Route)와 견줄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짧은 소품으로 이 앨범에 참여했다. 곡 제목은 Mimizan으로 프랑스 해변 마을의 이름과 동일하다. </p> <h2><span></span><span>공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베이루트는 공연 때 본인의 곡 이외에 본인이 좋아하는 다른 뮤지션들의 곡을 연주하기도 한다. 콘돈의 음악적 지향점인 까에따노 벨로주의 O LeãOzinho, 콘돈의 창법에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한 자끄 브렐의 Le Moribond, 레너드 코헨의 원곡으로 영화 슈렉에 루퍼스 웨인라이트 버전으로 삽입되어 유명해지기도 했던 Hallelujah, 콘돈이 유럽에서 제일 처음으로 접하고 가장 좋아하는 발칸 브라스 밴드 Kocani Orkestar의 Siki Siki Baba, 베이루트의 탄생에 일조한 A Hawk And A Hacksaw의 Serbian Cocek, 그리고 Goran Bregovic의 Ederlezi와 Serge Gainsbourg의 La Javanaise까지 공연에서 자주 불리곤 한다. Le Moribond는 Elephant Gun EP에 라이브 버전으로 실리기도 했고, Hallelujah의 경우엔 대중에게 잘 알려지기도 했으며 베이루트가 즐겨 부르는 타인의 곡 중에 유일한 영어 노래이기도 해서, 공연 때 이 곡을 부르다가 갑자기 멍하게 가사를 잊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관객에게 가사를 가르쳐달라는 듯이 참여를 유도하는 퍼포먼스를 종종 하기도 한다. 베이루트는 Kocani Orkestar와도 협연한 적이 있으며 공연의 클라이맥스에서 주로 터져 나오는 이들의 노래 Siki Siki Baba는 ‘엄격하고 엄격한 아버지’라는 뜻의 터키어이다. 베이루트의 곡이지만 아직까지 레코딩된 적 없는 Closing Song과, 콘돈이 어린 시절에 만들었고 역시 레코딩은 되지 않은 East Harlem 또한 공연 때만 들을 수 있는 곡이다. 미국인이지만 유럽의 감수성을 훨씬 더 짙게 가지고 있는 베이루트는 공연 때 타인의 노래뿐만 아니라 본인의 노래를 서툰 <a>포르투갈어</a>로 바꾸어 부르거나 비교적 능숙한 <a>프랑스어</a>로 관객에게 말을 거는 등의 행동을 가끔씩 시도하기도 한다. </p><p>베이루트는 2007년 9월과 2009년 1월에 각각 Flying Club Cup과 March of the Zapotec/Holland 발매를 앞두고 브루클린에 위치한 Coco66라는 작은 클럽에서 지인들과 함께 무료 공연을 가졌다. 본격적인 투어를 앞둔 리허설과 같은 의미의 공연으로 관객들과 아주 친밀한 거리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p><p>콘돈은 공연 전에 매우 떠는 편이고 대규모 페스티벌보다 작은 규모의 공연에서 더욱 긴장한다고 밝혔다. 공연 전 몇 시간 동안은 목소리를 좋게 하기 위해 말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올라서기 직전에 큰 잔에 <a>위스키</a>를 한 잔 마신다. 그래서 베이루트의 공연은 대부분 취중에 치러진다. </p> <h2><span></span><span>베이루트의 추천곡</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small> </small></p><small><ul><li>Kocani Orkestar의 Siki, Siki Baba</li> <li>Esma Redzepova의 Chaje Shukarije</li> <li>Justus Kohncke ft. Meloboy의 Hot Love (Freiland/Frei)</li> <li><a>배링턴 레비</a>(Barrington Levy)의 Here I Come</li> <li><a>카이타노 벨로소</a>(Caetano Veloso)의 Tropicália</li> <li><a>페드로 인판테</a>(Pedro Infante)의 Dios Nunca Muere</li> <li><a>미나 마치니</a>(Mina Mazzini)의 Se Telefonando</li> <li><a>호르헤 벤</a>(Jorge Ben)의 Take It Easy, My Brother Charles</li> <li>Boutaiba S'ghir의 Malgré Tout</li> <li><a>그리즐리 베어</a>의 Cheerleader와 Two weeks</li> <li><a>스모키 로빈슨</a>의 Tracks of My Tears</li></ul></small><small></small><p><small></small> </p> <h2><span></span><span>참고 자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a>롤링스톤지 인터뷰</a> 2007년 10월 10일</span> </li> <li><span><a>↑</a></span> <span><a>피치포크 인터뷰</a> 2006년 8월 21일</span> </li> <li><span><a>↑</a></span> <span><a>Said the Gramophone에 게스트 기고</a> <a>Archived</a> 2009년 10월 15일 - <a>웨이백 머신</a> 2006년 6월 21일</span> </li> <li><span><a>↑</a></span> <span><a>La Llorona</a> 영문 위키피디아</span> </li> <li><span><a>↑</a></span> <span><a>La Llorona 뮤직 비디오</a> 2009년 1월 14일</span> </li> </ol></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b><span>(영어)</span></b> <a>베이루트의 공식 홈페이지</a></li> <li><b><span>(영어)</span></b> <a>베이루트의 마이스페이스</a></li> <li><b><span>(영어)</span></b> <a>잭 콘돈의 마이스페이스</a></li> <li><b><span>(영어)</span></b> <a>베이루트의 영문 위키피디아</a></li> <li><b><span>(영어)</span></b> <a>베이루트의 위키스페이스</a></li> <li><b><span>(영어)</span></b> <a>The Flying Club Cup의 공식 홈페이지</a></li> <li><b><span>(영어)</span></b> <a>Dark Was The Night의 공식 홈페이지</a></li> <li><b><span>(영어)</span></b> <a>알마 하렐의 홈페이지</a></li> <li><b><span>(영어/프랑스어)</span></b> <a>La Blogothèque의 홈페이지</a></li> <li><b><span>(스페인어/영어)</span></b> <a>Índigo Brainmedia와의 인터뷰 페이지</a></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베이루트_(밴드)&amp;oldid=24206203</a>"</div> <div><div><a>분류</a>: <ul><li><a>미국의 록 밴드</a></li><li><a>2006년 결성된 음악 그룹</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로컬에는 없지만 위키데이터에는 있는 그림</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Azərbaycanca</a></li><li><a>تۆرکجه</a></li><li><a>Català</a></li><li><a>Dansk</a></li><li><a>Deutsch</a></li><li><a>Ελληνικά</a></li><li><a>English</a></li><li><a>Español</a></li><li><a>فارسی</a></li><li><a>Suomi</a></li><li><a>Français</a></li><li><a>Galego</a></li><li><a>עברית</a></li><li><a>Italiano</a></li><li><a>日本語</a></li><li><a>Македонски</a></li><li><a>Nederlands</a></li><li><a>Norsk nynorsk</a></li><li><a>Norsk</a></li><li><a>Polski</a></li><li><a>Português</a></li><li><a>Русский</a></li><li><a>Српски / srpski</a></li><li><a>Svenska</a></li><li><a>Türkçe</a></li><li><a>Українська</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5:4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콘돈이 처음 배운 악기는?
트럼펫
null
98574
10,699
[ "콘돈이 처음 배운 악기는?", "콘돈이 팔 수술을 한 나이는?", "콘돈이 음악적인 의미에서 제 2의 고향으로 여기는 곳은?", "콘돈이 즐겨 들은 음악은 무엇인가?", "콘돈이 제일 처음 배운 악기는?", "콘돈이 새긴 문신의 모양은?", "콘돈이 앨범을 발매할 때 사용한 이름은?", "콘돈이 제 2의 고향으로 여기는 곳은?", "유일하게 뮤직비디오로 제작된 앨범은?", "스튜디오를 사용하지 않고 만든 방법은 무엇인가?", "Scenic World와 After the Curtain에서만 사용된 음은?", "콘돈은 몇 살에 데뷔하였는가?", " Elephant Gun 이 실린 앨범의 이름은?", "Elephant Gun 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했던 바다는?", "베이루트가 가장 처음 찍은 뮤직비디오의 감독은?", "콘돈이 바다에서 연주하는 악기는 무엇인가?", "Elephant Gun의 뮤직비디오를 찍은 감독의 이름은?", "콘돈의 여자친구 이름은?", "베이루트의 모든 곡 중에 콘돈이 부르지 않은 유일한 곡의 제목은?", "Arcade Fire 의 멤버이기도 했고 파이널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베이루트의 앨범을 도왔던 사람의 이름은?", "캐나다 뮤지션 오웬 팔렛의 활동 이름은 무엇인가?", "베이루트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참여한 사람은?", "콘돈이 제대로 연주할 줄 모르는 악기는?", "오웬 팔렛의 활동명은?", "The Flying Club Cup의 타이틀 곡의 제목은?", "뮤직비디오의 영상에 사용했던 기법은?", "뮤직비디오의 영상 기법은 무엇인가?", "베이루트의 거주지는?", "The Flying Club Cup 앨범의 타이틀 곡은?", "뮤직비디오가 촬영된 기법은?", "베이루트가 Sin Nombre 라는 선댄스 영화제 출품작의 사운드트랙을 요청 받고 갔던 나라는?", "오하카의 작은 마을에서 만난 장례 브라스 밴드의 이름은?", "베이루트는 선댄스 영화제 출품작의 어떤 요청을 받았는가?", "베이루트가 갔던 작은 마을은 어디인가?", "베이루트가 Jimenez Band를 만난 곳은?", "베이루트에게 사운드트랙을 요청한 영화제 작품의 이름은?", "La Llorona라는 곡의 뮤직비디오를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사람은?", "La Llorona 라는 제목의 EP 앨범에서 La Llorona 의 뜻은 무엇인가?", "베이루트의 뮤직비디오는 누구에 의해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는가? ", "스페인어 La Llorona의 뜻은?", "La Llorona의 뜻은?", "La Llorona의 뮤직비디오를 제작한 사람은?", "콘돈이 보컬 참여를 제안한 사람은 누구인가?", "베이루트가 작업을 마치고 휴식을 취한 장소는 어디인가?", "콘돈에게 가장 먼저 프로젝트 앨범의 참여를 제안한 사람은?", "'No Dice'의 장르는?", "베이루트가 협연한 오케스트라는?", "베이루트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에서 이들의 노래 중 Siki Siki Baba 의 뜻은 무엇인가?", "미국인인 베이루트가 훨씬 더 짙게 가지고 있는 감수성은?", "콘돈이 유럽에서 제일 처음으로 접하고 가장 좋아하는 밴드의 이름은?", "Siki Siki Baba는 어느 나라의 언어인가?", "'Hallelujah'의 원곡자는?" ]
<!DOCTYPE html> 베이루트 (밴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베이루트 (밴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tbody><tr> <th colspan="2"> </th></tr> <tr> <th colspan="2">기본 정보 </th></tr> <tr> <th>국가 </th> <td> 미국 </td></tr> <tr> <th>장르 </th> <td>포크 인디 발칸 월드 </td></tr> <tr> <th>활동 시기 </th> <td>2006년 ~ 현재 </td></tr> <tr> <th>레이블 </th> <td>Ba Da Bing! 4AD </td></tr> <tr> <th>웹사이트 </th> <td>www.beirutband.com </td></tr> <tr> <td colspan="2">구성원 </td></tr> <tr> <td colspan="2">Zach Condon, Nicholas Petree, Perrin Cloutier, Jason Poranski, Paul Collins, Jon Natchez, Kristin ferebee, Kelly Pratt, Tracy Pratt, Heather Trost </td></tr> </tbody></table> 베이루트(Beirut)는 미국 뉴멕시코 앨버커키 출신 1986년생 잭 콘돈(Zach Condon)의 원맨 밴드로 시작했으며, 후에 고정적인 밴드 멤버들이 붙어서 콘돈 포함 열 명으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트럼펫, 우쿨렐레 등의 악기 연주는 물론, 작사/작곡과 보컬까지 거의 대부분의 작업이 콘돈의 손을 거쳐 이루어지므로 콘돈과 나머지 세션들로 구성된 밴드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들 음악의 기반은 동유럽 집시 음악에 포크적인 요소를 가미한 것으로 계속해서 유랑하는 느낌으로 프랑스, 멕시코 등 여러 지역의 음악적 전통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흡수해 가며 독특한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목차 1 역사 2 디스코그래피 2.1 앨범 2.2 EP 2.3 컴필레이션 2.4 객원참여 3 The Joys of Losing Weight 4 Gulag Orkestar 5 Lon Gisland EP 6 The Flying Club Cup 7 March of the Zapotec/Holland EP 8 Dark Was The Night (A Red Hot Compilation) 9 공연 10 베이루트의 추천곡 11 참고 자료 12 외부 링크 역사[편집] 콘돈은 어릴 때 아버지가 형제들과 즐겨 불렀던 아프리칸 아메리칸 보컬 스타일인 두왑과 모타운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다. 그는 자기만 혼자 몰래 듣는 본인의 두왑 앨범도 하나 만들어두었지만 공개하진 않았다. 그는 십대 시절부터 집시 영화의 거장이자 노 스모킹 밴드와 함께 뮤지션으로서 내한하기도 했던 에밀 쿠스트리차의 영화들에 빠져 살았으며, 열여섯에 학교를 그만두고 형과 함께 유럽 여행을 떠났다. 중간에 네 번이나 학교로 돌아갔지만 겨우 하루 갔다가 도로 그만둔 적도 몇 번 있었다. 콘돈은 뉴멕시코에 있는 대학에 한 달 정도 다니다가 Ba Da Bing! 레코드에서 앨범을 내자는 연락을 받고 그 날로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서 뉴욕 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1] 콘돈이 제일 처음 배운 악기는 트럼펫이었으며, 양쪽 손목에 프렌치 호른 모양의 문신을 새길 정도로 브라스 악기들에 열광했다. 열일곱 살 때 팔 수술을 해서 기타를 연주할 수 없게 되자 결국 트럼펫과 만돌린, 우쿨렐레가 그의 주된 악기로 자리 잡았고, 그 악기들이 주축이 되어[2] 소년의 얼굴에 노인의 감성을 지닌 듯한 콘돈은 베이루트라는 이름과 함께 스무 살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 있는 첫 앨범 Gulag Orkestar를 발표한다. 그는 수많은 블로그들을 통해 퍼져나간 인기와 함께 평단에서도 평가를 얻으며 센세이셔널하게 데뷔했고, 바로 다음 해에 두 번째 앨범 The Flying Club Cup을 발표하며 젊고 왕성한 창작열을 이어갔다. 베이루트는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 장르의 네 가지로 발칸 브라스와 유로 하우스, 덥, 그리고 브라질의 트로피칼리아를 꼽았는데,[3] 1집 Gulag Orkestar에서는 발칸 브라스의 영향이 가장 크게 두드러졌고, 프랑스로 음악적 근거지를 옮긴 2집에서는 1집의 기반에서 샹송의 로맨티시즘이 더해졌다. 열여섯 살 때부터 샹송을 즐겨들었던 콘돈은 특히 자끄 브렐의 음악을 즐겨 들었으며, 파리를 음악적인 의미에서 제 2의 고향으로 여기는 듯하다. 콘돈은 자신의 음악을 당나귀에 비유한다. 당나귀는 아주 웃기게 생기고 바보 같고 술에 취한 듯이 걷지만 정말 아름다운 슬픈 눈을 가졌기 때문이다. 베이루트의 음악에 있어서 슬픔이라는 정서는 언제나 중요한 화두이다. March of the Zapotec/Holland 더블 EP 작업을 마치고 투어 중인 베이루트는 함께 작업하고 싶은 아티스트로 조르쥬 벤과 까에따노 벨로주를 꼽으며 트로피칼리아에 대한 열망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이번 2009년 여름 브라질로 향할 것이고 그의 다음 정규 앨범은 그 여행의 결과물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디스코그래피[편집] 앨범[편집] The Joys of Losing Weight (미발매) Gulag Orkestar (2006년 5월) The Flying Club Cup (2007년 10월) EP[편집] Small Time American Bats (미발매) Onward to Mecca (2006년 11월) Lon Gisland (2007년 1월) Pompeii (2007년 2월) Elephant Gun (2007년 6월) March of the Zapotec/Holland (2009년 2월) 컴필레이션[편집] The Believer: 2007 Music Issue Big Change: Songs for FINCA Dark Was The Night (A Red Hot Compilation) 객원참여[편집] A Hawk and a Hacksaw의 A Hawk and a Hacksaw and the Hun Hangár Ensemble 앨범에서 만돌린과 트럼펫, 우쿨렐레를 연주했다. Alaska in Winter의 Dance Party in the Balkans 앨범에서 우쿨렐레와 트럼펫, 코러스 등으로 참여했다. Get Him Eat Him의 Arms Down 앨범에 수록된 2x2라는 곡에 참여했다. Bark Cat Bark의 노래 Barranquilla에서 트럼펫을 연주했다. Final Fantasy의 Spectrum, 14th Century EP에 참여했다. The Joys of Losing Weight[편집] 콘돈이 베이루트 이전인 열다섯 살 때, 리얼 피플이라는 이름으로 혼자서 집에 있는 악기들과 신시사이저를 가지고 만들었던 미발매 앨범이다. 베이루트의 음악과는 사뭇 다른 스무 곡 이상의 로우파이 일렉트로닉 음악들이 담겨 있으며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다. 후에 베이루트의 이름으로 발매한 Pompeii EP에 리얼 피플 시절의 곡을 다시 수록하기도 했다. 전자 음악에 대한 베이루트의 시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후에도 간헐적으로 지속되었다. Gulag Orkestar[편집] A Hawk And A Hacksaw의 제러미 반스와 헤더 트로스트가 드럼과 바이올린 세션으로 참여한 것을 제외하고는 전 과정을 콘돈 혼자서 담당했다. 스튜디오를 사용하지 않고 홈레코딩으로 만들어졌다. 스무살 미국인 청년에게서 기대되지 않을 법한 그의 데뷔 앨범은 인디신에 신선한 충격이 되었으며 비평적 성공과 함께 팬층을 형성하기 시작한다. The Joys of Losing Weight와 달리 어쿠스틱 악기들이 당당히 중심에 섰고 Scenic World와 After the Curtain에서만 전자음이 사용되었다. 앨범 내에서 가장 말랑말랑하고 예쁜 멜로디를 가진 Postcards from Italy는 가장 널리 알려진 베이루트의 곡 중 하나로 Gulag Orkestar 앨범에서 유일하게 뮤직비디오로 제작되었다. Lon Gisland EP[편집] 1집과 2집 사이에 발매된 Lon Gisland EP에 실린 Elephant Gun은 베이루트의 대표곡 중 하나로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유럽에서 방랑 생활을 했던 본인의 페르소나가 가장 잘 담겨 있는 곡이다. Elephant Gun의 뮤직비디오는 베이루트가 가장 처음으로 찍은 뮤직비디오였으며 알마 하렐이라는 유대계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알마가 일거리를 찾던 중에 베이루트의 음악을 듣고 느낌을 받아 직접 베이루트의 마이스페이스에 나와 있는 메일 주소로 연락을 하게 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콘돈은 알마에게 Elephant Gun의 화자가 사파리의 사냥꾼이라고 말했고, 비디오의 컨셉은 그것으로 결정되었다. 무대 벽에는 한반도 지도를 포함하여 시대를 초월한 세계 각국의 지도로 도배가 되어 있으며, 평소와는 달리 플루크라는 종류의 우쿨렐레를 연주하는 밴드 멤버 옆에서 노래하는 콘돈을 둘러싼 코끼리 코를 쓴 무용가들은 알퐁스 뮈샤의 그림이 붙어 있는 술병들 사이에서 모두 취한 듯 춤을 춘다. 안무는 엘리자베스타운, 더티 댄싱 2: 하바나 나이트 등 다수의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에 참여했던 안무가의 작품이다. 이 곡의 후반부에는 잠시 화면이 바다로 전환되면서 콘돈이 맨발로 등 뒤에 빈 캔을 주렁주렁 매달아 질질 끌면서 걸어가 파도에 발을 담그고 트럼펫을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은 알마가 콘돈이랑 만났던 첫 모임에서 콘돈이 신혼 여행가는 자동차처럼 자기 발에 캔을 끌고 가는 상상을 한다고 말해서 탄생하게 된 장면이다. 알마는 그 캔이 파티에서 나온 빈 캔이나 쓰레기로 받아들였고, 그에 영감 받아 뮤직비디오에 외롭고 로맨틱한 이미지를 연출해냈다. 이들이 촬영한 바다는 말리부의 해변이고 콘돈과 그의 여자친구인 크리스티아나는 말리부 근처에 위치한 알마의 집에서 5일 동안 머물며 Elephant Gun과 Postcards From Italy의 뮤직비디오까지 이어서 촬영했다. Gulag Orkestar에도 실렸던 Scenic World는 EP 버전에서는 어쿠스틱 악기들을 이용해 보다 느린 템포로 연주되었다. Scenic World의 가사는 콘돈이 아니라 그의 형인 라이언 콘돈이 쓴 것이다. 라이언은 잭 콘돈이 학교를 그만두고 열여섯 살 때 떠났던 유럽 여행에도 동행했으며, The Flying Club Cup의 앨범 속지에 글을 적기도 하는 등 문학적 재능으로 베이루트의 작사에 많은 영감을 주고 있다. The Flying Club Cup[편집] 작업의 근거지를 프랑스로 옮기고 홈 레코딩이 아닌 스튜디오 작업을 하면서 풍성한 실내악과 샹송의 로맨티시즘이 가미된 베이루트의 2집, The Flying Club Cup의 장난스러운 인트로곡 A Call to Arms에 쓰인 악기는 소라 고동이다. 이 앨범에 실린 Cliquot은 베이루트의 모든 곡 가운데에서 콘돈이 부르지 않은 유일한 곡이다. 각종 브라스 악기들과 키보드, 아코디언, 우쿨렐레, 만돌린 등 다양한 악기들을 연주하는 콘돈이지만 현악기만큼은 손으로 뜯는 것 외에 제대로 다룰 줄을 모르기 때문에 외부의 도움을 받았다. Arcade Fire의 멤버이기도 했고 파이널 판타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캐나다 뮤지션 오웬 팔렛이 앨범의 전체적인 스트링 작업을 도맡아서 했으며, 특히 이 곡에서는 콘돈과 작곡도 공동으로 작업했다. 노래의 제목은 콘돈이 붙였지만 작사와 보컬은 팔렛이 직접 맡아서 했기 때문에 그는 Cliquot이 베이루트의 곡이기도 하지만 본인의 곡이기도 하다는 자부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팔렛은 이 노래를 위해 베이루트의 콘서트에도 게스트로 참여한 적이 있으며 앨범작업을 할 수 있는 스튜디오를 마련해주는 등 베이루트에게 물심양면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Cliquot의 앨범 버전에는 오웬 팔렛의 청아한 목소리가 담겨 있으나 뮤직비디오에서는 Grizzly Bear의 에드 드로스테가 보컬을 맡았다. ‘어떤 멜로디가 나의 사랑을 그의 침실로부터 이끌어줄까’라는 가사의 한 구절 때문에 작사를 한 오웬 팔렛이 커밍아웃한 게이 뮤지션이라서 ‘그녀’가 아닌 ‘그의 침실’이 되었다는 추측도 오가기도 했지만 그는 흑사병으로 남편을 잃은 여인의 이야기라고 밝혔다. In The Mausoleum은 베이루트의 앨범에서 보기 드문 재즈 스타일의 곡이다. 닉 페트리의 경쾌한 드럼 리듬 위에 콘돈의 보컬과 스트링, 브라스 악기들이 조심스럽게 오가면서 만들어내는 하모니는 베이루트의 곡들 가운데 가장 현대적이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드럼 대신 수박을 두드리는 라이브 뮤직비디오 역시 재미있다. The Flying Club Cup 때는 헐렁한 티셔츠 차림으로 베이루트의 거주지인 브루클린의 거리 혹은 빈 건물, 아이스크림 창고, 강가 등의 곳곳에서 자연스러운 라이브 공연을 하는 모습을 담은 앨범 전곡의 뮤직비디오를 인터넷에 공개하기도 했다. 앨범의 타이틀 곡인 Nantes와, The Penalty의 뮤직비디오가 먼저 파리에서 Take Away Show로 만들어졌고, 이 인연을 계기로 프로듀서 La Blogothèque와 함께 브루클린에서 작업을 이어가게 된다. 모든 영상들은 핸드헬드 기법으로 원 테이크 원 샷의 모양새를 갖추어 마치 여행지에서 만나는 거리의 악사들을 구경하는 듯한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콘돈은 보컬 녹음할 때 아무리 여러 번 불러도 가장 처음 부를 때가 제일 신선하고 흥분되는 기분을 가지게 되기 때문에 가사를 까먹지 않으면 보통 첫 테이크 그대로 가려고 노력하는 편이라고 밝혔는데, The Flying Club Cup의 라이브 뮤직비디오들 또한 열두 곡을 3일 만에 모두 찍은 것으로 알려졌다. March of the Zapotec/Holland EP[편집] 베이루트가 The Flying Club Cup 투어로 인해 누적된 피로로 여름에 예정되었던 유럽 투어를 또다시 취소한 뒤에 처음으로 선보인 더블 EP인 March of the Zapotec/Holland는 멕시코에서 했던 작업의 결과였다. 파리에 이어서 그가 멕시코를 방문했던 처음 목적은 Sin Nombre라는 선댄스 영화제 출품작의 사운드트랙 요청 때문이었다. 그러나 베이루트는 그들이 요구하는대로 스트링이 많이 쓰인 전통적인 사운드트랙 작업을 할 수 없다고 느꼈고 결국 영화음악 작업은 무산되고 만다. 대신에 그는 오하카의 작은 마을에서 만난 Jimenez Band라는 장례 브라스 밴드와 함께 영화가 아닌 자기 자신만의 EP를 위한 곡을 녹음한다. 더블 EP가 발매되기 이전에 베이루트는 두 EP 가운데 어쿠스틱 EP인 March of the Zapotec에 실릴 세 곡, My Wife, The Shrew, Benito Juárez를 공연에서 먼저 선보였다. 콘돈이 장례행진곡이라고 묘사한 이들 세 곡 가운데 The Shrew는 이미 미발매 앨범 The Joys of Losing Weight에 제목 없이 15번 트랙으로 실려 있던 곡을 브라스를 활용해 베이루트의 느낌으로 재편곡한 결과였으며, Benito Juárez라고 소개되었던 곡은 후에 새롭게 편곡되어 La Llorona라는 제목의 EP 타이틀곡으로 실리게 된다. La Llorona는 '우는 여인'이란 뜻으로 스페인어 문화권에서 굉장히 유명한 전설 중 하나인데, 나라마다 조금씩 다른데 기본 버전은 이렇다. 아름다운 여인이 한 남자를 사랑했는데, 그 남자가 자기를 거절하자 아이들이 없다면 그를 되찾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자기 아이들을 익사시킨다. 그러나 남자가 돌아오지 않자 결국 자기도 자살하고, 아이들을 죽인 죄로 죽어서 떠돌며 자기 아이들의 시신을 찾아다니는 벌을 받아 언제나 울면서 돌아다닌다는 것이다. 때로는 돌아다니는 아이들을 납치하기도 하기 때문에 아이들보고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겁주는 용도로도 쓰였고, 어머니로서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여성상이 반영되어 있는 전설이라는 설도 있다.[4] 이 곡의 뮤직비디오는 오언 쿡에 의해서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었다.[5] Holland는 March of the Zapotec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다섯 곡의 전자음악들로 채워져 있다. 그 중 My Night with the Prostitute from Marseille와 Venice는 각각 Big Change: Songs for FINCA와 The Believer: 2007 Music Issue라는 프로젝트 컴필레이션 앨범에 수록되었던 곡의 재활용이다. 2007년 10월, 국제공동체지원재단(FINCA)에서 아이튠즈에만 발매한 빈민구제 기금마련 프로젝트 Big Change: Songs for FINCA의 홍보대사였던 배우 내털리 포트먼이 직접 앨범의 참여 뮤지션들을 섭외했는데, 당시 그녀가 매우 즐겨 들어서 가장 먼저 연락을 취한 것이 베이루트였다. 콘돈은 포트만에게 보컬 참여를 제안했으나 성사되지는 않았다. My Wife, Lost in the Wild와 The Concubine는 리얼 피플 시절과 베이루트의 중간쯤에 위치한 징검다리적인 느낌을 주고, 마지막 트랙인 No Dice는 완전한 신스팝이다. 완전히 상반되는 음악들을 대범하게 하나의 더블 EP로 묶어놓은 March of the Zapotec/Holland은 세 번째 정규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 색다른 감초 역할을 해주고 있으며, 베이루트는 March of the Zapotec/Holland EP 작업을 마친 후 모로코에서 휴식을 취하고서 다시 투어를 시작했다. Dark Was The Night (A Red Hot Compilation)[편집] 앤드루 버드, 디셈버리스츠, 벤 기바드, 아이언 앤 와인, 호세 곤살레스, 수프얀 스티븐스, 욜 라 텡고 등 인디 포크/록 계열의 스타들이 한 자리에 모인 HIV와 AIDS 퇴치기금 마련 컴필레이션 앨범으로 베이루트는 The Flying Club Cup 앨범에 실렸던 Un Dernier Verre (Pour La Route)와 견줄만큼 예쁘고 사랑스러운 느낌의 짧은 소품으로 이 앨범에 참여했다. 곡 제목은 Mimizan으로 프랑스 해변 마을의 이름과 동일하다. 공연[편집] 베이루트는 공연 때 본인의 곡 이외에 본인이 좋아하는 다른 뮤지션들의 곡을 연주하기도 한다. 콘돈의 음악적 지향점인 까에따노 벨로주의 O LeãOzinho, 콘돈의 창법에 영향을 주었음이 분명한 자끄 브렐의 Le Moribond, 레너드 코헨의 원곡으로 영화 슈렉에 루퍼스 웨인라이트 버전으로 삽입되어 유명해지기도 했던 Hallelujah, 콘돈이 유럽에서 제일 처음으로 접하고 가장 좋아하는 발칸 브라스 밴드 Kocani Orkestar의 Siki Siki Baba, 베이루트의 탄생에 일조한 A Hawk And A Hacksaw의 Serbian Cocek, 그리고 Goran Bregovic의 Ederlezi와 Serge Gainsbourg의 La Javanaise까지 공연에서 자주 불리곤 한다. Le Moribond는 Elephant Gun EP에 라이브 버전으로 실리기도 했고, Hallelujah의 경우엔 대중에게 잘 알려지기도 했으며 베이루트가 즐겨 부르는 타인의 곡 중에 유일한 영어 노래이기도 해서, 공연 때 이 곡을 부르다가 갑자기 멍하게 가사를 잊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관객에게 가사를 가르쳐달라는 듯이 참여를 유도하는 퍼포먼스를 종종 하기도 한다. 베이루트는 Kocani Orkestar와도 협연한 적이 있으며 공연의 클라이맥스에서 주로 터져 나오는 이들의 노래 Siki Siki Baba는 ‘엄격하고 엄격한 아버지’라는 뜻의 터키어이다. 베이루트의 곡이지만 아직까지 레코딩된 적 없는 Closing Song과, 콘돈이 어린 시절에 만들었고 역시 레코딩은 되지 않은 East Harlem 또한 공연 때만 들을 수 있는 곡이다. 미국인이지만 유럽의 감수성을 훨씬 더 짙게 가지고 있는 베이루트는 공연 때 타인의 노래뿐만 아니라 본인의 노래를 서툰 포르투갈어로 바꾸어 부르거나 비교적 능숙한 프랑스어로 관객에게 말을 거는 등의 행동을 가끔씩 시도하기도 한다. 베이루트는 2007년 9월과 2009년 1월에 각각 Flying Club Cup과 March of the Zapotec/Holland 발매를 앞두고 브루클린에 위치한 Coco66라는 작은 클럽에서 지인들과 함께 무료 공연을 가졌다. 본격적인 투어를 앞둔 리허설과 같은 의미의 공연으로 관객들과 아주 친밀한 거리에서 소규모로 이루어졌다. 콘돈은 공연 전에 매우 떠는 편이고 대규모 페스티벌보다 작은 규모의 공연에서 더욱 긴장한다고 밝혔다. 공연 전 몇 시간 동안은 목소리를 좋게 하기 위해 말을 하지 않고, 무대에 올라서기 직전에 큰 잔에 위스키를 한 잔 마신다. 그래서 베이루트의 공연은 대부분 취중에 치러진다. 베이루트의 추천곡[편집] Kocani Orkestar의 Siki, Siki Baba Esma Redzepova의 Chaje Shukarije Justus Kohncke ft. Meloboy의 Hot Love (Freiland/Frei) 배링턴 레비(Barrington Levy)의 Here I Come 카이타노 벨로소(Caetano Veloso)의 Tropicália 페드로 인판테(Pedro Infante)의 Dios Nunca Muere 미나 마치니(Mina Mazzini)의 Se Telefonando 호르헤 벤(Jorge Ben)의 Take It Easy, My Brother Charles Boutaiba S'ghir의 Malgré Tout 그리즐리 베어의 Cheerleader와 Two weeks 스모키 로빈슨의 Tracks of My Tears 참고 자료[편집] ↑ 롤링스톤지 인터뷰 2007년 10월 10일 ↑ 피치포크 인터뷰 2006년 8월 21일 ↑ Said the Gramophone에 게스트 기고 Archived 2009년 10월 15일 - 웨이백 머신 2006년 6월 21일 ↑ La Llorona 영문 위키피디아 ↑ La Llorona 뮤직 비디오 2009년 1월 14일 외부 링크[편집] (영어) 베이루트의 공식 홈페이지 (영어) 베이루트의 마이스페이스 (영어) 잭 콘돈의 마이스페이스 (영어) 베이루트의 영문 위키피디아 (영어) 베이루트의 위키스페이스 (영어) The Flying Club Cup의 공식 홈페이지 (영어) Dark Was The Night의 공식 홈페이지 (영어) 알마 하렐의 홈페이지 (영어/프랑스어) La Blogothèque의 홈페이지 (스페인어/영어) Índigo Brainmedia와의 인터뷰 페이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베이루트_(밴드)&amp;oldid=24206203" 분류: 미국의 록 밴드2006년 결성된 음악 그룹숨은 분류: 로컬에는 없지만 위키데이터에는 있는 그림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zərbaycancaتۆرکجهCatalà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Italiano日本語МакедонскиNederlands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Српски / srpskiSvenskaTürkçe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5:4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요약 **핵심 주장**: 베이루트(Beirut)는 잭 콘돈이 이끄는 미국의 인디 밴드로, 동유럽 집시 음악과 포크 요소를 결합하여 독특한 음악적 실험을 이어가고 있다. 콘돈의 개인적 경험과 다양한 문화적 영향을 바탕으로 한 음악은 슬픔과 유랑의 정서를 담고 있다. --- **1. 기본 정보 및 구성원** - 베이루트는 미국 뉴멕시코 앨버커키 출신의 잭 콘돈이 2006년에 시작한 밴드로, 현재 10명의 멤버로 구성되어 있다. 콘돈이 대부분의 작업을 담당하며, 음악은 동유럽 집시 음악과 포크적 요소를 결합한 독특한 스타일을 지닌다. **2. 역사** - 잭 콘돈은 어린 시절부터 다양한 음악 장르에 영향을 받았으며, 유럽 여행을 통해 음악적 영감을 얻었다. 그는 20세에 첫 앨범 'Gulag Orkestar'를 발표하며 인디 음악 씬에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두 번째 앨범 'The Flying Club Cup'을 통해 더욱 발전된 음악적 색깔을 선보였다. **3. 디스코그래피** - 베이루트는 여러 앨범과 EP를 발표했으며, 각 작품은 콘돈의 개인적 경험과 다양한 문화적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 특히 'Gulag Orkestar'는 그의 데뷔작으로, 인디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4. 주요 앨범 분석** - 'Gulag Orkestar'는 주로 어쿠스틱 악기를 사용하여 슬픈 정서를 담고 있으며, 'The Flying Club Cup'은 프랑스에서 작업하여 샹송의 로맨티시즘을 더했다. 'March of the Zapotec/Holland'는 멕시코에서의 작업 결과물로, 전통적인 요소와 전자음악을 결합한 더블 EP이다. **5. 공연 및 음악적 영향** - 베이루트는 공연에서 다양한 아티스트의 곡을 커버하며, 콘돈은 유럽의 감성을 담아 관객과 소통한다. 그의 음악적 지향점은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으며, 공연 전 긴장감을 느끼는 모습도 드러난다. **6. 추천곡** - 베이루트는 공연에서 자주 부르는 추천곡들을 통해 그들의 음악적 영향을 보여준다. 이 곡들은 다양한 장르와 아티스트의 영향을 받으며, 콘돈의 음악적 여정을 나타낸다. --- 이 문서는 베이루트의 음악적 여정과 그들이 지닌 독특한 정체성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콘돈의 개인적 경험과 문화적 배경이 음악에 어떻게 녹아들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다음 글의 핵심 주장과 근거를 중심으로 요약해줘. 단락별로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도 함께 정리해줘. 문장 길이는 너무 짧지 않게 하고, 원문의 흐름은 유지해줘.
한성부민회
https://ko.wikipedia.org/wiki/한성부민회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한성부민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한성부민회</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한성부민회</b>(漢城府民會)는 <a>1907년</a>(융희 2년) <a>9월</a> <a>유길준</a> 등에 의해 자치단체를 지향하면서 <a>한성부</a>에서 결성된 <a>대한제국</a>의 정치 단체이다. 초기의 한성부민회는 반관반민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초대 회장은 장헌식이 맡았다. 이때 <a>유길준</a> 등은 기부금을 모집해 부민회의 이름으로 남대문 정거장 앞에 환영녹문(歡迎綠門)을 세웠다. 한국 최초로 지방자치라는 근대적인 정치제도의 도입을 표방한 단체였지만 <a>한일 병합 조약</a>으로 실패하고 만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조직 배경</span></a></li> <li><a><span>2</span> <span>상설단체화</span></a></li> <li><a><span>3</span> <span>시민, 자치단체화</span></a></li> <li><a><span>4</span> <span>활동 내역</span></a></li> <li><a><span>5</span> <span>평가</span></a></li> <li><a><span>6</span> <span>관련 항목</span></a></li> <li><a><span>7</span> <span>참고자료</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조직 배경</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한성부민회의 전신은 <a>1907년</a> 9월 <a>유길준</a>, 한성부윤 장헌식 등에 의해 비상설단체로 <b>대일본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b>(大日本皇太子殿下奉迎漢城府民會)로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훗날의 <a>다이쇼 천황</a>인 일본 황태자가 대한제국 시찰을 왔을 때 <a>한성부</a>를 보조하여 환영식을 준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본래는 <a>유길준</a>에 의해서 자치 목적으로 조직되었지만 <a>한성 부윤</a> <a>장헌식</a>(張憲植)은 이를 <a>1909년</a>에 방한하는 일본 황태자 다이쇼의 환영 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p><p>황태자 방한은 <a>대한제국 고종</a>을 강제 퇴위시킨 뒤 반일 감정이 일어나고 의병 항쟁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a>이토 히로부미</a>가 정치적 고려에 따라 계획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제국의 일부 세력들은 성대한 환영행사를 준비했다. 대일본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는 행사에 필요한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서울 지역의 실업인을 위주로 구성되었다. <a>일진회</a> 회원도 적지 않게 참여했으며, 민간 단체지만 한성부의 행사를 보조하는 것이 목적이라 관제 단체의 성격도 있었다. </p><p>총리대신 <a>이완용</a>, 농상공부 대신 <a>송병준</a>, 법부 대신 <a>조중응</a>이 고문으로 참여했고, 위원장은 한성부윤 <a>장헌식</a>, 부회장은 <a>한성농공은행</a> 이사 <a>홍긍섭</a>이었다. 주요 활동은 서울을 몇 개 지역으로 나누어 지역마다 황태자를 환영하고 제등할 사람을 동원한 것과, 황태자에게 봉헌할 선물을 마련해 전달한 것 등이다. </p> <h2><span></span><span>상설단체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대일본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는 일시적으로 설치된 비상설단체였기 때문에 황태자 환영행사를 마친 뒤에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a>1908년</a> 3월에 <a>대한제국 순종</a>의 생일을 기념하는 건원절 행사를 거치면서 점차 한성부의 행사를 주관하는 상설단체로 변화했다. 이때는 <a>민영휘</a>가 회장을 맡고 <a>이지용</a>, <a>윤웅렬</a>이 부장을 맡아 행사를 치렀다. </p> <h2><span></span><span>시민, 자치단체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1908년 <a>5월 8일</a>에 지방자치 기관을 표방하는 한성부민회가 <a>유길준</a> 등에 의해 종로 상공회의소에서 발족되었다. 이때 회장은 <a>유길준</a>이 맡았다. 1908년 11월부터는 <a>유길준</a>, <a>유성준</a>, <a>윤효정</a> 등에 의해 본격적인 자치운동단체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p><p>1908년 11월 28일자의 '한성부민회창립취지서'에서는, 이 단체의 창립취지를 "현금(現今) 정황으로는 법률상 자치단체가 될 수 없으므로, 이에 민회(民會) 창립하는 취지를 창(唱)해 자치에 점진하는 문로(門路)를 준비함이라."고 밝혔다. 또한, "한 나라의 정치 기초가 민간자치제 위에 서고, 자치제는 문화·경제의 정도에 따라서 그 모습을 나타내니, 우리 한성은 제국의 수부(首府)라 사방이 지켜보는 땅에 있은 즉, 이번에 유신하는 운을 만나서 무릇 백가지 경장(更張)하는 규모를 솔선해 지방에 보여줌이 실로 우리 부민의 천직이라."고 하였다. 법률상으로는 당시 지방자치제가 허용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우선 민회를 세워 자치로 나가는 길을 열겠다는 것이다. 이로써 각 지방에도 같은 성격의 자치운동단체가 설립되도록 유도하겠다는 취지였다. </p> <h2><span></span><span>활동 내역</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한성부민회는 처무 규정에도 나타나 있지만 당시 교육문제와 위생문제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특히,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한성부민회조례'에서 '사립학교에 관한 규정'을 두어 특별한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부내(府內) 각 방에 설립되는 사립학교의 상황을 보고받고, 사립학교 폐지는 이 단체의 승인을 얻어야만 가능하다고 규정해 놓았다. 한성부민회는 이후 가로수 심기, 도로 청소, 자기 집 앞 청결하게 하기, 손님과 행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집안팎 정리정돈을 할 것을 캠페인으로 내세웠다. 한성부민회는 이듬해 이토가 <a>안중근</a>에게 살해되었을 때 <a>국민대추도회</a>를 열고 유길준은 한성부민회를 대표하여 일본에 건너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p><p>'한성부민회규약' 제1조에 의하면 "본회는 한성부 주거민이 그 공동편익을 증진하며, 자치사상을 계발하기 위해 협동일치하는 합의로 성립하였다."라고 요약하였다. 이어 주민자치단체로 재출발 할 당시의 관계 자료로 '한성부민회창립취지서', '한성부민회창립이유서', '한성부민회규약', '한성부민회처무규정', '한성부민회조례', '방회(坊會)규약', '한성부민회의원선거규칙', '한성부민회의회규칙' 등이 《한성부민회규약》이라는 제목의 책자로 편집되어 남아 있다. 규약에 하부 조직으로 방회를, 그리고 의결기관으로 한성부민회의를 두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방회나 의회는 당시 실제로 조직되지는 않았고, 향후 앞으로 <a>지방 자치제도</a>가 법률적으로도 시행 가능하게 될 때를 대비해 만들어둔 것이다. </p><p><a>1909년</a> <a>10월</a> <a>이토 히로부미</a>가 <a>안중근</a>(安重根)에게 사살되자 친일파들이 각종 추도회를 열었을 당시 이 단체도 참여하였다. 당시에는 1908년 이후 회장을 맡아오던 유길준이 물러나고 윤태정(尹泰定)이 회장대리로 있었다. </p> <h2><span></span><span>평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한국 최초로 지방자치라는 근대적인 정치제도의 도입을 표방하였지만 결국 <a>1910년</a>(융희 4년) <a>10월 1일</a>의 <a>한일 병합 조약</a>으로 부민회의 자치제 도입 운동은 실패하고 만다. </p> <h2><span></span><span>관련 항목</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장헌식</a></li> <li><a>유길준</a></li></ul> <h2><span></span><span>참고자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cite>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27일). &#12298;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12299;. 서울: 민족문제연구소. 34-37쪽쪽. <a>ISBN</a>&#160;<a>8995330724</a>.</cite><span><span>&#160;</span></span></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성부민회&amp;oldid=24007132</a>"</div> <div><div><a>분류</a>: <ul><li><a>대한제국의 정치 단체</a></li><li><a>1908년 설립</a></li><li><a>유길준</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ul> <div><span><a>링크 추가</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4월 10일 (수) 22:1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이토가 안중근에게 살해되었을 때 국민대추도회를 열었던 단체의 이름은 무엇인가?
한성부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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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토가 안중근에게 살해되었을 때 국민대추도회를 열었던 단체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토가 안중근에게 살해되었을 때 국민대추도회를 열었던 한성부민회를 대표해 일본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한 인물의 이름은 무엇인가?", "교육문제와 위생문제에 관심을 갖고, 가로수 심기, 도로 청소, 집안팎 정리정돈 등의 캠페인을 열었던 단체의 이름은 무엇인가?", "한성부민회가 사립학교에 관한 규정을 두었던 문서는?", "한성부민회 대표로 이토를 문상했던 사람은?", "한성부민회가 사립학교에 관한 규정을 둔 곳은?", "한성부민회를 대표해 일본에서 이토의 장례식에 참석한 인물은?", "한성부민회가 주민자치단체로 재출발 할 당시의 한성부민회창립취지서, 한성부민회처무규정, 한성부민회조례 등의 관계 자료를 편집하여 만든 책자의 이름은 무엇인가?", "한성부민회는 하부 조직으로 방회, 의결 기관으로는 한성부민회의를 두기로 되어 있었으나 실제로 조직되지는 않았으며 그 이유는 방회와 의회가 당시를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이 제도가 법률적으로 시행될 때를 대비한 것이기 때문인데, 이때 이 제도의 이름은 무엇인가?", "한성부민회의 하부 조직으로 계획되었던 것은?", "한성부민회의 의결기관으로 계획되었던 것은?", "한성부민회에서 여러 규약들을 모아 편집한 책자의 제목은?", "한성부민회규약에 기록된 한성부민회의 의결기관은?" ]
<!DOCTYPE html> 한성부민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성부민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는 1907년(융희 2년) 9월 유길준 등에 의해 자치단체를 지향하면서 한성부에서 결성된 대한제국의 정치 단체이다. 초기의 한성부민회는 반관반민의 성격을 띠게 되었고, 초대 회장은 장헌식이 맡았다. 이때 유길준 등은 기부금을 모집해 부민회의 이름으로 남대문 정거장 앞에 환영녹문(歡迎綠門)을 세웠다. 한국 최초로 지방자치라는 근대적인 정치제도의 도입을 표방한 단체였지만 한일 병합 조약으로 실패하고 만다. 목차 1 조직 배경 2 상설단체화 3 시민, 자치단체화 4 활동 내역 5 평가 6 관련 항목 7 참고자료 조직 배경[편집] 한성부민회의 전신은 1907년 9월 유길준, 한성부윤 장헌식 등에 의해 비상설단체로 대일본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大日本皇太子殿下奉迎漢城府民會)로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훗날의 다이쇼 천황인 일본 황태자가 대한제국 시찰을 왔을 때 한성부를 보조하여 환영식을 준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본래는 유길준에 의해서 자치 목적으로 조직되었지만 한성 부윤 장헌식(張憲植)은 이를 1909년에 방한하는 일본 황태자 다이쇼의 환영 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황태자 방한은 대한제국 고종을 강제 퇴위시킨 뒤 반일 감정이 일어나고 의병 항쟁이 잇따르는 상황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정치적 고려에 따라 계획한 것이었다. 이에 대한제국의 일부 세력들은 성대한 환영행사를 준비했다. 대일본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는 행사에 필요한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서울 지역의 실업인을 위주로 구성되었다. 일진회 회원도 적지 않게 참여했으며, 민간 단체지만 한성부의 행사를 보조하는 것이 목적이라 관제 단체의 성격도 있었다. 총리대신 이완용, 농상공부 대신 송병준, 법부 대신 조중응이 고문으로 참여했고, 위원장은 한성부윤 장헌식, 부회장은 한성농공은행 이사 홍긍섭이었다. 주요 활동은 서울을 몇 개 지역으로 나누어 지역마다 황태자를 환영하고 제등할 사람을 동원한 것과, 황태자에게 봉헌할 선물을 마련해 전달한 것 등이다. 상설단체화[편집] 대일본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는 일시적으로 설치된 비상설단체였기 때문에 황태자 환영행사를 마친 뒤에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으나, 1908년 3월에 대한제국 순종의 생일을 기념하는 건원절 행사를 거치면서 점차 한성부의 행사를 주관하는 상설단체로 변화했다. 이때는 민영휘가 회장을 맡고 이지용, 윤웅렬이 부장을 맡아 행사를 치렀다. 시민, 자치단체화[편집] 1908년 5월 8일에 지방자치 기관을 표방하는 한성부민회가 유길준 등에 의해 종로 상공회의소에서 발족되었다. 이때 회장은 유길준이 맡았다. 1908년 11월부터는 유길준, 유성준, 윤효정 등에 의해 본격적인 자치운동단체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 11월 28일자의 '한성부민회창립취지서'에서는, 이 단체의 창립취지를 "현금(現今) 정황으로는 법률상 자치단체가 될 수 없으므로, 이에 민회(民會) 창립하는 취지를 창(唱)해 자치에 점진하는 문로(門路)를 준비함이라."고 밝혔다. 또한, "한 나라의 정치 기초가 민간자치제 위에 서고, 자치제는 문화·경제의 정도에 따라서 그 모습을 나타내니, 우리 한성은 제국의 수부(首府)라 사방이 지켜보는 땅에 있은 즉, 이번에 유신하는 운을 만나서 무릇 백가지 경장(更張)하는 규모를 솔선해 지방에 보여줌이 실로 우리 부민의 천직이라."고 하였다. 법률상으로는 당시 지방자치제가 허용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우선 민회를 세워 자치로 나가는 길을 열겠다는 것이다. 이로써 각 지방에도 같은 성격의 자치운동단체가 설립되도록 유도하겠다는 취지였다. 활동 내역[편집] 한성부민회는 처무 규정에도 나타나 있지만 당시 교육문제와 위생문제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특히, 교육문제에 대해서는 '한성부민회조례'에서 '사립학교에 관한 규정'을 두어 특별한 관심을 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부내(府內) 각 방에 설립되는 사립학교의 상황을 보고받고, 사립학교 폐지는 이 단체의 승인을 얻어야만 가능하다고 규정해 놓았다. 한성부민회는 이후 가로수 심기, 도로 청소, 자기 집 앞 청결하게 하기, 손님과 행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집안팎 정리정돈을 할 것을 캠페인으로 내세웠다. 한성부민회는 이듬해 이토가 안중근에게 살해되었을 때 국민대추도회를 열고 유길준은 한성부민회를 대표하여 일본에 건너가 장례식에 참석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한성부민회규약' 제1조에 의하면 "본회는 한성부 주거민이 그 공동편익을 증진하며, 자치사상을 계발하기 위해 협동일치하는 합의로 성립하였다."라고 요약하였다. 이어 주민자치단체로 재출발 할 당시의 관계 자료로 '한성부민회창립취지서', '한성부민회창립이유서', '한성부민회규약', '한성부민회처무규정', '한성부민회조례', '방회(坊會)규약', '한성부민회의원선거규칙', '한성부민회의회규칙' 등이 《한성부민회규약》이라는 제목의 책자로 편집되어 남아 있다. 규약에 하부 조직으로 방회를, 그리고 의결기관으로 한성부민회의를 두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방회나 의회는 당시 실제로 조직되지는 않았고, 향후 앞으로 지방 자치제도가 법률적으로도 시행 가능하게 될 때를 대비해 만들어둔 것이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安重根)에게 사살되자 친일파들이 각종 추도회를 열었을 당시 이 단체도 참여하였다. 당시에는 1908년 이후 회장을 맡아오던 유길준이 물러나고 윤태정(尹泰定)이 회장대리로 있었다. 평가[편집] 한국 최초로 지방자치라는 근대적인 정치제도의 도입을 표방하였지만 결국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의 한일 병합 조약으로 부민회의 자치제 도입 운동은 실패하고 만다. 관련 항목[편집] 장헌식 유길준 참고자료[편집]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04년 12월 27일).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서울: 민족문제연구소. 34-37쪽쪽. ISBN 8995330724.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성부민회&amp;oldid=24007132" 분류: 대한제국의 정치 단체1908년 설립유길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4월 10일 (수) 22:1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한성부민회 요약 **설립 배경** - **연도**: 1907년 (융희 2년) 9월 - **창립자**: 유길준, 장헌식 등 - **목적**: 자치단체 지향, 대한제국의 정치 단체 **조직 및 발전** - **초기 형태**: 비상설단체 (대일본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 - **상설단체화**: 1908년 3월, 건원절 행사 이후 상설단체로 변화 - **정식 발족**: 1908년 5월 8일, 종로 상공회의소에서 유길준 회장으로 발족 **주요 활동** - **자치운동**: 자치단체 설립을 위한 기초 작업 - **교육 및 위생 문제**: 사립학교 규정 제정, 지역 청결 캠페인 - **사회적 참여**: 안중근 장례식 참석 등 **평가** - **성과**: 한국 최초의 지방자치 도입 시도 - **결과**: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자치제 도입 실패 **관련 인물** - **장헌식** - **유길준** **참고자료** -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2004). 《일제협력단체사전 - 국내 중앙편》. 이 문서는 한성부민회의 역사와 활동을 간결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이 글의 요지를 정리하되, 독자가 빠르게 스캔할 수 있도록 핵심 키워드를 굵게 표시하거나 줄글과 bullet 형식을 혼합해줘. 핵심 정보가 잘 드러나야 해.
박용환
https://ko.wikipedia.org/wiki/박용환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박용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박용환</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박용환</b>(朴容煥, <a>1878년</a> <a>7월 1일</a> ~&#160;?)은 <a>일제 강점기</a>의 공작원으로, 본적은 <a>경기도</a> <a>광주군</a> 경안면이다. 다른 이름으로 <b>박병일</b>(朴炳一), <b>박규환</b>(朴圭煥)이 있다. 본관은 <a>밀양</a>이다. </p>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경성부 종로에서 잡화업과 금융업을 경영했지만 사업이 실패하자 <a>1917년</a> 러시아 <a>블라디보스토크</a>로 이주했다. 포조흥신(浦潮興信)을 경영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 내 신한촌(新韓村) 유력자로 성장했으며, <a>일본의 시베리아 개입</a> 당시부터 일제 관헌의 밀정으로 활동했다. 1920년 3월 14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항일 독립 운동 세력으로부터 습격을 받기도 했다. </p><p><a>1920년</a> <a>4월 9일</a> 신한촌 조선인 유력자 7명과 함께 “어떠한 권유가 있어도 조선의 독립 운동에 절대 참여하지 않을 것, 일본과 일본군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에 노력하고 불리를 꾀하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을 것, 일본과 일본인에 호의를 가지고 선인(조선인)에 대해서는 반의(反意)를 갖지 않을 것, 항일 독립 세력을 일본 관헌에 밀고하는 역할 등에 적극 협력할 것” 등의 내용을 담은 서약서를 기쿠치 요시로(菊地義郞)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에게 제출했다. 또한 <a>조선총독부</a> 관료 야마자키 사네오(山崎眞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 등과 관계를 맺으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 단체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p><p><a>1921년</a> 블라디보스토크 재류 조선인민회 부회장으로 임명된 뒤부터 일본의 재러시아 조선인 통제 및 회유 정책에 적극 협력하는 한편 일본군에 군량미 등을 제공했다. <a>1922년</a> 12월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면서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a>1923년</a> <a>1월 25일</a> <a>사할린</a>으로 이주하게 된다. 일본의 사할린 개척 사업에 참여하는 동안 조선인 노동자들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식민지 대부금을 빌려서 사할린 농지를 개척하는 한편 개척 이익금의 일부를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과 학교 건립 등에 사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한 것이어서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p><p><a>1924년</a> <a>4월 26일</a> 가라후토(樺太)조선인공제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a>1929년</a> <a>9월 3일</a>에 실시된 가라후토 지방의회 선거에서 최다 득표를 얻어 혼토 정(本斗町) 의원에 당선되었다. <a>1936년</a>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민회 부회장 재직 시절 민회의 주요 사업이었던 이른바 '조선인 구제 사업'을 시행하던 도중 약 20,000엔의 손해를 보았다며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의 참고인이었던 일본인 서기관 야마자키 사네오(山崎眞雄)는 그를 일본의 재러시아 조선인 통제 및 회유 정책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고 밝혔으며, 군수나 <a>조선총독부 중추원</a> 참의까지 할 수 있는 업적을 낸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p><p><a>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a>의 해외 부문, <a>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a>가 발표한 <a>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a>에 포함되었다. </p> <h2><span></span><span>참고자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cite>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12296;박용환&#12297;. &#12298;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6&#12299;. 서울. 828~841쪽.</cite><span><span>&#160;</span></span></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박용환&amp;oldid=15835733</a>"</div> <div><div><a>분류</a>: <ul><li><a>1878년 태어남</a></li><li><a>몰년 미상</a></li><li><a>일제 강점기의 공작원</a></li><li><a>친일인명사전 수록자</a></li><li><a>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a></li><li><a>밀양 박씨</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ul> <div><span><a>링크 추가</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6년 2월 22일 (월) 23:3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박용환이 1923년 1월 25일 이주한 곳은?
사할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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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734
3,068
[ "박용환이 1923년 1월 25일 이주한 곳은?", "박용환이 1923년 1월 25일 어디로 이주하였나?", "박용환이 조선인 노동자를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일본으로부터 무엇을 빌렸는가?" ]
<!DOCTYPE html> 박용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박용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박용환(朴容煥, 1878년 7월 1일 ~ ?)은 일제 강점기의 공작원으로, 본적은 경기도 광주군 경안면이다. 다른 이름으로 박병일(朴炳一), 박규환(朴圭煥)이 있다. 본관은 밀양이다. 생애[편집] 경성부 종로에서 잡화업과 금융업을 경영했지만 사업이 실패하자 1917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 포조흥신(浦潮興信)을 경영하면서 블라디보스토크 내 신한촌(新韓村) 유력자로 성장했으며,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 당시부터 일제 관헌의 밀정으로 활동했다. 1920년 3월 14일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항일 독립 운동 세력으로부터 습격을 받기도 했다. 1920년 4월 9일 신한촌 조선인 유력자 7명과 함께 “어떠한 권유가 있어도 조선의 독립 운동에 절대 참여하지 않을 것, 일본과 일본군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에 노력하고 불리를 꾀하는 행위는 절대 하지 않을 것, 일본과 일본인에 호의를 가지고 선인(조선인)에 대해서는 반의(反意)를 갖지 않을 것, 항일 독립 세력을 일본 관헌에 밀고하는 역할 등에 적극 협력할 것” 등의 내용을 담은 서약서를 기쿠치 요시로(菊地義郞)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에게 제출했다. 또한 조선총독부 관료 야마자키 사네오(山崎眞雄),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 등과 관계를 맺으면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 단체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1921년 블라디보스토크 재류 조선인민회 부회장으로 임명된 뒤부터 일본의 재러시아 조선인 통제 및 회유 정책에 적극 협력하는 한편 일본군에 군량미 등을 제공했다. 1922년 12월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면서 신변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1923년 1월 25일 사할린으로 이주하게 된다. 일본의 사할린 개척 사업에 참여하는 동안 조선인 노동자들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식민지 대부금을 빌려서 사할린 농지를 개척하는 한편 개척 이익금의 일부를 조선인 노동자들을 위한 주택과 학교 건립 등에 사용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착취하여 자신의 이득을 챙기기 위한 것이어서 많은 조선인 노동자들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1924년 4월 26일 가라후토(樺太)조선인공제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으며 1929년 9월 3일에 실시된 가라후토 지방의회 선거에서 최다 득표를 얻어 혼토 정(本斗町) 의원에 당선되었다. 1936년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민회 부회장 재직 시절 민회의 주요 사업이었던 이른바 '조선인 구제 사업'을 시행하던 도중 약 20,000엔의 손해를 보았다며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이 소송의 참고인이었던 일본인 서기관 야마자키 사네오(山崎眞雄)는 그를 일본의 재러시아 조선인 통제 및 회유 정책에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고 밝혔으며, 군수나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까지 할 수 있는 업적을 낸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의 해외 부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참고자료[편집]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박용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6》. 서울. 828~841쪽.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박용환&amp;oldid=15835733" 분류: 1878년 태어남몰년 미상일제 강점기의 공작원친일인명사전 수록자대한민국 정부 발표 친일반민족행위자밀양 박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6년 2월 22일 (월) 23:3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문단 번호 | 핵심 내용 | 키워드 | |------------|--------------------------------------------------------------------------|----------------------------| | 1 | 박용환의 기본 정보: 출생일, 본적, 다른 이름, 본관 | 박용환, 1878년, 밀양 | | 2 | 경성부에서 사업 실패 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 일본의 밀정으로 활동 | 사업 실패, 밀정, 블라디보스토크 | | 3 | 독립 운동 세력에 대한 서약서 제출 및 일본 관헌과의 관계 형성 | 서약서, 일본 관헌, 밀고 | | 4 | 일본의 통제 및 회유 정책에 협력, 군량미 제공 | 통제, 회유, 군량미 | | 5 | 사할린으로 이주 후 조선인 노동자 착취 및 비난 | 사할린, 착취, 비난 | | 6 | 가라후토 조선인공제회 부회장 및 지방의회 의원 당선 | 가라후토, 의원, 당선 | | 7 | 조선총독부에 손해배상 청구소송, 친일 행위로 평가 | 손해배상, 친일, 평가 | | 8 | 친일인명사전 및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포함 | 친일, 반민족행위, 명단 | ### 글의 흐름 요약 글은 박용환의 생애와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의 초기 사업 실패 후 일본의 밀정으로 활동하게 되는 과정, 독립 운동 세력에 대한 배신, 일본의 통제 정책에 협력하는 모습, 사할린에서의 노동자 착취, 그리고 정치적 활동과 친일 행위로 평가받는 내용을 다룹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친일인명사전과 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어 그의 역사적 평가가 부정적임을 강조합니다.
이 글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표 형식으로 요약해줘. 예: {문단 번호, 핵심 내용, 키워드}. 글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요약 마지막에 간단히 설명해줘.
한승호
https://ko.wikipedia.org/wiki/한승호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한승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한승호</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한승호</b>(韓承鎬, 1924년 3월 10일~2010년 1월 28일). <a>대한민국</a>의 <a>국악인</a>이다. <a>판소리</a> 명창으로 광주판 서편제라 불리는 <a>김채만</a>제의 소리를 보유한 몇 안되는 명창으로,《<a>적벽가</a>》와 《<a>심청가</a>》에 능했다. 《<a>적벽가</a>》의 완창 능력을 인정받아 <a>1976년</a> 6월 30일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a>적벽가</a>》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국극단이나 창극단에서의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오직 전통 판소리 활동을 고집하였고, 2003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투병하다가 2010년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p>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전남</a> <a>광주(光州)</a>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한갑주(韓甲珠)이다. 그의 집안은 <a>가야금</a>, <a>대금</a>의 명인이었던 조부 <a>한덕만</a>(韓德萬, 1867년~1934년)의 대에서 이름을 얻기 시작하였다. 부친 <a>한성태</a>(韓成泰, 1890년~1931년) 역시 가야금 명인,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얻었다. 또한, 첫째 형인 <a>한영호</a>(?~1946년, 본명 한갑순韓甲順)는 해방을 전후하여 지방 창극단에서 활동한 바 있고, 둘째 형 <a>한갑득</a>(韓甲得, 1919년~1987년) 또한 <a>거문고</a> <a>산조</a>의 명인으로 이름이 높아 <a>국가무형문화재</a> 제16호 <a>거문고</a> <a>산조</a>의 예능보유자였다. 뿐만 아니라 방계로서 아쟁, 호적의 명인 <a>한일섭</a>(韓一燮, 1929년~1973년), 명무 <a>한진옥</a>(韓振玉, 1911년~1991년), 판소리 명창 <a>한애순</a>(韓愛順, 1924년~)과도 일족이다. </p><p>부친 한성태는 중앙에서 크게 활약하지는 않았으나,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고,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a>장판개</a>(張判介, 1985년~1937년), <a>김정문</a>(金正文, 1987년~1935년), <a>박동실</a>(朴東實, 1897년~1968년) 등과 호형호제 하면서 자주 교류하였다.<sup><a>&#91;1&#93;</a></sup><sup><a>&#91;2&#93;</a></sup> 한승호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판소리를 접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박종원(1894년~1962년), 성원목((成元睦, 1912년~1969년), 장판개에게 판소리 수업을 받았다. 이 가운데 박종원과 성원목은 모두 김채만제 소리를 했고,<sup><a>&#91;3&#93;</a></sup> 한승호는 이 가운데 박종원의 목기교를 많이 배웠다고 한다. 다만 장판개만은 <a>송만갑</a>의 제자였고 본바탕이 동편제 송판 소리를 하였으므로 그 계통이 달랐는데, 장판개에게는 제비노정기 정도를 배웠다고 한다. </p><p>15~6세 때에는 박동실의 문하로 들어갔는데, 이 시기부터 바탕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박동실은 본래 김채만의 수제자였던 인물로 서편제 명창인데, 박동실에게 처음 배운 것은 《<a>심청가</a>》이며, 또한 성음으로 아귀성<sup><a>&#91;4&#93;</a></sup>을 배웠다. 비슷한 시기에 <a>정남희</a>의 추천으로 서울로 상경해 <a>송만갑</a> 문하에 들어가서 또한 《심청가》와《적벽가》,《흥보가》,《춘향가》를 배우고, 또한 귀동냥으로 《수궁가》를 학습했다. 또한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 김창환 등 당대 명창들의 소리를 귀동냥하여 이를 따라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비로소 제대로 된 판소리 학습을 할 수 있었으며, 송만갑에 의해 고제목인 각구녘질(각구목질, 군목질)<sup><a>&#91;5&#93;</a></sup>을 배웠다. 이것은 이후 한승호의 판소리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기둥이 되었다. 1930년대 후반, 정정렬과 송만갑이 잇달아 사망하자, 다시 낙향하였다. </p><p>한승호는 이때 김채만의 소리를 알고 있는 이들을 찾아다니면서 김채만제 소리를 수련하기 시작하였는데, '상쟁이 영감'이라거나 '맨밥노인'과 같은 무명의 촌로를 찾아 그들의 구술이나 묘사를 듣고 수련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때 당시 아편으로 목이 심하게 상했던 박종원을 다시 찾아 수련하였는데, 이 시기에 한승호는 탁월한 붙임새 기교를 연구하였고, 다시 박동실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이로부터 1945년 해방, 1950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오랜기간 독공을 하며 간간히 공연단에 참여해 소리를 했다. </p><p>1962년, <a>김연수</a>의 주도로 국립창극단이 결성되자, 평단원으로 들어갔으나 창극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고, 1974년 국립국악원 연주단원으로 자리를 옮겨 그 해에 처음으로 완창 발표를 했는데, 《심청가》를 발표하였다. 뒤이어 1976년 《적벽가》를 완창하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창극에 관여하지 않고 관여한다 해도 엑스트라로 참여하였기 때문에 점차 무대에 서지 못했고, 1990년대에는 무대에서 거의 은퇴하다시피 하였으나, 1994년을 기점으로 다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심청가》와 《적벽가》이외의 소리를 잘 하지 않았고, 문하에 제자를 두지 못하였다. </p><p>2003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투병하였다가 2006년 다시 활동을 재개하는 등 마지막까지 정통 판소리 무대를 고집하며 자리에 섰으나 2010년,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p> <h2><span></span><span>예술세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한승호는 박종원, 성원목, 장판개, 박동실, 송만갑 등 여러 스승에게서 소리를 배웠으나 역시 김채만의 소리제를 중심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형성시켰다. 김채만의 소리는 이날치에게서 이어지는 서편제의 한 일파로서 오장육부를 긁어내는듯 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한승호는 걸걸한 성음으로 힘찬 아귀성과 다양한 성음의 각구녘질을 활용하여 유사한 느낌의 소리를 했다. 또한 김채만제 특유의 붙임새를 잘 구사하였는데, 때문에 장단의 속을 매우 잘 알았고, 그의 소리를 맞추어 주는 고수가 많지 않았으며, 당시 젊은 고수들은 그의 북을 치는데 있어서 '진땀 깨나 흘렸다.'고 한다. 발음을 분명하게 내기 보다는 입안에서 '씹어서' 내는 편이었는데, 채보하기에 어려운 단점이 있으나 대신 음악을 더욱 더 풍부하게 하여 고제 판소리를 따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음색이 걸걸하여 남자다운 구석이 있었고, 여느 동편제 소리꾼보다 훨씬 힘차게 소리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애절한 대목 또한 탁월하였다. </p><p>다만 사설이 소략하고 다소간 이면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으며, 소리를 길게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sup><a>&#91;6&#93;</a></sup> 한계로 꼽혔다. 또한 《적벽가》와 《심청가》이외에는 다른 소리는 잘 하지 않았는데, 때문에 김채만제의 다른 바탕 소리는 세상에 자주 선보이지 못했다. 그나마 토막소리로 공연한 《춘향가》의 일부와 《흥보가》의 완창이 남아 있을 뿐이다. </p><p>그의 장기는 《<a>심청가</a>》와 문화재로 지정된 《<a>적벽가</a>》이다. 1974년 명동 <a>국립극장</a>에서 가졌던 첫 완창발표회에서도 심청가를 불렀고, 1980년 <a>김명환</a>의 북 반주로 《<a>심청가</a>》의 녹음도 남아 있다. 《<a>적벽가</a>》는 문화재 지정 이전에도 자주 불렀지만 그 이후에 더욱 자주 불렀는데, 1980년 <a>김득수</a>의 북 반주로 녹음한 바 있으며, <a>국립문화재연구소</a>의 기획으로 천대용의 북 반주로도 녹음한 바 있다. 이 외에 박동실이 남긴 창작 판소리를 몇곡 부른 적이 있는데 이 또한 소수나마 녹음이 남아 있고,《흥보가》의 국립극장 완창 공연 실황 또한 남아 있다.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김정문, 장판개, 박동실씨 등 그때 이름이 높던 소리꾼들이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분들을 형님이라 부르면서 모시던 처지였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분들을 찾아다니며 두루 공부 할 수 있었지요. 그 중에서도 장판개 선생은 나를 자식처럼 귀여워해 주셔서 큰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댁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김치곤,「반드름제맥 이어 판소리 외길, 후계자 양성만이 유일한 소망」,『월간 문화재』1994년 5월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4, p.1.)</span> </li> <li><span><a>↑</a></span> <span>이들 가운데 장판개가 가장 연상으로 한성태 보다 5살 위이며, 그 다음이 김정문으로 한성태 보다 3살 위이고, 박동실은 한성태보다 7살이 연하이다.</span> </li> <li><span><a>↑</a></span> <span>한승호는 성원목의 경우에는 본래 김창환의 제자이며 김채만에게는 배웠던 바 없으나 김채만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보형·성기련,「한승호 명창 대담자료」,『판소리연구』제16집, 판소리학회, 2003, p.368~369.)</span> </li> <li><span><a>↑</a></span> <span>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목청을 좌우로 젖혀가며 힘차게 내는 성음이다.</span> </li> <li><span><a>↑</a></span> <span>"군목질이라는 것은 우조로 첨에 해 가지고 인자 평계면으로 갔다가 또 우조로 왔다가 평조로 갔다가 또 계면, 단계면으로 왔다가 나중엔 결국 저 진계면까지 갑니다. 시나우, 신제, 어정 성음까지 다 가요. 그래 갖고는 도로 인자 평계면으로 와 갖구는 도로 단계면으로. 인자 도로 우조로 끝얼 지어 버립니다. 처음에 우조럴 내 갖구는 별짓 다 하다가 도로 결국은 우조 그 청으로 끝얼 내요. 그래서 그것얼 각구목질이라고 하제. 각각, 각자 여러 가지 목소리럴 건드려, 가지가지로." (김해숙•박종권•이은자,『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 뿌리깊은나무, 1991, p.73.)</span> </li> <li><span><a>↑</a></span> <span>명창 박동진은 한승호의 소리는 성음이 좋지만 지나치게 짧은 것이 흠이라고 하였다.</span> </li> </ol></div> <div><small><a><img></a><a><img></a> 이 문서에는 <a>다음커뮤니케이션</a>(현 <a>카카오</a>)에서 <a>GFDL</a> 또는 <a>CC-SA</a> 라이선스로 배포한 <a>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a>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small></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승호&amp;oldid=21652145</a>"</div> <div><div><a>분류</a>: <ul><li><a>대한민국의 국악인</a></li><li><a>광주광역시 출신</a></li><li><a>한국의 국악인</a></li><li><a>판소리 명창</a></li><li><a>1924년 태어남</a></li><li><a>2010년 죽음</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ul> <div><span><a>링크 추가</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8년 6월 28일 (목) 14:1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한승호가 목기교를 주로 배웠던 사람은?
박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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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승호가 목기교를 주로 배웠던 사람은?", "한승호가 제비노정기를 배운 사람은?", "한승호는 판소리 수업에서 박종원에게 무엇을 많이 배웠는가?", "장판개의 스승은 누구인가?", "박종원과 성원목이 낼 수있는 소리는?", "장판개의 스승은?", "장판개의 계통이 한승호와 다른이유는?", "한승호가 15-16세 때 입문한 스승은?", "한승호가 박동실에게 처음 배운 바탕소리는?", "한승호가 박동실에게 처음 배운 것은?", "한승호가 송만갑 문하에 들어가 귀동냥으로 배운 것은?", "한승호가 15세쯤 어떤 스승 밑으로 들어갔는가?", "정정렬과 송만갑이 사망한 시대는 1930년대 초반, 중반, 후반 중 무엇인가?", "한승호가 아귀성과 각구녘질을 활용하여 계승한 목소리의 주인은?", "김채만에게 서편제 일파의 소리를 물려준 사람은?", "여러 스승에게 소리를 배운 한승호는 누구의 소리제를 중심으로 예술 세계를 형성시켰는가?", "발음을 씹어서 내는 한승호의 판소리는 무엇을 하기에 어려운 단점이 있는가?", "많은 스승 중 한승호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구축시키는데 도움을 준 스승은?", "한승호가 따르는 판소리의 이름은?" ]
<!DOCTYPE html> 한승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한승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한승호(韓承鎬, 1924년 3월 10일~2010년 1월 28일). 대한민국의 국악인이다. 판소리 명창으로 광주판 서편제라 불리는 김채만제의 소리를 보유한 몇 안되는 명창으로,《적벽가》와 《심청가》에 능했다. 《적벽가》의 완창 능력을 인정받아 1976년 6월 30일 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국극단이나 창극단에서의 활동은 거의 하지 않고 오직 전통 판소리 활동을 고집하였고, 2003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투병하다가 2010년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생애[편집] 전남 광주(光州)의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한갑주(韓甲珠)이다. 그의 집안은 가야금, 대금의 명인이었던 조부 한덕만(韓德萬, 1867년~1934년)의 대에서 이름을 얻기 시작하였다. 부친 한성태(韓成泰, 1890년~1931년) 역시 가야금 명인,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을 얻었다. 또한, 첫째 형인 한영호(?~1946년, 본명 한갑순韓甲順)는 해방을 전후하여 지방 창극단에서 활동한 바 있고, 둘째 형 한갑득(韓甲得, 1919년~1987년) 또한 거문고 산조의 명인으로 이름이 높아 국가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 산조의 예능보유자였다. 뿐만 아니라 방계로서 아쟁, 호적의 명인 한일섭(韓一燮, 1929년~1973년), 명무 한진옥(韓振玉, 1911년~1991년), 판소리 명창 한애순(韓愛順, 1924년~)과도 일족이다. 부친 한성태는 중앙에서 크게 활약하지는 않았으나, 판소리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고,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장판개(張判介, 1985년~1937년), 김정문(金正文, 1987년~1935년), 박동실(朴東實, 1897년~1968년) 등과 호형호제 하면서 자주 교류하였다.[1][2] 한승호는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판소리를 접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를 전후하여 박종원(1894년~1962년), 성원목((成元睦, 1912년~1969년), 장판개에게 판소리 수업을 받았다. 이 가운데 박종원과 성원목은 모두 김채만제 소리를 했고,[3] 한승호는 이 가운데 박종원의 목기교를 많이 배웠다고 한다. 다만 장판개만은 송만갑의 제자였고 본바탕이 동편제 송판 소리를 하였으므로 그 계통이 달랐는데, 장판개에게는 제비노정기 정도를 배웠다고 한다. 15~6세 때에는 박동실의 문하로 들어갔는데, 이 시기부터 바탕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박동실은 본래 김채만의 수제자였던 인물로 서편제 명창인데, 박동실에게 처음 배운 것은 《심청가》이며, 또한 성음으로 아귀성[4]을 배웠다. 비슷한 시기에 정남희의 추천으로 서울로 상경해 송만갑 문하에 들어가서 또한 《심청가》와《적벽가》,《흥보가》,《춘향가》를 배우고, 또한 귀동냥으로 《수궁가》를 학습했다. 또한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 김창환 등 당대 명창들의 소리를 귀동냥하여 이를 따라하기도 하였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비로소 제대로 된 판소리 학습을 할 수 있었으며, 송만갑에 의해 고제목인 각구녘질(각구목질, 군목질)[5]을 배웠다. 이것은 이후 한승호의 판소리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기둥이 되었다. 1930년대 후반, 정정렬과 송만갑이 잇달아 사망하자, 다시 낙향하였다. 한승호는 이때 김채만의 소리를 알고 있는 이들을 찾아다니면서 김채만제 소리를 수련하기 시작하였는데, '상쟁이 영감'이라거나 '맨밥노인'과 같은 무명의 촌로를 찾아 그들의 구술이나 묘사를 듣고 수련하였다고 한다. 한편 이때 당시 아편으로 목이 심하게 상했던 박종원을 다시 찾아 수련하였는데, 이 시기에 한승호는 탁월한 붙임새 기교를 연구하였고, 다시 박동실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이로부터 1945년 해방, 1950년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오랜기간 독공을 하며 간간히 공연단에 참여해 소리를 했다. 1962년, 김연수의 주도로 국립창극단이 결성되자, 평단원으로 들어갔으나 창극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고, 1974년 국립국악원 연주단원으로 자리를 옮겨 그 해에 처음으로 완창 발표를 했는데, 《심청가》를 발표하였다. 뒤이어 1976년 《적벽가》를 완창하여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창극에 관여하지 않고 관여한다 해도 엑스트라로 참여하였기 때문에 점차 무대에 서지 못했고, 1990년대에는 무대에서 거의 은퇴하다시피 하였으나, 1994년을 기점으로 다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심청가》와 《적벽가》이외의 소리를 잘 하지 않았고, 문하에 제자를 두지 못하였다. 2003년, 뇌경색으로 쓰러져 투병하였다가 2006년 다시 활동을 재개하는 등 마지막까지 정통 판소리 무대를 고집하며 자리에 섰으나 2010년, 노환으로 별세하였다. 예술세계[편집] 한승호는 박종원, 성원목, 장판개, 박동실, 송만갑 등 여러 스승에게서 소리를 배웠으나 역시 김채만의 소리제를 중심으로 자신의 예술 세계를 형성시켰다. 김채만의 소리는 이날치에게서 이어지는 서편제의 한 일파로서 오장육부를 긁어내는듯 하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한승호는 걸걸한 성음으로 힘찬 아귀성과 다양한 성음의 각구녘질을 활용하여 유사한 느낌의 소리를 했다. 또한 김채만제 특유의 붙임새를 잘 구사하였는데, 때문에 장단의 속을 매우 잘 알았고, 그의 소리를 맞추어 주는 고수가 많지 않았으며, 당시 젊은 고수들은 그의 북을 치는데 있어서 '진땀 깨나 흘렸다.'고 한다. 발음을 분명하게 내기 보다는 입안에서 '씹어서' 내는 편이었는데, 채보하기에 어려운 단점이 있으나 대신 음악을 더욱 더 풍부하게 하여 고제 판소리를 따른다는 평가를 받았다. 음색이 걸걸하여 남자다운 구석이 있었고, 여느 동편제 소리꾼보다 훨씬 힘차게 소리하는 경우도 많았으며, 애절한 대목 또한 탁월하였다. 다만 사설이 소략하고 다소간 이면에 맞지 않는 경우가 있었으며, 소리를 길게 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6] 한계로 꼽혔다. 또한 《적벽가》와 《심청가》이외에는 다른 소리는 잘 하지 않았는데, 때문에 김채만제의 다른 바탕 소리는 세상에 자주 선보이지 못했다. 그나마 토막소리로 공연한 《춘향가》의 일부와 《흥보가》의 완창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의 장기는 《심청가》와 문화재로 지정된 《적벽가》이다. 1974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가졌던 첫 완창발표회에서도 심청가를 불렀고, 1980년 김명환의 북 반주로 《심청가》의 녹음도 남아 있다. 《적벽가》는 문화재 지정 이전에도 자주 불렀지만 그 이후에 더욱 자주 불렀는데, 1980년 김득수의 북 반주로 녹음한 바 있으며,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기획으로 천대용의 북 반주로도 녹음한 바 있다. 이 외에 박동실이 남긴 창작 판소리를 몇곡 부른 적이 있는데 이 또한 소수나마 녹음이 남아 있고,《흥보가》의 국립극장 완창 공연 실황 또한 남아 있다. 각주[편집] ↑ "김정문, 장판개, 박동실씨 등 그때 이름이 높던 소리꾼들이 우리 집에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분들을 형님이라 부르면서 모시던 처지였기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분들을 찾아다니며 두루 공부 할 수 있었지요. 그 중에서도 장판개 선생은 나를 자식처럼 귀여워해 주셔서 큰아버지라 부르면서 그 댁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김치곤,「반드름제맥 이어 판소리 외길, 후계자 양성만이 유일한 소망」,『월간 문화재』1994년 5월호, 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4, p.1.) ↑ 이들 가운데 장판개가 가장 연상으로 한성태 보다 5살 위이며, 그 다음이 김정문으로 한성태 보다 3살 위이고, 박동실은 한성태보다 7살이 연하이다. ↑ 한승호는 성원목의 경우에는 본래 김창환의 제자이며 김채만에게는 배웠던 바 없으나 김채만의 소리를 듣고 그것을 가르쳤다고 한다. (이보형·성기련,「한승호 명창 대담자료」,『판소리연구』제16집, 판소리학회, 2003, p.368~369.) ↑ 입을 최대한 크게 벌리고 목청을 좌우로 젖혀가며 힘차게 내는 성음이다. ↑ "군목질이라는 것은 우조로 첨에 해 가지고 인자 평계면으로 갔다가 또 우조로 왔다가 평조로 갔다가 또 계면, 단계면으로 왔다가 나중엔 결국 저 진계면까지 갑니다. 시나우, 신제, 어정 성음까지 다 가요. 그래 갖고는 도로 인자 평계면으로 와 갖구는 도로 단계면으로. 인자 도로 우조로 끝얼 지어 버립니다. 처음에 우조럴 내 갖구는 별짓 다 하다가 도로 결국은 우조 그 청으로 끝얼 내요. 그래서 그것얼 각구목질이라고 하제. 각각, 각자 여러 가지 목소리럴 건드려, 가지가지로." (김해숙•박종권•이은자,『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 뿌리깊은나무, 1991, p.73.) ↑ 명창 박동진은 한승호의 소리는 성음이 좋지만 지나치게 짧은 것이 흠이라고 하였다.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한승호&amp;oldid=21652145" 분류: 대한민국의 국악인광주광역시 출신한국의 국악인판소리 명창1924년 태어남2010년 죽음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6월 28일 (목) 14:1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문단 번호 | 핵심 내용 | 키워드 | |------------|--------------------------------------------------------------------------|----------------------| | 1 | 한승호는 대한민국의 국악인으로, 판소리 명창이며, 《적벽가》와 《심청가》에 능함. | 한승호, 판소리, 명창 | | 2 | 전남 광주에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여러 스승에게 판소리를 배움. | 출생, 스승, 교육 | | 3 | 15세에 박동실 문하에서 바탕소리를 배우고, 서울로 상경하여 송만갑에게 배움. | 학습, 송만갑 | | 4 | 1962년 국립창극단에 평단원으로 들어가지만 창극에는 관여하지 않음. | 국립창극단, 활동 | | 5 | 1976년 《적벽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며, 1990년대에는 무대에서 은퇴. | 예능보유자, 은퇴 | | 6 | 한승호의 예술 세계는 김채만의 소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독특한 기교를 가짐. | 예술 세계, 기교 | | 7 | 《심청가》와 《적벽가》가 그의 장기로, 녹음도 남아 있음. | 장기, 녹음 | **글의 흐름 요약:** 문서는 한승호의 생애와 예술 세계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첫 번째 문단에서 그의 기본 정보와 업적을 소개하고, 두 번째 문단에서 그의 출생 배경과 교육 과정을 설명한다. 이어서 그의 활동 경과와 주요 성과를 다루며, 마지막으로 그의 예술적 특징과 장기를 강조한다. 전체적으로 한승호의 판소리 명창으로서의 여정과 그가 남긴 유산을 조명하고 있다.
이 글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표 형식으로 요약해줘. 예: {문단 번호, 핵심 내용, 키워드}. 글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요약 마지막에 간단히 설명해줘.
C4_식물
https://ko.wikipedia.org/wiki/C4_식물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C4 식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C4 식물</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d><div><img></div></td><td><span>이 문서의 내용은 <b><a>출처</a>가 분명하지 않습니다.</b><span><br>이 <span><a>문서를 편집</a></span>하여, <a>신뢰할 수 있는 출처</a>를 표기해 주세요. <a>검증</a>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a>토론 문서</a>에서 나누어 주세요.</span> <small>(2013년 7월)</small><span></span></span></td></tr></tbody></table> <p><b>C4 식물</b>은 4탄당(C4) 화합물이 관여하는 추가적인 경로(C4회로)를 이용해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가 부족한 환경에서도 <a>광합성</a>의 암반응(광비의존성반응)을 계속할 수 있는 식물을 말한다. 4탄당인 옥살산이 최초의 탄소고정산물이기 때문에 "C4"경로 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1966년에 2명의 호주 과학자들 (Hatch&amp; Slack)이 밝혀내었기 때문에 Hatch-Slack 경로라고도 불린다. <a>캘빈회로</a>(C3회로)의 Rubisco보다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를 효율적으로 고정하는 C4 식물의 탄소고정회로는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의 최초 고정 산물이 4탄당(C4)인 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대부분의 <a>열대</a> 혹은 <a>아열대</a>성 식물이 이 무리에 속한다. </p><p><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는 <a>공기</a> 중에 아주 적은 비율(0.03%)로 존재하기 때문에,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가 부족한 상태가 되면 캘빈회로에 있는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 고정효소인 Rubisco는 더 이상 탄소 고정을 하지 못하고 광호흡을 하게 된다. 반면에 C4식물은 Rubisco보다 강력한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고정효소인 PEP carboxylase(Phosphoenolpyruvate carboxylase)를 이용해 탄소 고정을 계속할 수 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C3 식물과 C4 식물의 차이</span></a></li> <li><a><span>2</span> <span>C4 식물의 분류</span></a> <ul> <li><a><span>2.1</span> <span>NADP-ME 형</span></a></li> <li><a><span>2.2</span> <span>NAD-ME 형</span></a></li> <li><a><span>2.3</span> <span>PEP-CK 형</span></a></li> </ul> </li> <li><a><span>3</span> <span>C4 식물의 진화</span></a></li> <li><a><span>4</span> <span>읽어보기</span></a></li> <li><a><span>5</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C3 식물과 C4 식물의 차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C3 식물에 비해 C4 식물은 더 건조하고 온도가 높으며 질소원이 부족한 곳에서도 광합성을 할 수 있다. 이는 C4가 C3와는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구조적인 차이와 대사 과정의 차이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p> <ul><li>구조적 차이</li></ul> <p>유관속(체관, 물관)은 2개의 세포층으로 둘러싸인 특징적인 잎구조를 가지고 있다. 안쪽 세포층은 유관속초(稍) 세포(bundle sheath cell;잎맥을 에워싸고 있는 세포)라고 불리며 그라나 구조가 부족한 대신 전분이 많이 저장되어 있다. 바깥쪽 세포층은 엽육세포라고 불리며 유관속초세포와는 반대로 전분 저장을 많이 하지 않지만 그라나 구조가 발달되어 있다. 안쪽과 바깥쪽의 같은 <a>엽록체</a>가 다른 형태를 나타낸다.<sup><a>&#91;1&#93;</a></sup> </p><p>C4 식물 잎의 횡단면을 관찰하면, 유관속초세포가 유관속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주위를 엽육 세포가 둘러싸고 있다. 이것은 마치 꽃다발처럼 보이므로, 크란츠 구조(Kranz anatomy)라고 한다.(Kranz<sup><a>&#91;2&#93;</a></sup>-Crown/Halo)라고 한다. C3 식물에서는 엽록체가 엽육 세포에는 많지만, 유관속초 세포에서는 적고 유관속초가 C4 식물만큼 두텁게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이러한 크란츠 구조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C4 식물에서는 유관속초 세포에도 엽록체가 많이 존재하며 유관속초가 두텁게 발달되어 크란츠 구조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p><p><a>C3 식물</a>에서는 <a>엽육세포</a>(葉肉細胞, leaf mesopyll cell)에서 직접 CO2 와 접촉이 일어나 광합성을 하지만, C4 식물의 엽육세포에서는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를 유기산의 형태로 고정하여 <a>유관속</a>초세포로 들여보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와 접촉하여 광합성을 진행하게 된다.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O_{2}}</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C3 식물에서는 광합성이 일어나는 곳과 직접 접촉이 일어나지만 C4 식물에서는 간접적으로 접촉이 일어나기 때문에 광호흡(높은 산소 농도 때문에 생성된 유기물이 분해되는 식물에게 해로운 과정)의 기회는 줄어들고 잎 내부의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 농도를 높여 탄소고정량을 늘릴 수 있다. </p> <ul><li>대사과정</li></ul> <p><a>C3 식물</a>에서는 <a>엽육세포</a>(leaf mesopyll cell)에서 캘빈회로가 돌아가지만, C4 식물에서는 <a>유관속</a>초세포(bundle sheath cell; 잎맥을 에워싸고 있는 세포)에서 캘빈회로가 작동하고 엽육세포에서는 C4회로가 진행된다. PEP carboxylase에 의해 CO<sub>2</sub>가 고정되어 4탄소화합물이 되고, 이 회로의 최종산물인 말산(malate)은 엽육세포에서 인접한 유관속초세포로 이동하여 3탄소 화합물과 CO<sub>2</sub>로 분해된다. CO<sub>2</sub>는 Rubisco와 결합하여 유관속초세포의 캘빈회로에 들어간다. 즉 상대적으로 성능이 나쁜 Rubisco 대신에 좀 더 강력한 효소인 PEP carboxylase가 CO<sub>2</sub>를 대신 받아 줌으로써 낮은 CO<sub>2</sub> 환경에서도 암반응을 계속 진행시킬 수 있는 것이다. </p><p>C4 식물은 일반적인 식물인 C3 식물에 비해, 발달된 유관속초 세포가 있으며 엽록체가 다수 존재한다. 이 때문에 C3 식물의 캘빈-벤슨 회로는 엽육 세포에 있는 데 비하여 C4 식물은 유관속초 세포에 있다. C3 식물은 CO<sub>2</sub>를 고정하는 데 RubisCO를 이용하지만 C4 식물은 PEPC를 이용한다. C4 식물의 이러한 차이는 광호흡을 줄여줘 광합성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보통 C3 식물의 CO<sub>2</sub> 보상점은 40~100 ppm이지만, 고온이 되면 상승하여 보상점이 대기 중의 CO<sub>2</sub> 농도(350 ppm)에 가까워진다. 이 때문에 고온에서 C3 식물은 성장 속도가 제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 C4 식물의 CO<sub>2</sub> 보상점은 2~5 ppm으로 온도가 높아져도 보상점이 C3만큼 급격히 증가하지는 않는다. </p><p>C4 식물은 C3 식물에 비해 반건조 조건에서도 잘 사는데 수분 사용률(광합성에 이용하는 물/증산으로 잃는 물)이 높기 때문이다. </p><p>C4 식물은 C3 식물에 비하여 질소 이용 효율도 높다. 첫째, RubisCO의 생성량이 적은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C4 경로에 의한 CO<sub>2</sub> 농축 기작에서 RubisCO의 산화효소(oxygenase)반응(광호흡)이 거의 일어나지 않게 되기 때문에 RubisCO의 생성량이 적어도 된다. C3 식물에서 전체 단백질의 약 50% 를 차지하는 RubisCO의 생성량을 줄일 수 있으므로 C4 식물은 질소 이용 효율이 높아지게 된다. </p><p>둘째, 광호흡에 의한 질소의 재방출이 일어나지 않는다. C4 식물은 C3 식물에 비해, 광이용 효율이 높다. 강한 빛은 광계 II, 광계 I의 불필요한 전자여기를 촉진하여 <a>활성산소</a>를 발생시키므로 식물에 독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식물은 강한 빛에 대한 방어를 한다. 빛에너지를 형광(빛)이나 열, 광호흡을 통해 방출하거나 여러 가지 보조 색소(<a>카로티노이드</a>, 크립토크롬, 플라보노이드 등)로 강한 빛을 흡수하여 자기자신을 보호한다. </p><p>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온, 건조, 강한 빛, 질소 부족 토양 조건에서는 C4 식물이 C3 식물에 비해 유리하다. 또한 C4 식물은 최적조건일 때 C3 식물에 비하여 효율적으로 탄산 고정이 진행되기 때문에, 같은 양의 빛에서 더 많은 탄소를 고정할 수 있다. 그러나 C4 경로에서 CO<sub>2</sub> 고정에 ATP 2 분자가 더 소모되므로 광호흡이 적은 저온의 습윤한 지역에서는 C3 식물이 유리하기 때문에 C3 식물이 전 세계 식물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p> <h2><span></span><span>C4 식물의 분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엽육 세포에서 PEP(3탄당)에서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실재 HCO3-)를 고정해 옥살산(4탄당)을 만들어 다양한 물질로 변환되어 유관속속초 세포에서 탈탄산 효소에 의해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가 재방출되어 캘빈-벤슨 회로에 받아들여지게 된다. C4 경로는 유관속초 세포로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를 재방출할 때 관여하는 효소(탈탄산효소)에 따라 크게 3 종류로 나뉜다. </p> <div><div><a><img></a> <div><div><a></a></div>C4(Hatch-Slack) 경로- NADP-ME형</div></div></div> <h4><span></span><span>NADP-ME 형</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p><a>옥수수</a>, <a>사탕수수</a>, 참억새 등이 포함된다. NADP-말산효소(NADP-ME: NADP-malic enzyme)가 탈탄산작용(decarboxylation)을 한다. 엽육 세포 기질에서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가 물에 녹아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H</mi> <mi>C</mi> <msubsup> <mi>O</mi> <mrow> <mn>3</mn> </mrow> <mrow> <mo>&#x2212;</mo> </mrow> </msubsup>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HCO_{3}^{-}}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가 되고 PEP와 PEP carboxylase(PEPC)에 의해 옥살아세트산이 된다. 옥살아세트산은 엽록체에 들어가 말산탈수소효소(MDH: malate dehydrogenase)와 환원제 NADPH에 의해 4탄당인 말산(사과산)으로 환원된다. 말산은 엽록체에서 세포질로 방출되어 농도 구배에 의해 원형질 연락사를 경유해, 유관속초 세포로 이동한다. 유관속초 세포의 엽록체로 말산이 이동하여 NADP+와 탈탄산효소와 반응해 피루브산(3탄당), NADPH,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이 생성된다. 탈탄산과정에 관여하는 효소가 NADP-말산효소(NADP-ME: NADP-malic enzyme)이다. 여기서 생성된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는 <a>캘빈-벤슨 회로</a>에 들어가며, 피루브산은 유관속초 세포의 세포질로 방출되어 농도 구배에 따라 원형질 연락사를 거쳐 엽육세포의 엽록체로 이동한다. 이 피루브산은, 2ATP를 이용해 다시 PEP가 되는데 이 반응에 관여하는 효소를 피루브산­인산 디키나아제(PPDK: pyruvate-phosphate dikinase)라고 한다. PPDK는 피루브산 1분자와 무기 인산 1분자, ATP 1분자의 에너지를 사용해 PEP 1분자와 AMP 1분자 무기인산 2분자를 형성한다. 이 AMP를 ADP로 되돌리기 위해 ATP 1분자가 사용된다. 따라서 NADP-ME형에서는 1 분자의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 농축에 2 분자의 ATP가 필요하다. </p> <h4><span></span><span>NAD-ME 형</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p><a>기장</a>, 조 등이 포함된다. NAD-ME(NAD-말산효소)가 탈탄산작용을 한다. 우선 엽육 세포에서 받아들인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CO_{2}}</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 는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i>H</mi> <mi>C</mi> <msubsup> <mi>O</mi> <mrow> <mn>3</mn> </mrow> <mrow> <mo>&#x2212;</mo> </mrow> </msubsup>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HCO_{3}^{-}}</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 이온이 되며 PEP와 반응하여 옥살아세트산이 형성된다. 이때 PEPC가 촉매로 작용한다. 옥살 아세트산에 아민기가 붙어 아스파르트산이 되면, 원형질 연락사를 통해 농도 차이에 따라 유관속초 세포로 이동하여 미토콘드리아로 들어간다. 아스파라긴산은 탈아민반응에 의해 다시 옥살아세트산이 된다. 옥살아세트산은 NADH에 의해 말산으로 환원되며 말산은 NAD-ME(NAD-말산효소)에 의해 탈탄산 반응이 일어나 NADH, 피루브산,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를 생성한다.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는 확산에 의해 엽록체로 이동하여 캘빈-벤슨 회로로 들어가 다시 고정된다. 피루브산은 미토콘드리아에서 세포질 기질로 방출되면 아민기가 붙어 알라닌이 된다. 알라닌은 농도 차이에 따라 원형질 연락사를 거쳐 엽육 세포로 이동한다. 엽육 세포에서 알라닌은 다시 탈아민화 되어 피루브산형태로 엽록체에 들어간다. 그 이후는 NADP-ME형과 동일하게 진행되며 2 분자의 ATP 에너지를 사용해 PEP로 돌아온다. NAD-ME형 또한 1 분자의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 농축에는 2 분자의 ATP가 필요하다. </p> <h4><span></span><span>PEP-CK 형</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p>PCK형이라고도 한다. PEP-CK형은 탈탄산 효소에 PEP-CK(PEP-carboxykinase)가 사용된다. NAD-ME과 유사한 듯 보이나 유관속초 세포의 미토콘드리아가 아닌 엽록체에서 반응이 일어나는 것과 중간산물 일부가 다르다. 먼저 엽육 세포에서 받아들인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 는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H</mi> <mi>C</mi> <msubsup> <mi>O</mi> <mrow> <mn>3</mn> </mrow> <mrow> <mo>&#x2212;</mo> </mrow> </msubsup>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HCO_{3}^{-}}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 이온이 되며 PEP와 반응하여 옥살아세트산이 형성된다. 이때 PEPC가 촉매로 작용한다. 옥살 아세트산에 아민기가 붙어 아스파르트산이 되면, 원형질 연락사를 통해 농도 차이에 따라 유관속초 세포로 이동하여 엽록체로 들어간다. 아스파르트산은 탈아민반응에 의해 다시 옥살아세트산이 된다. 옥살아세트산은 ATP에 의해 PEP와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로 쪼개어지며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는 확산에 의해 엽록체로 이동하여 캘빈-벤슨 회로로 들어간다. PEP는 세포질 기질로 방출되면 아민기가 붙어 알라닌이 된다. 알라닌은 농도 차이에 따라 원형질 연락사를 거쳐 엽육 세포로 이동한다. 엽육 세포에서 알라닌은 다시 탈아민화 되어 피루브산 형태로 엽록체에 들어간다. 그 이후는 NADP-ME형과 동일하게 진행되며 2 분자의 ATP 에너지를 사용해 PEP로 돌아온다. NAD-ME형 또한 1 분자의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 농축에는 2 분자의 ATP가 필요하다. </p> <h2><span></span><span>C4 식물의 진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C4 식물은 백악기(약 1억 3500만 ~ 6500만 년 전)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보이며 대기 중의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 농도가 현저하게 감소한 시기인 700만 년 전에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낮은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 농도에서 C3 식물보다 광호흡이 적은 C4 식물 쪽이 생육에 유리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C4 식물은 낮은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 농도에 적응했다는 가설도 있고 건조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건조한 환경에 적응하여 진화했다고 하는 가설도 있다. 그러나 C4 식물은 진화의 기원이 여러 곳에서 유래하여 다원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속씨식물의 큰 두 갈래 식물군(단자엽식물, 쌍자엽식물) 양쪽 모두에서 C4식물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속씨식물이 두 갈래의 무리로 나뉘기 전에 C4식물에 특이적으로 관련된 유전자군이 갖춰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벼와 같은 C3 식물에서 광합성에는 관여하지 않는 C4 식물의 것과 같은 PEPC, PPDK등의 유전자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는데 C3 식물에서는 C4 식물과는 달리 유전자군의 발현이 억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p><p>C3 식물은 고온, 건조, 낮은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농도, 질소가 부족한 토양 조건에서는 광호흡이 쉽게 일어나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를 고정하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C4 식물은 이러한 가혹한 기후조건에 적응하여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를 고정하기 위한 회로를 따로 가지게 되었다. 낮은 온도에서는 별도의 <span><span><math> <semantics> <mrow> <mstyle> <mrow> <mi>C</mi> <msub> <mi>O</mi> <mrow> <mn>2</mn> </mrow> </msub> </mrow> </mstyle> </mrow> <annotation>{\displaystyle \mathrm {CO_{2}} }</annotation> </semantics> </math></span><img></span> 고정회로가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소모하지만 건조한 조건에서는 생존에 바람직하게 된다. 작물 중 옥수수, 잡곡류가 C4 식물이며 벼나 밀은 C3식물이다. 잡초에도 C4 식물이 있는데 열대 지역에서는 C4 식물(잡초)이 C3 식물(작물)의 생장속도를 압도하기 때문에 잡초로 인한 피해 심각한 문제가 되어 경우에 따라서는 그 해 농사를 망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부 과학자들은 주요 작물에 없거나 잠재되어 있는 C4 관련 유전자를 활성화시켜 작물을 C4 식물로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다. </p> <h2><span></span><span>읽어보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광합성</a></li> <li><a>C3식물</a></li> <li><a>CAM식물</a></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동종이형(同種異形): 같은 종류임에도 형태가 다름</span> </li> <li><span><a>↑</a></span> <span>독일어로 화관(花冠), 꽃다발왕관이라는 의미</span> </li> </ol></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C4_식물&amp;oldid=22406134</a>"</div> <div><div><a>분류</a>: <ul><li><a>광합성</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출처가 필요한 글/2013년 7월</a></li><li><a>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a></li><li><a>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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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C4 식물은 C3 식물에 비해 발달된 유관속초 세포와 무엇이 다수 존재하는가?
엽록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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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40
[ "C4 식물은 C3 식물에 비해 발달된 유관속초 세포와 무엇이 다수 존재하는가?", "C4식물은 일반적인 식물에 비해 발달된 유관속초 세포와 엽록체가 다수 존재하므로, C4 식물의 캘빈-벤슨 회로는 어디에 있는가?", "CO2를 고정하는 데에 있어서 C4 식물은 PEPC를 이용하여 광호흡을 줄이는데 이는 무엇에 유리하게 작용하는가?", "C3 식물이 CO2를 고정하기 위해 이용하는 것은?", "C4 식물은 CO2 고정을 위해 무엇을 이용하나?", "C3 식물의 성장속도가 제한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온도는?", "CO2를 고정하는 데 C3 식물은 무엇을 이용하나?", "C3 식물은 엽육 세포에 있고 C4 식물은 유관속초 세포에 있는 것은?", "C02를 고정하는 데 C4 식물은 무엇을 이용하나?" ]
<!DOCTYPE html> C4 식물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C4 식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d></td><td>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이 문서를 편집하여,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3년 7월)</td></tr></tbody></table> C4 식물은 4탄당(C4) 화합물이 관여하는 추가적인 경로(C4회로)를 이용해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가 부족한 환경에서도 광합성의 암반응(광비의존성반응)을 계속할 수 있는 식물을 말한다. 4탄당인 옥살산이 최초의 탄소고정산물이기 때문에 "C4"경로 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1966년에 2명의 호주 과학자들 (Hatch&amp; Slack)이 밝혀내었기 때문에 Hatch-Slack 경로라고도 불린다. 캘빈회로(C3회로)의 Rubisco보다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를 효율적으로 고정하는 C4 식물의 탄소고정회로는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의 최초 고정 산물이 4탄당(C4)인 데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대부분의 열대 혹은 아열대성 식물이 이 무리에 속한다.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는 공기 중에 아주 적은 비율(0.03%)로 존재하기 때문에,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가 부족한 상태가 되면 캘빈회로에 있는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고정효소인 Rubisco는 더 이상 탄소 고정을 하지 못하고 광호흡을 하게 된다. 반면에 C4식물은 Rubisco보다 강력한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고정효소인 PEP carboxylase(Phosphoenolpyruvate carboxylase)를 이용해 탄소 고정을 계속할 수 있다. 목차 1 C3 식물과 C4 식물의 차이 2 C4 식물의 분류 2.1 NADP-ME 형 2.2 NAD-ME 형 2.3 PEP-CK 형 3 C4 식물의 진화 4 읽어보기 5 각주 C3 식물과 C4 식물의 차이[편집] C3 식물에 비해 C4 식물은 더 건조하고 온도가 높으며 질소원이 부족한 곳에서도 광합성을 할 수 있다. 이는 C4가 C3와는 다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구조적인 차이와 대사 과정의 차이로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다. 구조적 차이 유관속(체관, 물관)은 2개의 세포층으로 둘러싸인 특징적인 잎구조를 가지고 있다. 안쪽 세포층은 유관속초(稍) 세포(bundle sheath cell;잎맥을 에워싸고 있는 세포)라고 불리며 그라나 구조가 부족한 대신 전분이 많이 저장되어 있다. 바깥쪽 세포층은 엽육세포라고 불리며 유관속초세포와는 반대로 전분 저장을 많이 하지 않지만 그라나 구조가 발달되어 있다. 안쪽과 바깥쪽의 같은 엽록체가 다른 형태를 나타낸다.[1] C4 식물 잎의 횡단면을 관찰하면, 유관속초세포가 유관속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으며 그 주위를 엽육 세포가 둘러싸고 있다. 이것은 마치 꽃다발처럼 보이므로, 크란츠 구조(Kranz anatomy)라고 한다.(Kranz[2]-Crown/Halo)라고 한다. C3 식물에서는 엽록체가 엽육 세포에는 많지만, 유관속초 세포에서는 적고 유관속초가 C4 식물만큼 두텁게 발달되어 있지 않아서 이러한 크란츠 구조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C4 식물에서는 유관속초 세포에도 엽록체가 많이 존재하며 유관속초가 두텁게 발달되어 크란츠 구조가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특징이다. C3 식물에서는 엽육세포(葉肉細胞, leaf mesopyll cell)에서 직접 CO2 와 접촉이 일어나 광합성을 하지만, C4 식물의 엽육세포에서는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를 유기산의 형태로 고정하여 유관속초세포로 들여보내기 때문에 간접적으로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와 접촉하여 광합성을 진행하게 된다. O 2 {\displaystyle O_{2}} 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C3 식물에서는 광합성이 일어나는 곳과 직접 접촉이 일어나지만 C4 식물에서는 간접적으로 접촉이 일어나기 때문에 광호흡(높은 산소 농도 때문에 생성된 유기물이 분해되는 식물에게 해로운 과정)의 기회는 줄어들고 잎 내부의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농도를 높여 탄소고정량을 늘릴 수 있다. 대사과정 C3 식물에서는 엽육세포(leaf mesopyll cell)에서 캘빈회로가 돌아가지만, C4 식물에서는 유관속초세포(bundle sheath cell; 잎맥을 에워싸고 있는 세포)에서 캘빈회로가 작동하고 엽육세포에서는 C4회로가 진행된다. PEP carboxylase에 의해 CO2가 고정되어 4탄소화합물이 되고, 이 회로의 최종산물인 말산(malate)은 엽육세포에서 인접한 유관속초세포로 이동하여 3탄소 화합물과 CO2로 분해된다. CO2는 Rubisco와 결합하여 유관속초세포의 캘빈회로에 들어간다. 즉 상대적으로 성능이 나쁜 Rubisco 대신에 좀 더 강력한 효소인 PEP carboxylase가 CO2를 대신 받아 줌으로써 낮은 CO2 환경에서도 암반응을 계속 진행시킬 수 있는 것이다. C4 식물은 일반적인 식물인 C3 식물에 비해, 발달된 유관속초 세포가 있으며 엽록체가 다수 존재한다. 이 때문에 C3 식물의 캘빈-벤슨 회로는 엽육 세포에 있는 데 비하여 C4 식물은 유관속초 세포에 있다. C3 식물은 CO2를 고정하는 데 RubisCO를 이용하지만 C4 식물은 PEPC를 이용한다. C4 식물의 이러한 차이는 광호흡을 줄여줘 광합성에 유리하게 작용한다. 보통 C3 식물의 CO2 보상점은 40~100 ppm이지만, 고온이 되면 상승하여 보상점이 대기 중의 CO2 농도(350 ppm)에 가까워진다. 이 때문에 고온에서 C3 식물은 성장 속도가 제한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면, C4 식물의 CO2 보상점은 2~5 ppm으로 온도가 높아져도 보상점이 C3만큼 급격히 증가하지는 않는다. C4 식물은 C3 식물에 비해 반건조 조건에서도 잘 사는데 수분 사용률(광합성에 이용하는 물/증산으로 잃는 물)이 높기 때문이다. C4 식물은 C3 식물에 비하여 질소 이용 효율도 높다. 첫째, RubisCO의 생성량이 적은 것을 이유로 들 수 있다. C4 경로에 의한 CO2 농축 기작에서 RubisCO의 산화효소(oxygenase)반응(광호흡)이 거의 일어나지 않게 되기 때문에 RubisCO의 생성량이 적어도 된다. C3 식물에서 전체 단백질의 약 50% 를 차지하는 RubisCO의 생성량을 줄일 수 있으므로 C4 식물은 질소 이용 효율이 높아지게 된다. 둘째, 광호흡에 의한 질소의 재방출이 일어나지 않는다. C4 식물은 C3 식물에 비해, 광이용 효율이 높다. 강한 빛은 광계 II, 광계 I의 불필요한 전자여기를 촉진하여 활성산소를 발생시키므로 식물에 독성을 나타내기 때문에 식물은 강한 빛에 대한 방어를 한다. 빛에너지를 형광(빛)이나 열, 광호흡을 통해 방출하거나 여러 가지 보조 색소(카로티노이드, 크립토크롬, 플라보노이드 등)로 강한 빛을 흡수하여 자기자신을 보호한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고온, 건조, 강한 빛, 질소 부족 토양 조건에서는 C4 식물이 C3 식물에 비해 유리하다. 또한 C4 식물은 최적조건일 때 C3 식물에 비하여 효율적으로 탄산 고정이 진행되기 때문에, 같은 양의 빛에서 더 많은 탄소를 고정할 수 있다. 그러나 C4 경로에서 CO2 고정에 ATP 2 분자가 더 소모되므로 광호흡이 적은 저온의 습윤한 지역에서는 C3 식물이 유리하기 때문에 C3 식물이 전 세계 식물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C4 식물의 분류[편집] 엽육 세포에서 PEP(3탄당)에서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실재 HCO3-)를 고정해 옥살산(4탄당)을 만들어 다양한 물질로 변환되어 유관속속초 세포에서 탈탄산 효소에 의해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가 재방출되어 캘빈-벤슨 회로에 받아들여지게 된다. C4 경로는 유관속초 세포로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를 재방출할 때 관여하는 효소(탈탄산효소)에 따라 크게 3 종류로 나뉜다. C4(Hatch-Slack) 경로- NADP-ME형 NADP-ME 형[편집] 옥수수, 사탕수수, 참억새 등이 포함된다. NADP-말산효소(NADP-ME: NADP-malic enzyme)가 탈탄산작용(decarboxylation)을 한다. 엽육 세포 기질에서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가 물에 녹아 H C O 3 − {\displaystyle \mathrm {HCO_{3}^{-}} } 가 되고 PEP와 PEP carboxylase(PEPC)에 의해 옥살아세트산이 된다. 옥살아세트산은 엽록체에 들어가 말산탈수소효소(MDH: malate dehydrogenase)와 환원제 NADPH에 의해 4탄당인 말산(사과산)으로 환원된다. 말산은 엽록체에서 세포질로 방출되어 농도 구배에 의해 원형질 연락사를 경유해, 유관속초 세포로 이동한다. 유관속초 세포의 엽록체로 말산이 이동하여 NADP+와 탈탄산효소와 반응해 피루브산(3탄당), NADPH,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이 생성된다. 탈탄산과정에 관여하는 효소가 NADP-말산효소(NADP-ME: NADP-malic enzyme)이다. 여기서 생성된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는 캘빈-벤슨 회로에 들어가며, 피루브산은 유관속초 세포의 세포질로 방출되어 농도 구배에 따라 원형질 연락사를 거쳐 엽육세포의 엽록체로 이동한다. 이 피루브산은, 2ATP를 이용해 다시 PEP가 되는데 이 반응에 관여하는 효소를 피루브산­인산 디키나아제(PPDK: pyruvate-phosphate dikinase)라고 한다. PPDK는 피루브산 1분자와 무기 인산 1분자, ATP 1분자의 에너지를 사용해 PEP 1분자와 AMP 1분자 무기인산 2분자를 형성한다. 이 AMP를 ADP로 되돌리기 위해 ATP 1분자가 사용된다. 따라서 NADP-ME형에서는 1 분자의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농축에 2 분자의 ATP가 필요하다. NAD-ME 형[편집] 기장, 조 등이 포함된다. NAD-ME(NAD-말산효소)가 탈탄산작용을 한다. 우선 엽육 세포에서 받아들인 C O 2 {\displaystyle CO_{2}} 는 H C O 3 − {\displaystyle HCO_{3}^{-}} 이온이 되며 PEP와 반응하여 옥살아세트산이 형성된다. 이때 PEPC가 촉매로 작용한다. 옥살 아세트산에 아민기가 붙어 아스파르트산이 되면, 원형질 연락사를 통해 농도 차이에 따라 유관속초 세포로 이동하여 미토콘드리아로 들어간다. 아스파라긴산은 탈아민반응에 의해 다시 옥살아세트산이 된다. 옥살아세트산은 NADH에 의해 말산으로 환원되며 말산은 NAD-ME(NAD-말산효소)에 의해 탈탄산 반응이 일어나 NADH, 피루브산,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를 생성한다.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는 확산에 의해 엽록체로 이동하여 캘빈-벤슨 회로로 들어가 다시 고정된다. 피루브산은 미토콘드리아에서 세포질 기질로 방출되면 아민기가 붙어 알라닌이 된다. 알라닌은 농도 차이에 따라 원형질 연락사를 거쳐 엽육 세포로 이동한다. 엽육 세포에서 알라닌은 다시 탈아민화 되어 피루브산형태로 엽록체에 들어간다. 그 이후는 NADP-ME형과 동일하게 진행되며 2 분자의 ATP 에너지를 사용해 PEP로 돌아온다. NAD-ME형 또한 1 분자의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농축에는 2 분자의 ATP가 필요하다. PEP-CK 형[편집] PCK형이라고도 한다. PEP-CK형은 탈탄산 효소에 PEP-CK(PEP-carboxykinase)가 사용된다. NAD-ME과 유사한 듯 보이나 유관속초 세포의 미토콘드리아가 아닌 엽록체에서 반응이 일어나는 것과 중간산물 일부가 다르다. 먼저 엽육 세포에서 받아들인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는 H C O 3 − {\displaystyle \mathrm {HCO_{3}^{-}} } 이온이 되며 PEP와 반응하여 옥살아세트산이 형성된다. 이때 PEPC가 촉매로 작용한다. 옥살 아세트산에 아민기가 붙어 아스파르트산이 되면, 원형질 연락사를 통해 농도 차이에 따라 유관속초 세포로 이동하여 엽록체로 들어간다. 아스파르트산은 탈아민반응에 의해 다시 옥살아세트산이 된다. 옥살아세트산은 ATP에 의해 PEP와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로 쪼개어지며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는 확산에 의해 엽록체로 이동하여 캘빈-벤슨 회로로 들어간다. PEP는 세포질 기질로 방출되면 아민기가 붙어 알라닌이 된다. 알라닌은 농도 차이에 따라 원형질 연락사를 거쳐 엽육 세포로 이동한다. 엽육 세포에서 알라닌은 다시 탈아민화 되어 피루브산 형태로 엽록체에 들어간다. 그 이후는 NADP-ME형과 동일하게 진행되며 2 분자의 ATP 에너지를 사용해 PEP로 돌아온다. NAD-ME형 또한 1 분자의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농축에는 2 분자의 ATP가 필요하다. C4 식물의 진화[편집] C4 식물은 백악기(약 1억 3500만 ~ 6500만 년 전)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보이며 대기 중의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농도가 현저하게 감소한 시기인 700만 년 전에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낮은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농도에서 C3 식물보다 광호흡이 적은 C4 식물 쪽이 생육에 유리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C4 식물은 낮은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농도에 적응했다는 가설도 있고 건조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기 때문에, 건조한 환경에 적응하여 진화했다고 하는 가설도 있다. 그러나 C4 식물은 진화의 기원이 여러 곳에서 유래하여 다원적으로 진화하고 있다. 속씨식물의 큰 두 갈래 식물군(단자엽식물, 쌍자엽식물) 양쪽 모두에서 C4식물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속씨식물이 두 갈래의 무리로 나뉘기 전에 C4식물에 특이적으로 관련된 유전자군이 갖춰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벼와 같은 C3 식물에서 광합성에는 관여하지 않는 C4 식물의 것과 같은 PEPC, PPDK등의 유전자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는데 C3 식물에서는 C4 식물과는 달리 유전자군의 발현이 억제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C3 식물은 고온, 건조, 낮은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농도, 질소가 부족한 토양 조건에서는 광호흡이 쉽게 일어나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를 고정하기 힘들어진다. 하지만, C4 식물은 이러한 가혹한 기후조건에 적응하여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를 고정하기 위한 회로를 따로 가지게 되었다. 낮은 온도에서는 별도의 C O 2 {\displaystyle \mathrm {CO_{2}} } 고정회로가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소모하지만 건조한 조건에서는 생존에 바람직하게 된다. 작물 중 옥수수, 잡곡류가 C4 식물이며 벼나 밀은 C3식물이다. 잡초에도 C4 식물이 있는데 열대 지역에서는 C4 식물(잡초)이 C3 식물(작물)의 생장속도를 압도하기 때문에 잡초로 인한 피해 심각한 문제가 되어 경우에 따라서는 그 해 농사를 망치는 경우까지 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일부 과학자들은 주요 작물에 없거나 잠재되어 있는 C4 관련 유전자를 활성화시켜 작물을 C4 식물로 만드는 연구를 하고 있다. 읽어보기[편집] 광합성 C3식물 CAM식물 각주[편집] ↑ 동종이형(同種異形): 같은 종류임에도 형태가 다름 ↑ 독일어로 화관(花冠), 꽃다발왕관이라는 의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C4_식물&amp;oldid=22406134" 분류: 광합성숨은 분류: 출처가 필요한 글/2013년 7월출처가 필요한 모든 글전체에 출처가 필요한 글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frikaansالعربية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Italiano日本語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15일 (토) 17:4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주제 요약:** C4 식물은 4탄당 화합물을 이용하여 CO2가 부족한 환경에서도 효율적으로 광합성을 수행하는 식물로, C3 식물과는 다른 구조적 및 대사적 특성을 지닌다. 이들은 고온, 건조, 질소 부족 등의 환경에서 유리하게 진화하였으며, 다양한 종류로 분류된다. C4 식물의 진화는 낮은 CO2 농도와 건조한 환경에 적응한 결과로, 주요 작물로는 옥수수와 기장이 포함된다. **각 문단의 핵심 문장:** 1. C4 식물은 4탄당 화합물이 관여하는 추가적인 경로를 이용해 CO2가 부족한 환경에서도 광합성을 계속할 수 있는 식물이다. 2. C4 식물은 C3 식물에 비해 더 건조하고 온도가 높으며 질소원이 부족한 곳에서도 광합성을 할 수 있다. 3. C4 식물은 유관속초세포에서 캘빈회로가 작동하고 엽육세포에서는 C4회로가 진행된다. 4. C4 식물은 고온, 건조, 강한 빛, 질소 부족 토양 조건에서 C3 식물에 비해 유리하다. 5. C4 식물은 탈탄산 효소에 따라 크게 NADP-ME형, NAD-ME형, PEP-CK형으로 분류된다. 6. C4 식물은 백악기 시기에 처음 출현하였으며, 낮은 CO2 농도와 건조한 환경에 적응하여 진화하였다.
이 텍스트를 읽고, 전체 주제를 세 문장 이내로 요약한 뒤, 각 문단의 핵심 문장도 추출해서 함께 보여줘. 중요하지 않은 예시는 생략하고 핵심 개념 위주로 정리해줘.
문희옥
https://ko.wikipedia.org/wiki/문희옥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문희옥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문희옥</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h colspan="2"><div><div><img></div><span>문희옥<br></span></div></th></tr><tr><th colspan="2">기본 정보</th></tr><tr><th>출생</th> <td> 1969년 7월 27일<span>(<span>1969-07-27</span>)</span> (49세)<br><span><span><a><img></a></span> <a>대한민국</a> <a>강원도</a> <a>삼척군</a> 장성읍 <br> (<span><a><img></a></span> <a>대한민국</a> <a>강원도</a> <a>태백시</a>)</span></td></tr><tr><th>국적</th> <td> <span><a><img></a></span> <a>대한민국</a></td></tr><tr><th>직업</th> <td> <a>가수</a></td></tr><tr><th>장르</th> <td> <a>트로트</a></td></tr><tr><th>활동 시기</th> <td> <a>1987년</a> ~ <a>현재</a></td></tr> <tr><th>배우자</th> <td> 김홍선</td></tr><tr><th>가족</th> <td> 어머니 김한순</td></tr><tr><th>학력</th> <td> <a>서울예술대학교</a> 실용음악과 졸업</td></tr><tr><th>종교</th> <td> <a>개신교</a>(순복음)</td></tr><tr><th>소속사</th> <td> 예일기획</td></tr><tr><th>웹사이트</th> <td> <a>http://cafe.daum.net/mhosarang</a></td></tr> </tbody></table> <table> <tbody><tr> <th colspan="2">대표곡 </th></tr> <tr> <td><b>천방지축</b> </td> <td><a>1987년</a> </td></tr> <tr> <td><b>삼수갑산 비둘기</b> </td> <td><a>1987년</a> </td></tr> <tr> <td><b>빈손</b> </td> <td><a>1987년</a> </td></tr> <tr> <td><b>가는 님 가는 정</b> </td> <td><a>1988년</a> </td></tr> <tr> <td><b>사랑의 거리</b> </td> <td><a>1989년</a> </td></tr> <tr> <td><b>강남 멋쟁이</b> </td> <td><a>1990년</a> </td></tr> <tr> <td><b>성은 김이요</b> </td> <td><a>1991년</a> </td></tr> <tr> <td><b>사랑은 촛불</b> </td> <td><a>1991년</a> </td></tr> <tr> <td><b>순정</b> </td> <td><a>1993년</a> </td></tr> <tr> <td><b>현해탄</b> </td> <td><a>1993년</a> </td></tr> <tr> <td><b>해변의 첫사랑</b> </td> <td><a>1994년</a> </td></tr> <tr> <td><b>정 때문에</b> </td> <td><a>1998년</a> </td></tr> <tr> <td><b>하늘 땅만큼</b> </td> <td><a>2002년</a> </td></tr> <tr> <td><b>미스터 박</b> </td> <td><a>2004년</a> </td></tr> <tr> <td><b>사랑이 남아있을 때</b> </td> <td><a>2006년</a> </td></tr> <tr> <td><b>반달손톱</b> </td> <td><a>2013년</a> </td></tr> <tr> <td><b>이봐요</b> </td> <td><a>2013년</a> </td></tr></tbody></table> <p><b>문희옥</b>(文喜玉, <a>1969년</a> <a>7월 27일</a> ~ )은 <a>대한민국</a>의 <a>가수</a>이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li> <li><a><span>2</span> <span>학력</span></a></li> <li><a><span>3</span> <span>정규 앨범</span></a></li> <li><a><span>4</span> <span>출연작</span></a> <ul> <li><a><span>4.1</span> <span>방송 출연작</span></a></li> </ul> </li> <li><a><span>5</span> <span>주요 수상경력</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문희옥은 <a>강원도</a> 삼척군 장성읍(현 <a>태백시</a>)에서 2남 3녀 중에서 4째로 태어났다. 이후 학업을 위해 <a>서울</a>로 상경하였고 서울 <a>은광여자고등학교</a>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6년에 학교 장기자랑에서 <a>주현미</a>의 〈비내리는 영동교〉를 불러 실력인정을 받아 작곡가 안치행이 운영하던 소속사 안타프로덕션에서 1여년간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리고 <a>1987년</a>에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등 지방 사투리 창작곡들을 담은 《8도 디스코 사투리 메들리》(이호섭 작사/안치행 작곡)를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하였다. 데뷔 당시 문희옥은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있었으며 《8도 디스코 사투리 메들리》에 수록된 노래 《천방지축》(<a>전라도 사투리</a>), 《삼수갑산 비둘기》(<a>함경도 사투리</a>) 등 각 지방의 사투리 노랫말로 구성된 창작곡들을 감칠맛나게 불러 당시 일주일 만에 36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음반판매량을 기록했다. 데뷔와 동시에 큰 성과를 거두자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의 주선으로 학교 강당에서 생애 처음으로 리사이틀 공연을 하였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이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문희옥처럼 하이틴 스타가 트로트 장르를 한다는 것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시대상으로 사투리는 공중파 무대에서 활동하기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해에 표준어 가사로 된 앨범 《빈손》(이정화 작사/안치행 작곡)을 발표하였다. </p><p>1988년 문희옥은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a>서울예술대학</a> 실용음악학과에 입학하였고 대학생 가수가 되었으며 그 해 슬로우 템포의 정통 트로트 《가는 님 가는 정》(정은이 작사/ 남국인 작곡)을 발표하였다. 데뷔와 동시에 큰 성과를 거두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문희옥은 1989년에 정통 트롯 리듬을 경쾌하게 현대화한 폭스 트로트 《사랑의 거리》(정은이 작사/ 남국인 작곡/ 김용년 편곡)로 방송 음악다방 등지의 인기차트에서 상위권에 올라 가수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트로트 가수의 막내로서 기대를 모았다. 《<a>사랑의 거리</a>》는 <a>정재은</a>이 1984년에 먼저 취입하여 불렀는데 2절 까지 밖에 없었는데 문희옥이 2집 타이틀곡으로 리메이크 하면서 2절이 끝나고 1절을 한번 더 반복하면서 3절로 하였다. 또한 일본 오사카에서 교포 위문 공연을 시작으로 일본에도 진출하였다. 문희옥은 1990년에 《강남 멋쟁이》(정은이 작사/ 남국인 작곡)가 히트하여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당시 KBS 가요대상을 수상한 선배가수 <a>현철</a>과 혼성듀엣으로 《잘했군 잘했어 메들리》를 발표하였는데 기존에 무명가수가 혼성 듀엣한 음반이 아닌 인기가수로서 혼성 듀엣한 음반으로서 처음이었다. 그리고 《항구 메들리》, 《해금가요 메들리》 등을 발표하면서 기존의 메들리 음반을 발표하고 정통 트로트를 고수하던 <a>이미자</a>, <a>김연자</a>, <a>주현미</a>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에서 몇 안되는 정통 트로트 가수이자 메들리 가수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91년에 발표한 엔카풍의 정통 트로트 《성은 김이요》(조동산 작사/ 원희명 작곡)는 문희옥하면 떠오르는 노래 중 하나로 손 꼽히며 당시 <a>제14대 국회의원 선거</a> 때 김씨 후보자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상위권에 재도입에 성공했다. 그리고 선거철을 맞아 각 유세장에서 가사바꿔 부르기 노래로 각광을 받아 드디어 트로트계 정상의 자리에 안착했다. </p><p>데뷔와 동시에 트로트 장르에서 최고 가수로 명성을 떨치던 문희옥은 1990년 대 《순정》, 《해변의 첫사랑》, 《현해탄》을 히트시키며 트로트 여제로 등극하였지만 <a>락</a>, <a>댄스</a> 음악이 1990년 대에 대한민국 가요계의 주류를 이루었고 <a>포크</a>, <a>트로트</a> 음악은 슬럼에 빠졌다. 그 중에서 정통 트로트를 고수하는 가수였던 문희옥은 방송출연 비중이 줄어들었다. 1995년에 회사원 김 씨와 결혼한 이후 약 3년간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지만 1998년에서야 《정 때문에》(박용진 작사/ 박용진 작곡)가 히트하면서 가수 재개에 성공하였다. 문희옥은 주로 트로트 음악을 하였으나 지금까지의 정통 트로트에서 벗어난 세미 트로트 장르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 중 2002년에 발표한 《하늘 땅만큼》(정찬우 작사/ 김정호 작곡)은 패스트 템포 리듬의 트로트로 자신의 음악적 성향을 다양하게 해주는 색다른 음악이었다. 2006년에는 《사랑이 남아있을 때》(김병걸 작사/ 임종수 작곡)를 발표하고 정통 트로트로 성향을 바꿔 다시금 트로트 여제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문희옥은 다양한 음악 장르를 소화해내며 <a>SBS</a> 오락프로그램 《<a>도전 1000곡</a>》에서 여러번 우승을 거머쥐고 2011년에 방송한 <a>tvN</a> 오락프로그램 《오페라스타 2011》에 출연하여 실력파 가수로 인정받았다. </p> <h2><span></span><span>학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1988년</a> <a>은광여자고등학교</a> 졸업</li> <li><a>1991년</a> <a>서울예술대학교</a> 실용음악과 졸업</li></ul> <h2><span></span><span>정규 앨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table> <tbody><tr> <th>번호 </th> <th>음반 정보 </th> <th>트랙 리스트 </th></tr> <tr> <td><b>1</b> </td> <td>《<b>문희옥 1집</b>》 <ul><li>발매일&#160;: <a>1988년</a> <a>5월 20일</a></li></ul> </td> <td> <ol><li>가는 님 가는 정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당신을 보내지 않았어요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청춘 걸음마 (남석현 作詞/남석현 作曲)</li> <li>가지 말아요 (성윤 作詞/남석현 作曲)</li> <li>이별 약속은 없었잖아요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미련 때문이야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당신을 위해 (추세호 作詞/추세호 作曲)</li> <li>나 어떻게 되버려도 (추세호 作詞/추세호 作曲)</li> <li>그대 일로해 (추세호 作詞/추세호 作曲)</li> <li>달래 아씨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잊을꺼야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우리는 좋아해요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이 세상의 어린이 (건전가요)</li></ol> </td></tr> <tr> <td><b>2</b> </td> <td>《<b>문희옥 2집</b>》 <ul><li>발매일&#160;: <a>1989년</a> <a>5월 15일</a></li></ul> </td> <td> <ol><li>사랑의 거리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팔도 아줌마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연인들의 돛단배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빗물이야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아라리요 (금나영 作詞/남국인 作曲)</li> <li>팔도 아줌마 (경음악)</li> <li>찬바람 (손석우 作詞/손석우 作曲)</li> <li>분녀의 첫사랑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오지 않는 사람을 (손석우 作詞/손석우 作曲)</li> <li>광동 아가씨 (김설강 作詞/남국인 作曲)</li> <li>바보처럼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사랑의 거리 (경음악)</li></ol> </td></tr> <tr> <td><b>3</b> </td> <td>《<b>문희옥 3집</b>》 <ul><li>발매일&#160;: <a>1990년</a> <a>8월</a></li></ul> </td> <td> <ol><li>강남 멋쟁이(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비내리는 동성로 (권혁식 作詞/남국인 作曲)</li> <li>정때문에 미련때문에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손님 (권혁식 作詞/남국인 作曲)</li> <li>애만 쓰다가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강남 멋장이 (경음악)</li> <li>밤차로 갑니다 (고향 作詞/남국인 作曲)</li> <li>사랑의 욕심장이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이별의 꽃 한송이 (윤익삼 作詞/남국인 作曲)</li> <li>사모의 정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정의 블루스 (고향 作詞/남국인 作曲)</li> <li>돌아서는 그 사람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ol> </td></tr> <tr> <td><b>4</b> </td> <td>《<b>외출(外出)</b>》 <ul><li>발매일&#160;: <a>1991년</a> <a>4월 30일</a></li></ul> </td> <td> <ol><li>성은 김이요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li> <li>사랑은 촛불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li> <li>후회 (함중아 作詞/함중아 作曲)</li> <li>바보같은 사랑 (이현준 作詞/이현준 作曲)</li> <li>정든 님 (송정숙, 함중아 作詞/함중아 作曲)</li> <li>성은 김이요 (반주 음악)</li> <li>향수 (김동찬 作詞/심재현 作曲)</li> <li>하나야 (조동산 作詞/신대성 作曲)</li> <li>두 번째 작별 (조동산 作詞/신대성 作曲)</li> <li>내 마음에 쏙드는 남자 (김동찬 作詞/박현진 作曲)</li> <li>타박네 (김동찬 作詞/심재현 作曲)</li> <li>사랑은 촛불 (반주 음악)</li></ol> </td></tr> <tr> <td><b>5</b> </td> <td>《<b>비상(飛翔)</b>》 <ul><li>발매일&#160;: <a>1993년</a> <a>3월 30일</a></li></ul> </td> <td> <ol><li>현해탄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원희명 編曲)</li> <li>순정 (장경수 作詞/이현준 作曲/김용년 編曲)</li> <li>추억은 추억대로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원희명 編曲)</li> <li>내이름 내모습은 잊어도 (박범준 作詞/박범준 作曲/김용년 編曲)</li> <li>여자의 과거는 흘러간 노래 (지명길 作詞/김용년 作曲/김용년 編曲)</li> <li>현해탄 (경음악) (원희명 作曲/원희명 編曲)</li> <li>손뼉이 짝 (지명길 作詞/김용년 作曲/김용년 編曲)</li> <li>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김동찬 作詞/심재현 作曲/김광석 編曲)</li> <li>사랑의 불나비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원희명 編曲)</li> <li>머물 곳은 어디인가 (김동찬 作詞/심재현 作曲/김광석 編曲)</li> <li>사랑의 열매 (장경수 作詞/이현준 作曲/김용년 編曲)</li></ol> </td></tr> <tr> <td><b>6</b> </td> <td>《<b>문희옥 골든 히트</b>》 <ul><li>발매일&#160;: <a>1994년</a></li></ul> </td> <td> <ol><li>해변의 첫사랑 (이수진 作詞/설운도 作曲)</li> <li>슬픈 미르네바</li> <li>사랑의 거리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성은 김이요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li> <li>빈손 (이정화 作詞/안치행 作曲)</li> <li>순정</li> <li>환상의 그림자</li> <li>허상</li> <li>강남 멋장이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가는 님 가는 정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li> <li>현해탄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원희명 編曲)</li> <li>환상의 그림자</li></ol> </td></tr> <tr> <td><b>7</b> </td> <td>《<b>행복(幸福)</b>》 <ul><li>발매일&#160;: <a>1996년</a></li></ul> </td> <td> <ol><li>옛남자</li> <li>아무런 약속도 없이</li> <li>사랑을 잃어버린 나</li> <li>발등이 찍혔네</li> <li>장희빈</li> <li>멈출 수 없는 사랑</li> <li>사연</li> <li>여우같은 여자</li> <li>추억속의 여자</li> <li>현해탄</li></ol> </td></tr> <tr> <td><b>8</b> </td> <td>《<b>애(愛)</b>》 <ul><li>발매일&#160;: <a>1998년</a> <a>5월</a></li></ul> </td> <td> <ol><li>정 때문에</li> <li>나의 사람아</li> <li>잊어야 한다면</li> <li>비의 탱고</li> <li>정 때문에 (MR)</li> <li>발등이 찍혔네</li> <li>상처</li> <li>해변의 첫사랑 (이수진 作詞/설운도 作曲)</li> <li>성은 김이요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li> <li>나의 첫사랑 (MR)</li></ol> </td></tr> <tr> <td><b>9</b> </td> <td>《<b>16주년 기념음반</b>》 <ul><li>발매일&#160;: <a>2002년</a></li></ul> </td> <td> <ol><li>미스터 박</li> <li>하늘 땅만큼</li> <li>너는 내 남자</li> <li>남의 속도 모르면서</li> <li>정말 좋았네</li> <li>당신이 최고야</li> <li>가지말아요</li> <li>딱 걸렸어</li> <li>꼭 한번만</li> <li>빈손</li> <li>유행가</li> <li>바보</li> <li>장미꽃 한송이</li> <li>뭐야 뭐야</li> <li>영수증을 써줄거야</li> <li>나만의 여인</li> <li>갈테면 가라지</li> <li>갈매기 사랑</li> <li>삼수갑산 비둘기</li> <li>천방지축</li></ol> </td></tr> <tr> <td><b>10</b> </td> <td>《<b>문희옥 10집</b>》 <ul><li>발매일&#160;: <a>2006년</a> <a>4월 20일</a></li></ul> </td> <td> <ol><li>사랑이 남아있을 때 (디스코)</li> <li>사랑이 남아있을 때 (트롯)</li> <li>미스터 박</li> <li>하늘 땅만큼</li> <li>정 때문에</li> <li>강남 멋장이</li> <li>성은 김이요</li> <li>해변의 첫사랑</li> <li>사랑의 거리</li> <li>순정</li> <li>발등이 찍혔네</li> <li>빈손</li> <li>삼수갑산 비둘기</li> <li>천방지축</li> <li>사랑이 남아있을 때 (디스코 MR)</li> <li>사랑이 남아있을 때 (트롯 MR)</li></ol> </td></tr> <tr> <td><b>11</b> </td> <td>《<b>문희옥 11집</b>》 <ul><li>발매일&#160;: <a>2013년</a> <a>4월 19일</a></li></ul> </td> <td> <ol><li>반달손톱</li> <li>이봐요</li> <li>그 사람 집은 태백이라네</li> <li>사랑이 남아있을 때</li> <li>미스터 박</li> <li>하늘 땅만큼</li> <li>정 때문에</li> <li>강남 멋쟁이</li> <li>성은 김이요</li> <li>해변의 첫사랑</li> <li>사랑의 거리</li> <li>천방지축</li> <li>반달손톱 (MR)</li> <li>이봐요 (MR)</li> <li>그 사람 집은 태백이라네 (MR)</li></ol> </td></tr></tbody></table> <h2><span></span><span>출연작</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방송 출연작</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ul><li>2019년 <a>채널A</a> 《<a>행복한 아침</a>》</li> <li>2014년 <a>C채널</a> 《힐링토크 회복》</li> <li>2012년 <a>JTBC</a> 《<a>오! 해피데이</a>》</li> <li>2012년 <a>SBS</a> 《<a>강심장</a>》</li> <li>2011년 <a>MBC</a> 《<a>나는 트로트 가수다</a>》</li> <li>2011년 <a>tvN</a> 《오페라스타 2011》</li> <li>2011년 <a>SBS</a> 《<a>좋은아침</a>》</li> <li>2010년 <a>OBS</a> 《토크樂 황금 마이크》</li></ul> <h2><span></span><span>주요 수상경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2014년 제20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성인가요 가수상</li> <li>2012년 제12회 대한민국 전통가요대상 여자 7대가수상</li> <li>2011년 KBS 트로트 대축제 올해의 가수상</li> <li>2006년 제40회 가수의 날 특별공로상</li> <li>2003년 제5회 한국예술실연자대상 특별공로상</li> <li>2002년 제36회 가수의 날 모범가수상</li> <li>1992년 제7회 <a>골든 디스크</a> SKC 장려상</li> <li>1990년 제4회 <a>골든 디스크</a> 본상</li> <li>1987년 제2회 <a>골든 디스크</a> 신인가수상</li> <li>1987년 MBC 인기가요20 여자신인상</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문희옥&amp;oldid=24363031</a>"</div> <div><div><a>분류</a>: <ul><li><a>1969년 태어남</a></li><li><a>살아있는 사람</a></li><li><a>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a></li><li><a>대한민국의 여자 가수</a></li><li><a>서울예술대학교 동문</a></li><li><a>은광여자고등학교 동문</a></li><li><a>1987년 데뷔</a></li><li><a>태백시 출신</a></li><li><a>대한민국의 개신교도</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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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옥이 입학한 대학교 이름은?
서울예술대학
null
100185
9,072
[ "문희옥이 입학한 대학교 이름은?", "문희옥이 노래 <<사랑의 거리>>를 발표한 것은 몇 년도인가?", "문희옥이 발표한 노래 <<성은 김이요>>의 작사가 이름은 무엇인가?", "문희옥이 다녔던 서울예술대학의 학과는?", "정재은이 1984년에 먼저 취입하여 불렀던 곡으로, 문희옥이 2집에서 리메이크 한 곡의 제목은?", "문희옥과 현철이 인기가수로서 혼성 듀엣한 첫 음반은?", "문희옥이 1989년에 부른 곡으로 가수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한 곡명은?", "일본 오사카에서 문희옥은 무슨 공연을 하였는가?", "<잘했군 잘했어 메들리> 곡에서 문희옥은 누구와 듀엣을 했는가?", "문희옥이 회사원 김 씨와 결혼한 것은 몇 년도인가?", "문희옥이 2002년 낸 패스트 템포 트로트 곡의 제목은 무엇인가?", "문희옥이 2011년 tvN에서 출연한 프로그램 이름은 무엇인가?", "문희옥이 1998년 재기에 성공했던 곡 제목은?", "문희옥이 2002년에 발표한 '하늘 땅만큼'은 정통 트로트에서 벗어난 어떤 장으로 불리는가?", "문희옥이 여러번 우승을 차지한 SBS 오락 프로그램은?", "2011년에 문희옥이 출연한 tvN 오락프로그램으로 그녀가 실력파 가수로써 인정을 받았던 프로그램의 이름은?", "1995년 문희옥은 몇 년간의 공백기를 갖게 되었는가?", "2006년 때 문희옥이 정통 트로트로 성향을 바꾼 노래의 제목은?" ]
<!DOCTYPE html> 문희옥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문희옥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문희옥</th></tr><tr><th colspan="2">기본 정보</th></tr><tr><th>출생</th> <td> 1969년 7월 27일(1969-07-27) (49세) 대한민국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 ( 대한민국 강원도 태백시)</td></tr><tr><th>국적</th> <td> 대한민국</td></tr><tr><th>직업</th> <td> 가수</td></tr><tr><th>장르</th> <td> 트로트</td></tr><tr><th>활동 시기</th> <td> 1987년 ~ 현재</td></tr> <tr><th>배우자</th> <td> 김홍선</td></tr><tr><th>가족</th> <td> 어머니 김한순</td></tr><tr><th>학력</th> <td> 서울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 졸업</td></tr><tr><th>종교</th> <td> 개신교(순복음)</td></tr><tr><th>소속사</th> <td> 예일기획</td></tr><tr><th>웹사이트</th> <td> http://cafe.daum.net/mhosarang</td></tr> </tbody></table> <table> <tbody><tr> <th colspan="2">대표곡 </th></tr> <tr> <td>천방지축 </td> <td>1987년 </td></tr> <tr> <td>삼수갑산 비둘기 </td> <td>1987년 </td></tr> <tr> <td>빈손 </td> <td>1987년 </td></tr> <tr> <td>가는 님 가는 정 </td> <td>1988년 </td></tr> <tr> <td>사랑의 거리 </td> <td>1989년 </td></tr> <tr> <td>강남 멋쟁이 </td> <td>1990년 </td></tr> <tr> <td>성은 김이요 </td> <td>1991년 </td></tr> <tr> <td>사랑은 촛불 </td> <td>1991년 </td></tr> <tr> <td>순정 </td> <td>1993년 </td></tr> <tr> <td>현해탄 </td> <td>1993년 </td></tr> <tr> <td>해변의 첫사랑 </td> <td>1994년 </td></tr> <tr> <td>정 때문에 </td> <td>1998년 </td></tr> <tr> <td>하늘 땅만큼 </td> <td>2002년 </td></tr> <tr> <td>미스터 박 </td> <td>2004년 </td></tr> <tr> <td>사랑이 남아있을 때 </td> <td>2006년 </td></tr> <tr> <td>반달손톱 </td> <td>2013년 </td></tr> <tr> <td>이봐요 </td> <td>2013년 </td></tr></tbody></table> 문희옥(文喜玉, 1969년 7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목차 1 생애 2 학력 3 정규 앨범 4 출연작 4.1 방송 출연작 5 주요 수상경력 생애[편집] 문희옥은 강원도 삼척군 장성읍(현 태백시)에서 2남 3녀 중에서 4째로 태어났다. 이후 학업을 위해 서울로 상경하였고 서울 은광여자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86년에 학교 장기자랑에서 주현미의 〈비내리는 영동교〉를 불러 실력인정을 받아 작곡가 안치행이 운영하던 소속사 안타프로덕션에서 1여년간 트레이닝을 받았다. 그리고 1987년에 전라도, 경상도, 함경도 등 지방 사투리 창작곡들을 담은 《8도 디스코 사투리 메들리》(이호섭 작사/안치행 작곡)를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하였다. 데뷔 당시 문희옥은 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에 있었으며 《8도 디스코 사투리 메들리》에 수록된 노래 《천방지축》(전라도 사투리), 《삼수갑산 비둘기》(함경도 사투리) 등 각 지방의 사투리 노랫말로 구성된 창작곡들을 감칠맛나게 불러 당시 일주일 만에 360만장이라는 어마어마한 음반판매량을 기록했다. 데뷔와 동시에 큰 성과를 거두자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의 주선으로 학교 강당에서 생애 처음으로 리사이틀 공연을 하였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이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문희옥처럼 하이틴 스타가 트로트 장르를 한다는 것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시대상으로 사투리는 공중파 무대에서 활동하기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그 해에 표준어 가사로 된 앨범 《빈손》(이정화 작사/안치행 작곡)을 발표하였다. 1988년 문희옥은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서울예술대학 실용음악학과에 입학하였고 대학생 가수가 되었으며 그 해 슬로우 템포의 정통 트로트 《가는 님 가는 정》(정은이 작사/ 남국인 작곡)을 발표하였다. 데뷔와 동시에 큰 성과를 거두어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던 문희옥은 1989년에 정통 트롯 리듬을 경쾌하게 현대화한 폭스 트로트 《사랑의 거리》(정은이 작사/ 남국인 작곡/ 김용년 편곡)로 방송 음악다방 등지의 인기차트에서 상위권에 올라 가수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하면서 트로트 가수의 막내로서 기대를 모았다. 《사랑의 거리》는 정재은이 1984년에 먼저 취입하여 불렀는데 2절 까지 밖에 없었는데 문희옥이 2집 타이틀곡으로 리메이크 하면서 2절이 끝나고 1절을 한번 더 반복하면서 3절로 하였다. 또한 일본 오사카에서 교포 위문 공연을 시작으로 일본에도 진출하였다. 문희옥은 1990년에 《강남 멋쟁이》(정은이 작사/ 남국인 작곡)가 히트하여 인기가도를 달리고 있을 때 당시 KBS 가요대상을 수상한 선배가수 현철과 혼성듀엣으로 《잘했군 잘했어 메들리》를 발표하였는데 기존에 무명가수가 혼성 듀엣한 음반이 아닌 인기가수로서 혼성 듀엣한 음반으로서 처음이었다. 그리고 《항구 메들리》, 《해금가요 메들리》 등을 발표하면서 기존의 메들리 음반을 발표하고 정통 트로트를 고수하던 이미자, 김연자, 주현미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에서 몇 안되는 정통 트로트 가수이자 메들리 가수로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1991년에 발표한 엔카풍의 정통 트로트 《성은 김이요》(조동산 작사/ 원희명 작곡)는 문희옥하면 떠오르는 노래 중 하나로 손 꼽히며 당시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 김씨 후보자들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상위권에 재도입에 성공했다. 그리고 선거철을 맞아 각 유세장에서 가사바꿔 부르기 노래로 각광을 받아 드디어 트로트계 정상의 자리에 안착했다. 데뷔와 동시에 트로트 장르에서 최고 가수로 명성을 떨치던 문희옥은 1990년 대 《순정》, 《해변의 첫사랑》, 《현해탄》을 히트시키며 트로트 여제로 등극하였지만 락, 댄스 음악이 1990년 대에 대한민국 가요계의 주류를 이루었고 포크, 트로트 음악은 슬럼에 빠졌다. 그 중에서 정통 트로트를 고수하는 가수였던 문희옥은 방송출연 비중이 줄어들었다. 1995년에 회사원 김 씨와 결혼한 이후 약 3년간 공백기를 가지게 되었지만 1998년에서야 《정 때문에》(박용진 작사/ 박용진 작곡)가 히트하면서 가수 재개에 성공하였다. 문희옥은 주로 트로트 음악을 하였으나 지금까지의 정통 트로트에서 벗어난 세미 트로트 장르를 시도하기도 했다. 그 중 2002년에 발표한 《하늘 땅만큼》(정찬우 작사/ 김정호 작곡)은 패스트 템포 리듬의 트로트로 자신의 음악적 성향을 다양하게 해주는 색다른 음악이었다. 2006년에는 《사랑이 남아있을 때》(김병걸 작사/ 임종수 작곡)를 발표하고 정통 트로트로 성향을 바꿔 다시금 트로트 여제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특히 문희옥은 다양한 음악 장르를 소화해내며 SBS 오락프로그램 《도전 1000곡》에서 여러번 우승을 거머쥐고 2011년에 방송한 tvN 오락프로그램 《오페라스타 2011》에 출연하여 실력파 가수로 인정받았다. 학력[편집] 1988년 은광여자고등학교 졸업 1991년 서울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 졸업 정규 앨범[편집] <table> <tbody><tr> <th>번호 </th> <th>음반 정보 </th> <th>트랙 리스트 </th></tr> <tr> <td>1 </td> <td>《문희옥 1집》 발매일 : 1988년 5월 20일 </td> <td> 가는 님 가는 정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당신을 보내지 않았어요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청춘 걸음마 (남석현 作詞/남석현 作曲) 가지 말아요 (성윤 作詞/남석현 作曲) 이별 약속은 없었잖아요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미련 때문이야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당신을 위해 (추세호 作詞/추세호 作曲) 나 어떻게 되버려도 (추세호 作詞/추세호 作曲) 그대 일로해 (추세호 作詞/추세호 作曲) 달래 아씨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잊을꺼야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우리는 좋아해요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이 세상의 어린이 (건전가요) </td></tr> <tr> <td>2 </td> <td>《문희옥 2집》 발매일 : 1989년 5월 15일 </td> <td> 사랑의 거리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팔도 아줌마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연인들의 돛단배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빗물이야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아라리요 (금나영 作詞/남국인 作曲) 팔도 아줌마 (경음악) 찬바람 (손석우 作詞/손석우 作曲) 분녀의 첫사랑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오지 않는 사람을 (손석우 作詞/손석우 作曲) 광동 아가씨 (김설강 作詞/남국인 作曲) 바보처럼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사랑의 거리 (경음악) </td></tr> <tr> <td>3 </td> <td>《문희옥 3집》 발매일 : 1990년 8월 </td> <td> 강남 멋쟁이(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비내리는 동성로 (권혁식 作詞/남국인 作曲) 정때문에 미련때문에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손님 (권혁식 作詞/남국인 作曲) 애만 쓰다가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강남 멋장이 (경음악) 밤차로 갑니다 (고향 作詞/남국인 作曲) 사랑의 욕심장이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이별의 꽃 한송이 (윤익삼 作詞/남국인 作曲) 사모의 정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정의 블루스 (고향 作詞/남국인 作曲) 돌아서는 그 사람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td></tr> <tr> <td>4 </td> <td>《외출(外出)》 발매일 : 1991년 4월 30일 </td> <td> 성은 김이요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 사랑은 촛불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 후회 (함중아 作詞/함중아 作曲) 바보같은 사랑 (이현준 作詞/이현준 作曲) 정든 님 (송정숙, 함중아 作詞/함중아 作曲) 성은 김이요 (반주 음악) 향수 (김동찬 作詞/심재현 作曲) 하나야 (조동산 作詞/신대성 作曲) 두 번째 작별 (조동산 作詞/신대성 作曲) 내 마음에 쏙드는 남자 (김동찬 作詞/박현진 作曲) 타박네 (김동찬 作詞/심재현 作曲) 사랑은 촛불 (반주 음악) </td></tr> <tr> <td>5 </td> <td>《비상(飛翔)》 발매일 : 1993년 3월 30일 </td> <td> 현해탄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원희명 編曲) 순정 (장경수 作詞/이현준 作曲/김용년 編曲) 추억은 추억대로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원희명 編曲) 내이름 내모습은 잊어도 (박범준 作詞/박범준 作曲/김용년 編曲) 여자의 과거는 흘러간 노래 (지명길 作詞/김용년 作曲/김용년 編曲) 현해탄 (경음악) (원희명 作曲/원희명 編曲) 손뼉이 짝 (지명길 作詞/김용년 作曲/김용년 編曲)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김동찬 作詞/심재현 作曲/김광석 編曲) 사랑의 불나비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원희명 編曲) 머물 곳은 어디인가 (김동찬 作詞/심재현 作曲/김광석 編曲) 사랑의 열매 (장경수 作詞/이현준 作曲/김용년 編曲) </td></tr> <tr> <td>6 </td> <td>《문희옥 골든 히트》 발매일 : 1994년 </td> <td> 해변의 첫사랑 (이수진 作詞/설운도 作曲) 슬픈 미르네바 사랑의 거리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성은 김이요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 빈손 (이정화 作詞/안치행 作曲) 순정 환상의 그림자 허상 강남 멋장이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가는 님 가는 정 (정은이 作詞/남국인 作曲) 현해탄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원희명 編曲) 환상의 그림자 </td></tr> <tr> <td>7 </td> <td>《행복(幸福)》 발매일 : 1996년 </td> <td> 옛남자 아무런 약속도 없이 사랑을 잃어버린 나 발등이 찍혔네 장희빈 멈출 수 없는 사랑 사연 여우같은 여자 추억속의 여자 현해탄 </td></tr> <tr> <td>8 </td> <td>《애(愛)》 발매일 : 1998년 5월 </td> <td> 정 때문에 나의 사람아 잊어야 한다면 비의 탱고 정 때문에 (MR) 발등이 찍혔네 상처 해변의 첫사랑 (이수진 作詞/설운도 作曲) 성은 김이요 (조동산 作詞/원희명 作曲) 나의 첫사랑 (MR) </td></tr> <tr> <td>9 </td> <td>《16주년 기념음반》 발매일 : 2002년 </td> <td> 미스터 박 하늘 땅만큼 너는 내 남자 남의 속도 모르면서 정말 좋았네 당신이 최고야 가지말아요 딱 걸렸어 꼭 한번만 빈손 유행가 바보 장미꽃 한송이 뭐야 뭐야 영수증을 써줄거야 나만의 여인 갈테면 가라지 갈매기 사랑 삼수갑산 비둘기 천방지축 </td></tr> <tr> <td>10 </td> <td>《문희옥 10집》 발매일 : 2006년 4월 20일 </td> <td> 사랑이 남아있을 때 (디스코) 사랑이 남아있을 때 (트롯) 미스터 박 하늘 땅만큼 정 때문에 강남 멋장이 성은 김이요 해변의 첫사랑 사랑의 거리 순정 발등이 찍혔네 빈손 삼수갑산 비둘기 천방지축 사랑이 남아있을 때 (디스코 MR) 사랑이 남아있을 때 (트롯 MR) </td></tr> <tr> <td>11 </td> <td>《문희옥 11집》 발매일 : 2013년 4월 19일 </td> <td> 반달손톱 이봐요 그 사람 집은 태백이라네 사랑이 남아있을 때 미스터 박 하늘 땅만큼 정 때문에 강남 멋쟁이 성은 김이요 해변의 첫사랑 사랑의 거리 천방지축 반달손톱 (MR) 이봐요 (MR) 그 사람 집은 태백이라네 (MR) </td></tr></tbody></table> 출연작[편집] 방송 출연작[편집] 2019년 채널A 《행복한 아침》 2014년 C채널 《힐링토크 회복》 2012년 JTBC 《오! 해피데이》 2012년 SBS 《강심장》 2011년 MBC 《나는 트로트 가수다》 2011년 tvN 《오페라스타 2011》 2011년 SBS 《좋은아침》 2010년 OBS 《토크樂 황금 마이크》 주요 수상경력[편집] 2014년 제20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성인가요 가수상 2012년 제12회 대한민국 전통가요대상 여자 7대가수상 2011년 KBS 트로트 대축제 올해의 가수상 2006년 제40회 가수의 날 특별공로상 2003년 제5회 한국예술실연자대상 특별공로상 2002년 제36회 가수의 날 모범가수상 1992년 제7회 골든 디스크 SKC 장려상 1990년 제4회 골든 디스크 본상 1987년 제2회 골든 디스크 신인가수상 1987년 MBC 인기가요20 여자신인상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문희옥&amp;oldid=24363031" 분류: 1969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대한민국의 여자 가수서울예술대학교 동문은광여자고등학교 동문1987년 데뷔태백시 출신대한민국의 개신교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일 (일) 20:4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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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옥은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로, 1987년에 데뷔하여 현재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1969년 강원도 삼척군에서 태어난 그녀는 서울예술대학교 실용음악과를 졸업하고, 데뷔 당시 사투리 창작곡으로 큰 인기를 얻었다. 대표곡으로는 《천방지축》, 《사랑의 거리》, 《성은 김이요》 등이 있으며, 그녀는 정통 트로트와 세미 트로트 장르를 아우르며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해왔다. 결혼 후 잠시 활동을 중단했으나, 1998년 《정 때문에》로 재개하며 다시 주목받았다. 문희옥은 여러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실력파 가수로 인정받았고, 다수의 수상 경력을 보유하고 있다.
다음 글을 보고, 요약문을 만들되 첫 문장은 전체 주제를 압축적으로, 이후 문장은 세부 정보 중심으로 정리해줘.
장_칼뱅_참고문헌
https://ko.wikipedia.org/wiki/장_칼뱅_참고문헌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장 칼뱅 참고문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장 칼뱅 참고문헌</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div><div><a><img></a> <div><div><a></a></div><a>장 칼뱅</a>의 <a>석판화</a></div></div></div> <p><b>장 칼뱅 참고문헌</b>은 프랑스 <a>종교 개혁가</a> <a>존 칼빈</a> (1509-1564)의 설교들, 성경 주석, 신학논문의 작품들 소개하는 것이다. 칼빈은&#160;<a>제네바</a>&#160;(1536-38 및 1541-64)에서만 오랫 동안 살았지만 그의 작품들은 그의 개혁 교회의 사상을 유럽의 여러나라와 세계의 여러곳으로 확산시켰다. 그의 방대한 작품들은 기독교와 유럽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작품</span></a></li> <li><a><span>2</span> <span>기독교 강요</span></a></li> <li><a><span>3</span> <span>성경 주석과 설교</span></a></li> <li><a><span>4</span> <span>편지</span></a></li> <li><a><span>5</span> <span>설교</span></a></li> <li><a><span>6</span> <span>신학적인 논문</span></a></li> <li><a><span>7</span> <span>다른 작품</span></a></li> <li><a><span>8</span> <span>함께보기</span></a></li> <li><a><span>9</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10</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작품</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칼빈의 전작품</div></div></div> <p>칼뱅의 첫 번째 작품은 <a>로마</a> <a>철학자</a> <a>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a>의 관용론에 관한 주석(Seneca's De Clementia) 이다. 이 작품은 그의 인문주의적 사상과 학문성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첫 번째 신학적인 작품은 영혼의 수면(Psychopannychia)이다. 이 책은 사후에 영혼이 단지 잠을 잔다는 <a>재세례파들</a>에 대한 반박이다.<sup><a>&#91;1&#93;</a></sup> 1534년에 원고를 마쳤지만 친구들의 권면으로 미루다가 1542년에 출판하였다. 칼빈은 26세의 나이에 유명한 <i><a>기독교 강요</a> </i> (<i>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i>)를 출판하였다.<sup><a>&#91;2&#93;</a></sup>자신의 고국 프랑스에서는 1541년 처음으로 불어로 출판하였고, 최종판은 1559년(라틴어판)및 1560년(프랑스어판)이다. 개신교 신학의 중요한 주제인 하나님, 성경, 구원, 교회, 성례, 이신칭의, 기독교인의 자유와 같은 중요한 신학적인 것을 다루었다. 칼빈은 <a>여호수아</a> (<a>사무엘</a>상 설교는 출판함)이후 역사서를 제외하고, 지혜서와 시편을 포함하여 구역 전체를 주석하였다. 그는 요한 <a>이서</a>와 <a>삼서</a> , 그리고 요한 <a>계시록</a>을 제외하고 신약 성경 전체를 주석하여 출판하였다. 또한 1,300 통 이상의 편지를 썼다. </p> <h2><span></span><span>기독교 강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1834년 판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 (Institutio Religionis )</div></div></div> <p>칼빈은 자신의 사상을 주석, 설교, 논문에서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신학의 가장 간결한 표현은 바로 기독교 강요 이다.<sup><a>&#91;3&#93;</a></sup> 기독교강요의 다양한 판은 개혁자로서 거의 모든 경력을 쌓았으며, 이 책의 연속된 개정은 그의 신학이 그의 청년시절에서 말년까지 거의 변화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536 년 초판은 6 장으로 구성되었지만, 1539 년에 출판 된 두 번째 판은 <a>멜란히톤</a>의 신학통론 (Loci Communes)에 나오는 주제에 여러 장들을 추가했기 때문에 3 배로 늘어났다. 1543 년에 그는 다시 새로운 자료를 추가하고 사도 신경에 관한 장을 확장하였다. 1559년에마지막 판이 나왔다. 80개 장을 갖는 4권으로 구성되었고, 각 책은 신조의 진술에 따라 진술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제 1 권, 그리스도의 구속주에 대한 제 2 권, 제 3권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음, 그리고 4 권은 그리스도의 사회 또는 교회에 관해서 다룬다. </p> <h2><span></span><span>성경 주석과 설교</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칼빈은 성경에 대한 거의 모든 책들을 주석하였다. 1540년에 로마서 주석은 첫번째 작품이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주석하려고 했으나 6년이 지나서야 고린도전서에 대한 주석을 출판할 수 있었다. 그 작품을 쓴 4년후에는 바울서신에 대한 모든 주석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로마서 주석을 재판하였다. 일반서신을 주석하기 시작하였고 1555년까지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주석하여 출판하였다. 칼빈은 신약을 먼저 주석하고 요한 2서, 요한 3서,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았고, 구약은 시편을 시작으로 여호수아에 이르는 주석을 하였다. 칼빈은 1536년 기독교 강요 초판 발행이후에 그의 최초의 주석인 로마서 주석을 1540년에 출판하였고, 기독교 강요의 개정판이 나온 후에 1546년 1551년 사이 5년 동안 많은 주석들을 출판했다. 1546년에는 고린도전후서를, 1548년은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디모데전후서를, 1549년은 히브리서, 그리고 구약의 이사야서를, 1550년에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도서, 1551년은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서, 빌레몬서, 야고보서, 유다서에 대한 주석을 출판하였다. 1552년 사도행전 1장에서 13장까지 주석하였고, 1553년은 요한복음을, 1554년은 사도행전 14장에서 28장을 그리고 창세기를, 1555년은 공관복음서에 대한 주석을 출판하였다. 칼빈의 구약 주석은 그의 강의안을 대부분 편집한 것이다. 1540년 후반에 구약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으며 아직도 모든 강의안들이 남아 있다. 이사야서를 1549년 출판한 후에 8년 만에 1557년 시편과 호세아를, 1559년 소선지서를, 1561년 다니엘서를, 1563년 모세의 마지막 내권의 책, 예레미야, 애가서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칼빈 사후 1565년 에스겔(1-20장)과 여호수아서를 출판했다. 칼빈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15년 동안 설교를 했는데 순서적으로 보면 히브리서, 시편, 에레미야서, 요한복음, 사도행전, 애가서, 미가서, 스바냐서, 호세아서, 요엘서, 아모스서, 오바댜서, 요나서, 욥기,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신명기서, 디도서, 고린도전후서, 이사야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공관복음, 창세기,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에 대한 설교를 했다. 칼빈의 설교들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어 사람들에게 팔았던 19세기 초반 거의 분실되었다고 한다. 재생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찾을 수 없다고 한다. </p> <div><div><a><img></a> <div><div><a></a></div>칼빈의 신구약 주석 영어판</div></div></div> <h2><span></span><span>편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영국의 <a>에드워드 VI 에게 보낸 칼빈의 편지</a>, 1552년 7월 4일 <a>영국 박물관</a></div></div></div> <p>칼빈의 서신은 기독교강요와 성경 주석 만큰 크게 독자층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서신은 당시의 특별한 필요성과 사건을 분명하게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 쓰기의 규모는 그의 유명한 작품만큼이나 놀랐다. 그의 편지는 약 1,300 개이며, 그에게 쓰여진 약 3000 개의 편지와 함께 <a>종교개혁 전집</a>(Corpus Reformatorum)<sup><a>&#91;4&#93;</a></sup>에서 칼빈의 편지는 11권을 채운다. 워필드는 칼빈을 "종교 개혁 시대의 위대한 편지 작가"라고 부른다. 그의 편지는 종종 Charles d' Espeville라는 가명으로 쓰여졌다. 현지 극장에 관한 논쟁에서 신생 교회에 대한 지원을 정치적 동맹에서 선택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슈에 관심이있다. 그들은 또한 그의 해석학적 산문에서 분명하지 않은 개인성격을 드러낸다. 한 예가 1545 년에 프로방스의 왈도파의 3,600 명이 학살당한 후 나온 것이다. 칼빈은 21일 동안 베룬, 아우리히, 샤프하우젠, 바젤, 스트라스부르 그 지역을 방문하여 아라우의 국회에서 칸톤 (Cantons) 의원을 만나 생존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간청했다. 그는 William Farel에게 자신의 슬픔에 대해 썼습니다. 임신 한 여성이나 유아도 배려받지 못하는 박해자들의 잔인한 학대였다. 이 핍박의 잔인함이 대단합니다. 내가 그것을 생각할 때 당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 나는 슬픔이 닳아지고 눈물없이는 나의 글을 쓰지 못한다. 칼빈의 가장 잘 알려진 편지 중 하나는 Jacopo Sadoleto의 "제네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Reformation Debate"에 대한 그의 회신이 오늘도 계속 인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sup><a>&#91;5&#93;</a></sup> </p> <h2><span></span><span>설교</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Sermons on I Samuel</li> <li>Sermons on Galatians</li> <li>Sermons on Psalm 119</li> <li>Sermons on the deity of Christ</li> <li>Sermons on Election and Reprobation (Genesis)</li></ul> <h2><span></span><span>신학적인 논문</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i><a>Psychopannychia</a></i></li> <li><i><a>Treatise on Relics</a></i></li> <li><i><a>The Secret Providence of God</a></i></li> <li><i>A Short Treatise on the Lord's Supper</i><sup><a>&#91;6&#93;</a></sup></li></ul> <h2><span></span><span>다른 작품</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i>De Clementia</i></li></ul> <h2><span></span><span>함께보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기독교 강요</a></li> <li><a>장 칼뱅</a></li> <li><a>장 칼뱅의 신학</a></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cite><a>Barth, Karl</a> (1995) [1922]. &#12298;Die Theologie Calvins&#12299; &#91;The Theology of John Calvin&#93; (독일어). Translated by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W.B. Eerdmans Pub. Co. <a>ISBN</a>&#160;<a>978-0-8028-0696-3</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a>"John Calvin"</a> from "131 Christians everyone should know" in <i>Christian History &amp; Biography</i></span> </li> <li><span><a>↑</a></span> <span>See:</span> </li> <li><span><a>↑</a></span> <span>*<cite>De Greef, Wulfert (2008), &#12298;The Writings of John Calvin: An Introductory Guide&#12299;,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7쪽, <a>ISBN</a>&#160;<a>0-664-23230-2</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Both letters can be found in <a><i>Calvin's Tracts Relating to the Reformation</i></a> (pp. 3-24, 25-71), translated by H. Beveridge, 1844. Digitized by <a>Google Books</a></span> </li> <li><span><a>↑</a></span> <span><cite>Thompson, Bard (1996). &#12298;Humanists and Reformers&#12299;.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493–494쪽. <a>ISBN</a>&#160;<a>0-8028-6348-5</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ol></div></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칼빈의 작품</a> 에서는 기독교 Classics 천상의 라이브러리</li> <li><a>존 칼빈의 작품목록</a> 에 <a>Calvin500.com</a></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장_칼뱅_참고문헌&amp;oldid=24428755</a>"</div> <div><div><a>분류</a>: <ul><li><a>칼뱅주의</a></li><li><a>작품</a></li><li><a>목록</a></li><li><a>참고 문헌</a></li><li><a>편지</a></li><li><a>출판물</a></li><li><a>장 칼뱅</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CS1 - 독일어 인용 (de)</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English</a></li><li><a>Português</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6월 14일 (금) 22: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칼뱅의 저서중 하나로 칼뱅의 신학을 간결하게 표현한 책은?
기독교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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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24
[ "칼뱅의 저서중 하나로 칼뱅의 신학을 간결하게 표현한 책은?", "칼뱅의 신학이 변화 없이 계속되었음을 의미하는 증거는?", "칼뱅의 기독교 강요의 1536년 초판은 몇 개의 장으로 구성되었나?", "칼뱅의 기독교 강요의 두 번째 판이 출판된 해는?", "칼뱅의 '기독교 강요'의 마지막 판은 몇 권으로 구성되었나?", "칼뱅이 가장 마지막으로 설교했던 내용은?", "칼뱅의 선교가 대부분 분실된 시기가 언제인가?", "칼뱅이 1540년 처음으로 주석한 성경 주석 작품은?", "칼뱅이 요한복음을 주석하여 출판한 해는?", "칼뱅이 설교를 한 기간은 몇 년인가?", "칼빈이 만나 생존자들을 위한 기도를 부탁했던 국회 의원은?", "칼뱅이 작성한 편지는 대략 몇 개나 되는가?", "종교개혁 전집에서 칼뱅의 편지는 몇 권을 차지하나?", "칼뱅을 종교 개혁 시대의 위대한 편지 작가라고 평가했던 사람은 누구인가?", "1545년 학살사건이 발생하고 칼빈이 아라우의 국회에서 만난 사람은?" ]
<!DOCTYPE html> 장 칼뱅 참고문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장 칼뱅 참고문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장 칼뱅의 석판화 장 칼뱅 참고문헌은 프랑스 종교 개혁가 존 칼빈 (1509-1564)의 설교들, 성경 주석, 신학논문의 작품들 소개하는 것이다. 칼빈은 제네바 (1536-38 및 1541-64)에서만 오랫 동안 살았지만 그의 작품들은 그의 개혁 교회의 사상을 유럽의 여러나라와 세계의 여러곳으로 확산시켰다. 그의 방대한 작품들은 기독교와 유럽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목차 1 작품 2 기독교 강요 3 성경 주석과 설교 4 편지 5 설교 6 신학적인 논문 7 다른 작품 8 함께보기 9 각주 10 외부 링크 작품[편집] 칼빈의 전작품 칼뱅의 첫 번째 작품은 로마 철학자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관용론에 관한 주석(Seneca's De Clementia) 이다. 이 작품은 그의 인문주의적 사상과 학문성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첫 번째 신학적인 작품은 영혼의 수면(Psychopannychia)이다. 이 책은 사후에 영혼이 단지 잠을 잔다는 재세례파들에 대한 반박이다.[1] 1534년에 원고를 마쳤지만 친구들의 권면으로 미루다가 1542년에 출판하였다. 칼빈은 26세의 나이에 유명한 기독교 강요 (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출판하였다.[2]자신의 고국 프랑스에서는 1541년 처음으로 불어로 출판하였고, 최종판은 1559년(라틴어판)및 1560년(프랑스어판)이다. 개신교 신학의 중요한 주제인 하나님, 성경, 구원, 교회, 성례, 이신칭의, 기독교인의 자유와 같은 중요한 신학적인 것을 다루었다. 칼빈은 여호수아 (사무엘상 설교는 출판함)이후 역사서를 제외하고, 지혜서와 시편을 포함하여 구역 전체를 주석하였다. 그는 요한 이서와 삼서 , 그리고 요한 계시록을 제외하고 신약 성경 전체를 주석하여 출판하였다. 또한 1,300 통 이상의 편지를 썼다. 기독교 강요[편집] 1834년 판 존 칼빈의 기독교강요 (Institutio Religionis ) 칼빈은 자신의 사상을 주석, 설교, 논문에서 지속적으로 발전시켰다. 그의 신학의 가장 간결한 표현은 바로 기독교 강요 이다.[3] 기독교강요의 다양한 판은 개혁자로서 거의 모든 경력을 쌓았으며, 이 책의 연속된 개정은 그의 신학이 그의 청년시절에서 말년까지 거의 변화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1536 년 초판은 6 장으로 구성되었지만, 1539 년에 출판 된 두 번째 판은 멜란히톤의 신학통론 (Loci Communes)에 나오는 주제에 여러 장들을 추가했기 때문에 3 배로 늘어났다. 1543 년에 그는 다시 새로운 자료를 추가하고 사도 신경에 관한 장을 확장하였다. 1559년에마지막 판이 나왔다. 80개 장을 갖는 4권으로 구성되었고, 각 책은 신조의 진술에 따라 진술되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제 1 권, 그리스도의 구속주에 대한 제 2 권, 제 3권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음, 그리고 4 권은 그리스도의 사회 또는 교회에 관해서 다룬다. 성경 주석과 설교[편집] 칼빈은 성경에 대한 거의 모든 책들을 주석하였다. 1540년에 로마서 주석은 첫번째 작품이었다. 그는 지속적으로 주석하려고 했으나 6년이 지나서야 고린도전서에 대한 주석을 출판할 수 있었다. 그 작품을 쓴 4년후에는 바울서신에 대한 모든 주석을 출판하였다. 그리고 로마서 주석을 재판하였다. 일반서신을 주석하기 시작하였고 1555년까지 신약성경의 대부분을 주석하여 출판하였다. 칼빈은 신약을 먼저 주석하고 요한 2서, 요한 3서, 요한계시록을 주석하지 않았고, 구약은 시편을 시작으로 여호수아에 이르는 주석을 하였다. 칼빈은 1536년 기독교 강요 초판 발행이후에 그의 최초의 주석인 로마서 주석을 1540년에 출판하였고, 기독교 강요의 개정판이 나온 후에 1546년 1551년 사이 5년 동안 많은 주석들을 출판했다. 1546년에는 고린도전후서를, 1548년은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디모데전후서를, 1549년은 히브리서, 그리고 구약의 이사야서를, 1550년에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도서, 1551년은 베드로전후서, 요한일서, 빌레몬서, 야고보서, 유다서에 대한 주석을 출판하였다. 1552년 사도행전 1장에서 13장까지 주석하였고, 1553년은 요한복음을, 1554년은 사도행전 14장에서 28장을 그리고 창세기를, 1555년은 공관복음서에 대한 주석을 출판하였다. 칼빈의 구약 주석은 그의 강의안을 대부분 편집한 것이다. 1540년 후반에 구약에 대한 강의를 시작했으며 아직도 모든 강의안들이 남아 있다. 이사야서를 1549년 출판한 후에 8년 만에 1557년 시편과 호세아를, 1559년 소선지서를, 1561년 다니엘서를, 1563년 모세의 마지막 내권의 책, 예레미야, 애가서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칼빈 사후 1565년 에스겔(1-20장)과 여호수아서를 출판했다. 칼빈은 자신의 생애 마지막 15년 동안 설교를 했는데 순서적으로 보면 히브리서, 시편, 에레미야서, 요한복음, 사도행전, 애가서, 미가서, 스바냐서, 호세아서, 요엘서, 아모스서, 오바댜서, 요나서, 욥기,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신명기서, 디도서, 고린도전후서, 이사야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공관복음, 창세기, 사사기, 사무엘상하, 열왕기상에 대한 설교를 했다. 칼빈의 설교들은 가치가 없다고 생각되어 사람들에게 팔았던 19세기 초반 거의 분실되었다고 한다. 재생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칼빈의 신구약 주석 영어판 편지[편집] 영국의 에드워드 VI 에게 보낸 칼빈의 편지, 1552년 7월 4일 영국 박물관 칼빈의 서신은 기독교강요와 성경 주석 만큰 크게 독자층의 관심을 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서신은 당시의 특별한 필요성과 사건을 분명하게 다루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편지 쓰기의 규모는 그의 유명한 작품만큼이나 놀랐다. 그의 편지는 약 1,300 개이며, 그에게 쓰여진 약 3000 개의 편지와 함께 종교개혁 전집(Corpus Reformatorum)[4]에서 칼빈의 편지는 11권을 채운다. 워필드는 칼빈을 "종교 개혁 시대의 위대한 편지 작가"라고 부른다. 그의 편지는 종종 Charles d' Espeville라는 가명으로 쓰여졌다. 현지 극장에 관한 논쟁에서 신생 교회에 대한 지원을 정치적 동맹에서 선택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슈에 관심이있다. 그들은 또한 그의 해석학적 산문에서 분명하지 않은 개인성격을 드러낸다. 한 예가 1545 년에 프로방스의 왈도파의 3,600 명이 학살당한 후 나온 것이다. 칼빈은 21일 동안 베룬, 아우리히, 샤프하우젠, 바젤, 스트라스부르 그 지역을 방문하여 아라우의 국회에서 칸톤 (Cantons) 의원을 만나 생존자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간청했다. 그는 William Farel에게 자신의 슬픔에 대해 썼습니다. 임신 한 여성이나 유아도 배려받지 못하는 박해자들의 잔인한 학대였다. 이 핍박의 잔인함이 대단합니다. 내가 그것을 생각할 때 당황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 나는 슬픔이 닳아지고 눈물없이는 나의 글을 쓰지 못한다. 칼빈의 가장 잘 알려진 편지 중 하나는 Jacopo Sadoleto의 "제네바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Reformation Debate"에 대한 그의 회신이 오늘도 계속 인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5] 설교[편집] Sermons on I Samuel Sermons on Galatians Sermons on Psalm 119 Sermons on the deity of Christ Sermons on Election and Reprobation (Genesis) 신학적인 논문[편집] Psychopannychia Treatise on Relics The Secret Providence of God A Short Treatise on the Lord's Supper[6] 다른 작품[편집] De Clementia 함께보기[편집] 기독교 강요 장 칼뱅 장 칼뱅의 신학 각주[편집] ↑ Barth, Karl (1995) [1922]. 《Die Theologie Calvins》 [The Theology of John Calvin] (독일어). Translated by Geoffrey W. Bromiley. Grand Rapids: W.B. Eerdmans Pub. Co. ISBN 978-0-8028-0696-3.  ↑ "John Calvin" from "131 Christians everyone should know" in Christian History &amp; Biography ↑ See: ↑ *De Greef, Wulfert (2008), 《The Writings of John Calvin: An Introductory Guide》, Louisville, Kentucky: Westminster John Knox Press, 197쪽, ISBN 0-664-23230-2  ↑ Both letters can be found in Calvin's Tracts Relating to the Reformation (pp. 3-24, 25-71), translated by H. Beveridge, 1844. Digitized by Google Books ↑ Thompson, Bard (1996). 《Humanists and Reformers》. Grand Rapids: Wm. B. Eerdmans Publishing Company. 493–494쪽. ISBN 0-8028-6348-5.  외부 링크[편집] 칼빈의 작품 에서는 기독교 Classics 천상의 라이브러리 존 칼빈의 작품목록 에 Calvin500.com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장_칼뱅_참고문헌&amp;oldid=24428755" 분류: 칼뱅주의작품목록참고 문헌편지출판물장 칼뱅숨은 분류: CS1 - 독일어 인용 (de)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Portuguê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4일 (금) 22: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장 칼뱅(1509-1564)은 프랑스의 종교 개혁가로, 그의 작품들은 유럽과 세계에 걸쳐 개혁 교회의 사상을 확산시켰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오랜 기간 거주하며 다양한 신학적 저작을 남겼다. 1. **초기 작품**: - 칼뱅의 첫 번째 작품은 로마 철학자 세네카에 대한 주석으로, 인문주의적 사상을 드러낸다. - 그의 첫 신학적 저작인 '영혼의 수면'은 재세례파에 대한 반박으로 1542년에 출판되었다. 2. **기독교 강요**: - 26세에 출판한 '기독교 강요'는 개신교 신학의 중요한 주제를 다루며, 여러 차례 개정되었다. - 1559년 최종판은 80개 장으로 구성되어 신학적 주제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3. **성경 주석과 설교**: - 칼뱅은 성경의 거의 모든 책에 대한 주석을 남겼으며, 1540년에 로마서 주석을 출판한 것을 시작으로 신약과 구약을 아우르는 주석을 지속적으로 발표하였다. - 그의 설교는 생애 마지막 15년 동안 진행되었으며, 다양한 성경 구절에 대한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 4. **편지**: - 칼뱅은 약 1,300통의 편지를 썼으며, 이는 당시의 사건과 필요를 반영하고 있다. - 그의 편지는 종교개혁 전집에 수록되어 있으며,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5. **신학적 논문 및 기타 작품**: - 'Psychopannychia', 'Relics에 대한 논문', '하나님의 비밀한 섭리' 등 여러 신학적 논문을 저술하였다. - 그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인 'De Clementia'도 중요한 저작으로 평가된다. 칼뱅의 작품들은 기독교와 유럽 역사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신학적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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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곡_다장조_(바그너)
https://ko.wikipedia.org/wiki/교향곡_다장조_(바그너)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교향곡 다장조 (바그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교향곡 다장조 (바그너)</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교향곡 다장조</b> WWV.29는 <a>리하르트 바그너</a>가 완성한 유일한 <a>교향곡</a>이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개요</span></a></li> <li><a><span>2</span> <span>편성</span></a></li> <li><a><span>3</span> <span>연주시간</span></a></li> <li><a><span>4</span> <span>작품의 내용</span></a> <ul> <li><a><span>4.1</span> <span>제1악장</span></a></li> <li><a><span>4.2</span> <span>제2악장</span></a></li> <li><a><span>4.3</span> <span>제3악장</span></a></li> <li><a><span>4.4</span> <span>제4악장</span></a></li> </ul> </li> <li><a><span>5</span> <span>참고문헌</span></a></li> </ul> </div> <h2><span></span><span>개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바그너라고 하면, 흔히 오페라 등의 무대 작품 또는 그 작품에서 거의 독립된 형태로 자주 연주되는 서곡이나 전주곡을 떠놀리게 된다. 이것은 그의 피아노 소나타와 현악4중주 등의 순수한 기악곡이 거의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들이 그의 극음악과 비교해 볼 때, 완성도와 내용의 충실도가 뒤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b>교향곡 다장조</b>에는 교향곡으로서 적지않게 흥미로운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바그너의 학습기 직후의 작품이기 때문에 훗날 극음악의 거장이 된 그를 이해하는 데에도 꽤 중요한 작품이다. 물론 그런 연구적인 요소 외에 하나의 완성 된 예술 작품으로서도 충분히 즐거움을 주는 음악이다. </p><p>그는 교향곡을 2곡 썼는데, 1834년에 기회음악으로 작곡한 <b>교향곡 마장조</b>는 제1악장과 아다지오 2악장의 29마디까지만 쓰고 미완성으로 끝났다. (나중에 2악장은 보필됨.) 따라서 바그너가 완성한 교향곡으로는 이 <b>교향곡 다장조</b>를 들 수 있다. 이 교향곡은 형식과 작곡기법면에서 놀랄 만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이 크리스티안 바인리히(Christian Theodor Weinlig, 1780~1842, <a>클라라 슈만</a>의 작곡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음, <a>토마스 교회</a>의 지휘자) 밑에서 처음으로 작곡 수업을 마치고 난 직후인 19세 청년의 작품인 것을 감안할 때, 그 힘있는 음악 기법은 가히 감탄할 만한 것이다. 확고한 형식이 유지되고, 정돈된 음악적 대비를 멋지게 담아내었을 뿐 아니라 정교한 조바꿈도 자주 나타나므로 풍부한 울림을 감상할 수 있다. 바그너는 1830년경부터 많은 연주회용 서곡을 작곡하였으며 그런 경험이 교향곡 작곡에 자신감을 갖게 했을 것이다. 이 곡은 1832년 6월에 라이프치히에서 작곡하였다. </p><p>바그너의 가족들은 1882년 9월 14일에 베니스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 곳에서 반년 정도 머룰고 있던 1883년 2월 13일에 바그너는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이 체류기간 중인 1882년 12월 24일, 바그너는 아내 코지마의 생일 파티를 겸한 연주회를 페니체 극장에서 개최하였는데, 50년 전에 작곡한 이 교향곡을 자이톨이 만든 복원 총보를 사용하여 바그너 자신이 직접 연주하였다. 지금은 분실되고 말았지만, 원본 총보로 연주된 초연은 작곡 후 곧바로 1832년 11월에 프라하 음악원에서 디오니스 베버(Dionys Weber, 1799 ~ 1842, 체코의 작곡가이며 프라하 음악원 설립에 공헌한 음악교수)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이듬해인 1833년 1월에는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재연하기도 했다. 이 때 바그너는 당시 게반트하우스의 상임지휘자였던 <a>멘델스존</a>에게 이 곡의 총보를 선물하였는데 바그너의 바램대로 재연은 됐으나 멘델스존이 재연한 후 실수로 총보를 분실한다. 현재까지도 분실된 총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일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셩향을 갖게된 계기 中 하나가 된다. </p><p>이 곡은 1911년에 라이프치히의 M. 브로크하우스 출판사에서 초판(파트보)이 출판되었고, 곧이어 브라이트코프흐 &amp; 헤르텔 출판사에서 발간한 전집판에 수록되었다. 출판하게 된 경위는 잊혀져 있던 이 곡을 빌헬름 타페르트(Wilhelm Tappert, 1830 ~ 1907, 바그네리안으로 유명한 음악학자)가 재평가한 것을 받아들여 안톤 자이들(Anton Seidl, 1850 ~ 1898, 니벨룽의 반지의 완정 초연으로 유명한 지휘자로, 후에 뉴욕으로 가서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의 초연을 지휘함)이 남아있는 파트 악보를 가지고 복원한 총보와 편곡, 필사한 파트 악보를 따르고 있다. </p> <h2><span></span><span>편성</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플루트</a>2, <a>오보에</a>2, <a>클라리넷</a>2, <a>바순</a>2, <a>호른</a>4, <a>트럼펫</a>2, <a>트롬본</a>3, <a>팀파니</a>, 현5부 </p> <h2><span></span><span>연주시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약 40분 (또는 35분)</li></ul> <h2><span></span><span>작품의 내용</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제1악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소스테누토 에 마이스토소 - 알레그로 콘 브리오 다장조 4/4박자. 54마디의 서주와 반복이 있는 제시부, 명확한 주제 전개에 의한 발전부, 고전적인 형태를 따른 재현부 그리고 제2악장의 시작에 중요한 의미를 주는 종결부 등 잘 정돈되어 있는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반복을 포함하지 않고 468마디) 힘찬 다장조의 카덴차가 관현악의 투티로 5마디 연주된다. 명확한 기능화성을 따르고는 있지만 3마디에서는 2도 조(調)의 딸림화음을, 5마디에서는 도펠도미난테(Doppeldominante)를 차용하여 풍부한 색채를 암시하면서 시작된다. 2박자의 휴지 후에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등장하고 한 마디 늦게 바이올린이 서주 주제를 제시한다. 반음씩 하행하는 경과화음을 이용하여 장조와 단조의 울림을 모두 표현하려는 바그너의 독특한 화성을 들을 수 있다. 서주부는 악보1에서 a로 표시된 동기를 통일 소재로 하여 구성되는데, 또다른 중요한 소재가 11마디에서 목관악기군으로 나타나며 이 2개의 소재가 원과 같은 음형을 유지하면서 구성되어 어지럽게 조바꿈을 거듭하면서 발전된다. 이 악보1의 a소재가 마지막까지 남아 A단조의 딸림화음으로 반종지하여 서주부를 마친다. </p><p>알레그로 콘 브라오가 되는 55마디부터 제시부가 시작된다. A단조의 딸림화음을 이어받아 바이올린이 E음을 트레몰로로 연주하여 시작된다. 이것은 A단조의 딸림화음이 아니라 C장조의 제3음을 하기 시작한다. 이 트레몰로를 바탕으로 호른과 현이 저음부에서 제1주제를 제시한다. 이 주제동기가 C음의 지속저음 위에서 대담한 불협화음을 이루면서 제5도음을 하행시킨 G단조와 B♭단조적인 울림을 거쳐 강조되면, 78마디부터 투티의 ff로 명확한 형태의 주제가 확보된다. 주제의 후반은 특정적인 리듬을 가진 동기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된다. 하행 음계의 성격을 가진 경과음형이 점차 확실한 형태가 되어 110마디부터 ff로 나타나면, 112마디에 G음의 지속저음이 놓이고 그 위에 바이올린이 제2주제를 제시한다. 이미 암시된 하행음형 동기가 완전하게 발전된다. 그 속에 에핏드와 같은 악구가 처음에는 플루트 이어서 바이올린으로 나타나고, 다시 제2주제의 발전적 경과구가 되어 133마디에서 투티의 확보부에 이른다. </p><p>폭풍우와 같은 발전적인 확보부가 클라이맥스를 이룬 후 갑자기 조용해지고, 클라리넷과 바순이 돌체(Dolce)로 온화하게 제2주제의 주요동기를 연주한다. 이어서 다른 악기가 더해져 제2주제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듯한 악절로 제시부를 마친다. 이 제시부에는 8마디의 반복 이행구가 있는데, 제2주제의 소재를 A단조처럼 사용하여 서주부의 마지막과 같은 화음으로 반종지한다. 발전부는 170마디(반복되는 8마디 제외)에서 시작된다. 저현부가 B음부터 반음계적으로 상행하는 긴 저음 위에서, 제1주제의 전반부 동기인 악보3의 B가 같은 모양으로 반복하여 발전한다. 저음현이 E♭음까지 상행하면 일시적으로 E♭장조가 확립되고, 제1주제의 후반 동기인 악보4의 C도 더해져서 새로운 전개가 시작된다. 216마디부터는 제2주제의 동기인 악보4의 D와 E가 더해져서 4개의 소재를 사용한 폴리포닉적인 기법을 볼 수 있는데, C와 D를 연속하여 만든 새로운 선율 소재를 주고받아 여러 가지 악기로 연주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어서 C를 모든 현악기가 힘차게 연주하면 그것을 쫓듯이 관악기로 연주하는 짧지만 투티에 의한 클라이맥스가 이루어진다. 클라이맥스 후에 오보에가 p로 제2주제의 동기 d를 연주하면서 새로운 분위기로 바뀌어 발전부가 점차 마무리된다. 오보에에 이어 바순이 다시 한번 이 음형을 연주하면 재현부에 G#음의 지속저음이 놓이고 이번에는 제1주제의 동기 b가 바순으로 연주된다. 잠시 후에 이것을 부정하듯 다른 악기들이 f로 긴 화성을 연주한다. 그러나 바순은 다시 동기 b를 연주하여 재현부에 대한 강한 집착을 나타낸다. 이런 모습이 4회 반복되면, 화성이 으뜸조의 딸림화음으로 이동하여 ff의 투티에 의해 제1주제로 돌아가 재현부가 된다. </p><p>307마디 이후의 재현부는 제시부보다 주제가 세련되게 나타나며, 불필요한 이행구없이 계속되어 323마디 이후에 제2주제도 나타난다. 제1주제의 영향을 받아 조금은 변화되지만 340마디 이후에는 원래의 형태가 재현된다. 이어서 악보5의 에피소드 악구도 재현된다. 그러나 제2주제부는 멈추지 않고 마치 발전부처럼 크게 확장된다. 동기 E에 의한 발전 후에 ff의 긴 화음으로 끝나면, 이번에는 바이올린이 p로 동기 C를 연주하여 제1주제를 사용한 코다에 가까와졌음을 암시한다. 이때 오보에나 클라리넷으로 강조된 D음 동기가 간주처럼 삽입된다. 이것은 나중에 제2악장을 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음형이 된다. 420마디부터 제1주제를 이용한 코타가 이어지며 종지 바로 앞에 451마디부터 동기 E가 다시 회상되는데, 압도적인 ff의 투티에 의한 종지화음 속에 흡수된다. </p> <h3><span></span><span>제2악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안단테 마 논 트로포 운 포코 마에스토소 가단조 3/4박자. 느린 악장으로서 고전적인 가요 형식은 아니고 발전부를 생략한 소나타 형식. 또는 론도 형태의 구성이다. 내용면에서 보면 대체로 A-B-A-B-코다의 형식 구조이며 280마디로 구성되어 있다. 오보에와 클라리넷으로 시작되는 이 음형은 제1악장의 코다에 있던 것이며, 이 목관의 2음 동기는 언제나 제1주제가 나타나기 직전에 사용된다는 종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1주제는 현악기군으로 제시된다. 이 제1주제부는 단편적인 주제 악구가 쉼표 사이에서 차례로 나타나 변형되면서 발전한다. 이 제1주제부는 단편적인 주제 악구가 쉼표 사이에서 차례로 나타나 변형되면서 발전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주제로서 제시되는 것은 17마디부터 비올라와 첼로의 유니즌으로 연주되는 건 노래일 것이다. </p><p>이 노래는 현악기를 중심으로 발전되며, 관악기는 기준박자를 알리듯이 화성을 연주할 뿐이다. 주제는 크게 변화하지 않으며, 조성도 거의 A단조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 이후 악기의 등장이 둔해지고 첼로에만 단편적인 주제가 남아 E음으로 유지되면, 악장 첫머리에 나타났던 악보6의 2음 동기가 오보에와 클라리넷으로 연주되고 현악기의 피치카토에 의한 네 마디의 이행구를 이끌어내어 반종지로 제1부를 마친다. 62째마디부터의 제2부는 아주 다른 양상을 보인다. 모든 관악기와 팀파니가 ff의 장중한 화음을 가진 당당한 음형으로 시작된다. 계속해서 호른과 트럼펫이 위엄있게 신호풍의 리듬을 연주한다. 팀파니의 F음 트레몰로만 보아도 이 부분이 F장조라는 것은 분명한데, 5도음을 상행으로 변형시켜 D단조의 뉘앙스까지도 도입하고 있다. 이 관악기에 의한 악절이 끝나면 현악기가 상하행 음계의 악구를 연주하고 75마디에서 투티에 의해 주제가 확고하게 주제다운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p><p>관악기와 현악기의 소재는 섞이지 않고 균형을 이루면서 발전한다. 단, 제1부와는 달리 많은 화음을 차용하여 조성적인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96마디부터 현악기군의 트레몰로 화음 위에서 관악기가 제2부에서 나타난 것과 동일한 악절을 C장조의 색채를 도입하면서 제2부의 종지로 이끌어간다. 103마디에서 악보6의 2음 동기가 오보에에 이어서 트롬본으로 나타나 이 부분을 마친다. (여기까지 B) 106마디부터 125마디까지는 2음 동기를 완벽하게 이용한 발전적 이행구로 되어 있다. 이 이행구에는 아주 소극적기는 하지만 제1부, 제2부 주제의 부분적 동기를 사용한 변형도 저현부에 나타난다. 126마디부터 A가 다시 나타난다. 2음 동기에 의한 서주적 부분은 바로 앞의 다시 등장하는데, 이행적인 악구를 생략한 질서정연한 형태로 주요부가 재현되어 나타난다. 172마디부터 앞에 나타났던 오보에와 클라리넷의 2음 동기에 의해서 A가 다시 등장한다. 확고한 A장조의 주제부에 의한 19마디 규모로 축소되어 있다. 이어서 B첫머리 부분의 4마디도 부수적으로 회상된다. 195마디부터의 마지막 부분은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제1부 주제의 단편적인 음악을 곁들인 조용하고 회상적인 코다가 이어지고 사라지듯이 악장을 마친다. </p> <h3><span></span><span>제3악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알레그로 아사이 C장조 3/4박자 명확히 적혀 있지는 않지만 내용면으로 보아 스케르초풍의 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적 내용의 전환점에 반복기호나 겹세로줄이 있어 구성이 명확하게 되어 있다. 대략적인 형색을 기호로 표시하면 A-B-A-B-A가 되며, 2개의 주제부가 교대로 나타나도록 구성되어 있다. B부분은 약간 템포가 느려지고 주제도 A부분에 비해 유동적이기 때문에, 트리오족인 성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마지막 A는 프레스토로 되어 주제의 명확한 회귀(回歸)라기보다는 오히려 코다적인 특성을 갖게 되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복을 제외하면 전체가 451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알레그로 아시이는 힘차게 제1부 주제의 주요 동기를 2번 연주하여 시작한다. 아포지아투라(앞꾸밈음)를 잘 이용한 이 음형은 스케르초 악장의 소재로 알맞은 것이다. 5마디부터 주제가 제시된다. 이 스타카토의 하행 악구에 이어서 현악기군으로 상행 응답악기가 연주되어 주제부 전체를 완성한다. </p><p>40마디에 반복기호가 있어 5마디로 되돌아온다. 41마디부터는 아포지라투라가 잇는 2음 동기를 관악기가 계속 유지하는 가운데, 현악기가 새롭게 부드러운 소재를 제시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소재로 계속 발전하여 124마디의 반복기호에 이른다. 세 마디의 이행구 후에 제2부가 시작된다. 운 포코 메노 알레그로(알레그로보다 약간 느리게)로 조금 속도릉 늦추는 128마디부터는 트리오가 된다. 스케르초의 주요부와는 젼혀 다를, 순차진행하는 부드러운 주제가 관악기의 풍부한 울림으로 연주된다. 이 주제의 형태는 거의 바뀌지 않고, 풍부한 조바꿈으로 음색이 바뀌면서 여러 번 되풀이되어 212마디까지 제2부를 만들어 간다. 템포 프리모(처음 빠르기로)로 213마디부터 제1부가 다시 나타나는데, 내용 변화가 거의 없으므로 다 카포적인 형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34마디부터의 메노 알레그로(약간 느린 알레그로) 부분은 제2부, 즉 트리오의 재현이다. 여기에서도 별로변화는 나타나지 않아, 결국 스케르초와 트리오 전체가 다 카포되는 것과 거의 동일한 형태가 된다. 417마디부터는 템포가 프레스토로 변하여 반복부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는데, 팀파니가 C장조의 음뜸음과 딸림음을 스케르초 주제동기의 리듬을 이용하여 연주하는 가운데 관악기가 긴 화음을 연주하면서 크레셴도로 진행된다. 팀파니의 리듬에 이끄려서 관현악 전체에 스케르초 주제의 동기가 다시 나타나 압도적인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악장을 마친다. </p> <h3><span></span><span>제4악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알레그로 몰토 에 비바체 C장조 4/4박자. 소나타 형식으로서, 397마디로 구성되어 있다. C장조의 으뜸화음을 f로 연주한 후 한 마디의 휴지가 있고, 우후 바이올린으로 제1주제가 제시된다. 같은 형태로 거의 이 주제동기를 이용한 D단조의 응답악구가 이어진다. 쉼표를 끼고 저음현에 E장조적인 이행악구가 나타나서 경과구가 된다. 23째마디부터 주제가 f로 확보된 후의 구성은 마치 발전부가 시작된 듯이 주제를 사용한 부분이 계속된다. 그 과정에서 G장조를 향하여 제2주제부를 인도하여 A단조로 되거나, C단조로 조바꿈하면서 전개가 이루어진다. ff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현악기군이 8분음표로 하행음계를 연주하면서 디미누엔도하며, p에 이르면 목관악기군이 폴리포닉적인 제2주제부를 제시한다. 이 3성 체제의 주제부는 각 성부에 동일한 주제적 중요성이 부여되어 있다. 이 주제부는 관악기를 중심으로, 제1주제의 소재를 사용한 현악기의 대선율과도 때때로 혼합되면서 발전한다. 점차 제1주제를 이용한 현악기군이 주도권을 잡아가고 제시부를 마무리하는 경과적 악구로 이어진다. </p><p>긴 휴지부 후에 112마디부터 시작되는 발전부는 바이올린이 제1주제의 소재를 연주한다. 그리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다른 하나는 제1주제의 제시 때에 경과주제로 나타난 것으로, 그 특성이 제2주제와 비슷하기 때문에 발전부에서 많이 이용된다. 관악기를 중심으로 폴리포닉한 전개가 부드럽게 이루어지면, 135마디부터는 현악기가 가담하여 대위법적 기법을 사용하여 아름답게 전개된다. 151마디부터는 이 소재를 선율적으로 혼합하여 발전하는 관악기와는 별도로, 아주 비슷한 형태의 제1주제 음형이 현악기로 연주되어 상반된 성격의 두 주제가 동시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전개가 이루어진다. 그동안 제1주제의 음형이 점차로 위에서 나타나고, 164마디부터는 첼로와 더블베이스에 이어 비올라와 제2, 1바이올린이 교대로 나타나 제1주제를 저현부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음이 더해 가면서 완전히 주도권을 잡는다. 폭풍우와 같은 현악기의 연주가 끝나면, 193마디부터 다시 관악기로 제2주제에 경과주제를 더한 음형이 G음의 지속적을 위에서 pp로 온화하게 연주된다. C단조적인 울림을 가지고 딸림화음으로 반종지하면 제1주제의 부분동기를 이용한 선율이 저현악기로 갑자기 f로 나타나, 211마디에서 투티에 의한 으뜸음이 한 음으로 강조된다. </p><p>재현부이다. 이 재현부는 거의 제시부의 구성에 따라 충실하게 진행되어, 두 주제 모두 고전적인 소나타 형식처럼 으뜸조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제시부의 반복부분에 해당하는 312째마디는 F장조의 딸림7화음으로 반종지되고, 새로운 것을 암시하면서 긴 휴지부에 들어간다. 314마디부터는 발전부의 시작과 동일한 음악이 조성을 바꾸어 재현된다. 그러나 새로운 발전부로서의 성격은 약하고, 오히려 이행(移行) 악구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이것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결국 348마디부터 제1주제를 사용한 반복부로 이어진다. 베토벤적인 느낌이 강한 코다는 363마디에서 피우 알레그로(더욱 빠르게) 더욱 빨라져 압도적인 ff의 클라이맥스에 이르고 당당한 울림과 음량 속에서 전악장을 마친다. </p> <h2><span></span><span>참고문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작곡가별 명곡해설 라이브러리》 2권 '바그너' 〈음악지우사〉 (音樂世界)</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교향곡_다장조_(바그너)&amp;oldid=19835660</a>"</div> <div><div><a>분류</a>: <ul><li><a>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Català</a></li><li><a>English</a></li><li><a>Español</a></li><li><a>Suomi</a></li><li><a>Français</a></li><li><a>Italiano</a></li><li><a>日本語</a></li><li><a>Русский</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7년 10월 20일 (금) 18: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바그너는 교향곡 몇 곡을 작곡하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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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그너는 교향곡 몇 곡을 작곡하였는가?", "바그너가 작곡하였으나 미완성으로 끝난 교향곡은?", "크리스티안 바인리히 밑에서 작곡수업을 마치고 난 후 처음으로 만든 곡은?", "바그너가 작곡한 교향곡으로 미완성으로 끝난 곡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바그너가 작곡한 교향곡이 두 곡이 있는데 둘중 하나는 미완성이다. 완성한 곡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바그너가 작곡한 두 교향곡 중 교향곡 다장조는 바그너가 몇살때 작곡했습니까?", "바그너는 몇 개의 교향곡을 작곡했는가?", "바그너가 교향곡 다장조를 쓴 나이는?", "바그너의 가족들이 여행을 떠난 곳은?", "바그너가 아내를 위해 연주회를 개최한 장소는?", "교향곡 다장조를 분실한 사람은?", "바그너가 교향곡 다장조를 작곡한 것은 1882년으로부터 몇년 전 일입니까?",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 원본 총보는 누구에 의해 분실되었나요?", "바그너는 어디서 사망하였는가?", "바그너는 누구에게 교향곡 다장조 총보를 선물하였는가?", "제시부, 발전부,재현부 다음 순서는?", "제시부, 발전부, 재현부,종결부의 형식을 갖춘 것은?", "소나타 형식은 반복을 포함하지 않고 최대 몇 마디 까지 있는가?", "교향곡 다장조에서 바그너는 어떤 방식을 사용해 장조와 단조의 울림을 모두 표현하려하였는가?", "알레그로 콘 브리오 다장조는 어떠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가?", "제시부는 몇 마디 부터 시작되는가?", "이 곡에서 A단조의 딸림화음 후 E음을 트레몰로로 연주하는 악기는?", "투티의 ff가 명확한 형태의 주제로 연주되는 마디는?", "교향곡 다장조의 제시부는 몇마디에서부터 시작되나요?", "교향곡 다장조의 제시부를 시작하는 악기는 무엇입니까?", "제2주제를 제시하는 악기는 무엇입니까?",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에서 제시부가 시작되는 것은 몇 마디부터인가?",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에서 제시부를 시작하는 악기는?", "클라리넷과 바순이 돌체로 연주하는 것은?", "발전부는 반복되는 8마디를 제외하고 몇 마디부터 시작 되는가?", "폴리포닉적인 기법이 시작되는 마디는?", "교향곡 다장조에서 발전부의 시작마디는 몇마디입니까?", "교향곡 다장조에는 폴리포닉적인 기법이 사용되는데 몇마디에서부터 볼 수 있습니까?",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에서 제시부에는 몇 마디의 반복이행구가 있는가?",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에서 발전부는 몇 마디에서 시작하는가?", "제시부 보다 주제가 세련되게 나타나는 부분은?", "마치 발전부처럼 크게 확장되는 부분은?", "제2악장을 시작하는데 큰 역할을 하는 음형이 되는 부분은?", "교향곡 다장조의 재현부는 몇마디부터 입니까?", "교향곡 다장조에서 340마디 이후에 바이올린이 연주할 때 간주처럼 삽입되는 D음 동기는 어떤 악기로 연주되나요?",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에서 제1주제를 이용한 코타가 이어지는 부분은?",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에서 D음 동기는 어떤 악기들로 강조되나?", "제 1주제는 어떤악기군으로 제시되는가?", "단편적인 주제 악구가 쉼표 사이에서 차례로 변형되며 발전하는 주제부는?", "본격적인 주제가 제시되는 마디는?", "안단테 이하 3/4박자는 론도 형태의 구성이나 내용면에서는 어떤 형식 구조입니까?", "총 몇마디로 구성되어있습니까?", "본격적인 주제로 제시되는 노래는 어떤 악기로 연주됩니까?",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 2악장은 어떤 형태의 구성인가?",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 2악장은 몇마디 구성인가?", "어떤 악기를 중심으로 발전되었는가?", "대부분 어떤 조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투티에 의해 주제가 주제다운 형태로 나타나는 마디는?", "관악기와 현악기 중 어느 악기를 중심으로 노래가 발전됩니까?", "주로 사용되는 조성은 무엇입니까?", "제2부는 현악기와 관악기 중 어느 악기가 주를 이룹니까?",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 제2악장 제2부는 몇 째마디부터 시작하는가?", "62째마디부터의 제2부에서 팀파니는 어떠한 음을 연주하는가?", "악보6의 2음 동기가 오보에에서 트롬본으로 나타나 마치는 마디는?", "주제의 부분적 동기를 사용한 변형이 나타나는 부분은?", "제1부 주제에서 코다로 이어지고 이어 사라지듯이 악장을 마치는 시작의 마디는?", "103마디에서 악보6의 2음 동기는 오보에에 이어 어느 악기로 연주됩니까?", "A가 다시 나타나는 마디는 몇마디입니까?", "두번째로 다시 A가 등장하는 마디는 몇마디입니까?",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 172마디부터 2음 동기를 연주하는 악기는?",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 제2악장을 마무리하는 악기는?", "스케르포풍의 악장이라 불리는 것은?", "스케르초풍의 악장의 내용을 띄고 있는 것은?", "템포가 느려지고 주제가 유동적으로 변화하는 부분은?", "알레그로 아사이 C장조 3/4박자는 내용면으로 보아 어떤풍의 악장으로 볼수 있습니까?", "알레그로 아사이 C장조 3/4박자의 대략적인 형색을 알파벳기호로 표시하면 어떻게 됩니까?", "B부분은 어떤 성격을 갖습니까?",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 3악장은 내용면으로 어떠한 악장인가?",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에서 알레그로 아사이는 제1부 주제의 주요동기를 몇 번 연주하여 시작하는가?", "40마디에서 5마디로 돌아오는게 하는 기호는?", "아포지라투라가 잇는 2음 동기가 나타나는 마디는?", "처음 빠르기로 돌아가라는 뜻의 음악기호는?", "41마디에서 새롭게 부드러운 소재를 제시하는 데 쓰인 악기는 무엇인가요?", "알레그로보다 약간 느리게의 뜻을 가진 음악용어는 무엇입니까?", "처음 빠르기로 라는 뜻의 음악용어는 무엇입니까?", "41마디부터 아포지라투라가 잇는 2음 동기를 유지하는 악기군은 무엇인가?", "213마디부터 시작되는 제1부는 내용변화가 없는 어떠한 형태인가?", "폴리포닉적인 제2주제부를 제시하는 악기군은?", "각 성부에 동일한 주제적 중요성이 부여되는 부분은?", "주제부는 어떤 악기를 중심으로 연주되는가?", "제1주제는 어느 악기로 제시됩니까?", "ff의 클라이맥스를 연주하는 악기군은 무엇입니까?",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 제4악장은 몇 마디인가?", "교향곡 다장조 제4악장 제1주제를 제시하는 악기는?", "112마디부터 시작되는 부분은?", "135마디부터 나타나는 연주기법은?", "112마디에서 제1주제를 연주하는 악기는?", "135마디에서부터 추가로 연주해들어오는 악기는 무엇입니까?", "164마디에서 첼로와 더블베이스에 이어 등장하는 악기는 바이올리 외에 무엇입니까?",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 제4악장 135마디부터 현악기가 가담하여 어떠한 기법을 사용하는가?", "바그너의 교향곡 다장조 제4악장 제2주제에 경과주제를 더한 음형이 연주되는 것은 몇 마디부터인가?", "고전적인 소나타 형식처럼 으뜸조로 되돌아오는 부분은?", "더욱 빠르게의 뜻을 가진 음악기호는?", "이행 악구적인 성격이 두드러지는 부분은?", "재현부가 으뜸조로 돌아오는것은 어떤 형식을 닮은 것입니까?", "더욱 빠르게를 뜻하는 음악용어는 무엇입니까?", "재현부의 두 주제는 어떠한 화음으로 되돌아오는가?", "새로운 것을 암시하면서 긴 휴지에 들어가는 마디는?" ]
<!DOCTYPE html> 교향곡 다장조 (바그너)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교향곡 다장조 (바그너)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교향곡 다장조 WWV.29는 리하르트 바그너가 완성한 유일한 교향곡이다. 목차 1 개요 2 편성 3 연주시간 4 작품의 내용 4.1 제1악장 4.2 제2악장 4.3 제3악장 4.4 제4악장 5 참고문헌 개요[편집] 바그너라고 하면, 흔히 오페라 등의 무대 작품 또는 그 작품에서 거의 독립된 형태로 자주 연주되는 서곡이나 전주곡을 떠놀리게 된다. 이것은 그의 피아노 소나타와 현악4중주 등의 순수한 기악곡이 거의 잊혀져가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작품들이 그의 극음악과 비교해 볼 때, 완성도와 내용의 충실도가 뒤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교향곡 다장조에는 교향곡으로서 적지않게 흥미로운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바그너의 학습기 직후의 작품이기 때문에 훗날 극음악의 거장이 된 그를 이해하는 데에도 꽤 중요한 작품이다. 물론 그런 연구적인 요소 외에 하나의 완성 된 예술 작품으로서도 충분히 즐거움을 주는 음악이다. 그는 교향곡을 2곡 썼는데, 1834년에 기회음악으로 작곡한 교향곡 마장조는 제1악장과 아다지오 2악장의 29마디까지만 쓰고 미완성으로 끝났다. (나중에 2악장은 보필됨.) 따라서 바그너가 완성한 교향곡으로는 이 교향곡 다장조를 들 수 있다. 이 교향곡은 형식과 작곡기법면에서 놀랄 만한 완성도를 가지고 있다. 이 작품이 크리스티안 바인리히(Christian Theodor Weinlig, 1780~1842, 클라라 슈만의 작곡 스승으로도 알려져 있음, 토마스 교회의 지휘자) 밑에서 처음으로 작곡 수업을 마치고 난 직후인 19세 청년의 작품인 것을 감안할 때, 그 힘있는 음악 기법은 가히 감탄할 만한 것이다. 확고한 형식이 유지되고, 정돈된 음악적 대비를 멋지게 담아내었을 뿐 아니라 정교한 조바꿈도 자주 나타나므로 풍부한 울림을 감상할 수 있다. 바그너는 1830년경부터 많은 연주회용 서곡을 작곡하였으며 그런 경험이 교향곡 작곡에 자신감을 갖게 했을 것이다. 이 곡은 1832년 6월에 라이프치히에서 작곡하였다. 바그너의 가족들은 1882년 9월 14일에 베니스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 곳에서 반년 정도 머룰고 있던 1883년 2월 13일에 바그너는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이 체류기간 중인 1882년 12월 24일, 바그너는 아내 코지마의 생일 파티를 겸한 연주회를 페니체 극장에서 개최하였는데, 50년 전에 작곡한 이 교향곡을 자이톨이 만든 복원 총보를 사용하여 바그너 자신이 직접 연주하였다. 지금은 분실되고 말았지만, 원본 총보로 연주된 초연은 작곡 후 곧바로 1832년 11월에 프라하 음악원에서 디오니스 베버(Dionys Weber, 1799 ~ 1842, 체코의 작곡가이며 프라하 음악원 설립에 공헌한 음악교수)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이듬해인 1833년 1월에는 라이프치히의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가 재연하기도 했다. 이 때 바그너는 당시 게반트하우스의 상임지휘자였던 멘델스존에게 이 곡의 총보를 선물하였는데 바그너의 바램대로 재연은 됐으나 멘델스존이 재연한 후 실수로 총보를 분실한다. 현재까지도 분실된 총보는 아직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 일은 바그너의 반유대주의 셩향을 갖게된 계기 中 하나가 된다. 이 곡은 1911년에 라이프치히의 M. 브로크하우스 출판사에서 초판(파트보)이 출판되었고, 곧이어 브라이트코프흐 &amp; 헤르텔 출판사에서 발간한 전집판에 수록되었다. 출판하게 된 경위는 잊혀져 있던 이 곡을 빌헬름 타페르트(Wilhelm Tappert, 1830 ~ 1907, 바그네리안으로 유명한 음악학자)가 재평가한 것을 받아들여 안톤 자이들(Anton Seidl, 1850 ~ 1898, 니벨룽의 반지의 완정 초연으로 유명한 지휘자로, 후에 뉴욕으로 가서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의 초연을 지휘함)이 남아있는 파트 악보를 가지고 복원한 총보와 편곡, 필사한 파트 악보를 따르고 있다. 편성[편집] 플루트2, 오보에2, 클라리넷2, 바순2, 호른4, 트럼펫2, 트롬본3, 팀파니, 현5부 연주시간[편집] 약 40분 (또는 35분) 작품의 내용[편집] 제1악장[편집] 소스테누토 에 마이스토소 - 알레그로 콘 브리오 다장조 4/4박자. 54마디의 서주와 반복이 있는 제시부, 명확한 주제 전개에 의한 발전부, 고전적인 형태를 따른 재현부 그리고 제2악장의 시작에 중요한 의미를 주는 종결부 등 잘 정돈되어 있는 소나타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반복을 포함하지 않고 468마디) 힘찬 다장조의 카덴차가 관현악의 투티로 5마디 연주된다. 명확한 기능화성을 따르고는 있지만 3마디에서는 2도 조(調)의 딸림화음을, 5마디에서는 도펠도미난테(Doppeldominante)를 차용하여 풍부한 색채를 암시하면서 시작된다. 2박자의 휴지 후에 플루트와 클라리넷이 등장하고 한 마디 늦게 바이올린이 서주 주제를 제시한다. 반음씩 하행하는 경과화음을 이용하여 장조와 단조의 울림을 모두 표현하려는 바그너의 독특한 화성을 들을 수 있다. 서주부는 악보1에서 a로 표시된 동기를 통일 소재로 하여 구성되는데, 또다른 중요한 소재가 11마디에서 목관악기군으로 나타나며 이 2개의 소재가 원과 같은 음형을 유지하면서 구성되어 어지럽게 조바꿈을 거듭하면서 발전된다. 이 악보1의 a소재가 마지막까지 남아 A단조의 딸림화음으로 반종지하여 서주부를 마친다. 알레그로 콘 브라오가 되는 55마디부터 제시부가 시작된다. A단조의 딸림화음을 이어받아 바이올린이 E음을 트레몰로로 연주하여 시작된다. 이것은 A단조의 딸림화음이 아니라 C장조의 제3음을 하기 시작한다. 이 트레몰로를 바탕으로 호른과 현이 저음부에서 제1주제를 제시한다. 이 주제동기가 C음의 지속저음 위에서 대담한 불협화음을 이루면서 제5도음을 하행시킨 G단조와 B♭단조적인 울림을 거쳐 강조되면, 78마디부터 투티의 ff로 명확한 형태의 주제가 확보된다. 주제의 후반은 특정적인 리듬을 가진 동기를 중심으로 크게 발전된다. 하행 음계의 성격을 가진 경과음형이 점차 확실한 형태가 되어 110마디부터 ff로 나타나면, 112마디에 G음의 지속저음이 놓이고 그 위에 바이올린이 제2주제를 제시한다. 이미 암시된 하행음형 동기가 완전하게 발전된다. 그 속에 에핏드와 같은 악구가 처음에는 플루트 이어서 바이올린으로 나타나고, 다시 제2주제의 발전적 경과구가 되어 133마디에서 투티의 확보부에 이른다. 폭풍우와 같은 발전적인 확보부가 클라이맥스를 이룬 후 갑자기 조용해지고, 클라리넷과 바순이 돌체(Dolce)로 온화하게 제2주제의 주요동기를 연주한다. 이어서 다른 악기가 더해져 제2주제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듯한 악절로 제시부를 마친다. 이 제시부에는 8마디의 반복 이행구가 있는데, 제2주제의 소재를 A단조처럼 사용하여 서주부의 마지막과 같은 화음으로 반종지한다. 발전부는 170마디(반복되는 8마디 제외)에서 시작된다. 저현부가 B음부터 반음계적으로 상행하는 긴 저음 위에서, 제1주제의 전반부 동기인 악보3의 B가 같은 모양으로 반복하여 발전한다. 저음현이 E♭음까지 상행하면 일시적으로 E♭장조가 확립되고, 제1주제의 후반 동기인 악보4의 C도 더해져서 새로운 전개가 시작된다. 216마디부터는 제2주제의 동기인 악보4의 D와 E가 더해져서 4개의 소재를 사용한 폴리포닉적인 기법을 볼 수 있는데, C와 D를 연속하여 만든 새로운 선율 소재를 주고받아 여러 가지 악기로 연주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어서 C를 모든 현악기가 힘차게 연주하면 그것을 쫓듯이 관악기로 연주하는 짧지만 투티에 의한 클라이맥스가 이루어진다. 클라이맥스 후에 오보에가 p로 제2주제의 동기 d를 연주하면서 새로운 분위기로 바뀌어 발전부가 점차 마무리된다. 오보에에 이어 바순이 다시 한번 이 음형을 연주하면 재현부에 G#음의 지속저음이 놓이고 이번에는 제1주제의 동기 b가 바순으로 연주된다. 잠시 후에 이것을 부정하듯 다른 악기들이 f로 긴 화성을 연주한다. 그러나 바순은 다시 동기 b를 연주하여 재현부에 대한 강한 집착을 나타낸다. 이런 모습이 4회 반복되면, 화성이 으뜸조의 딸림화음으로 이동하여 ff의 투티에 의해 제1주제로 돌아가 재현부가 된다. 307마디 이후의 재현부는 제시부보다 주제가 세련되게 나타나며, 불필요한 이행구없이 계속되어 323마디 이후에 제2주제도 나타난다. 제1주제의 영향을 받아 조금은 변화되지만 340마디 이후에는 원래의 형태가 재현된다. 이어서 악보5의 에피소드 악구도 재현된다. 그러나 제2주제부는 멈추지 않고 마치 발전부처럼 크게 확장된다. 동기 E에 의한 발전 후에 ff의 긴 화음으로 끝나면, 이번에는 바이올린이 p로 동기 C를 연주하여 제1주제를 사용한 코다에 가까와졌음을 암시한다. 이때 오보에나 클라리넷으로 강조된 D음 동기가 간주처럼 삽입된다. 이것은 나중에 제2악장을 시작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음형이 된다. 420마디부터 제1주제를 이용한 코타가 이어지며 종지 바로 앞에 451마디부터 동기 E가 다시 회상되는데, 압도적인 ff의 투티에 의한 종지화음 속에 흡수된다. 제2악장[편집] 안단테 마 논 트로포 운 포코 마에스토소 가단조 3/4박자. 느린 악장으로서 고전적인 가요 형식은 아니고 발전부를 생략한 소나타 형식. 또는 론도 형태의 구성이다. 내용면에서 보면 대체로 A-B-A-B-코다의 형식 구조이며 280마디로 구성되어 있다. 오보에와 클라리넷으로 시작되는 이 음형은 제1악장의 코다에 있던 것이며, 이 목관의 2음 동기는 언제나 제1주제가 나타나기 직전에 사용된다는 종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제1주제는 현악기군으로 제시된다. 이 제1주제부는 단편적인 주제 악구가 쉼표 사이에서 차례로 나타나 변형되면서 발전한다. 이 제1주제부는 단편적인 주제 악구가 쉼표 사이에서 차례로 나타나 변형되면서 발전한다. 그러나 본격적인 주제로서 제시되는 것은 17마디부터 비올라와 첼로의 유니즌으로 연주되는 건 노래일 것이다. 이 노래는 현악기를 중심으로 발전되며, 관악기는 기준박자를 알리듯이 화성을 연주할 뿐이다. 주제는 크게 변화하지 않으며, 조성도 거의 A단조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다. 이후 악기의 등장이 둔해지고 첼로에만 단편적인 주제가 남아 E음으로 유지되면, 악장 첫머리에 나타났던 악보6의 2음 동기가 오보에와 클라리넷으로 연주되고 현악기의 피치카토에 의한 네 마디의 이행구를 이끌어내어 반종지로 제1부를 마친다. 62째마디부터의 제2부는 아주 다른 양상을 보인다. 모든 관악기와 팀파니가 ff의 장중한 화음을 가진 당당한 음형으로 시작된다. 계속해서 호른과 트럼펫이 위엄있게 신호풍의 리듬을 연주한다. 팀파니의 F음 트레몰로만 보아도 이 부분이 F장조라는 것은 분명한데, 5도음을 상행으로 변형시켜 D단조의 뉘앙스까지도 도입하고 있다. 이 관악기에 의한 악절이 끝나면 현악기가 상하행 음계의 악구를 연주하고 75마디에서 투티에 의해 주제가 확고하게 주제다운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관악기와 현악기의 소재는 섞이지 않고 균형을 이루면서 발전한다. 단, 제1부와는 달리 많은 화음을 차용하여 조성적인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96마디부터 현악기군의 트레몰로 화음 위에서 관악기가 제2부에서 나타난 것과 동일한 악절을 C장조의 색채를 도입하면서 제2부의 종지로 이끌어간다. 103마디에서 악보6의 2음 동기가 오보에에 이어서 트롬본으로 나타나 이 부분을 마친다. (여기까지 B) 106마디부터 125마디까지는 2음 동기를 완벽하게 이용한 발전적 이행구로 되어 있다. 이 이행구에는 아주 소극적기는 하지만 제1부, 제2부 주제의 부분적 동기를 사용한 변형도 저현부에 나타난다. 126마디부터 A가 다시 나타난다. 2음 동기에 의한 서주적 부분은 바로 앞의 다시 등장하는데, 이행적인 악구를 생략한 질서정연한 형태로 주요부가 재현되어 나타난다. 172마디부터 앞에 나타났던 오보에와 클라리넷의 2음 동기에 의해서 A가 다시 등장한다. 확고한 A장조의 주제부에 의한 19마디 규모로 축소되어 있다. 이어서 B첫머리 부분의 4마디도 부수적으로 회상된다. 195마디부터의 마지막 부분은 바이올린이 연주하는, 제1부 주제의 단편적인 음악을 곁들인 조용하고 회상적인 코다가 이어지고 사라지듯이 악장을 마친다. 제3악장[편집] 알레그로 아사이 C장조 3/4박자 명확히 적혀 있지는 않지만 내용면으로 보아 스케르초풍의 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음악적 내용의 전환점에 반복기호나 겹세로줄이 있어 구성이 명확하게 되어 있다. 대략적인 형색을 기호로 표시하면 A-B-A-B-A가 되며, 2개의 주제부가 교대로 나타나도록 구성되어 있다. B부분은 약간 템포가 느려지고 주제도 A부분에 비해 유동적이기 때문에, 트리오족인 성격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마지막 A는 프레스토로 되어 주제의 명확한 회귀(回歸)라기보다는 오히려 코다적인 특성을 갖게 되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반복을 제외하면 전체가 451마디로 이루어져 있다. 알레그로 아시이는 힘차게 제1부 주제의 주요 동기를 2번 연주하여 시작한다. 아포지아투라(앞꾸밈음)를 잘 이용한 이 음형은 스케르초 악장의 소재로 알맞은 것이다. 5마디부터 주제가 제시된다. 이 스타카토의 하행 악구에 이어서 현악기군으로 상행 응답악기가 연주되어 주제부 전체를 완성한다. 40마디에 반복기호가 있어 5마디로 되돌아온다. 41마디부터는 아포지라투라가 잇는 2음 동기를 관악기가 계속 유지하는 가운데, 현악기가 새롭게 부드러운 소재를 제시하기 시작한다. 이와 같은 소재로 계속 발전하여 124마디의 반복기호에 이른다. 세 마디의 이행구 후에 제2부가 시작된다. 운 포코 메노 알레그로(알레그로보다 약간 느리게)로 조금 속도릉 늦추는 128마디부터는 트리오가 된다. 스케르초의 주요부와는 젼혀 다를, 순차진행하는 부드러운 주제가 관악기의 풍부한 울림으로 연주된다. 이 주제의 형태는 거의 바뀌지 않고, 풍부한 조바꿈으로 음색이 바뀌면서 여러 번 되풀이되어 212마디까지 제2부를 만들어 간다. 템포 프리모(처음 빠르기로)로 213마디부터 제1부가 다시 나타나는데, 내용 변화가 거의 없으므로 다 카포적인 형태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234마디부터의 메노 알레그로(약간 느린 알레그로) 부분은 제2부, 즉 트리오의 재현이다. 여기에서도 별로변화는 나타나지 않아, 결국 스케르초와 트리오 전체가 다 카포되는 것과 거의 동일한 형태가 된다. 417마디부터는 템포가 프레스토로 변하여 반복부로서의 기능을 발휘하는데, 팀파니가 C장조의 음뜸음과 딸림음을 스케르초 주제동기의 리듬을 이용하여 연주하는 가운데 관악기가 긴 화음을 연주하면서 크레셴도로 진행된다. 팀파니의 리듬에 이끄려서 관현악 전체에 스케르초 주제의 동기가 다시 나타나 압도적인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악장을 마친다. 제4악장[편집] 알레그로 몰토 에 비바체 C장조 4/4박자. 소나타 형식으로서, 397마디로 구성되어 있다. C장조의 으뜸화음을 f로 연주한 후 한 마디의 휴지가 있고, 우후 바이올린으로 제1주제가 제시된다. 같은 형태로 거의 이 주제동기를 이용한 D단조의 응답악구가 이어진다. 쉼표를 끼고 저음현에 E장조적인 이행악구가 나타나서 경과구가 된다. 23째마디부터 주제가 f로 확보된 후의 구성은 마치 발전부가 시작된 듯이 주제를 사용한 부분이 계속된다. 그 과정에서 G장조를 향하여 제2주제부를 인도하여 A단조로 되거나, C단조로 조바꿈하면서 전개가 이루어진다. ff의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현악기군이 8분음표로 하행음계를 연주하면서 디미누엔도하며, p에 이르면 목관악기군이 폴리포닉적인 제2주제부를 제시한다. 이 3성 체제의 주제부는 각 성부에 동일한 주제적 중요성이 부여되어 있다. 이 주제부는 관악기를 중심으로, 제1주제의 소재를 사용한 현악기의 대선율과도 때때로 혼합되면서 발전한다. 점차 제1주제를 이용한 현악기군이 주도권을 잡아가고 제시부를 마무리하는 경과적 악구로 이어진다. 긴 휴지부 후에 112마디부터 시작되는 발전부는 바이올린이 제1주제의 소재를 연주한다. 그리고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다른 하나는 제1주제의 제시 때에 경과주제로 나타난 것으로, 그 특성이 제2주제와 비슷하기 때문에 발전부에서 많이 이용된다. 관악기를 중심으로 폴리포닉한 전개가 부드럽게 이루어지면, 135마디부터는 현악기가 가담하여 대위법적 기법을 사용하여 아름답게 전개된다. 151마디부터는 이 소재를 선율적으로 혼합하여 발전하는 관악기와는 별도로, 아주 비슷한 형태의 제1주제 음형이 현악기로 연주되어 상반된 성격의 두 주제가 동시에 나타나는 특징적인 전개가 이루어진다. 그동안 제1주제의 음형이 점차로 위에서 나타나고, 164마디부터는 첼로와 더블베이스에 이어 비올라와 제2, 1바이올린이 교대로 나타나 제1주제를 저현부에서부터 시작하여 점차 음이 더해 가면서 완전히 주도권을 잡는다. 폭풍우와 같은 현악기의 연주가 끝나면, 193마디부터 다시 관악기로 제2주제에 경과주제를 더한 음형이 G음의 지속적을 위에서 pp로 온화하게 연주된다. C단조적인 울림을 가지고 딸림화음으로 반종지하면 제1주제의 부분동기를 이용한 선율이 저현악기로 갑자기 f로 나타나, 211마디에서 투티에 의한 으뜸음이 한 음으로 강조된다. 재현부이다. 이 재현부는 거의 제시부의 구성에 따라 충실하게 진행되어, 두 주제 모두 고전적인 소나타 형식처럼 으뜸조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제시부의 반복부분에 해당하는 312째마디는 F장조의 딸림7화음으로 반종지되고, 새로운 것을 암시하면서 긴 휴지부에 들어간다. 314마디부터는 발전부의 시작과 동일한 음악이 조성을 바꾸어 재현된다. 그러나 새로운 발전부로서의 성격은 약하고, 오히려 이행(移行) 악구적인 성격이 두드러진다. 이것도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결국 348마디부터 제1주제를 사용한 반복부로 이어진다. 베토벤적인 느낌이 강한 코다는 363마디에서 피우 알레그로(더욱 빠르게) 더욱 빨라져 압도적인 ff의 클라이맥스에 이르고 당당한 울림과 음량 속에서 전악장을 마친다. 참고문헌[편집] 《작곡가별 명곡해설 라이브러리》 2권 '바그너' 〈음악지우사〉 (音樂世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교향곡_다장조_(바그너)&amp;oldid=19835660" 분류: 리하르트 바그너의 작품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CatalàEnglishEspañolSuomiFrançaisItaliano日本語Русский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10월 20일 (금) 18: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교향곡 다장조 (바그너) 요약** 1. **작곡 배경** - 리하르트 바그너는 1832년 6월에 교향곡 다장조 WWV.29를 작곡하였다. 이는 그가 완성한 유일한 교향곡으로, 바그너의 초기 작곡 기법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다. 2. **작품의 중요성** - 바그너는 주로 오페라와 서곡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교향곡은 그의 기악곡 중에서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한다. 이 작품은 바그너의 음악적 기법과 형식을 잘 보여준다. 3. **초연 및 출판** - 초연은 1832년 11월 프라하에서 이루어졌고, 1911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초판이 출판되었다. 이 곡은 후에 재평가되어 출판되었다. 4. **구성 및 편성** - 교향곡은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편성은 플루트, 오보에, 클라리넷, 바순, 호른, 트럼펫, 트롬본, 팀파니, 현악기로 이루어져 있다. 5. **악장별 내용** - **제1악장**: 소나타 형식으로, 주제 전개와 발전부가 잘 정돈되어 있다. 강렬한 주제가 특징적이며, 다양한 조바꿈이 나타난다. - **제2악장**: 느린 악장으로, 발전부 없이 A-B-A-B-코다 형식으로 구성된다. 주제는 주로 현악기로 제시된다. - **제3악장**: 스케르초풍의 악장으로, A-B-A-B-A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주제가 반복된다. - **제4악장**: 소나타 형식으로, 강렬한 클라이맥스와 함께 마무리된다. 주제의 재현과 발전이 두드러진다. 6. **작품의 유산** - 교향곡 다장조는 바그너의 초기 음악적 탐구를 보여주며, 그의 후속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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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_(서울)
https://ko.wikipedia.org/wiki/정동_(서울)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정동 (서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정동 (서울)</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정동</b>(貞洞)은 <a>대한민국</a> <a>서울특별시</a> <a>중구</a>에 속하는 <a>법정동</a>으로 <a>덕수궁</a>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동이란 이름은 조선 태조 <a>이성계</a>의 계비인 <a>신덕왕후</a>의 <a>정릉</a>(貞陵)이 현재 정동 4번지에 있던 데에서 유래되었다. 관할하는 <a>행정동</a>은 <a>소공동</a>이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역사</span></a></li> <li><a><span>2</span> <span>시설</span></a></li> <li><a><span>3</span> <span>사진</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5</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역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정동은 조선초 <a>한성부</a> 서부 <a>황화방</a>에 속하였던 곳으로 <a>태조</a>의 계비 <a>신덕왕후</a>의 능침인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이라는 데서 <a>정릉동</a>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능지를 직접 골랐으며 자주 찾았다. 또 그 옆에 천흥사를 세워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하지만 1408년(태종8년) 5월 24일 태조의 승하와 더불어 정릉은 반년 사이에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의 산기슭으로 옮겨지게 된다. 정릉은 성 밖으로 사라졌으나 그 대신에 원래의 자리에다 '정릉동(貞陵洞)' 혹은 '정동(貞洞)'이라는 지명을 남겨놓았다.『단종실록』1452년 7월 3일자의 기사에는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의 행태를 비난하는 내용과 관련하여 '정릉동'이라는 표기가 등장한다. 그 이후 시기에 있어서는 여기에서 파생된 '대정동(大貞洞)' 혹은 '대정릉동(大貞陵洞)'과 '소정동(小貞洞)' 혹은 '소정릉동(小貞陵洞)'이라는 지명도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순우는 그의 저서에서 '정동'지역은 '대정동'과 '소정동'이 합쳐진 구역이라고 보고 있다.<sup><a>&#91;1&#93;</a></sup> </p><p>정동의 범위를 살펴보자면 현재의 정동길의 서쪽 일대를 '대정동'이라 하였고 동쪽 일대를 '소정동'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대정동은 <a>서울시립미술관</a>이 자리한 <a>서소문동</a> 일부를 포함하여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지역까지 아우르는 지역이며, 소정동은 지금의 덕수궁을 포함하여 대한문 앞(서울시청광장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sup><a>&#91;2&#93;</a></sup> </p><p>이순우의 연구에 따르면, 대정동과 소정동의 개념과 범위가 완전히 무력화한 때는 일제강점기 1914년이다. 이 당시 조선총독부가 전국적인 행정구역개편을 단행하면서 개별 단위의 동네들을 자신들의 편의대로 구역을 재편하거나 명칭을 변경하였다. 『조선총독부 관보』1914년 4월 27일자에 게제된 '조선총독부 경기도고시 제7호 경성부 정동의 명칭 및 구역'(고시일자 1914년 4월 1일)에서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새로운 정동(貞洞)이 대정동과 소정동을 하나로 묶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의 잔여지역이 인접하는 태평통(지금의 태평로), 서소문정(지금의 서소문동), 무교정(지금의 <a>무교동</a>) 등지로 흩어져 편입되었다. 토지조사사업결과 새로운 지번이 부여된 이래로 행정구역상 정동에 존속했던 지번은 '정동 1번지'부터 '정동 34번지'에 이르는 구성이었다.<sup><a>&#91;3&#93;</a></sup><a>1936년</a> 행정구역 개편 때 정동정(貞洞町)이 되었고, 정동정은 <a>1943년</a> <a>6월</a> 신설된 <a>서대문구</a>에 속하였고, <a>1946년</a> 정동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에 이르며, <a>1975년</a>에는 <a>중구</a> 관할이 되었다. </p><p>19세기 말부터 각국 공사관들이 정동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순우의 책에는 과거 정동에 있었거나,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 공사관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미국공사관(1883년 5월 개설, 정동10번지), 영국공사관(1884년 4월 개설, 정동4번지), 독일영사관(1891년 후반, 서소문동 38번지이전), 러시아공사관(1885년 10월 개설, 정동15-1번지), 프랑스공사관(1889년 10월 정동 28번지이전), 벨기에영사관(1901년 10월 개설, 정동 16-1번지), 이탈리아공사관(1902년 11월 이전), 외교관구락부(1894년 정초식(定礎式), 정동 17번지) 등이 있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자리한 서소문동 38번지 일대는 육영공원을 거쳐 독일영사관이 있던 자리이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1977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과거 프랑스공사관의 자리엔 오늘날 창덕여중(昌德女中)가 위치해있다. 과거 벨기에 영사관 자리(정동16-1번지)는 해방이후 하남호텔을 거쳐 오늘날 캐나다 대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외교관구락부는 1892년 결성되어 프랑스공사관 인접가옥에서 회합을 갖다가, 1894년 정동 17번지에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후 1923년에 이 자리를 서울외국인학교가 매입하여 1957년까지 사용하였다. 현재는 프란치스코교육회관(Francisco Education Center)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미국대사관저(정동 10번지), 영국대사관(정동 4번지), 성공회대성당(정동 3번지), 이화여고 구내(정동 29번지, 30번지, 31, 32번지)가 거의 변동이 없이 남아있다.<sup><a>&#91;4&#93;</a></sup> </p> <h2><span></span><span>시설</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문화재: <a>덕수궁</a>, <a>배재학당</a>, <a>구 러시아 공사관</a>, <a>중명전</a></li> <li>예술 시설: <a>정동극장</a></li> <li>외국 공관: 주한미국대사관저, 주한노르웨이대사관, 주한뉴질랜드대사관, 주한러시아대사관, 주한영국대사관, 주한캐나다대사관</li> <li>교육 기관: <a>이화여자고등학교</a>, <a>예원학교</a>, <a>창덕여자중학교</a>, <a>덕수초등학교</a></li> <li>종교 시설: <a>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a>, <a>정동제일교회</a></li></ul> <h2><span></span><span>사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 <li><div> <div><div><a><img></a></div></div> <div> <p>덕수궁 중화전 </p> </div> </div></li> <li><div> <div><div><a><img></a></div></div> <div> <p>중명전 </p> </div> </div></li> <li><div> <div><div><a><img></a></div></div> <div> <p>배재학당 동관 </p> </div> </div></li> <li><div> <div><div><a><img></a></div></div> <div> <p>구 러시아 공사관 </p> </div> </div></li> <li><div> <div><div><a><img></a></div></div> <div> <p>이화여자고등학교 </p> </div> </div></li> <li><div> <div><div><a><img></a></div></div> <div> <p>예원학교 </p> </div> </div></li> <li><div> <div><div><a><img></a></div></div> <div> <p>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p> </div> </div></li> <li><div> <div><div><a><img></a></div></div> <div> <p>정동 제일교회 </p> </div> </div></li> </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이순우.《정동과 각국 공사관》.하늘재. 2012. pp.15~20.</span> </li> <li><span><a>↑</a></span> <span><a>대정동과 소정동</a><sup>&#91;<a>깨진 링크</a>(<a>과거 내용 찾기</a>)&#93;</sup></span> </li> <li><span><a>↑</a></span> <span>이순우.《정동과 각국 공사관》.하늘재. 2012. pp.21~24.</span> </li> <li><span><a>↑</a></span> <span>이순우.《정동과 각국 공사관》.하늘재. 2012. pp.113~119.</span> </li> </ol></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구한말외국인공간 정동</a><sup>&#91;<a>깨진 링크</a>(<a>과거 내용 찾기</a>)&#93;</sup>, 한국컨텐츠진흥원</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정동_(서울)&amp;oldid=24193073</a>"</div> <div><div><a>분류</a>: <ul><li><a>서울 중구의 법정동</a></li><li><a>1946년 설치</a></li><li><a>소공동</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English</a></li><li><a>فارسی</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7:3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한 곳은?
조선총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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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96
4,753
[ "전국적인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한 곳은? ", "이순우의 연구에 의하면 대정동과 소정동의 개념과 범위가 완전히 무력화한 때는 언제인가?", "1914년 조선총독부가 전국적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한 결과는 어디에서 확인할 수 있는가?", "일제강점기 때 개별 단위의 동네를 재편하거나 명칭을 변경한 것은 무엇인가?", "과거 벨기에 영사관 자리에 오늘날 자리하고 있는 것은? ", "각국 공사관들이 정동에 들어오기 시작했던 시기는?", "서소문동 38번지 일대는 현재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가?", "외교관구락부는 언제 결성되었는가?", "구 러시아공사관이 사적으로 지정된 것은 언제인가?", "정동 10번지에 1883년 5월 개설된 공사관은 어느나라의 것인가?", "육영공원을 거쳐 독일 영사관이 있던 자리인 서소문동 38번지 일대는 현재 무엇이 자리하고 있는가?" ]
<!DOCTYPE html> 정동 (서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정동 (서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정동(貞洞)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에 속하는 법정동으로 덕수궁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정동이란 이름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의 정릉(貞陵)이 현재 정동 4번지에 있던 데에서 유래되었다. 관할하는 행정동은 소공동이다. 목차 1 역사 2 시설 3 사진 4 각주 5 외부 링크 역사[편집] 정동은 조선초 한성부 서부 황화방에 속하였던 곳으로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의 능침인 정릉(貞陵)이 있었던 곳이라는 데서 정릉동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태조는 신덕왕후의 능지를 직접 골랐으며 자주 찾았다. 또 그 옆에 천흥사를 세워 그녀의 명복을 빌었다. 하지만 1408년(태종8년) 5월 24일 태조의 승하와 더불어 정릉은 반년 사이에 도성 밖 사을한(沙乙閑)의 산기슭으로 옮겨지게 된다. 정릉은 성 밖으로 사라졌으나 그 대신에 원래의 자리에다 '정릉동(貞陵洞)' 혹은 '정동(貞洞)'이라는 지명을 남겨놓았다.『단종실록』1452년 7월 3일자의 기사에는 안평대군 이용(1418~1453)의 행태를 비난하는 내용과 관련하여 '정릉동'이라는 표기가 등장한다. 그 이후 시기에 있어서는 여기에서 파생된 '대정동(大貞洞)' 혹은 '대정릉동(大貞陵洞)'과 '소정동(小貞洞)' 혹은 '소정릉동(小貞陵洞)'이라는 지명도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순우는 그의 저서에서 '정동'지역은 '대정동'과 '소정동'이 합쳐진 구역이라고 보고 있다.[1] 정동의 범위를 살펴보자면 현재의 정동길의 서쪽 일대를 '대정동'이라 하였고 동쪽 일대를 '소정동'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즉, 대정동은 서울시립미술관이 자리한 서소문동 일부를 포함하여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지역까지 아우르는 지역이며, 소정동은 지금의 덕수궁을 포함하여 대한문 앞(서울시청광장 일대)를 지칭하는 것으로 파악된다.[2] 이순우의 연구에 따르면, 대정동과 소정동의 개념과 범위가 완전히 무력화한 때는 일제강점기 1914년이다. 이 당시 조선총독부가 전국적인 행정구역개편을 단행하면서 개별 단위의 동네들을 자신들의 편의대로 구역을 재편하거나 명칭을 변경하였다. 『조선총독부 관보』1914년 4월 27일자에 게제된 '조선총독부 경기도고시 제7호 경성부 정동의 명칭 및 구역'(고시일자 1914년 4월 1일)에서 그 결과를 확인할 수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새로운 정동(貞洞)이 대정동과 소정동을 하나로 묶기는 하였으나 대부분의 잔여지역이 인접하는 태평통(지금의 태평로), 서소문정(지금의 서소문동), 무교정(지금의 무교동) 등지로 흩어져 편입되었다. 토지조사사업결과 새로운 지번이 부여된 이래로 행정구역상 정동에 존속했던 지번은 '정동 1번지'부터 '정동 34번지'에 이르는 구성이었다.[3]1936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정동정(貞洞町)이 되었고, 정동정은 1943년 6월 신설된 서대문구에 속하였고, 1946년 정동으로 이름이 바뀌어 지금에 이르며, 1975년에는 중구 관할이 되었다. 19세기 말부터 각국 공사관들이 정동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순우의 책에는 과거 정동에 있었거나,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는 공사관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미국공사관(1883년 5월 개설, 정동10번지), 영국공사관(1884년 4월 개설, 정동4번지), 독일영사관(1891년 후반, 서소문동 38번지이전), 러시아공사관(1885년 10월 개설, 정동15-1번지), 프랑스공사관(1889년 10월 정동 28번지이전), 벨기에영사관(1901년 10월 개설, 정동 16-1번지), 이탈리아공사관(1902년 11월 이전), 외교관구락부(1894년 정초식(定礎式), 정동 17번지) 등이 있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이 자리한 서소문동 38번지 일대는 육영공원을 거쳐 독일영사관이 있던 자리이다. '구 러시아공사관'은 1977년 사적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과거 프랑스공사관의 자리엔 오늘날 창덕여중(昌德女中)가 위치해있다. 과거 벨기에 영사관 자리(정동16-1번지)는 해방이후 하남호텔을 거쳐 오늘날 캐나다 대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외교관구락부는 1892년 결성되어 프랑스공사관 인접가옥에서 회합을 갖다가, 1894년 정동 17번지에 건물을 신축하였다. 이후 1923년에 이 자리를 서울외국인학교가 매입하여 1957년까지 사용하였다. 현재는 프란치스코교육회관(Francisco Education Center)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미국대사관저(정동 10번지), 영국대사관(정동 4번지), 성공회대성당(정동 3번지), 이화여고 구내(정동 29번지, 30번지, 31, 32번지)가 거의 변동이 없이 남아있다.[4] 시설[편집] 문화재: 덕수궁, 배재학당, 구 러시아 공사관, 중명전 예술 시설: 정동극장 외국 공관: 주한미국대사관저, 주한노르웨이대사관, 주한뉴질랜드대사관, 주한러시아대사관, 주한영국대사관, 주한캐나다대사관 교육 기관: 이화여자고등학교, 예원학교, 창덕여자중학교, 덕수초등학교 종교 시설: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정동제일교회 사진[편집] 덕수궁 중화전 중명전 배재학당 동관 구 러시아 공사관 이화여자고등학교 예원학교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정동 제일교회 각주[편집] ↑ 이순우.《정동과 각국 공사관》.하늘재. 2012. pp.15~20. ↑ 대정동과 소정동[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이순우.《정동과 각국 공사관》.하늘재. 2012. pp.21~24. ↑ 이순우.《정동과 각국 공사관》.하늘재. 2012. pp.113~119. 외부 링크[편집] 구한말외국인공간 정동[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한국컨텐츠진흥원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정동_(서울)&amp;oldid=24193073" 분류: 서울 중구의 법정동1946년 설치소공동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فارسی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1일 (토) 17:32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정동(서울)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중구에 위치한 법정동으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정릉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1. **역사적 배경** - 정동은 조선 초기에 한성부 서부 황화방에 속했으며, 태조가 신덕왕후의 능지를 선택하고 자주 방문한 곳이다. - 1408년 태조의 사망 후 정릉은 도성 밖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 '정동'이라는 지명이 남았다. - 1452년에는 '정릉동'이라는 표기가 등장하며, 이후 '대정동'과 '소정동'으로 나뉘었다. -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으로 대정동과 소정동이 통합되어 새로운 정동이 형성되었다. - 1936년 정동정으로 명칭이 변경되었고, 1946년 현재의 정동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2. **외교관의 유입** - 19세기 말부터 여러 나라의 공사관이 정동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등의 공사관이 설립되었으며, 현재도 일부는 남아있다. 3. **현재의 정동** - 정동에는 덕수궁, 배재학당, 구 러시아 공사관, 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 등 다양한 문화재와 교육기관이 위치하고 있다. - 외국 공관으로는 주한미국대사관, 주한영국대사관 등이 있다. 정동은 역사적 유산과 외교적 중요성을 지닌 지역으로, 현재도 다양한 문화와 교육 시설이 공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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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_(1611년)
https://ko.wikipedia.org/wiki/윤영_(1611년)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윤영 (1611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윤영 (1611년)</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윤영</b>(尹鍈, 1611년 - 1691년)은 <a>조선</a> 후기의 학자이다. 《여지도》, 《항부도기(恒符賭奇)》등을 지었다. </p><p>백호 <a>윤휴</a>의 이복 형이자, <a>윤효전</a>의 서자이자, 백호 <a>윤휴</a>의 이복 형이다. </p><p><a>병자호란</a> 이후 복수설치를 목적으로 전국을 답사하고 지도를 남겼으나, 만년은 가난하여 굶어죽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 <ul> <li><a><span>1.1</span> <span>생애 초반</span></a></li> <li><a><span>1.2</span> <span>북벌론</span></a></li> <li><a><span>1.3</span> <span>생애 후반</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저작</span></a> <ul> <li><a><span>2.1</span> <span>저서</span></a></li> <li><a><span>2.2</span> <span>작품</span></a></li> </ul> </li> <li><a><span>3</span> <span>사상과 신념</span></a> <ul> <li><a><span>3.1</span> <span>국내 답사와 북벌 준비</span></a></li> <li><a><span>3.2</span> <span>고토 회복론</span></a></li> <li><a><span>3.3</span> <span>몽골 답사</span></a></li> </ul> </li> <li><a><span>4</span> <span>참고 항목</span></a></li> <li><a><span>5</span> <span>참고 자료</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생애 초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아버지는 <a>사헌부</a><a>대사헌</a>을 지낸 <a>윤효전</a>이고, 어머니는 덕수이씨로 <a>이순신</a>의 서녀였다. </p><p>따라서 <a>윤영</a>은 <a>이순신</a>의 외손자이다.<a>윤효전</a>은 첫 부인 파평윤씨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첩인 덕수이씨에게서 윤영을 얻었다. </p><p>그리고 본부인 사후 얻은 둘째 부인인 <a>김덕민</a>의 딸 경주김씨에게서 아들 <a>윤휴</a>를 얻었다. </p><p>강한집(江漢集)에 의하면 윤영은 일찍부터 '기략을 좋아하고 열사의 풍이 있었다.'고 한다. 과거를 단념하고 경세제민하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는 <a>남인</a>재상 <a>이원익</a>의 서녀와 결혼했는데, <a>이원익</a>은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서녀의 남편이고 서얼이었지만 사위로 대접하였다. <a>이원익</a>은 그를 두고 "우리 사위는 재상감이다"라고 하였다. 소년기에 이르러 그는 학문은 되었지만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고 <a>명나라</a>가 <a>청나라</a>에 망하는 것을 분하게 여겼다. 이에 윤영은 몰래 손무⋅오기의 병법을 익혀서 <a>청나라</a>를 치려는 방책을 만들어 스스로 나타냈다. 적제였던 <a>윤휴</a> 젊어서 서형인 윤영을 따라 그 설을 얻었다 한다. 그는 장인 <a>이원익</a>의 총애를 특별히 받았고 <a>윤휴</a> 역시 “형의 문장은 나보다 낫다.” 하였다. </p> <h3><span></span><span>북벌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1639년</a> <a>정축하성</a> 이후 <a>청나라</a>와의 강화조약이 이루어지자 윤영은 이를 치욕으로 여겨 과거시험에 응하지 않고 북벌하는 방책을 강구하였다. 그는 직접 북벌을 할 목적으로 전국을 답사하고 북방을 탐험했는데 <a>개마고원</a>과 <a>토문강</a>, <a>압록강</a>의 서쪽까지 길이를 재고, 병마(兵馬)와 군량미로 조달할 전곡(錢穀)을 수송할 거리가 얼마가 되는지를 훤하게 다 알았다. 그는 자신의 유서에 말하기를 '恒符同奇'는 대개 손무와 오기의 병술인 것이라 하였다. 역시 북벌론자였던 그의 동생 <a>윤휴</a>는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전국 각지를 답사하며 다양한 지도를 저작으로 남겼다. </p><p>한편 <a>전라북도</a> <a>부안군</a> 주변의 대농토에 훈련기지를 마련하고 북벌을 단행할 병력을 양성하던 <a>유형원</a>과도 수시로 연락하며 기맥을 통하였다. 그러나 <a>유형원</a>은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일찍 요절하고 만다. </p><p><a>숙종</a> 때에 이르러 <a>윤휴</a>와 <a>이원정</a>, <a>남인</a> 장수 <a>유혁연</a>(柳赫然)과 등이 도체찰사 설치를 주장한 뒤 성사시키고 <a>허적</a>의 집 근교에 설치하고 장정들을 널리 모집하고 무뢰한들을 불러서 받아들였다. <a>허목</a>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a>윤휴</a>와 <a>유혁연</a> 등은 <a>청나라</a>를 쳐서 종실을 회복하겠다고 하였지만 실력이 부족하였다. 윤영은 서자임에도 친형대우를 하는 <a>윤휴</a>를 아깝게 여겨 <a>서인</a>의 역모 날조 가능성을 주지시키며 그것을 경계했지만 따르지 않았고 결국 역모로 몰려 죽었다. </p> <h3><span></span><span>생애 후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윤영의 집은 심히 가난하였다 한다. 여자 노비 한명과, 논 몇 마지기가 있었는데 용도에 넉넉치 않아 결국 가산과 전답을 모두 팔았다. 여름에는 비가 오면 지붕이 심하게 새어서 윤영이 직접 구들을 송곳으로 찔려 물이 흐르게 하여서 겨우 거주했고 장황도서편(章潢圖書篇)을 열람했으니 그 부지런하고 노력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등나무와 칡이 두른 담장 밖에서 길가는 사람이 들어와서 불을 빌리려고 하거늘 동행하는 자가 못가게 말리면서 말하기를, “불을 빌리려 가는데 늪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냐?”라고 말하였다. 이복 동생인 <a>윤휴</a>는 그를 형으로 대우하여 깎듯이 대하였다. 그러나 윤휴가 죽고 그 아들들조차 원지로 유배되면서 그는 직접 밭을 일구고 농업으로 생활하였다. </p><p><a>판서</a> <a>윤심</a>(尹深)이 윤영의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이때 윤영은 떨어진 건과 짤막한 옷을 입고서 맞이했는데, 태연했고 곤궁한 기색이 없다 한다. 후에 <a>윤심</a>이 되돌아와 탄식하여 말하기를 '신선중에 있는 사람과 더불어 놀고 왔다'라고 말했다. 판서 이무(李袤)는 그의 학식을 접하고 그를 인재를 천거하려고 했다가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복 동생인 <a>윤휴</a>가 죽고 난 뒤 10년을 더 살다가 마침내 곤궁하여 결국 굶주림으로서 죽었다. 사망당시 그의 나이는 80세였다. </p> <h2><span></span><span>저작</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저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ul><li>대소잡기 (代嘯雜記)</li></ul> <h3><span></span><span>작품</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ul><li>《여지도》</li> <li>《항부도기(恒符賭奇)》</li> <li>《북방관방도(北方關防圖)》</li></ul> <h2><span></span><span>사상과 신념</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국내 답사와 북벌 준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성호 이익</a>은 그가 만든 지도들을 일부 입수하였고, 자신의 <a>성호사설</a>을 통해 그의 기록 일부를 인용하였다. </p><p>전국을 답사한 윤영은 조선반도의 지리에 대해 '대체 우리나라의 지형은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으며 중앙은 빨고 아래쪽은 파리하다. 백두산은 머리가 되고, 대령(大嶺)은 등성마루가 되어 마치 사람이 머리를 기울이고 등을 굽히고 선 것 같다. 그리고 대마도(對馬島)와 <a>탐라</a>는 양쪽 발 모양으로 되었는데, 해방(亥方)에 앉아서 사방(巳方)으로 향하였다고 하니, 곧 감여가(堪輿家)의 정론이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a>쓰시마 섬</a>과 <a>제주도</a>까지 답사하고 돌아왔다. </p><p>또한 그는 각 지역의 거리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a>한성</a>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四方) 방위를 정한다면 온성(穩城)이 자방(子方), 해남이 오방(午方), 풍천(豊川)이 유방(酉方), 강릉이 묘방(卯方)이 된다. 근세에 소위 지도라는 것을 보면, 대개는 종이 넓이에 따라 위치를 배정하고 위치에 따라서 그림을 작성했기 때문에 길이와 넓이가 서로 어긋나고 좁고 넓은 데도 제대로 맞지 않는다. 두만강이 온성으로 들어오는 곳만 보아도 동쪽으로 흐르다가는 다시 북쪽으로 흘러서 미전보(美錢堡)에 와서는 다시 남쪽으로 흘러서 서수라(西水羅)로 들어가고, 압록강은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및 폐사군을 지나는데, 여러 번 굽이쳐 가지고 강계(江界)와 위원(渭原)을 스쳐 서남쪽으로 향하다가 창성(昌城)을 지나서야 비로소 남쪽으로 곧장 빠져 내려 통군정(統軍亭)의 서쪽을 싸고 돌아서 대총강(大總江)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p><p>그는 북벌을 하려면 국내의 지형부터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고 봤다. 윤영은 자신의 친구인 정여일(鄭汝逸)과 함께 각지를 답사하며 연구하고 백리척(百里尺)을 만들어 가지고 정밀한 측량을 거쳐서 지도 8권을 작성하였다. 그는 '멀고 가까운 거리와 높고 낮은 지형까지가 모두 실형으로 묘사되었으니 정말 진귀한 보물이며 이 지도와도 대체로 들어맞는다. 그는 저쪽 지역의 산천이나 평탄하고 험한 실태까지도 눈으로 본 것처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p> <h3><span></span><span>고토 회복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그는 지리지를 편찬하며 <a>고구려</a>와 <a>발해</a>시대의 고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a>이익</a>의 <a>성호사설</a>에도 일부 인용되었다. 그는 '영고탑(寧古塔)은 숙신(肅愼)의 옛터이다. 한ㆍ당(漢唐) 이전에는 동북 지방에 강대한 나라나 큰 부족이 없고 우리나라만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때에는 요동과 요서의 태반이 모두 우리의 소유였고 백두산 안팎의 여러 부족들이 많이 우리에게 소속되었는데, 여진(女眞)ㆍ만만(滿萬)의 부족이 경박(鏡泊)에서 일어나면서부터 마침내는 송(宋)을 대신하여 중국을 차지하였으니, 이것이 금(金) 나라이다. 그러다가 원(元) 나라 사람에게 쫓김을 당하여 그 잔당들이 압록강과 두만강 서북쪽에 흩어져 살면서 야인(野人)이란 명칭을 가지고 우리의 변경을 침략해 왔다. 북쪽에 사는 것은 이탕개(尼湯介)였고, 서쪽에 사는 것은 이만주(李滿住)였으며, 또 그들은 생여진(生女眞)ㆍ숙여진(熟女眞)의 구별이 있었다.'고 하였다. </p><p>그는 <a>청나라</a>의 왕실이 된 <a>아이로신교씨</a>의 영역에 대해서도 직접 찾아다니며 정탐하였다. 그는 '만력(萬曆) 이후에 여진의 동산(童山) 1파가 건주위(建州衛)에서 차츰 커져 모련위(毛憐衛)ㆍ좌위(左衛)ㆍ우위(右衛) 등의 부족들을 모조리 통합하게 되어 우리의 폐사군(廢四郡)이 가장 큰 폐해를 당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 지역을 비워 폐지하게 된 것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어 '<a>순치제</a> 이후에 심양(瀋陽)을 성경(盛京), 요양을 동경(東京), 건주를 흥경이라 하고, 영고탑 서쪽 지역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연경(燕京)에 들어가 중국의 주인이 된 뒤에 건주는 그들의 선대(先代) 무덤이 있는 곳이고 노성(老城)은 그들의 종족이 주거하는 지방이므로 그 배치제도를 성경과 같이 하였다.'며 건주위 영역 답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p> <h3><span></span><span>몽골 답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그는 <a>몽골</a>지역도 답사하고 그것 역시 함께 기록으로 남겼다. '요하 동쪽에 장군(將軍) 셋을 배치했는데 하나는 봉천(奉天) 등지를 진수(鎭守)하면서 심양에 주둔하고, 하나는 영고탑(寧古塔) 지방을 진수하면서 선창(船廠)에 주둔하고, 하나는 흑룡강 지방을 진수하면서 애호(艾滸)에 주둔하여, 각기 만주 지역을 통솔하는 고산대사원(固山大四員)이다. 강희(康熙) 말기에 흑룡강 북쪽의 몽고를 가장 염려하여 다시 백도눌 장군(白度訥將軍) 한 명을 더 배치하였다 한다. 몽고의 48개 부족 가운데서 동북 지방에 거주한 족속이 가장 강성하여 대비달자(大鼻㺚子)는 흑릉강 북쪽에 있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흑룡강에서부터 장성 밖에까지 북쪽이나 서쪽이 모두 몽고의 영토이며, 그 넓이는 중국의 몇 갑절이나 된다. 서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며 동ㆍ서ㆍ남ㆍ북의 황제라고 부른다. 황태극(黃太極)과 청태극(靑太極)은 중국 서남쪽에 있으며, 액라사(厄羅斯)라는 것은 곧 대비(大鼻)이고, 객이객(喀爾喀)이라는 것은 동북쪽에 있다고 한다.'며 대략의 위치를 기록하였다. </p> <h2><span></span><span>참고 항목</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북벌론</a></li> <li><a>윤휴</a></li> <li><a>윤효전</a></li> <li><a>유형원</a></li> <li><a>허목</a></li> <li><a>이원정</a></li> <li><a>윤선도</a></li> <li><a>이순신</a></li> <li><a>홍우원</a></li> <li><a>허적</a></li> <li><a>김석주</a></li></ul> <h2><span></span><span>참고 자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윤영, 《대소잡기(代嘯雜記) 1》 (여강출판사, 1989)</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윤영_(1611년)&amp;oldid=19582343</a>"</div> <div><div><a>분류</a>: <ul><li><a>조선 사람</a></li><li><a>1611년 태어남</a></li><li><a>1691년 죽음</a></li><li><a>허목</a></li><li><a>윤휴</a></li><li><a>조선의 실학자</a></li><li><a>조선의 지리학자</a></li><li><a>조선의 철학자</a></li><li><a>지도 제작자</a></li><li><a>굶어 죽은 사람</a></li><li><a>남원 윤씨</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ul> <div><span><a>링크 추가</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7년 9월 13일 (수) 08:1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윤영의 집에 노비는 몇 명이었나?
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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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영의 집에 노비는 몇 명이었나?", "윤영의 이복 동생의 이름은 무엇인가?", "윤영의 이복동생 이름은?", "윤휴가 죽고 그 아들들이 유배된 후 윤영이 한 생활은?", "윤영이 가난한 와중에 열람했던 책은?", "가난한 와중 윤영이 부지런히 열람했던 책은?", "후에 죽게되는 윤영의 이복동생은?", "윤영이 한성을 중심으로 사방 방위를 정했을 때 온성의 방위는?", "윤영이 한성을 중심으로 사방 방위를 정했을 때 묘방에 해당되는 곳은?", "삼수와 갑산 및 폐사군을 지나는 강은?", "한성이 중심인 경우 오방은 어디인가?", "한성이 중심인 경우 묘방은 어디인가?", "압록강이 굽이쳐 흐르다가, 결국 서쪽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강의 이름은?", "사방 방위를 정한다면 해남은 무엇이 되는가?", "압록강이 통군정의 서쪽을 싸고 돌아 결국 들어가는 곳은?", "고구려와 발해시대의 옛땅을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윤영이 편찬한 것은?", "여진과 만만의 부족이 경박에서 일어나 세운 금나라는 어느 나라를 대신하여 중국을 차지했나?", "금나라의 잔당들 중에 압록강과 두만강 북쪽에 살던 야인을 일컫는 말은?", "윤영이 편찬한 지리지에서 언급한 고토 중 발해시대와 나머지 하나는?", "백두산의 여러 부족 중 원나라에 쫓겨 우리의 변방에 침입한 사람 중 북쪽에 사는 사람들을 구분하는 말은?", "백두산의 여러 부족 중 쫒겨나 압록강과 두만강 서북쪽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을 부르던 말은?", "윤영이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무엇을 편찬해야한다고 하였나?", "원나라에 쫓겨 압록강과 두만강 서북쪽에 살면서 우리를 침략해온 사람의 명칭은?", "여진의 동산 1파가 부족들을 통합하게 되어 어디가 가장 큰 폐해를 당하게 되었나?", "윤영이 기록한 것에 따르면 순치제 이후 심양을 무엇이라 했나?", "윤영의 기록에 의하면 순치제 이후 건주를 무엇이라 했나?", "윤영이 정탐하였던 청나라 왕실의 이름은?", "윤영이 청나라를 정탐하고 답사를 기록으로 남긴 영역은?", " 여진의 동산1파가 부족들을 통합하게 되면서 가장 큰 폐해를 당하게 된 곳은?", "중국의 선대 무덤이 있고 그들의 종족이 주거하는 노성이 있어 배치제도를 성경과 같이 한 지역은?", "윤영이 몽골지역을 답사할 때 몽고에는 몇 개의 부족이 있었나?", "윤영이 답사할 당시 몽고의 동쪽에 있는 강의 이름은?", "가장 강성한 몽고 부족은 몽고의 어디에 위치했나?", "윤영이 답사하여 기록으로 남긴 지역은?", "몽고의 동쪽 영토 구분을 짓는 강의 이름은?", "봉천등지, 영고탑 지방, 흑룡강 지방을 고산대사원이라 칭한 것은 어느 나라 답사기인가?", "흑룡강 북쪽에 있는 족속은?" ]
<!DOCTYPE html> 윤영 (1611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윤영 (1611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윤영(尹鍈, 1611년 - 1691년)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여지도》, 《항부도기(恒符賭奇)》등을 지었다. 백호 윤휴의 이복 형이자, 윤효전의 서자이자, 백호 윤휴의 이복 형이다. 병자호란 이후 복수설치를 목적으로 전국을 답사하고 지도를 남겼으나, 만년은 가난하여 굶어죽었다.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반 1.2 북벌론 1.3 생애 후반 2 저작 2.1 저서 2.2 작품 3 사상과 신념 3.1 국내 답사와 북벌 준비 3.2 고토 회복론 3.3 몽골 답사 4 참고 항목 5 참고 자료 생애[편집] 생애 초반[편집] 아버지는 사헌부대사헌을 지낸 윤효전이고, 어머니는 덕수이씨로 이순신의 서녀였다. 따라서 윤영은 이순신의 외손자이다.윤효전은 첫 부인 파평윤씨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첩인 덕수이씨에게서 윤영을 얻었다. 그리고 본부인 사후 얻은 둘째 부인인 김덕민의 딸 경주김씨에게서 아들 윤휴를 얻었다. 강한집(江漢集)에 의하면 윤영은 일찍부터 '기략을 좋아하고 열사의 풍이 있었다.'고 한다. 과거를 단념하고 경세제민하는 학문을 좋아하였다. 그는 남인재상 이원익의 서녀와 결혼했는데, 이원익은 그의 재주를 아깝게 여겨 서녀의 남편이고 서얼이었지만 사위로 대접하였다. 이원익은 그를 두고 "우리 사위는 재상감이다"라고 하였다. 소년기에 이르러 그는 학문은 되었지만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고 명나라가 청나라에 망하는 것을 분하게 여겼다. 이에 윤영은 몰래 손무⋅오기의 병법을 익혀서 청나라를 치려는 방책을 만들어 스스로 나타냈다. 적제였던 윤휴 젊어서 서형인 윤영을 따라 그 설을 얻었다 한다. 그는 장인 이원익의 총애를 특별히 받았고 윤휴 역시 “형의 문장은 나보다 낫다.” 하였다. 북벌론[편집] 1639년 정축하성 이후 청나라와의 강화조약이 이루어지자 윤영은 이를 치욕으로 여겨 과거시험에 응하지 않고 북벌하는 방책을 강구하였다. 그는 직접 북벌을 할 목적으로 전국을 답사하고 북방을 탐험했는데 개마고원과 토문강, 압록강의 서쪽까지 길이를 재고, 병마(兵馬)와 군량미로 조달할 전곡(錢穀)을 수송할 거리가 얼마가 되는지를 훤하게 다 알았다. 그는 자신의 유서에 말하기를 '恒符同奇'는 대개 손무와 오기의 병술인 것이라 하였다. 역시 북벌론자였던 그의 동생 윤휴는 그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전국 각지를 답사하며 다양한 지도를 저작으로 남겼다. 한편 전라북도 부안군 주변의 대농토에 훈련기지를 마련하고 북벌을 단행할 병력을 양성하던 유형원과도 수시로 연락하며 기맥을 통하였다. 그러나 유형원은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일찍 요절하고 만다. 숙종 때에 이르러 윤휴와 이원정, 남인 장수 유혁연(柳赫然)과 등이 도체찰사 설치를 주장한 뒤 성사시키고 허적의 집 근교에 설치하고 장정들을 널리 모집하고 무뢰한들을 불러서 받아들였다. 허목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윤휴와 유혁연 등은 청나라를 쳐서 종실을 회복하겠다고 하였지만 실력이 부족하였다. 윤영은 서자임에도 친형대우를 하는 윤휴를 아깝게 여겨 서인의 역모 날조 가능성을 주지시키며 그것을 경계했지만 따르지 않았고 결국 역모로 몰려 죽었다. 생애 후반[편집] 윤영의 집은 심히 가난하였다 한다. 여자 노비 한명과, 논 몇 마지기가 있었는데 용도에 넉넉치 않아 결국 가산과 전답을 모두 팔았다. 여름에는 비가 오면 지붕이 심하게 새어서 윤영이 직접 구들을 송곳으로 찔려 물이 흐르게 하여서 겨우 거주했고 장황도서편(章潢圖書篇)을 열람했으니 그 부지런하고 노력하는 것이 이와 같았다. 등나무와 칡이 두른 담장 밖에서 길가는 사람이 들어와서 불을 빌리려고 하거늘 동행하는 자가 못가게 말리면서 말하기를, “불을 빌리려 가는데 늪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냐?”라고 말하였다. 이복 동생인 윤휴는 그를 형으로 대우하여 깎듯이 대하였다. 그러나 윤휴가 죽고 그 아들들조차 원지로 유배되면서 그는 직접 밭을 일구고 농업으로 생활하였다. 판서 윤심(尹深)이 윤영의 소문을 듣고 찾아갔다. 이때 윤영은 떨어진 건과 짤막한 옷을 입고서 맞이했는데, 태연했고 곤궁한 기색이 없다 한다. 후에 윤심이 되돌아와 탄식하여 말하기를 '신선중에 있는 사람과 더불어 놀고 왔다'라고 말했다. 판서 이무(李袤)는 그의 학식을 접하고 그를 인재를 천거하려고 했다가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복 동생인 윤휴가 죽고 난 뒤 10년을 더 살다가 마침내 곤궁하여 결국 굶주림으로서 죽었다. 사망당시 그의 나이는 80세였다. 저작[편집] 저서[편집] 대소잡기 (代嘯雜記) 작품[편집] 《여지도》 《항부도기(恒符賭奇)》 《북방관방도(北方關防圖)》 사상과 신념[편집] 국내 답사와 북벌 준비[편집] 성호 이익은 그가 만든 지도들을 일부 입수하였고, 자신의 성호사설을 통해 그의 기록 일부를 인용하였다. 전국을 답사한 윤영은 조선반도의 지리에 대해 '대체 우리나라의 지형은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으며 중앙은 빨고 아래쪽은 파리하다. 백두산은 머리가 되고, 대령(大嶺)은 등성마루가 되어 마치 사람이 머리를 기울이고 등을 굽히고 선 것 같다. 그리고 대마도(對馬島)와 탐라는 양쪽 발 모양으로 되었는데, 해방(亥方)에 앉아서 사방(巳方)으로 향하였다고 하니, 곧 감여가(堪輿家)의 정론이다.'는 기록을 남겼다. 그는 쓰시마 섬과 제주도까지 답사하고 돌아왔다. 또한 그는 각 지역의 거리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한성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四方) 방위를 정한다면 온성(穩城)이 자방(子方), 해남이 오방(午方), 풍천(豊川)이 유방(酉方), 강릉이 묘방(卯方)이 된다. 근세에 소위 지도라는 것을 보면, 대개는 종이 넓이에 따라 위치를 배정하고 위치에 따라서 그림을 작성했기 때문에 길이와 넓이가 서로 어긋나고 좁고 넓은 데도 제대로 맞지 않는다. 두만강이 온성으로 들어오는 곳만 보아도 동쪽으로 흐르다가는 다시 북쪽으로 흘러서 미전보(美錢堡)에 와서는 다시 남쪽으로 흘러서 서수라(西水羅)로 들어가고, 압록강은 삼수(三水)와 갑산(甲山) 및 폐사군을 지나는데, 여러 번 굽이쳐 가지고 강계(江界)와 위원(渭原)을 스쳐 서남쪽으로 향하다가 창성(昌城)을 지나서야 비로소 남쪽으로 곧장 빠져 내려 통군정(統軍亭)의 서쪽을 싸고 돌아서 대총강(大總江)으로 들어간다.'는 것이다. 그는 북벌을 하려면 국내의 지형부터 완벽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고 봤다. 윤영은 자신의 친구인 정여일(鄭汝逸)과 함께 각지를 답사하며 연구하고 백리척(百里尺)을 만들어 가지고 정밀한 측량을 거쳐서 지도 8권을 작성하였다. 그는 '멀고 가까운 거리와 높고 낮은 지형까지가 모두 실형으로 묘사되었으니 정말 진귀한 보물이며 이 지도와도 대체로 들어맞는다. 그는 저쪽 지역의 산천이나 평탄하고 험한 실태까지도 눈으로 본 것처럼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고토 회복론[편집] 그는 지리지를 편찬하며 고구려와 발해시대의 고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이익의 성호사설에도 일부 인용되었다. 그는 '영고탑(寧古塔)은 숙신(肅愼)의 옛터이다. 한ㆍ당(漢唐) 이전에는 동북 지방에 강대한 나라나 큰 부족이 없고 우리나라만이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때에는 요동과 요서의 태반이 모두 우리의 소유였고 백두산 안팎의 여러 부족들이 많이 우리에게 소속되었는데, 여진(女眞)ㆍ만만(滿萬)의 부족이 경박(鏡泊)에서 일어나면서부터 마침내는 송(宋)을 대신하여 중국을 차지하였으니, 이것이 금(金) 나라이다. 그러다가 원(元) 나라 사람에게 쫓김을 당하여 그 잔당들이 압록강과 두만강 서북쪽에 흩어져 살면서 야인(野人)이란 명칭을 가지고 우리의 변경을 침략해 왔다. 북쪽에 사는 것은 이탕개(尼湯介)였고, 서쪽에 사는 것은 이만주(李滿住)였으며, 또 그들은 생여진(生女眞)ㆍ숙여진(熟女眞)의 구별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는 청나라의 왕실이 된 아이로신교씨의 영역에 대해서도 직접 찾아다니며 정탐하였다. 그는 '만력(萬曆) 이후에 여진의 동산(童山) 1파가 건주위(建州衛)에서 차츰 커져 모련위(毛憐衛)ㆍ좌위(左衛)ㆍ우위(右衛) 등의 부족들을 모조리 통합하게 되어 우리의 폐사군(廢四郡)이 가장 큰 폐해를 당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그 지역을 비워 폐지하게 된 것이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어 '순치제 이후에 심양(瀋陽)을 성경(盛京), 요양을 동경(東京), 건주를 흥경이라 하고, 영고탑 서쪽 지역을 모두 차지하였으며, 연경(燕京)에 들어가 중국의 주인이 된 뒤에 건주는 그들의 선대(先代) 무덤이 있는 곳이고 노성(老城)은 그들의 종족이 주거하는 지방이므로 그 배치제도를 성경과 같이 하였다.'며 건주위 영역 답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몽골 답사[편집] 그는 몽골지역도 답사하고 그것 역시 함께 기록으로 남겼다. '요하 동쪽에 장군(將軍) 셋을 배치했는데 하나는 봉천(奉天) 등지를 진수(鎭守)하면서 심양에 주둔하고, 하나는 영고탑(寧古塔) 지방을 진수하면서 선창(船廠)에 주둔하고, 하나는 흑룡강 지방을 진수하면서 애호(艾滸)에 주둔하여, 각기 만주 지역을 통솔하는 고산대사원(固山大四員)이다. 강희(康熙) 말기에 흑룡강 북쪽의 몽고를 가장 염려하여 다시 백도눌 장군(白度訥將軍) 한 명을 더 배치하였다 한다. 몽고의 48개 부족 가운데서 동북 지방에 거주한 족속이 가장 강성하여 대비달자(大鼻㺚子)는 흑릉강 북쪽에 있다. 그리하여 동쪽으로 흑룡강에서부터 장성 밖에까지 북쪽이나 서쪽이 모두 몽고의 영토이며, 그 넓이는 중국의 몇 갑절이나 된다. 서로 강대한 세력을 가지고 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며 동ㆍ서ㆍ남ㆍ북의 황제라고 부른다. 황태극(黃太極)과 청태극(靑太極)은 중국 서남쪽에 있으며, 액라사(厄羅斯)라는 것은 곧 대비(大鼻)이고, 객이객(喀爾喀)이라는 것은 동북쪽에 있다고 한다.'며 대략의 위치를 기록하였다. 참고 항목[편집] 북벌론 윤휴 윤효전 유형원 허목 이원정 윤선도 이순신 홍우원 허적 김석주 참고 자료[편집] 윤영, 《대소잡기(代嘯雜記) 1》 (여강출판사, 198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윤영_(1611년)&amp;oldid=19582343" 분류: 조선 사람1611년 태어남1691년 죽음허목윤휴조선의 실학자조선의 지리학자조선의 철학자지도 제작자굶어 죽은 사람남원 윤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7년 9월 13일 (수) 08:1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윤영 (1611년 - 1691년) 요약 **개요** - **시대**: 조선 후기 - **직업**: 학자 - **주요 저작**: 《여지도》, 《항부도기(恒符賭奇)》 **생애** - **출생**: 1611년, 아버지 윤효전(사헌부대사헌), 어머니 덕수이씨(이순신의 서녀) - **가족**: 백호 윤휴의 이복 형, 윤효전의 서자 - **학문**: 과거를 단념하고 경세제민의 학문을 추구 - **북벌론**: 병자호란 이후 복수설치를 위해 전국 답사 및 지도 제작 **주요 활동** - **북벌 준비**: - 1639년 청나라와의 강화조약을 치욕으로 여김 - 전국 탐험 및 군량미 수송 거리 파악 - 다양한 지도 저작 - **가난한 말년**: - 가산을 모두 팔고 농업으로 생계 유지 - 80세에 굶주림으로 사망 **저작** - **저서**: - 《대소잡기(代嘯雜記)》 - **작품**: - 《여지도》 - 《항부도기(恒符賭奇)》 - 《북방관방도(北方關防圖)》 **사상과 신념** - **국내 답사 및 북벌 준비**: - 조선반도의 지리 연구 및 지도 제작 - **고토 회복론**: -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 회복 주장 - **몽골 답사**: - 몽골 지역 탐사 및 기록 **참고 인물** - 윤휴, 유형원, 허목, 이원정, 이순신 **결론** 윤영은 조선 후기의 중요한 학자로, 북벌론과 지리학적 연구에 기여했으나, 가난한 말년을 보내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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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화
https://ko.wikipedia.org/wiki/원정화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원정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원정화</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원정화</b>(元正花, <a>1974년</a> <a>1월 29일</a> ~ , <a>함경북도</a> <a>청진시</a> 출생)는 <a>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a>에서 태어난 탈북민이다. </p>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1974년에 <a>함경북도</a> <a>청진시</a>에서 태어났다. <a>1988년</a>, 고무산여자고등중학교 4학년 때는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이중 영예 붉은기 휘장'을 받았고 15세 때 <a>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a>에 발탁돼 공작원을 양성하는 학교인 <a>금성정치군사대학</a>에서 교육받았으나 <a>1992년</a> 머리 부상으로 소속된 특수부대에서 의병전역했다.<sup><a>&#91;1&#93;</a></sup> <a>1998년</a>부터 <a>국가안전보위부</a>에 포섭되어 공작 활동을 시작.<sup><a>&#91;1&#93;</a></sup> 하였다가, <a>2008년</a> <a>7월 15일</a>에 <a>대한민국</a>의 군경 합동 사법 당국에 <a>국가보안법</a> 위반으로 <a>일본</a>에서 귀국 직후 체포되었다.<sup><a>&#91;2&#93;</a></sup> 이와 동시에, 계부 김동순과 <a>한국군</a> 내에서 협력한 사람들도 체포되었다.<sup><a>&#91;3&#93;</a></sup> 그리고 원정화는 모 부대 정훈장교인 대위 황 모(30)씨와 내연 관계를 유지하면서 대위(진) 황 모씨를 이용해 군사 기밀을 빼내었고 대위(진) 황 모씨는 원정화가 자신보다 7살이나 연상인 데다가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연 관계를 유지<sup><a>&#91;4&#93;</a></sup> 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대위(진) 황 모(30)씨는 파면되어 불명예 퇴역<sup><a>&#91;5&#93;</a></sup> 되면서 구속기소되어 2009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6월의 실형을 확정판결 받았다. </p><p>원정화는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간첩으로 활동하여 후회한다"는 내용의 전향서를 제출한 가운데<sup><a>&#91;6&#93;</a></sup> 수원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신용석 부장판사)는 2008년 10월 15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원정화에게 "국가보안법상 간첩, 목적수행, 자진지원, 금품수수, 잠입과 탈출, 찬양과 고무, 회합과 통신 등에 관한 공소사실이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 피고인이 성을 매개로 군인과 정보기관 요원에게 접근해 약취, 유인을 시도하고 기존에 없던 탈북자 신분을 이용해 기밀 탐지활동을 장기적으로 수행했으며 중국에서 납치한 한국인 사업가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은 반인륜적 범죄"라고 하면서도 "취득한 군사기밀이 언론매체와 정보통신의 발달로 일반인의 접근이 가능해 국가안보에 심각한 위해를 주지않은 점, 북한에서 태어나 행위 선택의 폭이 다양하지 못했던 점, 수사에 협조하고 전향서를 제출하고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참작해 형량을 정했다"고 하면서 검찰이 구형한대로 징역 5년을 선고했다.<sup><a>&#91;7&#93;</a></sup><sup><a>&#91;8&#93;</a></sup><sup><a>&#91;9&#93;</a></sup> 피고인 원정화의 국선변호인을 맡은 대한법률구조공단 수원지부는 "최근 항소심 경향이 1심 판결을 존중하는 추세인데다 재판이 계속 진행될 경우 집중될 언론의 관심에 대한 부담감이 커 항소하지 않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밝힌 가운데 검찰도 1심 재판부가 구형량대로 선고를 했기 때문에 항소하지 않아 1심 판결이 최종 확정되었다.<sup><a>&#91;10&#93;</a></sup> 검찰은 여러 진술을 확보했으나 "탈북자 100여 명과 한국인 사업가 7여 명을 북한으로 납치 송환했다"는 것은 입증하지 못했다.<sup><a>&#91;11&#93;</a></sup> </p><p>그러나 원정화의 의붓 아버지 김동순(65)은 "간첩으로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면서 법원에서 2009년 2월의 제1심, 2010년 7월 제2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2012년에 최종 확정되었다.<sup><a>&#91;12&#93;</a></sup>. </p><p>한편, <a>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a> 측은 2010년 4월 조선중앙방송을 이용해 이 사건을 남측에서 한 날조극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보다 앞선 2008년 9월 <a>조국평화통일위원회</a> 담화를 이용해서도 비슷하게 주장하였다. 특히 조평통 담화는 원정화를 '범죄자', '인간 추물'이라 원색으로 비난하였다.<sup><a>&#91;13&#93;</a></sup>. </p><p>2013년 만기 출소한 이후로 대한민국 검찰 및 경찰의 보호 하에 딸과 함께 지내고 있다. 전향 이후로 공개적인 활동은 주로 보수 언론에서의 북한 현실에 대한 인터뷰에 참여하고 있다. </p><p><br> 월간지‘<a>신동아</a>’(2014년 4월호)는 "원정화가 2014년 2월 말 자신의 의붓아버지인 김동순을 만나 북한 보위부 직파간첩, 탈북 이후 3차례 북한 방문 등 사건 당시부터 자신이 주장했던 주요 간첩 행적을 부인하는 대화를 했다."고 보도했다. 보도 직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신동아 보도에 대한 입장’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발표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한겨레는 2014년 3월 22일 “검찰로부터 허위진술을 강요당했다. 나는 간첩이 맞지만, 아버지는 아니다”라는 원정화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면서 수사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원정화는 '신동아 2014년 4월호’가 보도한 “보위부의 ‘보’자도 모른다. 나는 북한 보위부가 남파한 간첩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자신의 비공개 증언에 대해 부인하며 “어린 나이부터 보위부 요원에 선발됐다고 말하면 아버지가 놀랄까봐 그렇게 설명드린 것”이라고 하면서 2014년 4월 8일에는 “나는 간첩행위를 인정하고 죗값도 정당하게 치렀다. 내 사건은 수사과정에서 회유와 협박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랜 내사와 많은 증거물을 대한민국 법기관에서 충분히 검토하고 판결을 내려 처벌을 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조용히 살려는 저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딸과 편안히 살 수 있게 해 달라.”라는 내용을 담은 문서를 언론사에 배포했다.<sup><a>&#91;14&#93;</a></sup>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cite>박홍두 (2008년 8월 27일). <a>&#8220;원정화 "15살부터 3년간 남파 공작원 훈련<span>"</span>&#8221;</a>. 경향신문.</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오명근 (2008년 8월 27일). <a>&#8220;위장 탈북 30대 女간첩 검거&#8221;</a>. 문화일보<span>. 2008년 11월 13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윤종석 (2008년 8월 27일). <a>&#8220;<span>'</span>위장 탈북' 30대 직파 女간첩 적발(종합)&#8221;</a>. 연합뉴스<span>. 2008년 11월 13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up>&#91;<a>깨진 링크</a>(<a>과거 내용 찾기</a>)&#93;</sup></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mk 뉴스 - 위장 탈북 여간첩 원정화 검거&#8221;</a>. 2008년 3월 27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10년 6월 29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징계 분류상 파면이라서 계급은 이등병으로 강등되고 군적이 박탈된다.</span> </li> <li><span><a>↑</a></span> <span><cite>이호건 (2008년 9월 11일). <a>&#8220;여간첩 법정서 눈물 '뚝뚝'…"딸과 함께 살고파<span>"</span>&#8221;</a>. SBS.</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a>[1]</a></span> </li> <li><span><a>↑</a></span> <span><cite>김경태, 김동규 (2008년 10월 15일). <a>&#8220;수원지법, 여간첩 원정화 징역 5년 선고(종합)&#8221;</a>. 연합뉴스.</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a>[2]</a></span> </li> <li><span><a>↑</a></span> <span><a>[3]</a></span> </li> <li><span><a>↑</a></span> <span><a>[4]</a></span> </li> <li><span><a>↑</a></span> <span><a>여간첩 원정화 계부 항소심도 '무죄'</a></span> </li> <li><span><a>↑</a></span> <span><a>北방송 "원정화 여간첩 사건은 완전 날조극"</a></span> </li> <li><span><a>↑</a></span> <span><a>[5]</a></span> </li> </ol></div> <h2><span></span><span>같이 보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김현희</a></li> <li><a>마타 하리</a></li> <li><a>쉬리</a></li> <li><a>국가정보원</a></li> <li><a>2008년 위장 탈북 간첩사건</a></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원정화&amp;oldid=24034489</a>"</div> <div><div><a>분류</a>: <ul><li><a>1974년 태어남</a></li><li><a>살아있는 사람</a></li><li><a>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a></li><li><a>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a></li><li><a>북한이탈주민</a></li><li><a>대한민국 사람</a></li><li><a>함경북도 출신</a></li><li><a>탈냉전 시대의 간첩</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English</a></li><li><a>日本語</a></li><li><a>中文</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4월 15일 (월) 09:0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원정화의 국선변호인을 맡은 곳은 어디인가?
대한법률구조공단 수원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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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정화의 국선변호인을 맡은 곳은 어디인가?", "원정화는 수원지방법원에 무엇을 제출했는가?", "원정화는 어떤 혐의로 구속되었는가?", "원정화가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받은 형량은?", "원정화의 국선변호를 맡은 곳은?", "원정화가 구속 기소된 해는 언제인가?", "원정화가 선고받은 징역형은 몇 년 인가?", "원정화가 구속 기소된 혐의는 무엇인가?", "원정화는 누구와 함께 대한민국에서 조용히 살기를 원하는가?", "원정화의 의붓아버지는 누구인가?", "원정화의 의붓아버지는 누구인가요?", "원정화가 간첩으로 선발된 북한의 부서는?", "원정화의 의붓아버지 이름은 무엇인가?", "2014년 원정화와 의붓아버지와의 대화에 대한 기사를 보도한 매체는 어디인가?", "신동아의 보도에 수사 조작 의혹을 제기하며 원정화의 인터뷰를 보도한 매체는 어디인가?" ]
<!DOCTYPE html> 원정화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원정화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원정화(元正花, 1974년 1월 29일 ~ , 함경북도 청진시 출생)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태어난 탈북민이다. 생애[편집] 1974년에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났다. 1988년, 고무산여자고등중학교 4학년 때는 학업 성적이 우수하여 '이중 영예 붉은기 휘장'을 받았고 15세 때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에 발탁돼 공작원을 양성하는 학교인 금성정치군사대학에서 교육받았으나 1992년 머리 부상으로 소속된 특수부대에서 의병전역했다.[1] 1998년부터 국가안전보위부에 포섭되어 공작 활동을 시작.[1] 하였다가, 2008년 7월 15일에 대한민국의 군경 합동 사법 당국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일본에서 귀국 직후 체포되었다.[2] 이와 동시에, 계부 김동순과 한국군 내에서 협력한 사람들도 체포되었다.[3] 그리고 원정화는 모 부대 정훈장교인 대위 황 모(30)씨와 내연 관계를 유지하면서 대위(진) 황 모씨를 이용해 군사 기밀을 빼내었고 대위(진) 황 모씨는 원정화가 자신보다 7살이나 연상인 데다가 간첩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연 관계를 유지[4] 하였다. 결국, 이 사건으로 대위(진) 황 모(30)씨는 파면되어 불명예 퇴역[5] 되면서 구속기소되어 2009년 대법원에서 징역 3년6월의 실형을 확정판결 받았다. 원정화는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재판에서 "간첩으로 활동하여 후회한다"는 내용의 전향서를 제출한 가운데[6] 수원지방법원 제11형사부(재판장 신용석 부장판사)는 2008년 10월 15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된 원정화에게 "국가보안법상 간첩, 목적수행, 자진지원, 금품수수, 잠입과 탈출, 찬양과 고무, 회합과 통신 등에 관한 공소사실이 모두 유죄로 인정된다 피고인이 성을 매개로 군인과 정보기관 요원에게 접근해 약취, 유인을 시도하고 기존에 없던 탈북자 신분을 이용해 기밀 탐지활동을 장기적으로 수행했으며 중국에서 납치한 한국인 사업가가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은 반인륜적 범죄"라고 하면서도 "취득한 군사기밀이 언론매체와 정보통신의 발달로 일반인의 접근이 가능해 국가안보에 심각한 위해를 주지않은 점, 북한에서 태어나 행위 선택의 폭이 다양하지 못했던 점, 수사에 협조하고 전향서를 제출하고 반성하고 있는 점 등을 참작해 형량을 정했다"고 하면서 검찰이 구형한대로 징역 5년을 선고했다.[7][8][9] 피고인 원정화의 국선변호인을 맡은 대한법률구조공단 수원지부는 "최근 항소심 경향이 1심 판결을 존중하는 추세인데다 재판이 계속 진행될 경우 집중될 언론의 관심에 대한 부담감이 커 항소하지 않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고 밝힌 가운데 검찰도 1심 재판부가 구형량대로 선고를 했기 때문에 항소하지 않아 1심 판결이 최종 확정되었다.[10] 검찰은 여러 진술을 확보했으나 "탈북자 100여 명과 한국인 사업가 7여 명을 북한으로 납치 송환했다"는 것은 입증하지 못했다.[11] 그러나 원정화의 의붓 아버지 김동순(65)은 "간첩으로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면서 법원에서 2009년 2월의 제1심, 2010년 7월 제2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2012년에 최종 확정되었다.[12]. 한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은 2010년 4월 조선중앙방송을 이용해 이 사건을 남측에서 한 날조극이라고 주장하였고 이보다 앞선 2008년 9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담화를 이용해서도 비슷하게 주장하였다. 특히 조평통 담화는 원정화를 '범죄자', '인간 추물'이라 원색으로 비난하였다.[13]. 2013년 만기 출소한 이후로 대한민국 검찰 및 경찰의 보호 하에 딸과 함께 지내고 있다. 전향 이후로 공개적인 활동은 주로 보수 언론에서의 북한 현실에 대한 인터뷰에 참여하고 있다. 월간지‘신동아’(2014년 4월호)는 "원정화가 2014년 2월 말 자신의 의붓아버지인 김동순을 만나 북한 보위부 직파간첩, 탈북 이후 3차례 북한 방문 등 사건 당시부터 자신이 주장했던 주요 간첩 행적을 부인하는 대화를 했다."고 보도했다. 보도 직후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은 ‘신동아 보도에 대한 입장’이란 제목의 보도자료를 발표하고 진상규명을 요구했다. 한겨레는 2014년 3월 22일 “검찰로부터 허위진술을 강요당했다. 나는 간첩이 맞지만, 아버지는 아니다”라는 원정화 인터뷰 내용을 보도하면서 수사 조작 의혹을 제기했다. 하지만 원정화는 '신동아 2014년 4월호’가 보도한 “보위부의 ‘보’자도 모른다. 나는 북한 보위부가 남파한 간첩이 아니다”라는 취지의 자신의 비공개 증언에 대해 부인하며 “어린 나이부터 보위부 요원에 선발됐다고 말하면 아버지가 놀랄까봐 그렇게 설명드린 것”이라고 하면서 2014년 4월 8일에는 “나는 간첩행위를 인정하고 죗값도 정당하게 치렀다. 내 사건은 수사과정에서 회유와 협박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오랜 내사와 많은 증거물을 대한민국 법기관에서 충분히 검토하고 판결을 내려 처벌을 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조용히 살려는 저를 더 이상 괴롭히지 말고 딸과 편안히 살 수 있게 해 달라.”라는 내용을 담은 문서를 언론사에 배포했다.[14] 각주[편집] ↑ 가 나 박홍두 (2008년 8월 27일). “원정화 "15살부터 3년간 남파 공작원 훈련"”. 경향신문.  ↑ 오명근 (2008년 8월 27일). “위장 탈북 30대 女간첩 검거”. 문화일보. 2008년 11월 13일에 확인함.  ↑ 윤종석 (2008년 8월 27일). “'위장 탈북' 30대 직파 女간첩 적발(종합)”. 연합뉴스. 2008년 11월 13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 “mk 뉴스 - 위장 탈북 여간첩 원정화 검거”. 2008년 3월 27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0년 6월 29일에 확인함.  ↑ 징계 분류상 파면이라서 계급은 이등병으로 강등되고 군적이 박탈된다. ↑ 이호건 (2008년 9월 11일). “여간첩 법정서 눈물 '뚝뚝'…"딸과 함께 살고파"”. SBS.  ↑ [1] ↑ 김경태, 김동규 (2008년 10월 15일). “수원지법, 여간첩 원정화 징역 5년 선고(종합)”. 연합뉴스.  ↑ [2] ↑ [3] ↑ [4] ↑ 여간첩 원정화 계부 항소심도 '무죄' ↑ 北방송 "원정화 여간첩 사건은 완전 날조극" ↑ [5] 같이 보기[편집] 김현희 마타 하리 쉬리 국가정보원 2008년 위장 탈북 간첩사건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원정화&amp;oldid=24034489" 분류: 1974년 태어남살아있는 사람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작원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북한이탈주민대한민국 사람함경북도 출신탈냉전 시대의 간첩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5일 (월) 09:0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문단 번호 | 핵심 내용 | 키워드 | |------------|--------------------------------------------------------------------------|----------------------------| | 1 | 원정화는 1974년 함경북도 청진시에서 태어난 탈북민이다. | 원정화, 탈북민 | | 2 | 원정화는 고등학교 시절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에 가입했다. | 학업 성적, 청년동맹 | | 3 | 1992년 특수부대에서 의병전역 후, 1998년 국가안전보위부에 포섭되어 공작 활동을 시작했다. | 특수부대, 공작 활동 | | 4 | 2008년 일본에서 귀국 후 체포되었고, 간첩 혐의로 기소되었다. | 체포, 간첩 혐의 | | 5 | 원정화는 군사 기밀을 빼내기 위해 대위와 내연 관계를 유지했다. | 내연 관계, 군사 기밀 | | 6 |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았고, 검찰은 항소하지 않았다. | 징역 5년, 항소 없음 | | 7 | 원정화의 의붓아버지는 간첩으로 인정할 만한 증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 의붓아버지, 무죄 주장 | | 8 | 북한 측은 이 사건을 날조극이라고 주장했다. | 북한 주장, 날조극 | | 9 | 2013년 출소 후, 대한민국에서 딸과 함께 지내며 북한 현실에 대한 인터뷰를 했다. | 출소, 인터뷰 | | 10 | 원정화는 간첩 행위를 인정하며, 수사 과정에서의 회유와 협박을 부인했다. | 간첩 인정, 수사 조작 의혹 | ### 글의 흐름 요약 글은 원정화의 생애와 경과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녀의 출생, 교육, 간첩 활동, 체포 및 재판 과정을 상세히 설명한다. 원정화는 간첩 혐의로 기소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이후 출소하여 대한민국에서 생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그녀의 가족과 북한 측의 반응도 언급되며, 사건에 대한 다양한 시각이 제시된다.
이 글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표 형식으로 요약해줘. 예: {문단 번호, 핵심 내용, 키워드}. 글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요약 마지막에 간단히 설명해줘.
김영한_(1957년)
https://ko.wikipedia.org/wiki/김영한_(1957년)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김영한 (1957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김영한 (1957년)</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김영한</b>(金英漢, <a>1957년</a> ~ <a>2016년</a> <a>8월 21일</a>)은 대한민국의 법률가이다. 1988년부터 2012년까지 검사 생활을 하였고 검사직 사퇴 후 변호사 생활을 했다. 2014년 <a>박근혜 정부</a> 제3대 <a>민정수석비서관</a>에 임용되어 일하다가 <a>2015년</a> 초 '<a>비선 실세 국정 개입 의혹</a>’을 규명하기 위해 열린 <a>국회 운영위</a> 회의에 <a>김기춘</a> <a>대통령비서실장</a>의 명령에도 출석을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학력</span></a></li> <li><a><span>2</span> <span>경력</span></a></li> <li><a><span>3</span> <span>항명사건</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5</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학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1976.02&#160;: <a>경북고등학교</a> 졸업</li> <li>1980.02&#160;: <a>연세대학교</a> 경제학 학사</li> <li>1982.02&#160;: <a>연세대학교</a> 대학원 법학 석사</li></ul> <h2><span></span><span>경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1982&#160;: 제24회 사법시험 합격</li> <li>1984&#160;: 제14기 사법연수원 수료</li> <li>해군 군법무관</li> <li>1988&#160;: 광주지방검찰청 검사</li> <li>1990.03&#160;: 대구지방검찰청 경주지청 검사</li> <li>1991.07&#160;: 서울지방검찰청 검사</li> <li>1994.03&#160;: 대전지방검찰청 검사</li> <li>1996.03&#160;: 대구지방검찰청 검사</li> <li>1997.03&#160;: 대구고등검찰청 검사</li> <li>1998.04&#160;: 대구지방검찰청 경주지청 형사2부 부장검사</li> <li>1999.06&#160;: 대구지방검찰청 공안부 부장검사</li> <li>2000&#160;: 대검찰청 공안3과 과장검사</li> <li>2001&#160;: 대검찰청 공안1과 과장검사</li> <li>2002&#160;: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10부 부장검사</li> <li>2003&#160;: 청주지방검찰청 충주지청 지청장</li> <li>2003&#160;: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1부 부장검사</li> <li>2004&#160;: 부산지방검찰청 동부지청 차장검사</li> <li>2005&#160;: 대구지방검찰청 제2차장검사</li> <li>2006.02 ~ 2007.03: 서울고등검찰청 공판부 부장검사</li> <li>2007.03 ~ 2008.03&#160;: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 지청장</li> <li>2008.03 ~ 2009.01&#160;: 대구고등검찰청 차장검사(검사장)</li> <li>2009.01 ~ 2009.08&#160;: 청주지방검찰청 검사장</li> <li>2009.08 ~ 2010.07&#160;: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장</li> <li>2010.07 ~ 2011.08&#160;: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li> <li>2011.08 ~ 2012.07&#160;: 대검찰청 강력부 부장검사</li> <li>2012.07 ~ 2014.06&#160;: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li> <li>2014.06 ~ 2015.01&#160;: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차관급)</li> <li>2015.09 ~ 2016.08&#160;: 대구대학교 석좌교수</li></ul> <h2><span></span><span>항명사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2015년 1월 9일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이 여야 합의사항을 거부한 것은 물론 상급자인 대통령비서실장 지시마저 거부하는 초유의 ‘항명 파문’이 벌어졌다. <a>김영한</a> 민정수석비서관이 여야가 합의하고, <a>김기춘</a> 대통령비서실장이 지시한 국회 운영위원회 출석을 거부하고 사의를 표명한 것이다.<sup><a>&#91;1&#93;</a></sup><sup><a>&#91;2&#93;</a></sup> </p><p><a>김재원</a> <a>새누리당</a> 원내수석부대표는 이날 오후 국회 운영위원회가 속개되자마자 “새누리당은 비록 대통령비서실에서 유출된 문건이 허위로 밝혀졌다 하더라도 민정수석실에서 벌어진 사안인 만큼 민정수석비서관 출석이 필요하다는 점에 의견 일치했다”며 “국회 운영위원회 주 질문이 끝나면 민정수석비서관이 출석해 답변하기로 여야 간 합의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a>안규백</a> <a>새정치민주연합</a> 원내수석부대표는 “합의가 됐는데도 돌발 사태가 있는 것 같다”며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님의 명쾌한 답변이 있어야 될 거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기춘 실장은 “민정수석비서관이 출석하도록 제가 지시를 했는데도 본인이 출석할 수 없다고 한다”며 “지금 그런 행동을 취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sup><a>&#91;3&#93;</a></sup> </p><p>이에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장인 <a>이완구</a>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출석할 수 없다는 반응인가”라고 재차 물었고 안규백 원내수석부대표는 “실장님 지휘 하에 있는 수석이 실장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앞으로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냐”고 추궁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비서실장이 지시한데 대해서 공직자가 응하지 않는다면 강력한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완구 원내대표는 다시 “여야가 합의해서 출석여부 의견이 모아졌는데도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중대사태”라며 “애매하게 말씀마시고 시간 드릴테니까 양 간사와 다시 대화를 하고 만약 본인이 응하지 않을 때 어떤 조치를 취할건지 구체적으로 답변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김기춘 실장은 "사표를 받고 대통령에게 해임을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오후 2시 43분께 속개된 운영위원회는 김영한 민정수석의 출석 거부로 인해 5분여 만에 다시 정회됐다.<sup><a>&#91;4&#93;</a></sup><sup><a>&#91;5&#93;</a></sup><sup><a>&#91;6&#93;</a></sup><sup><a>&#91;7&#93;</a></sup><sup><a>&#91;8&#93;</a></sup> </p><p>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가 김영한 수석의 출석 문제로 정회하자 새누리당 김재원 수석부대표는 이날 오후 기자들과 만나 “점심 시간 내내 출석을 요구했으나 민정수석 본인은 ‘사퇴하겠다. 나는 국회에 가서 답변할 수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또한 김영한 수석의 사의 표명 배경에 대해 “우리도 이유를 알고 싶다”며 “돌발적 상황”이라고 설명했다.<sup><a>&#91;9&#93;</a></sup><sup><a>&#91;10&#93;</a></sup> </p><p>이와 관련하여 <a>민경욱</a> 대통령비서실 대변인은 춘추관 브리핑에서 "김영한 수석은 문건유출 사건 이후 보임해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자신의 출석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은 말 그대로 정치 공세라고 생각하며, 지난 25년간 특별한 경우 외에는 민정수석이 국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 관행으로 정착돼 왔던 것인데, 정치공세에 굴복해 나쁜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출석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고 전했다. 또 "김영한 수석은 다만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본인이 사의를 표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대통령비서실 관계자는 "그런 소신이 있다면 미리 내부에 이야기를 했어야지, 이런 독선이 어딨느냐"며 "예전부터 사퇴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sup><a>&#91;11&#93;</a></sup><sup><a>&#91;12&#93;</a></sup><sup><a>&#91;13&#93;</a></sup> </p><p>하지만 과거 민정수석비서관의 국회출석이 다섯 번이나 있었고, 설사 출석이 적절치 않다는 판단을 했어도 직속상관인 김기춘 실장의 명령을 현실적으로 수석비서관이 '거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김기춘 실장은 김영한 민정수석의 법조계 대선배이며 공직기강이 가장 확실해야 할 대통령비서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sup><a>&#91;14&#93;</a></sup> </p><p><a>박완주</a>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변인은 "공직기강의 문란함이 생방송으로 전 국민에게 중계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라며 "대통령비서실의 국회 무시 행태가 도를 넘었고 대통령비서실 내부시스템은 철저하게 망가졌다"라고 비판했다. <a>김제남</a> <a>정의당</a> 원내대변인도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 핵심 관계자인 민정수석이 국회의 부름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며 "김영한 수석의 급작스러운 사의표명은 국회출석을 끝내 회피하고 국정농단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한 명백한 꼼수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sup><a>&#91;15&#93;</a></sup> </p><p>2015년 1월 10일 <a>박근혜</a> 대통령이 김영한 민정수석비서관의 사표를 수리했다. 민경욱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김영한 민정수석비서관의 사표가 오늘 오전에 수리돼 오늘 자로 면직 처리됐다”고 밝혔다. 이어 “어제 사표가 제출됐고,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작성해 올린 서류를 대통령께서 오늘 오전 재가했다”고 덧붙였다.<sup><a>&#91;16&#93;</a></sup> </p><p>같은 날 <a>정홍원</a> <a>국무총리</a>가 새해를 맞아 <a>국무총리비서실</a> 출입기자들과 <a>정부세종청사</a> 인근 운주산에서 산행을 함께 뒤 오찬장에서 '항명사태'에 대해 당황스럽다는 입장을 보였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기자들로부터 '항명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김영한 전 수석이 (내가) 대전지방검찰청 차장검사로 재직하던 시절 평검사로 같이 일했었는 데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소신이 강한 스타일 이었다"며 "김영한 전 수석이 국회에 출석하는 전례를 만들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린 것으로 보이지만 바람직하지 못한 처사"라고 말했다.<sup><a>&#91;17&#93;</a></sup> </p><p>한편, <a>박영선</a>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a>트위터</a>에 “민정수석 항명사태는 단순히 대통령비서실장에 대한 항명이 아니다”며 “국민에 대한 항명입니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영선 의원은 이어 “이명박 정권부터 쌓여온 민정수석실의 국정농단은 이미 곪아있는 상태”라고 지적하며 “이대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습니다.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라고 말했다.<sup><a>&#91;18&#93;</a></sup> </p><p>2015년 1월 11일 새정치민주연합 <a>서영교</a> 원내대변인은 "징계성 면직을 했어야 하는데 조용히 (사표를) 수리했다니 대통령의 영도, 대통령비서실의 기강도 무너져 내렸다"며 "대통령비서실의 시스템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당권주자 중 한명인 <a>문재인</a> 후보는 이날 울산지역 합동연설회를 앞두고 기자들과 만나 "최근의 국정농단에 이어 민정수석 항명에 이르기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비서실 기강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라며 "내각의 전면 개편을 통한 국정쇄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a>이인영</a> 후보도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항명사태가 일어났다면 <a>박정희</a> 전 대통령은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신년 기자회견으로 이 상황을 넘어가려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말했다.<sup><a>&#91;19&#93;</a></sup> </p><p>새누리당도 친이계 등 비주류를 중심으로 민정수석 교체를 계기로 대통령비서실의 전면적인 쇄신 필요성도 고개를 들고 있다. <a>정병국</a> 의원은 “대통령비서실이 인적쇄신을 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더 어려워진다”고 말했다.<sup><a>&#91;20&#93;</a></sup>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a>민정수석 “국회 가느니 사퇴”… 초유의 항명 파문</a>《경향신문》2015년 1월 9일 김진우·박홍두 기자</span> </li> <li><span><a>↑</a></span> <span><a>김영한 靑 민정수석 ‘항명’ 파문</a>《서울신문》2015년 1월 10일 장세훈 기자</span> </li> <li><span><a>↑</a></span> <span><a>김영한 민정수석 항명…국회 '발칵' 김기춘도 '황당'</a>《노컷뉴스》2015년 1월 9일 이재기·이용문 기자</span> </li> <li><span><a>↑</a></span> <span><a>靑 민정수석 항명? 국회 출석 거부후 “물러나겠다”</a>《동아일보》2015년 1월 9일</span> </li> <li><span><a>↑</a></span> <span><a>김영한 민정수석 국회 출석 거부…‘항명 사의’ 파문</a>《KBS》2015년 1월 9일 김기현 기자</span> </li> <li><span><a>↑</a></span> <span><a>민정수석 '항명'에 與도 '부글부글'…靑인적쇄신 탄력받나</a>《뉴스1》2015년 1월 9일 김유대·김영신 기자</span> </li> <li><span><a>↑</a></span> <span><a>靑민정수석 '항명사태'… 집권3년차 스텝 꼬이나</a>《연합뉴스》2015년 1월 9일</span> </li> <li><span><a>↑</a></span> <span><a>靑민정수석 '항명'성 사의…"해임하도록 건의"</a>《SBS》2015년 1월 9일 김호선 기자</span> </li> <li><span><a>↑</a></span> <span><a>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 사의표명…항명사태로 번지나</a>《연합뉴스》2015년 1월 9일</span> </li> <li><span><a>↑</a></span> <span><a>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 항명 파문, 청와대 인적쇄신론 불붙이나</a>《한국일보》2015년 1월 9일 김종민 기자</span> </li> <li><span><a>↑</a></span> <span><a>김영한 靑민정수석, '항명사태' 도대체 왜</a>《연합뉴스》2015년 1월 9일 박성민 기자</span> </li> <li><span><a>↑</a></span> <span><a>김영한 민정수석 '항명 사퇴'</a>《중앙일보》2015년 1월 10일 신용호·권호 기자</span> </li> <li><span><a>↑</a></span> <span><a>박 대통령, ‘항명 파동’ 민정수석 사표 수리</a> <a>Archived</a> 2016년 8월 10일 - <a>웨이백 머신</a>《채널A》2015년 1월 10일 동정민 기자</span> </li> <li><span><a>↑</a></span> <span><a>민정수석 '항명사퇴'…말 못할 비밀 있나, 靑쇄신 대타인가</a>《아시아경제》2015년 1월 10일 신범수 기자</span> </li> <li><span><a>↑</a></span> <span><a>청와대 민정수석 '황당' 사의 야당 "박 대통령 입장 밝혀야"</a>《오마이뉴스》2015년 1월 9일 이주영·최지용 기자</span> </li> <li><span><a>↑</a></span> <span><a>박 대통령, ‘항명’ 김영한 민정수석 사표 수리</a>《연합뉴스》2015년 1월 11일</span> </li> <li><span><a>↑</a></span> <span><a>정 총리 "김영한 민정수석 항명 바람직하지 못해"</a>《머니투데이》2015년 1월 10일 정혁수 기자</span> </li> <li><span><a>↑</a></span> <span><a>박영선 “김영한 민정수석 사태는 김기춘 아닌 국민에 대한 항명”</a>《로이슈》2015년 1월 10일 신종철 기자</span> </li> <li><span><a>↑</a></span> <span><a>새정치연합, 민정수석 항명사태 공세 고삐</a>《뉴시스》2015년 1월 11일 배민욱 기자</span> </li> <li><span><a>↑</a></span> <span><a>김영한 민정수석 국회 운영위 출석 거부 ‘항명’ 후폭풍</a>《문화일보》2015년 1월 10일 이화종 기자</span> </li> </ol></div></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김성수. <a>‘김영한 비망록’ 속의 KBS…청와대 손바닥에서 놀았다</a>. 뉴스타파. 2016년 11월 18일.</li></ul> <table> <tbody><tr> <td>전임<br><b><a>홍경식</a></b> </td> <td>제3대 <a>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a><br><a>2014년</a> <a>6월 12일</a> ~ <a>2015년</a> <a>1월 10일</a> </td> <td>후임<br><b><a>우병우</a></b> </td></tr></tbody></table>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박근혜-최순실 게이트</a></div></th></tr><tr><th>주요 사건</th><td><div> <ul><li><a>국민연금공단의 삼성물산 합병 관련 직권남용 및 배임 사건</a></li> <li><a>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a></li> <li><a>입시 및 학사 비리 사건</a></li></ul> </div></td></tr><tr><th><a>관련 인물</a></th><td><div></div><table><tbody><tr><th>핵심 인물</th><td><div> <ul><li><a>박근혜</a></li> <li><a>최순실</a></li></ul> </div></td></tr><tr><th>최순실 일가</th><td><div> <ul><li><a>장시호</a></li> <li><a>정유라</a></li> <li><a>최태민</a></li> <li><a>정윤회</a></li></ul> </div></td></tr><tr><th>박근혜 정부</th><td><div> <ul><li><a>김기춘</a></li> <li><a>이재만</a></li> <li><a>정호성</a></li> <li><a>안봉근</a></li> <li><a>안종범</a></li> <li><a>우병우</a></li> <li><a>문형표</a></li> <li><a>조윤선</a></li></ul> </div></td></tr><tr><th>주요 관계자</th><td><div> <ul><li><a>고영태</a></li> <li><a>김상률</a></li> <li><a>김종덕</a></li> <li><a>김종</a></li> <li><a>이재용</a></li> <li><a>이승철</a></li> <li><a>이만희</a></li> <li><a>이완영</a></li> <li><a>조원동</a></li> <li><a>차은택</a></li> <li><a>최경희</a></li></ul> </div></td></tr><tr><th>특별검사</th><td><div> <ul><li><a>박영수</a></li> <li><a>윤석열</a></li></ul> </div></td></tr><tr><th>박근혜 前 대통령 탄핵심판 대리인</th><td><div> <ul><li><a>유영하</a></li> <li><a>김평우</a></li> <li><a>서석구</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과정</th><td><div> <ul><li><a>배경</a></li> <li><a>특별검사</a></li> <li><a>박근혜 대통령 탄핵</a></li></ul> </div></td></tr><tr><th>관련 단체</th><td><div> <ul><li><a>문화체육관광부</a></li> <li><a>미르재단</a></li> <li><a>박근혜 정부</a></li> <li><a>비덱스포츠</a></li> <li><a>삼성그룹</a> <ul><li><a>삼성전자 승마단</a></li></ul></li> <li><a>자유한국당</a></li> <li><a>통일교</a></li> <li><a>신천지</a></li> <li><a>영세교</a></li> <li><a>이화여자대학교</a></li> <li><a>전국경제인연합회</a></li> <li><a>성광의료재단</a></li> <li><a>체육인재육성재단</a></li> <li><a>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a></li> <li><a>K스포츠재단</a></li> <li><a>박사모</a></li> <li><a>어버이연합</a></li> <li><a>더블루K</a></li></ul> </div></td></tr><tr><th>반응</th><td><div> <ul><li><a>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a></li> <li><a>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a></li> <li><a>#그런데_최순실은?</a></li> <li><a>국군기무사령부 계엄령 준비 사건</a></li></ul> </div></td></tr><tr><th>관련 주제</th><td><div> <ul><li><a>박근혜 정부</a> <ul><li><a>박근혜에 대한 비판</a></li></ul></li> <li><a>늘품체조</a></li> <li><a>코리아체조</a></li> <li><a>헬조선</a></li> <li><a>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a></li> <li><a>새누리당</a></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영한_(1957년)&amp;oldid=24077716</a>"</div> <div><div><a>분류</a>: <ul><li><a>대한민국의 공무원</a></li><li><a>대한민국 해군 대위</a></li><li><a>1957년 태어남</a></li><li><a>2016년 죽음</a></li><li><a>간암으로 죽은 사람</a></li><li><a>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a></li><li><a>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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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민정수석이 출석에 응하지 않을 경우 비서실장이 취하려는 조치는?
사표를 받고 대통령에게 해임을 건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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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316
8,987
[ "민정수석이 출석에 응하지 않을 경우 비서실장이 취하려는 조치는?", "국회 운영위원회가 속개된 지 5분여 만에 다시 정회된 이유는?", "운영위원회에 출석을 거부한 민정수석은 누구인가?",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장은 누구인가?", "김영한 수석은 자신의 출석 여부가 핵심으로 부각되는 이유를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김영한 수석이 출석하지 않는 대신 책임을 지겠다고 한 방법은?", "민정수석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국회에 출석하지 않는 관행은 몇 년 동안 정착되어 왔는가?", "김영한 수석은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국회출석을 요구 받았는가?",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비서실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내세운 것은?", "서영교 원내대변인은 대통령비서실이 김영한 민정수석에게 어떤 조치를 내려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당권주자 중 한명이자 울산지역 합동설명회를 앞둔 사람은 누구인가?", "문재인 후보가 국정쇄신을 위해 내각을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했는가?" ]
<!DOCTYPE html> 김영한 (1957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영한 (1957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영한(金英漢, 1957년 ~ 2016년 8월 21일)은 대한민국의 법률가이다. 1988년부터 2012년까지 검사 생활을 하였고 검사직 사퇴 후 변호사 생활을 했다. 2014년 박근혜 정부 제3대 민정수석비서관에 임용되어 일하다가 2015년 초 '비선 실세 국정 개입 의혹’을 규명하기 위해 열린 국회 운영위 회의에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의 명령에도 출석을 거부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목차 1 학력 2 경력 3 항명사건 4 각주 5 외부 링크 학력[편집] 1976.02 : 경북고등학교 졸업 1980.02 : 연세대학교 경제학 학사 1982.02 : 연세대학교 대학원 법학 석사 경력[편집] 1982 : 제24회 사법시험 합격 1984 : 제14기 사법연수원 수료 해군 군법무관 1988 : 광주지방검찰청 검사 1990.03 : 대구지방검찰청 경주지청 검사 1991.07 : 서울지방검찰청 검사 1994.03 : 대전지방검찰청 검사 1996.03 : 대구지방검찰청 검사 1997.03 : 대구고등검찰청 검사 1998.04 : 대구지방검찰청 경주지청 형사2부 부장검사 1999.06 : 대구지방검찰청 공안부 부장검사 2000 : 대검찰청 공안3과 과장검사 2001 : 대검찰청 공안1과 과장검사 2002 : 서울중앙지방검찰청 형사10부 부장검사 2003 : 청주지방검찰청 충주지청 지청장 2003 :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공안1부 부장검사 2004 : 부산지방검찰청 동부지청 차장검사 2005 : 대구지방검찰청 제2차장검사 2006.02 ~ 2007.03: 서울고등검찰청 공판부 부장검사 2007.03 ~ 2008.03 :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 지청장 2008.03 ~ 2009.01 : 대구고등검찰청 차장검사(검사장) 2009.01 ~ 2009.08 : 청주지방검찰청 검사장 2009.08 ~ 2010.07 :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장 2010.07 ~ 2011.08 : 수원지방검찰청 검사장 2011.08 ~ 2012.07 : 대검찰청 강력부 부장검사 2012.07 ~ 2014.06 : 법무법인 바른 변호사 2014.06 ~ 2015.01 :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차관급) 2015.09 ~ 2016.08 : 대구대학교 석좌교수 항명사건[편집] 2015년 1월 9일 대통령비서실 수석비서관이 여야 합의사항을 거부한 것은 물론 상급자인 대통령비서실장 지시마저 거부하는 초유의 ‘항명 파문’이 벌어졌다. 김영한 민정수석비서관이 여야가 합의하고,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지시한 국회 운영위원회 출석을 거부하고 사의를 표명한 것이다.[1][2] 김재원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는 이날 오후 국회 운영위원회가 속개되자마자 “새누리당은 비록 대통령비서실에서 유출된 문건이 허위로 밝혀졌다 하더라도 민정수석실에서 벌어진 사안인 만큼 민정수석비서관 출석이 필요하다는 점에 의견 일치했다”며 “국회 운영위원회 주 질문이 끝나면 민정수석비서관이 출석해 답변하기로 여야 간 합의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안규백 새정치민주연합 원내수석부대표는 “합의가 됐는데도 돌발 사태가 있는 것 같다”며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님의 명쾌한 답변이 있어야 될 거 같다”고 말했다. 그러자 김기춘 실장은 “민정수석비서관이 출석하도록 제가 지시를 했는데도 본인이 출석할 수 없다고 한다”며 “지금 그런 행동을 취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3] 이에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장인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출석할 수 없다는 반응인가”라고 재차 물었고 안규백 원내수석부대표는 “실장님 지휘 하에 있는 수석이 실장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앞으로 어떤 조치를 취할 것이냐”고 추궁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비서실장이 지시한데 대해서 공직자가 응하지 않는다면 강력한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그러나 이완구 원내대표는 다시 “여야가 합의해서 출석여부 의견이 모아졌는데도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중대사태”라며 “애매하게 말씀마시고 시간 드릴테니까 양 간사와 다시 대화를 하고 만약 본인이 응하지 않을 때 어떤 조치를 취할건지 구체적으로 답변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김기춘 실장은 "사표를 받고 대통령에게 해임을 건의하겠다"고 말했다. 결국 오후 2시 43분께 속개된 운영위원회는 김영한 민정수석의 출석 거부로 인해 5분여 만에 다시 정회됐다.[4][5][6][7][8] 국회 운영위원회 전체회의가 김영한 수석의 출석 문제로 정회하자 새누리당 김재원 수석부대표는 이날 오후 기자들과 만나 “점심 시간 내내 출석을 요구했으나 민정수석 본인은 ‘사퇴하겠다. 나는 국회에 가서 답변할 수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또한 김영한 수석의 사의 표명 배경에 대해 “우리도 이유를 알고 싶다”며 “돌발적 상황”이라고 설명했다.[9][10] 이와 관련하여 민경욱 대통령비서실 대변인은 춘추관 브리핑에서 "김영한 수석은 문건유출 사건 이후 보임해 사건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자신의 출석 여부가 핵심 쟁점으로 부각되는 것은 말 그대로 정치 공세라고 생각하며, 지난 25년간 특별한 경우 외에는 민정수석이 국회에 출석하지 않는 것이 관행으로 정착돼 왔던 것인데, 정치공세에 굴복해 나쁜 선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출석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밝혔다"고 전했다. 또 "김영한 수석은 다만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본인이 사의를 표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대통령비서실 관계자는 "그런 소신이 있다면 미리 내부에 이야기를 했어야지, 이런 독선이 어딨느냐"며 "예전부터 사퇴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11][12][13] 하지만 과거 민정수석비서관의 국회출석이 다섯 번이나 있었고, 설사 출석이 적절치 않다는 판단을 했어도 직속상관인 김기춘 실장의 명령을 현실적으로 수석비서관이 '거부'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로 받아들여진다. 김기춘 실장은 김영한 민정수석의 법조계 대선배이며 공직기강이 가장 확실해야 할 대통령비서실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14] 박완주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변인은 "공직기강의 문란함이 생방송으로 전 국민에게 중계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라며 "대통령비서실의 국회 무시 행태가 도를 넘었고 대통령비서실 내부시스템은 철저하게 망가졌다"라고 비판했다. 김제남 정의당 원내대변인도 "사건의 실체를 밝혀내기 위해 핵심 관계자인 민정수석이 국회의 부름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의무"라며 "김영한 수석의 급작스러운 사의표명은 국회출석을 끝내 회피하고 국정농단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기 위한 명백한 꼼수에 불과하다"라고 말했다.[15] 2015년 1월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김영한 민정수석비서관의 사표를 수리했다. 민경욱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김영한 민정수석비서관의 사표가 오늘 오전에 수리돼 오늘 자로 면직 처리됐다”고 밝혔다. 이어 “어제 사표가 제출됐고,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이 작성해 올린 서류를 대통령께서 오늘 오전 재가했다”고 덧붙였다.[16] 같은 날 정홍원 국무총리가 새해를 맞아 국무총리비서실 출입기자들과 정부세종청사 인근 운주산에서 산행을 함께 뒤 오찬장에서 '항명사태'에 대해 당황스럽다는 입장을 보였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기자들로부터 '항명사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김영한 전 수석이 (내가) 대전지방검찰청 차장검사로 재직하던 시절 평검사로 같이 일했었는 데 (주어진 업무에) 최선을 다하고 소신이 강한 스타일 이었다"며 "김영한 전 수석이 국회에 출석하는 전례를 만들지 않겠다며 고집을 부린 것으로 보이지만 바람직하지 못한 처사"라고 말했다.[17] 한편, 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트위터에 “민정수석 항명사태는 단순히 대통령비서실장에 대한 항명이 아니다”며 “국민에 대한 항명입니다”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영선 의원은 이어 “이명박 정권부터 쌓여온 민정수석실의 국정농단은 이미 곪아있는 상태”라고 지적하며 “이대로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습니다.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들지 못하는 이유”라고 말했다.[18] 2015년 1월 11일 새정치민주연합 서영교 원내대변인은 "징계성 면직을 했어야 하는데 조용히 (사표를) 수리했다니 대통령의 영도, 대통령비서실의 기강도 무너져 내렸다"며 "대통령비서실의 시스템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당권주자 중 한명인 문재인 후보는 이날 울산지역 합동연설회를 앞두고 기자들과 만나 "최근의 국정농단에 이어 민정수석 항명에 이르기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대통령비서실 기강이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다"라며 "내각의 전면 개편을 통한 국정쇄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인영 후보도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항명사태가 일어났다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불호령을 내렸을 것"이라며 "박근혜 대통령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신년 기자회견으로 이 상황을 넘어가려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말했다.[19] 새누리당도 친이계 등 비주류를 중심으로 민정수석 교체를 계기로 대통령비서실의 전면적인 쇄신 필요성도 고개를 들고 있다. 정병국 의원은 “대통령비서실이 인적쇄신을 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더 어려워진다”고 말했다.[20] 각주[편집] ↑ 민정수석 “국회 가느니 사퇴”… 초유의 항명 파문《경향신문》2015년 1월 9일 김진우·박홍두 기자 ↑ 김영한 靑 민정수석 ‘항명’ 파문《서울신문》2015년 1월 10일 장세훈 기자 ↑ 김영한 민정수석 항명…국회 '발칵' 김기춘도 '황당'《노컷뉴스》2015년 1월 9일 이재기·이용문 기자 ↑ 靑 민정수석 항명? 국회 출석 거부후 “물러나겠다”《동아일보》2015년 1월 9일 ↑ 김영한 민정수석 국회 출석 거부…‘항명 사의’ 파문《KBS》2015년 1월 9일 김기현 기자 ↑ 민정수석 '항명'에 與도 '부글부글'…靑인적쇄신 탄력받나《뉴스1》2015년 1월 9일 김유대·김영신 기자 ↑ 靑민정수석 '항명사태'… 집권3년차 스텝 꼬이나《연합뉴스》2015년 1월 9일 ↑ 靑민정수석 '항명'성 사의…"해임하도록 건의"《SBS》2015년 1월 9일 김호선 기자 ↑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 사의표명…항명사태로 번지나《연합뉴스》2015년 1월 9일 ↑ 김영한 청와대 민정수석 항명 파문, 청와대 인적쇄신론 불붙이나《한국일보》2015년 1월 9일 김종민 기자 ↑ 김영한 靑민정수석, '항명사태' 도대체 왜《연합뉴스》2015년 1월 9일 박성민 기자 ↑ 김영한 민정수석 '항명 사퇴'《중앙일보》2015년 1월 10일 신용호·권호 기자 ↑ 박 대통령, ‘항명 파동’ 민정수석 사표 수리 Archived 2016년 8월 10일 - 웨이백 머신《채널A》2015년 1월 10일 동정민 기자 ↑ 민정수석 '항명사퇴'…말 못할 비밀 있나, 靑쇄신 대타인가《아시아경제》2015년 1월 10일 신범수 기자 ↑ 청와대 민정수석 '황당' 사의 야당 "박 대통령 입장 밝혀야"《오마이뉴스》2015년 1월 9일 이주영·최지용 기자 ↑ 박 대통령, ‘항명’ 김영한 민정수석 사표 수리《연합뉴스》2015년 1월 11일 ↑ 정 총리 "김영한 민정수석 항명 바람직하지 못해"《머니투데이》2015년 1월 10일 정혁수 기자 ↑ 박영선 “김영한 민정수석 사태는 김기춘 아닌 국민에 대한 항명”《로이슈》2015년 1월 10일 신종철 기자 ↑ 새정치연합, 민정수석 항명사태 공세 고삐《뉴시스》2015년 1월 11일 배민욱 기자 ↑ 김영한 민정수석 국회 운영위 출석 거부 ‘항명’ 후폭풍《문화일보》2015년 1월 10일 이화종 기자 외부 링크[편집] 김성수. ‘김영한 비망록’ 속의 KBS…청와대 손바닥에서 놀았다. 뉴스타파. 2016년 11월 18일. <table> <tbody><tr> <td>전임홍경식 </td> <td>제3대 대통령비서실 민정수석2014년 6월 12일 ~ 2015년 1월 10일 </td> <td>후임우병우 </td></tr></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2">vdeh박근혜-최순실 게이트</th></tr><tr><th>주요 사건</th><td> 국민연금공단의 삼성물산 합병 관련 직권남용 및 배임 사건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 입시 및 학사 비리 사건 </td></tr><tr><th>관련 인물</th><td><table><tbody><tr><th>핵심 인물</th><td> 박근혜 최순실 </td></tr><tr><th>최순실 일가</th><td> 장시호 정유라 최태민 정윤회 </td></tr><tr><th>박근혜 정부</th><td> 김기춘 이재만 정호성 안봉근 안종범 우병우 문형표 조윤선 </td></tr><tr><th>주요 관계자</th><td> 고영태 김상률 김종덕 김종 이재용 이승철 이만희 이완영 조원동 차은택 최경희 </td></tr><tr><th>특별검사</th><td> 박영수 윤석열 </td></tr><tr><th>박근혜 前 대통령 탄핵심판 대리인</th><td> 유영하 김평우 서석구 </td></tr></tbody></table></td></tr><tr><th>과정</th><td> 배경 특별검사 박근혜 대통령 탄핵 </td></tr><tr><th>관련 단체</th><td> 문화체육관광부 미르재단 박근혜 정부 비덱스포츠 삼성그룹 삼성전자 승마단 자유한국당 통일교 신천지 영세교 이화여자대학교 전국경제인연합회 성광의료재단 체육인재육성재단 한국동계스포츠영재센터 K스포츠재단 박사모 어버이연합 더블루K </td></tr><tr><th>반응</th><td> 박근혜 대통령 퇴진 운동 박근혜 대통령 탄핵 반대 시위 #그런데_최순실은? 국군기무사령부 계엄령 준비 사건 </td></tr><tr><th>관련 주제</th><td> 박근혜 정부 박근혜에 대한 비판 늘품체조 코리아체조 헬조선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선거 새누리당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영한_(1957년)&amp;oldid=24077716" 분류: 대한민국의 공무원대한민국 해군 대위1957년 태어남2016년 죽음간암으로 죽은 사람연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동문연세대학교 대학원 동문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9년 4월 21일 (일) 06:5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제목: "김영한, 항명과 사퇴의 아이콘: 대한민국 법조계의 전환점" #### 요약 본문: 김영한(1957-2016)은 대한민국의 저명한 법률가로, 검사와 변호사로서의 경력을 쌓은 후 2014년 박근혜 정부의 민정수석비서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2015년, 그는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하라는 지시를 거부하고 사퇴를 결심하는 초유의 '항명사태'를 일으켰다. 이 사건은 정치적 파장을 일으키며, 청와대 내부의 갈등과 공직기강의 붕괴를 드러냈다. 김영한은 법조계에서의 경력을 통해 강한 소신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았으며, 그의 사퇴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 운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결론 요약: 김영한의 항명사태는 단순한 개인의 사퇴를 넘어, 대한민국 정치와 법조계의 복잡한 관계를 드러내는 사건으로 남았다. 그의 행동은 공직자의 책임과 정치적 압박 사이의 갈등을 상징하며, 이후의 정치적 변화에 중요한 전환점을 제공했다. 김영한은 법조계에서의 소신과 원칙을 지키기 위해 싸운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이 글을 기반으로 블로그 요약 포스트를 쓴다고 가정하고,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제목, 요약 본문, 결론 요약까지 작성해줘.
도리스_양식
https://ko.wikipedia.org/wiki/도리스_양식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도리스 양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도리스 양식</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도리스 양식</b>(<span>doric order</span>)은 <a>이오니아 양식</a>과 <a>코린트 양식</a>과 함께 <a>고대 그리스</a>의 <a>주범 양식</a> 중 하나이다. </p><p>오늘날에 남아 있는 도리스식 신전의 가장 오래된 예는 올림피아의 <a>헤라 신전</a>으로서, 건축 연대는 기원전 7세기의 전반(前半)이라고 추측된다. 헤라 신전은 한 줄의 기둥이 집 주위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기둥의 수는 정면과 뒷면에 6개, 좌우 양측면에 모서리 기둥까지 세어서 16개, 본당(本堂)의 정면에 현관마루가와 있고, 뒷면에도 같은 모양의 현관마루가 있어서, 벽단주내(壁端柱內)에 2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이미 진보한 설계를 보이는 것인데, 건축 재료는 미케네 시대에 쓰인 돌·생벽돌·목재·테라코타 등이었다. </p><p>그리스의 석조 건축에서 곧이어 대리석과 같은 질이 좋은 재료를 많이 사용하게 되자, 건축상의 기법과 의향(意向) 등이 일반에 걸쳐 세련미를 거듭하여, 그 궁극의 경지에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생겼다. 하나하나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처리를 보인 점에서, 다른 어떠한 건축도 그리스 건축에 필적할 것이 없다. 모르타르나 시멘트 종류를 사용하지 않고 석괴(石塊)와 석괴를 붙이는 훌륭한 솜씨, 면(面)의 뛰어난 취급법, 극히 명확한 형태 부여, 그리스 건축은 이리하여 석조 기술의 최고의 완성에 도달했다. 다공질(多孔質)의 패각 석회석(貝殼石灰石)이 쓰인 경우는 형태의 명료성을 확보하기 위해, 거친 돌의 표면에 모르타르를 덧칠했다. </p><p>구조상의 발전에서는 수세기 사이에 특별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형태상의 진보 발달의 흔적은 적어도 도리스식 신전에서도 분명히 더듬어 생각할 수 있다. 기원전 6세기에 속한다는 셀리논태(고대의 셀리누스) 소위 C·D·F·G 제 신전(諸神殿), 페스툼(고대의 포세이도니아)의 이른바 &lt;바실리카&gt; 및 &lt;케레스 신전&gt; 등의 중후(重厚)한 형식, 기원전 5세기 전반에 속하는 에기나의 &lt;아파이아 신전&gt;, 올림피아의 &lt;제우스 신전&gt;, 페스툼의 &lt;포세이돈 신전&gt; 등 엄정한 양식을 거쳐, 이윽고 클래식의 완성으로 발전하였다. 클래식의 완성은 기원전 5세기 중엽에 세워진 아테네의 <a>파르테논 신전</a>, 혹은 같은 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아테네의 <a>헤파이스토스 신전</a>(일반적으로 <a>테세이온</a>이라 알려졌다) 피갈리아 부근의 바사이의 &lt;아폴로 신전&gt; 등에 의해 달성되었다. </p><p><a>파르테논 신전</a>은 도리스식 신전의 궁극의 완성품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 건축의 가장 빛나는 기념비적 걸작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전면에 팔주식(八柱式)의 주주당(周柱堂)으로 건조되어 있는 것으로서 건축의 설계자는 <a>이크티노스</a>, 공사의 지도를 맡은 사람은 <a>칼리크라테스</a>였다. 건축 공사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447년, 완성한 것은 438년의 일이다. 건축 재료는 종래의 도리스식 신전과 달라서 거의 전부가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프리즈는 도리스식 신전에 통례의 트라이글리프와 메토프로 이루어지고, 메토프는 두꺼운 부조(浮彫)로 꾸며지고, 동서양 박공에는 군상(群像) 조각이 함께 들어 있다. 내부의 배치를 보면, 전후에 각각 현관마루가 있고, 본당(本堂)의 배후에 하나의 방이 딸려 있다. 이 방은 보물이나 봉납품의 저장에 쓰인 듯하다. 본당에는 대조각가 <a>페이디아스</a>가 상아와 금으로 만든 유명한 아테나 <a>파르테노스</a>의 상이 안치되고 그 3면을 도리스식 기둥이 줄지어 서 있으며, 본당의 바깥벽의 위쪽 네 면에는 이오니아식 프리즈가 채용되어 있다. 이것은 이오니아의 감화(感化)를 보인 하나의 명료한 증거이다. </p><p><a>페르시아 전쟁</a>이 끝난 기원전 5세기 중엽, 아네테는 이오니아 연방(聯邦)의 지배권을 잡아, 이 지도적 지위를 문화적으로도 선양(宣揚)하려 했다. 그래서 여기서 처음으로, 이오니아적인 특성과 도리스적인 특성의 중간을 차지하는 아테네의 지위가 확립된 것이다. 즉 아테네 건축에 있어서는, 바야흐로 도리스 양식이 이오니아 정신과 접촉함에 따라서 미적 세련의 극치에 달했다. 장중·간소한 도리스 정신이 우아·미려·온아(溫雅)한 이오니아 정신을 어느 모양으로 활용하게 되었는가는, 파르테논 신전 건축 전체의 절묘한 효과가 이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p> <h2><span></span><span>참고 문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div><small><a><img></a><a><img></a> 이 문서에는 <a>다음커뮤니케이션</a>(현 <a>카카오</a>)에서 <a>GFDL</a> 또는 <a>CC-SA</a> 라이선스로 배포한 <a>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a>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small></div></li></ul>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img> 위키미디어 공용에 <span><a>도리스 양식</a></span>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li></ul> <div><table><tbody><tr><th><a>전거 통제</a></th><td><div> <ul><li><a>GND</a>: <span><a>4150469-0</a></span></li> <li><a>BNF</a>: <span><a>cb12503386d</a> <a>(데이터)</a></span></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도리스_양식&amp;oldid=21854053</a>"</div> <div><div><a>분류</a>: <ul><li><a>건축사</a></li><li><a>고대 그리스의 건축</a></li><li><a>도리스인</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a></li><li><a>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a></li><li><a>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li><a>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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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에는 이름이 포세이도니아였던 그리스의 도시는?
페스툼
null
101328
4,270
[ "고대에는 이름이 포세이도니아였던 그리스의 도시는?", "고대에 포세이도니아를 일컫던 말은?" ]
<!DOCTYPE html> 도리스 양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도리스 양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도리스 양식(doric order)은 이오니아 양식과 코린트 양식과 함께 고대 그리스의 주범 양식 중 하나이다. 오늘날에 남아 있는 도리스식 신전의 가장 오래된 예는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으로서, 건축 연대는 기원전 7세기의 전반(前半)이라고 추측된다. 헤라 신전은 한 줄의 기둥이 집 주위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 기둥의 수는 정면과 뒷면에 6개, 좌우 양측면에 모서리 기둥까지 세어서 16개, 본당(本堂)의 정면에 현관마루가와 있고, 뒷면에도 같은 모양의 현관마루가 있어서, 벽단주내(壁端柱內)에 2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다. 이미 진보한 설계를 보이는 것인데, 건축 재료는 미케네 시대에 쓰인 돌·생벽돌·목재·테라코타 등이었다. 그리스의 석조 건축에서 곧이어 대리석과 같은 질이 좋은 재료를 많이 사용하게 되자, 건축상의 기법과 의향(意向) 등이 일반에 걸쳐 세련미를 거듭하여, 그 궁극의 경지에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생겼다. 하나하나의 세부에 이르기까지 철저한 처리를 보인 점에서, 다른 어떠한 건축도 그리스 건축에 필적할 것이 없다. 모르타르나 시멘트 종류를 사용하지 않고 석괴(石塊)와 석괴를 붙이는 훌륭한 솜씨, 면(面)의 뛰어난 취급법, 극히 명확한 형태 부여, 그리스 건축은 이리하여 석조 기술의 최고의 완성에 도달했다. 다공질(多孔質)의 패각 석회석(貝殼石灰石)이 쓰인 경우는 형태의 명료성을 확보하기 위해, 거친 돌의 표면에 모르타르를 덧칠했다. 구조상의 발전에서는 수세기 사이에 특별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형태상의 진보 발달의 흔적은 적어도 도리스식 신전에서도 분명히 더듬어 생각할 수 있다. 기원전 6세기에 속한다는 셀리논태(고대의 셀리누스) 소위 C·D·F·G 제 신전(諸神殿), 페스툼(고대의 포세이도니아)의 이른바 &lt;바실리카&gt; 및 &lt;케레스 신전&gt; 등의 중후(重厚)한 형식, 기원전 5세기 전반에 속하는 에기나의 &lt;아파이아 신전&gt;, 올림피아의 &lt;제우스 신전&gt;, 페스툼의 &lt;포세이돈 신전&gt; 등 엄정한 양식을 거쳐, 이윽고 클래식의 완성으로 발전하였다. 클래식의 완성은 기원전 5세기 중엽에 세워진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 혹은 같은 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아테네의 헤파이스토스 신전(일반적으로 테세이온이라 알려졌다) 피갈리아 부근의 바사이의 &lt;아폴로 신전&gt; 등에 의해 달성되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스식 신전의 궁극의 완성품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 건축의 가장 빛나는 기념비적 걸작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전면에 팔주식(八柱式)의 주주당(周柱堂)으로 건조되어 있는 것으로서 건축의 설계자는 이크티노스, 공사의 지도를 맡은 사람은 칼리크라테스였다. 건축 공사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447년, 완성한 것은 438년의 일이다. 건축 재료는 종래의 도리스식 신전과 달라서 거의 전부가 대리석이 사용되었다. 프리즈는 도리스식 신전에 통례의 트라이글리프와 메토프로 이루어지고, 메토프는 두꺼운 부조(浮彫)로 꾸며지고, 동서양 박공에는 군상(群像) 조각이 함께 들어 있다. 내부의 배치를 보면, 전후에 각각 현관마루가 있고, 본당(本堂)의 배후에 하나의 방이 딸려 있다. 이 방은 보물이나 봉납품의 저장에 쓰인 듯하다. 본당에는 대조각가 페이디아스가 상아와 금으로 만든 유명한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상이 안치되고 그 3면을 도리스식 기둥이 줄지어 서 있으며, 본당의 바깥벽의 위쪽 네 면에는 이오니아식 프리즈가 채용되어 있다. 이것은 이오니아의 감화(感化)를 보인 하나의 명료한 증거이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기원전 5세기 중엽, 아네테는 이오니아 연방(聯邦)의 지배권을 잡아, 이 지도적 지위를 문화적으로도 선양(宣揚)하려 했다. 그래서 여기서 처음으로, 이오니아적인 특성과 도리스적인 특성의 중간을 차지하는 아테네의 지위가 확립된 것이다. 즉 아테네 건축에 있어서는, 바야흐로 도리스 양식이 이오니아 정신과 접촉함에 따라서 미적 세련의 극치에 달했다. 장중·간소한 도리스 정신이 우아·미려·온아(溫雅)한 이오니아 정신을 어느 모양으로 활용하게 되었는가는, 파르테논 신전 건축 전체의 절묘한 효과가 이것을 이야기해 주고 있다. 참고 문헌[편집]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도리스 양식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table><tbody><tr><th>전거 통제</th><td> GND: 4150469-0 BNF: cb12503386d (데이터)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도리스_양식&amp;oldid=21854053" 분류: 건축사고대 그리스의 건축도리스인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GND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BNF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العربيةБеларускаяБългарскиBosanski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erantoEspañolEestiEuskaraفارسیSuomiFrançaisGaeilgeGalegoעבריתHrvatskiՀայերեն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КыргызчаLatinaLatviešu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cot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imple EnglishSlovenčinaSlovenščinaShqipСрпски / srpskiSvenskaதமிழ்ไทยTürkçe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7월 24일 (화) 09:2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제목: 고대 그리스 건축의 정수, 도리스 양식의 매력 #### 요약 본문: 도리스 양식은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건축 양식 중 하나로, 이오니아 양식과 코린트 양식과 함께 그리스 건축의 기초를 형성합니다. 가장 오래된 도리스식 신전인 올림피아의 헤라 신전은 기원전 7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그 구조는 기둥이 집을 둘러싸는 형태로 설계되었습니다. 도리스 양식은 석조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며, 기원전 5세기 중반에 완성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은 이 양식의 절정을 이룹니다. 파르테논 신전은 대리석으로 건축되었고, 그 내부에는 유명한 아테나 파르테노스의 조각이 안치되어 있습니다. 도리스 양식은 이오니아 양식과의 접촉을 통해 더욱 세련된 미적 감각을 발전시켰습니다. #### 결론 요약: 도리스 양식은 고대 그리스 건축의 기초를 이루며, 그 독특한 미적 특성과 기술적 완성도는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스 양식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그리스 건축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 양식은 단순한 건축 양식을 넘어, 고대 그리스의 문화와 예술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이 글을 기반으로 블로그 요약 포스트를 쓴다고 가정하고,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제목, 요약 본문, 결론 요약까지 작성해줘.
술라의_제1차_내전
https://ko.wikipedia.org/wiki/술라의_제1차_내전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술라의 제1차 내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술라의 제1차 내전</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h colspan="2">술라의 제1차 내전</th></tr><tr><td colspan="2"><a>로마 공화정의 내전</a>의 일부</td></tr><tr><td colspan="2"><table><tbody><tr><th>날짜</th><td>기원전 88년-기원전 87년</td></tr><tr><th>장소</th><td><span><a>이탈리아 반도</a></span></td></tr><tr><th>결과</th><td> <p>포풀라레스의 승리 </p> <ul><li>술라의 쿠데타</li> <li>마리우스의 역쿠데타</li></ul></td></tr></tbody></table></td></tr><tr><th colspan="2">교전국</th></tr><tr><td> <a>옵티마테스</a></td><td> <a>포풀라레스</a></td></tr><tr><th colspan="2">지휘관</th></tr><tr><td> <p><a>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a><br> <a>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a><br> <a>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a><br> <a>푸블리우스 크라수스 디베스</a>&#160;<a><span><b>&#8224;</b></span></a><br> <a>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a><br> <a>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a><br> <a>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a><br> <a>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a><br> <a>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a>&#160;<a><span><b>&#8224;</b></span></a><br> <a>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a><br> <a>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a>&#160;<a><span><b>&#8224;</b></span></a><br> <a>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a>&#160;<a><span><b>&#8224;</b></span></a><br> <a>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a>&#160;<a><span><b>&#8224;</b></span></a><br> </p> <a>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a>&#160;<a><span><b>&#8224;</b></span></a></td><td> <p><a>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a><br> <a>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a><br> <a>가이우스 마리우스</a><br> <a>가이우스 노르바누스 발부스</a><br> <a>퀸투스 세르토리우스</a><br> <a>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a>&#160;<a><span><b>&#8224;</b></span></a><br> <a>가이우스 마리우스 미노르</a><br> <a>가이우스 카리나스</a><br> <a>가이우스 마르쿠스 켄소리누스</a><br> <a>폰티우스 텔레시누스</a><br> </p> <a>마르쿠스 람포니우스</a></td></tr></tbody></table>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로마 공화정의 내전</a></div></th></tr><tr><td colspan="2"><div> <ul><li><a>제1차 노예전쟁</a></li> <li><a>제2차 노예전쟁</a></li> <li><a>동맹시 전쟁</a></li> <li><a>술라의 제1차 내전</a></li> <li><a>세르토리아 전쟁</a></li> <li><a>술라의 제2차 내전</a></li> <li><a>제3차 노예전쟁</a></li> <li><a>제2차 카틸리나 음모</a></li> <li><a>카이사르의 내전</a></li> <li><a>무티나 전투</a></li> <li><a>리베라토레스의 내전</a></li> <li><a>시칠리아 모반</a></li> <li><a>페루시아 전쟁</a></li> <li><a>안토니우스의 내전</a></li></ul> </div></td></tr></tbody></table></div> <p><b>술라의 제1차 내전</b>(Sulla's first civil war)은 기원전 88년에서 기원전 87년 사이에 진행된, <a>로마 공화정</a> 말기의 일련의 내전들 중 하나이다. 특히 <a>율리우스 카이사르</a>가 <a>독재관</a>의 지위에 오르게 되는 과정이라는 맥락에서 로마 내전을 보았을 때 최초의 중요 내전이라고 할 수 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배경 - 동맹시 전쟁</span></a></li> <li><a><span>2</span> <span>술라의 폰토스 원정</span></a></li> <li><a><span>3</span> <span>술라의 로마진군</span></a> <ul> <li><a><span>3.1</span> <span>배경</span></a></li> <li><a><span>3.2</span> <span>전개</span></a></li> <li><a><span>3.3</span> <span>정변 이후</span></a></li> </ul> </li> <li><a><span>4</span> <span>후폭풍 - 마리우스의 귀환</span></a></li> <li><a><span>5</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배경 - 동맹시 전쟁</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로마가 로마 시민이 그 외의 이탈리아 시민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태도를 비타협적으로 고수한 결과 <a>동맹시 전쟁</a>(기원전 91년-기원전 88년)이 벌어졌다. 동맹시 시민에게 <a>로마 시민권</a>을 주자고 주장한 호민관 <a>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a>가 암살당한 것도 동맹시 전쟁의 원인 중 하나였다. 드루수스가 암살당하면서 그가 추진했던 여러 개혁 정책들은 폐기되었고, 이에 분노한 로마의 속주들 대부분은 로마에 항거하는 편에 섰다. </p><p>동맹시 전쟁 개전 당시 로마의 귀족들과 원로원은 이미 6차례 <a>집정관</a>을 연임한 <a>가이우스 마리우스</a>의 야망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리우스가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에 관한 모든 지휘권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결정했고, 그 와중에 <a>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a>가 두각을 나타냈다. 술라의 전공은 마리우스와 <a>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a>(<a>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a>의 아버지)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동맹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으로 술라는 기원전 88년 처음으로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공동 집정관은 술라의 딸의 시아버지가 되는 <a>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a>였다. </p> <h2><span></span><span>술라의 폰토스 원정</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집정관이 된 술라는 동방으로 다시 한번 원정하여 <a>폰토스</a>의 <a>미트리다테스 6세</a>와 싸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a>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a>). 동방 원정군 지휘권을 탐낸 마리우스는 호민관 <a>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a>에게 <a>숙고집회</a>를 소집하여 술라에게 지휘권을 맡기는 원로원의 결정을 뒤집어 달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났고 술피키우스의 <a>검투사</a> 경호원들이 원로원파를 분쇄했다. 술라는 마리우스의 집으로 피신하여 그에게 폭동을 멈추어 달라고 빌었지만 무시당했다. 이 폭동에서 술라의 사위도 죽었다. </p> <h2><span></span><span>술라의 로마진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술라는 로마를 탈출해 동맹시 전쟁 재향군인들의 주둔지로 피신했다. 그는 자신에게 행해진 모략들을 폭로했고 군인들은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지휘권이 술라에게서 마리우스에게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사절단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술라는 자신이 장악한 <a>군단</a> 중 가장 충성스러운 6개 군단을 동원해 로마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는 매우 예상 밖의 일이었다. 술라 이전에 어떤 장군도 군대를 이끌고 로마 시 경계를 넘은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 비윤리적인 일이었기에 원로원 의원들도 술라에게 가담하기를 거부했다. 술라는 원로원이 마리우스에게 거세당했으며 당해 일어난 전쟁을 이끌 권한은 집정관에게 있다는 원칙이 침해되었음을 이유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마리우스는 <a>검투사</a> 노예들에게 자신을 위해 싸우면 해방시켜주겠다고 약속하여 싸우게 했지만 검투사들은 술라의 정규군을 당해내지 못했고 마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은 로마 시에서 도망쳤다. </p><p>술라와 그 지지자들은 원로원에서 마리우스, 술피키우스, 그 외 마리우스파 인물들에게 궐석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몇몇 사람들이 죽었으나 마리우스 본인은 죽음의 위기를 여러 번 넘기고 안전한 아프리카로 피신했다. </p><p>술라는 마리우스와 그 일당을 <a>공공의 적</a>이라고 선언하고 원로원에서 강한 어조로 연설했다. 그는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도시를 폭력적으로 탈환한 것을 정당화했다. 도시의 정치가 안정되고 원로원의 힘이 돌아오자 술라는 주둔지로 돌아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계속했다. </p> <h3><span></span><span>배경</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기원전 88년은 로마가 막 <a>동맹시 전쟁</a>을 끝내고 동쪽에서 미트라다테스 전쟁이 일어난 해였다. 이 해의 집정관에 취임한 사람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Quintus Pompeius Rufus)였다. 동맹시 전쟁이 끝나고 율리우스 법에 따라 막 로마시민이 된 신시민과 구시민 사이에 선거구 문제에 관한갈등이 생겼고, 당시 호민관이던 <a>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a>(Publius Sulpicius Rufus)는 선거구 수를 35개 모두에서 투표할 수 있게 법안을 제출했다. 거기다가 술라가 갖고있던 미트라다테스 전쟁의 임페리움(Imperium)을 자파인 <a>마리우스</a>(Gaius Marius)에게 제공하는 법안을 추가로 제안했다. 술라와 폼페이우스 루푸스는 이 법안에 반대했으나 술피키우스는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 중에 집정관 루푸스의 아들이 죽었고 두 집정관은 로마를 탈출했다. 술라는 <a>놀라</a>(Nola)에 도달하여 거기에 주둔한 6개 군단을 장악했다. </p> <h3><span></span><span>전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군대를 장악한 술라는 신속하게 로마로 진군하였다. 집정관 루푸스도 곧 술라에 합류했다. 술라는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로마시를 공격했다.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다가 술라가 정변을 일으키고 로마로 온다는 소식에 기겁하여 검투사와 노예로 급히 편성한 군단을 이끌고 술라에 맞서려 했다. 그러나 술라의 군대가 로마에 이르자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의 군단은 와해되었다. 술라는 곧 로마를 장악했고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달아났다. 술라는 마리우스 일당 12명을 반역자로 선고하며 이들을 추격했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도망쳤고 술피키우스의 목은 참수되어 술라에게 보내졌다. 술라는 술피키우스 법을 무효화시키며 이듬해 집정관인 옥타비우스와 킨나에게 로마를 맡기고 미트라다테스를 정벌하러 떠났다. </p> <h3><span></span><span>정변 이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비록 술라가 정권을 장악했으나 곧 미트라다테스를 상대하러 떠났다. 전직콘술인 폼페이우스 루푸스는 이탈리아의 군대를 통솔하게 되었지만 곧 암살되었다.<sup><a>&#91;1&#93;</a></sup> 결국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가 그를 대신해 군권을 장악했다. 두 집정관들 중 한명인 킨나는 마리우스의 복귀를 주장했으나 거부당하였고 이에 킨나와 합류한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에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여 술라파를 제거한다. </p><p>마리우스가 정변을 일으킨지 3년 후인 기원전 84년 술라는 미트라다테스 전쟁을 끝내고 돌아와 마리우스가 세운 정권과 대립한다. 이로써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의 제2막이 전개된다. </p> <h2><span></span><span>후폭풍 - 마리우스의 귀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술피키우스는 노예에게 배신당해 살해당했다. 술라는 이 노예들을 해방시켜 줬다가 곧 사형시켰다. 한편 아프리카로 피신한 마리우스는 술라가 로마 밖으로 다시 나가자 자신의 귀환을 위한 계획을 시작했다. 이 망명 기간 동안 마리우스는 과거 무녀가 예언했던 바와 같이 자신이 집정관을 7번 연임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p><p>로마에서는 술라를 지지하는 보수파들과 <a>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a>를 지지하는 <a>민중파</a>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보수파 군대를 이끈 것은 집정관 <a>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a>였다. 마리우스는 아들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징발한 군대를 이끌고 기원전 87년 말 킨나, <a>퀸투스 세르토리우스</a>와 합류해 로마로 진격했다. 옥타비우스는 분쇄되었고 로마는 마리우스에게 넘어갔다. 마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a>바르디아이</a>(마리우스의 해방노예 출신 군인)들이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며 술라 지지자들을 학살했다. 5일 뒤, 세르토리우스와 킨나가 미쳐 날뛰는 바르디아이들을 보다 군기가 잡힌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하고 죽였다. 이 과정에서 로마의 귀족 100여명이 살해되었다. </p><p>마리우스는 술라의 개혁안들을 폐기시키고 술라를 공식적으로 추방, 스스로에게 술라의 동방군 지휘권을 부여하고 킨나와 함께 기원전 86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집정관 선출 보름 뒤 급사했고 킨나가 로마의 유일한 1인자가 되었다. 한편 그사이 술라는 <a>술라의 제2차 내전</a>을 준비했다.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군권을 장악하려던 스트라보가 죽였을 가능성이 크다. 스트라보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버지이며 기원전 89년도 콘술이었다.</span> </li> </ol></div></div> <div><table><tbody><tr><th colspan="3"><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고대 로마의 전쟁</div></th></tr><tr><th>로마 공화국의 전쟁</th><td><div> <ul><li><a>에트루리아</a></li> <li><a>라티움</a></li> <li><a>헤르니키</a></li> <li><a>볼스키</a></li> <li><a>삼니움</a></li> <li><a>피로스</a></li> <li><a>포에니</a> <ul><li><a>제1차</a></li> <li><a>제2차</a></li> <li><a>제3차</a></li></ul></li> <li><a>일리리아</a> <ul><li><a>제1차</a></li> <li><a>제2차</a></li> <li><a>제3차</a></li></ul></li> <li><a>마케도니아 전쟁</a> <ul><li><a>제1차</a></li> <li><a>제2차</a></li> <li><a>제3차</a></li> <li><a>제4차</a></li></ul></li> <li><a>셀레우코스</a></li> <li><a>아이톨리아</a></li> <li><a>갈라티아</a></li> <li><a>히스파니아</a> <ul><li><a>제1차 켈티베리아</a></li> <li><a>루시타니아</a></li> <li><a>누만티아</a></li> <li><a>세르토리아</a></li> <li><a>칸타브리아</a></li></ul></li> <li><a>아카이아</a></li> <li><a>유구르타</a></li> <li><a>킴브리</a></li> <li><a>노예전쟁</a> <ul><li><a>제1차</a></li> <li><a>제2차</a></li> <li><a>제3차</a></li></ul></li> <li><a>동맹시 전쟁</a></li> <li><a>술라의 내전</a> <ul><li><a>제1차</a></li> <li><a>제2차</a></li></ul></li> <li><a>미트리다테스</a> <ul><li><a>제1차</a></li> <li><a>제2차</a></li> <li><a>제3차</a></li></ul></li> <li><a>갈리아</a></li> <li><a>브리타니아</a></li> <li><a>카이사르의 내전</a></li> <li><a>공화국의 종말</a> <ul><li><a>무티나</a></li> <li><a>리베라토레스의 내전</a></li> <li><a>시칠리아</a></li> <li><a>페루시아</a></li> <li><a>안토니우스의 내전</a></li></ul></li></ul> </div></td><td rowspan="2"><div><a><img></a></div></td></tr><tr><th>로마 제국의 전쟁</th><td><div> <ul><li><a>게르만</a> <ul><li><a>토이토부르크</a></li> <li><a>마르코만니</a></li> <li><a>알레만니</a></li> <li><a>고트</a></li> <li><a>서고트</a></li></ul></li> <li><a>브리타니아</a> <ul><li><a>부디카</a></li></ul></li> <li><a>아르메니아</a></li> <li><a>사황제 난립</a></li> <li><a>유대</a></li> <li><a>제1차 다키아</a></li> <li><a>제2차 다키아</a></li> <li><a>파르티아</a></li> <li><a>사산</a></li> <li><a>3세기의 위기</a></li> <li><a>서로마 제국의 멸망</a></li></ul> </div></td></tr><tr><td colspan="3"><div><b><a>군사사</a></b></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술라의_제1차_내전&amp;oldid=24043221</a>"</div> <div><div><a>분류</a>: <ul><li><a>로마 공화정의 내전</a></li><li><a>기원전 1세기 분쟁</a></li><li><a>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정</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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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가 동맹시 전쟁을 끝난 해는?
기원전 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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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727
7,850
[ "로마가 동맹시 전쟁을 끝난 해는?", "신시민과 구시민 사이에 선거구에 관한 갈등이 발생하도록 만든 법은?", "35개 모든 선거구에서 투표할 수 있도록 법안을 제출한 사람은?", "미트라다테스 전쟁이 일어난 시기는 언제인가? ", "호민관이면서 선거구 수를 35개 모두에게 투표할 수 있게 법안을 제출한 사람은?", "미트라다테스 전쟁이 일어난 해는?", "동맹시 전쟁 후, 당시 어떤 법에 의해서 로마 신시민이 발생하였는가?", "퓨블리우스 술키피우스 루푸스가 제출한 법안을 술라와 함께 반대한 인물은 누구인가?", "술라가 군대를 장악하고 진군한 곳은?", "마리우스가 도망친 곳은?", "술라가 무효화시킨 법은?",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로마시를 공격한 사람은?", "술라가 로마를 장악한 뒤 정벌하러 떠난 나라는?", "술라의 제 1차 내전 당시 루푸스의 직업은?", "술라의 제 1차 내전에서 술라는 군대를 나누어 어디를 공격하였는가?", "술라가 반역자로 선고한 마리우스 일당은 몇 명인가?", "로마에서 민중파가 지지한 사람은?", "보수파 군대를 이끈 집정관은?", "보수파 군대를 이끈 사람은 누구인가? ", "마리우스가 로마로 진격한 시기는 언제인가? ", "당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를 지지하는 파의 이름은?", "민중파와 갈등 중이던 보수파 군대를 이끈 집정관의 이름은?" ]
<!DOCTYPE html> 술라의 제1차 내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술라의 제1차 내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술라의 제1차 내전</th></tr><tr><td colspan="2">로마 공화정의 내전의 일부</td></tr><tr><td colspan="2"><table><tbody><tr><th>날짜</th><td>기원전 88년-기원전 87년</td></tr><tr><th>장소</th><td>이탈리아 반도</td></tr><tr><th>결과</th><td> 포풀라레스의 승리 술라의 쿠데타 마리우스의 역쿠데타</td></tr></tbody></table></td></tr><tr><th colspan="2">교전국</th></tr><tr><td> 옵티마테스</td><td> 포풀라레스</td></tr><tr><th colspan="2">지휘관</th></tr><tr><td>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피우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 디베스 †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 마르쿠스 테렌티우스 바로 루쿨루스 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돌라벨라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 †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스트라보 보피스쿠스 †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 † 퀸투스 루타티우스 카툴루스 †</td><td>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 가이우스 마리우스 가이우스 노르바누스 발부스 퀸투스 세르토리우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 † 가이우스 마리우스 미노르 가이우스 카리나스 가이우스 마르쿠스 켄소리누스 폰티우스 텔레시누스 마르쿠스 람포니우스</td></tr></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2">vdeh로마 공화정의 내전</th></tr><tr><td colspan="2"> 제1차 노예전쟁 제2차 노예전쟁 동맹시 전쟁 술라의 제1차 내전 세르토리아 전쟁 술라의 제2차 내전 제3차 노예전쟁 제2차 카틸리나 음모 카이사르의 내전 무티나 전투 리베라토레스의 내전 시칠리아 모반 페루시아 전쟁 안토니우스의 내전 </td></tr></tbody></table> 술라의 제1차 내전(Sulla's first civil war)은 기원전 88년에서 기원전 87년 사이에 진행된, 로마 공화정 말기의 일련의 내전들 중 하나이다.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독재관의 지위에 오르게 되는 과정이라는 맥락에서 로마 내전을 보았을 때 최초의 중요 내전이라고 할 수 있다. 목차 1 배경 - 동맹시 전쟁 2 술라의 폰토스 원정 3 술라의 로마진군 3.1 배경 3.2 전개 3.3 정변 이후 4 후폭풍 - 마리우스의 귀환 5 각주 배경 - 동맹시 전쟁[편집] 로마가 로마 시민이 그 외의 이탈리아 시민들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는 태도를 비타협적으로 고수한 결과 동맹시 전쟁(기원전 91년-기원전 88년)이 벌어졌다. 동맹시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자고 주장한 호민관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가 암살당한 것도 동맹시 전쟁의 원인 중 하나였다. 드루수스가 암살당하면서 그가 추진했던 여러 개혁 정책들은 폐기되었고, 이에 분노한 로마의 속주들 대부분은 로마에 항거하는 편에 섰다. 동맹시 전쟁 개전 당시 로마의 귀족들과 원로원은 이미 6차례 집정관을 연임한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야망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마리우스가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에 관한 모든 지휘권을 가져서는 안된다고 결정했고, 그 와중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가 두각을 나타냈다. 술라의 전공은 마리우스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버지)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동맹시 전쟁을 승리로 이끈 공으로 술라는 기원전 88년 처음으로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공동 집정관은 술라의 딸의 시아버지가 되는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였다. 술라의 폰토스 원정[편집] 집정관이 된 술라는 동방으로 다시 한번 원정하여 폰토스의 미트리다테스 6세와 싸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동방 원정군 지휘권을 탐낸 마리우스는 호민관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에게 숙고집회를 소집하여 술라에게 지휘권을 맡기는 원로원의 결정을 뒤집어 달라고 했다. 이 과정에서 폭력사태가 일어났고 술피키우스의 검투사 경호원들이 원로원파를 분쇄했다. 술라는 마리우스의 집으로 피신하여 그에게 폭동을 멈추어 달라고 빌었지만 무시당했다. 이 폭동에서 술라의 사위도 죽었다. 술라의 로마진군[편집] 술라는 로마를 탈출해 동맹시 전쟁 재향군인들의 주둔지로 피신했다. 그는 자신에게 행해진 모략들을 폭로했고 군인들은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지휘권이 술라에게서 마리우스에게로 넘어갔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사절단에게 돌을 던졌다. 그리고 술라는 자신이 장악한 군단 중 가장 충성스러운 6개 군단을 동원해 로마로 진격을 개시했다. 이는 매우 예상 밖의 일이었다. 술라 이전에 어떤 장군도 군대를 이끌고 로마 시 경계를 넘은 전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너무 비윤리적인 일이었기에 원로원 의원들도 술라에게 가담하기를 거부했다. 술라는 원로원이 마리우스에게 거세당했으며 당해 일어난 전쟁을 이끌 권한은 집정관에게 있다는 원칙이 침해되었음을 이유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했다. 마리우스는 검투사 노예들에게 자신을 위해 싸우면 해방시켜주겠다고 약속하여 싸우게 했지만 검투사들은 술라의 정규군을 당해내지 못했고 마리우스와 그 추종자들은 로마 시에서 도망쳤다. 술라와 그 지지자들은 원로원에서 마리우스, 술피키우스, 그 외 마리우스파 인물들에게 궐석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몇몇 사람들이 죽었으나 마리우스 본인은 죽음의 위기를 여러 번 넘기고 안전한 아프리카로 피신했다. 술라는 마리우스와 그 일당을 공공의 적이라고 선언하고 원로원에서 강한 어조로 연설했다. 그는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도시를 폭력적으로 탈환한 것을 정당화했다. 도시의 정치가 안정되고 원로원의 힘이 돌아오자 술라는 주둔지로 돌아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계속했다. 배경[편집] 기원전 88년은 로마가 막 동맹시 전쟁을 끝내고 동쪽에서 미트라다테스 전쟁이 일어난 해였다. 이 해의 집정관에 취임한 사람은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Lucius Cornelius Sulla)와 퀸투스 폼페이우스 루푸스(Quintus Pompeius Rufus)였다. 동맹시 전쟁이 끝나고 율리우스 법에 따라 막 로마시민이 된 신시민과 구시민 사이에 선거구 문제에 관한갈등이 생겼고, 당시 호민관이던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루푸스(Publius Sulpicius Rufus)는 선거구 수를 35개 모두에서 투표할 수 있게 법안을 제출했다. 거기다가 술라가 갖고있던 미트라다테스 전쟁의 임페리움(Imperium)을 자파인 마리우스(Gaius Marius)에게 제공하는 법안을 추가로 제안했다. 술라와 폼페이우스 루푸스는 이 법안에 반대했으나 술피키우스는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 중에 집정관 루푸스의 아들이 죽었고 두 집정관은 로마를 탈출했다. 술라는 놀라(Nola)에 도달하여 거기에 주둔한 6개 군단을 장악했다. 전개[편집] 군대를 장악한 술라는 신속하게 로마로 진군하였다. 집정관 루푸스도 곧 술라에 합류했다. 술라는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로마시를 공격했다.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이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다가 술라가 정변을 일으키고 로마로 온다는 소식에 기겁하여 검투사와 노예로 급히 편성한 군단을 이끌고 술라에 맞서려 했다. 그러나 술라의 군대가 로마에 이르자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의 군단은 와해되었다. 술라는 곧 로마를 장악했고 마리우스와 술피키우스는 달아났다. 술라는 마리우스 일당 12명을 반역자로 선고하며 이들을 추격했다.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도망쳤고 술피키우스의 목은 참수되어 술라에게 보내졌다. 술라는 술피키우스 법을 무효화시키며 이듬해 집정관인 옥타비우스와 킨나에게 로마를 맡기고 미트라다테스를 정벌하러 떠났다. 정변 이후[편집] 비록 술라가 정권을 장악했으나 곧 미트라다테스를 상대하러 떠났다. 전직콘술인 폼페이우스 루푸스는 이탈리아의 군대를 통솔하게 되었지만 곧 암살되었다.[1] 결국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가 그를 대신해 군권을 장악했다. 두 집정관들 중 한명인 킨나는 마리우스의 복귀를 주장했으나 거부당하였고 이에 킨나와 합류한 마리우스가 아프리카에서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하여 술라파를 제거한다. 마리우스가 정변을 일으킨지 3년 후인 기원전 84년 술라는 미트라다테스 전쟁을 끝내고 돌아와 마리우스가 세운 정권과 대립한다. 이로써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의 제2막이 전개된다. 후폭풍 - 마리우스의 귀환[편집] 술피키우스는 노예에게 배신당해 살해당했다. 술라는 이 노예들을 해방시켜 줬다가 곧 사형시켰다. 한편 아프리카로 피신한 마리우스는 술라가 로마 밖으로 다시 나가자 자신의 귀환을 위한 계획을 시작했다. 이 망명 기간 동안 마리우스는 과거 무녀가 예언했던 바와 같이 자신이 집정관을 7번 연임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로마에서는 술라를 지지하는 보수파들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를 지지하는 민중파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다. 보수파 군대를 이끈 것은 집정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였다. 마리우스는 아들과 함께 아프리카에서 징발한 군대를 이끌고 기원전 87년 말 킨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와 합류해 로마로 진격했다. 옥타비우스는 분쇄되었고 로마는 마리우스에게 넘어갔다. 마리우스의 명령에 따라 바르디아이(마리우스의 해방노예 출신 군인)들이 로마 시내를 돌아다니며 술라 지지자들을 학살했다. 5일 뒤, 세르토리우스와 킨나가 미쳐 날뛰는 바르디아이들을 보다 군기가 잡힌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하고 죽였다. 이 과정에서 로마의 귀족 100여명이 살해되었다. 마리우스는 술라의 개혁안들을 폐기시키고 술라를 공식적으로 추방, 스스로에게 술라의 동방군 지휘권을 부여하고 킨나와 함께 기원전 86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마리우스는 집정관 선출 보름 뒤 급사했고 킨나가 로마의 유일한 1인자가 되었다. 한편 그사이 술라는 술라의 제2차 내전을 준비했다. 각주[편집] ↑ 군권을 장악하려던 스트라보가 죽였을 가능성이 크다. 스트라보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버지이며 기원전 89년도 콘술이었다. <table><tbody><tr><th colspan="3">vdeh고대 로마의 전쟁</th></tr><tr><th>로마 공화국의 전쟁</th><td> 에트루리아 라티움 헤르니키 볼스키 삼니움 피로스 포에니 제1차 제2차 제3차 일리리아 제1차 제2차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제1차 제2차 제3차 제4차 셀레우코스 아이톨리아 갈라티아 히스파니아 제1차 켈티베리아 루시타니아 누만티아 세르토리아 칸타브리아 아카이아 유구르타 킴브리 노예전쟁 제1차 제2차 제3차 동맹시 전쟁 술라의 내전 제1차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제1차 제2차 제3차 갈리아 브리타니아 카이사르의 내전 공화국의 종말 무티나 리베라토레스의 내전 시칠리아 페루시아 안토니우스의 내전 </td><td rowspan="2"></td></tr><tr><th>로마 제국의 전쟁</th><td> 게르만 토이토부르크 마르코만니 알레만니 고트 서고트 브리타니아 부디카 아르메니아 사황제 난립 유대 제1차 다키아 제2차 다키아 파르티아 사산 3세기의 위기 서로마 제국의 멸망 </td></tr><tr><td colspan="3">군사사</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술라의_제1차_내전&amp;oldid=24043221" 분류: 로마 공화정의 내전기원전 1세기 분쟁기원전 1세기 로마 공화정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БългарскиCatalàEnglishEspañolSuomiFrançaisעבריתBahasa IndonesiaPortuguês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Српски / srpski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6일 (화) 16:31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제목: 로마의 내전, 술라의 제1차 내전: 권력의 전환점 #### 요약 본문: 술라의 제1차 내전은 기원전 88년부터 87년까지 로마 공화정에서 발생한 중요한 내전으로, 로마의 정치적 권력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내전은 동맹시 전쟁의 여파로 시작되었으며, 술라와 마리우스 간의 권력 다툼이 중심이 되었다. 술라는 동방 원정 중 마리우스의 반란을 저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격, 마리우스와 그의 지지자들을 쫓아내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러나 술라의 승리는 오래가지 못했고, 마리우스는 아프리카에서 귀환하여 다시 권력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로마의 정치적 혼란과 폭력이 극심해졌고, 결국 마리우스는 집정관으로 선출되지만 급사하게 된다. 이 내전은 로마의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키며, 후속 내전의 서막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 결론 요약: 술라의 제1차 내전은 로마 공화정의 권력 구조를 뒤흔든 사건으로, 권력의 이동과 정치적 폭력이 얽힌 복잡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 내전은 로마의 정치적 불안정을 심화시키며, 이후의 내전과 독재 체제의 출현을 예고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술라와 마리우스의 대립은 단순한 개인의 갈등을 넘어 로마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남았다.
이 글을 기반으로 블로그 요약 포스트를 쓴다고 가정하고,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제목, 요약 본문, 결론 요약까지 작성해줘.
블랙리스트_포티_작전
https://ko.wikipedia.org/wiki/블랙리스트_포티_작전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블랙리스트 포티 작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블랙리스트 포티 작전</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tbody><tr> <th colspan="2">블랙리스트 포티 작전 <br> Operation <i>Blacklist Forty</i> </th></tr> <tr> <td colspan="2"><a>냉전</a>의 일부 </td></tr> <tr> <td colspan="2"><a><img></a><br>1945년 9월 8일, 한반도에 입성한 미군. </td></tr> <tr> <th>장소 </th> <td><span><a>한반도</a></span><br> </td></tr> <tr> <th>목표 </th> <td><a>북위 38도</a> 이남의 한반도 <a>점령</a> </td></tr> <tr> <th>날짜 </th> <td>1945년 ~ 1948년 </td></tr> <tr> <th>결과 </th> <td>작전 성공 <ul><li><a>일제 강점기</a>의 종료</li> <li><a>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a> 설립</li> <li><a>대한민국</a> 설립</li></ul> </td></tr> </tbody></table> <p><b>블랙리스트 포티 작전</b>(Operation <i>Blacklist Forty</i><sup><a>&#91;1&#93;</a></sup>)는 1945년부터 1948년 사이 <a>미국</a>의 <a>한반도</a> 점령 작전의 <a>코드네임</a>이다. <a>제2차 세계 대전</a>이 끝나고 <a>일본 제국</a>이 항복함에 따라, 미군은 나중에 <a>대한민국</a>이 되는 38선 이남 한반도를 점령하고, 현재의 <a>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a>이 되는 곳을 점령했던 소련과 함께 연합하여 독립되고 통일된 한국 정부를 건설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후 협상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 모두 자신들과 우호적인 정부를 만들려고 하여 이러한 노력은 실패하였고, 이후 <a>한반도의 분단</a>이 찾아오게 된다.<sup><a>&#91;1&#93;</a></sup><sup><a>&#91;2&#93;</a></sup>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배경</span></a></li> <li><a><span>2</span> <span>점령 작전</span></a></li> <li><a><span>3</span> <span>더 보기</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5</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배경</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2> <p>1945년 8월, 미국은 <a>소련</a>이 <a>일본과의 전쟁을 선포</a>한 이후 한반도 점령 지역 분할을 제안했다. <a>딘 러스크</a>와 <a>찰스 H. 본스틸 3세</a> 미군장교 2명은 한국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짧은 시간의 회의 이후 8월 10일 <a>북위 38도</a>를 분할 구역 기준으로 삼았다. 미국 상부는 이 분할선을 받아들이고 소련도 이 제안을 받아들었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미국 체제를 지지하는 대표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으며, 역시 소련 또한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서 소련에게 우호적인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고자 했다.<sup><a>&#91;1&#93;</a></sup><sup><a>&#91;2&#93;</a></sup><sup><a>&#91;3&#93;</a></sup> </p> <h2><span></span><span>점령 작전</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1945년 9월 9일, 서울 <a>조선총독부 청사</a> 앞에서 일본 제국의 깃발을 강하하는 미군.</div></div></div> <div><div><a><img></a> <div><div><a></a></div>1945년 9월 9일 이후 <a>미국</a>과 <a>소련</a>의 한반도 38선 분단시킨 지도</div></div></div> <p>미국은 <a>미국 육군</a> <a>제24군단</a> 45,000명을 점령작전에 투입했다. 한반도에 상륙한 최초의 미군은 1945년 9월 4일 <a>서울</a> 근처 <a>김포비행장</a>에 착륙한 소규모 부대였다. 9월 8일에는 <a>인천</a>에 <a>제7보병사단</a> 소속 병사 14명이 상륙했으며, 다음 날 대규모 상륙이 시작되었다. 저자 폴 M. 에드워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당시 한국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이를 진행한 사람은 거의 대부분의 <a>세계대전 전후</a> 결정의 거의 맡고 <a>연합군 점령하의 일본</a>의 지휘관인 <a>대장</a> <a>더글러스 맥아더</a>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이미 일본에서 수행해야 할 작전에 떠밀렸고, 결국 이 열약한 한반도 점령작전의 지휘관을 <a>중장</a> <a>존 하지</a>에게 맡겼다. 호지는 서울 반다 호텔에 사령부를 세우고 <a>군사 정부</a>를 수립했으며, 한국의 공식 언어를 <a>영어</a>로 정했으며 미국에게 호의적인 독립 정부를 수립하기 시작했다.<sup><a>&#91;1&#93;</a></sup><sup><a>&#91;2&#93;</a></sup><sup><a>&#91;3&#93;</a></sup> </p><p>하지는 전장 지휘관으로는 훌륭했으나, 외교적 능력은 낮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는 한국인을 싫어했으며, 일본과 한국이 어떤 문화적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무지했다. 그 결과 하지 중장은 자신이 "한국의 적"으로 몰릴 정도로 많은 실수를 범했다. 더욱이, 인력 부족으로 인해 하지는 치안 단속과 같은 업무에 과거 일본 경찰을 이용했다. 또한, 적어도 초기에는 미국 내에서 적합한 대체제를 찾기 전까지는 일본 식민 정부를 유지했다. 그러나, 한국인의 불만이 늘어나자 <a>도쿄</a>의 미국 군사정부는 1945년 10월 2일 공식적으로 일본의 행정부를 해체했다. 이로 인해 일본인들이 행정업무 관리에서 내려왔으나 이를 대체할 미군은 고문을 이들을 고용했다. 에드워드는 중장 하지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의 부유한 반공 세력, 과거 일본 제국과 협력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군사정부와 협력한 것이라고 말했다.<sup><a>&#91;1&#93;</a></sup><sup><a>&#91;2&#93;</a></sup><sup><a>&#91;3&#93;</a></sup> </p><p>저자 E. 타케메에 따르면, 미군은 점령군으로, 그리고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또한, 그는 미군이 군사적 배경과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일본인의 행정 관리 능력 등으로 인해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우대받았다고 말했다. 이후, 미국은 한반도의 여러 정치 세력과 직접 말하는 것보다는, 일본 당국을 이용하여 취급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많은 한국인들의 눈에, 미국과 일본은 똑같이 나빠 보였다"라고 말했다.<sup><a>&#91;3&#93;</a></sup> </p> <div><div><a><img></a> <div><div><a></a></div>1945년 9월 28일, 인천 앞바다의 <a>USS 샌프란시스코 (CA-38)</a></div></div></div> <p>한반도 내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철수는 미국과 소련 양국이 양 국에게 서로 우호적인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동의할 때 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 생성 외에는 어떠한 것도 인정하지 않았고 협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협상이 실패하면서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a>유엔</a>에 보냈다. 1947년 9월 유엔은 이 문제를 받아들어 유엔 감독 하 한국의 선거 문제와 포함에 이를 회의에 올렸다. 그러나, 소련은 유엔이 내린 결정은 오직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에만 적용되는 것이며, 38도선 북쪽은 이를 적용받지 않거나 한국의 새로운 정부인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으로 독립한다고 말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38도선 이남에 선거가 열렸고 1948년 7월 24일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a>이승만</a>이 당선되었다.<sup><a>&#91;1&#93;</a></sup><sup><a>&#91;4&#93;</a></sup> </p><p>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점령은 두 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끝나게 되었다. 에드워드에 따르면, 대부분의 미군이 철수하면서 기뻐했다고 말했다. 1950년대 들어서는 한반도, 또는 극동 문제는 미국에게는 사소한 사건으로 받아들어져 1950년 1월 5일 미국의 대통령 <a>해리 트루먼</a>은 <a>타이완 섬</a>이나 중국 본토에서의 <a>중국 공산당</a>과 <a>중국 국민당</a>의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7일 후 미국의 <a>국무장관</a> <a>딘 애치슨</a>은 "한국은 미국의 영향권 밖에 있다"라고 말했다.<sup><a>&#91;5&#93;</a></sup>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 1월 26일 미국과 대한민국은 군사 원조 협정을 맺었으며, 대략 1,000$의 통신선은 1950년 6월 25일 <a>한국 전쟁</a>이 발발할 때 대한민국에 도착했다.<sup><a>&#91;1&#93;</a></sup> </p> <h2><span></span><span>더 보기</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2> <ul><li><a>대구 10·1 사건</a></li> <li><a>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a></li> <li><a>대한민국의 역사</a></li> <li><a>빌리거 작전</a></li> <li><a>마스터돔 작전</a></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 <sup><a>마</a></sup> <sup><a>바</a></sup> <sup><a>사</a></sup></span> <span><cite>Edwards, Paul M. (2006). &#12298;The Korean War&#12299;. Greenwood Publishing Group. <a>ISBN</a>&#160;<a>0313332487</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span> <span><cite>Edwards, Paul M. (2010). &#12298;Combat operations of the Korean War: ground, air, sea, special and covert&#12299;. McFarland. <a>ISBN</a>&#160;<a>0786458127</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span> <span><cite>Takemae, E. (2003). &#12298;The Allied Occupation of Japan&#12299;.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a>ISBN</a>&#160;<a>0826415210</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Morison, Samuel Eliot (1965). &#12298;The Oxford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12299;. Oxford University Press.</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a>Excerpts</a></span> </li> </ol></div></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2> <ul><li><a>대한민국 국가기록원 - 블랙리스트 계획</a></li></ul>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span><a><img></a></span> <a>한국 전쟁</a> <span><a><img></a></span></div></th></tr><tr><td colspan="2"><div> <ul><li><b><a>대한민국</a></b> <span>(<a>대한민국 국군</a>)</span></li> <li><b><a>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a></b> <span>(<a>조선인민군</a>)</span></li></ul> </div></td></tr><tr><th><a>참전국</a></th><td><div> <ul><li><a>그리스 왕국</a></li> <li><a>남아프리카 연방</a></li> <li><a>네덜란드</a></li> <li><a>뉴질랜드</a></li> <li><a>미국</a></li> <li><a>벨기에 &amp; 룩셈부르크</a></li> <li><a>소련</a></li> <li><a>에티오피아 제국</a></li> <li><a>영국</a></li> <li><a>오스트레일리아</a></li> <li><a>중화인민공화국</a></li> <li><a>캐나다</a></li> <li><a>콜롬비아</a></li> <li><a>태국</a></li> <li><a>터키</a></li> <li><a>프랑스</a></li> <li><a>필리핀</a></li></ul> </div></td></tr><tr><th>의료지원국</th><td><div> <ul><li><a>노르웨이</a></li> <li><a>덴마크</a></li> <li><a>스웨덴</a></li> <li><a>이탈리아</a></li> <li><a>인도</a></li> <li><a>헝가리</a></li></ul> </div></td></tr><tr><th><a>대중문화</a></th><td><div> <ul><li><a>다큐멘터리 영화</a></li> <li><a>영화</a></li> <li><a>도서</a></li> <li><a>재연</a></li> <li><i><a>M*A*S*H</a></i></li></ul> </div></td></tr><tr><th><a>전투 서열</a></th><td><div> <ul><li><a>미국 제8군</a></li> <li><a>제7함대</a></li> <li><a>제5공군</a></li> <li><a>유엔군</a></li> <li><a>중국인민지원군</a></li></ul> </div></td></tr><tr><th>배경</th><td><div> <ul><li><a>한반도 분단</a></li> <li><a>제2차 국공 내전</a></li> <li><a>애치슨 선언</a></li> <li><a>조중동맹조약</a></li></ul> </div></td></tr><tr><th>주요 전투</th><td><div> <ul><li><a>폭풍 작전</a></li> <li><a>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a></li> <li><a>한강 전투</a></li> <li><a>오산 전투</a></li> <li><a>대전 전투</a></li> <li><a>부산 교두보 전투</a></li> <li><a>인천 상륙 작전</a></li> <li><a>서울 수복</a></li> <li><a>평양 탈환</a></li> <li><a>장진호 전투</a></li> <li><a>흥남 철수 작전</a></li> <li><a>1·4 후퇴</a></li> <li><a>선더볼트 작전</a></li> <li><a>중공군 춘계공세</a></li> <li><a>피의 능선 전투</a></li> <li><a>백마고지 전투</a></li> <li><a>금성 전투</a></li></ul> </div></td></tr><tr><th>기타</th><td><div> <ul><li><a>여파</a></li> <li><a>화학전 논란</a></li> <li><a>탈영병</a></li> <li><a>정전</a></li> <li><a>MiG 골목길</a></li> <li><a>블랙리스트 포티</a></li> <li><a>글로리</a></li> <li><a>기념 공원</a></li> <li><a>전쟁 기념관</a></li> <li><a>무기</a></li></ul> </div></td></tr></tbody></table></div>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냉전</a></div></th></tr><tr><td colspan="2"><div><a>USA</a> &#160;<span>&#183;</span>&#32; <a>USSR</a> &#160;<span>&#183;</span>&#32; <a>ANZUS</a> &#160;<span>&#183;</span>&#32; <a>NATO</a> &#160;<span>&#183;</span>&#32; <a>NAM</a> &#160;<span>&#183;</span>&#32; <a>SEATO</a> &#160;<span>&#183;</span>&#32; <a>WarPac</a> <br> <a>서방권</a> &#160;<span>&#183;</span>&#32; <a>동구권</a></div></td></tr><tr><th>1940년대</th><td><div> <ul><li><a>후크발라합 반란</a></li> <li><a>데케므브리아나</a></li> <li><a>얄타 회담</a></li> <li><a>발트 3국 유격전</a> <ul><li><a>숲의 형제들</a></li> <li><a>프리뵈 작전</a></li> <li><a>정글 작전</a></li> <li><a>발트 3국 점령</a></li></ul></li> <li><a>저주받은 병사들</a></li> <li><a>언싱커블 작전</a></li> <li><a>포츠담 회담</a></li> <li><a>고젠코 사건</a></li> <li><a>마스터돔 작전</a></li> <li><a>빌리거 작전</a></li> <li><a>블랙리스트 포티 작전</a></li> <li><a>1946년 이란 위기</a></li> <li><a>그리스 내전</a></li> <li><a>케르키라 해협 사건</a></li> <li><a>터키 해협 위기</a></li> <li><a>Restatement of Policy on Germany</a></li> <li><a>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a></li> <li><a>트루먼 독트린</a></li> <li><a>아시아 관계 회의</a></li> <li><a>마셜 플랜</a></li> <li><a>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a></li> <li><a>티토-스탈린 결별</a></li> <li><a>베를린 봉쇄</a></li> <li><a>서구의 배신</a></li> <li><a>철의 장막</a></li> <li><a>동구권</a></li> <li><a>서구권</a></li> <li><a>제2차 국공 내전</a></li> <li><a>말레이시아 비상사태</a></li> <li><a>알바니아 정부 전복 시도</a></li></ul> </div></td></tr><tr><th>1950년대</th><td><div> <ul><li><a>죽의 장막</a></li> <li><a>한국 전쟁</a></li> <li><a>매카시즘</a></li> <li><a>1953년 이란 쿠데타</a></li> <li><a>1953년 동독 폭동 사태</a></li> <li><a>멕시코 더러운 전쟁</a></li> <li><a>브리커 헌법 수정안</a></li> <li><a>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a></li> <li><a>베트남 분할</a></li> <li><a>1차 타이완 해협 위기</a></li> <li><a>1955년 제네바 정상 회담</a></li> <li><a>아시아 아프리카 회의</a></li> <li><a>1956년 포즈난 시위</a></li> <li><a>1956년 헝가리 혁명</a></li> <li><a>수에즈 위기</a></li> <li>"<a>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a>"</li> <li><a>글라디오 작전</a></li> <li><a>아랍 냉전</a> <ul><li><a>1957년 시리아 위기</a></li> <li><a>1958년 레바논 위기</a></li> <li><a>이라크 7월 혁명</a></li></ul></li> <li><a>스푸트니크 충격</a></li> <li><a>2차 타이완 해협 위기</a></li> <li><a>쿠바 혁명</a></li> <li><a>부엌 논쟁</a></li> <li><a>중소 분쟁</a></li></ul> </div></td></tr><tr><th>1960년대</th><td><div> <ul><li><a>콩고 위기</a></li> <li><a>U-2기 사건</a></li> <li><a>피그스만 침공</a></li> <li><a>1960년 터키 쿠데타</a></li> <li><a>소련-알바니아 결별</a></li> <li><a>베를린 장벽</a></li> <li><a>포르투갈 식민지 전쟁</a> <ul><li><a>앙골라 독립 전쟁</a></li> <li><a>기니바사우 독립 전쟁</a></li> <li><a>모잠비크 독립 전쟁</a></li></ul></li> <li><a>쿠바 미사일 위기</a></li> <li><a>인도-중국 전쟁</a></li> <li><a>사라왁 공산당 반란</a></li> <li><a>이라크 라마단 혁명</a></li> <li><a>1963년 시리아 쿠데타</a></li> <li><a>베트남 전쟁</a></li> <li><a>1964년 브라질 쿠데타</a></li> <li><a>미국의 도미니카 공화국 점령 (1955년~1956년)</a></li> <li><a>남아프리카 국경 전쟁</a></li> <li><a>인도네시아 신질서 전이</a></li> <li><a>도미노 이론</a></li> <li><a>ASEAN 선언</a></li> <li><a>라오스 내전</a></li> <li><a>1966년 시리아 쿠데타</a></li> <li><a>아르헨티나 혁명</a></li> <li><a>대한민국 DMZ 충돌</a></li> <li><a>그리스 군사 정권</a></li> <li><a>푸에블로 호 납치 사건</a></li> <li><a>6일 전쟁</a></li> <li><a>소모전</a></li> <li><a>도파르 반란</a></li> <li><a>1968년 시위</a></li> <li><a>68 혁명</a></li> <li><a>문화 대혁명</a></li> <li><a>프라하의 봄</a></li> <li><a>말레이시아 공산당 반란전</a></li> <li><a>체코슬로바키아 침공</a></li> <li><a>이라크 바트당 혁명</a></li> <li><a>구야시 공산주의</a></li> <li><a>중소 국경 분쟁</a></li> <li><a>필리핀 공산주의자 반란</a></li> <li><a>예멘 수정 운동</a></li></ul> </div></td></tr><tr><th>1970년대</th><td><div> <ul><li><a>데탕트</a></li> <li><a>핵확산방지조약</a></li> <li><a>검은 9월</a></li> <li><a>1970년 시리아 수정 운동</a></li> <li><a>캄보디아 내전</a></li> <li><a>현실정치</a></li> <li><a>핑퐁 외교</a></li> <li><a>1971년 터키 쿠데타</a></li> <li><a>이집트 수정 운동</a></li> <li><a>베를린 4국 조약</a></li> <li><a>방글라데시 독립 전쟁</a></li> <li><a>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a></li> <li><a>1972년 북예멘-남예멘 전쟁</a></li> <li><a>1973년 칠레 쿠데타</a></li> <li><a>욤키푸르 전쟁</a></li> <li><a>카네이션 혁명</a></li> <li><a>전략 무기 제한 협상</a></li> <li><a>로디지아 부시 전쟁</a></li> <li><a>앙골라 내전</a></li> <li><a>모잠비크 내전</a></li> <li><a>오가단 전쟁</a></li> <li><a>에티오피아 내전</a></li> <li><a>레바논 내전</a></li> <li><a>알바니아-중국 결별</a></li> <li><a>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a></li> <li><a>베트남-캄보디아 전쟁</a></li> <li><a>중국-베트남 전쟁</a></li> <li><a>이란 혁명</a></li> <li><a>콘도르 작전</a></li> <li><a>더러운 전쟁</a></li> <li><a>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a></li> <li><a>사우르 혁명</a></li> <li><a>뉴주얼 운동</a></li> <li><a>1972년 헤라트 봉기</a></li> <li><a>라인 강까지 7일 작전</a></li></ul> </div></td></tr><tr><th>1980년대</th><td><div> <ul><li><a>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a></li> <li><a>1980년</a> 및 <a>1984년 하계 올림픽 보이콧</a></li> <li><a>1980년 터키 쿠데타</a></li> <li><a>그레나다 침공</a></li> <li><a>1986년 흑해 사건</a></li> <li><a>1988년 흑해 충돌 사건</a></li> <li><a>연대자유노조</a> <ul><li><a>소련의 반응</a></li></ul></li> <li><a>콘트라 반군</a></li> <li><a>중앙아메리카 위기</a></li> <li><a>RYAN 작전</a></li> <li><a>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a></li> <li><a>에이블 아처 83</a></li> <li><a>전략방위구상</a></li> <li><a>피플 파워 혁명</a></li> <li><a>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a></li> <li><a>1989년 톈안먼 사건</a></li> <li><a>베를린 장벽의 붕괴</a></li> <li><a>1989년 혁명</a></li> <li><a>글라스노스트</a></li> <li><a>페레스트로이카</a></li></ul> </div></td></tr><tr><th>1990년대</th><td><div> <ul><li><a>1990년 몽골 혁명</a></li> <li><a>예멘의 통일</a></li> <li><a>독일의 통일</a></li> <li><a>알바니아 공산주의 정권 붕괴</a></li> <li><a>유고슬라비아 해체</a></li> <li><a>소련의 붕괴</a></li> <li><a>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a></li></ul> </div></td></tr><tr><th><a>동결분쟁</a></th><td><div> <ul><li><a>압하지아 문제</a></li> <li><a>양안 문제</a></li> <li><a>한반도 문제</a></li> <li><a>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a></li> <li><a>남오세티야 문제</a></li> <li><a>트란스니스트리아 문제</a></li> <li><a>인도-중국 국경 분쟁</a></li></ul> </div></td></tr><tr><th>대외 정책</th><td><div> <ul><li><a>트루먼 독트린</a></li> <li><a>봉쇄 정책</a></li> <li><a>아이젠하워 독트린</a></li> <li><a>도미노 이론</a></li> <li><a>할슈타인 독트린</a></li> <li><a>케네디 독트린</a></li> <li><a>평화적 공존</a></li> <li><a>동방 정책</a></li> <li><a>존슨 독트린</a></li> <li><a>브레즈네프 독트린</a></li> <li><a>닉슨 독트린</a></li> <li><a>울브리히트 독트린</a></li> <li><a>카터 독트린</a></li> <li><a>레이건 독트린</a></li> <li><a>롤백 정책</a></li> <li><a>푸에르토리코 주권</a></li></ul> </div></td></tr><tr><th>이데올로기</th><td><div> <ul><li><a>자본주의</a> <ul><li><a>시카고 학파</a></li> <li><a>케인스 경제학</a></li> <li><a>통화주의</a></li> <li><a>신고전파 경제학</a></li> <li><a>레이거노믹스</a></li> <li><a>공급경제학</a></li> <li><a>대처주의</a></li></ul></li></ul> <ul><li><a>공산주의</a> <ul><li><a>마르크스-레닌주의</a></li> <li><a>레닌주의</a></li> <li><a>카스트로주의</a></li> <li><a>유럽공산주의</a></li> <li><a>게바라주의</a></li> <li><a>호자주의</a></li> <li><a>주체사상</a></li> <li><a>마오쩌둥주의</a></li> <li><a>낙살리즘</a></li> <li><a>스탈린주의</a></li> <li><a>티토주의</a></li> <li><a>호치민사상</a></li> <li><a>트로츠키주의</a></li></ul></li></ul> <ul><li><a>자유민주주의</a></li> <li><a>사회민주주의</a></li></ul> </div></td></tr><tr><th>조직</th><td><div> <ul><li><a>ASEAN</a></li> <li><a>CIA</a></li> <li><a>코메콘</a></li> <li><a>EEC</a></li> <li><a>KGB</a></li> <li><a>NAM</a></li> <li><a>SAARC</a></li> <li><a>사파리 클럽</a></li> <li><a>MI6</a></li> <li><a>슈타지</a></li></ul> </div></td></tr><tr><th>프로파간다</th><td><div> <ul><li><a>적극적 조치</a></li> <li><a>이즈베스티야</a></li> <li><a>프라우다</a></li> <li><a>자유의 십자군</a></li> <li><a>자유유럽방송</a></li> <li><a>적색공포</a></li> <li><a>타스</a></li> <li><a>미국의 소리</a></li> <li><a>러시아의 소리</a></li></ul> </div></td></tr><tr><th>경쟁</th><td><div> <ul><li><a>군비 경쟁</a></li> <li><a>핵 군비 경쟁</a></li> <li><a>우주 경쟁</a></li> <li><a>상호확증파괴</a></li></ul> </div></td></tr><tr><th>더 보기</th><td><div> <ul><li><a>벼랑끝전술</a></li> <li><a>NATO-러시아 관계</a></li> <li><a>미국의 소련 스파이</a></li> <li><a>미국의 러시아 스파이</a></li> <li><a>미국-소련 관계</a></li> <li><a>미국-소련 정상 회담</a></li> <li><a>신냉전</a></li></ul> </div></td></tr><tr><td colspan="2"><div><img> <a>분류</a> &#160;<span>&#183;</span>&#32; <img> <a>위키공용 사진</a> &#160;<span>&#183;</span>&#32; <a>연표</a> &#160;<span>&#183;</span>&#32; <a>분쟁</a></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블랙리스트_포티_작전&amp;oldid=21168683</a>"</div> <div><div><a>분류</a>: <ul><li><a>비전투 군사 작전</a></li><li><a>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미국의 군사 역사</a></li><li><a>대한민국의 역사</a></li><li><a>냉전</a></li><li><a>1945년 대한민국</a></li><li><a>1945년 미국</a></li><li><a>한국 전쟁</a></li><li><a>한국의 군정기</a></li><li><a>1945년 군사사</a></li><li><a>1946년 군사사</a></li><li><a>1947년 군사사</a></li><li><a>1948년 군사사</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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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의 부족한 능력은?
외교적 능력
null
101986
11,501
[ "하지의 부족한 능력은?", "하지가 업무에 과거 일본인 경찰을 쓴 이유는?", "일본의 행정부를 해체한 일자는?", "하지가 인력 부족으로 치안 업무에 이용한 이들은?", "도쿄의 미국 군사정부가 일본 행정부를 해체한 날짜는?", "소련이 유일하게 인정한 국가 체계는?", "소련과 미국이 협상하려고 한 문제는?", "유엔이 한반도 문제를 받아들인 년도는?", "미국과 소련의 협상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미국이 한반도문제를 보낸 곳은?", "1948년 당선된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소련과 협상이 실패한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보낸 곳은?", "유엔이 내린 결정은 한반도 38도선 이남에만 적용된다고 주장한 나라는?",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해는?", "1950년 1월에 재직한 미국의 대통령은?", "1950년도 미국 해리 트루먼 정부의 국무장관은?", "한국 전쟁이 발발한 년도는?", "1950년 타이완 섬이나 중국 본토에서의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 미국 대통령은?", "한국이 미국의 영향권 밖에 있다고 한 미국의 국무장관은?", "1950년 1월 26일 미국과 대한민국이 맺은 협정은?" ]
<!DOCTYPE html> 블랙리스트 포티 작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블랙리스트 포티 작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tbody><tr> <th colspan="2">블랙리스트 포티 작전 Operation Blacklist Forty </th></tr> <tr> <td colspan="2">냉전의 일부 </td></tr> <tr> <td colspan="2">1945년 9월 8일, 한반도에 입성한 미군. </td></tr> <tr> <th>장소 </th> <td>한반도 </td></tr> <tr> <th>목표 </th> <td>북위 38도 이남의 한반도 점령 </td></tr> <tr> <th>날짜 </th> <td>1945년 ~ 1948년 </td></tr> <tr> <th>결과 </th> <td>작전 성공 일제 강점기의 종료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 설립 대한민국 설립 </td></tr> </tbody></table> 블랙리스트 포티 작전(Operation Blacklist Forty[1])는 1945년부터 1948년 사이 미국의 한반도 점령 작전의 코드네임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일본 제국이 항복함에 따라, 미군은 나중에 대한민국이 되는 38선 이남 한반도를 점령하고, 현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되는 곳을 점령했던 소련과 함께 연합하여 독립되고 통일된 한국 정부를 건설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후 협상 과정에서 미국과 소련 모두 자신들과 우호적인 정부를 만들려고 하여 이러한 노력은 실패하였고, 이후 한반도의 분단이 찾아오게 된다.[1][2] 목차 1 배경 2 점령 작전 3 더 보기 4 각주 5 외부 링크 배경[원본 편집] 1945년 8월, 미국은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한 이후 한반도 점령 지역 분할을 제안했다. 딘 러스크와 찰스 H. 본스틸 3세 미군장교 2명은 한국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짧은 시간의 회의 이후 8월 10일 북위 38도를 분할 구역 기준으로 삼았다. 미국 상부는 이 분할선을 받아들이고 소련도 이 제안을 받아들었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미국 체제를 지지하는 대표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으며, 역시 소련 또한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서 소련에게 우호적인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고자 했다.[1][2][3] 점령 작전[원본 편집] 1945년 9월 9일, 서울 조선총독부 청사 앞에서 일본 제국의 깃발을 강하하는 미군. 1945년 9월 9일 이후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38선 분단시킨 지도 미국은 미국 육군 제24군단 45,000명을 점령작전에 투입했다. 한반도에 상륙한 최초의 미군은 1945년 9월 4일 서울 근처 김포비행장에 착륙한 소규모 부대였다. 9월 8일에는 인천에 제7보병사단 소속 병사 14명이 상륙했으며, 다음 날 대규모 상륙이 시작되었다. 저자 폴 M. 에드워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당시 한국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으며, 이를 진행한 사람은 거의 대부분의 세계대전 전후 결정의 거의 맡고 연합군 점령하의 일본의 지휘관인 대장 더글러스 맥아더였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이미 일본에서 수행해야 할 작전에 떠밀렸고, 결국 이 열약한 한반도 점령작전의 지휘관을 중장 존 하지에게 맡겼다. 호지는 서울 반다 호텔에 사령부를 세우고 군사 정부를 수립했으며, 한국의 공식 언어를 영어로 정했으며 미국에게 호의적인 독립 정부를 수립하기 시작했다.[1][2][3] 하지는 전장 지휘관으로는 훌륭했으나, 외교적 능력은 낮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그는 한국인을 싫어했으며, 일본과 한국이 어떤 문화적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무지했다. 그 결과 하지 중장은 자신이 "한국의 적"으로 몰릴 정도로 많은 실수를 범했다. 더욱이, 인력 부족으로 인해 하지는 치안 단속과 같은 업무에 과거 일본 경찰을 이용했다. 또한, 적어도 초기에는 미국 내에서 적합한 대체제를 찾기 전까지는 일본 식민 정부를 유지했다. 그러나, 한국인의 불만이 늘어나자 도쿄의 미국 군사정부는 1945년 10월 2일 공식적으로 일본의 행정부를 해체했다. 이로 인해 일본인들이 행정업무 관리에서 내려왔으나 이를 대체할 미군은 고문을 이들을 고용했다. 에드워드는 중장 하지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의 부유한 반공 세력, 과거 일본 제국과 협력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군사정부와 협력한 것이라고 말했다.[1][2][3] 저자 E. 타케메에 따르면, 미군은 점령군으로, 그리고 해방자로 환영받았다. 또한, 그는 미군이 군사적 배경과 한국인들 사이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일본인의 행정 관리 능력 등으로 인해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우대받았다고 말했다. 이후, 미국은 한반도의 여러 정치 세력과 직접 말하는 것보다는, 일본 당국을 이용하여 취급하는 것이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에 따르면, "많은 한국인들의 눈에, 미국과 일본은 똑같이 나빠 보였다"라고 말했다.[3] 1945년 9월 28일, 인천 앞바다의 USS 샌프란시스코 (CA-38) 한반도 내에서 미군과 소련군의 철수는 미국과 소련 양국이 양 국에게 서로 우호적인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동의할 때 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소련은 공산주의 국가 생성 외에는 어떠한 것도 인정하지 않았고 협상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협상이 실패하면서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보냈다. 1947년 9월 유엔은 이 문제를 받아들어 유엔 감독 하 한국의 선거 문제와 포함에 이를 회의에 올렸다. 그러나, 소련은 유엔이 내린 결정은 오직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에만 적용되는 것이며, 38도선 북쪽은 이를 적용받지 않거나 한국의 새로운 정부인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으로 독립한다고 말했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38도선 이남에 선거가 열렸고 1948년 7월 24일 대한민국의 새로운 대통령으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1][4]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점령은 두 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끝나게 되었다. 에드워드에 따르면, 대부분의 미군이 철수하면서 기뻐했다고 말했다. 1950년대 들어서는 한반도, 또는 극동 문제는 미국에게는 사소한 사건으로 받아들어져 1950년 1월 5일 미국의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타이완 섬이나 중국 본토에서의 중국 공산당과 중국 국민당의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며, 7일 후 미국의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한국은 미국의 영향권 밖에 있다"라고 말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 1월 26일 미국과 대한민국은 군사 원조 협정을 맺었으며, 대략 1,000$의 통신선은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이 발발할 때 대한민국에 도착했다.[1] 더 보기[원본 편집] 대구 10·1 사건 제2차 세계 대전의 여파 대한민국의 역사 빌리거 작전 마스터돔 작전 각주[원본 편집]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Edwards, Paul M. (2006). 《The Korean War》. Greenwood Publishing Group. ISBN 0313332487.  ↑ 가 나 다 라 Edwards, Paul M. (2010). 《Combat operations of the Korean War: ground, air, sea, special and covert》. McFarland. ISBN 0786458127.  ↑ 가 나 다 라 Takemae, E. (2003). 《The Allied Occupation of Japan》. Continuum International Publishing Group. ISBN 0826415210.  ↑ Morison, Samuel Eliot (1965). 《The Oxford History of the American People》. Oxford University Press.  ↑ Excerpts 외부 링크[원본 편집] 대한민국 국가기록원 - 블랙리스트 계획 <table><tbody><tr><th colspan="2">vdeh 한국 전쟁 </th></tr><tr><td colspan="2"> 대한민국 (대한민국 국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인민군) </td></tr><tr><th>참전국</th><td> 그리스 왕국 남아프리카 연방 네덜란드 뉴질랜드 미국 벨기에 &amp; 룩셈부르크 소련 에티오피아 제국 영국 오스트레일리아 중화인민공화국 캐나다 콜롬비아 태국 터키 프랑스 필리핀 </td></tr><tr><th>의료지원국</th><td>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 인도 헝가리 </td></tr><tr><th>대중문화</th><td> 다큐멘터리 영화 영화 도서 재연 M*A*S*H </td></tr><tr><th>전투 서열</th><td> 미국 제8군 제7함대 제5공군 유엔군 중국인민지원군 </td></tr><tr><th>배경</th><td> 한반도 분단 제2차 국공 내전 애치슨 선언 조중동맹조약 </td></tr><tr><th>주요 전투</th><td> 폭풍 작전 조선인민군의 서울 점령 한강 전투 오산 전투 대전 전투 부산 교두보 전투 인천 상륙 작전 서울 수복 평양 탈환 장진호 전투 흥남 철수 작전 1·4 후퇴 선더볼트 작전 중공군 춘계공세 피의 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 금성 전투 </td></tr><tr><th>기타</th><td> 여파 화학전 논란 탈영병 정전 MiG 골목길 블랙리스트 포티 글로리 기념 공원 전쟁 기념관 무기 </td></tr></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2">vdeh냉전</th></tr><tr><td colspan="2">USA  · USSR  · ANZUS  · NATO  · NAM  · SEATO  · WarPac 서방권  · 동구권</td></tr><tr><th>1940년대</th><td> 후크발라합 반란 데케므브리아나 얄타 회담 발트 3국 유격전 숲의 형제들 프리뵈 작전 정글 작전 발트 3국 점령 저주받은 병사들 언싱커블 작전 포츠담 회담 고젠코 사건 마스터돔 작전 빌리거 작전 블랙리스트 포티 작전 1946년 이란 위기 그리스 내전 케르키라 해협 사건 터키 해협 위기 Restatement of Policy on Germany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트루먼 독트린 아시아 관계 회의 마셜 플랜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 티토-스탈린 결별 베를린 봉쇄 서구의 배신 철의 장막 동구권 서구권 제2차 국공 내전 말레이시아 비상사태 알바니아 정부 전복 시도 </td></tr><tr><th>1950년대</th><td> 죽의 장막 한국 전쟁 매카시즘 1953년 이란 쿠데타 1953년 동독 폭동 사태 멕시코 더러운 전쟁 브리커 헌법 수정안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 베트남 분할 1차 타이완 해협 위기 1955년 제네바 정상 회담 아시아 아프리카 회의 1956년 포즈난 시위 1956년 헝가리 혁명 수에즈 위기 "당신들을 묻어버리겠다!" 글라디오 작전 아랍 냉전 1957년 시리아 위기 1958년 레바논 위기 이라크 7월 혁명 스푸트니크 충격 2차 타이완 해협 위기 쿠바 혁명 부엌 논쟁 중소 분쟁 </td></tr><tr><th>1960년대</th><td> 콩고 위기 U-2기 사건 피그스만 침공 1960년 터키 쿠데타 소련-알바니아 결별 베를린 장벽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 앙골라 독립 전쟁 기니바사우 독립 전쟁 모잠비크 독립 전쟁 쿠바 미사일 위기 인도-중국 전쟁 사라왁 공산당 반란 이라크 라마단 혁명 1963년 시리아 쿠데타 베트남 전쟁 1964년 브라질 쿠데타 미국의 도미니카 공화국 점령 (1955년~1956년) 남아프리카 국경 전쟁 인도네시아 신질서 전이 도미노 이론 ASEAN 선언 라오스 내전 1966년 시리아 쿠데타 아르헨티나 혁명 대한민국 DMZ 충돌 그리스 군사 정권 푸에블로 호 납치 사건 6일 전쟁 소모전 도파르 반란 1968년 시위 68 혁명 문화 대혁명 프라하의 봄 말레이시아 공산당 반란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이라크 바트당 혁명 구야시 공산주의 중소 국경 분쟁 필리핀 공산주의자 반란 예멘 수정 운동 </td></tr><tr><th>1970년대</th><td> 데탕트 핵확산방지조약 검은 9월 1970년 시리아 수정 운동 캄보디아 내전 현실정치 핑퐁 외교 1971년 터키 쿠데타 이집트 수정 운동 베를린 4국 조약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1972년 닉슨의 중국 방문 1972년 북예멘-남예멘 전쟁 1973년 칠레 쿠데타 욤키푸르 전쟁 카네이션 혁명 전략 무기 제한 협상 로디지아 부시 전쟁 앙골라 내전 모잠비크 내전 오가단 전쟁 에티오피아 내전 레바논 내전 알바니아-중국 결별 제3차 인도차이나 전쟁 베트남-캄보디아 전쟁 중국-베트남 전쟁 이란 혁명 콘도르 작전 더러운 전쟁 대한항공 902편 격추 사건 사우르 혁명 뉴주얼 운동 1972년 헤라트 봉기 라인 강까지 7일 작전 </td></tr><tr><th>1980년대</th><td>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1980년 및 1984년 하계 올림픽 보이콧 1980년 터키 쿠데타 그레나다 침공 1986년 흑해 사건 1988년 흑해 충돌 사건 연대자유노조 소련의 반응 콘트라 반군 중앙아메리카 위기 RYAN 작전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에이블 아처 83 전략방위구상 피플 파워 혁명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 1989년 톈안먼 사건 베를린 장벽의 붕괴 1989년 혁명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 </td></tr><tr><th>1990년대</th><td> 1990년 몽골 혁명 예멘의 통일 독일의 통일 알바니아 공산주의 정권 붕괴 유고슬라비아 해체 소련의 붕괴 체코슬로바키아의 해체 </td></tr><tr><th>동결분쟁</th><td> 압하지아 문제 양안 문제 한반도 문제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 남오세티야 문제 트란스니스트리아 문제 인도-중국 국경 분쟁 </td></tr><tr><th>대외 정책</th><td> 트루먼 독트린 봉쇄 정책 아이젠하워 독트린 도미노 이론 할슈타인 독트린 케네디 독트린 평화적 공존 동방 정책 존슨 독트린 브레즈네프 독트린 닉슨 독트린 울브리히트 독트린 카터 독트린 레이건 독트린 롤백 정책 푸에르토리코 주권 </td></tr><tr><th>이데올로기</th><td> 자본주의 시카고 학파 케인스 경제학 통화주의 신고전파 경제학 레이거노믹스 공급경제학 대처주의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레닌주의 카스트로주의 유럽공산주의 게바라주의 호자주의 주체사상 마오쩌둥주의 낙살리즘 스탈린주의 티토주의 호치민사상 트로츠키주의 자유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td></tr><tr><th>조직</th><td> ASEAN CIA 코메콘 EEC KGB NAM SAARC 사파리 클럽 MI6 슈타지 </td></tr><tr><th>프로파간다</th><td> 적극적 조치 이즈베스티야 프라우다 자유의 십자군 자유유럽방송 적색공포 타스 미국의 소리 러시아의 소리 </td></tr><tr><th>경쟁</th><td> 군비 경쟁 핵 군비 경쟁 우주 경쟁 상호확증파괴 </td></tr><tr><th>더 보기</th><td> 벼랑끝전술 NATO-러시아 관계 미국의 소련 스파이 미국의 러시아 스파이 미국-소련 관계 미국-소련 정상 회담 신냉전 </td></tr><tr><td colspan="2"> 분류  · 위키공용 사진  · 연표  · 분쟁</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블랙리스트_포티_작전&amp;oldid=21168683" 분류: 비전투 군사 작전제2차 세계 대전 중의 미국의 군사 역사대한민국의 역사냉전1945년 대한민국1945년 미국한국 전쟁한국의 군정기1945년 군사사1946년 군사사1947년 군사사1948년 군사사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Français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4월 26일 (목) 18:2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서론 블랙리스트 포티 작전(Operation Blacklist Forty)은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미국의 한반도 점령 작전으로,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 제국의 항복에 따라 시작되었다. 이 작전의 주된 목표는 북위 38도 이남의 한반도를 점령하고, 독립적이고 통일된 한국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 충돌로 인해 이 목표는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한반도의 분단이 초래되었다. ### 본론 1945년 8월, 미국은 소련과의 협상에서 한반도를 북위 38도로 분할하기로 결정하였다. 미국은 이 지역에서 친미 정부를 수립하고자 했으나, 소련은 공산주의 정부를 세우려 했다. 1945년 9월, 미군은 한반도에 상륙하여 점령 작전을 시작했으며, 초기에는 일본의 행정 체계를 유지하면서 한국인들의 불만을 초래했다. 중장 존 하지가 군사 정부를 수립했으나, 그의 외교적 능력 부족과 한국에 대한 무지로 인해 많은 실수를 범했다. 미국과 소련 간의 협상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 인해 한반도 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다. 1948년, 유엔의 감독 하에 남한에서 선거가 실시되어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소련은 북쪽에서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한반도의 분단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 결론 블랙리스트 포티 작전은 한반도에서 미국과 소련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실패로 끝났다. 작전의 결과로 한반도는 분단되었고, 이는 이후 한국 전쟁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작가는 이 작전이 단순한 군사 작전이 아니라, 냉전 시대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고 있음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결국, 블랙리스트 포티 작전은 한반도의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남게 되었다.
글 전체의 요지를 논리적 흐름에 맞게 정리해줘. 서론, 본론, 결론 구조로 요약해주고, 각 부분마다 글쓴이의 의도나 주장도 명확히 밝혀줘.
쓰릴_미
https://ko.wikipedia.org/wiki/쓰릴_미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쓰릴 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쓰릴 미</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h colspan="2">《<b>쓰릴 미</b>》<br><span>Thrill Me</span></th></tr><tr><td colspan="2"> <a><img></a><br><div>레오폴드 역의 <a>정욱진</a>(좌), 로엡 역의 <a>정동화</a>.</div></td></tr><tr><th><b>원작</b></th> <td> 스티븐 돌기노프</td></tr><tr><th><b>공연</b></th> <td> 2003년 뉴욕 초연<br>2007년 한국 초연~</td></tr> </tbody></table> <p>《<b>쓰릴 미</b>》(Thrill Me: Leopold &amp; Loeb Story)는 <a>스티븐 돌기노프</a>가 극본을 쓰고 작곡, 작사한 <a>뮤지컬</a>로, "완벽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1924년 소년을 살해한 소위 "스릴 킬러"로 불리는 <a>네이선 레오폴드와 리처드 로엡</a>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두 남자 배우와 피아노 하나로 이루어진 심리극으로, 1958년 가석방 심의위원회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달된다. </p><p>《쓰릴 미》는 2003년 뉴욕의 미드타운 국제 연극제에서 소규모 프로덕션으로 초연되었다. 이후 요크 시어터 컴패니가 짐 키어스테드와 함께 2005년에 대규모 오프브로드웨이 프로덕션으로 공연하였다. 드라마티스트 플레이 서비스에서 출판, 오리지널 캐스트 레코드에서 CD로 녹음하였으며,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도시 곳곳에서 상연되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프로덕션</span></a></li> <li><a><span>2</span> <span>줄거리</span></a></li> <li><a><span>3</span> <span>뮤지컬 넘버</span></a></li> <li><a><span>4</span> <span>개요</span></a> <ul> <li><a><span>4.1</span> <span>원작이 되는 사건</span></a></li> <li><a><span>4.2</span> <span>등장인물</span></a> <ul> <li><a><span>4.2.1</span> <span>나(네이슨)</span></a></li> <li><a><span>4.2.2</span> <span>그(리차드)</span></a></li> </ul> </li> </ul> </li> <li><a><span>5</span> <span>출연진</span></a> <ul> <li><a><span>5.1</span> <span>2007년 초연</span></a></li> <li><a><span>5.2</span> <span>2007년 초연 2차</span></a></li> <li><a><span>5.3</span> <span>2008년 재연</span></a></li> <li><a><span>5.4</span> <span>2009년 3연</span></a></li> <li><a><span>5.5</span> <span>2010년 4연</span></a></li> <li><a><span>5.6</span> <span>2011년 5연</span></a></li> <li><a><span>5.7</span> <span>2013년 6연</span></a></li> <li><a><span>5.8</span> <span>2013년 6연 2차</span></a></li> <li><a><span>5.9</span> <span>2014년 7연</span></a></li> <li><a><span>5.10</span> <span>2014년 7연 2차</span></a></li> <li><a><span>5.11</span> <span>2016년 8연</span></a></li> <li><a><span>5.12</span> <span>2017년 9연(10주년)</span></a></li> </ul> </li> <li><a><span>6</span> <span>수상</span></a> <ul> <li><a><span>6.1</span> <span>외국</span></a></li> <li><a><span>6.2</span> <span>한국</span></a></li> </ul> </li> <li><a><span>7</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8</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프로덕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마틴 샤닌</a>이 감독한 최초 프로덕션이 뉴욕 시의 2003년 미드타운 국제 연극제에서 초연되었다. 이후 <a>요크 시어터 컴패니</a>(프로듀싱 아티스틱 디렉터 제임스 모건)와 짐 키어스테드가 브로드웨이 밖에서 2005년 5월 16일부터 비영리로 제한 상연을 시작하였고, 8월 21일까지 공연을 연장하였다. <a>마이클 루퍼트</a>가 감독한 이 프로덕션은 스티븐 돌기노프가 레오폴드 역, 더그 크리거가 로엡 역을 맡았다. <a>스티븐 보가더스</a>와 <a>존 맥마틴</a>, 루퍼트 또한 <a>보이스오버</a>로 참여하였다. 상연 후반기에는 숀 와일리가 크리거의 역할을 대신 맡았으며, 초연에는 매트 바우어가 레오폴드를 연기하였다.<sup><a>&#91;1&#93;</a></sup> </p> <h2><span></span><span>줄거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My Glasses/Just Lay Low" 장면을 연기하는 로엡 역의 <a>김무열</a>.</div></div></div> <p>1958년 일리노이 주의 졸리엣 교도소, 네이선 레오폴드가 일곱 번째 가석방 심의위원회에 직면한다. 그는 위원들에게 34년 전 그를 감옥에 갇히게 한 "세기의 범죄"의 전말을 진술하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풀려날 것을 바라며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밝힌다("Why"). 과거의 회상 속에서 그는 1924년 시카고의 19세 소년으로 돌아가 우정과 성적인 관계를 나누고 함께 경범죄를 벌이던 동급생 리차드 로엡과 애타는 만남을 가진다. 대학을 졸업하고 <a>니체</a>의 사상에 심취하게 된 리차드는 1년만에 만난 네이선을 차갑게 대한다. 네이선은 여름 이후 다른 로스쿨에 들어가기 전에 둘의 관계를 다시 이어가기를 간청한다("Everybody Wants Richard"). 마음이 바뀐 리차드는 네이선에게 버려진 창고에 불을 지르는 짓을 함께 하자고 제안한다. 방화 현장, 리차드를 자극시키는 불꽃 앞에서 네이선은 원하던 것을 얻는다("Nothing Like a Fire"). </p><p>다음날, 네이선은 니체를 탐독하는 리처드에게 범죄 행위를 그만두라고 애원한다. 초인론에 경도된 리차드는 네이선이 자신에게 무슨 일이든지 도움을 주고 함께 해주면 그를 만족시켜주고 원하는 것을 다 해주겠다는 계약서를 제안하며 유혹한다. 네이선은 마지못해 동의하며 함께 피로 서명을 하고, 범죄 행위 동참해준 대가로 리차드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켜줄 것을 요구하며 계약을 이행한다("Thrill Me"). 경범죄에 지루함을 느끼게 된 리차드는 "위대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살인을 결심하고, 동생을 죽이려다 네이선의 만류로 대신 어린 아이를 죽인 뒤 거짓으로 몸값을 요구하는 계획을 세운다("The Plan"). 리차드는 자신들의 천재적이고 치밀한 계획이면 잡히지 않을 것이라 우기며 네이선에게 계약을 지키라 협박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네이선은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돕게 된다. </p><p>1958년의 네이선은 리차드가 살인을 하기 위한 도구들을 챙기는 과정을 회상하며 멈추기엔 너무 늦어버린 상황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밝힌다("Way Too Far"). 리차드는 희생자에게 자신의 스포츠카를 태워준다고 유인한다("Roadster"). 살인 현장을 정리하면서 리차드는 떨고 있는 네이선에게 자신들이 뛰어난 인간("Superior")임을 격찬한다. 그들은 리차드의 집으로 돌아가 가짜 협박 편지("Ransom Note")를 작성하며 계획을 이어나간다. 다음날, 조심스러운 계획에도 불구하고 신문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공개된다. 며칠이 더 지난 뒤, 네이선이 잃어버린 안경이 범죄 현장 근처에서 발견된다. 공황 상태에 빠진 네이선은 리차드에게 전화하고, 리차드는 조금 더 기다려보자며 그를 진정시킨다("My Glasses/Just Lay Low"). 결국 안경의 주인이 네이선임이 수사를 통해 드러나자, 리차드는 급히 알리바이를 날조하고 경찰에게 어떻게 거짓으로 대답해야 하는지 조언하며 그를 돕는다("I'm Trying to Think"). 네이선은 시킨대로 한 뒤 경찰서에서 돌아오지만, 불안해진 리차드는 안경을 떨어뜨리는 실수를 한 네이선을 비난하고 변호사로서의 자신의 미래를 지키고자 절교를 선언한다. 배신감을 느낀 네이선은 경찰과 협상을 하고, 가벼운 형을 받고자 리차드에 대해 밝힌다. </p><p>체포된 리차드는 더 많은 정보를 밝힐 수 있다는 네이선의 말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네이선에게 계약은 계속 유효하며 협상을 포기한 뒤 서로 똑같은 형벌을 받자고 설득하며 매달린다("Keep Your Deal With Me"). 둘은 교도소로 이송되고, 리차드는 아무렇지 않은듯 행동하지만, 네이선은 판결 전날 밤 진심으로 두려워("Afraid")하는 그의 목소리를 엿듣는다. 배심원도 없는 재판에서 변호사 클라렌스 대로우의 교활한 최후 변론 덕분에 그들은 사형을 피하고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법정을 떠나는 차 안에서 네이선은 마침내 자신의 충격적인 계획을 드러낸다. 리차드를 잃는 것이 두려워 함께 살인을 저질렀지만, 네이선은 매순간 그보다 한 발 앞서 가있었는데, 안경을 떨어뜨린 것조차 의도적이었으며, 리차드의 배신을 비롯한 모든 것이 그와 영원토록, 또는 적어도 99년 동안, 살아있는 동안("Life Plus 99 Years") 함께 하고자하는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계획이었다. </p><p>졸리엣 교도소에서 배심원들은 모든 진실을 밝힌 네이선에게 가석방을 허가하고, 네이선은 씁쓸하고도 달콤한 승리를 얻게 된다. 리차드는 몇 년 전 다른 수감자에게 살해되었다. 네이선은 리차드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돌려받은 뒤 홀로 바깥 세상에 나가게 된다("Finale"). </p> <h2><span></span><span>뮤지컬 넘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서곡 Prelude</li> <li>그를 뒤따른 것 뿐 Why - 네이슨</li> <li>모두 너만을 원해 Everybody Wants Richard - 네이슨</li> <li>정말, 죽이지? Nothing Like a Fire - 리처드와 네이슨</li> <li>계약서 A Written Contract - 리차드와 네이슨</li> <li>쓰릴 미 Thrill Me - 네이슨과 리차드</li> <li>계획 The Plan - 리차드와 네이슨</li> <li>너무 멀리 왔어 Way Too Far - 네이슨</li> <li>내 차는 안전해 Roadster - 리차드</li> <li>뛰어난 인간 Superior - 리차드와 네이슨</li> <li>협박편지 Ransom Note - 리처드와 네이선</li> <li>내 안경 / 진정해 My Glasses / Just Lay Low - 네이슨과 리차드</li> <li>생각 중이죠 I'm Trying To Think - 리차드와 네이슨</li> <li>너무 멀리 왔어 Way Too Far&#160;(reprise) - 네이슨</li> <li>계약은 끝나지 않았어 Keep Your Deal With Me - 리처드와 네이슨</li> <li>두려워 Afraid - 리차드</li> <li>살아있는 동안 Life Plus 99 Years - 리차드와 네이슨</li> <li>피날레 Finale - 네이슨</li></ul> <h2><span></span><span>개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원작이 되는 사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1924년 <a>시카고</a>에서 숲 속에 버려진 14살 어린이 Bobby Franks 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손발이 뒤로 묶여 잘려있고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그러져 있다. 현장에 떨어져 있는 안경이 단서가 되어 살인범이 잡히게 된다.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법대 졸업생 19살의 니체의 초인론에 심취해 있었던 '나'(Nathan Leopold)와 '그'(Richard Loeb)였다. 이 전대미문의 범죄는 미국 전역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당시 최고 명성의 변호사 Clarence Darrow의 변호로 이들은 사형 대신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재판정에서 Clarence Darrow의 최종 변론이었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지금도 명문으로 전해진다. </p> <h3><span></span><span>등장인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h4><span></span><span>나(네이슨)</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p>부유한 가정에서 잘 자란 '나'는 19세에 시카고 법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 입학 예정인 천재이다. 머리가 비상하지만 섬세하고 부드러운 면을 가지고 있다. </p> <h4><span></span><span>그(리차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p>아버지의 사랑에 목말라하지만 타고난 외모와 언변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19세 청년이다. 미시건대 역사학 전공을 최연소로 졸업하고 시카고대 로스쿨 입학 예정이다. <a>니체</a>의 초인론에 빠져 스스로를 초인 즉, 남들과는 다른 뛰어난 인간으로 여기고 있다. </p> <h2><span></span><span>출연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5><span></span><span>2007년 초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5> <p>충무 아트홀 블랙(2007년3월17일~5월13일) </p> <ul><li>나: <a>최재웅</a>, <a>류정한</a></li> <li>그: <a>김무열</a>, 이율</li></ul> <h5><span></span><span>2007년 초연 2차</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5> <p>예술마당 1관(2007년5월22일~7월22일) </p> <ul><li>나: <a>최재웅</a>, <a>류정한</a></li> <li>그: <a>김무열</a>, 이율</li></ul> <h5><span></span><span>2008년 재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5> <p>충무 아트홀 블랙(2008년6월28일~10월12일) </p> <ul><li>나: 이창용, <a>김우형</a>, <a>류정한</a></li> <li>그: <a>김무열</a>, <a>강동호</a></li></ul> <h5><span></span><span>2009년 3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5> <p>더 스테이지(2009년3월7일~5월24일) </p> <ul><li>나: <a>정상윤</a>, 강필석</li> <li>그: <a>김우형</a>, <a>김산호</a>, <a>김하늘</a></li></ul> <h5><span></span><span>2010년 4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5> <p>더 스테이지(2010년5월12일~11월14일) </p> <ul><li>나: 김재범, 강하늘, <a>최재웅</a>, <a>오종혁</a>, 최수형</li> <li>그: 김무열, <a>지창욱</a>, 조강현, <a>최지호</a>, <a>이지훈</a></li></ul> <h5><span></span><span>2011년 5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5> <p>충무 아트홀 블랙(2011년11월29일~2012년2월26일) </p> <ul><li>나: 김재범, 정상윤, <a>손승원</a>, 전성우</li> <li>그: 장현덕, 김성일, 이정훈</li></ul> <h5><span></span><span>2013년 6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5> <p>더 스테이지(2013년5월17일~7월21일) </p> <ul><li>나: 전성우, 정상윤</li> <li>그: <a>송원근</a>, 이재균</li></ul> <h5><span></span><span>2013년 6연 2차</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5> <p>더 스테이지(2013년7월23일~10월26일) </p> <ul><li>나: 박영수, 신성민, <a>오종혁</a></li> <li>그: 정상윤, 이동하, 임병근</li></ul> <h5><span></span><span>2014년 7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5> <p>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2014년8월8일~10월26일) </p> <ul><li>나: 전성우, 정상윤, 신성민, 정욱진, 정동화</li> <li>그: 송원근, 임병근, 이재균, 에녹</li></ul> <h5><span></span><span>2014년 7연 2차</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5> <p>대명문화공장 2관(2014년12월10일~2015년3월1일) </p> <ul><li>나: 정동화, 강필석, 백형훈</li> <li>그: 에녹, 김재범, 문성일, 김도빈</li></ul> <h5><span></span><span>2016년 8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5> <p>대명문화공장 2관(2016년2월19일~2016년6월12일) </p> <ul><li>나: 정욱진, 강영석, 이상이</li> <li>그: 정동화, 임병근, 강동호</li></ul> <h5><span></span><span>2017년 9연(10주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5> <p>백암아트홀(2017년2월14일~2017년5월28일) </p> <ul><li>나: <a>최재웅</a>, 정상윤, 이창용, 강필석, 정욱진, 김재범</li> <li>그: <a>김무열</a>, 에녹, 송원근, 이율, 정동화, 정상윤</li></ul> <h2><span></span><span>수상</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4><span></span><span>외국</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ul><li>Oustanding Off Broadway Musical 작품상 수상</li> <li>ASCAP Award 최고 오프 브로드웨이 작품상 수상</li> <li>Drama Desk Award 최고 뮤지컬, 최고 음악상 노미네이션</li> <li>Chicago News Star '2006년, 기억할 만한 공연'에 선정</li></ul> <h4><span></span><span>한국</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ul><li>제 13회 <a>한국뮤지컬대상</a> 4개부분(베스트 외국 뮤지컬, 남우주연, 남우조연, 조명디자인) 노미네이션 - 남우주연상 수상(류정한)</li> <li>제 1회 <a>더 뮤지컬 어워즈</a> 6개부분(최우수 외국 뮤지컬, 연출, 남우주연, 남우조연, 남우신인, 조명디자인)노미네이션</li> <li>제 14회 한국뮤지컬대상 2개부분(남우신인, 음악)노미네이션</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cite><a>&#8220;Lortel Archives entry&#8221;</a>. 2015년 6월 11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17년 3월 14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ol></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쓰릴미 사이트</a></li> <li><a>뮤지컬 해븐 사이트</a></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쓰릴_미&amp;oldid=24026684</a>"</div> <div><div><a>분류</a>: <ul><li><a>미국의 뮤지컬</a></li><li><a>실제 범죄를 바탕으로 한 작품</a></li><li><a>2005년 뮤지컬</a></li><li><a>오프브로드웨이 뮤지컬</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English</a></li><li><a>日本語</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4월 14일 (일) 02:0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리차드가 범죄 행위를 저지르며 빠져있던 이론은 무엇인가?
초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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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12
8,180
[ "리차드가 범죄 행위를 저지르며 빠져있던 이론은 무엇인가?", "리차드와 네이선이 계획한 범죄는 무엇인가?", "네이선이게 자신을 도와줄것을 제안한 사람의 이름은?", "네이선은 리차드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계약서에 무엇으로 서명하는가?", "네이선과 리차드는 계약서에 무엇으로 서명하는가?", "리차드가 경범죄에 지루함을 느껴 저지르려고하는 범죄는 무엇인가?", "본문에 나온 뛰어난 인간이라는 뜻의 단어는?", "네이선이 경찰에 잡히게된 결정적인 증거는 무엇인가?", "리차드가 수사에서 경찰에게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무엇때문인가?", "살인범죄현장 근처에서 네이선이 분실한 무엇이 발견되었나?", "리차드는 살인 희생자에게 무엇을 태워준다고 유인했나?", "리차드는 피해자들을 무엇으로 유인하였는가?", "네이선은 범죄 현장에서 무엇을 잃어버렸는가?", "리차드와의 절교 후 배신감을 느낀 네이선은 누구와 협상하는가?", "리차드와 네이선의 변호사는 누구인가?", "살아있는동안 교도로를 나갈 수 없는 형벌의 이름은?", "네이선이 리차드에게 협력한 진짜 이유는?", "리차드와 네이선의 변호를 맡은 사람의 이름은?", "리차드와 네이선이 살인으로 받은 형벌은 무엇인가?", "재판에서 리차드와 네이선이 선고받은 형은 무엇인가?", "리차드와 네이선의 변호를 맡은 인물의 이름은 무엇인가?", "네이선은 리차드와 영원히 함께하기 위해 범죄 현장에 무엇을 고의적으로 남기는가?", "클라렌스 대로우가 남긴 명문은?", "1924년 시카고 숲 속에 버려진 14살 어린이를 살해한 살인범은 몇살이었는가?", "Boddy Franks의 시체가 발견된 곳은?", "Boddy Franks의 시체가 발견된 년도는?", "살인범으로 지목된 용의자들은 니체의 어떤 이론에 빠져있었나?", "1924년 사건 당시 리차드와 네이손은 몇 세 인가?", "네이손과 리차드가 추앙했던 니체의 가설은 무엇인가?" ]
<!DOCTYPE html> 쓰릴 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쓰릴 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쓰릴 미》Thrill Me</th></tr><tr><td colspan="2"> 레오폴드 역의 정욱진(좌), 로엡 역의 정동화.</td></tr><tr><th>원작</th> <td> 스티븐 돌기노프</td></tr><tr><th>공연</th> <td> 2003년 뉴욕 초연2007년 한국 초연~</td></tr> </tbody></table> 《쓰릴 미》(Thrill Me: Leopold &amp; Loeb Story)는 스티븐 돌기노프가 극본을 쓰고 작곡, 작사한 뮤지컬로, "완벽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1924년 소년을 살해한 소위 "스릴 킬러"로 불리는 네이선 레오폴드와 리처드 로엡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두 남자 배우와 피아노 하나로 이루어진 심리극으로, 1958년 가석방 심의위원회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이야기가 전달된다. 《쓰릴 미》는 2003년 뉴욕의 미드타운 국제 연극제에서 소규모 프로덕션으로 초연되었다. 이후 요크 시어터 컴패니가 짐 키어스테드와 함께 2005년에 대규모 오프브로드웨이 프로덕션으로 공연하였다. 드라마티스트 플레이 서비스에서 출판, 오리지널 캐스트 레코드에서 CD로 녹음하였으며,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 도시 곳곳에서 상연되었다. 목차 1 프로덕션 2 줄거리 3 뮤지컬 넘버 4 개요 4.1 원작이 되는 사건 4.2 등장인물 4.2.1 나(네이슨) 4.2.2 그(리차드) 5 출연진 5.1 2007년 초연 5.2 2007년 초연 2차 5.3 2008년 재연 5.4 2009년 3연 5.5 2010년 4연 5.6 2011년 5연 5.7 2013년 6연 5.8 2013년 6연 2차 5.9 2014년 7연 5.10 2014년 7연 2차 5.11 2016년 8연 5.12 2017년 9연(10주년) 6 수상 6.1 외국 6.2 한국 7 각주 8 외부 링크 프로덕션[편집] 마틴 샤닌이 감독한 최초 프로덕션이 뉴욕 시의 2003년 미드타운 국제 연극제에서 초연되었다. 이후 요크 시어터 컴패니(프로듀싱 아티스틱 디렉터 제임스 모건)와 짐 키어스테드가 브로드웨이 밖에서 2005년 5월 16일부터 비영리로 제한 상연을 시작하였고, 8월 21일까지 공연을 연장하였다. 마이클 루퍼트가 감독한 이 프로덕션은 스티븐 돌기노프가 레오폴드 역, 더그 크리거가 로엡 역을 맡았다. 스티븐 보가더스와 존 맥마틴, 루퍼트 또한 보이스오버로 참여하였다. 상연 후반기에는 숀 와일리가 크리거의 역할을 대신 맡았으며, 초연에는 매트 바우어가 레오폴드를 연기하였다.[1] 줄거리[편집] "My Glasses/Just Lay Low" 장면을 연기하는 로엡 역의 김무열. 1958년 일리노이 주의 졸리엣 교도소, 네이선 레오폴드가 일곱 번째 가석방 심의위원회에 직면한다. 그는 위원들에게 34년 전 그를 감옥에 갇히게 한 "세기의 범죄"의 전말을 진술하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풀려날 것을 바라며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것을 밝힌다("Why"). 과거의 회상 속에서 그는 1924년 시카고의 19세 소년으로 돌아가 우정과 성적인 관계를 나누고 함께 경범죄를 벌이던 동급생 리차드 로엡과 애타는 만남을 가진다. 대학을 졸업하고 니체의 사상에 심취하게 된 리차드는 1년만에 만난 네이선을 차갑게 대한다. 네이선은 여름 이후 다른 로스쿨에 들어가기 전에 둘의 관계를 다시 이어가기를 간청한다("Everybody Wants Richard"). 마음이 바뀐 리차드는 네이선에게 버려진 창고에 불을 지르는 짓을 함께 하자고 제안한다. 방화 현장, 리차드를 자극시키는 불꽃 앞에서 네이선은 원하던 것을 얻는다("Nothing Like a Fire"). 다음날, 네이선은 니체를 탐독하는 리처드에게 범죄 행위를 그만두라고 애원한다. 초인론에 경도된 리차드는 네이선이 자신에게 무슨 일이든지 도움을 주고 함께 해주면 그를 만족시켜주고 원하는 것을 다 해주겠다는 계약서를 제안하며 유혹한다. 네이선은 마지못해 동의하며 함께 피로 서명을 하고, 범죄 행위 동참해준 대가로 리차드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만족시켜줄 것을 요구하며 계약을 이행한다("Thrill Me"). 경범죄에 지루함을 느끼게 된 리차드는 "위대한"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살인을 결심하고, 동생을 죽이려다 네이선의 만류로 대신 어린 아이를 죽인 뒤 거짓으로 몸값을 요구하는 계획을 세운다("The Plan"). 리차드는 자신들의 천재적이고 치밀한 계획이면 잡히지 않을 것이라 우기며 네이선에게 계약을 지키라 협박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네이선은 위험을 감수하고 그를 돕게 된다. 1958년의 네이선은 리차드가 살인을 하기 위한 도구들을 챙기는 과정을 회상하며 멈추기엔 너무 늦어버린 상황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밝힌다("Way Too Far"). 리차드는 희생자에게 자신의 스포츠카를 태워준다고 유인한다("Roadster"). 살인 현장을 정리하면서 리차드는 떨고 있는 네이선에게 자신들이 뛰어난 인간("Superior")임을 격찬한다. 그들은 리차드의 집으로 돌아가 가짜 협박 편지("Ransom Note")를 작성하며 계획을 이어나간다. 다음날, 조심스러운 계획에도 불구하고 신문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공개된다. 며칠이 더 지난 뒤, 네이선이 잃어버린 안경이 범죄 현장 근처에서 발견된다. 공황 상태에 빠진 네이선은 리차드에게 전화하고, 리차드는 조금 더 기다려보자며 그를 진정시킨다("My Glasses/Just Lay Low"). 결국 안경의 주인이 네이선임이 수사를 통해 드러나자, 리차드는 급히 알리바이를 날조하고 경찰에게 어떻게 거짓으로 대답해야 하는지 조언하며 그를 돕는다("I'm Trying to Think"). 네이선은 시킨대로 한 뒤 경찰서에서 돌아오지만, 불안해진 리차드는 안경을 떨어뜨리는 실수를 한 네이선을 비난하고 변호사로서의 자신의 미래를 지키고자 절교를 선언한다. 배신감을 느낀 네이선은 경찰과 협상을 하고, 가벼운 형을 받고자 리차드에 대해 밝힌다. 체포된 리차드는 더 많은 정보를 밝힐 수 있다는 네이선의 말에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네이선에게 계약은 계속 유효하며 협상을 포기한 뒤 서로 똑같은 형벌을 받자고 설득하며 매달린다("Keep Your Deal With Me"). 둘은 교도소로 이송되고, 리차드는 아무렇지 않은듯 행동하지만, 네이선은 판결 전날 밤 진심으로 두려워("Afraid")하는 그의 목소리를 엿듣는다. 배심원도 없는 재판에서 변호사 클라렌스 대로우의 교활한 최후 변론 덕분에 그들은 사형을 피하고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법정을 떠나는 차 안에서 네이선은 마침내 자신의 충격적인 계획을 드러낸다. 리차드를 잃는 것이 두려워 함께 살인을 저질렀지만, 네이선은 매순간 그보다 한 발 앞서 가있었는데, 안경을 떨어뜨린 것조차 의도적이었으며, 리차드의 배신을 비롯한 모든 것이 그와 영원토록, 또는 적어도 99년 동안, 살아있는 동안("Life Plus 99 Years") 함께 하고자하는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한 계획이었다. 졸리엣 교도소에서 배심원들은 모든 진실을 밝힌 네이선에게 가석방을 허가하고, 네이선은 씁쓸하고도 달콤한 승리를 얻게 된다. 리차드는 몇 년 전 다른 수감자에게 살해되었다. 네이선은 리차드와의 추억이 담긴 물건들을 돌려받은 뒤 홀로 바깥 세상에 나가게 된다("Finale"). 뮤지컬 넘버[편집] 서곡 Prelude 그를 뒤따른 것 뿐 Why - 네이슨 모두 너만을 원해 Everybody Wants Richard - 네이슨 정말, 죽이지? Nothing Like a Fire - 리처드와 네이슨 계약서 A Written Contract - 리차드와 네이슨 쓰릴 미 Thrill Me - 네이슨과 리차드 계획 The Plan - 리차드와 네이슨 너무 멀리 왔어 Way Too Far - 네이슨 내 차는 안전해 Roadster - 리차드 뛰어난 인간 Superior - 리차드와 네이슨 협박편지 Ransom Note - 리처드와 네이선 내 안경 / 진정해 My Glasses / Just Lay Low - 네이슨과 리차드 생각 중이죠 I'm Trying To Think - 리차드와 네이슨 너무 멀리 왔어 Way Too Far (reprise) - 네이슨 계약은 끝나지 않았어 Keep Your Deal With Me - 리처드와 네이슨 두려워 Afraid - 리차드 살아있는 동안 Life Plus 99 Years - 리차드와 네이슨 피날레 Finale - 네이슨 개요[편집] 원작이 되는 사건[편집] 1924년 시카고에서 숲 속에 버려진 14살 어린이 Bobby Franks 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손발이 뒤로 묶여 잘려있고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그러져 있다. 현장에 떨어져 있는 안경이 단서가 되어 살인범이 잡히게 된다. 용의자로 지목된 사람은 법대 졸업생 19살의 니체의 초인론에 심취해 있었던 '나'(Nathan Leopold)와 '그'(Richard Loeb)였다. 이 전대미문의 범죄는 미국 전역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리고 당시 최고 명성의 변호사 Clarence Darrow의 변호로 이들은 사형 대신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는다. 재판정에서 Clarence Darrow의 최종 변론이었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지금도 명문으로 전해진다. 등장인물[편집] 나(네이슨)[편집] 부유한 가정에서 잘 자란 '나'는 19세에 시카고 법대를 졸업하고 하버드 로스쿨 입학 예정인 천재이다. 머리가 비상하지만 섬세하고 부드러운 면을 가지고 있다. 그(리차드)[편집] 아버지의 사랑에 목말라하지만 타고난 외모와 언변으로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19세 청년이다. 미시건대 역사학 전공을 최연소로 졸업하고 시카고대 로스쿨 입학 예정이다. 니체의 초인론에 빠져 스스로를 초인 즉, 남들과는 다른 뛰어난 인간으로 여기고 있다. 출연진[편집] 2007년 초연[편집] 충무 아트홀 블랙(2007년3월17일~5월13일) 나: 최재웅, 류정한 그: 김무열, 이율 2007년 초연 2차[편집] 예술마당 1관(2007년5월22일~7월22일) 나: 최재웅, 류정한 그: 김무열, 이율 2008년 재연[편집] 충무 아트홀 블랙(2008년6월28일~10월12일) 나: 이창용, 김우형, 류정한 그: 김무열, 강동호 2009년 3연[편집] 더 스테이지(2009년3월7일~5월24일) 나: 정상윤, 강필석 그: 김우형, 김산호, 김하늘 2010년 4연[편집] 더 스테이지(2010년5월12일~11월14일) 나: 김재범, 강하늘, 최재웅, 오종혁, 최수형 그: 김무열, 지창욱, 조강현, 최지호, 이지훈 2011년 5연[편집] 충무 아트홀 블랙(2011년11월29일~2012년2월26일) 나: 김재범, 정상윤, 손승원, 전성우 그: 장현덕, 김성일, 이정훈 2013년 6연[편집] 더 스테이지(2013년5월17일~7월21일) 나: 전성우, 정상윤 그: 송원근, 이재균 2013년 6연 2차[편집] 더 스테이지(2013년7월23일~10월26일) 나: 박영수, 신성민, 오종혁 그: 정상윤, 이동하, 임병근 2014년 7연[편집]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2014년8월8일~10월26일) 나: 전성우, 정상윤, 신성민, 정욱진, 정동화 그: 송원근, 임병근, 이재균, 에녹 2014년 7연 2차[편집] 대명문화공장 2관(2014년12월10일~2015년3월1일) 나: 정동화, 강필석, 백형훈 그: 에녹, 김재범, 문성일, 김도빈 2016년 8연[편집] 대명문화공장 2관(2016년2월19일~2016년6월12일) 나: 정욱진, 강영석, 이상이 그: 정동화, 임병근, 강동호 2017년 9연(10주년)[편집] 백암아트홀(2017년2월14일~2017년5월28일) 나: 최재웅, 정상윤, 이창용, 강필석, 정욱진, 김재범 그: 김무열, 에녹, 송원근, 이율, 정동화, 정상윤 수상[편집] 외국[편집] Oustanding Off Broadway Musical 작품상 수상 ASCAP Award 최고 오프 브로드웨이 작품상 수상 Drama Desk Award 최고 뮤지컬, 최고 음악상 노미네이션 Chicago News Star '2006년, 기억할 만한 공연'에 선정 한국[편집] 제 13회 한국뮤지컬대상 4개부분(베스트 외국 뮤지컬, 남우주연, 남우조연, 조명디자인) 노미네이션 - 남우주연상 수상(류정한) 제 1회 더 뮤지컬 어워즈 6개부분(최우수 외국 뮤지컬, 연출, 남우주연, 남우조연, 남우신인, 조명디자인)노미네이션 제 14회 한국뮤지컬대상 2개부분(남우신인, 음악)노미네이션 각주[편집] ↑ “Lortel Archives entry”. 2015년 6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7년 3월 14일에 확인함.  외부 링크[편집] 쓰릴미 사이트 뮤지컬 해븐 사이트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쓰릴_미&amp;oldid=24026684" 분류: 미국의 뮤지컬실제 범죄를 바탕으로 한 작품2005년 뮤지컬오프브로드웨이 뮤지컬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14일 (일) 02:0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쓰릴 미》(Thrill Me: Leopold & Loeb Story)는 스티븐 돌기노프가 만든 뮤지컬로, 1924년에 실제로 일어난 범죄 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두 남자, 네이선 레오폴드와 리처드 로엡이 "완벽한 범죄"를 꿈꾸며 한 소년을 살해한 사건을 다룹니다. 뮤지컬은 두 남자 배우와 피아노 하나로 구성된 심리극 형식으로, 1958년의 교도소에서 네이선이 과거를 회상하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뮤지컬은 2003년 뉴욕에서 처음 공연되었고, 이후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상연되었습니다. 줄거리는 네이선이 가석방 심의위원회에서 자신의 범죄를 회상하며 시작됩니다. 그는 리처드와의 복잡한 관계와 함께 범죄를 저지르기까지의 과정을 이야기합니다. 두 사람은 범죄를 통해 서로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하지만, 결국 그들의 계획은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이 뮤지컬은 강렬한 음악과 심리적인 갈등을 통해 인간의 본성과 범죄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또한, 여러 차례의 공연과 수상 경력을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전문용어로 풀어서 요약해줘. 단, 원문의 핵심 메시지는 그대로 유지하고, 문장도 자연스럽게 이어줘.
보렐리스_쿼드랭글
https://ko.wikipedia.org/wiki/보렐리스_쿼드랭글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보렐리스 쿼드랭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보렐리스 쿼드랭글</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보렐리스 쿼드랭글</b>(Borealis quadrangle)는 위도 65 - 90°에서 수성을 둘러싸는 쿼드랭글이다. </p><p>이 쿼드랭글에는 <a>괴테 분지</a>와 <a>스키나카스 분지</a>가 있는데, <a>매리너 10호</a>가 찍은 사진 총돌구 중에서 각각 6번째, 7번째 로 큰 <a>충돌구</a>이며 그중 괴테 분지의 지름은 대략 400 km이다.<sup><a>&#91;1&#93;</a></sup><sup><a>&#91;2&#93;</a></sup><sup><a>&#91;3&#93;</a></sup> 서경 100 - 190°의 지역은 오래된 충돌구와 충돌구 사이의 평원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지역이다. 특히 젊은 충돌구는 다른 평원들 위에 겹쳐져 있다. <a>베르디</a>는 지름이 122 km 인 젊은 충돌구이다. 광대한 <a>분출물 덮개</a>와 이차 충돌구 지역은 평원과 오래된 충돌구 위에 겹쳐져 있다. 서경 0 - 100°의 지역은 매끄러운 평원들이 있는 특징이 있다.<sup><a>&#91;4&#93;</a></sup> 광활한 <a>보렐리스 평원</a>의 푹 패인 곳은 지름이 1,000km로 불규칙한 아치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구덩이는 몇몇 오래된 충돌 지형 너머에 위치하고 있다. <sup><a>&#91;3&#93;</a></sup><sup><a>&#91;4&#93;</a></sup>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매리너 10호의 사진</span></a></li> <li><a><span>2</span> <span>기후</span></a></li> <li><a><span>3</span> <span>층서학</span></a></li> <li><a><span>4</span> <span>출처</span></a></li> <li><a><span>5</span> <span>참고 자료</span></a></li> </ul> </div> <h2><span></span><span>매리너 10호의 사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매리너 10호의 모자이크 사진</div></div></div> <p><a>매리너 10호</a>의 보렐리스 지역 사진은 서경 0 - 190° 지역에서만 보이는데, 이는 그 이상의 부분에서는 어두운 지역이기 때문이다. 1974년 3월 29일, 매리너 10호가 처음 플레이바이를 하면서 그 지역의 가장 선명한 사진을 찍었다. 지도에 쓰인 대부분의 사진들은 소우주선 (Mercury I)이 처음 이동할 때 찍혔지만, 다른 소우주선 (Mercury II) 그런 사진을 찍지 못 했다.<sup><a>&#91;5&#93;</a></sup> 추가로, 보렐리스 지역의 입체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a>명암 경계선</a>이 자오선과 처음 닿았을 때 수 도만큼 떨어졌기 때문에, 일반 지역의 사진들은 밝은 조명 아래에서 찍혔다. 그러나 조명과 표면의 큰 경사도는 지질학적으로 해석하는데는 방해가 됐다. </p> <h2><span></span><span>기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수성의 <a>적도면</a>은 <a>궤도면</a>에 대해 2° 정도 기울어져있다.<sup><a>&#91;5&#93;</a></sup> 그로 인한 경사도와 궤도 <a>이심률</a> 때문에 평균 온도가 변화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느린 수성의 자전 속도 때문에, 하루 평균 온도는 위도와 경도에 따라 크게 변한다. 수성에서의 태양 광도는 2 수성년 내내 다르다. 이는 수성의 이심률 때문이다.<sup><a>&#91;6&#93;</a></sup> 이는 <a>평형 온도</a>의 20%선에서 변한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게다가, 궤도의 <a>각운동량</a> 보존과 <a>스핀-궤도 결합</a>은 낮의 길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동틀녘과 해질녘에는 수성 지평선이 태양을 가로지르는 시간이 늦기 때문에 그 길이가 늘어난다. 따라서 광량은 늘어나고 밤에는 수 지구일이 줄어든다. 이런 점과 수 <a>켈빈</a>의 표면 온도에도 불구하고, 극 지역의 지표 아래의 온도는 항상 영하의 상태를 유지한다. </p> <h2><span></span><span>층서학</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보렐리스 지역에는, 3종류의 광활한 평원이 알려져 있다. 각각의 종류는 상대적인 나이와 크게 연관이 있는 충돌구의 밀도가 각각 다르다. 가장 큰 충돌구(가장 오래된 충돌구)부터 가장 작은 충돌구(가장 젊은 충돌구)까지, 충돌구와 충돌구 사이의 평원, 중간 평원 그리고 부드러운 평원. 거의 대부분의 충돌구는 이 3종류에 속한다. </p> <h2><span></span><span>출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cite>Grolier, Maurice J.; Joseph M. Boyce (1984). <a>&#8220;Geologic Map of the Borealis Region (H-1) of Mercury&#8221;</a> <span>(PDF)</span>.</cite><span><span>&#160;</span></span> <span>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a>도움말</a>)</span> Prepared for the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by the U.S. Department of the Interior, U.S. Geological Survey (Published in hardcopy as USGS Miscellaneous Investigations Series Map I–1660, as part of the Atlas of Mercury, 1:5,000,000 Geologic Series. Hardcopy is available for sale from U.S. Geological Survey, Information Services, Box 25286, Federal Center, Denver, CO 80225)</li></ul> <h2><span></span><span>참고 자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ol> <li><span><a>↑</a></span> <span><cite>Strom, R. G.; Trask, N. J., and Guest, J. E. (1975). &#8220;Tectonism and volcanism on Mercury&#8221;. &#12298;Journal of Geophysical Research&#12299; <b>80</b> (17): 2478–2507.</cite><span><span>&#160;</span></span> <span>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a>도움말</a>)</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Trask, N. J.; Guest, J. E. (1975). &#8220;Preliminary geologic terrain map of Mercury&#8221;. &#12298;Journal of Geophysical Research&#12299; <b>80</b> (17): 2461–2477.</cite><span><span>&#160;</span></span> <span>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a>도움말</a>)</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cite>Strom, R. G. (1979). &#8220;Mercury: A post-Mariner 10 assessment&#8221;. &#12298;Space Science Reviews&#12299; <b>24</b> (1): 3–70.</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cite>Trask, N.J.; Strom, R.G. (1976). &#8220;Additional evidence of mercurian volcanism&#8221;. &#12298;Icarus&#12299; <b>28</b> (4): 559–563.</cite><span><span>&#160;</span></span> <span>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a>도움말</a>)</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cite>Davies, M. E.; Dwornik, S. E., Gault, D. E., and Strom, R. G. (1978). &#12298;Atlas of Mercury&#12299;.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31쪽. <a>ISBN</a>&#160;<a>0-188652-734-x</a><span> <code>&#124;isbn=</code> 값 확인 필요: invalid character (<a>도움말</a>)</span>. Special Publication SP-423.</cite><span><span>&#160;</span></span> <span>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a>도움말</a>)</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Davies, M. E.; Dwornik, S. E., Gault, D. E., and Strom, R. G. (1978). &#12298;Atlas of Mercury&#12299;.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2쪽. <a>ISBN</a>&#160;<a>0-188652-734-x</a><span> <code>&#124;isbn=</code> 값 확인 필요: invalid character (<a>도움말</a>)</span>. Special Publication SP-423.</cite><span><span>&#160;</span></span> <span>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a>도움말</a>)</span></span> </li> </ol></div> <p><br> </p> <table> <tbody><tr> <th colspan="8"><a>수성의 쿼드랭글</a> </th></tr> <tr> <td colspan="8">H-1 <a>보렐리스</a><br>(<a>세부 지형</a>) </td></tr> <tr> <td colspan="2">H-5 <a>아폴로니아</a><br>(<a>세부 지형</a>) </td> <td colspan="2">H-4 <a>리구리아</a><br>(<a>세부 지형</a>) </td> <td colspan="2">H-3 <a>셰익스피어</a><br>(<a>세부 지형</a>) </td> <td colspan="2">H-2 <a>빅토리아</a><br>(<a>세부 지형</a>) </td></tr> <tr> <td>H-10 <a>피에리아</a><br>(<a>세부 지형</a>) </td> <td colspan="2">H-9 <a>Solitudo Criophori</a><br>(<a>세부 지형</a>) </td> <td colspan="2">H-8 <a>톨스토이</a><br>(<a>세부 지형</a>) </td> <td colspan="2">H-7 <a>베토벤</a><br>(<a>세부 지형</a>) </td> <td>H-6 <a>카이퍼</a><br>(<a>세부 지형</a>) </td></tr> <tr> <td colspan="2">H-14 <a>킬레네</a><br>(<a>세부 지형</a>) </td> <td colspan="2">H-13 <a>Solitudo Persephones</a><br>(<a>세부 지형</a>) </td> <td colspan="2">H-12 <a>미켈란젤로</a><br>(<a>세부 지형</a>) </td> <td colspan="2">H-11 <a>디스커버리</a><br>(<a>세부 지형</a>) </td></tr> <tr> <td colspan="8">H-15 <a>바흐</a><br>(<a>세부 지형</a>) </td></tr></tbody></table> <div><table><tbody><tr><th colspan="3"><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수성</a></div></th></tr><tr><th>측정천문학</th><td><div> <ul><li><a>수성 횡단 소행성 목록</a></li> <li><a>수성의 위성</a></li></ul> </div></td><td rowspan="6"><div><a><img></a></div></td></tr><tr><th>통과</th><td><div> <ul><li><a>금성</a></li> <li><a>지구</a></li> <li><a>화성</a></li> <li><a>목성</a></li> <li><a>토성</a></li> <li><a>천왕성</a></li></ul> </div></td></tr><tr><th><a>탐사</a></th><td><div> <ul><li><a>매리너 10호</a></li> <li><a>메신저</a></li> <li><a>베피콜롬보</a></li> <li><a>식민지화</a></li></ul> </div></td></tr><tr><th>지리학</th><td><div> <ul><li><a>대기</a></li> <li><a>알베도 지형</a></li> <li><a>쿼드랭글</a></li></ul> </div></td></tr><tr><th><a>지질학</a></th><td><div></div><table><tbody><tr><th><a>충돌구</a></th><td><div> <ul><li><a>조맹부</a></li> <li><a>보에티우스</a></li> <li><a>카이퍼</a></li> <li><a>슈베르트</a></li> <li><a>설리번</a></li></ul> </div></td></tr><tr><th><a>기타</a></th><td><div> <ul><li><a>칼로리스 분지</a></li> <li><a>디스커버리 루페스</a></li> <li><a>스키나카스 분지</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기타 주제</th><td><div> <ul><li><a>소설 속의 수성</a> (<a>리 브래킷</a>)</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보렐리스_쿼드랭글&amp;oldid=16057168</a>"</div> <div><div><a>분류</a>: <ul><li><a>보렐리스 쿼드랭글</a></li><li><a>수성</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인용 오류 - 오래된 변수를 사용함</a></li><li><a>인용 오류 - ISBN</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English</a></li><li><a>Italiano</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6년 3월 23일 (수) 19: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매리너 10호가 처음 플레이바이를 하며 선명한 사진을 찍은 년도와 날짜는?
1974년 3월 29일
null
102068
5,722
[ "매리너 10호가 처음 플레이바이를 하며 선명한 사진을 찍은 년도와 날짜는?", "매리너 10호의 보렐리스 지역사진은 서경 몇 도의 지역에서만 보이는가?", "매리너10호가 보렐리스 지역의 선명한 사진을 찍은 년도는?", "플레이바이를 하면서 보렐리스 지역의 사진을 선명하게 찍은 우주선은?", "보렐리스 지역의 사진을 찍어 해석할 때, 조명과 표면의 큰 경사도가 어떤 측면에서의 해석에 방해가 되었습니까?", "일반 지역의 사진들은 밝은 조명 아래에서 찍혔기에 보렐리스의 무엇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수성의 적도면은 궤도면에 비해 몇도 기울어져있는가?", "궤도의 각운동량 보존과 스핀-궤도 결합은 어떤 것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가?", "수성의 적도면은 궤도면에 몇도정도 기울어져 있는가? ", "수성의 평균 온도는 위도와 경도에 따라 크게 변화하는데 그 원인은?", "하루 평균 온도는 위도와 함께 무엇에 따라 변합니까?", "수성의 적도면이 궤도면에 대해 기울어진 각도는 얼마입니까?" ]
<!DOCTYPE html> 보렐리스 쿼드랭글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보렐리스 쿼드랭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보렐리스 쿼드랭글(Borealis quadrangle)는 위도 65 - 90°에서 수성을 둘러싸는 쿼드랭글이다. 이 쿼드랭글에는 괴테 분지와 스키나카스 분지가 있는데, 매리너 10호가 찍은 사진 총돌구 중에서 각각 6번째, 7번째 로 큰 충돌구이며 그중 괴테 분지의 지름은 대략 400 km이다.[1][2][3] 서경 100 - 190°의 지역은 오래된 충돌구와 충돌구 사이의 평원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지역이다. 특히 젊은 충돌구는 다른 평원들 위에 겹쳐져 있다. 베르디는 지름이 122 km 인 젊은 충돌구이다. 광대한 분출물 덮개와 이차 충돌구 지역은 평원과 오래된 충돌구 위에 겹쳐져 있다. 서경 0 - 100°의 지역은 매끄러운 평원들이 있는 특징이 있다.[4] 광활한 보렐리스 평원의 푹 패인 곳은 지름이 1,000km로 불규칙한 아치형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구덩이는 몇몇 오래된 충돌 지형 너머에 위치하고 있다. [3][4] 목차 1 매리너 10호의 사진 2 기후 3 층서학 4 출처 5 참고 자료 매리너 10호의 사진[편집] 매리너 10호의 모자이크 사진 매리너 10호의 보렐리스 지역 사진은 서경 0 - 190° 지역에서만 보이는데, 이는 그 이상의 부분에서는 어두운 지역이기 때문이다. 1974년 3월 29일, 매리너 10호가 처음 플레이바이를 하면서 그 지역의 가장 선명한 사진을 찍었다. 지도에 쓰인 대부분의 사진들은 소우주선 (Mercury I)이 처음 이동할 때 찍혔지만, 다른 소우주선 (Mercury II) 그런 사진을 찍지 못 했다.[5] 추가로, 보렐리스 지역의 입체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명암 경계선이 자오선과 처음 닿았을 때 수 도만큼 떨어졌기 때문에, 일반 지역의 사진들은 밝은 조명 아래에서 찍혔다. 그러나 조명과 표면의 큰 경사도는 지질학적으로 해석하는데는 방해가 됐다. 기후[편집] 수성의 적도면은 궤도면에 대해 2° 정도 기울어져있다.[5] 그로 인한 경사도와 궤도 이심률 때문에 평균 온도가 변화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느린 수성의 자전 속도 때문에, 하루 평균 온도는 위도와 경도에 따라 크게 변한다. 수성에서의 태양 광도는 2 수성년 내내 다르다. 이는 수성의 이심률 때문이다.[6] 이는 평형 온도의 20%선에서 변한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게다가, 궤도의 각운동량 보존과 스핀-궤도 결합은 낮의 길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동틀녘과 해질녘에는 수성 지평선이 태양을 가로지르는 시간이 늦기 때문에 그 길이가 늘어난다. 따라서 광량은 늘어나고 밤에는 수 지구일이 줄어든다. 이런 점과 수 켈빈의 표면 온도에도 불구하고, 극 지역의 지표 아래의 온도는 항상 영하의 상태를 유지한다. 층서학[편집] 보렐리스 지역에는, 3종류의 광활한 평원이 알려져 있다. 각각의 종류는 상대적인 나이와 크게 연관이 있는 충돌구의 밀도가 각각 다르다. 가장 큰 충돌구(가장 오래된 충돌구)부터 가장 작은 충돌구(가장 젊은 충돌구)까지, 충돌구와 충돌구 사이의 평원, 중간 평원 그리고 부드러운 평원. 거의 대부분의 충돌구는 이 3종류에 속한다. 출처[편집] Grolier, Maurice J.; Joseph M. Boyce (1984). “Geologic Map of the Borealis Region (H-1) of Mercury” (PDF).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Prepared for the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by the U.S. Department of the Interior, U.S. Geological Survey (Published in hardcopy as USGS Miscellaneous Investigations Series Map I–1660, as part of the Atlas of Mercury, 1:5,000,000 Geologic Series. Hardcopy is available for sale from U.S. Geological Survey, Information Services, Box 25286, Federal Center, Denver, CO 80225) 참고 자료[편집] ↑ Strom, R. G.; Trask, N. J., and Guest, J. E. (1975). “Tectonism and volcanism on Mercury”. 《Journal of Geophysical Research》 80 (17): 2478–2507.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 Trask, N. J.; Guest, J. E. (1975). “Preliminary geologic terrain map of Mercury”. 《Journal of Geophysical Research》 80 (17): 2461–2477.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 가 나 Strom, R. G. (1979). “Mercury: A post-Mariner 10 assessment”. 《Space Science Reviews》 24 (1): 3–70.  ↑ 가 나 Trask, N.J.; Strom, R.G. (1976). “Additional evidence of mercurian volcanism”. 《Icarus》 28 (4): 559–563.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 가 나 Davies, M. E.; Dwornik, S. E., Gault, D. E., and Strom, R. G. (1978). 《Atlas of Mercury》.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31쪽. ISBN 0-188652-734-x |isbn= 값 확인 필요: invalid character (도움말). Special Publication SP-423.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 Davies, M. E.; Dwornik, S. E., Gault, D. E., and Strom, R. G. (1978). 《Atlas of Mercury》. National Aeronautics and Space Administration. 2쪽. ISBN 0-188652-734-x |isbn= 값 확인 필요: invalid character (도움말). Special Publication SP-423.  더 이상 지원되지 않는 변수를 사용함 (도움말) <table> <tbody><tr> <th colspan="8">수성의 쿼드랭글 </th></tr> <tr> <td colspan="8">H-1 보렐리스(세부 지형) </td></tr> <tr> <td colspan="2">H-5 아폴로니아(세부 지형) </td> <td colspan="2">H-4 리구리아(세부 지형) </td> <td colspan="2">H-3 셰익스피어(세부 지형) </td> <td colspan="2">H-2 빅토리아(세부 지형) </td></tr> <tr> <td>H-10 피에리아(세부 지형) </td> <td colspan="2">H-9 Solitudo Criophori(세부 지형) </td> <td colspan="2">H-8 톨스토이(세부 지형) </td> <td colspan="2">H-7 베토벤(세부 지형) </td> <td>H-6 카이퍼(세부 지형) </td></tr> <tr> <td colspan="2">H-14 킬레네(세부 지형) </td> <td colspan="2">H-13 Solitudo Persephones(세부 지형) </td> <td colspan="2">H-12 미켈란젤로(세부 지형) </td> <td colspan="2">H-11 디스커버리(세부 지형) </td></tr> <tr> <td colspan="8">H-15 바흐(세부 지형) </td></tr></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3">vdeh수성</th></tr><tr><th>측정천문학</th><td> 수성 횡단 소행성 목록 수성의 위성 </td><td rowspan="6"></td></tr><tr><th>통과</th><td> 금성 지구 화성 목성 토성 천왕성 </td></tr><tr><th>탐사</th><td> 매리너 10호 메신저 베피콜롬보 식민지화 </td></tr><tr><th>지리학</th><td> 대기 알베도 지형 쿼드랭글 </td></tr><tr><th>지질학</th><td><table><tbody><tr><th>충돌구</th><td> 조맹부 보에티우스 카이퍼 슈베르트 설리번 </td></tr><tr><th>기타</th><td> 칼로리스 분지 디스커버리 루페스 스키나카스 분지 </td></tr></tbody></table></td></tr><tr><th>기타 주제</th><td> 소설 속의 수성 (리 브래킷)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보렐리스_쿼드랭글&amp;oldid=16057168" 분류: 보렐리스 쿼드랭글수성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오래된 변수를 사용함인용 오류 - ISBN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Italiano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6년 3월 23일 (수) 19:1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서론 보렐리스 쿼드랭글(Borealis quadrangle)은 수성의 북극 지역에 해당하며, 위도 65°에서 90° 사이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괴테 분지와 스키나카스 분지를 포함하고 있으며, 매리너 10호의 탐사 결과로 밝혀진 다양한 지질학적 특성을 지닌다. 글쓴이는 이 쿼드랭글의 지형적 특징과 기후, 층서학적 구조를 통해 수성의 지질학적 역사와 환경을 이해하고자 한다. ### 본론 1. **지형적 특징**: 보렐리스 쿼드랭글은 오래된 충돌구와 그 사이에 위치한 평원이 밀집해 있으며, 특히 젊은 충돌구가 다른 평원 위에 겹쳐져 있다. 괴테 분지는 지름 약 400 km로, 매리너 10호의 사진에서 확인된 주요 충돌구 중 하나이다. 서경 0°에서 100° 지역은 매끄러운 평원으로 특징지어지며, 보렐리스 평원은 지름 1,000 km의 불규칙한 아치형 구덩이를 포함하고 있다. 2. **기후**: 수성의 기후는 궤도 이심률과 자전 속도에 따라 크게 변동한다. 평균 온도는 위도와 경도에 따라 다르며, 극 지역의 지표 아래 온도는 항상 영하로 유지된다. 이러한 기후적 특성은 수성의 자전과 공전의 관계에서 기인한다. 3. **층서학**: 보렐리스 지역은 세 가지 주요 평원 유형으로 나뉘며, 각 평원은 충돌구의 밀도에 따라 상대적인 나이가 다르다. 이 구조는 수성의 지질학적 과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 결론 보렐리스 쿼드랭글은 수성의 지질학적 역사와 기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지역이다. 글쓴이는 이 지역의 다양한 지형적 특성과 기후적 변화를 통해 수성의 복잡한 지질학적 과정을 설명하고자 하며, 이는 향후 수성 탐사 및 연구에 기여할 수 있는 기초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글 전체의 요지를 논리적 흐름에 맞게 정리해줘. 서론, 본론, 결론 구조로 요약해주고, 각 부분마다 글쓴이의 의도나 주장도 명확히 밝혀줘.
McCartney_(음반)
https://ko.wikipedia.org/wiki/McCartney_(음반)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McCartney (음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McCartney (음반)</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h colspan="2"><div><div><img></div><span>《McCartney》</span></div></th></tr><tr><td colspan="2"> <a><img></a></td></tr><tr><th colspan="2"><span>폴 매카트니</span>의 <a>정규 음반</a></th></tr><tr><th>발매일</th> <td> <span><a><img></a></span> 1970년 4월 17일<br><span><a><img></a></span> 1970년 4월 20일</td></tr><tr><th>녹음</th> <td> 1969년 11월 - 1970년 1월</td></tr><tr><th><a>장르</a></th> <td> <a>록</a></td></tr><tr><th>길이</th> <td> 35:03</td></tr><tr><th>언어</th> <td> 영어</td></tr><tr><th><a>레이블</a></th> <td> <a>애플</a></td></tr><tr><th><a>프로듀서</a></th> <td> 폴 매카트니</td></tr><tr><th colspan="2">폴 매카트니 연표</th></tr> <tr><td colspan="2"> <p> </p> <table> <tbody><tr> <td> </td> <td>《<b>McCartney</b>》<br>(1970) </td> <td>《<a>Ram</a>》<br>(1971) </td></tr></tbody></table></td></tr> </tbody></table> <p>《<b>McCartney</b>》는&#160;<a>폴 매카트니</a>의&#160;데뷔 음반이다. 《<a>Let It Be</a>》를 고려해 발매를 늦추려는 <a>비틀즈</a> 멤버의 시도를 매카트니가 막은 후&#160;1970년 4월 <a>애플 레코드</a>에서 발매되었다. 매카트니는 1969년 9월에 레논이 비틀즈를 떠난다는 소식을 사적으로 접하고는 비틀즈 멤버와 음반 발매를 둘러싼 다툼으로 《McCartney》를 우울증과 혼란의 시기에 녹음했다. 1970년 4월 10일 자기 회견 형식으로&#160;성명을 낸 그는 영국에&#160;홍보물을 배포해 비틀즈의 해체를 주도했다. </p><p>아내 린다가 보컬에&#160;참여한 것 외에는 모든 악기를 연주하는 등 매카트니 혼자서 음반 전체를 담당했다. 집에서 녹음돼 느슨한 편곡을 보여주는 《McCartney》는 《Let It Be》(당시에는 《Get Back》)의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초기 콘셉트를 도입했다. 비틀즈 경력에 종지부를 찍은 매카트니로서, 음반은 주요 음악 평론가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받았지만, 〈Maybe I'm Amazed〉은 계속해서 찬사를 받았다. 상업적으로 《McCartney》는 비틀즈의 해체를 둘러싼 언론의 관심으로 이득을 얻었다. 3주동안 빌보드 200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고, 영국에서는 2위까지 올라갔다. 음반은 《Paul McCartney Archive Collection》로서 2011년 6월에 재발매되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배경</span></a></li> <li><a><span>2</span> <span>녹음</span></a></li> <li><a><span>3</span> <span>음반 커버</span></a></li> <li><a><span>4</span> <span>평가</span></a></li> <li><a><span>5</span> <span>곡 목록</span></a></li> <li><a><span>6</span> <span>참여 인원</span></a></li> <li><a><span>7</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배경</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존 레논</a>이 1969년 9월 20일 자신이 비틀즈와 "결별"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틀즈에게 전한 뒤,<sup><a>&#91;1&#93;</a></sup> <a>폴 매카트니</a>는 <a>캠벨타운</a>에 위치한 자신의 농장에 돌아가 틀어박혔다.<sup><a>&#91;2&#93;</a></sup> 작가인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당시의 그의 마음 상태가 "상심했으며, 충격받았고, 그가 알던 유일한 직장을 잃어 의기소침했다."고 했다.<sup><a>&#91;3&#93;</a></sup> 일부 사업적 이유로 아직 공식적으로 성사되지 않았을 때,<sup><a>&#91;1&#93;</a></sup><sup><a>&#91;4&#93;</a></sup> 매카트니는 가족과 함께 은둔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진다.<sup><a>&#91;5&#93;</a></sup> 3년간의 수명을 가지고 있던 <a>폴 매카트니 사망설</a>이 그것이다.<sup><a>&#91;6&#93;</a></sup> 이 소문은 <a>BBC 라디오</a>의 저널리스트와<sup><a>&#91;7&#93;</a></sup> 《라이프》지에서 그가 머무르던 하이드 파크의 농장을 방문하여 급속히 사라진다.<sup><a>&#91;8&#93;</a></sup> </p> <div> <div> <div> <p>난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이었어. 이 모든 것에 상처받았고 또한 실망했으며, 이런 위대한 밴드와 친구들을 잃게 되어 슬픔의 고배를 마셨단다.&#160;... 미쳐가기 시작했어.<sup><a>&#91;9&#93;</a></sup> </p> </div> </div> <div>– 매카트니가 딸 <a>메리 매카트니</a>에게, 2001</div> </div> <p>매카트니는 그해 5월 <a>앨런 클라인</a>의 비즈니스 매니저 임명 문제로<sup><a>&#91;10&#93;</a></sup><sup><a>&#91;11&#93;</a></sup> 다른 비틀즈 멤버들과 소원해짐과 동시에 스코틀랜드에서 몇달간 음악을 제작했다.<sup><a>&#91;12&#93;</a></sup> 그는 아내였던 린다의, 각각 아버지와 남자형제인 뉴욕의 변호사 <a>리 이스트먼</a>과 존 이스트먼<sup><a>&#91;13&#93;</a></sup>을 매니저로 임명하려 했으나 비틀즈는 클라인을 임명하려 했다.<sup><a>&#91;14&#93;</a></sup> 레논이 밴드를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매카트니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sup><a>&#91;2&#93;</a></sup> 매카트니는 자신의 견해로 보았을 때 이것이 신경 쇠약에 가까웠다고 설명했다.<sup><a>&#91;15&#93;</a></sup><sup><a>&#91;16&#93;</a></sup> </p><p>책 《Fab: An Intimate Life of Paul McCartney》(2010)에서 하워드 수네즈는 매카트니가 하이드 파크에서 망명을 떠나있을 때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건 린다에게 있어 암울한 소식이었다. 그녀는 돌보아야 하는 7살 아기가 있었고, 남편은 우울증에 빠져 술에 빠져 살았다. 그녀는 후에 친구에게, 폴 자신이 로큰롤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던 이 때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라고 말했다."<sup><a>&#91;9&#93;</a></sup> 린다의 격려에 힘입어 매카트니는 비틀즈를 벗어난, 첫 솔로 음반인 《McCartney》의 수록곡을 쓰고 완성하기 시작했다.<sup><a>&#91;3&#93;</a></sup><sup><a>&#91;9&#93;</a></sup> </p> <h2><span></span><span>녹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1970년 초 <a>티악 코퍼레이션</a>에서 <a>VU 미터</a>를 달고 제작한 포 트랙 녹음기. 매카트니의 스튜더 머신과는 다른 기계다.</div></div></div> <p>매카트니는 1969년 크리스마스 이전 가족과 런던으로 돌아왔으며,<sup><a>&#91;9&#93;</a></sup> 캐번디시 거리의 세인트 존스 우드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음반 작업을 시작했다.<sup><a>&#91;17&#93;</a></sup> 녹음은 최근에 배송된, 믹싱 데스크가 딸린 스튜더 포 트랙 테이프 레코더로 이루어졌다.<sup><a>&#91;18&#93;</a></sup> 따라서 레코딩 레벨을 알아볼 VU 디스플레이 없이 진행했다.<sup><a>&#91;19&#93;</a></sup> 음반의 코멘터리에서 그는 자신이 한 홈레코딩의 진행 과정을 "스튜더, 마이크 하나와 너브 하나"라고 표현했다.<sup><a>&#91;17&#93;</a></sup><sup><a>&#91;19&#93;</a></sup> </p> <h2><span></span><span>음반 커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음반의 접이식 커버의 디자인 콘셉트는 고든 하우스, 디자이너 로저 휴겟이 매카트니가 제시한 "폴의 콘셉트를 삶에 가져오자"는 안을 채택한 것이다.<sup><a>&#91;20&#93;</a></sup> 음반 전체에 걸쳐 있는 콜라주를 비롯한 사진은 린다 매카트니가 찍은 것이다.<sup><a>&#91;21&#93;</a></sup> 이 접이식 커버는 매카트니가 린다의 사진을 차용한 첫 음반이다.<sup><a>&#91;17&#93;</a></sup> </p> <h2><span></span><span>평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table><tbody><tr><th colspan="2">전문가 평가</th></tr><tr><th colspan="2">평가 점수</th></tr><tr><th>출처</th><th>점수</th></tr><tr><td><a>올뮤직</a></td><td><span><img><img><img><img><img></span><sup><a>&#91;22&#93;</a></sup></td></tr><tr><td><a>로버트 크리스트가우</a></td><td>B+<sup><a>&#91;23&#93;</a></sup></td></tr><tr><td>《<a>언사이클로피디아 오브 파퓨러 뮤직</a>》</td><td><span><img><img><img><img><img></span><sup><a>&#91;24&#93;</a></sup></td></tr><tr><td>《<a>더 에센셜 록 디스코그래피</a>》</td><td>6/10<sup><a>&#91;25&#93;</a></sup></td></tr><tr><td><a>뮤직하운드</a></td><td>3.5/5<sup><a>&#91;26&#93;</a></sup></td></tr><tr><td><a>피치포크 미디어</a> <small>(재발매)</small></td><td>7.9/10<sup><a>&#91;27&#93;</a></sup></td></tr><tr><td>《<a>레코드 컬렉터</a>》</td><td><span><img><img><img><img><img></span><sup><a>&#91;28&#93;</a></sup></td></tr><tr><td>《<a>롤링 스톤</a>》</td><td>(mixed)<sup><a>&#91;29&#93;</a></sup></td></tr><tr><td>《<a>롤링 스톤 앨범 가이드</a>》</td><td><span><img><img><img><img><img></span><sup><a>&#91;30&#93;</a></sup></td></tr></tbody></table> <p>《McCartney》는 출시되자 불충분한 제작과 미완성 곡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혹평을 들었다.<sup><a>&#91;31&#93;</a></sup><sup><a>&#91;32&#93;</a></sup> 덧붙여서 니콜라스 샤프너의 1977년 저서 《비틀즈 포에버》(<i>The Beatles Forever</i>)에 의하면, 매카트니는 자신을 행복한 가정의 남자로 대표하면서 비틀즈의 해체를 자신의 솔로 음반 홍보에 사용하려고 했고, 이는 "많은 목격자들에 의해 음반 전부가 감각이 없고, 지독하게 고안됨이 들통나면서"부터 "분명한 역효과"를 낳았다.<sup><a>&#91;33&#93;</a></sup> 매딩거와 이스터는 음반이 "엄청난 혹평"을 받았으며, 평론가 사이에서의 이러한 "공통된 진술"은 "'비틀즈를 고작 이거 때문에 해체시켰다고!?'와 유사하다"고 썼다.<sup><a>&#91;34&#93;</a></sup> 《<a>멜로디 메이커</a>》지의 <a>리처드 윌리엄스</a>는<sup><a>&#91;35&#93;</a></sup> "음반의 분명한 사운드는 조지 마틴의 공"이라고 분석했다.<sup><a>&#91;36&#93;</a></sup> 윌리엄스는 〈Maybe I'm Amazed〉에는 "순전히 따분함"이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으며,<sup><a>&#91;37&#93;</a></sup> 〈Man We Was Lonely〉에 대해서는 "그의 보드빌 면에서의 최악의 예시"라고 표현했다.<sup><a>&#91;35&#93;</a></sup> </p> <h2><span></span><span>곡 목록</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table> <tbody><tr> <th colspan="10">사이드 1</th> </tr> <tr> <th>#</th> <th>제목</th> <th><span>재생 시간</span></th> </tr> <tr> <td>1.</td> <td><a>The Lovely Linda</a> &#160;</td> <td>0:43</td> </tr> <tr> <td>2.</td> <td><a>That Would Be Something</a> &#160;</td> <td>2:38</td> </tr> <tr> <td>3.</td> <td>Valentine Day &#160;</td> <td>1:39</td> </tr> <tr> <td>4.</td> <td><a>Every Night</a> &#160;</td> <td>&#160;2:31</td> </tr> <tr> <td>5.</td> <td><a>Junk</a> &#160;</td> <td>1:54</td> </tr> <tr> <td>6.</td> <td>Man We Was Lonely &#160;</td> <td>2:56</td> </tr> </tbody></table></div> <div><table> <tbody><tr> <th colspan="10">사이드 2</th> </tr> <tr> <th>#</th> <th>제목</th> <th><span>재생 시간</span></th> </tr> <tr> <td>7.</td> <td>Oo You &#160;</td> <td>&#160;2:48</td> </tr> <tr> <td>8.</td> <td>Momma Miss America &#160;</td> <td>4:04</td> </tr> <tr> <td>9.</td> <td><a>Teddy Boy</a> &#160;</td> <td>&#160;2:22</td> </tr> <tr> <td>10.</td> <td><a>Singalong Junk</a> &#160;</td> <td>2:34</td> </tr> <tr> <td>11.</td> <td><a>Maybe I'm Amazed</a> &#160;</td> <td>3:53</td> </tr> <tr> <td>12.</td> <td>Kreen - Akrore &#160;</td> <td>4:15</td> </tr> </tbody></table></div> <h2><span></span><span>참여 인원</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폴 매카트니</a> – 리드 보컬, 통기타, 전자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 피아노, 오르간, 타악기, 멜로트론, 장난감 실로폰, 이펙트, 백 보컬</li> <li><a>린다 매카트니</a> – 하모니, 백 보컬</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ol>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Doggett, pp. 101–03.</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Spizer, p. 116.</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Rodriguez, p. 1.</span> </li> <li><span><a>↑</a></span> <span>Woffinden, p. 27.</span> </li> <li><span><a>↑</a></span> <span>Sounes, p. 262.</span> </li> <li><span><a>↑</a></span> <span>Schaffner, pp. 127–28.</span> </li> <li><span><a>↑</a></span> <span>Miles 2001, pp. 357, 358.</span> </li> <li><span><a>↑</a></span> <span>Sounes, pp. 262–63.</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span> <span>Sounes, p. 264.</span> </li> <li><span><a>↑</a></span> <span>Doggett, pp. 85–86, 101, 111.</span> </li> <li><span><a>↑</a></span> <span><i>The New Rolling Stone Encyclopedia of Rock &amp; Roll</i>, p. 61.</span> </li> <li><span><a>↑</a></span> <span>Clayson, p. 205.</span> </li> <li><span><a>↑</a></span> <span>Sounes, pp. 250, 251–52, 253.</span> </li> <li><span><a>↑</a></span> <span>Doggett, pp. 70, 132.</span> </li> <li><span><a>↑</a></span> <span>Miles 1998, p. 570.</span> </li> <li><span><a>↑</a></span> <span>Sounes, pp. 263, 264.</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span> <span>Madinger &amp; Easter, p. 154.</span> </li> <li><span><a>↑</a></span> <span>Miles 1998, p. 571.</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a>Press release (9 April 1970)</a>, accompanying UK promotional copies of <i>McCartney</i> (Apple PCS 7102). <a>Apple Records</a>.</span> </li> <li><span><a>↑</a></span> <span>Spizer, p. 118.</span> </li> <li><span><a>↑</a></span> <span>Spizer, pp. 118, 120.</span> </li> <li><span><a>↑</a></span> <span><cite>Erlewine, Stephen Thomas. <a>&#8220;Paul McCartney <i>McCartney</i>&#8221;</a>. <a>AllMusic</a><span>. 2014년 7월 22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Christgau, Robert</a> (1970년 5월 28일). <a>&#8220;Consumer Guide (10)&#8221;</a>. robertchristgau.com<span>. 2014년 2월 10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Larkin, p. 1257.</span> </li> <li><span><a>↑</a></span> <span><cite>Strong, Martin C. (2006). &#12298;The Essential Rock Discography&#12299;. Edinburgh, UK: Canongate. 696쪽. <a>ISBN</a>&#160;<a>978-184195-827-9</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Graff &amp; Durchholz, p. 730.</span> </li> <li><span><a>↑</a></span> <span><a>Paul McCartney: McCartney / McCartney II | Album Reviews | Pitchfork</a></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Paul McCartney <i>McCartney</i> CD&#8221;</a>. CD Universe/<a>Muze</a><span>. 2014년 8월 2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Winner, Langdon (1970년 5월 14일). <a>&#8220;Paul McCartney <i>McCartney</i>&#8221;</a>. &#12298;<a>Rolling Stone</a>&#12299;. 50쪽<span>. 2014년 7월 22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Paul McCartney: Album Guide&#8221;</a>. rollingstone.com. 2014년 7월 4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14년 7월 22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Rodriguez, pp. 151, 178.</span> </li> <li><span><a>↑</a></span> <span>Carlin, p. 205.</span> </li> <li><span><a>↑</a></span> <span>Schaffner, pp. 135, 136.</span> </li> <li><span><a>↑</a></span> <span>Madinger &amp; Easter, pp. 151, 154.</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Badman, p. 5.</span> </li> <li><span><a>↑</a></span> <span>Sounes, p. 271.</span> </li> <li><span><a>↑</a></span> <span>Sounes, pp. 271−72.</span> </li> </ol></div>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폴 매카트니</a></div></th></tr><tr><th>정규 음반</th><td><div></div><table><tbody><tr><td colspan="2"><div> <ul><li>《<a>McCartney</a>》</li> <li>《<a>Ram</a>》</li> <li>《<a>McCartney II</a>》</li> <li>《<a>Tug of War</a>》</li> <li>《<a>Pipes of Peace</a>》</li> <li>《<a>Give My Regards to Broad Street</a>》</li> <li>《<a>Press to Play</a>》</li> <li>《<a>Снова в СССР</a>》</li> <li>《<a>Flowers in the Dirt</a>》</li> <li>《<a>Off the Ground</a>》</li> <li>《<a>Flaming Pie</a>》</li> <li>《<a>Run Devil Run</a>》</li> <li>《<a>Driving Rain</a>》</li> <li>《<a>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a>》</li> <li>《<a>Memory Almost Full</a>》</li> <li>《<a>Kisses on the Bottom</a>》</li> <li>《<a>New</a>》</li> <li>《<a>Egypt Station</a>》</li></ul> </div></td></tr><tr><th><a>윙스</a> 시절</th><td><div> <ul><li>《<a>Wild Life</a>》</li> <li>《<a>Red Rose Speedway</a>》</li> <li>《<a>Band on the Run</a>》</li> <li>《<a>Venus and Mars</a>》</li> <li>《<a>Wings at the Speed of Sound</a>》</li> <li>《<a>London Town</a>》</li> <li>《<a>Back to the Egg</a>》</li></ul> </div></td></tr><tr><th>클래식 음반</th><td><div> <ul><li>《<a>The Family Way</a>》</li> <li>《<a>Thrillington</a>》</li> <li>《<a>Paul McCartney's Liverpool Oratorio</a>》</li> <li>《<a>Standing Stone</a>》</li> <li>《<a>Working Classical</a>》</li> <li>《<a>Ecce Cor Meum</a>》</li> <li>《<a>Ocean's Kingdom</a>》</li></ul> </div></td></tr><tr><th>일렉트로니카</th><td><div> <ul><li>《<a>Strawberries Oceans Ships Forest</a>》 <small>(<a>파이어맨</a>)</small></li> <li>《<a>Rushes</a>》 <small>(파이어맨)</small></li> <li>《<a>Liverpool Sound Collage</a>》</li> <li>《<a>Twin Freaks</a>》</li> <li>《<a>Electric Arguments</a>》<small>(파이어맨)</small></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라이브 음반</th><td><div> <ul><li>《<a>Wings over America</a>》</li> <li>《<a>Tripping the Live Fantastic</a>》</li> <li>《<a>Unplugged (The Official Bootleg)</a>》</li> <li>《<a>Paul Is Live</a>》</li> <li>《<a>Back in the U.S.</a>》</li> <li>《<a>Back in the World Live</a>》</li> <li>《<a>iTunes Festival: London</a>》</li> <li>《<a>Amoeba's Secret</a>》</li> <li>《<a>Good Evening New York City</a>》</li> <li>《<a>Live in Los Angeles</a>》</li> <li>《<a>iTunes Live from Capitol Studios</a>》</li></ul> </div></td></tr><tr><th>컴필레이션</th><td><div> <ul><li>《<a>Wings Greatest</a>》</li> <li>《<a>Cold Cuts</a>》 <span>(미발매)</span></li> <li>《<a>All the Best!</a>》</li> <li>《<a>The Paul McCartney Collection</a>》</li> <li>《<a>Wingspan: Hits and History</a>》</li> <li>《<a>Pure McCartney</a>》</li></ul> </div></td></tr><tr><th>관련 문서</th><td><div> <ul><li><a>디스코그래피</a></li> <li><a>비틀즈</a></li> <li><a>더 파이어맨</a></li> <li><a>퍼시 스릴스 스릴링턴</a></li> <li><a>린다 매카트니</a></li> <li><a>헤더 밀스 매카트니</a></li> <li><a>MPL 커뮤니케이션스</a></li> <li><a>폴 매카트니 사망설</a></li> <li><a>스텔라 매카트니</a></li> <li><a>포슬린 로드 20번지</a></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McCartney_(음반)&amp;oldid=24450123</a>"</div> <div><div><a>분류</a>: <ul><li><a>애플 레코드 음반</a></li><li><a>컬럼비아 레코드 음반</a></li><li><a>폴 매카트니의 음반</a></li><li><a>1970년 데뷔 음반</a></li><li><a>폴 매카트니가 프로듀싱한 음반</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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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레논은 언제 비틀즈와 "결별"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틀즈에게 전했는가?
1969년 9월 20일
null
102224
10,326
[ "존 레논은 언제 비틀즈와 \"결별\"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틀즈에게 전했는가?", "매카트니에 대해 미국에서 무슨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졌는가?", "1969년 9월 20일 비틀즈와 결별하고 싶다고 이야기한 인물은 누구인가?", "존레논이 비틀즈와 결별하고 싶다고 하자 폴매카트니는 어디에 위치한 자신의 농장에 틀어박혔는가?", "존 레논이 비틀즈를 탈퇴하고 싶다는 의사를 나타낸 시기는? ", "매카트니가 머무르던 농장은?", "《McCartney》가 혹평을 들은 이유는 무엇인가?", "《비틀즈 포에버》에 의하면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해체를 무엇에 사용하려 했는가?", "《멜로디 메이커》지에 의하면 음반의 분명한 사운드는 누구의 덕분이라고 썼는가?", "1977년의 비틀즈 포에버의 저자는 누구인가?", "McCartney 음반의 사운드가 조지 마틴의 공이라고 분석한 인물은 누구인가?", "불충분한 제작과 미완성 곡으로 전 세계적으로 흑평을 들었던 음반은? ", "매카트니 음반에 대해 혹평을 가했던 멜로디 메이커지의 평론가는 누구인가?" ]
<!DOCTYPE html> McCartney (음반)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McCartney (음반)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McCartney》</th></tr><tr><td colspan="2"> </td></tr><tr><th colspan="2">폴 매카트니의 정규 음반</th></tr><tr><th>발매일</th> <td> 1970년 4월 17일 1970년 4월 20일</td></tr><tr><th>녹음</th> <td> 1969년 11월 - 1970년 1월</td></tr><tr><th>장르</th> <td> 록</td></tr><tr><th>길이</th> <td> 35:03</td></tr><tr><th>언어</th> <td> 영어</td></tr><tr><th>레이블</th> <td> 애플</td></tr><tr><th>프로듀서</th> <td> 폴 매카트니</td></tr><tr><th colspan="2">폴 매카트니 연표</th></tr> <tr><td colspan="2"> <table> <tbody><tr> <td> </td> <td>《McCartney》(1970) </td> <td>《Ram》(1971) </td></tr></tbody></table></td></tr> </tbody></table> 《McCartney》는 폴 매카트니의 데뷔 음반이다. 《Let It Be》를 고려해 발매를 늦추려는 비틀즈 멤버의 시도를 매카트니가 막은 후 1970년 4월 애플 레코드에서 발매되었다. 매카트니는 1969년 9월에 레논이 비틀즈를 떠난다는 소식을 사적으로 접하고는 비틀즈 멤버와 음반 발매를 둘러싼 다툼으로 《McCartney》를 우울증과 혼란의 시기에 녹음했다. 1970년 4월 10일 자기 회견 형식으로 성명을 낸 그는 영국에 홍보물을 배포해 비틀즈의 해체를 주도했다. 아내 린다가 보컬에 참여한 것 외에는 모든 악기를 연주하는 등 매카트니 혼자서 음반 전체를 담당했다. 집에서 녹음돼 느슨한 편곡을 보여주는 《McCartney》는 《Let It Be》(당시에는 《Get Back》)의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초기 콘셉트를 도입했다. 비틀즈 경력에 종지부를 찍은 매카트니로서, 음반은 주요 음악 평론가에게 부정적인 반응을 받았지만, 〈Maybe I'm Amazed〉은 계속해서 찬사를 받았다. 상업적으로 《McCartney》는 비틀즈의 해체를 둘러싼 언론의 관심으로 이득을 얻었다. 3주동안 빌보드 200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고, 영국에서는 2위까지 올라갔다. 음반은 《Paul McCartney Archive Collection》로서 2011년 6월에 재발매되었다. 목차 1 배경 2 녹음 3 음반 커버 4 평가 5 곡 목록 6 참여 인원 7 각주 배경[편집] 존 레논이 1969년 9월 20일 자신이 비틀즈와 "결별"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틀즈에게 전한 뒤,[1] 폴 매카트니는 캠벨타운에 위치한 자신의 농장에 돌아가 틀어박혔다.[2] 작가인 로버트 로드리게즈는 당시의 그의 마음 상태가 "상심했으며, 충격받았고, 그가 알던 유일한 직장을 잃어 의기소침했다."고 했다.[3] 일부 사업적 이유로 아직 공식적으로 성사되지 않았을 때,[1][4] 매카트니는 가족과 함께 은둔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미국에서 그가 죽었다는 소문이 광범위하게 퍼진다.[5] 3년간의 수명을 가지고 있던 폴 매카트니 사망설이 그것이다.[6] 이 소문은 BBC 라디오의 저널리스트와[7] 《라이프》지에서 그가 머무르던 하이드 파크의 농장을 방문하여 급속히 사라진다.[8] 난 완전히 무너지기 직전이었어. 이 모든 것에 상처받았고 또한 실망했으며, 이런 위대한 밴드와 친구들을 잃게 되어 슬픔의 고배를 마셨단다. ... 미쳐가기 시작했어.[9] – 매카트니가 딸 메리 매카트니에게, 2001 매카트니는 그해 5월 앨런 클라인의 비즈니스 매니저 임명 문제로[10][11] 다른 비틀즈 멤버들과 소원해짐과 동시에 스코틀랜드에서 몇달간 음악을 제작했다.[12] 그는 아내였던 린다의, 각각 아버지와 남자형제인 뉴욕의 변호사 리 이스트먼과 존 이스트먼[13]을 매니저로 임명하려 했으나 비틀즈는 클라인을 임명하려 했다.[14] 레논이 밴드를 떠나겠다고 선언하자 매카트니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2] 매카트니는 자신의 견해로 보았을 때 이것이 신경 쇠약에 가까웠다고 설명했다.[15][16] 책 《Fab: An Intimate Life of Paul McCartney》(2010)에서 하워드 수네즈는 매카트니가 하이드 파크에서 망명을 떠나있을 때를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건 린다에게 있어 암울한 소식이었다. 그녀는 돌보아야 하는 7살 아기가 있었고, 남편은 우울증에 빠져 술에 빠져 살았다. 그녀는 후에 친구에게, 폴 자신이 로큰롤의 희생자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던 이 때가 자신의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라고 말했다."[9] 린다의 격려에 힘입어 매카트니는 비틀즈를 벗어난, 첫 솔로 음반인 《McCartney》의 수록곡을 쓰고 완성하기 시작했다.[3][9] 녹음[편집] 1970년 초 티악 코퍼레이션에서 VU 미터를 달고 제작한 포 트랙 녹음기. 매카트니의 스튜더 머신과는 다른 기계다. 매카트니는 1969년 크리스마스 이전 가족과 런던으로 돌아왔으며,[9] 캐번디시 거리의 세인트 존스 우드에 위치한 자신의 집에서 음반 작업을 시작했다.[17] 녹음은 최근에 배송된, 믹싱 데스크가 딸린 스튜더 포 트랙 테이프 레코더로 이루어졌다.[18] 따라서 레코딩 레벨을 알아볼 VU 디스플레이 없이 진행했다.[19] 음반의 코멘터리에서 그는 자신이 한 홈레코딩의 진행 과정을 "스튜더, 마이크 하나와 너브 하나"라고 표현했다.[17][19] 음반 커버[편집] 음반의 접이식 커버의 디자인 콘셉트는 고든 하우스, 디자이너 로저 휴겟이 매카트니가 제시한 "폴의 콘셉트를 삶에 가져오자"는 안을 채택한 것이다.[20] 음반 전체에 걸쳐 있는 콜라주를 비롯한 사진은 린다 매카트니가 찍은 것이다.[21] 이 접이식 커버는 매카트니가 린다의 사진을 차용한 첫 음반이다.[17] 평가[편집] <table><tbody><tr><th colspan="2">전문가 평가</th></tr><tr><th colspan="2">평가 점수</th></tr><tr><th>출처</th><th>점수</th></tr><tr><td>올뮤직</td><td>[22]</td></tr><tr><td>로버트 크리스트가우</td><td>B+[23]</td></tr><tr><td>《언사이클로피디아 오브 파퓨러 뮤직》</td><td>[24]</td></tr><tr><td>《더 에센셜 록 디스코그래피》</td><td>6/10[25]</td></tr><tr><td>뮤직하운드</td><td>3.5/5[26]</td></tr><tr><td>피치포크 미디어 (재발매)</td><td>7.9/10[27]</td></tr><tr><td>《레코드 컬렉터》</td><td>[28]</td></tr><tr><td>《롤링 스톤》</td><td>(mixed)[29]</td></tr><tr><td>《롤링 스톤 앨범 가이드》</td><td>[30]</td></tr></tbody></table> 《McCartney》는 출시되자 불충분한 제작과 미완성 곡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혹평을 들었다.[31][32] 덧붙여서 니콜라스 샤프너의 1977년 저서 《비틀즈 포에버》(The Beatles Forever)에 의하면, 매카트니는 자신을 행복한 가정의 남자로 대표하면서 비틀즈의 해체를 자신의 솔로 음반 홍보에 사용하려고 했고, 이는 "많은 목격자들에 의해 음반 전부가 감각이 없고, 지독하게 고안됨이 들통나면서"부터 "분명한 역효과"를 낳았다.[33] 매딩거와 이스터는 음반이 "엄청난 혹평"을 받았으며, 평론가 사이에서의 이러한 "공통된 진술"은 "'비틀즈를 고작 이거 때문에 해체시켰다고!?'와 유사하다"고 썼다.[34] 《멜로디 메이커》지의 리처드 윌리엄스는[35] "음반의 분명한 사운드는 조지 마틴의 공"이라고 분석했다.[36] 윌리엄스는 〈Maybe I'm Amazed〉에는 "순전히 따분함"이 있을 뿐이라고 지적했으며,[37] 〈Man We Was Lonely〉에 대해서는 "그의 보드빌 면에서의 최악의 예시"라고 표현했다.[35] 곡 목록[편집] <table> <tbody><tr> <th colspan="10">사이드 1</th> </tr> <tr> <th>#</th> <th>제목</th> <th>재생 시간</th> </tr> <tr> <td>1.</td> <td>The Lovely Linda  </td> <td>0:43</td> </tr> <tr> <td>2.</td> <td>That Would Be Something  </td> <td>2:38</td> </tr> <tr> <td>3.</td> <td>Valentine Day  </td> <td>1:39</td> </tr> <tr> <td>4.</td> <td>Every Night  </td> <td> 2:31</td> </tr> <tr> <td>5.</td> <td>Junk  </td> <td>1:54</td> </tr> <tr> <td>6.</td> <td>Man We Was Lonely  </td> <td>2:56</td> </tr> </tbody></table> <table> <tbody><tr> <th colspan="10">사이드 2</th> </tr> <tr> <th>#</th> <th>제목</th> <th>재생 시간</th> </tr> <tr> <td>7.</td> <td>Oo You  </td> <td> 2:48</td> </tr> <tr> <td>8.</td> <td>Momma Miss America  </td> <td>4:04</td> </tr> <tr> <td>9.</td> <td>Teddy Boy  </td> <td> 2:22</td> </tr> <tr> <td>10.</td> <td>Singalong Junk  </td> <td>2:34</td> </tr> <tr> <td>11.</td> <td>Maybe I'm Amazed  </td> <td>3:53</td> </tr> <tr> <td>12.</td> <td>Kreen - Akrore  </td> <td>4:15</td> </tr> </tbody></table> 참여 인원[편집] 폴 매카트니 – 리드 보컬, 통기타, 전자 기타, 베이스 기타, 드럼, 피아노, 오르간, 타악기, 멜로트론, 장난감 실로폰, 이펙트, 백 보컬 린다 매카트니 – 하모니, 백 보컬 각주[편집] ↑ 가 나 Doggett, pp. 101–03. ↑ 가 나 Spizer, p. 116. ↑ 가 나 Rodriguez, p. 1. ↑ Woffinden, p. 27. ↑ Sounes, p. 262. ↑ Schaffner, pp. 127–28. ↑ Miles 2001, pp. 357, 358. ↑ Sounes, pp. 262–63. ↑ 가 나 다 라 Sounes, p. 264. ↑ Doggett, pp. 85–86, 101, 111. ↑ The New Rolling Stone Encyclopedia of Rock &amp; Roll, p. 61. ↑ Clayson, p. 205. ↑ Sounes, pp. 250, 251–52, 253. ↑ Doggett, pp. 70, 132. ↑ Miles 1998, p. 570. ↑ Sounes, pp. 263, 264. ↑ 가 나 다 Madinger &amp; Easter, p. 154. ↑ Miles 1998, p. 571. ↑ 가 나 Press release (9 April 1970), accompanying UK promotional copies of McCartney (Apple PCS 7102). Apple Records. ↑ Spizer, p. 118. ↑ Spizer, pp. 118, 120. ↑ Erlewine, Stephen Thomas. “Paul McCartney McCartney”. AllMusic. 2014년 7월 22일에 확인함.  ↑ Christgau, Robert (1970년 5월 28일). “Consumer Guide (10)”. robertchristgau.com. 2014년 2월 10일에 확인함.  ↑ Larkin, p. 1257. ↑ Strong, Martin C. (2006). 《The Essential Rock Discography》. Edinburgh, UK: Canongate. 696쪽. ISBN 978-184195-827-9.  ↑ Graff &amp; Durchholz, p. 730. ↑ Paul McCartney: McCartney / McCartney II | Album Reviews | Pitchfork ↑ “Paul McCartney McCartney CD”. CD Universe/Muze. 2014년 8월 2일에 확인함.  ↑ Winner, Langdon (1970년 5월 14일). “Paul McCartney McCartney”. 《Rolling Stone》. 50쪽. 2014년 7월 22일에 확인함.  ↑ “Paul McCartney: Album Guide”. rollingstone.com. 2014년 7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4년 7월 22일에 확인함.  ↑ Rodriguez, pp. 151, 178. ↑ Carlin, p. 205. ↑ Schaffner, pp. 135, 136. ↑ Madinger &amp; Easter, pp. 151, 154. ↑ 가 나 Badman, p. 5. ↑ Sounes, p. 271. ↑ Sounes, pp. 271−72. <table><tbody><tr><th colspan="2">vdeh폴 매카트니</th></tr><tr><th>정규 음반</th><td><table><tbody><tr><td colspan="2"> 《McCartney》 《Ram》 《McCartney II》 《Tug of War》 《Pipes of Peace》 《Give My Regards to Broad Street》 《Press to Play》 《Снова в СССР》 《Flowers in the Dirt》 《Off the Ground》 《Flaming Pie》 《Run Devil Run》 《Driving Rain》 《Chaos and Creation in the Backyard》 《Memory Almost Full》 《Kisses on the Bottom》 《New》 《Egypt Station》 </td></tr><tr><th>윙스 시절</th><td> 《Wild Life》 《Red Rose Speedway》 《Band on the Run》 《Venus and Mars》 《Wings at the Speed of Sound》 《London Town》 《Back to the Egg》 </td></tr><tr><th>클래식 음반</th><td> 《The Family Way》 《Thrillington》 《Paul McCartney's Liverpool Oratorio》 《Standing Stone》 《Working Classical》 《Ecce Cor Meum》 《Ocean's Kingdom》 </td></tr><tr><th>일렉트로니카</th><td> 《Strawberries Oceans Ships Forest》 (파이어맨) 《Rushes》 (파이어맨) 《Liverpool Sound Collage》 《Twin Freaks》 《Electric Arguments》(파이어맨) </td></tr></tbody></table></td></tr><tr><th>라이브 음반</th><td> 《Wings over America》 《Tripping the Live Fantastic》 《Unplugged (The Official Bootleg)》 《Paul Is Live》 《Back in the U.S.》 《Back in the World Live》 《iTunes Festival: London》 《Amoeba's Secret》 《Good Evening New York City》 《Live in Los Angeles》 《iTunes Live from Capitol Studios》 </td></tr><tr><th>컴필레이션</th><td> 《Wings Greatest》 《Cold Cuts》 (미발매) 《All the Best!》 《The Paul McCartney Collection》 《Wingspan: Hits and History》 《Pure McCartney》 </td></tr><tr><th>관련 문서</th><td> 디스코그래피 비틀즈 더 파이어맨 퍼시 스릴스 스릴링턴 린다 매카트니 헤더 밀스 매카트니 MPL 커뮤니케이션스 폴 매카트니 사망설 스텔라 매카트니 포슬린 로드 20번지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McCartney_(음반)&amp;oldid=24450123" 분류: 애플 레코드 음반컬럼비아 레코드 음반폴 매카트니의 음반1970년 데뷔 음반폴 매카트니가 프로듀싱한 음반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ČeštinaDeutschEnglishEspañolSuomiFrançaisעבריתMagyar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Norsk nynorsk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venskaУкраїнськаTiếng Việt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19일 (수) 16:3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폴 매카트니의 데뷔 음반 《McCartney》는 1970년 4월 17일에 발매되었으며, 비틀즈 해체 후의 혼란과 우울증 속에서 녹음되었다. 매카트니는 모든 악기를 혼자 연주하고 아내 린다와 함께 보컬에 참여하여 음반을 완성했다. 이 음반은 비틀즈의 해체를 주도하는 성명과 함께 발표되었고, 상업적으로는 성공을 거두어 빌보드 200 차트에서 1위를 기록했다. 그러나 음악 평론가들로부터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특히 〈Maybe I'm Amazed〉는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 음반은 2011년에 재발매되었다.
다음 글을 보고, 요약문을 만들되 첫 문장은 전체 주제를 압축적으로, 이후 문장은 세부 정보 중심으로 정리해줘.
코린토스_전쟁
https://ko.wikipedia.org/wiki/코린토스_전쟁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코린토스 전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코린토스 전쟁</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h colspan="2">코린토스 전쟁</th></tr><tr><td colspan="2"><a><img></a><br>전투에 임하는 호플리테스(중장보병)</td></tr><tr><td colspan="2"><table><tbody><tr><th>날짜</th><td><a>기원전 395년</a>–<a>기원전 387년</a></td></tr><tr><th>장소</th><td><span>그리스 본토</span></td></tr><tr><th>결과</th><td> <a>안탈키다스 평화조약</a> (<a>페르시아 제국</a> 주도로)</td></tr></tbody></table></td></tr><tr><th colspan="2">교전국</th></tr><tr><td> <a>스파르타</a><br><a>펠로폰네소스 동맹</a></td><td> <a>아테나이</a><br><a>아르고스</a><br><a>코린토스</a><br><a>테바이</a><br><a>페르시아 제국</a><br>기타 동맹</td></tr><tr><th colspan="2">지휘관</th></tr><tr><td> <a>아게실라오스 2세</a><br><a>리산드로스</a><br><a>텔레우티아스</a><br><a>페이산드로스</a> 등</td><td> <a>이피크라테스</a><br><a>카브리아스</a><br><a>코논</a> 등</td></tr></tbody></table><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코린토스 전쟁</a></div></th></tr><tr><td colspan="2"><div> <ul><li><a>할리아르토스</a></li> <li><a>네메아</a></li> <li><a>크니도스</a></li> <li><a>코로네이아</a></li> <li><a>레카이온</a></li></ul> </div></td></tr></tbody></table></div> <p><b>코린토스 전쟁</b>(Κορινθιακός Πόλεμος, <a>기원전 395년</a> - <a>기원전 387년</a>)은 <a>아테네</a>, <a>아르고스</a>, <a>코린토스</a>, <a>테바이</a>와 기타 반 스파르타 동맹과 <a>스파르타</a>와 그 동맹국(펠로폰네소스 동맹)들과의 전쟁이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개요</span></a></li> <li><a><span>2</span> <span>원인</span></a></li> <li><a><span>3</span> <span>기원전 395년</span></a></li> <li><a><span>4</span> <span>기원전 394년</span></a> <ul> <li><a><span>4.1</span> <span>네메아</span></a></li> <li><a><span>4.2</span> <span>크니도스</span></a></li> <li><a><span>4.3</span> <span>코로네이아</span></a></li> </ul> </li> <li><a><span>5</span> <span>기원전 393년</span></a></li> <li><a><span>6</span> <span>기원전 392년</span></a></li> <li><a><span>7</span> <span>기원전 391년에서 388년</span></a></li> <li><a><span>8</span> <span>기원전 387년&#160;: 안탈키다스 평화조약</span></a></li> <li><a><span>9</span> <span>영향</span></a></li> <li><a><span>10</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개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a>아게실라오스 2세</a>의 <a>소아시아</a> 원정에 대항해 그리스 본토에서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a>페르시아 제국</a> <a>아케메네스 왕조</a>가 그들의 시선을 그리스로 집중시키려한 것이다. <a>테바이</a>와 <a>스파르타</a>가 개입하며 그리스 북서 지방의 대립이 되었으며, 잠재적인 원인은 <a>펠로폰네소스 전쟁</a>으로 <a>아테네</a>를 그리스의 패자의 자리에서 끌어 내리고, 세력 확대를 꾀한 스파르타에 대한 다른 도시 국가의 경계심과 적개심이었다. </p><p>전쟁은 육지에서는 코린토스에서 테바이 부근까지, 바다에서는 <a>에게 해</a>에서 치러졌다. 스파르타는 육지에서의 주요 대규모 작전은 대체로 승리를 거뒀지만, 바다에서는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적에게 참패했다. 이 승리를 거둔 아테네는 일부 해군이 원정을 하였고 <a>기원전 5세기</a> ‘아테네 제국’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p><p>이 아테네의 성공과 세력 확장을 경계한 페르시아는 노선을 변경하여 스파르타 편을 들었다. 대제국의 배신에 대항하여 반 스파르타 동맹은 평화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a>기원전 387년</a>에 체결된 〈<a>안탈키다스 평화조약</a>〉(대왕의 화평)을 맺으며 전쟁은 끝났다. 이 조약에서 페르시아는 <a>이오니아</a> 전역의 지배권을 확립하였고, 또한 스파르타의 패권이 확립되었다. </p> <h2><span></span><span>원인</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고대 그리스 본토</div></div></div> <p><a>기원전 404년</a>, 아테네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난 <a>펠로폰네소스 전쟁</a> 이후 스파르타는 다른 그리스 국가들과 페르시아의 협력을 얻으면서 <a>에게 해</a>의 여러 섬을 지배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패전국이나 아테네의 옛 속국들로부터 공물을 요구했고, 전시에 스파르타에 대한 적대행위를 한 엘리스를 <a>기원전 402년</a>에 공격했기 때문에 <a>코린토스</a>와 <a>테바이</a>가 엘리스 공격전에 스파르타에 원군을 보내는 것을 거부하는 등 동맹국들 사이에서 스파르타의 지지율은 떨어졌다. </p><p>스파르타의 왕 <a>아게실라오스 2세</a>가 통치했던 스파르타는 <a>기원전 399년</a>에 <a>소아시아</a> 원정을 벌임으로서 <a>펠로폰네소스 전쟁</a> 당시 협력자였던 페르시아와 결별했다. 이 원정에서 <a>테바이</a>, <a>코린토스</a>, <a>아테네</a>는 참여를 거부했지만, 아게실라오스는 소아시아의 태수들을 상대로 우세한 전투를 벌였으며, 후퇴 직전에는 페르시아 황제에게 진군할 계획조차 세웠다. </p><p>아게실라오스과 싸웠던 <a>프리기아</a>의 <a>사트라프</a>(태수) <a>파르나바조스</a>는 그리스 본토에서 전쟁을 유발하여 아게실라오스를 철수시키려 <a>로도스 출신의 티모크라테스</a>에게 자금을 주어 그리스로 파견했다. <a>아테네</a>, <a>테바이</a>, <a>코린토스</a>, <a>아르고스</a>를 방문한 티모크라테스는 그 나라에서 대 스파르타 전쟁을 일으킬 것을 설득하였고, 스파르타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던 그 도시 국가들은 설득에 넘어와 티모크라테스의 공작은 성공을 거두었다. </p> <h2><span></span><span>기원전 395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테바이는 <a>스파르타</a>에 직접 도전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동맹국인 <a>로크리스</a>에게 <a>로크리스</a>와 <a>포키스</a> 모두의 영지에서 세금을 거두라고 권유함으로써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다. 그 결과 포키스가 로크리스를 침공하였고, 로크리스가 테바이에 원군을 요청하자 테바이는 포키스를 침공했다. 그리고 포키스의 원군 요청을 받은 스파르타는 테바이를 징계한다는 명목으로 병력을 동원했다. 또한 테바이는 사절을 아테네에 파견하였고, 테바이를 돕고자 아테네는 테바이를 포함한 보이오티아 연합과 동맹을 체결했다. </p><p>스파르타는 <a>펠로폰네소스 전쟁</a>에서 제독으로 활약한 <a>리산드로스</a>와 <a>파우사니아스 왕</a>이 이끄는 두 군대를 각각 파견해 <a>보이오티아</a>의 도시 할리아르토스에서 만나 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파우사니아스보다 먼저 도착한 리산드로스는 <a>오르코메노스</a>에 보이오티아 연합에 반기를 들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고, 오르코메노스 군과 함께 할리아르토스로 향했지만, <a>할리아르토스 전투</a>에서 패배를 당해 죽음을 맞았다. 며칠 후 도착한 파우사니아스는 협정을 맺고 전사자의 시신을 거둔 후 스파르타로 발길을 돌렸다. 도착이 늦어져 리산드로스를 죽게 한 파우사니아스는 재판에 회부당했고, 유죄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a>테게아</a>로 망명했다. </p><p><a>기원전 395년</a> 말에 코린토스와 아테네가 대 스파르타 전쟁에 참전하였고, 그들은 다른 수많은 소국에 사절을 보내 지지를 호소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놀란 스파르타는 새 동맹국에 군사를 보내 응징할 준비를 하였고, 소아시아에 원정을 떠나 있던 아게실라오스에게 특사를 파견해 그리스로 돌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아게실라오스는 헬레스폰투스를 건너 <a>트라키아</a>를 통해서 육로로 귀국하려고 했다. </p> <h2><span></span><span>기원전 394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a>에게 해</a>로 분리된 <a>고대 그리스</a>와 <a>소아시아</a></div></div></div> <h3><span></span><span>네메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테바이의 승리로 테바이와 <a>포키스</a>가 휴전을 한 후 대 스파르타 동맹은 24,000명의 대군을 집결시키고, 반면 스파르타도 18,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양군은 코린토스의 <a>네메아</a>에서 회전을 벌였고, 〈<a>네메아 전투</a>〉는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다. </p> <h3><span></span><span>크니도스</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div><img>이 부분의 본문은 <a>크니도스 해전</a>입니다.</div> <p>한편 바다에서는 양 진영이 각각 함대를 편성하였고, 아게실라오스는 예하의 <a>에게 해</a> 국가의 함선을 집결시켜 120척의 함대를 편성하고, 함대의 지휘권을 함대 경험이 없었던 처남 <a>페이산도로스</a>에게 지휘권을 주었다. 한편 페르시아, 아테네 연합 함대는 <a>파르나바조스</a>와 경험이 풍부한 아테네 장군들에게 지휘권을 갖게 했다. 그리고 두 함대는 <a>기원전 394년</a> <a>크니도스</a> 근해에서 충돌하였고, 스파르타는 분전했지만 스파르타 함대의 대패로 〈<a>크니도스 해전</a>〉이 끝났다. 이 패배로 스파르타는 해상에서 퇴출되었다. 이 승리 이후 파르나바조스는 이오니아 해안을 따라 여러 도시에서 스파르타 인이 지배자하고 있던 주둔군을 추방했지만, <a>데르킬리타스</a>가 지휘하고 있던 아비도스와 세스토스에서는 실패했다.<sup><a>&#91;1&#93;</a></sup> </p> <h3><span></span><span>코로네이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div><img>이 부분의 본문은 <a>코로네이아 전투 (기원전 394년)</a>입니다.</div> <p>이 시기, 아게실라오스 군은 <a>테살리아</a>에서 싹쓸이 약탈을 한 이후에, 진군을 계속에 보이오티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a>테바이</a>, <a>아르고스</a> 등 여러 반 스파르타 동맹국에서 모은 병력과 조우했다. 이곳에서 〈<a>코로네이아 전투</a>〉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아게실라오스는 다시 승리를 거두었고, <a>코린토스 만</a>을 건너 스파르타로 귀국했다. </p> <h2><span></span><span>기원전 393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기원전 394년</a>, 스파르타의 전황은 육지에서는 우세하게 싸웠지만, 바다에서는 열세에 놓여 있었다. 이후 몇 년 동안 스파르타는 <a>코린트</a>와 <a>아르고스</a>를 동맹에서 동맹에서 몰아내려고 공격을 가했다. 한편, 아테네와 테바이는 그 틈을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지역에서의 영향력 강화에 이용했다. </p><p><a>기원전 393년</a>, <a>코논</a>과 파르나바조스는 함선에서 그리스 본토를 향해 라코니아 연안을 강습하여 <a>큐테라 섬</a>을 점령하고 수비대와 아테나이 인의 지배자를 남겼다. 이어 그들은 코린토스에 가서 의회 의원들에게 자신들이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페르시아 왕을 알현하도록 요청했다. </p><p>그 후, 파르나바조스는 상당한 자금과 함대의 대부분과 함께 코논을 아티카로 보냈다. 그곳에서 코논은 그 돈으로 고용한 일꾼과 함대 선원으로 아테나이에서 피레우스에 이르는 장성 재건에 착수하였고, 이내 끝냈다. 아테네는 그 즉시 함대를 스슈로스, 임브로스, 렘노스 섬을 점령하는데 이용하였고 클레르코스(시민거주지)를 그곳에 설립했다. </p><p>그즈음 코린토스에서 민주파와 과두파의 충돌이 일어났고, 아르고스의 협력을 얻은 민주파는 과두파를 추방했다. 이 추방자들은 스파르타에 들어간 뒤 시키온을 거점으로 했다. 그 후, 스파르타 군과 추방자들은 야습을 감행하여 코린토스 만 코린토스의 항구였던 레카이온을 탈취했다. 이에 대해 반 스파르타 동맹은 레카이온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p> <h2><span></span><span>기원전 392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기원전 392년</a>, 스파르타는 <a>사르디스</a>의 태수 <a>티리바조스</a>에게 <a>안탈키다스</a>를 사절로 파견했다. 그는 <a>코논</a>이 페르시아 함대를 아테나이 패권 재건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 것을 알리고, 이를 통해 페르시아의 동맹 측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아테네는 이것을 알고, 페르시아에게 자신들의 의혹을 풀기 위해 코논 외 다른 몇 명을 파견했고, <a>아르고스</a>, <a>코린토스</a>, <a>테바이</a>에 같은 내용을 통지하여 그 나라도 티리바조스에게 사절을 파견하게 했다. 페르시아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스파르타 측은 모든 국가의 독립에 근거한 평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아테네는 에게 해에서 구축한 세력의 유지하길 원했으며, 보이오티아 연합의 지배권 유지를 원하는 테바이와 코린트의 흡수를 노리고 있었던 아르고스 등의 동맹 쪽에서 거절당하자 강화 회의는 결렬되었다. 이때 코콘의 행동에 경계심을 품은 티리바조스는 그를 구속하고, 몰래 안탈키다스에 함대 건설을 위한 자금을 제공했다. </p><p>같은 해에 다시 스파르타에서 강화 회의가 다시 열렸지만, 또 다시 결렬되었다. </p><p>티리바조스는 일련의 전말 보고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지침을 받기 위해 왕이 있는 수사에 가야했지만, 소아시아 연안 지방의 임무 때문에 스토르타스를 보내졌다. 스파르타는 스토르타스가 친 아테네적이며, 반 스파르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간파하고, 장군 티뷰론을 소아시아에 파견했다. 그는 소아시아를 휩쓸었지만, 방심한 그가 소부대로 약탈에 나선 것을 발견한 스토르타스는 다수의 기병으로 적을 묶어두고 티뷰론을 전사시켰다. 그 뒤 그의 후임으로 티프리다스가 보내졌다. 티프리다스는 스토르타스의 사위를 붙잡아 그의 신병에 대한 대가로 몸값을 받았지만, 극적인 결과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p><p>또한 <a>크니도스 해전</a>에서의 패배 후, 스파르타는 함대 재건을 시작하여 코린토스와의 전투 끝에 <a>기원전 392년</a> 경에는 <a>코린토스 만</a>의 제해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의 화의에 실패한 후, 스파르타는 에크디코스 휘하의 소함대로 <a>로도스</a>에서 망명한 과두파를 지원하기 위해 <a>에게 해</a>로 보냈지만, 정권을 잡고 있는 로도스의 민주파가 그들보다 많은 함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크니도스에서 자군의 증원을 기다렸다. 그리고 스파르타의 텔레우티아스가 이끄는 함대를 보내자 그는 사모스에서 함대를 확충하고, 크니도스의 에크디코스과 합류하여 대 로도스 작전을 지휘했다. </p><p>이러한 스파르타 함대의 부활을 경계했던 아테네는 40척의 함대를 <a>트라쉬불로스</a>와 함께 파견했다. 그는 헬레스폰투스로 향하는 인접한 주요 도시들을 아테네 측에서 설득하여 비잔티움을 지나가는 배에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따라 아테네는 <a>펠로폰네소스 전쟁</a> 패전으로 잃은 세입(동맹 도시에서 공납하는)을 대신하여 얻을 수 있었다. 이어 그는 레스보스 섬으로 가서 뮤티레네의 협력을 얻어 섬의 스파르타 군을 물리치고, 도시들을 친 아테네 세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소아시아의 <a>아스펜도스</a>에서 침공을 받아 트라쉬불로스는 전사했다. </p><p>이후, 스파르타는 새로 아나크시비오스를 케르소네소스 반도(오늘날의 터키 겔리볼루 반도)의 아뷔도스로 보냈다. 그는 파르나바조스에게 많은 승리를 거두며, 많은 아테네 상선을 노획했다. 이에 따라 트라쉬불로스의 성과가 약화되는 것을 걱정한 아테네는 <a>이피크라테스</a>를 그곳에 파견했다. 한동안 양군은 서로의 영지를 습격하기만 했지만, 이피크라테스는 안탄도로스 원정에서 아나크시비오스의 기로를 예측하고 매복을 했다. 이피크라테스의 판단은 적중하여 그의 군대는 진군해 오던 아나크시비오스 군에 매복 공격을 가해 아나크시비오스를 포함한 다수를 살해했다. </p> <h2><span></span><span>기원전 391년에서 388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기원전 391년</a>, 아게실라오스는 레카이온 근처 지역에 원정을 떠나, 방비가 강화된 지점과 대량의 포로와 약탈품을 얻었다. 그러나 아게실라오스는 전리품 매각을 준비하는 동안 <a>이피크라테스</a>가 대부분 경장보병과 투창병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레카이온에 가서 그곳에 배치되어 있던 스파르타 군대를 물리쳤다. 이 <a>레카이온 전투</a>에서 아테네 경갑부대는 스파르타의 <a>호플리테스</a>를 치고, 빠지는 전법으로 전력을 줄이며, 괴멸시켰다. 그 후, 그는 스파르타가 차지했던 많은 요지들을 탈환하고 <a>플리우스</a>와 <a>아르카디아</a>에 원정을 가 있던 플리우스 인들을 물리치고 아르카디아를 약탈하고 다녔다. </p><p>한편 이후 코린토스에 온 <a>아르고스</a> 군은 아크로폴리스를 점거하고 코린토스를 합병했다. </p><p>이피크라테스의 승리 이후, 코린토스 근교는 주전장에서 벗어났고, 펠로폰네소스와 그리스 동북부에서의 전투가 주가 되었다. <a>기원전 391년</a>에 아게실라오스가 아르고스에 원정을 떠난데 이어 <a>기원전 389년</a>에 반 스파르타 연합 동맹국이었던 <a>아카루나니아</a>에도 원정했다. 아카루나니아 인은 교전을 피하기는 했지만 아게실라오스 의해 전투에 끌려들었다. 아카루나니아 인은 아게실라오스에게 패해 많은 병사를 잃었다. 그 후, 아게실라오스는 본국에 돌아갔고, 아카루나니아는 이듬해 스파르타와 강화를 했다. </p><p>같은 해 아테네는 <a>에기나</a>를 공격했고, 스파르타는 아테네 함대를 몰아내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후 아테네 군은 몇 달 후 에기나에서 빠져나갔다. 또한 <a>안탈키다스</a>가 이끄는 스파르타 함대가 <a>로도스</a>에 가려고 했지만 <a>아뷔도스</a>에서 아테네 군에 길이 막혔다. </p><p>에기나에서 아테네 군의 철수 직후에 <a>고르고파스</a>가 이끄는 스파르타 함대가 아테네 근해에서 아테네 함대에 매복 공격을 가해 많은 선박을 노획했다. 이에 대해 아테네는 같은 방법으로 보복을 가했다. 즉 <a>키프로스</a>로 행하는 길목에서 아테네 장군 <a>카브리아스</a>가 에기나 섬에 병력을 상륙시켜 그곳에 있던 에기나 군과 스파르타 동맹군에 매복 공격을 가하여 고르고파스 등 많은 이들을 살상했다. 그래서 스파르타 함대의 지휘관으로 <a>텔레우티아스</a>를 에기나에 파견시켰다. 그는 아테네가 카브리아스의 승리 후 수비를 느슨하게 한 것을 알고 피레우스를 습격해 많은 상선을 노획했다. </p><p><a>기원전 388년</a>, 아게실라오스와 공동으로 통치를 했던 <a>아게시폴리스 1세</a>가 스파르타 군대를 이끌고 <a>아르고스</a>를 침공, 시골 지역을 약탈했지만 불길한 전조가 있었기 때문에 귀국했다. </p> <h2><span></span><span>기원전 387년&#160;: 안탈키다스 평화조약</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img> <a>안탈키다스 평화조약</a> 문서를 참고하십시오.</div> <p>안탈키다스는 티리바조스와의 협상에 들어가 만약 동맹 측이 평화협상을 거부할 경우 페르시아가 스파르타 측에 참전한다는 합의를 얻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페르시아는 페르시아에 반기를 든 <a>키프로스</a>의 <a>에바고라스 1세</a>와 <a>이집트</a> <a>아코리스</a> 왕에 대한 원조를 포함한 아테네의 행동에 질려있었기 때문에 아테네를 도움으로써 스파르타를 약화시키겠는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p><p>그 후, 안탈키다스는 아뷔도스의 봉쇄를 깨고 <a>시라쿠사</a>에서 원군과 자신의 함대를 연합하여 헬레스폰투스에 가서 아테네로 가는 곡물 수송 항로를 차단하고 아테네가 강화를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넣었다. 그리고 티리바조스는 <a>기원전 387년</a>에 화의를 주장했으며, 각국은 이에 따라 같은 해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p><p>조약의 기본 요지가 <a>페르시아 제국</a>의 황제 <a>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a>의 법령에 의하여 발부되었기 때문에 ‘대왕의 화평’이라고도 불린다. 그 요지에는 페르시아가 그리스의 도시를 포함한 <a>소아시아</a>를 영유하고 아테나이에 속해야 하는 <a>렘노스</a>, <a>브로스</a>, <a>키프로스</a>를 제외하고 그렇지 않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모두 독립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나라에 페르시아가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억제책도 있었다. </p> <h2><span></span><span>영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평화협정에 서명한 다음 몇 년 동안, 체제 유지에 책임을 가진 두 나라였던 페르시아와 스파르타는 이 조약으로 쌓아 올린 것을 최대한 이용했다. 페르시아는 다시금 그리스 측의 아시아 간섭에서 해방되어 <a>에게 해</a> 동부의 지배를 굳건히 했고, <a>기원전 380년</a>, 반란을 일으킨 <a>이집트</a>와 <a>키프로스</a>를 다시 점령했다. 또한 <a>이오니아</a>의 그리스인들은 <a>기원전 5세기</a> 최초로 반란을 일으킨 이후 페르시아의 자유와 자치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평화조약으로 인해 페르시아에 의한 이오니아를 포함한 <a>소아시아</a>의 지배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자유와 자치를 목표로 무언가를 시도할 수는 없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은 본토 그리스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다. 이후 <a>알렉산더 3세 대왕</a>이 이곳을 정복할 때까지 페르시아는 소아시아를 계속 지배하게 되었다. </p><p>스파르타는 위협 세력이었던 동맹을 해체한다는 평화조약의 조항을 활용해 그리스 패권을 주창했다. 스파르타는 테바이의 세력 하에 있던 보이오티아의 도시를 독립시키라고 압박하고, <a>아르고스</a>와 <a>코린토스</a>를 분리시켜 코린토스를 <a>펠로폰네소스 동맹</a>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곧 테바이와의 대립으로 <a>보이오티아 전쟁</a>이 일어나 <a>기원전 371년</a>, 〈<a>레욱트라 전투</a>〉에서 패배를 당하며 그리스에서의 패권을 상실했다. </p><p>한편 기원전 4세기 중반, <a>펠로폰네소스 전쟁</a>의 패전 이후 2등 국가로 위신이 추락한 아테네는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리스의 강국의 지위를 되찾고 ‘<a>제2의 아테네 제국</a>’이라는 <a>에게 해</a> 국가 동맹체를 결성하고 <a>기원전 404년</a> 패전으로 상실한 세력의 일부를 회복했다.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Fine, <i>The Ancient Greeks</i>, 546–7</span> </li> </ol></div></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코린토스_전쟁&amp;oldid=23436319</a>"</div> <div><div><a>분류</a>: <ul><li><a>고대 그리스의 전쟁</a></li><li><a>아테네의 전쟁</a></li><li><a>스파르타의 전쟁</a></li><li><a>코린토스의 전쟁</a></li><li><a>테베의 전쟁</a></li><li><a>아르고스의 전쟁</a></li><li><a>아케메네스 제국의 전쟁</a></li><li><a>스파르타 패권</a></li><li><a>기원전 4세기 분쟁</a></li><li><a>코린토스 전쟁</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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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콘의 행동에 경계심을 품고 구속한 사람은?
티리바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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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콘의 행동에 경계심을 품고 구속한 사람은?", "스파르타가 모든 국가의 독립에 근거한 평화를 주장한 회의는 어디에서 개최되었나?", "기원전 392년 스파르타가 사르디스에 사절로 보낸 이는 누구인가?", "스파르타가 모든 나라의 평화로운 독립을 주장했던건 어디서 개최한 회의에서 였는가?", "페르시아가 이집트와 키프로스를 다시 점령한 해는?", "알렉산더 3세 대왕이 정복하기 전까지 소아시아를 지배하던 나라는?",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이 최초로 반란을 일으킨 것은 언제인가?", "기원전 380년 이집트와 키브로스를 재점령한 국가는 어디인가?", "알렉산더 3세가 지배하기 전까지 페르시아가 군림하였던 이 곳은 어디인가?" ]
<!DOCTYPE html> 코린토스 전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코린토스 전쟁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코린토스 전쟁</th></tr><tr><td colspan="2">전투에 임하는 호플리테스(중장보병)</td></tr><tr><td colspan="2"><table><tbody><tr><th>날짜</th><td>기원전 395년–기원전 387년</td></tr><tr><th>장소</th><td>그리스 본토</td></tr><tr><th>결과</th><td> 안탈키다스 평화조약 (페르시아 제국 주도로)</td></tr></tbody></table></td></tr><tr><th colspan="2">교전국</th></tr><tr><td> 스파르타펠로폰네소스 동맹</td><td> 아테나이아르고스코린토스테바이페르시아 제국기타 동맹</td></tr><tr><th colspan="2">지휘관</th></tr><tr><td> 아게실라오스 2세리산드로스텔레우티아스페이산드로스 등</td><td> 이피크라테스카브리아스코논 등</td></tr></tbody></table><table><tbody><tr><th colspan="2">vdeh코린토스 전쟁</th></tr><tr><td colspan="2"> 할리아르토스 네메아 크니도스 코로네이아 레카이온 </td></tr></tbody></table> 코린토스 전쟁(Κορινθιακός Πόλεμος, 기원전 395년 - 기원전 387년)은 아테네, 아르고스, 코린토스, 테바이와 기타 반 스파르타 동맹과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펠로폰네소스 동맹)들과의 전쟁이다. 목차 1 개요 2 원인 3 기원전 395년 4 기원전 394년 4.1 네메아 4.2 크니도스 4.3 코로네이아 5 기원전 393년 6 기원전 392년 7 기원전 391년에서 388년 8 기원전 387년 : 안탈키다스 평화조약 9 영향 10 각주 개요[편집]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게실라오스 2세의 소아시아 원정에 대항해 그리스 본토에서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페르시아 제국 아케메네스 왕조가 그들의 시선을 그리스로 집중시키려한 것이다. 테바이와 스파르타가 개입하며 그리스 북서 지방의 대립이 되었으며, 잠재적인 원인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아테네를 그리스의 패자의 자리에서 끌어 내리고, 세력 확대를 꾀한 스파르타에 대한 다른 도시 국가의 경계심과 적개심이었다. 전쟁은 육지에서는 코린토스에서 테바이 부근까지, 바다에서는 에게 해에서 치러졌다. 스파르타는 육지에서의 주요 대규모 작전은 대체로 승리를 거뒀지만, 바다에서는 페르시아의 도움으로 적에게 참패했다. 이 승리를 거둔 아테네는 일부 해군이 원정을 하였고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제국’의 대부분을 회복했다. 이 아테네의 성공과 세력 확장을 경계한 페르시아는 노선을 변경하여 스파르타 편을 들었다. 대제국의 배신에 대항하여 반 스파르타 동맹은 평화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하였고, 기원전 387년에 체결된 〈안탈키다스 평화조약〉(대왕의 화평)을 맺으며 전쟁은 끝났다. 이 조약에서 페르시아는 이오니아 전역의 지배권을 확립하였고, 또한 스파르타의 패권이 확립되었다. 원인[편집] 고대 그리스 본토 기원전 404년, 아테네의 무조건 항복으로 끝난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스파르타는 다른 그리스 국가들과 페르시아의 협력을 얻으면서 에게 해의 여러 섬을 지배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패전국이나 아테네의 옛 속국들로부터 공물을 요구했고, 전시에 스파르타에 대한 적대행위를 한 엘리스를 기원전 402년에 공격했기 때문에 코린토스와 테바이가 엘리스 공격전에 스파르타에 원군을 보내는 것을 거부하는 등 동맹국들 사이에서 스파르타의 지지율은 떨어졌다. 스파르타의 왕 아게실라오스 2세가 통치했던 스파르타는 기원전 399년에 소아시아 원정을 벌임으로서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협력자였던 페르시아와 결별했다. 이 원정에서 테바이, 코린토스, 아테네는 참여를 거부했지만, 아게실라오스는 소아시아의 태수들을 상대로 우세한 전투를 벌였으며, 후퇴 직전에는 페르시아 황제에게 진군할 계획조차 세웠다. 아게실라오스과 싸웠던 프리기아의 사트라프(태수) 파르나바조스는 그리스 본토에서 전쟁을 유발하여 아게실라오스를 철수시키려 로도스 출신의 티모크라테스에게 자금을 주어 그리스로 파견했다. 아테네, 테바이, 코린토스, 아르고스를 방문한 티모크라테스는 그 나라에서 대 스파르타 전쟁을 일으킬 것을 설득하였고, 스파르타에 대해 반감을 품고 있었던 그 도시 국가들은 설득에 넘어와 티모크라테스의 공작은 성공을 거두었다. 기원전 395년[편집] 테바이는 스파르타에 직접 도전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에 동맹국인 로크리스에게 로크리스와 포키스 모두의 영지에서 세금을 거두라고 권유함으로써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다. 그 결과 포키스가 로크리스를 침공하였고, 로크리스가 테바이에 원군을 요청하자 테바이는 포키스를 침공했다. 그리고 포키스의 원군 요청을 받은 스파르타는 테바이를 징계한다는 명목으로 병력을 동원했다. 또한 테바이는 사절을 아테네에 파견하였고, 테바이를 돕고자 아테네는 테바이를 포함한 보이오티아 연합과 동맹을 체결했다. 스파르타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제독으로 활약한 리산드로스와 파우사니아스 왕이 이끄는 두 군대를 각각 파견해 보이오티아의 도시 할리아르토스에서 만나 공격하기로 계획을 세웠다. 파우사니아스보다 먼저 도착한 리산드로스는 오르코메노스에 보이오티아 연합에 반기를 들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하였고, 오르코메노스 군과 함께 할리아르토스로 향했지만, 할리아르토스 전투에서 패배를 당해 죽음을 맞았다. 며칠 후 도착한 파우사니아스는 협정을 맺고 전사자의 시신을 거둔 후 스파르타로 발길을 돌렸다. 도착이 늦어져 리산드로스를 죽게 한 파우사니아스는 재판에 회부당했고, 유죄 판결이 내려지기 전에 테게아로 망명했다. 기원전 395년 말에 코린토스와 아테네가 대 스파르타 전쟁에 참전하였고, 그들은 다른 수많은 소국에 사절을 보내 지지를 호소했다. 이러한 움직임에 놀란 스파르타는 새 동맹국에 군사를 보내 응징할 준비를 하였고, 소아시아에 원정을 떠나 있던 아게실라오스에게 특사를 파견해 그리스로 돌아오라는 명을 내렸다. 아게실라오스는 헬레스폰투스를 건너 트라키아를 통해서 육로로 귀국하려고 했다. 기원전 394년[편집] 에게 해로 분리된 고대 그리스와 소아시아 네메아[편집] 테바이의 승리로 테바이와 포키스가 휴전을 한 후 대 스파르타 동맹은 24,000명의 대군을 집결시키고, 반면 스파르타도 18,000명의 군대를 파견했다. 양군은 코린토스의 네메아에서 회전을 벌였고, 〈네메아 전투〉는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다. 크니도스[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크니도스 해전입니다. 한편 바다에서는 양 진영이 각각 함대를 편성하였고, 아게실라오스는 예하의 에게 해 국가의 함선을 집결시켜 120척의 함대를 편성하고, 함대의 지휘권을 함대 경험이 없었던 처남 페이산도로스에게 지휘권을 주었다. 한편 페르시아, 아테네 연합 함대는 파르나바조스와 경험이 풍부한 아테네 장군들에게 지휘권을 갖게 했다. 그리고 두 함대는 기원전 394년 크니도스 근해에서 충돌하였고, 스파르타는 분전했지만 스파르타 함대의 대패로 〈크니도스 해전〉이 끝났다. 이 패배로 스파르타는 해상에서 퇴출되었다. 이 승리 이후 파르나바조스는 이오니아 해안을 따라 여러 도시에서 스파르타 인이 지배자하고 있던 주둔군을 추방했지만, 데르킬리타스가 지휘하고 있던 아비도스와 세스토스에서는 실패했다.[1] 코로네이아[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코로네이아 전투 (기원전 394년)입니다. 이 시기, 아게실라오스 군은 테살리아에서 싹쓸이 약탈을 한 이후에, 진군을 계속에 보이오티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들은 테바이, 아르고스 등 여러 반 스파르타 동맹국에서 모은 병력과 조우했다. 이곳에서 〈코로네이아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아게실라오스는 다시 승리를 거두었고, 코린토스 만을 건너 스파르타로 귀국했다. 기원전 393년[편집] 기원전 394년, 스파르타의 전황은 육지에서는 우세하게 싸웠지만, 바다에서는 열세에 놓여 있었다. 이후 몇 년 동안 스파르타는 코린트와 아르고스를 동맹에서 동맹에서 몰아내려고 공격을 가했다. 한편, 아테네와 테바이는 그 틈을 그들이 전통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지역에서의 영향력 강화에 이용했다. 기원전 393년, 코논과 파르나바조스는 함선에서 그리스 본토를 향해 라코니아 연안을 강습하여 큐테라 섬을 점령하고 수비대와 아테나이 인의 지배자를 남겼다. 이어 그들은 코린토스에 가서 의회 의원들에게 자신들이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페르시아 왕을 알현하도록 요청했다. 그 후, 파르나바조스는 상당한 자금과 함대의 대부분과 함께 코논을 아티카로 보냈다. 그곳에서 코논은 그 돈으로 고용한 일꾼과 함대 선원으로 아테나이에서 피레우스에 이르는 장성 재건에 착수하였고, 이내 끝냈다. 아테네는 그 즉시 함대를 스슈로스, 임브로스, 렘노스 섬을 점령하는데 이용하였고 클레르코스(시민거주지)를 그곳에 설립했다. 그즈음 코린토스에서 민주파와 과두파의 충돌이 일어났고, 아르고스의 협력을 얻은 민주파는 과두파를 추방했다. 이 추방자들은 스파르타에 들어간 뒤 시키온을 거점으로 했다. 그 후, 스파르타 군과 추방자들은 야습을 감행하여 코린토스 만 코린토스의 항구였던 레카이온을 탈취했다. 이에 대해 반 스파르타 동맹은 레카이온 탈환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기원전 392년[편집] 기원전 392년, 스파르타는 사르디스의 태수 티리바조스에게 안탈키다스를 사절로 파견했다. 그는 코논이 페르시아 함대를 아테나이 패권 재건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 것을 알리고, 이를 통해 페르시아의 동맹 측에 대한 태도를 변화시키기 위함이었다. 아테네는 이것을 알고, 페르시아에게 자신들의 의혹을 풀기 위해 코논 외 다른 몇 명을 파견했고, 아르고스, 코린토스, 테바이에 같은 내용을 통지하여 그 나라도 티리바조스에게 사절을 파견하게 했다. 페르시아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스파르타 측은 모든 국가의 독립에 근거한 평화를 주장했다. 그러나 아테네는 에게 해에서 구축한 세력의 유지하길 원했으며, 보이오티아 연합의 지배권 유지를 원하는 테바이와 코린트의 흡수를 노리고 있었던 아르고스 등의 동맹 쪽에서 거절당하자 강화 회의는 결렬되었다. 이때 코콘의 행동에 경계심을 품은 티리바조스는 그를 구속하고, 몰래 안탈키다스에 함대 건설을 위한 자금을 제공했다. 같은 해에 다시 스파르타에서 강화 회의가 다시 열렸지만, 또 다시 결렬되었다. 티리바조스는 일련의 전말 보고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지침을 받기 위해 왕이 있는 수사에 가야했지만, 소아시아 연안 지방의 임무 때문에 스토르타스를 보내졌다. 스파르타는 스토르타스가 친 아테네적이며, 반 스파르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을 간파하고, 장군 티뷰론을 소아시아에 파견했다. 그는 소아시아를 휩쓸었지만, 방심한 그가 소부대로 약탈에 나선 것을 발견한 스토르타스는 다수의 기병으로 적을 묶어두고 티뷰론을 전사시켰다. 그 뒤 그의 후임으로 티프리다스가 보내졌다. 티프리다스는 스토르타스의 사위를 붙잡아 그의 신병에 대한 대가로 몸값을 받았지만, 극적인 결과를 얻어내지는 못했다. 또한 크니도스 해전에서의 패배 후, 스파르타는 함대 재건을 시작하여 코린토스와의 전투 끝에 기원전 392년 경에는 코린토스 만의 제해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의 화의에 실패한 후, 스파르타는 에크디코스 휘하의 소함대로 로도스에서 망명한 과두파를 지원하기 위해 에게 해로 보냈지만, 정권을 잡고 있는 로도스의 민주파가 그들보다 많은 함대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크니도스에서 자군의 증원을 기다렸다. 그리고 스파르타의 텔레우티아스가 이끄는 함대를 보내자 그는 사모스에서 함대를 확충하고, 크니도스의 에크디코스과 합류하여 대 로도스 작전을 지휘했다. 이러한 스파르타 함대의 부활을 경계했던 아테네는 40척의 함대를 트라쉬불로스와 함께 파견했다. 그는 헬레스폰투스로 향하는 인접한 주요 도시들을 아테네 측에서 설득하여 비잔티움을 지나가는 배에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따라 아테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패전으로 잃은 세입(동맹 도시에서 공납하는)을 대신하여 얻을 수 있었다. 이어 그는 레스보스 섬으로 가서 뮤티레네의 협력을 얻어 섬의 스파르타 군을 물리치고, 도시들을 친 아테네 세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소아시아의 아스펜도스에서 침공을 받아 트라쉬불로스는 전사했다. 이후, 스파르타는 새로 아나크시비오스를 케르소네소스 반도(오늘날의 터키 겔리볼루 반도)의 아뷔도스로 보냈다. 그는 파르나바조스에게 많은 승리를 거두며, 많은 아테네 상선을 노획했다. 이에 따라 트라쉬불로스의 성과가 약화되는 것을 걱정한 아테네는 이피크라테스를 그곳에 파견했다. 한동안 양군은 서로의 영지를 습격하기만 했지만, 이피크라테스는 안탄도로스 원정에서 아나크시비오스의 기로를 예측하고 매복을 했다. 이피크라테스의 판단은 적중하여 그의 군대는 진군해 오던 아나크시비오스 군에 매복 공격을 가해 아나크시비오스를 포함한 다수를 살해했다. 기원전 391년에서 388년[편집] 기원전 391년, 아게실라오스는 레카이온 근처 지역에 원정을 떠나, 방비가 강화된 지점과 대량의 포로와 약탈품을 얻었다. 그러나 아게실라오스는 전리품 매각을 준비하는 동안 이피크라테스가 대부분 경장보병과 투창병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레카이온에 가서 그곳에 배치되어 있던 스파르타 군대를 물리쳤다. 이 레카이온 전투에서 아테네 경갑부대는 스파르타의 호플리테스를 치고, 빠지는 전법으로 전력을 줄이며, 괴멸시켰다. 그 후, 그는 스파르타가 차지했던 많은 요지들을 탈환하고 플리우스와 아르카디아에 원정을 가 있던 플리우스 인들을 물리치고 아르카디아를 약탈하고 다녔다. 한편 이후 코린토스에 온 아르고스 군은 아크로폴리스를 점거하고 코린토스를 합병했다. 이피크라테스의 승리 이후, 코린토스 근교는 주전장에서 벗어났고, 펠로폰네소스와 그리스 동북부에서의 전투가 주가 되었다. 기원전 391년에 아게실라오스가 아르고스에 원정을 떠난데 이어 기원전 389년에 반 스파르타 연합 동맹국이었던 아카루나니아에도 원정했다. 아카루나니아 인은 교전을 피하기는 했지만 아게실라오스 의해 전투에 끌려들었다. 아카루나니아 인은 아게실라오스에게 패해 많은 병사를 잃었다. 그 후, 아게실라오스는 본국에 돌아갔고, 아카루나니아는 이듬해 스파르타와 강화를 했다. 같은 해 아테네는 에기나를 공격했고, 스파르타는 아테네 함대를 몰아내려 했지만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 후 아테네 군은 몇 달 후 에기나에서 빠져나갔다. 또한 안탈키다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함대가 로도스에 가려고 했지만 아뷔도스에서 아테네 군에 길이 막혔다. 에기나에서 아테네 군의 철수 직후에 고르고파스가 이끄는 스파르타 함대가 아테네 근해에서 아테네 함대에 매복 공격을 가해 많은 선박을 노획했다. 이에 대해 아테네는 같은 방법으로 보복을 가했다. 즉 키프로스로 행하는 길목에서 아테네 장군 카브리아스가 에기나 섬에 병력을 상륙시켜 그곳에 있던 에기나 군과 스파르타 동맹군에 매복 공격을 가하여 고르고파스 등 많은 이들을 살상했다. 그래서 스파르타 함대의 지휘관으로 텔레우티아스를 에기나에 파견시켰다. 그는 아테네가 카브리아스의 승리 후 수비를 느슨하게 한 것을 알고 피레우스를 습격해 많은 상선을 노획했다. 기원전 388년, 아게실라오스와 공동으로 통치를 했던 아게시폴리스 1세가 스파르타 군대를 이끌고 아르고스를 침공, 시골 지역을 약탈했지만 불길한 전조가 있었기 때문에 귀국했다. 기원전 387년 : 안탈키다스 평화조약[편집] 안탈키다스 평화조약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안탈키다스는 티리바조스와의 협상에 들어가 만약 동맹 측이 평화협상을 거부할 경우 페르시아가 스파르타 측에 참전한다는 합의를 얻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페르시아는 페르시아에 반기를 든 키프로스의 에바고라스 1세와 이집트 아코리스 왕에 대한 원조를 포함한 아테네의 행동에 질려있었기 때문에 아테네를 도움으로써 스파르타를 약화시키겠는 전략이 더 이상 통하지 않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후, 안탈키다스는 아뷔도스의 봉쇄를 깨고 시라쿠사에서 원군과 자신의 함대를 연합하여 헬레스폰투스에 가서 아테네로 가는 곡물 수송 항로를 차단하고 아테네가 강화를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넣었다. 그리고 티리바조스는 기원전 387년에 화의를 주장했으며, 각국은 이에 따라 같은 해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의 기본 요지가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의 법령에 의하여 발부되었기 때문에 ‘대왕의 화평’이라고도 불린다. 그 요지에는 페르시아가 그리스의 도시를 포함한 소아시아를 영유하고 아테나이에 속해야 하는 렘노스, 브로스, 키프로스를 제외하고 그렇지 않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은 모두 독립을 지킨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나라에 페르시아가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억제책도 있었다. 영향[편집] 평화협정에 서명한 다음 몇 년 동안, 체제 유지에 책임을 가진 두 나라였던 페르시아와 스파르타는 이 조약으로 쌓아 올린 것을 최대한 이용했다. 페르시아는 다시금 그리스 측의 아시아 간섭에서 해방되어 에게 해 동부의 지배를 굳건히 했고, 기원전 380년, 반란을 일으킨 이집트와 키프로스를 다시 점령했다. 또한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5세기 최초로 반란을 일으킨 이후 페르시아의 자유와 자치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평화조약으로 인해 페르시아에 의한 이오니아를 포함한 소아시아의 지배가 확정되었기 때문에 자유와 자치를 목표로 무언가를 시도할 수는 없게 되었다. 말하자면 이오니아의 그리스인들은 본토 그리스인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다. 이후 알렉산더 3세 대왕이 이곳을 정복할 때까지 페르시아는 소아시아를 계속 지배하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위협 세력이었던 동맹을 해체한다는 평화조약의 조항을 활용해 그리스 패권을 주창했다. 스파르타는 테바이의 세력 하에 있던 보이오티아의 도시를 독립시키라고 압박하고, 아르고스와 코린토스를 분리시켜 코린토스를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복귀시켰다. 그러나 곧 테바이와의 대립으로 보이오티아 전쟁이 일어나 기원전 371년, 〈레욱트라 전투〉에서 패배를 당하며 그리스에서의 패권을 상실했다. 한편 기원전 4세기 중반,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패전 이후 2등 국가로 위신이 추락한 아테네는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그리스의 강국의 지위를 되찾고 ‘제2의 아테네 제국’이라는 에게 해 국가 동맹체를 결성하고 기원전 404년 패전으로 상실한 세력의 일부를 회복했다. 각주[편집] ↑ Fine, The Ancient Greeks, 546–7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코린토스_전쟁&amp;oldid=23436319" 분류: 고대 그리스의 전쟁아테네의 전쟁스파르타의 전쟁코린토스의 전쟁테베의 전쟁아르고스의 전쟁아케메네스 제국의 전쟁스파르타 패권기원전 4세기 분쟁코린토스 전쟁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lemannischالعربيةتۆرکجهБългарскиCatalà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فارسیSuomiFrançaisעבריתHrvatskiՀայերենItaliano日本語ქართულიLatinaNederlandsNorskOccitanPolskiPortuguêsРусский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SlovenčinaСрпски / srpskiSvenskaУкраїнськаاردو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1월 8일 (화) 15:17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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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린토스 전쟁 요약 **핵심 주장**: 코린토스 전쟁은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 그리고 아테네, 아르고스, 코린토스, 테바이 등 반 스파르타 동맹 간의 전쟁으로, 페르시아 제국의 개입과 함께 그리스의 정치적 지형을 변화시킨 사건이다. 전쟁은 스파르타의 패권을 강화하려는 시도와 이에 대한 다른 도시 국가들의 반발로 촉발되었으며, 결국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 **1. 개요** 코린토스 전쟁은 기원전 395년부터 387년까지 진행된 전쟁으로, 아테네와 그 동맹국들이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에 맞서 싸운 사건이다. 전쟁의 배경에는 스파르타의 세력 확대와 페르시아의 개입이 있었다. 스파르타는 육상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해상에서는 패배를 경험했다. 전쟁은 결국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으로 종료되었고, 이 조약은 페르시아의 지배권을 확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2. 원인**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패권을 쥐었으나, 다른 도시 국가들은 스파르타의 지배에 반감을 품고 있었다. 아게실라오스 2세의 소아시아 원정이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고, 페르시아의 지원을 받은 반 스파르타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스파르타의 세력 확장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켰다. **3. 기원전 395년** 전쟁의 시작은 테바이가 스파르타에 도전하면서 촉발되었다. 스파르타는 동맹국을 동원하여 테바이를 공격하였고, 아테네는 테바이를 지원하기 위해 동맹을 체결했다. 스파르타는 초기 전투에서 패배를 겪었고, 아게실라오스는 그리스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4. 기원전 394년** 전투가 계속되면서 스파르타는 네메아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해상에서는 크니도스 해전에서 패배하여 해상 지배권을 잃었다. 이후 코로네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가 다시 승리하였으나, 전반적인 전황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5. 기원전 393년** 스파르타는 코린토스와 아르고스를 공격하며 동맹국을 분리하려 했고, 아테네와 테바이는 이를 기회로 삼아 세력을 확장했다. 이 시기에 코논과 파르나바조스는 아테네의 해군을 재건하고, 코린토스에서 민주파가 과두파를 추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6. 기원전 392년** 스파르타는 해군을 재건하고 코린토스 만의 제해권을 회복하려 했으나, 아테네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군사 작전을 강화했다. 이 시기에 스파르타와 아테네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7. 기원전 391년에서 388년** 아게실라오스는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나, 아테네의 이피크라테스가 스파르타 군대를 물리치는 등 전투의 양상이 복잡해졌다. 이 시기에 아테네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8. 기원전 387년: 안탈키다스 평화조약** 전쟁은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조약은 페르시아의 개입을 통해 체결되었으며,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독립을 보장하는 대신 페르시아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스파르타는 패권을 유지했으나, 그리스의 정치적 상황은 크게 변화하게 되었다. **9. 영향** 안탈키다스 평화조약은 페르시아와 스파르타의 지배를 강화했으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독립을 잃게 되었다. 스파르타는 일시적으로 패권을 유지했으나, 이후 테바이와의 전투에서 패배하며 그리스에서의 지배력을 상실하게 된다. 아테네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다음 글의 핵심 주장과 근거를 중심으로 요약해줘. 단락별로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도 함께 정리해줘. 문장 길이는 너무 짧지 않게 하고, 원문의 흐름은 유지해줘.
아레스_온라인
https://ko.wikipedia.org/wiki/아레스_온라인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아레스 온라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아레스 온라인</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caption>아레스 온라인<br></caption><tbody><tr><th><a>개발사</a></th> <td> (주)<a>KRG소프트</a></td></tr><tr><th>배급사</th> <td> (주)<a>엠게임</a></td></tr> <tr><th>플랫폼</th> <td> 윈도 98SE/2000/xp 이상</td></tr><tr><th>출시일</th> <td> 2003.12.02</td></tr><tr><th><a>장르</a></th> <td> MMORPG</td></tr><tr><th>모드</th> <td> 멀티</td></tr><tr><th>언어</th> <td> 한국어</td></tr><tr><th>입력장치</th> <td> 키보드, 마우스</td></tr> </tbody></table> <p><b>아레스온라인</b>은 (주)<a>KRG SOFT</a>에서 개발하고 <a>엠게임</a>에서 서비스하는 <a>MMORPG</a> 게임이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역사</span></a></li> <li><a><span>2</span> <span>시놉시스</span></a> <ul> <li><a><span>2.1</span> <span>프롤로그</span></a></li> <li><a><span>2.2</span> <span>특징</span></a></li> </ul> </li> <li><a><span>3</span> <span>캐릭터</span></a> <ul> <li><a><span>3.1</span> <span>궁술사</span></a></li> <li><a><span>3.2</span> <span>마도사</span></a></li> </ul> </li> <li><a><span>4</span> <span>시스템</span></a> <ul> <li><a><span>4.1</span> <span>인첸트 시스템</span></a></li> <li><a><span>4.2</span> <span>축복 시스템</span></a></li> <li><a><span>4.3</span> <span>연금수 시스템</span></a></li> <li><a><span>4.4</span> <span>가베노르 시스템</span></a></li> </ul> </li> <li><a><span>5</span> <span>전쟁</span></a> <ul> <li><a><span>5.1</span> <span>워페어</span></a></li> <li><a><span>5.2</span> <span>영토전쟁</span></a></li> <li><a><span>5.3</span> <span>길드전</span></a></li> </ul> </li> <li><a><span>6</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역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리펜트 클로즈베타 테스트: <a>2002년</a> <a>8월 19일</a> ~ <a>9월 7일</a></li> <li>리펜트 오픈베타: <a>2003년</a> <a>12월 2일</a></li> <li>아레스로 개명한 리펜트, 1차 클베: <a>2004년</a> <a>5월 28일</a> ~ <a>6월 2일</a></li> <li>아레스 오픈베타: <a>2004년</a> <a>7월 15일</a></li> <li>아레스 상용화 및 리펜트 유저 통합: <a>2004년</a> <a>9월 6일</a></li> <li>정식서비스: 현재</li></ul> <h2><span></span><span>시놉시스</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프롤로그</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 페리클레스력 62년 정월 12일, 기록자 크세노폰 ~ </p><p>몰아치는 폭풍우, 태양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하늘 바닥난 물과 식량, 젖은 옷과 차가운 물보라, 차오르는 바닷물 갑판 위를 살아있는 뱀처럼 몸부림치는 끊어진 로프 선창 깊숙한 곳에서 물을 퍼내는 병사들의 한숨 이미 파랗게 녹슬어버린 채 흔들거리는 청동 갑옷 </p><p>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검은 파도와 하얀 물보라뿐 </p><p>아아, 우리들의 주신이시자 전쟁의 신이시여! 당신이 어여삐 여기시는 것이 오직 전장의 비명과 고함뿐이라는 사실을 잊고, 돈과 평화 앞에 눈이 멀었던 우리를 용서하여 주소서! </p><p>아아, 우리들의 주신이시자 전쟁의 신이시여! 우리들에게 다시금 설 땅을 주신다면, 우리들은 당신에게 바칠 전쟁의 환희와 고통을 위하여 이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칼을 휘두르겠나이다! </p><p>아아, 우리들의 주신이시자 전쟁의 신이시여! </p><p><br> ~ 페리클레스력 62년 정월 13일, 기록자 헤라클레이토스 ~ </p><p>우리들의 지도자이자 형제 크세노폰이, 스스로를 산 제물로써 바친 그날 새벽, 우리들은 유황과 송진 냄새, 그리고 주신의 신탁과 함께 붉게 타오르는 대지를 발견했다. </p><p>"나에게 목숨을 맹세한 자들이여, 너희들은 이 땅에서 나를 위하여, 그리고 전쟁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p><p>"너희들의 피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너희들의 외침과 비명 소리 역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영원의 시간과 생명을 주리니, 너희들은 내게 전쟁의 광기와 고통을 바칠 지어다." "그것이 너희가 내게 치러야 할 죄의 대가이며, 그것이 너희가 내게 맹세한 가치이니라." </p> <h3><span></span><span>특징</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아레스 온라인은 플레이어의 사냥,전쟁,상거래,퀘스트 등의 결과가 이후의 전체 게임 내용에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형태의 게임 구조를 가진 새롭게 진화된 트리니티 시스템(Trinity System)을 채용한 온라인 RPG이다. </p><p>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플레이어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p> <h2><span></span><span>캐릭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궁술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타고난 민첩성과 뛰어난 궁술을 바탕으로 사냥과 전투에 모두 뛰어난 직업이다. 기본적으로는 마도사와 같은 원거리 공격 캐릭터이지만, 공격 속성 자체는 궁술 - 즉 물리 공격이기 때문에 마도사처럼 MP를 소비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단, 활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화살이 필요하다.) 궁술사라는 직업의 특성 상,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사실상 활 뿐이다. 게다가 방패 역시 마땅한 것을 착용할 수 없고, 갑옷 역시 전사에 비해서 가볍고 낮은 등급의 것을 착용할 수 밖엔 없다. 따라서 전사나 성기사와 같은 방어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전투 시에는 마도사와 마찬가지로 일격이탈이나 단기결전 전술을 사용해야 한다. 궁술사의 강함은 다른 물리 공격 캐릭터와는 달리 민첩성에서 비롯된다. 즉, 검사나 창술사의 공격력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 무기를 빠르게 다룰 수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되는가에 반하여, 궁술사의 공격력은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화살을 적의 급소에 명중시킬 수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궁술사의 공격력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캐릭터 능력치는 민첩성이다.) 궁술사가 가진 가장 독특한 스킬이라면, 이동 속도를 올려주는 스킬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마도사와 마찬가지로 원거리 공격을 주로 하면서 잦은 이동을 해야 하는 궁술사에게 빠른 이동 속도는 전투에서 많은 이점을 주기 때문에, 공격 속도를 올려주거나 이동 속도를 올려주는 스킬에 적당히 투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본 공격 자체가 원거리 공격이고, 자체적으로 이동 속도를 올릴 수 있는 데다가, 화살 자체의 가격이 다른 약물에 비하여 저렴한 편이기 때문에 까다로운 컨트롤만 극복한다면 저레벨 때에는 가장 저비용으로 경험치 사냥을 할 수 있는 클래스가 바로 궁술사이다. </p><p>현재 사실상 최고 클래스 등급이며,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 공격력 패시프스킬로 인해 대미지가 2배로 박히며, 도덕경험치가 높으며 고렙의 경우 일격필살이 가능한 먼치킨 클래스가 되었다 </p> <h3><span></span><span>마도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자신의 정신력을 공격적인 마법으로 바꾸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클래스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전략과 컨트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가장 다루기 어렵기는 하지만, 비교적 초반부터 사용할 수 있는 범위 공격 마법을 능숙하게만 사용한다면 가장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마도사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정신력을 무기로 삼기 때문에, 방어력이나 공격력보다는 자신의 정신력을 높여주는 장비를 즐겨 착용한다. 또한 원거리 공격(마법)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전사와 같은 근접 전투 클래스와는 달리 HP 회복제보다는 MP 회복제(케모마일 포션)를 주로 사용하게 된다. 또한 전투 시 이동을 많이 하게 되므로 이동 속도를 올려주는 약물(화이트 퀵 포션)와 스태미너 회복제를 챙기도록 한다. 마도사는 다른 클래스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방어력과 물리 공격력이 낮기 때문에, 몬스터의 접근을 허용할 경우 순식간에 찬 바닥에 드러눕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도사들은 전투시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전술을 사용하게 된다. </p><p>1. 단기결전 전술: 강력한 공격 마법으로 몬스터가 유저에게 접근하기 전에 쓰러뜨리는 전법. 먼저 공격해오는 몬스터(선공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면, 좋은 포지션을 잡고 마법을 연사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사냥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단, 이러한 방법으로 많은 체력을 가진 몬스터나 선공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p><p>2. 일격이탈 전술: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적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공격하는 전법. 적에게 공격을 가한 후, 적과의 거리를 항시 주의하면서 거리가 가까워지면 적에게 공격을 당하기 전에 미리 이동하여 다음 번 공격 포지션을 탐색하는 전법이다. 항상 수 초 후의 몬스터 위치를 예상하면서 캐릭터를 컨트롤하는 것은 상당한 숙련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이론적으로는 어떤 사냥터에서든 혼자서 사냥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전술에 익숙한 마도사만이 진짜 마도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벨업과 함께 부여되는 스킬 포인트는 한번 배분하면 되돌려 받을 길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스킬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고 아껴만 두는 경우가 많은데, 모든 공격을 마법 스킬에 의존하는 마도사들에게 있어서 그렇게 스킬 포인트를 아끼기만 하는 것은 자신의 공격력을 제한하는 행동이 되기도 한다. 적당한 시점에, 적당한 마법에, 적당한 스킬 포인트를 분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게 게임을 이끌어나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p><p>안타깝게도 현재 클레스에서 가장 인기가 떨어지는 클래스 중 하나, 흡력이 없어서 대미지로 사냥을 해야하니 사냥 지속력이 떨어지며, 대미지가 뛰어날려면 바로메트 목걸이라는 목걸이를 착용해야만 함. 생각보다 몸이 약해 눞기 쉬운 클래스이다. </p> <h2><span></span><span>시스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인첸트 시스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인첸트 시스템이란 인챈트 아이템(무기 및 방어구)에 특별한 광석 아이템을 조합해서 매직속성을 부가 해주는 시스템이다. 인첸트 시스템에 사용되는 아이템은 모두 보라색으로 표시되며, 광석 아이템은 상, 중, 하 별로 능력의 크기가 다르다. </p> <h3><span></span><span>축복 시스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축복 시스템은 자신이 사용하는 아이템에 축복을 내려 주는 것으로 아이템의 능력이 일정이상 증가하는 것이다. 축복 시스템은 아이템 중에 무기에 축복을 내려주는 "축복의 문서"와 방어구에 축복을 내려주는 "보호의 문서"로 나뉜다. </p> <h3><span></span><span>연금수 시스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신비한 힘을 지닌 연금수를 이용한 획득의 연금술이다. </p><p>연금수는 샤모르 지역 마을에 배치되어 있는 소모품 판매NPC를 통하여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능력이 뛰어난 연금수를 얻기 위해서는 강력한 보스 몬스터나 특수 몬스터를 사냥하여야만 얻을 수 있다. </p> <h3><span></span><span>가베노르 시스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가베노르의 구슬 강화의 단계 아이템의 옵션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연금술이다. </p><p>습득방법: 보스 몬스터 및 특수 몬스터의 사냥을 통해 습득이 가능하다. 가베노르의 구슬을 소지한 상태로 바르포프 마을의 NPC ‘아스테’를 찾아 갑니다. NPC 아스테의 진행에 따라 가베노르의 구슬을 강화시킨다. </p> <h2><span></span><span>전쟁</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워페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아레스의 워페어 시스템은 유저와 유저간의 대결을 주축으로 이루어진다. 특정 지역에서 이뤄지는 전쟁은 필드에서의 전쟁과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상대 진영의 막강한 투석기와 처음 마주하게 되는 적을 두고 유저는 자신의 진영에 서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된다. </p> <h3><span></span><span>영토전쟁</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영토전쟁은 아레스월드의 중립 지역인 카이얀, 브엘사바, 디셉고원의 지배권을 갖기 위해 해당 지역에서 직접 양 국가의 유저들이 전쟁을 벌이는 시스템이다. 영토전쟁은 워페어와는 다르게 특정 지역으로 이동 후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이동할 수 있는 대륙에서 전쟁이 이루어 지므로 워페어와는 또 다른 전쟁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p> <h3><span></span><span>길드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유저들이 팀웍을 이룰 수 있도록 시스템 상으로 제공하여, 다중 커뮤니티를 이루도록 유도하고, 유저들간의 다중 커뮤니티를 통해 새로운 경제 시스템과 개인으로 느낄 수 없는 팀웍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시스템이다. </p>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아레스 온라인 공식 사이트</a></li></ul>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엠게임</a>에서 서비스하는 <a>온라인 게임</a></div></th></tr><tr><th><a>ACT</a></th><td><div> <ul><li><a>초괴물낚시</a></li></ul> </div></td></tr><tr><th><a>FPS</a></th><td><div> <ul><li><a>로스트사가</a></li></ul> </div></td></tr><tr><th><a>MMORPG</a></th><td><div> <ul><li><a>귀혼</a></li> <li><a>나이트 온라인</a></li> <li><a>드로이얀 온라인</a></li> <li><a>라피스</a></li> <li><a>아레스 온라인</a></li> <li><a>열혈강호 온라인</a></li> <li><a>영웅 온라인</a></li> <li><a>이터널 시티</a></li> <li><a>풍림화산</a></li> <li><a>홀릭2</a></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레스_온라인&amp;oldid=21396509</a>"</div> <div><div><a>분류</a>: <ul><li><a>2003년 비디오 게임</a></li><li><a>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a></li><li><a>대한민국의 비디오 게임</a></li><li><a>윈도우 게임</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ul> <div><span><a>링크 추가</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8년 5월 24일 (목) 11: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아레스 온라인에서 자신의 정신력을 무기로 삼는 캐릭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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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YPE html> 아레스 온라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레스 온라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caption>아레스 온라인</caption><tbody><tr><th>개발사</th> <td> (주)KRG소프트</td></tr><tr><th>배급사</th> <td> (주)엠게임</td></tr> <tr><th>플랫폼</th> <td> 윈도 98SE/2000/xp 이상</td></tr><tr><th>출시일</th> <td> 2003.12.02</td></tr><tr><th>장르</th> <td> MMORPG</td></tr><tr><th>모드</th> <td> 멀티</td></tr><tr><th>언어</th> <td> 한국어</td></tr><tr><th>입력장치</th> <td> 키보드, 마우스</td></tr> </tbody></table> 아레스온라인은 (주)KRG SOFT에서 개발하고 엠게임에서 서비스하는 MMORPG 게임이다. 목차 1 역사 2 시놉시스 2.1 프롤로그 2.2 특징 3 캐릭터 3.1 궁술사 3.2 마도사 4 시스템 4.1 인첸트 시스템 4.2 축복 시스템 4.3 연금수 시스템 4.4 가베노르 시스템 5 전쟁 5.1 워페어 5.2 영토전쟁 5.3 길드전 6 외부 링크 역사[편집] 리펜트 클로즈베타 테스트: 2002년 8월 19일 ~ 9월 7일 리펜트 오픈베타: 2003년 12월 2일 아레스로 개명한 리펜트, 1차 클베: 2004년 5월 28일 ~ 6월 2일 아레스 오픈베타: 2004년 7월 15일 아레스 상용화 및 리펜트 유저 통합: 2004년 9월 6일 정식서비스: 현재 시놉시스[편집] 프롤로그[편집] ~ 페리클레스력 62년 정월 12일, 기록자 크세노폰 ~ 몰아치는 폭풍우, 태양조차 보이지 않는 어두운 하늘 바닥난 물과 식량, 젖은 옷과 차가운 물보라, 차오르는 바닷물 갑판 위를 살아있는 뱀처럼 몸부림치는 끊어진 로프 선창 깊숙한 곳에서 물을 퍼내는 병사들의 한숨 이미 파랗게 녹슬어버린 채 흔들거리는 청동 갑옷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검은 파도와 하얀 물보라뿐 아아, 우리들의 주신이시자 전쟁의 신이시여! 당신이 어여삐 여기시는 것이 오직 전장의 비명과 고함뿐이라는 사실을 잊고, 돈과 평화 앞에 눈이 멀었던 우리를 용서하여 주소서! 아아, 우리들의 주신이시자 전쟁의 신이시여! 우리들에게 다시금 설 땅을 주신다면, 우리들은 당신에게 바칠 전쟁의 환희와 고통을 위하여 이 목숨이 다하는 그 순간까지 칼을 휘두르겠나이다! 아아, 우리들의 주신이시자 전쟁의 신이시여! ~ 페리클레스력 62년 정월 13일, 기록자 헤라클레이토스 ~ 우리들의 지도자이자 형제 크세노폰이, 스스로를 산 제물로써 바친 그날 새벽, 우리들은 유황과 송진 냄새, 그리고 주신의 신탁과 함께 붉게 타오르는 대지를 발견했다. "나에게 목숨을 맹세한 자들이여, 너희들은 이 땅에서 나를 위하여, 그리고 전쟁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너희들의 피는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며, 너희들의 외침과 비명 소리 역시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영원의 시간과 생명을 주리니, 너희들은 내게 전쟁의 광기와 고통을 바칠 지어다." "그것이 너희가 내게 치러야 할 죄의 대가이며, 그것이 너희가 내게 맹세한 가치이니라." 특징[편집] 아레스 온라인은 플레이어의 사냥,전쟁,상거래,퀘스트 등의 결과가 이후의 전체 게임 내용에 영향을 끼치는 새로운 형태의 게임 구조를 가진 새롭게 진화된 트리니티 시스템(Trinity System)을 채용한 온라인 RPG이다.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가혹한 운명을 극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플레이어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캐릭터[편집] 궁술사[편집] 타고난 민첩성과 뛰어난 궁술을 바탕으로 사냥과 전투에 모두 뛰어난 직업이다. 기본적으로는 마도사와 같은 원거리 공격 캐릭터이지만, 공격 속성 자체는 궁술 - 즉 물리 공격이기 때문에 마도사처럼 MP를 소비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단, 활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화살이 필요하다.) 궁술사라는 직업의 특성 상, 사용할 수 있는 무기는 사실상 활 뿐이다. 게다가 방패 역시 마땅한 것을 착용할 수 없고, 갑옷 역시 전사에 비해서 가볍고 낮은 등급의 것을 착용할 수 밖엔 없다. 따라서 전사나 성기사와 같은 방어력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전투 시에는 마도사와 마찬가지로 일격이탈이나 단기결전 전술을 사용해야 한다. 궁술사의 강함은 다른 물리 공격 캐릭터와는 달리 민첩성에서 비롯된다. 즉, 검사나 창술사의 공격력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 무기를 빠르게 다룰 수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되는가에 반하여, 궁술사의 공격력은 얼마나 빠르고 정확하게 화살을 적의 급소에 명중시킬 수 있는가에 따라서 결정된다. (궁술사의 공격력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캐릭터 능력치는 민첩성이다.) 궁술사가 가진 가장 독특한 스킬이라면, 이동 속도를 올려주는 스킬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마도사와 마찬가지로 원거리 공격을 주로 하면서 잦은 이동을 해야 하는 궁술사에게 빠른 이동 속도는 전투에서 많은 이점을 주기 때문에, 공격 속도를 올려주거나 이동 속도를 올려주는 스킬에 적당히 투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본 공격 자체가 원거리 공격이고, 자체적으로 이동 속도를 올릴 수 있는 데다가, 화살 자체의 가격이 다른 약물에 비하여 저렴한 편이기 때문에 까다로운 컨트롤만 극복한다면 저레벨 때에는 가장 저비용으로 경험치 사냥을 할 수 있는 클래스가 바로 궁술사이다. 현재 사실상 최고 클래스 등급이며, 많은 사람들이 즐기고 있다. 공격력 패시프스킬로 인해 대미지가 2배로 박히며, 도덕경험치가 높으며 고렙의 경우 일격필살이 가능한 먼치킨 클래스가 되었다 마도사[편집] 자신의 정신력을 공격적인 마법으로 바꾸는 신비한 능력을 가진 클래스이다. 가장 높은 수준의 전략과 컨트롤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가장 다루기 어렵기는 하지만, 비교적 초반부터 사용할 수 있는 범위 공격 마법을 능숙하게만 사용한다면 가장 빠르게 성장할 수 있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마도사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정신력을 무기로 삼기 때문에, 방어력이나 공격력보다는 자신의 정신력을 높여주는 장비를 즐겨 착용한다. 또한 원거리 공격(마법)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전사와 같은 근접 전투 클래스와는 달리 HP 회복제보다는 MP 회복제(케모마일 포션)를 주로 사용하게 된다. 또한 전투 시 이동을 많이 하게 되므로 이동 속도를 올려주는 약물(화이트 퀵 포션)와 스태미너 회복제를 챙기도록 한다. 마도사는 다른 클래스에 비하여 절대적으로 방어력과 물리 공격력이 낮기 때문에, 몬스터의 접근을 허용할 경우 순식간에 찬 바닥에 드러눕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도사들은 전투시 기본적으로 다음과 같은 전술을 사용하게 된다. 1. 단기결전 전술: 강력한 공격 마법으로 몬스터가 유저에게 접근하기 전에 쓰러뜨리는 전법. 먼저 공격해오는 몬스터(선공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면, 좋은 포지션을 잡고 마법을 연사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사냥을 할 수가 있을 것이다. 단, 이러한 방법으로 많은 체력을 가진 몬스터나 선공 몬스터를 사냥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2. 일격이탈 전술: 끊임없이 이동하면서, 적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공격하는 전법. 적에게 공격을 가한 후, 적과의 거리를 항시 주의하면서 거리가 가까워지면 적에게 공격을 당하기 전에 미리 이동하여 다음 번 공격 포지션을 탐색하는 전법이다. 항상 수 초 후의 몬스터 위치를 예상하면서 캐릭터를 컨트롤하는 것은 상당한 숙련을 필요로 할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익숙해지기만 한다면 이론적으로는 어떤 사냥터에서든 혼자서 사냥을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전술에 익숙한 마도사만이 진짜 마도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레벨업과 함께 부여되는 스킬 포인트는 한번 배분하면 되돌려 받을 길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스킬 포인트를 사용하지 않고 아껴만 두는 경우가 많은데, 모든 공격을 마법 스킬에 의존하는 마도사들에게 있어서 그렇게 스킬 포인트를 아끼기만 하는 것은 자신의 공격력을 제한하는 행동이 되기도 한다. 적당한 시점에, 적당한 마법에, 적당한 스킬 포인트를 분배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게 게임을 이끌어나가는 방법이 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현재 클레스에서 가장 인기가 떨어지는 클래스 중 하나, 흡력이 없어서 대미지로 사냥을 해야하니 사냥 지속력이 떨어지며, 대미지가 뛰어날려면 바로메트 목걸이라는 목걸이를 착용해야만 함. 생각보다 몸이 약해 눞기 쉬운 클래스이다. 시스템[편집] 인첸트 시스템[편집] 인첸트 시스템이란 인챈트 아이템(무기 및 방어구)에 특별한 광석 아이템을 조합해서 매직속성을 부가 해주는 시스템이다. 인첸트 시스템에 사용되는 아이템은 모두 보라색으로 표시되며, 광석 아이템은 상, 중, 하 별로 능력의 크기가 다르다. 축복 시스템[편집] 축복 시스템은 자신이 사용하는 아이템에 축복을 내려 주는 것으로 아이템의 능력이 일정이상 증가하는 것이다. 축복 시스템은 아이템 중에 무기에 축복을 내려주는 "축복의 문서"와 방어구에 축복을 내려주는 "보호의 문서"로 나뉜다. 연금수 시스템[편집] 신비한 힘을 지닌 연금수를 이용한 획득의 연금술이다. 연금수는 샤모르 지역 마을에 배치되어 있는 소모품 판매NPC를 통하여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더 능력이 뛰어난 연금수를 얻기 위해서는 강력한 보스 몬스터나 특수 몬스터를 사냥하여야만 얻을 수 있다. 가베노르 시스템[편집] 가베노르의 구슬 강화의 단계 아이템의 옵션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연금술이다. 습득방법: 보스 몬스터 및 특수 몬스터의 사냥을 통해 습득이 가능하다. 가베노르의 구슬을 소지한 상태로 바르포프 마을의 NPC ‘아스테’를 찾아 갑니다. NPC 아스테의 진행에 따라 가베노르의 구슬을 강화시킨다. 전쟁[편집] 워페어[편집] 아레스의 워페어 시스템은 유저와 유저간의 대결을 주축으로 이루어진다. 특정 지역에서 이뤄지는 전쟁은 필드에서의 전쟁과는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상대 진영의 막강한 투석기와 처음 마주하게 되는 적을 두고 유저는 자신의 진영에 서서 최고의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얻게 된다. 영토전쟁[편집] 영토전쟁은 아레스월드의 중립 지역인 카이얀, 브엘사바, 디셉고원의 지배권을 갖기 위해 해당 지역에서 직접 양 국가의 유저들이 전쟁을 벌이는 시스템이다. 영토전쟁은 워페어와는 다르게 특정 지역으로 이동 후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 이동할 수 있는 대륙에서 전쟁이 이루어 지므로 워페어와는 또 다른 전쟁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길드전[편집] 유저들이 팀웍을 이룰 수 있도록 시스템 상으로 제공하여, 다중 커뮤니티를 이루도록 유도하고, 유저들간의 다중 커뮤니티를 통해 새로운 경제 시스템과 개인으로 느낄 수 없는 팀웍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는 시스템이다. 외부 링크[편집] 아레스 온라인 공식 사이트 <table><tbody><tr><th colspan="2">vdeh엠게임에서 서비스하는 온라인 게임</th></tr><tr><th>ACT</th><td> 초괴물낚시 </td></tr><tr><th>FPS</th><td> 로스트사가 </td></tr><tr><th>MMORPG</th><td> 귀혼 나이트 온라인 드로이얀 온라인 라피스 아레스 온라인 열혈강호 온라인 영웅 온라인 이터널 시티 풍림화산 홀릭2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레스_온라인&amp;oldid=21396509" 분류: 2003년 비디오 게임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대한민국의 비디오 게임윈도우 게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5월 24일 (목) 11: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아레스 온라인 요약** **1. 개요** 아레스 온라인은 (주)KRG SOFT에서 개발하고 (주)엠게임에서 서비스하는 MMORPG 게임으로, 2003년 12월 2일에 출시되었다. 이 게임은 다양한 시스템과 전투 방식으로 플레이어에게 독특한 경험을 제공한다. **2. 역사** 아레스 온라인은 2002년 클로즈베타 테스트를 시작으로, 2003년 오픈베타를 거쳐 2004년 상용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리펜트라는 이름에서 아레스로 개명되었으며, 유저 통합이 이루어졌다. **3. 시놉시스** - **프롤로그**: 게임의 배경은 전쟁의 신에게 바치는 기도를 통해 전투와 고통을 다루고 있으며, 플레이어는 전쟁의 광기와 고통을 바치기 위해 싸워야 한다. - **특징**: 아레스 온라인은 플레이어의 행동이 게임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트리니티 시스템을 채택하여, 각 플레이어는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 선택한 국가와 민족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4. 캐릭터** - **궁술사**: 민첩성과 궁술을 기반으로 한 원거리 공격 캐릭터로, 물리 공격을 사용하며, 빠른 이동 속도를 통해 전투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 저비용으로 경험치를 얻을 수 있는 클래스이다. - **마도사**: 정신력을 이용한 마법 공격 캐릭터로, 높은 전략과 컨트롤이 요구된다. 방어력이 낮아 적의 접근을 허용하면 위험하지만, 적절한 전술을 사용하면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 **5. 시스템** - **인첸트 시스템**: 무기와 방어구에 특별한 속성을 부여하는 시스템으로, 보라색 아이템을 사용한다. - **축복 시스템**: 아이템에 축복을 내려 능력을 증가시키는 시스템이다. - **연금수 시스템**: 연금술을 통해 아이템을 획득하는 시스템으로, 강력한 몬스터를 사냥해야 더 좋은 아이템을 얻을 수 있다. - **가베노르 시스템**: 아이템의 옵션을 강화하는 연금술 시스템으로, 보스 몬스터를 사냥하여 강화할 수 있다. **6. 전쟁** - **워페어**: 유저 간의 대결을 중심으로 한 전투 시스템으로, 특정 지역에서 진행된다. - **영토전쟁**: 중립 지역에서 두 국가의 유저들이 지배권을 두고 전투를 벌이는 시스템이다. - **길드전**: 유저들이 팀워크를 통해 새로운 경제 시스템과 협력의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이다. 이 문서는 아레스 온라인의 전반적인 구조와 시스템, 캐릭터의 특징을 설명하며, 게임의 역사와 전투 시스템을 강조하고 있다.
다음 글의 핵심 주장과 근거를 중심으로 요약해줘. 단락별로 주요 내용이 무엇인지도 함께 정리해줘. 문장 길이는 너무 짧지 않게 하고, 원문의 흐름은 유지해줘.
손바이_버사르
https://ko.wikipedia.org/wiki/손바이_버사르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손바이 버사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손바이 버사르</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손바이 버사르</b> (Sonbai Besar)는 <a>티모르</a>섬에서 1658년에서 1906년까지 <a>서티모르</a>의 지역의 광범위한 영토를 지배했던 고대 왕국이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왕국의 성립 역사</span></a></li> <li><a><span>2</span> <span>전통적인 통치자의 권한과 지위</span></a></li> <li><a><span>3</span> <span>포르투갈 지배에서의 이탈</span></a></li> <li><a><span>4</span> <span>네덜란드와의 관계</span></a></li> <li><a><span>5</span> <span>역대 손바이 버사르의 왕<sup>&#91;1&#93;</sup></span></a></li> <li><a><span>6</span> <span>같이 보기</span></a></li> <li><a><span>7</span> <span>참고문헌</span></a></li> <li><a><span>8</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왕국의 성립 역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손바이 버사르의 건국 역사는 <a>티모르 섬</a>의 지배권 탈환을 위한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양국의 오랜 갈등과 빈번한 충돌에 깊은 관련이 있다. <a>서티모르</a>의 아토니 (<a>Atoni</a>)족들 사이에서 가장 영향력이있던 통일 <a>손바이</a> 왕국은 1649에서 1655년까지 포르투갈 정부와 동맹 관계를 유지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포르투갈과의 기존의 동맹을 파기하고, 다시 1655년에서 1658년까지 <a>네덜란드 동인도 회사</a>와 동맹을 맺었다. 1657년에서 1658넌 사이에 발생한 포르투갈 혼혈계 민족인 토파즈족과의 연이은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손바이 왕국은 두 개의 왕국으로 분리가 된다. 첫 번째로 분리된 왕국인 <a>손바이 끄찔</a> (Sonbai Kecil)은 네덜란드가 요새를 세우고 자국의 영토로 편입 시켜 지배하던 <a>쿠팡</a> 지역으로 이주한 집단들에 의해서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서티모르의 내륙에서 포르투갈의 감시와 지배를 받던 나머지 세력들은 손바이 버사르 (<a>Sonbai Besar</a>)로 불리며 자체적인 왕국을 유지했다. </p> <h2><span></span><span>전통적인 통치자의 권한과 지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손바이 버사르의 지지세력들은 케이저(Keizer, 황제라는 뜻)라는 칭호의 통치자인 왕의 지배를 받았다. 티모르지역의 전통적인 관습에따라, 손바이 버사르의 왕은 실제적으로 직접 통치권이 없이 페토(Feto)라는 여성적인 의미를 부여한 상징으로서 군림하였다. 정치적인 권한은 우이스 코노(Uis Kono) 혹은 아마 코노(Ama Kono)라고 불리는 코노 일족의 막료인 모네(Mone)라는 남성을 의미하는 총독이 행사 하였다. 이러한 정치 체계로 인하여, 왕국의 북동부 지역은 우이스 코노(Uis Kono) 일족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중앙지역인 몰로(Mollo)는 오에마탄(Oematan) 일족들이 양두정치 체계와 유사한 공동 대표 총독들에의해서 지배를 받았다. 서부 지역은 주요 핵심 영주들인 유시프(Usif)들의 지배하에서 여러 지역을 지배 관리하는 아마프 나엑 (Amaf naek, 위대한 아버지라는 뜻)이라는 소(小)영주들이 있었으며, 다시 아마프 나엑의 지배 하에는 여러 마을들을 다스리는 아마프(amaf, 아버지라는 뜻)라는 족장들로 구성이 되어있는 정치 체계를 이루었다. </p> <h2><span></span><span>포르투갈 지배에서의 이탈</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토파즈인들과 손바이 버사르 왕국의 사이의 관계에서는 협력과 반목이 자주 번복 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방식의 식민지배가 수반되지 못했다. 손바이 버사르 왕국의 영주들은 주요 수입원인 백단유(백단향에서 채취하는 기름으로 향수의 원료)을 포르투갈과 다른 해외 선박들이 선적하는 해안 지역으로 운송을 했고, 이러한 백단향은 <a>마카오</a>와 당시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 (Batavia, <a>자카르타</a>의 옛 이름)으로 팔려 나갔다. 그러는 와중에, 1711년~1713년과 1722년에 손바이 왕국과 토파즈인들 사이에 심각한 분쟁이 발생하였다. 1748년 손바이 왕국의 통치자 알폰소 살레마 (Alfonso Salema), 암포안 (Afoan)과 아마누반 (Amanuban)의 왕들은 반란을 일으킨후, 쿠팡 지역으로 망명을 한다. 알폰소 살레마는 많은 수의 자기의 추종 세력들과 함께 쿠팡 지역으로 이동을 했고, 이는 쿠팡 지역에 위치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토파즈 부족의 지도자인 가스파 다 코스타 (Gaspar da Costa)와의 극도의 분쟁의 발단이 되었다. 1749년 11월 펜푸이 전투에서 토파즈 군사들은 쿠팡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연합군들에 의해서 패배를 하고 만다. 그리고 서티모르 지역의 상당부분의 영토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p> <h2><span></span><span>네덜란드와의 관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손바이 버사르와 손바이 버사르의 새로운 영주국은 다시 분쟁이 발생한다. 1752년 알폰소 살레마는 내란을 음모했다는 죄목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로부터 추방당하게 된다. 알폰소 살레왕의 손자인 알폰수스 아드리아누스 (Alphonsus Adrianus)왕은 내륙지역에서 그의 새로운 왕국을 세운다. 1802년 알폰수스 왕의 죽음이후, 그의 후계자이자 아들인 나이 소베 손바이 2세 (Nai Sobe Sonbai II)는 1808년~1867년까지 길고 힘든 통치 기간동안 자기의 권좌 유지에 어렴움을 겪으며 서서히 권력을 새로이 규합해 나갔다. 1847년에서 1850년 그리고 1855년에서 1857년 두 차례 쿠팡 지역에서 네덜란드와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손바이 버사르의 마지막 왕인, 나이 소베 손바이 3세 (Nai Sobe Sonbai III 재위 기간 1885~1906)는 항거 끝에 1906년 네덜란드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나이 소베 손바이 3세는 <a>숨바 섬</a>으로 추방이 되었고 1922년에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현재의 서티모르에서는 나이 소베 손바이 3세를 식민지 열강들에 대항한 영웅으로 평가 받으며, 쿠팡의 중심부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p> <h2><span></span><span>역대 손바이 버사르의 왕<sup><a>&#91;1&#93;</a></sup></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ma Tuan (Ama Utang) c. 1650-c. 1680</li> <li>A son late 17th century</li> <li>Dom Pedro Sonbai (Tomenu) mentioned 1704-1726 (son)</li> <li>Dom Alfonso Salema (Nai Bau Sonbai) before 1748-1752 (son)</li> <li>Don Bernardo (Nai Sobe Sonbai I?) 1752-1760 (son)</li> <li>Albertus Johannes Taffy (Nai Tafin Sonbai) 1760-1768 (brother)</li> <li>Alphonsus Adrianus (Nai Kau Sonbai) 1768-1802 (son)</li> <li>Nai Sobe Sonbai II 1808-1867 (son)</li> <li>Nai Bau Sonbai 1867-c. 1885 (son)</li> <li>Nai Nasu Mollo co-emperor 1870-1885 (cousin)</li> <li>Nai Sobe Sonbai III 1885-1906 (son of Nai Sobe Sonbai II)</li></ul> <h2><span></span><span>같이 보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손바이</a></li> <li><a>손바이 끄찔</a></li></ul> <h2><span></span><span>참고문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G. Heymering (1847), 'Bijdragen tot de geschiedenis van Timor', <i>Tijdschrift van Nederlandsch-Indië</i> IX:3, pp. 1–62, 121-232.</li> <li>P. Middelkoop (1938), 'Iets over Sonba'i, het bekende vorstengeslacht in Timor', <i>Tijdschrift voor Indische Taal-, Land- en Volkenkunde</i> 78, pp. 392–509.</li> <li>S. Müller (1857), <i>Reizen en onderzoekingen in den Indischen Archipel</i>, Vol. II. Amsterdam: F. Muller.</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cite><a>&#8220;보관 된 사본&#8221;</a>. 2011년 7월 15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08년 12월 30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ol></div></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손바이_버사르&amp;oldid=22282360</a>"</div> <div><div><a>분류</a>: <ul><li><a>인도네시아 왕국</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English</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8년 9월 8일 (토) 18:3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손바이 버사르의 왕은 실질적인 통치권이 없어 부여받은 여성적 의미의 상징은?
페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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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바이 버사르의 왕은 실질적인 통치권이 없어 부여받은 여성적 의미의 상징은?", "정치적인 권한을 행사하며 모네라는 남성을 의미하는 직책은? ", "위대한 아버지라는 뜻의 소영주를 부르는 말은?", "손바이 버사르의 지지세력들이 왕의 지배를 받았던 통치자의 칭호는?", "서부지역 주요 핵심 영주들인 유시프들의 지배하에서 여러지역을 지배 관리하는 위대한 아버지라는 뜻을 가진 소 영주들은 누구인가?", "손바이 버사르의 지지세력들을 지배했던 왕의 칭호는?", "정치적 권한을 가졌던 존재는?", "손바이 버사르 왕국의 주요 수입원은?", "1748년 손바이 왕국의 통치자 알폰소 살레마가 망명한 지역은?", "서티모르 지역이 네덜란드의 영향권에 들어가는 계기가 된 전투는?", "1748년 손바이 왕국의 통치자 알폰소 살레마, 암포안과 아마누반의 왕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 망명한 지역은?", "손바이 버사르 왕구의 영주들에게 주요 수입원이었고, 백단향에서 채취하는 기름으로 향수의 원료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손바이 버사르 왕국 영주들의 주요 수입원이었던 것은?", "서티모르 지역의 상당부분이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 전환점은?", "1752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로부터 추방당한 사람은?", "손바이 버사르의 마지막 왕은?", "나이 소베 손바이 3세가 네덜란드 군인들에게 체포된 후 추방된 곳은?", "1752년 알폰소 살레마가 내란을 음모했다는 죄목으로 추방을 당하게 된 회사는?", "1802년 알폰수스 왕의 죽음 이후, 그의 후계자이자 아들은 누구인가?", "1752년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알폰소 살레마를 추방한 죄목은?", "손바이 버사르의 마지막 왕은?" ]
<!DOCTYPE html> 손바이 버사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손바이 버사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손바이 버사르 (Sonbai Besar)는 티모르섬에서 1658년에서 1906년까지 서티모르의 지역의 광범위한 영토를 지배했던 고대 왕국이다. 목차 1 왕국의 성립 역사 2 전통적인 통치자의 권한과 지위 3 포르투갈 지배에서의 이탈 4 네덜란드와의 관계 5 역대 손바이 버사르의 왕[1] 6 같이 보기 7 참고문헌 8 각주 왕국의 성립 역사[편집] 손바이 버사르의 건국 역사는 티모르 섬의 지배권 탈환을 위한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양국의 오랜 갈등과 빈번한 충돌에 깊은 관련이 있다. 서티모르의 아토니 (Atoni)족들 사이에서 가장 영향력이있던 통일 손바이 왕국은 1649에서 1655년까지 포르투갈 정부와 동맹 관계를 유지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포르투갈과의 기존의 동맹을 파기하고, 다시 1655년에서 1658년까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동맹을 맺었다. 1657년에서 1658넌 사이에 발생한 포르투갈 혼혈계 민족인 토파즈족과의 연이은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하여, 손바이 왕국은 두 개의 왕국으로 분리가 된다. 첫 번째로 분리된 왕국인 손바이 끄찔 (Sonbai Kecil)은 네덜란드가 요새를 세우고 자국의 영토로 편입 시켜 지배하던 쿠팡 지역으로 이주한 집단들에 의해서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 서티모르의 내륙에서 포르투갈의 감시와 지배를 받던 나머지 세력들은 손바이 버사르 (Sonbai Besar)로 불리며 자체적인 왕국을 유지했다. 전통적인 통치자의 권한과 지위[편집] 손바이 버사르의 지지세력들은 케이저(Keizer, 황제라는 뜻)라는 칭호의 통치자인 왕의 지배를 받았다. 티모르지역의 전통적인 관습에따라, 손바이 버사르의 왕은 실제적으로 직접 통치권이 없이 페토(Feto)라는 여성적인 의미를 부여한 상징으로서 군림하였다. 정치적인 권한은 우이스 코노(Uis Kono) 혹은 아마 코노(Ama Kono)라고 불리는 코노 일족의 막료인 모네(Mone)라는 남성을 의미하는 총독이 행사 하였다. 이러한 정치 체계로 인하여, 왕국의 북동부 지역은 우이스 코노(Uis Kono) 일족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중앙지역인 몰로(Mollo)는 오에마탄(Oematan) 일족들이 양두정치 체계와 유사한 공동 대표 총독들에의해서 지배를 받았다. 서부 지역은 주요 핵심 영주들인 유시프(Usif)들의 지배하에서 여러 지역을 지배 관리하는 아마프 나엑 (Amaf naek, 위대한 아버지라는 뜻)이라는 소(小)영주들이 있었으며, 다시 아마프 나엑의 지배 하에는 여러 마을들을 다스리는 아마프(amaf, 아버지라는 뜻)라는 족장들로 구성이 되어있는 정치 체계를 이루었다. 포르투갈 지배에서의 이탈[편집] 토파즈인들과 손바이 버사르 왕국의 사이의 관계에서는 협력과 반목이 자주 번복 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인 방식의 식민지배가 수반되지 못했다. 손바이 버사르 왕국의 영주들은 주요 수입원인 백단유(백단향에서 채취하는 기름으로 향수의 원료)을 포르투갈과 다른 해외 선박들이 선적하는 해안 지역으로 운송을 했고, 이러한 백단향은 마카오와 당시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 (Batavia, 자카르타의 옛 이름)으로 팔려 나갔다. 그러는 와중에, 1711년~1713년과 1722년에 손바이 왕국과 토파즈인들 사이에 심각한 분쟁이 발생하였다. 1748년 손바이 왕국의 통치자 알폰소 살레마 (Alfonso Salema), 암포안 (Afoan)과 아마누반 (Amanuban)의 왕들은 반란을 일으킨후, 쿠팡 지역으로 망명을 한다. 알폰소 살레마는 많은 수의 자기의 추종 세력들과 함께 쿠팡 지역으로 이동을 했고, 이는 쿠팡 지역에 위치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토파즈 부족의 지도자인 가스파 다 코스타 (Gaspar da Costa)와의 극도의 분쟁의 발단이 되었다. 1749년 11월 펜푸이 전투에서 토파즈 군사들은 쿠팡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연합군들에 의해서 패배를 하고 만다. 그리고 서티모르 지역의 상당부분의 영토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된다. 네덜란드와의 관계[편집] 손바이 버사르와 손바이 버사르의 새로운 영주국은 다시 분쟁이 발생한다. 1752년 알폰소 살레마는 내란을 음모했다는 죄목으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로부터 추방당하게 된다. 알폰소 살레왕의 손자인 알폰수스 아드리아누스 (Alphonsus Adrianus)왕은 내륙지역에서 그의 새로운 왕국을 세운다. 1802년 알폰수스 왕의 죽음이후, 그의 후계자이자 아들인 나이 소베 손바이 2세 (Nai Sobe Sonbai II)는 1808년~1867년까지 길고 힘든 통치 기간동안 자기의 권좌 유지에 어렴움을 겪으며 서서히 권력을 새로이 규합해 나갔다. 1847년에서 1850년 그리고 1855년에서 1857년 두 차례 쿠팡 지역에서 네덜란드와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손바이 버사르의 마지막 왕인, 나이 소베 손바이 3세 (Nai Sobe Sonbai III 재위 기간 1885~1906)는 항거 끝에 1906년 네덜란드 군인들에게 체포되었다. 나이 소베 손바이 3세는 숨바 섬으로 추방이 되었고 1922년에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현재의 서티모르에서는 나이 소베 손바이 3세를 식민지 열강들에 대항한 영웅으로 평가 받으며, 쿠팡의 중심부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상이 세워져 있다. 역대 손바이 버사르의 왕[1][편집] Ama Tuan (Ama Utang) c. 1650-c. 1680 A son late 17th century Dom Pedro Sonbai (Tomenu) mentioned 1704-1726 (son) Dom Alfonso Salema (Nai Bau Sonbai) before 1748-1752 (son) Don Bernardo (Nai Sobe Sonbai I?) 1752-1760 (son) Albertus Johannes Taffy (Nai Tafin Sonbai) 1760-1768 (brother) Alphonsus Adrianus (Nai Kau Sonbai) 1768-1802 (son) Nai Sobe Sonbai II 1808-1867 (son) Nai Bau Sonbai 1867-c. 1885 (son) Nai Nasu Mollo co-emperor 1870-1885 (cousin) Nai Sobe Sonbai III 1885-1906 (son of Nai Sobe Sonbai II) 같이 보기[편집] 손바이 손바이 끄찔 참고문헌[편집] G. Heymering (1847), 'Bijdragen tot de geschiedenis van Timor', Tijdschrift van Nederlandsch-Indië IX:3, pp. 1–62, 121-232. P. Middelkoop (1938), 'Iets over Sonba'i, het bekende vorstengeslacht in Timor', Tijdschrift voor Indische Taal-, Land- en Volkenkunde 78, pp. 392–509. S. Müller (1857), Reizen en onderzoekingen in den Indischen Archipel, Vol. II. Amsterdam: F. Muller. 각주[편집] ↑ “보관 된 사본”. 2011년 7월 15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8년 12월 30일에 확인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손바이_버사르&amp;oldid=22282360" 분류: 인도네시아 왕국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8일 (토) 18:3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서론 손바이 버사르(Sonbai Besar)는 1658년부터 1906년까지 티모르섬의 서티모르 지역을 지배했던 고대 왕국으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 간의 갈등 속에서 형성되었다. 이 문서는 손바이 버사르의 역사, 통치 체계, 외부 세력과의 관계를 통해 왕국의 정치적 및 사회적 구조를 조명하고자 한다. ### 본론 1. **왕국의 성립 역사**: 손바이 버사르는 1649년부터 1655년까지 포르투갈과 동맹을 맺었으나, 이후 네덜란드와 동맹을 형성하며 왕국을 세웠다. 그러나 1657-1658년 사이의 전쟁으로 인해 왕국은 두 개로 분리되었다. 2. **전통적인 통치자의 권한과 지위**: 손바이 버사르의 왕은 상징적인 존재로, 실제 통치권은 코노 일족의 총독이 행사하였다. 이로 인해 왕국은 복잡한 정치 체계를 형성하였고, 지역별로 다양한 지배 구조가 존재했다. 3. **포르투갈 지배에서의 이탈**: 손바이 버사르와 토파즈족 간의 관계는 협력과 갈등이 반복되었으며, 왕국의 영주들은 주요 자원인 백단유를 포르투갈과 거래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초반 심각한 분쟁이 발생하며 왕국의 통치력이 약화되었다. 4. **네덜란드와의 관계**: 손바이 버사르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의 갈등 속에서 여러 차례 내란과 전쟁을 겪었다. 마지막 왕인 나이 소베 손바이 3세는 1906년 네덜란드 군에 의해 체포되었고, 이후 영웅으로 평가받게 된다. ### 결론 손바이 버사르는 복잡한 정치적 역사와 외부 세력과의 갈등 속에서 독립적인 왕국으로 존재했으나, 결국 식민지 세력에 의해 지배당하게 되었다. 이 왕국의 역사는 티모르섬의 문화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나이 소베 손바이 3세는 현재에도 저항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다. 글쓴이는 손바이 버사르의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 왕국이 지역 사회에 미친 영향을 조명하고자 한다.
글 전체의 요지를 논리적 흐름에 맞게 정리해줘. 서론, 본론, 결론 구조로 요약해주고, 각 부분마다 글쓴이의 의도나 주장도 명확히 밝혀줘.
미래의_인종
https://ko.wikipedia.org/wiki/미래의_인종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미래의 인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미래의 인종</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d><div><img></div></td><td><span>이 글의 <b><a>중립성</a>에 대한 이의</b>가 제기되었습니다.<span><br>주관적인 내용이나 감정적인 표현은 없는지,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여러 관점이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span> <small>(2017년 12월)</small><span></span></span></td></tr></tbody></table> <p><b>미래의 <a>인종</a></b>은 진행 중인 인종적 혼합에 기인한 이론적인 복합 인종이다.<sup><a>&#91;1&#93;</a></sup> </p><p>리차드 폰 쿠덴 호브 칼레 기(Richard von Coudenhove-Kalergi)는 1925년에 <i>실용 주의적 사고</i>에서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160;: "미래의 사람은 혼혈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인종과 <a>계급</a>은 공간, 시간, 편견이 사라짐에 따라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미래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개인의 다양성으로 대체 할 것입니다. "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역사</span></a></li> <li><a><span>2</span> <span>다인종 인구</span></a> <ul> <li><a><span>2.1</span> <span>브라질</span></a></li> <li><a><span>2.2</span> <span>미국</span></a></li> </ul> </li> <li><a><span>3</span> <span>대안 시각</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역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고트 프리드 드 퍼커 (Gottfried de Purucker)는 1930년 다른 인종간의 결혼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매우 간단하게 질문에 대답하면 간단히 말해서 나는 다른 인종간의 결혼을 제안 할 때는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면 미래의 인종은 오늘날 지구상의 여러 인종으로 구성된 합성물이 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한 종족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라고 말했다. </p><p>단어 "miscegenation"는 1863 년 후반에 뉴욕시에서 인쇄 된 익명의 선전 팜플렛에 사용되었는데, Miscegenation&#160;: 인종 혼합의 이론, 미국의 백인과 흑인에게 적용됨. 이 팸플릿은 인종과 뚜렷이 섞여 있지 않을 때까지 백인과 흑인의 이종 번식에 찬성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미국 <a>공화당</a>의 목표라고 주장했다. 진짜 저자는 데이비드 굿맨 크로리 (David Goodman Croly), 민주당 신문 뉴욕 월드 (New York World) 편집장, 세계 기자 조지 워켄 먼 (George Wakeman) 편집장이었다. 팜플렛은 곧 백인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두려움과 <a>인종 차별</a>을 이용하여 공화당, 링컨 행정부, <a>노예제 폐지 운동</a>에 대한 신용을 훼손하려는 시도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팜플렛과 그 변형은 공화당의 반대자들에 의한 미국 남북 전쟁의 양측 지역 공동체에서 광범위하게 증쇄되었다. </p><p>영국의 <a>식민지</a>인 <a>메릴랜드주</a>는 최초로 반종독법 (1664)을 통과시켰다. 18세기, 19세기 및 20세기 초반에 많은 미국 국가는 종종 성경의 논란이 많은 해석, 특히 피네 하스 (Phinehas)의 이야기에 근거하여 반종독법을 통과 시켰습니다. 일반적으로 중범죄이며, 이 법은 다른 인종간의 결혼식의 엄숙함을 금지하고 그러한 의식을 집행하는 것을 금지했다. 때로는 결혼을 시도하는 개인이 스스로 위법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지는 않지만 <a>간통죄</a>나 간통죄에 대한 중죄 혐의가 대신 제기 될 수 있다. 뉴 햄프셔, 뉴욕, 뉴저지, 버몬트, 위스콘신, 미네소타, 알래스카, 하와이 및 연방 디스트릭트 컬럼비아 특별구는 <a>반종교법</a>을 통과하지 않았다. 1883년 미국의 대법원에 의해 Pace v. Alabama의 반종독법의 합헌성이 지지되었다. </p><p>1948년, 페레즈 대 샤프에 소재한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은 캘리포니아의 반종독법을 사실상 폐지하여 캘리포니아가 20세기에 최초의 국가가 되도록했다. 1967년, 16개 주에서 남은 반종교법은 버지니아 주 러빙 대법원에 위헌으로 선언되었다.<sup><a>&#91;2&#93;</a></sup> </p> <h2><span></span><span>다인종 인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브라질</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브라질에서는 인구의 44 %가 Prado(다 인종)로 분류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화이트, 블랙, 아메리칸의 혼합이다. </p> <h3><span></span><span>미국</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미국의 경우, <a>다민족</a> 미국 어린이의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다른 인종의 아이 <a>입양</a>과 마찬가지로 다른 인종간의 파트너십이 상승하고 있다. 1990년에는 18세와 19세의 약 14%, 20 세와 21 세의 12%, 34세와 35세의 7%가 인종 간 관계에 개입했다 (Joyner and Kao, 2005). 2010년 미국에서 새로운 결혼의 15%는 백인계 9%, 흑인 17%, <a>히스패닉</a>계 26%, 아시아계 미국인 28%가 다른 인종끼리 결혼했다. 2010년에 실시된 275,000건의 새로운 인종 간의 결혼 중 43%가 백인 남성, 14.4%가 백인 아시아 인종, 11.9%가 백인 흑인이었고 나머지는 다른 조합이었다.<sup><a>&#91;3&#93;</a></sup> </p> <h2><span></span><span>대안 시각</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인류 학자 헨리 하 운딩 (Henry Harpending)에 따르면, 한 인구로 융합하는 것과는 달리, 인구는 실제로 서로 갈라지고 있다. Harpending는 "인간 종족은 서로 멀리 진화하고 있습니다 [...] <a>유전자</a>는 유럽, 아시아 및 아프리카에서 빠르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거의 모든 것이 원산지 대륙에 고유합니다. 우리는 단일성이 없는 혼합된 인류로 합병되지 않고 덜 유사 해지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a>남반구</a> 빈곤 법 센터 (Southern Poverty Law Center)는 하인 팅의 작품과 인종에 관한 진술을 문서화했으며, <a>백인 우월주의</a>자 그룹과의 연관성과 그의 작업을 영속하려는 시도 과학적 인종 차별주의로 귀속화 시켰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a>파푸아 뉴기니</a>, "<a>볼티모어</a>"(아프리카 계 미국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동일한 유전적 기질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폭력, 게으름, 유럽인들과 북부 아시아 인들은 고도의 정보를 진화시켜 왔으며 당연시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징계를 받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FEMA 수용소를 사용하여 미국에서 <a>불법 이민</a>자를 대량 추방하는 것을 선호했고, 인종 차별이 불균형보다는 유전학에 근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국 교육에 더 많은 돈을 지출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sup><a>&#91;4&#93;</a></sup>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cite><a>&#8220;Race of the future&#8221;</a> (영어). 2017년 12월 11일.</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91;윤희영의 News English&#93; '징글벨'에 얽힌 인종차별 역사&#8221;</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백인 우월' 시위에도 미국 사회의 다문화화는 역사적 대세<span>"</span>&#8221;</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91;공존의 위기 분쟁의 미래&#93; 인종청소 40년… 벼랑 끝에 선 로힝야&#8221;</a>.</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ol></div></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미래의_인종&amp;oldid=24206846</a>"</div> <div><div><a>분류</a>: <ul><li><a>미래</a></li><li><a>예측</a></li><li><a>사회변동</a></li><li><a>이론</a></li><li><a>미래학</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CS1 - 영어 인용 (en)</a></li><li><a>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2017년 12월</a></li><li><a>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모든 문서</a></li><li><a>전체의 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English</a></li><li><a>Bahasa Indonesia</a></li><li><a>Italiano</a></li><li><a>Português</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6:3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영국의 식민지이며 1664년에 최초로 반종독법을 통과시킨 곳은?
메릴랜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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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식민지이며 1664년에 최초로 반종독법을 통과시킨 곳은?", "미국의 대법원에 의해 반종독법의 합헌성이 지지된 년도는?", "식민지 메릴랜드주가 최초로 반종독법을 통과시킨 해는?", "반종독법은 성경의 논란이 많은 해석 중 특히 누구의 이야기에 근거하여 통과되었나?", "미국 대법원에 의해 Pace v. Alabama의 반종독법의 합헌성이 지지된 해는?", "메릴랜드주가 1664년에 최초로 통과시킨 법은?", "반종독법은 일반적으로 얼마나 무거운 죄에 해당하는가?", "인구는 서로 갈라지고 있고, 인간 종족은 서로 멀리 진화하고 있다고 주장한 인류 학자는 누구인가?", "인류가 하나의 인류로 융합하며 진화하지 않고 실제로는 갈라져서 진화한다고 주장하는 인류학자는?" ]
<!DOCTYPE html> 미래의 인종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미래의 인종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d></td><td>이 글의 중립성에 대한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주관적인 내용이나 감정적인 표현은 없는지, 고려할 가치가 있는 여러 관점이 편견 없이 공정하게 반영되었는지 확인해 주세요. (2017년 12월)</td></tr></tbody></table> 미래의 인종은 진행 중인 인종적 혼합에 기인한 이론적인 복합 인종이다.[1] 리차드 폰 쿠덴 호브 칼레 기(Richard von Coudenhove-Kalergi)는 1925년에 실용 주의적 사고에서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 "미래의 사람은 혼혈이 되어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인종과 계급은 공간, 시간, 편견이 사라짐에 따라 점차 사라질 것입니다. 미래는 사람들의 다양성을 개인의 다양성으로 대체 할 것입니다. " 목차 1 역사 2 다인종 인구 2.1 브라질 2.2 미국 3 대안 시각 4 각주 역사[편집] 고트 프리드 드 퍼커 (Gottfried de Purucker)는 1930년 다른 인종간의 결혼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매우 간단하게 질문에 대답하면 간단히 말해서 나는 다른 인종간의 결혼을 제안 할 때는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면 미래의 인종은 오늘날 지구상의 여러 인종으로 구성된 합성물이 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궁극적으로 한 종족인 것을 기억하십시오. "라고 말했다. 단어 "miscegenation"는 1863 년 후반에 뉴욕시에서 인쇄 된 익명의 선전 팜플렛에 사용되었는데, Miscegenation : 인종 혼합의 이론, 미국의 백인과 흑인에게 적용됨. 이 팸플릿은 인종과 뚜렷이 섞여 있지 않을 때까지 백인과 흑인의 이종 번식에 찬성한다고 주장하면서 이것이 미국 공화당의 목표라고 주장했다. 진짜 저자는 데이비드 굿맨 크로리 (David Goodman Croly), 민주당 신문 뉴욕 월드 (New York World) 편집장, 세계 기자 조지 워켄 먼 (George Wakeman) 편집장이었다. 팜플렛은 곧 백인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두려움과 인종 차별을 이용하여 공화당, 링컨 행정부, 노예제 폐지 운동에 대한 신용을 훼손하려는 시도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팜플렛과 그 변형은 공화당의 반대자들에 의한 미국 남북 전쟁의 양측 지역 공동체에서 광범위하게 증쇄되었다. 영국의 식민지인 메릴랜드주는 최초로 반종독법 (1664)을 통과시켰다. 18세기, 19세기 및 20세기 초반에 많은 미국 국가는 종종 성경의 논란이 많은 해석, 특히 피네 하스 (Phinehas)의 이야기에 근거하여 반종독법을 통과 시켰습니다. 일반적으로 중범죄이며, 이 법은 다른 인종간의 결혼식의 엄숙함을 금지하고 그러한 의식을 집행하는 것을 금지했다. 때로는 결혼을 시도하는 개인이 스스로 위법 행위로 유죄 판결을 받지는 않지만 간통죄나 간통죄에 대한 중죄 혐의가 대신 제기 될 수 있다. 뉴 햄프셔, 뉴욕, 뉴저지, 버몬트, 위스콘신, 미네소타, 알래스카, 하와이 및 연방 디스트릭트 컬럼비아 특별구는 반종교법을 통과하지 않았다. 1883년 미국의 대법원에 의해 Pace v. Alabama의 반종독법의 합헌성이 지지되었다. 1948년, 페레즈 대 샤프에 소재한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은 캘리포니아의 반종독법을 사실상 폐지하여 캘리포니아가 20세기에 최초의 국가가 되도록했다. 1967년, 16개 주에서 남은 반종교법은 버지니아 주 러빙 대법원에 위헌으로 선언되었다.[2] 다인종 인구[편집] 브라질[편집] 브라질에서는 인구의 44 %가 Prado(다 인종)로 분류된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화이트, 블랙, 아메리칸의 혼합이다. 미국[편집] 미국의 경우, 다민족 미국 어린이의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다른 인종의 아이 입양과 마찬가지로 다른 인종간의 파트너십이 상승하고 있다. 1990년에는 18세와 19세의 약 14%, 20 세와 21 세의 12%, 34세와 35세의 7%가 인종 간 관계에 개입했다 (Joyner and Kao, 2005). 2010년 미국에서 새로운 결혼의 15%는 백인계 9%, 흑인 17%, 히스패닉계 26%, 아시아계 미국인 28%가 다른 인종끼리 결혼했다. 2010년에 실시된 275,000건의 새로운 인종 간의 결혼 중 43%가 백인 남성, 14.4%가 백인 아시아 인종, 11.9%가 백인 흑인이었고 나머지는 다른 조합이었다.[3] 대안 시각[편집] 인류 학자 헨리 하 운딩 (Henry Harpending)에 따르면, 한 인구로 융합하는 것과는 달리, 인구는 실제로 서로 갈라지고 있다. Harpending는 "인간 종족은 서로 멀리 진화하고 있습니다 [...] 유전자는 유럽, 아시아 및 아프리카에서 빠르게 진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거의 모든 것이 원산지 대륙에 고유합니다. 우리는 단일성이 없는 혼합된 인류로 합병되지 않고 덜 유사 해지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다. 남반구 빈곤 법 센터 (Southern Poverty Law Center)는 하인 팅의 작품과 인종에 관한 진술을 문서화했으며, 백인 우월주의자 그룹과의 연관성과 그의 작업을 영속하려는 시도 과학적 인종 차별주의로 귀속화 시켰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파푸아 뉴기니, "볼티모어"(아프리카 계 미국인)는 아프리카계 미국인과 동일한 유전적 기질을 갖고 있다고 말하면서 "폭력, 게으름, 유럽인들과 북부 아시아 인들은 고도의 정보를 진화시켜 왔으며 당연시되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징계를 받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FEMA 수용소를 사용하여 미국에서 불법 이민자를 대량 추방하는 것을 선호했고, 인종 차별이 불균형보다는 유전학에 근거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국 교육에 더 많은 돈을 지출해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4] 각주[편집] ↑ “Race of the future” (영어). 2017년 12월 11일.  ↑ “[윤희영의 News English] '징글벨'에 얽힌 인종차별 역사”.  ↑ “"'백인 우월' 시위에도 미국 사회의 다문화화는 역사적 대세"”.  ↑ “[공존의 위기 분쟁의 미래] 인종청소 40년… 벼랑 끝에 선 로힝야”.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미래의_인종&amp;oldid=24206846" 분류: 미래예측사회변동이론미래학숨은 분류: CS1 - 영어 인용 (en)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2017년 12월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모든 문서전체의 중립성에 이의가 제기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Bahasa IndonesiaItalianoPortuguê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6:3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미래의 인종 요약** '미래의 인종'은 인종적 혼합에 기반한 이론적 개념으로, 리차드 폰 쿠덴 호브 칼레 기가 1925년에 예측한 바에 따르면, 미래의 사람들은 혼혈이 될 것이며, 인종과 계급의 경계가 사라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주요 인물:** - 리차드 폰 쿠덴 호브 칼레 기: 미래의 인종에 대한 예측을 한 인물. - 고트 프리드 드 퍼커: 인종 간 결혼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인물. **주요 사건:** - 1863년, 'miscegenation'이라는 용어가 인종 혼합을 지지하는 팜플렛에서 사용됨. - 1664년, 메릴랜드주에서 최초의 반종독법 통과. - 1948년, 캘리포니아주 대법원이 반종독법을 폐지. - 1967년, 버지니아주 러빙 대법원에서 남은 반종독법이 위헌으로 선언됨. **배경:** 미국과 브라질에서 다인종 인구가 증가하고 있으며, 특히 미국에서는 인종 간 결혼 비율이 상승하고 있다. 2010년에는 새로운 결혼의 15%가 인종 간 결혼이었다. **갈등 구조:** - 인종 간 결혼과 혼합에 대한 사회적 저항과 법적 제약이 존재했으며, 이는 인종 차별과 관련된 역사적 맥락에서 발생했다. - 헨리 하 운딩은 인류가 서로 갈라지고 있다고 주장하며, 인종 간 혼합에 대한 반대 시각을 제시한다. 그의 주장은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연관되어 비판받고 있다. 이 문서는 인종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역사적 맥락을 다루고 있으며, 인종 간 혼합의 증가와 그에 따른 사회적 갈등을 탐구하고 있다.
다음 텍스트를 읽고 독자가 처음 접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해줘. 주요 인물, 사건, 배경, 갈등 구조 등을 빠짐없이 담되, 문장은 간결하게 유지해줘.
스크류어택
https://ko.wikipedia.org/wiki/스크류어택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스크류어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스크류어택</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tbody><tr> <th colspan="2"><div><div><img></div><span><big>스크류어택<br><small>(skrewattack)</small></big><br></span></div> </th></tr> <tr> <th colspan="2">기본 정보 </th></tr> <tr> <th>국가 </th> <td><span><a><img></a></span> <a>대한민국</a> </td></tr> <tr> <th>장르 </th> <td><a>록</a><br><a>파워 팝</a><br><a>펑크 록</a><br><a>일렉트로 펑크</a><br><a>댄스 펑크</a> </td></tr> <tr> <th>활동 시기 </th> <td><a>1998년</a> ~ 현재 </td></tr> <tr> <th>레이블 </th> <td><a>Locksmith Music</a> </td></tr> <tr> <td colspan="2"><b>구성원</b> </td></tr> <tr> <td colspan="2">고연경<br>황정익<br>한솔 </td></tr> <tr> <td colspan="2"><b>이전 구성원</b> </td></tr> <tr> <td colspan="2">이응균 </td></tr></tbody></table> <p><b>스크류어택</b>(<span>skrew attack</span>)은 <a>1998년</a> <a>대한민국</a>의 <a>서울특별시</a>에서 결성된 3인조 펑크밴드다. 2005년말 보컬리스트 고연경이 합류하면서 재정비를 한후 몇 가지의 포지션 변동 후 현재 밴드의 색깔로 자리잡혔다. 2006년에 밴드통산 두 번째스플릿 EP앨범을 내며 본격적인 라인업으로 시동을 걸었고, 2008년말 10여년의 여정의 첫 번째 풀렝스 정규앨범을 발매했다. 현재 구성원은 고연경(건반)(보컬), 황정익(기타)(코러스), 한솔(베이스)(코러스), 이응균(드럼)으로 구성되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개요</span></a></li> <li><a><span>2</span> <span>역사</span></a></li> <li><a><span>3</span> <span>구성원</span></a> <ul> <li><a><span>3.1</span> <span>전 구성원</span></a></li> </ul> </li> <li><a><span>4</span> <span>음반 목록</span></a> <ul> <li><a><span>4.1</span> <span>스튜디오 앨범</span></a></li> <li><a><span>4.2</span> <span>EP</span></a></li> <li><a><span>4.3</span> <span>V/A</span></a></li> </ul> </li> <li><a><span>5</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개요</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2> <ul><li>1998년 18크럭 출신의 베이스, 황정익과 조천호, 박태식을 중심으로 결성</li> <li>2000년 코믹스 레이블의 정치풍자 컴필레이션앨범 [V/A] 개판오분전 참여 심의에 걸려 무산</li> <li>2001년 자신들의 레이블 Beach 'n' Bitch 설립후 프로펠러21과 첫 번째 스플릿 ep 발매</li> <li>2003년 스컹크 레이블의 We Are The Punx 컴필앨범 발매 및뮤직비디오 촬영</li> <li>2004년 배다른형제 레이블의 Save Your Mind 컴필앨범 발매</li> <li>2006년 신가야 레이블의 벤젠과의 스플릿 앨범 발매</li> <li>2007년 첫 번째 풀렝스 녹음</li> <li>2008년 12월 앨범 발매</li></ul> <h2><span></span><span>역사</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2> <p>1998년 같이 스케잇보드를 타면서 만난 멤버 기타/코러스 조천호,드럼 박태식, 베이스/보컬 황정익으로 구성된 3인조구성으로 서울에서 결성. 밴드초기 Lagwagon, Bad Relligion,No Use For A Name, Face To Face, Satanic Surfers, Strung Out,NOFX같은 Sk8rock밴드들을 표방하며 여러 인디록밴드,펑크밴드들을 모티브로삼고 활동중,2000년 퍼포먼스 쇼크록밴드 이발쇼포르노씨의 레이블 코믹스레코드에서 Belly Button이라는 노래를 레코딩했으나 심의에걸려 무기한 연기됨. </p><p>99년말 박태식 탈퇴후 "들뜬마음가라앉히고"(현 popstore)의 드러머 전민확 과 2000년초 기타 이광재(ex - 쇠파이프, 현 Hollow Jan)를영입 4인조 라인업으로 교체 서울,대구 등 여러지방 투어하며 수많은 라이브를 라이브를 가짐. 그리고 2001년 3월 비슷한 류의 펑크밴드 Propeller 21과 그들의 첫 싱글 이자 6곡짜리 스플릿 앨범 Skrew Attack/Propeller21 - In store 를 자신의 레이블 Beach And Bitch Records 에서 발매. 그후로 조천호 전민확 군대에 끌려감. 드러머 조상현[ex)Propeller21현,RUX]을 영입 2001년말 이광재 탈퇴.2002년초 이광재 재영입(2002년중순 이광재는 결국 탈퇴) </p><p>스카펑크밴드 Beach Valley의 기타 명권의 세션으로 곡작업과 라이브를 재개 Skunk label의 컴필래이션 시리즈 We Are The Punx(2003)에 "Drama"라는 곡으로참여 2003년 5월 조천호의 군제대 스크류어택 다시 합류. 보더들의 헌정 음반 Save Your Mind(2003)에 "Letter That From Past, Sk8 song" 참여. 2003년말 조상현 탈퇴,명권 비치벨리로 돌아감. 잠정적으로 밴드해체선언 , 2004년 3월 기타 이현희 영입 [ex)Stunning Down 현,RUX] Beach Valley의 드러머 류해원 세션영입. 밴드재결성 활동 , 이현희. 조천호 2004년 말 탈퇴. </p><p>Beach Valley의 보컬겸트럼본 창민을 보컬로 영입. 창민의 같은학교후배 기타 이영훈 영입. 드러머 강태근[ex)Counter Reset] 영입. 기타 이성동 [ex)Two Town.버져비터] 영입. 창민 탈퇴, 보컬 오디션중 만난 여성보컬 정지하 영입. 그러나 구색에안맞아 팀에오래있지못함, 노브레인 이성우의 소개로 만난 여성보컬 고연경 영입. 2005년말 이성동 강태근 탈퇴 벤젠의 보컬겸기타 이승윤의 소개로만난 안병욱 영입. 그러나 밴드 에 적응하지못한 병욱을 내보냄. </p><p>비치벨리와 레이지본등을 거쳐, 현재 카피머신에 재적중인 드러머 류해원의 세션으로 2006년 5월 Benzene의 자체레이블 Singuaya Records 에서 벤젠의 이승윤의 감독하에 "Skrew Attack / Benzene Split Ep 발매" 황정익의 어렸을적 오랜친구인 박길연의 동생 베이스 박건률을 영입. 건률의 소개 로 만난 드러머 안승훈 영입. 황정익 기타로 포지션전환, 베이스 건률 학교생활에 대한 이유로탈퇴. 기타 이영훈 베이스로 포지션전환, 2006년 9월 드러머 안승훈 개인사정에의해서 탈퇴. 2006년 12월 가수 이승철방송세션등 드럼강사활동을하던 드러머 이용훈 영입 다시 활동재개. 2007년 5월 밴드에 적응을 잘 못하는 이유로 이용훈 내보냄. 2007년 5월 전GUMX 출신의 드러머 이응균 영입. 2008년 4월 멤버들의 불화로 베이시스트 이영훈을 내보냄. 2009년 1월 에어백의 베이시스트였던 한솔군을 영입. </p> <h2><span></span><span>구성원</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2> <ul><li>고연경(RAT) - <a>보컬</a>, <a>신시사이저</a></li> <li>황정익(Toby) - <a>기타</a>, <a>프로그래밍</a>, <a>코러스</a></li> <li>한솔(Sol) - <a>베이스</a>, <a>코러스</a></li></ul> <h3><span></span><span>전 구성원</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3> <ul><li>이응균(Eung.Lee) - <a>드럼</a> ( ~2011년)</li> <li>장창민 - <a>보컬</a>, <a>트럼본</a> (2005년)</li> <li>정지하 - <a>보컬</a> (2005년~2006년)</li> <li>박건률 - <a>베이스</a> (2006년)</li> <li>이영훈 - <a>기타</a>, <a>베이스</a>, <a>코러스</a> (2005년~2007년)</li> <li>박태식 - <a>드럼</a> (1998년~1999년)</li> <li>전민확 - <a>드럼</a> (1999년~2001년)</li> <li>조상현 - <a>드럼</a> (2001년~2004년)</li> <li>류해원 - <a>드럼</a> (2006년 세션)</li> <li>강태근 - <a>드럼</a> (2005년~2006년)</li> <li>이용훈 - <a>드럼</a> (2006년)</li> <li>안승훈 - <a>드럼</a> (2006년~2007년)</li> <li>이광재 - <a>기타</a>, <a>코러스</a> (1999년~2002년)</li> <li>조천호 - <a>기타</a>, <a>코러스</a> (1998년~2004년)</li> <li>이현희 - <a>기타</a>, <a>코러스</a> (2003년~2004년)</li> <li>이성동 - <a>기타</a>, <a>코러스</a> (2005년~2006년)</li> <li>이광수 - <a>기타</a> (2007년 세션)</li></ul> <h2><span></span><span>음반 목록</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스튜디오 앨범</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3> <table> <tbody><tr> <th rowspan="1">연도 </th> <th rowspan="1">음반 </th></tr> <tr> <td>2008 </td> <td><i>Not Enough Translation</i> <ul><li><small>Release: Descember 23, 2008</small></li> <li><small>Formats: <a>CD</a>, <a>디지털 음원</a></small></li></ul> </td></tr></tbody></table> <h3><span>EP</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3> <table> <tbody><tr> <th rowspan="1">Year </th> <th rowspan="1">Album </th> <th rowspan="1">Tracklisting </th></tr> <tr> <td>2001 </td> <td><i>Skrewattack Propeller21 Split - In store</i> <ul><li>Released: —, <a>2001</a></li> <li>Formats: <a>CD</a>, <a>디지털 음원</a></li></ul> </td> <td><small>1. My Dad</small><br><small>2. Something Really Hard To Select</small><br><small>3. Innocent Man</small> </td></tr> <tr> <td rowspan="2"><center>2006</center> </td> <td><i>Skrewattack Benzene Split</i> <ul><li>Released: —, <a>2006</a></li> <li>Formats: <a>CD</a>, <a>디지털 음원</a></li></ul> </td> <td><small>1. Don't Know What You Mean</small><br><small>2. Take It Away</small><br>3. Not Yet </td></tr> </tbody></table> <h3><span></span><span>V/A</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3> <table> <tbody><tr> <th rowspan="1">Year </th> <th rowspan="1">Album </th> <th rowspan="1">Tracklisting </th></tr> <tr> <td>2000 </td> <td><i>개판오분전</i> <ul><li>Released: —, <a>2000</a></li> <li>Formats: <a>CD</a>, <a>Tape</a></li></ul> </td> <td><small> Belly Button </small> </td></tr> <tr> <td rowspan="1"><center>2003</center> </td> <td><i>We Are The Punx</i> <ul><li>Released: —, <a>2003</a></li> <li>Formats: <a>CD</a>, <a>디지털 음원</a></li></ul> </td> <td><small> Drama</small> </td></tr> <tr> <td rowspan="2"><center>2004</center> </td> <td><i>Save Your Mind</i> <ul><li>Released: —, <a>2004</a></li> <li>Formats: <a>CD</a>, <a>디지털 음원</a></li></ul> </td> <td><small> 1.Sk8 Song <br> 2.The Letter From The Past</small> </td></tr> </tbody></table>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원본 편집</a><span>]</span></span></h2> <ul><li><a>스크류어택 공식 마이스페이스</a></li> <li><a>스크류어택 싸이월드 클럽</a></li> <li><a>공식트위터</a></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스크류어택&amp;oldid=22824992</a>"</div> <div><div><a>분류</a>: <ul><li><a>대한민국의 록 밴드</a></li><li><a>대한민국의 펑크 록 밴드</a></li><li><a>1998년 결성된 음악 그룹</a></li><li><a>2008년 데뷔</a></li><li><a>3인조 음악 그룹</a></li><li><a>혼성 음악 그룹</a></li><li><a>2000년대 음악 그룹</a></li><li><a>2010년대 음악 그룹</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원본 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ul> <div><span><a>링크 추가</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8년 10월 21일 (일) 10:4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스크류어택이 Skunk label의 컴필래이션 시리즈에 참여한 곡명은?
Dr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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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크류어택이 Skunk label의 컴필래이션 시리즈에 참여한 곡명은?", "스크류어택의 세션으로 활동했던 기타리스트 명권의 본래 소속 그룹은?", "스크류어택이 Skunk label의 컴필래이션 시리즈에 참여한 곡의 이름은?", "스크류어택이 잠정적으로 밴드해체를 선언한 년도는?", "스크류어택에서 베이스로 악기를 바꾼 이영훈이 원래 다루던 악기는?", "스크류어택에서 이용훈을 내보낸 뒤 새로 영입한 드러머는?", "스크류어택의 베이시스트였던 박건률의 형은 누구인가?", "2009년 스크류어택이 영입한 베이시스트 한솔은 어느 그룹 소속이었는가?", "2006년 베이스로 영입된 멤버의 이름은?", "2007년 5월 영입된 드러머 이응균이 전에 소속되어 있던 그룹의 이름은?" ]
<!DOCTYPE html> 스크류어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스크류어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tbody><tr> <th colspan="2">스크류어택(skrewattack) </th></tr> <tr> <th colspan="2">기본 정보 </th></tr> <tr> <th>국가 </th> <td> 대한민국 </td></tr> <tr> <th>장르 </th> <td>록파워 팝펑크 록일렉트로 펑크댄스 펑크 </td></tr> <tr> <th>활동 시기 </th> <td>1998년 ~ 현재 </td></tr> <tr> <th>레이블 </th> <td>Locksmith Music </td></tr> <tr> <td colspan="2">구성원 </td></tr> <tr> <td colspan="2">고연경황정익한솔 </td></tr> <tr> <td colspan="2">이전 구성원 </td></tr> <tr> <td colspan="2">이응균 </td></tr></tbody></table> 스크류어택(skrew attack)은 1998년 대한민국의 서울특별시에서 결성된 3인조 펑크밴드다. 2005년말 보컬리스트 고연경이 합류하면서 재정비를 한후 몇 가지의 포지션 변동 후 현재 밴드의 색깔로 자리잡혔다. 2006년에 밴드통산 두 번째스플릿 EP앨범을 내며 본격적인 라인업으로 시동을 걸었고, 2008년말 10여년의 여정의 첫 번째 풀렝스 정규앨범을 발매했다. 현재 구성원은 고연경(건반)(보컬), 황정익(기타)(코러스), 한솔(베이스)(코러스), 이응균(드럼)으로 구성되었다. 목차 1 개요 2 역사 3 구성원 3.1 전 구성원 4 음반 목록 4.1 스튜디오 앨범 4.2 EP 4.3 V/A 5 외부 링크 개요[원본 편집] 1998년 18크럭 출신의 베이스, 황정익과 조천호, 박태식을 중심으로 결성 2000년 코믹스 레이블의 정치풍자 컴필레이션앨범 [V/A] 개판오분전 참여 심의에 걸려 무산 2001년 자신들의 레이블 Beach 'n' Bitch 설립후 프로펠러21과 첫 번째 스플릿 ep 발매 2003년 스컹크 레이블의 We Are The Punx 컴필앨범 발매 및뮤직비디오 촬영 2004년 배다른형제 레이블의 Save Your Mind 컴필앨범 발매 2006년 신가야 레이블의 벤젠과의 스플릿 앨범 발매 2007년 첫 번째 풀렝스 녹음 2008년 12월 앨범 발매 역사[원본 편집] 1998년 같이 스케잇보드를 타면서 만난 멤버 기타/코러스 조천호,드럼 박태식, 베이스/보컬 황정익으로 구성된 3인조구성으로 서울에서 결성. 밴드초기 Lagwagon, Bad Relligion,No Use For A Name, Face To Face, Satanic Surfers, Strung Out,NOFX같은 Sk8rock밴드들을 표방하며 여러 인디록밴드,펑크밴드들을 모티브로삼고 활동중,2000년 퍼포먼스 쇼크록밴드 이발쇼포르노씨의 레이블 코믹스레코드에서 Belly Button이라는 노래를 레코딩했으나 심의에걸려 무기한 연기됨. 99년말 박태식 탈퇴후 "들뜬마음가라앉히고"(현 popstore)의 드러머 전민확 과 2000년초 기타 이광재(ex - 쇠파이프, 현 Hollow Jan)를영입 4인조 라인업으로 교체 서울,대구 등 여러지방 투어하며 수많은 라이브를 라이브를 가짐. 그리고 2001년 3월 비슷한 류의 펑크밴드 Propeller 21과 그들의 첫 싱글 이자 6곡짜리 스플릿 앨범 Skrew Attack/Propeller21 - In store 를 자신의 레이블 Beach And Bitch Records 에서 발매. 그후로 조천호 전민확 군대에 끌려감. 드러머 조상현[ex)Propeller21현,RUX]을 영입 2001년말 이광재 탈퇴.2002년초 이광재 재영입(2002년중순 이광재는 결국 탈퇴) 스카펑크밴드 Beach Valley의 기타 명권의 세션으로 곡작업과 라이브를 재개 Skunk label의 컴필래이션 시리즈 We Are The Punx(2003)에 "Drama"라는 곡으로참여 2003년 5월 조천호의 군제대 스크류어택 다시 합류. 보더들의 헌정 음반 Save Your Mind(2003)에 "Letter That From Past, Sk8 song" 참여. 2003년말 조상현 탈퇴,명권 비치벨리로 돌아감. 잠정적으로 밴드해체선언 , 2004년 3월 기타 이현희 영입 [ex)Stunning Down 현,RUX] Beach Valley의 드러머 류해원 세션영입. 밴드재결성 활동 , 이현희. 조천호 2004년 말 탈퇴. Beach Valley의 보컬겸트럼본 창민을 보컬로 영입. 창민의 같은학교후배 기타 이영훈 영입. 드러머 강태근[ex)Counter Reset] 영입. 기타 이성동 [ex)Two Town.버져비터] 영입. 창민 탈퇴, 보컬 오디션중 만난 여성보컬 정지하 영입. 그러나 구색에안맞아 팀에오래있지못함, 노브레인 이성우의 소개로 만난 여성보컬 고연경 영입. 2005년말 이성동 강태근 탈퇴 벤젠의 보컬겸기타 이승윤의 소개로만난 안병욱 영입. 그러나 밴드 에 적응하지못한 병욱을 내보냄. 비치벨리와 레이지본등을 거쳐, 현재 카피머신에 재적중인 드러머 류해원의 세션으로 2006년 5월 Benzene의 자체레이블 Singuaya Records 에서 벤젠의 이승윤의 감독하에 "Skrew Attack / Benzene Split Ep 발매" 황정익의 어렸을적 오랜친구인 박길연의 동생 베이스 박건률을 영입. 건률의 소개 로 만난 드러머 안승훈 영입. 황정익 기타로 포지션전환, 베이스 건률 학교생활에 대한 이유로탈퇴. 기타 이영훈 베이스로 포지션전환, 2006년 9월 드러머 안승훈 개인사정에의해서 탈퇴. 2006년 12월 가수 이승철방송세션등 드럼강사활동을하던 드러머 이용훈 영입 다시 활동재개. 2007년 5월 밴드에 적응을 잘 못하는 이유로 이용훈 내보냄. 2007년 5월 전GUMX 출신의 드러머 이응균 영입. 2008년 4월 멤버들의 불화로 베이시스트 이영훈을 내보냄. 2009년 1월 에어백의 베이시스트였던 한솔군을 영입. 구성원[원본 편집] 고연경(RAT) - 보컬, 신시사이저 황정익(Toby) - 기타, 프로그래밍, 코러스 한솔(Sol) - 베이스, 코러스 전 구성원[원본 편집] 이응균(Eung.Lee) - 드럼 ( ~2011년) 장창민 - 보컬, 트럼본 (2005년) 정지하 - 보컬 (2005년~2006년) 박건률 - 베이스 (2006년) 이영훈 - 기타, 베이스, 코러스 (2005년~2007년) 박태식 - 드럼 (1998년~1999년) 전민확 - 드럼 (1999년~2001년) 조상현 - 드럼 (2001년~2004년) 류해원 - 드럼 (2006년 세션) 강태근 - 드럼 (2005년~2006년) 이용훈 - 드럼 (2006년) 안승훈 - 드럼 (2006년~2007년) 이광재 - 기타, 코러스 (1999년~2002년) 조천호 - 기타, 코러스 (1998년~2004년) 이현희 - 기타, 코러스 (2003년~2004년) 이성동 - 기타, 코러스 (2005년~2006년) 이광수 - 기타 (2007년 세션) 음반 목록[원본 편집] 스튜디오 앨범[원본 편집] <table> <tbody><tr> <th rowspan="1">연도 </th> <th rowspan="1">음반 </th></tr> <tr> <td>2008 </td> <td>Not Enough Translation Release: Descember 23, 2008 Formats: CD, 디지털 음원 </td></tr></tbody></table> EP[원본 편집] <table> <tbody><tr> <th rowspan="1">Year </th> <th rowspan="1">Album </th> <th rowspan="1">Tracklisting </th></tr> <tr> <td>2001 </td> <td>Skrewattack Propeller21 Split - In store Released: —, 2001 Formats: CD, 디지털 음원 </td> <td>1. My Dad2. Something Really Hard To Select3. Innocent Man </td></tr> <tr> <td rowspan="2">2006 </td> <td>Skrewattack Benzene Split Released: —, 2006 Formats: CD, 디지털 음원 </td> <td>1. Don't Know What You Mean2. Take It Away3. Not Yet </td></tr> </tbody></table> V/A[원본 편집] <table> <tbody><tr> <th rowspan="1">Year </th> <th rowspan="1">Album </th> <th rowspan="1">Tracklisting </th></tr> <tr> <td>2000 </td> <td>개판오분전 Released: —, 2000 Formats: CD, Tape </td> <td> Belly Button </td></tr> <tr> <td rowspan="1">2003 </td> <td>We Are The Punx Released: —, 2003 Formats: CD, 디지털 음원 </td> <td> Drama </td></tr> <tr> <td rowspan="2">2004 </td> <td>Save Your Mind Released: —, 2004 Formats: CD, 디지털 음원 </td> <td> 1.Sk8 Song 2.The Letter From The Past </td></tr> </tbody></table> 외부 링크[원본 편집] 스크류어택 공식 마이스페이스 스크류어택 싸이월드 클럽 공식트위터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스크류어택&amp;oldid=22824992" 분류: 대한민국의 록 밴드대한민국의 펑크 록 밴드1998년 결성된 음악 그룹2008년 데뷔3인조 음악 그룹혼성 음악 그룹2000년대 음악 그룹2010년대 음악 그룹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링크 추가 이 문서는 2018년 10월 21일 (일) 10:4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스크류어택 (Skrewattack) 요약 1. **결성 및 초기 활동 (1998-2001)** - 1998년, 서울에서 황정익, 조천호, 박태식이 중심이 되어 3인조 펑크밴드 결성. - 초기에는 Lagwagon, Bad Religion 등 스케이트 록 밴드를 모티브로 활동. - 2000년, 정치풍자 컴필레이션 앨범 참여 시도했으나 심의에 걸려 무산. - 2001년, 레이블 Beach 'n' Bitch 설립 후 첫 스플릿 EP 발매. 2. **구성원 변화 및 재편성 (2001-2005)** - 2001년, 조천호와 전민확 군입대 후 드러머 조상현 영입. - 2004년, 여러 구성원 변화 후 밴드 해체 선언. - 2005년, 여성 보컬 고연경 영입 및 재편성. 3. **활동 재개 및 앨범 발매 (2006-2008)** - 2006년, 스플릿 EP 발매 및 새로운 드러머 이응균 영입. - 2007년, 첫 번째 풀렝스 앨범 녹음 시작. - 2008년 12월, 첫 번째 정규 앨범 "Not Enough Translation" 발매. 4. **현재 구성원** - 고연경 (보컬, 신시사이저), 황정익 (기타, 코러스), 한솔 (베이스, 코러스). - 이전 구성원으로는 이응균 (드럼), 장창민 (보컬), 정지하 (보컬) 등이 있음. 5. **음반 목록** - **스튜디오 앨범**: 2008년 "Not Enough Translation". - **EP**: 2001년 "Skrewattack Propeller21 Split", 2006년 "Skrewattack Benzene Split". - **V/A**: 2000년 "개판오분전", 2003년 "We Are The Punx", 2004년 "Save Your Mind". 이 요약은 스크류어택의 결성부터 현재까지의 주요 사건과 변화를 시간순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텍스트 내용을 시간순 또는 인과관계 순으로 재배열해서 요약해줘. 사건의 흐름이나 논리 전개 순서를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줘.
김춘택
https://ko.wikipedia.org/wiki/김춘택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김춘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김춘택</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div><div><a><img></a> <div><div><a></a></div>김춘택</div></div></div><p>‎ </p><p><b>김춘택</b>(金春澤, <a>1670년</a> ~ <a>1717년</a>)은 <a>조선</a>후기의 문신, 외척, 작가이다. 자(字)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 본관은 <a>광산</a>이다. 숙종의 장인 <a>김만기</a>의 손자이다. 종조부인 <a>김만중</a>의 문하생이다.<sup><a>&#91;1&#93;</a></sup> </p><p><a>인경왕후</a>의 친정 조카로, 당색은 <a>서인</a>이었다가 <a>노론</a>이 되었다. <a>인현왕후</a> 민씨의 복위에 공을 세웠으나, <a>희빈 장씨</a>의 오빠 <a>장희재</a>의 처와 간통한 뒤 그로부터 정보를 빼돌렸고 이때문에 <a>소론</a>과 <a>남인</a>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a>장희재</a>를 제거하려는 과정에서 세자에게 위협을 가하려 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a>제주도</a>로 유배된다. 고종 때 복권 되어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로 추증되고 광령군(光寧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문이다. </p><p>김춘택은 벼슬이 없는 상태에서 노론의 환국 모의를 주도했다. <a>장희재</a>의 처를 통해 <a>남인</a> 내부의 중요 정보를 획득하여 결국 환국에는 성공<sup><a>&#91;2&#93;</a></sup>했으나 그 방법이 옳지 못했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귀양까지 가야 했다.<sup><a>&#91;3&#93;</a></sup> 종조부 <a>김만중</a>의 문집을 <a>한자</a>로 번역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 <ul> <li><a><span>1.1</span> <span>생애 초반</span></a></li> <li><a><span>1.2</span> <span>남인 제거 계획</span></a> <ul> <li><a><span>1.2.1</span> <span>비밀 계획</span></a></li> <li><a><span>1.2.2</span> <span>첩보와 투옥, 정권탈환에 성공</span></a></li> </ul> </li> <li><a><span>1.3</span> <span>비판과 유배</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작품</span></a></li> <li><a><span>3</span> <span>사후</span></a></li> <li><a><span>4</span> <span>가족 관계</span></a></li> <li><a><span>5</span> <span>영조 김춘택 아들설 음모론</span></a></li> <li><a><span>6</span> <span>관련 작품</span></a> <ul> <li><a><span>6.1</span> <span>드라마</span></a></li> </ul> </li> <li><a><span>7</span> <span>저서와 작품</span></a> <ul> <li><a><span>7.1</span> <span>저서</span></a></li> <li><a><span>7.2</span> <span>작품</span></a></li> </ul> </li> <li><a><span>8</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9</span> <span>관련 항목</span></a></li> <li><a><span>10</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h2> <h3><span></span><span>생애 초반</span></h3> <p>아버지는 <a>인경왕후</a>의 친정 오빠인 경헌공(景獻公) <a>진구</a>(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a>한산 이씨</a>로 <a>지평</a> <a>광직</a>(光稷)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종조부인 <a>김만중</a>에게 문장을 배웠는데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여 <a>김수항</a>의 탄복을 받았다고 한다. 문장과 재기가 구비하여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훈신과 적장자를 우대하는 전례에 따라 일찍이 음서로 출사하여 대호군에 제수되었다. </p><p>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으로 쫓겨난 서인들은 <a>숙빈 최씨</a>가 낳은 왕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왕자는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sup><a>&#91;3&#93;</a></sup> 그러나 서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문록』은 왕비 장씨가 후궁 최씨를 결박해 심하게 때린 후 거꾸로 세운 큰 독 안에 가둬 두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왕비 장씨의 핍박을 받는 최씨로서는 서인들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sup><a>&#91;3&#93;</a></sup> 김춘택은 <a>인현왕후</a>의 친정과도 친밀했는데, 이 때문에 후일 <a>소론</a>은 <a>김일경의 옥사</a> 당시 <a>영조</a>가 <a>숙종</a>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 하여 <a>영조</a>에게 충격을 주기도 한다. </p> <h3><span></span><span>남인 제거 계획</span></h3> <h4><span></span><span>비밀 계획</span></h4> <p><a>숙종</a> 때 <a>기사환국</a>으로 종조부 <a>김만중</a>과 가문의 당파인 <a>서인</a>이 실각하여 자신도 수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숙종의 첫 정비인 <a>인경왕후</a> 김씨의 친정 조카인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고 여전히 궁 출입도 자유로웠다. 이러한 배경 조건과 재물을 이용해 <a>1694년</a>(숙종 21) 갑술옥사(甲戌獄事) 직전 인현왕후 복위를 은밀히 추진하여 <a>갑술환국</a>과 폐비 민씨의 복위를 성공시켰다. <a>희빈 장씨</a>의 오빠 <a>장희재</a>의 처를 유혹하여 간통한 뒤 그로부터 <a>남인</a>측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고, <a>갑술옥사</a> 이후 <a>1701년</a>의 무고의 옥으로 <a>남인</a>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한다. </p><p>서인들은 노론·소론 할 것 없이 정권 탈환에 부심 했다. 노론에서는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손자 김춘택(金春澤)이 환국(換局) 모의를 주도했고, 소론에서는 승지 한구(韓構)의 아들 한중혁(韓重爀)이 주도했다. 서인들은 ‘장다리(장씨)는 한철이고 미나리(민씨)는 사철이다’ 같은 동요를 만들어 퍼뜨렸다.<sup><a>&#91;3&#93;</a></sup> 노론 김만중(金萬重)은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어 왕비 장씨를 비난하고 폐비 민씨를 옹호했다. 『사씨남정기』는 명나라의 유현(劉炫)이 정실부인 사씨를 내쫓고 첩인 교씨(喬氏)를 정실부인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교씨의 간악함을 깨닫고 사씨를 정실로 맞이하고 교씨를 죽인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사씨가 폐비 민씨, 교씨가 왕비 장씨를 뜻하는 것인데 훗날 실제로 이 소설의 내용대로 전개된다. 『사씨남정기』를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은 이 소설 내용이 현실화되기를 바라는 서인들의 염원이었다.<sup><a>&#91;3&#93;</a></sup> </p><p><a>1695년</a>(숙종 20년) 3월 23일 우의정 민암이 숙종에게 서인들이 불령한 무리들과 불법 정치자금을 모아 환국을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한 것이다. 음모에 가담했던 함이완(咸以完)이란 인물을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위협해 폭로하게 한 것이었다.<sup><a>&#91;3&#93;</a></sup> 남인 정승 민암의 고변으로 김춘택·한중혁 등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숙종 20년 3월 29일에는 서인의 사주를 받은 유학(幼學) 김인(金寅)등이 맞고변했다. 우의정 민암과 병조판서 목창명, 신천군수 윤희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김인의 고변 중에 왕비의 오빠 장희재가 김해성(金海成)에게 돈을 주어 김해성의 장모로 하여금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김해성의 장모는 숙원 최씨의 숙모였다. 하지만 남인 정권 아래에서 남인들을 역모로 고변한 것은 무리수로 보였다. 함이완의 고변은 사실로, 김인의 고변은 무고로 정리돼 가고 있었다.<sup><a>&#91;3&#93;</a></sup> </p> <h4><span></span><span>첩보와 투옥, 정권탈환에 성공</span></h4> <p><a>장희재</a>의 처와 내연관계를 갖고 그로부터 정보를 일부 빼냈는데 <a>남인</a>에서 이를 일부 눈치챘다. 김춘택은 수감되어 형문을 당했고, <a>남인</a>은 이 기회에 김춘택을 물고하려 했다. 그러나 숙종 20년 4월 1일 밤 2고(二鼓:밤 9~11시)에 승정원으로 갑자기 내려진 숙종의 비망기(備忘記)가 전세를 뒤집었다.<sup><a>&#91;3&#93;</a></sup> </p><p>“군부(君父)를 우롱하고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드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러우니 국청에 참여한 대신 이하는 모두 관직을 삭탈해 문외출송(門外黜送)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숙종실록』 20년 4월 1일)” </p><p>국청에 참여한 대신들을 모두 쫓아내라는 명으로서 정권을 다시 서인으로 갈아치우겠다는 뜻이었다. 남인들이 장악한 승정원에서는 급히 복역(覆逆) 장계(狀啓)를 작성했다. 임금의 잘못된 명을 받들지 않는 것이 복역(覆逆)이었다. 그러나 막 작성한 초안을 올리려고 할 때 다시 숙종의 비망기가 내려왔다.<sup><a>&#91;3&#93;</a></sup> </p><p>“비망기가 승정원에 내려진 지 이미 오래돼 경고(更鼓)가 반이나 지났는데 전지(傳旨)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그 머리를 모아 서로 상의하며 (대신들을) 반드시 구제하려는 정상이 극히 분통스럽고 놀랍다. 입직(入直:숙직) 승지와 옥당(玉堂:홍문관)을 모두 파직하라. 이번 복역(覆逆) 의논을 집에 있는 승지와 삼사(三司)라고 모를 리 없으니 마찬가지로 모두 파직하라.(『숙종실록』 20년 4월 1일)” </p><p>승지 전원과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 전원을 파직시킨 것이다.<sup><a>&#91;3&#93;</a></sup> 또한 숙종은 입직한 오위장(五衛將) 황재명(黃再命)을 가승지(假承旨)로 삼아 명령을 내렸다. 그날 밤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민암 등을 쫓아내고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병권 장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숙종은 병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각각 서인 서문중(徐文重)과 신여철로 갈아치웠다. 이조판서 이현일도 유상운으로 갈아치워 문관 인사권도 서인에게 주었다.<sup><a>&#91;3&#93;</a></sup> <a>서인</a>이 정권을 장학하면서 의금부에 감금되었던 그는 석방된다. </p><p>이때 그는 <a>장희재</a>의 처와 내연관계를 갖고 그로부터 정보를 일부 빼냈는데, 환국 유도 과정에서 그의 내연관계 역시 <a>의금부</a>와 <a>사헌부</a>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시중에 유포되었다. <a>무고의 옥</a> 직후 그는 <a>노론</a>으로부터 환국의 공로자로 칭송받았지만, <a>노론</a> 일부와 <a>소론</a>으로부터는 음모를 이용한 파행적인 정치활동을 행하였다, 부도덕한 계략을 썼다고 비난받았다. </p> <h3><span></span><span>비판과 유배</span></h3> <p>그러나 <a>소론</a>과 <a>남인</a>은 그가 <a>장희재</a>의 처와 간통한 것을 끈질기게 물고늘어졌고, <a>노론</a>에서도 그의 행동이 부적절했다며 비난 여론이 일부 나타났다. <a>노론</a>의 절대적인 변호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탄핵을 받다가 <a>1697년</a> 10월 금천으로 유배되었고, <a>1701년</a> <a>무고의 옥</a>에 대한 수사 중에 <a>갑술환국</a> 전에 장희재의 처와 간통하여 간자로 삼았었다는 증언이 발고되어 다시 소론의 공격을 받고 <a>전라북도</a> <a>부안</a>(扶安)으로 정배되었다. <a>1706년</a>에는 장희재의 처와 내통한 것은 <a>장희재</a>를 죽이려는 목적때문만이 아니라 장차 세자(뒷날의 경종)를 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상소가 빗발쳤는데, 우의정 <a>김창집</a>의 강력한 보호에도 불구하고 끝내 김춘택은 <a>제주도</a>(濟州道)로 무기 유배되었다. <a>1710년</a> 제조 민진후가 숙종에게 감률 품지를 올려 육지로 이배되었다가 <a>1712년</a>에 방송되었다<sup><a>&#91;4&#93;</a></sup>. <a>고종시대</a>에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를 추증받았으며 광령군(光寧君)에 추봉되었고, 충문(忠文)의 시호를 받았다. </p><p>유배지에서도 그는 충효의 대절을 지켰다 한다. 일설에는 <a>숙빈 최씨</a>와도 내연 관계였다는 설이 있다. 이 주장은 <a>이인좌의 난</a> 때 <a>소론</a>과 <a>남인</a> 인사들에게서 주로 채택되었다. 그에 의하면 <a>영조</a>는 그가 무수리인 <a>숙빈 최씨</a>와 사통한 뒤 <a>숙종</a>에게 보내졌다는 것이다. </p><p><a>숙종</a>때부터 <a>영조</a> 때까지도 그가 <a>숙빈 최씨</a>와 사통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악형을 금지한 <a>영조</a>였지만 <a>영조</a> 때 이를 언급하는 자에게는 예외로 심한 형문을 가하였다. 사생활과 과격했던 정치활동 등으로 정적은 물론 <a>노론</a>내부에서도 비난 받았지만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시에 대한 재주와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종조부 <a>김만중</a>의 언문소설 &lt;<a>구운몽</a>&gt;과 &lt;<a>사씨남정기</a>&gt;를 <a>한문</a>으로 번역하여 배포하였다. 저서로 &lt;북헌집&gt;과 글씨 &lt;호판 김진귀 표&gt;가 있다. </p> <h2><span></span><span>작품</span></h2> <p>작품으로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이 전한다.《별사미인곡》은 작자가 제주도로 귀양 가 있을 때 지은 가사인데, 그 시대에 한문 숙어가 거의 없는 순한글체로 언어 구사의 평이성을 살린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글씨로는 《호판김진귀표(戶判金鎭龜表)》가 있다. </p> <h2><span></span><span>사후</span></h2> <p>사후 <a>경기도</a> <a>시흥군</a>(현 <a>군포시</a> 대야미동)에 안장되었다. </p><p>고종 때 복권되어 <a>이조판서</a> 겸 <a>성균관</a>좨주에 <a>추증</a>되고 광녕군에 추봉되었으며, 부조추증지전을 받았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p> <h2><span></span><span>가족 관계</span></h2> <ul><li>아버지&#160;: <a>김진구</a>(金鎭龜)</li> <li>어머니&#160;: <a>한산 이씨</a> <ul><li>매부&#160;: 임징하(任徵夏)</li> <li>부인&#160;: <a>완산 이씨</a>(完山李氏) <ul><li>장남&#160;: 김덕재(金德材) <ul><li>손자&#160;: 김두추(金斗秋)</li> <li>손녀&#160;: 이극광에 출가</li> <li>손녀&#160;: 이홍지에 출가</li></ul></li> <li>장녀&#160;: 송정상에게 출가</li> <li>차녀&#160;: 허우에게 출가</li> <li>삼녀&#160;: 송진상에게 출가</li></ul></li></ul></li></ul> <h2><span></span><span>영조 김춘택 아들설 음모론</span></h2> <p>일부 야사에서는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닐 것으로 추정한다. 가장 큰 근거는 영조의 외모가 숙종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sup><a>&#91;5&#93;</a></sup> 18세기 <a>조선</a>에서는 <a>영조</a>가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고, <a>소론</a>과 <a>남인</a> 강경파 중에는 <a>영조</a> 김춘택 아들설을 신봉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a>이인좌의 난</a> 당시 형장에 끌려간 소론 인사들이 경종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영조의 면전에서 김춘택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a>조선왕조실록</a>에서 영조가 소론계 인사들을 심문할 때의 내용을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돼 돼 돼. </p><p>숙빈 최씨와 사랑을 나누던 김춘택이 임금의 씨가 아닌 자기 씨앗을 숙빈 최씨에게 잉태시키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 영조라는 것은 당시 18세기를 살던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던 소문이었다.<sup><a>&#91;6&#93;</a></sup> 결국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다. 왕실의 씨가 바뀌었다" 라는 내용으로 영조 집권 4년만인 <a>1728년</a> <a>3월 15일</a>에 <a>이인좌의 난</a>이 일어난다. <a>이인좌의 난</a>은 보름만에 진압이 되지만 영조는 집권 내내 190여차례 괘서사건을 접하게 된다. 그 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닌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다.<sup><a>&#91;6&#93;</a></sup> </p> <h2><span></span><span>관련 작품</span></h2> <h3><span></span><span>드라마</span></h3> <ul><li>《<a>인현왕후</a>》 (<a>MBC</a>, <a>1988년</a>~<a>1988년</a>, 배우:<a>최상훈</a>)</li> <li>《<a>장희빈</a>》 (<a>SBS</a>, <a>1995년</a>~<a>1995년</a>, 배우:<a>라재웅</a>)</li> <li>《<a>장희빈</a>》 (<a>KBS</a>, <a>2002년</a>~<a>2003년</a>, 배우:<a>송일국</a>)</li> <li>《<a>동이</a>》 (<a>MBC</a>, <a>2010년</a>~<a>2010년</a>, 배우:<a>김동윤</a>) (극 중에서는 '심운택'으로 소개되었다.)</li></ul> <h2><span></span><span>저서와 작품</span></h2> <h3><span></span><span>저서</span></h3> <ul><li>북헌집</li> <li>시문 10 책</li> <li>만필(漫筆) 1책</li></ul> <h3><span></span><span>작품</span></h3> <ul><li>《별사미인곡 (別思美人曲)》</li> <li>《호판김진귀표 (戶判金鎭龜表)》</li></ul> <h2><span></span><span>각주</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서포만필과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작자이다.</span> </li> <li><span><a>↑</a></span> <span><a>인현왕후</a>의 복위와 <a>노론</a>의 집권 확정에 결정적인 공을 세움</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 <sup><a>마</a></sup> <sup><a>바</a></sup> <sup><a>사</a></sup> <sup><a>아</a></sup> <sup><a>자</a></sup> <sup><a>차</a></sup> <sup><a>카</a></sup></span> <span><a>미인계로 떴다 미인계로 하루아침에 떼죽음</a> 중앙일보 2009년 09월 09일자</span> </li> <li><span><a>↑</a></span> <span><a>미인계로 떴다 미인계로 하루아침에 떼죽음</a> 중앙일보 2009년 09월 09일자</span> </li> <li><span><a>↑</a></span> <span><a>&lt;동이&gt;는 진짜 숙종의 아이를 낳았을까?</a> 프레시안 2010.05.05</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a>동이 비밀병기 심운택, 숙빈최씨의 애인?</a> 미디어스 2010.06.09</span> </li> </ol></div></div> <h2><span></span><span>관련 항목</span></h2> <ul><li><a>인경왕후</a></li> <li><a>인현왕후</a></li> <li><a>송시열</a></li> <li><a>김만기</a></li> <li><a>김만중</a></li> <li><a>김익훈</a></li> <li><a>김익겸</a></li> <li><a>김수항</a></li> <li><a>김수흥</a></li> <li><a>민유중</a></li> <li><a>민정중</a></li> <li><a>영빈 김씨</a></li> <li><a>숙빈 최씨</a></li></ul>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h2> <div><small><a><img></a><a><img></a> 이 문서에는 <a>다음커뮤니케이션</a>(현 <a>카카오</a>)에서 <a>GFDL</a> 또는 <a>CC-SA</a> 라이선스로 배포한 <a>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a>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small></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춘택&amp;oldid=24486054</a>"</div> <div><div><a>분류</a>: <ul><li><a>조선의 문신</a></li><li><a>1670년 태어남</a></li><li><a>1717년 죽음</a></li><li><a>조선의 정치인</a></li><li><a>조선의 학자</a></li><li><a>정치 운동</a></li><li><a>조선의 작가</a></li><li><a>한국의 수필가</a></li><li><a>조선의 저술가</a></li><li><a>조선의 번역가</a></li><li><a>광산 김씨</a></li><li><a>서울특별시 출신</a></li><li><a>노론</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원본 보기</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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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인의 사주를 받은 유학 김인 등이 맞고변을 한 때는?
숙종 20년 3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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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인의 사주를 받은 유학 김인 등이 맞고변을 한 때는?", "서인들이 불령한 무리들과 불법 정치자금을 모아 환국을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한 사람은?", "1695년 우의정 민암은 누구에게 고변했나?", "장희재가 김해성에게 돈을 주어 김해성의 장모를 통해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한다는 내용을 고변한 사람은?", "서인들이 다른무리들과 불법 정치자금을 모아 환국을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한 사람은?", "김해성의 장모는 누구의 숙모였는가?", "유학과 김인 등이 서인의 사주를 받고 맞고변한 날짜는?", "민암의 직책은 무엇이었는가?", "김춘택이 무기 유배된 곳은 어디인가요?", "김춘택이 무기 유배된 장소는?", "김춘택은 1697년 10월 어디로 유배되었는가?", "김춘택을 보호해준 우의정의 이름은?" ]
<!DOCTYPE html> 김춘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김춘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김춘택‎ 김춘택(金春澤, 1670년 ~ 1717년)은 조선후기의 문신, 외척, 작가이다. 자(字)는 백우(伯雨), 호는 북헌(北軒), 본관은 광산이다. 숙종의 장인 김만기의 손자이다. 종조부인 김만중의 문하생이다.[1] 인경왕후의 친정 조카로, 당색은 서인이었다가 노론이 되었다. 인현왕후 민씨의 복위에 공을 세웠으나,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의 처와 간통한 뒤 그로부터 정보를 빼돌렸고 이때문에 소론과 남인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장희재를 제거하려는 과정에서 세자에게 위협을 가하려 한다는 탄핵을 받고 부안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된다. 고종 때 복권 되어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로 추증되고 광령군(光寧君)에 추봉되었다. 시호는 충문이다. 김춘택은 벼슬이 없는 상태에서 노론의 환국 모의를 주도했다. 장희재의 처를 통해 남인 내부의 중요 정보를 획득하여 결국 환국에는 성공[2]했으나 그 방법이 옳지 못했다는 비난에 시달렸고 귀양까지 가야 했다.[3] 종조부 김만중의 문집을 한자로 번역하여 배포하기도 했다. 목차 1 생애 1.1 생애 초반 1.2 남인 제거 계획 1.2.1 비밀 계획 1.2.2 첩보와 투옥, 정권탈환에 성공 1.3 비판과 유배 2 작품 3 사후 4 가족 관계 5 영조 김춘택 아들설 음모론 6 관련 작품 6.1 드라마 7 저서와 작품 7.1 저서 7.2 작품 8 각주 9 관련 항목 10 외부 링크 생애 생애 초반 아버지는 인경왕후의 친정 오빠인 경헌공(景獻公) 진구(鎭龜)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 한산 이씨로 지평 광직(光稷)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종조부인 김만중에게 문장을 배웠는데 어려서부터 재질이 특이하여 김수항의 탄복을 받았다고 한다. 문장과 재기가 구비하여 세상에 이름이 높았다. 훈신과 적장자를 우대하는 전례에 따라 일찍이 음서로 출사하여 대호군에 제수되었다.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으로 쫓겨난 서인들은 숙빈 최씨가 낳은 왕자에게 큰 기대를 걸었지만 왕자는 두 달 만에 죽고 말았다.[3] 그러나 서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수문록』은 왕비 장씨가 후궁 최씨를 결박해 심하게 때린 후 거꾸로 세운 큰 독 안에 가둬 두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왕비 장씨의 핍박을 받는 최씨로서는 서인들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3] 김춘택은 인현왕후의 친정과도 친밀했는데, 이 때문에 후일 소론은 김일경의 옥사 당시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라 하여 영조에게 충격을 주기도 한다. 남인 제거 계획 비밀 계획 숙종 때 기사환국으로 종조부 김만중과 가문의 당파인 서인이 실각하여 자신도 수차례 위기를 맞았지만 숙종의 첫 정비인 인경왕후 김씨의 친정 조카인 덕분에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고 여전히 궁 출입도 자유로웠다. 이러한 배경 조건과 재물을 이용해 1694년(숙종 21) 갑술옥사(甲戌獄事) 직전 인현왕후 복위를 은밀히 추진하여 갑술환국과 폐비 민씨의 복위를 성공시켰다. 희빈 장씨의 오빠 장희재의 처를 유혹하여 간통한 뒤 그로부터 남인측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고, 갑술옥사 이후 1701년의 무고의 옥으로 남인을 일망타진하는데 성공한다. 서인들은 노론·소론 할 것 없이 정권 탈환에 부심 했다. 노론에서는 숙종의 장인인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손자 김춘택(金春澤)이 환국(換局) 모의를 주도했고, 소론에서는 승지 한구(韓構)의 아들 한중혁(韓重爀)이 주도했다. 서인들은 ‘장다리(장씨)는 한철이고 미나리(민씨)는 사철이다’ 같은 동요를 만들어 퍼뜨렸다.[3] 노론 김만중(金萬重)은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어 왕비 장씨를 비난하고 폐비 민씨를 옹호했다. 『사씨남정기』는 명나라의 유현(劉炫)이 정실부인 사씨를 내쫓고 첩인 교씨(喬氏)를 정실부인으로 삼았다가 나중에 교씨의 간악함을 깨닫고 사씨를 정실로 맞이하고 교씨를 죽인다는 내용의 소설이다. 사씨가 폐비 민씨, 교씨가 왕비 장씨를 뜻하는 것인데 훗날 실제로 이 소설의 내용대로 전개된다. 『사씨남정기』를 김춘택이 한문으로 번역한 것은 이 소설 내용이 현실화되기를 바라는 서인들의 염원이었다.[3] 1695년(숙종 20년) 3월 23일 우의정 민암이 숙종에게 서인들이 불령한 무리들과 불법 정치자금을 모아 환국을 도모하고 있다고 고변한 것이다. 음모에 가담했던 함이완(咸以完)이란 인물을 목숨을 살려주겠다고 위협해 폭로하게 한 것이었다.[3] 남인 정승 민암의 고변으로 김춘택·한중혁 등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는 가운데 숙종 20년 3월 29일에는 서인의 사주를 받은 유학(幼學) 김인(金寅)등이 맞고변했다. 우의정 민암과 병조판서 목창명, 신천군수 윤희 등이 역모를 꾀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그런데 김인의 고변 중에 왕비의 오빠 장희재가 김해성(金海成)에게 돈을 주어 김해성의 장모로 하여금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김해성의 장모는 숙원 최씨의 숙모였다. 하지만 남인 정권 아래에서 남인들을 역모로 고변한 것은 무리수로 보였다. 함이완의 고변은 사실로, 김인의 고변은 무고로 정리돼 가고 있었다.[3] 첩보와 투옥, 정권탈환에 성공 장희재의 처와 내연관계를 갖고 그로부터 정보를 일부 빼냈는데 남인에서 이를 일부 눈치챘다. 김춘택은 수감되어 형문을 당했고, 남인은 이 기회에 김춘택을 물고하려 했다. 그러나 숙종 20년 4월 1일 밤 2고(二鼓:밤 9~11시)에 승정원으로 갑자기 내려진 숙종의 비망기(備忘記)가 전세를 뒤집었다.[3] “군부(君父)를 우롱하고 진신(搢紳)을 어육(魚肉)으로 만드는 정상이 매우 통탄스러우니 국청에 참여한 대신 이하는 모두 관직을 삭탈해 문외출송(門外黜送)하고, 민암과 금부 당상은 모두 절도(絶島)에 안치(安置)하라.(『숙종실록』 20년 4월 1일)” 국청에 참여한 대신들을 모두 쫓아내라는 명으로서 정권을 다시 서인으로 갈아치우겠다는 뜻이었다. 남인들이 장악한 승정원에서는 급히 복역(覆逆) 장계(狀啓)를 작성했다. 임금의 잘못된 명을 받들지 않는 것이 복역(覆逆)이었다. 그러나 막 작성한 초안을 올리려고 할 때 다시 숙종의 비망기가 내려왔다.[3] “비망기가 승정원에 내려진 지 이미 오래돼 경고(更鼓)가 반이나 지났는데 전지(傳旨)가 아직도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그 머리를 모아 서로 상의하며 (대신들을) 반드시 구제하려는 정상이 극히 분통스럽고 놀랍다. 입직(入直:숙직) 승지와 옥당(玉堂:홍문관)을 모두 파직하라. 이번 복역(覆逆) 의논을 집에 있는 승지와 삼사(三司)라고 모를 리 없으니 마찬가지로 모두 파직하라.(『숙종실록』 20년 4월 1일)” 승지 전원과 삼사(三司:사헌부·사간원·홍문관) 전원을 파직시킨 것이다.[3] 또한 숙종은 입직한 오위장(五衛將) 황재명(黃再命)을 가승지(假承旨)로 삼아 명령을 내렸다. 그날 밤 영의정 권대운, 좌의정 목내선, 우의정 민암 등을 쫓아내고 남구만(南九萬)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병권 장악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숙종은 병조판서와 훈련대장을 각각 서인 서문중(徐文重)과 신여철로 갈아치웠다. 이조판서 이현일도 유상운으로 갈아치워 문관 인사권도 서인에게 주었다.[3] 서인이 정권을 장학하면서 의금부에 감금되었던 그는 석방된다. 이때 그는 장희재의 처와 내연관계를 갖고 그로부터 정보를 일부 빼냈는데, 환국 유도 과정에서 그의 내연관계 역시 의금부와 사헌부에 정보가 입수되면서 시중에 유포되었다. 무고의 옥 직후 그는 노론으로부터 환국의 공로자로 칭송받았지만, 노론 일부와 소론으로부터는 음모를 이용한 파행적인 정치활동을 행하였다, 부도덕한 계략을 썼다고 비난받았다. 비판과 유배 그러나 소론과 남인은 그가 장희재의 처와 간통한 것을 끈질기게 물고늘어졌고, 노론에서도 그의 행동이 부적절했다며 비난 여론이 일부 나타났다. 노론의 절대적인 변호에도 불구하고 조정에 발을 들이지 못한 채 탄핵을 받다가 1697년 10월 금천으로 유배되었고, 1701년 무고의 옥에 대한 수사 중에 갑술환국 전에 장희재의 처와 간통하여 간자로 삼았었다는 증언이 발고되어 다시 소론의 공격을 받고 전라북도 부안(扶安)으로 정배되었다. 1706년에는 장희재의 처와 내통한 것은 장희재를 죽이려는 목적때문만이 아니라 장차 세자(뒷날의 경종)를 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상소가 빗발쳤는데, 우의정 김창집의 강력한 보호에도 불구하고 끝내 김춘택은 제주도(濟州道)로 무기 유배되었다. 1710년 제조 민진후가 숙종에게 감률 품지를 올려 육지로 이배되었다가 1712년에 방송되었다[4]. 고종시대에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를 추증받았으며 광령군(光寧君)에 추봉되었고, 충문(忠文)의 시호를 받았다. 유배지에서도 그는 충효의 대절을 지켰다 한다. 일설에는 숙빈 최씨와도 내연 관계였다는 설이 있다. 이 주장은 이인좌의 난 때 소론과 남인 인사들에게서 주로 채택되었다. 그에 의하면 영조는 그가 무수리인 숙빈 최씨와 사통한 뒤 숙종에게 보내졌다는 것이다. 숙종때부터 영조 때까지도 그가 숙빈 최씨와 사통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는데, 악형을 금지한 영조였지만 영조 때 이를 언급하는 자에게는 예외로 심한 형문을 가하였다. 사생활과 과격했던 정치활동 등으로 정적은 물론 노론내부에서도 비난 받았지만 글씨를 잘 썼을 뿐만 아니라 시에 대한 재주와 문장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다. 종조부 김만중의 언문소설 &lt;구운몽&gt;과 &lt;사씨남정기&gt;를 한문으로 번역하여 배포하였다. 저서로 &lt;북헌집&gt;과 글씨 &lt;호판 김진귀 표&gt;가 있다. 작품 작품으로 《별사미인곡(別思美人曲)》이 전한다.《별사미인곡》은 작자가 제주도로 귀양 가 있을 때 지은 가사인데, 그 시대에 한문 숙어가 거의 없는 순한글체로 언어 구사의 평이성을 살린 점은 높이 살 만하다. 글씨로는 《호판김진귀표(戶判金鎭龜表)》가 있다. 사후 사후 경기도 시흥군(현 군포시 대야미동)에 안장되었다. 고종 때 복권되어 이조판서 겸 성균관좨주에 추증되고 광녕군에 추봉되었으며, 부조추증지전을 받았다. 시호는 충문(忠文)이다. 가족 관계 아버지 : 김진구(金鎭龜) 어머니 : 한산 이씨 매부 : 임징하(任徵夏) 부인 : 완산 이씨(完山李氏) 장남 : 김덕재(金德材) 손자 : 김두추(金斗秋) 손녀 : 이극광에 출가 손녀 : 이홍지에 출가 장녀 : 송정상에게 출가 차녀 : 허우에게 출가 삼녀 : 송진상에게 출가 영조 김춘택 아들설 음모론 일부 야사에서는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닐 것으로 추정한다. 가장 큰 근거는 영조의 외모가 숙종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5] 18세기 조선에서는 영조가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확산되었고, 소론과 남인 강경파 중에는 영조 김춘택 아들설을 신봉하기도 했다. 일설에는 이인좌의 난 당시 형장에 끌려간 소론 인사들이 경종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영조의 면전에서 김춘택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영조가 소론계 인사들을 심문할 때의 내용을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은 것이 돼 돼 돼. 숙빈 최씨와 사랑을 나누던 김춘택이 임금의 씨가 아닌 자기 씨앗을 숙빈 최씨에게 잉태시키고, 그래서 태어난 것이 영조라는 것은 당시 18세기를 살던 조선 사람들 사이에서 유포되었던 소문이었다.[6] 결국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니다. 왕실의 씨가 바뀌었다" 라는 내용으로 영조 집권 4년만인 1728년 3월 15일에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다. 이인좌의 난은 보름만에 진압이 되지만 영조는 집권 내내 190여차례 괘서사건을 접하게 된다. 그 내용 중의 하나가 바로 영조는 숙종의 아들이 아닌 김춘택의 아들이라는 내용이었다 한다.[6] 관련 작품 드라마 《인현왕후》 (MBC, 1988년~1988년, 배우:최상훈) 《장희빈》 (SBS, 1995년~1995년, 배우:라재웅) 《장희빈》 (KBS, 2002년~2003년, 배우:송일국) 《동이》 (MBC, 2010년~2010년, 배우:김동윤) (극 중에서는 '심운택'으로 소개되었다.) 저서와 작품 저서 북헌집 시문 10 책 만필(漫筆) 1책 작품 《별사미인곡 (別思美人曲)》 《호판김진귀표 (戶判金鎭龜表)》 각주 ↑ 서포만필과 구운몽, 사씨남정기의 작자이다. ↑ 인현왕후의 복위와 노론의 집권 확정에 결정적인 공을 세움 ↑ 가 나 다 라 마 바 사 아 자 차 카 미인계로 떴다 미인계로 하루아침에 떼죽음 중앙일보 2009년 09월 09일자 ↑ 미인계로 떴다 미인계로 하루아침에 떼죽음 중앙일보 2009년 09월 09일자 ↑ &lt;동이&gt;는 진짜 숙종의 아이를 낳았을까? 프레시안 2010.05.05 ↑ 가 나 동이 비밀병기 심운택, 숙빈최씨의 애인? 미디어스 2010.06.09 관련 항목 인경왕후 인현왕후 송시열 김만기 김만중 김익훈 김익겸 김수항 김수흥 민유중 민정중 영빈 김씨 숙빈 최씨 외부 링크 이 문서에는 다음커뮤니케이션(현 카카오)에서 GFDL 또는 CC-SA 라이선스로 배포한 글로벌 세계대백과사전의 내용을 기초로 작성된 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김춘택&amp;oldid=24486054" 분류: 조선의 문신1670년 태어남1717년 죽음조선의 정치인조선의 학자정치 운동조선의 작가한국의 수필가조선의 저술가조선의 번역가광산 김씨서울특별시 출신노론숨은 분류: 글로벌세계대백과를 인용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원본 보기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26일 (수) 13:5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김춘택 생애 요약** 1. **초기 생애 (1670년 ~ 1689년)** - 김춘택은 1670년에 태어나, 인경왕후의 친정 조카로서 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작가로 성장했다. - 아버지는 경헌공 진구, 어머니는 한산 이씨이며, 종조부 김만중에게 문장을 배워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쫓겨나고, 김춘택은 인경왕후의 친척 덕분에 위기를 벗어났다. 2. **정치적 활동과 남인 제거 계획 (1694년 ~ 1701년)** - 1694년, 김춘택은 인현왕후 복위를 은밀히 추진하며 남인 측의 정보를 장희재의 처를 통해 입수했다. - 갑술환국과 폐비 민씨의 복위를 성공시키고, 1701년 무고의 옥에서 남인을 일망타진하는 데 기여했다. 3. **비판과 유배 (1701년 ~ 1712년)** - 그러나 장희재의 처와의 간통 사실이 드러나면서 소론과 남인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 1697년 금천으로 유배된 후, 1701년 다시 부안으로, 1706년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 유배 중에도 충효의 대절을 지켰으며, 숙빈 최씨와의 내연설이 돌기도 했다. 4. **사후 및 복권 (1717년 이후)** - 김춘택은 1717년에 사망하였고, 고종 때 복권되어 이조판서 겸 성균관 좨주로 추증되었다. - 그의 시호는 충문이며, 경기도 시흥군에 안장되었다. 5. **작품 및 유산** - 김춘택은 여러 저서와 작품을 남겼으며, 특히 《별사미인곡》과 《호판김진귀표》가 전해진다. - 그의 문학적 재능과 정치적 활동은 조선시대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요약은 김춘택의 생애를 시간순으로 정리하여 그의 주요 사건과 정치적 활동을 명확히 전달하고자 하였다.
텍스트 내용을 시간순 또는 인과관계 순으로 재배열해서 요약해줘. 사건의 흐름이나 논리 전개 순서를 이해하기 쉽게 정리해줘.
12국_목록
https://ko.wikipedia.org/wiki/12국_목록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12국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12국 목록</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십이국은 <a>오노 후유미</a>의 소설 《<a>십이국기</a>》 시리즈의 무대가 되는 가공 세계의 호칭. 혹은 그 속에 존재하는 12 나라의 총칭이기도 하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개요</span></a></li> <li><a><span>2</span> <span>기본설정</span></a> <ul> <li><a><span>2.1</span> <span>창세신화</span></a></li> <li><a><span>2.2</span> <span>천제</span></a></li> <li><a><span>2.3</span> <span>왕</span></a></li> <li><a><span>2.4</span> <span>기린</span></a></li> <li><a><span>2.5</span> <span>승산</span></a></li> <li><a><span>2.6</span> <span>특수한 짐승</span></a></li> <li><a><span>2.7</span> <span>식</span></a></li> <li><a><span>2.8</span> <span>난과</span></a></li> <li><a><span>2.9</span> <span>광물</span></a></li> <li><a><span>2.10</span> <span>해객·산객·태과</span></a> <ul> <li><a><span>2.10.1</span> <span>해객</span></a></li> <li><a><span>2.10.2</span> <span>산객</span></a></li> <li><a><span>2.10.3</span> <span>태과</span></a></li> </ul> </li> <li><a><span>2.11</span> <span>신선</span></a></li> <li><a><span>2.12</span> <span>반수</span></a></li> <li><a><span>2.13</span> <span>장애인 차별과 남녀차별</span></a></li> <li><a><span>2.14</span> <span>언어</span></a></li> <li><a><span>2.15</span> <span>력</span></a></li> <li><a><span>2.16</span> <span>이름의 구성</span></a></li> </ul> </li> <li><a><span>3</span> <span>법령</span></a> <ul> <li><a><span>3.1</span> <span>태강·지강</span></a></li> <li><a><span>3.2</span> <span>적면의 죄</span></a></li> </ul> </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개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십이국기에는 산해경에 등장할 법한 신선이나 요괴가 존재하는 세계이다. 문화, 정치형태는 고대 <a>중국</a>(특히 <a>주나라</a>)와 비슷하며 절대 왕정이다. 하지만 왕위는 세습되지 않으며 12국에 각각 <a>기린</a>이 천의(天意)에 따라 고른 왕에 의해 다스려진다. 왕은 제후를 임명하여 각 지역을 다스리게 하며, 이러한 왕이나 고위 관리, 신선등은 불로장수한다. 그러나 이는 영원불멸한 삶을 산다는 것은 아니며 동기(冬器)로 몸통이나 목을 베면 죽게 된다. 또한 국왕이 폭정 혹은 도의에 어긋난 정치를 행하면 기린은 실도(失道)의 병에 걸려 죽게 되며 기린이 죽으면 왕 또한 죽게 된다. </p><p>타국에 대한 군사적 간섭은 그 나라의 국왕이 조력을 요청하지 않는한 천의에 따라 엄격히 금지되어 있으며 이유를 불문하고 그것을 어긴 국왕은 왕과 기린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고 국씨(国氏)도 바뀐다. (<a>적면의 죄</a>) 이 작품은 이러한 왕과 왕을 선택한 기린, 천의란 무엇인가를 시리즈의 큰 주제로 그리고 있다. 또한 사이드 스토리로 맨 처음 집필된 《마성의 아이》는 식에 의해 교차하는 이 세계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 개입했을 때의 공포를 공포 소설로 그리고 있고, 달콤한 이세계(異世界)의 환상에 어울리지 않는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 </p> <h2><span></span><span>기본설정</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창세신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이 세계에는 독특한 창세신화가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과거의 일을 말하는 신화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하늘의 뜻〉으로서 현재 및 현실에 작용하고 있는 <a>태강</a>등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p> <dl><dd>일찍이 세계는 9주와 4개의 이민족을 더해 도합 13주인,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나도 분별없이 상식에 어긋난 삶을 살고 있었다. 천제가 아무리 설득해도 아무도 행동을 고치지 않고,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 피의 강이 흘렀다. 이에 천제는 뜻을 굳히고, 구주사이를 멸하고 5명의 신과 12명의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를 알로 돌려보냈다. 그 중앙에 오산을 만들고, 서왕모를 주인으로 임명하고 오산으로 둘러싸인 한 주를 황해로 만들었다. 그리고 5명의 신을 용왕으로 삼아 오대산을 각각 하나씩 맡아 지키게 했다.</dd> <dd>또한 12명의 사람에게는 각각 세 개의 열매가 달려있고 한 마리의 뱀이 감겨 있는 가지를 건네주었다. 그 뱀이 몸을 풀고 하늘로 날아가자 열매들이 떨어져 각각 토지와 나라와 옥좌를 만들었고, 남은 가지는 붓이 되었다. 그것은 각각 뱀은 태강, 토지는 <a>호적</a>, 나라는 법, 옥좌는 <a>인도</a>(仁道),즉 재보(宰輔)를, 붓은 역사를 나타낸다.</dd></dl> <h3><span></span><span>천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천제(天帝)는 이 세계의 최고 신이자 창조주이다. 〈천〉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세계가 생기기 전부터 지배하였으나 과거의 세계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세계를 멸하고 모두 알로 돌려보내 현재의 십이국기 세계를 만들었다. 십이국 세계의 모든 것을 만들고 태강을 정해 지금도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로, 옥경에 산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린이 왕을 선택할 때도 천제의 의사를 따라 선택한다고 한다. </p><p>천제는 소설속에서도 거의 설명되지 않고 있다. 천계에 속하는 천선(天仙)인 <a>견랑진군</a>은 옥경에 거주하는 천제와 제신에게 탄원하여 리목의 가지를 열두개 얻어 그것을 황주의 백성들에게 내려 주었다고 한다<sup><a>&#91;1&#93;</a></sup>. “천제가 왕을 임명하는 의식”으로 여겨지는 왕의 즉위 의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안국의 왕과 엔키는 500년에 걸쳐 통치하는 동안 “만난 적도 없고, 만났다고 하는 놈도 모른다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의 유무나 12국 세계에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억측을 낳고 있다. </p> <h3><span></span><span>왕</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b>왕</b>은 기린이 선택한, 천제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인물. 선택받을 수 있는 자격은 그 나라의 리목에 열린 난과에서 태어날 것, 기린만이 느낄 수 있는 왕기를 지니고 있을 것. 이 왕기는 천제의 의사, 즉 천명이다. 단명하는 왕이나 여왕이 많으며 장기간 통치하는 명군이나 현군은 그 수가 적다. 또한 모반과 같은 왕의 목숨이 위협받을 경우, 천제가 구해주는 일은 없다. 이로 인해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천명이라는 시스템이나 하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는 자도 많다. </p><p>왕의 통치에는 몇 차례의 고비가 존재한다.<sup><a>&#91;2&#93;</a></sup> 이 지점 외에서 쓰러지는 왕도 많고, 항상 이 사항에 해당하는 것만은 아니다. </p> <dl><dd><ul><li>통치하기 시작한지 10년 정도 되는 시기. 실무에 뛰어난 관료들을 편성할 수 있느냐가 첫 관문으로 들 수 있다. 관료편성에 실패하여 국가 통치의 기개를 잃는 일이 많다.</li> <li>일반적인 인간의 수명을 넘길 때즘. 불로불사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수명이 다한 것을 생각하며 사는 것에 대한 욕구를 잃은 것으로도 보인다.</li> <li>300년쯤 지났을 무렵. 이대로 왕으로서 영원히 통치하며 사는 것에 중압감을 느끼고 현군이 폭군으로 돌변한다.</li></ul></dd></dl> <p>"왕"이 되는 것은 기린이 무릎을 꿇는 시점, 혹은 맹세를 주고 받은 시점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왕이 된 시점에서 그 사람은 사람으로서 죽고, 기린의 신비스러운 힘으로 되살아 나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며, 기린이 죽으면 왕도 죽는다. 기린의 선정에 따라 왕이 된 사람은 호적에서 벗어나 신적에 등록되며, 불로 불사의 몸이 되어 동기 이외로는 해를 입지 않는 몸이 되는 것은 신선과 마찬가지이다. 호적이 없기 때문에 정식적인 결혼은 할 수 없지만, 등극 시기에 기혼자인 경우 아이를 노목에 빌 수 있다. </p><p>왕으로 선택받으면 기린과의 서약을 관례에 따른 문언으로 주고받는다. (기린은 이 서약을 여선들에게 배운다.) 그리고 천칙을 받기 위해 봉산으로 향한다. 천칙을 받는 날까지 왕은 단계궁에 거처하며, 길일이 되면 운제궁으로 가 계단을 오른다. 계단은 봉산의 정상에 이어져 있으며 계단을 다 오른 자는 사당에 들어가 천제에게 향을 올린다. 그 뒤 현무를 타고 운해를 건너 왕궁으로 향한다. </p><p>왕이 탄생하면 여러 길조가 나타난다. 우선 왕이 태어난 나라의 백치가 〈즉위〉라고 울고, 봉(鳳)이 타국의 왕에게 어느나라 왕이 즉위했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서운(현무가 운해에 남기는 흔적같은 것)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런 길조 없이 왕의 즉위를 전하는 사절이 온 경우, 대부분은 위왕인 것을 의심하고, 실제로 그러하기도 하다. 왕이 쓰러진 경우에는 백치가 〈붕어〉라고 운 뒤 죽으며, 이 또한 봉(鳳)에 의해 타국의 왕도 알게 된다. </p><p>각국의 보물중에는 왕만이 다룰 수 있는 것도 있으며, 기린과 함께 왕의 비장의 카드가 된다. 기린이 실도할 정도로 실정이 되지 않는 한 왕이 옥좌에 있는 것만으로 천재지변이나 요마의 습격을 줄일 수 있다. 왕에게 가장 기본적인 직무에 해당하지만 그저 왕궁에 있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의식 특히 교사(郊祀)가 반드시 필요하다. </p> <h3><span></span><span>기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각 나라에 하나씩 존재하는 최고위 신수. 왕기를 의지하여 자신의 주인을 선택한다. 그 뒤 왕과 함께 나라로 돌아가 신하가 되어 곁에서 왕을 돕는다. 기린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자국민의 기질을 기준으로, 민의가 구체화 한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성정은 인이며 자비심이 깊다. 싸움을 싫어하며 피의 부정으로 병이 들기도 한다. 자신의 주인 이외에는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또한 기린 본래의 힘은 짐승으로 변했을 때 그 뿔에서 나온다고 여겨지며, 사람의 모습일 때는 뿔에 해당하는 이마를 만지는 것을 싫어하는 하늘을 뛰어다닐 수 있고, 12국 세계의 생물 중에서 가장 발이 빠르다고 한다. </p><p>12국 세계의 중앙에 있는 오산 중에 하나인 봉산의 사신목에 황금 난과가 열리면 열달 후 그 난과에서 기린이 태어난다. 태어난 후에는 봉로궁에 거주하며 여괴의 젖과 봉산의 여선들의 보살핌을 받아 자란다. 왕과 계약하기 전까지는 〈봉산공〉(봉산의 주인)으로 불린다. 봉산에 사는 여선들은 기린을 보살펴주기 위해 존재하며 여선 중에서도 벽하현군은 유일하게 기린과 동등한 존재이다. 왕이 없는 기린의 수명은 30년 정도로 (봉래에서는 10년에 해당한다), 드물게 왕을 찾아내지 못한채 천수를 맞이하는 기린도 있다. 하지만 왕을 선택한 후에는 왕이 도를 잃어 〈실도의 병〉에 걸리거나, 모반등 동기로 공격받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한 왕과 함께 계속 살아갈 수 있다. 기린이 죽으면 왕도 죽기 때문에 기린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해지기도 한다. </p><p>태어났을 때는 짐승의 모습으로 뿔은 없지만 5세정도 되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며 말도 하기 시작한다. 그 뒤 한동안 모습이 빈번하게 바뀌지만 점차 잦아들고, 뿔이 이마에 생기면 완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젖을 떼게 된다. 젖을 떼기 전에는 상처나 피의 부정에 강하다. 기린의 능력의 대부분은 짐승일 때 몸에 붙는다. 짐승일 때는 오산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황해를 돌아 요마를 놀이처럼 절복시키며 지낸다. 사람의 모습에서 짐승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전변(転変), 반대로 짐승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전화(転化)라고 한다. 봉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기린은 짐승의 모습으로 태어나 성장함에 따라 전화를 배운다. 그러나 타이키처럼 12국 외에서 생활이 길어 전변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성수가 되면 외견 상의 성장은 멈추지만 성수가 되기까지의 기간은 기린마다 각각 다르다. </p><p>보통은 금색 갈기를 가진다.(흑기린인 타이키는 강철색). 코우키는 동에 가까은 금색, 케이키는 상당히 옅은 금색처럼 기린의 갈기 색에도 개성이 있다. 12국 세계에서 금색을 금발인 사람은 반드시 기린이다. 어떠한 염료를 써도 갈기는 염색되지 않는다. 인간일 때의 머리는 짐승일 때의 갈기이며, 전변할 때에 흉하게 되거나 목이 굽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자르지 않는다. 갈기(=머리)의 길이는 개체에 따라 다르며 더이상 자라지 않을 때까지 기르는 것이 보통이다. </p><p>수컷은 기, 암컷은 린이라 하고 국씨를 이름으로 하여 그 기린을 나타내는 호가 된다. 다만 호칭으로 사용되는 것은 봉산에서 여선의 비호하에 있거나 사적인 대화를 할 경우에만 사용하고,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일반적으로 직명인 재보, 혹은 경외를 나타내 타이호라 불린다. 타국의 기린은 국씨를 붙여 나누어 부른다. 기와 린의 비율은 한 나라를 보든, 세계 전체를 보든 시대에 따라 비율이 다를 수도 있지만 총체적으로 보면 반반씩이다. </p><p>특수한 능력으로서 요마를 <b>사령</b>이라 하여 자신의 부하로 부릴 수 있다. 기린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힘을 가진 요마는 절복시킬 수 없으며, 사령이 된 요마는 기린이 죽은 뒤 그 사체를 먹을 수 있다. 기린의 육체는 영력의 집합체이며 요마에게 거대한 힘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기린의 묘는 왕가 함께 합장되지만 시체는 없다. 보통 기린은 사후에 빈궁에 안치되며 안치되어 있는 동안 요마가 몰래 사체를 먹는다. </p> <h3><span></span><span>승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b>승산</b>(昇山)이란 왕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자력으로 봉산에 올라 그 나라의 기린을 만나는 것을 말한다. 승산하여 기린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에 호적이 있는 자뿐이며, 생애 단 한번밖에 승산할 수 없다. 왕이 되기 위한 조건은 고국의 리목에서 태어난 자여야 하며, 왕의 자질을 가진 자가 태과로 흘러간 경우에는 승산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때에는 기린이 스스로 인간계나 봉래·곤륜으로 건너가 왕을 찾는 경우도 있다. </p><p>전왕과 함께 기린이 죽은 경우, 다음 기린이 성장하길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약 5~10년을 기다려야 한다. 기린이 준비가 갖춰지면 고국의 리사에 기린기가 올라, 왕의 선정(승산) 개시를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빨리 승산을 하려고 시기가 다가워오면 기린기가 오르기도 전에 사령문에 대기하는 자도 있다. (사령문이 열리는 것은 각가겨 일년에 한 번씩 정해진 날에만 열리기 때문이다.) </p><p>승산을 하려면 일단 사령문을 지나 봉산에 오르게 된다. 문에서 봉산까지는 약 한달정도 걸리며 이는 생사를 건 여행을 하게 된다. 기린과 면접한 결과 왕기를 인정받지 못하면 "지일(중일)까지 무사하기를"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지일이란 <a>하지</a> 및 <a>동지</a>를 말하며, 중일이란 피안의 중간 (<a>춘분</a> 및 <a>추분</a>), 즉 다음에 문이 열리는 말을 가리킨다. 왕기를 인정 받으면 운해 위로 안전하게 지나가기 때문에, 왕이 아닌 경우 위험한 황해를 건너야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p><p>일반적으로 승산자는 초반에는 자만심이 강하거나 군인, 혹은 관리가 많고, 뒤로 갈 수록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을 받아 승산을 결의한 사람이나 상인이 늘어가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맨 처음 승산한 자 중에서 왕이 나올 경우, 그 왕을 〈질풍같이 왕이 된 자〉라는 뜻으로 표풍의 왕이라 한다. 표풍의 왕의 예로서 샤쿠 교소우(태왕)와 시쇼우(前채왕)을 들 수 있다. </p><p>승산한 자 중에 왕이 될만한 인물이 있는 경우, 강씨들 사이에서는 그것을 붕(鵬), 혹은 붕추(鵬雛)라고 하며, 평소보다도 위험이 훨씬 줄어들기 때문에 〈붕익을 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인물이 죽을 경우, 그 때까지의 쌓여있던 불운이 한꺼번에 닥친다. </p><p>또한 현재 십이국의 왕중에 자신이 승산하여 왕이 된 것을 밝혀진 것은 공왕 슈쇼우와 태왕 샤쿠 교소우 두사람이다. 연왕 쇼류와 경왕 세키시는 기린이 봉래로 건너가 왕을 선택하였고, 종왕 센신은 그가 경영하는 여관에 기린 쇼쇼우가 찾아왔다.<sup><a>&#91;3&#93;</a></sup> </p> <h3><span></span><span>특수한 짐승</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h3><span></span><span>식</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식은 기운의 흐트러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천재지변의 일종이다. 십이국의 세계와 봉래또는 곤륜등의 차원의 겹쳐짐으로 인한 일그러짐이 원인이라는 설정이다. 태풍이라면 강한 비바람을 동반한 재해라는 인식이 있지만 식은 일반적인 자연 재해와는 달리 정형화 되지 않은 예측 불가능한 재해이다ㅣ. </p> <h3><span></span><span>난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십이국기의 독특한 설정으로 생명체의 탄생기원이 되는 나무열매이다. 난과가 열리는 나무는 태어나는 생물의 종류에 따라 리목, 야목 따위로 불린다. </p> <h3><span></span><span>광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금이나 은, 수정등의 보물은 주로 대국에 나오는 금천, 은천, 옥천에서 채취한다. 샘물이 자갈 지층을 흐를때 드물게 결정화하는 일이 있어 그 결정을 종석으로 하여 대응하는 샘에 담가 오랜 시간 기다리면 결정이 커진다. 바라는 크기가 되었을 때 채취한다. 그렇기 때문에 12국 세계에서는 보석 장식품의 가치는 높지 않고 진정으로 가치가 높은 것은 진주뿐이다. </p> <h3><span></span><span>해객·산객·태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식에 휘말려 십이국 세계로 넘어온 봉래 및 곤륜의 인간을 말한다. 해객과 산객은 십이국 세계 태생이 아니므로 낯선 세계에의 적응과 언어소통 등에 크나큰 난항을 겪는다. </p> <h4><span></span><span>해객</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p>식에 휘말려 넘어온 봉래(일본)의 인간. 바닷가에서 발견되므로 해객이라 불린다. </p> <h4><span></span><span>산객</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p>식에 휘말려 넘어온 곤륜(중국)의 인간. 산에서 발견되므로 산객이라 불린다. </p> <h4><span></span><span>태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4> <p>식에 휘말려 난과가 곤륜 또는 봉래로 넘어가 그곳에서 나고자란 십이국 세계의 인간. 이세계로 넘어가면 그곳 주민의 자궁에 수태되어 태어나며, 후에 기린과의 만남 등으로 십이국 세계에 귀환할 수 있다. 귀환 시 이세계에서의 적응을 위해 뒤집어쓰고 있던 껍질을 버리고 십이국 세계의 주민으로서 타고난 본 모습(체모 및 눈동자의 색, 피부색 등)을 되찾게 된다. 경왕 세키시와 연왕 쇼류, 엔키 로쿠타와 타이키 코우리가 작중 등장하는 대표적인 태과 출신이다. </p> <h3><span></span><span>신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h3><span></span><span>반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사람의 모습도 짐승의 모습도 될 수 있는 인간. 반수도 보통 인간의 아이로서 리목에 열린 난과에서 태어난다. 인간의 모습으로 있을 때에는 보통 사람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다양한 짐승과 인간의 반수가 존재한다. 자신의 의지로 인간의 모습이 될 수도 있고 짐승의 모습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짐승의 모습으로 지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모습으로 지내는 것을 더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p><p>원래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제도적으로 차별하여 성인이 되어도 군역을 뛸 수 없고, 학교에도 가지 못해 관리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대하던 나라들은 점차 멸망하였으며, 대국에서는 효종이 제도를 폐지하고 (나라가 혼란스럽기 때문에 철저하게 폐지되지는 않았다.), 경국에서도 요코가 초칙으로 폐지하였기 때문에 호적을 주지않을 정도의 법적 차별이 남아 있는 나라는 교국 뿐이다<sup><a>&#91;4&#93;</a></sup>. 경에서는 반수는 상대부 이상의 관리직에는 등용될 수 없었으나, 요우코가 칙명으로 폐지하였기 때문에 법률상 평등하게 되었지만 반수에 대한 차별은 남아있다. 제도상으로는 반수에 대한 차별이 거의 없게 된 안국의 대학에서도 교수에게 반수 모습으로 수강을 거부당하거나 책을 갉아먹는다고 생각하는 등 사실상 차별은 뿌리깊게 박혀있다. </p> <h3><span></span><span>장애인 차별과 남녀차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반수나 해객·산객, 유민에 대한 차별과는 대조적으로, 장애인이나 남녀차별은 없다. 선천적 장애인에 대한 보호제도가 정비되어 있으며, 임신 및 출산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남녀 모두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직업도 대부분의 직종에서 반반씩 이루고 있으며 무관등도 체력적인 이유에서 남자가 많은 것일 뿐, 여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왕이나 기린도 남녀 비율을 역사서를 조사해 평균내어 보면, 어느 나라를 보아도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반반이다. </p> <h3><span></span><span>언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12국 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봉래나 곤륜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매우 다른 언어이다. 문자는 <a>한자</a>(애니메이션 판에서는 금문(金文))을 사용하였으며, 한문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헤키 라쿠진처럼 <a>중국어</a> 지식으로 한문의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는 있지만, 초보적인 현대 중국어로 회화는 불가능하다. 특정 지역에서만 사용되는 관용구가 있지만 타국간에 차이는 없다. </p> <h3><span></span><span>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각국마다 원호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a>서력</a>과 같은 세계 공통적인 연수표기방법은 12국 세계에는 없다. 원호는 왕이 즉위했을 때 개원되며 그 뒤에도 왕의 정책에 따라 개원되기도 한다. </p> <h3><span></span><span>이름의 구성</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h2><span></span><span>법령</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태강·지강</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h3><span></span><span>적면의 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b>적면의 죄</b>는 태강에 정해진 가장 중한 죄 중 하나로, “군사를 이끌고 타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왕도 기린도 수일 내에 쓰러지게 된다.”<sup><a>&#91;5&#93;</a></sup>. </p><p>과거의 실례로, 준제의 고사가 전해져 내려온다. 명군이자 자비심이 많기로 유명한 재국의 준제는 〈이웃 국가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왕사를 출병시켰고 누구도 태강에 어긋나는 일이라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군사가 국경을 넘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왕과 기린이 돌연사를 맞게 된다. 그것이 적면의 죄인 것은 처음에는 아무도 몰랐으나, 다음 왕이 등극했을 때 국새의 국씨가 바뀌어 적면의 죄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죄는 군대의 침입 뿐만 아니라 기린이 사령만을 보내는 것도 해당되며,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에서는 실도의 병을 앓고 있는 코우린이 안까지 향하고 있었다. 그 나라의 왕으로부터 정식적인 요청없이 군사력을 타국으로 지원하는 일은 용서되지 않는다. </p><p>국씨가 바뀌는 것은 왕이 매우 무거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 과거에 국씨가 바뀐 같은 예로서 들 수 있는 것은, 〈실도로 기린이 죽은 일에 이성을 잃어, 다음 기린이 태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봉산에 침입하여 사신목을 다 태우고 여선을 몰살했다〉는 대극국의 왕의 사례가 있다. </p><p>애니메이션에서는 적면의 죄의 정의 그 자체가 원작과 매우 다르다. 〈천명에 거스르며 인도에서 벗어나는 일〉·〈천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선양 한다) 일〉·〈타국에 침입하는 일〉이 3개가 적면의 죄로 설정 되어있다. 이 세 가지는 원작에서도 〈왕이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이다.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a>↑</a></span> <span>《도남의 날개》조은세상 P277</span> </li> <li><span><a>↑</a></span> <span>《화서의 꿈》조은세상, 273P </span> </li> <li><span><a>↑</a></span> <span>도남의 날개(조은세상) 319페이지</span> </li> <li><span><a>↑</a></span> <span>관리로서 불채용, 소학 이상은 다닐 수 없는 차별은 교, 방, 순 3국에 남아있다.</span> </li> <li><span><a>↑</a></span> <span>십이국기 9권《황혼의 물가 새벽의 하늘》조은세상 P182</span> </li> </ol></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2국_목록&amp;oldid=19880866</a>"</div> <div><div><a>분류</a>: <ul><li><a>가공의 세계</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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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이 태어난 후 거주하는 곳은?
봉로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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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린이 태어난 후 거주하는 곳은?", "왕이 없는 기린의 수명은 어느 정도인가?", "봉산의 주인으로 황금 난과가 열린 열달후 태어나는 생물은? ", "기린을 보살펴 주기 위해 존재하는 봉산의 여선 중 기린과 동등한 존재는? ", "난과에서 태어닌 기린이 바로 거주하는 곳은?", "기린이 태어나는 과실로, 12국 세계의 중앙에 있는 오산 중 하나인 봉산의 사신목에 열리는 과실의 이름은? ", "왕과 계약하기 전까지 기린을 부르는 명칭으로, 봉산의 주인이라는 뜻을 지닌 이름은? ", "기린을 보살피기 위해 존재하는 봉산의 여선 중, 유일하게 기린과 동등한 존재인 여선의 호칭은? ", "사람의 모습에서 짐승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는 무엇인가?", "완전한 사람의 모습이 될 수 있으려면 무엇이 생겨야하나요", "기린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는 시기는? ", "기린이 나고 자란곳은 어디인가?", "신수가 사람의 모습에서 짐승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일컫는 말은?", "신수가 짐승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일컫는 말은? ", "기린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며 말도 하기 시작하는 대략의 나이는? ", "호적을 주지않을 정도의 법적 차별이 남아있는 나라는 어디인가?", "대국에서 제도를 폐지한 사람은?", "군역과 교육의 차별적 제도로 인해 멸망한 나라들이 발생하여, 제도를 폐지한 대국의 왕은?", "반수에 대한 차별은 남아 있지만, 칙명이라도 법률상으로나마 평등을 없애고자 했던 왕은? ", "대국, 경국, 교국, 안국 중 반수에게 호적을 주지 않을 정도로 법적 차별이 남아있는 나라는? ", "대국에서 반수를 차별하는 제도를 폐지한 사람은? ", "경국에서 초칙으로 반수를 차별하는 법률을 폐지한 사람은? ", "왕사 출병이 적면의 죄 임을 예측 할수 있는 상황은? ", "석면의 죄인것을 모르고, 이웃나라에 군사를 보낸 명군은?" ]
<!DOCTYPE html> 12국 목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2국 목록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십이국은 오노 후유미의 소설 《십이국기》 시리즈의 무대가 되는 가공 세계의 호칭. 혹은 그 속에 존재하는 12 나라의 총칭이기도 하다. 목차 1 개요 2 기본설정 2.1 창세신화 2.2 천제 2.3 왕 2.4 기린 2.5 승산 2.6 특수한 짐승 2.7 식 2.8 난과 2.9 광물 2.10 해객·산객·태과 2.10.1 해객 2.10.2 산객 2.10.3 태과 2.11 신선 2.12 반수 2.13 장애인 차별과 남녀차별 2.14 언어 2.15 력 2.16 이름의 구성 3 법령 3.1 태강·지강 3.2 적면의 죄 4 각주 개요[편집] 십이국기에는 산해경에 등장할 법한 신선이나 요괴가 존재하는 세계이다. 문화, 정치형태는 고대 중국(특히 주나라)와 비슷하며 절대 왕정이다. 하지만 왕위는 세습되지 않으며 12국에 각각 기린이 천의(天意)에 따라 고른 왕에 의해 다스려진다. 왕은 제후를 임명하여 각 지역을 다스리게 하며, 이러한 왕이나 고위 관리, 신선등은 불로장수한다. 그러나 이는 영원불멸한 삶을 산다는 것은 아니며 동기(冬器)로 몸통이나 목을 베면 죽게 된다. 또한 국왕이 폭정 혹은 도의에 어긋난 정치를 행하면 기린은 실도(失道)의 병에 걸려 죽게 되며 기린이 죽으면 왕 또한 죽게 된다. 타국에 대한 군사적 간섭은 그 나라의 국왕이 조력을 요청하지 않는한 천의에 따라 엄격히 금지되어 있으며 이유를 불문하고 그것을 어긴 국왕은 왕과 기린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고 국씨(国氏)도 바뀐다. (적면의 죄) 이 작품은 이러한 왕과 왕을 선택한 기린, 천의란 무엇인가를 시리즈의 큰 주제로 그리고 있다. 또한 사이드 스토리로 맨 처음 집필된 《마성의 아이》는 식에 의해 교차하는 이 세계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 개입했을 때의 공포를 공포 소설로 그리고 있고, 달콤한 이세계(異世界)의 환상에 어울리지 않는 세계관을 제시하고 있다. 기본설정[편집] 창세신화[편집] 이 세계에는 독특한 창세신화가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과거의 일을 말하는 신화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하늘의 뜻〉으로서 현재 및 현실에 작용하고 있는 태강등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것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일찍이 세계는 9주와 4개의 이민족을 더해 도합 13주인,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너무나도 분별없이 상식에 어긋난 삶을 살고 있었다. 천제가 아무리 설득해도 아무도 행동을 고치지 않고, 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 피의 강이 흘렀다. 이에 천제는 뜻을 굳히고, 구주사이를 멸하고 5명의 신과 12명의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를 알로 돌려보냈다. 그 중앙에 오산을 만들고, 서왕모를 주인으로 임명하고 오산으로 둘러싸인 한 주를 황해로 만들었다. 그리고 5명의 신을 용왕으로 삼아 오대산을 각각 하나씩 맡아 지키게 했다. 또한 12명의 사람에게는 각각 세 개의 열매가 달려있고 한 마리의 뱀이 감겨 있는 가지를 건네주었다. 그 뱀이 몸을 풀고 하늘로 날아가자 열매들이 떨어져 각각 토지와 나라와 옥좌를 만들었고, 남은 가지는 붓이 되었다. 그것은 각각 뱀은 태강, 토지는 호적, 나라는 법, 옥좌는 인도(仁道),즉 재보(宰輔)를, 붓은 역사를 나타낸다. 천제[편집] 천제(天帝)는 이 세계의 최고 신이자 창조주이다. 〈천〉이라 불리기도 한다. 이 세계가 생기기 전부터 지배하였으나 과거의 세계가 너무나도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세계를 멸하고 모두 알로 돌려보내 현재의 십이국기 세계를 만들었다. 십이국 세계의 모든 것을 만들고 태강을 정해 지금도 세계를 다스리고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로, 옥경에 산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린이 왕을 선택할 때도 천제의 의사를 따라 선택한다고 한다. 천제는 소설속에서도 거의 설명되지 않고 있다. 천계에 속하는 천선(天仙)인 견랑진군은 옥경에 거주하는 천제와 제신에게 탄원하여 리목의 가지를 열두개 얻어 그것을 황주의 백성들에게 내려 주었다고 한다[1]. “천제가 왕을 임명하는 의식”으로 여겨지는 왕의 즉위 의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안국의 왕과 엔키는 500년에 걸쳐 통치하는 동안 “만난 적도 없고, 만났다고 하는 놈도 모른다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존재의 유무나 12국 세계에서의 역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억측을 낳고 있다. 왕[편집] 왕은 기린이 선택한, 천제를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인물. 선택받을 수 있는 자격은 그 나라의 리목에 열린 난과에서 태어날 것, 기린만이 느낄 수 있는 왕기를 지니고 있을 것. 이 왕기는 천제의 의사, 즉 천명이다. 단명하는 왕이나 여왕이 많으며 장기간 통치하는 명군이나 현군은 그 수가 적다. 또한 모반과 같은 왕의 목숨이 위협받을 경우, 천제가 구해주는 일은 없다. 이로 인해 일반적으로 전해지는 천명이라는 시스템이나 하늘의 존재에 대해 의문을 갖는 자도 많다. 왕의 통치에는 몇 차례의 고비가 존재한다.[2] 이 지점 외에서 쓰러지는 왕도 많고, 항상 이 사항에 해당하는 것만은 아니다. 통치하기 시작한지 10년 정도 되는 시기. 실무에 뛰어난 관료들을 편성할 수 있느냐가 첫 관문으로 들 수 있다. 관료편성에 실패하여 국가 통치의 기개를 잃는 일이 많다. 일반적인 인간의 수명을 넘길 때즘. 불로불사의 몸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의 수명이 다한 것을 생각하며 사는 것에 대한 욕구를 잃은 것으로도 보인다. 300년쯤 지났을 무렵. 이대로 왕으로서 영원히 통치하며 사는 것에 중압감을 느끼고 현군이 폭군으로 돌변한다. "왕"이 되는 것은 기린이 무릎을 꿇는 시점, 혹은 맹세를 주고 받은 시점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왕이 된 시점에서 그 사람은 사람으로서 죽고, 기린의 신비스러운 힘으로 되살아 나는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으며, 기린이 죽으면 왕도 죽는다. 기린의 선정에 따라 왕이 된 사람은 호적에서 벗어나 신적에 등록되며, 불로 불사의 몸이 되어 동기 이외로는 해를 입지 않는 몸이 되는 것은 신선과 마찬가지이다. 호적이 없기 때문에 정식적인 결혼은 할 수 없지만, 등극 시기에 기혼자인 경우 아이를 노목에 빌 수 있다. 왕으로 선택받으면 기린과의 서약을 관례에 따른 문언으로 주고받는다. (기린은 이 서약을 여선들에게 배운다.) 그리고 천칙을 받기 위해 봉산으로 향한다. 천칙을 받는 날까지 왕은 단계궁에 거처하며, 길일이 되면 운제궁으로 가 계단을 오른다. 계단은 봉산의 정상에 이어져 있으며 계단을 다 오른 자는 사당에 들어가 천제에게 향을 올린다. 그 뒤 현무를 타고 운해를 건너 왕궁으로 향한다. 왕이 탄생하면 여러 길조가 나타난다. 우선 왕이 태어난 나라의 백치가 〈즉위〉라고 울고, 봉(鳳)이 타국의 왕에게 어느나라 왕이 즉위했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서운(현무가 운해에 남기는 흔적같은 것)이 나타난다. 따라서 이런 길조 없이 왕의 즉위를 전하는 사절이 온 경우, 대부분은 위왕인 것을 의심하고, 실제로 그러하기도 하다. 왕이 쓰러진 경우에는 백치가 〈붕어〉라고 운 뒤 죽으며, 이 또한 봉(鳳)에 의해 타국의 왕도 알게 된다. 각국의 보물중에는 왕만이 다룰 수 있는 것도 있으며, 기린과 함께 왕의 비장의 카드가 된다. 기린이 실도할 정도로 실정이 되지 않는 한 왕이 옥좌에 있는 것만으로 천재지변이나 요마의 습격을 줄일 수 있다. 왕에게 가장 기본적인 직무에 해당하지만 그저 왕궁에 있는 것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며, 의식 특히 교사(郊祀)가 반드시 필요하다. 기린[편집] 각 나라에 하나씩 존재하는 최고위 신수. 왕기를 의지하여 자신의 주인을 선택한다. 그 뒤 왕과 함께 나라로 돌아가 신하가 되어 곁에서 왕을 돕는다. 기린의 성격은 기본적으로 자국민의 기질을 기준으로, 민의가 구체화 한 것이라고 여겨지고 있다. 성정은 인이며 자비심이 깊다. 싸움을 싫어하며 피의 부정으로 병이 들기도 한다. 자신의 주인 이외에는 결코 머리를 숙이지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또한 기린 본래의 힘은 짐승으로 변했을 때 그 뿔에서 나온다고 여겨지며, 사람의 모습일 때는 뿔에 해당하는 이마를 만지는 것을 싫어하는 하늘을 뛰어다닐 수 있고, 12국 세계의 생물 중에서 가장 발이 빠르다고 한다. 12국 세계의 중앙에 있는 오산 중에 하나인 봉산의 사신목에 황금 난과가 열리면 열달 후 그 난과에서 기린이 태어난다. 태어난 후에는 봉로궁에 거주하며 여괴의 젖과 봉산의 여선들의 보살핌을 받아 자란다. 왕과 계약하기 전까지는 〈봉산공〉(봉산의 주인)으로 불린다. 봉산에 사는 여선들은 기린을 보살펴주기 위해 존재하며 여선 중에서도 벽하현군은 유일하게 기린과 동등한 존재이다. 왕이 없는 기린의 수명은 30년 정도로 (봉래에서는 10년에 해당한다), 드물게 왕을 찾아내지 못한채 천수를 맞이하는 기린도 있다. 하지만 왕을 선택한 후에는 왕이 도를 잃어 〈실도의 병〉에 걸리거나, 모반등 동기로 공격받는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한 왕과 함께 계속 살아갈 수 있다. 기린이 죽으면 왕도 죽기 때문에 기린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해지기도 한다. 태어났을 때는 짐승의 모습으로 뿔은 없지만 5세정도 되면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게 되며 말도 하기 시작한다. 그 뒤 한동안 모습이 빈번하게 바뀌지만 점차 잦아들고, 뿔이 이마에 생기면 완전한 사람의 모습으로 될 수 있으며 동시에 젖을 떼게 된다. 젖을 떼기 전에는 상처나 피의 부정에 강하다. 기린의 능력의 대부분은 짐승일 때 몸에 붙는다. 짐승일 때는 오산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황해를 돌아 요마를 놀이처럼 절복시키며 지낸다. 사람의 모습에서 짐승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전변(転変), 반대로 짐승에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을 전화(転化)라고 한다. 봉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기린은 짐승의 모습으로 태어나 성장함에 따라 전화를 배운다. 그러나 타이키처럼 12국 외에서 생활이 길어 전변이 어려운 경우가 있다. 성수가 되면 외견 상의 성장은 멈추지만 성수가 되기까지의 기간은 기린마다 각각 다르다. 보통은 금색 갈기를 가진다.(흑기린인 타이키는 강철색). 코우키는 동에 가까은 금색, 케이키는 상당히 옅은 금색처럼 기린의 갈기 색에도 개성이 있다. 12국 세계에서 금색을 금발인 사람은 반드시 기린이다. 어떠한 염료를 써도 갈기는 염색되지 않는다. 인간일 때의 머리는 짐승일 때의 갈기이며, 전변할 때에 흉하게 되거나 목이 굽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자르지 않는다. 갈기(=머리)의 길이는 개체에 따라 다르며 더이상 자라지 않을 때까지 기르는 것이 보통이다. 수컷은 기, 암컷은 린이라 하고 국씨를 이름으로 하여 그 기린을 나타내는 호가 된다. 다만 호칭으로 사용되는 것은 봉산에서 여선의 비호하에 있거나 사적인 대화를 할 경우에만 사용하고,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일반적으로 직명인 재보, 혹은 경외를 나타내 타이호라 불린다. 타국의 기린은 국씨를 붙여 나누어 부른다. 기와 린의 비율은 한 나라를 보든, 세계 전체를 보든 시대에 따라 비율이 다를 수도 있지만 총체적으로 보면 반반씩이다. 특수한 능력으로서 요마를 사령이라 하여 자신의 부하로 부릴 수 있다. 기린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힘을 가진 요마는 절복시킬 수 없으며, 사령이 된 요마는 기린이 죽은 뒤 그 사체를 먹을 수 있다. 기린의 육체는 영력의 집합체이며 요마에게 거대한 힘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기린의 묘는 왕가 함께 합장되지만 시체는 없다. 보통 기린은 사후에 빈궁에 안치되며 안치되어 있는 동안 요마가 몰래 사체를 먹는다. 승산[편집] 승산(昇山)이란 왕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자력으로 봉산에 올라 그 나라의 기린을 만나는 것을 말한다. 승산하여 기린을 만날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에 호적이 있는 자뿐이며, 생애 단 한번밖에 승산할 수 없다. 왕이 되기 위한 조건은 고국의 리목에서 태어난 자여야 하며, 왕의 자질을 가진 자가 태과로 흘러간 경우에는 승산할 수 없다. 따라서 그 때에는 기린이 스스로 인간계나 봉래·곤륜으로 건너가 왕을 찾는 경우도 있다. 전왕과 함께 기린이 죽은 경우, 다음 기린이 성장하길 기다려야 하기 때문에 약 5~10년을 기다려야 한다. 기린이 준비가 갖춰지면 고국의 리사에 기린기가 올라, 왕의 선정(승산) 개시를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빨리 승산을 하려고 시기가 다가워오면 기린기가 오르기도 전에 사령문에 대기하는 자도 있다. (사령문이 열리는 것은 각가겨 일년에 한 번씩 정해진 날에만 열리기 때문이다.) 승산을 하려면 일단 사령문을 지나 봉산에 오르게 된다. 문에서 봉산까지는 약 한달정도 걸리며 이는 생사를 건 여행을 하게 된다. 기린과 면접한 결과 왕기를 인정받지 못하면 "지일(중일)까지 무사하기를"이라는 말을 듣게 된다. 지일이란 하지 및 동지를 말하며, 중일이란 피안의 중간 (춘분 및 추분), 즉 다음에 문이 열리는 말을 가리킨다. 왕기를 인정 받으면 운해 위로 안전하게 지나가기 때문에, 왕이 아닌 경우 위험한 황해를 건너야 한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승산자는 초반에는 자만심이 강하거나 군인, 혹은 관리가 많고, 뒤로 갈 수록 주변 사람들에게 추천을 받아 승산을 결의한 사람이나 상인이 늘어가는 경향을 보인다. 특히 맨 처음 승산한 자 중에서 왕이 나올 경우, 그 왕을 〈질풍같이 왕이 된 자〉라는 뜻으로 표풍의 왕이라 한다. 표풍의 왕의 예로서 샤쿠 교소우(태왕)와 시쇼우(前채왕)을 들 수 있다. 승산한 자 중에 왕이 될만한 인물이 있는 경우, 강씨들 사이에서는 그것을 붕(鵬), 혹은 붕추(鵬雛)라고 하며, 평소보다도 위험이 훨씬 줄어들기 때문에 〈붕익을 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인물이 죽을 경우, 그 때까지의 쌓여있던 불운이 한꺼번에 닥친다. 또한 현재 십이국의 왕중에 자신이 승산하여 왕이 된 것을 밝혀진 것은 공왕 슈쇼우와 태왕 샤쿠 교소우 두사람이다. 연왕 쇼류와 경왕 세키시는 기린이 봉래로 건너가 왕을 선택하였고, 종왕 센신은 그가 경영하는 여관에 기린 쇼쇼우가 찾아왔다.[3] 특수한 짐승[편집] 식[편집] 식은 기운의 흐트러짐으로 인해 발생하는 천재지변의 일종이다. 십이국의 세계와 봉래또는 곤륜등의 차원의 겹쳐짐으로 인한 일그러짐이 원인이라는 설정이다. 태풍이라면 강한 비바람을 동반한 재해라는 인식이 있지만 식은 일반적인 자연 재해와는 달리 정형화 되지 않은 예측 불가능한 재해이다ㅣ. 난과[편집] 십이국기의 독특한 설정으로 생명체의 탄생기원이 되는 나무열매이다. 난과가 열리는 나무는 태어나는 생물의 종류에 따라 리목, 야목 따위로 불린다. 광물[편집] 금이나 은, 수정등의 보물은 주로 대국에 나오는 금천, 은천, 옥천에서 채취한다. 샘물이 자갈 지층을 흐를때 드물게 결정화하는 일이 있어 그 결정을 종석으로 하여 대응하는 샘에 담가 오랜 시간 기다리면 결정이 커진다. 바라는 크기가 되었을 때 채취한다. 그렇기 때문에 12국 세계에서는 보석 장식품의 가치는 높지 않고 진정으로 가치가 높은 것은 진주뿐이다. 해객·산객·태과[편집] 식에 휘말려 십이국 세계로 넘어온 봉래 및 곤륜의 인간을 말한다. 해객과 산객은 십이국 세계 태생이 아니므로 낯선 세계에의 적응과 언어소통 등에 크나큰 난항을 겪는다. 해객[편집] 식에 휘말려 넘어온 봉래(일본)의 인간. 바닷가에서 발견되므로 해객이라 불린다. 산객[편집] 식에 휘말려 넘어온 곤륜(중국)의 인간. 산에서 발견되므로 산객이라 불린다. 태과[편집] 식에 휘말려 난과가 곤륜 또는 봉래로 넘어가 그곳에서 나고자란 십이국 세계의 인간. 이세계로 넘어가면 그곳 주민의 자궁에 수태되어 태어나며, 후에 기린과의 만남 등으로 십이국 세계에 귀환할 수 있다. 귀환 시 이세계에서의 적응을 위해 뒤집어쓰고 있던 껍질을 버리고 십이국 세계의 주민으로서 타고난 본 모습(체모 및 눈동자의 색, 피부색 등)을 되찾게 된다. 경왕 세키시와 연왕 쇼류, 엔키 로쿠타와 타이키 코우리가 작중 등장하는 대표적인 태과 출신이다. 신선[편집] 반수[편집] 사람의 모습도 짐승의 모습도 될 수 있는 인간. 반수도 보통 인간의 아이로서 리목에 열린 난과에서 태어난다. 인간의 모습으로 있을 때에는 보통 사람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다양한 짐승과 인간의 반수가 존재한다. 자신의 의지로 인간의 모습이 될 수도 있고 짐승의 모습이 될 수도 있지만 대부분 짐승의 모습으로 지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인간의 모습으로 지내는 것을 더 선호하는 사람도 있다. 원래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제도적으로 차별하여 성인이 되어도 군역을 뛸 수 없고, 학교에도 가지 못해 관리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렇게 대하던 나라들은 점차 멸망하였으며, 대국에서는 효종이 제도를 폐지하고 (나라가 혼란스럽기 때문에 철저하게 폐지되지는 않았다.), 경국에서도 요코가 초칙으로 폐지하였기 때문에 호적을 주지않을 정도의 법적 차별이 남아 있는 나라는 교국 뿐이다[4]. 경에서는 반수는 상대부 이상의 관리직에는 등용될 수 없었으나, 요우코가 칙명으로 폐지하였기 때문에 법률상 평등하게 되었지만 반수에 대한 차별은 남아있다. 제도상으로는 반수에 대한 차별이 거의 없게 된 안국의 대학에서도 교수에게 반수 모습으로 수강을 거부당하거나 책을 갉아먹는다고 생각하는 등 사실상 차별은 뿌리깊게 박혀있다. 장애인 차별과 남녀차별[편집] 반수나 해객·산객, 유민에 대한 차별과는 대조적으로, 장애인이나 남녀차별은 없다. 선천적 장애인에 대한 보호제도가 정비되어 있으며, 임신 및 출산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에 남녀 모두 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다. 직업도 대부분의 직종에서 반반씩 이루고 있으며 무관등도 체력적인 이유에서 남자가 많은 것일 뿐, 여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왕이나 기린도 남녀 비율을 역사서를 조사해 평균내어 보면, 어느 나라를 보아도 시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 반반이다. 언어[편집] 12국 세계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봉래나 곤륜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매우 다른 언어이다. 문자는 한자(애니메이션 판에서는 금문(金文))을 사용하였으며, 한문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헤키 라쿠진처럼 중국어 지식으로 한문의 필담으로 의사소통을 할 수는 있지만, 초보적인 현대 중국어로 회화는 불가능하다. 특정 지역에서만 사용되는 관용구가 있지만 타국간에 차이는 없다. 력[편집] 각국마다 원호제를 시행하고 있으며 서력과 같은 세계 공통적인 연수표기방법은 12국 세계에는 없다. 원호는 왕이 즉위했을 때 개원되며 그 뒤에도 왕의 정책에 따라 개원되기도 한다. 이름의 구성[편집] 법령[편집] 태강·지강[편집] 적면의 죄[편집] 적면의 죄는 태강에 정해진 가장 중한 죄 중 하나로, “군사를 이끌고 타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왕도 기린도 수일 내에 쓰러지게 된다.”[5]. 과거의 실례로, 준제의 고사가 전해져 내려온다. 명군이자 자비심이 많기로 유명한 재국의 준제는 〈이웃 국가의 백성을 구하기 위해〉왕사를 출병시켰고 누구도 태강에 어긋나는 일이라 여기지 않았다. 하지만 군사가 국경을 넘어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왕과 기린이 돌연사를 맞게 된다. 그것이 적면의 죄인 것은 처음에는 아무도 몰랐으나, 다음 왕이 등극했을 때 국새의 국씨가 바뀌어 적면의 죄인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죄는 군대의 침입 뿐만 아니라 기린이 사령만을 보내는 것도 해당되며, 《달의 그림자 그림자의 바다》에서는 실도의 병을 앓고 있는 코우린이 안까지 향하고 있었다. 그 나라의 왕으로부터 정식적인 요청없이 군사력을 타국으로 지원하는 일은 용서되지 않는다. 국씨가 바뀌는 것은 왕이 매우 무거운 죄를 지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 과거에 국씨가 바뀐 같은 예로서 들 수 있는 것은, 〈실도로 기린이 죽은 일에 이성을 잃어, 다음 기린이 태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봉산에 침입하여 사신목을 다 태우고 여선을 몰살했다〉는 대극국의 왕의 사례가 있다. 애니메이션에서는 적면의 죄의 정의 그 자체가 원작과 매우 다르다. 〈천명에 거스르며 인도에서 벗어나는 일〉·〈천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선양 한다) 일〉·〈타국에 침입하는 일〉이 3개가 적면의 죄로 설정 되어있다. 이 세 가지는 원작에서도 〈왕이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이다. 각주[편집] ↑ 《도남의 날개》조은세상 P277 ↑ 《화서의 꿈》조은세상, 273P ↑ 도남의 날개(조은세상) 319페이지 ↑ 관리로서 불채용, 소학 이상은 다닐 수 없는 차별은 교, 방, 순 3국에 남아있다. ↑ 십이국기 9권《황혼의 물가 새벽의 하늘》조은세상 P182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12국_목록&amp;oldid=19880866" 분류: 가공의 세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Русский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10월 29일 (일) 16:05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12국 목록 - 개요 및 기본 설정** - **십이국기**: 오노 후유미의 소설 시리즈, 가공 세계의 12국 총칭. ### 1. 개요 - **세계관**: 고대 중국(주나라)와 유사, 절대 왕정. - **왕위**: 세습되지 않으며, **기린**이 천의에 따라 왕을 선택. - **정치**: 왕의 폭정 시 기린은 실도에 걸려 죽고, 왕도 함께 죽음. - **군사적 간섭**: 타국의 요청 없이는 금지, 위반 시 비참한 죽음. ### 2. 기본 설정 - **창세신화**: 세계의 기원과 천제의 의도 설명. - **천제**: 최고 신, 세계의 창조주, 왕의 선택에 영향. - **왕**: 기린이 선택한 통치자, 왕기는 천제의 의사. - **기린**: 각국의 신수, 왕을 돕고, 왕과 함께 생존. ### 3. 법령 - **태강·지강**: 국가의 법과 규칙. - **적면의 죄**: 타국 군사 침입 시 중대한 죄. ### 4. 주요 개념 - **승산**: 왕이 되고자 하는 자가 기린을 만나기 위한 과정. - **식**: 기운의 흐트러짐으로 발생하는 천재지변. - **난과**: 생명체의 탄생 기원인 나무열매. - **해객/산객/태과**: 다른 세계에서 넘어온 인간들. ### 5. 차별 문제 - **반수**: 인간과 짐승의 중간 존재, 법적 차별 존재. - **장애인 및 성별 차별**: 존재하지 않음, 평등한 대우. ### 6. 언어 및 문화 - **언어**: 12국 세계의 언어는 봉래 및 곤륜과 다름. - **력**: 각국의 연호 제도, 세계 공통 연수 표기 없음. 이 문서는 **십이국기**의 세계관과 설정을 간략히 정리한 것입니다. 각 요소는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독특한 문화와 정치 체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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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_지역_고속도로의_모터사이클_통행_제한
https://ko.wikipedia.org/wiki/동아시아_지역_고속도로의_모터사이클_통행_제한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동아시아 지역 고속도로의 모터사이클 통행 제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동아시아 지역 고속도로의 모터사이클 통행 제한</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동아시아 지역 고속도로의 모터사이클 통행 제한</b>은 몇 개의 동아시아 국가와 지역(<a>중국 본토</a>, <a>홍콩</a>, <a>일본</a>, <a>필리핀</a>, <a>대한민국</a> 및 <a>타이완</a>(<a>중화민국</a>))의 <a>고속도로</a>가 안전 우려 때문에 세계에서 빈번하게 통행 제한, 승차 제한과 <a>속도 제한</a> 등 다른 지역에서는 널리 실시되지 않는 모터사이클의 제한이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진입과 승차 제한</span></a> <ul> <li><a><span>1.1</span> <span>중국 본토</span></a></li> <li><a><span>1.2</span> <span>홍콩</span></a></li> <li><a><span>1.3</span> <span>일본</span></a></li> <li><a><span>1.4</span> <span>필리핀</span></a></li> <li><a><span>1.5</span> <span>대한민국</span></a></li> <li><a><span>1.6</span> <span>타이완 (중화민국)</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속도 제한</span></a></li> <li><a><span>3</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4</span> <span>관련 항목</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진입과 승차 제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동아시아 국가와 그 주변의 국가는 다른 지역에서는 널리 적용되지 않는 고속도로의 모터사이클 통행 제한을 부과한다. 국가에서 이러한 제한을 시행하는 이유는 모터사이클 사용자를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a>대한민국</a>, <a>타이완</a>, <a>필리핀</a>의 경우에는 과도한 제한(긴급자동차를 제외한 이륜자동차는 배기량에 관계없이 고속도로 통행금지) 때문에 모터사이클 동호인과 단체 사이에서 문제를 제기한 사례도 있다. </p> <h3><span></span><span>중국 본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중국 본토</a>에 2명이 탄 상태의 모터사이클은 고속도로에 통행할 수 없으며, 모터사이클의 제한속도는 70&#160;km/h이다.<sup><a>&#91;1&#93;</a></sup> 그러나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 모터사이클은 고속도로를 통행할 수 없다. </p><p><a>마카오</a>는 고속도로가 없으며, <a>홍콩</a>과 <a>타이완</a>은 다른 법률 및 규칙이 시행되고 있어 중국과 비교된다. </p> <h3><span></span><span>홍콩</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홍콩</a>은 125cc 미만의 모터사이클이 고속도로에 다닐 수 없으며, 중국 본토와는 다르게 2명이 탄 상태에서도 통행이 가능하다.<sup><a>&#91;2&#93;</a></sup> </p> <h3><span></span><span>일본</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div><div><a><img></a> <div><div><a></a></div>일본의 2인 승차 이륜차 통행금지 표지판 도안.</div></div></div> <div><div><a><img></a> <div><div><a></a></div>2인 승차 이륜차 통행금지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는 일본 고속도로 출입구(<a>수도고속도로 도심 환상선</a> <a>가스미가세키 나들목</a>).</div></div></div> <p><a>일본</a> 고속도로의 모터사이클 통행 기준은 <a>배기량</a>이 125cc를 초과해야 한다. 2인 승차에 관해서는 <a>1965년</a> <a>9월</a>, 당시 도로교통법 개정을 했을 당시 고속도로에서 이륜차 통행을 하는데 있어서 이륜차 운전자는 <a>헬멧</a> 착용을 의무화하도록 함과 동시에 고속도로에서 2인 승차 상태의 이륜차(측차(<a>사이드카</a>)가 부착된 이륜차는 제외) 통행을 금지했으며, <a>2005년</a> <a>4월</a>에 개정 도로교통법이 시행되면서 고속도로 이륜차 2인 승차가 가능하게 되었다.<sup><a>&#91;3&#93;</a></sup> 이러한 고속도로 이륜차 2인 승차 금지 제도는 <a>1999년</a> <a>11월 29일</a>, 미국 정부 측에서 철폐를 요구했다.<sup><a>&#91;4&#93;</a></sup> </p><p><a>2003년</a> <a>7월 21일</a>, <a>TBS</a>의 보도에 의하면 <a>내각부</a>에서 행한 여론 조사에서는, 이것에 반대하는 사람이 7할을 넘었으나,<sup><a>&#91;5&#93;</a></sup> 2001년, <a>일본자동차공업협회</a>(JAMA) 이륜차 특별위원회에서 2인 승차 상태의 이륜차 고속도로 통행이 가능한 독일과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독일 및 이탈리아의 경찰, IVM(독일 이륜차산업협회), BAST(독일연방 도로연구소), AISCAT(이탈리아 고속도로 터널 위탁 회사협회) 등을 방문해서 정보 수집 및 양국에서 2인 승차 상태의 이륜차를 스스로 체험 주행하는 등의 조사를 행한 결과, 이탈리아 고속도로의 이륜차 사고는 1인 승차가 79%, 2인 승차는 21%의 비율로 발생하고 있어, 2인 승차를 한 상태의 이륜차가 1인 승차를 한 상태보다도 사고 발생율이 낮다는 연구결과를 예로 들어 이륜차의 고속도로의 주행은 1인 승차의 경우 뿐만 아니라 2인 승차의 경우더라도 일반도로보다 안전한 것이며, 일본에 있어서도, 2인 승차 상태 이륜차의 고속도로 이용은 안전확보에 연결되면 기대할 수 있기 위해서 하루도 빠른 규제 해제의 실현을 제언했으며, 고속도로의 이륜차 안전 이용의 추진에 대해서는 유저의 안전계발 활동과 이륜차 업계는 총력을 다해 대응하는 것이라는 제언을 했다.<sup><a>&#91;6&#93;</a></sup> </p><p><a>2005년</a> <a>4월 1일</a>, 개정 도로교통법 시행에 의해 2명이 탄 상태의 모터사이클도 고속도로의 통행이 가능해졌다. 기준은 <a>운전 면허</a>를 취득한지 3년이 경과해야 하며, 면허를 취득한 사람은 20세 이상인 경우여야 한다. <a>수도고속도로</a>의 일부구간은 현재도 2명이 탄 상태의 모터사이클의 통행이 불가능한 구간이 있다.(수도고속도로 일부구간의 경우 <a>측차</a>가 부착된 경우에 한해서 2인 승차 상태의 이륜차 통행이 가능하다.)<sup><a>&#91;7&#93;</a></sup><sup><a>&#91;8&#93;</a></sup> </p> <h3><span></span><span>필리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필리핀 모터사이클 커뮤니티의 한 원로 회원에 의하면 모터사이클이 통행금지 차량에 포함된 것은 <a>남부루손고속도로</a>(South Luzon Expressway)에서 경찰이 사고를 내고 나서부터 인듯하다는 입장이다. 당시 필리핀 경찰은 <a>라구나 주</a> <a>로스바노스</a> (Los Baños)에 위치한 <a>국제 미작 연구소</a>(IRRI)를 방문하는 미국 고위층 <a>리처드 M. 닉슨</a>의 호위를 명령받았다. 필리핀 정부는 닉슨에게 국가적인 환영을 보여주기 위해 호위경찰에게 헬멧 대신 필리핀 전통 모자를 쓰도록 하였다. 연구소로 가는 도중 남부루손고속도로에서 모터사이클을 탄 경찰관이 사고로 사망한 이후, <a>공공건설교통부</a>(DPWC, Department of Public Works and Communication)는 행정명령 1호를 제정해 이륜차의 고속도로 통행을 금지하였다.(<a>1968년</a> <a>2월 19일</a>) </p><p><a>1987년</a> <a>1월 30일</a>, 공공건설교통부가 <a>공공건설도로부</a>(DPWH, Department of Public Works and Highways)로 바뀌었다. 1993년에는 부 규칙 74호가 시행되었으며, 1997년 당시 공공건설도로부 장관이었던 비질라(Gregorio R. Vigilar)가 승인하고 <a>통행규제위원회</a>가 선포한 <a>접근제한시설</a>에 대한 수정법률과 규칙을 시행하였다. 필리핀이 1977년에 공포한 대통령령에 의해 <a>유료도로</a> 운영주체로 유일하게 지정된 국립건설회사가 금지령을 집행하고 있었다. 당시 통행규제위원회와 국립건설회사 회장이었던 비질라와 간부의 말은 아래와 같다. </p> <blockquote><div>"오토바이가 교통의 빈 공간을 들락날락하는 경향은 위험천만하며 속도감에 들뜨고 흥분하여 때 지어 다니는 행위는 사고 공식임에 분명하다."<br> <p>"통행금지를 해제하거나 오토바이 일부를 허용할 경우 혼란만 가져오며 금지를 통해 막아온 사고를 야기할 뿐이다." </p> </div> <p><cite> —&#8201;1999년 12월 2일 비질라 공공건설도로부 장관</cite></p></blockquote> <blockquote><div>"자동차를 이용하는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도록 위임받은 책무에 충실하여 법규 개정에 지속적으로 반대한다."<br> "국립건설회사 입장은 공공 안전을 지탱하기 위해 오토바이 고속도로 통행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div> <p><cite> —&#8201;1999년 10월 26일 자비어(Leonilo G. Javier) 국립건설회사 부사장</cite></p></blockquote> <blockquote><div>"매우 유감스럽지만, 공공건설도로부는 특히 오토바이와 관련된 사고를 예방하는 목적과 공공의 평화와 건강, 안전을 보존하기 위해 국회에서 이 법을 제정하였으므로 호의적일 수 없다."</div> <p><cite> —&#8201;1999년 10월 13일, 내부 법률심사에서 부난(Manuel G. Bunan) 공공건설도로부 차관보</cite></p></blockquote> <p>1998년에는 부 규칙 215호가 시행되었다. 부 규칙 74호와 215호는 공공건설교통부 행정명령 1호를 통해 <a>북부루손고속도로</a>(<a>North Luzon Expressway</a>), 남부루손고속도로, 연안도로를 접근제한시설로 지정하고 있다. 행정명령 1호 아래서 모터사이클은 접근제한시설 이용을 금지하였다. </p><p><a>2001년 1월</a>, 필리핀의 몇몇 모터사이클 클럽이 <a>마카티</a>(Makati City) 법원에 유료도로의 운행을 금지하는 통행규제위원회 규칙에 대해 시민 소송을 제기하였다. 청원자는 통행금지가 현행 법률을 위반할 뿐 아니라 모든 오토바이 운전자가 교통사고 주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유료도로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강제하여 공공 안전을 위협한다고 주장하였다. <a>육상운송국</a> 통계에 따르면 오토바이와 관련된 사고 가능성은 전체 자동차 사고의 1%도 안되므로 통행금지를 해제하면 사고가 더욱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필리핀 전역의 오토바이 사용자는 전체 자동차 인구의 약 1/3로 수백만명에게는 극히 중요한 운송수단이다. 이 사건의 주요 논점은 접근제한공도법으로 알려진 필리핀 공화국법령 2000호가 오로지 트럭, 버스, 기타 상업용 차량의 유료도로 통행을 제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청원자들은 통행규제위원회가 오직 오토바이만 추방하여 법을 위반하는 것을 관찰하였다. </p><p><a>2001년</a> <a>7월</a>에는 마카티 법원에서 모터사이클 운전자는 면허를 취득한 자동차 이용자로서 유료도로를 합법적으로 이용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하여 모터사이클의 유료도로 통행이 가능해졌다. 이에 대항하여 공공건설도로부는 400cc 미만 모터사이클의 통행을 금지하는 공공건설도로부 규칙 123호를 제정하여, 400cc미만 모터사이클의 유료도로 통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모터사이클 오너들은 예심명령 영장을 위반한 것이라고 강력히 항의하였으며, 부 규칙 123호를 패퇴시킬 준비를 하였다. </p><p>국립건설회사는 통행규제위원회 대리인이라며 부 규칙 123호를 강요하고 예심명령 영장을 계속 무시하였다. 400cc 미만 모터사이클 라이더는 교통신호와 장애물을 무시하고 부 규칙 123호보다 영장의 우위를 인정하는 육상운송국에서 발부하는 위반영수증을 받기 위해 유료도로로 진입하여 국립건설회사 집행자에게 정기적으로 체포되었다. 일부는 국립건설회사의 오만불손에 화가 나서 교통 집행자와 임원을 모욕죄로 고소하였다. </p><p>MMDA(<a>Metropolitan Manila Development Authority</a>)가 연안유료도로에서 발부받은 위반 영수증을 취소시키고 영장을 지지하였다. <a>2003년 4월</a>, 한 모터사이클 단체 회원이 175cc 바이크를 타고 연안도로를 타다가 경찰에게 제지되었다. 그 라이더는 경찰에게 “체포반대 키트”를 보여주며 법정모독 행위라고 설명하였으나 충고를 무시하고 신호위반 영수증을 끊었다. 라이더는 소송을 제기하였고 당시 MMDA는 항소를 거듭했으며 위반 영수증은 취소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같은해 <a>6월</a>, 최종심은 예심명령의 영장은 유효하며 모터사이클은 합법적으로 연안유료도로를 이용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p><p><a>2003년 6월</a>, <a>크리스티나 코네조</a>(Christina Cornejo) 마카티 지방법원 판사는 공공건설도로부 규칙 123호가 불법이라는 부분재심 신청을 기각하고 유료도로에서 모터사이클 통행의 전면적 금지를 지지하였다. 전임 판사가 금지는 불법이며 무효라고 언도한 판결을 완전히 뒤엎었다. 청원자들은 사건을 대법원으로 가져갔다. 정부 고위공무원은 모터사이클의 고속도로 통행에 아무 문제가 없지만 일부 라이더가 400cc미만을 금지하는 효력이 사라진 부 규칙 123호를 지지하는 정치적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터사이클 클럽에서는 정치적 문제는 없으며 부 규칙 123호를 지지하는 모터사이클 사용자는 자신들만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400cc 미만 사용자의 안전을 희생시키며 즐거워하기 때문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만 있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sup><a>&#91;9&#93;</a></sup> </p><p><a>2006년</a> <a>6월 19일</a>, 이륜차의 유료도로 통행금지를 규정하는 공공건설도로부 규칙 74호(1993년 시행), 215호(1998년 시행), 123호(2001년 시행), 그리고 통행규제위원회의 접근제한시설에 대한 수정법률과 규칙(1997년 시행)을 무효화한 필리핀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필리핀의 고속도로와 유료도로 등에서 이륜차의 통행이 가능해졌다.<sup><a>&#91;10&#93;</a></sup> </p> <h3><span></span><span>대한민국</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div><img> <a>대한민국 고속도로의 이륜자동차 통행 논란</a> 문서를 참고하십시오.</div> <p>대한민국은 도로교통법에 고속도로 등(<a>고속국도 노선</a>과 <a>고속국도 노선에 포함되지 않는 자동차전용도로</a>를 통칭)에 이륜자동차의 경우 긴급자동차에 한해 통행이 가능하도록 명시되어 있어 긴급자동차로 지정된 모터사이클(예&#160;: <a>싸이카</a> 등)인 경우에만 고속도로 등의 통행이 가능하며 그 외의 모터사이클은 배기량에 관계없이 고속도로의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sup><a>&#91;11&#93;</a></sup> 이러한 법에 의해 통행을 하다 적발되는 경우도 있으며, 적발되면 3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에 처하게 된다. </p><p>이러한 법에 대해 사용자가 헌법소원을 제기한 사례도 있지만 헌법재판소에서는 기각판결과 합헌판결을 내렸다. </p> <h3><span></span><span>타이완 (중화민국)</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div><div><a><img></a> <div><div><a></a></div>타이완의 550cc 이상 이륜차 통행금지 표지 도안.(이 경우 모든 배기량의 이륜차 통행금지)</div></div></div> <div><div><a><img></a> <div><div><a></a></div>타이완의 550cc 이상 이륜차 통행가능 자동차 전용도로 표지 도안.</div></div></div> <p><a>중화민국</a>의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이륜차의 통행이 언제부터 금지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a>2003년</a> 타이완에서 최초로 이륜차 사용자의 권리를 위한 저항운동을 하기 시작했으며, <a>2006년</a>에는 타이완 68개 이상의 모터사이클 판매대리점 대표인 첸펑윤(<small><a>중국어</a> <a>정체자</a>&#58; </small><span>陳豐運</span>, <small><a>병음</a>&#58; </small><span>Chén Fēngyùn</span>)의 선도로 타이완 전역에서 1500명 이상의 모터사이클 오너들이 고속도로 개방을 위한 투명한 일정표를 세울 것을 요구하기 위해 <a>타이베이</a> 거리를 점거하였다. 시위에 참가한 모터사이클 오너들은 시청과 입법원으로 주행하였으며, 이들은 시청과 입법원 건물 앞에서 "도로 권리를 돌려 달라", "이륜차 운전자는 범죄자가 아니다." 라는 구호를 외쳤다.<sup><a>&#91;12&#93;</a></sup> </p><p>중화민국에서 자동차 전용도로<sup><a>&#91;13&#93;</a></sup> 의 교통관리를 담당하는 기관은 <a>교통부</a>와 <a>내정부</a>로, 도로교통관리처벌조례(<a>zh:道路交通管理處罰條例</a>) 제33조에 의하여 모터사이클의 고속공로 통행은 특정한 경찰 목적이나 비상 업무 등에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는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며, 이는 안전을 위한 요소라는 것이 타이완의 교통 관련 행정 부처의 공식적인 입장이며,<sup><a>&#91;14&#93;</a></sup> 금지 이유는 아래와 같다. </p> <ol><li>타이완의 고속공로는 모터사이클 전용 차로가 없다. 모터사이클이 일반 자동차 및 대형 차량과 차로를 공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li> <li>모터사이클은 자동차보다 보호를 적게 받는다. 때문에 발생할 수있는 사고는 더 나빠질 수 있으며, 특히 복잡한 교통 흐름과 잦은 교류 때문에 모터사이클 운전자에 대한 위험을 증가시킨다.</li> <li>타이완의 모터사이클 운전자는 인내성이 낮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것으로 반드시 다른 차량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교통흐름에 방해가 된다.</li> <li>고속공로의 교통량이 용량 이상이며 고속공로의 교통량을 해소하기 위한 좋은 관리가 필요하다. 모터사이클의 고속도로 통행은 교통문제를 악화시킬 것이다.</li></ol> <p>이에 대한 반론은 아래와 같다. </p> <ol><li>같은 속도로 달리는 차량은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li> <li>대부분의 교통사고와 충돌은 교차로에서 발생하며, 주변 지대와 높이가 같은 도로는 일반적인 느린 속도에도 불구하고 모터사이클에 있어서 더 위험한 경향이 있다.</li> <li>적절한 안전 교육은 대부분의 안전 문제를 감소하게 한다.</li> <li>나홀로 승용차 운전자는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으로 전환하여 교통체증을 감소하게 해야 한다.</li></ol> <p>2006년 7월 1일에 개정된 고속공로급쾌속공로교통관제규칙(<a>zh:高速公路及快速公路交通管制規則</a>) 제19조에서는 틀림없이 쾌속도로에 550cc 이상의 이륜차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으며, 2012년 6월 29일에 개정된 고속공로급쾌속공로교통관제규칙 제20조에는 대부분의 쾌속공로에서 250cc 이상의 이륜차(타이완 기준으로 250cc~549cc는 노랑색 번호판, 550cc 이상은 적색 번호판 부착)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개정되었다. 이외에도 고속공로에서 550cc이상의 이륜차가 통행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자동차 운전자, 경찰과 지방정부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인해 고속공로에 이륜차의 통행을 가능하도록 하는 개정내용은 예정대로 구현되지 않았다.<sup><a>&#91;15&#93;</a></sup> </p><p>2007년 1월 12일 <a>입법원</a>은 도로교통관리처벌조례 제92조를 개정하였으며,<sup><a>&#91;16&#93;</a></sup> 당시 <a>교통부</a>의 철도도로국장 인청펑(<small><a>중국어</a> <a>정체자</a>&#58; </small><span>尹承蓬</span>, <small><a>병음</a>&#58; </small><span>Yǐn Chéngpéng</span>)은 운행 안전, 이륜차운전자 교습과 새로운 교통표지 도입에 초점을 맞추어 관련법규를 개정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개정안을 제출한 <a>민주진보당</a> 국회의원 <a>왕싱난</a>(<small><a>중국어</a> <a>정체자</a>&#58; </small><span>王辛男</span>, <small><a>병음</a>&#58; </small><span>Wáng Xìngnán</span>)은 벨기에, 프랑스, 독일에서는 모터사이클이 고속도로를 통행하고 있다고 말하였으며, 타이완이 법규 개정으로 세계적 추세에 동조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타이완 경찰청은 고속공로의 대량 교통이 모터사이클 운전자에게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륜차의 고속도로 통행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sup><a>&#91;17&#93;</a></sup> </p><p>2007년 9월 13일에 <a>행정원</a>이 2007년 1월 12일에 개정된 도로교통관리처벌조례 개정안을 검증 후 이를 승인함에 따라,<sup><a>&#91;18&#93;</a></sup> 2007년 11월 1일부터 550cc 이상의 이륜차는 쾌속공로의 통행이 가능하게 되었다.<sup><a>&#91;19&#93;</a></sup> 고속공로는 긴급용을 제외한 모든 이륜차의 통행이 금지되는 동안 입법원은 <a>교통부</a>에 2010년까지 고속공로에 대한 이륜차 통행 가능성을 연구하도록 요청했다.<sup><a>&#91;20&#93;</a></sup><sup><a>&#91;21&#93;</a></sup> </p><p>2011년 11월 8일의 개정안에는 이론상으로 550cc 이상 이륜차의 고속공로 통행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sup><a>&#91;22&#93;</a></sup> </p> <h2><span></span><span>속도 제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안전 문제라는 이유로 특정한 국가의 고속도로의 제한속도 중 모터사이클의 제한속도는 아래와 같은 제한속도를 부과한다. </p> <ul><li><a>불가리아</a>&#160;: 100&#160;km/h (승용차 최고제한속도는 130&#160;km/h)</li> <li><a>중국 본토</a>&#160;: 80&#160;km/h (승용차 최고제한속도는 120&#160;km/h)</li> <li><a>일본</a>&#160;: 모터사이클의 고속도로 최고제한속도는 80&#160;km/h(승용차 최고제한속도는 100&#160;km/h)로 제한되었지만 2000년에 승용차의 제한속도와 같은 100&#160;km/h로 바뀌었다.</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a>중화인민공화국 도로교통안전법</a> 제67조</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Hong Kong Road Users' Code: Chapter 7 For Motor Cycles&#8221;</a>. 2009년 10월 19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11년 5월 23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b><span>(일본어)</span></b> <a>일본어 위키백과의 일본 도로교통법 문서</a>를 참조</span> </li> <li><span><a>↑</a></span> <span><a>米国政府、自動二輪2人乗り禁止規則の撤廃を要求</a> <a>Archived</a> 2010년 5월 27일 - <a>웨이백 머신</a> 주일미국대사관</span> </li> <li><span><a>↑</a></span> <span><a>高速道路バイク2人乗り、7割超が反対</a> TBS 2003.07.21</span> </li> <li><span><a>↑</a></span> <span><a>ニュースリリース</a></span> </li> <li><span><a>↑</a></span> <span><a>[1]</a> レスポンス自動車ニュース, 2005.03.31</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好きな場所にいつでも行けるオートバイツーリングの楽しさ&#8221;</a>. 2011년 9월 2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11년 8월 24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a>The History of the Ban on Motorcycles Using the Tollways</a> Motorcyclephilippines</span> </li> <li><span><a>↑</a></span> <span><a>Supreme Court Strikes Down Motorcycle Ban on Tollways</a> Motorcyclephilippines</span> </li> <li><span><a>↑</a></span> <span><a>대한민국 도로교통법</a>, 도로교통법 제63조를 참조</span> </li> <li><span><a>↑</a></span> <span><b><span>(영어)</span></b> <a>1,500 bikers take to the streets to demand open roads</a> Taipei Times 2006.07.03</span> </li> <li><span><a>↑</a></span> <span>타이완의 자동차 전용도로는 <a>고속공로</a>와 쾌속공로로 구분되며, 고속공로의 영문명칭은 Freeway, 쾌속공로의 영문명칭은 Expressway</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보관 된 사본&#8221;</a>. 2007년 11월 24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06년 5월 31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b><span>(영어)</span></b> <a>CNN iReport: Taiwan's Legislative department passed a Law and local officials refuse to follow?</a> <a>Archived</a> 2016년 3월 4일 - <a>웨이백 머신</a></span> </li> <li><span><a>↑</a></span> <span><b><span>(중국어)</span></b> <a>도로교통관리처벌조례</a> 입법원, 2007년 1월 12일 개정</span> </li> <li><span><a>↑</a></span> <span><b><span>(영어)</span></b> <a>Traffic amendment gives more freedom to large motorcycles</a> Taipei Times 2007.01.14</span> </li> <li><span><a>↑</a></span> <span><a>도로교통관리처벌조례 연혁</a>, <a>중화민국 법무부</a></span> </li> <li><span><a>↑</a></span> <span><b><span>(영어)</span></b> <a>Large-engined bikes take to the nation's expressways</a> Taipei Times, 2007년 11월 1일</span> </li> <li><span><a>↑</a></span> <span><a>공식 발표</a> 입법원, 2007년 10월 31일</span> </li> <li><span><a>↑</a></span> <span><b><span>(중국어)</span></b> <a>중요한 교통뉴스</a> <a>Archived</a> 2008년 6월 18일 - <a>웨이백 머신</a> 타이완 교통협회, 2007년 1월 13일</span> </li> <li><span><a>↑</a></span> <span><b><span>(중국어)</span></b> <a>도로교통관리처벌조례</a> 입법원, 2011년 11월 8일 개정</span> </li> </ol></div></div> <h2><span></span><span>관련 항목</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고속도로의 모터사이클 통행 기준</a></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동아시아_지역_고속도로의_모터사이클_통행_제한&amp;oldid=23154767</a>"</div> <div><div><a>분류</a>: <ul><li><a>고속도로</a></li><li><a>모터사이클</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중국어 간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a></li><li><a>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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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정부는 미국 고위층 리처드 M. 닉슨의 호위경찰에게 헬멧 대신 무엇을 쓰게 하였나?
필리핀 전통 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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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리핀 정부는 미국 고위층 리처드 M. 닉슨의 호위경찰에게 헬멧 대신 무엇을 쓰게 하였나?", "닉슨의 호위경찰은 어느 고속도로에서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다 사고로 사망하였나?", "어떠한 모임의 한 구성원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국민의 치안과 안전을 담당하는 공무원조직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과거에 지켜오던 문화와 생활풍습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하는가?", "닉슨이 방문했을 때 필리핀 경찰의 임무는?", "호위 경찰이 닉슨을 호위할 때 착용한 것은 무엇인가?", "모터사이클을 탄 경찰관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법은?", "필리핀의 모터사이클 클럽이 유료도로 운행 금지에 대해 시민 소송을 제기한 곳은 어느 지방 법원인가?", "필리핀에서 오토바이와 관련된 사고 가능성은 전체 자동차 사고의 1%도 되지 않는다는 통계는 어느 기관의 조사인가?", "접근제한공도법은 필리핀 공화국법령 몇 호인가?", "이동을 하게 해주는 도구를 지칭하는단어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돈을내고 통행료를 지불하는 도로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필리핀에서 자동차와 함께 중요한 운송수단으로 여겨지는 것은 무엇인가?", "접근제한공도법에 제외되는 차량은?", "2003년 6월 유료도로에서 모터사이클 통행의 전면 금지를 지지한 필리핀 지방법원 판사의 이름은?", "필리핀의 마카티 지방법원 판사는 공공건설도로부 규칙 몇 호가 불법이라는 부분재심 신청을 기각했나?", "공공건설도로부 규칙은 몇 cc미만 모터사이클의 고속도록 통행을 금지하나?", "어떤 사건에대해 법률에 근거하여 잘잘못을 따지는 공무원은 누구일까?", "법이 아니라는 뜻으로 법의 뜻과 어긋나는 것을 무엇이라고 할까?", "어떤 행위나 무엇을 하지 못하게 하는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청원자들은 지방법원의 판결 이후 사건을 어디로 가져갔는가?", "400cc미만을 제한하지 않는 법령은?", "2006년 누구의 선도로 모터사이클 오너들이 타이베이 거리를 점거하였나?", "누군가가 무엇을 할 수있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
<!DOCTYPE html> 동아시아 지역 고속도로의 모터사이클 통행 제한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아시아 지역 고속도로의 모터사이클 통행 제한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동아시아 지역 고속도로의 모터사이클 통행 제한은 몇 개의 동아시아 국가와 지역(중국 본토, 홍콩, 일본, 필리핀, 대한민국 및 타이완(중화민국))의 고속도로가 안전 우려 때문에 세계에서 빈번하게 통행 제한, 승차 제한과 속도 제한 등 다른 지역에서는 널리 실시되지 않는 모터사이클의 제한이다. 목차 1 진입과 승차 제한 1.1 중국 본토 1.2 홍콩 1.3 일본 1.4 필리핀 1.5 대한민국 1.6 타이완 (중화민국) 2 속도 제한 3 각주 4 관련 항목 진입과 승차 제한[편집] 동아시아 국가와 그 주변의 국가는 다른 지역에서는 널리 적용되지 않는 고속도로의 모터사이클 통행 제한을 부과한다. 국가에서 이러한 제한을 시행하는 이유는 모터사이클 사용자를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대한민국, 타이완, 필리핀의 경우에는 과도한 제한(긴급자동차를 제외한 이륜자동차는 배기량에 관계없이 고속도로 통행금지) 때문에 모터사이클 동호인과 단체 사이에서 문제를 제기한 사례도 있다. 중국 본토[편집] 중국 본토에 2명이 탄 상태의 모터사이클은 고속도로에 통행할 수 없으며, 모터사이클의 제한속도는 70 km/h이다.[1] 그러나 중국의 많은 지역에서 모터사이클은 고속도로를 통행할 수 없다. 마카오는 고속도로가 없으며, 홍콩과 타이완은 다른 법률 및 규칙이 시행되고 있어 중국과 비교된다. 홍콩[편집] 홍콩은 125cc 미만의 모터사이클이 고속도로에 다닐 수 없으며, 중국 본토와는 다르게 2명이 탄 상태에서도 통행이 가능하다.[2] 일본[편집] 일본의 2인 승차 이륜차 통행금지 표지판 도안. 2인 승차 이륜차 통행금지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는 일본 고속도로 출입구(수도고속도로 도심 환상선 가스미가세키 나들목). 일본 고속도로의 모터사이클 통행 기준은 배기량이 125cc를 초과해야 한다. 2인 승차에 관해서는 1965년 9월, 당시 도로교통법 개정을 했을 당시 고속도로에서 이륜차 통행을 하는데 있어서 이륜차 운전자는 헬멧 착용을 의무화하도록 함과 동시에 고속도로에서 2인 승차 상태의 이륜차(측차(사이드카)가 부착된 이륜차는 제외) 통행을 금지했으며, 2005년 4월에 개정 도로교통법이 시행되면서 고속도로 이륜차 2인 승차가 가능하게 되었다.[3] 이러한 고속도로 이륜차 2인 승차 금지 제도는 1999년 11월 29일, 미국 정부 측에서 철폐를 요구했다.[4] 2003년 7월 21일, TBS의 보도에 의하면 내각부에서 행한 여론 조사에서는, 이것에 반대하는 사람이 7할을 넘었으나,[5] 2001년, 일본자동차공업협회(JAMA) 이륜차 특별위원회에서 2인 승차 상태의 이륜차 고속도로 통행이 가능한 독일과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독일 및 이탈리아의 경찰, IVM(독일 이륜차산업협회), BAST(독일연방 도로연구소), AISCAT(이탈리아 고속도로 터널 위탁 회사협회) 등을 방문해서 정보 수집 및 양국에서 2인 승차 상태의 이륜차를 스스로 체험 주행하는 등의 조사를 행한 결과, 이탈리아 고속도로의 이륜차 사고는 1인 승차가 79%, 2인 승차는 21%의 비율로 발생하고 있어, 2인 승차를 한 상태의 이륜차가 1인 승차를 한 상태보다도 사고 발생율이 낮다는 연구결과를 예로 들어 이륜차의 고속도로의 주행은 1인 승차의 경우 뿐만 아니라 2인 승차의 경우더라도 일반도로보다 안전한 것이며, 일본에 있어서도, 2인 승차 상태 이륜차의 고속도로 이용은 안전확보에 연결되면 기대할 수 있기 위해서 하루도 빠른 규제 해제의 실현을 제언했으며, 고속도로의 이륜차 안전 이용의 추진에 대해서는 유저의 안전계발 활동과 이륜차 업계는 총력을 다해 대응하는 것이라는 제언을 했다.[6] 2005년 4월 1일, 개정 도로교통법 시행에 의해 2명이 탄 상태의 모터사이클도 고속도로의 통행이 가능해졌다. 기준은 운전 면허를 취득한지 3년이 경과해야 하며, 면허를 취득한 사람은 20세 이상인 경우여야 한다. 수도고속도로의 일부구간은 현재도 2명이 탄 상태의 모터사이클의 통행이 불가능한 구간이 있다.(수도고속도로 일부구간의 경우 측차가 부착된 경우에 한해서 2인 승차 상태의 이륜차 통행이 가능하다.)[7][8] 필리핀[편집] 필리핀 모터사이클 커뮤니티의 한 원로 회원에 의하면 모터사이클이 통행금지 차량에 포함된 것은 남부루손고속도로(South Luzon Expressway)에서 경찰이 사고를 내고 나서부터 인듯하다는 입장이다. 당시 필리핀 경찰은 라구나 주 로스바노스 (Los Baños)에 위치한 국제 미작 연구소(IRRI)를 방문하는 미국 고위층 리처드 M. 닉슨의 호위를 명령받았다. 필리핀 정부는 닉슨에게 국가적인 환영을 보여주기 위해 호위경찰에게 헬멧 대신 필리핀 전통 모자를 쓰도록 하였다. 연구소로 가는 도중 남부루손고속도로에서 모터사이클을 탄 경찰관이 사고로 사망한 이후, 공공건설교통부(DPWC, Department of Public Works and Communication)는 행정명령 1호를 제정해 이륜차의 고속도로 통행을 금지하였다.(1968년 2월 19일) 1987년 1월 30일, 공공건설교통부가 공공건설도로부(DPWH, Department of Public Works and Highways)로 바뀌었다. 1993년에는 부 규칙 74호가 시행되었으며, 1997년 당시 공공건설도로부 장관이었던 비질라(Gregorio R. Vigilar)가 승인하고 통행규제위원회가 선포한 접근제한시설에 대한 수정법률과 규칙을 시행하였다. 필리핀이 1977년에 공포한 대통령령에 의해 유료도로 운영주체로 유일하게 지정된 국립건설회사가 금지령을 집행하고 있었다. 당시 통행규제위원회와 국립건설회사 회장이었던 비질라와 간부의 말은 아래와 같다. "오토바이가 교통의 빈 공간을 들락날락하는 경향은 위험천만하며 속도감에 들뜨고 흥분하여 때 지어 다니는 행위는 사고 공식임에 분명하다." "통행금지를 해제하거나 오토바이 일부를 허용할 경우 혼란만 가져오며 금지를 통해 막아온 사고를 야기할 뿐이다." — 1999년 12월 2일 비질라 공공건설도로부 장관 "자동차를 이용하는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도록 위임받은 책무에 충실하여 법규 개정에 지속적으로 반대한다." "국립건설회사 입장은 공공 안전을 지탱하기 위해 오토바이 고속도로 통행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다." — 1999년 10월 26일 자비어(Leonilo G. Javier) 국립건설회사 부사장 "매우 유감스럽지만, 공공건설도로부는 특히 오토바이와 관련된 사고를 예방하는 목적과 공공의 평화와 건강, 안전을 보존하기 위해 국회에서 이 법을 제정하였으므로 호의적일 수 없다." — 1999년 10월 13일, 내부 법률심사에서 부난(Manuel G. Bunan) 공공건설도로부 차관보 1998년에는 부 규칙 215호가 시행되었다. 부 규칙 74호와 215호는 공공건설교통부 행정명령 1호를 통해 북부루손고속도로(North Luzon Expressway), 남부루손고속도로, 연안도로를 접근제한시설로 지정하고 있다. 행정명령 1호 아래서 모터사이클은 접근제한시설 이용을 금지하였다. 2001년 1월, 필리핀의 몇몇 모터사이클 클럽이 마카티(Makati City) 법원에 유료도로의 운행을 금지하는 통행규제위원회 규칙에 대해 시민 소송을 제기하였다. 청원자는 통행금지가 현행 법률을 위반할 뿐 아니라 모든 오토바이 운전자가 교통사고 주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운 유료도로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강제하여 공공 안전을 위협한다고 주장하였다. 육상운송국 통계에 따르면 오토바이와 관련된 사고 가능성은 전체 자동차 사고의 1%도 안되므로 통행금지를 해제하면 사고가 더욱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었다. 필리핀 전역의 오토바이 사용자는 전체 자동차 인구의 약 1/3로 수백만명에게는 극히 중요한 운송수단이다. 이 사건의 주요 논점은 접근제한공도법으로 알려진 필리핀 공화국법령 2000호가 오로지 트럭, 버스, 기타 상업용 차량의 유료도로 통행을 제외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청원자들은 통행규제위원회가 오직 오토바이만 추방하여 법을 위반하는 것을 관찰하였다. 2001년 7월에는 마카티 법원에서 모터사이클 운전자는 면허를 취득한 자동차 이용자로서 유료도로를 합법적으로 이용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하여 모터사이클의 유료도로 통행이 가능해졌다. 이에 대항하여 공공건설도로부는 400cc 미만 모터사이클의 통행을 금지하는 공공건설도로부 규칙 123호를 제정하여, 400cc미만 모터사이클의 유료도로 통행이 가능하게 되었다. 모터사이클 오너들은 예심명령 영장을 위반한 것이라고 강력히 항의하였으며, 부 규칙 123호를 패퇴시킬 준비를 하였다. 국립건설회사는 통행규제위원회 대리인이라며 부 규칙 123호를 강요하고 예심명령 영장을 계속 무시하였다. 400cc 미만 모터사이클 라이더는 교통신호와 장애물을 무시하고 부 규칙 123호보다 영장의 우위를 인정하는 육상운송국에서 발부하는 위반영수증을 받기 위해 유료도로로 진입하여 국립건설회사 집행자에게 정기적으로 체포되었다. 일부는 국립건설회사의 오만불손에 화가 나서 교통 집행자와 임원을 모욕죄로 고소하였다. MMDA(Metropolitan Manila Development Authority)가 연안유료도로에서 발부받은 위반 영수증을 취소시키고 영장을 지지하였다. 2003년 4월, 한 모터사이클 단체 회원이 175cc 바이크를 타고 연안도로를 타다가 경찰에게 제지되었다. 그 라이더는 경찰에게 “체포반대 키트”를 보여주며 법정모독 행위라고 설명하였으나 충고를 무시하고 신호위반 영수증을 끊었다. 라이더는 소송을 제기하였고 당시 MMDA는 항소를 거듭했으며 위반 영수증은 취소되어야 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같은해 6월, 최종심은 예심명령의 영장은 유효하며 모터사이클은 합법적으로 연안유료도로를 이용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2003년 6월, 크리스티나 코네조(Christina Cornejo) 마카티 지방법원 판사는 공공건설도로부 규칙 123호가 불법이라는 부분재심 신청을 기각하고 유료도로에서 모터사이클 통행의 전면적 금지를 지지하였다. 전임 판사가 금지는 불법이며 무효라고 언도한 판결을 완전히 뒤엎었다. 청원자들은 사건을 대법원으로 가져갔다. 정부 고위공무원은 모터사이클의 고속도로 통행에 아무 문제가 없지만 일부 라이더가 400cc미만을 금지하는 효력이 사라진 부 규칙 123호를 지지하는 정치적 문제가 생겼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터사이클 클럽에서는 정치적 문제는 없으며 부 규칙 123호를 지지하는 모터사이클 사용자는 자신들만 고속도로를 타기 위해 400cc 미만 사용자의 안전을 희생시키며 즐거워하기 때문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만 있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9] 2006년 6월 19일, 이륜차의 유료도로 통행금지를 규정하는 공공건설도로부 규칙 74호(1993년 시행), 215호(1998년 시행), 123호(2001년 시행), 그리고 통행규제위원회의 접근제한시설에 대한 수정법률과 규칙(1997년 시행)을 무효화한 필리핀 대법원의 판결에 의해 필리핀의 고속도로와 유료도로 등에서 이륜차의 통행이 가능해졌다.[10] 대한민국[편집] 대한민국 고속도로의 이륜자동차 통행 논란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대한민국은 도로교통법에 고속도로 등(고속국도 노선과 고속국도 노선에 포함되지 않는 자동차전용도로를 통칭)에 이륜자동차의 경우 긴급자동차에 한해 통행이 가능하도록 명시되어 있어 긴급자동차로 지정된 모터사이클(예 : 싸이카 등)인 경우에만 고속도로 등의 통행이 가능하며 그 외의 모터사이클은 배기량에 관계없이 고속도로의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11] 이러한 법에 의해 통행을 하다 적발되는 경우도 있으며, 적발되면 30만원 이하의 벌금이나 구류에 처하게 된다. 이러한 법에 대해 사용자가 헌법소원을 제기한 사례도 있지만 헌법재판소에서는 기각판결과 합헌판결을 내렸다. 타이완 (중화민국)[편집] 타이완의 550cc 이상 이륜차 통행금지 표지 도안.(이 경우 모든 배기량의 이륜차 통행금지) 타이완의 550cc 이상 이륜차 통행가능 자동차 전용도로 표지 도안. 중화민국의 자동차 전용도로에서 이륜차의 통행이 언제부터 금지가 되었는지 알 수 없다. 2003년 타이완에서 최초로 이륜차 사용자의 권리를 위한 저항운동을 하기 시작했으며, 2006년에는 타이완 68개 이상의 모터사이클 판매대리점 대표인 첸펑윤(중국어 정체자: 陳豐運, 병음: Chén Fēngyùn)의 선도로 타이완 전역에서 1500명 이상의 모터사이클 오너들이 고속도로 개방을 위한 투명한 일정표를 세울 것을 요구하기 위해 타이베이 거리를 점거하였다. 시위에 참가한 모터사이클 오너들은 시청과 입법원으로 주행하였으며, 이들은 시청과 입법원 건물 앞에서 "도로 권리를 돌려 달라", "이륜차 운전자는 범죄자가 아니다." 라는 구호를 외쳤다.[12] 중화민국에서 자동차 전용도로[13] 의 교통관리를 담당하는 기관은 교통부와 내정부로, 도로교통관리처벌조례(zh:道路交通管理處罰條例) 제33조에 의하여 모터사이클의 고속공로 통행은 특정한 경찰 목적이나 비상 업무 등에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는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며, 이는 안전을 위한 요소라는 것이 타이완의 교통 관련 행정 부처의 공식적인 입장이며,[14] 금지 이유는 아래와 같다. 타이완의 고속공로는 모터사이클 전용 차로가 없다. 모터사이클이 일반 자동차 및 대형 차량과 차로를 공유하는 것은 매우 위험할 수 있다. 모터사이클은 자동차보다 보호를 적게 받는다. 때문에 발생할 수있는 사고는 더 나빠질 수 있으며, 특히 복잡한 교통 흐름과 잦은 교류 때문에 모터사이클 운전자에 대한 위험을 증가시킨다. 타이완의 모터사이클 운전자는 인내성이 낮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것으로 반드시 다른 차량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교통흐름에 방해가 된다. 고속공로의 교통량이 용량 이상이며 고속공로의 교통량을 해소하기 위한 좋은 관리가 필요하다. 모터사이클의 고속도로 통행은 교통문제를 악화시킬 것이다. 이에 대한 반론은 아래와 같다. 같은 속도로 달리는 차량은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의 교통사고와 충돌은 교차로에서 발생하며, 주변 지대와 높이가 같은 도로는 일반적인 느린 속도에도 불구하고 모터사이클에 있어서 더 위험한 경향이 있다. 적절한 안전 교육은 대부분의 안전 문제를 감소하게 한다. 나홀로 승용차 운전자는 모터사이클을 타는 것으로 전환하여 교통체증을 감소하게 해야 한다. 2006년 7월 1일에 개정된 고속공로급쾌속공로교통관제규칙(zh:高速公路及快速公路交通管制規則) 제19조에서는 틀림없이 쾌속도로에 550cc 이상의 이륜차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으며, 2012년 6월 29일에 개정된 고속공로급쾌속공로교통관제규칙 제20조에는 대부분의 쾌속공로에서 250cc 이상의 이륜차(타이완 기준으로 250cc~549cc는 노랑색 번호판, 550cc 이상은 적색 번호판 부착)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개정되었다. 이외에도 고속공로에서 550cc이상의 이륜차가 통행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지만 자동차 운전자, 경찰과 지방정부의 부정적인 반응으로 인해 고속공로에 이륜차의 통행을 가능하도록 하는 개정내용은 예정대로 구현되지 않았다.[15] 2007년 1월 12일 입법원은 도로교통관리처벌조례 제92조를 개정하였으며,[16] 당시 교통부의 철도도로국장 인청펑(중국어 정체자: 尹承蓬, 병음: Yǐn Chéngpéng)은 운행 안전, 이륜차운전자 교습과 새로운 교통표지 도입에 초점을 맞추어 관련법규를 개정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개정안을 제출한 민주진보당 국회의원 왕싱난(중국어 정체자: 王辛男, 병음: Wáng Xìngnán)은 벨기에, 프랑스, 독일에서는 모터사이클이 고속도로를 통행하고 있다고 말하였으며, 타이완이 법규 개정으로 세계적 추세에 동조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타이완 경찰청은 고속공로의 대량 교통이 모터사이클 운전자에게 위험하다는 이유로 이륜차의 고속도로 통행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17] 2007년 9월 13일에 행정원이 2007년 1월 12일에 개정된 도로교통관리처벌조례 개정안을 검증 후 이를 승인함에 따라,[18] 2007년 11월 1일부터 550cc 이상의 이륜차는 쾌속공로의 통행이 가능하게 되었다.[19] 고속공로는 긴급용을 제외한 모든 이륜차의 통행이 금지되는 동안 입법원은 교통부에 2010년까지 고속공로에 대한 이륜차 통행 가능성을 연구하도록 요청했다.[20][21] 2011년 11월 8일의 개정안에는 이론상으로 550cc 이상 이륜차의 고속공로 통행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다.[22] 속도 제한[편집] 안전 문제라는 이유로 특정한 국가의 고속도로의 제한속도 중 모터사이클의 제한속도는 아래와 같은 제한속도를 부과한다. 불가리아 : 100 km/h (승용차 최고제한속도는 130 km/h) 중국 본토 : 80 km/h (승용차 최고제한속도는 120 km/h) 일본 : 모터사이클의 고속도로 최고제한속도는 80 km/h(승용차 최고제한속도는 100 km/h)로 제한되었지만 2000년에 승용차의 제한속도와 같은 100 km/h로 바뀌었다. 각주[편집] ↑ 중화인민공화국 도로교통안전법 제67조 ↑ “Hong Kong Road Users' Code: Chapter 7 For Motor Cycles”. 2009년 10월 19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5월 23일에 확인함.  ↑ (일본어) 일본어 위키백과의 일본 도로교통법 문서를 참조 ↑ 米国政府、自動二輪2人乗り禁止規則の撤廃を要求 Archived 2010년 5월 27일 - 웨이백 머신 주일미국대사관 ↑ 高速道路バイク2人乗り、7割超が反対 TBS 2003.07.21 ↑ ニュースリリース ↑ [1] レスポンス自動車ニュース, 2005.03.31 ↑ “好きな場所にいつでも行けるオートバイツーリングの楽しさ”. 2011년 9월 2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8월 24일에 확인함.  ↑ The History of the Ban on Motorcycles Using the Tollways Motorcyclephilippines ↑ Supreme Court Strikes Down Motorcycle Ban on Tollways Motorcyclephilippines ↑ 대한민국 도로교통법, 도로교통법 제63조를 참조 ↑ (영어) 1,500 bikers take to the streets to demand open roads Taipei Times 2006.07.03 ↑ 타이완의 자동차 전용도로는 고속공로와 쾌속공로로 구분되며, 고속공로의 영문명칭은 Freeway, 쾌속공로의 영문명칭은 Expressway ↑ “보관 된 사본”. 2007년 11월 2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6년 5월 31일에 확인함.  ↑ (영어) CNN iReport: Taiwan's Legislative department passed a Law and local officials refuse to follow? Archived 2016년 3월 4일 - 웨이백 머신 ↑ (중국어) 도로교통관리처벌조례 입법원, 2007년 1월 12일 개정 ↑ (영어) Traffic amendment gives more freedom to large motorcycles Taipei Times 2007.01.14 ↑ 도로교통관리처벌조례 연혁, 중화민국 법무부 ↑ (영어) Large-engined bikes take to the nation's expressways Taipei Times, 2007년 11월 1일 ↑ 공식 발표 입법원, 2007년 10월 31일 ↑ (중국어) 중요한 교통뉴스 Archived 2008년 6월 18일 - 웨이백 머신 타이완 교통협회, 2007년 1월 13일 ↑ (중국어) 도로교통관리처벌조례 입법원, 2011년 11월 8일 개정 관련 항목[편집] 고속도로의 모터사이클 통행 기준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동아시아_지역_고속도로의_모터사이클_통행_제한&amp;oldid=23154767" 분류: 고속도로모터사이클숨은 분류: 중국어 간체자 표기를 포함한 문서중국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2월 4일 (화) 16:1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제목: 동아시아 고속도로의 모터사이클 통행 제한, 그 배경과 현황 #### 요약 본문: 동아시아 지역의 고속도로에서는 모터사이클 통행에 대한 다양한 제한이 존재합니다. 중국 본토, 홍콩, 일본, 필리핀, 대한민국, 타이완 등에서 시행되는 이 제한은 주로 안전 문제를 이유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중국 본토에서는 2인 승차 모터사이클의 고속도로 통행이 금지되며, 일본은 125cc 이상의 모터사이클만 고속도로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필리핀은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모터사이클의 고속도로 통행을 금지했으나, 최근 법원 판결로 통행이 허용되기도 했습니다. 대한민국은 긴급차량을 제외한 모든 모터사이클의 고속도로 통행을 금지하고 있으며, 타이완은 특정 배기량 이상의 모터사이클에 대해 통행을 제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제한은 모터사이클 사용자와 관련 단체들 사이에서 논란을 일으키고 있으며, 각국의 법과 규정은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 결론 요약: 동아시아의 고속도로에서 모터사이클 통행 제한은 안전을 위한 조치로 시작되었지만, 각국의 법과 규정은 사용자들의 권리와 안전 간의 균형을 찾기 위한 지속적인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문제는 모터사이클 사용자와 정부 간의 갈등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으며, 각국의 정책 변화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을 기반으로 블로그 요약 포스트를 쓴다고 가정하고,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제목, 요약 본문, 결론 요약까지 작성해줘.
그리스_신화와_서양_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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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그리스 신화와 서양 예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그리스 신화와 서양 예술</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div><div><a><img></a> <div><div><a></a></div>보티첼리의 《<a>베누스의 탄생</a>》(1485–1486년 경, 캔버스에 유화, <a>우피치</a>, <a>플로렌스</a>) &#8212; <a>고대</a> 다신교의 새로운 관점을 목적으로 한 베누스 푸티카의 재현. 현대인을 위한 르네상스 정신의 전형으로도 통한다.<sup><a>&#91;1&#93;</a></sup></div></div></div> <p><a>르네상스</a> 시대에 <a>고전 고대</a>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면서, <a>오비디우스</a>의 시는 시인과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다음 세기 동안 이어지는 <b><a>그리스 신화</a></b>의 보급과 인식에 근원적인 영향력으로 자리 잡았다.<sup><a>&#91;2&#93;</a></sup> 르네상스 초기부터 예술가들은 전통적인 기독교 주제와 더불어 그리스 신화에 대한 주제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주제는 이탈리아 예술가인 <a>보티첼리</a>의 《<a>베누스의 탄생</a>》, 《<a>팔라스와 켄타우로스</a>》, <a>레오나르도 다 빈치</a>, <a>미켈란젤로</a>, 그리고 <a>라파엘로</a>의 《<a>갈라테아</a>》가 있다.<sup><a>&#91;2&#93;</a></sup> 또한, 라틴어 매체와 오비디우스의 시를 통해 <a>이탈리아</a>의 <a>페트라르카</a>, <a>보카치오</a>, <a>단테</a> 등과 같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시인들도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sup><a>&#91;1&#93;</a></sup> </p><p>북부 유럽에서 그리스 신화는 시각 예술의 주제로는 쓰이지 않았으나, 문학 분야에서는 큰 영향을 주었다. 라틴과 그리스 고전 원문을 번역하면서 신화 이야기를 주제로 다루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영국에서는 <a>초서</a>, <a>엘리자베스</a> 시대의 <a>존 밀턴</a>이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a>셰익스피어</a>와 <a>로버트 브리지스</a>에 이르는 거의 모든 주요 영국 시들도 그리스 신화에서 그 영감을 받았다. <a>프랑스</a>의 <a>장 라신</a>과 <a>독일</a>의 <a>괴테</a>는 그리스 희곡을 부활시켰다.<sup><a>&#91;2&#93;</a></sup> 라신은 <a>파이드라</a>, <a>안드로마케</a>, 오이디푸스와 <a>이피게네이아</a>처럼 많은 고대 신화들을 새로운 목적으로 개작하였다.<sup><a>&#91;3&#93;</a></sup> </p> <div><div><a><img></a> <div><div><a></a></div><a>프란시스코 고야</a>, 《<a>에우로페의 납치</a>》<i>(El rapto de Europa),</i> 1772년</div></div></div> <p>18세기에는 <a>계몽주의</a>의 철학 변혁이 유럽에 퍼지면서 그리스 신화에 대한 반발 작용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리스와 로마의 과학과 철학에 대한 업적을 강조하는 풍조가 강해졌다. 그러나 신화는 각본 작가에게는 가공되지 않은 소재의 중요한 출처로 계속해서 쓰였으며, 이를 통해 <a>헨델</a>의 오페라 《<a>아드메토</a>》, 《<a>세멜레</a>》, <a>모차르트</a>의 《<a>이도메네오</a>》, <a>글루크</a>의 《<a>아울리데의 이피게네이아</a>》의 <a>리브레토</a>가 만들어졌다.<sup><a>&#91;3&#93;</a></sup> 세기 말에는 <a>낭만주의</a>가 대두되면서 신화를 포함한 그리스의 모든 것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이 때 그리스 비극과 호메로스에 대한 새로운 번역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며 <a>키츠</a>, <a>바이런</a>, <a>셸리</a>와 같은 당대의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sup><a>&#91;4&#93;</a></sup> <a>빅토리아 여왕</a>의 계관 시인 <a>알프레드 테니슨</a> 경은 헬레니즘 경향으로 인해 아서 왕의 영국 왕정을 호메로스 서사시 풍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1816년 <a>파르테논 대리석 조각군</a> 구입이 자극이 되어, 시각 예술에서의 영향도 발을 맞추어 나타났다. <a>레이턴 경</a>과 <a>로렌스 앨머 태디마</a>의 많은 "그리스" 회화는 그리스 이상의 매개로써 진정으로 인정 받았다.<sup><a>&#91;5&#93;</a></sup> 18세기 독일의 작곡가 <a>크리스토프 글루크</a> 또한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sup><a>&#91;1&#93;</a></sup> </p><p><a>토마스 불핀치</a>, <a>너대니얼 호손</a>과 같은 19세기 미국 작가들은 신화가 오락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고전 신화의 연구가 영국과 미국 문학의 이해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sup><a>&#91;6&#93;</a></sup> 불핀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날의 사람들 중에서 이른바 올림포스의 신들을 숭배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러한 신들은 지금은 신학의 분야가 아닌, 문학이나 취미의 영역에 속하여 있다."<sup><a>&#91;7&#93;</a></sup>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a>장 아누이</a>, <a>장 콕토</a>, <a>장 지로두</a>, 미국의 <a>유진 오닐</a>, 영국의 <a>T. S. 엘리엇</a> 등의 주요 극작가와 아일랜드인 <a>제임스 조이스</a>, 프랑스인 <a>앙드레 지드</a> 등의 주요 소설가가 고전 신화 속 주제를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을 썼으며, <a>리하르트 슈트라우스</a>, <a>자크 오펜바흐</a>를 비롯한 여러 음악가가 그리스 신화를 음악의 주제로 삼기도 하였다.<sup><a>&#91;1&#93;</a></sup>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 <sup><a>라</a></sup></span> <span><cite>&#12296;Greek Mythology&#12297;. &#12298;Encyclopaedia Britannica&#12299;. 2002.</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span> <span><cite>&#12296;Greek mythology&#12297;. &#12298;Encyclopaedia Britannica&#12299;. 2002.</cite><span><span>&#160;</span></span><br>* L. Burn, <i>Greek Myths</i>, 75</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l. Burn, <i>Greek Myths</i>, 75</span> </li> <li><span><a>↑</a></span> <span>l. Burn, <i>Greek Myths</i>, 75-76</span> </li> <li><span><a>↑</a></span> <span>l. Burn, <i>Greek Myths</i>, 76</span> </li> <li><span><a>↑</a></span> <span>Klatt-Brazouski, <i>Ancient Greek and Roman Mythology</i>, 4</span> </li> <li><span><a>↑</a></span> <span>T. Bulfinch (1855). <a><i>The Age of Fable: Or, Stories of Gods and Heroes</i></a>, p.11. Sanborn, Carter, and Bazin.</span> </li> </ol></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그리스_신화와_서양_예술&amp;oldid=19780931</a>"</div> <div><div><a>분류</a>: <ul><li><a>그리스 신화</a></li><li><a>예술사</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English</a></li><li><a>Bahasa Indonesia</a></li><li><a>日本語</a></li><li><a>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7년 10월 10일 (화) 19:4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18세기 초중반을 장악했던 유럽의 철학 사조는?
계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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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초중반을 장악했던 유럽의 철학 사조는?", "<아울리데의 이피게네이아>에 리브레토를 지어준 음악가는?", "알프레드 테니슨 경이 호메로스 서사시 풍으로 묘사한 영국 왕정은 어떤 왕의 것이었는가?", "18세기 말에 주로 강조된 철학은?", "18세기말 대두된 예술 사조는?", "알프레드 테니슨은 어떤 사람의 계관 시인이었는가?", "알프레드 테니슨은 아서 왕을 묘사한 서사시를 지은 사람은?", "고전 신화의 연구가 영국과 미국 문학 이해에 중요하다고 생각한 19세기 대표적인 예술가는?",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주요 극작가와 주요 소설가 여러 음악가들의 주제가 되었던 19세기의 대표적인 예술가는?", "19세기 마국작가들은 신화가 무엇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는가?", "불핀치는 오늘날에 어떤 신을 숭배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하였는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음악의 주제로 삼기도 했던 신화는?" ]
<!DOCTYPE html> 그리스 신화와 서양 예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그리스 신화와 서양 예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보티첼리의 《베누스의 탄생》(1485–1486년 경, 캔버스에 유화, 우피치, 플로렌스) — 고대 다신교의 새로운 관점을 목적으로 한 베누스 푸티카의 재현. 현대인을 위한 르네상스 정신의 전형으로도 통한다.[1] 르네상스 시대에 고전 고대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지면서, 오비디우스의 시는 시인과 예술가들의 영감을 자극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다음 세기 동안 이어지는 그리스 신화의 보급과 인식에 근원적인 영향력으로 자리 잡았다.[2] 르네상스 초기부터 예술가들은 전통적인 기독교 주제와 더불어 그리스 신화에 대한 주제를 묘사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주제는 이탈리아 예술가인 보티첼리의 《베누스의 탄생》, 《팔라스와 켄타우로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의 《갈라테아》가 있다.[2] 또한, 라틴어 매체와 오비디우스의 시를 통해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단테 등과 같은 중세와 르네상스의 시인들도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1] 북부 유럽에서 그리스 신화는 시각 예술의 주제로는 쓰이지 않았으나, 문학 분야에서는 큰 영향을 주었다. 라틴과 그리스 고전 원문을 번역하면서 신화 이야기를 주제로 다루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영국에서는 초서, 엘리자베스 시대의 존 밀턴이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셰익스피어와 로버트 브리지스에 이르는 거의 모든 주요 영국 시들도 그리스 신화에서 그 영감을 받았다. 프랑스의 장 라신과 독일의 괴테는 그리스 희곡을 부활시켰다.[2] 라신은 파이드라, 안드로마케, 오이디푸스와 이피게네이아처럼 많은 고대 신화들을 새로운 목적으로 개작하였다.[3] 프란시스코 고야, 《에우로페의 납치》(El rapto de Europa), 1772년 18세기에는 계몽주의의 철학 변혁이 유럽에 퍼지면서 그리스 신화에 대한 반발 작용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리스와 로마의 과학과 철학에 대한 업적을 강조하는 풍조가 강해졌다. 그러나 신화는 각본 작가에게는 가공되지 않은 소재의 중요한 출처로 계속해서 쓰였으며, 이를 통해 헨델의 오페라 《아드메토》, 《세멜레》, 모차르트의 《이도메네오》, 글루크의 《아울리데의 이피게네이아》의 리브레토가 만들어졌다.[3] 세기 말에는 낭만주의가 대두되면서 신화를 포함한 그리스의 모든 것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이 때 그리스 비극과 호메로스에 대한 새로운 번역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며 키츠, 바이런, 셸리와 같은 당대의 시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4] 빅토리아 여왕의 계관 시인 알프레드 테니슨 경은 헬레니즘 경향으로 인해 아서 왕의 영국 왕정을 호메로스 서사시 풍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1816년 파르테논 대리석 조각군 구입이 자극이 되어, 시각 예술에서의 영향도 발을 맞추어 나타났다. 레이턴 경과 로렌스 앨머 태디마의 많은 "그리스" 회화는 그리스 이상의 매개로써 진정으로 인정 받았다.[5] 18세기 독일의 작곡가 크리스토프 글루크 또한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받았다.[1] 토마스 불핀치, 너대니얼 호손과 같은 19세기 미국 작가들은 신화가 오락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고전 신화의 연구가 영국과 미국 문학의 이해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6] 불핀치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오늘날의 사람들 중에서 이른바 올림포스의 신들을 숭배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러한 신들은 지금은 신학의 분야가 아닌, 문학이나 취미의 영역에 속하여 있다."[7]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프랑스의 장 아누이, 장 콕토, 장 지로두, 미국의 유진 오닐, 영국의 T. S. 엘리엇 등의 주요 극작가와 아일랜드인 제임스 조이스, 프랑스인 앙드레 지드 등의 주요 소설가가 고전 신화 속 주제를 새롭게 재해석한 작품을 썼으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자크 오펜바흐를 비롯한 여러 음악가가 그리스 신화를 음악의 주제로 삼기도 하였다.[1] 각주[편집] ↑ 가 나 다 라 〈Greek Mythology〉. 《Encyclopaedia Britannica》. 2002.  ↑ 가 나 다 〈Greek mythology〉. 《Encyclopaedia Britannica》. 2002. * L. Burn, Greek Myths, 75 ↑ 가 나 l. Burn, Greek Myths, 75 ↑ l. Burn, Greek Myths, 75-76 ↑ l. Burn, Greek Myths, 76 ↑ Klatt-Brazouski, Ancient Greek and Roman Mythology, 4 ↑ T. Bulfinch (1855). The Age of Fable: Or, Stories of Gods and Heroes, p.11. Sanborn, Carter, and Bazin.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그리스_신화와_서양_예술&amp;oldid=19780931" 분류: 그리스 신화예술사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Bahasa Indonesia日本語Srpskohrvatski / српскохрватски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10월 10일 (화) 19:4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문단 번호 | 핵심 내용 | 키워드 | |------------|--------------------------------------------------------------------------|----------------------------| | 1 | 르네상스 시대에 그리스 신화가 재발견되고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 르네상스, 그리스 신화 | | 2 | 북부 유럽에서 그리스 신화는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 주요 작가들이 신화를 다룸. | 문학, 초서, 셰익스피어 | | 3 | 18세기 계몽주의로 인해 신화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나, 여전히 예술에 사용됨. | 계몽주의, 헨델, 모차르트 | | 4 | 낭만주의가 대두되며 그리스 신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새로운 번역이 이루어짐. | 낭만주의, 키츠, 바이런 | | 5 | 19세기 미국 작가들이 신화의 오락적 가치를 강조하며 문학에 중요성을 부여함. | 미국 문학, 불핀치 | | 6 | 현대에 이르러 다양한 작가와 음악가들이 그리스 신화를 재해석하고 활용함. | 현대 문학, 음악 | **글의 흐름 요약:** 이 문서는 그리스 신화가 르네상스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예술과 문학에 미친 영향을 다루고 있다. 초기에는 예술가들이 신화를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였고, 북부 유럽에서는 문학에서 그리스 신화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18세기에는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신화에 대한 반발이 있었으나 여전히 예술적 소재로 사용되었고, 낭만주의 시대에는 신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증가하였다. 19세기에는 미국 작가들이 신화의 오락적 가치를 강조하며 문학에 통합하였고, 현대에 이르러 다양한 작가와 음악가들이 신화를 재해석하여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이 글의 내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표 형식으로 요약해줘. 예: {문단 번호, 핵심 내용, 키워드}. 글의 흐름이 어떻게 전개되는지도 요약 마지막에 간단히 설명해줘.
더_레브
https://ko.wikipedia.org/wiki/더_레브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더 레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더 레브</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h colspan="2"><div><div><img></div><span>제임스 "더 레브" 설리반<br></span></div></th></tr><tr><td colspan="2"> <a><img></a></td></tr><tr><th colspan="2">기본 정보</th></tr><tr><th>본명</th> <td> 제임스 오웬 설리반(James Owen Sullivan)</td></tr><tr><th>예명</th> <td> The Rev</td></tr><tr><th>출생</th> <td> 1981년 2월 9일<span>(<span>1981-02-09</span>)</span><br><span><a>캘리포니아주</a>, <a>헌팅턴비치</a></span></td></tr><tr><th>사망</th> <td> 2009년 12월 28일 (28세)<br><span><a>캘리포니아주</a>, <a>헌팅턴비치</a></span></td></tr><tr><th>국적</th> <td> <span><a><img></a></span> <a>미국</a></td></tr><tr><th>직업</th> <td> <a>뮤지션</a>, <a>송라이터</a>, <a>작곡가</a>, <a>드러머</a></td></tr><tr><th>장르</th> <td> <a>하드 록</a>, <a>헤비 메탈</a>, <a>메탈코어</a>, <a>프로그레시브 메탈</a>, <a>아방가르드 메탈</a>, <a>스카 펑크</a></td></tr><tr><th>악기</th> <td> <a>드럼</a>, <a>보컬</a>, <a>기타</a>, <a>피아노</a>, <a>키보드</a></td></tr><tr><th>활동 시기</th> <td> 1998년 - 2009년</td></tr> <tr><th>레이블</th> <td> <a>워너 브라더스</a>, <a>굿 라이프</a>, <a>호프리스 레코드</a>, 부크탄</td></tr><tr><th>관련 활동</th> <td> <a>어벤지드 세븐폴드</a>, 핑클리 스무스, 브라이언 헤이너, 서버반 레전즈</td></tr> </tbody></table> <p><b>제임스 오언 설리번</b>(James Owen Sullivan, <a>1981년</a> <a>2월 9일</a> ~ <a>2009년</a> <a>12월 28일</a>)<sup><a>&#91;1&#93;</a></sup>은 <a>미국</a>의 <a>음악가</a>이자 <a>작곡가</a>로, <b>더 레버런드 소롤뮤 플레이그</b>(The Reverend Tholomew Plague) 또는 간단히 <b>더 레브</b>(The Rev)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의 <a>헤비 메탈</a> 밴드 <a>어벤지드 세븐폴드</a>의 송라이터, 공동 리드보컬, 창립 멤버였다. 그는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앨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되며 "Afterlife", "A Little Piece of Heaven", "Almost Easy"같은 곡들을 작곡하였다. 그는 또한 같은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멤버인 <a>시니스터 게이츠</a>(Brian Elwin Haner Jr.)와 함께 그의 사이드 프로젝트 밴드 핑클리 스무스에서 예명 랫헤드(Rathead)로 보컬과 피아노를 담당했었다. 또한 그는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서버반 레전즈의 드러머였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커리어</span></a></li> <li><a><span>2</span> <span>사망</span></a></li> <li><a><span>3</span> <span>음반</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커리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설리반은 1981년 2월 9일, 캘리포니아 주의 헌팅턴비치에서 태어났다.<sup><a>&#91;2&#93;</a></sup> 그는 5살 때 처음 <a>드럼 스틱</a>을 선물받았고 12살 때는 <a>드럼 세트</a>를 선물받았다.<sup><a>&#91;3&#93;</a></sup> 고등학생 때는 학교 밴드에서 활동했다. 어벤지드 세븐폴드를 창립하기 전에는 <a>스카</a> 밴드 서버반 레전즈의 드러머로 활동했었다. 그는 20살에 어벤지드 세븐폴드와 함께 그의 생애 첫 앨범 <a><i>Sounding the Seventh Trumpet</i></a>을 발매한다. 초기에 그는 <a>프랭크 자파</a>와 <a>킹 크림슨</a>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모던 드러머 매거진 인터뷰에서 그는, "록과 메탈뿐만 아니라 이들의 음악을 정말 많이 들으면서 자랐다."<sup><a>&#91;3&#93;</a></sup> </p><p>이후 그는 <a>비니 폴</a>, <a>마이크 포트노이</a> (그는 더 레브의 사망 이후 어벤지드 세븐폴드에서 잠깐 드러머로 활동한다), <a>데이브 롬바르도</a>, <a>조이 조디슨</a>, <a>라스 울리히</a>, <a>테리 보지오</a>와 같은 드러머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sup><a>&#91;4&#93;</a></sup> 그는 "내가 영향을 받은 드러머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매우 재미있다. 예로, <a>타미 리</a>는 나에게 시각적인 퍼포먼스를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하여 영향을 주었다. 난 그와 같이 공연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참 대단한 것 같다."라고 했다.<sup><a>&#91;5&#93;</a></sup> 설리반은 "더 더블 라이드 씽(The double-ride thing), 또는 "더 더블 옥토퍼스(The Double Octopus)와 같은 그만의 기술이 있는데 이 용어들의 이름은 그가 "이것들보다 더 좋은 용어가 생각나지 않는다"며 붙여진 것이다.<sup><a>&#91;6&#93;</a></sup> "더 더블 라이드 씽" 테크닉은 "Almost Easy", "Critical Acclaim", "Crossroads", "Dancing Dead"와 같은 트랙에서 사용되었는데, 이 테크닉은 빠른 템포에서 더블 베이스 드럼과 라이드 심벌의 속도를 2배로 올리는 것이다. 연주할 때 설리반은 종종 스틱을 돌리기도 한다. </p><p>더 레브는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드러머임과 동시에 작곡가, 송라이터, 보컬, 피아니스트였다. 그의 보컬 트랙은 "Strength of the World", "Afterlife", "A Little Piece of Heaven", "Almost Easy", "Scream", "Critical Acclaim", "Lost", "Brompton Cocktail", "Crossroads", "Flash of the Blade (<a>아이언 메이든</a> 커버)", "Fiction"과 같은 트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A Little Piece of Heaven", "Afterlife", "Almost Easy", "Unbound (The Wild Ride)", "Buried Alive", "Fiction", "Brompton Cocktail"과 같은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어벤지드 세븐폴드는 더 레브가 전자 드럼셋으로 연주한 트랙과 보컬 트랙을 녹음한 "Nightmare"의 데모를 발매했다. </p><p>제2회 리볼버 골든 갓 어워드에서 더 레브는 베스트 드러머에 선정되어 시상을 받았다. 고인이 된 그를 대신하여 그의 가족,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멤버가 대신 시상했다.<sup><a>&#91;7&#93;</a></sup> </p><p>얼티메이트 기타 온라인 사이트에서 실시한 "최고의 드러머 1위~10위"의 구독자 투표에서 더 레브는 <a>블랙 사바스</a>의 드러머 <a>빌 워드</a>보다 높은 순위이자 <a>더 후</a>의 드러머 <a>키스 문</a>보다는 낮은 순위인 8위에 등극되었다. 2017년에는 그는 얼티메이트 기타의 노래하는 드러머 1~25위 리스트에서 5위에 등극되었다.<sup><a>&#91;8&#93;</a></sup> </p> <h2><span></span><span>사망</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2009년 12월 28일, 자택에서 숨져있는 것이 발견됐다. 검시 결과, 사인은 처방약과 알코올의 과잉 섭취로 판명되었다. </p> <h2><span></span><span>음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b>어벤지드 세븐폴드</b> </p> <ul><li><i><a>Sounding The Seventh Trumpet</a></i> (2001)</li> <li><i><a>Waking The Fallen</a></i> (2003)</li> <li><i><a>City of Evil</a></i> (2005)</li> <li><i><a>Avenged Sevenfold</a></i> (2007)</li> <li><i><a>Live in the LBC &amp; Diamonds in the Rough</a></i> (2008)</li> <li><i><a>Nightmare</a></i> (2010)</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table> <tbody><tr> <td><img></td> <td> <b><a>위키미디어 공용</a></b>에 관련된<br>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div><b><a>더 레브</a></b></div> </td> </tr> </tbody></table> <div> <div><ol> <li><span><a>↑</a></span> <span><cite><a>&#8220;MTV Newsroom&#8221;</a>. Newsroom.mtv.com. 2009년 12월 29일. 2011년 10월 23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11년 10월 28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Huntington Beach Independent&#8221;</a>. Hbindependent.com. 2010년 2월 17일<span>. 2011년 10월 28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cite><a>&#8220;<span>'</span>&#39;Modern Drummer Magazine Interview Oct. 2006'&#39;&#8221;</a>. Moderndrummer.com. 2010년 8월 4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11년 10월 28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January 5, 2010&#8221;</a>. Allcurrenthotnews.com. 2012년 1월 11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11년 10월 29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James "The Rev" Sullivan | Modern Drummer Magazine&#8221;</a>. &#12298;www.moderndrummer.com&#12299;<span>. 2016년 12월 23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DRUM! Magazine Interview Nov. 2007&#8221;</a>. Drummagazine.com<span>. 2011년 10월 28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Revolver Golden Gods Awards 2010: The Winners &#124; Latest News&#8221;</a>. Metal Injection. 2010년 4월 9일<span>. 2011년 10월 28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Friday Top: 25 Greatest Singing Drummers&#8221;</a>. &#12298;Ultimate-guitar.com&#12299;<span>. 2017년 11월 30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ol></div></div> <div><table><tbody><tr><th><a>전거 통제</a></th><td><div> <ul><li><a>뮤직브레인즈</a>: <span><a>717f3252-14e9-461a-9233-12e4f9c08df3</a></span></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더_레브&amp;oldid=24367091</a>"</div> <div><div><a>분류</a>: <ul><li><a>1981년 태어남</a></li><li><a>2009년 죽음</a></li><li><a>미국의 헤비 메탈 드럼 연주자</a></li><li><a>미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a></li><li><a>미국의 록 피아노 연주자</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다른 프로젝트</h3> <div> <ul> <li><a>위키미디어 공용</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Aragonés</a></li><li><a>العربية</a></li><li><a>تۆرکجه</a></li><li><a>Беларуская</a></li><li><a>Català</a></li><li><a>Čeština</a></li><li><a>Dansk</a></li><li><a>Deutsch</a></li><li><a>Ελληνικά</a></li><li><a>English</a></li><li><a>Español</a></li><li><a>Eesti</a></li><li><a>فارسی</a></li><li><a>Suomi</a></li><li><a>Français</a></li><li><a>Galego</a></li><li><a>עברית</a></li><li><a>Magyar</a></li><li><a>Bahasa Indonesia</a></li><li><a>Italiano</a></li><li><a>日本語</a></li><li><a>Nederlands</a></li><li><a>Norsk</a></li><li><a>Polski</a></li><li><a>Português</a></li><li><a>Română</a></li><li><a>Русский</a></li><li><a>Simple English</a></li><li><a>Slovenčina</a></li><li><a>Svenska</a></li><li><a>ไทย</a></li><li><a>Türkçe</a></li><li><a>中文</a></li><li><a>粵語</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6월 3일 (월) 14:4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설리번에게 시각적인 퍼포먼스 방면으로 영향을 준 기성 드러머는?
타미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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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리번에게 시각적인 퍼포먼스 방면으로 영향을 준 기성 드러머는?", "설리번이 감탄한 드럼 기술로, 더블 베이스 드럼과 라이드 심벌의 속도를 2배로 올리는 것은?", "빠른 템포에서 더블 베이스 드럼과 라이드 심벌의 속도를 2배로 올리는 테크닉은?", "더 레브 사망 이후 마이크 포트노이의 포지션은?", "설리번의 자작곡으로 'The Wild Ride'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곡은?", "어벤지드 세븐폴드가 발표한 데모곡으로, 설리번이 드럼과 보컬을 녹음한 곡은?", "어벤지드 세븐폴드다 발매한 더 레브의 데모 트랙은?", "Scream은 더 레브의 무슨 트랙에 속하는가?" ]
<!DOCTYPE html> 더 레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더 레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제임스 "더 레브" 설리반</th></tr><tr><td colspan="2"> </td></tr><tr><th colspan="2">기본 정보</th></tr><tr><th>본명</th> <td> 제임스 오웬 설리반(James Owen Sullivan)</td></tr><tr><th>예명</th> <td> The Rev</td></tr><tr><th>출생</th> <td> 1981년 2월 9일(1981-02-09)캘리포니아주, 헌팅턴비치</td></tr><tr><th>사망</th> <td> 2009년 12월 28일 (28세)캘리포니아주, 헌팅턴비치</td></tr><tr><th>국적</th> <td> 미국</td></tr><tr><th>직업</th> <td> 뮤지션, 송라이터, 작곡가, 드러머</td></tr><tr><th>장르</th> <td> 하드 록, 헤비 메탈, 메탈코어, 프로그레시브 메탈, 아방가르드 메탈, 스카 펑크</td></tr><tr><th>악기</th> <td> 드럼, 보컬, 기타, 피아노, 키보드</td></tr><tr><th>활동 시기</th> <td> 1998년 - 2009년</td></tr> <tr><th>레이블</th> <td> 워너 브라더스, 굿 라이프, 호프리스 레코드, 부크탄</td></tr><tr><th>관련 활동</th> <td> 어벤지드 세븐폴드, 핑클리 스무스, 브라이언 헤이너, 서버반 레전즈</td></tr> </tbody></table> 제임스 오언 설리번(James Owen Sullivan, 1981년 2월 9일 ~ 2009년 12월 28일)[1]은 미국의 음악가이자 작곡가로, 더 레버런드 소롤뮤 플레이그(The Reverend Tholomew Plague) 또는 간단히 더 레브(The Rev)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의 헤비 메탈 밴드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송라이터, 공동 리드보컬, 창립 멤버였다. 그는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앨범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고 평가되며 "Afterlife", "A Little Piece of Heaven", "Almost Easy"같은 곡들을 작곡하였다. 그는 또한 같은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멤버인 시니스터 게이츠(Brian Elwin Haner Jr.)와 함께 그의 사이드 프로젝트 밴드 핑클리 스무스에서 예명 랫헤드(Rathead)로 보컬과 피아노를 담당했었다. 또한 그는 1998년부터 1999년까지 서버반 레전즈의 드러머였다. 목차 1 커리어 2 사망 3 음반 4 각주 커리어[편집] 설리반은 1981년 2월 9일, 캘리포니아 주의 헌팅턴비치에서 태어났다.[2] 그는 5살 때 처음 드럼 스틱을 선물받았고 12살 때는 드럼 세트를 선물받았다.[3] 고등학생 때는 학교 밴드에서 활동했다. 어벤지드 세븐폴드를 창립하기 전에는 스카 밴드 서버반 레전즈의 드러머로 활동했었다. 그는 20살에 어벤지드 세븐폴드와 함께 그의 생애 첫 앨범 Sounding the Seventh Trumpet을 발매한다. 초기에 그는 프랭크 자파와 킹 크림슨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모던 드러머 매거진 인터뷰에서 그는, "록과 메탈뿐만 아니라 이들의 음악을 정말 많이 들으면서 자랐다."[3] 이후 그는 비니 폴, 마이크 포트노이 (그는 더 레브의 사망 이후 어벤지드 세븐폴드에서 잠깐 드러머로 활동한다), 데이브 롬바르도, 조이 조디슨, 라스 울리히, 테리 보지오와 같은 드러머들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4] 그는 "내가 영향을 받은 드러머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매우 재미있다. 예로, 타미 리는 나에게 시각적인 퍼포먼스를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하여 영향을 주었다. 난 그와 같이 공연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참 대단한 것 같다."라고 했다.[5] 설리반은 "더 더블 라이드 씽(The double-ride thing), 또는 "더 더블 옥토퍼스(The Double Octopus)와 같은 그만의 기술이 있는데 이 용어들의 이름은 그가 "이것들보다 더 좋은 용어가 생각나지 않는다"며 붙여진 것이다.[6] "더 더블 라이드 씽" 테크닉은 "Almost Easy", "Critical Acclaim", "Crossroads", "Dancing Dead"와 같은 트랙에서 사용되었는데, 이 테크닉은 빠른 템포에서 더블 베이스 드럼과 라이드 심벌의 속도를 2배로 올리는 것이다. 연주할 때 설리반은 종종 스틱을 돌리기도 한다. 더 레브는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드러머임과 동시에 작곡가, 송라이터, 보컬, 피아니스트였다. 그의 보컬 트랙은 "Strength of the World", "Afterlife", "A Little Piece of Heaven", "Almost Easy", "Scream", "Critical Acclaim", "Lost", "Brompton Cocktail", "Crossroads", "Flash of the Blade (아이언 메이든 커버)", "Fiction"과 같은 트랙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A Little Piece of Heaven", "Afterlife", "Almost Easy", "Unbound (The Wild Ride)", "Buried Alive", "Fiction", "Brompton Cocktail"과 같은 곡을 작곡하기도 했다. 어벤지드 세븐폴드는 더 레브가 전자 드럼셋으로 연주한 트랙과 보컬 트랙을 녹음한 "Nightmare"의 데모를 발매했다. 제2회 리볼버 골든 갓 어워드에서 더 레브는 베스트 드러머에 선정되어 시상을 받았다. 고인이 된 그를 대신하여 그의 가족,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멤버가 대신 시상했다.[7] 얼티메이트 기타 온라인 사이트에서 실시한 "최고의 드러머 1위~10위"의 구독자 투표에서 더 레브는 블랙 사바스의 드러머 빌 워드보다 높은 순위이자 더 후의 드러머 키스 문보다는 낮은 순위인 8위에 등극되었다. 2017년에는 그는 얼티메이트 기타의 노래하는 드러머 1~25위 리스트에서 5위에 등극되었다.[8] 사망[편집] 2009년 12월 28일, 자택에서 숨져있는 것이 발견됐다. 검시 결과, 사인은 처방약과 알코올의 과잉 섭취로 판명되었다. 음반[편집] 어벤지드 세븐폴드 Sounding The Seventh Trumpet (2001) Waking The Fallen (2003) City of Evil (2005) Avenged Sevenfold (2007) Live in the LBC &amp; Diamonds in the Rough (2008) Nightmare (2010) 각주[편집] <table> <tbody><tr> <td></td> <td> 위키미디어 공용에 관련된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더 레브 </td> </tr> </tbody></table> ↑ “MTV Newsroom”. Newsroom.mtv.com. 2009년 12월 29일. 2011년 10월 23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10월 28일에 확인함.  ↑ “Huntington Beach Independent”. Hbindependent.com. 2010년 2월 17일. 2011년 10월 28일에 확인함.  ↑ 가 나 “''Modern Drummer Magazine Interview Oct. 2006''”. Moderndrummer.com. 2010년 8월 4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10월 28일에 확인함.  ↑ “January 5, 2010”. Allcurrenthotnews.com. 2012년 1월 1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11년 10월 29일에 확인함.  ↑ “James "The Rev" Sullivan | Modern Drummer Magazine”. 《www.moderndrummer.com》. 2016년 12월 23일에 확인함.  ↑ “DRUM! Magazine Interview Nov. 2007”. Drummagazine.com. 2011년 10월 28일에 확인함.  ↑ “Revolver Golden Gods Awards 2010: The Winners | Latest News”. Metal Injection. 2010년 4월 9일. 2011년 10월 28일에 확인함.  ↑ “Friday Top: 25 Greatest Singing Drummers”. 《Ultimate-guitar.com》. 2017년 11월 30일에 확인함.  <table><tbody><tr><th>전거 통제</th><td> 뮤직브레인즈: 717f3252-14e9-461a-9233-12e4f9c08df3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더_레브&amp;oldid=24367091" 분류: 1981년 태어남2009년 죽음미국의 헤비 메탈 드럼 연주자미국의 남자 뮤지컬 배우미국의 록 피아노 연주자숨은 분류: MusicBrainz 식별자를 포함한 위키백과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AragonésالعربيةتۆرکجهБеларускаяCatalàČeštinaDanskDeutschΕλληνικάEnglishEspañolEestiفارسیSuomiFrançaisGalegoעבריתMagyarBahasa IndonesiaItaliano日本語NederlandsNorskPolskiPortuguêsRomânăРусскийSimple EnglishSlovenčinaSvenskaไทยTürkçe中文粵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6월 3일 (월) 14:4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서론 제임스 "더 레브" 설리반은 미국의 유명한 뮤지션이자 작곡가로, 헤비 메탈 밴드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창립 멤버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음악적 기여와 독특한 드러밍 스타일은 그를 음악계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이 문서는 그의 생애, 커리어, 사망 원인 및 음악적 유산을 다룬다. ### 본론 설리반은 1981년 캘리포니아주 헌팅턴비치에서 태어나 5세에 드럼을 시작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음악 활동을 시작했으며, 20세에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첫 앨범을 발매했다. 그의 음악적 스타일은 프랭크 자파와 킹 크림슨의 영향을 받았으며, 다양한 드러머들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그는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여러 곡에서 보컬과 작곡을 담당하며, "A Little Piece of Heaven", "Afterlife" 등의 곡을 작곡했다. 그의 드러밍 기술은 독창적이며, 여러 음악 매체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설리반은 2009년 12월 28일, 자택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으며, 사인은 처방약과 알코올의 과다 섭취로 확인되었다. 그의 죽음은 음악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그의 유산은 계속해서 기념되고 있다. ### 결론 더 레브는 그의 짧은 생애 동안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물로, 어벤지드 세븐폴드의 성공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독창적인 드러밍과 작곡 능력은 많은 팬들에게 기억되고 있으며, 그의 사망 이후에도 그의 음악은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글쓴이는 그의 음악적 유산과 영향력을 강조하며, 그가 남긴 작품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영향을 미칠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글 전체의 요지를 논리적 흐름에 맞게 정리해줘. 서론, 본론, 결론 구조로 요약해주고, 각 부분마다 글쓴이의 의도나 주장도 명확히 밝혀줘.
전경협
https://ko.wikipedia.org/wiki/전경협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전경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전경협</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h colspan="2">전경협 아가타</th></tr><tr><th colspan="2"><b>순교자</b></th></tr><tr><th><b><span>출생</span></b></th> <td> <a>1790년</a><br> <a>서울</a></td></tr><tr><th><b><span>선종</span></b></th> <td> <a>1839년</a> <a>9월 26일</a><br> <a>서울</a> <a>서소문</a></td></tr><tr><th><b><span>교파</span></b></th> <td> <a>로마 가톨릭교회</a></td></tr><tr><th><b><span>시복</span></b></th> <td> <a>1925년</a> <a>7월 5일</a> <a>교황 비오 11세</a></td></tr><tr><th><b><span>시성</span></b></th> <td> <a>1984년</a> <a>5월 6일</a> <a>교황 요한 바오로 2세</a></td></tr><tr><th><b><span>축일</span></b></th> <td> <a>9월 20일</a></td></tr> </tbody></table> <p><b>전경협</b>(全敬俠, <a>1790년</a> ~ <a>1839년</a> <a>9월 26일</a>)은 <a>조선</a>의 <a>천주교</a> <a>박해</a> 때에 <a>순교</a>한 <a>한국 천주교</a>의 <a>103위 성인</a> 중에 한 사람이다. <a>세례명</a>은 <b>아가타</b>(Agatha)이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li> <li><a><span>2</span> <span>시복 · 시성</span></a></li> <li><a><span>3</span> <span>참고 문헌</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전경협은 <a>한양</a>의 한 이교도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어렸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래로, 그녀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a>안형광</a>이라는 이름의 <a>궁녀</a>의 도움으로 그녀와 함께 살게 되었다. 몇 해가 지나서 전경협의 친오빠가 그녀를 결혼시키려 했지만, 궁녀 안형광은 그녀를 보내주지 않았는데, 그녀도 이미 궁녀 명부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a>박희순 루치아</a>를 비롯한 <a>천주교</a>인 궁녀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인이 되었다. 박희순이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출궁한 후에, 전경협도 꽤병을 부려 궁궐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궁궐의 호사스러운 생활이 신앙생활을 방해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전경협은 박희순과 함께 살며 <a>기도</a>와 종교서적의 독서 그리고 선행에 전념했다. 그녀 주위 사람들이 그녀에게 감복했고, 그녀는 그들중 많은 사람들이 <a>천주교</a>로 개종하는데 일조했다. 그녀는 극도의 가난과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번 없었다. 그녀는 그저 <a>체포</a>될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p><p>그녀가 체포되어 <a>감옥</a>으로 압송되고, 더 격심한 <a>고문</a>을 받았는데, 그녀가 <a>궁녀</a>였었기 때문이었다. 포장은 그녀를 <a>심문</a>했다. "어째서 너는 궁녀가 이교를 믿느냐?" "저의 종교는 이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는 <a>하느님</a>을 <a>천사</a>와 사람 그리고 만물의 <a>창조주</a>로 믿기 때문입니다." 포장은 그녀가 <a>천주교</a>를 부정하도록 만들 수 없었으므로, 그녀를 <a>형조</a>로 이송했고 거기서 다시 심문이 이어졌다. "궁녀가 이교를 믿는 것은 대역죄이다. 너의 <a>천주</a>를 부정하고 천주교도들과 천주교 서적들이 숨겨져 있는 데가 어딘지 불어라." "제가 만 번을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그녀는 격심하게 매질을 당해 그녀의 살가죽이 떨어져 나갔고, 그녀의 뼈 여러 곳이 부러졌으며, 엄청난 양의 피를 흘려 바닥이 흥건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천주교인이 아닌 사람들 까지도 그녀에게 감복하였다. </p><p>전경협의 친오빠는 이교도였으며, <a>조정</a>의 고위 관리였다. 그는 <a>임금</a>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그녀를 배교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그녀는 오빠의 간청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의 오빠는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는 독이 든 계란 과자를 <a>감옥</a>에 있는 그녀에게 보냈던 것이다. 수상스럽게 생각한 전경협은 과자를 비녀로 찔러 보았는데, 그 비녀의 색쌀이 금새 변했으므로 그 과자를 먹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오빠는 형리장을 매수하여 그녀를 몽둥이로 때려 죽이도록 시켰다. 하지만 형리장은 여러 차례 그녀를 때리되 죽이지는 않았다. 전경협의 조카 즉 오빠의 딸이 그녀의 상처가 하루만에 다 낫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고 말했다. 전경협은 그녀의 오빠가 그녀가 감옥에 영원히 갖혀 있도록 요청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a>참수</a>되기를 <a>기도</a>했고, 마침내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p><p>전경협은 <a>1839년</a> <a>9월 26일</a>에 <a>서소문</a> 바깥에서 여덟 명의 교우와 함께 그녀가 원한데로 <a>참수</a>로써 <a>순교</a>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53세였다. </p> <h2><span></span><span>시복 · 시성</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전경협 아가타는 <a>1925년</a> <a>7월 5일</a>에 <a>성 베드로 광장</a>에서 <a>교황</a> <a>비오 11세</a>가 집전한 79위<sup><a>&#91;1&#93;</a></sup> <a>시복식</a>을 통해 <a>복자</a> 품에 올랐고,<sup><a>&#91;2&#93;</a></sup> <a>1984년</a> <a>5월 6일</a>에 <a>서울특별시</a> <a>여의도</a>에서 <a>한국 천주교</a>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a>교황</a> <a>요한 바오로 2세</a>가 집전한 <a>미사</a> 중에 이뤄진 103위 <a>시성식</a>을 통해 <a>성인</a> 품에 올랐다. </p> <h2><span></span><span>참고 문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b><span>(영어)</span></b> <a>Catholic Bishop's Conference Of Korea. 103 Martryr Saints: 전경협 아가타 Agatha Chon Kyong-hyob</a></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cite><a>&#12296;103위 성인 (百三位聖人)&#12297;</a>. &#12298;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12299;.</cite><span><span>&#160;</span></span> <span>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code>&#124;확인월일=</code> (<a>도움말</a>)</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이상도 (2014년 7월 24일). <a>&#8220;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8221;</a>. 평화방송<span>. 2014년 11월 9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ol></div></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전경협&amp;oldid=19839031</a>"</div> <div><div><a>분류</a>: <ul><li><a>1790년 태어남</a></li><li><a>1839년 죽음</a></li><li><a>서울특별시 출신</a></li><li><a>참수된 사람</a></li><li><a>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a></li><li><a>19세기 기독교 성인</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인용 오류 -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Polski</a></li><li><a>Русский</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7년 10월 21일 (토) 12: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그녀를 심문한 사람은?
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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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80
[ "그녀를 심문한 사람은?", "전경협이 끝까지 천주교를 부정하지 않자 보낸 곳은?", "포장은 천주교를 부정하도록 만들 수 없었으므로 그녀를 이송했던 곳은?", "포장은 천주교를 부정하도록 만들 수 없었으므로 그녀를 이송했던 곳은?", "전경협의 친오빠가 믿었던 종교는?", "전경협의 오빠가 그녀를 죽이기 위해 보낸 것은?", "전경협이 오빠가 보내준 과자에 독이 들었는지 아닌지를 구별하기 위해 이용한 도구는?", "전경협의 친 오빠는 전경협을 죽이려고 감옥에 보낸 것은? ", "전경협의 친 오빠가 전경협을 때려 죽이도록 매수한 사람은? ", "전경협의 친오빠의 종교는?", "전경협의 오빠는 전경협을 죽이기 위해 독이 든 무엇을 감옥으로 보냈는가?", "전경협은 독이 든 계란 과자를 뭐로 찔러 보았는가?" ]
<!DOCTYPE html> 전경협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전경협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전경협 아가타</th></tr><tr><th colspan="2">순교자</th></tr><tr><th>출생</th> <td> 1790년 서울</td></tr><tr><th>선종</th> <td> 1839년 9월 26일 서울 서소문</td></tr><tr><th>교파</th> <td> 로마 가톨릭교회</td></tr><tr><th>시복</th> <td>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td></tr><tr><th>시성</th> <td>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td></tr><tr><th>축일</th> <td> 9월 20일</td></tr> </tbody></table> 전경협(全敬俠, 1790년 ~ 1839년 9월 26일)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때에 순교한 한국 천주교의 103위 성인 중에 한 사람이다. 세례명은 아가타(Agatha)이다. 목차 1 생애 2 시복 · 시성 3 참고 문헌 4 각주 생애[편집] 전경협은 한양의 한 이교도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어렸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래로, 그녀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그러던 중 안형광이라는 이름의 궁녀의 도움으로 그녀와 함께 살게 되었다. 몇 해가 지나서 전경협의 친오빠가 그녀를 결혼시키려 했지만, 궁녀 안형광은 그녀를 보내주지 않았는데, 그녀도 이미 궁녀 명부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박희순 루치아를 비롯한 천주교인 궁녀들의 영향을 받아 천주교인이 되었다. 박희순이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출궁한 후에, 전경협도 꽤병을 부려 궁궐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궁궐의 호사스러운 생활이 신앙생활을 방해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때부터 전경협은 박희순과 함께 살며 기도와 종교서적의 독서 그리고 선행에 전념했다. 그녀 주위 사람들이 그녀에게 감복했고, 그녀는 그들중 많은 사람들이 천주교로 개종하는데 일조했다. 그녀는 극도의 가난과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불평 한번 없었다. 그녀는 그저 체포될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가 체포되어 감옥으로 압송되고, 더 격심한 고문을 받았는데, 그녀가 궁녀였었기 때문이었다. 포장은 그녀를 심문했다. "어째서 너는 궁녀가 이교를 믿느냐?" "저의 종교는 이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는 하느님을 천사와 사람 그리고 만물의 창조주로 믿기 때문입니다." 포장은 그녀가 천주교를 부정하도록 만들 수 없었으므로, 그녀를 형조로 이송했고 거기서 다시 심문이 이어졌다. "궁녀가 이교를 믿는 것은 대역죄이다. 너의 천주를 부정하고 천주교도들과 천주교 서적들이 숨겨져 있는 데가 어딘지 불어라." "제가 만 번을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렇게 못합니다." 그녀는 격심하게 매질을 당해 그녀의 살가죽이 떨어져 나갔고, 그녀의 뼈 여러 곳이 부러졌으며, 엄청난 양의 피를 흘려 바닥이 흥건했지만, 결코 굴복하지 않았다. 천주교인이 아닌 사람들 까지도 그녀에게 감복하였다. 전경협의 친오빠는 이교도였으며, 조정의 고위 관리였다. 그는 임금의 총애를 잃을까 두려워 그녀를 배교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그녀는 오빠의 간청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자 그녀의 오빠는 그녀를 죽이려 했다. 그는 독이 든 계란 과자를 감옥에 있는 그녀에게 보냈던 것이다. 수상스럽게 생각한 전경협은 과자를 비녀로 찔러 보았는데, 그 비녀의 색쌀이 금새 변했으므로 그 과자를 먹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의 오빠는 형리장을 매수하여 그녀를 몽둥이로 때려 죽이도록 시켰다. 하지만 형리장은 여러 차례 그녀를 때리되 죽이지는 않았다. 전경협의 조카 즉 오빠의 딸이 그녀의 상처가 하루만에 다 낫는 것이 정말 신기하다고 말했다. 전경협은 그녀의 오빠가 그녀가 감옥에 영원히 갖혀 있도록 요청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신앙을 위하여 참수되기를 기도했고, 마침내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전경협은 1839년 9월 26일에 서소문 바깥에서 여덟 명의 교우와 함께 그녀가 원한데로 참수로써 순교하였다. 그때 그녀의 나이는 53세였다. 시복 · 시성[편집] 전경협 아가타는 1925년 7월 5일에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비오 11세가 집전한 79위[1] 시복식을 통해 복자 품에 올랐고,[2] 1984년 5월 6일에 서울특별시 여의도에서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을 기념하여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집전한 미사 중에 이뤄진 103위 시성식을 통해 성인 품에 올랐다. 참고 문헌[편집] (영어) Catholic Bishop's Conference Of Korea. 103 Martryr Saints: 전경협 아가타 Agatha Chon Kyong-hyob 각주[편집] ↑ 〈103위 성인 (百三位聖人)〉. 《한국 브리태니커 온라인》.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확인월일= (도움말) ↑ 이상도 (2014년 7월 24일). “교황, 화해와 평화..8월의 크리스마스되길”. 평화방송. 2014년 11월 9일에 확인함.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전경협&amp;oldid=19839031" 분류: 1790년 태어남1839년 죽음서울특별시 출신참수된 사람한국의 로마 가톨릭 성인19세기 기독교 성인숨은 분류: 인용 오류 - 지원되지 않는 변수 무시됨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PolskiРусский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7년 10월 21일 (토) 12:00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전경협 (Agatha Chon Kyong-hyob)** - **출생**: 1790년, 서울 - **선종**: 1839년 9월 26일, 서울 서소문 - **교파**: 로마 가톨릭교회 - **시복**: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 - **시성**: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축일**: 9월 20일 ### 생애 - **가난한 배경**: 이교도 부모 아래 태어나 아버지 사망 후 극심한 가난에 시달림. - **천주교 신앙**: 궁녀 안형광의 도움으로 천주교에 입문. - **신앙의 고난**: - 체포 후 심문과 고문을 받음. - "저의 종교는 이교가 아닙니다."라는 신념으로 굴복하지 않음. - 오빠의 배교 강요에도 불구하고 신앙을 지킴. - **순교**: 1839년 9월 26일, 53세에 참수로 순교. ### 시복 및 시성 - **시복**: 1925년,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복식. - **시성**: 1984년, 한국 천주교 창립 200주년 기념 미사 중 시성식. ### 참고 문헌 - Catholic Bishop's Conference Of Korea. 전경협은 조선의 천주교 박해 시기에 순교한 성인으로, 그녀의 신앙과 용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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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린_소나타_(슈트라우스)
https://ko.wikipedia.org/wiki/바이올린_소나타_(슈트라우스)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바이올린 소나타 (슈트라우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바이올린 소나타 (슈트라우스)</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바이올린 소나타 내림마장조 Op.18</b>은 <a>리하르트 슈트라우스</a>가 <a>1888년</a>에 완성한 바이올린 소나타이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개요</span></a></li> <li><a><span>2</span> <span>연주시간</span></a></li> <li><a><span>3</span> <span>구성</span></a> <ul> <li><a><span>3.1</span> <span>제1악장</span></a></li> <li><a><span>3.2</span> <span>제2악장</span></a></li> <li><a><span>3.3</span> <span>제3악장</span></a></li> </ul> </li> <li><a><span>4</span> <span>참고문헌</span></a></li> </ul> </div> <h2><span></span><span>개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슈트라우스는 바이올린을 상당히 잘 연주했으며, 피아노의 연주 테크닉 또한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트라우스는 바이올린 소나타를 1곡만 남기고 있다. 이것은 1887년 여름과 가을에 대부분 작곡되어, 다음해 9월에 2악장이 완성되어 전체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소나타는 슈트라우스의 실내악곡 분야에서의 매듭이 되었다. 즉 이 이후 슈트라우스는 고전파적인 형식의 절대음악에서 벗어나 교향시와 오페라의 세계에 몰입해 간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 바이올린 소나타보다 이전에 교향시의 포석이 되는 <a>이탈리아에서</a>를 이미 작곡했고, 1887년에는 <a>교향시 ‘맥베드’</a>를 쓰기 시작했으며, 1888년에는 <a>교향시 ‘돈 후안’</a>의 작곡에 착수했다. 슈트라우스는 재빨리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며 전진했다. 따리서 이 소나타는 슈트라우스에게 있어서 과도적인 최후의 작품이 된다. 그런 까닭에 곡은 전통적인 3악장제를 취하곡 있지만, 이제까지의 슈트라우스의 실내악곡과 협주곡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면 선율의 움직임은 슈트라우스의 개성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다. 1악장 서두의 주제에서 이미 슈만적이나 브람스풍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제1주제 부분만으로도 말할 수 있듯이 화성은 아주 독창적이며, 대위법도 창의에 가득 차서 풍부하게 쓰이고 있다. 동기의 처와 발전과 관련에도 교묘함이 나타나고 있고, 각 악장은 대비성에 배려하면서 긴밀한 결말을 보인다. 거기에다가 바이올린도 피아노도 확실히 슈트라우스가 좋아하는 상당히 고도의 연주기교를 요구한다. 그 때문에 때로는 2중주 영역을 넘는 효과의 인상을 준다. 이처럼 이 곡은 고전파로부터의 2중주 소나타의 노선을 슈트라우스 나름대로 한계에까지 전진하게 한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p><p>악보는 곡이 완성된 해인 1888년에 뮈헨의 요제프 아이플사에서 출판되었다. 단 그 출판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빈의 우니베르잘 출판사로 옮겨졌다. 그리고 곡은 <b>‘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와 친구 로베르트 르쇼어씨에게’</b> 헌정되었다. 로베르트 프쇼어(Robert Pschor)는 슈트라우스의 어너니계인 프쇼어가(家)의 사람으로 슈트라우스의 사촌뻘이 되는데, 피아노를 상당히 잘 연주했으며 프쇼어가의 음악모임 등에서 가끔 만났다. </p><p>초연은 1888년 10월 3일, 쾰른 근처의 엘바펠트의 카지노잘(작은 홀)에서 열린 실내악의 밤에서 연주되었다. 그때 바이올린을 담당한 것은 쾰른의 게르체니히 관현악단의 콘서트마스인 로베르트 헤크만(Robett Heckmann)이었고, 피아노는 엘바펠트에서 지휘자로 있던 유리우스 붓스(Julius Buths)가 맡았다. 이 두 사람은 계속해서 10월 5일에 게르체니히의 이자베르 홀의 실내악의 밤에서도 이 곡을 소개헀다. 또한 헤크만은 슈트라우스와 함께 10월 13일에 열린 뮌헨에 있는 박물관 홀의 헤크만 4중주단의 제2회 연주회에서도 이 곡을 연주했다. </p> <h2><span></span><span>연주시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약 27분</li></ul> <h2><span></span><span>구성</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제1악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내림마장조 4/4박자(때로는 2/4박자가 된다). 소나타 형식. 입체감과 생기가 있는 규모가 큰 악장이다. 제1주제는 피아노로 결렬하게 시작되는데, 곧바로 바이올린에 의해서 온화하게 펼쳐진다. 피아노는 거기에 대위적으로 더해지고 있다. 잠시 후에 바이올린이 멈추면 피아노가 또다른 표정적인 선율을 내놓는다. 이것은 내림마장조로 시작되고, 제1주제의 연속과 같은 것이지만, 제1주제와는 잘 대비되어 있다. 이것도 곧바로 바이올린으로 옮겨져서 전개된다. 그려면 또 하나의 정열적인 선율이 바이올린으로 나타난다. 그것을 피아노가 아르페지오로 반주한다. 마친내 그것이 가라앉으면, 바이올린은 정열을 담은 관능적인 선율을 내놓는다. 이것은 내림나장조로 시작되며, 제2주제를 이룬다. 여기에서 피아노는 처음에 셋잇단음을 넣어 반주하고 있지만, 곧바로 제1주제에 의한 점리듬으로 바뀌어 격렬하게 흥분하단. 얼마 후 곡은 발전부가 되고, 먼저 제1주제를 대위법으로 멋지게 상승시킨 다음, 정열의 선율을 내놓고, 마침내 제1주제의 대비선율을 다룬 후, 또 한번 제1주제를 선보인 다음, 표정적인 악구를 거쳐 재현부가 된다. 먼저 제1주제가 약하게 바이올린을 동반하여 나온다. 그 다음에 바로 정열의 선율을 단조로 내놓고(앞의 대위 선율이 여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어 제2주제에 이른다. 여기에 제1주제가 또 한번 계속해서 나온다. 그것이 대위법으로 정열을 드높이면, 곡은 코다가 되어 제1주제가 변화된 가락으로 힘차게 끝난다. </p> <h3><span></span><span>제2악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즉흥곡, 안단테 칸타빌레 내림가장조 2/4박자. 3부 형식. <b>‘즉흥곡(卽興曲, Improvisation)’</b>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다. 물론 즉흥곡다운 자유로움이 없지는 않지만, 노래하는 듯한 선율을 주로 하고 있다. 슈트라우스의 무언가(無言歌)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슈트라우스는 특히 이 악장을 마음에 들어한 듯, 후에 이것을 독립시켜 출판했다. 이 악장은 피아노의 간소한 펼침화음의 반주 위에 바이올린의 단순한 선율로써 조용히 시작된다. 드디어 다소 흥분한 선율도 나오지만, 처음의 선율이 다소 변화하며 계속된다. 다음에 곡은 중간부가 되어 피아노의 셋잇단음 후에 정열을 담은 선율이 나타난다. 이 부분은 특히 즉흥곡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선율은 곤 섬세하게 되고, 피아노는 정묘하게 된다. 그러면 바이올린은 약음기를 부착하고, 피아노의 정묘한 음 사이에 세세한 음의 음형을 가하며, 곧 절묘한 선율을 흘린다. 그러나 마침내 최초의 부분이 변화하여 되돌아오고, 바이올린은 약음기를 때어내고 선율을 내놓는다. 곡은 점점 조용해지고, 사라지듯이 끝난다. </p> <h3><span></span><span>제3악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피날레. 안단테 알레그로 내림마장조. 론도 형식. 먼저 피아노만의 느린 전주(안단테, 6/8박자)로 시작된다. 거기에는 다음 주부의 주요주제가 암시되어 있다. 그것이 9마디로 끝나면, 빠른 주부(알레그로, 3/4박자)가 피아노로 강하고 정력적으로 이어간다. 이것은 8도로 격렬하게 시작되고, 젊은 슈트라우스의 열의와 힘을 나타내며, <a>돈 후안</a>과 <a>영웅의 생애</a>로의 야심을 보인다. 이것이 상승하면 바이올린이 상행구에서 즉흥적으로 가담한다. 그러나 바로 사라진다. 그려면 피아노는 주제를 한층 더 힘차게 내놓고, 바이올린의 악구를 계속한다. 주제는 다시 한번 피아노로 반복된다. 그려면 바이올린이 노래하는 듯한 제1부주제를 내놓는다. 이에 피아노는 처음에 펼침화음으로 반주하여 나가다가 곧 주요주제까지도 더하여 가다. 다음에 바이올린은 또 하나의 노래하는 듯한 선율을 낸다. 여기에서도 피아노는 처음에 펼침화음으로 반주하다가 이윽고 경쾌한 동기를 내놓는다. 이 동기는 멘델스존의 <a>헤브리디스 서곡 ‘핑갈의 동굴’</a> 중의 제1주제를 빠르게 한 것 같은 것으로서 그서은 마치 무곡풍이기도 하다. 이후 곧바로 8도 아레로 모방되는 바이올린으로도 옯겨진다. 그러나 바이올린은 그 후에 피아노의 아르페지오 위에서 다장조의 큰 선율을 아름답게 내놓는다. 이것을 제2부주제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것을 피아노가 받으면, 바이올린은 아르페지오로 오르내린다. 마침내 주요주제가 2개의 악기로 되돌아오고, 발전부풍으로 다뤄지며 정열을 높인다. 노래하는 듯한 선율로 되돌아간다. 스케르초풍의 등기도 나온다. 그 다움에 주제가 바이올린으로 되돌아고고, 곧 2대의 악기의 동음으로 힘차게 된다. 이어서 표정적인 선율도 재현된다. 그 후 박자를 6/8박자로 바꾼 코다가 되고, 주제에 의거하면서도 스케르초의 요소도 가미되어 진행하면서, 마침내 분주하면서도 강렬한 결말에 이른다 </p> <h2><span></span><span>참고문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작곡가별 명곡해설 라이브러리》 22권 '슈트라우스' 〈음악지우사〉 (音樂世界)</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바이올린_소나타_(슈트라우스)&amp;oldid=20814163</a>"</div> <div><div><a>분류</a>: <ul><li><a>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a></li><li><a>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실내악곡</a></li><li><a>바이올린 소나타</a></li><li><a>실내악곡</a></li><li><a>내림마장조 작품</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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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주제는 어떤 악기로부터 시작이 되는가?
피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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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31
[ "제1주제는 어떤 악기로부터 시작이 되는가?", "제1주제에서 피아노와 함께 나오는 악기는?", "슈트라우스의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제1주제는 무슨 악기로 시작하나요?", "슈트라우스의 바이올린 소나타의 제1주제에서 피아노 이후 무슨 악기가 나오나요?", "슈트라우스의 무언가라고도 할 수 있는 즉흥곡은 어떻게 끝나는가?", "슈트라우스의 무언가라고도 불리는 즉흥곡이 취하는 박자는?", "슈트라우스가 마음에 들어하여 후에 이것을 독립시켜 출판한 악장의 이름은?", "슈트라우스의 즉흥곡중 중반부에 바이올린에 부착되었다가 마침내 떼어지는 것은?", "슈트라우스의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즉흥곡은 몇 부로 이루어져 있나요?", "슈트라우스의 악장 중 후에 독립시켜 출판한 악장은?", "슈트라우스가 쓴 소나타의 피날레 부분에서 피아노가 아르페지오를 보일 때 바이올린은 어떤 음조의 선율을 연주하는가?", "슈트라우스가 쓴 소나타의 피날레는 어떤 결말을 보여주는가?", "핑갈의 동굴은 누구의 곡인가요?", "멘델스존의 헤브리디스 서곡은 제목은?" ]
<!DOCTYPE html> 바이올린 소나타 (슈트라우스)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바이올린 소나타 (슈트라우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바이올린 소나타 내림마장조 Op.18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1888년에 완성한 바이올린 소나타이다. 목차 1 개요 2 연주시간 3 구성 3.1 제1악장 3.2 제2악장 3.3 제3악장 4 참고문헌 개요[편집] 슈트라우스는 바이올린을 상당히 잘 연주했으며, 피아노의 연주 테크닉 또한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슈트라우스는 바이올린 소나타를 1곡만 남기고 있다. 이것은 1887년 여름과 가을에 대부분 작곡되어, 다음해 9월에 2악장이 완성되어 전체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 소나타는 슈트라우스의 실내악곡 분야에서의 매듭이 되었다. 즉 이 이후 슈트라우스는 고전파적인 형식의 절대음악에서 벗어나 교향시와 오페라의 세계에 몰입해 간다. 그렇다고는 하나 이 바이올린 소나타보다 이전에 교향시의 포석이 되는 이탈리아에서를 이미 작곡했고, 1887년에는 교향시 ‘맥베드’를 쓰기 시작했으며, 1888년에는 교향시 ‘돈 후안’의 작곡에 착수했다. 슈트라우스는 재빨리 새로운 방향을 개척하며 전진했다. 따리서 이 소나타는 슈트라우스에게 있어서 과도적인 최후의 작품이 된다. 그런 까닭에 곡은 전통적인 3악장제를 취하곡 있지만, 이제까지의 슈트라우스의 실내악곡과 협주곡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면 선율의 움직임은 슈트라우스의 개성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다. 1악장 서두의 주제에서 이미 슈만적이나 브람스풍으로는 형용할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이 제1주제 부분만으로도 말할 수 있듯이 화성은 아주 독창적이며, 대위법도 창의에 가득 차서 풍부하게 쓰이고 있다. 동기의 처와 발전과 관련에도 교묘함이 나타나고 있고, 각 악장은 대비성에 배려하면서 긴밀한 결말을 보인다. 거기에다가 바이올린도 피아노도 확실히 슈트라우스가 좋아하는 상당히 고도의 연주기교를 요구한다. 그 때문에 때로는 2중주 영역을 넘는 효과의 인상을 준다. 이처럼 이 곡은 고전파로부터의 2중주 소나타의 노선을 슈트라우스 나름대로 한계에까지 전진하게 한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악보는 곡이 완성된 해인 1888년에 뮈헨의 요제프 아이플사에서 출판되었다. 단 그 출판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빈의 우니베르잘 출판사로 옮겨졌다. 그리고 곡은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와 친구 로베르트 르쇼어씨에게’ 헌정되었다. 로베르트 프쇼어(Robert Pschor)는 슈트라우스의 어너니계인 프쇼어가(家)의 사람으로 슈트라우스의 사촌뻘이 되는데, 피아노를 상당히 잘 연주했으며 프쇼어가의 음악모임 등에서 가끔 만났다. 초연은 1888년 10월 3일, 쾰른 근처의 엘바펠트의 카지노잘(작은 홀)에서 열린 실내악의 밤에서 연주되었다. 그때 바이올린을 담당한 것은 쾰른의 게르체니히 관현악단의 콘서트마스인 로베르트 헤크만(Robett Heckmann)이었고, 피아노는 엘바펠트에서 지휘자로 있던 유리우스 붓스(Julius Buths)가 맡았다. 이 두 사람은 계속해서 10월 5일에 게르체니히의 이자베르 홀의 실내악의 밤에서도 이 곡을 소개헀다. 또한 헤크만은 슈트라우스와 함께 10월 13일에 열린 뮌헨에 있는 박물관 홀의 헤크만 4중주단의 제2회 연주회에서도 이 곡을 연주했다. 연주시간[편집] 약 27분 구성[편집] 제1악장[편집]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내림마장조 4/4박자(때로는 2/4박자가 된다). 소나타 형식. 입체감과 생기가 있는 규모가 큰 악장이다. 제1주제는 피아노로 결렬하게 시작되는데, 곧바로 바이올린에 의해서 온화하게 펼쳐진다. 피아노는 거기에 대위적으로 더해지고 있다. 잠시 후에 바이올린이 멈추면 피아노가 또다른 표정적인 선율을 내놓는다. 이것은 내림마장조로 시작되고, 제1주제의 연속과 같은 것이지만, 제1주제와는 잘 대비되어 있다. 이것도 곧바로 바이올린으로 옮겨져서 전개된다. 그려면 또 하나의 정열적인 선율이 바이올린으로 나타난다. 그것을 피아노가 아르페지오로 반주한다. 마친내 그것이 가라앉으면, 바이올린은 정열을 담은 관능적인 선율을 내놓는다. 이것은 내림나장조로 시작되며, 제2주제를 이룬다. 여기에서 피아노는 처음에 셋잇단음을 넣어 반주하고 있지만, 곧바로 제1주제에 의한 점리듬으로 바뀌어 격렬하게 흥분하단. 얼마 후 곡은 발전부가 되고, 먼저 제1주제를 대위법으로 멋지게 상승시킨 다음, 정열의 선율을 내놓고, 마침내 제1주제의 대비선율을 다룬 후, 또 한번 제1주제를 선보인 다음, 표정적인 악구를 거쳐 재현부가 된다. 먼저 제1주제가 약하게 바이올린을 동반하여 나온다. 그 다음에 바로 정열의 선율을 단조로 내놓고(앞의 대위 선율이 여기에는 나오지 않는다), 이어 제2주제에 이른다. 여기에 제1주제가 또 한번 계속해서 나온다. 그것이 대위법으로 정열을 드높이면, 곡은 코다가 되어 제1주제가 변화된 가락으로 힘차게 끝난다. 제2악장[편집] 즉흥곡, 안단테 칸타빌레 내림가장조 2/4박자. 3부 형식. ‘즉흥곡(卽興曲, Improvisation)’이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다. 물론 즉흥곡다운 자유로움이 없지는 않지만, 노래하는 듯한 선율을 주로 하고 있다. 슈트라우스의 무언가(無言歌)라고도 할 수 있을 듯하다. 슈트라우스는 특히 이 악장을 마음에 들어한 듯, 후에 이것을 독립시켜 출판했다. 이 악장은 피아노의 간소한 펼침화음의 반주 위에 바이올린의 단순한 선율로써 조용히 시작된다. 드디어 다소 흥분한 선율도 나오지만, 처음의 선율이 다소 변화하며 계속된다. 다음에 곡은 중간부가 되어 피아노의 셋잇단음 후에 정열을 담은 선율이 나타난다. 이 부분은 특히 즉흥곡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선율은 곤 섬세하게 되고, 피아노는 정묘하게 된다. 그러면 바이올린은 약음기를 부착하고, 피아노의 정묘한 음 사이에 세세한 음의 음형을 가하며, 곧 절묘한 선율을 흘린다. 그러나 마침내 최초의 부분이 변화하여 되돌아오고, 바이올린은 약음기를 때어내고 선율을 내놓는다. 곡은 점점 조용해지고, 사라지듯이 끝난다. 제3악장[편집] 피날레. 안단테 알레그로 내림마장조. 론도 형식. 먼저 피아노만의 느린 전주(안단테, 6/8박자)로 시작된다. 거기에는 다음 주부의 주요주제가 암시되어 있다. 그것이 9마디로 끝나면, 빠른 주부(알레그로, 3/4박자)가 피아노로 강하고 정력적으로 이어간다. 이것은 8도로 격렬하게 시작되고, 젊은 슈트라우스의 열의와 힘을 나타내며, 돈 후안과 영웅의 생애로의 야심을 보인다. 이것이 상승하면 바이올린이 상행구에서 즉흥적으로 가담한다. 그러나 바로 사라진다. 그려면 피아노는 주제를 한층 더 힘차게 내놓고, 바이올린의 악구를 계속한다. 주제는 다시 한번 피아노로 반복된다. 그려면 바이올린이 노래하는 듯한 제1부주제를 내놓는다. 이에 피아노는 처음에 펼침화음으로 반주하여 나가다가 곧 주요주제까지도 더하여 가다. 다음에 바이올린은 또 하나의 노래하는 듯한 선율을 낸다. 여기에서도 피아노는 처음에 펼침화음으로 반주하다가 이윽고 경쾌한 동기를 내놓는다. 이 동기는 멘델스존의 헤브리디스 서곡 ‘핑갈의 동굴’ 중의 제1주제를 빠르게 한 것 같은 것으로서 그서은 마치 무곡풍이기도 하다. 이후 곧바로 8도 아레로 모방되는 바이올린으로도 옯겨진다. 그러나 바이올린은 그 후에 피아노의 아르페지오 위에서 다장조의 큰 선율을 아름답게 내놓는다. 이것을 제2부주제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것을 피아노가 받으면, 바이올린은 아르페지오로 오르내린다. 마침내 주요주제가 2개의 악기로 되돌아오고, 발전부풍으로 다뤄지며 정열을 높인다. 노래하는 듯한 선율로 되돌아간다. 스케르초풍의 등기도 나온다. 그 다움에 주제가 바이올린으로 되돌아고고, 곧 2대의 악기의 동음으로 힘차게 된다. 이어서 표정적인 선율도 재현된다. 그 후 박자를 6/8박자로 바꾼 코다가 되고, 주제에 의거하면서도 스케르초의 요소도 가미되어 진행하면서, 마침내 분주하면서도 강렬한 결말에 이른다 참고문헌[편집] 《작곡가별 명곡해설 라이브러리》 22권 '슈트라우스' 〈음악지우사〉 (音樂世界)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바이올린_소나타_(슈트라우스)&amp;oldid=20814163" 분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작품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실내악곡바이올린 소나타실내악곡내림마장조 작품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Français日本語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2월 24일 (토) 12:2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바이올린 소나타 (슈트라우스) 요약** - **작품 개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1888년에 작곡한 바이올린 소나타 내림마장조 Op.18은 그의 유일한 바이올린 소나타로, 실내악 분야에서의 전환점을 나타낸다. 이 곡은 고전적인 형식에서 벗어나 교향시와 오페라로 나아가는 과정의 마지막 작품이다. - **주요 인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작곡가), 로베르트 헤크만(바이올린 연주자), 유리우스 붓스(피아노 연주자). - **작곡 배경**: 1887년 여름과 가을에 작곡되었으며, 1888년 10월 3일 쾰른 근처에서 초연되었다. 곡은 슈트라우스의 아버지와 친구 로베르트 르쇼어에게 헌정되었다. - **구성**: 1. **제1악장**: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소나타 형식으로, 생동감 있는 선율과 대위법이 특징이다. 2. **제2악장**: 즉흥곡, 안단테 칸타빌레, 노래하는 듯한 선율로 구성되어 있으며, 슈트라우스가 특히 좋아한 악장이다. 3. **제3악장**: 피날레, 안단테 알레그로, 론도 형식으로, 젊은 슈트라우스의 열정과 힘을 드러낸다. - **갈등 구조**: 이 소나타는 전통적인 형식과 슈트라우스의 독창적인 음악적 개성을 조화롭게 결합하며, 각 악장 간의 대비와 긴밀한 결말로 구성되어 있다.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상호작용이 두드러지며, 고도의 연주 기교를 요구한다. 이 작품은 슈트라우스의 음악적 진화와 실내악에서의 독창성을 잘 보여주는 중요한 곡이다.
다음 텍스트를 읽고 독자가 처음 접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해줘. 주요 인물, 사건, 배경, 갈등 구조 등을 빠짐없이 담되, 문장은 간결하게 유지해줘.
아나우악_소요사건
https://ko.wikipedia.org/wiki/아나우악_소요사건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아나우악 소요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아나우악 소요사건</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아나우악 소요사건</b>(<span>Anahuac Disturbances</span>)은 <a>1832년</a>과 <a>1835년</a> 두 차례에 걸쳐, <a>텍사스</a> 아나우악과 주변 지역에서 발생한 분쟁이다. 텍사스가 <a>멕시코</a>에서 탈퇴하고 <a>텍사스 공화국</a>을 건국하게 된 <a>텍사스 혁명</a>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p><p><a>겔베스톤 만</a> 북쪽 근처의 트리니티 강 동쪽에 위치한 아나우악은 멕시코와 루이지애나 사이에 걸친 교역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밀수를 단속하고 또한 연안 이주자에서 세금을 거두기 위해 <a>1830년</a> 이후 멕시코는 여기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주민과 주둔군 장교 사이에 알력이 생겼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배경</span></a></li> <li><a><span>2</span> <span>제1차 소요사건(1832년)</span></a> <ul> <li><a><span>2.1</span> <span>폭동</span></a></li> <li><a><span>2.2</span> <span>여파</span></a></li> </ul> </li> <li><a><span>3</span> <span>제2차 소요사건(1835년)</span></a></li> <li><a><span>4</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5</span> <span>같이 보기</span></a></li> <li><a><span>6</span> <span>관련 자료</span></a></li> </ul> </div> <h2><span></span><span>배경</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한 후, 미국에서 이민자가 합법화됐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이민하여 텍사스에 정착하는 계약대행으로 엠프레사리오 제도가 있었지만, 텍사스로 이주하는 미국인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멕시코 당국은 점차 미국이 멕시코를 합병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 </p><p><a>1830년</a> <a>4월 6일</a>, 멕시코 정부는 미국에서 텍사스로 이민을 제한하는 일련의 법률을 제정했다. 그 <a>엠프레사리오</a>에 의한 계약 중 끝나지 않은 것은 취소하고 또한 텍사스에 관세 사무소를 개설하고 관세 징수를 시작했다. 원래는 미국인이었던 멕시코 군 장교 후안 데이비스 브래드번이 겔버스턴 만에서 이 관세 사무소와 주둔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브래드번은 <a>1830년</a> 10월 <a>트리니티 강</a> 하구에 있는 30피트 절벽에 이 관세사무소 겸 주둔지를 건설했다. 이곳은 아나우악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p><p>브래드번은 임기내내 미움을 받았다. 그는 아나우악 근처에 사는 이주민에 대한 토지 불하를 반대했다. 멕시코의 <a>1824년 헌법</a>에서는 해안선에서 26마일 이내에 정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신청된 대부분의 불하지는 이 범위 내에 있는 것이 그 이유였다. 궁극적으로 땅이 불하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주민은 브래드번에게 증오심을 갖게 되었다. </p><p><a>1832년</a> 1월, 브래드번은 자신의 관할 지역 내에서 멕시코에서 텍사스를 분리하고 싶어 하는 10명의 인물의 목록을 입수했다. 이후 모든 일이 미국의 텍사스 분리를 위한 음모라고 믿게 되었다. <a>1832년</a> 6월 브래드번 휘하의 군인 두 명이 이주민 여성을 강간한 사건이 발생하자, 성난 정착민들은 피해자를 죽인 이웃을 린치 했다. 그들은 브래드번에게 가해 병사들에게 동일한 형벌을 주기 위하여 인계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이 사건 이후, 정착민은 인디언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민병대 조직을 만들었다. 멕시코 법률에 민병대는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브래드번은 주동자인 패트릭 잭을 체포했지만, 그 후 살해 협박을 받고 석방을 하게 된다. </p> <h2><span></span><span>제1차 소요사건(1832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div><a><img></a> <div><div><a></a></div>윌리엄 바렛 트래비스</div></div></div> <p>이후에도 브래드번과 정착민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브래드번은 <a>노예제도</a>를 금지하는 멕시코 법률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a>1831년</a> 8월, 루이지애나에서 도망친 탈주노예 두 명을 보호했다. 노예 소유자는 반환을 요구하고, 법률 대리인으로서 현지 변호사 <a>윌리엄 바렛 트래비스</a>에게 의뢰했다.<sup><a>&#91;1&#93;</a></sup> 브래드번은 <a>1832년</a> 5월, 브래드번은 겉표지에 친구의 명의로 된 편지를 받았는데, 루이지애나에서 100명의 무장 집단이 노예를 찾기 위해 온다는 경고 편지였다. 이 편지가 장난이라고 판명된 후 브래드번은 트래비스를 용의자로 체포하고<sup><a>&#91;2&#93;</a></sup>, 반역 혐의로 군사 재판에 넘기기 위하여, 마타모로스에 보내려고 했다. 유죄가 확정되면 확실하게 사형을 받을 수 있는 범죄였다<sup><a>&#91;3&#93;</a></sup>. 정착민들은 멕시코의 법률을 잘 몰랐기 때문에, 영장이나 혐의도 없이 체포되어, 배심원 재판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분개했다. 대부분의 정착민들은 미국의 <a>권리장전</a>이 그들을 지켜주는 걸로 오해하고 있었다.<sup><a>&#91;4&#93;</a></sup> </p><p>잭은 다시 브래드번을 협박하여 구속당했다. 그 다음 트래브스와 잭은 그들의 도피를 모의했다. 그들은 동료 조사관인 데이빗 G. 버넷에게 가는 편지를 은닉하려했고, 그 편지들은 텍시언이 그들을 도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무장 인력의 부족으로 중단되었다. 브래드번은 그 편지들이 배달되기 전에 가로챘다.<sup><a>&#91;3&#93;</a></sup> </p><p>처음에는 주민들이 가담하지 않았지만, 브래드번이 트래비스와 잭, 그리고 그들의 대리인에 증언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것을 알고 놀라게 되었다. 잭의 형이 브래조리아에서 아나우악까지 행진할 무리를 조직했고 주변 마을에서 다른 사람들도 도착하기 시작했다. 브래조리아 의원 중 한 사람인 존 오스틴은 부라조스 주둔 부대를 이끌고 있었던 도밍고 우가르테체아 대령에게 상담했다. 우가르테체아는 오스틴이 투옥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을 권했다.<sup><a>&#91;5&#93;</a></sup> </p><p>브래드번 장교는 오스틴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기소된 사람을 민간 기구에 인도하는 것은 법률로 금지되고 있다고 해명했다. 브래조리아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떠난 후, 멕시코 장교들은 말을 도난당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지역 주민 두 사람을 절도 혐의로 체포를 한다. 이 체포 소식을 듣자마자 브래조리아 대표단은 다시 아나우악에 돌아왔다. 분노한 시민들과 함께 아나우악에서 몇 마일 위치에 캠프를 차리고, 프랭크 W 존슨을 지휘관으로 선출했다. 그들은 곧 텍시언들의 동정을 정찰하려던 19명의 멕시코 기병대를 억류했다.<sup><a>&#91;6&#93;</a></sup><sup><a>&#91;7&#93;</a></sup> </p><p><a>6월 10일</a>에는 아나우악 북쪽에 있는 건물을 점거했다. 브래드번은 무장 집단의 목표가 체포된 미국인의 석방에 그치지 않고, 전반적인 폭동으로 번질까 우려했다. 브래드번은 트래비스와 잭을 땅위에 묶고 총을 들이대며, 텍시언이 습격한다면 그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트래비스는 존슨에게 자신은 상관말고 습격을 하도록 촉구했다.<sup><a>&#91;8&#93;</a></sup> 뒤이은 협상에서 텍사스 측은 트래비스 등 죄수와 텍시언이 포로로 잡고 있는 멕시코 병사의 교환을 요청했으나<sup><a>&#91;7&#93;</a></sup>, 멕시코 측은 포로 교환 외에도 텍시언 폭도들이 터틀 베이유까지 물러나도록 조건을 제시했다.<sup><a>&#91;9&#93;</a></sup> 협상의 결과로 대부분의 폭도가 아나우악을 떠났지만, 15 ~ 30명 정도가 흩어져 그 타운에 남아 있었다. 브래드번은 이것이 협정을 위반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2시간 이내 퇴거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경고했다. 대부분의 텍시언들은 브래드번 경고가 거짓말로 단순히 건물에서 나가라고 으르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텍시언은 몰랐지만, 그 건물 안에는 멕시코 군 보급물자인 무기와 탄약이 저장되어 있었다.<sup><a>&#91;10&#93;</a></sup> </p> <h3><span></span><span>폭동</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브래드번 경고를 듣고 아나우악 여자와 아이들은 마을에서 도망쳤다. 멕시코 병사는 즉시 남아 있던 사람에게 발포를 했고, 이 싸움에서 5명의 멕시코 병사와 1명의 텍시언이 죽었다. 이후 텍시언은 터틀 배이유에 모여 브래조리아에서 대포의 도착을 기다렸다. </p><p><a>6월 13일</a> 텍시언은 《터틀 배이유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문서에는 그들은 연방주의자(federalist)이며, 멕시코의 안토니오 산타 안나 장군을 지지한다고 말하고, 민정에 상관없이 군대에 의해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 현 정부를 비난했다. 텍시언이 무기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브래드번은 200마일 북쪽 나케도체스에 있는 피에드라스 대령과 300마일 서쪽 샌안토니오에 있는 에로스아 대령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a>6월 19일</a>에는 피에드라스 대령이 100명 정도의 병력을 데리고 출발했다. </p><p>존 오스틴 일행들은 대포를 가지고 오기 위해 브래조리아로 돌아갔다. <a>6월 20일</a> 그는 주민들을 모아 중앙집권 정부에 반대한다는 투표를 했다. 오스틴은 반중앙집권 운동에 우가르테체아 대령을 초대다가 거절했당기 때문에 <a>6월 26일</a> 우가르테체아가 있는 요새를 공격했다. 이 작전은 벨라스코 전투로 알려졌으며, 다음날 아침에는 모든 무기를 남겨두고 마타모로스로 돌아간다는 조건 하에 우가르테체아 군은 항복을 했다. </p><p>피에드라스가 아나우악에서 30 마일 정도의 지점에 도달했을 때, 그는 존슨에 사절을 보냈다. 존슨은 그 사절에게 브래드번에 대한 불만과 불평을 목록을 전달했다. 피에드라스가 충돌의 해결을 모색하고 아래에 항에 합의를 했다. </p> <ul><li>자유 마을 자치를 위한 회의(ayutamiento)을 재건</li> <li>아나우악에 잡혀있는 민간인을 민정 당국에 인도</li> <li>브래드번을 해임하고 후임을 지명</li></ul> <p><a>6월 28일</a> 이것을 텍사스 측이 수락했고, <a>7월 1일</a> 피에드라스 부대는 아나우악에 입성했다. </p> <h3><span></span><span>여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브래드번의 후임으로 지명된 펠릭스 마리아 수바런 중령은 지명을 거부했기 때문에, 피에드라스가 임시 지휘관을 맡았다. 7월 2일에는 구속된 텍시언들의 신병을 민정 당국에 인도했다. 그 후 1주일 이내에 전원이 불기소되어 풀려났다. 7월 8일 피에드라스가 나코그도체스로 돌아갈 즈음, 세 번째 서열인 코르티나 중위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피에드라스가 떠난 3일 후 아나우악 부대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연방주의자임을 선언했다. 병사들은 연일 취해 있었으며, 코르티나의 명령을 듣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브래드번에게 지휘관에 복귀하라고 요청했지만, 브래드번은 이를 거절했고, 대신 수바런이 지휘할 것을 조언했다.<sup><a>&#91;11&#93;</a></sup> </p><p>브래드번 암살 계획은 사전에 드러나 무산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그는 텍사스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지역 배의 어떤 선장도 그를 태우는 것을 거부했다. 7월 13일에는 수바런은 중앙집권 정부를 지지하는 어떤 관리의 안전도 보장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날 밤 브래드번은 가이드를 고용하여 걸어서 도보로 루이지애나를 향해 출발했다. 다른 관리들은 동정적인 지역민들에게 안식처를 찾았다.<sup><a>&#91;12&#93;</a></sup> </p><p>브래드번의 역할에 대해 훗날 역사학자에 의해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윌리엄 C. 데이비스는 "브래드번이 과도한 제제로 단순한 시골 불량배 두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sup><a>&#91;13&#93;</a></sup> 결과로 탄생한 터틀 배이유 결의안은 다른 텍시언들이 비슷한 과정을 따르도록 했다. </p><p>피에드라스가 나코고도체스로 돌아왔을 때, 시민들이 민병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민정 의회에 이것을 해체하도록 요구했지만 거부했다. 오히려 민정 의회는 스스로의 민병대를 갖출 것이라고 선언했다. 8월 1일, 이 복합 민병대는 피에드라스에게 연방주의자의 반란을 지원할 것을 맹세라고 명령했다. 피에드라스가 거부하자 공격을 받았다. 며칠 후 그들은 페에드라스와 그 부하들을 감금하고, 연방주의자가 되도록 설득했다.<sup><a>&#91;14&#93;</a></sup> 군인들의 항복과 멕시코 내부로 철수로, 텍사스 동부에는 멕시코 군대가 전무했다. 이제 정착민들은 점점 정치 활동을 늘려나갔다.<sup><a>&#91;15&#93;</a></sup> 바로 1832년 회담이 결성되어 텍시언이 결속하여 같은 목표를 향하게 되었다.<sup><a>&#91;16&#93;</a></sup> </p> <h2><span></span><span>제2차 소요사건(1835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두 번째 분쟁은 <a>1835년</a> 6월 말 일어났으며, 또다시 관세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했다. 지역 상인이자 소형 선박의 선장인 앤드류 브리스코우는 모든 항구에서 세금이 동일하게 부과되지 않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새 정부의 지휘관 안토니오 테노리오 대위를 시험하려고하고, 그의 배를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생각대로 당국자의 일부가 배를 알아냈다. 사실, 그는 단순히 모래만 싣고 있었을 뿐이었다. 테노리오는 격노하여 브리스코우과 그의 동료 데윗 클린턴 해리스를 체포했다. 해리스와 브리스코우를 연행하던 병사는 발포까지 하여 텍시언 젊은이, 윌리엄 스미스를 부상시켰다. </p><p>트래비스는 이후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체포 소식은 산 펠리페 데 오스틴 마을에 퍼졌고,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정치 지도자인 피터 밀러는 이 사건에 대해 트래비스에게 위탁하여 민병대를 조직하게 했다. 트래비스는 민병대를 모았고, 해리스 버그에 정박하고 있던 선박 오하이오 호를 징발하여, 대포를 싣고 아나우악으로 출항했다. 25명으로 구성된 부대는 즉시 40명 정도의 멕시코 군 부대를 항복시키고 무장을 해제하고, 잡혀 있던 두 사람의 텍시언을 석방하고, 부대를 쫓아냈다.<sup><a>&#91;17&#93;</a></sup><sup><a>&#91;18&#93;</a></sup> </p><p>하지만 트래비스는 행위는 지역 사회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a>멕시코시티</a>에 있던 <a>스티븐 오스틴</a>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하여, 결국 사과를 했다. 오스틴은 멕시코 국경에 정착할 이민을 장려, 감독하고, 스페인(후에 멕시코) 정부와 계약을 맺은 가장 유명한 엠프레사리오였다. 그 여름의 끝 무렵, 멕시코 군 당국은 군사법정에서 트래비스를 재판하기 위해 신병 인도를 요구했지만, 정착민들은 이에 반대했다. </p><p>트래비스는 다음 해 <a>알라모 전투</a>에서 사망했다. 텍사스 공화국 국무장관을 단시간 맡은 오스틴은 텍사스의 중요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p>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Henson (1982), p. 95.</span> </li> <li><span><a>↑</a></span> <span>Henson (1982), p. 97.</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Davis (2006), p. 83.</span> </li> <li><span><a>↑</a></span> <span>Henson (1982), p. 96.</span> </li> <li><span><a>↑</a></span> <span>Henson (1982), p. 99.</span> </li> <li><span><a>↑</a></span> <span>Henson (1982), p. 100.</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Henson (1982), p. 101.</span> </li> <li><span><a>↑</a></span> <span>Davis (2006), p. 84.</span> </li> <li><span><a>↑</a></span> <span>Henson (1982), p. 103-104.</span> </li> <li><span><a>↑</a></span> <span>Henson (1982), p. 104.</span> </li> <li><span><a>↑</a></span> <span>Henson (1982), p. 111.</span> </li> <li><span><a>↑</a></span> <span>Henson (1982), pp. 111–2.</span> </li> <li><span><a>↑</a></span> <span>Davis (2006), p. 86.</span> </li> <li><span><a>↑</a></span> <span>Davis (2006), pp. 86–9.</span> </li> <li><span><a>↑</a></span> <span>Davis (2006), p. 89.</span> </li> <li><span><a>↑</a></span> <span>Davis (2006), p. 91.</span> </li> <li><span><a>↑</a></span> <span>Looscan, AB., <a>"THE OLD FORT AT ANAHUAC"</a>, Southwestern Historical Quarterly Online, Volume 002, Number 1, pp. 21 - 28, accessed 28 Oct 2006</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Eugene Barker, Excerpted publications&#8221;</a>. 2007년 1월 1일에 <a>원본 문서</a>에서 보존된 문서<span>. 2006년 10월 28일에 확인함</span>.</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ol></div></div> <h2><span></span><span>같이 보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텍사스 혁명</a></li></ul> <h2><span></span><span>관련 자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House, Boyce (July 1960), <a>"An Incident at Velasco, 1832"</a>, Southwestern Historical Quarterly 64 (1)</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나우악_소요사건&amp;oldid=22283200</a>"</div> <div><div><a>분류</a>: <ul><li><a>텍사스주의 역사</a></li><li><a>멕시코의 역사</a></li><li><a>텍사스 혁명</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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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우악 소요사건 때 브래드번이 강하게 지지한 멕시코 법률은?
노예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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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나우악 소요사건 때 브래드번이 강하게 지지한 멕시코 법률은?", "아나우악 소요사건 때 브래드번이 보호해준 두 명의 노예는 어디에서 도망쳤는가?", "아나우악 소요사건 때 노예 소유자가 법률 대리인으로서 의뢰한 변호사는?", "브래드번이 강하게 지지했던 멕시코의 법률에서 금지된 것은?", "1832년 5월에 루이지애나에서 무장 집단 100명이 노예를 찾기 위해 텍사스로 온다는 경고 편지를 브래드번에게 보낸 인물로 누가 지목되었는가?", "1830년대에 멕시코 법률을 몰랐던 텍사스 정착민들이 법정에서 자신들 개개인을 지켜줄 근거가 될 것으로 믿었던 법률조항을 일컫는 단어는?", "아나우악 소요사건 때 브래드번은 무장 집단의 목표가 무엇으로 번질까 우려했는가?", "아나우악 소요사건에서 텍사스와 멕시코의 협상으로 대부분의 폭도가 어디를 떠났는가?", "멕시코 측이 포로 교환 외에 텍시언 폭도들에게 물러나도록 제시한 지역의 이름은?", "텍사스가 멕시코령이던 1830년대에 텍사스에 살던 앵글로계 정착민을 무엇이라 불렀는가?", "1832년과 1835년에 텍사스가 멕시코에서 분리되어 텍사스 공화국을 건국하는 계기가 된 소요사건이 발생한 지역은 어디인가?" ]
<!DOCTYPE html> 아나우악 소요사건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아나우악 소요사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아나우악 소요사건(Anahuac Disturbances)은 1832년과 1835년 두 차례에 걸쳐, 텍사스 아나우악과 주변 지역에서 발생한 분쟁이다. 텍사스가 멕시코에서 탈퇴하고 텍사스 공화국을 건국하게 된 텍사스 혁명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겔베스톤 만 북쪽 근처의 트리니티 강 동쪽에 위치한 아나우악은 멕시코와 루이지애나 사이에 걸친 교역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밀수를 단속하고 또한 연안 이주자에서 세금을 거두기 위해 1830년 이후 멕시코는 여기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주민과 주둔군 장교 사이에 알력이 생겼다. 목차 1 배경 2 제1차 소요사건(1832년) 2.1 폭동 2.2 여파 3 제2차 소요사건(1835년) 4 각주 5 같이 보기 6 관련 자료 배경[편집]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한 후, 미국에서 이민자가 합법화됐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이민하여 텍사스에 정착하는 계약대행으로 엠프레사리오 제도가 있었지만, 텍사스로 이주하는 미국인의 수가 많아짐에 따라 멕시코 당국은 점차 미국이 멕시코를 합병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게 되었다. 1830년 4월 6일, 멕시코 정부는 미국에서 텍사스로 이민을 제한하는 일련의 법률을 제정했다. 그 엠프레사리오에 의한 계약 중 끝나지 않은 것은 취소하고 또한 텍사스에 관세 사무소를 개설하고 관세 징수를 시작했다. 원래는 미국인이었던 멕시코 군 장교 후안 데이비스 브래드번이 겔버스턴 만에서 이 관세 사무소와 주둔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브래드번은 1830년 10월 트리니티 강 하구에 있는 30피트 절벽에 이 관세사무소 겸 주둔지를 건설했다. 이곳은 아나우악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브래드번은 임기내내 미움을 받았다. 그는 아나우악 근처에 사는 이주민에 대한 토지 불하를 반대했다. 멕시코의 1824년 헌법에서는 해안선에서 26마일 이내에 정착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지만, 신청된 대부분의 불하지는 이 범위 내에 있는 것이 그 이유였다. 궁극적으로 땅이 불하가 되었다 하더라도 이주민은 브래드번에게 증오심을 갖게 되었다. 1832년 1월, 브래드번은 자신의 관할 지역 내에서 멕시코에서 텍사스를 분리하고 싶어 하는 10명의 인물의 목록을 입수했다. 이후 모든 일이 미국의 텍사스 분리를 위한 음모라고 믿게 되었다. 1832년 6월 브래드번 휘하의 군인 두 명이 이주민 여성을 강간한 사건이 발생하자, 성난 정착민들은 피해자를 죽인 이웃을 린치 했다. 그들은 브래드번에게 가해 병사들에게 동일한 형벌을 주기 위하여 인계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이 사건 이후, 정착민은 인디언의 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민병대 조직을 만들었다. 멕시코 법률에 민병대는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브래드번은 주동자인 패트릭 잭을 체포했지만, 그 후 살해 협박을 받고 석방을 하게 된다. 제1차 소요사건(1832년)[편집] 윌리엄 바렛 트래비스 이후에도 브래드번과 정착민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브래드번은 노예제도를 금지하는 멕시코 법률을 강하게 지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1831년 8월, 루이지애나에서 도망친 탈주노예 두 명을 보호했다. 노예 소유자는 반환을 요구하고, 법률 대리인으로서 현지 변호사 윌리엄 바렛 트래비스에게 의뢰했다.[1] 브래드번은 1832년 5월, 브래드번은 겉표지에 친구의 명의로 된 편지를 받았는데, 루이지애나에서 100명의 무장 집단이 노예를 찾기 위해 온다는 경고 편지였다. 이 편지가 장난이라고 판명된 후 브래드번은 트래비스를 용의자로 체포하고[2], 반역 혐의로 군사 재판에 넘기기 위하여, 마타모로스에 보내려고 했다. 유죄가 확정되면 확실하게 사형을 받을 수 있는 범죄였다[3]. 정착민들은 멕시코의 법률을 잘 몰랐기 때문에, 영장이나 혐의도 없이 체포되어, 배심원 재판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분개했다. 대부분의 정착민들은 미국의 권리장전이 그들을 지켜주는 걸로 오해하고 있었다.[4] 잭은 다시 브래드번을 협박하여 구속당했다. 그 다음 트래브스와 잭은 그들의 도피를 모의했다. 그들은 동료 조사관인 데이빗 G. 버넷에게 가는 편지를 은닉하려했고, 그 편지들은 텍시언이 그들을 도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시도는 무장 인력의 부족으로 중단되었다. 브래드번은 그 편지들이 배달되기 전에 가로챘다.[3] 처음에는 주민들이 가담하지 않았지만, 브래드번이 트래비스와 잭, 그리고 그들의 대리인에 증언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것을 알고 놀라게 되었다. 잭의 형이 브래조리아에서 아나우악까지 행진할 무리를 조직했고 주변 마을에서 다른 사람들도 도착하기 시작했다. 브래조리아 의원 중 한 사람인 존 오스틴은 부라조스 주둔 부대를 이끌고 있었던 도밍고 우가르테체아 대령에게 상담했다. 우가르테체아는 오스틴이 투옥된 사람의 석방을 요구하는 것을 권했다.[5] 브래드번 장교는 오스틴과 다른 사람들에 대해, 기소된 사람을 민간 기구에 인도하는 것은 법률로 금지되고 있다고 해명했다. 브래조리아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떠난 후, 멕시코 장교들은 말을 도난당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지역 주민 두 사람을 절도 혐의로 체포를 한다. 이 체포 소식을 듣자마자 브래조리아 대표단은 다시 아나우악에 돌아왔다. 분노한 시민들과 함께 아나우악에서 몇 마일 위치에 캠프를 차리고, 프랭크 W 존슨을 지휘관으로 선출했다. 그들은 곧 텍시언들의 동정을 정찰하려던 19명의 멕시코 기병대를 억류했다.[6][7] 6월 10일에는 아나우악 북쪽에 있는 건물을 점거했다. 브래드번은 무장 집단의 목표가 체포된 미국인의 석방에 그치지 않고, 전반적인 폭동으로 번질까 우려했다. 브래드번은 트래비스와 잭을 땅위에 묶고 총을 들이대며, 텍시언이 습격한다면 그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트래비스는 존슨에게 자신은 상관말고 습격을 하도록 촉구했다.[8] 뒤이은 협상에서 텍사스 측은 트래비스 등 죄수와 텍시언이 포로로 잡고 있는 멕시코 병사의 교환을 요청했으나[7], 멕시코 측은 포로 교환 외에도 텍시언 폭도들이 터틀 베이유까지 물러나도록 조건을 제시했다.[9] 협상의 결과로 대부분의 폭도가 아나우악을 떠났지만, 15 ~ 30명 정도가 흩어져 그 타운에 남아 있었다. 브래드번은 이것이 협정을 위반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2시간 이내 퇴거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고 경고했다. 대부분의 텍시언들은 브래드번 경고가 거짓말로 단순히 건물에서 나가라고 으르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텍시언은 몰랐지만, 그 건물 안에는 멕시코 군 보급물자인 무기와 탄약이 저장되어 있었다.[10] 폭동[편집] 브래드번 경고를 듣고 아나우악 여자와 아이들은 마을에서 도망쳤다. 멕시코 병사는 즉시 남아 있던 사람에게 발포를 했고, 이 싸움에서 5명의 멕시코 병사와 1명의 텍시언이 죽었다. 이후 텍시언은 터틀 배이유에 모여 브래조리아에서 대포의 도착을 기다렸다. 6월 13일 텍시언은 《터틀 배이유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 문서에는 그들은 연방주의자(federalist)이며, 멕시코의 안토니오 산타 안나 장군을 지지한다고 말하고, 민정에 상관없이 군대에 의해 체제를 유지하려고 하는 현 정부를 비난했다. 텍시언이 무기의 도착을 기다리는 동안, 브래드번은 200마일 북쪽 나케도체스에 있는 피에드라스 대령과 300마일 서쪽 샌안토니오에 있는 에로스아 대령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6월 19일에는 피에드라스 대령이 100명 정도의 병력을 데리고 출발했다. 존 오스틴 일행들은 대포를 가지고 오기 위해 브래조리아로 돌아갔다. 6월 20일 그는 주민들을 모아 중앙집권 정부에 반대한다는 투표를 했다. 오스틴은 반중앙집권 운동에 우가르테체아 대령을 초대다가 거절했당기 때문에 6월 26일 우가르테체아가 있는 요새를 공격했다. 이 작전은 벨라스코 전투로 알려졌으며, 다음날 아침에는 모든 무기를 남겨두고 마타모로스로 돌아간다는 조건 하에 우가르테체아 군은 항복을 했다. 피에드라스가 아나우악에서 30 마일 정도의 지점에 도달했을 때, 그는 존슨에 사절을 보냈다. 존슨은 그 사절에게 브래드번에 대한 불만과 불평을 목록을 전달했다. 피에드라스가 충돌의 해결을 모색하고 아래에 항에 합의를 했다. 자유 마을 자치를 위한 회의(ayutamiento)을 재건 아나우악에 잡혀있는 민간인을 민정 당국에 인도 브래드번을 해임하고 후임을 지명 6월 28일 이것을 텍사스 측이 수락했고, 7월 1일 피에드라스 부대는 아나우악에 입성했다. 여파[편집] 브래드번의 후임으로 지명된 펠릭스 마리아 수바런 중령은 지명을 거부했기 때문에, 피에드라스가 임시 지휘관을 맡았다. 7월 2일에는 구속된 텍시언들의 신병을 민정 당국에 인도했다. 그 후 1주일 이내에 전원이 불기소되어 풀려났다. 7월 8일 피에드라스가 나코그도체스로 돌아갈 즈음, 세 번째 서열인 코르티나 중위를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피에드라스가 떠난 3일 후 아나우악 부대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연방주의자임을 선언했다. 병사들은 연일 취해 있었으며, 코르티나의 명령을 듣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브래드번에게 지휘관에 복귀하라고 요청했지만, 브래드번은 이를 거절했고, 대신 수바런이 지휘할 것을 조언했다.[11] 브래드번 암살 계획은 사전에 드러나 무산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그는 텍사스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지역 배의 어떤 선장도 그를 태우는 것을 거부했다. 7월 13일에는 수바런은 중앙집권 정부를 지지하는 어떤 관리의 안전도 보장해주지 않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날 밤 브래드번은 가이드를 고용하여 걸어서 도보로 루이지애나를 향해 출발했다. 다른 관리들은 동정적인 지역민들에게 안식처를 찾았다.[12] 브래드번의 역할에 대해 훗날 역사학자에 의해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윌리엄 C. 데이비스는 "브래드번이 과도한 제제로 단순한 시골 불량배 두 사람을 영웅으로 만들었다"고 말했다.[13] 결과로 탄생한 터틀 배이유 결의안은 다른 텍시언들이 비슷한 과정을 따르도록 했다. 피에드라스가 나코고도체스로 돌아왔을 때, 시민들이 민병대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민정 의회에 이것을 해체하도록 요구했지만 거부했다. 오히려 민정 의회는 스스로의 민병대를 갖출 것이라고 선언했다. 8월 1일, 이 복합 민병대는 피에드라스에게 연방주의자의 반란을 지원할 것을 맹세라고 명령했다. 피에드라스가 거부하자 공격을 받았다. 며칠 후 그들은 페에드라스와 그 부하들을 감금하고, 연방주의자가 되도록 설득했다.[14] 군인들의 항복과 멕시코 내부로 철수로, 텍사스 동부에는 멕시코 군대가 전무했다. 이제 정착민들은 점점 정치 활동을 늘려나갔다.[15] 바로 1832년 회담이 결성되어 텍시언이 결속하여 같은 목표를 향하게 되었다.[16] 제2차 소요사건(1835년)[편집] 두 번째 분쟁은 1835년 6월 말 일어났으며, 또다시 관세 문제를 둘러싸고 발생했다. 지역 상인이자 소형 선박의 선장인 앤드류 브리스코우는 모든 항구에서 세금이 동일하게 부과되지 않는 것에 불만이 있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새 정부의 지휘관 안토니오 테노리오 대위를 시험하려고하고, 그의 배를 무거운 짐을 나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생각대로 당국자의 일부가 배를 알아냈다. 사실, 그는 단순히 모래만 싣고 있었을 뿐이었다. 테노리오는 격노하여 브리스코우과 그의 동료 데윗 클린턴 해리스를 체포했다. 해리스와 브리스코우를 연행하던 병사는 발포까지 하여 텍시언 젊은이, 윌리엄 스미스를 부상시켰다. 트래비스는 이후 큰 역할을 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체포 소식은 산 펠리페 데 오스틴 마을에 퍼졌고, 사람들의 분노를 샀다. 정치 지도자인 피터 밀러는 이 사건에 대해 트래비스에게 위탁하여 민병대를 조직하게 했다. 트래비스는 민병대를 모았고, 해리스 버그에 정박하고 있던 선박 오하이오 호를 징발하여, 대포를 싣고 아나우악으로 출항했다. 25명으로 구성된 부대는 즉시 40명 정도의 멕시코 군 부대를 항복시키고 무장을 해제하고, 잡혀 있던 두 사람의 텍시언을 석방하고, 부대를 쫓아냈다.[17][18] 하지만 트래비스는 행위는 지역 사회의 폭넓은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당시 멕시코시티에 있던 스티븐 오스틴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기 위하여, 결국 사과를 했다. 오스틴은 멕시코 국경에 정착할 이민을 장려, 감독하고, 스페인(후에 멕시코) 정부와 계약을 맺은 가장 유명한 엠프레사리오였다. 그 여름의 끝 무렵, 멕시코 군 당국은 군사법정에서 트래비스를 재판하기 위해 신병 인도를 요구했지만, 정착민들은 이에 반대했다. 트래비스는 다음 해 알라모 전투에서 사망했다. 텍사스 공화국 국무장관을 단시간 맡은 오스틴은 텍사스의 중요한 역사적인 인물이 되었다. 각주[편집] ↑ Henson (1982), p. 95. ↑ Henson (1982), p. 97. ↑ 가 나 Davis (2006), p. 83. ↑ Henson (1982), p. 96. ↑ Henson (1982), p. 99. ↑ Henson (1982), p. 100. ↑ 가 나 Henson (1982), p. 101. ↑ Davis (2006), p. 84. ↑ Henson (1982), p. 103-104. ↑ Henson (1982), p. 104. ↑ Henson (1982), p. 111. ↑ Henson (1982), pp. 111–2. ↑ Davis (2006), p. 86. ↑ Davis (2006), pp. 86–9. ↑ Davis (2006), p. 89. ↑ Davis (2006), p. 91. ↑ Looscan, AB., "THE OLD FORT AT ANAHUAC", Southwestern Historical Quarterly Online, Volume 002, Number 1, pp. 21 - 28, accessed 28 Oct 2006 ↑ “Eugene Barker, Excerpted publications”. 2007년 1월 1일에 원본 문서에서 보존된 문서. 2006년 10월 28일에 확인함.  같이 보기[편집] 텍사스 혁명 관련 자료[편집] House, Boyce (July 1960), "An Incident at Velasco, 1832", Southwestern Historical Quarterly 64 (1)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아나우악_소요사건&amp;oldid=22283200" 분류: 텍사스주의 역사멕시코의 역사텍사스 혁명숨은 분류: 영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日本語Português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8일 (토) 19:13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아나우악 소요사건 요약** **주요 인물:** - 후안 데이비스 브래드번: 멕시코 군 장교, 아나우악의 관세 사무소 및 군대 지휘관. - 윌리엄 바렛 트래비스: 정착민 변호사, 후에 민병대 조직. - 패트릭 잭: 정착민 리더, 민병대 조직에 참여. - 앤드류 브리스코우: 지역 상인, 두 번째 소요사건의 주인공. **배경:** 1830년대 초, 멕시코는 미국 이민자들의 텍사스 이주를 제한하고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 군대를 주둔시켰다. 이로 인해 정착민들과 군대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브래드번은 정착민들의 토지 불하를 반대하고, 이주민에 대한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 **제1차 소요사건 (1832년):** - 브래드번의 군인들이 정착민 여성을 강간한 사건이 발생하자, 정착민들은 민병대를 조직하고 브래드번에게 보복을 요구했다. - 정착민들은 아나우악을 점거하고 브래드번과 대치하게 된다. 결국, 협상 후 일부 정착민이 아나우악을 떠나지 않자, 브래드번은 발포를 경고하고 충돌이 발생하여 사상자가 발생했다. - 이 사건은 텍사스의 연방주의자 운동을 촉발하고, 정착민들이 정치적 결속을 다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여파:** - 브래드번은 해임되고, 새로운 지휘관이 임명되었다. 정착민들은 민병대를 조직하고 정치적 활동을 강화했다. **제2차 소요사건 (1835년):** - 1835년, 관세 문제로 인해 브리스코우가 체포되자, 트래비스가 민병대를 조직하여 멕시코 군대를 공격하고 정착민을 구출했다. - 이 사건은 정착민들 사이의 반멕시코 감정을 더욱 고조시켰고, 텍사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갈등 구조:** 아나우악 소요사건은 멕시코 정부의 강압적인 정책과 정착민들의 저항 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이는 결국 텍사스 혁명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잡았다.
다음 텍스트를 읽고 독자가 처음 접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해줘. 주요 인물, 사건, 배경, 갈등 구조 등을 빠짐없이 담되, 문장은 간결하게 유지해줘.
조양호
https://ko.wikipedia.org/wiki/조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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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훈</td></tr><tr><th>후임자</th> <td> 우기홍, 서용원, 석태수</td></tr><tr><th>종교</th> <td> <a>불교</a></td></tr><tr><th>부모</th> <td> 아버지: <a>조중훈</a>, 어머니: 김정일</td></tr><tr><th>형제</th> <td> 동생: <a>조남호</a>, <a>조수호</a>, <a>조정호</a></td></tr><tr><th>배우자</th> <td> <a>이명희</a></td></tr><tr><th>자녀</th> <td> 아들: <a>조원태</a>, 딸: <a>조현아</a>, <a>조현민</a></td></tr> </tbody></table> <p><b>조양호</b>(<small><a>한국 한자</a>:&#160;</small>趙亮鎬, <a>1949년</a> <a>3월 8일</a> ~ <a>2019년</a> <a>4월 8일</a>)는 <a>한진그룹</a> 회장, <a>대한항공</a> 회장을 역임한 <a>대한민국</a>의 기업인이다. 호는 일우이다. </p><p>한진그룹 창업주 <a>조중훈</a>의 장남으로 태어나 1974년 대한항공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1999년부터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으며, 2003년 한진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p><p>2014년부터 <a>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a> 위원장을 맡았으나 2016년 <a>한진해운</a> 사태의 처리를 위해 자진 사퇴하였다. </p><p>2019년 3월 27일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연임 안건이 부결되어 대한항공 이사의 지위를 상실하였고, 회장 직함만 유지하게 되었다.<sup><a>&#91;1&#93;</a></sup> </p><p>2019년 4월 8일 새벽 (<a>한국 표준시</a>) 숙환으로 인하여 미국 LA에서 7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논란</span></a> <ul> <li><a><span>1.1</span> <span>항공기 리베이트 탈세 혐의</span></a></li> <li><a><span>1.2</span> <span>변칙 증여 사건</span></a></li> <li><a><span>1.3</span> <span>대한항공 브랜드 사용료 논란</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학력</span></a> <ul> <li><a><span>2.1</span> <span>명예 박사 학위</span></a></li> </ul> </li> <li><a><span>3</span> <span>경력</span></a> <ul> <li><a><span>3.1</span> <span>기타 약력</span></a></li> </ul> </li> <li><a><span>4</span> <span>수상</span></a></li> <li><a><span>5</span> <span>가족</span></a></li> <li><a><span>6</span> <span>각주</span></a></li> <li><a><span>7</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논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img>이 부분의 본문은 <a>한진그룹 총수 일가 논란</a>입니다.</div> <h3><span></span><span>항공기 리베이트 탈세 혐의</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1991년 부터 1998년까지 외국 기업 두 곳의 항공기를 구매할때 특정 회사의 엔진을 장착하는 조건으로 <a>리베이트</a>를 받았다. 이 중 일부인 1천685억원을 국내로 들여와 <a>조중훈</a> 명예 회장과 <a>조양호</a> 회장 등이 개인적으로 사용했다. 지난 1997년 11월 26일 600만달러의 리베이트를 국내로 반입하고 1998년 7월 29일에 이 중 18만달러 (2억 5천만원)를 개인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3개를 당좌수표로 분산하여 현금화한것으로 밝혀졌다. 또, <a>조중훈</a> 일가는 이때 받은 리베이트를 조세 회피 지역인 '아일랜드 더블린' 지역에 100만달러를 출자해 설립한 현지 법인 KA사에 이전하여 1억 8천 400만 달러가 해외로 유출됐고, 이로 인해 814억원을 탈세한 혐의가 밝혀졌다.<sup><a>&#91;2&#93;</a></sup> </p> <h3><span></span><span>변칙 증여 사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조중훈</a> 명예회장은 1990년 이후 자녀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해 회사 자금 1천 579억원을 유출시켜 계열사 주식 취득 자금으로 이용했다. 1994년 10월에는 대한항공 주식 75만주를 매각하고 취득한 대금을 5개 은행 지점에서 수표로 찾아 본인 명의의 종합금융사 어음관리계좌(CMA)에 분산관리 하다가 1995년 1월 <a>조양호</a> 등 6명의 수익 증권 계좌에 입금 시키는 방식이었다. 이 돈은 유상 증자 대금으로 사용됐으며, 이 수법으로 총 967억원의 소득세와 증여세를 탈세했다.<sup><a>&#91;3&#93;</a></sup> </p> <h3><span></span><span>대한항공 브랜드 사용료 논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한진칼</a>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가 지분 25%를 보유한 한진그룹 지주회사이며, 대한항공은 매년 매출액의 0.25%(2017년 기준 300억원)를 한진칼에 '대한항공 상표권' 사용료로 납부한다. 특허청에 따르면, <a>대한항공</a>은 2013년 8월 6일 '대한항공'과 'Korean Air' 이름, 태극문양의 로고 등 상표권 전부와 진에어· 칼호텔 네트워크 등의 계열사 주식, 서울 서소문사옥, 현금 및 예금 1000억원을 <a>한진칼</a>에 넘겨줬다.<sup><a>&#91;4&#93;</a></sup> </p><p><a>한진칼</a>은 <a>대한항공</a>으로부터 상표권을 넘겨받기 닷새 전인 2013년 8월 1일 대한항공으로부터 계열 분리된, 한진그룹의 지주 회사다. 조양호 회장과 장녀 <a>조현아</a>, 장남 <a>조원태</a>, 차녀 <a>조현민</a>은 대한항공의 주식을 모두 넘기고 한진칼의 주식을 받았다. 이후 <a>조양호</a> 회장 일가는 2014년 ~ 2017년까지 세 번에 걸쳐 37억원의 현금 배당을 받았다. 오너 일가가 <a>한진칼</a>에서 수십억원대의 배당금을 받았던 이 시기, 대한항공은 저유가·항공수요 증가가 겹친 호황기였음에도 한진해운 부실처리 문제를 떠안으며 곤란을 겪게 되었다. 사정이 어려워 수 년간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하지 못하던 대한항공이 2014년 ~ 2017년까지 오너 일가의 지분이 몰려있는 <a>한진칼</a>에 지불한 '<a>대한항공</a> <a>상표권</a> 사용료'와 '건물 임대료'는 1,229억원으로 밝혀졌다.<sup><a>&#91;5&#93;</a></sup> </p> <h2><span></span><span>학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경복고등학교</a> 졸업</li> <li><a>인하대학교</a> 산업공학 학사</li> <li><a>USC 경영대학원</a> <a>MBA</a></li> <li><a>인하대학교 대학원</a> 경영학 박사</li></ul> <h3><span></span><span>명예 박사 학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ul><li>엠브리리들항공대학교 명예항공경영학 박사</li></ul> <h2><span></span><span>경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대한탁구협회 회장</li> <li>국제항공운송협회 집행위원회 5선 위원</li> <li>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집행위원(재선) 및 집행위원 선정위원회 위원</li> <li>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집행위원회 위원</li> <li>한국방위산업진흥회 회장</li> <li>정석인하학원 재단 이사장</li> <li><a>한진그룹</a> 회장</li> <li>한·불최고경영자클럽 회장</li> <li><a>대한항공</a> 대표이사 회장</li> <li>한일경제협회 부회장</li> <li><a>KEB하나은행</a> 사외이사</li> <li><a>인하대학교</a> 이사장</li> <li>정석항공과학고등학교 이사장</li> <li>한국경영자교협이사장회장</li> <li><a>한진그룹</a> 부회장</li> <li>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집행위원</li> <li><a>한국항공대</a> (정석학원) 재단 이사장</li> <li><a>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a> 공동 위원장</li></ul> <h3><span></span><span>기타 약력</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ul><li>2019년 3월 27일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직과 등기이사직 선임 부결되었다.</li></ul> <h2><span></span><span>수상</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2005년 몽골 최고 훈장</li> <li>2005년 USC 기술경영자상 / 글로벌 경영자상</li> <li>2005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li> <li>2011년 제 11회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최고대상</li> <li>2012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li> <li>2012년 아시안 비즈니스 리더상</li> <li>2015년 프랑스 <a>레지옹 도뇌르 훈장</a> 그랑도피시에(<span>Légion d'honneur Grand Officier</span>)</li></ul> <h2><span></span><span>가족</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조부: 조명희</li> <li>조모: 태천즙 <ul><li>아버지: <a>조중훈</a> (1920년 3월 30일 - 2002년 11월 17일)</li> <li>어머니: 김정일 (1923년 9월 8일 - 2016년 12월 15일) <ul><li>동생: <a>조남호</a> (1951년 2월 12일 - ) 한진중공업홀딩스 회장</li> <li>동생: <a>조수호</a> (1954년 6월 21일 - 2006년 11월 26일)</li> <li>제수: 최은영 (1962년 5월 3일 - ) - <a>신격호</a>(<a>롯데그룹</a> 회장)의 여동생 신정숙(<a>동화면세점</a> 사장)의 딸. 현 유수홀딩스 대표이사.</li> <li>동생: <a>조정호</a> (1958년 10월 5일 - ) 메리츠금융지주 회장</li> <li>배우자: <a>이명희</a> (1949년 12월 19일 - ) <ul><li>장녀: <a>조현아</a> (1974년 10월 5일 - )</li> <li>장남: <a>조원태</a> (1976년 1월 25일 - ) <a>한진그룹</a> 회장</li> <li>차녀: <a>에밀리 리 조</a> (Emily Cho, 1983년 8월 31일 - ) 대한항공 전무이자 진에어 부사장.</li></ul></li></ul></li> <li>숙부: 조중건</li></ul></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cite><a>&#8220;<span>'</span>대표이사' 뗐지만 '회장 조양호' 여전…향후 경영 진로는?&#8221;</a>. JTBC. 2019년 3월 27일.</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한진그룹 탈세수법&#8221;</a>. 연합뉴스. 1999년 10월 4일.</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한진그룹 탈세수법&#8221;</a>. 연합뉴스. 1999년 10월 4일.</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대한항공은 '대한항공'을 돈 내고 쓴다…누구에게?&#8221;</a>. 비즈니스워치. 2018년 4월 19일.</cite><span><span>&#160;</span></span></span> </li> <li><span><a>↑</a></span> <span><cite><a>&#8220;대한항공은 '대한항공'을 돈 내고 쓴다…누구에게?&#8221;</a>. 비즈니스워치. 2018년 4월 19일.</cite><span><span>&#160;</span></span><sup>&#91;<a>깨진 링크</a>(<a>과거 내용 찾기</a>)&#93;</sup></span> </li> </ol></div></div>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조양호</a> - 네이버 인물검색</li> <li><a>조양호</a> - 다음 인물백과</li></ul> <table> <tbody><tr> <td>전임<br><b>신설</b> </td> <td>초대 <a>한진칼</a> 총수<br><a>2013년</a> 9월 16일 ~ <a>2019년</a> <a>3월 29일</a> </td> <td>후임<br><b><a>석태수</a></b> </td></tr></tbody></table> <table> <tbody><tr> <td>전임<br><b><a>조중훈</a></b> </td> <td>제4대 <a>대한항공</a> 총수<br><a>1999년</a> <a>11월 19일</a> ~ <a>2019년</a> <a>3월 27일</a> </td> <td>후임<br><b>우기홍</b> </td></tr></tbody></table> <table> <tbody><tr> <td>전임<br><b><a>조중건</a></b> </td> <td><a>한진그룹</a> 부회장<br><a>1995년</a> 12월 8일 ~ <a>2003년</a> </td> <td>후임<br><b><a>심이택</a></b> </td></tr></tbody></table> <table> <tbody><tr> <td>전임<br><b><a>조중훈</a></b> </td> <td>제2대 <a>한진그룹</a> 회장<br><a>2003년</a> <a>2월 14일</a> ~ <a>2019년</a> <a>3월 27일</a> </td> <td>후임<br><b><a>석태수</a></b> </td></tr></tbody></table> <table> <tbody><tr> <td>전임<br><b><a>조중훈</a></b> </td> <td>제2대 <a>정석기업</a> 회장<br><a>2003년</a> ~ <a>2019년</a> <a>3월 27일</a> </td> <td>후임<br><b><a>원종승</a></b> </td></tr></tbody></table> <table> <tbody><tr> <td>전임<br><b><a>최은영</a></b> </td> <td>제4대 <a>한진해운</a> 회장<br><a>2014년</a> ~ <a>2016년</a> <a>4월 25일</a> </td> <td>후임<br><b><a>석태수</a></b> </td></tr></tbody></table> <table> <tbody><tr> <td>전임<br><b><a>조중훈</a></b> </td> <td><a>한진그룹</a> 명예회장<br><a>2019년</a> 3월 27일 ~ <a>2019년</a> <a>4월 8일</a> </td> <td>후임<br><b>-</b> </td></tr></tbody></table> <div><table><tbody><tr><th colspan="3"><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한진그룹</a></div></th></tr><tr><th>지주회사</th><td><div> <ul><li><a>한진칼</a></li></ul> </div></td><td rowspan="11"><div><a><img></a></div></td></tr><tr><th>항공</th><td><div> <ul><li><a>대한항공</a> (<a>KAL 리무진</a>)</li> <li><a>진에어</a></li> <li><a>한국공항</a></li> <li><a>에어코리아</a></li></ul> </div></td></tr><tr><th>육운</th><td><div> <ul><li><a>한진</a> (<a>물류</a></li> <li><a>택배</a></li> <li><a>렌터카</a>)</li> <li><a>한진드림익스프레스</a></li></ul> </div></td></tr><tr><th>관광·호텔·부동산</th><td><div> <ul><li><a>한진관광</a></li> <li><a>칼호텔네트워크</a> (<a>KAL호텔</a></li> <li><a>그랜드 하얏트 인천</a>)</li> <li><a>항공종합서비스</a></li> <li><a>정석기업</a></li> <li><a>호미오세라피</a></li> <li><a>삼올</a></li></ul> </div></td></tr><tr><th>정보서비스</th><td><div> <ul><li><a>한진정보통신</a></li> <li><a>토파스여행정보</a></li> <li><a>싸이버스카이</a></li> <li><a>한국글로발로지스틱스</a></li> <li><a>유니컨버스</a></li> <li><a>하이큐스</a></li></ul> </div></td></tr><tr><th>비영리</th><td><div> <ul><li><a>정석인하학원</a> (<a>인하대학교</a></li> <li><a>인하공업전문대학</a></li> <li><a>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a></li> <li><a>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a></li> <li><a>인하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a></li> <li><a>한국항공대학교</a></li> <li><a>정석항공과학고등학교</a>)</li> <li><a>일우재단</a></li> <li><a>양현재단</a></li></ul> </div></td></tr><tr><th>스포츠</th><td><div> <ul><li><a>인천 대한항공 점보스</a></li> <li><a>대한항공 여자탁구단</a></li> <li><a>대한항공 빙상단</a></li></ul> </div></td></tr><tr><th>이전 계열사</th><td><div> <ul><li><a>한진상사</a></li> <li><a>한진건설/한진종합건설</a></li> <li><a>한진투자증권</a></li> <li><a>동양화재</a></li> <li><a>한진고속</a></li> <li><a>한진중공업</a></li> <li><a>한불종합금융</a></li> <li><a>거양해운</a></li> <li><a>한진해운</a></li></ul> </div></td></tr><tr><th>방계기업</th><td><div> <ul><li><a>메리츠금융그룹</a></li> <li><a>동양고속건설그룹</a></li> <li><a>한진중공업그룹</a></li></ul> </div></td></tr><tr><th>특수관계인</th><td><div> <ul><li><a>조중훈</a></li> <li><a>조중건</a></li> <li><a>김형배</a></li> <li><a>이종희</a></li> <li><a>김종선</a></li> <li><a>조양호</a></li> <li><a>심이택</a></li> <li><a>석태수</a></li> <li><a>조남호</a></li> <li><a>조수호</a></li> <li><a>조정호</a></li> <li><a>서용원</a></li> <li><a>우기홍</a></li> <li><a>이명희</a></li> <li><a>조원태</a></li> <li><a>조현아</a></li> <li><a>조현민</a></li></ul> </div></td></tr><tr><th>관련사건</th><td><div> <ul><li><a>대한항공 086편 회항 사건</a></li> <li><a>총수 일가 논란</a></li></ul> </div></td></tr><tr><td colspan="3"><div><b>웹사이트</b>: <a>hanjin.net</a></div></td></tr></tbody></table></div>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사단법인</a> <a>전국경제인연합회</a></div></th></tr><tr><th>회장</th><td><div> <ul><li><a>허창수</a>(<a>GS</a>)</li></ul> </div></td></tr><tr><th>부회장</th><td><div></div><table><tbody><tr><th>상근부회장</th><td><div><a>권태신</a>(<a>전국경제인연합회</a>)</div></td></tr><tr><td colspan="2"><div> <ul><li><a>김승연</a>(<a>한화</a>)</li> <li><a>조양호</a>(<a>대한항공</a>)</li> <li><a>이웅열</a>(<a>코오롱</a>)</li> <li><a>신동빈</a>(<a>롯데쇼핑</a>)</li> <li><a>이준용</a>(<a>대림산업</a>)</li> <li><a>김윤</a>(<a>삼양홀딩스</a>)</li> <li><a>박영주</a>(<a>이건산업</a>)</li> <li><a>류진</a>(<a>풍산</a>)</li> <li><a>박삼구</a>(<a>금호산업</a>)</li> <li><a>김준기</a>(<a>DB</a>)</li> <li><a>박정원</a>(<a>두산</a>)</li> <li><a>장세주</a>(<a>동국제강</a>)</li> <li><a>이장한</a>(<a>종근당</a>)</li></ul> </div></td></tr></tbody></table><div></div></td></tr><tr><th>위원장단</th><td><div> <ul><li><a>김윤</a>(<a>삼양홀딩스</a>)</li> <li><a>박삼구</a>(<a>금호산업</a>)</li> <li><a>정진행</a>(<a>현대자동차</a>)</li> <li><a>박영주</a>(<a>이건산업</a>)</li> <li><a>구자열</a>(<a>LS</a>)</li> <li><a>손길승</a>(<a>SK텔레콤</a>)</li></ul> </div></td></tr></tbody></table></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조양호&amp;oldid=24521167</a>"</div> <div><div><a>분류</a>: <ul><li><a>1949년 태어남</a></li><li><a>2019년 죽음</a></li><li><a>양주 조씨</a></li><li><a>인천광역시 출신</a></li><li><a>경복고등학교 동문</a></li><li><a>인하대학교 동문</a></li><li><a>한진 사람</a></li><li><a>항공 기업인</a></li><li><a>대한항공</a></li><li><a>한진가</a></li><li><a>대한민국의 기업인</a></li><li><a>대한민국의 억만장자</a></li><li><a>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a></li><li><a>대한민국의 조세 범죄 기결수</a></li><li><a>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a></li><li><a>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 훈장 수훈자</a></li><li><a>폐질환으로 죽은 사람</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a></li><li><a>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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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호 회장의 장녀의 이름은?
조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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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양호 회장의 장녀의 이름은?", "대한항공이 한진칼에 지불한 대한항공 상표권 사용료와 건물 임대료의 금액은?", "조양호 회장의 장녀의 이름은 ?", "조양호 회장의 장남의 이름은 ?", "대한항공이 2014년~2017년까지 한진칼에 지불한 대한항공 상표권 사용료와 건물임대료로 밝혀진 액수는?" ]
<!DOCTYPE html> 조양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양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조양호</th></tr><tr><td colspan="2"> </td></tr><tr><th>출생</th> <td> 1949년 3월 8일(1949-03-08)대한민국 인천</td></tr><tr><th>사망</th> <td> 2019년 4월 8일 (70세)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td></tr><tr><th>사인</th> <td> 폐질환</td></tr><tr><th>국적</th> <td> 대한민국</td></tr> <tr><th>본관</th> <td> 양주</td></tr><tr><th>학력</th> <td> 인하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td></tr><tr><th>경력</th> <td> 한진그룹 회장대한항공 회장한진해운 회장</td></tr><tr><th>직업</th> <td> 기업인</td></tr><tr><th>전임자</th> <td> 조중훈</td></tr><tr><th>후임자</th> <td> 우기홍, 서용원, 석태수</td></tr><tr><th>종교</th> <td> 불교</td></tr><tr><th>부모</th> <td> 아버지: 조중훈, 어머니: 김정일</td></tr><tr><th>형제</th> <td> 동생: 조남호, 조수호, 조정호</td></tr><tr><th>배우자</th> <td> 이명희</td></tr><tr><th>자녀</th> <td> 아들: 조원태, 딸: 조현아, 조현민</td></tr> </tbody></table> 조양호(한국 한자: 趙亮鎬, 1949년 3월 8일 ~ 2019년 4월 8일)는 한진그룹 회장, 대한항공 회장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기업인이다. 호는 일우이다. 한진그룹 창업주 조중훈의 장남으로 태어나 1974년 대한항공에서 근무를 시작했고, 1999년부터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으며, 2003년 한진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2014년부터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나 2016년 한진해운 사태의 처리를 위해 자진 사퇴하였다. 2019년 3월 27일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연임 안건이 부결되어 대한항공 이사의 지위를 상실하였고, 회장 직함만 유지하게 되었다.[1] 2019년 4월 8일 새벽 (한국 표준시) 숙환으로 인하여 미국 LA에서 70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목차 1 논란 1.1 항공기 리베이트 탈세 혐의 1.2 변칙 증여 사건 1.3 대한항공 브랜드 사용료 논란 2 학력 2.1 명예 박사 학위 3 경력 3.1 기타 약력 4 수상 5 가족 6 각주 7 외부 링크 논란[편집] 이 부분의 본문은 한진그룹 총수 일가 논란입니다. 항공기 리베이트 탈세 혐의[편집] 1991년 부터 1998년까지 외국 기업 두 곳의 항공기를 구매할때 특정 회사의 엔진을 장착하는 조건으로 리베이트를 받았다. 이 중 일부인 1천685억원을 국내로 들여와 조중훈 명예 회장과 조양호 회장 등이 개인적으로 사용했다. 지난 1997년 11월 26일 600만달러의 리베이트를 국내로 반입하고 1998년 7월 29일에 이 중 18만달러 (2억 5천만원)를 개인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3개를 당좌수표로 분산하여 현금화한것으로 밝혀졌다. 또, 조중훈 일가는 이때 받은 리베이트를 조세 회피 지역인 '아일랜드 더블린' 지역에 100만달러를 출자해 설립한 현지 법인 KA사에 이전하여 1억 8천 400만 달러가 해외로 유출됐고, 이로 인해 814억원을 탈세한 혐의가 밝혀졌다.[2] 변칙 증여 사건[편집] 조중훈 명예회장은 1990년 이후 자녀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기 위해 회사 자금 1천 579억원을 유출시켜 계열사 주식 취득 자금으로 이용했다. 1994년 10월에는 대한항공 주식 75만주를 매각하고 취득한 대금을 5개 은행 지점에서 수표로 찾아 본인 명의의 종합금융사 어음관리계좌(CMA)에 분산관리 하다가 1995년 1월 조양호 등 6명의 수익 증권 계좌에 입금 시키는 방식이었다. 이 돈은 유상 증자 대금으로 사용됐으며, 이 수법으로 총 967억원의 소득세와 증여세를 탈세했다.[3] 대한항공 브랜드 사용료 논란[편집] 한진칼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일가가 지분 25%를 보유한 한진그룹 지주회사이며, 대한항공은 매년 매출액의 0.25%(2017년 기준 300억원)를 한진칼에 '대한항공 상표권' 사용료로 납부한다. 특허청에 따르면, 대한항공은 2013년 8월 6일 '대한항공'과 'Korean Air' 이름, 태극문양의 로고 등 상표권 전부와 진에어· 칼호텔 네트워크 등의 계열사 주식, 서울 서소문사옥, 현금 및 예금 1000억원을 한진칼에 넘겨줬다.[4] 한진칼은 대한항공으로부터 상표권을 넘겨받기 닷새 전인 2013년 8월 1일 대한항공으로부터 계열 분리된, 한진그룹의 지주 회사다. 조양호 회장과 장녀 조현아, 장남 조원태, 차녀 조현민은 대한항공의 주식을 모두 넘기고 한진칼의 주식을 받았다. 이후 조양호 회장 일가는 2014년 ~ 2017년까지 세 번에 걸쳐 37억원의 현금 배당을 받았다. 오너 일가가 한진칼에서 수십억원대의 배당금을 받았던 이 시기, 대한항공은 저유가·항공수요 증가가 겹친 호황기였음에도 한진해운 부실처리 문제를 떠안으며 곤란을 겪게 되었다. 사정이 어려워 수 년간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지급하지 못하던 대한항공이 2014년 ~ 2017년까지 오너 일가의 지분이 몰려있는 한진칼에 지불한 '대한항공 상표권 사용료'와 '건물 임대료'는 1,229억원으로 밝혀졌다.[5] 학력[편집] 경복고등학교 졸업 인하대학교 산업공학 학사 USC 경영대학원 MBA 인하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박사 명예 박사 학위[편집] 엠브리리들항공대학교 명예항공경영학 박사 경력[편집] 대한탁구협회 회장 국제항공운송협회 집행위원회 5선 위원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집행위원(재선) 및 집행위원 선정위원회 위원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집행위원회 위원 한국방위산업진흥회 회장 정석인하학원 재단 이사장 한진그룹 회장 한·불최고경영자클럽 회장 대한항공 대표이사 회장 한일경제협회 부회장 KEB하나은행 사외이사 인하대학교 이사장 정석항공과학고등학교 이사장 한국경영자교협이사장회장 한진그룹 부회장 국제항공운송협회(IATA) 집행위원 한국항공대 (정석학원) 재단 이사장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위원회 공동 위원장 기타 약력[편집] 2019년 3월 27일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직과 등기이사직 선임 부결되었다. 수상[편집] 2005년 몽골 최고 훈장 2005년 USC 기술경영자상 / 글로벌 경영자상 2005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 2011년 제 11회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최고대상 2012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2012년 아시안 비즈니스 리더상 2015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Légion d'honneur Grand Officier) 가족[편집] 조부: 조명희 조모: 태천즙 아버지: 조중훈 (1920년 3월 30일 - 2002년 11월 17일) 어머니: 김정일 (1923년 9월 8일 - 2016년 12월 15일) 동생: 조남호 (1951년 2월 12일 - ) 한진중공업홀딩스 회장 동생: 조수호 (1954년 6월 21일 - 2006년 11월 26일) 제수: 최은영 (1962년 5월 3일 - ) - 신격호(롯데그룹 회장)의 여동생 신정숙(동화면세점 사장)의 딸. 현 유수홀딩스 대표이사. 동생: 조정호 (1958년 10월 5일 - ) 메리츠금융지주 회장 배우자: 이명희 (1949년 12월 19일 - ) 장녀: 조현아 (1974년 10월 5일 - ) 장남: 조원태 (1976년 1월 25일 - ) 한진그룹 회장 차녀: 에밀리 리 조 (Emily Cho, 1983년 8월 31일 - ) 대한항공 전무이자 진에어 부사장. 숙부: 조중건 각주[편집] ↑ “'대표이사' 뗐지만 '회장 조양호' 여전…향후 경영 진로는?”. JTBC. 2019년 3월 27일.  ↑ “한진그룹 탈세수법”. 연합뉴스. 1999년 10월 4일.  ↑ “한진그룹 탈세수법”. 연합뉴스. 1999년 10월 4일.  ↑ “대한항공은 '대한항공'을 돈 내고 쓴다…누구에게?”. 비즈니스워치. 2018년 4월 19일.  ↑ “대한항공은 '대한항공'을 돈 내고 쓴다…누구에게?”. 비즈니스워치. 2018년 4월 19일. [깨진 링크(과거 내용 찾기)] 외부 링크[편집] 조양호 - 네이버 인물검색 조양호 - 다음 인물백과 <table> <tbody><tr> <td>전임신설 </td> <td>초대 한진칼 총수2013년 9월 16일 ~ 2019년 3월 29일 </td> <td>후임석태수 </td></tr></tbody></table> <table> <tbody><tr> <td>전임조중훈 </td> <td>제4대 대한항공 총수1999년 11월 19일 ~ 2019년 3월 27일 </td> <td>후임우기홍 </td></tr></tbody></table> <table> <tbody><tr> <td>전임조중건 </td> <td>한진그룹 부회장1995년 12월 8일 ~ 2003년 </td> <td>후임심이택 </td></tr></tbody></table> <table> <tbody><tr> <td>전임조중훈 </td> <td>제2대 한진그룹 회장2003년 2월 14일 ~ 2019년 3월 27일 </td> <td>후임석태수 </td></tr></tbody></table> <table> <tbody><tr> <td>전임조중훈 </td> <td>제2대 정석기업 회장2003년 ~ 2019년 3월 27일 </td> <td>후임원종승 </td></tr></tbody></table> <table> <tbody><tr> <td>전임최은영 </td> <td>제4대 한진해운 회장2014년 ~ 2016년 4월 25일 </td> <td>후임석태수 </td></tr></tbody></table> <table> <tbody><tr> <td>전임조중훈 </td> <td>한진그룹 명예회장2019년 3월 27일 ~ 2019년 4월 8일 </td> <td>후임- </td></tr></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3">vdeh한진그룹</th></tr><tr><th>지주회사</th><td> 한진칼 </td><td rowspan="11"></td></tr><tr><th>항공</th><td> 대한항공 (KAL 리무진) 진에어 한국공항 에어코리아 </td></tr><tr><th>육운</th><td> 한진 (물류 택배 렌터카) 한진드림익스프레스 </td></tr><tr><th>관광·호텔·부동산</th><td> 한진관광 칼호텔네트워크 (KAL호텔 그랜드 하얏트 인천) 항공종합서비스 정석기업 호미오세라피 삼올 </td></tr><tr><th>정보서비스</th><td> 한진정보통신 토파스여행정보 싸이버스카이 한국글로발로지스틱스 유니컨버스 하이큐스 </td></tr><tr><th>비영리</th><td> 정석인하학원 (인하대학교 인하공업전문대학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부속고등학교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중학교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한국항공대학교 정석항공과학고등학교) 일우재단 양현재단 </td></tr><tr><th>스포츠</th><td>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 대한항공 여자탁구단 대한항공 빙상단 </td></tr><tr><th>이전 계열사</th><td> 한진상사 한진건설/한진종합건설 한진투자증권 동양화재 한진고속 한진중공업 한불종합금융 거양해운 한진해운 </td></tr><tr><th>방계기업</th><td> 메리츠금융그룹 동양고속건설그룹 한진중공업그룹 </td></tr><tr><th>특수관계인</th><td> 조중훈 조중건 김형배 이종희 김종선 조양호 심이택 석태수 조남호 조수호 조정호 서용원 우기홍 이명희 조원태 조현아 조현민 </td></tr><tr><th>관련사건</th><td> 대한항공 086편 회항 사건 총수 일가 논란 </td></tr><tr><td colspan="3">웹사이트: hanjin.net</td></tr></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2">vdeh사단법인 전국경제인연합회</th></tr><tr><th>회장</th><td> 허창수(GS) </td></tr><tr><th>부회장</th><td><table><tbody><tr><th>상근부회장</th><td>권태신(전국경제인연합회)</td></tr><tr><td colspan="2"> 김승연(한화) 조양호(대한항공) 이웅열(코오롱) 신동빈(롯데쇼핑) 이준용(대림산업) 김윤(삼양홀딩스) 박영주(이건산업) 류진(풍산) 박삼구(금호산업) 김준기(DB) 박정원(두산) 장세주(동국제강) 이장한(종근당) </td></tr></tbody></table></td></tr><tr><th>위원장단</th><td> 김윤(삼양홀딩스) 박삼구(금호산업) 정진행(현대자동차) 박영주(이건산업) 구자열(LS) 손길승(SK텔레콤)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조양호&amp;oldid=24521167" 분류: 1949년 태어남2019년 죽음양주 조씨인천광역시 출신경복고등학교 동문인하대학교 동문한진 사람항공 기업인대한항공한진가대한민국의 기업인대한민국의 억만장자대한민국의 공공기관장대한민국의 조세 범죄 기결수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레지옹 도뇌르 그랑도피시에 훈장 수훈자폐질환으로 죽은 사람숨은 분류: 깨진 링크를 가지고 있는 문서프랑스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EspañolBahasa Indonesia日本語Simple EnglishTürkçe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7월 4일 (목) 01:2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조양호(1949년 3월 8일 ~ 2019년 4월 8일)는 대한민국의 기업인으로, 한진그룹과 대한항공의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한진그룹 창립자 조중훈의 장남으로 태어나 인하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 대한항공에 입사하여 1999년부터 대한항공의 대표이사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2003년 한진그룹 회장에 취임했다. 조양호는 2014년 평창동계올림픽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나, 2016년 한진해운 사태로 인해 사퇴했다. 2019년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대표이사 연임이 부결되어 이사직을 잃었고, 같은 해 4월 8일 폐질환으로 사망했다. 그의 경력 중에는 항공기 리베이트 탈세 혐의, 변칙 증여 사건, 대한항공 브랜드 사용료 논란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는 한진그룹 총수 일가의 논란으로 이어졌다. 조양호는 여러 차례 수상 경력이 있으며, 가족으로는 배우자 이명희와 자녀 조원태, 조현아, 조현민이 있다.
다음 텍스트를 읽고 독자가 처음 접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해줘. 주요 인물, 사건, 배경, 갈등 구조 등을 빠짐없이 담되, 문장은 간결하게 유지해줘.
프라이베르크_전투
https://ko.wikipedia.org/wiki/프라이베르크_전투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프라이베르크 전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프라이베르크 전투</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h colspan="2">프라이베르크 전투</th></tr><tr><td colspan="2"><a>7년 전쟁</a>의 일부</td></tr><tr><td colspan="2"><table><tbody><tr><th>날짜</th><td><a>1762년</a> <a>10월 29일</a></td></tr><tr><th>장소</th><td><span><a>작센</a>의 <a>프라이베르크</a></span></td></tr><tr><th>결과</th><td> 프로이센의 결정적인 승리</td></tr></tbody></table></td></tr><tr><th colspan="2">교전국</th></tr><tr><td> <div><div><a><img></a></div></div><div><a>프로이센 왕국</a></div></td><td> <div><div><a><img></a></div></div><div><a>합스부르크 군주국</a></div></td></tr><tr><th colspan="2">지휘관</th></tr><tr><td> <a>프로이센의 하인리히 공</a></td><td> <a>스톨베르크 공</a></td></tr><tr><th colspan="2">병력</th></tr><tr><td> 22,000-22,657명</td><td> 27,000-31,000명</td></tr><tr><th colspan="2">피해 규모</th></tr><tr><td> 1,400명</td><td> 7,400(4,000명 전사)</td></tr></tbody></table> <div><table><tbody><tr><th colspan="2"><div><ul><li><a><abbr>v</abbr></a></li><li><a><abbr>d</abbr></a></li><li><a><abbr>e</abbr></a></li><li><a><abbr>h</abbr></a></li></ul></div><div><a>7년 전쟁</a>: 유럽 전역</div></th></tr><tr><td colspan="2"><div><a>미노르카</a> – <a>로보지츠</a> – <a>라이헨베르크</a> – <a>프라하</a> – <a>콜린</a> – <a>하스텐벡</a> – <a>그로스-야거스도르프</a> – <a>모이</a> – <a>로스바흐</a> – <a>브레슬라우</a> – <a>로이텐</a> – <a>크레펠트</a> – <a>돔슈테트</a> – <a>조른도르프</a> – <a>생 카스</a> – <a>토르노프</a> – <a>호크키르히</a> – <a>베르겐</a> – <a>케이</a> – <a>민덴</a> – <a>쿠너스도르프</a> – <a>호이어스베르다</a> – <a>막센</a> – <a>마이센</a> – <a>란트슈트</a> – <a>코르바흐</a> – <a>엠스도르프</a> – <a>바르부르크</a> – <a>리그니츠</a> – <a>클로스터 캄펜</a> – <a>토르가우</a> – <a>벨링하우젠</a> – <a>콜베르크</a> – <a>빌헴스타흘</a> – <a>부르케르스도르프</a> – <a>루터베르크</a> – <a>프라이베르크</a></div></td></tr></tbody></table></div> <div><a><img></a> 같은 이름의 다른 전투는 1644년 <a>프라이베르크 전투 (1644년)</a>을 참고 하세요.</div> <p><b>프라이베르크 전투</b>는 <a>1762년</a> <a>10월 29일</a> 벌어진 전투로 <a>7년 전쟁</a>의 주요 전투 중 마지막으로 벌어졌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배경</span></a></li> <li><a><span>2</span> <span>전투</span></a></li> <li><a><span>3</span> <span>결과</span></a></li> <li><a><span>4</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배경</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프리드리히 대왕</a>(Frederick II of Prussia)의 남동생 <a>프로이센의 하인리히 공</a>(Prince Henry of Prussia)은 비록 2진 부대와 비정규 대대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있었지만 <a>안드라스 하디크</a>(András Hadik)가 지휘하는 <a>오스트리아</a>군의 지원을 받고 있는 <a>스톨베르크 공</a>(Prince Stolberg)이 지휘하는 제국군(Reichsarmy)에 대해 공세를 펼치기로 결심하였다.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군은 고지대의 정상에 위치한 보루 뒤로부터 참호를 파기 시작하여 프라이베르크의 서쪽까지 이어나갔다. 이러한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군의 위치는 <a>드레스덴</a>(Dresden)으로 향하는 적의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군의 후방에는 <a>물데 강</a>(River Mulde)이 있었는데, 이 강에 놓여있는 다리를 통해 마을 동쪽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a>10월 28일</a> 하인리히 공과 그의 부관들은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군의 배치를 정찰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러한 프로이센군의 움직임은 고지대 앞에 펼쳐진 숲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경무장 부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의 배치를 묘사한 정확한 그림을 그려 충분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p><p>하인리히는 캄피텔리(Campitelli)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이 고지대에서 마을의 서남쪽으로부터 적이 진군하는 것을 저지하는 동안 제국군은 서쪽으로부터 프라이베르크로 진군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확실할 수 있었다. 하인리히는 또 비록 오스트리아군과 제국군이 전면에 몇 개의 임시 보루와 울타리를 건설하여 방어를 강화하기는 했지만, 제국군이 어떤 '위험한 처지'에 처해 이동함에 따라 오스트리아 - 신성로마제국군의 좌익을 지킬만한 충분한 병력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이는 소규모 분견대를 이용하여 오스트리아군을 서남쪽에 묶어두고 주력군을 이끌고 측면공격을 감행하여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약한 제국군을 격파하는 계획을 세운 하인리히 공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인 타겟이었다. 하인리히는 참호 뒤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메이에르(Meyer)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이 자신들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도박을 하였다. </p> <h2><span></span><span>전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10월 29일</a> 동이 틀 무렵 하인리히 공은 평원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랑 헨네르스도르프(Lang Hennersdorf)의 서쪽으로 향했다. 좀 더 자세히 그 움직임을 설명하면, 포르카데(Forcade)가 예비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하고, 클라이스트(Kleist)는 메이에르를 묶어두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으며, 하인리히 공은 자이드리츠(Seydlitz)와 슈터하임(Stutterheim)과 함께 제국군이 진을 치고 있는 고지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움직일 때, 프로이센군의 선봉부대는 숲에서 오스트리아군 휘하의 크로아티아 부대와 짧은 시간 교전을 하였다. 크로아티아군은 프로이센 본대와 맞서게 되자 곧 퇴각하였다. 그러나 곧 소(小) 슈터하임의 공격은 캄피텔리가 지휘하는 군단의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공격은 지연되었다. 몇몇 프로이센 기병부대의 공격도 오스트리아군과 전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좌익에서 급파된 제국군 여단을 물러나게 하는데 실패하였다. 프로이센군의 주력이 이 위치에서 공격을 계속하는 동안 자이드리츠는 지형이 자신의 기병대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자신의 맡고 있는 부대의 보병대에게 명령하여 캄피텔리의 측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공격이 개시되자 스톨베르크는 트로이즈 크로익스(Trois Croix)라 알려진 낮은 언덕의 방어를 보강하기 위해 부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하인리히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자신이 지휘하는 척탄병들에게 스톨베르크의 본대에 돌격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제국군은 프로이센군에 돌격을 감행하여 비록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났지만, 제국군 척탄병으로 하여금 언덕을 장악할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p><p>결코 무익하게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닌 대(大) 슈터하임은 제국군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하였고,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의 앞에 있는 방어부대가 이 같은 움직임으로 인하여 약화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휘하의 군대에게 즉각적으로 공격을 개시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오스트리아 보병대는 붕괴되었다. 프로이센의 벨링 후사르(The Prussian Belling Hussars)와 KR4는 붕괴된 오스트리아군을 돌파하는 돌격을 감행하였고,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이 분산됨에 따라 프로이센군은 승기를 장악할 수 있었다. 스톨베르크는 동맹군이 퇴각함에 따라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의 측면이 적의 공격에 노출된 것을 깨닫고 즉각적으로 퇴각할 것을 명했다. 제국군이 자신의 위치에서 물러남에 따라 캄피텔리의 나머지 부대도 뒤따라 퇴각을 시작했다. 미리 예고되었듯 메이에르의 부대는 잔여부대를 돕기 위해 자신들의 위치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메이에르는 후에 자신이 맡은 위치를 사수하기 위하여 최후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하였다. 프로이센군은 1,400명을 잃었고,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군은 7,000명의 병력과 9개의 군기, 28문의 포를 상실했다. </p> <h2><span></span><span>결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은 <a>피르나</a>(Pirna)로 물러났고, 프로이센군은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뒤를 따르다가 얼마 안 있어 좀 더 대담하게 추격을 하기 시작했다. 클라이스트는 11월의 첫 주 동안 작센에 있는 오스트리아군의 보급 창고를 공격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작전을 성공시켰다. 그는 또 하인리히 공의 명령에 따라 황제파를 격파하기 위해 오랜 기간 행군하여 프랑코니아(Franconia)에 진입하였다. <a>나움베르크</a>(Naumberg), <a>뷔르츠부르크</a>(Würzburg), <a>레겐스부르크</a>(Regensburg)는 프로이센군에게 점령당했고, 점령군을 지휘하는 하인리히 공으로부터 기부금을 차출당했다. 스톨베르크는 하디크(Hadik)와 함께 귀환하여 고향을 방어하기 위한 무의미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디크는 스톨베르크 몰래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밀사를 보냈고, 이들은 제국군의 해산을 골자로 하는 협상을 체결하였다. </p>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img> 위키미디어 공용에 <span><a>프라이베르크 전투</a></span>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프라이베르크_전투&amp;oldid=22509381</a>"</div> <div><div><a>분류</a>: <ul><li><a>1762년</a></li><li><a>7년 전쟁의 전투</a></li><li><a>오스트리아의 전투</a></li><li><a>프로이센의 전투</a></li><li><a>1762년 분쟁</a></li><li><a>1762년 신성 로마 제국</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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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가 오스트리아군을 이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용한 것은?
소규모 분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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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47
[ "하인리히가 오스트리아군을 이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용한 것은?", "참호 뒤의 오스트리아 군은 누가 지휘하고 있었는가?", "고지대에서 적이 진군하는 것을 저지하는 역할을 했던 오스트리아군을 이끌던 사람의 이름은?", "하인리히가 오스트리아군을 서남쪽에 묶어두고 감행했던 공격은?", "트로이즈 크로익스 언덕을 장악한 병사들은 누구인가?", "스톨베르크 휘하 부대가 방어하려고 했던 지역은 어디인가?", "프로이센군의 선봉부대가 숲에서 교전했던 부대는?", "오스트리아 보병대는 어떤 사람이 지휘하는 군대에 의해 패배했는가?", "오스트리아군을 돌파하는 작전을 시도해 오스트리아 군이 흩어지게 만든 사람은 누구인가?", "프로이센군이 잃은 병력의 수는?",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군이 잃은 병력의 수는?",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의 연합군이 퇴각한 곳은?", "클라이스트가 파견된 목적은 오스트리아군의 무엇을 공격하기 위해서였는가?", "스톨베르크가 모르게 프리디리히 대왕과 비밀 협상을 체결한 사람은 누구인가?",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이 물러난 곳은?", "클라이스트가 하인리히 공의 명령에 따라 오랜 기간 행군하여 진입한 곳은?" ]
<!DOCTYPE html> 프라이베르크 전투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프라이베르크 전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프라이베르크 전투</th></tr><tr><td colspan="2">7년 전쟁의 일부</td></tr><tr><td colspan="2"><table><tbody><tr><th>날짜</th><td>1762년 10월 29일</td></tr><tr><th>장소</th><td>작센의 프라이베르크</td></tr><tr><th>결과</th><td> 프로이센의 결정적인 승리</td></tr></tbody></table></td></tr><tr><th colspan="2">교전국</th></tr><tr><td> 프로이센 왕국</td><td> 합스부르크 군주국</td></tr><tr><th colspan="2">지휘관</th></tr><tr><td>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공</td><td> 스톨베르크 공</td></tr><tr><th colspan="2">병력</th></tr><tr><td> 22,000-22,657명</td><td> 27,000-31,000명</td></tr><tr><th colspan="2">피해 규모</th></tr><tr><td> 1,400명</td><td> 7,400(4,000명 전사)</td></tr></tbody></table> <table><tbody><tr><th colspan="2">vdeh7년 전쟁: 유럽 전역</th></tr><tr><td colspan="2">미노르카 – 로보지츠 – 라이헨베르크 – 프라하 – 콜린 – 하스텐벡 – 그로스-야거스도르프 – 모이 – 로스바흐 – 브레슬라우 – 로이텐 – 크레펠트 – 돔슈테트 – 조른도르프 – 생 카스 – 토르노프 – 호크키르히 – 베르겐 – 케이 – 민덴 – 쿠너스도르프 – 호이어스베르다 – 막센 – 마이센 – 란트슈트 – 코르바흐 – 엠스도르프 – 바르부르크 – 리그니츠 – 클로스터 캄펜 – 토르가우 – 벨링하우젠 – 콜베르크 – 빌헴스타흘 – 부르케르스도르프 – 루터베르크 – 프라이베르크</td></tr></tbody></table> 같은 이름의 다른 전투는 1644년 프라이베르크 전투 (1644년)을 참고 하세요. 프라이베르크 전투는 1762년 10월 29일 벌어진 전투로 7년 전쟁의 주요 전투 중 마지막으로 벌어졌다. 목차 1 배경 2 전투 3 결과 4 외부 링크 배경[편집] 프리드리히 대왕(Frederick II of Prussia)의 남동생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공(Prince Henry of Prussia)은 비록 2진 부대와 비정규 대대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있었지만 안드라스 하디크(András Hadik)가 지휘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지원을 받고 있는 스톨베르크 공(Prince Stolberg)이 지휘하는 제국군(Reichsarmy)에 대해 공세를 펼치기로 결심하였다.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군은 고지대의 정상에 위치한 보루 뒤로부터 참호를 파기 시작하여 프라이베르크의 서쪽까지 이어나갔다. 이러한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군의 위치는 드레스덴(Dresden)으로 향하는 적의 움직임을 봉쇄할 수 있었다.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군의 후방에는 물데 강(River Mulde)이 있었는데, 이 강에 놓여있는 다리를 통해 마을 동쪽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10월 28일 하인리히 공과 그의 부관들은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군의 배치를 정찰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러한 프로이센군의 움직임은 고지대 앞에 펼쳐진 숲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오스트리아군의 경무장 부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그러나 하인리히는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의 배치를 묘사한 정확한 그림을 그려 충분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하인리히는 캄피텔리(Campitelli)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의 주력이 고지대에서 마을의 서남쪽으로부터 적이 진군하는 것을 저지하는 동안 제국군은 서쪽으로부터 프라이베르크로 진군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확실할 수 있었다. 하인리히는 또 비록 오스트리아군과 제국군이 전면에 몇 개의 임시 보루와 울타리를 건설하여 방어를 강화하기는 했지만, 제국군이 어떤 '위험한 처지'에 처해 이동함에 따라 오스트리아 - 신성로마제국군의 좌익을 지킬만한 충분한 병력이 없다는 것을 파악하였다. 이는 소규모 분견대를 이용하여 오스트리아군을 서남쪽에 묶어두고 주력군을 이끌고 측면공격을 감행하여 오스트리아군에 비해 약한 제국군을 격파하는 계획을 세운 하인리히 공에게 너무나도 매력적인 타겟이었다. 하인리히는 참호 뒤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메이에르(Meyer) 휘하의 오스트리아군이 자신들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도박을 하였다. 전투[편집] 10월 29일 동이 틀 무렵 하인리히 공은 평원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랑 헨네르스도르프(Lang Hennersdorf)의 서쪽으로 향했다. 좀 더 자세히 그 움직임을 설명하면, 포르카데(Forcade)가 예비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이동하고, 클라이스트(Kleist)는 메이에르를 묶어두기 위해 남쪽으로 향했으며, 하인리히 공은 자이드리츠(Seydlitz)와 슈터하임(Stutterheim)과 함께 제국군이 진을 치고 있는 고지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움직일 때, 프로이센군의 선봉부대는 숲에서 오스트리아군 휘하의 크로아티아 부대와 짧은 시간 교전을 하였다. 크로아티아군은 프로이센 본대와 맞서게 되자 곧 퇴각하였다. 그러나 곧 소(小) 슈터하임의 공격은 캄피텔리가 지휘하는 군단의 강력한 저항을 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공격은 지연되었다. 몇몇 프로이센 기병부대의 공격도 오스트리아군과 전위를 안정시키기 위해 좌익에서 급파된 제국군 여단을 물러나게 하는데 실패하였다. 프로이센군의 주력이 이 위치에서 공격을 계속하는 동안 자이드리츠는 지형이 자신의 기병대에게 불리하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자신의 맡고 있는 부대의 보병대에게 명령하여 캄피텔리의 측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 공격이 개시되자 스톨베르크는 트로이즈 크로익스(Trois Croix)라 알려진 낮은 언덕의 방어를 보강하기 위해 부대를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하인리히는 지금 돌아가는 상황의 중요성을 인식하였고, 자신이 지휘하는 척탄병들에게 스톨베르크의 본대에 돌격을 하라고 명령하였다. 제국군은 프로이센군에 돌격을 감행하여 비록 많은 피해를 입고 물러났지만, 제국군 척탄병으로 하여금 언덕을 장악할 충분한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결코 무익하게 가만히 있는 사람이 아닌 대(大) 슈터하임은 제국군이 남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발견하였고,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의 앞에 있는 방어부대가 이 같은 움직임으로 인하여 약화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휘하의 군대에게 즉각적으로 공격을 개시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오스트리아 보병대는 붕괴되었다. 프로이센의 벨링 후사르(The Prussian Belling Hussars)와 KR4는 붕괴된 오스트리아군을 돌파하는 돌격을 감행하였고,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이 분산됨에 따라 프로이센군은 승기를 장악할 수 있었다. 스톨베르크는 동맹군이 퇴각함에 따라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의 측면이 적의 공격에 노출된 것을 깨닫고 즉각적으로 퇴각할 것을 명했다. 제국군이 자신의 위치에서 물러남에 따라 캄피텔리의 나머지 부대도 뒤따라 퇴각을 시작했다. 미리 예고되었듯 메이에르의 부대는 잔여부대를 돕기 위해 자신들의 위치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메이에르는 후에 자신이 맡은 위치를 사수하기 위하여 최후까지 싸우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하였다. 프로이센군은 1,400명을 잃었고,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군은 7,000명의 병력과 9개의 군기, 28문의 포를 상실했다. 결과[편집]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은 피르나(Pirna)로 물러났고, 프로이센군은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뒤를 따르다가 얼마 안 있어 좀 더 대담하게 추격을 하기 시작했다. 클라이스트는 11월의 첫 주 동안 작센에 있는 오스트리아군의 보급 창고를 공격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작전을 성공시켰다. 그는 또 하인리히 공의 명령에 따라 황제파를 격파하기 위해 오랜 기간 행군하여 프랑코니아(Franconia)에 진입하였다. 나움베르크(Naumberg), 뷔르츠부르크(Würzburg), 레겐스부르크(Regensburg)는 프로이센군에게 점령당했고, 점령군을 지휘하는 하인리히 공으로부터 기부금을 차출당했다. 스톨베르크는 하디크(Hadik)와 함께 귀환하여 고향을 방어하기 위한 무의미한 노력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디크는 스톨베르크 몰래 프리드리히 대왕에게 밀사를 보냈고, 이들은 제국군의 해산을 골자로 하는 협상을 체결하였다. 외부 링크[편집] 위키미디어 공용에 프라이베르크 전투 관련 미디어 분류가 있습니다.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프라이베르크_전투&amp;oldid=22509381" 분류: 1762년7년 전쟁의 전투오스트리아의 전투프로이센의 전투1762년 분쟁1762년 신성 로마 제국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EnglishEspañolFrançais日本語Norsk nynorskNorskPolskiРусскийTiếng Việt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9월 23일 (일) 01:44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프라이베르크 전투 요약** 1. **배경** - 1762년 10월 28일, 프로이센의 하인리히 공은 오스트리아군과 제국군에 대한 공세를 결심. -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군은 프라이베르크 서쪽 고지대에 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음. - 하인리히 공은 오스트리아군의 배치를 정찰하고, 제국군의 약점을 파악하여 측면 공격 계획을 세움. 2. **전투** - 10월 29일, 하인리히 공은 병력을 집결시키고 공격을 개시. -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과의 초기 교전에서 일부 저항을 받았으나, 하인리히는 공격을 지속. - 대 슈터하임이 오스트리아군의 약점을 발견하고 공격을 개시, 오스트리아군이 붕괴됨. -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을 크게 무찌르고, 전투에서 1,400명의 피해를 입히며 승리. 3. **결과** - 오스트리아-신성로마제국 연합군은 피르나로 퇴각. -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군의 보급 창고를 공격하고, 작센 내 여러 도시를 점령. - 스톨베르크는 고향 방어를 시도했으나, 하디크는 비밀리에 협상을 통해 제국군 해산을 추진. 이 전투는 7년 전쟁의 마지막 주요 전투 중 하나로, 프로이센의 결정적인 승리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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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덕인
https://ko.wikipedia.org/wiki/조덕인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조덕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조덕인</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tbody><tr><th colspan="2">조덕인<br><div>Zhao Deyin (趙德諲)</div></th></tr><tr><th>출생</th> <td> 불명<br>채주(蔡州, 현 <a>허난 성</a> <a>주마뎬 시</a>)</td></tr><tr><th>사망</th> <td> <a>892년</a> <a>2월</a><br>양주(襄州, 현 <a>후베이 성</a> <a>샹양 시</a>)</td></tr><tr><th>사인</th> <td> 병사</td></tr><tr><th>국적</th> <td> <a>중국</a> <a>당나라</a></td></tr><tr><th>민족</th> <td> <a>한족</a></td></tr> <tr><th>경력</th> <td> 신주자사(申州刺史, <a>881년</a>? ~ <a>884년</a>)<br>산남동도 유후(山南東道留後, <a>887년</a>? ~ <a>888년</a>)<br>충의군 절도사(忠義軍節度使, <a>888년</a> ~ <a>892년</a>) <br>중서령(中書令, <a>889년</a> ~ <a>892년</a>)</td></tr><tr><th>직업</th> <td> <a>당나라</a> <a>군벌</a>, 충의군 절도사(忠義軍節度使)</td></tr><tr><th>활동 기간</th> <td> <a>880년</a>? ~ <a>892년</a></td></tr><tr><th>소속</th> <td> <a>진종권</a> → <a>독립</a></td></tr><tr><th>작위</th> <td> 회안왕(淮安王, <a>889년</a> 책봉)</td></tr><tr><th>자녀</th> <td> 4남<br><a>조광응</a>(趙匡凝), <a>조광명</a>(趙匡明)<br>조광번(趙匡璠), 조광린(趙匡璘)</td></tr> </tbody></table> <p><b>조덕인</b>(趙德諲, <b>Zhao Deyin</b>,&#160;? ~ <a>892년</a>)은 <a>중국</a> <a>당나라</a> 말기에 활약했던 <a>군벌</a>이다. 당초에는 <a>황제</a>를 자칭한 <a>진종권</a> 휘하의 무장으로 있었으나, 진종권의 패망이 가까워지자 당나라에 충성을 맹세하였고, 충의군 절도사(忠義軍節度使, 본거지는 현 <a>후베이 성</a> <a>샹양 시</a>)로서 해당 번진(藩鎭)의 지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지배는 사후 그의 아들 <a>조광응</a>에게로 이어졌다. <a>작위</a>는 회안왕(淮安王).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생애</span></a> <ul> <li><a><span>1.1</span> <span>진종권 휘하의 무장으로서</span></a></li> <li><a><span>1.2</span> <span>당나라에 다시 충성을 맹세하다</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출전 및 각주</span></a></li> <li><a><span>3</span> <span>참고 자료</span></a></li> </ul> </div> <h2><span></span><span>생애</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a>진종권</a> 휘하의 무장으로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조덕인은 채주(蔡州, 현 <a>허난 성</a> <a>주마뎬 시</a>) 출신으로, 그의 출생 연도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나중에 그는 <a>당나라</a>의 봉국군 절도사(奉國軍節度使, 본거지는 채주) <a>진종권</a>의 휘하 장수가 되었다. 진종권이 당나라 정부군의 유력 변민군(變民軍) 수령 <a>황소</a>에 대한 작전에 참가했을 때, 조덕인은 전장에서 전과를 거둔 전공으로 신주자사(申州刺史, 현 <a>허난 성</a> <a>신양 시</a>)에 임명되었다.<sup><a>&#91;1&#93;</a></sup> </p><p><a>884년</a> 당시, 진종권을 간단히 굴복시킨 황소는 패망해 버렸다. 그러나 이 무렵, 진종권은 당나라 조정의 배반자가 되어 있었고, 인근 번진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그 해 연말, 진종권과 함께 당나라를 배반한 무장 <a>녹안홍</a>이 산남동도(山南東道, 본거지는 현 <a>후베이 성</a> <a>샹양 시</a>) 번진을 공격해 왔을 무렵, 진종권은 진고(秦誥)와 조덕인을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녹안홍의 군대와 합류하여 공격에 협조하게 하였다. 이들은 함께 산남동도 번진의 본거지인 양주(襄州)를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켜 버렸다. 이에 산남동도 절도사 유거용(劉巨容)은 양주를 버리고 <a>성도</a>로 달아났다. 녹안홍은 이후 동쪽으로 진격하여 충무군(忠武軍, 본거지는 현 <a>허난 성</a> <a>쉬창 시</a>) 번진을 점거하였고, 조덕인으로 하여금 산남동도 번진을 점거하게 하였다.<sup><a>&#91;2&#93;</a></sup> </p><p><a>887년</a>, 진종권은 자신의 본거지인 채주를 <a>수도</a>로 삼아 <a>황제</a>를 자칭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진종권 휘하에 있었던 조덕인은 진종권에 의해 산남동도 유후(留後)로 임명되어 있었다. 그 해 <a>12월 25일</a>, 조덕인은 형남(荊南, 본거지는 현 <a>후베이 성</a> <a>징저우 시</a>) 번진을 공격하여 그곳을 함락시키고, 형남절도사 <a>장괴</a>를 살해하였다. 그는 그 후, 그의 장수 <a>왕건조</a>에게 형남 번진의 수도 강릉현(江陵縣, 현 <a>후베이 성</a> <a>징저우 시</a> <a>장링 현</a>)의 지배를 맡기고 그곳을 떠났다. 전후 강릉에는 수백 가구만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듬해인 <a>888년</a> 4월 말에 당나라 장수 <a>곽우</a>가 강릉을 공격하여 왕건조를 축출하고 형남 번진을 점거하였다.<sup><a>&#91;3&#93;</a></sup> </p> <h3><span></span><span><a>당나라</a>에 다시 충성을 맹세하다</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곽우가 조덕인으로부터 형남 번진을 탈취한 후, 진종권이 최근에 여러 차례 계속해서 당나라의 선무군 절도사(宣武軍節度使, 본거지는 현 <a>허난 성</a> <a>카이펑 시</a>) <a>주전충</a>과의 전투에서 잇달아 패배하자, 진종권의 패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조덕인은 그 해(<a>888년</a>) <a>5월 6일</a>에 그의 번진을 가지고 당나라에 투항하면서, 당시의 당나라 황제인 <a>당 소종</a> 및 주전충과 교섭을 시작하였다. 주전충은 소종에게 조덕인의 투항을 받아들이고 조덕인을 진종권 토벌 작전에서 자신의 부관으로 삼을 것을 제안하였다. 소종은 산남동도 번진에 충의군(忠義軍)의 군호(軍號)를 하사하여 조덕인을 해당 번진의 절도사로 삼는 한편, 채주사면행영부도통(蔡州四面行營副都統)의 직책을 제수하였다. (이때 주전충은 도통(都統)에 제수되었다)<sup><a>&#91;3&#93;</a></sup> </p><p>진종권이 그 자신의 부하 장수의 배반으로 붙잡혀 주전충에게로 압송된 이후(그리고 결국 수도 <a>장안</a>으로 압송되어 이듬해인 <a>889년</a> <a>4월 1일</a>에 처형되었다),<sup><a>&#91;3&#93;</a></sup><sup><a>&#91;4&#93;</a></sup> 조덕인은 중서령(中書令)이라는 명예 <a>재상</a> 직함을 하사받았고, 회안왕(淮安王)에 봉해졌다.<sup><a>&#91;1&#93;</a></sup> 그는 <a>892년</a> <a>2월</a> 중에 사망하였고, 이후 충의군 번진은 그의 아들 <a>조광응</a>에 의해 상속되었다.<sup><a>&#91;5&#93;</a></sup> </p> <h2><span></span><span>출전 및 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ol>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a>신당서</a>》 <a>제186권 - 열전(列傳) 제111권</a></span> </li> <li><span><a>↑</a></span> <span>《<a>자치통감</a>》, <a>제256권</a></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 <sup><a>다</a></sup></span> <span>《<a>자치통감</a>》, <a>제257권</a></span> </li> <li><span><a>↑</a></span> <span>《<a>자치통감</a>》, <a>제258권</a></span> </li> <li><span><a>↑</a></span> <span>《<a>자치통감</a>》, <a>제259권</a></span> </li> </ol></div> <h2><span></span><span>참고 자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신당서</a>》 <a>제186권 - 열전(列傳) 제111권</a></li> <li>《<a>자치통감</a>》 <a>제256권</a>・<a>제257권</a>・<a>제258권</a>・<a>제259권</a></li></ul> <table> <tbody><tr> <td>전임<br><b>산남동도 절도사에서 개칭</b> </td> <td>충의군 절도사<br><a>888년</a> ~ <a>892년</a> </td> <td>후임<br><b><a>조광응</a></b> </td></tr></tbody></table>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조덕인&amp;oldid=24205044</a>"</div> <div><div><a>분류</a>: <ul><li><a>9세기 태어남</a></li><li><a>892년 죽음</a></li><li><a>당나라의 중서령</a></li><li><a>충의군 절도사 (당)</a></li><li><a>허난성 출신</a></li><li><a>당나라의 제후왕 (비황족 계통)</a></li><li><a>진종권의 나라</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English</a></li><li><a>中文</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4:0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진종권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수도로 삼은 곳은?
채주
null
104006
4,916
[ "진종권이 스스로 황제라 칭하며 수도로 삼은 곳은?", "887년 진종권의 휘하에 있던 조덕인의 관직은 무엇이었나?", "888년 4월 말에 강릉을 공격해 왕건조를 축출하고 형남 번진을 점령한 당나라 장수는?", "조덕인이 887년 12월 25일 형남 번진을 공격하여 살해한 사람은?", "조덕인이 형남절도사 장괴를 살해한 후 강릉현의 지배를 맡은 사람은?", "조덕인이 형남절도사를 살해한 뒤 형남 번진의 수도인 강릉현의 지배를 맡긴 장수는?", "조덕인이 당나라에 투항할 때의 당나라 황제는 누구인가?", "당나라 황제에게 조덕인의 투항을 받아들이고 토벌작전에서 자신의 부관으로 삼아줄 것을 제안한 당나라 장수는?", "당나라 황제는 산남동도 번진에 어떤 군호를 하사했나?", "소종이 조덕인에게 제수한 직책은?", "888년 진종권과의 전투에서 잇따른 승리를 거둔 당나라의 절도사는?", "조덕인에게 채주사면행영부도통의 직책을 제수한 당나라의 황제는?" ]
<!DOCTYPE html> 조덕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덕인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tbody><tr><th colspan="2">조덕인Zhao Deyin (趙德諲)</th></tr><tr><th>출생</th> <td> 불명채주(蔡州, 현 허난 성 주마뎬 시)</td></tr><tr><th>사망</th> <td> 892년 2월양주(襄州, 현 후베이 성 샹양 시)</td></tr><tr><th>사인</th> <td> 병사</td></tr><tr><th>국적</th> <td> 중국 당나라</td></tr><tr><th>민족</th> <td> 한족</td></tr> <tr><th>경력</th> <td> 신주자사(申州刺史, 881년? ~ 884년)산남동도 유후(山南東道留後, 887년? ~ 888년)충의군 절도사(忠義軍節度使, 888년 ~ 892년) 중서령(中書令, 889년 ~ 892년)</td></tr><tr><th>직업</th> <td> 당나라 군벌, 충의군 절도사(忠義軍節度使)</td></tr><tr><th>활동 기간</th> <td> 880년? ~ 892년</td></tr><tr><th>소속</th> <td> 진종권 → 독립</td></tr><tr><th>작위</th> <td> 회안왕(淮安王, 889년 책봉)</td></tr><tr><th>자녀</th> <td> 4남조광응(趙匡凝), 조광명(趙匡明)조광번(趙匡璠), 조광린(趙匡璘)</td></tr> </tbody></table> 조덕인(趙德諲, Zhao Deyin, ? ~ 892년)은 중국 당나라 말기에 활약했던 군벌이다. 당초에는 황제를 자칭한 진종권 휘하의 무장으로 있었으나, 진종권의 패망이 가까워지자 당나라에 충성을 맹세하였고, 충의군 절도사(忠義軍節度使, 본거지는 현 후베이 성 샹양 시)로서 해당 번진(藩鎭)의 지배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그 지배는 사후 그의 아들 조광응에게로 이어졌다. 작위는 회안왕(淮安王). 목차 1 생애 1.1 진종권 휘하의 무장으로서 1.2 당나라에 다시 충성을 맹세하다 2 출전 및 각주 3 참고 자료 생애[편집] 진종권 휘하의 무장으로서[편집] 조덕인은 채주(蔡州, 현 허난 성 주마뎬 시) 출신으로, 그의 출생 연도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나중에 그는 당나라의 봉국군 절도사(奉國軍節度使, 본거지는 채주) 진종권의 휘하 장수가 되었다. 진종권이 당나라 정부군의 유력 변민군(變民軍) 수령 황소에 대한 작전에 참가했을 때, 조덕인은 전장에서 전과를 거둔 전공으로 신주자사(申州刺史, 현 허난 성 신양 시)에 임명되었다.[1] 884년 당시, 진종권을 간단히 굴복시킨 황소는 패망해 버렸다. 그러나 이 무렵, 진종권은 당나라 조정의 배반자가 되어 있었고, 인근 번진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그 해 연말, 진종권과 함께 당나라를 배반한 무장 녹안홍이 산남동도(山南東道, 본거지는 현 후베이 성 샹양 시) 번진을 공격해 왔을 무렵, 진종권은 진고(秦誥)와 조덕인을 파견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녹안홍의 군대와 합류하여 공격에 협조하게 하였다. 이들은 함께 산남동도 번진의 본거지인 양주(襄州)를 공격하여 이를 함락시켜 버렸다. 이에 산남동도 절도사 유거용(劉巨容)은 양주를 버리고 성도로 달아났다. 녹안홍은 이후 동쪽으로 진격하여 충무군(忠武軍, 본거지는 현 허난 성 쉬창 시) 번진을 점거하였고, 조덕인으로 하여금 산남동도 번진을 점거하게 하였다.[2] 887년, 진종권은 자신의 본거지인 채주를 수도로 삼아 황제를 자칭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여전히 진종권 휘하에 있었던 조덕인은 진종권에 의해 산남동도 유후(留後)로 임명되어 있었다. 그 해 12월 25일, 조덕인은 형남(荊南, 본거지는 현 후베이 성 징저우 시) 번진을 공격하여 그곳을 함락시키고, 형남절도사 장괴를 살해하였다. 그는 그 후, 그의 장수 왕건조에게 형남 번진의 수도 강릉현(江陵縣, 현 후베이 성 징저우 시 장링 현)의 지배를 맡기고 그곳을 떠났다. 전후 강릉에는 수백 가구만이 남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듬해인 888년 4월 말에 당나라 장수 곽우가 강릉을 공격하여 왕건조를 축출하고 형남 번진을 점거하였다.[3] 당나라에 다시 충성을 맹세하다[편집] 곽우가 조덕인으로부터 형남 번진을 탈취한 후, 진종권이 최근에 여러 차례 계속해서 당나라의 선무군 절도사(宣武軍節度使, 본거지는 현 허난 성 카이펑 시) 주전충과의 전투에서 잇달아 패배하자, 진종권의 패망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조덕인은 그 해(888년) 5월 6일에 그의 번진을 가지고 당나라에 투항하면서, 당시의 당나라 황제인 당 소종 및 주전충과 교섭을 시작하였다. 주전충은 소종에게 조덕인의 투항을 받아들이고 조덕인을 진종권 토벌 작전에서 자신의 부관으로 삼을 것을 제안하였다. 소종은 산남동도 번진에 충의군(忠義軍)의 군호(軍號)를 하사하여 조덕인을 해당 번진의 절도사로 삼는 한편, 채주사면행영부도통(蔡州四面行營副都統)의 직책을 제수하였다. (이때 주전충은 도통(都統)에 제수되었다)[3] 진종권이 그 자신의 부하 장수의 배반으로 붙잡혀 주전충에게로 압송된 이후(그리고 결국 수도 장안으로 압송되어 이듬해인 889년 4월 1일에 처형되었다),[3][4] 조덕인은 중서령(中書令)이라는 명예 재상 직함을 하사받았고, 회안왕(淮安王)에 봉해졌다.[1] 그는 892년 2월 중에 사망하였고, 이후 충의군 번진은 그의 아들 조광응에 의해 상속되었다.[5] 출전 및 각주[편집] ↑ 가 나 《신당서》 제186권 - 열전(列傳) 제111권 ↑ 《자치통감》, 제256권 ↑ 가 나 다 《자치통감》, 제257권 ↑ 《자치통감》, 제258권 ↑ 《자치통감》, 제259권 참고 자료[편집] 《신당서》 제186권 - 열전(列傳) 제111권 《자치통감》 제256권・제257권・제258권・제259권 <table> <tbody><tr> <td>전임산남동도 절도사에서 개칭 </td> <td>충의군 절도사888년 ~ 892년 </td> <td>후임조광응 </td></tr></tbody></table>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조덕인&amp;oldid=24205044" 분류: 9세기 태어남892년 죽음당나라의 중서령충의군 절도사 (당)허난성 출신당나라의 제후왕 (비황족 계통)진종권의 나라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中文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5월 12일 (일) 14:09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 제목: "조덕인: 당나라의 군벌에서 충성의 아이콘으로" ### 요약 본문: 조덕인(趙德諲, Zhao Deyin)은 9세기 중국 당나라 말기에 활동한 군벌로, 그의 생애는 복잡한 정치적 배경 속에서 전개되었습니다. 출생지는 불명이나, 그는 허난 성 채주 출신으로, 진종권 휘하의 장수로서 군사적 전공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진종권의 패망이 가까워지자, 조덕인은 당나라에 충성을 맹세하고 충의군 절도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의 통치 아래에서 충의군은 안정된 지배를 이어갔고, 조덕인의 사후에는 그의 아들 조광응이 그 자리를 이어받았습니다. 조덕인은 892년 사망하였으며, 그의 생애는 당나라의 혼란 속에서 충성과 배신의 상징으로 남아 있습니다. ### 결론 요약: 조덕인의 이야기는 당나라의 군벌 시대를 배경으로 한 충성과 배신의 복잡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그는 진종권의 휘하에서 시작해, 결국 당나라에 충성을 다짐하며 자신의 세력을 확립한 인물로, 그의 후손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이어주었습니다. 조덕인의 생애는 역사 속에서 군벌의 운명과 정치적 선택의 중요성을 일깨워줍니다.
이 글을 기반으로 블로그 요약 포스트를 쓴다고 가정하고, 독자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제목, 요약 본문, 결론 요약까지 작성해줘.
기관_감사_위원회
https://ko.wikipedia.org/wiki/기관_감사_위원회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기관 감사 위원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기관 감사 위원회</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p><b>IRB</b>(IEC, ERB)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a>의학실험</a> 및 행동연구에서 피실험자의 권리와 복지를 보호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구성되는 위원회이다. 미국에서는 <a>식품의약국</a>(FDA)과 보건후생성(DHHS)에서 IRB가 연구 계획을 승인, 수정,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IRB는 과학, 윤리분야 등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대해 심의를 맡고 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미국 법령</span></a> <ul> <li><a><span>1.1</span> <span>예외</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조직과 명칭</span></a></li> <li><a><span>3</span> <span>목적과 효용</span></a></li> <li><a><span>4</span> <span>책임</span></a></li> <li><a><span>5</span> <span>사회과학과 IRB의 문제</span></a></li> <li><a><span>6</span> <span>인용</span></a></li> <li><a><span>7</span> <span>외부 링크</span></a></li> </ul> </div> <h2><span></span><span>미국 법령</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미국 IRB는 미국연방규정집(CFR) 45조(title) 46항(part)을 따른다. 이 규정은 IRB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지금은 보건사회복지부(HHS)로 바뀐 교육보건성(DHEW)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는 모든 연구에 대한 심의를 하도록 하는 것 등을 결의한 1974 국가연구법을 이행하게 한다. IRB는 HHS 산하 임상연구안전국(OHRP)의 규제를 받고 있다. IRB는 20세기 초 임상피해사례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 방편으로 발족되었다. 이러한 임상피해사례 중 악명 높은 두 사례가 2차 대전 이후 의사 재판에서 조명된 나치내과의사실험과 1932년부터 1972년 사이 미국 앨라배마 지방에 거주하는 흑인을 대상으로 미 공중위생국이 행한 터스키지매독연구이다. CFR 21조 56항은 IRB에 신약개발국이 관여하는 신약임상실험 감독을 명하는 추가 조항을 명시하고 있다. </p> <h3><span></span><span>예외</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IRB는 규정 내에서 운신의 폭이 자유로운데, 피실험자가 다음 범주에 한 가지 이상이라도 속할 경우 해당 연구 활동에 대해 IRB의 감독을 면제받을 수 있다. </p> <ol><li>일반적인 교육활동 등 공인된 교육 환경에서 이행되는 연구. <ol><li>정기교수전략과 특별교수전략에 관한 연구</li> <li>효율적인 교수기법, 커리큘럼, 교실운영에 관한 비교연구.</li></ol></li> <li>교육적 검사(인지검사, 진단검사, 태도검사, 성취도평가 등), 설문, 인터뷰, 혹은 공적 활동에 대한 관찰 등의 연구. 단 다음의 경우 면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ol><li>획득된 정보가 어떤 형태로든 기록으로 남아 직간접적으로 피실험자의 신원이 식별될 수 있는 경우</li> <li>실험 외적인 피실험자의 반응에 대한 공개는 피실험자를 범죄 등의 위험에 노출되게 하거나 피실험자의 재산, 고용, 명성 등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li></ol></li> <li>교육적 검사(인지검사, 진단검사, 태도검사, 성취도평가 등), 설문, 인터뷰, 혹은 공적 활동에 대한 관찰 등의 연구에서 면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라도 다음의 조건 하에서는 IRB의 감독을 면제 받을 수 있다. <ol><li>피실험자가 당선되거나 지명된 공직자이거나 공직 후보자일 경우;</li> <li>연방법은 예외 없이 연구 중 혹은 이후 개인식별정보에 대한 기밀 유지를 요구한다.</li></ol></li> <li>수집된 자료나 기존 데이터, 문서, 기록, 병리학 표본, 진단 표본 등을 조사 대상으로 하는 연구. 단 일반 대중이 접근 가능한 자료여야 하며 피실험자가 직간접적으로 식별될 수 없도록 기록된 정보여야 한다.</li> <li>정부기관이 주도하거나 승인하는 연구와 시범사업. 또한 다음에 대한 평가, 조사를 위해 설계된 연구나 시범사업 <ol><li>공익, 공공 사업 평가</li> <li>공익, 공공 사업 획득 과정 조사</li> <li>위 사업에 대한 변화, 또는 대안 평가</li> <li>위 사업의 방법, 자금 수준에 대한 변화, 또는 대안 평가.</li></ol></li> <li>식품 시식 및 품평, 선호도에 대한 연구에서 (i)식품첨가물이 함유되지 않은 건강 식품이나 (ii)식품의약국이나 환경보호국 또는 농무부의 식품안전조사국의 승인을 받아 화학 첨가물의 수치가 충분히 낮은 것으로 판단될 경우</li></ol> <h2><span></span><span>조직과 명칭</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IRB가 FDA와 HHS에 의해 사용되는 일반적인 명칭임에도, IRB를 조직하는 집단은 이와 다른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 단 어떤 이름을 사용하든 FDA의 규제 대상이 되는 상품과 관련 연구는 FDA의 IRB 규제안을 따라야 한다. </p><p>원래, IRB는 학술기관과 의료기관 등 기관 내에서 윤리 문제 최소화를 위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를 관찰하려는 모임이었다. </p><p>오늘날 IRB 역할은 IRB 업무를 통해 소득을 얻는 상업적 집단이 수행한다. 이들은 독립 IRB(independent IRB) 혹은 상업적 IRB(commercial IRB)라고 불린다. 이러한 IRB들은 검열 대상이 되는 학술 의료 기관과 독립적이어야 하며 종전의 IRB와 같은 행정적 규제를 받아야 한다. 이에 대한 FDA의 요구는 21 CFR 56.107.에 기록되어 있다. (a)1 IRB는 최소 5명 이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a)2 구성원은 충분한 경험, 전문성, 연구가 윤리적이며 고지에 입각한 동의가 충분한 수준인지, 적절한 보호장치가 있는지에 대한 유효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정도의 포괄성을 지녀야 한다. (a)3 만약 IRB가 상처입기 쉬운 집단을 포함하는 연구와 관련해 일하고 있다면, IRB는 이 그룹을 익히 알고 있는 구성원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따라서 IRB가 수감자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를 실시할 때 수감자들을 대변하는 이를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b)1IRB는 반드시 성별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닌 한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포함시켜야 한다. (b)2IRB 모든 구성원이 같은 직종에 종사해서는 안된다. (c)IRB는 최소 한 명의 과학자와 한 명의 비과학자를 포함해야 한다. 이러한 용어는 규제목록에 정의되어 있지 않다. (d)IRB는 대상 기관과 관련되지 않은 사람 또는 대상 기관과 관련된 사람의 직계 가족이 아닌 사람을 한 명 이상 포함해야 한다. (e)IRB 구성원은 검열 대상 프로젝트에 지지를 표명할 수 없다. (f)IRB는 전문성과 다양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논의에 조언자를 포함시킬 수 있다. </p><p>제안서에 투표하기 위해서는, IRB 구성원의 반 이상이 참석해야 하며 비과학자 구성원이 반드시 자리해야 한다. 신속함이 요구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예외를 두어 IRB장이나 지명된 구성원 한 명의 판단을 따를 수 있으나 비교적 드문 경우이다. </p> <h2><span></span><span>목적과 효용</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IRB는 주로 건강관련 분야와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사회과학 분야에서 활용된다. 이러한 연구들은 대체로 신약, 새로운 고안물에 대한 임상실험이나 개인사회적 행동, 의견, 태도에 대한 연구, 혹은 어떻게 건강관리가 이루어지며 개선될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 등이다. </p><p>IRB의 목적은 선행된, 주기적 검토를 통해 인간대상연구에서 인간의 권리와 복지를 보호하기 위한 절차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IRB는 연구 원안을 검토하고 관련 자료를 검토한다. 모든 IRB 원안 검토의 주요 목적은 연구와 연구 방법론의 윤리성을 평가하고, 피실험자로 선정되어 참여여부를 결정하려는 대상에 완전한 정보 제공을 통한 자발적인 참여를 권장하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피실험자의 안전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이다. </p> <h2><span></span><span>책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ICP-GCP에 따르면 IRB/IEC는 피실험자의 권리, 안전, 복지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임신한 여성이나, 유아, 수감자, 노인 등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일 경우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인간 피험자 보호에 대한 주요 윤리원칙은 벨몬트 의정서에 요약되어 있으며 인간에 대한 존중, 선, 정의를 포함한다. IRB는 오직 고지에 입각한 동의 절차를 거친 경우, 피험자에 미칠 수 있는 위험이 사회에 대한 잠지적 효용과 균형이 맞을 경우, 피험자의 선정에서 위험과 효용을 볼 수 있는 대상의 분포가 공정할 경우에만 연구를 허가한다. </p><p>IRB/IEC는 반드시 다음의 서류를 제시해야 한다. 실험 원안/수정안, 고지에 입각한 동의서 형식과 실험에서 사용하기 위해 조사자가 실제로 사용한 동의서 형식, 피실험자 모집 절차(광고 등), 피실험자에게 제공된 서류 형태의 정보, 조사자의 팸플릿(IB), 안전 정보, 피실험자에게 제공된 보상에 대한 정보, 조사자의 이력서와 자격 증명 서류, 이 밖에 IRB/IEC가 책무 수행에 필요한 기타 자료. </p><p>IRB/IEC는 적절한 기한 내에 임상실험에 대해 검토하고 이에 대한 견해를 문서 형태로 제시해야 한다. 임상실험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며, </p><p>허가/호의적임 허가/호의 이전에 수정이 필요함 불허/부정적임 허가/호의적 견해의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재심의 여지가 없음 </p><p>ICH-GCP에 따르면 IRB/IEC는 최근 약력과 IRB/IEC가 요구하는 다른 관련서류를 참고하여 실험에 대한 심의를 신청하는 연구자의 자질을 고려해야 한다. </p><p>ICH-GCP에 따르면 IRB/IEC는 적어도 1년에 한 번 이상, 피실험자에 대한 위험 수준을 고려하여 적절한 간격을 두고, 진행 중인 실험에 대한 지속적인 검토를 해야 한다. </p><p>IRB/IEC는 피실험자의 권리 보호에 의미 있는 정보라고 판단될 경우 IRB/IEC판단기준 4.8.10에 수록된 정보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 있다. 비치료적 실험이 피실험자의 법적 대리인의 동의 아래 진행될 경우 IRB/IEC는 제시된 원안과 기타 서류에서 적절하게 윤리적 우려를 다루고 있는지 이러한 실험에 대한 규제요건을 만족시키는지 판단해야 한다. 피실험자와 법적 대리인의 사전 동의가 불가능한 경우(4.8.15), 제시된 원안과 서류를 검토하여 관련 윤리 조항과 규정에 부합하는지 판단한다.(예/응급상황 등) IRB/IEC는 강제력이나 여타 영향력이 행사되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보상의 양과 방법을 검토한다. 보상은 피실험자의 참여 양에 비례하며 실험완료 여부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p><p>ICH GCP에 따르면 IRB/IEC는 보상 관련 정보(보상 방법, 보상의 양, 보상 일자 등)가 문서 형식의 동의서에 명시되어 있고 피실험자에게 전달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일의 양에 비례하여 어느 정도의 보상이 이루어졌는지는 자세히 명기되어야 한다. </p> <h2><span></span><span>사회과학과 IRB의 문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연방의 규제와 벨몬트 원칙이 생명과학과 사회과학에 작용하고 있지만 강제력 있는 규제, 규제의 기준에 해당하는 역사 속의 예시, 광범위한 문서 지침 등은 주로 생명과학연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p><p>IRB의 규제 요건이 사회과학연구와 맞지 않는다는 연구자들의 비판이 많다. IRB의 정통성에서부터 IRB에서 지칭하는 위험이라는 개념이 사회과학에 적용 가능한가, 그리고 참여자에게 문서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 등이다. 이러한 비판은 기본적으로 IRB가 사회과학을 잘못 이해하며 규정에 유연성을 두는데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사회과학자들은 다분히 생명과학 중심적인 IRB가 사회과학 방법론을 적절히 이해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해왔다. 2003년 OHRP는 구술역사협회와 미국역사협회와 연합하여 구술역사를 다루는 일과 비정형화된 인터뷰, 일화 수집, 자유로운 언론 활동 등이 IRB의 규정대로 인간대상연구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며 임상실험관련 규정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공식 성명을 냈다. </p><p>사회과학 측을 지지하는 다른 연방 기관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새로운 지침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일반적으로, FAQ는 IRB에 피해를 줄이고 고지된 동의를 극대화 하되, 효용을 지니는 연구에 대해 관료적 제한을 최소화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p> <h2><span></span><span>인용</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p><a>[1]</a> Thaddeus Mason Pope, "Multi-Institutional Healthcare Ethics Committees: The Procedurally Fair Internal Dispute Resolution Mechanism," 31 Campbell Law Review 257-331 (2009). </p> <h2><span></span><span>외부 링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Office for Human Research Protections (OHRP)(HHS)</a></li> <li><a>ICH Website</a></li> <li><a>FDA Website</a></li> <li><a>Institutional Review Board Services Website</a></li> <li><a><i>IRB: Ethics &amp; Human Research</i></a> – a peer-reviewed journal of The Hastings Center</li> <li><a><i>Drug Industry Human Testing Masks Death, Injury, Compliant FDA</i></a>, Bloomberg News Special Report, November 2, 2005</li> <li><a><i> Ethics for Sale: For-profit ethical review, coming to a clinical trial near you</i></a>, Carl Elliott and Trudo Lemmens, Slate, December 13, 2005</li> <li><a>Compass IRB</a></li> <li><a>Seattle Children's Hospital IRB</a></li></ul>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기관_감사_위원회&amp;oldid=23990362</a>"</div> <div><div><a>분류</a>: <ul><li><a>실험 설계</a></li><li><a>의료 윤리</a></li><li><a>약리학</a></li><li><a>사회과학</a></li><li><a>응용 윤리학</a></li><li><a>의약품 안전</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English</a></li><li><a>Français</a></li><li><a>Polski</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9년 4월 8일 (월) 12: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21 CFR 56.107.에 기록된 IRB의 최소 구성 인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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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CFR 56.107.에 기록된 IRB의 최소 구성 인원은?", "FDA의 요구에 따르면 IRB구성원이 지지를 표명할 수 없는 것은?", "IRB는 최소 몇명 이상으로 구성되어야 하는가?", "오늘날 IRB 역할을 수행하는 집단은?", "상업적 IRB와 같은 의미로 불리는 말은?", "IRB 구성원의 최소 인원 수는 몇 명인가?", "IRB 구성원이 지지를 표명해서는 안되는 사안은?", "IRB/IEC가 강제력이나 여타 영향력이 행사되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검토하는 것은?", "피실험자와 법적 대리인의 사전 동의가 불가능한 경우 IRB/IEC가 검토해야 하는 것은?", "강제력이나 다른 영향력이 행사 되었는지 아닌지 판단하기 위해 보상의 양과 방법을 검토하는 것은?", "보상이 주어질 때 비례하는 피실험자의 참여 양과 달리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것은?", "보상이 주어질 때 보상의 정도와 비례하는 것은?", "IRB/IEC는 비치료적 실험에서 어떤 우려를 다루고 있는지 살펴야 하는가?", "IRB/IEC가 실험 보상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지표는?", "OHRP와 연합하여 2003년 공식 성명을 낸 단체는?", "IRB가 사회과학 방법론을 적절히 이해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한 사람들은?", "사회과학들이 IRB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 "OHRP가 IRB에 대한 공식 성명을 발표한 년도는?", "2003년 IRB와 관련된 공식 성명을 낸 기관은?", "IRB가 무엇과 맞지 않는다는 연구자들의 비판이 있는가?", "2003년 IRB의 인간대상연구에 대한 규제에 비판 성명을 냈던 조직은?" ]
<!DOCTYPE html> 기관 감사 위원회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기관 감사 위원회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IRB(IEC, ERB)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의학실험 및 행동연구에서 피실험자의 권리와 복지를 보호하기 위해 공식적으로 구성되는 위원회이다. 미국에서는 식품의약국(FDA)과 보건후생성(DHHS)에서 IRB가 연구 계획을 승인, 수정, 거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IRB는 과학, 윤리분야 등에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대해 심의를 맡고 있다. 목차 1 미국 법령 1.1 예외 2 조직과 명칭 3 목적과 효용 4 책임 5 사회과학과 IRB의 문제 6 인용 7 외부 링크 미국 법령[편집] 미국 IRB는 미국연방규정집(CFR) 45조(title) 46항(part)을 따른다. 이 규정은 IRB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지금은 보건사회복지부(HHS)로 바뀐 교육보건성(DHEW)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는 모든 연구에 대한 심의를 하도록 하는 것 등을 결의한 1974 국가연구법을 이행하게 한다. IRB는 HHS 산하 임상연구안전국(OHRP)의 규제를 받고 있다. IRB는 20세기 초 임상피해사례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 방편으로 발족되었다. 이러한 임상피해사례 중 악명 높은 두 사례가 2차 대전 이후 의사 재판에서 조명된 나치내과의사실험과 1932년부터 1972년 사이 미국 앨라배마 지방에 거주하는 흑인을 대상으로 미 공중위생국이 행한 터스키지매독연구이다. CFR 21조 56항은 IRB에 신약개발국이 관여하는 신약임상실험 감독을 명하는 추가 조항을 명시하고 있다. 예외[편집] IRB는 규정 내에서 운신의 폭이 자유로운데, 피실험자가 다음 범주에 한 가지 이상이라도 속할 경우 해당 연구 활동에 대해 IRB의 감독을 면제받을 수 있다. 일반적인 교육활동 등 공인된 교육 환경에서 이행되는 연구. 정기교수전략과 특별교수전략에 관한 연구 효율적인 교수기법, 커리큘럼, 교실운영에 관한 비교연구. 교육적 검사(인지검사, 진단검사, 태도검사, 성취도평가 등), 설문, 인터뷰, 혹은 공적 활동에 대한 관찰 등의 연구. 단 다음의 경우 면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획득된 정보가 어떤 형태로든 기록으로 남아 직간접적으로 피실험자의 신원이 식별될 수 있는 경우 실험 외적인 피실험자의 반응에 대한 공개는 피실험자를 범죄 등의 위험에 노출되게 하거나 피실험자의 재산, 고용, 명성 등에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교육적 검사(인지검사, 진단검사, 태도검사, 성취도평가 등), 설문, 인터뷰, 혹은 공적 활동에 대한 관찰 등의 연구에서 면제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 경우라도 다음의 조건 하에서는 IRB의 감독을 면제 받을 수 있다. 피실험자가 당선되거나 지명된 공직자이거나 공직 후보자일 경우; 연방법은 예외 없이 연구 중 혹은 이후 개인식별정보에 대한 기밀 유지를 요구한다. 수집된 자료나 기존 데이터, 문서, 기록, 병리학 표본, 진단 표본 등을 조사 대상으로 하는 연구. 단 일반 대중이 접근 가능한 자료여야 하며 피실험자가 직간접적으로 식별될 수 없도록 기록된 정보여야 한다. 정부기관이 주도하거나 승인하는 연구와 시범사업. 또한 다음에 대한 평가, 조사를 위해 설계된 연구나 시범사업 공익, 공공 사업 평가 공익, 공공 사업 획득 과정 조사 위 사업에 대한 변화, 또는 대안 평가 위 사업의 방법, 자금 수준에 대한 변화, 또는 대안 평가. 식품 시식 및 품평, 선호도에 대한 연구에서 (i)식품첨가물이 함유되지 않은 건강 식품이나 (ii)식품의약국이나 환경보호국 또는 농무부의 식품안전조사국의 승인을 받아 화학 첨가물의 수치가 충분히 낮은 것으로 판단될 경우 조직과 명칭[편집] IRB가 FDA와 HHS에 의해 사용되는 일반적인 명칭임에도, IRB를 조직하는 집단은 이와 다른 명칭을 사용할 수 있다. 단 어떤 이름을 사용하든 FDA의 규제 대상이 되는 상품과 관련 연구는 FDA의 IRB 규제안을 따라야 한다. 원래, IRB는 학술기관과 의료기관 등 기관 내에서 윤리 문제 최소화를 위해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를 관찰하려는 모임이었다. 오늘날 IRB 역할은 IRB 업무를 통해 소득을 얻는 상업적 집단이 수행한다. 이들은 독립 IRB(independent IRB) 혹은 상업적 IRB(commercial IRB)라고 불린다. 이러한 IRB들은 검열 대상이 되는 학술 의료 기관과 독립적이어야 하며 종전의 IRB와 같은 행정적 규제를 받아야 한다. 이에 대한 FDA의 요구는 21 CFR 56.107.에 기록되어 있다. (a)1 IRB는 최소 5명 이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a)2 구성원은 충분한 경험, 전문성, 연구가 윤리적이며 고지에 입각한 동의가 충분한 수준인지, 적절한 보호장치가 있는지에 대한 유효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정도의 포괄성을 지녀야 한다. (a)3 만약 IRB가 상처입기 쉬운 집단을 포함하는 연구와 관련해 일하고 있다면, IRB는 이 그룹을 익히 알고 있는 구성원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따라서 IRB가 수감자를 대상으로 하는 연구를 실시할 때 수감자들을 대변하는 이를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b)1IRB는 반드시 성별 때문에 선택된 것이 아닌 한 남자와 여자를 동시에 포함시켜야 한다. (b)2IRB 모든 구성원이 같은 직종에 종사해서는 안된다. (c)IRB는 최소 한 명의 과학자와 한 명의 비과학자를 포함해야 한다. 이러한 용어는 규제목록에 정의되어 있지 않다. (d)IRB는 대상 기관과 관련되지 않은 사람 또는 대상 기관과 관련된 사람의 직계 가족이 아닌 사람을 한 명 이상 포함해야 한다. (e)IRB 구성원은 검열 대상 프로젝트에 지지를 표명할 수 없다. (f)IRB는 전문성과 다양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논의에 조언자를 포함시킬 수 있다. 제안서에 투표하기 위해서는, IRB 구성원의 반 이상이 참석해야 하며 비과학자 구성원이 반드시 자리해야 한다. 신속함이 요구되는 사안에 대해서는 예외를 두어 IRB장이나 지명된 구성원 한 명의 판단을 따를 수 있으나 비교적 드문 경우이다. 목적과 효용[편집] IRB는 주로 건강관련 분야와 인류학, 심리학, 사회학 등의 사회과학 분야에서 활용된다. 이러한 연구들은 대체로 신약, 새로운 고안물에 대한 임상실험이나 개인사회적 행동, 의견, 태도에 대한 연구, 혹은 어떻게 건강관리가 이루어지며 개선될 수 있는가에 대한 연구 등이다. IRB의 목적은 선행된, 주기적 검토를 통해 인간대상연구에서 인간의 권리와 복지를 보호하기 위한 절차를 공고히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IRB는 연구 원안을 검토하고 관련 자료를 검토한다. 모든 IRB 원안 검토의 주요 목적은 연구와 연구 방법론의 윤리성을 평가하고, 피실험자로 선정되어 참여여부를 결정하려는 대상에 완전한 정보 제공을 통한 자발적인 참여를 권장하며,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피실험자의 안전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이다. 책임[편집] ICP-GCP에 따르면 IRB/IEC는 피실험자의 권리, 안전, 복지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임신한 여성이나, 유아, 수감자, 노인 등 약자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일 경우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인간 피험자 보호에 대한 주요 윤리원칙은 벨몬트 의정서에 요약되어 있으며 인간에 대한 존중, 선, 정의를 포함한다. IRB는 오직 고지에 입각한 동의 절차를 거친 경우, 피험자에 미칠 수 있는 위험이 사회에 대한 잠지적 효용과 균형이 맞을 경우, 피험자의 선정에서 위험과 효용을 볼 수 있는 대상의 분포가 공정할 경우에만 연구를 허가한다. IRB/IEC는 반드시 다음의 서류를 제시해야 한다. 실험 원안/수정안, 고지에 입각한 동의서 형식과 실험에서 사용하기 위해 조사자가 실제로 사용한 동의서 형식, 피실험자 모집 절차(광고 등), 피실험자에게 제공된 서류 형태의 정보, 조사자의 팸플릿(IB), 안전 정보, 피실험자에게 제공된 보상에 대한 정보, 조사자의 이력서와 자격 증명 서류, 이 밖에 IRB/IEC가 책무 수행에 필요한 기타 자료. IRB/IEC는 적절한 기한 내에 임상실험에 대해 검토하고 이에 대한 견해를 문서 형태로 제시해야 한다. 임상실험에 대해 정확하게 파악해야 하며, 허가/호의적임 허가/호의 이전에 수정이 필요함 불허/부정적임 허가/호의적 견해의 가능성이 전혀 없으며 재심의 여지가 없음 ICH-GCP에 따르면 IRB/IEC는 최근 약력과 IRB/IEC가 요구하는 다른 관련서류를 참고하여 실험에 대한 심의를 신청하는 연구자의 자질을 고려해야 한다. ICH-GCP에 따르면 IRB/IEC는 적어도 1년에 한 번 이상, 피실험자에 대한 위험 수준을 고려하여 적절한 간격을 두고, 진행 중인 실험에 대한 지속적인 검토를 해야 한다. IRB/IEC는 피실험자의 권리 보호에 의미 있는 정보라고 판단될 경우 IRB/IEC판단기준 4.8.10에 수록된 정보 이상의 것을 요구할 수 있다. 비치료적 실험이 피실험자의 법적 대리인의 동의 아래 진행될 경우 IRB/IEC는 제시된 원안과 기타 서류에서 적절하게 윤리적 우려를 다루고 있는지 이러한 실험에 대한 규제요건을 만족시키는지 판단해야 한다. 피실험자와 법적 대리인의 사전 동의가 불가능한 경우(4.8.15), 제시된 원안과 서류를 검토하여 관련 윤리 조항과 규정에 부합하는지 판단한다.(예/응급상황 등) IRB/IEC는 강제력이나 여타 영향력이 행사되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보상의 양과 방법을 검토한다. 보상은 피실험자의 참여 양에 비례하며 실험완료 여부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는다. ICH GCP에 따르면 IRB/IEC는 보상 관련 정보(보상 방법, 보상의 양, 보상 일자 등)가 문서 형식의 동의서에 명시되어 있고 피실험자에게 전달되었는지 확인해야 한다. 일의 양에 비례하여 어느 정도의 보상이 이루어졌는지는 자세히 명기되어야 한다. 사회과학과 IRB의 문제[편집] 연방의 규제와 벨몬트 원칙이 생명과학과 사회과학에 작용하고 있지만 강제력 있는 규제, 규제의 기준에 해당하는 역사 속의 예시, 광범위한 문서 지침 등은 주로 생명과학연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IRB의 규제 요건이 사회과학연구와 맞지 않는다는 연구자들의 비판이 많다. IRB의 정통성에서부터 IRB에서 지칭하는 위험이라는 개념이 사회과학에 적용 가능한가, 그리고 참여자에게 문서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는 조건 등이다. 이러한 비판은 기본적으로 IRB가 사회과학을 잘못 이해하며 규정에 유연성을 두는데 성공적이지 못하다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사회과학자들은 다분히 생명과학 중심적인 IRB가 사회과학 방법론을 적절히 이해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해왔다. 2003년 OHRP는 구술역사협회와 미국역사협회와 연합하여 구술역사를 다루는 일과 비정형화된 인터뷰, 일화 수집, 자유로운 언론 활동 등이 IRB의 규정대로 인간대상연구에 포함되는 것이 아니며 임상실험관련 규정을 따를 필요가 없다는 공식 성명을 냈다. 사회과학 측을 지지하는 다른 연방 기관은 이러한 부분에 대한 새로운 지침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일반적으로, FAQ는 IRB에 피해를 줄이고 고지된 동의를 극대화 하되, 효용을 지니는 연구에 대해 관료적 제한을 최소화 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인용[편집] [1] Thaddeus Mason Pope, "Multi-Institutional Healthcare Ethics Committees: The Procedurally Fair Internal Dispute Resolution Mechanism," 31 Campbell Law Review 257-331 (2009). 외부 링크[편집] Office for Human Research Protections (OHRP)(HHS) ICH Website FDA Website Institutional Review Board Services Website IRB: Ethics &amp; Human Research – a peer-reviewed journal of The Hastings Center Drug Industry Human Testing Masks Death, Injury, Compliant FDA, Bloomberg News Special Report, November 2, 2005 Ethics for Sale: For-profit ethical review, coming to a clinical trial near you, Carl Elliott and Trudo Lemmens, Slate, December 13, 2005 Compass IRB Seattle Children's Hospital IRB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기관_감사_위원회&amp;oldid=23990362" 분류: 실험 설계의료 윤리약리학사회과학응용 윤리학의약품 안전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FrançaisPolski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9년 4월 8일 (월) 12:56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기관 감사 위원회(IRB) 요약** **주요 인물 및 기관**: IRB는 미국의 식품의약국(FDA)과 보건후생성(DHHS) 산하의 기관으로,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의 윤리성을 심의하고 피실험자의 권리와 복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배경**: IRB는 20세기 초 임상 피해 사례에 대한 대응으로 설립되었으며, 특히 나치 의사 실험과 터스키지 매독 연구와 같은 역사적 사건이 그 필요성을 강조했다. 미국 연방규정집(CFR) 45조 46항에 따라 운영된다. **목적과 효용**: IRB의 주된 목적은 인간대상 연구의 윤리성을 평가하고, 피실험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여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며, 연구의 안전성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주로 건강 관련 연구와 사회과학 분야에서 활용된다. **갈등 구조**: IRB는 생명과학 연구에 중점을 두고 있어 사회과학 연구자들로부터 비판을 받고 있다. 연구자들은 IRB의 규제가 사회과학 연구에 적합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문서 동의서 요구와 위험 개념의 적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책임**: IRB는 피실험자의 권리와 안전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며, 특히 취약한 집단(임신한 여성, 유아, 수감자 등)에 대한 연구에서는 더욱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연구자는 IRB에 실험 계획서, 동의서, 피실험자 모집 절차 등의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예외 사항**: 특정 교육 활동이나 정부 주도의 연구 등은 IRB의 감독을 면제받을 수 있다. IRB는 연구의 윤리적 기준을 유지하며, 인간의 권리와 복지를 보호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검토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다음 텍스트를 읽고 독자가 처음 접해도 이해할 수 있도록 요약해줘. 주요 인물, 사건, 배경, 갈등 구조 등을 빠짐없이 담되, 문장은 간결하게 유지해줘.
오토모씨_(신별)
https://ko.wikipedia.org/wiki/오토모씨_(신별)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오토모씨 (신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오토모씨 (신별)</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table> <tbody><tr> <td colspan="2"> <div><div><img></div><span><big><big><b>오오토모 씨</b></big></big></span></div> </td></tr> <tr> <td colspan="2"><a><img></a> </td></tr> <tr> <th><span>한자 </span> </th> <td>大伴氏 </td></tr> <tr> <th><span>가나 </span> </th> <td>おおともうじ </td></tr> <tr> <th><span><a>씨</a><a>성</a>(氏姓) </span> </th> <td>오토모 <a>무라지</a> </td></tr> <tr> <th><span>시조(始祖) </span> </th> <td><a>미치노 오미노 미코토</a> </td></tr> <tr> <th><span>종별(種別) </span> </th> <td><a>신별</a>(<a>천신</a>) </td></tr> <tr> <th><span>출신 저명인물 </span> </th> <td><a>오토모노 가나무라</a><br><a>오토모노 마쿠타</a><br><a>오토모노 후케이</a><br><a>오토모노 야스마로</a><br><a>오토모노 다비토</a><br><a>오토모노 야카모치</a><br><a>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a><br><a>오토모노 코마로</a><br><a>오토모노 오토마로</a><br><a>토모노 요시로</a> </td></tr> <tr> <td colspan="2"><a>범례</a> - <a>분류:일본의 씨족</a> </td></tr> </tbody></table> <p><b>오토모 씨</b>(<span><a>일본어</a>&#58; </span><span><style>.mw-parser-output ruby>rt,.mw-parser-output ruby>rtc{font-feature-settings:"ruby"1}.mw-parser-output ruby.large{font-size:250%}.mw-parser-output ruby.large>rt,.mw-parser-output ruby.large>rtc{font-size:.3em}</style><span><ruby><rb>大伴</rb><rp> (</rp><rt>おおとも</rt><rp>)</rp></ruby></span><link><span><ruby><rb>氏</rb><rp> (</rp><rt>うじ</rt><rp>)</rp></ruby></span></span>&#32;<small>오오토모우지<sup>&#91;<a>*</a>&#93;</sup></small>)는 "오토모(大伴)"을 <a>씨</a>로 삼는 씨족이다. <a>헤이안 시대</a> 초기에 <a>준나 천황</a>을 피휘하여 <b>토모 씨</b>(伴氏)로 개칭했다. <a>성</a>은 <a>무라지</a>이고, <a>팔색성</a>제가 제정된 뒤에는 <a>스쿠네</a>,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에는 <a>아손</a>이다. </p><p><a>천손강림</a> 때 선도한 <a>아마노 오시히</a>의 자손인 <a>천신</a>계 씨족으로, <a>사에키 씨</a>와는 동족 관계이다. 일반적으로 사에키 씨를 오토모 씨의 분가로 보지만 그 반대 설도 있다. </p> <div><input><div><h2>목차</h2><span><label></label></span></div> <ul> <li><a><span>1</span> <span>개요</span></a> <ul> <li><a><span>1.1</span> <span>임무</span></a></li> <li><a><span>1.2</span> <span>근거지</span></a></li> </ul> </li> <li><a><span>2</span> <span>역사</span></a> <ul> <li><a><span>2.1</span> <span>전성기</span></a></li> <li><a><span>2.2</span> <span>아스카 시대(飛鳥時代)에서 나라 시대(奈良時代)로</span></a></li> <li><a><span>2.3</span> <span>정쟁 그리고 쇠퇴</span></a></li> <li><a><span>2.4</span> <span>헤이안 중기 이후</span></a></li> </ul> </li> <li><a><span>3</span> <span>각주</span></a></li> </ul> </div> <h2><span></span><span>개요</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임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오토모」(大伴)는 「거대한 <a>도모노 미야쓰코</a>(伴造)」라는 의미로, 고대 야마토 조정에 직속된 많은 도모노베(伴部)를 통솔했던 데서 기인한다.<sup><a>&#91;1&#93;</a></sup> 또한 집안 전승에 따르면 구메베(来目部)나 유기오베(靫負部) 등의 군사적 부민(部民)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상정되어, <a>모노노베 씨</a>(物部氏)와 함께 야마토 조정의 군사 업무를 맡아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sup><a>&#91;2&#93;</a></sup> 두 씨족의 차이는 오토모 씨가 오키미(大王) 및 야마토 조정의 친위대적 성격의 군사였다면 모노노베 씨는 지방을 맡은 국군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 대대로 궁정을 경호하는 왕궁경찰이나 근위병과 같은 역할을 했다. </p> <h3><span></span><span>근거지</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오토모 씨의 옛 근거지는 바다와 가까운 <a>셋쓰 국</a>(摂津国) ・ <a>가와치 국</a>(河内国) 연안 지방이었던 것으로 보이며<sup><a>&#91;3&#93;</a></sup> 가와치 국에서는 오토모노 가네마로(大伴金村)의 「스미요시 저택」(住吉の宅)<sup><a>&#91;4&#93;</a></sup>이 있어 《<a>만요슈</a>》(万葉集)에서도 「大伴の御津の浜」<sup><a>&#91;5&#93;</a></sup> 또는 「大伴の高師の浜」<sup><a>&#91;6&#93;</a></sup>라는 와카 구절로 등장하고 있다. 스미요시는 <a>야마토 왕권</a>의 중요한 항구였던 스미요시 진(住吉津)이 위치해 있었던 곳으로 「御津」란 나니와 진(難波津), 「高師」는 오늘날의 <a>오사카부</a>(大阪府) <a>다카이시 시</a>(高石市) 일대에 해당한다. </p><p>한편으로 오토모 씨의 먼 조상으로 전하는 미치노오미노 미코토(道臣命)가 <a>진무 동정</a>(神武東征)에서 공을 세워 <a>야마토 국</a>(大和国)의 <a>다카이치 군</a>(高市郡) 지쿠사카 읍(築坂邑)에 택지를 하사받았다는 《<a>일본서기</a>》(日本書紀)의 기록이나<sup><a>&#91;7&#93;</a></sup> 오토모 씨의 다른 연고지가 같은 구니(国)의 시로가미 군(城上郡) 적견장(跡見荘)에 있었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훗날 근거지를 야마토 국의 시키(磯城), 다카이치 지방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sup><a>&#91;3&#93;</a></sup> </p> <h2><span></span><span>역사</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h3><span></span><span>전성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5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오토모 씨의 첫 번째 인물로 실재가 확인되는 것은 오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로, <a>유랴쿠</a>(雄略) 때에 <a>오오무라치</a>(大連)가 되어, 그때까지 세력을 떨치던 가쓰라기 씨(葛城氏)를 제치고 오토모 씨가 급속히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p><p><a>부레쓰</a>(武烈) 때 오오무라치가 된 가네마로(金村)의 시대에 오토모 씨는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그 뒤 <a>게이타이</a>(継体) ・ <a>안칸</a>(安閑) ・ <a>센카</a>(宣化) ・ <a>긴메이</a>(欽明)에 이르는 다섯 오키미의 조정에서 오오무라치를 맡았다. 특히 가네마로는 <a>에치젠 국</a>(越前国)에서 오호도(弟) 왕자를 맞이해 와서 새로운 오키미로 옹립하는 공을 세우고 야마토 왕권 내에서도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a>백제</a>(百濟)의 가야 진출 과정에서 <a>임나 4현</a>이 백제에 넘어간 뒤 같은 오오무라치였던 모노노베 씨의 참소를 당해 실각한다<sup><a>&#91;8&#93;</a></sup> 셋쓰 국 스미요시 군(住吉郡, 지금의 <a>오사카 시</a> <a>스미요시 구</a> 미카도즈카 산帝塚山)의 저택으로 물러났다. 그 뒤 <a>소가 씨</a>(蘇我氏)와 <a>모노노베 씨</a>(物部氏)의 대립이 시작된다. </p> <h3><span></span><span>아스카 시대(飛鳥時代)에서 나라 시대(奈良時代)로</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그러나 오토모 씨의 힘은 아직 쇠퇴한 것은 아니었고, 오토모노 이와(大伴磐) ・ 오토모노 후키(大伴咋) ・ <a>오토모노 사데히코</a>(大伴狭手彦)가 대장군 및 대부(大夫, 의정관)으로써 야마토 조정을 섬겼고, <a>다이카 개신</a> 이후인 <a>다이카</a>(大化) 5년(<a>649년</a>)에는 오토모노 나가토쿠(大伴長徳)가 <a>우대신</a>(右大臣)이 되었다. 또한 <a>고분 천황</a>(弘文天皇) 원년(<a>672년</a>)에 일어난 <a>진신의 난</a>(壬申の乱) 때에는 나가토쿠의 동생 오토모노 마쿠타(大伴馬来田) ・ 후케이(吹負) 형제가 병사를 거느리고 공을 세웠다. 이후로도 <a>나라 시대</a>(奈良時代)까지 오토모 씨는 조정을 섬겨 <a>대납언</a>(大納言)까지 오른 오토모노 미유키(大伴御行) ・ 오토모노 야스마로(大伴安麻呂) ・ <a>오토모노 다비토</a>(大伴旅人) 이후 많은 <a>구교</a>(公卿)들이 배출되었다. </p><p>한편으로 오토모노 야스마로 ・ 오토모노 다비토 ・ <a>오토모노 야카모치</a>(大伴家持) ・ <a>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a>(大伴坂上郎女) 등의 가인(歌人) 또한 많이 배출되었다. <a>견당부사</a>(遣唐副使) <a>오토모노 고마로</a>(大伴古麻呂)는 독단으로 당의 승려 간진(鑑真)을 밀입국시켜 데려 오기도 했다. </p> <h3><span></span><span>정쟁 그리고 쇠퇴</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오토모 씨는 나라 시대에서 <a>헤이안 시대</a>(平安時代) 전기에 걸쳐 정쟁에 관여했다가 일족 대부분이 처벌을 당하고 차츰 세력을 잃어 갔다. </p><p><a>진키</a>(神亀) 6년(<a>729년</a>)에 일어난 <a>나가야 왕의 정변</a>(長屋王の変)에서는 나가야 왕과의 친분이 있던 오토모노 다비토가 사건 전후에 일시 <a>다자이후</a>(大宰府)로 좌천되었다. 나라 시대 중기에 일어난 <a>후지와라 나카마로</a>(藤原仲麻呂) 정권 아래서 <a>덴표쇼호</a>(天平勝宝) 9세(<a>757년</a>)의 다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의 난에서 오토모노 고마로가 옥사하고 오토모노 고자비(大伴古慈悲)는 유배당한다(<a>쇼토쿠 천황</a>이 붕어하고 나서야 복귀). 또한 오토모노 야카모치는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a>암살</a> 계획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a>덴표호지</a>(天平宝字) 8년(<a>764년</a>)<a>하리마노카미</a>(薩摩守)로 좌천당한다. </p><p>야카모치는 <a>덴오</a>(天応) 2년(<a>782년</a>)에 발생한 히카미노 가와쓰기(氷上川継)의 난에 연좌당해 관직에서 해임되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a>간무</a>(桓武) 초기에 <a>중납언</a>(中納言)까지 올랐다. 그러나 <a>엔랴쿠</a>(延暦) 3년(<a>784년</a>) 천황이 <a>나가오카쿄</a>(長岡京) 천도를 실행에 옮기는데 불만을 품은 오토모 씨는 천도 책임자였던 중납언 후지와라노 다네쓰구(藤原種継)를 암살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사건 뒤에 오토모노 고마로의 아들인 쓰구히토(継人)는 난의 주모자로써 처형당했고, 직전에 사망했던 야카모치도 제명당했다. 그런 한편으로 헤이안 초기에 간무 천황의 명을 받들어 <a>세이이타이쇼군</a>(征夷大将軍)이 되어 <a>에미시</a>(蝦夷) 정벌에 공을 세우고 종3위 관위를 받은 <a>오토모노 오토마로</a>(大伴弟麻呂)나, 후지와라노 다네쓰구 암살 사건의 주모자로 처형된 쓰구히토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유배되었다가 사면된 뒤 관직에 올라 업적을 세우고 산기(参議)가 된 오토모노 구니미치(大伴国道) 등의 구교가 배출되는 등 집안의 지위는 보존되었다. </p><p><a>고닌</a>(弘仁) 14년(<a>823년</a>) 오토모 씨는 <a>준나 천황</a>(淳和天皇)의 휘(오토모大伴)를 피해, 천황이 즉위하자마자 <b>도모(伴)</b>로 씨를 고쳤다. <a>조와</a>(承和) 9년(<a>842년</a>)에 발생한 조와의 변에서 도모노 다케즈미(伴健岑)가 주모자로써 유배당하고 <a>후지와라 씨</a>(藤原氏)의 타 씨족 배척으로 도모 씨 또한 타격을 입지만, 실제로 5위 이상의 일족 일원으로 연좌된 사람은 없었다. 그 뒤 구니미치의 아들인 도모노 요시오(伴善男)가 <a>닌묘 천황</a>(仁明天皇)에게 중용되면서 대납언이 되고 두각을 드러내는데, <a>세이와</a>(清和) 때인 <a>조간</a>(貞観) 6년(<a>864년</a>) 다비토 이래 130년만에 대납언이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조간 8년(<a>866년</a>) 발생한 응천문의 변에서 요시오 ・ 나카쓰네(中庸) 부자가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그 친족 대다수가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후 도모 씨에서는 구교가 나오지 못한다. </p> <h3><span></span><span>헤이안 중기 이후</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3> <p><a>덴교</a>(天慶) 2년(<a>939년</a>) 도모노 야스히라(伴保平)가 6개 구니의 고쿠시(国司)를 거쳐 72세의 나이로 산기가 되면서 도모 씨로써 75년만에 다시 구교가 탄생되었다. 야스히라는 고령의 나이로 <a>덴랴쿠</a>(天暦) 4년(<a>950년</a>) 종3위까지 올랐고, 이듬해에는 <a>아손</a>(朝臣)으로 가바네를 고치지만, 결과적으로는 도모노 야스히라가 도모 씨 최후의 구교가 되었다. 헤이안 시대 전기에는 <a>기 씨</a>(紀氏)와 함께 <a>무인고실</a>(武人故実)을 전하는 집안이 되었으나, <a>무사</a>(武士)의 대두와 함께 도모 씨는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p><p>다음은 도모 씨의 후손을 칭한 집안들이다. </p> <ul><li>쓰루가오카 사직가(鶴岡社職家) ・・・ 도모노 다다쿠니(伴忠国)가 <a>쓰루가오카 하치만구</a>(鶴岡八幡宮) 초대 신주(神主)가 된 이래 대대로 그 직책을 이어받았다. 도모노 나카쓰네의 후손을 자처했으나<sup><a>&#91;9&#93;</a></sup> 도모노 야스히라의 동생인 야스아리(保在)의 후예라 된 계보도도 있다.<sup><a>&#91;10&#93;</a></sup></li> <li>기모쓰키 씨(肝付氏) ・・・ <a>오스미 국</a>(大隅国)의 호족. <a>센고쿠 시대</a> 기모쓰키 가네쓰구(肝付兼続)가 <a>센고쿠 다이묘</a>(戦国大名)로써 시마즈 씨(島津氏)와 경쟁하였으나 자손은 시마즈 씨를 주군으로 섬겨 <a>사쓰마 번사</a>(薩摩藩士)가 되었다. 계보는 명확하지 않으나 도모 성을 칭했고, 도모노 나카쓰네로 이어지는 계보도 있다.<sup><a>&#91;11&#93;</a></sup></li> <li>미카와 도모 씨(三河伴氏) ・・・ <a>미카와 국</a>(三河国) 호족으로 헤이안 시대 후기에 도모노 스케카네(伴助兼)가 <a>후3년의 역</a>(後三年の役)에서 활약하였다. 도모노 요시오<sup><a>&#91;12&#93;</a></sup> ・ 오토모노 스루가마로(大伴駿河麻呂)<sup><a>&#91;13&#93;</a></sup> ・ 오토모노 야카모치<sup><a>&#91;14&#93;</a></sup> 등과 엮인 계보도 있다.</li> <li>가가 도모 토(甲賀伴党) ・・・ <a>오미 국</a>(近江国)의 호족으로 훗날 다키가와 씨(滝川氏)를 칭하고 센고쿠 시대에 <a>다키가와 가즈마스</a>(滝川一益) 등의 무장을 배출하였다. 미카와 도모 씨의 일족이다.<sup><a>&#91;15&#93;</a></sup></li> <li>이즈 도모 씨(伊豆伴氏) ・・・ 헤이안 후기에 이즈노죠(伊豆掾)를 역임<sup><a>&#91;16&#93;</a></sup>. 이즈노곤노카미(伊豆権守, 죠掾라고도) ・ 도모노 다메후사(伴為房)의 딸은 <a>가마쿠라 막부</a>의 싯켄 <a>호조 도키마사</a>(北条時政)의 어머니이다.<sup><a>&#91;17&#93;</a></sup> 도모노 요시오가 이즈 국으로 유배된 뒤에 얻었다는 아들 요시우오(善魚)에서 이어지는 계보도가 존재한다.<sup><a>&#91;16&#93;</a></sup></li> <li>오노 가(小野家) ・・・ 조정에서 주전료(主殿寮)의 관인을 지냈던 지게케(地下家)로 <a>에도 시대</a>(江戸時代) 최고 관직 승진은 종4위상 ・ 주전조(主殿助)였다. 도모노 야스히라의 후예를 자처했다.<sup><a>&#91;18&#93;</a></sup></li> <li>오자키 가(尾崎家) ・・・ 황족 가쓰라노미야(桂宮) 집안의 쇼다이후(諸大夫)를 지낸 지게케로 에도 시대의 최고 관직 승진은 정4위하 ・ 봉전두(縫殿頭). 에도 시대 후기에 오자키 스미오키(尾崎積興)는 81세의 고령으로 종3위에 올랐다. 또한 오자키 사부로(尾崎三良)는 <a>메이지 유신</a>에서 공을 세워 <a>남작</a>(男爵)이 되었다. 도모노 요시오의 후예를 자처했다.<sup><a>&#91;18&#93;</a></sup></li> <li>이치베 씨(市部氏) ・・・ 가이 도모 씨(甲斐伴氏)라고도 불리며 지파 씨족으로 가네마루 씨(金丸氏)가 있다.</li></ul> <h2><span></span><span>각주</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고사기전》(古事記伝)</span> </li> <li><span><a>↑</a></span> <span>사에키(佐伯)[1994: 111]</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사에키(佐伯)[1994: 110]</span> </li> <li><span><a>↑</a></span> <span>《일본서기》(日本書紀) 긴메이(欽明) 원년 9월 기묘조.</span> </li> <li><span><a>↑</a></span> <span>《만요슈》(万葉集) 1-63・68</span> </li> <li><span><a>↑</a></span> <span>《만요슈》(万葉集) 1-66</span> </li> <li><span><a>↑</a></span> <span>일본서기(日本書紀) 진무기(神武紀)</span> </li> <li><span><a>↑</a></span> <span>한편 가네마로의 실각 이유에 대해서는 실제로는 즉위하지 않았던 안칸 ・ 센카 두 오키미와 긴메이의 왕위 계승 싸움에 말려들었던 것이라는 구로이시 준고(黒岩重吾)의 지적이 있다.</span> </li> <li><span><a>↑</a></span> <span>「쓰루가오카 사직 계도」(鶴岡社職系図) 《속군서유종》(続群書類従) 권제182.</span> </li> <li><span><a>↑</a></span> <span>《백가계도》(百家系図) 권59, 오토모 스쿠네(大伴宿禰)</span> </li> <li><span><a>↑</a></span> <span>「기모쓰키 가보」(肝付家譜) 《사쓰오히 지리찰고》(薩隅日地理纂考) 肝属郡内郡 高山郷 조.</span> </li> <li><span><a>↑</a></span> <span>「伴氏系図」《속군서유종》(続群書類従) 권제182.</span> </li> <li><span><a>↑</a></span> <span>鈴木真年의 저작에 따른 것이다. 宝賀[1986: 822]에서 이 설을 따랐다.</span> </li> <li><span><a>↑</a></span> <span>鈴木真年 《백가계도》(百家系図) 권제59, 오토모 스쿠네(大伴宿禰)</span> </li> <li><span><a>↑</a></span> <span>오타(太田)[1963: 3362]</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鈴木真年 《백가계보고》(百家系図稿) 권6, 이시이(石井)</span> </li> <li><span><a>↑</a></span> <span>《이즈지고》(伊豆志稿)</span> </li> <li><span>↑ <sup><a>가</a></sup> <sup><a>나</a></sup></span> <span>《지게케전》(地下家伝)</span> </li> </ol></div></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오토모씨_(신별)&amp;oldid=20702881</a>"</div> <div><div><a>분류</a>: <ul><li><a>오토모씨 (신별)</a></li><li><a>일본의 씨족</a></li><li><a>신별 씨</a></li></ul></div><div>숨은 분류: <ul><li><a>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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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분 천황 원년에 일어난 난의 이름은?
진신의 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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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66
[ "고분 천황 원년에 일어난 난의 이름은?", "다이카 5년에 오토모노 나가토쿠는 무엇이 되었는가?", "오토모 씨가 암살한 사람은?", "오토모노 고마로의 아들의 이름은?", "야카모치는 간무 초기에 어느 관직까지 올라갔는가?", "천도 책임자로 오토모 씨에게 암살당한 인물은?", "난의 주모자로 처형당한 오토모노 고마로의 아들은 누구인가?", "조와의 변의 주모자는?", "구니미치의 아들의 이름은?", "고닌 14년 오토모 씨가 천황이 즉위하자 무엇으로 씨를 고쳤는가?", "조간 8년 발생한 응천문의 변에서 사건의 주모자로 몰린 자는?", "구니미치의 아들로 닌묘 천황에게 중용되어 대납언이 된 인물은?" ]
<!DOCTYPE html> 오토모씨 (신별)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오토모씨 (신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table> <tbody><tr> <td colspan="2"> 오오토모 씨 </td></tr> <tr> <td colspan="2"> </td></tr> <tr> <th>한자 </th> <td>大伴氏 </td></tr> <tr> <th>가나 </th> <td>おおともうじ </td></tr> <tr> <th>씨성(氏姓) </th> <td>오토모 무라지 </td></tr> <tr> <th>시조(始祖) </th> <td>미치노 오미노 미코토 </td></tr> <tr> <th>종별(種別) </th> <td>신별(천신) </td></tr> <tr> <th>출신 저명인물 </th> <td>오토모노 가나무라오토모노 마쿠타오토모노 후케이오토모노 야스마로오토모노 다비토오토모노 야카모치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오토모노 코마로오토모노 오토마로토모노 요시로 </td></tr> <tr> <td colspan="2">범례 - 분류:일본의 씨족 </td></tr> </tbody></table> 오토모 씨(일본어: .mw-parser-output ruby&gt;rt,.mw-parser-output ruby&gt;rtc{font-feature-settings:"ruby"1}.mw-parser-output ruby.large{font-size:250%}.mw-parser-output ruby.large&gt;rt,.mw-parser-output ruby.large&gt;rtc{font-size:.3em}大伴 (おおとも)氏 (うじ) 오오토모우지[*])는 "오토모(大伴)"을 씨로 삼는 씨족이다. 헤이안 시대 초기에 준나 천황을 피휘하여 토모 씨(伴氏)로 개칭했다. 성은 무라지이고, 팔색성제가 제정된 뒤에는 스쿠네, 헤이안 시대 중기 이후에는 아손이다. 천손강림 때 선도한 아마노 오시히의 자손인 천신계 씨족으로, 사에키 씨와는 동족 관계이다. 일반적으로 사에키 씨를 오토모 씨의 분가로 보지만 그 반대 설도 있다. 목차 1 개요 1.1 임무 1.2 근거지 2 역사 2.1 전성기 2.2 아스카 시대(飛鳥時代)에서 나라 시대(奈良時代)로 2.3 정쟁 그리고 쇠퇴 2.4 헤이안 중기 이후 3 각주 개요[편집] 임무[편집] 「오토모」(大伴)는 「거대한 도모노 미야쓰코(伴造)」라는 의미로, 고대 야마토 조정에 직속된 많은 도모노베(伴部)를 통솔했던 데서 기인한다.[1] 또한 집안 전승에 따르면 구메베(来目部)나 유기오베(靫負部) 등의 군사적 부민(部民)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상정되어, 모노노베 씨(物部氏)와 함께 야마토 조정의 군사 업무를 맡아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2] 두 씨족의 차이는 오토모 씨가 오키미(大王) 및 야마토 조정의 친위대적 성격의 군사였다면 모노노베 씨는 지방을 맡은 국군적 성격을 가지고 있어, 대대로 궁정을 경호하는 왕궁경찰이나 근위병과 같은 역할을 했다. 근거지[편집] 오토모 씨의 옛 근거지는 바다와 가까운 셋쓰 국(摂津国) ・ 가와치 국(河内国) 연안 지방이었던 것으로 보이며[3] 가와치 국에서는 오토모노 가네마로(大伴金村)의 「스미요시 저택」(住吉の宅)[4]이 있어 《만요슈》(万葉集)에서도 「大伴の御津の浜」[5] 또는 「大伴の高師の浜」[6]라는 와카 구절로 등장하고 있다. 스미요시는 야마토 왕권의 중요한 항구였던 스미요시 진(住吉津)이 위치해 있었던 곳으로 「御津」란 나니와 진(難波津), 「高師」는 오늘날의 오사카부(大阪府) 다카이시 시(高石市) 일대에 해당한다. 한편으로 오토모 씨의 먼 조상으로 전하는 미치노오미노 미코토(道臣命)가 진무 동정(神武東征)에서 공을 세워 야마토 국(大和国)의 다카이치 군(高市郡) 지쿠사카 읍(築坂邑)에 택지를 하사받았다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기록이나[7] 오토모 씨의 다른 연고지가 같은 구니(国)의 시로가미 군(城上郡) 적견장(跡見荘)에 있었다는 것 등으로 미루어 볼 때 훗날 근거지를 야마토 국의 시키(磯城), 다카이치 지방으로 옮긴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3] 역사[편집] 전성기[편집] 5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오토모 씨의 첫 번째 인물로 실재가 확인되는 것은 오토모노 무로야(大伴室屋)로, 유랴쿠(雄略) 때에 오오무라치(大連)가 되어, 그때까지 세력을 떨치던 가쓰라기 씨(葛城氏)를 제치고 오토모 씨가 급속히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부레쓰(武烈) 때 오오무라치가 된 가네마로(金村)의 시대에 오토모 씨는 전성기를 맞이하였고, 그 뒤 게이타이(継体) ・ 안칸(安閑) ・ 센카(宣化) ・ 긴메이(欽明)에 이르는 다섯 오키미의 조정에서 오오무라치를 맡았다. 특히 가네마로는 에치젠 국(越前国)에서 오호도(弟) 왕자를 맞이해 와서 새로운 오키미로 옹립하는 공을 세우고 야마토 왕권 내에서도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백제(百濟)의 가야 진출 과정에서 임나 4현이 백제에 넘어간 뒤 같은 오오무라치였던 모노노베 씨의 참소를 당해 실각한다[8] 셋쓰 국 스미요시 군(住吉郡, 지금의 오사카 시 스미요시 구 미카도즈카 산帝塚山)의 저택으로 물러났다. 그 뒤 소가 씨(蘇我氏)와 모노노베 씨(物部氏)의 대립이 시작된다. 아스카 시대(飛鳥時代)에서 나라 시대(奈良時代)로[편집] 그러나 오토모 씨의 힘은 아직 쇠퇴한 것은 아니었고, 오토모노 이와(大伴磐) ・ 오토모노 후키(大伴咋) ・ 오토모노 사데히코(大伴狭手彦)가 대장군 및 대부(大夫, 의정관)으로써 야마토 조정을 섬겼고, 다이카 개신 이후인 다이카(大化) 5년(649년)에는 오토모노 나가토쿠(大伴長徳)가 우대신(右大臣)이 되었다. 또한 고분 천황(弘文天皇) 원년(672년)에 일어난 진신의 난(壬申の乱) 때에는 나가토쿠의 동생 오토모노 마쿠타(大伴馬来田) ・ 후케이(吹負) 형제가 병사를 거느리고 공을 세웠다. 이후로도 나라 시대(奈良時代)까지 오토모 씨는 조정을 섬겨 대납언(大納言)까지 오른 오토모노 미유키(大伴御行) ・ 오토모노 야스마로(大伴安麻呂) ・ 오토모노 다비토(大伴旅人) 이후 많은 구교(公卿)들이 배출되었다. 한편으로 오토모노 야스마로 ・ 오토모노 다비토 ・ 오토모노 야카모치(大伴家持) ・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大伴坂上郎女) 등의 가인(歌人) 또한 많이 배출되었다. 견당부사(遣唐副使) 오토모노 고마로(大伴古麻呂)는 독단으로 당의 승려 간진(鑑真)을 밀입국시켜 데려 오기도 했다. 정쟁 그리고 쇠퇴[편집] 오토모 씨는 나라 시대에서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전기에 걸쳐 정쟁에 관여했다가 일족 대부분이 처벌을 당하고 차츰 세력을 잃어 갔다. 진키(神亀) 6년(729년)에 일어난 나가야 왕의 정변(長屋王の変)에서는 나가야 왕과의 친분이 있던 오토모노 다비토가 사건 전후에 일시 다자이후(大宰府)로 좌천되었다. 나라 시대 중기에 일어난 후지와라 나카마로(藤原仲麻呂) 정권 아래서 덴표쇼호(天平勝宝) 9세(757년)의 다치바나노 나라마로(橘奈良麻呂)의 난에서 오토모노 고마로가 옥사하고 오토모노 고자비(大伴古慈悲)는 유배당한다(쇼토쿠 천황이 붕어하고 나서야 복귀). 또한 오토모노 야카모치는 후지와라 나카마로의 암살 계획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덴표호지(天平宝字) 8년(764년)하리마노카미(薩摩守)로 좌천당한다. 야카모치는 덴오(天応) 2년(782년)에 발생한 히카미노 가와쓰기(氷上川継)의 난에 연좌당해 관직에서 해임되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는 간무(桓武) 초기에 중납언(中納言)까지 올랐다. 그러나 엔랴쿠(延暦) 3년(784년) 천황이 나가오카쿄(長岡京) 천도를 실행에 옮기는데 불만을 품은 오토모 씨는 천도 책임자였던 중납언 후지와라노 다네쓰구(藤原種継)를 암살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사건 뒤에 오토모노 고마로의 아들인 쓰구히토(継人)는 난의 주모자로써 처형당했고, 직전에 사망했던 야카모치도 제명당했다. 그런 한편으로 헤이안 초기에 간무 천황의 명을 받들어 세이이타이쇼군(征夷大将軍)이 되어 에미시(蝦夷) 정벌에 공을 세우고 종3위 관위를 받은 오토모노 오토마로(大伴弟麻呂)나, 후지와라노 다네쓰구 암살 사건의 주모자로 처형된 쓰구히토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유배되었다가 사면된 뒤 관직에 올라 업적을 세우고 산기(参議)가 된 오토모노 구니미치(大伴国道) 등의 구교가 배출되는 등 집안의 지위는 보존되었다. 고닌(弘仁) 14년(823년) 오토모 씨는 준나 천황(淳和天皇)의 휘(오토모大伴)를 피해, 천황이 즉위하자마자 도모(伴)로 씨를 고쳤다. 조와(承和) 9년(842년)에 발생한 조와의 변에서 도모노 다케즈미(伴健岑)가 주모자로써 유배당하고 후지와라 씨(藤原氏)의 타 씨족 배척으로 도모 씨 또한 타격을 입지만, 실제로 5위 이상의 일족 일원으로 연좌된 사람은 없었다. 그 뒤 구니미치의 아들인 도모노 요시오(伴善男)가 닌묘 천황(仁明天皇)에게 중용되면서 대납언이 되고 두각을 드러내는데, 세이와(清和) 때인 조간(貞観) 6년(864년) 다비토 이래 130년만에 대납언이 나온 것이었다. 그러나 조간 8년(866년) 발생한 응천문의 변에서 요시오 ・ 나카쓰네(中庸) 부자가 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그 친족 대다수가 유배형에 처해졌다. 이후 도모 씨에서는 구교가 나오지 못한다. 헤이안 중기 이후[편집] 덴교(天慶) 2년(939년) 도모노 야스히라(伴保平)가 6개 구니의 고쿠시(国司)를 거쳐 72세의 나이로 산기가 되면서 도모 씨로써 75년만에 다시 구교가 탄생되었다. 야스히라는 고령의 나이로 덴랴쿠(天暦) 4년(950년) 종3위까지 올랐고, 이듬해에는 아손(朝臣)으로 가바네를 고치지만, 결과적으로는 도모노 야스히라가 도모 씨 최후의 구교가 되었다. 헤이안 시대 전기에는 기 씨(紀氏)와 함께 무인고실(武人故実)을 전하는 집안이 되었으나, 무사(武士)의 대두와 함께 도모 씨는 역사의 무대에서 자취를 감춰버렸다. 다음은 도모 씨의 후손을 칭한 집안들이다. 쓰루가오카 사직가(鶴岡社職家) ・・・ 도모노 다다쿠니(伴忠国)가 쓰루가오카 하치만구(鶴岡八幡宮) 초대 신주(神主)가 된 이래 대대로 그 직책을 이어받았다. 도모노 나카쓰네의 후손을 자처했으나[9] 도모노 야스히라의 동생인 야스아리(保在)의 후예라 된 계보도도 있다.[10] 기모쓰키 씨(肝付氏) ・・・ 오스미 국(大隅国)의 호족. 센고쿠 시대 기모쓰키 가네쓰구(肝付兼続)가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로써 시마즈 씨(島津氏)와 경쟁하였으나 자손은 시마즈 씨를 주군으로 섬겨 사쓰마 번사(薩摩藩士)가 되었다. 계보는 명확하지 않으나 도모 성을 칭했고, 도모노 나카쓰네로 이어지는 계보도 있다.[11] 미카와 도모 씨(三河伴氏) ・・・ 미카와 국(三河国) 호족으로 헤이안 시대 후기에 도모노 스케카네(伴助兼)가 후3년의 역(後三年の役)에서 활약하였다. 도모노 요시오[12] ・ 오토모노 스루가마로(大伴駿河麻呂)[13] ・ 오토모노 야카모치[14] 등과 엮인 계보도 있다. 가가 도모 토(甲賀伴党) ・・・ 오미 국(近江国)의 호족으로 훗날 다키가와 씨(滝川氏)를 칭하고 센고쿠 시대에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 등의 무장을 배출하였다. 미카와 도모 씨의 일족이다.[15] 이즈 도모 씨(伊豆伴氏) ・・・ 헤이안 후기에 이즈노죠(伊豆掾)를 역임[16]. 이즈노곤노카미(伊豆権守, 죠掾라고도) ・ 도모노 다메후사(伴為房)의 딸은 가마쿠라 막부의 싯켄 호조 도키마사(北条時政)의 어머니이다.[17] 도모노 요시오가 이즈 국으로 유배된 뒤에 얻었다는 아들 요시우오(善魚)에서 이어지는 계보도가 존재한다.[16] 오노 가(小野家) ・・・ 조정에서 주전료(主殿寮)의 관인을 지냈던 지게케(地下家)로 에도 시대(江戸時代) 최고 관직 승진은 종4위상 ・ 주전조(主殿助)였다. 도모노 야스히라의 후예를 자처했다.[18] 오자키 가(尾崎家) ・・・ 황족 가쓰라노미야(桂宮) 집안의 쇼다이후(諸大夫)를 지낸 지게케로 에도 시대의 최고 관직 승진은 정4위하 ・ 봉전두(縫殿頭). 에도 시대 후기에 오자키 스미오키(尾崎積興)는 81세의 고령으로 종3위에 올랐다. 또한 오자키 사부로(尾崎三良)는 메이지 유신에서 공을 세워 남작(男爵)이 되었다. 도모노 요시오의 후예를 자처했다.[18] 이치베 씨(市部氏) ・・・ 가이 도모 씨(甲斐伴氏)라고도 불리며 지파 씨족으로 가네마루 씨(金丸氏)가 있다. 각주[편집] ↑ 《고사기전》(古事記伝) ↑ 사에키(佐伯)[1994: 111] ↑ 가 나 사에키(佐伯)[1994: 110] ↑ 《일본서기》(日本書紀) 긴메이(欽明) 원년 9월 기묘조. ↑ 《만요슈》(万葉集) 1-63・68 ↑ 《만요슈》(万葉集) 1-66 ↑ 일본서기(日本書紀) 진무기(神武紀) ↑ 한편 가네마로의 실각 이유에 대해서는 실제로는 즉위하지 않았던 안칸 ・ 센카 두 오키미와 긴메이의 왕위 계승 싸움에 말려들었던 것이라는 구로이시 준고(黒岩重吾)의 지적이 있다. ↑ 「쓰루가오카 사직 계도」(鶴岡社職系図) 《속군서유종》(続群書類従) 권제182. ↑ 《백가계도》(百家系図) 권59, 오토모 스쿠네(大伴宿禰) ↑ 「기모쓰키 가보」(肝付家譜) 《사쓰오히 지리찰고》(薩隅日地理纂考) 肝属郡内郡 高山郷 조. ↑ 「伴氏系図」《속군서유종》(続群書類従) 권제182. ↑ 鈴木真年의 저작에 따른 것이다. 宝賀[1986: 822]에서 이 설을 따랐다. ↑ 鈴木真年 《백가계도》(百家系図) 권제59, 오토모 스쿠네(大伴宿禰) ↑ 오타(太田)[1963: 3362] ↑ 가 나 鈴木真年 《백가계보고》(百家系図稿) 권6, 이시이(石井) ↑ 《이즈지고》(伊豆志稿) ↑ 가 나 《지게케전》(地下家伝)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오토모씨_(신별)&amp;oldid=20702881" 분류: 오토모씨 (신별)일본의 씨족신별 씨숨은 분류: 일본어 표기를 포함한 문서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다른 프로젝트 위키미디어 공용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Deutsch日本語Українська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2월 11일 (일) 07:02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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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토모 씨 (신별) 요약 - **한자**: 大伴氏 - **가나**: おおともうじ - **씨성**: 오토모 무라지 - **시조**: 미치노 오미노 미코토 - **종별**: 신별(천신) - **출신 저명인물**: - 오토모노 가나무라 - 오토모노 마쿠타 - 오토모노 후케이 - 오토모노 야스마로 - 오토모노 다비토 - 오토모노 야카모치 - 오토모노 사카노우에노 이라쓰메 - 오토모노 코마로 - 오토모노 오토마로 - 오토모노 요시로 #### 개요 - **의미**: "거대한 도모노 미야쓰코"로, 고대 야마토 조정에 직속된 도모노베를 통솔. - **역할**: 군사적 부민을 거느리며, 왕궁 경호 및 친위대 역할 수행. #### 역사 - **전성기**: - 5세기 후반, 오토모노 무로야가 오오무라치로 대두. - 오토모 씨는 여러 오키미의 조정에서 오오무라치를 맡음. - **아스카 시대에서 나라 시대**: - 오토모 씨는 대장군 및 대부로서 조정에 기여. - 진신의 난에서 공을 세운 인물 다수 배출. - **정쟁 및 쇠퇴**: - 나라 시대에서 헤이안 시대 초기에 정쟁에 연루되어 세력 감소. - 여러 인물들이 처벌받고, 집안의 지위 약화. - **헤이안 중기 이후**: - 도모 씨로 개칭 후, 구교 배출이 감소. - 무사 대두와 함께 역사에서 자취 감춤. #### 후손 및 관련 집안 - **쓰루가오카 사직가**: 초대 신주 후손. - **기모쓰키 씨**: 센고쿠 시대의 호족. - **미카와 도모 씨**: 헤이안 후기에 활동. - **가가 도모 토**: 다키가와 씨로 이어짐. - **이즈 도모 씨**: 가마쿠라 막부와 관련. - **오노 가**: 조정에서 관인으로 활동. - **오자키 가**: 황족과의 연관. - **이치베 씨**: 지파 씨족으로 가네마루 씨 포함. 이 문서는 오토모 씨의 역사와 관련된 주요 정보를 간결하게 정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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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_(점성술)
https://ko.wikipedia.org/wiki/고양_(점성술)
<!DOCTYPE html> <html> <head> <meta> <title>고양 (점성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title> <link> <meta> <link> <meta> <meta> <meta> <meta> <meta>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link> </head> <body> <div></div> <div></div> <div> <a></a> <div></div> <div> </div> <h1>고양 (점성술)</h1> <div> <div>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div> <div></div> <div></div> <a>둘러보기로 가기</a> <a>검색하러 가기</a> <div><div><div><div><a><img></a> <div><div><a></a></div>행성의 고양 위치</div></div></div> <p><a>점성술</a>에서 <b>고양</b>(高揚) 또는 <i>엑절테이션</i>(exaltation)은 <a>행성</a>의 다섯 가지의 <a>본질적 위계</a> 가운데 하나이다. 일곱 개의 <a>전통적 행성</a>은 하나의 <a>황도대 별자리</a>에서 고양되는. 그 위치는 다음과 같다.: </p> <ul><li><a>태양</a>: <a>양자리</a> 19도 (예: 18°00' - 18°59')</li> <li><a>달</a>: <a>황소자리</a> 3도</li> <li><a>수성</a>: <a>처녀자리</a> 15도</li> <li><a>금성</a>: <a>물고기자리</a> 27도</li> <li><a>화성</a>: <a>염소자리</a> 28도</li> <li><a>목성</a>: <a>게자리</a> 15도</li> <li><a>토성</a>: <a>천칭자리</a> 21도</li></ul> <p><a>승교점</a>은 쌍둥이자리의 3도에서 <a>강교점</a>은 사수자리의 3도에서 고양지위를 갖는다. 그 위치들은 11세기 <a>알비루니</a>의 저서 《점성예술의 요소에 대한 소개서(Book of Instruction in the elements of the art of astrology)》와 같은 <a>중세 초기 아랍</a> 시대의 점성술 문헌들에 수록되어 있다.<sup><a>&#91;1&#93;</a></sup> 현대 <a>베다 점성가들</a>은 교점의 고양 지위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반면, 중세 유럽을 통해 전해진 서양 점성술의 전통은 그 실천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그리고 현재에 그것들을 약간만 사용한다.<sup><a>&#91;2&#93;</a></sup> 그리스인들과 페르시아인들과는 반대로 알비루니는 그 점들의 고양에 대해 알리며, 그 원리를 "아주 적절한" 것으로 묘사했는데 반해, 그의 시대의 <a>힌두 점성가들</a>은 태양과 목성 그리고 토성의 고양 위치에 일치가 없었으며, 교점의 고양은 인정하지 않았다.<sup><a>&#91;3&#93;</a></sup> </p><p>고양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가장 고대의 점성학적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황도대가 알려지기 이전의 시대 부터 고대의 <a>메소포타미아 점성술</a>에서 사용되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 후일의 황도대의 도수와 일치하는 별자리의 위치를 기준으로 사용했다.) <a>프란세스카 록버그</a>는 이 체계는 <a>에누마 아누 엔릴</a>의 전통에서 발견되므로, 그것의 기원은 기원전 제2천년기로 확장될 수도 있음을 알린다.<sup><a>&#91;4&#93;</a></sup> </p><p>왜 <a>바빌로니아인들</a>은 서양 점성가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그러한 위계의 위치를 고려했는가? 여러 세기 동안 그것을 고집하게 해왔던 숨은 이유에 관한 많은 고찰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핸드<sup><a>&#91;5&#93;</a></sup>는 추운 염소자리에서 활발한 화성이 고양하는 것처럼 일관성을 가지고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그것은 여전히 변칙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서양 <a>항성황도대 점성가</a> <a>시릴 페이건</a>은 기원전 786년에 바빌로니아의 신 <a>나부</a>를 위한 중요한 신전의 설립 해에 모든 행성이 그러한 도수들에서 <a>태양과 함께</a> 떠올랐다<sup><a>&#91;6&#93;</a></sup>고 추측하지만, 그러함도 여전히 매우 불확실하다.<sup><a>&#91;7&#93;</a></sup> </p><p><a>헬레니즘</a> 점성술에서 일반적으로 별자리에서 별자리까지의 각을 인정하므로, 고양의 정확한 도수에서부터 한 행성과의 거리가 큰 중요성을 지녔었는지도 모를 일이다.<sup><a>&#91;8&#93;</a></sup> 하지만, 고대의 점성가들에게 그 도수가 사용되었음은 분명하다. 예를 들면, <a>발광체들</a>(태양과 달)이 각각 고양하는 정확한 도수는 헬레니즘 <a>고양점</a>의 공식으로 사용되었다. </p><p><a>아랍</a>과 <a>비잔티움</a>에 의해 영향을 받은 후일의 <a>중세</a> 점성술에서는 가장 중요한 위계는 거주지의 주인지위이며 그 다음으로 고양인 등의 다섯 가지의 모든 본질적 위계에 대한 서열적 사용이 선호되었다.<sup><a>&#91;9&#93;</a></sup> 중세의 점성가들은 각각의 위계를 등급으써 점수를 매겼고, 그것들은 개략적인 통계적 방식으로 된 비교 가능한 표로 만들어졌다.(<a>본질적 위계</a> 참조.)<sup><a>&#91;10&#93;</a></sup> 그러한 점수값들은 오늘날 점성가들에게도 여전히 사용된다. </p><p><a>천왕성</a>과 <a>해왕성</a> 그리고 <a>명왕성</a> 이렇게 세 개의 <a>외부 행성</a>의 발견 이후에 현대 점성가들은 그 행성들을 위해 가능한 거주지와 고양의 지위에 대해 숙고했다. 그러함은 예를 들어, 해왕성이 (목성의 두 거주지 가운데서 하나의 주인지위를 빼았고) <a>물고기자리</a>의 "진짜" 집주인이 되는 등을 암시했다. 그러나, 고대의 체계는 가시외적 행성은 허용하지 않는 복잡한 대칭구조이므로, 그것들을 전통적 기법에 포함시키기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점성가들은 그러한 새로운 행성들에 고양 지위를 할당하려는 시도를 그만두었다. </p><p>전통적인 <a>힌두 점성술</a>은 기본적으로 <a>나크샤트라</a>라고 불리는 항성군에 있는 행성의 고양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다. <a>항성 황도대</a>에는 27개의 나크샤트라가 있다. 360°/27로 하여 1°가 60′임을 감안하면 한 개의 나크샤트라 당 정확히 13° 20′이다. 예를 들어, <a>목성</a>은 게자리에서 고양하지만, 게자리의 30° 내에는 (쌍둥이자리 20°00′부터 게자리 3°20까지의) <a>푸나바수</a>와 (게자리 3°20부터 16°40′까지의) 푸시야 그리고 (게자리 16°40′부터 29°59′까지의) 아슐레샤 이렇게 세 개의 나크샤트라가 있다.<sup><a>&#91;11&#93;</a></sup> 목성은 게자리 5° 에서 고양하므로, 그 위치는 푸시야 나크샤트라에서의 진짜 고양을 의미한다.<sup><a>&#91;12&#93;</a></sup> 푸시야 나크샤트라 데비타는 신들의 스승인 <a>브라스파티</a>이다. 목성은 일반적으로 게자리에서 고양하지만, 푸시야 바로 옆의 나크샤트라에 있을 때는 그것의 완전한 고양이 부여되지 않는다. 게다가, 각각의 나크샤트라는 <a>파다</a>라고 불리는 네 구간으로 나뉘는데, 13°20′/4로 하면 한 파다 당 정확히 3°20′ 이다. 베다의 전통에 따르면, 네 개의 파다는 각각 <a>다르마</a>와 <a>아르타</a>, <a>카마</a> 그리고 <a>모크사</a> 이렇게 네 개의 삶의 목표를 나타낸다.<sup><a>&#91;13&#93;</a></sup> 만일, 목성이 푸시야에서 강하게 고양하고 있다면, (게자리 3°20′~6°40′의) 다르마 파다, (게자리 6°40′~10°00′의) 아르타 파다, (게자리 10°00′~13°20′의) 카마 파다 그리고 (게자리 13°20′-16°40′의) 모그사 파다 가운데 하나에 속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의 도수는 천문적인 것으로 추론되는데, 목성은 게자리의 5°에서 고양하므로, 그러함은 푸시야 나크샤트라의 다르마 파다의 마음에서의 "깊은" 고양을 의미한다. 힌두 점성술 비전에서, 목성이 (마음을 뜻하는) 게자리에 있고 (신들의 스승인) 브라스파티의 영향을 받았으며, (다르마 파다의) 정당한 위치에 있다면, 목성은 그것이 표현하는 모든 것에 관하여 100% 고양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p><p>행성의 고양의 별자리와 정반대편에 위치한 별자리는 그것의 <a>쇠퇴</a> 자리로 여겨진다. 고양의 자리가 행성의 자기인식 장소라면, 쇠퇴의 자리는 행성이 표현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기능에 있어서 쇠약의 위치이다. </p> <h2><span></span><span>같이 보기</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ul><li><a>점성학적 쇠퇴</a></li></ul> <h2><span></span><span>참고 문헌</span><span><span>[</span><a>편집</a><span>]</span></span></h2> <div> <div><ol> <li><span><a>↑</a></span> <span>Albiruni, <i>The Book of Instruction in the Elements of the Art of Astrology</i>, (written in Ghaznah, 1029) ch.443 'Exaltation and fall of the planets'. Translated into English by R. Ramsay Wright. London: Luzac &amp; Co. 1934.</span> </li> <li><span><a>↑</a></span> <span>Deborah Houlding, '<a>Ptolemy's table of planetary dignity explained</a>' Skyscript: "Mars is dignified at any position in Capricorn, the sign of its exaltation, but the dignity will be especially apparent in the 28th degree. The traditional exaltations of the nodes are included although I have never really seen these put to good use in judgements".<span><small>→"화성은 고양 별자리인 염소자리의 특정 위치에서 위계를 가지는데, 그 위계는 특히 28도에서 표출될 것이다. 교점의 전통적인 고양 위치도 수록되어 있지만, 나의 견해로는 그것들의 사용이 마땅하다고 여긴적은 없다." -데보라 홀딩의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 위계표에 대한 설명 중에서.</small></span> 2013년 3월 17일 갱신.</span> </li> <li><span><a>↑</a></span> <span>Albiruni, <i>The Book of Instruction in the Elements of the Art of Astrology</i>, ch.444 'Hindu's differ as to degrees':<span><small>→알비루니의 점성예술의 요소에 대한 소개서, 제444장, 힌두 점성술과의 차이점:</small></span> <blockquote><p>"There is no difference of opinion as to the signs of exaltation, but the Hindu's differ as to the degrees in certain cases. They are agreed that the exaltation of the Sun lies in 10° of Aries, of Jupiter in 5° of Cancer, of Saturn in 20° of Libra, the others as above, except with regard to the Dragon's head [Moon's north node] and Tail [Moon's south node] which are not mentioned by them in this connection as is quite proper".<span><small>→"고양의 별자리에 대해서 힌두 점성가들과는 의견 차이가 없지만, 그들은 어떤 경우에 그 도수를 다르게 본다. 그들은 태양이 10° 에서, 목성은 게자리 5° 에서 그리고 토성은 천칭자리 20° 에서 고양하는 등에 동의하지만, 용두(달의 승교점)과 용미(달의 강교점)의 고양에 대해서는 적절한 언급이 없다."</small></span></p></blockquote> The altered positions of the Sun, Jupiter and Saturn suggests an attempt to update the traditional zodiac positions in response to the effect of <a>precession</a>.<span><small>→태양과 목성 그리고 토성의 변경된 위치는 <a>세차운동</a>의 효과에 대한 반응으로 전통적인 황도대의 위치를 수정하려한 시도였음을 시사한다.</small></span></span> </li> <li><span><a>↑</a></span> <span>Rochberg, Francesa, <i>Babylonian Horoscopes</i> pp.46-47. Philadelphia: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98. <a>ISBN</a>&#160;<a>0-87169-881-1</a></span> </li> <li><span><a>↑</a></span> <span>Robert Hand, <i>Horoscope Symbols</i>. Schiffer Publishing (Easton, PA., 1987), <a>ISBN</a>&#160;<a>0-914918-16-8</a>.</span> </li> <li><span><a>↑</a></span> <span>that is, made its first appearance in the night sky after a period of being obscured by the Sun. The planet will be seen close to the horizon, becoming visible as sunlight fades or before the Sun rises. In the ancient Near East, this was an important sky event.<span><small>→그러함은 태양이 가리우고 있는 기간이 지난 후 밤하늘에 맨먼저 출현함으로도 이루어진다. 그 행성은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에 지평선과 가까운 곳에서 보이고 태양빛에 가려져 갈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 그러함은 하늘의 중요한 사건이었다.</small></span></span> </li> <li><span><a>↑</a></span> <span>Hand, <i>Horoscope Symbols</i>, p.204, referencibg Cyril Fagan, <i>Zodiacs, Old and New,</i> (Anscombe, 1951.)</span> </li> <li><span><a>↑</a></span> <span>Albiruni, <i>The Book of Instruction in the Elements of the Art of Astrology</i>, ch.443, demonstrates that differences of opinion existed in his era:<span><small>→알비루니의 점성예술의 요소에 대한 소개서, 제444장, 그의 시대에 나타난 의견 차이에 대한 논증:</small></span> <blockquote><p>"In such signs the exaltations is regarded as especially related to a certain degree; but there are many differences of opinion in this matter, some saying that it extends to some degrees in front or behind the degree in question, while others hold that it extends from the first point of the sign to that degree, and again others that it is present in the whole sign without any special degree".<span><small>→"이와 같은 별자리에서, 고양은 특히 특정 도수와 관계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는 의견 차이가 많은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해당 도수에서 앞이나 뒤로 확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별자리의 시작점에서부터 확장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특정 도수를 지정하지 않고 어느 한 별자리의 전체가 그렇다고 한다."</small></span></p></blockquote> The altered positions of the Sun, Jupiter and Saturn suggests an attempt to update the traditional zodiac positions in response to the effect of <a>precession</a>.<span><small>→태양과 목성 그리고 토성의 변경된 위치는 <a>세차운동</a>의 효과에 대한 반응으로 전통적인 황도대의 위치를 수정하려한 시도였음을 시사한다.</small></span></span> </li> <li><span><a>↑</a></span> <span>See for instance, William Lilly, <i>Christian Astrology</i> (London, 1647) in one of its several modern reprints, p. 104.<span><small>→예를 들어, 윌리엄 릴리의 크리스천 점성술(1647년 런던)의 현대 재판본 가운데 하나.</small></span></span> </li> <li><span><a>↑</a></span> <span>Lilly, p.104</span> </li> <li><span><a>↑</a></span> <span>Freedom Tobias Cole, <i>Science of Light: An Introduction to Vedic Astrology</i>, p.251, <a>ISBN</a>&#160;<a>0-9788447-8-5</a></span> </li> <li><span><a>↑</a></span> <span>Cole, p.81</span> </li> <li><span><a>↑</a></span> <span>Cole, p.289</span> </li> </ol></div></div> </div><noscript><img></noscript></div> <div>원본 주소 "<a>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고양_(점성술)&amp;oldid=22932741</a>"</div> <div><div><a>분류</a>: <ul><li><a>점성술</a></li></ul></div></div> <div></div> </div> </div> <div> <h2>둘러보기 메뉴</h2> <div> <div> <h3>개인 도구</h3> <ul> <li>로그인하지 않음</li><li><a>토론</a></li><li><a>기여</a></li><li><a>계정 만들기</a></li><li><a>로그인</a></li> </ul> </div> <div> <div> <h3>이름공간</h3> <ul> <li><span><a>문서</a></span></li><li><span><a>토론</a></span></li> </ul> </div> <div> <input> <h3> <span>변수</span> </h3> <ul> </ul> </div> </div> <div> <div> <h3>보기</h3> <ul> <li><span><a>읽기</a></span></li><li><span><a>편집</a></span></li><li><span><a>역사 보기</a></span></li> </ul> </div> <div> <input> <h3><span>더 보기</span></h3> <ul> </ul> </div> <div> <h3> <label>검색</label> </h3> <form> <div> <input><input><input><input> </div> </form> </div> </div> </div> <div> <div><a></a></div> <div> <h3>둘러보기</h3> <div> <ul> <li><a>대문</a></li><li><a>사용자 모임</a></li><li><a>요즘 화제</a></li><li><a>최근 바뀜</a></li><li><a>모든 문서 보기</a></li><li><a>임의 문서로</a></li><li><a>도움말</a></li><li><a>기부</a></li> </ul> </div> </div> <div> <h3>도구</h3> <div> <ul> <li><a>여기를 가리키는 문서</a></li><li><a>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a></li><li><a>파일 올리기</a></li><li><a>특수 문서 목록</a></li><li><a>고유 링크</a></li><li><a>문서 정보</a></li><li><a>위키데이터 항목</a></li><li><a>이 문서 인용하기</a></li> </ul> </div> </div> <div> <h3>인쇄/내보내기</h3> <div> <ul> <li><a>책 만들기</a></li><li><a>PDF로 다운로드</a></li><li><a>인쇄용 판</a></li> </ul> </div> </div> <div> <h3>다른 언어</h3> <div> <ul> <li><a>English</a></li><li><a>Hrvatski</a></li><li><a>Italiano</a></li><li><a>Српски / srpski</a></li> </ul> <div><span><a>링크 편집</a></span></div> </div> </div> </div> </div> <div> <ul> <li> 이 문서는 2018년 11월 6일 (화) 14: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li> <li>모든 문서는 <a>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a>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a>이용 약관</a>을 참고하십시오.<br>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a>Wikimedia Foundation, Inc.</a>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li> </ul> <ul> <li><a>개인정보 정책</a></li> <li><a>위키백과 소개</a></li> <li><a>면책 조항</a></li> <li><a>개발자</a></li> <li><a>쿠키 정책</a></li> <li><a>모바일 보기</a></li> </ul> <ul> <li> <a><img></a> </li> <li> <a><img></a> </li> </ul> <div></div> </div> </body> </html>
항성 황도대에는 총 몇개의 나크샤트라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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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성 황도대에는 총 몇개의 나크샤트라가 있는가?", "신들의 스승이기도 한 푸시야 나크샤트라 데비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항성 황도대에 있는 나크샤트라는 그 개수를 고려할 때 하나 당 몇 도인가?", "나크샤트라고 불리는 항성군에 있는 행성의 고양을 가지고 있는 점성술은?", "목성이 일반적으로 고양하는 별자리는?", "고양이 별자리에서 특히 관계되어 있는 것은 무엇인가?", "별자리와 고양의 관계에 대한 의견 가운데 별자리의 어디부터 확장하였다고 보았는가?" ]
<!DOCTYPE html> 고양 (점성술)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고양 (점성술)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둘러보기로 가기 검색하러 가기 행성의 고양 위치 점성술에서 고양(高揚) 또는 엑절테이션(exaltation)은 행성의 다섯 가지의 본질적 위계 가운데 하나이다. 일곱 개의 전통적 행성은 하나의 황도대 별자리에서 고양되는. 그 위치는 다음과 같다.: 태양: 양자리 19도 (예: 18°00' - 18°59') 달: 황소자리 3도 수성: 처녀자리 15도 금성: 물고기자리 27도 화성: 염소자리 28도 목성: 게자리 15도 토성: 천칭자리 21도 승교점은 쌍둥이자리의 3도에서 강교점은 사수자리의 3도에서 고양지위를 갖는다. 그 위치들은 11세기 알비루니의 저서 《점성예술의 요소에 대한 소개서(Book of Instruction in the elements of the art of astrology)》와 같은 중세 초기 아랍 시대의 점성술 문헌들에 수록되어 있다.[1] 현대 베다 점성가들은 교점의 고양 지위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반면, 중세 유럽을 통해 전해진 서양 점성술의 전통은 그 실천에 있어서 전통적으로 그리고 현재에 그것들을 약간만 사용한다.[2] 그리스인들과 페르시아인들과는 반대로 알비루니는 그 점들의 고양에 대해 알리며, 그 원리를 "아주 적절한" 것으로 묘사했는데 반해, 그의 시대의 힌두 점성가들은 태양과 목성 그리고 토성의 고양 위치에 일치가 없었으며, 교점의 고양은 인정하지 않았다.[3] 고양은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가장 고대의 점성학적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황도대가 알려지기 이전의 시대 부터 고대의 메소포타미아 점성술에서 사용되었다. (그들은 그것에 대해 후일의 황도대의 도수와 일치하는 별자리의 위치를 기준으로 사용했다.) 프란세스카 록버그는 이 체계는 에누마 아누 엔릴의 전통에서 발견되므로, 그것의 기원은 기원전 제2천년기로 확장될 수도 있음을 알린다.[4] 왜 바빌로니아인들은 서양 점성가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그러한 위계의 위치를 고려했는가? 여러 세기 동안 그것을 고집하게 해왔던 숨은 이유에 관한 많은 고찰에도 불구하고, 로버트 핸드[5]는 추운 염소자리에서 활발한 화성이 고양하는 것처럼 일관성을 가지고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므로 그것은 여전히 변칙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서양 항성황도대 점성가 시릴 페이건은 기원전 786년에 바빌로니아의 신 나부를 위한 중요한 신전의 설립 해에 모든 행성이 그러한 도수들에서 태양과 함께 떠올랐다[6]고 추측하지만, 그러함도 여전히 매우 불확실하다.[7] 헬레니즘 점성술에서 일반적으로 별자리에서 별자리까지의 각을 인정하므로, 고양의 정확한 도수에서부터 한 행성과의 거리가 큰 중요성을 지녔었는지도 모를 일이다.[8] 하지만, 고대의 점성가들에게 그 도수가 사용되었음은 분명하다. 예를 들면, 발광체들(태양과 달)이 각각 고양하는 정확한 도수는 헬레니즘 고양점의 공식으로 사용되었다. 아랍과 비잔티움에 의해 영향을 받은 후일의 중세 점성술에서는 가장 중요한 위계는 거주지의 주인지위이며 그 다음으로 고양인 등의 다섯 가지의 모든 본질적 위계에 대한 서열적 사용이 선호되었다.[9] 중세의 점성가들은 각각의 위계를 등급으써 점수를 매겼고, 그것들은 개략적인 통계적 방식으로 된 비교 가능한 표로 만들어졌다.(본질적 위계 참조.)[10] 그러한 점수값들은 오늘날 점성가들에게도 여전히 사용된다. 천왕성과 해왕성 그리고 명왕성 이렇게 세 개의 외부 행성의 발견 이후에 현대 점성가들은 그 행성들을 위해 가능한 거주지와 고양의 지위에 대해 숙고했다. 그러함은 예를 들어, 해왕성이 (목성의 두 거주지 가운데서 하나의 주인지위를 빼았고) 물고기자리의 "진짜" 집주인이 되는 등을 암시했다. 그러나, 고대의 체계는 가시외적 행성은 허용하지 않는 복잡한 대칭구조이므로, 그것들을 전통적 기법에 포함시키기란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점성가들은 그러한 새로운 행성들에 고양 지위를 할당하려는 시도를 그만두었다. 전통적인 힌두 점성술은 기본적으로 나크샤트라라고 불리는 항성군에 있는 행성의 고양에 대한 개념을 갖고 있다. 항성 황도대에는 27개의 나크샤트라가 있다. 360°/27로 하여 1°가 60′임을 감안하면 한 개의 나크샤트라 당 정확히 13° 20′이다. 예를 들어, 목성은 게자리에서 고양하지만, 게자리의 30° 내에는 (쌍둥이자리 20°00′부터 게자리 3°20까지의) 푸나바수와 (게자리 3°20부터 16°40′까지의) 푸시야 그리고 (게자리 16°40′부터 29°59′까지의) 아슐레샤 이렇게 세 개의 나크샤트라가 있다.[11] 목성은 게자리 5° 에서 고양하므로, 그 위치는 푸시야 나크샤트라에서의 진짜 고양을 의미한다.[12] 푸시야 나크샤트라 데비타는 신들의 스승인 브라스파티이다. 목성은 일반적으로 게자리에서 고양하지만, 푸시야 바로 옆의 나크샤트라에 있을 때는 그것의 완전한 고양이 부여되지 않는다. 게다가, 각각의 나크샤트라는 파다라고 불리는 네 구간으로 나뉘는데, 13°20′/4로 하면 한 파다 당 정확히 3°20′ 이다. 베다의 전통에 따르면, 네 개의 파다는 각각 다르마와 아르타, 카마 그리고 모크사 이렇게 네 개의 삶의 목표를 나타낸다.[13] 만일, 목성이 푸시야에서 강하게 고양하고 있다면, (게자리 3°20′~6°40′의) 다르마 파다, (게자리 6°40′~10°00′의) 아르타 파다, (게자리 10°00′~13°20′의) 카마 파다 그리고 (게자리 13°20′-16°40′의) 모그사 파다 가운데 하나에 속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의 도수는 천문적인 것으로 추론되는데, 목성은 게자리의 5°에서 고양하므로, 그러함은 푸시야 나크샤트라의 다르마 파다의 마음에서의 "깊은" 고양을 의미한다. 힌두 점성술 비전에서, 목성이 (마음을 뜻하는) 게자리에 있고 (신들의 스승인) 브라스파티의 영향을 받았으며, (다르마 파다의) 정당한 위치에 있다면, 목성은 그것이 표현하는 모든 것에 관하여 100% 고양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이다 행성의 고양의 별자리와 정반대편에 위치한 별자리는 그것의 쇠퇴 자리로 여겨진다. 고양의 자리가 행성의 자기인식 장소라면, 쇠퇴의 자리는 행성이 표현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기능에 있어서 쇠약의 위치이다. 같이 보기[편집] 점성학적 쇠퇴 참고 문헌[편집] ↑ Albiruni, The Book of Instruction in the Elements of the Art of Astrology, (written in Ghaznah, 1029) ch.443 'Exaltation and fall of the planets'. Translated into English by R. Ramsay Wright. London: Luzac &amp; Co. 1934. ↑ Deborah Houlding, 'Ptolemy's table of planetary dignity explained' Skyscript: "Mars is dignified at any position in Capricorn, the sign of its exaltation, but the dignity will be especially apparent in the 28th degree. The traditional exaltations of the nodes are included although I have never really seen these put to good use in judgements".→"화성은 고양 별자리인 염소자리의 특정 위치에서 위계를 가지는데, 그 위계는 특히 28도에서 표출될 것이다. 교점의 전통적인 고양 위치도 수록되어 있지만, 나의 견해로는 그것들의 사용이 마땅하다고 여긴적은 없다." -데보라 홀딩의 프톨레마이오스의 행성 위계표에 대한 설명 중에서. 2013년 3월 17일 갱신. ↑ Albiruni, The Book of Instruction in the Elements of the Art of Astrology, ch.444 'Hindu's differ as to degrees':→알비루니의 점성예술의 요소에 대한 소개서, 제444장, 힌두 점성술과의 차이점: "There is no difference of opinion as to the signs of exaltation, but the Hindu's differ as to the degrees in certain cases. They are agreed that the exaltation of the Sun lies in 10° of Aries, of Jupiter in 5° of Cancer, of Saturn in 20° of Libra, the others as above, except with regard to the Dragon's head [Moon's north node] and Tail [Moon's south node] which are not mentioned by them in this connection as is quite proper".→"고양의 별자리에 대해서 힌두 점성가들과는 의견 차이가 없지만, 그들은 어떤 경우에 그 도수를 다르게 본다. 그들은 태양이 10° 에서, 목성은 게자리 5° 에서 그리고 토성은 천칭자리 20° 에서 고양하는 등에 동의하지만, 용두(달의 승교점)과 용미(달의 강교점)의 고양에 대해서는 적절한 언급이 없다." The altered positions of the Sun, Jupiter and Saturn suggests an attempt to update the traditional zodiac positions in response to the effect of precession.→태양과 목성 그리고 토성의 변경된 위치는 세차운동의 효과에 대한 반응으로 전통적인 황도대의 위치를 수정하려한 시도였음을 시사한다. ↑ Rochberg, Francesa, Babylonian Horoscopes pp.46-47. Philadelphia: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1998. ISBN 0-87169-881-1 ↑ Robert Hand, Horoscope Symbols. Schiffer Publishing (Easton, PA., 1987), ISBN 0-914918-16-8. ↑ that is, made its first appearance in the night sky after a period of being obscured by the Sun. The planet will be seen close to the horizon, becoming visible as sunlight fades or before the Sun rises. In the ancient Near East, this was an important sky event.→그러함은 태양이 가리우고 있는 기간이 지난 후 밤하늘에 맨먼저 출현함으로도 이루어진다. 그 행성은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에 지평선과 가까운 곳에서 보이고 태양빛에 가려져 갈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 그러함은 하늘의 중요한 사건이었다. ↑ Hand, Horoscope Symbols, p.204, referencibg Cyril Fagan, Zodiacs, Old and New, (Anscombe, 1951.) ↑ Albiruni, The Book of Instruction in the Elements of the Art of Astrology, ch.443, demonstrates that differences of opinion existed in his era:→알비루니의 점성예술의 요소에 대한 소개서, 제444장, 그의 시대에 나타난 의견 차이에 대한 논증: "In such signs the exaltations is regarded as especially related to a certain degree; but there are many differences of opinion in this matter, some saying that it extends to some degrees in front or behind the degree in question, while others hold that it extends from the first point of the sign to that degree, and again others that it is present in the whole sign without any special degree".→"이와 같은 별자리에서, 고양은 특히 특정 도수와 관계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는 의견 차이가 많은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해당 도수에서 앞이나 뒤로 확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별자리의 시작점에서부터 확장하며, 또 다른 사람들은 특정 도수를 지정하지 않고 어느 한 별자리의 전체가 그렇다고 한다." The altered positions of the Sun, Jupiter and Saturn suggests an attempt to update the traditional zodiac positions in response to the effect of precession.→태양과 목성 그리고 토성의 변경된 위치는 세차운동의 효과에 대한 반응으로 전통적인 황도대의 위치를 수정하려한 시도였음을 시사한다. ↑ See for instance, William Lilly, Christian Astrology (London, 1647) in one of its several modern reprints, p. 104.→예를 들어, 윌리엄 릴리의 크리스천 점성술(1647년 런던)의 현대 재판본 가운데 하나. ↑ Lilly, p.104 ↑ Freedom Tobias Cole, Science of Light: An Introduction to Vedic Astrology, p.251, ISBN 0-9788447-8-5 ↑ Cole, p.81 ↑ Cole, p.289 원본 주소 "https://ko.wikipedia.org/w/index.php?title=고양_(점성술)&amp;oldid=22932741" 분류: 점성술 둘러보기 메뉴 개인 도구 로그인하지 않음토론기여계정 만들기로그인 이름공간 문서토론 변수 보기 읽기편집역사 보기 더 보기 검색 둘러보기 대문사용자 모임요즘 화제최근 바뀜모든 문서 보기임의 문서로도움말기부 도구 여기를 가리키는 문서가리키는 글의 최근 바뀜파일 올리기특수 문서 목록고유 링크문서 정보위키데이터 항목이 문서 인용하기 인쇄/내보내기 책 만들기PDF로 다운로드인쇄용 판 다른 언어 EnglishHrvatskiItalianoСрпски / srpski 링크 편집 이 문서는 2018년 11월 6일 (화) 14:38에 마지막으로 편집되었습니다. 모든 문서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동일조건변경허락 3.0에 따라 사용할 수 있으며, 추가적인 조건이 적용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이용 약관을 참고하십시오.Wikipedia®는 미국 및 다른 국가에 등록되어 있는 Wikimedia Foundation, Inc. 소유의 등록 상표입니다. 개인정보 정책 위키백과 소개 면책 조항 개발자 쿠키 정책 모바일 보기
고양(점성술)은 점성술에서 행성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하는 위치를 의미합니다. 각 행성은 특정 별자리에서 고양되며, 이 위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 태양: 양자리 19도 - 달: 황소자리 3도 - 수성: 처녀자리 15도 - 금성: 물고기자리 27도 - 화성: 염소자리 28도 - 목성: 게자리 15도 - 토성: 천칭자리 21도 고양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점성술에서부터 사용되었으며, 중세 아랍 점성술 문헌에서도 다루어졌습니다. 현대 점성가들은 새로운 행성인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에 대해서도 고양의 개념을 적용하려고 했지만, 전통적인 체계와의 일치가 어려워 이를 포기했습니다. 고양의 반대 위치는 쇠퇴 자리로, 이는 행성이 힘을 잃는 위치로 간주됩니다. 고양은 행성이 자신의 특성을 가장 잘 발휘할 수 있는 장소로, 이 위치에서 행성은 그 기능을 최대한으로 발휘합니다. 예를 들어, 목성이 게자리에서 고양할 때, 그 위치는 목성이 가장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이처럼 고양은 점성술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행성의 성격과 영향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전문가가 아닌 일반 독자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비전문용어로 풀어서 요약해줘. 단, 원문의 핵심 메시지는 그대로 유지하고, 문장도 자연스럽게 이어줘.